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송곳니
휴리트 저택은 웅장하지만 으스스하다. 나붓한 곡선이 지붕부터 내려와 건축가의 노고가 그대로 드러나는데, 색은 고궁에 피를 발라 놓은 것마냥 축축했다.
공작의 조모는 장미 넝쿨과 단색의 꽃들로 조경을 꾸며 축축함을 화사함으로 둔갑시켰으나, 타센 공작부터는 그조차 행하지 않아 황량한 분위기를 풍겼다. 해서 행인들은 공작가의 저택을 두고 다소 섬뜩한 집이라 혀를 찼다.
물론 사용인들 또한 이 우중충한 저택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주인이 된 여인이 꽃이라도 가꾸면 좋으련만, 취향이 아니라 했다. 심지어 이전에 공작이 부인을 위해 심었던 장미꽃들도 향이 지독하다고 꺼려 해, 공작이 꽃을 전부 밀어 버렸다.
아, 그러고 보니 공작 부인도 한 번 꽃을 심자 제안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언질을 준 꽃의 꽃잎도 하필 눅눅한 녹색이었다. 결국은 전부 초록이었다.
꽃보다는 푸른 숲을 좋아한다는 그녀의 기호에 충성한 주인은 다른 꽃은 한 송이도 저택에 들이지 않았다. 중간이 없는 사낼 모두가 속으로 혀를 찼지만, 언제나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안주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침묵했다. 그게 아랫것들이 살길이었다.
“노데이나, 세리아 아가씨 분유 챙겨서 따라와.”
그렇기 때문에 노데이나는 아기 울음소리만이 이 집구석의 한 줄기 희망이라 생각했다.
기실 다른 사용인들은 돌봐야 할 상전이 더 늘었다고, 아니, 리안이 애지중지하는 인간 하나가 더 늘었다고 불안해했지만. 그래도 노데이나는 아기가 좋았다. 사랑할 구석밖에 없는 작은 생명체였다. 귀여운 우리 아기씨.
노데이나는 제 옆의 유모에게 안겨 있는 세리아를 보며 생긋 웃었다. 아기가 꺄르르, 하고 따라 웃음 짓는다. 발그레하고 오동통한 뺨이 보기 좋게 출렁인다. 황금색 눈과 머리칼이 풍성한 밀밭처럼 빛났다. 제 어미만 한 미인이 되리라. 축축한 입술을 오물대며 제 손가락을 빠는 게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긴장을 늦추지 말아.”
하녀장이 헤벌레하게 풀어진 노데이나를 향해 경고했다. 어리숙한 하녀는 핫, 하고 쥐고 있던 분유를 꽉 쥔 뒤,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항상 예기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저택이었다. 얼마 전에는 방에 들어오는 사용인들에 놀란 헤일라가 발코니 밖으로 뛰어들려고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때 공작은 헤일라 님에게…….
노데이나는 애써 생각을 물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굳이 끔찍한 기억을 되살릴 필요는 없었다. 자신이 기억해야 하는 건, 사용인들은 언제나 긴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 모시는 상전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꿀꺽. 옆에 있던 유모의 침 삼키는 소리가 자못 비장했다.
“아우우, 아우!”
포대기에 싸인 채 유모에게 안겨 있는 아기가 팔을 뻗으며 바동댔다. 오늘 하루 딸랑이를 향해 손을 열심히 흔든 탓에, 배가 어지간히 주린 모양이었다. 아기가 주룩, 흘린 침을 유모가 닦아 주었다.
“끼니때마다 이 고생을 해야 하니 원.”
하녀장은 약간 한탄하는 투였다. 노데이나의 호응을 바라는 것이리라. 그녀는 능수능란하게 맞장구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아랫것들이 하는 일이 다 이렇지, 하고 넘겼다.
기실 가장 안타까운 이는 따로 있지 않은가.
제 손에 들린 젖병을 빤히 보던 하녀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귀족은 제 아이에게 직접 젖을 먹이지 않는다. 그건 유모가 할 일. 그러므로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는 일도 아랫것들의 일이었다.
하지만 세리아 아가씨는 매끼 어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주린 배를 채울 수 없었다. 모든 게 다 아비 때문이었다. 타론 제국의 공작이자 저택의 압제자, 리안 휴리트가 세리아의 아비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아가씨는 무슨 죄람.”
물론 하녀장의 이 말에는 동의했다. 아이에게는 죄가 없으니, 세리아 아가씨는 참 안 되었다.
리안과 헤일라의 아이, 세리아 휴리트.
세리아의 아비는 아기를 사랑해 마지않았다. 그리하여 아기에게 공녀의 지위와 온갖 영애를 안겨 주었으나, 모를 일이다. 여자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딸을 내팽개칠 수 있으리라. 그게 진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노데이나는 속으로 쓰리게 한탄했다.
게다가 어미는 제 혈육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알아보는지도 의문이었다. 하여 노데이나는 세리아의 동생이 태어났으면 했다. 그러면 자신이 먹이고 입히는 아가씨는 외롭지 않을지도 몰랐다. 외로운 아이 둘이 의지하며 커 갈 동화 같은 일을 꿈꾸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리안 휴리트는 헤일라가 난산으로 사경을 헤맬 때 아기를 죽여 꺼내려 한 전적이 있다. 차라리 그가 끔찍한 공포에 까무러쳐 한 행동이라면 지극한 사랑 때문이라 포장해 볼 텐데, 그도 아니었다.
‘잘라서 꺼내.’
남자는 너무나 침착하게, 그러나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명령했다. 그 자리에 있던 노데이나는 남자의 냉연함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결국, 무사히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공작은 백 일이 넘도록 아이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동안 이름을 주지 않았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여하튼 남자는 이후로 피임을 철저하게 했다. 다시는 아이를 보지 않겠다 황제에게 말을 흘리기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노데이나는 헤일라의 고통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라 여기면서도, 세리아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했다. 외로운 아기씨가 앞으로도 외롭게 자라날 것을 그리니 마음이 아렸다.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걸음을 놀리다 보니 어느새 주인의 방문 앞이었다. 노데이나의 눈이 유모에게 안겨 있는 아가씨에게 잠시 머물렀다.
똑똑.
“주인님, 세리아 아가씨의 식사 시간입니다.”
하녀장이 나뭇결이 살아 있는 침실 문을 두드렸다. 아기를 안고 있는 유모가 약간 불안한 눈빛을 하녀장에게 보냈으나 그녀는 예의 그 무뚝뚝하고 차분한 태도로 문만 바라보았다.
노데이나는 꼿꼿이 서서 앞을 보았다. 안쪽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셋은 익숙한 듯 불편한 침묵을 견뎌 냈다.
우당탕! 안에서 요란한 파열음이 울렸다. 아, 오늘도 시작이구나. 하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사, 살려…….”
누군가 안쪽 나무 문을 손으로 드득, 드득 긁어 대며 애원했다.
“문 좀, 문 좀 열어 주세요……!”
뒤늦게 손잡이의 존재를 인지했는지 손잡이를 헛돌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러나 안쪽에서도 열쇠가 없으면 열지 못하는 문은 열리지 않았다.
“흐윽, 제발…….”
여기서 꺼내 달라는 말만 반복하던 여자는 지쳤는지 훌쩍대기만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는 소리가 뚝, 끊겼다. 리안 휴리트가 여자를 붙잡은 것이 틀림없었다.
사박대는 소리가 들린 뒤에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남자가 헤일라를 껴안은 채 서 있었다. 그는 세 사용인을 보고 들어오라 눈짓했다. 셋은 눈치껏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 옆에 조르륵 섰다. 헤일라가 세리아에게 분유를 먹이는 장소가 대부분 침상 위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석상처럼 고정된 자세로 서 있는 동안, 리안은 헤일라를 들어 침상 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안긴 여자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얬다. 이를 딱딱 부딪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헤일라, 세리아 왔어.”
“…….”
침상 위에 헤일라를 기대 앉힌 남자가 세리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볼에 살이 잘 오른 아기가 눈을 깜빡대며 입술을 오물댔다. 태어난 지 사 개월이 조금 넘은 아기는 방싯방싯 잘도 웃었다.
그러나 어미는 황금색 눈알을 휙휙 굴리며 손톱만 뜯었다. 노데이나는 자신이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따뜻한 분유 병을 꽉 쥐었다. 긴장이 방 전체를 감싸고 돌았다.
“자, 안아 줘.”
리안은 유모에게서 아기를 앗아 들었다. 그리고 헤일라를 다정히 어르면서 아기의 뺨에 입 맞추고, 침대에 뉘었다.
그래, 안겨 주지 않고 헤일라의 옆에 눕히기만 했다.
정말 지독한 인간.
노데이나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언뜻 보면 다정한 아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만 그건 모두 가식일 뿐이다.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아, 우우…….”
아기는 이불 위에 눕혀져 눈을 깜빡, 깜빡 하다가 안아 주던 이가 멀어지자 칭얼댔다. 포대기에 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바즈락대다가 결국은 으아앙, 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방에 아기의 울음소리만 가득 찼다. 그러나 아기를 어르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또 시작이라는 얼굴로 눈만 질끈 감을 뿐이었다. 노데이나는 속으로, 제발 헤일라가 아기를 품어 주길 간절히 기도했다. 공작은 아주 질이 나쁜 인간이지만 아기는 아기니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까.
“헤일라, 얼른.”
