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둘뿐이었다. 창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빛이 들어오는 걸 보면 해가 뜨긴 한 모양이다.
일어나 앉으니, 노엘이 내 뺨을 손등으로 어루만졌다.
“아주 잘 자더라……. 그보다 리사.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렸어. 괜찮아?”
“그야. 네가 날 혼자 관 속에 두니 그렇지!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다채로운 욕을 퍼붓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냈다.
“무서웠구나. 미안해. 나는 네가 날 제일 무서워하는 줄 알았어.”
“…….”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왜 아쉬운 표정을 짓는 거니?
“나야… 너와 붙어 있으면 좋긴 하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그랬어. 나만 참는 건… 너무하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냥 모르는 척했다.
많이 참긴 했겠지. 철퇴를 휘두르고 싶어서.
“지금은 몰라도 돼. 아무튼… 다음부턴 자제할게. 혼자 자게 두지 않으면 되는 거지?”
뭔가 미묘하게 어긋난 해석을 한 것 같지만, 어차피 여기서 하룻밤씩이나 더 있을 생각은 없었다.
다음부터라는 말을 무시하고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는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이제 가야겠어.”
목에 열쇠 목걸이가 잘 걸려 있는지 만져 보고는 걸음을 뗐다.
노엘은 조용히 내 뒤를 따라왔다.
방을 가로질러 걷는데, 가운데에 놓인 유리장에 작은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이건… 노엘이 갇혔었던 유리관인데.’
거기에 쓰여 있는 글자를 보자 심장이 은은하게 뛰었다.
‘노엘 칼리스. 론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왜 노엘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거지?
아주 오래전에 쓰인 듯했다.
궁금해서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빙긋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미소가 묻지 말아 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곧 이곳을 나갈 텐데 뭐.’
***
“노엘… 왜 밖에 있어?”
리사가 깨어났다.
노엘은 최대한 상냥하게 웃어 보이려 했지만, 웬일인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자꾸만 미간이 찌푸려지고, 입꼬리가 푹 가라앉았다.
결국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마음속으로 할 말을 토해냈다.
‘정말 잘도 자더라. 어떻게 나를 두고 잠을 잘 수 있지? 나만 한숨도 못 잔 거야? 나만 설레고, 떨리고, 두근거리고…… 그랬던 거야?’
그렇다고 곤히 자는 걸 깨울 수도 없고.
‘이대로는 안 되겠어.’
***
노엘과 나가는 문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대체 몇 층에 있었던 건지, 하염없이 내려가기만 하던 찰나였다.
츠스스스.
분명 어제 들어 본 소리였다. 커튼 뒤에 숨어 있느라 보지는 못했지만, 기어 다니는 괴물 소리 같았는데.
그 소리의 정체가 바로 아래층 계단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미치겠네. 이제 좀만 더 내려가면 나갈 수 있는데!’
이대로라면 마주칠 게 뻔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노엘과 친한 사이였던 것 같다. 분명 다리를 찾아 주느니 마느니 했던 것이 생각났다.
츠스스. 츠스스.
팔에 닭살이 피어올랐다. 닭살이 폐 속에서도 올라오는 듯했다.
나는 황급히 뒤따르던 노엘의 뒤로 달라붙었다.
“노, 노, 노, 노엘! 뭔가 오고 있어.”
진짜 무슨 대형 괴물이라도 오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되면 이번엔 정말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츠스스스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리사.”
그가 안심시키려는 듯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잠시 뒤 마주한 건 정말 엄청난 크기의 벌레였다.
츠스스. 츠스스.
그러니까… 돈벌레라고 하던가? 정확히는 그리마라고 부르던 것 같은데.
벌레의 얼굴이 달려 있어야 할 곳에는 사람 얼굴이 달려 있었고, 머리칼은 몸통의 색과 비슷한 갈색이었다.
녹색 눈동자의 그것은 나와 마주치자마자 사람처럼 스멀스멀 기립했다.
그리마가 기어가는 걸 투명한 바닥에서 본다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싶었다.
츠스스스스스.
“리마. 좋은 아침이야. 아침이라기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노엘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름도 마침 리마란다. 자기가 그리마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걸까?
우울하게도 리마의 얼굴은 제법 귀엽게 생긴 남자였다.
‘얼굴이 귀여우면 뭐 하냐고……. 저 끔찍한 몸 진짜 어떡할 건데. 너무하잖아!’
츠스스스.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소름 돋는 소리를 내는 몸통이었다.
“브런치로 바퀴벌레 알을 먹고 오는 길이야. 노엘. 이건 뭐야?”
‘우웨에엑…….’
리마는 중간쯤에 붙은 다리 하나를 들어 입을 틀어막고 있는 나를 가리켰다.
“리사라고 해.”
“아. 어제 그 리사?! 그러고 보니 나랑 이름이 꼭 남매 같아! 내 누나 해 줄래?”
‘나는 너 같은 그리마를 동생으로 둔 적이 없다!’
츠스 츠스.
리마가 악수를 청하는 듯, 길고 뾰족한 두 번째 다리를 내게 내밀었다.
“…….”
나는 차마 그걸 만질 수 없었다. 작은 것도 못 만졌었는데…….
그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죽음이 가까운 듯했다.
시야를 좁혀, 그의 얼굴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악수 안 해?”
리마는 뻘쭘한지 팔을 삭 거두고, 더듬이를 기우뚱했다.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그리마의 더듬이는 귀엽지 않았다.
