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나니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풀려 좋길 잠시, 또다시 노엘과 같은 침대에 오르자 긴장이 되었다.
괜히 어색해진 나는 침대를 빠져나와 방구석에 있는 장식장 속을 구경하는 시늉을 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식품이 많았는데, 곧 노엘이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음악 들을래?”
“음악?”
정말 여기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건가?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노엘의 싱그러운 눈웃음을 튕겨냈다.
“이 오르골이 연주해 줄 거야.”
노엘이 장식장 속의 사각 오르골 상자를 열자 남녀가 함께 춤을 추는 조각이 돌아가며 소리를 내었다.
띠리링 띵. 팅팅. 띵. 뚜루루루룽. 띵.
구슬프면서도 어딘가 서늘한 느낌이 드는 멜로디라니.
딱 공포 영화의 새드 엔딩에 흘러나올 법한 연주였다.
“…….”
나는 조용히 오르골 상자의 뚜껑을 덮은 후 장식장의 문도 다시 잘 닫아 놓았다.
“마음에 안 드나 보네. 그럼 다음엔 더 제대로 된 음악을 들려줄게.”
“응, 제발……. 꼭. 기대할게. 노엘.”
오싹해진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베개를 등에 받치고 앉았다.
아직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아까 그 섬뜩한 오르골의 멜로디가 짧으면서도 너무 강력했다.
얼마 듣지도 않았는데 그 부분의 음이 자꾸만 반복해서 떠올랐다.
‘띵. 뚜루루루룽. 띵,’
오르골 자체는 참 화려하고 예쁘게 생겼는데 말이다.
이불을 쿠션 삼아 가득 껴안고 있는데, 노엘이 아까 그 자리에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알아챈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저 오르골 소리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왜, 왜?”
무섭게 왜 그러고 있어!
“겨우 저런 게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더 무서운 게 여기 있는데.”
“더 무서운 거라니.”
그러더니 나른한 걸음으로 침대로 와 내 발밑에서 엎드리는 것이었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삭 거두고서.
“서운해지려 해. 그러니까 나보다 무서운 거 만들지 마.”
……?
그러고는 사냥감을 몰아넣는 맹수처럼 슬금슬금 다가왔다.
“무조건 나만 바라보고 나만 생각해 줘. 응? 가장 무서운 것도, 가장 사랑하는 것도 모두 나여야 해.”
예상치 못한 그의 애절한 시선에 나는 철저히 붙들려 버렸다.
“그러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게 될 거야. 네가 가장 무서워하는 나는, 너를 위해 목숨도 다 내어 줄 수 있거든.”
다가온 노엘은 곧장 내 목에 얼굴을 파묻었고, 입술인지 그 안쪽에 있는 건지 모를 물컹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내 오른쪽 목에 닿았다.
노엘은 내 목을 물었다가 놓았다가를 여러 차례 반복하며 나를 간지럽혔다.
“노, 노엘…?”
정확히는 나를 괴롭혔다.
처음엔 간지러웠다가 점점 참을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몰려들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그를 밀어내려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곧 밀어낼 힘조차 쓸 수 없을 정도로 희한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윽! 그, 그만……. 간지러워! 악!”
결국 참을 수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고, 그제야 노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한 번 쓱 쳐다보았다.
끝난 줄 알았는데, 달콤한 미소를 한 모금 흘린 그는 이번엔 내 왼쪽 목으로 파고들었다.
예상대로 아까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 꼭대기까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오르는 느낌에 정신을 잃을 것 같던 순간.
그 순간에서야 노엘은 나를 놀리듯 빠져나갔다.
“잘 먹었어. 아주 좋은 향기가 나.”
다정한 듯 아닌 듯, 은근한 듯 아닌 듯 웃고 있었다.
빠르게 정신이 돌아온 나는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들며 목을 길게 내어놓았다. 한 손으론 목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왜, 너도 먹고 싶어? 그럼…… 먹을래?”
옷깃 사이로 보이는 쭉 뻗은 목선이 장인 정신으로 조각한 것처럼 참으로 예술이었다.
그래, 정말 맛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한번 맛보고 싶은 충동까지 들어서 소름이 다 돋았다.
하지만 나는 아쉽게도 흡혈귀가 아니었다.
‘차라리 내가 흡혈귀였다면 좋았겠어. 아니, 뭐래. 미쳤나 봐.’
이내 아득해진 정신을 다시 붙잡으려 했지만, 정신은 이미 분열되어 사방으로 떠다니는 중이었다.
녀석한테 홀려서 정말 미쳐 버린 게 틀림없었다.
나는 노엘의 셔츠 깃을 떨리는 손으로 잡아 쥐곤 또박또박 말했다.
“먹고 싶어. 근데 지금 말고…. 다음에.”
