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검이 뽑힌 자리
타론 제국의 황제가 바뀐 지 삼 년이 지났다.
탄신 연회에서 독을 마신 황제는 이 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서거했다. 그녀는 꽤나 끈질기게 황제위를 꿰차고 있었으나, 죽음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그 뒤로 곧바로 새로운 황제가 등극했다.
페이네리아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항간에서는 황태자였던 라베이츠가 지고의 자리를 얻고자 천륜을 저 버릴 수도 있지 않겠냐고 떠들어 댔다. 무엄한 이들은 자리를 보전하고 누운 페이네리아의 침소에 암살자들이 숨어들지도 모른다 점쳤다.
그러나 황태자는 병상에 있던 황제보다 더 일찍 죽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상처 하나 없는 채로 시신이 되어 나왔다. 뿐만 아니라 라베이츠를 견제하던 삼 황자도 돌연 사라졌다.
결국, 황제 자리를 꿰찬 건 사 황자 헤넬라드였다. 지고의 자리 따위에는 관심 없던 겁쟁이 열다섯의 소년.
황위는 불안정했다. 그의 아비는 전장에서 전사한 기사였으며 가문도 형편없었기 때문에. 공작의 비호를 필요로 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아니, 필요하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못했다. 휴리트 공작가와 견줄 만했던 루데인 후작가의 가주 또한 어느 날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스러져 가는 황권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일 인물은 리안 휴리트 외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걸음 해 주어 고맙군, 공작.”
헤넬라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투를 꾸며 내며 리안을 바라보았다. 팔걸이를 꽉 쥔 채였다. 휴리트 공작은 여유로운 낯으로 싱긋 웃고는 천천히 예를 갖추었다.
“타론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는 언제나처럼 단정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어디로 보나 기품 있는 공작가 가주의 모습이었다. 둘은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다과와 향이 좋은 차가 올라와 있었다.
“……다음 출정이 보름 후였나.”
“예, 그렇습니다.”
리안은 눈을 한껏 휘었다. 꿀꺽. 황제의 목울대가 울렸다. 그는 공작의 저런 얼굴을 볼 때마다 목이 죄이는 듯 갑갑했다. 어쩌면, 사람의 목을 베러 가는 데 저리도 설레는 표정을 띠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폐하의 타론이 더욱 위대해지겠지요.”
리안은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넘겼다. 황제 또한 공작을 따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손에 땀이 가득 차올랐다. 헤넬라드가 테이블 아래로 팔을 내리곤 손가락을 꿈질댔다. 리안은 예의 그 친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봤다.
깔끔하게 올린 머리칼과 선명한 눈동자가 검은 채로 조화를 이루었다. 뭇 여성들이 칭송하는 외피는 아름다우면서도 정갈했다. 그러나……. 감정이 말라붙어 모든 걸 꾸며 내는 모양이 마치 밀랍 인형과 비슷해 보였다.
헤넬라드는 숨을 흡 들이마시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언제나 그랬듯 공작이 원하는 바를 내어주기 위해서였다.
“로넬라이드의 국경을 넘어 함락한 뒤에는, 자네가 원하는 대로 수색을 하게.”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그대가 제국의 광영을 위해 이토록 노력하는데 당연한 일이지.”
기실 헤넬라드는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 데 관심이 없었다. 아니, 사실 황제위와 관련된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어린 소년은 그저 살고 싶었다. 그래서 황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리안 휴리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야 내부의 단결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지극히 진부한 설득 때문이었다.
하지만 열다섯 먹은 헤넬라드조차 리안의 목적이 다른 데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그가 원하는 건 제국의 광영 따위가 아니다. 리안 휴리트는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를 마음껏 헤집을 수 있는 권한을 원했다. 그렇게 해서, 숨어 있는 제 아내를 찾아내려고.
그가 아내를 찾기 위해 부순 국경만 다섯이 넘었다. 대부분은 속국이 되거나 타론에 흡수된 뒤 리안 휴리트가 성에 찰 때까지 헤집었다. 헤넬라드가 황제가 된 후 삼 년 내내, 그랬다.
“이번에는 기대가 큽니다. 로넬라이드처럼 폐쇄적인 나라는 몇 없으니까요.”
몸을 숨기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리안은 약간 아득하게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찻잔을 들었다. 황제가 쭈뼛대며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때, 젊은 시종이 누군가의 등장을 알렸다.
“자이투스 백작이 폐하의 알현을 청합니다.”
* * *
리안은 자이투스 백작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황궁을 나섰다. 용건을 마쳤기 때문에 더는 황제의 옆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자이투스 백작이 기름진 얼굴을 들이밀고 아부해 대는 모습은 지나치게 역했다.
그는 황궁의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감상에 젖어 꽃구경 따위를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단지 작은 정원을 지나야만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문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리안은 어지러울 정도로 풍겨 대는 독한 꽃향기들 때문에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그런데 그런 남자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양산을 쓴 채 정원의 꽃을 감상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흐르듯 쏟아지는 백금발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 모양이 누군가와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리안은 잠시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아주 그리운 무언가를 그리는 듯한 눈빛이 태양 아래의 여인을 훑으며 점점 집요해져 갔다.
쿵. 쿵. 심장 박동이 손끝까지 전해질 정도로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머리통 안쪽이 지끈 대기 시작했다. 리안이 핏줄이 선연히 돋은 손을 쥐었다 폈다. 저도 모르게 땀이 찼다.
“안녕하세요.”
“…….”
그리고 얼굴을 확인한 순간, 폭풍처럼 솟구쳤던 감각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도.
리안은 자조하며 저에게 인사하는 여인에게 적당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지나치려고 하는데, 여자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솔레니아 자이투스라고 합니다.”
그녀는 다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고아하게 웃었다. 자이투스. 이름 뒤에 붙은 단어를 듣자마자 리안은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했다. 비죽, 웃음이 샌다.
“황제 폐하와 알현하고 나오시는 길이신가요?”
솔레니아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부서지듯 고막을 거쳐 들어왔다. 순간 리안은 자신의 귀를 잘라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두통이 일었다.
리안의 얼굴에 변화가 없단 걸 확인한 여자는, 그게 긍정적인 신호라 생각했는지 더 적극적으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한 발, 리안에게 다가선 채였다.
“아무래도 로넬라이드와의 국경 분쟁 때문이겠죠?”
물론 공작께서 계시니 큰 걱정은 덜어 둔 셈이지만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눈꼬리를 둥글게 접었다. 동그란 눈동자가 예쁘게 휜 채 그를 바라봤다. 햇살을 머금은 눈동자는 아까보다 조금 더, 옅었다.
“이런.”
리안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미려한 외모는 웃을 때 더 빛을 발했다. 순간 솔레니아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오늘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해 댄 아버지의 명에 따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는 양 볼에 보조개가 짙게 팰 만큼 활짝 웃었다.
“아버지께서도 평소 공작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신답니다. 워낙…….”
“솔레니아 영애.”
리안이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명백한 무례였지만 묘하게 다정하다 느껴져 화를 낼 수가 없는, 그런 어조였다.
“아쉽게도 선약이 있습니다.”
“아…….”
그녀는 답지 않게 우물대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얼굴을 했을 때 남자들이 어떤 마음을 먹는지 알았다. 허둥대며 그녀를 달래려 들 테다. 그러나 솔레니아의 기대와는 다르게, 리안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
그녀는 결국 다급히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살짝 드러난 남자의 팔은 단단했다. 그리고 동시에 잘은 상처들로 범벅되어 있었다. 여자는 손목 부근의 상처를 보지 못했지만, 리안의 눈빛은 약간 가늘어졌다.
“아, 실, 실례했습니다.”
말을 더듬으며 얼굴을 붉혔다. 물론 계산된 행동이었다. 기실, 입궁하여 이 자리에 서 있었던 것, 리안에게 말을 건 것 모두가 짜여진 각본이었다.
솔레니아는 리안 휴리트를 유혹해 공작 부인의 자리를 꿰차야만 했다. 욕심이 났기 때문에.
황좌 위에 있다는 공작가의 위세를 업는다면 못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야심만만한 여자였다. 그녀는 잡고 있던 옷깃을 천천히 놓았다. 그리고는 순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렇다면, 달밤에라도 제게 시간을 내어주시면 안 될까요?”
의심할 바가 없는 유혹이었다. 달이 뜨는 밤에 남녀가 만난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가벼운 만남을 주로 즐기는 귀족들 사이의 은어였다. 물론 솔레니아는 가벼운 만남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한 번의 잠자리만으로 리안 휴리트를 완전히 홀릴 수 있다 자신했다. 그녀의 밤 기술에 홀리지 않는 남자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주머니 안에는 미약을 담은 유리병이 있었다. 이걸 먹여 그를 홀리는 데 성공만 하면, 아이를 가져 공작가에 입성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솔레니아는 부러 고개를 푹 숙이며 천진한 영애 흉내를 내었다.
“무례처럼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녀는 흘금 위를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뜰 듯했던 공작이 의외로 가만히 서 있었다. 솔레니아는 그가 자신에게 흥미를 보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참에 쐐기를 박자.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는 단지, 공작께서…… 외로우실 듯하여, 공작 부인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메워 드리고 싶었답니다.”
문장을 뱉으면서도 그녀는 두근대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건 그녀로서도 꽤나 도박인 셈이었다.
아버지가,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리안 휴리트의 앞에서 아내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 금기시했다. 그 여자의 빈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면서도 여자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지금 리안 휴리트를 붙잡으려면 이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그분에 비하면 저는 한없이 부족하겠지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리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솔레니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잘게 떨리는 몸과 함께 나풀대는 황금빛 머리칼을 쫓고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아…….”
리안이 손에 쥔 것은 솔레니아의 머리칼이었다. 그녀는 훅 끼쳐 드는 그의 향기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친다. 리안 휴리트는 활짝 웃고 있었다. 누구든 홀릴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엉켜 부드럽게 흩날렸다.
“내가 그 여자를 찾으면 어찌할 줄 알고.”
“…….”
“정말로 ‘그녀 대신’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방금까지의 두려움은 금세 휘발되었다. 솔레니아는 드디어 자신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이제껏 누구도 그의 곁에 접근하지 못했는데……!
“네, 기꺼이.”
리안이 솔레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정중함이 담긴 손짓이었다. 그녀는 손을 맞잡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작가의 마차까지 걸어가 탑승했다.
마차는 황궁을 완전히 벗어나 달리고 달렸다. 솔레니아는 그 안에서 리안 휴리트를 흘금대며 훔쳐보았으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의외로 굉장히 다정했으며 부드러웠다. 솔레니아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지금은 헤일라라는 여인의 대신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완벽한 공작 부인이 되어 권력을 휘두를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자이투스 가의 저택에 작은 상자 하나가 도착했다. 그 안에는 고운 여자의 손과 발, 그리고 다갈색 눈동자 한 알이 들어 있었다.
* * *
“대체 어쩌실 생각으로 일을 벌이셨어요?”
미아르는 신전의 가장 끝에 위치한 조용한 방에 앉아 리안을 독대하고 있었다.
“자이투스 백작가가 이전만 못 해도 귀족이라고요. 그렇게 티 나게 죽이시면 어떡해요!”
그녀는 새된 목소리로 리안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나 이건 화를 내는 것보다 한탄에 가까웠다. 이미 벌어진 일인 데다가 수습을 못 할 정도의 사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사람을 써서 조용히 처리하셨어야죠. 아, 한동안 또 얼마나 시끄러울까.”
리안은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담배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미아르도 작게 한숨을 쉬고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왜 그러셨어요?”
“…….”
“그래도 적당히 선은 지켜 오셨던 것 같은데. 이제 못 견디시겠는 거예요?”
그녀는 짐짓 걱정된다는 투였다. 그러나 리안은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미쳐 버렸냐는 의미였다. 사리 분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면 더 이상 리안과 거래할 수 없으니 그를 떠보는 것이다. 오 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녀의 세상은 여전히 돈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아직 미치지 않았으니 걱정 마.”
미아르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입을 삐죽였다.
“헤일라 대신이 되고 싶다고 하기에 원하는 대로 다뤄 주었을 뿐이야.”
“세간에선 그런 걸 미쳤다고 하죠…….”
그녀는 혀를 차면서 뒤에 있던 심복에게 손짓했다. 은쟁반을 든 시종이 바짝 다가와 허리를 굽혀 반짝이는 유리병 하나를 건넸다.
“여기요. 음용하시고 내일 오후에 저택으로 돌아가세요.”
“아침에 출발할 거야. 세리아랑 식사하기로 했거든.”
“……약 기운이 남아 있으실 거예요.”
미아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에게 제공하는 약은 신전만의 방식으로 배합하여 만든 환각제였다. 적당한 양만 복용하면 몸에도 해롭지 않고 수면을 도왔다. 하여 웬만한 귀족들에게도 경매로만 넘길 만큼 귀한 물건이었다. 밖으로 새어 나가면 곤란한 건 신전과 미아르였다.
“이렇게 비협조적이실 거면 차라리 저택 안에서 약을 하세요. 그럼 세리아 아가씨랑 식사도 제시간에 맞춰 하실 수 있으실 테고.”
“그건 곤란해.”
미아르의 둥근 어깨가 가볍게 으쓱였다. 리안이 담배 연기를 뱉고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리아는…… 겁이 많아.”
“아, 네에.”
미아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리안의 딸 사랑은 아주 지극할 정도여서, 결코 저택 안에서 비상식적인 행위를 벌이지 않았다. 약도 그중 하나였다. 징그러운 내리사랑이었다. 물론 그것도 그 여자 때문이겠지만.
미아르는 찡그리고 있는 리안 휴리트를 바라봤다. 언뜻 보기에 남자는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아니, 그는 더욱 완벽해졌다.
묵직한 중압감과 묘한 여유로움을 동시에 풍기는 남자는 아쉬울 게 없어 보였다. 실제로 그는 마음고생한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미아르는 그의 이면에 관해 아주 잘 알았다. 그는 몸이 야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끔찍이 노력했다. 거의 억지로 음식을 섭취하는 수준이었다. 꾸역꾸역 식도에 음식을 밀어 넣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지독한 식이장애를 앓았음에도 결코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 모든 걸 게워 낸 뒤에는 꼭 정량만큼 더 식사했다.
언젠가 왜냐고 물었을 때, 뭐라고 했더라.
‘헤일라는 내 껍데기를 꽤 좋아해.’
그는 그렇게 말했다.
리안은 헤일라가 좋아했던 부분을 훼손하여 미움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다시 만나 가둬 두면 안 그래도 미움을 잔뜩 받을 테니 조금이라도 잘 보일 구석을 남겨 두어야 한다고.
이 정도로만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리안 휴리트는 요즘 사라진 부인에 대한 폭력적인 욕구를 참지 못하고 엉뚱한 데 풀곤 했다. 이제는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증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정말 다시 만나면 손발을 자르고 오른쪽 눈까지 파 없애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렇게 미쳐 버리면 정말 곤란했다. 아직 그는 뽑아 먹을 구석이 많은 귀족이었다.
미아르는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금 내일 오후에 나서시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방을 나갔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리안은 그대로 약을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 * *
그는 준비된 침상에 누워 있었다. 오른쪽 팔을 두 눈 위에 올려 시야를 가렸다. 소매가 살짝 올라가 안쪽 팔을 점령하고 있는 징그러운 자상들이 드러났다. 리안은 한참 동안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잠에 빠지지도 않았다.
“……오늘은 안 나타나 줄 거야?”
눈을 가린 채로 허공에 묻는 목소리는 어딘가 처량했다.
“헤일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이 천천히 내려갔다.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투정을 부리는 아이 같기도, 정신이 빠져 중얼대는 미치광이 같기도 했다. 리안은 흐릿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면서 계속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약간 흐릿하게, 저 멀리에 무언가가 보였다.
“헤일라.”
그녀는 물 안에서 눈을 떴을 때처럼 뭉근한 형태로만 보였다. 그녀가 입을 뻐끔대며 리안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남자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약 기운에 취해 금방 몸이 무너져 내렸다.
“얼굴 좀 보여 줘, 제발.”
그는 이불에 얼굴을 처박은 채 중얼댔다. 그러면서 왼 주머니에서 작은 칼 하나를 꺼냈다.
헤일라가 남기고 간 칼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의 왼 눈알을 훼손시킨 칼이리라.
그는 광기에 잡아 먹혀 헤일라의 왼눈을 도려내었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리안은 언제나 이 칼로 자신을 상처 냈다. 흐릿한 모습의 헤일라는 자해를 할수록 약간씩 선명히 보였다. 마치 상을 주듯.
“가까이 좀 와 봐, 응? 헤일라, 흐읏…….”
리안은 헤일라의 잔상을 보며 망설임 없이 팔뚝을 그어 내렸다. 붉은 피가 주욱, 하고 흘러내렸다. 툭, 투둑.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모양이 꼭 빗방울 같았다.
“흣, 나 아파. 아파, 헤일라…….”
잔뜩 어리광을 부렸다. 그럼에도 여자는 다가오지 않았다.
“무서워? 무서워서 그래?”
리안은 쉬이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헤일라에게 애가 닳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너한테 그러려는 거 아냐, 그 여자가 자꾸 널 대신 하겠다고…… 그래서 그냥 혼을…….”
헤일라의 환영이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순간 남자의 눈에 핏발이 선다.
“가지 마!”
그가 혼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얼굴 근육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가지 마, 가지 마! 가면 아프게 할 거야! 손도 발도 다 잘라서, 눈도 다 파내고, 흐윽…….”
리안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꾸물꾸물 움직여 침대 아래로 쿵, 떨어진 남자가 고개를 들고 환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 거야…….”
비정상적인 충동이 그를 난도질했다. 당장 앞에 있는 여자의 신체를 훼손시키자. 영영 가둬 두고 어여뻐 해 주자.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다시는…….
