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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17화 (17/145)

17화.

꼬마 노엘과 세 명의 아이들은 이미 이전부터 잘 아는 사이인 듯해 보였다.

백금발 머리와 갈색 머리 여자애, 그리고 은빛 머리의 남자애.

다들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아이들.

외모에선 귀티가 줄줄 흘러나왔다. 어디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리사가 힘들어 보여. 오늘 놀이는 여기까지 하자.-

‘응? 나?’

나는 꼬마 노엘의 말에 화들짝 놀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가 보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나와 같은 백금발 머리의 여자애였다.

그러고 보니…… 어째 생긴 게 나랑 비슷하다?

이름까지 똑같고.

‘에이, 설마……. 설마… 나야? 뭐야. 얘가 이 몸이라고?!’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쿵!

심장이 크게 뛰고 얼굴에 열감이 차올랐다. 반면 머릿속은 파랗게 차가워졌다.

‘얘가 정말 나라면, 나도 어릴 때 실험용 아이 중 하나였다는 거야?’

이 몸의 과거가 여기 있는 백금발 여자애라니.

나는 아이의 외모를 뚫어지도록 집요하게 살폈다.

나와 다른 부분을 단 하나라도 찾길 바랐다.

다른 곳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땐, 고개를 세차게 저어 버렸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이게 말이 돼?’

나는 머리가 떨어질 정도로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볼을 탁탁 때리며 세뇌를 시키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래, 이름이 어쩌다 겹친 것일 뿐!’

분명 내가 아닐 것이라 여기고 넘어가기로 했다. 무시하기로 했다.

하필 이런 때에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란 말이 떠올라 버렸지만.

-리사, 괜찮아?-

은발의 남자애가 백금발 여자애의 이마 위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꼬마 노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노엘은 이때도 백금발 여자애를 좋아한 모양이다.

‘뭐야, 백금발이 취향이었나 봐?’

나는 질투하는 꼬마 노엘이 귀여워 보여 피식 웃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노엘이 은발 남자애의 자상한 손길을 곧장 쳐내 버린 것이었다.

-토드, 리사는 내 정혼자야. 감히 내 앞에서 함부로 건드리다니. 죽고 싶어?-

어리지만 그 누구보다도 강한 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내가 더 놀랐던 건 토드라는 은발 남자애의 반응이었다.

-어차피 여기선 다 같이 죽은 목숨 아닌가요? 이곳에서 우리는 더 이상 황족도, 귀족도, 그 무엇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 리사와 전하의 정혼도 의미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토드는 노엘의 찢어발길 듯한 살기를 부드러운 미소로 받아쳤다.

저런 반응인 걸 보니 토드도 백금발 여자애를 좋아하나 보다.

‘백금발이 인기녀였네.’

둘 사이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기류가 흐르자 가만히 지켜보던 갈색 머리 여자애가 둘을 말렸다.

-여기서 소란을 일으켜 봐야, 우리의 실험 날짜만 앞당겨질 뿐입니다. 전하와 영식은 쓸데없는 일로 다투지 마시지요.-

다들 나이에 비해 굉장히 어른스러운 말투였다.

‘귀족 자제들은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상황이 이렇게 만든 걸까.’

똑 부러진 게 마음에 들어 갈색 머리 그녀를 주시해 봤는데, 어째 흘깃하는 눈동자마다 꼬마 노엘에게로 향하는 것이었다.

노엘을 슬쩍슬쩍 훔쳐보며 얼굴을 수줍게 붉혔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다 음흉한 눈빛이 되고 말았다.

‘아, 뭐야…… 삼각관계야? 사각 관계? 이거 흥미진진한데.’

그녀는 노엘이 백금발 여자애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누가 봐도 티가 팍팍 나긴 했으니 그녀가 모를 리는 없겠지.

그렇다 해서 그녀가 백금발 여자애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분명 질투 날 텐데, 겉으로는 하나도 안 드러내네.’

정말 조숙하다.

아무튼 갈색 머리 여자애의 활약으로 남자들은 조용해졌다.

꼬마 노엘은 아직 부들부들 떠는 게 느껴졌지만, 꽉 쥔 주먹을 내보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정말 질투의 화신이 따로 없다.

-미안, 나는 이만 쉬러 가야겠어.-

눈 밑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백금발의 여자애는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이런 상황이 몹시 불편한 기색이었다.

몸이 연약한지 휘청거려, 꼬마 노엘이 부축해 주며 함께 나갔다.

둘이 사라지자 갈색 머리 여자애와 은빛 머리의 토드는 남아서 장난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베키, 우리 중 너의 날이 가장 먼저 오잖아.-

-……그래서요?-

베키. 갈색 머리 여자애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예쁜 이름이었다.

‘이 귀여운 녀석들이 말하는 날이란 게 뭘까?’

