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뭣?!
“작별 인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다음에 나를 만나러 오면… 나는 훨씬 더 성장해 있을 거거든. 이제 네가 꼬맹이 노엘이라 부르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을 거야.]
어쩐지 꼬마 노엘을 더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했다.
노엘의 이 귀여운 모습을 이젠 놓아주어야 한다니. 뜻밖의 갑작스러운 이별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성장이라니? 대체 얼마나?”
[아마 지금의 너와 거의 비슷할 거야.]
환영의 시간이 지금과 훨씬 근접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대로 세월이 흘러 드디어 최근을 향해 달려왔다는 것.
그렇다는 건 내가 이 별장에서 일어난 최근의 일을 알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너와 헤어지는 건 정말 아쉽지만… 계속 제자리에 머무르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
[그래도 네 덕분에 견딜 수 있었어. 리사, 약속 하나만 해 줄래? 이전에도 했던 약속이긴 한데……. 한 번 더 하고 싶어.]
“뭐, 한 번 했는데 두 번을 못 할까?”
꼬마 노엘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자, 걸어.]
“어어…. 응!”
손가락을 걸자마자 그는 엄지손가락 도장을 꾹꾹 눌렀다.
아니 근데 약속을 먼저 말하고 도장을 찍는 게 맞는 순서 같은데.
이러면 사기 위험이 큰 것 아닌가….
[작은 내 모습은 사라지겠지만, 커진 내 모습과도 언제나 함께해 줘. 영원히. 약속!]
아악!
잊을 만하면 ‘영원히’ 트라우마가 발현되고 만다.
소름 돋아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꼬마 노엘이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니 금방 진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음에 봐. 네가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보고 싶을 거야.”
나는 꼬마 노엘이 만져진다는 걸 뒤늦게 의식했고 드디어 그 아이를 내 품에 끌어안을 수 있었다.
작별 아닌 작별이었지만, 지금 내 옆에 누운 남자의 어릴 적 모습이어서 그런지 더 애정이 가는 느낌이었다.
취향인 남자의 과거 모습을 마주할 기회는 원래라면 있을 리도 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더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빨리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나눌 시간을 가졌더라면,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런 이별은 정말 아무리 해도 적응되지 않을 것이다.
꼬마 노엘이 작은 손으로 내 등을 토닥였고 그 토닥이는 느낌이 점점 사그라들 때쯤엔 그도 사라진 상태였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니 아직 새벽이었다.
내가 잠이 든 뒤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새벽 같았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꿈을 꾼 것이었다.
촉촉해진 눈가를 훔친 나는 피로감에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다.
“리사…, 자?”
잠에서 깬 건지 옆에서 노엘이 나를 불렀고, 나는 어차피 다시 잠들 거 같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내가 자는지 확인한 노엘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뭐지…? 뭐 하려고?’
그냥 일어났으면 신경 쓰이지 않았을 텐데.
굳이 내가 자는 걸 확인했다는 건 무언가 나 몰래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불안해할 틈도 없이 노엘이 내 발밑 이불을 거두었다. 이불이 걷히자 서늘한 바람이 속절없이 들어왔다.
‘안 돼!’
그가 보고 말았다. 내 발목을 쥐고 있는 그 검은 손을.
“어쩐지 이상한 기운이 흐른다 했더니……. 리사, 어디서 이런 걸 달고 온 거야. 또 나갔다 왔구나.”
노엘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내가 깰 것을 염려한 모양이다.
결국 이렇게 들킬 거였으면 그냥 어제 사실대로 말할 걸 그랬나 싶었다.
“절대 나가지 않겠다 약속해 놓고선…….”
노엘의 한숨이 닿으니 발가락이 오싹하도록 간지러웠다.
내일 노엘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 봐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분명 추궁할 텐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전전긍긍하며 핑계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순간 발목의 검은 손 따위는 별걱정도 들지 않는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나는 괴물보다도 노엘이 더 무서운 모양이다.
그때였다.
퉁퉁.
누군가 밖에서 방문을 두드렸다.
퉁퉁퉁.
리마일 리는 없었다. 리마가 두드린다면 저런 뭉툭한 소리는 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누구지? 대체… 이런 시간에.’
내 궁금증에 답을 준 건 노엘이었다.
“리사, 저것이 네 발목에 있는 손을 찾으러 왔어.”
순간 두피 속에 전류가 흐르는 듯 찌릿찌릿했다.
‘그럴 수가…! 그럼 그 침대 밑의 몸통이 몸소 찾아왔다는 건가?’
대체 여기까진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손에 자석이라도 달린 건가.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계속 자는 척하며 실눈을 뜨고 노엘의 얼굴을 살폈다.
노엘은 다시 내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찬 바람이 조금이라도 들어가지 않도록 아주 철저하고 단단하게.
바로 밖에서 괴물이 문을 두들기는데 그는 당황해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아주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다녀올게. 여기 안전하게 있어.”
노엘은 내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는 침대 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 무언가는 장검이었고.
스륵.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든 그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나감과 동시에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노엘……?”