리안의 명이 없는 이상, 헤일라 이외에 누구도 아기를 달랠 수 없다. 분유를 먹이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헤일라가 외면하면, 어미가 안아 거두지 않으면 아기는 모두가 있는 곳에서 방치된다.
리안은 헤일라에게 그것을 주지시켜 왔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여인에게 가혹할 정도로 책임을 지웠다. 그것은 어미가 아이를 사랑하게 만들려는 수작이기도 했고 동시에 족쇄를 채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기의 목소리가 점점 간헐적으로 히끅 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얼마 전처럼 열이 잔뜩 올라 세리아가 밤새 고생할지도 몰랐다. 참다못한 노데이나가 손을 덜덜 떨면서 무어라 간언하려 한 순간이었다.
“아, 아기, 아기…….”
헤일라가 빠끔대며 무어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듬더듬 포대기를 만지다가 아기의 얼굴을 스치듯 쓰다듬었다.
“아우으우!”
아기가 울음을 멈추고 무어라 옹알이를 해 댔다. 헤일라가 흠칫 떨며 손을 물렸다. 자기가 만져 놓고 되레 더 놀라 몸서리를 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안은 헤일라가 아기에게 관심을 가진 게 좋은지 헤벌쭉 웃었다.
그는 기쁜 낯으로 아기를 들어 올려 그녀에게 안겨 주었다. 생기 없는 눈동자가 멍하니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리안은 가녀린 여자가 아기를 떨어트리지 않도록 옆에서 함께 작은 포대기를 받쳐 안아 주었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개해 있었다.
“우, 아아, 우응.”
엉거주춤 안긴 아기가 불편한지 옹알대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 조금 정신이 돌아왔는지 헤일라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리고 축축하게 젖은 아기의 입술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잊었던 사실이 생각난 양 말했다.
“아기, 밥.”
젖병을 든 노데이나를 빤히 보는 헤일라의 얼굴이 멀겋다. 헤일라가 가는 손을 내밀었다. 분유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노데이나는 침착하게 품 안의 따끈한 분유를 꺼내 전달했다.
아기는 무예 좋은지 어미의 품에 안겨 방싯대고 있었다. 이 방에서 행복한 듯 웃고 있는 건 아기와 리안, 둘뿐이었다.
헤일라가 한 손에 아기를 받쳐 들고, 한 손에 분유 병을 들자 아기는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입을 오물댔다. 얼른 밥을 달라는 투정이다. 그녀는 아기의 입에 젖병을 물렸다.
아기를 안고 있는 어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무기력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녀의 눈매 끝에 아롱아롱 매달린 옅은 음울만이 불행한 삶의 편린을 대변할 뿐이었다.
꼴깍꼴깍, 분유 삼키는 소리만이 방을 채웠다. 저렇게 제 새끼가 잘 먹는 모습을 보면 부모로서 흐뭇할 법도 하건만, 헤일라는 그저 초연해 보였다.
그러나 노데이나는 헤일라를, 아니 주인마님을 감히 이해했다. 그녀는 헤일라가 저택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어떻게 아이를 잃고 다시 수태했는지 아는 인간 중 하나였다. 차라리 미쳐 버리는 게 편했으리라.
마침내 아기가 젖병을 모두 비웠다. 리안은 대견하다는 듯 아기의 볼에 한 번 입을 맞추고, 헤일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잘했어. 같이 산책도 할까?”
남자가 가증스럽게 떠들어 댔다. 헤일라는 몸을 옹송그리며 으응, 하고 읊조린 뒤 노데이나 쪽을 흘깃댔다. 얼른 품 안의 아기를 거두어 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제 엄지를 쪽쪽 빨고 있는 세상 무해한 아가씨를 조금 두려워하는 듯도 하였다. 그러나 사용인들이 따르는 건 리안 쪽이었다.
“데려가.”
아쉬움이 묻어나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유모가 아기를 받아 들었다. 노데이나와 하녀장, 그리고 유모는 오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를 느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부산스럽지 않게, 그러나 부지런히 방문 쪽으로 발을 놀렸다.
노데이나는 마지막으로 방문을 닫고 나왔다. 아주 살짝 뒤돌아 확인한 문 안에, 헤일라의 곁으로 다가가는 리안의 뒷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 * *
“세리아가 이제는 엄마를 알아보나 봐.”
말은 언제쯤 하지? 리안은 혼잣말을 하며 헤일라의 머리칼을 손으로 꼬았다. 헤일라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앞만 응시했다. 그럼에도 리안은 계속 세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요즘 좋아하는 모빌의 모양과 장난감 종류 따위를 늘어놓으며 헤일라를 관찰한다. 어떻게 해서든 아기에 대한 애착을 더 붙여 주려 안달하는 모습이었다.
여자는 이미 미쳐 버렸는데도, 리안은 헤일라가 아기를 사랑하고, 그래서 자신을 떠날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으면 했다. 오늘처럼 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고 쪼르르 문에 붙어 훌쩍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리안이 건조한 입술을 혀로 축인 뒤 헤일라의 목선을 할짝댔다.
“아, 아아…….”
헤일라는 단어가 되지 못한 이상한 소리들을 흩뿌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익숙한 광경이다. 아이를 낳은 뒤부터 정신을 놓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리안은 애틋한 얼굴로 여자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러다가 손이 약간 내려가 가슴에 닿았다.
“아!”
그 순간 헤일라가 미간을 확 좁히며 앙알댔다. 끙끙대며 어깨를 둥글게 말아 상체를 수그리는 게 가슴 통증이 도진 모양이었다.
“아직도 아파?”
웃음 섞인 물음에 헤일라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이럴 때 보면 정신이 아예 나간 건 아닌 것도 같았다. 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얇은 여체를 뒤로 눕혔다.
언제나 헤일라의 고통에 민감하던 리안은 요즘 들어 그녀의 가슴 통증을 퍽 반겼다.
“젖 짜자.”
통증의 근원이 젖몸살이었기 때문이다. 리안은 그녀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손수 가슴을 주물러 젖을 뽑아냈다. 얼마 전에는 유모에게 그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헤일라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정성을 쏟는 남자다웠다.
헤일라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건지 아닌지 고개만 도리도리 돌려 가며 반감을 표했다. 리안은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몸통 위에 가볍게 올라타 윗옷의 앞섶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여자는 팔을 뻗어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찌릿하게 퍼지는 유방 통증 때문에 이내 모든 걸 포기하고 축 늘어졌다.
“아.”
곧이어 헤일라의 가슴이 드러났다. 리안은 출산 이후 더 부풀어 오른 젖가슴과 함몰된 짙은 유륜을 보고 탄성을 터트렸다. 매일 보면서도 한결같은 반응이다. 헤일라의 얼굴이 조금씩 달아올랐다. 아롱아롱 맺힌 눈물은 덤이었다.
“시러, 시, 시러…….”
“응, 응…….”
헤일라의 거부에도 리안이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흣…….”
리안은 우둘투둘 잡히는 갈빗대를 손으로 감싸 안은 채 함빡 입안에 살을 물었다. 혀를 써서 부드러운 살점을 핥아 올린 뒤 가볍게 빨아들였다. 헤일라가 신음을 참으면서 부들대는 게 혀로도 느껴졌다. 남자가 곧바로 유륜을 쪽, 빨아들였다.
“하앗!”
고통이 섞인 목소리였다. 리안은 몇 번 흡입을 반복했다. 즈읍, 츱, 외설적인 음률이 섞이고 흩어졌다. 다만 짙은 속눈썹을 반쯤 내리깔고 신중하게 가슴을 빠는 남자는 성애적인 욕구를 채우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는 안쪽으로 푹 빠져 있는 꼭지를 빼내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헤일라의 가슴은 유두가 안쪽으로 움푹 패 있었기 때문에 젖이 돌게 하려면 꼭지를 밖으로 빼내야 했다.
리안은 오른쪽 가슴의 유두를 빼낸 뒤 젖꼭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왼쪽에 입을 댔다. 유두가 모두 삐져나온 뒤에는 부드러운 크림을 손에 양껏 펴 발라 두 살덩이를 정성껏 치댔다. 며칠 해 댔다고 요령이 생겼는지 짙은 유두에 진한 모유가 맺히기 시작했다.
“아!”
곧이어 퓩, 퓩 하고 희멀건 액체가 공중에 흩어졌다. 리안의 볼에도 몇 가닥이 튀었다.
“흑, 아파, 아! 아파요!”
그는 멈추지 않고 손을 놀렸다. 마냥 자신을 괴롭히는 게 아님을 알고 있는 것인지 헤일라도 더는 몸부림치지는 않았다. 돌고 있는 젖을 뽑아내지 않으면 밤 내내 가슴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리라.
“흐읏…….”
돌던 젖을 어느 정도 빼낸 뒤 리안이 손을 뗐다. 얼굴에 젖이 잔뜩 흐르는 리안은 혀를 빼내 제 입술 위로 흐르는 젖을 할짝였다.
“이제 안 나오네.”
헤일라의 볼에도 젖이 튀어 주룩 흘렀다. 그걸 본 리안은 흰 모유와 자신의 정액을 겹쳐 보았다. 아, 당장 헤일라의 몸 곳곳에 정액을 사출하고 싶다. 저급한 욕망이 대가리를 들고 꺼덕대기 시작했다.
