56화.
알프레드는 가슴 양쪽을 주먹으로 퍽퍽 번갈아 쳤다.
“노엘의 친구는 내 친구이기도 해. 그러니 너도 내 친구야.”
나는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이 훈훈한 분위기가 너무 좋다.
알프레드… 좋은 녀석이야.
“고마워, 알프레드. 앞으로 잘 부탁해.”
“나야말로! 우워어!”
그 원시적인 포효는 좀 안 했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
도란도란 얘기하다 보니 금세 4층 숙소로 도착했다.
“알프레드, 여기서 기다려 줄래? 난 저 안에서 잠시 볼일이 있어.”
숙소 바로 밖 소파에 알프레드를 앉힌 뒤, 홀로 들어왔다.
중간 문을 지나려는데 바로 근처 창틀에 붉은 보석이 있었다.
붉은 보석을 들자 주위가 하얗게 밝아졌고, 눈이 적응할 시간도 없이 연구원들이 모여 웅성웅성 이야기하는 장면을 마주했다.
-자네, 그거 들었나? 이번 실험실에 들어갈 사람이 정해졌다네.-
-나는 전혀 들은 바가 없는데. 그래서 누구로 정해진 거지?-
-이름이 뭐더라…. 그 은발 남자 있잖아.-
-은발이면 토드라고 했던 걸로 기억해.-
-그래, 아무튼 그리 정해졌다고 하는데….-
-실험일도 정해진 건가?-
-이틀 뒤라고 했어.-
그들 사이에서 얌전히 팔짱 끼고 듣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결국 토드 차례구나….’
토드를 잃게 될 노엘이 걱정되었다. 이러나저러나 미운 정도 정이었으니.
환영 리사도 알게 된다면 분명 오열할 텐데. 그것도 걱정이다.
연구원들의 움직임을 따라 깊이 들어온 나는 환영 리사의 개인실로 들어섰다.
환영 리사가 혼자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낯빛을 띠고 있었다.
‘건강이 여전히 안 좋은가 봐.’
조금 뒤, 전에 보았던 ‘티나’라는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묘하게 타란티나와 비슷한 이목구비를 가진 아이였는데.
-티나! 어떻게 되었어? 결과는 나온 거야?-
-이틀 뒤에 토드… 토드 오라버니가…….-
티나는 말을 더는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환영 리사는 이불을 쥔 두 손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래도 티나의 앞에선 최대한 이성을 잃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알려 주어 고마워. 이제 가 봐도 좋아.-
-언니…….-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는데, 환영 리사는 이미 티나를 내보낸 사람처럼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결국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나가는 티나였다.
다시 혼자 남은 환영 리사는 한동안 멍하니 있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안 돼……. 토드만은 제발…… 그럴 순 없어. 그럴 수는…….-
이번엔 환영 노엘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리사!-
괴롭게 떨고 있는 리사를 본 환영 노엘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노엘…. 토, 토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였다.
-알아. 방금 막 듣고 오는 길이야. 토드가… 실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응…. 어떡해… 어떡하지? 정말 어떡하면 좋아……?-
환영 노엘에게 기대어 발발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반면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는 아무 표정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인 것도 같았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걸…….-
그녀를 위로하던 그는 이내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못 봤겠지만, 나는 그의 미소를 딱 보고 말았다. 그러고는 소름이 돋아나 몸을 떨었다.
‘속지 말자. 속지 마. 저렇게 좋아하는 거 같아 보여도… 분명 속은 타들어 갈 테니까…….’
이제까지 지켜본 바로는 그러했다. 그러니 이젠 그의 소름 끼치는 행동만으로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노엘은 절대 친구의 죽음을 좋아할 녀석이 아니니까.
환영 리사는 결국 오열하며 눈물을 쏟아냈고, 환영 노엘은 그저 말없이 그녀를 품고만 있었다.
그녀의 고통이 나한테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옆에서 지키고 있는 환영 노엘도 얼마나 괴로울지…….
그러던 중, 문에 나 있는 창문으로 그림자가 짧게 비쳤다.
나는 어째선지 문밖에 토드가 와 있음을 확신했고, 문을 열고 나가 보았다.
역시나 토드가 환영 리사와 노엘을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토드…. 너도 들었겠구나.”
어쩌면 본인이 가장 두렵고 무서울 텐데.
환영 토드는 그저 둘을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아 쥔 두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렇게 그의 옆에 한참을 서 있었을까, 그가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홱 꺾었다.
눈물을 매단 눈으로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데, 그의 입이 열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드시 되찾을 거야.]
환영이 나한테 말하는 울림이었다.
토드가 내게 말을 걸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무, 무얼…?”
[나의 연인인 리사를.]
“…….”
섬뜩하리만치 낯선 모습이었다. 해맑은 버전만 보다 보니, 이렇게 무서운 얼굴도 할 줄 아는구나 싶었다.
[그러려면 네가 먼저 죽어야겠지.]
“뭐…? 그게 무슨….”
[너를 쫓아내고… 나의 리사를 반드시 되찾을 거야.]
뭐라고?
화들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두 발짝 뒷걸음질 쳤다.
목소리만으로도 천장이 뒤집히는 것처럼 아찔했다.
