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까드득거리던 손가락이 문을 스르륵 열었고, 마침내 흰머리 귀신의 모습이 모두 드러났다.
머리카락이 여전히 뒤덮여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조금은 안도했지만, 이다음의 일이 제일 걱정이었다.
“도,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나는 힘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면서도 말끝에 힘을 주려 노력했다.
흰머리 귀신은 하얀 맨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는데.
대단히 차분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이미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괜히 도끼를 허공에 붕붕 휘저었다.
“오지 마! 도끼에 베이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이, 이거 날이 엄청 날카롭다고!”
더 이상 거리를 좁혔다간 내 심장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오지 말란다고 해서 오지 않을 리는 없겠지.
역시나 계속해서 이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에 맞추어 나도 어느샌가 뒷걸음질을 치는 중이었다.
아래턱에 땀방울이 고여 뚝뚝 흐르는 가운데,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았다.
나는 도끼를 최대한 길게 잡은 채, 흰머리 귀신과 나 사이의 공간을 갈랐다.
“내 말 안 들려? 이걸로 널 벨 수도 있다니까?”
잠시 걸음을 멈춰 선 흰머리 귀신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물에 홀딱 젖은 생쥐 같으니라고. 겁에 질려서 너와 나의 능력 차이조차 가늠이 안 되는 거니?”
그래, 능력.
내가 해 봤던 몇 안 되는 공포 게임에선 플레이어에게 뛰어난 능력 따위는 주는 법이 없었다.
그랬다간 플레이어가 괴물을 사냥하는 게임이 돼 버리고 말겠지.
그렇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살려 줘.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이유나 좀 들어 보자. 응?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저 녀석은 무기가 많다. 길게 늘어나는 머리카락과 손톱, 그리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얼굴.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나는 제압당할 것이다.
아무리 봐도 내게 훨씬 더 불리한 싸움이니 태세를 전환할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흰머리 귀신은 더욱 험악해졌다.
“너 따위가 알 필요는 없어. 그냥 모르고 죽어!”
말과 함께 흰 머리카락이 허공에 두둥 떠올랐다. 이내 그것은 나를 향해 돌진했고.
붕붕 휘두르던 내 도끼의 손잡이를 휘감아 버렸다.
“안 돼! 내 도끼!”
아무래도 도끼를 내 손에서 빼내려는 것 같은데.
당기는 힘이 엄청났다. 도끼를 지키려다 나까지 끌려가게 생겼다.
“큭……!”
어금니를 꽉 깨물며 버티던 나는 그냥 도끼를 놓아 버렸다.
그러자마자 흰머리 귀신은 도끼를 내팽개치듯 날려 버렸고, 도끼는 벽 구석에 있던 나무 장식장에 날아가 박혔다.
콰직!
장식장의 나무가 결을 따라 갈라지다 멈추었다.
이번엔 내 차례인가.
흰머리 귀신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나와의 간격을 더욱 좁혀 오더니 긴 손톱을 드러냈고.
그렇게 허공을 마구 할퀴며 내 쪽으로 전진해 왔다.
“으아악!”
나는 어떻게든 이곳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문이 너무 멀었다.
‘그렇다면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나.’
그러고 보니 안쪽 통로로 가면 베키의 실험실이 있을 것이었다.
뒷걸음질하다 보니 어느새 벽에 등이 달싹 붙어 버렸다.
흰머리 귀신의 손톱이 날아들었고, 나는 냅다 방향을 틀어 옆으로 굴렀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게임 캐릭터를 떠올려 앞구르기를 한 것이었지만.
“악! 꼬리뼈!”
뻣뻣한 꼬리뼈가 으스러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역시 나는 게임 캐릭터처럼 앞구르기 뒤구르기를 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이번엔 흰머리 귀신의 손톱은 피했다.
‘후, 다행이야. 잠시 뼈가 놀랐나 봐. 바닥이 딱딱해서…… 어윽.’
아픈 건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고, 급히 안쪽으로 내달렸다.
조금만 더 가면 좁은 통로가 나올 것인데, 실험실에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릴 생각이었다.
뒤통수에서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며 금방이라도 흰머리 귀신의 손톱이 닿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 되겠어. 따라잡힐 것 같아.’
라고 생각한 순간, 흰머리 귀신의 머리카락이 내 다리를 낚아챘다.
“으갹!”
그에 따라 내 몸은 앞으로 철퍽 넘어지고 말았다.
아까의 꼬리뼈 통증이 다시 살아난 기분.
아…….
나는 곧장 돌아누워 상체를 일으켰다.
발을 딛고 일어나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흰머리 귀신이 코앞에서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으니까.
‘어, 얼굴 무기를 쓰려는 건가……!’
나는 전시실에서처럼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저 본능이었다. 너무 무서워서 나오는 그런.
눈을 감으니 막상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노엘의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봐… 역시 정들어 버린 거 같잖아.’
그러다 노엘의 철퇴가 떠올랐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그게 왜 생각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분명 코앞에 흰머리 귀신의 기척은 느껴지는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뭐지……?’
내 발목을 휘감은 머리카락의 감촉도 아직 그대로였으니, 귀신이 간 건 아닐 테고.
용기를 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떠 보았다.
‘으아악, 깜짝이야!’
흰머리 귀신이 여전히 내 앞에 보이지 않는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시간 정지라도 당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위에 있는 무언가를 보기 위해 고개가 들린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는데.
‘내 뒤에 뭐라도 있나?’
어쩐지 아까보다 주변이 어두워진 것 같다 싶었는데,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와 흰머리 귀신을 덮고 있었다.