팔랑대는 황금색 속눈썹 위, 흰 볼, 옴폭 팬 겨드랑이와 둥근 목덜미, 부푼 가슴과 도독하게 올라온 갈빗대…… 여기저기 뿌려서 제 냄새와 헤일라의 체취를 섞어 두고 희롱하고 싶었다.
리안은 홀린 듯 헤일라의 얼굴에 손끝을 갖다 대었다. 쓰다듬어 마음껏 어여뻐해 주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히익!”
비쩍 마른 손이 그녀의 얼굴 위로 교차 되었다. 헤일라가 지레 겁먹고 자신을 방어하는 모양새였다. 리안이 주춤하고 그녀의 곁에서 약간 물러났다.
“헤일라.”
“힉, 잘, 잘못, 잘못했…….”
“괜찮아. 응? 괜찮으니까…….”
리안은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해 당황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흥분할 이유가 없었다. 헤일라는 정신이 온전치 않았지만 이유 없이 발작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소매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고 등을 토닥였다. 그럼에도 헤일라는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졸지에는 엉엉 울면서 엉덩이 걸음으로 그에게서 떨어지려 안간힘을 썼다.
“죄송, 아흐, 그, 그러지 마…….”
그러지 말라 애원하며 차마 그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여인은 무언가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는 아이처럼 보였다.
아.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짚이는 게 있는 것이다. 리안의 얼굴에 옅은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야. 아니야, 아프게 하려는 거 아니야. 응?”
“흐, 어엉, 어어엉…….”
결국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헤일라는 바들바들 떨며 울었다. 다행히 떨림은 시간이 지나자 사그라들었다.
“미안해.”
“…….”
“미안해, 헤일라.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는 다짐하듯 속삭였다. 내뱉는 숨의 온도가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그러나 헤일라는 제 손톱만 뜯으며 눈알을 굴렸다.
리안이 답지 않게 허둥지둥하며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이전에 자신이 그녀 앞에서 보였던 광증과 폭력성을 다정한 단어들로 어찌 무마해 보려는 수작이다. 그는 조급증이 나 입술을 빼어 물었다. 헤일라를 달랠 수 있을 만한 말을 고르려다가 실패한 모양이다.
“이제는, 절대로…….”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하면서도 리안은 확신할 수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눈이 돌아 방 안의 온갖 물건을 부수며 자해하는 건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기실 남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한 조각도 기억해 내지 못했으니까.
술을 마신 것도, 화를 참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리안은 그런 이유로 이성을 잃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되었다. 최초의 순간은 헤일라가 그에게 ‘괴물’이라며 저주의 말을 꺼냈을 때. 그리고 최근에는 헤일라가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려 했을 때였다. 순간 머리에 무언가 뚝 끊기는 느낌이 들면서 완전히 암전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헤일라는 울고 있었다. 리안, 리안 하며 그에게 사정하고 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그의 큰 손을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면서.
무릎을 꿇고 있는 헤일라의 볼에는 피가 튀어 있었다. 사과의 표면처럼 새붉은 피였다. 그게 자신의 피였다는 걸, 리안은 아주 나중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살려 줘…….’
리안은 아직도 그때의 헤일라를 기억하고 있었다. 살려 달라고 두 손을 싹싹 비비고 있었다.
‘왼눈을 핥으셨다 합니다.’
이후 유일한 목격자인 하녀가 파이라에게 증언했다.
처음에는 헤일라의 목을 살짝 틀어쥐었다. 그러나 금방 놓고는, 스스로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 대다가, 뭐라 중얼대며 방 안에 있는 온갖 집기들을 부쉈다. 자학하듯 제 손을 벽에 찧기도 했다.
가장 마지막에는,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기 직전에는 그녀를 끌어안아 왼 눈꺼풀을 핥고, 빨고, 눌렀다고.
마지막에 헤일라의 눈에 집착했다는 사실을 들고 나서야, 리안은 자신이 벌인 기행의 원흉을 알게 되었다. 이제껏 그가 다른 이들에게 보였던 광증과 유사했다. 차이가 있다면, 사람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무의식중에 헤일라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 자해를 선택한 것이리라.
‘……전장에서 돌아오신 지 서른 날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이상한 점은, 광증이 도질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리안이 최초로 헤일라 앞에서 광증을 드러낸 때는 전쟁에 나가 기형적인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킨 뒤였다.
그러나 리안은 애써 그것을 실수라 치부했다.
자신이 누구던가. 헤일라의 하나뿐인 연인이었고, 세상에서 그녀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였다. 실수였을 것이다. 사람이 가끔 돌아 버리면 보이는 폭력성일 뿐이리라. 그렇게 여기고 온갖 약초를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러나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스러졌다.
몇 번의 끔찍한 경험 뒤에야, 리안은 인정했다. 헤일라를 향한 광증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왼눈을 점점 더 갈구하게 되어 간다. 이러다가는 언젠가 헤일라를 죽여 그녀의 왼눈을 앗아 갈지도 몰랐다.
그냥 다치게 하는 것과는 결이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만에 하나 헤일라가 죽게 된다면.
리안 휴리트의 세계도 그날로 끝이었다.
“절대 그런 일 없도록 할 거야. 너는 안전해. 절대 아프게 하지 않아.”
그는 스스로에게 주지시키듯 말했다. 말끝이 약간 떨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를 안아 주느라 리안이 보지 못한 헤일라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었다.
때마침, 문밖에서 하녀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아르 님과 베르디안 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익숙한 객들의 방문이었다.
* * *
귀족의 저택에서 가장 정갈하면서 호화로운 공간을 두고 응접실이라 이른다. 온갖 사치를 쏟아붓고도 한껏 단조로운 체를 하는 게 미덕이라 여겨지는 귀족 사회의 단면이었다.
휴리트 저택은 이런 관습이 아주 철저히 반영되어 있었다. 특히 리안의 조모가 일찍이 바다 너머 먼 땅의 가구에 눈독을 들여 응접실을 이국적으로 꾸며 둔 부분이 상당히 유명세를 탔었다.
칠기 판이 붙어 있는 서랍장과 자개가 박힌 모퉁이 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것들이 화려한 샹들리에와 테이블, 그리고 타론의 유리 공예품과도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게 썩 놀라웠다.
미아르는 베르디안과 함께 리안의 맞은편에 앉아 응접실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감탄했다. 그러나 리안은 성의 없는 태도로 미아르의 감탄을 쳐 냈다. 묘하게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으나 미아르는 눈치채지 못했다. 헤일라에 관해 물은 건 그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부인께서는 주무시나 보죠?”
나붓하게 웃은 여인이 휴리트가의 오랜 전통이 흐르는 찻잔을 들어 힐긋 관찰했다. 오밀조밀 세공된 찻잔에 값을 매기느라 머릿속이 혼란해 보였다.
“그래.”
“아아, 그럼 잠에서 깨어나시는 건 언제쯤?”
미아르가 여전히 찻잔에 눈을 맞춘 채 물었다. 그러나 리안은 팔걸이에 팔을 괴고 말을 하지 않았다. 베르디안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방종한 신관에게 눈짓했다.
“그쯤 해. 찻잔 깨지겠어.”
“어머, 그냥 예뻐서…….”
“금액이 예뻐 보이는 거겠지.”
베르디안이 조롱하듯 낄낄대다가 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무기질적인 눈동자였다. 베르디안은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테이블 위에 올렸다.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느른하게 한숨을 쉬니 미아르가 입을 삐죽대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남자에게서 묘한 기류를 읽어 낸 탓이다.
“레테에 관한 수사가 종결되었다고.”
먼저 말문을 튼 건 리안이었다.
“네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걸로 마무리 지었죠.”
베르디안은 말없이 시가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연기를 빨아들인 남자는 검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천천히 눈알을 굴렸다. 감정을 알아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 치들이 믿던가?”
리안은 레테의 시신을 본 귀족들에 관해 물었다. 레테는 몸 곳곳에 상처를 달고 있었는데, 그걸 본 귀족들이 자살이라 납득하기는 어려웠을 테다. 미아르는 차를 홀짝댄 뒤 다리를 꼬았다.
“제 능력을 얕보시면 곤란한데요.”
“대신관 자리가 편하긴 편하군.”
“별말씀을.”
입가를 가리고 눈을 휘는 미아르는 겸손을 떠는 척하며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았다.
“쉽지는 않았답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해내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밤낮으로 열심히, 아주 열심히 뛰었죠.”
리안과 베르디안은 침묵했다. 미아르는 개의치 않고 혼자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말이에요.”
챙. 리안이 찻잔을 소리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에게서 묘한 불쾌감을 읽어 낸 미아르가 새삼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를 죽였다 의심받은 이들은 모두 제 덕을 본 셈이잖아요?”
미아르는 찻잔의 둥근 끝단을 중지로 은근히 쓸면서 리안과 베르디안을 훑어보았다.
“그래서 두 분이 저한테 부탁, 아니 거래를…… 제안하셨으면서. 아닌 척은.”
키득대는 웃음소리가 묘하게 경쾌했다. 그녀로서는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레테가 죽고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열댓 살 먹은 소년 하나가 신관으로 임명되었다. 레테의 뒤를 잇는 신관이었다. 소년 또한 어마어마한 신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소년일 뿐이었고, 미아르를 맹목적으로 따랐기 때문에 대신관 자리는 미아르가 꿰차게 되었다.