-나는 네가 노엘 전하를 좋아하는 거 다 알고 있었어.-

-쉿! 제발 조용히 하세요. 토드!-

베키는 주위의 다른 이들이 혹여나 들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토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날이 오기 전에, 꼭 마음을 전하라고 하는 말이야.-

-지금까지 입 다물고 계셨으면 앞으로도 계속 그래 주세요. 저는 노엘 전하께 고백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썩어 문드러졌을 거잖아. 그 속이.-

-지금 이 상황만큼 더 썩어 문드러지는 일이 있을까요? 토드야말로 몸조심하세요. 그날이 오는 것보다 전하의 손에 죽는 게 더 빠르겠어요.-

흠. 대체 그날이 무슨 날인 걸까…….

대충 대화의 뉘앙스로 보니, 뭔가 자신의 죽는 날 같은 그런 느낌인데.

‘그럼 각자의 실험 날짜인 걸까?’

여기는 실험용 아이들이 지내는 곳이었으니까, 최종적으로는 모두 실험에 쓰이는 거겠지.

실험도 그 종류가 아주 다양해 보였는데.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는 게 무척 절망스럽다.

-내가 뭘 어쨌길래 전하의 손에 죽는다는 거야?-

-리사를 좋아하시잖아요? 적당히 좀 하세요. 아주 티가 팍팍 난다고요. 감히 황태자 전하의 정혼자를 넘보다니.-

-나라가 멸망했는데 황태자는 무슨. 난 내 날이 오기 전에 리사에게 반드시 마음을 전할 거야.-

-그런다고 해서 이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닐 텐데요? 굳이 죽기 전에 그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요.-

-상황을 바꾸려는 게 아니야. 그저 이런 상황 속에서, 내 감정이 리사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 다만 그뿐이야.-

-…….-

-틀림없어. 분명 리사도 기뻐할 거야!-

토드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자꾸만 흠칫하게 되었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모르겠네요.-

-내가 리사에게 바라는 건 하나밖에 없어. 그 예쁜 미소를 잃지 않는 것.-

굳은 의지를 내비치는 토드.

그는 마음이 참 부드럽고, 따듯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기운을 이렇게나 뿜어내고 있다니.

그런 그를 자연스레 응원하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응원하고 싶게 만드는 힘을 가진 녀석인 것 같다.

그나저나 백금발 여자애는 누굴 좋아하는지 겉으로 영 보이질 않아 의문이었다.

‘궁금하네. 노엘을 좋아하긴 하는 건가? 아까 같은 상황이라면, 노엘의 편을 들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노엘이 자신의 정혼자라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자리를 뜨며 회피하는 선택을 했을 뿐.

그녀에게 있어 노엘과의 정혼은 어떤 의미였던 걸까.

-그건 그렇고 베키, 대체 말은 언제 편하게 놓을 셈이야?-

-평생 그럴 일 없을걸요?-

-하하. 그래, 그게 너답다.-

토드의 시원한 웃음에 나도 작은 미소가 절로 생겨났다.

‘토드는 기분 좋은 에너지를 갖고 있구나. 이대로 잘 자라 준다면 맑고 자상한 훈남이 되었겠어.’

노엘의 친구들은 생각보다도 더 좋은 아이들이었다.

함께 지낸다면 굉장히 즐거울 것 같은데.

지금의 노엘과 나처럼, 베키와 토드도 살아 있을까?

이 별장 어딘가에서.

***

환영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9일 후, 베키의 실험일 바로 전날이 되었다.

이때까지도 베키는 꼬마 노엘에게 마음을 전하지 않았다.

-리사, 오늘은 좀 어때?-

‘윽. 깜짝이야.’

순간, 또 날 부르는 줄 알았다.

나와 이름이 같은 그녀는 역시 건강이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눈 밑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다.

남자들이 피 검사를 하러 불려 갔고, 그녀는 모처럼 베키와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베키, 매번 네게 걱정 끼쳐서 미안하네…….-

처음엔 몰랐지만, 이 둘은 아주 절친하고도 친밀한 사이였다.

-저기 리사, 나…… 아니, 아니야.-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으음……. 아니야. 아무것도.-

베키는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았는데, 자꾸만 말을 삼켰다.

-…… 베키, 실은 이전부터 쭉 알고 있었어. 그를 좋아하지?-

-어? 그, 그라면…?-

‘역시, 다 알고 있었구나.’

그래, 친한 친구 사이라면 알 법도 하지.

베키는 그녀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노엘 전하 말이야.-

-무슨 소리야. 친구의 정혼자를 좋아하다니……. 무슨 그런 망측한 소리를!-

백금발 여자애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에게 네 솔직한 마음을 꼭 전했으면 해.-

그러자 베키의 표정이 급속히 험악해졌다.

-살아 돌아오라는 말을 꼭 그런 식으로 해야겠어? 그냥 툭 까놓고 말해! 내일이 내 죽는 날이라고. 왜 다들 내게 고백을 못 시켜 안달인 거야!-

-많이… 좋아했잖아. 후회할 거야.-

-어차피 전하는 널 좋아하잖아! 지금 내게 네 우월감이라도 표현하려는 거니?-

-베키!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 콜록.-

-네가 그러지 않아도 나는 지금 매우 비참하다고!-

두 녀석 모두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경일 것이었다.

결국 흥분한 베키가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 하자 꼬마 리사는 필사적으로 엎드리며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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