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방문이 닫히고, 나는 이 서늘한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노엘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노엘. 오늘은 문이 뚫린 데가 없었나 봐? 덕분에 나도 자유롭게 돌아다녔어.”
그는 이젠 아예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괜히 만지지도 않던 장식장의 소품을 이리저리 옮겨 놓고 있었다.
내가 토드와 함께 있는 걸 보고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질투의 화신 아니랄까 봐.
“토드랑은 어쩌다 우연히 마주친 거야. 거미줄에 속박된 걸… 내가 구해 주게 되었고, 친구니까 외면할 수 없었어.”
그의 등에 대고 말을 하니, 말이 술술 나오긴 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하면 그의 외모에 홀려 정신이 다른 데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아 슬슬 답답해졌다.
“나한테 화났으면 그냥 말해 주면 안 될까? 나 이런 분위기 정말 싫어.”
“…….”
“이젠 내 얼굴 보기도 싫은가 보구나……. 그럼 나는 나갈 수밖에 없겠네.”
이래도 그가 가만히 있으니 오기가 생겼다. 더욱 잘 들리도록 아주 큰 소리로 말했다.
“어휴. 노엘이 날 보기 싫어하니, 나는 이 방을 나가야겠네. 그럼 난 이만 갈게……. 잘 지내.”
괜히 풀이 죽은 척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이어서 나가려고 시늉하는데, 한걸음에 달려온 노엘이 문을 그대로 닫아 버렸다.
그 무서운 속도에 흠칫 놀라고 말았지만.
다행이었다. 예상대로 그가 잡아 줘서.
어차피 안 먹혀도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그랬다면 무척 뻘쭘했을 것 같다.
“노엘…?”
잔뜩 성이 나서 험악한 얼굴이라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상당히 놀란 표정이라 나조차 같이 놀라고 말았다.
정말 무서운 광경이라도 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미안…. 이런 한심한 내 얼굴… 지금은 보지 말아 줘.”
알고 보니 자기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 한심하다니…. 그렇지 않은걸.”
그를 만나고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환영 노엘에게서도 본 적 없는 얼굴.
새로운 발견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으면서도, 그 괴로운 모습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노엘. 나… 토드랑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하지만 불안하게 했다면 미안해.”
“리사. 그런 거 아니야.”
“응…?”
“네가 미안해하지 마. 넌 아무 잘못 없어. 내가 내 화를 이기지 못해서 그래. 네게 참 한심한 모습을 보였어.”
“아니. 그래도….”
“이렇게 네가 변명까지 해 가며 쩔쩔매게 만들다니……. 정말 미안해. 그리고… 다신 간다는 말 하지 마.”
그는 여전히 문을 닫은 손을 떼어내지 못했다.
물에 젖은 강아지처럼 떨고 있으니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내 생각만 해 주는구나.’
자꾸 이런 모습 보여 주면 곤란한데 말이다.
과거 리사의 몸이 아닌,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었으면…. 하고 원하게 되고 만다.
“노엘. 너는 대체 내가 왜 좋은 거야?”
“좋아하는 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해? 계속해서 끌리는걸…. 나도 이걸 뭐라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그래….”
그가 좋아하는 이유가 나와 관련된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네가 없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고, 보이지 않는 곳에선 네 생각만 나. 그리고 이렇게 눈에 보이면… 어떻게든 너와 갇혀서 묶여 있고 싶어.”
그러면 안 되는데. 또 다정한 목소리로 흉흉한 말을 한다.
“오래 서 있었더니 다리 아파.”
“이런, 내가 너무 오래 세워 두었구나. 침대로 갈까?”
내 발로 걸어갈 셈이었는데, 노엘이 뭐라 할 틈도 없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끄악!”
갑자기 붕 뜨는 느낌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를 안아 든 노엘은 침대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자, 조심히 누워.”
“고, 고마워.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다시 평소처럼 평온해진 얼굴이었다.
기분 탓인지 조금은 측은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그의 얼굴이 확 가까워지자, 향기 가득한 그의 숨결이 내 모든 감각을 깨웠다.
“리사. 그거 나한테 줘.”
그의 시선이 또렷이 내 입술로 향했다.
민망해서 숨어 버리고 싶은데.
뻔뻔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를 보면 쓸데없이 용기가 치솟는다.
그래서 먼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쉽게 떼었을 땐, 그가 아랫입술을 반 바퀴 핥았다.
“더…….”
“응?”
“더 줘…. 아직 한참은 모자라. 아주 한참…….”
‘나 진짜 미쳐 버려…….’
내일 아침이 되면 나는 또 얼굴을 붉히며 이불을 발로 걷어차겠지. 아니, 찢어 버릴지도.
그러곤 노엘의 얼굴을 어떻게 보냐며 베개를 주먹으로 벅벅 칠 테지.
그래도 어쩌겠어. 어쩔 수 없는걸.
***
아침이 되었고, 나는 정말로 엎드려선 베개를 퍽퍽 치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창피해서 못 나갈 것 같았다.
노엘의 그 곱상한 얼굴을 보기만 해도, 어제의 낯선 내가 자꾸만 기억나고 말 테니.
오늘은 홍차 타임에서 발을 빼기로 했다. 대신 침대를 뒹굴뒹굴하며 이불을 돌돌 말고 있었다.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잠시 쉬어 주니 산만하던 마음도 차분해지는 듯했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나 했더니 다시 폭주하듯 어제가 떠올라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아… 어쩌다 내가 이렇게 불순해진 걸까. 불순물 그 자체구나. 아마 해로운 물질이 가득 들어 있을 거야.’
결국 얼굴을 감싸 쥐고 또다시 좌우로 굴러다녔다.
