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안 할게.”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그녀를 휙 돌아보았다.
“정말……?”
“어차피 당분간은 네 목숨 따위 관심 밖이야. 그랬다간 노엘이 날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당분간’이라는 말이 무척 마음에 걸렸으나, 그 안에 이 별장을 탈출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내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어 버릴 거였으면 진작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그냥 풀어 줘. 어차피 네가 빙의자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의문의 목소리가 재촉하는 걸 들으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여전히 사기꾼 냄새가 나긴 했지만, 베키도 일단은 내 목숨엔 관심 두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래, 지금은 그거면 충분해.”
그렇게 나는 베키를 감고 있던 밧줄을 풀어 주었다.
밧줄을 털어낸 베키가 바로 성큼성큼 떠나려던 참이었다.
나는 왠지 아쉬워 그녀의 등에 대고 딱 몇 마디만 더 했다.
“앞머리 좀 뒤로 넘기고 다녀. 네 예쁜 얼굴이 아깝잖아. 왜 스스로 귀신처럼 하고 다니는 거야.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그러자 그녀가 움찔하며 멈추어 섰고, 나는 그녀가 열받아서 공격이라도 할까 봐 냉큼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와. 방금 살기가 느껴졌어.’
가슴을 쓸어내리며 침대로 기어들어 오니 노엘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흐악!
붉게 빛나는 눈과 마주친 나는 깜짝 놀라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작아졌다.
“노, 노엘……. 나 때문에 깬 거야?”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잠이 안 와서… 베키를 풀어 주고 왔어. 아, 그러니까 베키한테서 더 이상 나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들었어!”
“그래? 그랬구나. 잘했어. 리사.”
많이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평범한 반응이었다.
노엘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그 감촉은 내가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럼 이제 다시 잘까?”
이 기분 좋음을 안고 다시 잠자리에 들고 싶었는데 그가 허락해 주지 않았다.
“리사, 원래는 어젯밤에 하려고 한 얘기가 있어.”
“응? 무슨 얘긴데?”
아…….
이 녀석이 이렇게 뜸을 들이면 무섭다. 너무 무섭다.
또 무슨 놀라운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피할 수 없는 데자뷔가 느껴진다.
“내가 전에 그랬었잖아. 한 번 더 도망치면 그땐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아……. 응. 그랬었지.”
하.
그 얘기 왜 안 하나 했다. 어쩌면 이대로 어물쩍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역시나 그가 잊을 리 없었다.
“그러니 이번엔 그냥 넘어갈 수 없겠어.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긴 그렇잖아.”
……도망가고 싶다. 내게 또 무슨 시련을 주려고 이러는 걸까.
분명 어제만 해도 분위기 좋지 않았나, 우리?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두근두근.
심장의 고동이 귓가에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
제발 별일 아니길 염원했는데 예감이 썩 좋지 않다.
“네게 벌을 주려고 해. 이번에 내게서 도망친 벌.”
“벌……?”
“응. 고의는 아니었다고 했지만, 어쨌든 도망은 친 거잖아.”
벌이라니!
어린 시절 이후로 벌이란 걸 받아 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단어 자체도 무척 낯설다.
그래도 날 살려 둔 걸 보면 사형은 아니겠지.
나는 마른침을 꿀꺽 넘기며 그의 심판을 기다렸다.
제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벌이길 바라면서. 무엇보다도 아프지 않길 바라면서.
“우리 연애하자.”
……?
“예? 아니.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사귀자고. 나랑.”
믿기지 않았다. 갑자기 웬 법원에서 하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데, 내가 바보라도 된 것처럼 이해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그게 벌이라고?
“노엘,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
“네가 그랬잖아. 결혼 전에 사귀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그야 그랬었지. 그랬었는데…….”
어안이 벙벙해 더 이상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도 별 뜻 없이 말한 거긴 했다. 무엇보다 청혼한다는 말에 당황스러워서 그런 것이었는데, 진짜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게다가 그걸 노엘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네 의견을 반영해서 생각해 봤어. 나도 청혼은 조금 미룰 테니까 그건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물론, 이건 명백한 벌이야.”
대체 어딜 봐서 벌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나를 배려해서 그랬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세상에.
“나를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 그런데 명백한 벌이라니.”
나 지금 외계인과 대화하는 걸까.
아니면 내 의사소통 능력에 심각한 문제라도 생긴 건가?
“네가 심히 부담스러워하는 거 같아서 말이야. 일단은 네가 말하는 그 절차란 걸 밟아 볼까 해. 내 스타일엔 맞지 않지만, 네 스타일에 한번 맞춰 보려고.”
봐. 이상하잖아. 벌이라면서 왜 나한테 맞춰 주는 건데!
이 와중에 심장이 쿵쿵 간지럽게도 뛰었다. 얼굴은 울상일 텐데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려 했다. 어이없고 황당해서 그런 게 분명하다.
이렇게 다정하게 날 배려한 벌을 준다고 하니 무언가 달콤했다.
