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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30화 (30/145)

30화.

철퇴도 결혼도 아닌 가위 엔딩이라니.

정원사가 내 쪽으로 무섭게 돌진했고, 그와 동시에 베키는 부서진 문으로 혼자 달아나 버렸다. 충격이었다.

‘아아…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다는 게 이렇게 힘든 거구나.’

베키를 원망하기보다 그저 슬픈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러면서도 담담해지는 이 기분은 내가 이제 모든 걸 내려놓았기 때문일까?

그런데 그렇게 가 버릴 줄 알았던 베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카락을 스르르 들어 올리는 게 나를 빼내어 주려 한 모양인데, 갑자기 문밖에서 하얀 거미줄이 뿜어 나와 베키를 덮치더니 끌고 갔다.

베키가 날 구해 주려 한 것에 감격할 틈도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본 건 코앞으로 다가온 정원사의 뾰족한 가윗날 끝이었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베키는 어떻게 된 건지. 무사한 걸까? 난 이제 저 주머니로 들어가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죽는 게 너무나 싫어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한 번이라도 더 발버둥 쳐 볼걸, 하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는데,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할 시간이 넉넉히 있다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이미 가위에 썰리고도 남을 시간일 텐데.

‘나… 아직 안 죽었나? 죽은 건가? 죽을 때 아픈 느낌은 원래 없는 거야? 그럼 지금 정원사의 주머니 속에 있는 걸까.’

눈물로 촉촉해진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정원사의 가위 끝이 머물러 있었다.

한 번만 더 폈다가 접으면 내 목이 떨어질 예정이었을 텐데.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가위가 멈춰 있었다. 하지만 부들부들 떨림이 있는 걸로 보아 시간이 정지한 건 아닌 모양이다.

무언가의 힘으로 인해 잠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나 보다.

[리사, 어서 피해.]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서 처음 들었던 의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꼬마 노엘도 아니었고.

바로 꼬마 리사의 목소리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꼬마 리사가 정원사의 무릎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녀의 힘인지 마법인지 덕분에 정원사가 꼼짝도 못 하는 듯했다.

“너… 네가 어떻게 여기에…?”

[이 힘은 오래 쓰지 못해. 그러니 어서 피해…….]

어딘가 힘겨워 보이는 얼굴. 여전히 눈 밑에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일단 가위의 사정거리에서 빠져나왔다.

[살아서 베키를 구해 줘.]

“베키를 구해 달라고?”

역시 베키는 위험에 처한 게 분명했다.

[꼭 좀 부탁할게. 적어도 내일까진 꼭 구해 줘.]

정원사의 가위가 다시 조금씩 벌어지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반드시 구할게! 나한테 쌀쌀맞게 굴긴 해도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아.”

[베키는… 지금은 상심이 깊어서 그래.]

문이 부서진 방을 나서기 전, 꼬마 리사와 눈이 마주쳤다.

[베키를 잘 부탁할게. 너라면 괜찮을 거야.]

꼬마 리사는 내게 씁쓸한 미소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힘에서 풀려난 정원사가 정면으로 벽을 들이받았고, 그 주변이 쩌저적 금 가며 갈라졌다.

나는 정원사가 다시 재정비하기 전에 빠르게 도망쳐 나왔다.

전력으로 달려 계단까지 도달한 나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두세 칸씩 뛰어올랐다.

헉, 헉.

숨을 헐떡이면서 마구 뛰다가 6층까지 올라와서야 이제 좀 쉬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계단에 풀썩 주저앉아 잠시 숨 고르기를 했고, 꼬마 리사의 말을 떠올렸다.

‘베키는 대체 어디로 잡혀간 걸까.’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다만 내 발목에는 액세서리처럼 아직도 검은 손이 붙어 있었다. 축축하고 끈적한 피부의 감촉이 무척 꺼림칙했다.

‘이미 시간도 깊은 밤이 된 거 같은데……. 어쩌지.’

어쩌긴. 일단 6층에 온 이상 노엘의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무사해야 베키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겨우 걸어 다닐 정도의 숨만 고르고 서둘러 노엘의 방에 도착했는데.

오……?

아무도 없는 걸 보니 아직 노엘도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살았다…….’

하지만 내 발목을 보이면 분명 나갔다 왔다는 걸 들킬 것이고…….

내 원피스들은 모두 발목이 보이는 길이였으니 어떻게든 감추어야만 했다.

츠스스스.

밖에서 리마의 소리가 강렬하게도 들려왔다.

그렇다면 노엘도 같이 돌아오고 있는 거겠지.

나는 얼른 침대로 뛰어 들어가 이불을 덮고 앉았다.

이윽고 밖에서 리마와 헤어진 노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를 보자마자 환해지는 그의 안색에 어쩐지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리사.”

“어서 와! 노엘. 많이 늦었네?”

나는 해맑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미안해. 말한 것보다도 너무 늦었지? 예상보다 훨씬 일이 많았어.”

“무슨 일인진 아직 모르겠지만, 고생 많았어. 미안해할 필요 없으니 어서 씻고 자자.”

노엘은 순순히 무거운 몸을 이끌고 씻으러 들어갔다.

휴…….