‘뭐야. 뭔데.’
흰머리 귀신이 꼼짝도 안 할 정도로 무서운 무언가라도 있는 걸까?
궁금증이 폭발하자 저절로 내 고개가 뒤로 돌아갔고.
“리사, 보고 싶었어. 잠깐 떨어져 있었는데 몇백 년은 된 거 같네.”
바로 뒤에서 노엘이 내려다보며 예쁘게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노… 노엘?”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나타나 주니 역시 반갑지 않을 리가 없었다.
“베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응?
베키? 베키라고?
노엘은 흰머리 귀신에게 시선을 두었고,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베키라니? 내가 본 꼬마 베키랑은 너무 다른데…….’
그러고 보니 붉은 보석 퀘스트의 다음 이벤트는 베키의 실험일이었는데.
‘그렇다면 베키가 이렇게 된 것은 실험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베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어쩐지 노엘과 베키의 사이에 폭풍 전야 같은 긴장감이 맴돌았고.
누구 하나가 먼저 움직이면 뭔가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괜히 나도 얼어붙어선 가만히 있었는데.
1분 정도 그렇게 침묵의 시간을 거치고, 조금은 지루해지려는 찰나.
베키가 먼저 몸을 움직였다.
“베키!”
베키가 뒤로 가볍게 물러났고, 도망을 치려는지 바깥문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노엘은 베키를 잡으러 따라나섰고.
얼마 되지 않는 거리지만, 혼자 남겨진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회다. 이 틈에 붉은 보석을 찾으러 가야겠어!’
나는 곧장 좁은 통로로 악착같이 기어들어 갔다. 최대한 몸을 낮췄지만, 아마 다 보이긴 했을 것이다.
바깥쪽 복도로 이어지는 문 근처에서 쿠당탕 몸싸움이 벌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금방 잠잠해진 걸로 보아, 둘 중 하나가 제압당했거나 제압했을 가능성이 컸다.
‘이런, 시간이 없어.’
좁은 통로에 들어온 나는 드디어 두 다리를 일으켰다.
통로는 사람 한 명만이 널널하게 지나갈 수 있는 넓이였다.
맨 끝에 이 넓이만큼의 좁은 문이 하나, 양측에 하나씩 방이 더 있었다.
‘어쩐다…….’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맨 끝에 있는 방부터 먼저 가 보기로 했다.
끼익.
막상 들어가려고 문손잡이를 잡았는데 잠금장치가 없었다.
허름한 나무 문은 발로 차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다.
일단 안을 살펴보려고 들어왔는데, 직원 휴게실 같은 느낌의 방이었다.
간이침대가 두 개 정도 있었고, 간단히 식사할 수 있는 테이블과 조리대가 있었다.
‘여긴 아닌가 봐. 그럼 바로 옆에 있던 방으로 가 봐야겠어.’
바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잔잔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좀 적응되었나 싶었지만,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발소리였다.
“리사, 그새 어느 방으로 들어가 숨은 거야?”
노엘이었다.
그 짧은 시간 베키를 어떻게 하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저 여유로운 발걸음이 또 나를 사냥감처럼 몰아넣고 있었다.
“너를 찾았으니 내게 상을 줘야 하지 않겠어?”
노엘은 허공을 향해 내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아, 나는 왜 저 다정한 목소리에 벌벌 떨고 있는 걸까!
일단 주위를 둘러보니 영 좁아터져서 숨을 데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다 어렸을 때 동생들이랑 했던 숨바꼭질 놀이를 떠올렸고.
문 뒤에 숨어서 따돌린 적이 있었던 게 생각났다. 사실 들키기 좋았지만 방심하면 놓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으니.
‘해 보자.’
그래서 문 옆 벽에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까치발은 필수였다.
양팔도 벽에 딱 붙였겠다. 이제 노엘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끼익.
드디어 문이 열렸고.
나는 숨쉬기를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심장 보호를 위해 눈을 살며시 감았다.
“드디어 얼굴을 보게 되어서 좋았는데……. 이렇게 금방 달아나려 하는 거야? 그래도 널 또 찾아낼 상상을 하니 무척 기대된다.”
코끝에 닿을 듯 말 듯 아슬하게 나무 문의 존재감이 느껴졌고.
노엘은 뭐 하고 있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방에 들어와 둘러보는 중이라 여겨졌다.
어차피 방이 작아서 깊이 들어올 곳도 없었다.
‘제발…… 빨리 나가 줘. 숨 막힌다고!’
머릿속도 가슴속도 새하얘지는 기분.
심장은 활기차게 널뛰었고, 까치발을 세운 발은 금방이라도 쥐가 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내 예상보다도 노엘이 방을 둘러보는 시간이 길었다.
‘뭔데… 대체 뭐 하고 있는 건데?’
설마 지금 나를 발견한 건 아닐까.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 그럴 리가……. 아닐 거야. 날 찾았으면 당장이라도 어떻게 했겠지.’
점점 숨을 참는 게 힘들어졌고, 까치발도 바들바들 떨리며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아…… 제발!’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 노엘이 기척을 느끼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끼익.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앞이 시원할 정도로 휑한 기분이 들었다.
조심스레 눈을 뜬 나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후아…….”
아무도 없는 걸 보니 다행히도 노엘한테 들키지 않은 모양이다.
잔뜩 긴장한 몸이 풀어지자 쓰러질 것 같았지만, 작은 소리라도 내서는 안 되었다.
아직 노엘이 근처 방을 돌아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