레테의 죽음에 관한 수사가 지지부진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대신관이 된 미아르는 이전 대신관 후보였던 레테를 미워했다. 공작은 제 여자를 갉아먹는 레테를 증오했고, 시신의 왼눈은 파여 있었다. 베르디안은 레테에게 집착을 보였고, 정황상 그녀는 죽은 날 다른 남정네를 만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세 권력자가 모두 용의 선상에 올랐었기 때문에, 일은 빠르게 묻혔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리안과 베르디안 모두 사건을 자살로 몰기 위해 물심양면 미아르를 도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레테의 죽음은 자살로 종결되었다. 오늘 셋은 그 축배를 들기 위해 모인 것이나 진배없었다.
“음.”
베르디안이 목을 울리며 일어났다. 그는 어딘가 갑갑한 듯 발코니 쪽으로 걸어가 전면 창을 열었다. 여전히 파이프를 물고 있던 베르디안은 창밖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권태로움이 덧씌워진 낯가죽의 근육이 약간 틀어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완벽하게 무표정으로 돌아온 남자가 일행이 있는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려 다가왔다.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 입술만 은은히 올라가 있는 채였다.
“그럼 이제 슬슬 때가 된 건가?”
“흐응.”
미아르가 콧소리를 내며 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기압이었던 방금과는 다르게 기분이 약간 고양되어 보였다. 그 변화를 본 베르디안이 품 안을 뒤적거렸다.
“때마침 폐하의 탄신 연회라지.”
황제의 탄신 연회는 거의 모든 고위 귀족들이 참석하는 행사였다. 그리고 황제는, 순산한 뒤 헤일라와 리안의 혼인 서약을 황실의 연회에서 진행하라 명한 바 있었다. 이전에 세느리움에서 레테가 죽은 바람에 진행하지 못한 의식을 진행하라는 의미였다.
그것이 황제가 혼인을 승인하는 조건이었다. 누구보다 빛나게, 누구보다 떳떳하게 혼인하는 것. 황제는 리안이 아주 어릴 때부터 그것에 집착해 왔으므로, 리안도 이것만큼은 어쩔 도리 없이 따라야 했다.
현재 헤일라는 리안과 사실혼 관계에 있었으나 황제의 승인 없이 공식 석상에서 ‘공작 부인’으로 불릴 수는 없었다. 그는 헤일라를 정식 혼인으로 묶어두는 데 목을 매는 쪽이었으므로, 황제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폐하께서도 대충 눈치를 채셨는지 선물을 보내셨어.”
베르디안이 고급스러운 가죽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똑, 하는 소리를 내며 열린 케이스 안에는 붉은 보석 귀걸이가 길게 세공된 채로 달랑대고 있었다.
“헤일라는 귀 안 뚫었는데.”
“그래도 하게 해. 폐하의 선물이니 하지 않으면 또 골을 내실 거다.”
베르디안이 털썩 앉으며 제 목덜미를 주물렀다. 무언가 곤한 눈치였다. 황제의 닦달에 선물을 직접 전해 주러 걸음 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나는 이제 가 볼게. 전해 줄 것도 다 전해 줬으니.”
“저는 헤일라 님을 뵈러 가야겠어요!”
베르디안이 일어나자마자 미아르가 소리쳤다. 베르디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아르를 바라보았다. 꼭 끼긱대는 고철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왜?”
일순 셋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베르디안은 한 번 더 왜, 하고 물었다.
“으응? 제가 헤일라 님을 뵙는 게 이상해요?”
그녀는 흥미가 인 듯 코를 찡긋댔다.
“네가 볼 이유가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
리안이 베르디안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미아르의 행동을 막으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헤일라 님이 제게만 특별히! 부탁하신 게 있거든요.”
그러나 미아르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리안의 입매가 굳었다. 그는 얄쌍한 눈썹을 살짝 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미아르.”
“네, 네에.”
베르디안은 미아르와 리안을 번갈아 본 뒤 무언가를 감지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있었다.
그때 미아르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러나 목소리는 푹 죽인 채 소곤댔다.
“쉿, 헤일라 님께는 저와 둘만의 비밀이라고 해 뒀거든요. 리안 님이 아시는 건 비밀이에요. 후작님도 비밀로 해 주셔요.”
“아, 그러니까 또 그 여자 하나 바보 만들고 있다는 말이네.”
베르디안은 이제 알았다는 듯 피식댔다. 결국은 또 레테의 동생이 멍청하게 속는 중이었던 거다. 그 여자는 발전이라는 게 없나.
“뭘 부탁했는데?”
“그게 말이죠, 수면…….”
“그만.”
리안이 냉정하게 일갈했다. 비밀을 숨기고자 하기보다는 귀찮은 대화를 중단하는 듯한 태도였다. 미아르는 조가비처럼 입을 딱 다물고 백치처럼 고개만 까닥댔다. 돈줄에게는 절대복종. 그녀의 가치관이 아주 투명하게 비쳤다.
그러나 베르디안은 이미 대충 상황을 눈치챘다. 아마 헤일라라는 반 미쳐 있는 여자가 미아르에게 수면제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네 여자는 너 몰래 받아먹는 거라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 속이면 좋아?”
“헤일라가 마음 편한 게 중요하니까.”
헤일라는 미아르를 철석같이 믿고 리안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고 했지만 리안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 뻔하고 뻔했다. 베르디안은 레테의 동생에게 미약한 실망감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로, 재미가 없다.
레테와는 다르게.
보람이 없지 않나. 지지부진한 쇼를 몇 년간 이어 가는 이 행위가, 의미가 없다. 자신이 어떻게 욕구를 내리누르면서 일을 진행하는지 누구도 모를 것이다. 레테의 죽음을 덮고, 그녀가 죽은 뒤에 난잡한 생활을 하며 감정을 감추고. 모두를 속이면서…….
이렇게 노력하는데. 나는 이토록 괴로움을 누르고 레테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참고 참는데 동생이라는 년은…….
감정이 범람하려고 했다. 아주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누군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흔들림이었다.
그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럼 나는 이만 가지.”
베르디안이 능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하고 일어났다. 다행히 그는 맹수처럼 포악하지만 몸을 숨길 줄 아는 기민함을 가졌다.
“저도, 저도 헤일라 님께 가 볼게요. 그래도 되죠, 리안 님?”
리안이 가볍게 눈짓했다. 허하는 동작이었다. 미아르는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헤일라의 방으로 향했다.
요리하기 좋은 가련한 여주인공을 보러 가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 * *
“헤일라 님!”
시종이 문을 열어 주자마자, 미아르가 방 안으로 뛰어들며 헤일라를 불렀다. 동굴처럼 부풀어 있던 이불이 잠시 위로 튀어 올랐다. 미아르는 방을 지키고 있던 하녀 둘에게 눈짓했다. 나가라는 의미였다. 하녀들은 군말 없이 자리를 떴다. 미아르는 헤일라를 만날 때 이렇게 주위를 물렸다.
모두 리안의 허락 덕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아마 헤일라는 그조차 모르고 있겠지만.
“헤일라 님, 저예요. 미아르 에르단도. 수면제! 수면제요!”
미아르는 발랄한 목소리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천천히 헤일라에게 다가갔다. 품 안에 있던 약병을 천천히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침상 위의 이불이 서서히 내려갔다.
“……약?”
“네에, 약이 왔답니다.”
헤일라가 천천히 일어나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볼이 발그레 한 게 꼭 복숭아 같았다.
“자는 약…….”
“자는 약 맞아요. 이 약을 물이랑 꼴깍 마시면!”
“잠이 와…….”
미아르는 그새 헤일라의 코앞에 와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둘은 마주 보고 배시시 웃었다. 헤일라는 여느 때와 달리 편안한 듯 얼굴 근육을 부드러이 풀었다.
“자고, 자고 싶어요.”
“네, 그래서 제가 왔어요.”
헤일라는 서서히 미쳐 가면서 동시에 지독한 불면증을 앓았다. 한동안 괜찮아지던 것이 근래 들어 부쩍 심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또, 리안이 주는 약은 발작적으로 피했다.
그는 해결책을 강구해야 했고, 그래서 미아르를 이용했다. 대가는 새로운 사업이었다. 돈에 미친 대신관은 이를 아주 반겼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헤일라에게 약을 건네고, 그녀와 비밀을 약속하면 되었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는 미아르를 철석같이 믿고 의지했다. 불쌍해라.
대신관이 된 여자는 속으로 헤일라를 조금 동정했다. 그러나 티 내지 않는 매끄러움은 숨길 것 많은 신관들의 미덕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다정함을 흉내 내어 헤일라에게 약병을 내밀었다.
“자아. 여기 있어요.”
비쩍 마른 열 개의 손가락이 약병을 그러쥐었다. 헤일라는 그걸 꼭 쥐고 제 가슴 안쪽에 병을 품었다. 그리고는 미아르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말, 하면 안 돼.”
“…….”
“말하지 마세요. 말하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여자치고 말이 꽤 반듯했다. 자애롭게 웃은 미아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누가 본다면 신실한 마음을 품고 봉사하는 신자라 생각했을 정도의 껍데기였다.
“예, 리안 님께는 비밀로 할 거예요. 정말로.”
순진하고 가엾은 여자는 고개를 까닥이고 침대 안으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미아르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럼 사흘 뒤에 또 뵈어요.”
그리고는 이불 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은 이불은 보드라웠다.
“저 치들은 제가 나가고 정확히 오 분 뒤에 들어와요. 알죠?”
