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무척이나 애절한 모습이어서 내 마음이 다 아플 정도였다.
-베키! 가지 마. 이대로 가면 안 돼……!-
-……이거 놔!-
-아… 안 돼. 이렇게 헤어질 순 없어!-
그녀는 어느새 베키의 다리 한 짝을 꽉 안아 잡고 있었다.
안색이 초췌한 애가 그러고 있으니, 베키도 더 이상 뿌리칠 순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순순히 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는 여전히 붙들려 있는 상태였다.
-리사… 너는 줄곧…… 내가 불쾌하지 않았어? 친한 친구인 주제에 네 정혼자를 좋아하고 있었는걸.-
-아니, 전혀! 불쾌하지 않았어.-
-어째서? 나라면 굉장히 불쾌할 거 같은데….-
-불쾌할 거라니… 당치도 않아. 게다가 우리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정혼이었고.-
-…….-
-너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잖아. 오히려 내가 다 미안해지던걸.-
-됐어. 다음 생이 있다면, 너 안 봐줄 거야. 노엘 전하한테 완전히 들이댈 거라고!-
그녀의 솔직한 마음에 백금발 여자아이는 그제야 안심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렇게 해.-
-내 말이 거짓말 같아? 노엘 전하가 좋아하는 여자는 모조리 치워 버릴 거라고! 그게 너라도 말이야.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
-알겠어. 알았다니까. 꼭… 그래 줘야 해.-
-…….-
그녀는 베키의 두 손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꼭 살아 돌아와 줘. 돌아와서… 꼭 그렇게 해. 알았지?-
진심이 담긴 그 눈빛을 본 베키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 투명한 것이 흘러내릴까 봐 코끝을 한껏 들어 올리는 모양새가 안타까웠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 리사… 내일도 이렇게 건강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경쟁자 치우는 맛이 난다고.-
-푸흡. 응! 물론이지. 그리고 잊지 마. 베키, 너는 내 하나뿐인 친구라는 걸.-
-리사… 바보……. 너도 내 소중한 친구야. 절대 못 잃어.-
결국은 주체 못 한 눈물을 쏟아내는 그녀들이었다.
옆에서 영화를 보듯 보고 있던 나도 한마음이 되어 눈물을 찔끔 흘렸다.
‘뭐야…… 둘 다 착하잖아. 근데 나는 왜 우니. 주책이야, 정말…….’
두 눈가가 촉촉해지며 마음이 따듯해져 있던 때였다.
환영의 시간이 또 빠르게 흘렀다.
베키와 토드가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인 것 같은데.
-잘 지내요. 영식. 만나서 반가웠지만, 나를 보는 것 같아 불쌍하니 다음 생이 있더라도 친해지진 말자고요.-
-그거 서운하네. 다음 생이라니. 나는 그런 거 믿지 않아. 그러니 그깟 실험 잘 견뎌내 보라고.-
-만에 하나……. 정말 살아 돌아오게 된다면, 그쪽의 실험 날에 똑같이 말해 드리겠어요.-
둘의 작별 인사는 그렇게 간단히도 끝이 났다.
엄청나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대화만으로도 충분함이 느껴졌다.
그들이 서로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짓는 사이, 꼬마 노엘이 다가왔다.
토드는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었다.
-베키.-
-노엘 전하, 부족한 저를 친구 삼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꼬마 노엘은 베키를 불쌍하게 바라보거나 동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의 단단한 눈빛은 평소에 봤던 그대로였다.
-그래, 감사해야겠지. 그리고 그 감사는 제대로 표현했으면 좋겠어. 이왕이면 살아 돌아오는 것으로 말이야.-
-……저.-
-무슨 할 말이라도?-
나는 베키가 드디어 고백하려는 건가 싶어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였다.
사실 내 바람이기도 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베키가 살아 돌아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겪을 실험이 뭔지 아직 몰랐지만, 그리마 융합 실험 때를 떠올려 보면…….
사람이 살아남을 리가 없는 실험일 것이 눈에 선했다.
-제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녀가 몹시 뜸을 들이는 탓에 보는 내가 다 답답했다.
‘그래. 말하라고! 말해. 왜 말을 못 해! 좋아한다고 말하라고!’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응원했다.
눈에 너무 힘을 줬는지 눈알이 밖으로 빠져나올 것 같았다.
-그대는 뜸 들이는 성격은 아니었지 않은가?-
그의 장난기 섞인 미소에 베키는 결심한 듯 함께 웃음을 흘렸다.
-제가 살아 돌아오면, 그때도 저와 친구 해 주시겠습니까?-
‘아, 뭐야……. 그건 고백이 아니지!’
김빠진 나는 실망해선 애먼 바닥에 발길질했다.
