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자, 잘 자. 노엘.”
분명 무서웠는데 또 이런다.
들떴다니…. 재밌게 해 준다니…….
분명 벌이라며 괴로울 거라고 말해 놓고선.
‘아, 진짜 모르겠다. 알 수 없는 녀석이야. 이런 녀석은 처음이라고!’
이렇게 내 마음을 얼렸다가 녹였다가 할 수 있는 건 이 녀석밖에 없을 것이다.
내 환상 속에만 존재하던 취향의 남자는 막상 연애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나 보다.
***
눈을 떴는데 피곤이 몰려들었다. 잠도 겨우겨우 들었던 기억이 있다.
반 몽롱한 상태로 몸을 일으키니 노엘이 씻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나 진짜…… 데이트하는 거 맞아? 저 노엘이랑 사귀는 거야? 연인이라고? 이런 벌은 난생처음이야.’
눈 밑이 쏙 들어가 초췌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 머리는 하도 뒤척여 산발이 되었다.
다물어지지 않는 턱까지 더해 이 별장의 여느 귀신 못지않게 무서운 모습일 것이었다.
‘그럼 안 되지. 그래도 첫 데이트인데.’
나는 벌떡 일어나서 거울을 보았다.
노엘의 빗을 빌려 머리를 단정히 빗고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눈곱을 떼었다.
간단한 조치만 취했는데도 벌써 사람 같은 모습이 되었다.
‘아니……. 근데 나 왜 이러는 건데.’
왜 그 녀석한테 잘 보이려는 거지? 첫 데이트가 뭐 어쨌다고?
그래, 그저 추한 몰골을 보이는 수치를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일 뿐!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고 있는데 뒤에서 노엘이 머리를 털며 등장했다.
“리사, 네 옷을 준비해 두었어. 지금 있는 곳에서 오른쪽을 봐.”
“옷?”
노엘의 말을 따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검은 원피스가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도 이 옷만 입어서 너덜너덜해진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 검은 원피스. 귀여운 것이 꽤 마음에 든다.
노엘의 취향일까? 아니면 내 취향일까.
어쨌거나 그가 직접 준비한 거라니 왠지 기분이 또 붕붕 들뜨고 말았다.
‘뭐야. 왜 또 설레는 건데.’
***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와 노엘은 제법 한 쌍의 연인 같은 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잘 어울릴 줄 알았지만… 정말 잘 어울린다. 리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설마 그 세상이 이 별장이 다는 아니겠지? 라는 무서운 의심과 함께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래도 선물에 대한 고마움은 표시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이 원피스 정말 마음에 들어. 고마워.”
내 반응이 예상외인지 노엘은 무척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이내 살짝 상기된 그가 내 손에 다시 깍지를 끼며 마주 잡았다.
“손잡고 가도 돼? 네가 싫으면 잡지 않아도 돼.”
이미 잡아 놓고선……. 괴롭히겠다고 하더니 배려해 주는 거야?
나는 오히려 마음이 약해져 그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싫지 않아. 잡고 가자.”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노엘도 질려서 그만둘 날이 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잡은 물고기에 급격히 흥미를 잃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말이다.
내 취향인 남자가 그러면 실망이 클 것 같긴 하지만, 이렇게 데이트할 시간에 탈출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었다.
일단 오늘은 데이트하고 노엘의 마음을 좀 놓이게 해서 어떻게든 퀘스트를 다시 이어 가야 했다.
“그래서 우린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잡은 손을 물끄러미 보던 노엘은 헛기침하더니 다시 앞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제대로 음악을 들려주겠다고 했었지? 어제.”
“응. 그랬지.”
또 으스스한 음악을 들려주려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철퇴 엔딩 OST 뭐 그런 건 아니겠지.
“그래서 준비해 봤어. 조금만 더 가면 돼.”
“준비했다고? 그사이에? 어떻게…….”
준비할 시간이 도대체 어떻게 난 걸까.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틈이 난 적이 없었는데.
분명 나랑 계속 방에 있었는데 말이다.
“아침 일찍 준비했지. 정확히는 일어나서 씻기 전에. 너는 자고 있어서 몰랐을 거고.”
“그럴 수가……!”
그런 틈새를 노리다니. 생각보다도 훨씬 치밀한데.
‘나… 이런 남자랑… 괜찮은 걸까?’
“리사, 벌써 감동하면 네가 곤란해.”
“내가 곤란하다고? 어째서?”
“나중에 더 감동하면 어쩌려고 그래.”
‘뭐야…. 노엘……. 허세도 부릴 줄 아네.’
내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사귀기로 한 이후로 뭔가 좀 평온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표정도 목소리도 몸짓도 미묘하게 다른 느낌.
물론 특유의 여유로운 모습은 철퇴를 들고 쫓아올 때랑 여전히 똑같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철퇴를 방에 두고 나온 모양이었다.
자연스레 그의 허리로 내 눈길이 머물렀고, 적어도 오늘은 싸한 분위기가 돼도 철퇴 엔딩은 피하겠구나 싶었다.
그러니 마음이 절로 푹 놓였고 온전히 노엘에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노엘의 말대로 목적지까지 금방 다다랐다.
같은 층의 맨 끝에 있는 방이어서 계단을 오르내릴 필요도 없었다.
양쪽에 달린 고급스럽고 묵직한 문을 열자 생각보다도 넓은 공간이 나왔다.
