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네가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노엘…….”
겉으로는 차분해졌을지 몰라도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그가 멀쩡히 살아 있는 걸 보곤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가시지 않는 묘한 불안감도 여전히 존재했다.
“아까 같은 상황이었으면 정신 차리고 도망갔어야지. 어떻게 내 생사만 필사적으로 묻고 있던 거야.”
그의 따듯한 손이 내 뺨을 소중히 어루만졌다. 끈적하게 따라붙는 그의 눈빛이 소용돌이치는 불기둥의 눈 같다.
그 와중에도 나는 내가 과거의 리사가 아니라는 걸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어차피 도망갈 수 없었는걸. 운 좋게 뛰쳐나가도 금방 따라잡힐 거리였어.”
“리사, 솔직히 말해 봐. 내가 좋아졌어?”
“…….”
혀끝이 간지러웠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복잡한 심경이 내 입술을 꾹 다물도록 짓눌렀다.
그에게 끌린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명백히 내가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나는 이곳에선 살아갈 수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진심을 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 정체를 들켰을 경우도 생각해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전의 네 모습은, 나 없인 살지 못할 것처럼 보였는데. 내가 틀린 건가?”
노엘은 계속해서 간절한 얼굴로 날 응시했다. 거의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감당하지 못해 고개를 떨구었다.
“틀린 건가 보구나.”
그는 몹시 실망해선 고개를 푹 숙였다.
어딘가 혼란스럽고 서글퍼 보였다.
“그래도 아직 내 입술은 좋아하는 거지?”
“뭐?”
화들짝 놀라 쳐다보니 그가 심각한 눈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것마저 싫다고 했다간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위협이 느껴졌다.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얼른 좋다고 말해. 밤새 시달리고 싶지 않으면.]
의문의 목소리도 나와 같은 의견인 모양이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건가.’
“그, 그건 좋아. 여전히.”
어쩐지 그의 몸만, 아니 입술만 좋아하는 이상한 여자가 되어 버린 것 같은데.
어쩌면 정말 이번에야말로 그가 나한테 정이 떨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라도 뻥 뚫려 버린 것 같다.
이내 노엘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는 자포자기한 채 죽은 생선이 뜬 것 같은 멍한 눈알을 껌벅거렸고.
“다행이다. 이거라도 좋아한다니.”
다가오는 그의 거친 숨결을 무방비한 상태로 맞이했다.
“이게 그렇게 좋으면 너 다 가져.”
그의 입술에 온몸이 짓눌리듯 침대로 파고들었다.
“얼마든지 줄 테니까 네가 다 가져가.”
이토록 조심스러운 분노라니.
머릿속에서 그의 과거 모습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맞아. 상대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데도 포기하지 않는 녀석이었지.’
강렬하게 밀려오는 부드러운 감촉에 나는 팔을 올려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앞에선 화를 내며 당장이라도 다 휩쓸어 버릴 것처럼 굴어 놓고 뒤에선 속상해서 처절하게 우는 녀석이었고.’
내가 이 별장을 탈출하게 되는 날, 그 옆에 노엘이 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밝은 곳으로 나가 그와 새롭게 시작한다면. 그게 가능하다면 그를 데리고 함께 나갈 텐데.
그렇게 되면 리마도, 베키도 같이 가자고 할 수 있을까? 그 녀석들도 이곳에 남겨지면 쓸쓸하겠지.
만약에 토드를 만나게 된다면? 토드도 같이 가면 노엘이 좋아할 거야.
그렇게 모두가 함께 이곳에서 해방되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흣….”
“지금 다른 생각 할 시간이 어딨어. 이래서 오늘 안에 다 가져갈 수 있겠나.”
그는 정말 다 내어 줄 것처럼 집중적으로 퍼붓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난 나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노엘! 그, 그만!”
“왜… 좋다며. 벌써 충분해졌어? 난 아직도 더 많이 줄 수 있는데.”
잠시 떨어진 그는 윗입술을 제 혀로 반 바퀴 훑었다.
더 이상 멈출 수 없다는 얼굴.
그의 확 풀려 버린 눈가가 무척이나 촉촉해 보인다.
“계속해도 돼? 더 가져가.”
권유형으로 말하는 주제에 애원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맑은 붉은빛을 보니 나도 정신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겨났다.
“줘.”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노엘이 입술을 작게 벌리며 다가왔다.
오늘도 잠은 다 잤다.
***
늦은 아침이었다.
노엘은 부지런해선 나보다 일찍 일어났는지 옆에 없었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그를 못 본 지 오래된 것만 같다.
저 문만 열면 분명 어둠 속에서 홍차 한잔하고 있을 텐데.
이제는 그 기이한 풍경마저 날 안정시킨다.
그가 누웠던 침대 위에 손을 얹어 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걸 보니 그도 그리 빨리 일어난 건 아닌가 보다.
나는 그의 자리로 굴러가 특유의 냄새를 들이켰다. 역시 좋은 향기가 난다. 계속 맡고 싶었지만 자제했다.
‘정이 든 게 아니라, 향에 중독이라도 된 건가.’
난 이미 틀렸어. 노엘에게서 헤어 나오긴 글렀다.
그의 알 수 없는 매력에 녹아들어 스스로 고통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끌어모았던 한숨을 푹 내쉬자 밖에서 리마의 쫑알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쫑긋하고 노엘의 목소리를 좇았는데, 새로운 목소리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낮고 무거운 소리. 바로 오늘 새벽에 들어 본 것 같은…….