“응, 그 전에 먹어야 돼.”
“맞아요.”
헤일라는 미아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른 나가라는 눈총이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만 약을 먹었다. 약 먹는 행위를 굉장히 부끄럽고 비밀스러운 행위로 여기는 듯했다.
아무렴. 미친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까.
미아르는 속으로 혀를 차고 빙글 돌아 방을 나섰다. 어차피 발코니 문도 잠겨 있었고 방 안에는 흉기가 될 수 있을 만한 물건도 없었다. 가구의 모퉁이들마저 둥글게 깎여 있었으니 말 다 한 것이다. 오 분 정도는 리안 또한 헤일라 혼자만의 시간을 허했다. 그녀는 편안한 마음으로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 미아르가 나가자마자, 헤일라가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곧장 침실과 연결되어 있는, 아무도 없는 욕실로 향했다.
헤일라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모두가 나를 미친 여자라 여긴다.
나를 이 꼴로 만든 리안 휴리트까지도.
“멍청하긴.”
“멍청하긴.”
레테의 환영과 헤일라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물론 청자는 헤일라 하나였다.
헤일라는 욕실 가장자리의 타일을 들어 올렸다. 이전에 헤일라가 난동을 피웠을 때 발을 디뎌, 덜컹대는 걸 눈치챘던 타일이었다. 그때부터 헤일라는 이 구석을 눈여겨보았고 지금은…… 아주 은밀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들어 올린 타일 안쪽에 패인 홈에는 알약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모두 미아르가 헤일라에게 넘긴 수면제였다. 헤일라는 오늘 받은 수면제 한 알도 그 안에 욱여넣었다. 몰래 수면제를 주는 척하며 리안에게 낱낱이 오늘의 일을 고해바치고 있을 미아르가 그려졌다.
역겹다. 가증스러워.
헤일라는 침상으로 돌아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이제 푹 자면 된다. 사흘 내내 불면증에 시달리는 척을 하느라 잠을 자지 못해 아주 졸렸다. 그녀는 불면증 따윈 겪지 않는 건강한 몸이었으므로, 피로함에 지쳐 잠들기는 아주 쉬웠다.
그런데 그때, 레테의 환영이 헤일라의 곁에 다가왔다.
“너는 달라?”
속으로 미아르를 험담한 것에 관해 레테가 물어 왔다.
“가증스러운 건 너야.”
아니야.
“아니긴.”
“뭘 어쩌고 싶은 건데?”
신경 꺼.
어차피 언니도 아니잖아. 헤일라는 죽은 언니의 환영에게 일갈했다. 진심을 담아 대답하는 게 상당히 무용한 일임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저건 언니가 아니다. 내가 만든 환영일 뿐.
“지금이 좋은 거야? 아닌 척하면서 날 죽인 새끼랑 사는 걸 즐기는 거지? 널 닮은 그 아기랑 너랑 날 죽인 리안 휴리트랑 가족이 되어서 살려고.”
헤일라가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 누웠다.
“내가 모른 척하라고 했지.”
“애새끼가 굶어 죽든 말든 네 알 바 아니어야 하잖아.”
“그냥 목을 졸라 죽여 버렸어야지!”
헤일라는 언니의 환영이 세리아를 저주하는 소리를 익숙하게 흘려들었다. 아기를 본 날부터 매일같이 들리기 시작한 새로운 종류의 저주는 이제 자연스러웠다.
“멍청한 년.”
나도 알아.
“아기를 사랑해? 네가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르겠어.
헤일라는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아기를 사랑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으나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보면 심장이 내려앉았고 포근해지기도 했으며 염려되기도 했다.
확실한 건, 완벽하게 외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저가 손을 뻗지 않으면 아기는 주린 배도 채울 수가 없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자신에게 집착하는 리안 휴리트 때문에.
“그럼 뭐 어쩌겠다는 건데?”
레테가 빈정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헤일라는 이런 순간에는, 자신이 만든 환영이 퍽 어릴 적의 언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마는 것이다.
“벗어날 거야.”
“그 미친놈이 온갖 거 다 부수는 거 구경하려고? 아니면 자해하는 꼴을 또 보고 싶어진 거야?”
어리석은 치를 비난하는 투였다. 이전에 헤일라가 도망쳤다가 리안이 집안의 온갖 가구를 부수고, 종래에는 자해한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저주가 점점 진해지고 있어. 무섭지 않아?”
레테가 사뭇 다정히 물었다.
“그래.”
헤일라는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녀는 이제 두렵다 이야기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처음 리안의 광증을 마주했을 때는 괜찮아질 거라고, 두렵지 않다고 속으로 중얼대곤 했는데. 이제 그건 별로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일 년 전 황제에게 받은 꽃이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라가스타. 거짓과 기만을 상징하는 꽃은 언니가 리안의 손에 죽었음을 의미했다.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더라.
화가 났나? 아니면, 증오에 몸을 떨었던가.
그것도 아니면 자책하고 슬퍼했나?
헤일라는 가끔 기억을 더듬곤 했지만 명쾌하게 기억해 내지는 못했다. 그만큼 복잡하고 지저분한 감정들이었다.
여하튼 중요한 건, 헤일라가 리안에게서 벗어날 계획을 세웠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정말로 미쳐 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헤일라는 제정신을 유지하되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살았다. 현저하게 떨어진 기억력을 끌어모았다. 흐려지는 이성을 붙들려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습관적으로 긁어 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백치처럼 행동해 모두를 안심시켰다.
다행히 흐려졌던 이지는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녀는 어떤 방법으로 탈출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험 삼아’ 도망치는 척을 해 봤다. 리안이 어떻게 나올지, 저택의 호위는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부른 배를 안고 발코니 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헤일라는 그날 우연히, 가장 완벽한 도주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발코니로 탈출하는 데에 실패한 직후, 헤일라는 질질 끌려와 침대에 내던져졌다. 왜 도망쳤냐고 묻는 리안에게 뭐라고 했더라.
‘네가 싫어. 넌 괴물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리안의 몸이 덜컥, 멈췄다. 갑자기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모든 행동이 멈추었고, 언뜻 본 눈은 초점이 흐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리안이 몸 위를 덮치고 목을 틀어쥐었다. 짐승처럼 커다란 남자가 그녀의 위에 올라타는데, 두려움보다는 압도된다는 감각에 지배되었다.
그러나 리안은 곧바로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냈다.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이었다. 그는 숨이 막히는지 가슴을 퍽퍽 치다가 갑자기 침대를 엉금엉금 기어 내려갔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물건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리안의 손에서 장인이 세공한 뭉툭한 조각들과 아름다운 가구들, 티 테이블과 의자, 모서리 장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계속 부수고, 망가트렸다. 자신의 손이 피로 흠뻑 물들 때까지 계속.
헤일라는 그때, 리안의 손가락뼈가 모두 으스러졌으리라 예상했다. 그의 자해는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며 파괴적이었다.
‘아, 리안, 리안, 그러지, 그러지 마…….’
무슨 용기였는지, 그녀는 바닥을 기어 리안의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이대로 두면 그가 죽을 것 같았고, 그가 누군가를 죽이고 말 것 같아서 눈물을 질질 흘렸더랬다. 그때의 헤일라는 차마 리안의 눈을 보지 못하고 신발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질 즈음, 헤일라는 천천히 목을 움직였다.
아, 드디어 리안의 눈을 본 것이다.
그의 두 눈은 헤일라의 왼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깊은 갈망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리안의 광증이 도졌음을 깨달았다. 온몸이 얼어 눈도 깜빡할 수 없었다.
아래를 멍하니 응시하던 리안이 몸을 천천히 말아 굽히고 그녀의 턱을 쥐었다. 그리고 불쑥 혀를 내밀었다. 붉은 살덩이가 닿은 곳은…… 헤일라의 왼눈이었다. 축축한 혀가 눈꺼풀을 밀어 올리듯 핥고, 빨다가 그 안에 있는 망막을 갈망하듯 더듬댔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당장이라도 눈알이 파일지도 모른다는 타당한 두려움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리, 안, 흑…… 흣…….’
헤일라는 필사적으로 그의 손에 매달려 이름을 불렀다.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꽤 효과가 있었다. 곧이어 리안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고, 그의 손이 떨어졌다.
약간의 손자국이 남아 있는 목. 축축하게 젖어 있는 얼굴의 반절. 그리고 얼굴에 튄 남자의 피, 엉망이 된 방 안…….
그걸 천천히 훑던 리안의 표정이 어땠더라.
‘누가 이랬어?’
그는 배에 칼이 찔린 사람처럼 덜덜 떨면서 물었다. 헤일라가 더 다친 곳이 없는지 몸을 더듬으면서도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누가, 누가…….’
그리고는 제 손바닥을 펴 멍하니 바라봤다.
‘아, 아…….’
펜촉처럼 날카로운 그의 눈매 끝이 둥글게 우그러졌다.
‘아…….’
리안은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누가 보면 헤일라가 살인마라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삼 일간 여자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흘째가 되던 날 밤에야, 그는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그녀가 있는 침실로 숨어들었다. 왼손이 꿰뚫린 채였다. 붕대도 감지 않은 손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견딜 수가 없어서.’
그는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처럼 자는 척을 하고 있는 헤일라의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너르게 펼쳐진 헤일라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중얼댔다.