아니, 아니다. 그러면 안 돼. 미움받을 테다. 영영 관심 한 자락 받지 못하고 말라 가게 될 거다. 그러니까, 아, 그러니까…….
푹, 리안이 제 어깨를 칼로 찔렀다.
“잘못했어…… 나 좀 봐 줘…….”
아프면 나타나 준다. 그건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환영은 정말로 그랬다. 몸을 망친 데 대한 선물을 베풀 듯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나 주었다.
그래서 환영인 것이다.
헤일라는 그가 죽는다 해도 눈앞에 나타나 주지 않을 테니까.
“아, 아아…….”
드디어 그녀가 조금 선명하게 보였다. 헤일라는 침대에서 떨어진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리안이 그녀에게 닿기 위해 일어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쿵, 바닥에 닿은 무릎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리안은 무릎걸음으로 기어 헤일라가 앉아 있는 의자 앞으로 다가갔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리안의 무릎은 단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리안이 헤일라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팔을 뻗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허공을 짚는 남자의 손은 꽤나 진중하게 움직였다. 여자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리안은 그 모습을 홀린 듯 지켜보았다. 헤일라의 눈이 천천히 구부러지더니 아름답게 휜다.
“괴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리안은 그 모습마저 좋아서 따라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녀가 말을 걸어 주었다. 기뻤다.
“응, 응…….”
리안은 끙끙대며 헤일라의 허벅지에 제 얼굴을 뉘었다. 그녀가 손으로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며 간절히, 간절히 울었다. 그러나 헤일라의 환영은 금세 무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연기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리안은 언제나 그랬듯 환영이 사라지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 * *
“오, 오늘 아버지 오는 거야?”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방이었다. 온갖 인형과 반짝대는 장난감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다. 침대에는 풍성한 레이스가 둘려 있었고 아이는 그 중앙에 앉은 채 우물댔다. 아이는 어딘가 불안한 사람처럼 눈을 천천히 굴렸다.
“나 그럼 뭐 해야 돼?”
세리아. 리안 휴리트와 헤일라의 아이는 어미를 쏙 빼닮은 얼굴을 하고 노데이나를 올려다보았다. 노데이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이의 머리를 빗겨 주다가 입술을 살짝 물었다.
“별일 없으실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되어요. 제가 옆에 있을 테니까…….”
“아, 안 보면…… 그러면 안 돼?”
“…….”
“노데이나, 혼나?”
아이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비를 무서워하는 모양새였다. 노데이나가 세리아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짧게 자른 황금빛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주인님께선 결코 아가씨를 해치지 않으세요. 아프게도 하지 않아요. 우리 예쁜 아가씨의 아버지인걸요.”
무서워하실 게 없어요. 그녀는 저에게 달라붙어 색색 대는 세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이는 그래도 불안한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보드라운 볼이 하녀의 어깨에 납작하게 퍼졌다.
“그래도…… 무서워.”
“…….”
노데이나는 다른 말을 찾지 못하고 아가씨를 안아 주었다. 그녀는 세리아의 두려움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토닥, 토닥 등을 두드려 주니 아이는 서서히 울음을 멈추었다.
그때, 방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노데이나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세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세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하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런 체념 어린 모습이 하녀의 가슴을 찌르르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젖은 수건을 다른 사용인에게 부탁한 뒤 세리아의 눈 아래를 닦아 주었다. 다행히 열이 오르지는 않았다.
얼굴이 깔끔해진 세리아는 이제 아비를 마주하러 가야 함을 눈치채고 침대에 앉은 채 두 손을 뻗었다. 노데이나가 살풋 웃으며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대로 방을 나가 계단 아래까지 노데이나가 안고 가는 게 보통이었다.
“세리아.”
그런데 방을 나서려는 때, 누군가 먼저 문을 열었다.
리안이었다.
“잘 지냈어?”
그는 환한 낯으로 세리아에게로 다가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리아를 안고 있는 노데이나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노데이나는 뒷걸음질 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남자는 여전히 완벽했고, 서늘했다.
“자.”
그런 하녀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리안이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아빠한테 와야지.”
세리아가 와앙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을까. 노데이나는 리안의 웃는 얼굴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리아는 리안에게로 손을 뻗었다. 이전처럼 서툴게 반항하지도 않았다. 아비는 냉큼 아이를 받아 들었다.
“옳지.”
“다녀오셨어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는데도 리안은 기분 좋은 사람처럼 헤실댔다. 그는 능숙하게 아이를 안고 노데이나에게 눈짓했다. 나가라는 의미다.
“아, 저…….”
하지만 둘을 한 방에 두어도 괜찮을까. 그런 일은 없었지만 혹시나 아가씨에게 해가 되는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괜찮아. 나 아버지랑 둘이 있을래. 노데이나는 쿠키 가져와.”
노데이나가 망설이자, 자신의 하녀가 혼날까 걱정이 된 세리아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럼, 다과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하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아마 문밖을 나서는 순간 전속력으로 주방에 달려가리라.
리안은 닫힌 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딸을 안고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아이용 의자에 앉히고 맞은편에 앉으니 제 손가락만 응시하는 작은 머리통이 보였다.
아이의 솔직한 감정은 시선만으로도 잘 드러났다. 리안은 경계를 풀어 주려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오전까지 도착해서 세리아랑 식사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일이 많았어.”
“괜찮아요.”
아이는 전혀 섭섭해하지 않았다. 리안은 그것을 알면서도 또 미안하다 덧붙였다. 오히려 그가 섭섭해하는 것 같았다.
또 대화가 중단되었다. 어색한 사이에서나 나올 법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감돌았다. 리안은 약간 안달이 난 사람처럼 세리아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러다 화젯거리가 다 떨어졌다 느껴지자, 가장 식상한 질문을 던졌다.
“오늘은 뭐 하고 놀았어?”
세리아는 여전히 눈을 아래로 고정한 채 대답했다.
“……밥 먹고, 책 읽고, 산책도 했어요.”
“음, 그랬구나.”
리안은 그렇게 답하고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달칵, 노데이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안색이 대번 밝아졌다.
노데이나는 다른 하녀 하나와 함께 깔끔하게 다과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리안은 채워져 가는 테이블 위를 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되짚는 얼굴로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는 제 앞에 놓여진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을 마신 뒤 내려놓았다.
“그런데 세리아.”
“…….”
“어머니께 인사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세리아는 그걸 깨닫고 움칠 떨었다.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음색이었고,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이. 눈빛이 미묘하게 날카로웠다.
세리아는 이런 순간 때문에 아비가 두려웠다. 무엇인지 모를 압박감이 자신을 내리누르는 듯한 느낌은 아이가 견디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순간은 대체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리안은 자신의 방에 걸려 있는 헤일라의 초상화에 대고 아이가 매일 아침 인사하도록 했다. 세리아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의무였다.
아이는 아주 무서운 가정교사에게 꾸중을 듣는 학생처럼 바짝 얼어 버렸다. 방을 나서려던 노데이나 또한 근심 어린 눈으로 세리아를 바라봤다.
잘 대답해야 했다.
“해, 했어. 했어요.”
리안은 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뭐라고 했어?”
“보고 싶어요. 세리아가 기다리고 있어요.”
세리아는 즉각적으로 대답을 뱉어 냈다. 언젠가 아버지가 헤일라의 초상화 앞에서 말하라고 한 대로 읊은 것이다.
“그래. 잘했어.”
만족스러운지 눈을 휜 리안이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세리아. 아주 잘하면 말이야. 이번에야말로 어머니가 돌아오실지도 몰라.”
이것도 항상 하는 말이었다. 그는 아이에게 어미가 존재하며,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가르쳤다. 이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휴리트 가문의 저택에 한 명도 없었다.
“그러면, 어머니께 어떻게 해야 하지?”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기에, 세리아는 언제나 배운 대로 대답했다.
“보, 보고 싶었어요. 세리아랑 놀아 주세요. 사랑해요.”
사실은 전혀 보고 싶지 않았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아이는 당장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너무너무 무서워. 아버지 무서워.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응, 착하다.”
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흐뭇한 아비처럼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니, 그렇게 하려 손을 뻗었다.
“힉!”
하지만 아이가 저도 모르게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직 나가지 않고 조마조마한 눈으로 둘을 지켜보던 노데이나 또한 놀라 한 걸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멈춰 섰다.
“……놀랐어?”
“……네, 네에…….”
리안은 잠시 멈추어 있다가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또 미안하다 사과했다. 아이는 여전히 아래만 보고 있었다. 놀랍지도 않다. 거의 매번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거절 당한 뒤에는 언제나…… 공작의 저런 얼굴이 따라왔다. 지극히 인간적인, 씁쓸함이 밴 얼굴.
노데이나는 그것마저 소름이 끼쳤다. 괴물이 인간인 체하는 것 같아서. 저 표정까지 가짜일 것 같아서.
그는 아이를 몇 번 토닥여 주고 방을 나갔다. 노데이나는 리안이 완전히 방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한 뒤 세리아에게 달려갔다. 아이는 익숙한 품 안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리안은 방 밖에서 잠시 그 울음소리를 듣다가 걸음을 옮겼다.
* * *
세상의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게 당연했을 때 죽을걸.
요즘 들어 리안 휴리트는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그는 헤일라와 자신의 방 침상에 널브러진 채 눈을 감았다. 수면 아래로 자신을 매장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리안에게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최소한의 안식도 찾아오지 않았다.
불면에 시달리는 남자는 복용하는 수면초를 찾기 위해 눈을 떴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옆에 있는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수면초는 잘 정리되어 있었다. 리안은 그걸 한 움큼 향로에 집어 던지듯 넣었다.
그리고 다시 누우려는 찰나, 협탁의 마지막 칸이 유독 모나 보였다. 드륵, 리안은 자신이 과거를 더듬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추억을 열었다. 그 안에는 거친 천으로 만들어진 흰 손수건 하나가 들어 있었다.
“버릴까.”
리안의 목소리는 녹슨 쇠가 드득대며 갈리는 것 마냥 음산했다. 그러나 그는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조심스런 손길로 손수건을 쥐고 입술 끝을 가져다 댔다. 눈을 내리감고 속눈썹을 살짝 떠는 모습이 퍽 처연했다.
“이건 너무 낡고 헤졌어.”
다른 이들이 봤다면 미친 사람 취급했으리라.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데도 리안은 계속 중얼댔다.
“새로 만들어 줘, 헤일라.”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안은 손수건을 그대로 협탁 안에 넣고 털썩 누웠다. 손목 안쪽이 천에 닿았다. 씁쓸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려 눈높이에 맞췄다. 들춰 보니 제때 치료하지 않아 곪은 상처가 눈에 띄었다.
“아파.”
그는 아픔을 꾸며 내 허공에 흩뿌렸다. 고통에 찌든 패잔병의 신음처럼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파, 아파.”
아프다는 말을 몇 번 반복하자, 헤일라와의 옛 추억이 떠올랐다. 그의 헤일라는 사람의 고통에 예민했으며, 안타깝다 여겼다. 그래서 리안은 언제든 아프고 싶었다. 자신이 피라도 보이면 헤일라는 사색이 되어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는 꼭 이렇게 소리쳤다.
‘조심하라고 했지!’
그녀는 질책이 비난이 아닐 수 있다는 걸 처음 알려 준 사람이었다. 리안은 헤일라의 다정한 질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끼고 아껴 두었던 약을 듬뿍 발라 주는 작은 검지도, 저가 아프다는 듯 잔뜩 찌푸리는 눈매도 모두 좋았다.
그랬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리안의 아픔에 슬퍼하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헤일라.”
명치에서 무언가 꽉 막혀 역류했다. 그러나 토기는 아니었다. 뜨겁고 묵직한 게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그는 이게 무엇인지 알았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헤일라…….”
외로움이었다. 열감이 과했다. 그것은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만들었다. 주룩, 옆으로 흐르는 물이 귓불에 닿았다.
도려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언젠가부터 자신을 좀먹기 시작한 고독을 깨끗하게 떨쳐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 리가.
리안은 헤일라를 사랑했다. 이것은 사랑에 덧붙어 오는 고통이었다. 너무 늦게 깨달았다. 헤일라가 그의 사랑에 지쳐 모든 걸 버리고 떠난 뒤에서야…… 리안은 흐느끼면서 입꼬리를 올려 헛웃음을 뱉었다.
신의 검을 쓰고 달아난 헤일라는 다시 만나도 웃지 않을 테다. 사랑한다는 말도 듣지 못할 것이고, 제 사랑은 깊은 구덩이 속에 처박혀 영영 빛을 보지 못하고 천천히 천천히 질식할 것이다. 의미 없는 구걸만 하다가 생이 바스러질 것이다.
헤일라에게 동정 한 조각 받지 못하고 그렇게…….
“헉, 헉…….”
갑자기 호흡이 힘들었다. 리안은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말았다. 웅크린 남자는 덜덜 떨면서 헤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성대를 타고 터지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리안은 최선을 다해 헤일라를 불렀다.
그럼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출정하는 날 아침이었다. 결국, 며칠째 잠을 설친 리안의 얼굴에는 옅은 피로가 얽혀 있었다. 늙은 집사가 방 밖으로 빠져나오는 리안의 뒤를 따랐다.
집사는 리안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눈에 띄게 한숨을 쉬었다. 휴리트 가문의 충직한 집사는 가주가 전장에 나설 때마다 시름을 지고 사는 사람처럼 울상을 지었다. 왜 그러는지는 저택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가주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전장에 직접 출정하지 않는다. 뿌리가 상하면 나무가 말라 죽기 마련이다. 하여 대부분은 후계자나 가문의 정예 기사 정도만 내보낸다. 휴리트 가문의 가주가 이토록 정기적으로 자리를 비우는 건 가문에 이로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리안은 이에 관해 완고했다. 그는 저주가 사라져 광증을 해소하지 않아도 되는 몸이 된 후에도 전장을 떠돌았다. 타국을 침범하고 휘저어서라도 헤일라를 직접 찾아내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부디 무탈히 돌아오십시오.”
리안은 집사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고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 기사의 복장을 갖춰 입고 나왔다. 저택 본관 쪽으로 걸음을 옮겨 가 보니 사용인들이 늘어져 있었다. 리안이 무기질적인 눈을 하고 중앙을 지나 문 쪽으로 향했다.
그때, 조그마한 인영이 문 앞에서 톡 튀어나왔다.
“아, 아버지.”
세리아였다.
“아버지,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
“세리아가, 기다릴게요.”
세리아는 두 손을 모아 아래로 내린 채 우물쭈물 이야기했다. 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세리아를 바라봤다. 사랑하는 여자를 빼다 박았으나 저를 두려워하는 아이였다.
“다녀오세요…….”
세리아는 했던 말을 반복하며 리안의 눈치를 봤다. 인사를 하기는 해야 해서 나왔는데 여전히 무서운 모양이었다. 리안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고마워, 세리아.”
그의 선선한 대답에 아이도, 주변의 사용인들도 모두 안심한 눈치였다. 사용인들은 세리아가 리안을 무서워하는 게 리안의 심기를 건드려 화를 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헤일라의 거부를 끔찍해하던 남자니, 그녀를 닮은 아이에게도 같은 반응을 보이리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이는 쓸데없는 염려였다. 리안은 아이의 사랑을 받지 못해 억울하다 생각한 적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리아는 그로 하여금 어떤 대단한 감상을 불러일으킬 존재가 못 되었다. 리안을 자극하는 건 헤일라가 유일했다. 자식이라 한들 이 진리를 훼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세리아는 헤일라를 묶어 두기 위한 마지막 보루이자 그녀와 리안 휴리트가 연결되었던 순간의 증명이었다. 그러므로 리안이 아이에게 관대할 이유는 충분했다. 아이도, 사용인들도 리안이 아이를 해칠까 봐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리안은 세리아의 볼에 가볍게 입 맞춰 주었다. 언제나처럼 인지한 미소를 보인 채였다. 그리고 저택의 문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시종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리안의 옆으로 다가섰다.
“주인님, 저, 신전에서 예언이 내려왔습니다! 로넬라이드에 관한 것이라고…….”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려 신전에서 출정지에 관해 내린 신탁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끝에서 일어난 전쟁 중 무엇도 예언을 받은 바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일까? 리안은 신의 의뭉스런 속내를 점쳤다.
“출정 직전이라 신전의 사자가 곧 이리로…….”
“오랜만입니다.”
그때, 시종의 말을 누군가 막았다. 썩 반갑지 않은 목소리였다.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모습을 드러낸 신관의 사자를 본 리안의 입매가 약간 비틀렸다. 눈앞의 남자는 레테가 죽은 뒤 신의 선택을 받아 신관이 된 이였다. 어린 소년에서 청년이 된 남자는 꽤나 말쑥한 껍데기를 두르고 그의 앞에 다가섰다.
세리아는 그의 모습을 빼꼼 관찰하고는 입을 헤 벌렸다. 제 아비보다야 못하지만 꽤나 번듯했다. 세리아는 어여쁜 것을 좋아했으므로 그에게 희미한 호감을 느꼈다. 그래 봐야 리안의 눈에는 아직 미아르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어린 애로만 보였다.
리안은 더 말을 섞기도 귀찮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급한 상황에서 신탁은 종이로 옮겨져 전달되었다. 출정 직전 또한 그런 상황이었다. 다만, 건성으로 손을 내미는 작태는 신전의 신탁을 받는 경건한 태도가 아니었다.
“신탁 앞의 무례는 불경인데.”
“신께서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오시라 한 건 아닐 테지. 목숨은 귀한 거니까.”
신관, 타이노르는 피식 웃으며 은실이 묶여 있는 둥근 종이 뭉치 하나를 내밀었다. 그는 의뭉스런 표정이었다.
