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참으로 대단한 하루였다.
물론 아직 오늘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나와 노엘은 손을 깍지 끼고 방에 돌아가고 있었다.
츠스스스.
익숙함에 이제는 친근함을 더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분명 리마 소린데. 근처에 있는 건가?’
노엘도 소리를 들었는지 걸음을 멈추었는데 표정이 어쩐지 험악했다.
“누나?”
소리를 따라 뒤를 돌아보니 천장과 벽이 이어지는 모서리에 리마가 달라붙어 있었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외관이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괜히 반가웠다.
츠스스스. 츠스.
“리마! 그동안 어디 있었어? 보이지 않아 걱정했다고.”
“그게… 사정이 좀 있었어. 누나.”
환한 얼굴로 인사하는 나와는 달리, 노엘은 곧장 머리채라도 쥐어 잡을 듯한 살벌한 분위기였다.
“리마, 너 이 녀석…… 이리 안 와?”
“노, 노엘? 무섭게 왜 그래.”
둘이 정말 싸우기라도 한 건가?
리마의 태도는 죄지은 것처럼 쪼그라든 모양새인데, 한 대 얻어맞기 직전인 녀석 같았다.
“살려 줘. 누나!”
노엘이 리마 쪽으로 묵직한 한 발을 내딛자 리마가 재빨리 내 뒤로 왔다.
졸지에 내가 리마를 보호하고 있는 것 같은 위치가 되었다.
물론 리마의 몸집 크기상 내 뒤에 있는다고 다 가려질 리는 없었다.
내가 잡아 뜯기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둘이 사이좋았잖아.”
“나 너무 무서워. 누나, 노엘이 내 다리를 전부 압수하겠대.”
리마는 기립하더니 위쪽 다리들로 끔찍하다며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동그란 눈을 그렁그렁하며 찡그린 것이 무척 불쌍해 보였다.
“……노엘. 리마한테 왜 그러는 거야? 다리를 모두 압수하면 리마는 어떻게 다니라고….”
다리 없는 모습이 더 징그러우면 난 어떡하라고!
나는 리마를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노엘을 쳐다봤지만, 열받은 그의 얼굴을 보니 사실 나도 무서워 주춤하게 된다.
“……그런 게 있어.”
“이유를 말해 줄 수 없는 거야?”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나는 알면 안 되는 거야?
답답함에 약이 오른 나는 더 적극적으로 리마를 감쌌다.
이미 내 뒤로 딱 붙어 있는 리마였지만, 나도 노엘에게서 떨어져 리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랬더니 확실한 2대 1 구도가 되었다.
노엘은 아까보단 조금 더 차분해진 듯했지만 표정도 함께 가라앉아서 더 서늘해진 분위기였다.
“리사. 그럴 만한 사정이.”
노엘이 말하는데 리마가 갑자기 불쑥 끼어들었다.
“내가 누나를 공격할 때 노엘이 보고 있었어! 그래서 날 혼내려고 그러는 거야.”
엑?
그때 노엘이 있었다고?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입이 떡 벌어졌다.
노엘은 리마를 더욱 죽일 듯이 노려보았고 리마의 말이 사실이라는 무언의 증명을 해 보였다.
리마는 내가 자기를 살려 줄 수 있는 희망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 무얼 보고 그러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저기, 노엘. 그때 리마는 결국 나를 놓아주었고 사과까지 했어. 나는 리마를 용서했고.”
“…….”
“그러니 너도 이번만큼은 리마를 용서해 주면 안 될까? 그러면 리마도 다신 그러지 않을 거야.”
“…….”
리마는 축 처진 더듬이를 매만지며 몸을 수그렸다.
“맞아. 나는 다시는 누나를 공격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그러니 용서해 줘.”
“하…….”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노엘은 여전히 리마를 갈기갈기 찢을 듯 쏘아보고 있었다.
어쩌면 마음속에서 이미 노엘의 다리를 전부 해체했을지도 몰랐다.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모양인데.
내게 필살기가 하나 있었으니. 지금이 그걸 써먹을 땐가 보다.
“리마를 용서해 준다면 네가 세상에서 최고로 멋있어 보일 거 같아.”
일부러 최고라는 단어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러자 노엘의 입꼬리가 먼저 움찔거렸고 목덜미가 급격히 발그레해지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대한 대답을 끌어낼 수 있었다.
“……최… 최고. 알았어. 알았다고. 이번만이야. 리마, 두 번째는 절대 없을 거야.”
“우와! 고마워. 정말 고마워. 노엘. 나 진짜 잘할 거야!”
리마는 기뻐선 더듬이를 동그랗게 세우고 다리들을 활짝 펼쳤다.
“한 번 더 그러면 그땐 다리만으론 안 돼. 네 목숨을 내놔야 할 거야.”
“물론이지! 그땐 나라도 날 용서하지 못해!”
리마는 흥분해선 바닥부터 천장까지 360도 회전을 반복하며 날뛰었다.
얼마나 신이 났으면…….
‘어이쿠!’
그 와중에도 나는 내 몸에 리마의 다리가 닿을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널 잘도 이용해 먹었어. 나한테 용서받으려고.”
노엘은 회전하는 리마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찌 되었든 리마를 구했단 생각에 나는 뿌듯해졌다.
노엘도 분명 리마를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었다. 괜히 나 때문에 둘의 사이가 나빠진다면 그건 그거대로 슬플 것 같다.