공연장을 떠올리게 했는데 맨 앞에는 당연하다는 듯 검은 피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와. 여기 뭐야? 정말 멋진 공간이야.”
피아노의 근처엔 넓고 동그란 테이블이 떡하니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로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유혹하듯 존재감을 뽐냈다.
“여길 청소하느라 알프레드가 고생이 많았지…….”
“응? 알프레드……?”
어디선가 들어 봤던 것 같은 이름인데.
알프레드란 친구도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노엘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아, 아니야. 그런 게 있어.”
“그래…….”
“리사,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잖아. 이 별장에선 배가 고프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가끔은 먹어야 해.”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니 배가 고픈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해서 식욕이 없는 건 또 아니었다. 탐스러운 음식을 보니 입 안에 침이 절로 고였다.
“그렇구나. 뭔가 편리한 것 같기도 하네.”
삼시 세끼 챙겨 먹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으니, 나름 괜찮은 것 같았다.
이내 노엘이 테이블 앞으로 날 인도해 등받이가 긴 의자를 잡아당겨 주었다.
나는 묘한 설렘에 귀족 아가씨처럼 허리를 펴고 다소곳이 앉았다. 그 행동이 스스로 보기에 어색하기도 하고 어설프기도 했지만, 그냥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곧 나를 앉힌 노엘이 내 귓가에 간지러운 숨을 불어 넣었다.
“지금 네가 너무 귀여워 미치겠어. 그래서 내가 미쳐 죽게 된다면, 훗날 네가 묻힐 관에 나도 함께 넣어 줘.”
“아, 정말……!”
귀가 달아오른 나는 얼굴까지 벌게져선 그를 원망했다.
그런 나를 보며 수수하게 씩 웃는 그는 악마인 게 분명하다.
“식사는 먼저 하고 있어. 나는 어제 했던 말대로 음악을 제대로 들려줄 테니까.”
“뭐?”
노엘은 피아노 의자에 앉자마자 진지한 모습으로 돌변했다.
“음. 자작곡이야. 이 곡을 네게 바치고 싶었어.”
세상에나. 자작곡이란 말이야?
곡을 바치고 싶었다니…….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철퇴만 만지는 무식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작곡에 피아노 연주까지…….
순간 머리가 아찔해져선 어질어질했다.
내 취향인 녀석의 매력이 어디까지가 끝인 건지.
그렇지 않아도 짧은 시간 안에 매번 놀라움의 기록을 경신하는 녀석이었다.
노엘이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자 감미롭고도 묵직한 소리가 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어딘가 음울한 느낌을 주다가도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경쾌한 음이 심장을 흔들어 놓았다.
느리게 시작한 곡은 어느새 빨라져 나를 상상의 세계로 잡아끌었다.
사실 희망적이기보다는, 더욱더 깊고 어두운 절망의 나락으로 이끌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분 좋은 절망이라니. 이런 게 가능한 걸까.
이런 절망이라면 어디까지가 바닥인지 궁금해서라도 한번 다녀와 보고 싶은데, 일단 들어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
‘좋다……. 이런 곡.’
이미 음식은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화려한 음식보다도 더 맛있는 노엘의 연주에 내 마음을 전부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이 감정을 함께 공유하고 있을 그의 모습. 그 우아하게 잘난 모습에 다시 한번 심장이 두근거렸다.
***
노엘의 연주가 끝나고 나서야 우린 함께 식사했다.
연주에 몰입해선 포크를 들 새도 없었다. 어떤 맛있는 걸 먹어도 맛이 느껴질 리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테이블을 촘촘히 채운 음식을 보고 이걸 다 먹을 수는 있을까 싶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지금껏 배가 고프지 않았던 것처럼,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여유롭게 맛을 오래 음미할 수 있었다.
“노엘, 네 연주… 정말 최고였어. 너무 멋있어서 숨이 멎을 것 같았어. 다시 한번 네게 감사하고 싶어.”
나는 연주의 여운에서 아직도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노엘이 연주하는 황홀한 모습과 함께 그 음악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었다.
노엘은 역시 최고란 말이 듣기 좋았는지 나보다도 더 감격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네가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마음에 든 정도가 아니라니까.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또 듣고 싶어.”
진지하게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던 것 같다. 정말 예상치 못했던 행복.
이 남자는 날 행복하게 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날 꼬시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그의 완벽한 성공이자 승리였다.
“그래. 기회는 또 만들면 되지 뭐.”
다소 흥분해 있던 내게 갑자기 그가 손을 뻗어 왔다.
“응? 왜 그래?”
그의 손수건이 내 입가를 부드럽게 두드리고 스쳐 갔다.
칠칠치 못하게 음식이 입가에 묻었나 보다.
“왜 그러긴. 한 번이라도 더 닿고 싶어서 그러지. 그런데 지금 막 후회하는 중이야. 입으로 닦아 줄걸. 하고. 근데 그러면 네가 싫어하려나?”
‘그, 그런 말을……! 잘도 하네.’
듣기 미묘한 말을 하는데 표정은 또 몹시 건전하고 인자하다.
이쯤 되니 내 사고방식이 음흉한 게 아닌지 반성하고 돌아보게 되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느낀 게 맞는 것 같다.
철컥! 철컥철컥철컥.
……?!
식사를 마칠 때쯤이었다.
나와 노엘은 일제히 닫아 놓았던 문 쪽을 바라보았다.
불안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것을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