“으어어.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다….”
“어제는 뭘 많이 했나 봐?”
“꺅!”
깜짝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키니, 베키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뭐야. 뭘 그리 놀라!”
내가 귀신이라도 본 듯 까무러치자, 진짜 귀신인 그녀도 적잖게 당황스러워했다.
“아니… 문소리도 안 들렸고 발소리도 안 들리니 그렇지! 기척도 전혀 없었는걸!”
“난 원래 그렇게 다녀.”
“그랬지, 참…….”
진짜 심장 떨어질 뻔.
“네가 방에서 하도 안 나오길래 기다리다 지쳐서 들어와 봤어.”
“그랬구나. 나도 나갈까 하다 쉬고 있었어.”
“무사한 걸 보니 다행이야. 난 네가 노엘의 질투에 밤새 시달린 줄 알았지.”
“그렇게 보여도 막상 둘이 있으면 나한테 화조차 안 내……. 노엘이 천사라고 해도 믿겠어.”
베키는 신기하다는 듯 입술을 오므렸다. 그러고는 나를 유심히 살피더니 눈썹을 치켜떴다.
“너 설마… 좋아해?”
“어…?”
“진심이야?”
그래, 귀신같이… 도 아니고 귀신인 그녀가 내 숨길 수 없는 낯빛을 보고도 모를 리가 없겠지.
“아마도… 그런 것 같아.”
일부러 좀 애매하게 둘러대려 했지만, 베키가 용납할 리가 없었다.
“진짜 좋아한다는 거네…….”
베키는 내 중대한 비밀까지 알고 있으니 말해도 괜찮긴 했다.
부끄러운 게 문제지.
“맞아. 나도 모르게 좋아하게 돼 버렸어. 물론 처음에도 외모나 목소리 이런 게 다 내 취향이긴 했거든.”
“뭐, 그럴 만해. 네가 반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야. 외모로 전시회를 휩쓴 남자기도 하잖아.”
“그, 그렇지?”
역시 사람 보는 눈은 다 비슷한가 보다. 내가 좋은 건 남의 눈에도 좋아 보인다더니.
“하지만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마. 어차피 넌 돌아가는 게 목적이라며.”
“응. 그렇지. 그렇긴 해…. ”
하지만 통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음은 늘 제멋대로다.
그러고 보니 탈출하게 되면 베키와도 헤어져야 하는구나….
베키는 괜찮은 걸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 같지만, 분명 그녀도 서운하겠지.
“깊이 들어갈수록… 노엘이 네 정체를 알았을 때의 분노만 더 키울 뿐이야.”
“그렇겠지? 하아….”
“붉은 보석 진행은 잘 돼 가?”
“거의 끝으로 온 것 같아. 다음 실험체 선정을 두고 노엘이냐 토드냐로 갈등하는 중인데….”
베키도 모르는 일들이라, 나는 그녀에게 대략 요약해서 알려 주었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들은 베키는 바닥을 뚫고 들어갈 정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앞으로의 일들을 또 목격하려니 착잡해졌다.
“알려 줘서 고마워. 네 덕분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네.”
“고맙긴! 이 정도로…. 오늘 다녀오면 또 얘기해 줄게.”
“무엇보다도 몸조심하길 부탁할게.”
“응! 고마워. 너도 몸조심하고.”
어쩐지 쑥스러워 뒷덜미를 긁적이는데, 밖이 소란스러웠다.
베키와 나는 서로 쳐다보다가 궁금해져선 같이 밖으로 나가 보았다.
모두 테이블 주위로 모여 있었는데, 오늘따라 더욱 북적이는 느낌이었고.
자세히 보니 알프레드도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저 덩치로 호 불며 마시는 모양새가 귀여워 보였다.
츠스. 츠스. 츠스.
“리마?”
‘헉! 거미 소녀잖아?’
복도에 커다란 그림자가 지더니 곧 거미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까만 털이 수북한 다리를 보고 있기만 해도 죽을 것 같았다.
게다가 리마의 몸통이 거미 소녀에게 꽉 붙잡혀선 더듬이마저 축 늘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 여유롭게 차를 즐기는 노엘을 보니, 안심 아닌 안심이 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마치 거미한테 잡아먹히기 직전의 그리마의 모습이랄까.
“누, 누나…! 살려 줘.”
리마는 눈알이 벌겋게 충혈되어선 겨우 입만 벙긋했다.
반면, 여유로워 보이는 거미 소녀는 노엘을 보더니 아침 인사를 건넸다.
“노엘. 좋은 아침이네요. 다들 반가워요. 저는 타란티나라고 해요.”
타란티나라니…. 어쩐지 거미 중 타란툴라라는 거미가 떠올라 오싹했다. 자세히 보니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노엘과 타란티나는 이미 전부터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타란티나가 저렇게 상냥하게 말할 리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노엘은 타란티나를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러고 보니 토드를 잡아 두고 있던 것도…, 이전에 베키를 잡아 두고 있던 것도… 다 저 타란티나였는데?
혼란스러워진 나는 노엘을 빤히 쳐다봤다.
“응…. 아는 사이야.”
왠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걸 보니, 내 감이 맞는다면…….
역시 그가 타란티나를 시켜서 베키와 토드를……?
거기에 더해 알프레드까지 생각나 버린 나는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내 눈을 피하며 말을 삼가는 노엘의 모습을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세상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는 안 되고, 마음만 억울해져선 어버버하고 있을 때였다.
타란티나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저희. 오늘부터 사귀어요.”
타란티나가 눈동자로 가리킨 건, 다름 아닌 제 다리로 움켜쥔 리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