“확실히 우리의 아버지는 짓궂은 면이 있으시지요.”
리안은 종이 뭉치를 받아 들고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말아 천천히 은실을 풀었다. 종이를 펼치는 순간, 타이노르가 한마디를 더 얹는다.
“그대의 짝에 관해 이제서야 입을 여셨으니.”
종이를 펼쳐 안의 글자 조각들을 확인한 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타이노르의 말을 알아들은 사용인들 또한 바짝 굳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만이 수줍은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손장난을 치며 하녀를 향해 배싯댔다.
* * *
로넬라이드의 동쪽 끝, 투라이나.
평지가 드문 투라이나의 언덕을 제 구역 마냥 쏘다니는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나비를 피해 춤추듯 하늘댔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한참 동안을 그렇게 뛰놀았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나비와 노는 데 질린 다음이었다.
“어!”
방금까지 천방지축처럼 방방 대던 아이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금세 다소곳한 걸음걸이로 언덕 위로 올라갔다. 은발을 하나로 곱게 올려 묶은 여자 하나가 점점 더 선명히 보였다.
“파멜라!”
아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찾아온 게 썩 기쁜지 활짝 웃었다. 파멜라라 불린 여자 또한 아이의 애정에 화답하듯 생긋 웃었다. 잘 정제된 미소였다.
“카델.”
이름을 불린 아이는 헤헤 웃으며 파멜라의 앞에 섰다. 손을 뒤로 맞잡고 몸을 배배 꼬면서 키 차이가 한참 나는 파멜라를 위로 흘긋댔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아…… 음…….”
나비랑 놀고 있었다고 말하면 파멜라가 실망할지도 모른다. 카델은 열 살이었지만 어린애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파멜라 앞에서는 그랬다. 그녀는 카델의 의젓함을 칭찬한 바가 있으며 자신의 갓난쟁이 아들을 카델에게 맡겼다. 그러므로 어리숙해 보여서는 안 됐다. 카델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냥…… 나비…….”
카델은 말을 늘이며 발로 흙바닥을 긁었다. 파멜라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비랑 춤추고 있었구나.”
아이의 바람이 무색하게, 파멜라는 단번에 카델이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눈치챘다. 그러나 불쾌한 비아냥은 결코 아니었다.
“내가 방해했니?”
그것은 그저 사실을 묻고 답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아, 잊고 있었다. 파멜라는 이런 사람이었다.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섣불리 재단하거나 평가하려 하지 않았다. 비단 카델에게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그랬다. 그런 점이 좋았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볼이 씰룩댔다.
“아뇨.”
카델은 수줍게 대답했다.
“그럼 갈까? 엄마가 기다리셔.”
“응!”
언덕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아이는 파멜라가 자신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어 주고 있음을 알았다. 익숙지 않은 친절에 귓가가 달아올랐다.
풀들이 눕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그 순간 파멜라의 왼눈을 가리고 있던 은발이 살랑이며 옆으로 흩어졌다. 가려져 있던 왼 눈의 상처가, 감겨 있는 눈꺼풀이 드러났다. 고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흉한 상처였다.
알게 모르게 파멜라를 흘금대던 카델은 실례라는 사실도 잊고 입술을 약간 벌렸다.
“아.”
파멜라가 시선을 눈치채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잠시 카델을 내려다보았다.
“미안.”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정돈하는 모습은 태연했다.
“죄, 죄송해요.”
“괜찮아.”
파멜라는 언제나처럼 상냥한 목소리로 괜찮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그 태연함이 아이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파멜라의 상처와 은발을 보고 그녀를 미워했다. 로넬라이드에서 금발이 아닌 머리 색은 불운의 상징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카델의 어머니는 사람들이 파멜라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낯설어하는 것이라 정정했으나 카델은 무엇이 다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린아이의 눈은 순수한 만큼이나 직관적이었다.
“저어…… 파멜라.”
파멜라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머리 색 말예요. 언제 원래대로 돌아와요?”
하지만 파멜라는 사실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빛 머리칼을 갖고 있는 걸.
카델은 사람들이 파멜라를 미워할 때마다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마을의 그 누구보다 빛나는 머리칼을 가진 게 파멜라라는 걸, 카델은 알았다. 아이는 파멜라를 좋아했고, 그녀가 사람들 사이에서 힘들지 않기를 바랐으므로 종종 이를 물었다.
“글쎄.”
파멜라는 친절한 어른이었다. 그러나 종종 다른 어른들처럼 입을 다물 때도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는 알아선 안 된다는 것 마냥. 카델은 입을 한 발 내밀기는 했으나, 상대가 파멜라였으므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델.”
“네.”
“비밀, 꼭 지켜 줘.”
부탁해.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비밀에 관해 함부로 떠들었다고 혼내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하게 읊조렸다. 카델은 이런 이유로 파멜라가 너무나 좋았다. 아이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감에 차 말했다.
“응! 아무한테도 말 안 해요. 나는 다리온의 누나니까!”
“음?”
비밀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제 아이의 이름이 나오자 파멜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카델은 천진하게 웃었다.
“나는, 그…… 다리온의 누이예요. 다리온도 그렇게 부르고요. 그러니까, 나는 또…… 파멜라의 가족이에요! 가족의 비밀은 꼭 지켜야 하는 거예요.”
모호한 논리였다. 다리온은 파멜라의 아들이고, 카델은 그저 낮 동안 다리온을 돌봐 주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그러나 카델은 자신이 다리온의 친누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했다.
“그래. 고마워.”
파멜라는 아이의 동심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는지 유하게 넘어갔다. 어느새 카델의 집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리온은 집에 있는 거죠?”
“응. 카델 어머니께서 봐 주고 계셔.”
파멜라는 낮 동안 식당 주방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다리온은 카델의 집에 맡겨졌다. 둘은 카델의 집 앞에 다다라 멈춰 섰다.
“그럼 오늘도 다리온 잘 부탁해.”
“……그냥 가요?”
파멜라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응, 곧 일 시작할 시간이라.”
아, 맞다. 카델은 파멜라가 자신을 찾으러 나오는 바람에 일하러 가는 시간이 다 되었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조금 미안했다.
“갈게.”
“네에…….”
파멜라는 더 시간을 지체하기 힘든지 바로 돌아서서 걸었다. 방금보다 걸음걸이가 빨랐다. 카델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카델?”
“응, 나 왔어요.”
카델은 집에 들어서 손을 씻고 바로 엄마와 다리온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다리온!”
아이는 활짝 웃으며 침대로 달음박질했다. 엄마가 무어라 잔소리를 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늘도 누나랑 즐겁게 놀자!”
“누우, 노오!”
이제 두 살 난 아기는 포동포동한 볼살을 씰룩였다. 어설프게나마 말도 따라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카델은 아기를 꼭 안아 주었다.
“그렇게 좋으니?”
카델의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다리온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눈빛에 상냥함을 머금은 채였다. 엄마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카델은 생각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사실 카델의 어머니, 사라 또한 처음엔 파멜라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일 년 전 파멜라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다리온이 마을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다.
몇 년 전 카델의 아버지가 사고로 죽고, 사라의 지병이 점점 악화되어 돈이 궁하지 않았더라면 다리온을 맡지도 않았을 테다. 그때만 해도 사라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아픈 다리를 원망할 만큼 외지인을 꺼렸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사라는 다리온을 아주 예뻐했다. 그리고 파멜라를 꺼리지 않았다. 되레 그녀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일 년간 지켜보며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파멜라의 남편은 그들이 마을에 터를 잡은 뒤 한 달도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당시 다리온은 태어난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핏덩이였다. 파멜라가 해산하고 몸을 완전히 풀기도 전에 세상을 뜬 것이다. 사라는 파멜라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과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간식 먹고 다리온한테 책 좀 읽어 줘. 파멜라가 동화책이랑 네 책을 선물로 사 왔더구나.”
이제는 이름도 스스럼없이 부르는 사이였다. 카델은 새로운 책이라는 말에 잔뜩 신이 났다. 아이는 어머니의 말대로 간식을 먹은 뒤 한참 동안 다리온과 놀았다. 장난감을 흔들기도 했고 동화책을 읽어 주기도 했으며 걸음마 연습을 돕기도 했다. 그러다가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수도가…… 점령…… 타론이…… 여기도 곧 들이닥칠…….”
카델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어느새 침실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옆에 다리온이 있는 걸 보니 아직 파멜라가 온 건 아닌 듯했다. 그런데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침대 옆 목발이 없는 걸 보니 엄마의 손님이었다. 부엌 쪽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꽤나 은밀했다.
“여자란 여자는 다 잡아 두고 뭘 확인한다는데…… 그 무뢰배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돌아가겠어? 분명…….”
“도망을…….”
“도망치면 그날로 눈알이 파여서…….”
옆집 아주머니였다. 파멜라를 아주 싫어하는 타니오 아저씨의 부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집도 잘 찾아오지 않았는데…… 카델은 객의 방문을 의문스러워하면서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우리도 망국의 국민이…….”
무슨 이야기지? 카델은 전쟁놀이를 하는 사내아이들의 대화를 엿듣는 기분이 들었다. 살짝 열려 있는 문가에 더 귀를 바짝 댔다. 그런데 그때, 말소리가 뚝 끊겼다.
“……카델?”
엄마였다. 카델은 속으로, 들켰네, 하고 씩 웃어 보였다. 사라는 그런 딸을 내려다보다가 목발을 짚고 천천히 다가와 얼른 들어가 자라고 일렀다. 카델은 아주머니에게 들리지 않게끔 작은 목소리로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물었다. 그러나 사라는 어린 애들이 알 필요 없는 이야기라 일축했다.
카델은 역시나, 하고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때 탁탁, 하고 문고리가 나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이 끝나고 다리온을 데리러 온 파멜라가 틀림없었다. 카델은 엄마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튀어 나가 황급히 문을 열었다. 집 안에 다른 객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였다.
“파멜라!”
“응, 카델.”
파멜라는 언제나처럼 짧게 웃으며 카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분명 카델과 사라에게 줄 요깃거리일 테다. 아이는 신이 나서 눈알을 데록데록 굴렸다.
“아, 왔어요?”
사라는 약간 어색한 투로 말을 건넸다. 파멜라는 고개를 들어 사라에게 무어라 대답하려고 하다가,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보고 입을 닫았다.
드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카델은 그제서야 옆집 아주머니가 아직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채곤 숨을 죽였다.
“그만 가 볼게요.”
그녀는 쌀쌀맞게 이야기하며 파멜라를 지나쳐 갔다. 파멜라가 작게, 안녕히, 라고 무어라 말을 걸었지만 완벽하게 무시했다. 카델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입술을 잘근잘근 물다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에다 대고 자랑하듯 이야기했다.
“우와, 이거 우리 먹으라고 가져왔어요?”
“응.”
“블랑쥬다!”
로넬라이드 남쪽 지방의 전통 과자였다. 카델은 얼마 전 저가 먹고 싶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구해 온 파멜라에게 폭 안겼다. 그리고 부러 더 큰 소리로 고마워요, 파멜라! 하고 말했다. 파멜라를 미워하는 아주머니에게 목소리가 꼭 닿기를 바랐다. 아이다운 심술이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사라는 천천히 다가와 약간 의례적인 위로를 건넸다. 파멜라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며 다리온이 있는 방을 흘긋댔다.
블랑쥬를 한입 가득 베어 먹던 카델은 먹던 걸 식탁 위에 내려놓고 손을 옷에 문질러 닦은 뒤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리온을 안고 나왔다. 아기는 졸린 눈을 끔벅대고 있었다. 다리온은 졸음이 덜 달아난 와중에도 나타난 제 엄마를 보고 손을 뻗었다.
“마, 어마아…….”
열이 오른 작은 손이 꼬물대며 파멜라 쪽으로 뻗어 왔다. 파멜라는 제 아기를 받아 안고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다리온은 금세 졸음이 쏟아지는지 고롱고롱 잠들었다. 그걸 보고 있던 카델은 오늘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다리온을 돌봐주었는지, 얼마나 즐거웠는지를 설명했다. 그런데 보통은 조용히 자신의 말을 경청하곤 하던 엄마가 말을 막았다.
“카델, 이만 들어가 보렴.”
“왜에…… 나 아직 안 졸려요.”
“얼른.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또 어린애 취급이었다. 자신은 이제 글도 다 읽을 줄 알고 다리온도 잘 돌보고 스튜도 잘 끓이는데. 카델은 구조 요청을 하듯 파멜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녀 또한 애매한 미소만 지으며 잘 자라고 아이의 등을 떠밀었다.
카델은 씩씩대며 방으로 들어갔다. 정확히는, 들어가는 척하며 문을 살짝 열어 두고 그 뒤에 숨었다. 소리를 푹 죽인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도가 완전히 뚫렸대요. 황제의 목을 검에 꽂아 거리에 내던졌다는데…….”
“네, 저도 들었어요.”
약간 떨리는 엄마의 목소리와는 달리 파멜라의 목소리에는 동요가 없었다.
“사람들을 다 모아 두고 뭘 확인한다는데, 도망가면 죽인대요. 이미 마을 하나가 통째로 불타기도 했대요. 만약, 만약…….”
우리 마을도 그렇게 되면…….
사라는 아주머니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엇보다 카델을 가장 염려했다. 문 뒤에서 엿듣고 있던 카델은 저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상황에 침을 꼴깍 삼켰다. 무서웠다. 정확히는 엄마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게 무서웠다.
“전장을 돌아다니는 사내들은 거칠다는데, 혹시라도…….”
“사라.”
드물게 사라의 이름을 부른 파멜라가 진정하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진정해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단호한 어조였다. 사라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안심이 되었는지, 그녀는 파멜라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파멜라는 사라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그러나 사라도, 엿듣는 카델도 이상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 * *
며칠이 더 흘렀다. 마을은 여전히 조용했다. 카델은 옆집 아주머니가 허풍쟁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 카델은 언제나처럼 파멜라가 사다 준 간식을 먹으며 책을 읽었다. 저번에 사다 준 책의 마지막 챕터였다.
* * *
어느 날 밤, 잠들기 전에 옆집의 타니오 아저씨가 찾아왔다. 아주머니도 함께였다. 그날은 파멜라가 카델에게 새로운 책을 사다 준 날이었다.
카델은 울그락불그락한 타니오 아저씨의 얼굴이 무서워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뒤에 숨었다. 엄마는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고, 카델은 또 방문을 완전히 닫지 않고 뒤에 서서 셋의 말소리를 경청했다.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춘 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했다. 확실한 건, 엄마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고, 파멜라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점이었다.
방에 돌아온 엄마는 침대 위로 올라가 카델을 꼭 안아 주었다. 카델은 그날 엄마가 우는 걸 처음 보았다.
* * *
사라가 파멜라가 가져온 간식을 거절했다. 카델은 엄마가 파멜라의 성의를 거절해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딱딱한 얼굴로 말하는 엄마를 보고 입을 딱 다물었다. 아무래도 엄마와 파멜라는 싸운 것 같았다. 친구끼리는 다투기도 하니까.
카델은 짐짓 어른스레 그들을 이해하며 얼른 화해하기를 바랐다.
* * *
며칠이 더 지났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카델은 아침에 눈을 뜬 직후 몸을 말았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꾸물꾸물 일어나 침대 밖으로 발을 디뎠다.
엄마가 없다. 주방에서 수프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아침 식사를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처럼 카델은 뭉근하게 끓인 수프와 텁텁한 빵 한 조각을 먹고 파멜라를 기다릴 것이다. 그동안은 다리온과 무엇을 하며 놀지 고민하는 시간이다.
카델은 야무지게 계획을 짜며 주방을 향해 걸었다. 사라는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살펴보니 그녀의 맞은편에 반쯤 비어 있는 찻잔이 보였다.
뭐지?
카델은 고개를 갸웃하며 조심스레 엄마의 팔에 손을 댔다.
“엄마……?”
사라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에서 손을 떼며 잘 잤니, 하고 물었다. 얼굴에는 피로가 잔뜩 발려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목발을 짚으며 일어나는 뒷모습이 유독 작아 보였다. 꼭……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직후처럼.
카델의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아이는 제 엄마가 또 무기력증을 앓을까 두려워했다.
“엄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사라는 엄마의 등을 와락 안았다.
“엄마는 내가 지켜 줄게.”
“…….”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기껏해야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였다. 카델은 엄마의 기분이 풀리기를 바라며, 자신이 컸을 때 엄마를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과장해서 늘어놓았다.
사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손을 내려 자신의 배에 얹어져 있는 딸의 손을 쓰다듬어 주었다.
“응…….”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 카델을 안아 주었다.
“엄마는, 엄마는 카델만 있으면 돼…….”
그렇게 말하면서 바르르 떨었다. 아빠가 죽었을 때와 같다. 카델은 엄마가 죽은 아빠를 떠올린 것이라 생각했다.
“너를 위해서는…… 못할 게 없단다…….”
그래서 이 말에도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 * *
다리온은 여느 때처럼 잘 잤다. 카델은 침대에 누운 다리온을 흐뭇하게 보다가 옆에 앉아 있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사라는 언제나처럼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카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 맞다! 이 층 청소해야겠어요. 요즘 통 못해서.”
카델이 헤헤 웃으며 일어났다. 그녀는 다리가 불편한 엄마를 대신해 집 안 청소를 도왔다. 카델은 언제나처럼 청소 도구를 챙겨 계단을 올랐다. 창고처럼 쓰고 있는 다락 위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이렇게 생각날 때마다 바닥을 닦는데 왜 이렇게 쉽게 더러워지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얼른 하고 나도 낮잠 자야지.”