“리마가 그래도 너와 화해하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온 거 아니겠어?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랬겠어.”
“리사.”
“응?”
“그렇게 당하고도 리마를 감싸는 거야? 네 그런 점이 참…….”
뭔데 또 뜸을 들이는 건지 모르겠다.
“말해.”
“아니야. 아무것도.”
그는 얼굴이 발그레해져선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갑자기 귀여워 보여서 더 이상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또 홀려서 새까맣게 잊은 게 분명하다.
어쨌든 노엘과 리마가 다시 잘 지내게 되어 다행이었다.
***
“누나! 난 그럼 간다. 내일 아침에 놀러 갈게.”
리마는 계속 회전하며 그대로 어디론가 가 버렸고, 나와 노엘은 무사히 방으로 귀환했다.
그런데 본래 연인과 데이트하고 나면 헤어지는 게 정상인데.
이렇게 또 같은 방으로 함께 들어오니……, 이건 마치 결혼 생활을 하는 신혼부부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직접 겪어 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게… 맞는 건가.’
방에 들어온 뒤부터 무언가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노엘이 태연한 것으로 보아 나만 느끼는 건가 보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노엘과 커튼 뒤에 숨었던 일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 같아 미간이 좁혀졌다.
‘후. 그래, 드디어 내가 미친 거지. 그런 대담한 짓을 벌이다니.’
‘그런데 첫 데이트부터 이렇게 완벽하고 강렬하면… 나중엔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은근히 그와의 다음 데이트가 기대되면서도 무서워졌다.
내가 그를 감당할 수 있을지 전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리사, 거기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씻고 나온 노엘이 탄탄한 상체를 드러낸 채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냈다.
허억.
‘나 또 왜 두근거리는 건데.’
나는 노엘의 속살을 보자마자 재빠르게 눈을 돌렸다. 이미 다 봤지만.
위험하다. 위험해.
“노엘, 내 방을 따로 만들어 주지 않을래? 아니, 내가 만들어도 되니까! 우리… 각방 쓰는 게 좋을 거 같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게 횡설수설 나열하고 있었지만. 의미만 정확히 전달되었다면 상관없었다.
“각방이라니…. 리사, 무언가 불만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보통 연인들은 데이트하고 나면 서로의 집으로 각자 돌아가잖아. 우리도 아직 결혼한 게 아니고 하니…….”
하하.
그냥 말해 버리고 싶다. 심장이 두근대서 미칠 지경이라고. 이상해진 나를, 나도 더는 견딜 자신이 없다고.
“리사, 그런 보통 연인들에 우릴 끼워서 맞추지 말자.”
“으, 응?”
“우린 우리니까. 우리만 좋으면 된 거 아닐까?”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그의 싱그러운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나는 혹시나 코피라도 터질까 봐 콧구멍을 두 손가락으로 막아 버렸다.
당연히 고개는 돌린 후였다.
“그, 그래.”
여기서 더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각방 쓰길 순순히 포기하고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노엘과 살짝 닿기만 해도 화르르 타오를 것 같아 최대한 침대 바깥쪽으로 누웠다.
“그럼, 잘 자. 노엘, 오늘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어. 고마웠고.”
나는 노엘에게서 등을 돌리며 그래도 꾸역꾸역 인사를 전했다.
할 말은 다 하면서도 지금은 영 그의 얼굴을 볼 여유가 없었다.
커튼 뒤의 비밀스러운 사건이 아직도 내 머리를 맴돌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밤새 무한 반복 재생될 예정인 듯싶은데. 오늘 잠은 다 잤다고 봐야 한다.
“리사, 그런 말은 내 눈을 마주 보고 얘기해 줘.”
내 위로 노엘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고, 그가 엎드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아…….
곤란하다.
얼굴은 간신히 몸을 돌려 그를 향해 있었지만, 눈알은 데굴데굴 사방으로 굴러다녔다.
“다, 다시 한번 더 말해 달란 소리야?”
“응.”
내가 아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니 똑같이 말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빨리 말을 해 줘야 이 상황도 빨리 끝나겠지?
“오늘 데이트 준비하느라 정말 수고했어. 내겐 최고의 하루였어.”
이 단어만 들어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그야말로 만능 단어다.
그리고 예상대로 노엘은 한발 물러났다.
“……큰일이야.”
“응? 뭐, 뭐가?”
“더는 못 참겠어.”
“응……?”
아니, 내가 성급하게 판단했다. 한발 물러난 줄 알았다.
노엘의 눈이 나른하게 풀리기 전까진.
‘와악! 안 돼! 못 참으면 어쩔 건데!’
뭔지 자세히는 모르겠고, 내가 그를 오해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게 뭐든 무조건 참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더 이상 그를 감당할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자야겠어. 너무 피곤하다. 면역력이 떨어진 것 같아. 자, 어서 자자. 노엘.”
“피곤해…? 면역력? 근데 내가 뭘 못 참겠는지는 물어봐 주지 않는 거야?”
“응.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자자, 어서.”
나는 신속히 노엘을 다시 눕히려 팔을 잡아당겼고, 그도 순순히 베개에 머리를 붙였다.
연신 하품하는 시늉을 하며 피곤한 연기를 선보였더니 그도 포기한 모양이다.
그렇게 노엘은 그 뒤로도 한참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천장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