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고마워. 네가 이렇게 날 꺼내 줄 거라 믿고 있었어.”
“그래?”
믿음이란 좋은 녀석이군.
“응. 너는 나쁜 애가 아니니까.”
“그, 그렇구나.”
“리사,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이제부터 내게 거짓말은 하지 말아 줘.”
“응?”
내가 거짓말을 한 게 있었던가?
“나를 좋아한다고 한 거짓말.”
아, 그랬었지. 정체 모를 목소리가 시켜서 어쩔 수 없긴 했지만.
가능하면 그가 화날 만한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니 여기서부턴 솔직하게 사과하는 게 좋겠지.
“미…, 미안!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얘기할게. 그땐 너무 당황했고, 무서워서 그랬어. 입맞춤을 한 건… 넘어져서 생긴 사고였고…….”
“역시 착하네…. 솔직하게 말해 주니 고마워. 앞으로도 내겐 항상 솔직했으면 해.”
‘앞으로도’라고? 음….
더 이상의 앞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분명 열쇠를 빌려 바로 나갈 거라고 했는데? 그런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역시 열쇠를 주겠다는 건 거짓말이었을까.
“알았어! 내가 이곳을 나갈 때까진, 절대로 네게 거짓말하는 일은 없을 거야.”
대충 흘려듣기로 했다. 그의 말 한마디마다 깊이 생각할수록 나만 휘둘릴 뿐.
마음과는 다르게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쪼르르 흘러내렸다.
“그래. 믿어.”
“응!”
‘뭔가 싸한데……. 왜 이 녀석 얼굴을 오래오래 볼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거지?’
숨 막히는 공기 사이를 뚫고, 그저 그가 가진 열쇠만을 애타게 노려보고 있었다. 빨리 내놓으란 듯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노골적이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역시나 금세 알아차린 그가 피식 웃었다. 양옆으로 길게 휘어진 눈꼬리가 나를 휘감아 가두는 듯했다.
‘자, 어서 열쇠를 내놓으라고!’
심장 타들어 가는 긴장감은 나 혼자만 느끼나 보다.
“가만히 있어 볼래? 이 목걸이 걸어 줄게.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말보다도 행동이 빠른 녀석이었다. 어느새 내 뒤로 딱 붙어 있었다.
“어? 내가 해도 되는데….”
그가 순순히 자기 목에 걸려 있던 금빛 열쇠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 주었다.
가까이 닿는 그의 숨결이 겨울바람처럼 차가웠다. 그러면서도 코끝에 맴도는 향기가, 잠시 나를 화원에라도 데려다 놓은 듯했다.
목에 열쇠의 무게가 느껴지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언제라도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찬 기운이 났다.
반면, 너무 순조로운 것 같아 조금은 불길하기도 했다.
“잘 어울린다. 예뻐. 이제야 주인을 찾은 것 같아.”
그가 하는 말을 들으니, 이 목걸이가 단순히 열쇠인 것만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 고마워. 그럼 이제 가 볼까?”
1분 1초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노엘이 내 팔목을 잡았다.
“잠깐만. 지금 새벽이야. 우선 해가 뜰 때까지 여기 머물다 나가자. 밖에는 아까 같은 녀석들이 훨씬 많이 돌아다니고 있을 거야.”
흑…….
“맞다…. 그랬지.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네 말대로 하자.”
어깨가 절로 축 처졌다.
당장 뛰어 내려가서 열쇠로 문을 열고 나가면 그만인 건데, 그게 뭐 이리 어려운 건지.
“그래야지. 조금만 더 참아.”
“근데 여기로 아까 그 녀석이 또 들어오면 어떡해?”
둘 다 유리장에 갇히면 끝장이지 않은가.
“음…. 그래서 말인데, 우린 숨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로 숨을까? 역시 탁자 밑에?!”
나는 내가 숨었던 하얀 테이블보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대신 천천히 주위를 돌아다니며 탐색하더니 구석으로 가서 내게 손짓했다.
그가 있는 곳으로 가 보니 관 같은 크기의 까만 나무 상자가 있었다.
진짜 관 같기도 하고…….
‘관 맞네. 이건 관이 맞아.’
사람 둘은 충분히 들어갈 크기였다. 어쩜 이렇게 적당한 곳에 적당하게 마련되어 있는 건지.
이것도 전시라고 해 놓은 건가?
“여기에 숨어 있자. 졸리면 자도 돼. 아침이 되면 내가 깨워 줄 테니까.”
“그, 그럴까?”
뭔가 좀… 무섭다. 아니, 아주 무서워. 설마 진짜 내 관인 건 아니겠지.
지나가던 귀신도 모르게 죽기 딱 좋은 자린데. 역시 내 관이 맞는 거 아닌가.
어디 내 이름이 쓰여 있는 게 아닌지 자꾸만 이리저리 살펴보게 되었다.
“먼저 들어갈래?”
“어? 아니. 노엘 먼저 들어가.”
노엘이 먼저 들어가 옆으로 돌아눕더니, 이리로 누우라며 옆자리를 손으로 탁탁 쳤다.
어디서 많이 본 저 행동은, 로맨스 장르에서 흔히 출몰하는 설레는 행동이 아니었던가.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죽음으로 인도하는 사자의 손짓이었다.