아이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열심히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청소를 시작한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누군가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카델의 어깨가 바짝 튀어 올랐다. 깜짝 놀란 아이는 혹여 다리온이 깨서 울까 싶어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걸레를 팽개친 손은 축축한 물기에 젖어 있었다. 아이는 조심성 없는 이웃을 탓하며 구시렁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엄마가 이미 손님을 맞아 문을 열어 드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그러나 사라가 열어 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이웃이 아니었다.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카델이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두 남자가 집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자 집이 꽉 찬 것처럼 묘한 압박감이 일었다. 어쩌면 그들이 온몸에 두르고 있는 단단한 갑옷들 때문인지도 몰랐다.
집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문을 젖히고 나오라 소리 질렀다. 카델은 소음 때문에 깬 다리온을 안아 얼렀다. 빽빽 우는 다리온을 묘한 눈길로 지켜보던 남자가 아기도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
“집에, 집에 있어, 카델.”
“한 명도 빠짐없이 가야 합니다.”
사라가 카델에게 한 말을 갑옷을 입은 군인이 받았다. 사라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손을 꽉 쥐었다.
셋은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목발을 짚어야 하는 사라 대신 카델이 다리온을 안은 채였다. 사라는 어딘가 불안한 눈빛으로 제 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짚은 목발이 오늘따라 유독 땅에 더 많이 끌렸다.
“정말 괜찮은 거죠? 약속한 대로 다 했으니까…….”
사라가 앞에 걷던 병사에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카델은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남자는 무어라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카델은 안심했다. 어린아이가 느끼기에도 충분히 위압적인 상황이지만, 엄마가 한 말은 같은 편에게나 할 법한 이야기였다. 아이는 안겨 있는 다리온을 고쳐 안으며 뽀얀 이마에 작게 입을 맞췄다.
“괜찮아, 괜찮아.”
다리온은 훌쩍대면서도 카델의 품이 편안한지 금세 배싯댔다. 아이는 자신보다 더 어린아이의 안정을 위해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도착한 곳은 마을의 중앙에 있는 작은 광장이었다. 광장의 사방은 군인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니, 얼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듯했다. 그리고 광장의 사방은 군인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셋을 데려온 남자들이 손짓하자 작은 틈을 만들어 주었고, 사라와 카델은 몸을 구겨 그 사이로 들어가야 했다. 꽉 안긴 다리온이 갑갑한지 칭얼댔지만 어를 겨를은 없었다.
“어…….”
그런데 이상했다. 군인들은 사라와 카델을 광장의 중앙으로 안내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중구난방으로 서 있는데 오직 셋만 중앙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카델은 겁이 나서 울먹이는 눈으로 엄마의 옷깃을 쥐었다. 그러나 사라는 괜찮을 것이라는 말만 반복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카델은 결국 광장의 중앙 탑 앞에 발을 들여놓았다. 커다란 사람 하나가 그 앞에 있었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 머리부터 어깨에 걸치고 있는 얇은 망토와 신발까지 모두 검은 남자였다. 카델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파드득. 소름이 돋았다.
남자는 웃고 있었다.
“왔구나.”
거친 전장을 구르는 남성이라 하기에는 미려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짐승이 심장을 할퀴기 직전 먹잇감의 상태를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기괴한 공포가 카델을 감싸 안았다.
“상처 하나 없이 잘 데려왔겠지.”
그는 상냥하게 물었다. 예, 라는 대답이 뒤에서 들려오고 나서야, 카델은 그것이 병사들을 향한 질문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남자가 가리키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안고 있는 다리온.
그의 눈은 카델에게 안겨 있는 작은 다리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떨림이 가시기도 전에,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어느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델 또한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타니오 아저씨의 손에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머리칼을 콱 쥔 두툼한 손이 억셌다. 큰 죄를 지은 죄인인가 봐. 카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 두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끌고 오지는 않을 테다. 게다가 모두가 끌려오는 여인을 외면했다. 찝찝하지만 어딘가 안도하는,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카델의 엄마, 사라까지도.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끌려오는 여자의 머리칼이…… 온통 하얬다.
꼭 파멜라처럼.
“파멜라……?”
카델이 얼빠진 사람처럼 단어를 토해 냈다.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마치 뱉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것처럼. 그것이 카델의 심장을 더 거세게 뛰게 만들었다.
“파, 파멜라.”
아이는 조금 더 명확한 발음으로 여자를, 그러니까 파멜라를 불렀다.
“엄마, 저 사람 파멜라 같…….”
카델은 다가오는 여자와 사라를 번갈아 보면서 울먹였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그저 굳은 얼굴로 앞만 보고 있었다. 저건 외면이었다.
다들 왜 이러는 거야. 카델은 다리온을 더 꽉 안으며 울먹였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기가 엄마의 비참한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끌어안아 주는 것뿐이었다.
“얼른 데려가십시오.”
타니오 아저씨가 중앙에 다다라, 검은 남자에게 말했다. 아저씨는 어딘가 화가 난 것 같았다.
“음.”
그러나 남자는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목을 울렸다. 타니오 아저씨는 연설하듯이, 그러나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각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계집 때문에 우리가 망국의 백성이 되었다고! 큰 죄를 짓고 달아나 숨은 탓에 이미 몇 개의 마을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고 하셨잖습니까!”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집요할 정도로 파멜라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얼른 이 계집을 데리고 가십시오.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저 속은 것뿐입니다. 재차 말씀드렸지만…….”
타니오 아저씨는 결백을 주장하는 죄인처럼 시뻘게진 얼굴이었다. 굉장히 분하고 원통해 보였다. 그는 혼자 숨을 고르다가 쥐고 있던 머리채를 팍 놓았다. 동시에 여자의 몸이 앞으로 거꾸러졌다. 순식간에 나뒹굴게 된 파멜라가 흙바닥을 손으로 짚는 게 보였다.
남자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파멜라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아, 안 돼.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카델은 전신을 떨면서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아이는 파멜라를 구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힘과 동시에 공포에 먹혔다. 그것은 죄책감이라는 올가미가 되어 아이를 움켜쥐었다.
그러는 사이,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 둘을 바라보았다. 흡사 무대에 선 아름다운 극단의 배우들 같았다.
“네가 나와 가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데.”
“…….”
“저건 아니지.”
남자의 눈이 카델에게 닿았다. 정확히는, 카델이 안고 있는 다리온에게.
그걸 눈치채고 바짝 얼어 있던 카델의 어깨 위에 누군가의 손이 얹어졌다. 사라였다. 사라는 자신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손의 악력이 조금 더 세졌음을 느끼고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사라는 카델과 다리온을 떨어트리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가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카델은 화들짝 놀라 엄마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든, 파멜라는 남자만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뾰족하지도 뭉툭하지도 않았다. 마치 아무런 유감이 없는 사람처럼.
방금까지 웃고 있던 남자가 입매를 굳혔다.
“데려갈 거야?”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져 있었다. 누구를 가리키는지 뻔했다. 다리온이리라. 왜인지 저 남자는 아기와 엄마를 떨어트려 놓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눈치챌 정도로, 아이의 존재에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파멜라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단호히 대답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응.”
푸욱.
여자가 대답한 순간이었다. 옆에 서 있던 군인 하나가 파멜라를 끌고 왔던 타니오 아저씨의 배에 칼을 찔러 넣었다.
“아악!”
타니오 아저씨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끅끅대기만 하다가 입으로 피를 뱉어 내며 쓰러졌다.
“안 돼!”
그때 멀리 떨어져 지켜보던 타니오 아저씨의 부인이 인파를 헤치고 달려 나왔다. 카델도 잘 아는, 옆집 아주머니였다. 광장이 고음을 질러대는 사람들에 의해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카델은 똑똑히 들었다.
“데려갈 거야?”
남자가 한 번 더 물었다. 파멜라는 옆에서 쓰러진 타니오 아저씨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응.”
대답해 버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타니오 아저씨를 붙들고 울고 있는 아주머니의 등에 칼이 꼽혔다. 카델은, 아니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주춤대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군인들이 막고 있어 광장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포위된 것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군사들이 타론의, 적국의 군사들임을 상기할 수 있었다. 언제든 자신들을 도륙할 수 있는 침략자들인 것이다.
“아, 안 돼…….”
카델의 옆에 있던 사라가 몸을 떨면서 카델에게 바짝 다가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타니오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찌른 군인이 단단한 검을 들고 카델 쪽으로 오고 있었다. 카델은 다리온을 떨어트리지 않도록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온몸의 힘은 더 쉽게 빠졌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데, 그 말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때, 선명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데려갈 거야?”
카델은 끼긱대는 목을 움직여 파멜라를 바라봤다. 파멜라는 남자를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카델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순간 안심했다. 파멜라가 자신을 위해 아까까지와는 다른 대답을 할 게 분명했기 때문에.
“응.”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쉽게 깨지는 것이던가.
카델이 상황을 깨닫기도 전에, 군인이 들고 있던 검이 카델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리고 카델을 향해 내리꽂힌 검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진 어미의 몸을 관통했다.
“허억…….”
고통에 헛숨을 내뱉는 엄마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델의 입에서 어, 어, 하는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엄……마.”
아이의 부름에 응하지 못한 어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사라의 등에서 물줄기처럼 피가 줄줄 흘렀다.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카델은 기절했다.
* * *
덜컹대는 마차의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둥근 바퀴가 만들어 내는 파열음만이 마차 내부에 간간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마주 앉은 남녀의 침묵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리안은 헤일라를 멀건 눈으로 보다가 건조한 손으로 눈두덩을 주물렀다. 다시 눈을 뜨고 앞을 보는데, 또 헤일라가 있었다.
꿈이,
꿈이 아니구나.
수면이 만들어 낸 환상도, 불면이 만들어 낸 허상도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건 헤일라가 맞았다. 그는 그제서야 완벽하게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움에 파묻혀 잔상의 조각들만 엉성하게 맞춰 왔는데, 지금은 이렇게 선명한 상이 눈앞에 있었다. 리안은 헤일라를 찬찬히 살폈다.
창밖만 응시하는 눈은 여전히 동그랬다. 그 안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빛났다. 투명하다 느껴질 정도로 흰 피부도, 가는 목과 동그란 어깨도, 약간 굳은살이 박인 손도 변치 않았다.
……가려진 왼눈의 흉과 달라진 머리칼 색만 제외하면 정말로, 똑같았다.
리안은 저도 모르게 일어나, 헤일라의 옆에 앉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왼 볼을 조심스레 만졌다.
보드라웠다.
“아…….”
그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에 몸서리쳤다.
“헤, 헤일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끝이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손을 쳐 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여자에게 용기를 얻어, 볼을 쓰다듬던 손으로 머리칼을 만졌다. 목덜미를, 어깨를, 팔을, 팔목을, 그리고 손을…….
“헤일라, 헤일라.”
대답이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그녀는 가만히 앉아 창에 하나둘 얹어지는 빗줄기만 감상하고 있었다. 마치 리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헤일라가 그럴 리가 없다. 리안은 자신의 허튼 생각을 비웃으며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헤일라.”
“…….”
“헤일라, 화났어?”
혹시 내가 마을의 인간들을 몇 죽였다고 이리도 심통을 부리는 것일까? 하지만 그건 헤일라의 잘못이었다. 리안으로서는 아주 많이 참은 것이었다.
검은 눈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는 헤일라에 관해, 아니 파멜라에 관해 입수한 정보 하나를 떠올렸다.
‘남편은 일 년 전 지병으로 사망, 슬하에 아들 하나.’
믿지 않았다. 헤일라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고 다른 이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았을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헤일라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미 소거하지 않았나.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질 일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리안은 파멜라라는 여인과 헤일라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지난한 추적과 기다림에 신물이 나면서도 파멜라는 헤일라가 아니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리안은 그녀가 다른 사내를 모르길 바랐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헤일라가 맞았다. 그래서 리안은 생각의 궤를 달리했다. 친아들이 아니구나. 진짜 남편이 아니겠구나. 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에도 화가 났다. 다른 사내와의 혼인을 꾸며 내고, 다른 사내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키우다니. 그건 자신과 세리아에 대한 배신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그녀를 만나자마자 살인을 눈앞에서 보여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리안은 오랜만에 만난 헤일라를 궁지로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 다정하게 어르고 달래 주고 싶었다. 그러다가 투정을 부리고, 품 안에 잠기고 싶었다.
이전처럼.
“헤일라.”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안은 턱에 힘을 주었다가 간신히 풀고 다시 그녀를 불렀다.
“헤일…….”
“다리온은 어딨어?”
다리온. 리안은 속으로 그 이름을 두어 번 되뇐 뒤에야, 헤일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리안의 손등이 살짝 꿈틀했다.
“다리온 어디 있냐고.”
리안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건 왜?”
평소에는 붙어 있는지도 몰랐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애써 억눌러 왔던 의심이 대가리를 들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 아이가 헤일라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이었다.
긴장감에 목이 죄였다.
“아니지?”
“…….”
“네 아이 아니잖아.”
헤일라는 쉬이 답을 내놓지 않았다. 초조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네가 그럴 리 없는데 내가 실수했어. 그냥 불쌍한 걸 주워서 키우는 건데, 내가 괜히 심통이 나서 그랬던 거야. 너무 화내지 말고…….”
리안은 벌게진 눈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뒷말을 삼켰다. 속에서 울컥대며 차오르는 것을 집어삼키느라 부단히 애쓰고 있었다. 헤일라는 그걸 지켜보다가 끔뻑, 하고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혹시 내가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말하지 못하는 건가? 데려갈 것이냐 물으며 마을의 인간들을 찔러 죽였으니 그럴지도 몰랐다. 리안은 이전과 달리 가늠할 수 없는 헤일라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미안해. 네 애라고 생각해서 데려가지 말라고 한 게 아냐. 네가 그럴 리 없는 거 아는데, 그런데 우리 너무 오랜만이라, 응, 내가 조금 화가 나서…….”
그는 마을에서의 살인에 관해 횡설수설 변명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리안은 갈급한 마음에 다시 한번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헤일라가 조금 더 빨랐다.
“맞는데.”
얼핏 무감하기까지 한 말투였다.
“다리온은 내 아이야. 내가 낳았어.”
헤일라는 약간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럼에도 리안이 멍한 얼굴이자, 조금 답답한 듯 조곤조곤 반복했다.
“다리온은 내가 낳았어. 걘 내 아들이야.”
리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헤일라.”
“내 아기라고.”
그녀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입증하듯 흔들림이 없었다.
진짜, 헤일라가 다른 사내와 정을 나누었나? 그걸 지금 내 앞에서 저렇게, 너무나 당연하게…….
리안의 숨이 가빠졌다.
“아니라고 해.”
“내 아기야.”
“아니라고 하라고.”
“억지 부리지 마.”
헤일라는 팔짱을 끼고 조금 지루한 얼굴을 했다. 그의 분노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리안은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그는 채근하듯 묻기 시작했다.
“아니잖아, 아니잖아, 응?”
“어떻게 해도 사실은 안 바뀌어.”
“내가 그 애를 죽여도 좋아?”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대화였다. 리안은 정말로 헤일라의 말 한마디에 그녀의 아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녀가 하고 있는 말이 사실이라면, 다리온은 헤일라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어 만든 불순물이었다. 그녀와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는 증거였다.
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리안은 결심했다.
“정말 죽여도 좋은 거야? 응?”
헤일라가 자신에게 애원하면, 그때 다리온을 죽이자. 작은 몸을 조각조각 내어 헤일라의 앞에 전시하고 그녀를 괴롭혀야겠다. 울부짖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울음소리의 음률을 즐기며 새로운 씨를 뿌려 그녀를 잡아 두자.
이전처럼 폭력과 갈취로 헤일라를 길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음.”
헤일라가 목을 울렸다. 그것이 사고의 흐름을 흐트러트렸다. 그녀는 나긋하게 몸을 뒤로 기댄 뒤 동요 한 점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지는 않지.”
그것뿐이었다. 아들이 죽는다는 가정에 대한 감상은 지극히 짧고 간결했다. 헤일라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였다.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거야? 오 년 만에 만나서 할 말이 이것뿐이니?”
그녀는 리안의 한심함에 개탄하는 것 같았다. 아니, 조금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넌 내가 그날 뭘 했고 뭘 버렸는지 알잖아.”
리안은 깨어난 뒤 노데이나에게 모든 사실을 들었다. 헤일라가 검을 쓰고 신전을 나갔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검을 쓰기 위해 신전에 왔다는 사실을 파이라와 노데이나가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쓴 내가 다른 사람 목숨 따위에 연연할 것 같으니?”
“…….”
“난 이제 사랑 같은 건 못 느껴.”
손가락 끝부터 온도가 조금씩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된다고 해도 아무런 느낌이 안 들어.”
이상하지? 헤일라는 그렇게 덧붙이며 창가에 턱을 괴었다. 나른해 보였다.
리안은 헤일라가 말하는 증상의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의 검을 써서 감정을 소거하면, 그 뒤에는 영영 소거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저주에 걸렸다. 그리고 하나의 감정이 소거되면 덩달아 마모되는 감정들도 생기는 법이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작용하니까.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어떤 것들은 나가떨어지면서 다른 존재를 이탈시키기도 했다. 그 결과물이 지금의 헤일라인 것이다. 헤일라는 사랑과 함께 많은 것을 잃었다.
헤일라는 창백한 리안의 안색 따위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것이 리안을 미치게 만들었다.
“이제는 너를 봐도…… 흣.”
순식간의 일이었다. 리안이 헤일라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덜컹이는 마차 의자에 그녀를 밀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름, 이름 불러 줘, 헤일라.”
“…….”
“헤일라.”
헤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나른한 눈으로 리안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 순간 리안은 깨달았다.
정말로.
정말로 헤일라는…… 변했다.
