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까만 관이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일단 관에 들어가 버텨 보기로 했다.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저 녀석의 속도에 질겁한 상태였으니까.
이대로는 금방 붙잡힐 것이 틀림없었다.
재빠르게 관 문을 닫아 버리니, 아슬아슬한 차이로 도착한 리마가 관에 몸통 박치기했다.
관문이 열릴세라, 어떻게든 안쪽에 장착된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코앞으로 리마의 다리 하나가 관을 뚫고 쑥 들어왔다.
“이익!”
놀란 마음은 둘째 치고, 이다음엔 진짜 죽을지도 몰랐다.
뚫고 들어온 다리가 바닥 밑으로 깊이 박혔는지 빠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어? 안 빠져…….”
리마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리를 부르르 떨었다.
떼었다 붙였다 하는 게 자유로운 다리란 걸 잊은 건가.
‘뭐야, 고작 그걸로 당황했다고? 알려 주지 말아야겠다.’
예상치 못한 리마의 빈틈에 자신감이 생겨났다.
“아아. 안 빠져! 안 빠진다! 내가 가장 아끼는 3번 다리가!”
가장 아끼는 다리라 떼기가 싫은 거였나?
아무튼 도망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리마가 꽂아 넣은 다리 때문에 관 뚜껑을 열 수도 없었다.
이 상태로 여기 오래 갇혀 있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별수 없지.
“누나가 도와줄게. 조금만 참아 봐.”
“도, 도와준다고? 나를?”
나는 관 속에서 리마의 다리를 붙잡고, 빼내기 위해 힘을 주었다.
‘결국 그리마를 만지고야 마는구나. 생각하지 말자. 어떤 감촉인지… 생각하지 말자. 흑…….’
울상 짓던 리마도 그제야 다시 기운 내서 힘을 줬다.
“끝이 조금 빠진 것 같아. 조금만 더 힘내 봐!”
“으, 응!”
같이 힘을 주자 부들부들 떨리던 다리가 드디어 푝 빠져나갔다. 그와 함께 관의 문도 활짝 열렸다.
리마가 반동으로 뒤로 자빠져 다리를 부여잡는 동안, 나는 곧장 뛰어나갔다.
이 녀석이 또 나를 죽이려 들기 전에 도망가야 했다.
전시실을 무사히 빠져나오기 전, 너무 조용해서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는데.
‘안 쫓아오나?’
리마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금방 뒤쫓을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다시 이전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어쩐지 찡한 얼굴이었다.
뭐야, 그새 다리 빼 준 거로 감동한 거야?
‘악역을 하기엔 물렁물렁한 녀석이네.’
나는 피식 웃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리마의 촉촉한 목소리가 내 귀에 닿았다.
“누나, 고마워! 그리고 미안했어….”
‘그럼! 당연히 미안해해야지. 덕분에 그리마를 맨손으로 만져 본 사람이 되었다고!’
리마가 왜 공격한 건지 물어보지 못해 궁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지만.
지금은 녀석이 금세 또 마음을 바꿀 수 있으니 자중해야겠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그때는 꼭 물어봐야지.’
***
리사가 전시실을 떠나간 직후, 리마는 더듬이를 축 늘어뜨리며 반성하는 중이었다.
‘괜히 누나한테 화풀이하려 했어. 누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날 도와줬는데…….’
풀이 죽어선 후회하는데, 앞 바닥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너, 왜 그랬어?”
냉기를 머금은 목소리에 깜짝 놀란 리마는 고개를 들었다.
노엘이 곧 쪼그려 앉아 무릎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노… 노엘?!”
노엘은 그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리사가 대체 무얼 하는지 몰라 몰두해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심지어 혼잣말을 열심히 중얼거리던데,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영 알 수가 없어 인상을 쓰고 있는데, 리마가 나타난 것이었다.
처음엔 리마가 정말 장난이라도 치려는 건가 싶었는데, 장난이라 하기엔 확실히 선을 넘어 버렸다.
그런데도 리마를 믿었기 때문에 섣불리 나서지 않고 있었고.
다행히 리사는 무사했지만, 하마터면 리마의 다리가 리사를 뚫었을 수도 있었다.
“리마, 이 일은 내가 그냥 참고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아.”
그의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리마의 고개를 깊숙이 찍어 눌렀다.
***
리마와 무사히 헤어지고, 나는 다시 실험실이 있는 4층으로 내려왔다.
지도에 의하면 융합 실험실의 반대쪽 끝에 대규모의 방이 있었다.
그곳이 실험용 아이들의 숙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엘의 진짜 친구들이라…… 궁금하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복도는 아무리 거닐고 거닐어도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복도가 끝없이 길어 당황스럽던 참이었다.
‘지금쯤이면 도착해야 하는 거 아닌가?’
슬슬 불안감이 몰려올 무렵, 눈앞의 하얀 무언가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복도의 천장 위에 희고 긴 머리카락이 붙어 늘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얼마나 긴지, 천장에서 바닥까지 닿을 정도였는데.