‘손을, 자르려고 했는데…… 그럼 너를 안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을 것 같아서 못했어. 그건 죽는 것보다 무서워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잘못했어. 나 미워하지 마…….’
두서없는 말들이 흩어졌다. 헤일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생각했다. 역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를 미치게 만든 건 광증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광증이 그를 덮칠 때 리안은 헤일라의 왼눈에 기형적으로 집착한다.
깨달은 순간의 짜릿함을 리안이 이해할 수 있을까?
언니의 말이 맞았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 언니가 알려 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넌 그 저주가 기껏해야 인간 눈알 파는 정도라고 생각할 거야. 근데 사실 그게 다가 아냐. 그 새끼의 저주는 네 왼눈을 파내야 끝나. 사실 저주는, 자신이 죽인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이 같은 상처를 가지게 되면 끝이 나거든.’
놀랍게도 신전에서 사람을 죽이면 얻게 된다는 저주는 영원성을 띠는 게 아니었다. 신전의 기득권자들이 신성성을 지키기 위해 비밀로 묻어 두었을 뿐, 저주는 충분히 유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주가 풀리는 순간부터 나흘간, 저주가 풀린 몸은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지게 돼.’
시간이 지나고 언니의 말을 더듬어 보았을 때에도, 레테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저주에 관해 이야기를 해 주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눈알을 내어 주어야 리안의 광증을 풀 수 있다니. 비극처럼 느껴져 괴로움에 허우적댔으니까. 하지만 그 뒤는? 저주가 풀린 이에게 하루 간의 공백이 생긴다는 사실은 왜 이야기해 준 것일까.
헤일라는 리안이 제 왼눈을 짓누르던 순간에야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기회였다. 깨달은 순간부터 두려움 따위는 큰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기회를 얻으려면 두려움은 감수해야 해.”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언니의 환영과 눈을 맞추며 섧게 웃었다. 헤일라는 언젠가 언니가 핀잔주듯 해 주었던 충고를 언니의 환영에게 되돌려 주었다.
“세상에 그냥 얻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리안을 자극해 왼눈이 뽑히는 날, 헤일라는 그가 없는 하루를 얻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두려움 때문에 놓칠 수는 없다.
“그래.”
레테가 간만에 유쾌하게 웃으며 헤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시각, 헤일라가 아랫것들에게 심으라 명한, 초록 꽃잎의 꽃이 바람에 나붓댔다. 꽃의 이름은 루아두, 꽃잎을 으깨 문지르면 문지른 부위를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는 약초였다.
헤일라의 무기가 하나둘씩 저택에 산적해 가고 있었다.
사실을 아는 건 미쳐 버린 공작부인, 헤일라뿐이었다.
* * *
황제의 탄신 연회는 화려했다. 페이네리아는 섬세하게 세공된 유리 조각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샹들리에 아래를 흘긋 보았다. 썩 빼입은 인사들이 짝을 지어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 발코니로 통하는 창문에 시선이 멈추었다.
그곳에는 헤일라와 리안이 서 있었다. 헤일라는 리안의 손을 잡은 채 발코니에서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번잡함을 견디지 못해 바깥바람을 쐬고 온 듯싶었다.
어지간히 싸고도는군.
페이네리아는 속으로 이죽댔다. 그녀는 오늘 심기가 썩 좋지 않았다. 사실은 연회장에 손을 잡고 들어오는 헤일라와 리안을 보는 순간부터 기분이 나빴다.
금발의 계집은 제 머리 색과 썩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높은 네크라인으로 목과 가슴을 완벽하게 가린 슈미즈와 몸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벨벳 드레스는 고상하면서도 차분한 아름다움을 강조한 모양새였다.
황금색으로 수놓아져 있는 소매의 복잡한 문양과 넉넉히 부풀려져 있는 치맛단이 맵시 있게 어우러져 여자를 더더욱 귀족처럼 보이게 했다. 자신이 선물한 과하다 싶은 화려한 귀걸이까지도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외모는 얄미울 정도였다.
페이네리아가 그들에게 시선을 주는 동안, 오랫동안 보좌해 왔던 시종 루나이드가 고개를 조아리며 다가왔다. 주름진 이마와 굴곡 있는 매부리코, 잘 쓸어 넘긴 백발의 노인은 절제된 동작으로 황제에게 귓속말했다.
“폐하, 공작이 서약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먼저 가 있기를 청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페이네리아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판드로니아에?”
판드로니아는 황궁에 있는 가장 아담한 성이었다. 페이네리아와 타델리아가 유배되다시피 어릴 적을 보낸 궁이기도 했다. 리안은 그곳에서 혼인 서약식을 진행하게 해 달라 청했었다. 분명 가장 규모가 작은 성을 골라 사람을 적게 들일 속셈이었겠지만, 페이네리아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타델리아와의 추억이 담긴 장소였기 때문이다.
“예. 부인될 여인의 몸 상태가 염려된다 합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흔흔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싹 날아갔다. 그녀는 이죽대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황제가 주최한 연회 중간에 자리를 비우는 것은 무례였다.
그녀는 화를 삭이면서 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황제 쪽으로는 시선도 내비치지 않은 채로 헤일라를 쓰다듬고 있었다. 입술을 쉬지 않고 움직이며 그녀에게 무어라 재잘대고 있었다. 다른 이와 있으면 그렇게 과묵한 놈이.
“그렇게 하라 해.”
페이네리아는 어딘가 지친 얼굴로 명령했다. 그러나 루나이드는 움직이지 않은 채로 고개만 살짝 숙이고 있었다.
“뭐, 더 할 말이 남았나?”
“폐하. 얼굴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럼 좋다고 춤이라도 춰야 하나.”
“……폐하께서는 여전히 헤일라라는 여인이 마음에 차지 않으십니까?”
“당연한 소리를.”
다른 시종이 했다면 건방진 언사라며 벌을 내렸을 것이었다. 루나이드가 페이네리아를 어릴 적부터 돌봤던 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질문이었다. 페이네리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천한 신분의 계집이 마음에 들 구석이 어디가 있어.”
“그런 이유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루나이드.”
페이네리아가 경고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충직한 시종은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공작은, 아니 리안 도련님은 타델리아 님이 아닙니다.”
황제가 리안을 타델리아 공주의 대용품으로 본다는 건 죽은 타센도, 리안 본인도, 페이네리아도 알았다. 누구도 문제 삼은 적 없기에 수면 위로 올라온 적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
“그리고, 리안 도련님은 타센 휴리트와도 완전히 다른 인간입니다.”
움찔. 페이네리아의 손끝이 떨렸다. 그녀는 오랜 시종의 통찰력에 잠시 말을 잃었다.
“헤일라 님을 대하는 리안 님의 태도에서, 타센 휴리트를 떠올리는 게 힘드신 게지요. 압니다.”
정확했다.
사실 페이네리아가 싫어했던 건 헤일라라는 여인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이 끔찍하게 증오하는 타센과 겹쳐 보이는 리안이 싫었던 것이다.
결국 리안을 미워하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동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아이를 미워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과거에 머무르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망자는 이제 그만 놓아주시지요. 이미 하실 수 있는 모든 걸 하셨습니다. 게다가…….”
그가 잠시 망설이듯 입을 달싹였다. 백발의 노인이 주름진 얼굴 근육이 움직여 딱딱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미래를 읽는 자도 바꾸지 못한 미래를 무슨 수로 바꾼단 말입니까…….”
일순 페이네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명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죽어 버린 예언자와의 약속을.
루나이드는 황제를 상대로 맹랑하기만 했던 예언자, 레테를 떠올렸다.
‘세느리움에 헤일라와 공작을 초대해요. 거기서 대신관 임명식 전에 리안 휴리트를 불러내는 거죠. 물론 헤일라 없이 독대하셔야 합니다.’
‘그렇게만 하면 되나? 그 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불러내기만 하신다면…… 리안 휴리트와 헤일라의 관계는 영영 돌려놓기 힘들 만큼 부서질 겁니다. 장담하죠.’
레테는 끝내 황제에게 무슨 일을 꾸미는지 전부 털어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제는 레테를 믿었다. 오랜 관찰 끝에 레테가 리안을 깊이 증오함을 알아냈고, 세상 그 누구보다 제 동생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가 황제에게 부탁한 것은 리안과 헤일라를 세느리움에 초대하는 것, 그리고 세느리움에서 리안을 불러들이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그녀는 그렇게만 하면 황제가 원하는 대로 리안과 헤일라의 관계가 요원해질 것이라 말했다.
리안이 전장에 나간 틈을 타 헤일라를 찾아간 것도, 세느리움에 오라 약속을 받아 낸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일어날 것이라 말했던 레테는 그날 죽어 버렸다. 헤일라가 리안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괴로움에 몸부림치고야 있지만, 이것이 어떻게 영원한 이별이란 말인가.
페이네리아는 낙담했고 그래서 헤일라에게 꽃을 보냈다. 거짓과 기만의 꽃말을 가진 노란 꽃을. 그럼에도 변하는 것은 없었고, 결국 둘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혼인을 인정받기 위해 황궁에까지 당도했다.
미래를 읽는 자도 실패했다. 그것에 발을 걸치고 있던 페이네리아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은 지고의 황제가 패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걸 인정하지 못해 괴로운 것이다. 아직도 둘을 떼어 놓는 게 가능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지난한 일에 매달리는 것이다.
“이제는 놓으셔야 합니다.”