어쩌면 이 달콤함으로 충치가 생겨나지 않을까. 한번 생긴 충치는 무슨 치료를 해도 영원히 원상태로는 회복할 수 없는데 큰일이다.
“정말 그게 벌 맞아? 벌이란 건 뭔가 내게 불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바보같이 괜한 말을 해서 진짜 벌이라도 받을 셈인가 보다.
“벌 맞아.”
하지만 다행스러운 건지 노엘은 굳이 의심치 않는 단호한 얼굴이었다.
“벌이 맞다니?”
“너는 날 좋아하지 않으니까.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연애는… 괴롭지 않겠어?”
“…….”
순간 환영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환영 리사와는 결국 이어지지 않은 걸까? 그는 내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 발언이 내 가슴 한구석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런 슬픈 말을 그렇게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하다니.
“그러니까 네겐 벌이 맞지?”
“……그러네. 응. 벌이 맞네.”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니라고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나도 아직 내 마음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노엘의 사정이 안쓰럽고 안타까워서 그를 동정하는 건지.
그가 너무나 매력적이고 내 취향이라 이미 스며들어 반해 버린 건지.
나도 모르게 그사이 정이라도 들어 버린 건지.
그저 무서워서 상황에 맞춰 가며 살살 기는 건지.
복합적인 마음이 들어 그야말로 아수라장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지, 이 벌이 아주 싫지 않은 건 확실했다.
“좋아. 그럼 그에 대한 대답은?”
“응? 대답? 벌인데… 선택권도 주는 거야?”
“리사, 선택권이라니. 이미 답은 정해져 있지만, 그래도 대답은 해 줘야 나도 확실하게 일을 마무리 짓지.”
마주한 그의 벌집 같은 눈동자에 내가 갇힌 것처럼 비쳤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흘러넘쳐서 정말 밖으로 꿀이 샐 것만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가 시려서 충치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래, 사귀자. 노엘, 오늘부터 사귀는 거야. 우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로봇처럼 무심하게 대답해 버렸다.
어차피 지금 내게 선택권은 없었으니까.
역시 노엘의 경고는 함부로 넘길 것이 못 되었다. 기어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날 이끌었으니.
“좋네. 이 느낌. 사귄다는 거 말이야……. 괜찮은 것 같아. 벌써 뭔가 여기가 뜨거워진 느낌이 들어.”
노엘이 제 가슴에 손을 살포시 얹는데 어쩐지 순수한 모습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먹이를 코앞에 둔 맹수처럼 황홀히 웃었다.
‘내가 스테이크 썰기 직전에 분명 저런 표정이었지.’
그러니 나도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노엘이 내 손을 슬며시 잡았다.
잡은 손이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깍지를 껴 손바닥끼리 꽉 붙어 버렸다.
생각보다도 단단하고 부드러운 손의 감촉에 얼굴이 화하면서도 왠지 모를 안정감이 들었다.
“리사, 이제 날 배신하면 안 돼. 알지?”
역시 로맨스만 주는 녀석은 아니라는 듯 다시금 잊었던 소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 노엘은 노엘이었지. 역시 제일 무서운 건 이 녀석이야. 어쩌면 이게 진짜 벌일 수도 있겠어.’
앞으로 퀘스트는 잘해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고작 사귀기로 한 것뿐이라 생각했는데 어쩜 내 생각이 단단히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그의 손아귀에 확 사로잡힌 느낌이라니. 사로잡히다 못해 갇혀 버린 것 같다.
“리사, 대답해야지. 설마 배신할 의향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배신이라니. 이제 우린 사귀는 사이잖아. 절대 널 배신하지 않아.”
정신 똑바로 차리자.
생각해 보면 단순하다. 퀘스트를 다 하고 별장을 탈출하면 그만이었다.
그때까지만이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어떻게든 버텨 보자.
“그래, 아주 좋은 대답이야. 아 참, 이것도 알아 둬야 해. 우리 연애의 결말에 헤어짐은 없어. 이다음은 반드시 결혼이야.”
“으, 응. 알았어!”
대답하고 있지만 이미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선 각종 자연재해가 절망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노엘은 몹시 만족했는지 다시 꿀이 뚝뚝 흐르는 눈웃음을 짜냈다. 저렇게 좋아하는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럼 다시 푹 자고! 일어나면 데이트하자.”
“데, 데이트?”
공포 게임에서, 그것도 이런 음산한 별장에서 데이트를 한다고?
그게 가능해?
“응. 우리의 첫 데이트. 그러니 어서 푹 자. 즐거운 하루가 될 거야.”
노엘은 가볍게 하품하고는 설레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깍지를 낀 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대로 잠들 셈인지.
손만 잡고 잔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건가.
“기대해. 리사…. 재밌게 해 줄게. 솔직히 지금 너무 들떠서 잠이 잘 오지 않을 거 같아. 그래도 자야 해…….”
종알종알 흥분해서 중얼거리던 노엘은 잠을 못 잘 것 같다면서도 피곤했는지 금세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