“미… 미안! 대신 마음속으로 했어. 너랑 악수!”
“뭐야. 혼자만 나랑 악수했어…? 실망이야…….”
츠스스스. 츠스. 츠스.
그가 제발 움직이지 않으면 좋겠다. 그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나는 수십 년씩 늙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럼, 나는 어서 가 봐야 해서….”
한계가 왔다. 코앞에 놓인 희망으로,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가면… 더 가면 나갈 수 있는데!’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옆으로 비켜나 계단을 다시 내려가려 했다.
“잠깐만, 누나.”
리마가 재빨리 내 길을 막았다.
불길하게도, 내게 무언가를 원하는 눈빛이었다.
“으… 응?”
“어제 노엘이 내 다리를 찾아 주겠다고 했단 말이야.”
“그, 그래서?”
“누나도 같이 찾아 주면 더 빠를 것 같은데. 도와주지 않을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내 앞의 이 녀석이 정상적인 크기였다면, 토치로 불태워 버렸을 것이라고.
하지만 왠지 모를 묘한 위기감에,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도움 요청을 빙자한 협박성 발언이 아닌가! 애초에 길을 막고 하는 말이니, 협박이 틀림없었다.
‘빨리 나가고 싶다고……. 제발….’
나는 구원을 바라는 처절한 눈빛으로 노엘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러자. 리사. 네가 도와주면 리마가 다리를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거야.”
내 바람과는 달리 노엘은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가장 듣고 싶지 않던 말을 꺼냈다.
금세 내 눈을 피하긴 했지만.
“…….”
여기서 내가 싫다고 하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그랬다가 저게 날 공격해 온다면?
앞에는 대형 그리마가 있고, 뒤에는 언제 휘둘릴지 모르는 철퇴가 있었다.
[맞아. 여기서 네가 거절한다면, 일단 그리마의 저 뾰족한 다리에 몸통이 꽂히겠지. 그다음엔 노엘이 철퇴로 마무리할 거고. 그러니 리마를 도와주도록 해.]
내 마음속을 엿본 의문의 목소리가 조잘조잘 속삭였다.
아무리 들어 봐도 코가 막힌 듯한 괴기한 목소리다. 성별 구분도 되지 않음은 물론이었다.
“이거 봐 봐. 내 다리가 10개나 떨어져 버렸어.”
츠스스스스.
리마가 뛰어오를 듯 기립하자, 매끄러운 몸통의 마디마디가 더 잘 보였다.
다리를 살펴보니 20개는 붙어 있었는데, 군데군데 빈 곳이 있었다.
“……20개만으로는 부족한 거야?”
“그럼! 제 속도가 나오질 않는단 말이야. 아주 불편하고 힘들어 죽겠어.”
“그런데 다리는 어쩌다 잃어버린 거야?”
“무언가가 나를 덮쳤어. 질 거 같아서 도망치다가… 다리로 멀리 유인하려고 떼어 놓고 왔는데, 다시 가 보니까 없어졌어.”
축 처진 더듬이와 함께 잔뜩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나도 다른 이유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일단 굴복할 수밖에.
“…알았어. 10개……. 얼른 찾으러 가자. 노엘.”
나는 노엘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렇게 된 거, 재빠르게 찾아 주고 떠야겠다.
“2층이야. 내 다리들은 2층에서 다 잃어버렸어.”
마침 조금만 더 내려가면 2층이었다. 2층이면 1층과도 가까우니 나쁘지 않았다.
그제야 길을 비켜 준 리마는 가운데 다리들을 기도하듯 마주 잡았다.
“정말 고마워! 누나. 다리를 다 찾으면 보답으로 내 달리기 속도를 보여 줄게.”
“…….”
흑, 제발 나한테 그런 거 보여 주지 마…….
“나도 2층에서 같이 찾아야겠다. 노엘이랑 누나한테만 찾으라고 할 순 없지.”
“그, 그럼 각자 흩어져서 찾아볼까?”
흩어져서 찾는 척하다가, 몰래 내빼는 것도 괜찮겠다.
츠스스스스. 츠스스.
무엇보다 같이 다니다가 리마의 몸과 살짝 스치기만 해도 죽을 듯이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거대 벌레의 촉감 따위 알지도 느끼고도 싶지 않았다.
“복도가 두 갈래로 나뉘니, 리마는 오른쪽으로 가고 우린 왼쪽으로 가도록 하자.”
이번엔 노엘이 나를 도와주었다. 완전한 혼자는 되지 못했지만.
노엘의 말에 리마는 서운해하면서도 순순히 따랐다.
노엘과 나는 다리를 다 찾은 뒤, 리마와 다시 계단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왼쪽 복도로 진입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이 이어졌다. 당장 코앞도 안 보이는데, 꼬챙이 같은 다리를 찾으라니.
“노엘… 대체 이 복도엔 방이 어디까지 있는 거야?”
“글쎄. 그래도 다른 층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은 편인걸.”
“그래…….”
“너무 조급해하지 마. 리사. 열쇠는 네가 갖고 있으니, 언제든 나갈 수 있어.”
어두워도 그의 미모는 여전히 맑게 빛나고 있었다. 다정하고 온화한 기운을 풀풀 풍기면서.
그런 그의 말 한마디에 조금은 여유를 되찾은 느낌…… 은 개뿔.
이러다 밤이 오면 또 기괴한 것들이 날뛸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이 끔찍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야겠지.
이다음엔 관이 아니라 아예 흙 속에 파묻힐 수도.
그렇게 되기 전 도망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