-그 말을 하려고 그렇게 시간을 끈 거야? 당연한 소린 걸.-
-그땐… 전하라고 부르지 않을 거예요. 전하의 존함을 부를 겁니다.-
-……건방지지만 허락할게. 무사히 살아 돌아온다면.-
-그럼 되었습니다. 저는 그걸로 족합니다. 부디 토드, 리사와 함께 무사히 계셔 주셔요.-
베키의 작별 인사가 모두 끝나자 환영도 사라졌다.
나는 괜히 씁쓸한 마음에 한숨만 푹푹 쉬어댔다.
‘결국 말하지 못했잖아……. 어휴.’
베키한테 너무 과몰입했나 싶어 헤어 나오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으니까.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좀 더 감정을 추스르는 시간을 가졌다.
‘분명 다음 장소는 베키의 실험실로 가게 되겠지.’
이번엔 또 어떤 충격을 내게 안겨 주려고 이러나…….
‘악. 못 해! 더 이상 못 해 먹겠어!’
성격 파탄자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끝난 줄 알았던 환영이 갑자기 다시 나타났다.
때는 베키의 실험 날이었다.
아이들이 놀던 곳 바로 옆으로 난 좁은 통로는 실험실로 가는 길인 듯했다.
통로로 사라지는 베키를 꼬마 노엘이 뒤에서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꼬맹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불만의 표시로 팔짱을 끼고는 그의 근처로 다가갔다.
[그렇게 궁금해?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아오, 깜짝이야. 이러다 놀라서 죽겠어.’
지금은 나한테 말한 게 확실했다. 근데 어디 보고 있는 거지?
그의 시선은 여전히 베키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괜찮은 표정이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베키도 그리마처럼 살아남을 수 없겠지? 슬프긴 하지만…… 리사한테 드디어 친구가 없게 되었어.]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게… 무슨 뜻이야?”
[베키 때문에 내가 리사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적었었거든. 이제 없어졌으니, 내가 좀 더 오랜 시간 리사를 독차지할 수 있겠어.]
……?
그 의미를 최대한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 잘근잘근 곱씹어 보았지만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는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꼬마 리사를 좋아하는 마음에 대한 진심은 충분히 알겠지만.
‘역시 노엘은 노엘이었어.’
발바닥부터 올라오던 소름이 전신으로 고르게도 퍼졌다.
꼬마 노엘은 귀엽고 착한 느낌이었는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갑자기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들며 삐딱하게 기울였다.
핏빛 미소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진한 웃음이었다.
[이제 토드 그 녀석만 없어지면… 리사는 온전히 내 차지야.]
경악한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동그랗게 뜬 눈만 껌벅거렸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저 한 몸에 모두 들어 있었다.
도대체 어느 놈이 진짜 노엘의 모습인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다시 한번 현재의 내 상황을 인지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이런 녀석한테 쫓기고 있다는 거지?’
그야말로 절규의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리사, 내가 이렇게나 너를 사랑하고 있었어. 아마 지금도 똑같을 거야. 너는 어때? 지금도 나 말고 그 녀석을 좋아해?]
고개를 비틀며 처연히 웃는 꼬마 노엘을 피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무서우면서도 가여워 보이는 건 무엇 때문일지.
여기저기 상처 입고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것 같은 그 표정 때문일까?
어찌할 바를 몰라 굳어 있는데, 다행히 환영은 그 말을 끝으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환영이 사라지고 덮친 이 어둠이 차라리 반가워질 정도였다.
‘미쳐 버리겠네. 그 녀석은 또 누구지? 설마 토드를 말하는 거야?’
잠시나마 가슴을 진정시킬 시간이 생긴 줄 알았다.
하지만 이 공포 게임은 잠시라도 나를 가만히 두는 법이 없었다.
충격과 공포가 채 가라앉기도 전 문틈으로부터 흘러오는 흰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오고 말았다.
그것은 정확히 흰머리 귀신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서 와. 네가 여기로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 비밀 통로에서 네 목숨을 거둘 수 있었는데……, 간발의 차이라 정말 아쉬웠어.”
‘뭐야, 노엘이 쫓아왔던 게 아니었어?’
비밀 통로에서 흰머리 귀신한테 따라잡힐 뻔했다고?
생각만 해도 아찔했지만, 살아남아서 뿌듯해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도끼를 양손으로 꽉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좀 더 무섭게 생긴 무기를 고를 걸 그랬어.’
오늘따라 작은 도끼가 더 귀여워 보였다.
“그 방에서 노엘이 몰래 널 따라 나가는 걸 봤어. 그래서 더는 쫓아갈 수 없었지.”
문밖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흰머리 귀신이 뭐라고 하는지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 몸체가 어디까지 왔는지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둘만 있게 되었구나. 이번에야말로 네 숨을 거두어 갈 수 있겠어.”
귀를 찢고 들어오는 뾰족한 소리에 바짝 예민해진 찰나.
끼긱. 끼끽. 끼이이이.
벽을 긁던 하얀 손톱이 문틈으로 하나, 둘씩 비집고 들어왔다.
‘아…… 제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