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그제야 나는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해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오늘도 잘 살아남았다…….’
아, 이제 오늘이 아니겠구나.
벌써 새벽의 중간쯤 되었을 것이다. 안도한 나머지 정신이 말짱해져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었지만, 제일 큰 건 역시 커튼 뒤에서의…….
그 감촉이 지금까지도 생생해 잊히지 않았다.
‘못 산다. 못 살아.’
그나저나 퀘스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실상 감금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으니.
온종일 노엘과 껌딱지처럼 붙어 있게 생겼다.
이러다가 결혼하고 애 낳는 건 시간문제가 아닐까? 아니지, 결혼보다 애 낳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노엘의 계략에 완전히 말려든 걸 수도.
‘뭔가…… 핑계가 필요해. 아주 그럴듯한 핑계가.’
내가 퀘스트 하러 갈 시간을 벌 핑계가 필요했다.
문득 전구에 빛이라도 들어온 듯 번쩍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당시에는 별생각 없었는데, 내일 아침 놀러 오겠다는 리마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리마라면 날 도와주지 않을까?’
좀 더 상세한 핑계는 머리를 더 굴려 봐야겠지만, 일단 리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
하도 늦게 잠든 탓인지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깨고 말았다.
눈을 뜨고 시계를 보자마자 경악해선 벌떡 일어났다.
아침에 리마가 온다고 했었는데 점심까지 자다니.
‘마, 망한 건가? 리마! 리마는? 벌써 간 건가?’
방 안에는 리마도 없고 노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허둥지둥 침대를 뛰쳐나와 방문을 벌컥 열었다.
“리사, 잘 잤어? 정말 많이 피곤했나 봐.”
“누나, 안녕! 그렇지 않아도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
노엘과 리마가 복도의 작은 테이블에 앉아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찻잔을 들지 못하는 리마는 혀를 날름거리며 강아지처럼 차를 홀짝였다.
이런 어둠 속의 티타임이라니. 빛이라고는 테이블 가운데의 작은 초 하나가 전부였다.
굉장히 기이한 광경이었지만, 둘이 나란히 앉아 있으니 왠지 이상하게도 마음이 푹 놓였다.
“리마가 나를 기다렸다니….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
새삼 설렜다. 제발 나만 데리고 어딘가로 좀 빠져나가 주었으면!
“음… 아니, 노엘한테! 오늘 하루 내가 노엘 좀 빌릴 수 있을까?”
“후…….”
리마의 말과 함께 노엘은 몹시 싫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내색은 안 했지만 신나서 날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와 떨어지게 되어 좋아하는 티는 내선 안 된다. 그랬다간 저 노엘이 귀신같이 내 속셈을 알아채겠지. 또 도망가려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다.
나는 눈꼬리를 푹 가라앉히며 최대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겠네. 근데 무슨 일이길래?”
“누나, 미안하지만 이유는 묻지 말아 줘. 얘기하려면 길어지거든. 정기적으로 관찰하는 문이 있는데 매주 우리 둘이 같이 확인했었어.”
리마는 이유를 묻지 말아 달라면서도 무엇 때문인지 얘기해 주었다.
“그런데 자꾸 노엘이 나더러 혼자 가라는 거 있지. 그래서 나 지금 너무 속상해서 하소연하던 중이었어.”
“그, 그랬구나.”
“노엘은 누나를 혼자 두고 가는 게 싫어서 그런 거 같은데. 그렇다고 누나를 데려가는 것도 원치 않아 하는걸.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
리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팔을 양쪽으로 쳐들었다.
나는 리마가 저렇게 까불다가 노엘한테 한 대 맞을까 봐 걱정되었다.
“노엘, 나는 괜찮으니 리마와 같이 다녀와. 저렇게나 속상해하잖아.”
“…….”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이던 노엘은 내 뇌 속을 발가벗길 듯이 쳐다보았다.
그저 바라만 본 건데도 그 모습에 급속히 작아진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맞아. 나는 혼자 가기 무섭단 말이야. 그러니 노엘이 꼭 필요해.”
잘한다. 우리 리마! 자랑스러운 내 동생!
“그래, 노엘. 리마랑 어서 다녀와. 나는 방에서 한숨 더 자고 있을게.”
“…….”
노엘이 얼굴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미 내 의중을 파악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 안 되는데…….’
그러던 중 마음을 잡았는지 노엘이 입을 열었다.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나는 거짓 약속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이야. 절대 나가지 않아. 나도 혼자 나가면 무서운걸!”
하며 오들오들 떠는 시늉을 해 보였다.
어차피 노엘이 오기 전에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거짓말이지만 들키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 좋은 기회를 절대 놓칠 수는 없었다.
“알았어. 믿을게.”
“응! 근데 언제쯤 돌아오는 거야? 리마 말로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일이란 느낌이 들어서…….”
노엘이 언제 돌아오는지는 반드시 알아 두어야 했다.
