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나한테 하는 소리가 맞는지 헷갈렸다. 과거 리사의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은 거였나?
그냥 너무 괴로워서 뱉어 보는 말인 건가.
“네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녀의 마음이잖아.”
환영 노엘은 잠시 나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새침하게 눈을 떼었다.
[너도 내가 싫은가 보구나.]
으악! 그런 뜻이 아닌데.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랑해 줄 것도 아니면서 굳이 배려해 주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내 말을 자른 그는 체념한 얼굴로 돌아섰다.
나는 황당해선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계속해서 곱씹었지만,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뭐야. 나더러 무얼 어쩌라는 건지….”
등을 돌린 그가 천천히 걸어 나가며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그와 함께 손안의 붉은 보석이 점점 가루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한테만 뭐라 하지 말고, 너도 좀 솔직해져 봐.]
“솔직하라니….”
지금 내 상황에서 그게 가당키나 한가.
사람 속도 모르고…!
게다가 이런 식으로 툴툴거리는 건 또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억울했다. 잘생긴 얼굴이 툴툴거리니까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좀 더 화내는 얼굴도 보고 싶네.’
[저리로 가.]
괜히 혼자 찔려선 화들짝 놀랐다.
환영 노엘이 손가락을 펴 좁은 통로를 가리켰다. 분명 그곳 중 하나가 베키의 실험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다면 가 보지 못한 그 반대편 방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환영 노엘이 사라지고, 나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시간이 점점 저녁과 가까워지니 마음이 촉박해졌다.
끼익.
문을 열어 보니 베키의 실험실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규모로 보면 이 실험실이 훨씬 더 크긴 한데, 이번엔 유리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천장 가운데에 물 호스 같은 것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수십 개는 되어 보인다.
그 호스들은 도넛 모양의 근처 기계들에 연결돼 있었다. 기계는 지금까지 봐 왔던 것과 모양은 달라도 기본적인 쓰임새는 비슷한 듯했다.
“붉은 보석!”
가장 크고 동그란 버튼 위에 붉은 보석이 놓여 있어 주저 없이 주워 들었다.
“윽!”
갑자기 새하얀 빛이 주변으로 퍼져 나는 다급히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겨우 적응해서 눈을 제대로 떴을 땐, 열심히 상황 파악하기 바빴다.
노엘과 알프레드가 헤어지고 또 며칠이 지난 시점.
아무래도 알프레드의 실험일인 것 같다.
실험실 중앙에 겨우 서 있는 알프레드는 온몸에 호스를 끼운 장치를 달고 있었다.
끔찍했지만, 호스를 잇는 연결 고리들이 피부를 통과한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 연결 고리에 아까 보았던 수많은 호스가 끼워져 있었다.
-알프레드. 제 발로 죽음을 재촉하다니.-
말을 하는 연구원은 평소 알프레드와 잘 알던 사이인 듯했다.
콜록, 콜록.
쇳소리를 내며 기침을 토해내던 알프레드는 간신히 입을 열었는데, 그 모습조차 무척 힘겨워 보였다.
-자넨 이 일을 하며, 죄책감 같은 걸 느낀 적이 전혀 없던가.-
-그런 걸 느꼈다면 지금 여기 있을 수 없었겠지.-
-그 많은 포로가 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잠들어 버렸어. 이제 남아 있는 포로는 몇 되지도 않지. 언젠간 너 자신도 실험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들던가.-
-곧 죽을 놈이 말이 많군.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될 거로 생각하지는 말라고.-
말하는 연구원은 그동안 보았던 연구원 중에서도 급이 높아 보였다.
그의 주위로 보조하는 연구원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모두 그의 통솔하에 실험을 진행했다.
-내가 죽을 거로 생각하는 걸 보니, 이번 실험도 성공할 자신이 없나 봐?-
껄껄.
극심한 두려움 앞에서 저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될까?
나는 진심으로 알프레드에게 감탄했다.
-……이번만큼은 제발 실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잘 가라고.-
곧 상급 연구원이 보조 연구원들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지시를 내렸다.
그들은 능숙하게 자기 위치에서 다루어야 할 기계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자네도 나처럼… 천벌받을 거야.-
알프레드가 마지막 말을 남김과 동시에, 상급 연구원이 제 상체만 한 레버를 당겼다.
호스가 울긋불긋해지며 무언가가 알프레드의 몸속으로 침입하고 있었다.
끄아아아아!
알프레드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 모습을 즐기고 있는지 상급 연구원은 꽤 뿌듯한 표정이었다.
보조 연구원들은 이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 어슬렁어슬렁 모여서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나는 그 틈으로 들어가 그들의 말을 엿들었다.
-그러니까, 이 실험이 성공하면 나도 노력 없이 튼튼한 근육을 얻게 될 수 있다는 거네?-
그 말을 들으니 알프레드의 몸에 꽂힌 호스들이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근육이 커지도록 무언가를 직접 주입하고 있는 모양이다.