“토, 토드…?”
환영 토드가 손가락을 들어 나를 지목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묵직한 음성이 나를 내려찍는 듯했다.
[그러니까 거기서 딱 기다려. 내가 찾아갈 테니까. 네 죽음을 가지러….]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나를 죽일 듯한 살벌한 눈빛에 머릿속이 하얘지고 있었다.
“무, 무서워……. 그러지 마….”
나는 환영 토드가 정말 날 죽이기라도 할까 봐, 환영 노엘과 리사가 있던 개인실로 다시 얼른 들어와 버렸다.
가시지 않는 살기에 문고리를 쥔 손을 놓지 않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니 불이 꺼지듯 어두워지며 환영이 모두 사라졌다.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들이켠 숨이 내쉬어지지 않고 꽉 막혀 있었다.
숨이 막혀 미친 듯이 콜록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침대 밑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흡!”
깜짝 놀랐지만, 자세히 보니 검은 손이었다.
검은 손이 튀어나오더니 주저앉은 내 발목을 또 잡았다.
“데릭……?”
조심스레 불러 보니 침대 밑에서 바닥을 쓸며 무언가가 기어 나왔다.
긴 머리가 먼저 나오더니 갑자기 가느다란 몸이 길쭉하게 뻗어 나오는 게 아닌가.
“흐… 흐아악!”
처녀 귀신 같은 형체에 나는 울음 섞인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이 침대 밑은 데릭이 있기에는 너무 작은 공간이었다. 도저히 그 우람한 늑대의 몸집이 들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이내 스멀스멀 일어난 검은 그림자는 호리호리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를 살폈다. 너무 놀라 눈조차 감기지 않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푸르고 긴 머리카락에, 웃통은 잘빠진 근육을 드러낸 남자였다. 다행인지 아랫도리는 옷이 입혀져 있었다.
얼굴은 여자보다도 곱상해선, 잠이 덜 깨 멍한지 눈물점이 도드라져 보인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손부터 팔까지의 피부가 검은색이었다.
아무튼 데릭 같은데 데릭이 아니어서 혼란스러웠다.
“놀랐다면 미안하다.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너무 많이 자 버렸다.”
묵직하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다름 아닌 데릭의 음성이었고, 말투도 명백히 데릭의 말버릇이었다.
“무… 뭐… 뭐, 뭐야! 데릭 맞아?”
웬 꽃미남이 침대 밑에서 자다 나오더니 데릭이란다.
“맞다. 데릭이다.”
특유의 말투 때문인지 생긴 것과 좀 많이 다른 느낌이다.
“왜, 왜 혼자 여기 있어? 문을 지켜야지!”
“이미 오늘 일은 다 끝나서 다들 일찌감치 돌아갔다.”
“엑, 벌써?! 그래… 그렇구나…. 아니, 근데 지금 모습은 대체 뭐야?”
데릭이 나와 눈을 맞추려 내려앉았다. 양반다리를 하며 털털하게 앉는데 잔근육들이 쓸데없이 우글우글 움직인다.
“이게 원래 내 모습이다. 특히 일할 땐 무조건 이 모습이다. 리사만 몰랐다.”
“아, 그래……. 그사이 다들 본 거구나. 나만 모르다니…….”
“노엘이 웬만하면 네 앞에선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그게 뭐야. 어째서?”
“모른다. 아무튼 그러라고 했었다.”
데릭은 장발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묶었다. 끈으로 묶는 솜씨가 나보다도 능숙한 것 같았다.
머리를 묶으니 드러나는 턱선이 고와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모라면 노엘도 위기의식을 느꼈을 법도 한데. 설마 노엘이 데릭한테 그런 걸 느꼈을 리가…….
“비명 지르는 걸 들었다. 네가 괜찮은 건지 알고 싶다.”
“아. 놀라서 그랬어. 응…. 지금은 괜찮아.”
환영 토드의 살기를 띤 모습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설마 현재의 토드도 그렇게 바뀌는 건 아닐지 몹시 걱정되었다.
‘진짜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하지만 아직 토드가 날 제대로 알아본 건 아닌 게 분명했다.
앞으론 절대로 토드와 마주치는 일이 있어선 안 되겠다는 결론을 다시 한번 내렸다.
“밖에 알프레드가 왔다.”
“응?”
벌컥!
문이 열렸고, 데릭의 말대로 알프레드가 숨을 헐떡였다.
“하도 나오질 않아 걱정되어 와 봤어. 데릭, 넌 여기 왜 있는 거냐?”
“자고 있었다. 여기… 내 낮잠 방이다.”
“그 모습은 역시 오래 보고 있긴 거북하군그래.”
알프레드는 데릭의 얼굴이 못마땅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데릭의 이 모습도 좋은데? 음. 굳이 고르라면 이 모습이 더 좋아.”
덧붙이자면 무섭지도 않고 얼마나 좋아. 눈도 즐거운걸!
데릭을 감상하고 있자니, 무서웠던 토드도 점차 잊혀 갔다.
데릭은 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처음으로 잔잔한 미소를 띠었는데, 웃으니까 더 예뻤다.
“그럼 계속 이 모습으로 있어야겠다.”
데릭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며 입꼬리를 살며시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