다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혹시나 그가 다칠까 염려된 탓이었다. 이 검은 손의 주인이 어떤 괴물인지도 모르니 더욱 그랬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그를 도와줄까 싶었지만, 잘못했다간 괜히 그의 신경만 분산시킬 게 분명해 보인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문에 귀를 대 보았지만, 달려가는 발소리가 급속도로 멀어져 버렸다.
‘노엘…. 괜찮겠지? 괜찮은 거 맞겠지?’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방 안을 구석구석 배회했다.
노엘이 괴물을 빨리 해치우고 방으로 무사히 돌아오길 바랐다. 상처 하나 없이.
분명 괜찮을 것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터벅터벅.
‘노엘이 돌아오나?’
저런 여유로운 리듬의 발걸음이라면, 분명 노엘이 맞을 것이라 여겼다.
나는 당장 침대로 뛰어들어 자는 척 이불을 덮었다.
드디어 노엘이 돌아오는구나, 하고 언제 걱정했냐는 듯 거짓말처럼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역시 노엘은 여기서 제일 강한 녀석임이 틀림없었다.
끼익.
어째서인지 노엘은 들어오며 문을 닫지 않았다.
그 틈으로 얼음 조각 같은 바람이 쉬이 들어왔고, 어딘가 기묘한 느낌이 든 나는 실눈을 떠 보았다.
처음엔 방이 이렇게까지 어두웠나 싶었지만 곧 내 위로 덮친 커다란 검은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
그것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내 이마에 닿을 듯 말 듯 내려와 있었고, 몸집은 호랑이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 아래 시체 같은 검은 손이 눈에 들어왔는데, 문을 두드렸던 괴물임이 틀림없었다.
‘노엘이… 당한 거야?’
나는 곧장 죽을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무엇보다 노엘이 이 괴물한테 어떻게 되었을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뜨거운 기운이 눈 주변에서 불어나고 있었다.
“내 손… 가지러… 왔다.”
검은 괴물은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살며시 거두었다.
드러난 내 발목에 감긴 자기 손을 발견하고는 손이 없어진 팔을 뻗었다.
그러자 금방 손이 팔에 붙었고 드디어 내 발목을 움켜쥐고 있던 기분 나쁜 압박감이 떨어져 나갔다.
괴물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긴 혀로 손을 핥고 있었다.
“내 손… 드디어… 되찾았다.”
아주 무거운 톤이면서도 허스키한 남성의 저음이었다. 그 목소리에선 기쁨이 묻어져 나왔다.
‘노엘이 당했다면, 나도 어찌하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겠지.’
이제 나를 죽이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참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오열했다.
“노엘은? 노엘은 어떻게 했어. 노엘을 돌려줘! 돌려 달란 말이야! 이 나쁜 괴물아!”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운 나는 괴물의 손을 주먹으로 퍽퍽 쳤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었다.
노엘이 잘못되었다는 황당한 사실에 영혼이 털려 나간 것만 같았다.
성가시게 하는 노엘만 없으면 탈출이 쉬울 것이라 여겼었는데, 막상 그렇게 되었다고 하니 온몸의 방어막이라도 깨진 듯이 막막하고 서러웠다.
“노엘이… 노엘이 죽었으면… 나는 어떡하라고! 내가 너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말과는 다르게 기력이 금방 떨어진 나는 괴물의 우락부락한 팔을 껴안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우는 소리를 냈다.
명백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현실감 제로에 대혼란까지 뒤섞여 환상의 궁합을 이루고 있었다. 이게 바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란 건가 보다.
이런 모습을 본 괴물은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저절로 괴물의 시선을 좇았고, 문 앞에 멀쩡히 서 있는 노엘을 보고야 말았다.
그는 어쩐지 얼굴이 붉어져선 헛기침을 연달아 하고 있었다.
흠흠. 흠.
놀란 내가 멍한 얼굴로 보고 있자 그가 눈을 마주치기 괴롭다는 듯 말했다.
“내가 죽었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니…….”
내가 정신 놓은 모습을 모두 지켜본 모양이었다.
노엘이 가까이 다가오자 괴물은 순순히 침대 밖으로 물러났다.
“나도… 기쁘다. 손… 찾았다. 그리고 노엘은 안 죽었다.”
인제 보니 검은 머리는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몸에 난 긴 털이었다.
네 발로 다니는 늑대 같은 외형의 괴물이었는데, 아깐 제대로 못 봤던 건지 눈빛이 무척 선해 보여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내가 얼이 빠져선 눈물도 뚝 그치고 괴물을 올려다보자 노엘이 말했다.
“정말 손만 찾아가겠다고 아주 사정하더라고…. 자기가 직접 와야 손이 붙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그렇다. 손… 찾았으니 이만 가겠다.”
말을 마친 검은 괴물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금세 방을 빠져나갔다.
황홀한 감격에 젖어 있던 노엘은 어쩐지 씰룩거리는 입꼬리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나를 집요하도록 빤히 응시했는데, 집요하다 못해 딱 붙어서 영원히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아주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