그녀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던 유일한 것이었다. 헤일라는 여전히 헤일라일 것이라고. 사랑을 버렸어도 여전히 그를 애틋한 눈으로 봐 줄 것이라고, 아파할지언정 차게 내려다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는 천치처럼 믿고 있었던 것이다. 리안은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그리고 눈을 뜨고 있는 헤일라의 입술에 입 맞췄다. 아랫입술을 천천히 빨고 잡아 당겼다. 체취가 훅 끼쳐 들어 아찔했으나 신중한 손짓으로 어깨를 잡고, 혀를 섞었다.
반항은 없었다. 그녀는 순순히 제 입술을 내주었다. 리안은 거기서 묘한 절망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입을 떼고 헤일라를 일으켜 주었다.
“네 자식은 세리아 하나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히 채워 주는 남자의 손에는 과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애는 착하게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고, 넌 이제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이견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목소리였다. 이전에 헤일라를 겁먹게 했던 모습과 흡사했다. 헤일라는 리안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빠르게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럼 다리온은?”
“…….”
“난 그 앨 양육할 의무가 있는데. 엄마니까.”
헤일라는 하늘이 파랗고 태양은 붉다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리안의 말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죽일 게 아니면 내 옆에 데려다 놔.”
“…….”
“그럼 내가 널 조금 덜 끔찍해할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말을 마치고 조금 웃었다. 리안과 오 년 만에 마주하고 처음 보여 주는 미소였다.
마차 안에는 다시 바퀴가 덜컹이는 소리만 희미하게 울렸다.
* * *
헤일라가 휴리트 저택에 돌아온 지 세 달이 지났다. 그동안 저택의 분위기도 미묘하게 바뀌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헤일라가 있을 때부터 일을 해 온 이들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헤일라가 부재한 동안 들어온 하인들이었다.
기존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은 포악한 주인의 만행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헤일라의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애썼다. 그들은 그냥 조용히, 책잡히지 않을 선에서 헤일라와 리안의 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헤일라가 없을 때 저택에 발을 들인 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공작이 공작 부인을 각별히 아낀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속으로는 도망친 공작 부인을 탐탁잖게 여겼지만, 동시에 어떻게든 그녀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특히 하녀 중 몇 명은 헤일라의 전담이 되겠다고 발 벗고 나서기까지 했다. 그들은 주인마님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성격인지 알아내기 위해 연차가 쌓인 사용인들에게 선물을 들고 찾아가기도 했다.
지금처럼.
“아이, 노데이나 님. 그러지 말고 알려 주시면 안 돼요?”
“안 돼. 쓸데없는 짓 말고 청소나 해.”
“너무해…….”
앳된 하녀가 노데이나의 옆에 붙어 칭얼댔다. 노데이나는 한숨을 푹 쉬고 뒤를 돌아 단호하게 말했다.
“괜한 짓 하지 마.”
“마님을 잘 모시려고 하는 게 어떻게 괜한 짓이에요!”
“마린느.”
노데이나가 꽤나 엄격하게 이름을 불렀다. 저택에 들어온 지 반 년이 채 되지 않은 마린느가 살짝 풀이 죽은 채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노련한 하녀가 된 노데이나는 하녀들 사이에서 꽤 영향력 있는 존재였다.
“얼른 가서 네 일을 해. 오늘 세탁 당번은 너잖니.”
마린느는 정말 대답해 줄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입을 비죽대기는 했지만 더 이상 조르지는 않았다.
“그럼 저, 오늘 세리아 아가씨 시중 같이 들어도 돼요?”
더 큰 건을 조르려고 그랬나 보다. 노데이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마린느를 바라봤다. 마린느는 웅얼대면서도 세리아의 시중을 들고 싶다는 선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건 내 권한이 아냐.”
“세리아 아가씨를 모시는 건 전적으로 노데이나 님 소관인 거 다 안단 말예요. 네?”
노데이나는 마린느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저 영악하고 어린 하녀를 세리아 곁에 둘 마음이 없었다.
“안 돼.”
“아, 정말 너무하세요!”
도련님 뵙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며 마린느는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도련님. 노데이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복도를 걸었다. 마린느도 결국은 세리아 따위는 안중에 없고, 새로운 도련님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리온.
헤일라가 돌아온 날 함께 저택에 입성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휴리트’의 성을 받은 아이였다.
‘다리온 휴리트.’
아이의 이름을 묻는 집사에게 성의 없이 알려 준 리안은 멀뚱히 서 있는 헤일라의 반응을 열심히 살폈다. 노데이나는 리안의 파격적인 발언이 누구를 의식한 것인지 깨달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떡 벌리고 서 있던 사용인들과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혼외자가 분명한 이 아이가 모두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이제 사용인들은 세리아보다 다리온을 더욱 신경 썼다. 돌아온 공작 부인이 세리아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처음 세리아를 마주한 공작 부인은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이를 훑어보기만 했다.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라고 말한 뒤 계속 두 손을 꼭 모으고 있던 세리아가 울음을 터트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리아는 그 뒤로 조금 더 소극적인 아이로 변했다. 그럼에도 공작은 아이에게 눈길 한 번 더 주는 법이 없었다. 그는 완전히 헤일라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노데이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도련님보다 어릴 때부터 업어 키운 세리아가 더 눈에 밟혔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노데이나는 세리아의 방 앞에 다다랐다. 아마 이 문을 열면, 세리아 님과, ‘도련님’이 있을 터였다. 오늘은 둘이 만나 노는 날이었으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리아가 고개를 돌리고 하녀를 향해 방긋 웃었다. 노데이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세리아에게 인사를 하고, 세리아의 앞에 앉아 장난감을 갖고 노는 남자아이 하나를 바라봤다. 세리아보다 한참 작은 아기는 조용히 나무 장난감을 옮기며 놀았다.
“왜 이제 왔어.”
“죄송해요. 재밌게 놀고 있으셨어요?”
“몰라.”
세리아는 퉁명스레 말하고 노데이나에게 손을 뻗었다. 앉아 있는 아기는 둘에게 관심 없는지 바닥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리온은 재미없어.”
노데이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달리 할 말을 찾지는 못했다. 다리온은 정말로 조용한 편이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잘 주지 않았다.
아기는 소공자가 되면서 따뜻하고 안락한 잠자리, 비단옷, 부드러운 음식, 노련한 보모를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리안은 아주 가끔, 아기가 어미를 만나는 것도 허했다. 그러나 다리온이 정말로 조르는 것은 따로 있었다.
때마침, 다리온이 나무 조각을 집어 던지고 울음을 터트렸다. 축축한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불렸다.
“카데- 카델-”
바로 다리온과 함께 저택에 들어온 카델이라는 계집애였다. 하녀 방에서 매일 처박혀 울다가 가끔 얼굴을 비추는 아이였다. 노데이나는 언제나 수척한 몰골을 하고 비척대던 카델을 떠올리다가, 또다시 터져 나오는 한숨을 애써 막았다.
오늘도 저 도련님을 달래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 * *
“흣, 아아!”
새된 신음이 침상의 캐노피 안쪽에서 부유했다. 가는 여체 위에서 허덕이는 남자는 신음에 더욱 몸이 달았는지 제 입술을 헤일라의 입술 위에 얹었다. 고통과 쾌감을 넘나들다 못해 실신할 지경이었던 헤일라는 입이 막히자 더욱 바동댔다.
“흐, 읏, 흣……!”
뭉툭한 손톱이 너른 등을 마구 긁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덩어리진 근육들 위에 얇은 생채기가 새겼다. 헤일라가 남기는 상처에 반응한 리안이 허리를 더욱 격하게 놀렸다. 퍽퍽 대는 소리와 함께 찔걱이는 마찰음이 더욱 선명히 울려 퍼졌다.
“헤일라, 헤일라…….”
그는 헉헉대면서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허겁지겁 가슴을 빨고, 안으로 쏙 들어가 있는 젖꼭지를 조물댔다.
“예뻐, 예뻐, 헤일라…….”
“흣, 아앙!”
함몰되어 있던 젖꼭지가 삐져나오자, 리안은 그것을 그대로 잡고 비틀었다. 동시에 자궁이 밀려 올라갈 만큼 강하게 성기를 박았다. 눅진하고 습한 안쪽이 그를 반기듯 옴찔댔다.
“좋아, 너무 좋아…….”
정신이 나간 짐승 같았다. 아니, 누군가 그의 꼴을 본다면 짐승이라는 칭호도 과분하다 말했을 것이다. 그만큼 난잡하고 추잡하게 들러붙었다. 남자의 몸에 새겨진 흉측한 자해의 흔적들이 근육과 함께 꿈틀댔다.
“하응!”
“읏, 좋아? 여기…… 좋은 거지?”
그는 선물을 받아 신이 난 아이처럼 밝아졌다. 그리고는 그녀가 반응한 지점을 다시 쳐올렸다.
“예전, 흣, 부터 여기, 엄청 좋아했어…….”
예전부터. 그 말을 내뱉는 리안의 표정이 묘하게 흐트러졌다.
그녀가 변하지 않은 부분은 몸을 섞을 때만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리안은 이런 순간이 아주 소중했다. 그리고 아주 많이 비참하기도 하였다.
순간, 리안이 차오르는 어떤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헤일라의 목에 손을 뻗었다. 요즘 들어 두드러지는 침대 위에서의 가학적 성향 중 하나였다.
“컥, 커헉!”
그는 두 손을 목 위에 얹어 그러쥐곤, 숨통을 조였다. 목이 졸리자, 헤일라의 안쪽이 바짝 조여들었다. 리안은 완급을 조절하며 헤일라가 정신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호흡을 허용했다.
“아, 아아!”
리안은 점점 벌게지는 헤일라의 얼굴을 관음하며 속도를 높였다. 아래에 깔려 신음하는 여자가 한없이 사랑스러운지,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틈틈이 목덜미와 가슴에 입을 맞춰 댔다.
결국 그는 헤일라가 절정에 이르고 한참 뒤에나 사정했다. 목을 놓아준 건 그다음이었다.
헤일라는 침대에 축 처져 있었다. 아랫배와 가슴께까지 튄 정액이 등허리 쪽으로 주룩, 흘렀다. 리안은 장관이라도 본 사람처럼 입을 약간 벌리고 그걸 지켜봤다.
“닦아.”
차가운 명령이었다. 헤일라는 방금까지의 뜨거운 정사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 같았다.
“핥을까?”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팩 돌렸다. 그는 곧 축축한 천으로 헤일라의 몸 구석구석을 닦아 주었다. 그 꼴이 꼭 말을 잘 듣는 노예 같았다. 리안은 그녀의 명을 충실히 이행한 뒤 몸을 굴려 헤일라의 옆에 털썩 누웠다.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눈치를 보다가 먼저 말을 건넨 건 리안이었다.
“헤일라.”
“…….”
“좋았어?”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리안은 약간 초조한 사람처럼 질문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다가 음습한 말투로 뇌까렸다.
“왜, 그 새끼가 더 좋았어?”
“…….”
“……사랑한 건 아니었지? 이제는 그런 거 못 느끼니까…….”
리안은 그것이 약간 다행이라 느끼는 사람처럼 웅얼댔다. 그러나 금세 침울해하고, 또 바로 화를 냈다. 마치 인격이 여러 개 있는 사람 같았다.
“그 새끼가 죽은 게 아쉬워. 내가 죽였어야 했는데. 감히, 감히 너를…….”
그의 얼굴에 무르익은 광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헤일라는 그걸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랑한 건 아니었어.”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안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약간의 기대감이 깃든 눈이었다.
“그런데 너랑 있는 것보다는 좋았어.”
헤일라는 피식 웃으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마치 리안과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 모습이 남자의 마음을 흐트러트렸다. 리안이 헤일라의 어깨를 잡아 거칠게 바로 눕혔다. 그대로 헤일라의 위에 올라탄 리안은 한쪽 다리를 손으로 들어 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 음부를 잡아 벌렸다.
“좋았는데 좆은 엄청 작았나 봐. 네 구멍, 전보다 더 좁아졌거든.”
“흣, 하지, 마!”
거칠게 휘젓는 손길에 눅진한 정액이 흘러넘쳤다.
“걱정하지 마. 내가 열심히 할 테니까…….”
리안의 목구멍에서 거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를 사랑하지는 않아도…… 원하게끔은 만들어 줄게.”
그는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의 끝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비참함이 리안의 발끝부터 올라와 그를 갉아먹었다.
* * *
붉은 장미와 루아두가 만발한 정원은 아름다웠다. 장미향과 풀 내음의 조화가 여름의 향을 뿜어 대고 있었다.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구부러진 둘레 길이 특히나 눈에 띄었다.
그리고 헤일라가 그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허리와 팔목은 금실로 엮어 짠 띠가 아름답게 매여 있었고, 치마는 찰랑이며 발목까지 떨어졌다. 옷을 바꿔 입었을 뿐인데, 헤일라는 영락없는 귀족 마님이 되었다.
“헤일라 님! 루아두를 아주 좋아하신다면서요?”
마린느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헤일라는 루아두라는 단어에서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하게 올렸는데, 뒤에서 따르던 마린느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보지 않아도 헤일라의 표정을 가늠할 수 있는지라, 노데이나는 마린느에게 눈총을 보냈다. 그녀는 저 철없는 하녀가 화를 자초하지 않기를 바랐다.
“장미는 또 얼마나 탐스러운지…….”
노데이나의 눈초리와 헤일라의 침묵에도 마린느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토록 정원에 공을 들인 걸 보면 주인님께서는 마님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게 아니겠어요?”
따위의 말이나 하며 노데이나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게 만들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마린느의 목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 헤일라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잠깐 멈춰 서서 유독 탐스럽게 핀 장미 한 송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큼, 그 앞으로 다가간 헤일라가 손가락 사이에 꽃을 끼우고 후두둑, 하고 꽃과 줄기를 분리시킨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 마, 마님! 피가……!”
마린느가 사색이 되어 헤일라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러나 헤일라는 멍한 얼굴로 중얼댔다.
“그러네.”
헤일라는 무감하게 말한 뒤에 무어라 더 중얼댔다. 그 소리는 마린느가 호들갑 떠는 소리에 완벽하게 묻혔다. 마린느는 급히 저택으로 뛰어 들어갔다. 노데이나가 말한 약을 찾기 위해서였다.
“…….”
노데이나는 마린느의 뒷모습을 보며 찝찝함을 곱씹었다.
‘그러네. 정말 예쁘네.’
방금 헤일라가 한 말 때문이었다. 정말 예쁘다니. 피를 뚝뚝 흘리면서 하는 말이 굉장히 소름 끼쳤다. 그녀는 불손한 생각을 하면서도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물었다.
“이만 들어가시는 게 어떠세요? 치료도 해야 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노데이나는 이런 순간에 숨이 턱턱 막히는 듯했다. 오 년 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헤일라는 노데이나로 하여금 약간의 공포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 노데이나의 머릿속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시나리오 하나가 떠올랐다.
“서, 설마 지금 도망치시려는 건 아니시죠?”
헤일라는 여전히 제 손 위의 장미 잎들만 보고 있었다. 장미꽃을 쥐고 있던 손에 서서히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피 묻은 장미 꽃잎이 흙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노데이나가 기함하며 빠르게 속삭였다.
“주인님께서는 무서운 분이세요. 한 번 놓친 마님을 다시 놓치실 분이…….”
“애들은.”
“예?”
“애들은 잘 지내고 있어요?”
헤일라가 갑자기 다른 말을 하자 노데이나는 대화의 간극을 따라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세리아랑 다리온…… 그리고 카델이요.”
“아. 두 분은…….”
노데이나는 헤일라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에 굉장히 놀랐다. 그래서 하대해 달라 청하는 것도 잊고 어물댔다.
“세리아 님과 다리온 님은 잘 지내세요. 카델이라는 아이는 여전히 방에서 잘 나오질 못하고요.”
헤일라는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매일 악몽을 꾸면서 엄마를 찾는다고…….”
“살아 있다고는 말해 줬어요?”
무감한 말투였다. 눈앞에서 어미가 칼에 맞은 걸 본 아이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없는 사람 같았다. 노데이나는 약간 기가 질려 네, 하고 답하기만 했다.
“그 애는 과자랑 책을 좋아하니까 챙겨 줘요. 난 못 가니까.”
“네.”
노데이나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또 이렇게 챙기는 걸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 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주인마님을 종잡을 수 없다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문득, 헤일라가 세리아의 안부를 물었다는 사실에 약간 집중하게 되었다.
“저, 마님. 혹시 세리아 아가씨와 함께 저녁 산책이라도 하지 않으시겠어요? 주인님께서도 좋아하실 테고……. 아니, 주인님께서 좋아하실 테니 하시라는 게 아니고, 저는 그저, 아가씨와 마님께서 좋은 시간을 보내시면…….”
그녀는 말주변이 없는 자신을 탓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조금 더 조리 있게 모녀지간의 정을 나누라고 설득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나 노데이나의 후회는 헤일라의 따분함이 묻은 얼굴에 완전히 허물어졌다. 노데이나는 곧, 헤일라가 세리아에게 어떤 관심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리아 아가씨는 외로움을 많이 타시는 분이세요.”
하녀가 용기를 짜내 내뱉은 말에도 헤일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가 가엾지도 않으세요? 그분은, 항상 외롭게 지내셨어요. 따뜻하게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시면 굉장히 기뻐하실…….”
풉. 순간 헤일라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노데이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었다. 사용인으로서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노데이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주인마님께 설교를 하다니. 노데이나는 이 일이 리안에게 알려지면 자신의 혀가 뽑히리라 짐작했다.
손에 땀이 찼다.
“아니, 화 난 거 아니에요.”
“…….”
“꼭 내 언니 같아서.”
언니? 노데이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헤일라의 언니에 관해 떠올리려 노력했다. 대신관이 될 뻔했던 신관이었다고 했는데. 갑자기 그 여자는 왜.