“어서 들어와. 리사.”
‘어서 들어와. 여기가 네 무덤… 아니, 관이야.’라고 들리는 듯했다.
“…….”
그가 상큼한 미소로 나를 안심시켰지만, 이미 내 동공은 폭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렇다고 다시 뛰쳐나가기엔 새벽이라 괴상한 것들이 날뛰고 있을 텐데…….
드디어 나가는 문의 열쇠까지 얻었는데, 고지 앞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과연, 이 내적 갈등이 의미가 있긴 한 걸까?
“이번에는 날 애태워서 죽이려는 거야?”
그가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양팔을 내 쪽으로 활짝 열어 보였다.
가련한 미친놈이라니. 이질적인데 속아 주고 싶은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관 속에는 그가 철퇴를 휘두를 충분한 공간이 없었다.
‘오. 그럼 철퇴 맞을 일은 없겠는데…?’
그래도 역시 발이 떨어지지 않아 주춤하던 그때였다.
터벅. 터벅. 터벅.
아까 그 거인의 발소리였다. 고민하는 사이 점점 가까워졌다.
하필 이런 때를 딱 맞춰서 돌아오다니!
‘관 속 체험이냐, 유리장 체험이냐. 우열을 가릴 수 없구나.’
저 거인의 발걸음이 나를 점점 압박해 왔다.
마음이 급해지니, 당장은 노엘 옆이 더 나아 보였다.
결국 떠밀리듯 관 속으로 뛰어들어 그의 품에 안겼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치 제 방문을 닫듯 여유롭게 관 문을 닫았다.
끼익.
동시에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곧 방의 가운데로 온 그것은 한동안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유리장에 잡아넣었던 노엘이 없어져 찾는 걸까?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지, 그것이 가는 곳마다 물건이 떨어졌다.
“우워어어!”
찌이이이익.
테이블 밑에 숨었다간 딱 걸렸을 것이었다. 성난 것처럼 괴성을 내지른 그것이 흰 테이블보를 마구 찢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는 노엘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더욱 깊게 묻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도 나를 꽉 안았다.
자기 몸집의 세 배나 되는 거인이니, 그도 당해 내기 쉽진 않았을 것이었다. 아까도 질질 끌려가 가두어졌으니.
‘그도 무서워하는 게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와 내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걸까?
나는 점차 그 괴물이 무얼 찢든 떨어뜨리든 상관하지 않게 되었다.
‘타인한테 이렇게 안겨 본 적이 있었던가. 사람 품속이란 게 이렇게 포근한 곳이었나.’
노엘이 흘리는 그윽한 체취에 조금씩 안정을 찾은 나는 그의 따듯한 품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가 무어라 중얼거리는지도 듣지 못한 채.
“리사, 이렇게 널 묻어 버리고 싶었어. 내 품 안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내 옆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다정한 손길은 어렴풋이 기억에 남았다.
“그거 알아? 너와 입맞춤하는 건 오랫동안 꿈꿔 왔던 일이었어. 그리고 네가 넘어진 거… 그게 사고여서 슬프면서도…… 그렇게 좋더라.”
그 손길이 무척 기분 좋아서, 어쩌면 꿈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도 넘어질 거면 나한테 와서 넘어져. 알았지? 이번엔 절대 아무한테도 넘겨주지 않을 거야.”
난리를 피우던 거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해져선 유유히 사라졌다.
“그럼, 잘 자. 너를 위해 만든 관 속에서.”
***
“근데 여기로 아까 그 녀석이 또 들어오면 어떡해?”
“음…. 그래서 말인데, 우린 숨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노엘은 미리 만들어 놓은 관으로 다가가, 리사에게 손짓했다.
그녀를 위해 손수 만든 지는 꽤 오래됐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가 생길 줄이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여기에 숨어 있자. 졸리면 자도 돼. 아침이 되면 내가 깨워 줄 테니까.”
고개를 돌린 노엘의 입가에 탁한 웃음이 번졌다.
‘내가 말했잖아? 오늘 밤은 꼭 너와 함께 보낼 거라고.’
***
놀랍게도 이런 상황에서 정말 잠을 잤다. 게다가 푹 잤다.
얼마나 잔 건지, 눈을 뜨니 온통 깜깜했다. 관 속이었으니 당연하겠지만.
문제는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쯤 되니 영원히 깰 수 없는 건지, 이곳이 정말 게임 속이긴 한 건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별 하나 없는 우주 한복판에서, 나 홀로 침전하는 기분.
너무 허전하다 싶더니 노엘이 없었다. 당황해서 양옆으로 손을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흐윽…….’
갑자기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폐소공포증이라도 걸린 듯 곧장 팔을 뻗어 관 뚜껑을 밀었다.
영영 이 안에서 산 채로 못 나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잠시, 묵직한 관문이 활짝 열리자 다시 숨이 쉬어졌다.
‘헉…. 진짜 파묻힌 줄 알았네.’
“일어났어?”
관 바로 옆에 기대어 앉아 있는 노엘의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오늘따라 눈 밑이 더 검붉고, 어딘가 토라져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노엘… 왜 밖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