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토드는 제 가슴을 누르는 노엘의 가죽 구두를 양손으로 잡아 떼어내기 위해 힘주었고, 노엘은 그럴수록 더욱 꽉 눌러 버렸다.
“인제 그만 놔주지? 날 진심으로 죽일 게 아니라면.”
그 말에 노엘은 자신의 검을 놓고 왔다는 사실이 후회되었다.
“막상 그 낯짝을 보니 진심으로 죽이고 싶은데.”
“리사를 놓쳐 버렸잖아. 혼자 많이 무서울 거야.”
그의 입에서 리사의 이름이 나오자 노엘은 그를 짓누르는 다리에 더욱 힘을 실었다.
이내 웃음기를 거둔 눈이 자비롭게 내려다보았다.
“토드. 이제 리사는 너의 그녀가 아니야. 그동안 리사의 뒤를 밟았으면 알 거 아니야? 나와 한방에서 지낸다는 걸.”
토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한 듯 힘을 놓고 양팔을 뻗은 그는 다소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노엘의 말은 더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리사는 나를 좋아해. 네가 억지로 그녀를 감금하고 있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던데? 왜 그렇게 그녀를 못살게 구는 거야.”
노엘은 토드에게 올린 다리에 허리를 굽혀 턱을 괴었다. 그도 흥미진진한 모양이다.
“글쎄. 리사가 지금도 널 좋아할까…? 너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지?”
“나와 리사는 지금도 이어져 있어. 목숨이 끊기지 않는 한은… 아니, 끊어진다 해도 우린 헤어지지 않아.”
“그런데 어째서 리사의 뒤를 쫓고만 있는 거지. 앞에 나타나려면 얼마든지 나타났을 텐데?”
“…….”
“나와 함께 있는 그녀를 보고 자신 없어진 게 아니고?”
정곡을 찔렸는지 토드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렇게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갖더니 금세 강렬한 눈빛으로 노엘을 쏘아보았다.
“잠시 그랬었다는 건 인정할게. 하지만 리사가 날 만나게 된다면, 틀림없이 내게 돌아올 거야.”
“아니,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점점 노엘의 얼굴에 그림자가 깊어지자, 토드는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너야말로 자신이 없나 봐? 강제로 그녀를 가두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라니.”
“웃기지 마. 너는 오늘 나한테 죽어. 그러니까 그녀를 만나게 될 일은 없을 거야.”
살벌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
왜 하필 또 곤충류인지. 아니, 이번엔 동물로 봐야 하는 건가?
평범한 거미만 떠올려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을 텐데, 저 거미 괴물을 보고 나니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집은 리마와 거의 비슷한 크기였고, 인간의 상체에 하반신은 거미 다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일반적인 크기가 아니긴 했다. 거인 괴물보다도 큰, 상체만 인간인 형태였으니까.
일단 머리통의 크기가 보통 사람의 다섯 배는 되어 보였으니 그 기묘한 모습에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저 거미 괴물도 융합 실험의 포로였나 봐.’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노란 머리카락이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보다 보면 리마처럼 익숙해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사실 지금까지도 리마의 몸체에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다.
거미 괴물은 거미줄에 걸려 있는 베키를 한 번 더 돌돌 말고 있었다.
“아프지 않아요. 해치지 않아요.”
처음 듣는 거미 괴물의 목소리. 놀랍게도 소녀의 여리여리한 느낌이 묻어 있었다.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조합에 혼란이 와선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말하는 내용을 들어 보니 그렇게 나쁜 녀석 같지는 않은 느낌인데…….
“해치지 않는다면서 왜 이렇게 칭칭 감아대는 거야!”
조금만 더 감기면 누에고치라도 될 것 같았는지 베키가 신경질을 냈다.
나는 베키가 괜히 거미 괴물을 자극할까 봐 염려되었다.
“해치지 않아요. 입 다물고 얌전히 있어요.”
거미 괴물은 계속해서 베키를 감아댔다. 그러면서 노래까지 예쁘게 흥얼거리기 시작했는데.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가고 있어요. 그런데 먹이가 위로 도망을 치네요. 그래서 거미가 줄을 타고 다시 올라가고 있어요.”
묘하게 달랐지만, 내가 어릴 적 들어 봤던 노래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는 팔뚝에 피어오른 닭살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으스스한 노래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비가 오네요. 비를 맞으면 끊어져 버려요. 비를 맞으면 끊어져 버려……. 제기랄, 비를 맞으면 끊어져 버린다고!”
……?!
거미 소녀는 노래를 부르다 버럭 화를 냈다.
갑자기 거친 말을 내뱉으며 눈덩이같이 불어난 거미줄에 둘러싸인 베키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뭐, 뭐야. 왜 그러는 건데. 갑자기 무섭게……!’
거미 소녀의 험악해진 모습에 놀란 나는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눈물이 다 찔끔 날 것 같았다. 빨리 저 거미 소녀가 밖으로 나가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생각해 보니 거미 소녀가 나간다 한들 베키를 어떻게 구할지 아직 의문이긴 했다.
일단 베키가 땅에 내려졌으니 굴려서 갈까 싶기도 했지만.
문제는 저 거미줄을 만지면 내 손이 붙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굴릴 수도 없는 거네……. 같이 붙어서 굴러 버릴지도 몰라.’
어쩐지 몹시 아쉬웠다. 저 고집불통 베키를 합법적으로 굴려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아무튼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고민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든 의문이 머릿속에 전기처럼 찌릿 스쳐 갔다.