-얼마나 좋아. 삶의 질이 달라질 거야. 앞으로는 운동하지 않아도 건강하게 살 수 있겠어.-
-저것 봐. 벌써 근육이 저렇게 커지고 있잖아.-
한 연구원이 턱짓하자, 모두의 시선이 다시 알프레드에게로 향했다.
알프레드의 몸집이 근육과 함께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피부의 색깔이 푸르스름하게 변했고, 머리카락은 다 빠져선 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역시 부작용인가. 이번에도 실패인가 봐.’
그의 몸집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정도로 불어나자 나는 저러다 풍선처럼 터지는 게 아닐지 걱정되었다.
이윽고 연구원들의 절규 섞인 탄성과 함께 실험이 끝나고 말았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더는 볼 수가 없을 것 같아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심장이 울렁이며 요동쳤고, 내가 터져 버린 것처럼 온몸이 찢기는 듯했다.
“하… 하아…….”
나는 급히 심호흡했다.
-이런… 오늘 저녁은 다 먹었군.-
-우웨에엑. 우웩…… 저 좀 잠시 나갔다 오겠… 우읍….-
연구원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린다.
나는 여전히 후들후들 떨리는 몸이 진정되지 않아 털썩 엎드렸다.
그저 빨리 환영들이 사라지길 기도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리사. 리사?! 왜 이러고 있어. 얼굴 좀 들어 봐.”
베키의 목소리에, 얼굴에 파묻힌 손바닥을 천천히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환영은 이미 다 사라진 후였다.
“베키…….”
“무슨 일이야. 얼굴이 아주 새파랗네. 어쩐지 너무 늦는다 싶어 와 봤더니….”
나는 겨우 일어나 베키를 끌어안았다.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좀 있을게…….”
“…….”
베키는 별말 없이 그대로 한참을 기다려 주었고, 나는 그 품에서 충격을 조용히 삼켜냈다.
***
겨우 진정이 되었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알프레드의 죽기 전 모습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리사, 거기 아니야. 이리로 가야지.”
“앗…! 미안. 잠시 다른 생각이 들었어.”
아직 4층의 복도였다. 계단을 올라 노엘의 방으로 귀환하려 하던 그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키에엑. 키에에에에.
“베… 베키.”
나와 베키는 걸음을 멈추고 즉시 주변을 살폈다.
틀림없이 우리 쪽으로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끈적하고도 소름 끼치는 기묘한 소리.
키에에에엑!
칠흑 같은 복도의 가시거리에서 만난 그것은, 이전에 보았던 붉은 피부의 괴물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4층의 문이 뚫리기라도 한 건가?
절망스럽게도 저번처럼 한 마리가 아니었다.
천장에 한 마리, 옆 벽에 각각 한 마리, 바닥에 한 마리…. 그러니까 총 네 마리나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심장이 버거운 상태였는데. 이젠 아예 훅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키이에에엑! 키이이익!
네 마리의 인간형 괴물들은 거미처럼 몸을 낮추고 슬금슬금 기어 왔다.
먹잇감의 반응을 탐색하는 느릿한 움직임.
“베키…, 이건 무조건 도망가야 할 거 같은데.”
“나도 같은 생각이야. 둘에 뛰자.”
“응!”
“하나, 둘!”
“으아아아!”
베키의 목소리에 맞춰 동시에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선 그것들이 무서운 속도로 쫓아왔다.
키에에엑! 켁켁!
괴물들이 무슨 대화라도 주고받는 건지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제발… 제발……!’
그런데 괴물들은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해서 달려오는데, 우리는 두 다리로만 달리고 있지 않은가.
어쩐지 쉽게 따라잡힐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극심한 공포에 잠긴 나는 눈물이 찔끔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따라잡힐 거야. 분명.’
“리사! 이쪽으로!”
베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나보다 조금 더 앞서가던 베키가 방으로 들어갔고, 나도 곧장 뒤따라가 문을 닫아 버렸다.
하지만 바짝 따라온 녀석들의 팔다리가 끼어선 문이 닫히질 않았다.
“으아아! 안 돼!”
나와 베키는 온몸으로 문을 밀어 막았지만, 녀석들도 이미 벌어진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려 애쓰는 중이었다.
어느새 네 마리가 다 달라붙었는지, 나와 베키의 힘은 쉽게도 무너지고 말았다.
문이 벌컥 열렸고, 우리는 방 안쪽으로 퉁겨져 나가떨어졌다.
“아악!”
“큭……!”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니 나는 납작 엎드려 있었고, 베키는 머리카락을 이용해 무사히 착지한 상태였다.
괴물들은 방의 출입구를 꽉 메우며 우릴 가두었다.
‘세상에…….’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다. 돌파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싸우기라도 하려는 듯, 베키가 잔뜩 긴장해서 뻣뻣해진 팔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급히 혼란한 주위를 살폈고.
나는 내 머리맡에 떨어져 있던 긴 촛대를 꽉 쥐어 들고 일어났다.
초를 꽂는 윗부분이 아주 길고 뾰족한 촛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