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노엘은 뺨을 붉히며 풍성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드디어 리사가 내 마음을 받아 주었어.]
“뭐라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사이에 환영인 노엘과 리사가 연인 관계가 되었다니.
분명 노엘이 끈질기게 고백하지 않았을까 상상은 되었지만.
[우리가 연인이 된 건 바로 어제부터야. 얼마 되지 않았어.]
이토록 행복한 얼굴의 노엘이라니.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추, 축하해…….”
어쩐지 얼떨떨해져선 제대로 축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고마워. 나…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행복하다니 다행이네.”
역시 영혼 없는 반응으로 말했다. 특별히 무어라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 건가?
훌쩍 커 버린 환영 노엘이 사라지고, 환영 리사의 개인실에 불이 켜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붉은 보석의 환영이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모양인데.
나는 빠르게 개인실로 직진했다.
여전히 환영 리사는 건강 문제로 침대 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도 지금의 내 모습처럼 훌쩍 자란 상태였으나, 눈 밑의 검은 그림자는 여전했다.
눈 밑 그림자만 없었다면, 나와 아무런 차이점이 없을 정도였다.
-리사, 나는 친구로 그저 기다리기만 했어. 그 오랜 시간을.-
환영 리사의 침대 옆엔 마찬가지로 어른스럽게 커 버린 토드가 서 있었다.
성인이 된 토드의 모습은 달나라에서 온 왕자님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어딘가 신성한 느낌이 드는 건 저 은발의 머리카락 때문인 걸까?
-……토드, 진정해.-
-그런데 그 자식의 마음을 받아 주었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환영 노엘과 토드의 처지가 바뀌어 버렸다.
토드는 절망적인 눈빛을 금방이라도 다 쏟아 버릴 것처럼 가득 품고 있었다.
도대체 환영 리사는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다.
그새 토드를 향한 마음이 변한 거라고? 그렇게 쉽게 변할 마음이었던 건가?
-토드… 제발, 제발 좀… 여기 앉아 봐.-
그녀의 모습이 힘겨워 보이자 환영 토드도 정신이 든 모양인지 진정하며 털썩 앉았다.
-이해할 수 없어. 저 자식이 너한테 협박이라도 한 거지? 그런 거지?-
-토드, 소리 좀 낮춰. 노엘이 듣겠어….-
-말해 봐. 그런 거 맞지? 거절한 이후에도 네겐 계속 찾아왔다면서.-
-어떻게 협박으로 사람을 사귈 수 있겠어. 그런 거 아니야. 절대…….-
-그럼 뭔데. 제발 날 좀 이해시켜 줘.-
혼란에 빠진 토드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흥분해 호흡 조절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환영 리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토드, 네가… 네가 죽을까 봐 그랬어.-
그 말을 들은 나와 환영 토드는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매우 놀란 사람처럼 눈을 동시에 번쩍 떴다.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어릴 때부터 자주 봐 온 사이니까. 나는 그를 잘 알아. 그는 네가 방해된다고 생각하고 있어. 네가 위험에 처해도 도와주지 않을 거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노엘이 그렇게 잔인한 사람인 걸까? 그저 그렇게 생각만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 않나?
-네가 그 자식을 거절하고도 몇 년이 지났지. 그사이 난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가 막아 줬으니까.-
-뭐라고……? 자세히 말해 줘.-
-최근, 네 실험 날이 정해졌었어. 나는… 노엘에게 매달려서 부탁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만은 살려 달라고.-
-왜 그 얘길 이제야 하는 건데. 그 녀석이 무슨 힘이 있어서 날 살렸다는 거야?-
이야기를 듣던 나는 어느새 내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환영 리사는 결국 노엘을 좋아해서 마음을 받아 준 게 아니었다.
환영 노엘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괜찮을까?
-노엘이 널 그 실험에서 제외해 주는 대신 전시실에서의 시간을 늘리겠다고 그들에게 제안했어.-
-전시실…? 그 인간 전시회를 말하는 거야?-
-응. 요즘 노엘이 그 일로 아주 바빠…….-
-시드가 다시 전시회를 열었구나….-
-그래서 그와는 만날 시간도 별로 없어. 아무튼… 그 일 이후로 나는 노엘의 마음을 받아들였어.-
-꼭… 그래야만 했어? 강제한 것도 아니라면서!-
-그토록 좋아하는 내가 부탁한다면, 노엘이 언제든 널 살려 주지 않을까? 나로선…… 널 지키기 위해선 이게 최선인 것 같아.-
노엘은 결국 여기저기 이용만 당하는 처지였던 거였나.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용당하고, 시드 공작에게 이용당하고…….
그야말로 어디 하나 편히 기댈 곳이 없어 보였다.
-그래. 날 위해서 그랬다고 치자. 그래서 내가 기뻐하기라도 할 줄 알았어? 난 그냥 그 자식이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환영 토드도 결국은 나와 같은 사람이었나 보다. 착하고 밝은 성격의 그가 저런 과격한 말을 하다니.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마치 딴사람 같았다.
-토드, 노엘한테 그러지 마. 그는 아무 잘못… 없잖아. 그저 나를… 좋아할 뿐인걸.-
그래, 내 말이 바로 그거다. 환영 리사도 알고는 있는가 본데.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그랬다니.