누가 봐도 무용한 일이었다. 영리하지 못한 처사다. 그러니 벗어나라는 말이었다. 현재와 미래를 옭아매는 과거에서. 타델리아와 타센에게서.
페이네리아는 잠깐 동안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채로 제 시종을 보았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 볼까 해.”
저번에는 조금, 몸을 사렸던 것 같아서. 늙은 시종이 아연해져 말을 더듬었다. 설마, 하고 무언가를 짚어 보는 표정이었다.
황제는 제 부모와 다름없이 저를 돌봐 주었던 루나이드를 향해 약간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페이네리아의 눈동자가 헤일라에게 닿았다. 그녀는 리안에게 딱 붙어 이리저리 연회장 안을 흘겼다. 그런 헤일라의 귓불에 탐스러운 루비 귀걸이가 대롱대롱, 달려 있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폐하.”
그리고 때마침, 황제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웃고 있는 남자는 황제의 동업자인 베르디안이었다.
“……리안에게는,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해. 축배는 함께 들어야지.”
페이네리아가 루나이드에게 명령했다. 시간을 끌라는 의미였다. 그는 베르디안 쪽을 흘금 보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주름진 손안에 땀이 차오를 만큼 불안감이 일었다.
축배를 들기 전후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다. 반드시. 그리고 결코 페이네리아에게 좋은 일은 아니리라.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루나이드는 페이네리아를 본 세월이 길었다. 그러나 페이네리아는 그녀이기 이전에 황제였다. 루나이드가 걱정이 된다 하여 훈수를 둘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황제를 어릴 적부터 보필해 왔던 시종이라 한들, 황궁의 종이 인형 신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루나이드는 천천히 허리를 펴고 베르디안에게도 예를 차린 뒤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리안에게 황제의 명을 전달해야 했다. 그것이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중앙 홀의 구석 자리에 있던 리안은 헤일라를 애지중지 돌보고 있었다. 그는 동그란 마카롱을 헤일라의 입에 넣어 준 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주었다. 순간 루나이드의 눈에 헤일라와 타델리아가 겹쳐 보였다. 외피의 무엇 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 여인들인데도.
‘난 떠날 거야.’
그는 약간 아득해져서 잠시 발을 멈추었다. 타델리아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삶은 내 거야.’
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루나이드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루나이드와 리안의 시선이 마주쳤다.
‘둘 다 지긋지긋해. 공작이나 언니나.’
모두를 끔찍하게 여겼던 도도한 공주. 그럼에도 모두의 사랑을 받은 공주. 리안의 어머니는 그런 여자였다.
아들은 그리 자라지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멀쩡한 여인을 제 어미처럼 만들어 끔찍하다 해야 하나. 루나이드는 씁쓸함을 느끼며 리안에게 다가갔다.
“……폐하께서 축배 이후에 이동하시라 명하셨습니다.”
가볍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리안 또한 숨 쉬듯 가볍게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축배를 드는 건 연회의 가장 주요한 행사였다. 그는 대충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헤일라에게 속삭였다. 얼핏 들으니 조금만 더 참아 달라는 이야기였다.
사근사근. 속닥속닥.
마음에 드는 이에게 과한 애정을 쏟아붓는 점은 제 어미를 닮았어.
루나이드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가 리안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는 순간, 황제의 시종이 중앙 홀에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페이네리아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퍼졌다가 모였다. 황제는 느릿하게 입술을 벌렸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모두, 탄신 연회에 걸음해 주어 고맙네.”
늙은 시종은 침음을 삼켰다.
“자, 모두 잔을 준비하고.”
단상 위에 서 있던 페이네리아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이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입술만큼 붉은 와인이 잔 안에서 출렁댔다. 귀족들도 하나둘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시종들이 그들의 잔에 붉은 와인을 채워 줬다.
모두의 얼굴에 충만한 안정감이 들어차 있고, 무르익은 분위기는 화려한 크리스털 장식들과 어우러졌다. 황제는 그것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씩, 웃었다.
“제국의 광영을 위하여.”
위하여.
모두가 황제의 마지막 말을 따라 하며 입에 술을 머금었다. 리안도, 헤일라도 작게 한 모금씩 술을 마셨다. 꼴깍. 헤일라의 목울대가 가볍게 울렸다. 리안은 그것까지도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꺄아아악!”
하객들이 잔을 올려 든 손을 내렸을 때 즈음, 누군가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의 시선은 황제가 서 있던 위쪽으로 쏠렸다.
페이네리아가 즐겨 입던 붉은 드레스 위로, 새빨간 선혈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약간 그을린 손등 위, 옅게 화장을 한 황제의 얼굴에도 예외 없이 피가 튀었다. 자신의 피를 확인한 황제의 동공이 일순 확장되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커헉…….”
어깨에 칼이 박혀도 눈썹 한 올 휘어지지 않는다는 황제의 표정이 고통에 헝클어져 갔다. 그녀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 모습을 본 시종들이 다급히 의원을 부르는 소리가 연회장에 퍼졌다. 루나이드가 황급히 황제에게로 달려갔다.
그사이 페이네리아는 몇 번이나 피를 토했다. 황제의 몸이 뒤쪽으로 천천히 무너졌다.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
차마 말을 마치지 못한 귀족이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귀족들이 웅성대며 제 잔을 한 번씩 확인하고 불안한 얼굴로 황제가 쓰러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쓰러진 황제의 몸이 철저히 가려진 채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시종들의 틈 사이로 살짝 보인 황제의 손에 선연한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뒤를 따르는 기사들과 황태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황제 음독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은 황태자가 맡았다. 주요 가문의 귀족들이 다수 용의 선상에 올라 있는 만큼, 황족이 조사를 주관해야 한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귀족은 없었다. 이 사건은 황제 측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 황족을 견제하는 신전과 귀족들의 중추를 잘라 버릴 수도 있는 대형 사건이었다. 아직도 황제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정도로 지독한 음독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사건이 벌어진 직후 본관의 문을 폐쇄했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도 성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배정된 방에서 심문의 차례를 기다렸다. 데려온 호위들 또한 따로 심문을 받아야 했기에 방 안에는 귀족들만 머무를 수 있었다. 황실의 기사들이 방 안팎을 지키고 있는 건 덤이었다.
그런 이유로, 리안과 베르디안, 그리고 헤일라는 황궁에서 배정해 준 방에서 심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귀찮네.”
리안은 금빛 투구를 쓴 황실의 기사들을 의식하지 않는 듯 뇌까렸다. 그는 가까스로 잠이 든 헤일라를 두어 번 더 토닥인 뒤 침상에서 일어났다. 베르디안은 리안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황제 시해 의혹에 휘말릴 테니 얌전히 있으라는 거지.”
“음.”
리안은 성가신 눈치였다. 혼인 서약을 핑계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더니 결국 사람을 이리도 짜증 나게 만들다니. 그는 저를 어여뻐하는 황제가 사경을 헤매는 데도 지루한 낯으로 한숨을 쉬었다.
“뭐, 적당한 놈들 추려서 목을 썰겠지. 평소에 거슬리던 것들 한둘쯤.”
베르디안의 입에서 반황제파 귀족의 이름 몇 개가 나왔다. 희생자로 지목될 만한 귀족들의 이름이었다.
“내가 하면 좋겠는데.”
죽을지도 모르는 이들을 지명하던 베르디안이 입맛을 다셨다. 옛날부터 그가 가진 기이한 취향이었다.
베르디안은 아무나 잡아 죽이는 걸 즐기지 않았다. 쉬이 건드릴 수 없는 질서를 파괴하고 불문율을 재조립하는 데 쾌감을 느끼는 종자였다. 그가 귀족들의 참수형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했다. 악우의 조악한 취미 생활이 익숙한 리안은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침상 쪽을 힐끔 확인했다. 베르디안이 약간 질린다는 투로 물었다.
“차라리 심문받을 때도 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 그래?”
빈정거림이 리안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 너 정도면 이르게 끝낼 테니 걱정 말고 다녀와. 내가 있잖아?”
베르디안은 부러 곰살맞게 웃었다. 약을 올리는 태도였다. 모든 사람이 심문을 받아야 했고, 심문은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다. 황족 시해가 중죄에 해당하는 만큼 철저하게 조사를 벌여야 했다. 리안 또한 예외 없이 헤일라를 두고 심문을 받으러 가야 한다는 의미다.
리안은 베르디안의 얼굴이 천진하게 밝은 만큼 기분이 더러워져 헤일라에게 다시 다가갔다. 이렇게 보면 거의 분리 불안을 겪고 있는 개새끼 같다고, 베르디안은 생각했다.
“내가 다녀올 동안,”
“절대 안 깨우고, 안 다가갈게. 일어나도 말 안 걸게.”
친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르디안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자신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내내 리안에게 들은 말을 줄줄 읊었다.
“그래.”
리안은 탐탁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헤일라를 황실의 기사들과 덩그러니 둘 수는 없었다. 리안은 황제가 헤일라를 몹시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적이 많은 인간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믿을 수 있는 귀족을 헤일라 옆에 붙여 두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인성이 밑바닥인 리안은 친우라 할 만한 게 베르디안밖에 없었다. 물론 루데인 후작을 잘 모르는 사람은 되레 그가 헤일라를 못 살게 굴지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괴팍하기로 유명한 베르디안은 아이러니하게도 보는 눈이 많은 장소에선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이 방에는 황제의 시종과 기사들이 있었고, 베르디안은 쓸데없는 짓을 해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아무리 쾌락을 좇는 데 몰두하는 인간이라도 귀족은 귀족. 그는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킬 줄 알았다. 언제나 과하게 즐기는 것 같지만 절대 자신의 지위를 놓아 버리지는 않는 아슬아슬함이 그의 본질이었다.