노데이나는 가시지 않는 불안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나 앞의 사람에겐 관심이 없는지 헤일라는 여상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말이에요. 언니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참 많이 했는데.”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그건 대신관이 죽은 이후였다. 헤일라가 레테의 환영을 봤다는 사실을 모르는 노데이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지금의 마님이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네.”
그렇게 말하는 헤일라는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고개를 들고 멍하니 헤일라를 바라보고 있던 노데이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마님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반항도 복종도 하지 않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지…….
모호했다. 알 수가 없었다. 노데이나는 재회한 이후의 헤일라를 종잡을 수가 없어 불안했다. 사실 노데이나 이외의 모두가 종잡을 수 없는 헤일라를 두려워했다. 그녀는 저택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중추였다.
하녀는 자신이 무례를 저질렀음을 알고 있었으나 더 이상 말을 올리지는 않았다. 어쩐지 헤일라는 관대하게 대답해 줄 것 같았다.
복잡한 표정을 한 노데이나를 마주 본 헤일라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걸 물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원하는 거라……. 헤일라는 그렇게 속삭이며 발아래 기어 다니는 개미 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실 내가 언니의 망령을 봤을 때, 언니는 나한테 죽으라고 했어요.”
노데이나는 그제야 헤일라가 말하는 레테가 환상임을 깨달았다.
“정말 죽으려고도 했지. 난 말을 잘 듣는 동생이었거든. 그런데 그때 깨달았지 뭐예요.”
지직. 헤일라가 발로 흙을 짓이겼다. 동시에 행렬을 이어 가던 개미들이 그녀의 발에 밟혀 으깨졌다.
“난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달라진 공기가 노데이나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
노데이나는 홀린 듯 헤일라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그녀의 음성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래서 노데이나는, 자신의 뒤쪽에 젊은 정원사가 서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헤일라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무슨 일을 해서든 말이에요.”
탐스러운 붉은 뺨과 빛나는 머리칼이 햇살 아래에서 나부꼈다. 정원의 향기가 그녀의 완벽한 들러리가 되어 주는 순간이었다.
누구도 헤일라의 아름다움을 거절치 못하리라. 그 방증으로 노데이나는 입술을 살짝 벌리고 주인마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헤일라는, 노데이나 뒤의 정원사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지고, 도톰한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치켜 올라갔다.
* * *
공작 부인이 도망쳤다.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하녀가 공작 부인과 머리칼 색이 비슷했던 게 화근이었다. 부인은 하녀의 머리통을 후려쳐 정신을 잃게 한 뒤 침대에 뉘어 자신처럼 꾸몄다. 그리고 하녀의 옷을 입고 발코니로 뛰어들어 탈출했다.
조력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저택 안의 누군가가 그녀를 도왔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일이 발각되자마자, 저택 안은 온통 혼잡스러워졌다.
먼저 가장 끔찍해진 공간은 공작의 침실이었다. 리안은 헤일라로 위장되어 있는 은빛 머리칼의 하녀를 긴 칼로 찔러 죽였다. 그 피가 사방으로 튀어, 보고 있던 사용인들의 뺨에 튀었다.
그다음은 부인을 지키고 있던 보초들과 저택을 감싸고 있던 몇몇 병사들, 그리고 죄 없는 사용인 두어 명…….
피가 저택의 복도에 흩뿌려졌다. 매끄러운 나무 바닥 위에 벨벳 카펫이 펼쳐진 듯 붉은 기가 그득했다.
“……찾아와.”
리안은 그렇게만 말했다. 공작의 심복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공작 부인을 찾아 나섰다.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만큼, 최선을 다했다.
그 덕에 공작 부인은 네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잡혀 들어왔다.
“왜.”
금빛과 은빛이 섞인 머리칼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뺨에는 잘은 상처들이 나 있었다.
“왜 나갔어?”
리안은 헤일라를 고이 앉혀 두고 무릎을 꿇은 채였다. 그는 헤일라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왜 도망갔어?”
“…….”
“네가 원하는 대로 다리온도 살려 뒀어. 여기, 이 저택에 뒀다고. 그런데 뭐가 불만이었어?”
헤일라는 다리온도 두고 혼자의 몸으로 탈출했다. 리안은 헤일라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속이 바짝 탔다.
무엇보다.
“그 남자는 뭐야.”
헤일라를 도운 건 남자였다. 휴리트 가문의 정원을 돌보는 젊은 정원사.
“뭐냐고.”
말 한 번 나누어 본 적 없는 이라고 했다. 피투성이가 된 정원사는 히끅대며, 정원을 정리하다 마주쳤다고 변명했다. 도울 생각이 없었는데 우는 모습이 너무 사무쳐 보여 지나칠 수가 없었다고. 잠시 숨통을 틔고 다시 돌아올 생각이라는 말을 믿었노라고…….
죽어 가면서 말했다.
“그 남자, 어떻게 했어?”
“하.”
리안이 한탄하듯 웃었다.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죽였니?”
“살려 뒀을 리가.”
헤일라는 입을 닫았다. 샅샅이 살핀 얼굴 위에는 충격도 두려움도 없었다.
“아쉬워? 그게 마음에 들었나?”
리안은 꽤 반반하게 생겼던 다갈색 머리의 남자를 떠올리며 이를 사리물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헤일라의 두 볼을 쥐었다. 왼쪽 엄지가 헤일라의 오른쪽 눈꺼풀 위를 쓰다듬었다.
“이쪽 눈은 나 보라고 남겨 둔 거야.”
“…….”
“널 잡으면 제일 먼저 남은 눈부터 파 버릴 생각이었어. 그래도 나를 봐야 하니까, 네가 나를 보고 싶어 할지도 모르니까 남겨 뒀는데…….”
그는 괴로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괴로움은 헤일라가 자신을 외면한다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연인의 왼눈을 도려낸 남자에게서는 어떤 죄책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른 쪽 눈도 필요하다면 파낼 기세였다.
헤일라가 점점 힘이 들어가는 그의 왼손을 쳐 냈다.
“무슨 소리야.”
차가운 목소리였다. 헤일라는 리안을 거만하게 올려다봤다.
“나 너 진짜 보고 싶었어. 오 년 내내.”
검은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믿지 않는 듯싶었으나, 동시에 약간의 희망도 엿보였다.
“매일 매 순간…….”
헤일라가 손을 뻗어 리안의 뺨에 얹었다. 그리고 코가 맞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였다.
“얼마나 죽이고 싶었는데.”
순식간이었다. 헤일라의 오른쪽 엄지가 리안의 안구를 찔렀다. 파고든 손톱이 왼쪽 동공을 스쳤다. 번쩍이는 고통이 왼눈에 찾아 들었다. 리안이 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그 모습을 본 헤일라가 피식 웃었다. 리안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 생채기만 나도 자신의 상처처럼 아파하던 여자가.
“사랑을 모르고 슬픔에 무뎌졌다고 해서 너에 대한 증오까지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헤일라.”
“왜 그렇게 봐?”
“…….”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헤일라는 리안과 눈을 맞추며 히죽, 웃었다. 한쪽 눈을 손으로 가리고 있던 리안이 천천히 팔을 움직여 내렸다. 왼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리안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물었다.
“나, 피 나, 헤일라.”
그는 이전에 헤일라가 제 손에 감싸 주던 손수건을 떠올렸다. 그건 아직도 보물처럼 협탁 아래 잠들어 있었다. 헤일라라면, 상처를 보고 마음이 약해져 다시 상처를 보듬어 줄지도 몰랐다.
그러나 리안의 눈을 본 헤일라는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고개를 획 돌렸다. 마치 흉한 걸 본 행인처럼 무감한 눈빛이었다.
순간, 숨이 멈췄다.
“아, 안 돼……. 이러면 안 돼.”
헤일라는 침묵했다. 더듬더듬 말을 잇는 그를 방치했다.
“네가 이러면 안 돼. 너는, 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안은 갑자기 돌변해서 의자에 앉아 있던 헤일라의 어깨를 콱 쥐었다. 의자의 앞다리가 살짝 들렸을 정도로 그녀를 밀어붙였다.
“이럴 거면 왜 날 사랑해 줬어? 결국 변할 거면, 왜 그랬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잘못 따위를 전혀 되짚지 않는 오만한 남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헤일라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왜 사랑해 줬을까.”
“…….”
“후회가 돼.”
멀거니 헤일라를 내려다본 남자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헤일라는 지금 완전히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정말로 타인이 되어 버린다. 지금이 그 전환점이 될 것이다.
“안, 안 돼.”
몸을 섞어도, 강제로 자신만 보게 만들어도, 그 안에 어떤 감정도 없이……. 죽은 인형을 끌어안고 살게 될 것이다. 헤일라는 이 시간 이후로 자신을 완전히 포기할 테니까.
리안에게는 다시없을 위기감이었다. 리안은 헤일라가 사랑을 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큰 상실감을 맛봤다. 다시는 애증 섞인 눈동자를 볼 수 없다는 게 사무치도록 아렸다.
그러나 사랑을 몰라도 헤일라는 자신을 특별히 여길 것이라 믿었다. 양방의 감정이 오갈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영영 그녀의 분노와 슬픔을 감당하며 행복에 젖고 싶었다. 그렇게 자위했다. 그러면 리안은 헤일라의 몸과 마음을 모두 가지는 게 되니까.
하지만 이래서는, 이래서는 안 되었다. 송두리째 삶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쿵, 소리가 날 만큼 큰 소리가 났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헤일라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왼 눈을 뜨지도 못하고 덜덜 떠는 채였다.
“나 버리지 마.”
리안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어떻게 해야 예전처럼 날 봐 줄 거야?”
“…….”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원할 수는 있잖아. 밀어내지 않을 수는 있잖아. 영영 내 곁에 남아 줄 수는 있잖아…….”
“아.”
드디어 헤일라의 입이 열렸다. 리안은 숨을 헐떡이며 젖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너처럼?”
“…….”
“너도 그러잖아. 나를 사랑하지는 않으면서 몸은 원하고, 영영 나한테 들러붙으려고 하잖아.”
“무슨, 무슨 소리야. 나는 너를,”
“사랑이 아니야.”
단호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쥔 리안의 손을 가볍게 쳐 냈다.
“네가 하는 건 사랑 같은 게 아니라고.”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날카롭게 리안을 할퀴었다.
“내가 변했다고 했지? 맞아.”
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헤일라는 정말로, 점점 무감한 표정이 되어 갔다.
“하지만 날 먼저 기만한 건 너야. 네가 한 건 그냥 더러운 집착 같은 거였어.”
“아니야! 정말, 정말로 사랑해. 너만, 나는 너만…… 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야…….”
“…….”
“그래서 그런 거면, 못 믿어서 이러는 거면, 응? 내가 더 잘할 테니까. 어떤 식으로든 증명할 테니까 제발…….”
예전처럼 날 봐 줘.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다면, 증오가 담긴 눈으로라도.
리안은 속으로 마지막 말을 삼키며 헤일라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다리를 감싼 치마가 조금씩 축축해졌다.
“증명?”
그때, 그의 머리 위에서 헤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의 흥미가 담겨 있는 목소리. 리안은 이것이 기회임을 눈치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발을 핥을 수도 있었고 개처럼 길 수도 있었다. 다시 그녀의 관심만 독차지할 수 있다면, 온전한 감정의 배출구가 될 수만 있다면…….
“그럼 증명해 봐.”
미소 짓는 헤일라의 얼굴에 약간의 흥분이 스쳐 지나갔다.
“내 구슬로.”
그녀는 리안을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리안은 잠시, 구슬이라는 단어를 멍청하게 따라하고 눈을 끔벅였다. 헤일라의 말을 단박에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이거 말이야.”
헤일라가 리안의 두 어깨를 짚고 자신에게서 천천히 떼어 냈다. 그리고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투명하고 맑은 구슬 하나가 그녀의 손 위에 올려졌다. 리안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헤일라는 그런 그에게 한 자 한 자 설명했다. 유아기의 아이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모양새와 비슷했다.
“신전의 검을 써서 얻어 낸 구슬이야. 이걸 깨면…… 네가 깨면, 너는 내 사랑을 갖게 되는 거야…….”
검은색 동공이 확장되었다. 이제야 그는 이해한 성 싶었다. 신의 검을 쓰고 빼낸 구슬은 특정한 감정의 덩어리였다. 그리고 구슬을 깨는 사람은 그 감정에 완전히 매몰되어 증폭된 감정에 고통스럽게 얽매이게 될 것이다.
헤일라는 지금 리안에게 그 고통을 통해 사랑을 증명해 보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구슬을 깨면 너 스스로도 알게 될 거야. 네가 하던 그게 사랑이 아니란 거. 그럼 그땐 날 놔줘.”
“그대로일 거야. 아니면 너를 더 사랑하게 되거나.”
리안은 축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억울해 보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기대에 차 있는 듯도 했다.
“그래.”
헤일라는 더 사랑할 것이라는 다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리안이 헤일라를 더 끔찍하게 옭아매게 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있는 사람처럼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감수할게.”
리안은 모든 걸 감수하겠다는 헤일라의 다짐에 눈을 크게 떴다. 후회해도 그건 그녀의 몫. 리안은 이 기회를 잡아야 했다. 그는 무언가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갈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증명하면…… 그렇게 하면 나…… 안아 줘.”
“그래.”
간단한 대답에 리안의 손이 꽉 쥐어졌다.
“입 맞춰 줘, 좋아한다고 말해 줘…….”
“그래.”
“손, 손도…….”
그는 눈치를 보면서도 계속 요구했다. 자신이 돌려받고 싶은 모든 걸 말했다. 자신에게만 온전히 집중하는 삶을 살아 달라 간절히 애원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름, 이름도 불러 줄 거야?”
이름을 요구했다. 그녀에게서 지워진 자신의 이름.
헤일라는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름을 부른다뿐일까?”
얇은 손이 리안의 검은 머리칼과 귓가를 쓰다듬었다.
“영영 옆에 있을게. 예전처럼 될 수 있도록 나도 최선을 다 할 거야. 어쩌면 사랑 비슷한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
“아, 아아…….”
리안은 어딘가 감격한 사람처럼 탄성을 내뱉다가 후들대는 다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급히 헤일라에게서 구슬을 빼앗아 들었다. 헤일라가 약속을 철회할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구슬을 들고 이리 저리 살펴보다가 어딘지 기분이 좋은 아이처럼 그것을 꼭 쥐었다 폈다. 아주 소중한 것을 돌보는 양 쓰다듬기도 했다.
헤일라는 약간 질린다는 표정이었지만 그것을 빠르게 지워 냈다. 그리고는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 둔 구슬과 리안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하기 싫으면 물러도 좋아.”
헤일라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사람처럼 말했다.
“넌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정에 완전히 먹힐 수도 있어. 그건 네 삶을 파괴하고, 너를 괴롭게 만들고, 아프게 할 거야.”
시험, 또는 도발이었다. 그러나 리안은 마지막 자비처럼 내민 기회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눈가를 휘었다.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리안이 헤일라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맞았다. 이렇게 강렬하고 애틋한 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리고 만약 아니라 해도. 리안은 헤일라에게 받은 사랑으로 다시 그녀를 갈구할 것이었다. 그는 확신했다.
사랑에 먹혀 불행해질 일은 결코 없으리라…….
“그럴 리가.”
단호히 말하는 목소리가 단단했다. 그는 결심을 할 필요도 없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접었다. 그의 손에 구슬이 완전히 파묻혔다.
“사랑해.”
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꽉 쥐었다. 팍, 하고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가 미미하게 퍼졌다. 헤일라는 고요히 그것을 지켜봤다.
곧이어 뼈마디가 굵은 손이 천천히 펴졌다. 그 안에는 깨진 유리 파편이 황홀한 빛을 뿜으며 빛나고 있었다. 그것들은 곧 연기처럼 흩어져 리안의 가슴께로 모여들었다.
잠시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묘한 긴장에 감싸였던 리안이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었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은 여전히 헤일라를 사랑했고, 다른 어떤 감정도 돌출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틀린 것이다.
내가 이겼다.
내가…….
“허억.”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리안이 물에서 이탈된 물고기처럼 몸을 퍼덕였다.
“윽, 헉…….”
그가 가슴을 틀어쥐었다. 어딘가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런 사람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식은땀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도 헤일라는 미동이 없었다.
“헤, 헤일라…….”
마치 모든 걸 예상한 사람처럼.
“리안.”
“흑, 아, 왜, 왜…….”
내가 왜 이러지? 리안은 질문을 맺지도 못한 채 눈물을 줄줄 흘렸다. 헤일라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리안의 오만함을 비웃었다.
“단 한 순간도 의심한 적 없니?”
“흐으, 아…….”
“내가 검을 찔러 넣었을 때 떠올린 게 네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
리안은 헤일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들을 새가 없었다. 심장이 여러 갈래로 쪼개지는 감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일 거라고 했잖아.”
헤일라가 무릎 꿇은 리안의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 다시 그를 떼어 냈다. 두 뺨을 들어 올려 자신의 황금색 눈과 검은 눈을 강제로 맞췄다.
“아.”
리안은 그제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덜덜 떨었다. 자신이 파낸 헤일라의 왼눈을 보는 순간, 미친 듯이 심장이 요동쳤다. 온 몸의 피가 다 빠져 나가는 생경한 감각이 몸을 지배했다.
그래. 확실히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이건, 이건…….
“사랑해, 리안.”
죄책감이었다.
* * *
“잘 생각해 봐.”
언니를 마지막으로 마주한 날, 그녀는 내게 충고했다.
“넌 날 사랑하는 게 아냐.”
아주 슬픈 얼굴로.
* * *
헤일라는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것도 선택한 적이 없었다.