그래야 노엘보다 먼저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문이 하나가 아니라서 시간이 꽤 걸려. 밤이 되어서야 올지도 몰라.”
노엘은 걱정 반 의심 반 섞인 우려의 표정을 지었다.
내 감정이 이입되어서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근데 무슨 문이길래 그렇게 정기적으로 살펴보는 거야?”
“그건… 다녀와서 얘기해 줄게. 빨리 돌아오려면 지금 떠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렇구나. 알았어. 나는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
찻잔을 내려놓은 노엘은 곧장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으앗……. 리마도 보는 데서…!’
리마는 이미 다 봐 놓고 부끄러운지 더듬이를 구부리며 크게 뜬 눈을 가리는 척했다.
얼굴은 시뻘게져선…….
“노엘. 리마도 있는데 이런 건 주의해야지.”
그저 내가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일 뿐. 정말 말 그대로 주의해 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리마도 보고 배우는 게 있어야 언젠가 연애를 시작해도 잘할 거 아니야.”
리마가 연애를……?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별장에 다른 그리마도 있는 걸까? 아니. 상상하지 말자.
“그래. 그렇기도 하네….”
“그리고 겨우 이 정도로 그러지 말아 줘. 앞으로 어떡하려고 그래.”
“…….”
내 말이. 앞으로 대체 너랑 어떻게 지내야 하는 걸까.
내 심장의 안위는 온전히 노엘에게 달려 있다.
“그럼 다녀올게. 부디 안전히… 제발 안전하게만 있어 줘.”
“응, 알았어. 너도 몸조심해.”
뭔가 남편을 출근 보내는 아내의 그림이 그려진다.
“누나! 나도 있어.”
“그래그래. 리마도 조심히 잘 다녀와!”
“응! 이따 봐. 누나.”
츠스스스스스.
그렇게 노엘과 리마를 무사히 보내고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멀어진 그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바로 뛰쳐나왔다.
‘서둘러야 해.’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생기긴 했지만, 퀘스트가 연속으로 나올 수도 있으니 대비해야 했다.
***
후다닥 빠른 걸음으로 어둠을 뚫다 보니, 어느새 실험실 아이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내 귀여운 도끼가 아직도 나무 장식장에 박혀 있었고, 나는 간신히 손을 뻗어 도끼를 다시 챙겼다.
‘뭐라도 손에 있어야 안심이 될 거 같아.’
그런데 괜히 짐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붉은 보석을 찾으러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일단… 베키의 실험실은 또 살펴볼 필요는 없을 테니 다른 방향으로 가 볼까?’
그러던 중 실험실 아이들의 숙소 깊은 곳까지 들어왔고, 개인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인용 침실로 된 방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 한 곳에서 붉은 보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1인실이긴 하지만 좁지는 않아서 쾌적한 느낌이었다.
침대 위의 붉은 보석을 쥐어 들자 환한 불빛이 나를 맞이했다.
침대의 주인은 알고 보니 꼬마 리사였다.
리사는 제 옆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토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간은 베키의 실험일에서 조금 더 지난 후인 듯했다.
-토드, 나는 아직도 베키의 죽음이 믿기지 않아……. 괴로워. 견딜 수가 없어.-
꼬마 리사의 눈 밑은 전보다 더 어두웠다.
‘베키의 죽음 이후 마음고생을 많이 한 탓이겠지.’
토드도 전보다는 좀 더 말라 보였다. 그는 꼬마 리사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의지가 되어 주었다.
-베키는…… 좋은 곳에 갔을 거야. 여기보다도 훨씬 더 좋은 곳으로. 그곳엔 행복만이 넘쳐 날 거야.-
-그런 곳이… 정말 있을까?-
-그럼, 물론이고말고!-
-네 말대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 베키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친구니까.-
-그곳에서 베키는 우릴 다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 힘내야 해. 베키가 아파하는 네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슬퍼하겠어.-
-그래, 그렇겠구나. 그래야지…. 나도 빨리 기운 차리고 싶어.-
아무리 봐도 토드는 참 괜찮은 녀석인 듯했다.
꼬마 리사가 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엔 저 녀석이 꼭 포함돼 있을 것 같다.
나는 마음이 따듯해져선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문이 열리고 꼬마 노엘이 들어왔다.
꼬마 노엘도 그사이 마음을 잘 추스른 건지 이 둘보다는 좀 더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리사, 오늘은 좀 어때? 오늘도 아픈 거야?-
말을 하며 들어온 꼬마 노엘은 토드를 보고 한 번 놀랐고.
토드와 꼬마 리사가 맞잡은 손을 보고 또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아니, 놀랐다기보단 분노를 터뜨리기 직전의 사람으로 돌변했다.
-노, 노엘, 나는 괜찮아. 어제보단 많이 좋아졌어.-
눈치를 살살 살피던 꼬마 리사는 토드에게서 손을 슬며시 빼내었다.
반면,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토드는 꼬마 노엘에게 도전적인 시선을 보냈다.
-토드, 네가 왜 리사의 손을 잡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