조금만 더 늦었어도 들키기 딱 좋았겠다.

오늘은 일이 좀 꼬이긴 했어도 여러모로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꼬마 리사한테 목숨을 빚지게 될 줄이야. 정말 미스터리인 일이다.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급속도로 피곤해진 나는 이불 속으로 미끄러지듯 누웠다.

한쪽 발목에는 여전히 기분 나쁜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내일은 돼야 다시 뗄 시도를 할 수 있었다.

베키를 어떻게 구해 주란 건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날이 밝는 대로 열심히 찾아봐야겠다.

어쩌면 퀘스트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게 퀘스트인지 아닌지도 헷갈리게 하는 게임은 또 처음이다.

‘자유도가 높아도 너무 높단 말이야.’

“리사, 보고 싶어서 정말 힘들었어. 떨어져 있는데도 계속 네 생각만 나더라.”

뽀송뽀송해진 노엘이 어느샌가 내 옆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따듯한 안정감에 어쩐지 놀라웠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쁘게 느껴졌다.

‘진짜 정들었나 봐. 이렇게 포근해도 되는 건가.’

이 다정한 체온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저 옆에만 있어도 전해지는 온기였지만, 그는 기어코 내게 조금의 틈도 없이 밀착해 왔다.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내 어깨로 파고든 그의 입술이 정체되었다가 내 목선을 따라 스쳐 올라왔다. 그러고는 내 입술을 품고 한동안 머물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향기로운 숨결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생명수라도 되는 것처럼 당연하게 받아 마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된 기분이었는데, 거짓말처럼 싹 씻겨 나간 것 같았다.

이윽고 내 얼굴에서 떨어진 노엘이 제 아랫입술을 한 번 훑더니 눈을 빛냈다.

“리사, 온 우주에 너와 나만 존재하는 기분이야. 네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별처럼 빛나서 금방 찾을 수 있겠어.”

딱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가슴이 훈훈했었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

노엘은 무슨 영감이라도 떠오른 듯, 갑자기 몸을 일으켜 종이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금방 뚝딱! 그려내선 내게 보여 주었는데, 검정 배경에 작고 하얀 동그라미 하나가 전부였다.

추상화인가. 심오한 의미라도 있는 건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이것 봐 봐. 너와 나를 그려 봤어. 이 유일한 별이 바로 너야.”

놀랍게도 정말 우주에 별 하나인 그림이었다.

“그럼 노엘 넌 어디 있어? 너와 나를 그린 거라며.”

“나는 여기 있잖아. 널 둘러싼 우주 그 자체인 거지.”

그는 검정 배경이 자신이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그게 뭐야.”

무섭잖아.

“그럼 넌 내 안에 완전히 갇힌 거네?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겠다. 어딜 가든 내가 있으니까.”

역시 그건 너무 무서운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설렘은 또 뭔지.

이쯤 되니 내 취향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나는 노엘이 그린 하얀 동그라미 옆에 별을 하나 더 그려 넣었다.

“아니, 이게 너야. 음, 검은 배경은 너무 어둡기도 하고. 뭔가 아무 존재도 아닌 것 같잖아. 게다가 별이 하나니까 외로워 보여.”

그리고 그 옆에 두 개의 별을 더 그려 넣었다.

“이건 리마랑 베키 별이야!”

그림을 받아 든 노엘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별들을 응시했다.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건지 한참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였다.

***

잠이 오지 않았던 노엘은 혼자 일어나 다시 별 그림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자기가 그렸던 별 하나만 남기고 다 지워 버렸다.

‘이건 우리 둘만의 그림이니까 리마와 베키는 필요 없어.’

원상태로 돌아간 그림을 보고 흡족해하며 별 하나를 더 그려 넣었다.

리사의 별 옆에 아주 딱 붙은 별 하나가 생겨 있었다.

‘이렇게 날 붙여 놓으면 되겠다. 네가 외롭지 않게.’

그렇게 하나가 된 눈사람 모양의 별을 보며 그는 매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

깊은 잠이 들어 꿈도 깊은 꿈을 꾸게 되었나 보다.

눈을 뜨니 꼬마 노엘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꿈이라고 더욱 확신했다.

[리사, 여기까지 잘 따라와 줘서 정말 고마웠어.]

나는 꼬마 노엘의 눈높이를 맞춰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최근 퀘스트의 내용을 떠올리니 감정이 이입돼서 실연당한 꼬마 노엘에게 무슨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아이의 표정은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고맙긴.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응? 뭐가?]

“그러니까 그… 네 마음 말이야.”

[…….]

‘괜히 상처만 더 후벼 파 버린 건가? 괜히 말했나…!’

이러다 또 무서운 장면이 연출될까 봐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꼬마 노엘은 눈매를 부드럽게 휘더니 오히려 따듯한 눈웃음을 지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내 마음을 다 걱정해 주고. 너라서 참 다행이야.]

어쩐지 분위기도 훈훈한 것이 일단 꿈속에서 쫓길 일은 다행히 없을 것 같았다.

“괜찮아질 거야.”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아서 잘할 거니까.]

“그, 그렇겠지. 그런데 이번엔 무슨 일이야? 이렇게 꿈에서 만난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여유로운 모습인데.

[네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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