‘반반하게 태어난 걸 감사히 여겨.’
어미는 종종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아름다움은 갈취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부모가 멋대로 물려준 외모는 헤일라가 원한 게 아니었다.
‘아프, 아파, 아파…….’
끔찍한 역병에 걸린 것도, 헤일라가 원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행은 언제나 제 발로 문을 열고 헤일라의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즈음, 소녀였던 헤일라는 그래도 안도했다.
이제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영민한 언니는 이 집을 뒤로하고 어떻게든 잘 살 수 있을 것이었다. 누군가의 짐이 되는 일도, 상품이 되는 일도 지친 헤일라는 자신이 죽음의 발치로 굴러떨어진 것에 안도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언니를 제물 삼아 기어이 살아났다. 이 또한 부모의 선택이었다.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끈질긴 숨통조차도 헤일라의 손 밖에 있었다. 그럼에도 헤일라는 모든 것을 감당했다. 책임을 졌다. 마치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인 양 견뎠다.
그래서였을까? 헤일라는 레테의 환영이 죽음을 종용했을 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언니 말대로 할게. 내가 잘못한 거니까. 다 내 잘못이니까…….”
그렇게 말했던가.
헤일라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실존하지 않는 언니에게도 거짓을 늘어놓지 않았다. 감히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손목을 향해 날카로운 조각을 들이 밀고 살을 갈랐다. 피가, 아주 많이 났다. 끔찍한 혈향이 공기를 타고 코를 찌르는 와중에도 고통은 물 밀 듯 밀려 왔다.
괴로웠다.
아팠다.
왜인지 눈물도 흘렀다. 그것이 지난한 삶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라 생각했다. 얼마나 어리석었던지.
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운명은 헤일라를 놓아주지 않았다.
헤일라는 살아남았다. 그녀는 살아남아 리안이 언니를 죽였다는 사실을 대면해야 했고, 언니를 죽인 리안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으며, 새로운 생명을 품어야 했다. 무엇 하나 끔찍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 레테가 속삭였다.
“신전으로 가서, 검으로, 여기를 찔러.”
검을 써서 사랑을 도려내라고 유혹했다. 찔러 넣으면 다시는 소거한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했는데.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요구했다. 칼로 난자한 손목의 통증이 가시기도 전이었다.
헤일라는 서러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사랑을 잃고 괴물이 될 자신이 그려졌다. 사랑을 잃으면 모든 게 무채색으로 보일 테다. 아름다운 꽃을 봐도, 고운 노래를 들어도 무엇도 느끼지 못한 채로. 누구에게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채로 외롭게, 쓸쓸하게…… 살아가야 하는데.
처음으로 언니의 명령을 거부하고 싶었다. 감히. 자신 따위가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데서 옅은 충격을 받았다.
헤일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니가 침대맡에 턱을 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그렇구나.”
레테는 대답을 듣지 않고도 헤일라의 의중을 눈치채고 씩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말했잖아. ……넌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헤일라는 무어라 반박하려고 했다. 리안이 자신을 꼭 안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입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는 게 옳은 표현이리라.
“네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 봐야…… 그렇잖아, 응?”
레테가 헤일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둘의 눈이 마주친다. 헤일라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피할 수 없었다.
“너, 내가 나타났을 때…… 싫었잖아.”
쿵.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조금이라도 날 보고 싶어 했으면, 내가 좋았으면…… 조금이라도 반길 법한데, 너.”
“…….”
“끔찍해하기만 했어. 지금도.”
아.
아아…….
헤일라는 속으로 탄식했다. 자신이 만들어 낸 환영이, 자신이 만든 견고한 거짓을 허물고 있었다.
“넌 날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 아마도 그 순간부터.”
그 순간.
헤일라는 입모양으로 그 단어를 따라했다. 언니가 알려 주지 않아도 언제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때를 넘어, 모든 것을 알게 된 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피가 낭자했던 집, 칼로 낭자된 두 구의 시신들, 그리고 귀신처럼 칼을 들고 서 있던 언니. 그리고 언니의 살인을 눈감았던 자신.
언니의 말이 맞았다. 그때부터였다. 언니가 사창가에서 병을 얻고 돌아와 부모를 죽였을 때, 그리고 자신이 언니의 공범이 되었을 때.
그때부터 나는…….
죄책감에 질식해 가고 있었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손과 발을 묶은 건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을 알게 된 순간 헤일라는 외면해 왔던 자신의 진심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때때로 언니가 미웠다. 자신의 탓이 아닌데 자꾸 화를 내는 언니에게 실망하기도 했다. 언니의 수발을 드는 게 고되었다. 돈을 버는 것도 힘이 들었다.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언니의 심술이 싫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죽어 버리라는, 감정을 말려 죽이라는 언니의 말을 거역하고 싶었다.
……지금도.
왜냐하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건 더 이상 언니가 아니니까.
나는 이제 언니의 뜻대로 살 필요가,
없다.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건 뭐지?
헤일라는 리안에게 안긴 채로 제 손을 쥐었다 폈다. 눈도 깜빡여 보았다.
나는…….
작은 입술이 움직이며 어떤 단어를 만들어 냈다.
난, 나는, 살고, 싶…….
“아, 아아…….”
살고 싶다.
살고 싶어.
헤일라는 처음으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마주했다.
살고 싶었다.
누구보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이 당연한 것을 깨닫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헤일라는 속으로 자신의 염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눈물 사이로 보이는 언니가 얼핏, 웃은 것 같기도 했다.
* * *
아이가 태어났다. 지나가며 듣기로, 이름은 세리아라 했다.
헤일라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다만, 해산하고 몇 달 뒤 정원에 꽃을 심어 달라 부탁했을 뿐이었다.
꽃의 이름은 루아두였다.
* * *
황제가 쓰러졌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언니의 사람이라는 베르디안이 헤일라에게 접근했다. 베르디안에게서 네이오라를 받았다. 헤일라는 언니가 리안을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을 써서 리안을 떠나라는 것이리라.
가슴이 울렁댔다. 헤일라는 언니의 유지를 따를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리안이 필요했다. 아주 징그러운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헤일라를 살게 했다.
* * *
모든 준비가 끝났다.
헤일라는 어리숙한 노데이나라는 하녀에게 계획의 일부를 흘리고, 리안이 그것을 알아채기를 기다렸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왼눈을 포기하기로 일찍이 마음을 먹은 헤일라는 망설이지 않았다. 왼눈이 뽑히면 리안의 저주는 풀리고, 그는 며칠 동안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동안 도망쳐야 했다.
“재밌었어?”
정말로 고통의 순간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고 느꼈을 때에는, 두려웠다. 그러나 헤일라는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지금은 그것이 신체의 일부일 뿐이었다.
“네가 재미있었으면 됐어.”
리안은 나른한 얼굴로 헤일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당황한 연기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몸을 떨었다.
“……왜 마신 거야?”
노데이나가 필히 배신했기를. 그리하여 리안의 분노가 극에 달하기를 바랐다.
“네가 준비한 건데 안 마시면 서운할 거 아냐.”
그리고 헤일라의 염원은 이루어졌다. 노데이나는 배신했고.
“……미친놈.”
자신은 리안의 분노를 이용할 수 있었다.
“역시 너는, 괴물이야.”
리안의 손등이 움찔 움직였다.
“만나지 말걸. 너 같은 건…….”
“헤일라, 그만.”
그가 낮음 음성으로 경고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멈추지 않았다.
여러 말이 오갔다. 그녀는 리안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후회한다는 말. 끔찍한 너를 더 이상은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말. 너 같은 건 죽여 버리고 싶다는 절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옷소매 안의 작은 칼을 꺼내 리안의 목을 찌르려 했다. 남자는 아주 작은 동작으로 칼을 피했다.
그것이 실패하자, 헤일라는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 시도했다. 리안의 이성이 끊어진 건 이 지점이었다. 갑자기 그가 헤일라에게 달려들었다.
“커흑.”
목을 졸랐다. 핏발이 선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헤일라는 검은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확실한 건, 리안이 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불쌍한 리안.
헤일라는 그가 가엾게 여겨져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산소가 부족해 눈앞이 뿌예지는데도 그렇게 느꼈다.
몇 초가 지난 뒤, 목을 죄는 감각이 옅어졌다. 리안의 오른손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그의 엄지가 헤일라의 왼눈을 지그시 누르기 시작했다. 그의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리안의 저주가 풀리는구나.
헤일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자신의 왼눈을 후벼 파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떨리는 손가락의 감각만 눈꺼풀에 느껴질 뿐이었다.
“헉, 흐억…….”
눈을 떠 보니, 리안의 왼손이 오른손을 저지하고 있었다. 거의 비틀어지다시피 한 오른손은 점점 붉어졌다.
“흐, 안 돼, 안 돼, 헤일라…….”
그가 헤일라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가…….”
“아.”
헤일라는 짧게 탄식했다.
“아아…….”
그리고 울었다.
헤일라는 지금 리안이 어떤 상태인지 눈치챘다. 그는 지금 저주를 억누르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고통을 감내하며 헤일라의 왼눈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헤일라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헉, 허억…….”
리안은 점점 호흡이 가빠지는지 심장을 틀어쥐고 바닥에 헝클어졌다. 리안의 몸이 발작적으로 꿈틀댔다.
“안, 돼, 흐으, 헤, 헤일…… 라……. 가, 얼른…….”
헤일라는 천천히 리안에게로 다가갔다. 신의 뜻을 억지로 거스른 벌을 받고 있는지, 리안의 코에서 핏물이 주룩 흘렀다. 헤일라는 그걸 소매로 닦아 주었다. 그 사이 리안의 호흡은 더욱 간헐적으로 변해 갔다. 눈이 서서히 감겼다.
헤일라가 무릎 위에 리안을 뉘이고 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속삭였다.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 줘서, 고마워.”
“…….”
“정말 기뻐.”
헤일라는 옆에 널브러져 있던 자신의 작은 칼을 쥐었다. 살풋 웃은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왼눈을 향해 칼날을 들이밀었다.
푸욱.
잔인한 소리와 함께, 리안의 떨림이 멎었다. 그는 숨이 끊어진 동물처럼 축 늘어졌다.
신의 저주가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 * *
자신의 손으로 왼눈을 도려낸 헤일라는 도구로 쓴 단도를 방에 그대로 두고 나왔다. 차후, 자신의 눈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리안이라는 흔적을 남겨 두기 위함이었다. 헤일라는 그 거짓이 얼마나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스르륵.
리듀카의 앞에 혼자 당도한 헤일라는 문고리를 잡아 밀었다. 문은 아주 매끄럽게 열렸다. 여전히 중앙을 지키고 있는 환한 빛기둥이 눈에 띄었다. 헤일라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나아갔다.
그곳에서 언니의 환영을 만났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
언니는 새하얀 옷을 입고 빛기둥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헤일라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내가 준 약 따위는 쓸 생각 없었던 거지?”
헤일라는 리안에게 최고의 죄악을 선물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왼눈을 희생해야 했고, 신의 검을 써서 얻은 구슬이 있어야 했다.
리안은 그 구슬을 깨고 죄책감을 얻어 인간이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을 그에게 주고, 리안을 자신처럼 불행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리안처럼 사랑하는 괴물이 되리라.
헤일라는 그런 완벽한 행복을 꿈꿨다. 그러니 언니의 유품은 쓸모가 없었다.
“응.”
헤일라는 손바닥이 패이도록 손을 말아 쥐고 천천히 공간을 둘러보았다. 눈을 굴리지 않으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언니, 고마워. 어릴 때 나 지켜 준 거. 원치는 않았겠지만, 나 살려 준 거. 그리고 내 언니로 살아 준 거.”
그녀는 마지막으로, 언니에게 못 다한 말을 중얼댔다. 작별의 인사를 갈음하는 고백이었다.
“너…….”
“그런데 나는, 난…… 더 이상 언니 뜻대로 살기 싫어.”
헤일라는 그대로 달려 빛기둥 속으로 네이오라를 던져 넣었다. 언니의 유품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영영 매장해 버렸다.
레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를 버렸다.
“미안해, 언니.”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그러나 헤일라는 멈추지 않고 손을 뻗어 빛기둥 속의 검을 잡았다. 검이 잘게 울렸다. 마치 앞으로의 파란을 예고하듯 거칠게 요동쳤다.
헤일라는 입술을 빼어 물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마지막으로 언니를 보고 싶었다. 언니가 비난을 던질지라도 죽음의 문턱 앞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 혈육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는 없었다. 레테는 영영 사라졌다. 헤일라는 그 사실을 깨닫자 가슴속이 텅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지금 내게 남은 건 결국…….
헤일라는 손에 쥐어진 검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들어 올렸다. 왼쪽 가슴 위를 조준하자, 다시금 검이 진동했다. 그녀는 그것을 내리찍듯 아래로 휘둘렀다. 여린 살갗과 쇠붙이가 만나는 순간,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언니.
헤일라는 언니에 대한 죄책감을 소거해 달라 신에게 간청했다. 대상에 대한 진실하고 가장 강렬한 감정을 말하는 자리에서, 죄책감을 읊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끔찍함을 곱씹는 순간, 검이 찬란한 빛을 뿜어 댔다.
귓가에 누군가 어떤 말을 속삭였다.
너의 생이 끝났다는 선고인가?
헤일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대로 심장에 검이 꿰어 죽지는 않을까. 상대에 대한 가장 큰 감정만 소거할 수 있다고 하니까, 지금 죽게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죄책감보다 크기를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레테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하지만 신의 속삭임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었다.
결국 헤일라는 살아남았고,
오래도록 그를 기다렸으며,
다시 리안 휴리트를 만나 구슬을 건넸다.
교만한 남자는 검이 뽑힌 자리에 사랑 이외의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그는 그녀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으므로.
헤일라의 승리였다.
* * *
“헉, 허억…….”
“네가 없는 오 년간, 네가 너무 원망스러웠어. 어째서 날 더 빨리 찾아내지 못했어?”
헤일라는 헐떡이는 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헤일라의 비어 있는 왼눈을 보기가 힘든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경쾌하게 웃으며 그의 턱을 쥐고 자신 쪽으로 돌렸다.
“나를 봐. 네가 이렇게 만든 헤일라야. 설마 내 왼눈이 흉해서 그래?”
그녀는 자신이 만든 상처를 리안의 탓으로 돌렸다. 거짓을 읊는 그녀의 눈동자는 아주 차분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리안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매달렸다.
바닥에 떨어진 투명한 눈물 자국을 보던 헤일라가 무릎을 꿇어 리안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검지로 그의 심장 위를 꾹 눌렀다.
“여기가 찢어질 것 같지?”
“흑, 아, 헤일라, 나는…….”
“정말 기뻐, 리안.”
리안은 억억대며 헤일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오물보다 더 질척한 감정을 감당하지 못한 남자가 숨을 허덕인다.
“살려 줘, 살려 줘 헤일라, 나, 나…… 흑, 아아, 죽을 것, 죽을 것 같…….”
헤일라는 그것이 아름다운 선율이라도 되는 양 느긋하게 감상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네게 돌아오려고 했어. 왜 아니겠니?”
그녀의 가는 손이 리안의 목을 감싸 안았다. 작은 품에 기댄 남자가 억억대며 울었다. 그는 헤일라가 하는 말의 반도 알아듣지 못하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너만큼 날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 그리고 나도…….”
헤일라는 그의 불행의 방증이 어깨에 적셔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행복이 짙어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사랑해.”
복수와 사랑이 한 데 어우러져 행복의 형상을 띠었다.
둘은 한참이나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Epilogue
휴리트 저택의 가장 구석진 방, 그러나 가장 넓은 방 한가운데 다갈색 머리칼의 소녀 하나가 앉아 탁자에 놓인 물건을 훑어보고 있었다. 둥근 눈매를 하고서 상인들이 들고 온 물품을 하나하나 정교하게 살피기도 하는 게 여간 깐깐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로 앉은 소녀의 뒤에는 두어 명의 하녀가 서 있었다.
“노나모는 어제도 들어 왔어요. 그건 빼고, 그 옆에 걸로.”
열일곱 먹은 소녀는 꽤나 익숙하게 사용인들에게 명령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저택 몇 채는 살 수 있는 보석, 노나모가 저 뒤쪽으로 밀려났다. 소녀는 가차 없이 몇 개의 귀물을 그런 식으로 물리고, 최소한의 것들만 앞으로 배치했다.
그 모습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단주가 바짝 긴장해 침을 삼켰다. 그는 헛기침을 해 시선을 모은 뒤, 밀려난 노나모에 대한 가치를 조리 있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지고 온 노나모는 상등품 중에 상등품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빠르게 그의 말을 잘라 냈다.
“주인님께서 푸른색 라오디스를 구해 오라고 하셨을 텐데, 그건?”
그녀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상단주에게 물었다. 아니, 묻는다기보다는 따지는 모양새였다.
“그, 그건, 동대륙에서 딱 하나 넘어온 보석이라, 구하기가…….”
“그대로 공작께 고하실 텐가?”
소녀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나이 든 남자를 몰아세웠다. 그는 딸뻘 되는 계집애에게 쩔쩔매며 고개를 조아렸다. 중얼대며 하는 말 대부분이 자비를 베풀어 공작께 잘 말씀을 해 달라는 둥의 이야기였다.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겠어. 마님이 직접 갖고 싶다고 말씀하신 걸 못 구해 오는 상단과는 거래할 필요가 없거든. 이건 주인님 명령이야.”
상인은 너무한 처사라며 싹싹 빌었지만 소녀는 다음 사람을 들게 하라 차게 명령할 뿐이었다. 휴리트 공작가와 오랫동안 거래해 왔던 상단주는 소녀에게 더 이상의 애원이 먹히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절망에 빠졌다.
