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뭐야!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철퇴에 손이 가?’
나는 발발 떨며 머릿속으로 아까 그 의문의 목소리에게 따졌다.
[아슬하게 0.1초가 지났어. 네가 죽게 되어 유감이야. 그럼, 잘 가.]
‘뭐? 자, 잠깐만! 야! 야이, 저기요? 나 아직 살아 있거든?’
나를 죽은 사람 취급한 목소리는 더 이상 내게 속삭이지 않았다.
저렇게 인사까지 하는 걸 보니 날 포기라도 한 것 같은 뉘앙스다.
나도 일단 목소리와의 대화는 집어치우기로 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물어본다고 한들,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내 급박한 물음에 노엘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입꼬리를 위로 쭉 찢으면서.
“갑자기 소원 들어주려고? 나야 원하는 건 단 하나지. 이곳에서 너와 영원히 함께하는 거.”
……그 소원은 영원히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은데. 설마, 정말 게임 속이라면 이 녀석이 최종 보스 뭐 그런 건 아니겠지.
“꼭 이곳이어야만 해? 나가서 함께하는 건 안 돼?”
적어도 이곳을 나가서라면 나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응. 꼭 이곳이어야 해.”
우린 영원히 함께하긴 글렀다.
던져진 주사위가 내게 말하고 있었다. 붉은 사이렌을 번쩍거리면서.
도망가라고.
드디어 그가 철퇴를 완전히 뽑아 들었다.
손등의 핏줄이 울긋불긋 잔뜩 성이 나서는, 저 무시무시하게 생긴 것이 곧 내게로 날아들 것이었다.
‘튀자.’
여기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철커덩.
철퇴의 쇠사슬이 펼쳐짐과 함께, 나는 문을 향해 죽기 살기로 뛰었다.
“리사! 나가면 안 된다니까….”
길고 긴 복도를 그저 미친 사람처럼 달리고 달렸다.
내 머리카락이 폭풍처럼 휘날릴 정도였으니, 백금발이라는 것도 이제야 알아차렸다.
꽤 멀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맞은편에서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터벅. 터벅.
걷는 속도가 느리고, 다소 무거운 발소리였다. 하지만 보폭은 커서 빨리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앞이 캄캄해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지만, 사람의 형체임이 틀림없었다. 풍채로 보아 아주 건장한 남성이다.
“사… 살려 주세요!”
저 남자라면, 노엘도 무서워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으니.
절박한 마음에 필사적으로 소리 질렀다가, 곧 후회하고 말았다.
가까워질수록 드러나는 그의 피부 색깔을 봤기 때문이었다. 검푸른 그것은 산 사람이라고는 전혀 여길 수 없었다.
그런 것에 눈, 코, 입이 제대로 붙어 있다고 해 봤자, 아무 위로도 되지 않았다.
나를 확인한 그것은 커다란 발을 망치질하듯 굴리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쾅쾅쾅.
그 덩치와 소리에 짓눌리듯 압도당하고 말았다.
경악해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드럽게 밀쳤다.
“컥!”
덕분에 복도 옆으로 나 있는 큰 방으로 굴러 들어왔다.
상황이 급박해서 그런지 아픈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다.
간신히 바짝 정신을 차린 나는 방 안의 조그만 탁자 밑으로 허겁지겁 기어들어 갔다. 하얀 테이블보가 바닥까지 내려온 탁자였다.
‘누가 날 밀친 거지?’
누군진 몰라도 덕분에 살았다.
귀를 쫑긋할 필요도 없이, 바로 앞 복도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테이블보를 살짝 들어 올려 밖을 주시했다.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가까워졌고, 조금 전에 본 건장한 좀비 같은 남자가 노엘의 멱살을 잡고 들어왔다.
지금 보니 그냥 건장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몸집이 노엘의 세 배는 되는 듯, 거인 같았다.
노엘의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붙잡혀서 괴로워하는 신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혹시라도 들킬까 봐 입을 꽉 틀어막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노엘이 날 구한 거였어?’
어째서? 죽이려 할 땐 언제고…….
남자는 노엘을 방의 한가운데로 끌고 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 방은 화랑 같은 곳이었다.
방의 중앙에는 커다란 유리장이 놓여 있었는데, 게임 홍보 영상에서 보았던 것과 일치했다.
예상대로 남자는 노엘을 유리장에 넣고 가두었다. 그러고는 다시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터벅. 터벅. 터벅.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노엘에게 접근했다.
유리장 속의 노엘은 기운 없이 축 처져선, 벌을 받듯 간신히 서 있었다.
노엘의 키에 비해 유리장이 작아서,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구부러진 채였다.
내가 유리장을 손톱으로 톡 치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뭐야……. 아깐 무서웠는데, 이러고 있으니 그냥 평범한 사람 같네.’
이렇게 보니 이 녀석 나쁜 게 맞나 싶기도 하고…….