장난에는 장난으로 받아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진심과 거짓이 모두 섞인 말이었지만, 금방 내가 무슨 대담한 말을 한 건지 기함해선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
어찌어찌 뒤척이다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깨어나 보니 아직 한창 새벽인 모양이었다.
옆에서 쌔근쌔근 자는 노엘이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하필 어젯밤의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아악! 내가 미쳤지. 진짜.’
얼굴로 피가 마구 솟구쳤고, 이불을 발로 차고 싶었으나 노엘이 깰까 봐 발가락만 열정적으로 꼼지락거렸다.
노엘의 목을 다음에 먹겠다고 한 말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다시 생각해 보니 뭐 하자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그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내 어이없는 발언에 역으로 놀란 노엘의 토끼 같은 눈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어쨌거나 노엘의 계략에 말려든 게 분명하다. 그 녀석이 만들어낸 분위기에 폭풍처럼 쓸려 가고 말았다.
이러다 노엘이 제 목을 언제 먹을 거냐며 독촉하는 건 아닐지,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고 있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괴기스럽다.
‘아침에는 또 어떻게 노엘의 얼굴을 봐야 하나…….’
그러고 보니 지금 내 행동은 어쩐지 노엘을 많이 의식한 것 같았다.
하긴, 무리도 아니었다. 노엘의 외모는 정말로 내 취향 그 이상이었으니까.
‘거기다 하는 짓도 미묘하게……. 으아아!’
또 아까의 이미지가 떠오른 나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고 한참을 있었을까.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잠이 다시 오지 않았고, 급격히 더워진 나는 슬그머니 침대를 빠져나왔다.
‘흠. 지금 시간에 퀘스트를 하러 가긴 위험할 테고…….’
[지금 나가서 네가 베키를 풀어 주면 호감도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뜬금없이 나타난 의문의 목소리였다.
나는 이 공포 게임에 호감도 따위가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런 분위기의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나한테 사기 치는 거지?’
[어쩌면 그녀가 네 조력자가 될지도 모르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만.’
[혼자 힘으로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점점 상황이 힘들어질 거란 사실만 알아 둬.]
‘뭐야? 그렇지 않아도 베키를 풀어 줄 생각은 하고 있었어. 근데 또다시 날 공격하면 어떡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아무리 봐도 사기꾼인데.
‘그래도 지금 시간까지 묶여 있으면 베키도 힘들긴 하겠지.’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베키가 내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틀었다.
“베키, 힘들지 않아?”
“…….”
“아직도 나와 대화하고 싶지 않은 거야?”
나는 답답한 마음에 베키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베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 내가 베키인지 어떻게 아는 거지?”
“어…?”
생각해 보니 내가 붉은 보석 퀘스트를 하는 걸 베키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모르더라도 과거에 친구였는데 지금 몰라볼 리가 있나?
무언가 이상하다.
“네가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그야 나는 네 친구니까.”
“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유독 뜸을 들였다. 아니, 아예 다시 입을 다무는 모양새였다.
갑자기 베키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궁금함으로 혼란스러워졌다.
“베키, 더 이상 나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줘. 그럼 지금 당장 널 풀어 줄게.”
노엘도 분명 이해해 줄 것이었다. 그도 이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베키를 묶어 둔 거였으니까.
거기다 그런 잔인한 실험을 당한 아이를 이렇게 묶어 두고 싶지도 않았다.
베키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천천히 중얼거렸다.
“너…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네 친구니까.”
자꾸 말하다 보니 좀 찔리긴 했다. 그녀의 진짜 친구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그녀에게 내적으로 상당한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나는 네가 친구라는 걸 인정할 수 없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줘.”
“너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
뭐지. 얘…… 내가 빙의자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라도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이 사실은 절대 함구해야 했다.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특히나 노엘이 알게 된다면?
그가 사랑했던 그녀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나는 진정으로 철퇴 엔딩을 맞이하게 되겠지.
어제 들었던 오르골의 음악이 내 엔딩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와. 이런 위기는 상상도 못 했는데.’
간신히 쩍 벌린 입을 다물었다.
“베키, 너… 나에 대해 무얼 알고 있는 거야?”
“……알려 주면 날 죽이려고?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는 건가?”
“무슨 소리야! 나는 절대 네 손끝 하나 건드릴 생각 없다고.”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난 널 절대로 믿지 않아.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고.”
어쩌면 베키와 친구가 되는 일은… 정말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황에선 그녀가 내 조력자가 될 확률도 상당히 낮아 보인다.
“정말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베키, 풀어 주면 나를 또 공격할 거야?”
“…….”
또 대답이 없자 나는 체념한 듯 일어나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노엘의 방으로 다시 들어가려는데 등 뒤에서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