휴리트 공작가는 상단들이 놓쳐서는 안 될 거래처였다. 타론 제국의 황실보다도 더 많은 보석과 진귀한 보물들을 끌어모으는 곳이 이곳, 휴리트 공작가였기 때문이다.
공작 부인은 세상의 진귀한 모든 걸 원했고 공작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없던 보물도 만들어 대령할 인사였다. 그리고 공작 부인에게 올라갈 진귀한 물품들을 솎아 내는 일을 하는 게 눈앞의 소녀였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공작 부인에 대한 소녀의 충성심은 보통이 넘었다. 소녀에게 뒷돈을 바치려 시도했던 모든 상단은 거래 명단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상단주들은 이런 상황에서 찍소리 못 하고 물러나야 했다.
라오디스를 구해 오기로 했다가 실패한 이 또한 풀이 팍 죽은 채로 일어나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그때, 방문이 열렸다.
“카델.”
흰 베일을 쓴 여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델은 벌떡 일어나 여인 쪽으로 다가갔다.
“마님!”
목소리에는 묘한 설렘과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 상인은 금빛 머리칼을 베일 안에 숨긴 여자를 멍하니 지켜보다가 마님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마님. 마님이라면 휴리트 가를 쥐고 흔든다는 그 요부였다. 상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흘긋대며 얼굴 쪽을 보려고 시도했지만 베일에 감춰진 여인의 얼굴을 쉬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혹시 라오디스 때문에 오신 거예요?”
상기된 얼굴로 헤일라의 곁을 맴돌던 카델이 약간 풀이 죽은 음성으로 물었다. 방금까지 차가운 음성으로 사람을 짓누르던 인간과 괴리가 컸다. 그러나 카델의 이런 변화에도, 헤일라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카델이 약간 눈치를 보며 그때 마님께서 갖고 싶다고 말씀하신 보석이요, 하고 귓속말했다.
“아아, 그거.”
그러나 정작 갖고 싶다고 말했던 장본인은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시큰둥했다.
“못 구했어?”
“네. 죄송해요.”
“상관없어. 갖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헤일라가 카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카델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산책 가자. 날이 좋아.”
보름 만에 화창한 날씨이기는 했다. 카델은 또래의 아이처럼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의 사용인들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자네가 라오디스를 담당한 상인인가?”
그런데 공작 부인이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옆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있던 상인을 향한 말이었다. 그는 허리를 더 숙이며 송구하다고 사죄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의외의 대답이었다.
“다음 물건도 자네에게 맡기는 걸로 하지.”
공작 부인은 그 말만 남기고 방을 나섰다.원하는 보석을 찾는 데 실패한 저에게 다음 기회를 준다니? 게다가 말투에는 묘한 기쁨이 서려 있었다. 이래서야, 실패한 일을 두고 치하받은 기분이 들었다. 상인이 허리를 펴고 영문 모르겠다는 듯 방 안을 둘러보았다. 넓은 방에는 자신과 시종 몇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 상황에 의문을 품고 있는 건, 상단주 하나뿐이었다.
그는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저택을 나가야 했다.
* * *
헤일라와 카델은 화사한 정원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년 새 몰라보게 화려해진 정원은 대리석으로 만든 분수대와 진귀한 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헤일라는 별다른 감흥 없는 표정으로 카델과 나란히 걷기만 했다. 그때, 헤일라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카델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일부러 그러신 거죠?”
“뭐가?”
“그 상인 말예요. 원래라면 다시는 공작저에 발도 못 붙였을 텐데…….”
“후후.”
헤일라가 낮게 웃었다.
“네가 일을 맡은 뒤로는 못 구하는 물건이 너무 줄었어. 내 놀잇거리가 줄었지.”
“네에…….”
카델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물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헤일라는 공작에게 수시로 진귀한 물건을 요구하면서도, 그것들을 찾는 데 실패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공작이 자신의 요구를 완벽히 수행해내지 못했을 때 물건을 던지거나 각방을 썼다.
언제나 공작은 절절매며 부인에게 매달렸고, 때로는 뜬 눈으로 방 문 앞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꼴이 문 앞에서 끙끙대며 주인을 기다리는 개와 비슷했다. 그만큼 애처롭게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그러니까, 귀한 물건을 요구하는 건 리안 휴리트를 괴롭히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 카델은 정원의 향기가 너울대는 것을 느꼈다. 헤일라의 베일이 바람에 나부꼈다. 소녀가 가지는 의문의 종착점이 그녀의 앞에 살랑댔다. 카델은 감히 이해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헤일라에게 물었다.
“그 베일은 언제까지 쓰실 거예요?”
여름이라 답답할 것이 분명한데, 헤일라는 얼굴 전체를 가리는 베일을 꼭 착용했다.
“음. 리안이 벗으라고 할 때까지?”
그래. 바로 이런 지점이 카델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역시, 주인님께서 쓰라고 하신 거였군요.”
공작 부인은 공작을 괴롭히는 걸 낙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공작의 말이라면 대부분 따랐다. 그것이 비상식적인 일이라도 군말 없이 복종했다. 기괴한 일이었다.
“왜 베일을 벗지 않으시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헤일라는 소녀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제 목덜미를 살짝 쓸었다.
“그야, 좀 귀여워서…….”
그녀는 이해하기 힘든 문장의 끝을 흐리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금방 화제를 돌렸다.
“사라에게서 편지가 왔어.”
“엄마께서요?”
카델은 금방 놀란 얼굴로 바뀌어 헤일라가 내민 봉투를 받아 들었다. 방금까지의 대화는 모두 잊은 듯했다. 어미의 일이라면 언제든 이랬다. 급히 봉투를 찢어 안의 내용을 확인하는 소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기쁨과 묘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 혼자 마을에 남겨진 어미에 대한 염려였다. 헤일라는 카델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조심해서 오라고 적혀 있어요.”
“그래. 곧 내려가 볼 거지?”
“네. 아버지 기일이라…….”
카델은 일 년에 네 번 정도 사라를 보러 떠났다. 모두 헤일라가 편의를 봐 주는 덕이었다.
“감사해요.”
소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카델은 다시금 헤일라에 대한 따뜻한 감정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물론, 아주 오래전 헤일라를 깊이 오해하기도 했었다. 어미와 저를 곤경에 빠트린 사람이 헤일라라고 착각하고 그녀를 저주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알았다.
공작이었다면, 헤일라가 매달리는 순간 카델과 사라를 죽였을 것이다. 카델은 공작저의 하녀로 일하며 그 정도 눈썰미는 키울 수 있었다. 공작은 정말로 잔인한 인간이었고, 헤일라는 그에게서 카델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카델을 데려와 일자리를 주었으며,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부양할 수 있는 많은 봉급을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병사의 칼에 찔려 부상 당한 사라에게 의원을 보내 준 사람도 헤일라였다.
게다가…….
‘다리온은 내 아들이 아냐. 다리온의 아비에게 은혜를 입어서 아기를 책임지게 됐지. 물론 비밀이란다.’
헤일라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 다리온까지도 친자식으로 품을 만큼 다정한 여인이었다.
카델이 저택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헤일라가 알려 준 사실이었다. 크면서 조금씩 제 아비를 닮아 가는지, 헤일라와는 이목구비가 많이 달라져 가는 다리온을 보고 카델이 툴툴댄 적이 있었다. 다리온은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이어서 고고한 도련님처럼 보였다.
그런데 헤일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리온에 관한 비밀을 말해 준 것이다.
‘너는 앞으로도 다리온을 가장 옆에서 돌봐 줄 아이니까.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러니 리안이 혹시 의심하면, 네가 잘 말해 주렴. 다리온의 친부와 내 사이가 얼마나 좋았는지, 얼마나 좋아했는지…… 뭐 그런 거.’
카델은 다리온의 친부를 본 일이 없었다. 헤일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건, 다리온을 위해 거짓말을 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카델은 주저 없이 그러겠노라 맹세했다.
소녀는 친아들이 아닌 다리온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헤일라의 마음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다리온을 진짜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까 카델은, 헤일라가 다리온을 거두어 키우는 데 어떤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카델은 아직 어린 소녀였다. 헤일라가 공작을 아무리 미워한다 한들 없는 아들을 만들어 그를 괴롭힐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타론에서는 정조를 잃은 아내를 모질게 대하는 풍속이 남아 있었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다리온을 친아들로 삼아 끝까지 책임을 지기로 한 헤일라에게 감동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리온이 또 한바탕 난리를 부릴 게 걱정이 되긴 한다만.”
헤일라가 부드러운 얼굴로 다리온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곧 카델이 떠나면 다리온이 보일 반응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다.
“하하…….”
카델은 애매하게 웃었다. 이제 소년기에 접어든 소공자가 시중드는 하녀의 부재에 심통을 부리는 건 보기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리온은 카델이 저택에 없으면 상당히 불안해했다. 다른 사용인들에게 패악을 부리는 일도 번번이 일어나곤 했다.
“도련님도 조금만 더 크시면 절 본체만체하실 걸요.”
카델은 곧 다가올 시원섭섭한 미래를 그리며 헤헤 웃었다. 그걸 지켜보던 헤일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베일 안쪽의 얼굴에는 짙은 의문이 그어져 있었다.
“글쎄.”
그러나 카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무엇보다, 옅고 깊은 베일이 헤일라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름 낮의 산책은 그렇게 끝이 났다.
* * *
산책을 마치고 침실로 돌아온 헤일라는 베일을 바닥에 내던지고 침대로 향했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쏘다니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것 같았다. 씻지도 않고 바로 침상에 털썩 앉은 헤일라는 뚱한 얼굴로 제 머리칼을 꼬았다.
의상실을 세 곳이나 둘러볼 필요는 없었나. 헤일라는 오늘 자신이 쓸어 담은 드레스들과 예약해둔 옷가지들의 수를 가늠해 보며 다리를 쭉 폈다. 가는 발목이 침상 아래쪽을 향했다.
그때, 리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헤일라, 나 왔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한 번 까닥였다. 리안은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런 그의 발에, 베일이 감겼다. 헤일라가 던져 둔 천이었다. 리안이 그녀에게 씌운 천이기도 했다. 그는 그것을 못 본 체하고 헤일라의 옆에 털썩 앉았다.
“오늘 나갔다 왔다며?”
“…….”
“재미있었어?”
아내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눈빛은 집요했다. 헤일라는 그의 초조를 음미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헤일라는 리안이 없는 바깥 외출 따위,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녀를 감시하며 보호하기 위한 눈들도 거추장스러웠고 따라붙는 이들은 귀찮았다. 그럼에도…….
이런 순간이 너무 좋아서 멈출 수가 없었다.
“헤일라, 혹시 밖에서 뭐 봤어?”
리안이 다시 물었다. 분위기가 약간 침체 되었다. 그가 자신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마음에 드는 거라도 찾은 거야?”
헤일라는 ‘마음에 드는 것’이라는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리안이 말하는 건 드레스나 보석, 장신구 따위가 아니었다.
남자였다.
리안은 헤일라가 자신 이외의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둘까 매일 매 순간 전전긍긍했다. 헤일라의 외출을 끔찍이 싫어하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응.”
헤일라는 보란 듯이 그렇다고 대답하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있었다고 하면 어쩔 거야?”
“……헤일라.”
리안이 애원하듯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부인이 장난을 치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방식으로.
“앞으로는 베일을 쓰고도 밖으로 나돌지 못하게 할 거야? 아니면, 나를 여기 묶어 두고 개처럼 다루려나?”
리안의 표정이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헤일라가 그어 준 금을 지나치기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받고 있었다.
“그도 아니면…… 남은 한쪽 눈알도 파 버릴 거니?”
그녀가 장난스럽게 오른쪽 눈꺼풀 쪽으로 제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이었다. 리안이 거칠게 헤일라의 팔을 잡아챘다.
“이런 장난치지 마.”
긴 머리칼이 실타래처럼 침대 위에 늘어졌다. 리안이 그녀를 뒤로 눕힌 탓이었다. 그가 떨리는 손끝으로 헤일라의 뺨을 쓸었다. 나비가 꽃에 날아 앉듯 가볍고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내가 너한테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못 하는 거…… 네가 가장 잘 알면서…….”
눈썹을 찌푸리고 괴로운 듯 이를 악문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억울한 듯도, 슬픈 듯도 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리안의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덤덤하게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
“버린 지 좀 됐잖아. 내다 버린 감정 따위 알 게 뭐니?”
헤일라가 짓궂게 웃었다. 그 모습은, 헤일라가 리안에 관해 아무것도 모를 적 보여 주었던 깨끗한 미소와 아주 비슷했다. 순수하게 유희를 즐기는 투명한 눈이었다.
“네가 주워 간 건 네가 알아서 해. 난 그냥 재미나 보면 그만 아니겠어?”
얇은 손가락이 리안의 옷깃을 쥐고 끌어당겼다. 입술이 열렸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혀를 얽었다. 타액이 뒤엉키며 질척이는 소리를 내었다.
먼저 멈춘 쪽은 이번에도 헤일라였다. 리안은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얼굴 닦아 줘.”
헤일라가 편안한 자세를 찾아 앉고 리안에게 명령했다. 그는 종을 울려 젖은 수건을 갖고 오게 한 뒤, 손수 헤일라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녀는 매일 일부러 리안에게 자신의 얼굴을 닦게 했다. 특히 자신의 푹 파인 왼눈을 꼼꼼히 닦을 것을 주문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입술을 꼭 물면서도 정성스레 흉 위를 닦아 냈다. 지금처럼.
“기분 좋다.”
그녀는 고약한 심보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리안은 쉬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목을 닦아 주었다. 잔뜩 몸을 굳히고 있던 리안은 젖은 천을 내려 두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세리아랑은…… 오늘도 만나지 않았어?”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그는 카델과 헤일라가 낮에 산책을 했다는 보고를 받고 넌지시 묻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리안은 헤일라가 조금이라도 더 세리아에게 관심을 갖길 바랐으니까.
일순 헤일라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제껏 헤일라는 그것이 리안 스스로를 위한 바람일 뿐이라 여겨 왔다. 리안과 헤일라의 아이인 세리아에게 정을 붙이는 게 리안에게도 유리하니까.
그래서 헤일라는 세리아를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거리를 유지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곧잘 대화도 나누고 쓰다듬어 주기도 했으나 그뿐. 그녀는 리안이 안심할 만한 단 하나의 구석도 남겨 놓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리안의 속마음이 자신의 추측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세리아에게 미안하니?”
만약 리안이, 아버지로서 세리아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헤일라와 세리아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기를 바라고 있는 거라면?
리안이 날카로워진 헤일라의 눈빛에 당황한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난…….”
“리안.”
헤일라는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그의 한쪽 뺨에 손을 얹었다.
“내가 준 감정을 다른 것들에게 낭비하지 마.”
“…….”
“그러라고 준 게 아니잖아.”
불쾌했다. 세리아가 자신과 리안의 혈육이라는 사실 따위는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헤일라는 이것이 기형적인 감정임을 알고 있었지만 바로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오직 자신만 봐야 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저가 어떻게 했는데.
언니까지 버려 가며 여기까지 왔다. 인간성마저 도려내 괴물이 되었다. 그러니 그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어야 마땅했다. 헤일라의 가슴 속에서 잠시, 무언가 절절 끓었다.
“응. 알아.”
리안이 헤일라의 눈을 똑바로 보고 대답했다. 그의 눈가는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손끝은 약간 떨리는 채였고, 속눈썹도 파르르 진동했다. 그러나 저건, 초조나 우울 따위에서 파생된 변화가 아니었다. 리안의 입술은 선명한 호를 그리고 있었다. 헤일라는 그의 표정을 확인하곤 속으로 혀를 찼다. 괜한 걱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난 너만 생각하지. 정말이야.”
지금의 리안은 행복에 젖어 있었다. 헤일라가 자신에게 보이는 기형적인 집착에 흥분하고 있었다. 세리아에게 조금이라도 안타까움을 품었다면 저런 얼굴을 할 수 없으리라. 리안이 헤일라를 와락 안았다. 그의 옅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훅 끼쳐 들어오는 그의 향기가 달고 포근했다. 리안의 행복이 자신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아주 깊고, 진하게.
순간, 헤일라는 세리아가 조금은 가엾게 느껴졌다. 아비에게까지 이렇게 쉽게 버려지는 아이가 안타까웠다. 부모 중 누구도 세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아…….”
잠시, 씁쓸함이 입안에 돌았다. 언젠가 언니에게, 자신은 좋은 부모가 될 것이라 호언장담했던 때가 떠오른 탓이다.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자신은 결국 몹쓸 부모가 되었다. 또 언니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었다.
아니, 아닌가. 저 말을 했을 때는 검을 쓰기 전이었으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던가.
헤일라는 아주 쓸모없는 가정을 세워 보았다. 만약 검을 쓰지 않았다면, 그래서 수치와 죄악을 아는 인간으로 남았다면…… 지금보다 아이들을 더 살갑게 돌봤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책임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연기했으리라. 그럼 세리아도 끔벅 속아 더 명랑한 아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분명 자신은 잘 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헤일라는 자신을 꽉 껴안고 있는 리안의 목덜미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천천히 입술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제…….”
후회는 내 몫이 아니지.
리안에게는 들리지 않을 속삭임이었다. 헤일라는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가볍게 웃어 버렸다. 순식간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우선되는 명제를 떠올렸다.
그래.
내가 행복하면 되었다. 애초에 남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헤일라는 그렇게 맺음 지으며 리안을 더 꽉 껴안았다. 여전히 불안하게 뛰는 리안의 심장 소리가 저에게까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이 조금 더 행복해졌음을 깨달았다.
그 행복에 취해, 방금까지 무엇을 고민했는지 금세 잊을 수 있었다.
[검이 뽑힌 자리]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