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리마는 더듬이를 튕기며 날카롭게 뜬 눈을 반짝였다.
“맞아! 우리가 문이 뚫리지 않도록 지킬 거니까! 누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보통 이런 식이면 언젠가 뚫리던데.
비관적인 생각에 마음만 더 촉박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빨리 퀘스트를 다 해 버리고 떠야 할 텐데. 할 수 있을까?
“앞으론 좀 더 자주 문을 살펴야겠어.”
노엘의 그 한마디에 조금은 긍정적이 되었다.
노엘이 자주 나가면, 나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질 테니까!
그 틈을 타 퀘스트 진도를 팍팍 빼야겠다.
‘그러고 보니 베키도 찾아야 하는데….’
베키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꼬마 리사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쩌면 퀘스트의 일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뭔가 일이 점점 많아지는 느낌이야.’
나는 찻잔의 식어 버린 홍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데릭, 너는 이제 돌아가도 좋아.”
노엘이 검은 손 늑대, 데릭에게 말했다.
강아지처럼 귀엽게 앉아 있던 데릭. 그는 엉덩이를 들더니 붓털 같은 꼬리를 흔들어댔다.
“나도 돕고 싶다.”
예상외의 반응에 노엘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금방 좋은 수를 떠올렸는지 눈을 크게 떴다.
“좋아. 머릿수가 많을수록 문도 더 견고하게 지켜지겠지. 일단 문들의 위치를 알아야 하니….”
노엘의 시선이 급히 나를 향했고 은밀한 미소를 띠었다.
……?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 의미를 헤아려 보려 했다.
“리사, 미안하지만 오늘도 혼자 있어야 할 텐데. 괜찮겠어?”
신입인 데릭을 가르치러 여기저기 다니려는 모양이다.
저 검은 손 늑대가 날 이런 식으로 도와줄 줄이야…!
나는 속으로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물론이지. 나는 걱정하지 마.”
“그래, 오늘은 제발 안전하게 좀 있어 줘.”
그 일이 정말 급하긴 한가 보다. 분명 어제 나갔다 온 나를 추궁하리라 생각했는데.
추궁은커녕 이런 나를 두고 또 나갔다 온다고 하다니…….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한데 괜히 혼자 찔려서 그런 건가?
잘된 일이 맞는 거겠지?
***
나는 노엘과 리마, 데릭을 떠나보내자마자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깊은 갈등에 빠져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베키를 먼저 구할까… 퀘스트를 먼저 할까…….’
머리는 실험실로 가는 퀘스트 쪽으로 기울었지만, 결국 가슴으로 결론을 내렸다.
베키를 먼저 구하기로!
무슨 상황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더 늦게 찾았다간 베키가 정말 잘못될 수도 있을 테니까.
거기다 꼬마 리사의 애원이 눈에 밟히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게 무겁게 내디딘 발걸음은 어느새 1층으로 내려와 있었다.
‘일단 어제 마지막으로 본 건 1층이었으니까…….’
밤은 아니었으니 정원사는 활동하지 않았다.
나는 어제 일이 있던 곳의 반대편 복도로 빠르게 다다랐다.
분명 방을 나올 때 베키를 보지는 못했으니 무언가에 끌려가기라도 했다면 이 방향이 맞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기분도 우울해지는 느낌.
이 암흑 속은 아무리 다녀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진짜 뒤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던 중, 반만 열려 있는 문틈으로 베키의 흰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끼익.
조심조심 문을 열어 베키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문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려 왔고, 나는 그 자리에서 석화라도 된 듯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베… 베키……!’
베키는 허공의 하얀 거미줄에 칭칭 감겨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거미줄은 방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나는 급히 방 안을 샅샅이 살폈고 거미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제야 발이 떨어져 베키 근처로 다가갈 수 있었다.
“베키! 정신 차려 봐!”
고개를 움찔하는 걸 보니 아직 살아는 있나 보다.
“내가 구해 줄게! 조금만 참아.”
나는 신속히 눈알을 굴려 거미줄을 끊어낼 만한 물건을 탐색했다.
마침 바닥에 떨어진 깨진 거울 조각들이 시야에 들어왔고, 그중 쓸 만한 긴 조각을 주워 들었다.
그러곤 거미줄을 쓱싹쓱싹 자르기 시작했는데…….
“뭐지? 안 끊어져….”
거미줄은 날카로운 거울 조각에도 끄덕하지 않고 여전히 팽팽했다.
믿기지 않아 계속해서 시도를 해 봤지만 헛수고였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신기해서 한번 손으로 만져 볼까 하고 갖다 대려던 순간이었다.
“그거 만지면 붙어 버려.”
베키가 작게 중얼거렸다. 말하는 걸 보니 상태는 괜찮은 듯했다.
“그걸 말해 줄 거였으면 거미줄이 단단하다는 것도 좀 미리 말해 주지 그랬어.”
나는 노엘처럼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입을 삐죽였다.
“나는 상관 말고 가…. 곧 그것이 돌아올 거야.”
“아니, 죽으라고 내버려 둘 땐 언제고 인제 와서 그러는 거야?”
아직도 어제의 충격을 잊지 못한 터였다. 베키가 정말 마지막까지 날 구하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더라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냥 날 내버려 둬.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베키가 상심해서 그렇다는 꼬마 리사의 말이 떠올랐다.