“리사, 다친 덴 없어? 많이 놀랐지. 그러니까 내가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구해 줘서.”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나를 걱정하고 있어 더욱 난감했다.
‘뭐지. 분명 살려고 도망친 건데, 왜 내가 사고 친 것 같은 느낌이….’
나 때문에 갇힌 거면서 어떻게 싫은 표정 하나 안 짓는 거지?
“고마우면 이제 나 좀 여기서 꺼내 줄래? 이 유리장 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어. 거기 모서리에 손잡이 보이지?”
“어어…. 응. 그냥 돌려서 열면 되는 거네.”
그러고 보니 게임 홍보 영상에서 봤던 장면이랑 똑같다 싶을 정도로 비슷한 상황이었다.
‘아직 이 녀석을 풀어 주기는… 매우 무서운데. 또 철퇴 들고 쫓아오면 어떡하지.’
새삼스럽지만, 이 녀석이 나를 쫓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럼 어서 열어 줘.”
나를 구해 준 건 고맙지만, 역시 섣불리 그를 풀어 줄 수는 없었다.
“저기, 노엘. 이 별장을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 보니까 문에 열쇠 구멍이 있던데, 열쇠가 필요한 거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은 모르겠지만, 일단 이 별장이라도 좀 빠져나가고 싶었다.
“아. 이 열쇠로 열면 나갈 수 있어.”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의 목에 걸려 있는 열쇠 목걸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악! 그게 왜 하필 너한테 있는 건데!’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다. 나의 불안이 그의 희망이 될 수도 있다.
“그럼, 내가 나갈 수 있게 그 열쇠 좀 빌릴 수 있을까?”
“물론이야.”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지 사실 모르겠지만, 일단 그가 날 살려 주었다는 것에 신뢰가 조금은 생겨난 것도 같다.
설령 그가 열쇠를 순순히 내어 주지 않는다 해도, 열쇠를 얻으려면 어쨌든 그를 꺼내 주긴 해야 했다.
절망스럽지만 내겐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정말이지…?”
머뭇거리며 재차 확인하는 내게 그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유리장에서 나가자마자 이 열쇠를 네 목에 걸어 줄 거야.”
반응은 생각보다도 아주 협조적이었다. 이러면 더 믿고 싶어지기 마련이지만, 아직은 말만 그럴싸할 뿐.
저 안에 갇히면 무슨 달콤한 말인들 하지 못할까.
[그의 말은 사실이야. 그러니 열어 주도록 해. 게다가 1층의 출입문으로 나가면 원래 살던 곳으로도 돌아갈 수 있어.]
내게 잘 죽으라며 작별했던 의문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는 속으로 목소리에 말을 걸었다.
‘내가 왜 널 믿어야 하지? 네가 시킨 대로 했는데도 죽을 뻔했다구! 거기다 날 죽은 사람 취급까지 하고 말이야.’
[네가 시간을 초과해서 그런 거잖아.]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다. 사실이니까.
‘1층 출입문만 열면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단 거. 진짜야?’
[……진짜야.]
‘방금 좀 머뭇거리지 않았어?’
[진짜라고.]
기분 탓인가. 일단 믿어 볼 수밖에 없는 건가.
믿지 않으면 어쩔 건데? 스스로 질문해 보아도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노엘은 나갈 수 있는 열쇠를 지니고도 이곳을 나가지 않는 거지? 여기가 그렇게 좋은가?
“근데 넌 왜 여기 있었어?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기에…….”
그가 뒷말을 얼버무려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응? 잘 안 들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다만, 나는 이곳을 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아.”
궁금했지만, 말하기 꺼리는 듯해 더 파고들 수는 없었다.
나는 유리장 문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유리장의 서늘한 온도가 이상스레 한기처럼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두근두근…….
다시 한번 목숨을 건 도박이라도 하는 것 같은 감정에 휩싸였다.
‘이제 이 문을 열면… 또 도망가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혼자서 이 넓고 험한 곳을 돌아다녀 봤자였다.
일단 의문의 목소리를 믿어 볼 수밖에. 저 열쇠가 없으면, 정말 영원히 이곳에 발이 묶일지도 몰라.
‘열쇠를 넘겨주지 않는다면, 빼앗아서라도 획득해야만 해.’
달칵.
유리장의 문이 열리고, 기다렸다는 듯 노엘이 빠져나왔다.
***
“근데 넌 왜 여기 있었어?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리사의 말에 노엘은 아주 작게 대답했다.
“여기에 네가 있잖아. 네가 있는 곳이 곧 내가 있을 곳인걸. 근데, 리사… 왜 자꾸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 거야?”
“응? 잘 안 들려.”
다행히 의도한 대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모양인데. 그녀를 시무룩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다만, 나는 이곳을 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아.”
궁금해서 죽으려 하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귀여워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너도 나갈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헛된 희망 품지 말고, 어서 이 유리문 좀 열어 봐.
오늘 밤은 꼭 너와 함께 보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