-그게 잘못이야. 그 자식이 널 좋아하는 거. 그게 아주 큰 잘못이라고.-
이러다 환영 토드가 흑화라도 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미 흑화된 남자가 할 소리를 하고 있긴 했지만, 아직까진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머물러 있다고 여기고 싶었다.
-토드! 제발… 내 말 좀 들어. 네 화내는 모습 보려고 이러는 게 아니란 말이야.-
고개를 푹 숙인 환영 토드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환영 리사가 뭐라고 하는지 듣고 있지도 않아 보였다.
그의 꽉 쥔 주먹만이 핏줄을 팽팽하게 당기며 무릎 위에서 부르르 떨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스스로 간신히 억누른 모양인지 다시 입을 열었다. 꽤 진정된 모습이었다.
-리사, 어쨌거나… 네가 좋아하는 건 결국 나라는 거지.-
그 말에 환영 리사는 곧장 반응했다.
-물론이야! 토드, 우린 이미 마음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걸. 그러니 겉으로만 존재하는 관계에 너무 목매지 말았으면 해….-
환영 토드는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일단은 네 뜻에 따를게. 그렇지만…… 네가 그 자식과 그 어떤 스킨십이라도 한다면…… 나는… 난…….-
-……그럴 일 없어. 걱정하지 마.-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엔 가지 마. 절대 이 안을 벗어나지도 말고.-
지금 보니 환영 토드도 한집착 하는 녀석인 것 같은데…….
환영 리사에 대한 마음이 지금까지 변치 않은 것도 그렇고.
친구는 끼리끼리 사귄다더니, 노엘 친구인 토드도 노엘과 꽤 비슷한 면이 있는 듯하다.
그나저나… 사귀는데 어떻게 스킨십을 피하려 그러는 거지?
역시 환영 리사도 보통이 아닌 것 같다.
-어차피 병 때문에 이 침대를 벗어날 수도 없는걸…. 절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환영 리사는 안심시키려는 듯 토드의 손을 끌어당겨 두 손으로 꽉 감싸 쥐었다.
-그 자식이랑 손도 잡지 마…….-
-응, 그렇게 할 생각이었어.-
-리사, 그냥… 안 하면 안 돼? 그 녀석한테… 솔직히 말하고…… 그럼 안 돼?-
나도 환영 토드의 의견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하면 노엘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
이러는 건 서로에게 상처만 더 주는 일이 분명해 보인다.
물론 그녀도, 그녀의 진짜 연인인 토드를 살리기 위해서 그런 거겠지만.
실험이라는 거대한 두려움 앞에 감히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없었다.
내가 저런 상황이었다면 그 상황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었을 테니까.
-싫어…. 토드, 그럼 네가 또… 실험에…… 아, 안 돼! 싫어!-
환영 리사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머리를 쥐어뜯듯 부여잡고 울먹였다.
화들짝 놀란 환영 토드는 그녀를 품에 안아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키려 했다.
-리사! 괜찮아…. 괜찮아…….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안심해. 괜찮아…….-
하아…….
나는 숨이 막혀서 잠시 이 방을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일어나 정말 나가 버리려 했는데.
문에 난 작은 창문에 환영 노엘의 얼굴이 비쳤다.
‘노엘?’
사각 창문에 노엘의 얼굴이 반 정도 노출되어 있었는데, 화염에 휩싸인 눈빛이 껴안고 있는 환영 리사와 토드를 향했다.
그렇다는 건…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걸까?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사실 어디서부터 들었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둘이 껴안고 있는 걸 보기만 해도, 단번에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가능할 테니까.
나는 문을 열고 나가 바로 앞에 서 있는 환영 노엘을 마주 보았다.
“노엘…… 너… 다 알고 있는 거야?”
그가 천천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뜨겁다 못해 소멸해 버릴 것 같은 온도.
당장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화라도 낼 줄 알았는데.
그의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이 열리고, 슬픈 음성이 들려왔다.
[다 거짓말이었어. 날 좋아한다는 거짓말…….]
“노엘… 괜찮아?”
고개가 푸욱 힘없이 떨어지는데, 내 심장이 다 철렁이는 것 같다.
[하루 만에 이렇게 행복한 꿈에서 깨다니……. 너무해. 리사.]
그는 장대비 같은 굵은 물방울을 뚝뚝 떨구었다.
촘촘하게 들어선 속눈썹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축 처졌다.
나에게는 매우 낯선 모습이었다.
차라리 꼬마 노엘이 울었다면 이렇게 낯설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커서도 이렇게 울고 있다니.
“차라리 들어가서 화를 내. 이렇게 불쌍하게 울고 있지 말고.”
보는 내가 다 안쓰러웠다.
무엇보다 그의 눈물이 환영 리사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답답하다.
[그래도 좋은 걸 어쩌겠어……. 난 괜찮아.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리사도 언젠가 내게 진짜 마음을 열게 될 거야…. 그렇겠지?]
저 광경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다니.
나라면, 이미 정이 뚝 떨어졌을 것 같은데. 미련도 다 사라져 버릴 것 같은데 말이다.
역시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