정확한 이유야 내가 알 리는 없었지만, 눈 밑이 검은 걸 보니 꼬마 리사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닌 모양이다.
“네 친구한테 간절한 부탁을 받아서 말이야. 나는 널 꼭 구해야 해.”
“내… 친구?”
“그래, 네 진짜 친구.”
그 말에 베키는 고개를 확 들어 올렸고, 그 탓에 앞머리 일부가 옆으로 쓸려 내려갔다.
겨우 다시 보게 된 그녀의 눈동자가 은은한 달 같은 빛을 발했다.
그녀가 입을 연 순간, 복도에서 톡톡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톡 톡 토도독. 톡 톡 토도독.
“숨어!”
베키가 다급히 속삭였고, 나는 두리번거리다 소파 등받이 뒤로 몸을 숨겼다.
어차피 몸을 숨길 데가 거기밖에 없었다. 나머지 가구들엔 온통 거미줄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톡 톡 토도도도독.
소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조심스레 그 실체를 보려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최대한 바닥에 딱 엎드려선 거미로 추정되는 괴물을 살피다 다시 한번 떡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
리마, 데릭과 동행하던 노엘은 2층쯤 내려와서 금방 멈추어 섰다.
리마와 데릭은 서로를 바라보며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리마. 데릭의 교육은 네게 좀 맡겨야겠다.”
가만히 있던 리마는 기겁해선 번쩍 기립했다.
“무, 무무무 무슨 말이야!”
“나는 다른 할 일이 있어. 그러니 어제 했던 대로만 해.”
“무, 무섭다고!”
“데릭이 같이 있잖아. 보아하니 너와 같은 융합 실험 동기 같은데, 이참에 좀 친해지는 게 어때?”
노엘이 적극적으로 둘을 묶어 주려 했지만, 아직 리마와 데릭은 서먹서먹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걸….”
데릭보다도 덩치가 큰 리마는 어쩔 줄 몰라 30개의 다리를 바르르 떨었다.
낯선 이와의 동행이 어색한 걸 스스로 견디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노엘은 성가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데릭, 리마를 부탁하지.”
결국 신입자에게 상급자를 부탁하는 꼴이 되어 버렸지만, 시간이 없었다.
“노엘이 부탁했다. 내가 알아서 잘해 보겠다.”
리마와는 달리 무덤덤한 데릭이었다.
데릭의 대답에 화들짝 놀란 리마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 바람에 다리들이 엇갈려 엑스 자 모양이 되었다.
“나와 잘해 보겠다고? 무, 무얼? 어떻게? 나를 어떻게 하려고!”
“길을 안내한다. 리마.”
데릭은 리마의 뒤로 가더니 그가 앞장서게 했다.
앞발로 자신의 엉덩이를 툭툭 치니 어쩔 수 없어진 리마는 떠밀리는 모양새로 몸을 움직였다.
노엘은 그런 둘을 내버려 두고 다시 6층을 향해 빠르게 올라갔다.
그리고 역시 계단을 내려오려는 리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위층에서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이렇게 올라갔다간 딱 마주쳐 버릴 터였다.
‘그럼 안 되지.’
리사가 내려오는 속도에 발을 맞추어 노엘도 귀를 기울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계산대로 리마와 데릭도 계단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이윽고 1층에 다다른 노엘은 근처 방에 들어가 잠시 몸을 숨겼다.
리사의 발소리를 따라 바짝 뒤를 밟았다.
‘어딜 그렇게 다니는 건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단 말이지.’
리사가 걷는 복도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던 중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시야에 잡혔다.
노엘은 지금 리사를 쫓고 있는 이가 자신만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저 녀석은……?’
바로 건너편의 방에서, 자신처럼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노엘은 그 그림자가 다시 나오길 기다렸고 한 발자국 내딛는 걸 보자마자 가차 없이 덮쳤다.
“큭!”
“너…, 너……!”
남자는 순식간에 바닥에 깔려 버렸고, 노엘은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체중을 실어 짓눌렀다.
멱살을 잡힌 남자는 목이 눌려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콜록.
“언제 나타나나 했더니… 그동안 리사를 멀리서 관찰하고 있던 거였나.”
노엘은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그 작은 목소리엔 숨만 불어 넣어도 죽을 듯한 살기가 가득했다.
그의 목을 더욱 꽉 짓누른 노엘은 괴로워하는 그 모습에 입꼬리를 들썩였다.
“기다렸어……. 토드, 너를 너무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거든. 너라면 어떻게든 리사한테 접근하려 할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노엘의 붉게 휘몰아치는 눈빛에 대항하는 토드의 물빛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큭……. 노엘….”
토드가 입을 뻐끔거리자, 노엘은 어디 그 입으로 무슨 말을 지껄이나 보자는 듯 목을 놓았다.
콜록콜록.
겨우 목구멍을 가다듬은 토드는 그제야 몸에서 힘을 뺐다.
“하하! 하하하.”
그러더니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노엘은 천천히 일어나 발을 그의 가슴 위로 가볍게 올렸다. 일어나려 한다면 발로 꾹 짓눌러 줄 생각이었다.
“오랜만이야. 친구!”
토드는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 뻔뻔스러움에 노엘도 오싹할 만큼 어둡게 웃어 보였다.
“친구는 무슨. 이젠 존대하던 말도 다 갖다 버린 모양이지? 네 밝은 척하는 낯짝은 지금 봐도 여전히 불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