처음에는 천장에 머리카락이 달린 줄 알았다.
‘잠깐. 저거,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저 머리카락은 분명… 으엑!
생각이 나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가 유리장에 갇혀 있을 때, 나타나서 괴롭혔던 흰머리 귀신의 머리였다.
‘왜 또 나타난 거야! 아니, 내가 나타난 건가?’
일단 아직까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천장을 유심히 살펴봤지만, 머리와 몸통이 보이지 않았고, 그저 머리카락만 내려와 있을 뿐이었다.
‘대체 본체는 어디 있는 거지?’
천장에 붙은 물줄기 같은 머리카락을 눈으로 추격해 보았고.
방향을 보아하니 저쪽으로 더 가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필이면 목적지가 있는 쪽이라니….’
가슴이 저 머리카락보다도 하얗게 타들어 갔다.
나는 허리춤의 도끼를 뽑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의지와 달리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또 나를 공격하기만 해 봐라…. 이 도끼로 그냥…! 아니지, 그냥 제발 이대로 얌전히만 있었으면.’
만약의 경우 도끼를 마구 휘둘러 버릴 생각이었지만, 역시 이대로 모른 척해 주는 게 제일 좋았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머리카락을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냥 뒤로 돌아가 아늑한 방에 처박혀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하루라도 더 빨리 이 별장을 나가려면 어떻게든 퀘스트를 진행해야겠지.
‘후우…… 후우…….’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군데군데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를 지났다.
복도는 가면 갈수록 머리카락으로 둘러싸인 동굴처럼 보였다.
귀신 주제에 머리숱이 쓸데없이 풍성하다.
‘아… 대체 얼마나 더 가야 나오는 거야.’
머리카락으로 발 디딜 곳이 점점 없어지니 불안감이 더욱 치솟았다.
가시밭길은 많이 들어 봤어도 머리 밭길은 처음이었다.
‘저긴가?’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방의 입구가 문이 열린 채로 나를 반겼다.
그리고 바로 그 입구 옆에, 나와 비슷한 키로 보이는 흰머리 귀신의 본체가 서 있었다.
‘하아악……. 놀라라. 아오, 저게 뭐야!’
고음의 비명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절망의 탄성을 꿀꺽 삼켰다.
흰머리가 얼굴을 다 덮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진 않았다.
마른 체형의 여자 같았는데, 내가 갇힌 유리장을 긁어댔던 뾰족하고 긴 손톱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위치가 좋지 않네. 문 바로 옆에 있다니.’
하얀 원피스를 입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부마저 새하얀 귀신이었다.
표백제를 들이부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저러고 가만히 서 있으니 무척 섬뜩했다.
‘나를 못 본 건가? 아니면 자는 걸까?’
나는 숨을 참고 그 앞으로 차근차근 나아갔다.
그리고 흰머리 귀신을 지나쳐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으아아.’
스치기만 해도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혹시나 해 조금 더 기다려 봤지만, 흰머리 귀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아 다행이긴 한데……. 너무 가까이 있으니 소리 내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방금 들어온 문은 밖에서 잠글 수 있는 형태라, 열린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진짜 자는 거 맞겠지? 서서 자는 스타일인가….’
만약 정말 자는 중이라면 지금이 아주 좋은 기회였다.
안에 중간 문이 하나 더 있어 들어가 보니, 작은 복도가 나왔다. 어릴 때 다녔던 유치원의 분위기가 떠올랐다.
중간중간 교실 같은 곳이…… 있을 줄 알았으나 없었다.
대신 다양한 형태의 방과 실험실이 있었고, 침대만 서른 개가 넘어 보이는 방도 있었다.
실험실 아이들이 있던 곳이 확실해 보였다.
‘붉은 보석이다!’
나는 복도에 떨어진 붉은 보석을 주워 들었고, 곧장 과거의 환영이 펼쳐졌다.
어두웠던 공간이 조금은 활기차게 바뀌었다.
눈앞엔 꼬마 노엘과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있었다.
지금 있는 이곳은 아이들의 놀이터 같은 방이었는데, 장난감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노는 아이들의 소리로 주변은 꽤 소란스러웠다.
‘어디 보자…… 꼬맹이 노엘은 어디 있는 거지?’
오히려 밝은 곳에 적응을 못 해,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를 찾는 중이었다.
그렇게 가장 구석에서 놀고 있는 노엘을 딱 찾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애 두 명과 남자애 한 명이 함께 놀고 있었다.
모두 통일된 회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무슨 죄수복도 아니고…….
‘아주 불쾌한 느낌이 드는 곳이야.’
나는 찝찝한 기분으로 꼬마 노엘 곁으로 가 쭈그려 앉았다.
그는 날 못 본 건지, 일부러 안 보는 건지 알은척도 하지 않았다.
노는 데에 무척 집중하는 듯해서, 나도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흥. 꼭 와 달라고 할 땐 언제고.’
그래도 매번 내가 오면 알은체했었는데……. 왠지 서운했다.
‘기껏 흰머리 귀신까지 뚫고 왔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