‘어?!’
분명 그 검은 손 괴물의 목소리였다.
나는 당장 몸을 일으켜 우다다 밖으로 나갔다.
작은 테이블에 노엘과 리마가 홍차를 마시며 앉아 있었고, 노엘의 옆에 검은 손 괴물도 함께 있었다.
내가 문을 벌컥 열자마자 얼어 버린 듯 멈추어 있으니, 셋도 처음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사, 잘 잤어?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네.”
노엘은 변함없는 싱그러운 미소로 날 맞이했고, 나는 그 평범한 미소에 가슴이 다 설렜다.
“누나! 어젯밤 얘긴 다 들었어. 정말 무서웠겠다. 생긴 것도 무서워서 말이야…….”
리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치가 보였는지 검은 손 괴물을 흘깃거렸다. 반면 검은 손 괴물은 조금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사실 생긴 게 더 무서운 건 몸통 한정 리마가 압승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생겼었구나. 어젠 너무 경황이 없었지.’
검은 손 괴물을 자세히 뜯어보니 거대한 검푸른 털의 늑대였다.
얼굴과 몸통만 늑대고 네 다리는 사람의 팔로 이루어져 있었다.
팔의 색상이 몸통과 비슷해서 그런지 자세히 보지만 않으면 위화감은 덜한 편이었다.
‘이 녀석도 융합 실험의 피해자겠구나.’
이제는 충분히 예상이 가는 모습이었다.
“내 이름은 데릭. 어제의 일. 사과하고 싶어 다시 찾아왔다.”
“그렇다고 하네.”
노엘이 씩 웃으며 가볍게 거들었고, 나는 데릭에게 다가갔다.
“그날 널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침대 밑에서 자고 있었고, 잠결에 어째선지 네 발목을 잡고 말았다.”
“그랬구나…….”
왜 멀쩡한 침대 놔두고 그 밑으로 들어가 자는 건지.
‘그것도 모르고 도끼로 내려친 거였구나. 새삼 미안하네. 가차 없이 절단해 버렸으니.’
그런데 어제 내 다리를 쥐고 있던 손보다 지금 데릭의 손이 훨씬 더 컸다.
손 크기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건가.
“미안하다.”
“아, 아니야… 나도 미안했어. 너무 놀라서 그만 손목을….”
아, 발목이라 해야 하나.
손목이냐 발목이냐 고민하다 결국엔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나저나, 결국 들키고 말았네. 어제 몰래 나갔다 온 걸.’
다행인지 아직 노엘은 그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은 어차피 다 같이 있어서 굳이 말을 꺼내려 하진 않을 것 같긴 한데.
“나, 나도 홍차 한잔해도 될까?”
나는 비실거리며 리마 옆의 빈 의자에 착석했다.
어떻게든 모두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길게 끌고 싶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노엘은 빈 찻잔에 능숙한 자세로 차를 내려 주었다.
“뜨거우니까 식혀서 천천히 마셔.”
“고마워, 노엘.”
초콜릿 쿠키를 함께 내주는 그의 각진 손가락이 섬세하고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단숨에 내 앞에 나만을 위한 홍차 세트가 완성되었다.
초콜릿 쿠키를 입에 넣어 오물거리던 중, 턱을 팔에 괴고 있는 노엘과 눈이 딱 마주쳤다.
분명 넷이 함께 있는데 이 공간에 노엘과 나, 단둘만 있는 느낌이 다분했다.
‘너 다 가져.’
갑자기 어제 노엘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고, 나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달콤하다던 쿠키의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입 밖으로 질질 흘러내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흥미로운 듯 지켜보는 그였다.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선 눈웃음 짓는 그 얼굴이 오늘도 나를 유혹하기엔 충분히 차고 넘쳤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꿰뚫어 보는 거 같아.’
그럴 리는 없을 테지만, 어쩐지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은 여유로움의 소유자였으니.
그래서 더 무서운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콜록.
쿠키가 목에 걸린 것 같아 급히 홍차를 홀짝였다. 다행히 다 식어 혀가 녹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리사, 어제 내가 정기적으로 관리하는 문에 대해 알려 준다고 했었지?”
“아! 맞아. 그랬었지.”
“층마다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긴 한데…. 쇠사슬로 묶어 둔 문들이 있어.”
그의 표정이 진중해서 나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 문들은 이 별장의 다른 동과 이어지는 통로야.”
“다른 동도 있었어? 그렇지 않아도 별장이 이렇게나 큰데…….”
미쳤다. 입이 떡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별장을 다 돌아보지도 못했는데 더한 곳들이 넘쳐 난다는 건지.
“다른 동에는 내가 분리한 녀석들이 있어. 물론, 그들 중에는 이 별장의 주인인 시드 공작도 포함되어 있지.”
노엘이 자세히 설명한 건 아니었지만, 붉은 보석을 따라왔던 나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시드 공작을 포함한 연구원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모양이다. 더불어 그 사악한 귀족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어떤 상태인 거지? 실험실의 피해자가 아니었으니 죽은 몸도 아닐 텐데?
나처럼 사람의 모습인 걸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여기서 더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계속 이곳을 뚫으려 시도하고 있어.”
“그들이 쳐들어오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릴 공격하려는 건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자기들 세력이 아닌 한 닥치는 대로 공격할 가능성이 커. 이전에 운 좋게 뚫고 들어왔던 붉은 괴물처럼.”
노엘은 나와 리마, 데릭을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문들이 뚫릴 일은 없을 거야.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