‘이 안에선 비도 안 오는데 왜 저렇게 비에 화가 난 거지…?’
그냥 노래에 감정을 이입해서 그런가? 하고 넘기려 하다가도 그러기엔 너무 강렬했다.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노래에 무언가 있다.
나는 계속해서 거미 소녀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거미가 줄을 타고 올라가면…… 뭐 하냐고! 비를 맞으면 끊어지는데!”
거미 소녀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베키를 공처럼 마구 발로 찼다.
베키는 거미의 다리 아래에서 왔다 갔다 구르고 있었는데, 거미줄에 두껍게 둘러싸여서 아프진 않을 것이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재차 쓸어내리며 진정시켰다.
자꾸만 저 난폭한 소리에 새가슴이 되는 듯했다.
‘비를 맞으면 끊어진다고…….’
거미 소녀가 유독 비에 흥분하는 걸 보니…….
‘그렇다면 거미줄이 물에 약한 걸까?’
솔직히 현실에선 어지간히 강한 빗방울이 아니고서야 거미줄이 쉽게 끊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여긴 괴물과 마력이 존재하는 판타지의 세계였다.
게다가 저 거미 소녀도 일반적인 거미와는 달라도 아주 달랐으니.
‘해 볼 만한 것 같아. 그런데 물을 어디서 구하지?’
6층에 있는 노엘의 방까지 다녀오기는 너무 먼 길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도에서 이 근처에 큰 주방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곳에 물이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사실 이 방법이 맞는 건지, 괜히 삽질하는 건 아닌지 불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일단 괴물이 나가야 나도 나가서 물을 가져오든 할 텐데.’
그사이 거미 소녀가 발길질을 멈췄는지 조용했다.
용기를 내어 고개를 내밀어 보았는데, 진정된 거미 소녀는 베키를 다시 거미줄에 걸어 놓는 중이었다.
둘러싼 거미줄로 불어난 베키의 무게가 엄청날 것 같았는데도 아주 손쉽게 붙었다.
‘접착력이 엄청나네……. 조심해야겠어.’
그리고 드디어 사라지나 했지만, 거미 소녀는 나가지 않았다.
베키가 걸려 있는 거미줄 근처 구석으로 가더니 다리를 접고 눈을 감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잠을 자려는 모양이다.
‘하아…… 어떡하지, 진짜.’
곧, 코 고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거미 소녀가 자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했으니 이 틈에 방을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납작 엎드려서 문을 향해 슬금슬금 기었다.
드디어 문 앞으로 와 천천히 일어섰고 손잡이를 살포시 잡아당겼다.
“후하…….”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숨이 가까스로 터져 나왔다.
다행히 거미 소녀의 코 고는 리듬에 묻혀 내 숨소리 따위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끼이…….
‘아악!’
오래된 나무 문의 소리에 당황하여 열던 것을 즉시 멈추었다.
그러곤 거미 소녀가 깨지 않았는지 고개를 기울여 살폈는데.
구석에 있던 거미 소녀의 커다란 파란 안구가 번뜩 뜨여선 나를 응시했다.
그다음엔 접혀 있던 다리들이 쑤욱 펼쳐지며 거대한 몸을 들어 올렸고.
“해치지 않아요. 이리로 오세요.”
그녀의 얼굴 크기만큼이나 큰 입술이 양옆으로 찌익 찢어졌다.
눈과 턱이 흘러내리듯 벌어진 나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내달렸다.
“이리 오세요…. 이리 와……. 이리 안 와? 이리 오라고!”
등 뒤에서 나를 쫓는 소녀가 다시 괴팍한 음성을 쏟았다.
‘으아아아!’
나는 눈을 부릅뜨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다급히 떠올렸다.
복도의 더욱 깊은 곳으로 재빠르게 들어가 드디어 주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규모가 웬만한 학교 운동장 반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감탄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뒤에서 거미 소녀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으니 일단 그녀를 따돌려야 했다.
마침 주방이라 수납장이 많았고 나는 주방의 가운데쯤에 있는 수납장으로 엎드려 들어갔다.
조금 더 널찍한 공간도 있었던 것 같지만, 선택할 시간이 없었다.
톡톡 토도독독. 톡톡 토도독독.
벌써 그녀가 도착해 버렸으니 말이다.
“어디에 숨었을까요? 어디에 있나요?”
다시 상냥한 소녀가 되어선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또 언제 돌변할지 몰라 무서웠다. 이런 식으로 무서운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너무 무서워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쉬시시식. 쉬식. 쉬식.
거미줄을 생성하는 소리였다. 그녀는 리마와는 달리 문을 여닫을 수 있었는데, 저 거미줄의 접착력을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문이 달린 수납장은 모두 열어 보고 있었다.
아직 입구 쪽이었기 때문에, 가운데로 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할 텐데.
‘어떡하지…. 이동할까? 아니면 지칠 때까지 기다릴까…?’
사실 저 속도로 여기 있는 수납장들을 모두 열어 보려면 반나절은 소요될 게 분명하다.
거미줄을 뽑아내는 시간도 생각보다 오래 걸렸으니.
조금은 마음이 여유로워졌을 찰나.
툭 투도도도독.
갑자기 거미 소녀가 내가 있는 수납장의 근처 가운데로 펄쩍 튕겨 오르듯 뛰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