레테의 죽음을 냉정하게 덮어 버린 모습만 봐도 그랬다. 후작은 관심을 갖고 아끼는 대상이 나타나도 자신의 기반을 조금이라도 흔들면 냉정하게 쳐 냈다. 그것이 리안이 베르디안을 곁에 두는 이유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리안 님. 가시지요.”
황태자의 심복이었다. 리안은 헤일라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다가가 그녀의 이마를 한 번 뒤로 쓸어 준 뒤 입을 맞추고 방을 나갔다. 하루종일 피로에 시달렸던 연인은 아마 몇 시간은 죽은 듯 수면에 취하리라.
그렇게 리안은 삼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잠시 헤일라의 곁을 떠났다.
* * *
방에는 헤일라와 황실의 기사들 셋, 그리고 베르디안만 남았다. 베르디안은 속으로 다섯을 세고 검지로 의자 팔걸이를 세 번 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푹.
침상의 매트리스가 꺼지면서 가벼운 소리를 내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숙면을 취하는 듯 얼굴에 미동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디안이 히죽 웃었다.
“재밌네, 이거.”
그리고는 헤일라의 턱을 휙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움찔. 그제야 여자의 몸이 반응했다.
“그만 일어나.”
헤일라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데도 시침을 떼는 게 여간 괘씸한 게 아니었다. 베르디안이 이죽댔다.
“끝까지 자는 척하게? 나는 너한테 기회를 주려는 건데.”
“…….”
“그럼 리안에게 말해야겠네. 네가 미아르 에르단도한테 받은 수면제를 욕실에…….”
결국 헤일라의 눈꺼풀이 열림과 동시에 베르디안이 입을 닫았다. 그녀는 고요한 눈으로 베르디안을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방 안의 기사들에게로 시선을 옮겨 흘금댔다. 아무래도 그들의 의식해 섣불리 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안심해. 저들은 귀가 귀가 먹었거든. 그런 이들로 배정하라 일렀으니.”
베르디안은 침상에서 일어나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투구를 벗으라는 신호였는지, 기사들은 곧바로 투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두툼한 철 덩어리가 벗겨진 관자놀이 옆쪽을 본 헤일라의 어깨가 바짝 굳었다. 방을 지키고 있는 두 기사의 귀는 모두 뜯겨 나가 있었다.
그녀는 기사들을 살피던 눈길을 거두고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베르디안을 경계하는 눈초리는 거두지 않은 채였다. 그 모습을 본 베르디안이 갑자기 낄낄대기 시작했다.
“언니랑 비슷하네.”
언니? 갑작스레 나온 레테의 이야기에 헤일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든 의심부터 하는 거. 비슷해.”
“…….”
“그런데 이상하지. 딱히 너한테 쑤시고 싶다는 마음은 안 들어.”
역시 레테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그는 잔잔한 말투로 헤일라가 기겁할 만한 말을 내뱉었다. 뭘…… 쑤셔? 헤일라는 베르디안의 말을 더듬어 보다가 인상을 깊게 찌푸렸다.
“당신 뭐예요?”
헤일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곤댔다.
“베르디안. 베르디안 루데인. 레테가 내 얘기 안 했어?”
그는 약간 실망한 투로 물었으나, 헤일라는 침묵했다.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다. 베르디안은 금세 아쉬운 기색을 지워 내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뭐,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이야기할게. 난 레테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려고 널 만나러 왔어.”
“언니의 부탁?”
헤일라는 종잡을 수 없는 남자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내기 위해 날을 바짝 세워 물었다. 저도 모르게 눈 끝이 바짝 올라갔다.
“응. 레테가 마지막으로 부탁한 게 있거든.”
그가 주머니 속을 뒤적대다가 붉은 귀걸이 한쪽을 들어 올렸다.
“아.”
놀랍게도 그것은 헤일라의 귀에 달려 있는 것과 같은 귀걸이였다. 황제가 선물한 보석과 완벽하게 똑같은 모양이다.
“잘 봐.”
기다란 보석의 윗부분을 천천히 힘을 주어 돌리니, 실처럼 가는 균열이 생기며 뽁, 하고 보석의 위와 아래가 분리되었다. 그가 천천히 분리된 귀걸이의 아랫부분을 기울여 헤일라에게 보여 주었다. 놀랍게도 안에는 액체가 일렁이고 있었다.
“마시면 사흘하고도 반나절은 죽은 사람처럼 잠들게 하는 네이오라라는 약이야. 맥박도 숨도 옅어져서 진짜 죽은 사람처럼 위장할 수도 있는.”
구하려고 바다 건너까지 다녀왔지. 그가 생색을 내듯 덧붙였다. 그러나 헤일라는 그가 다른 이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째서?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헤일라는 묘한 위화감을 떨쳐 내고 중요한 사실을 물었다. 어느새 그녀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언니가 그걸 나한테 주라고 했어요?”
“응.”
베르디안은 잠시, 레테가 보냈다는 신전의 시종이 한 말을 떠올렸다.
‘레, 테 님, 께서, 흑, 베르디, 안 님께 전해야 할 말이 있다, 고 하셔서. 가 보라고, 서둘러 가라고, 하, 하셨…… 습니다, 아, 그, 부탁한 건,’
“너를 위한 거라고.”
‘헤일라를 위한, 거라고…….’
“너를 위해 쓸 물건이라고 했어. 그러니 네게 줘야지.”
“나한테 그걸 왜.”
“쓸 데가 있지 않겠어?”
그는 친절하게 헤일라의 귀에 걸려 있던 귀걸이 한쪽을 뺐다. 그리고 액체가 들어 있던 귀걸이를 다시 조립해 헤일라의 귀에 걸어 주었다. 언뜻 만져 보니 손끝에 느껴지는 굴곡과 정교함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처음부터 한 쌍이었던 것처럼.
……이렇게까지 똑같은 귀걸이라면, 이를 선물한 황제 또한 이 남자의 계획에 동참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폐하와 공모하셨군요.”
“아주 멍청하지는 않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베르디안의 거래였다. 황태자는 다음 황위를 확실히 보장받고 싶어 했고, 황제는 리안과 헤일라가 떨어지기를 바랐으며 베르디안은 레테의 염원을 이뤄 주어야 했다. 셋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까지 모두 늘어놓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헤일라는 무언가 미심쩍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 남자, 대체 언니와 무슨 관계이길래 황제와 공모까지 한 걸까. 리안을 속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언니는 죽었는데. 언니와 보통 깊은 관계가 아니고서야…….
그녀는 차마 생각을 맺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당신 우리 언니랑 무슨 관계예요?”
“아…….”
베르디안은 침음을 흘리고 잠시 숨을 참았다. 헤일라는 그 모습을 미심쩍게 바라봤으나, 그는 이내 약간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연인?”
베르디안은 약간 벅찬 목소리였다. 일순 헤일라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사기꾼 보듯 그를 응시하고 말았다. 몸을 살짝 뒤로 물려 그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낸 건 덤이었다.
“……당장 이 방에서 나가요.”
언니가, ‘그’ 레테가 연인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헤일라는 레테가 남자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잘 알았다. 레테가 연인을 만들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적나라한 반응에 베르디안이 급히 말을 주워 담았다.
“아, 농담이야. 그냥 나 혼자 좋아한 거지.”
그는 과장된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어댔다.
“걘 진짜 완벽했거든. 죽어 버렸지만.”
헤일라는 슬슬 그가 정상이 아님을 눈치챘다. 언니와의 관계에 관해 물어봐야 정상적인 답변을 얻기는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남자는 헤일라가 미친 척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자칫 방치했다가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녀는 질문의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그럼 내가 수면제를 숨기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휴리트 저택에 간 날, 집에 가는 척하고 네 방 발코니로 숨어들어서 널 봤지.”
“하.”
발코니 뒤에서 훔쳐봤다니.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헤일라는 점점 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짜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나 해서. 그러면 내가 일을 벌인 보람이 없잖아.”
“언니가 부탁해서 하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헤일라가 톡 쏘듯 이야기하자, 베르디안이 잠시 주춤하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음, 그렇지. 어쨌든 저택에서 나가고 싶은 거라면 그걸 써. 리안에게는 일반 수면제가 들지 않아.”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베르디안이 말하고 있는 건 헤일라도 대충 눈치챈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수면제를 모으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를 자극하려고. 그래서 눈을 파이면, 며칠의 여유가 생기니까.
헤일라는 부러 이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쥐고 있는 가장 좋은 패를 함부로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네가 뭘 생각하든 이게 나을 거야. 레테의 안배는 틀리지 않으니까.”
그러나 베르디안이 준 약이 확실한 효능만 가지고 있다면, 그가 하는 말이 맞았다. 왼눈을 포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일은 더 편하게 굴러갈지도 몰랐다. 게다가 언니는 예언의 힘을 갖고 있었으니까. 리안과 헤어질 완벽한 방법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하지만…….
헤일라는 잔잔하면서도 또렷한 얼굴로 수많은 경우의 수를 가늠해 보았다. 베르디안은 꽤 신중한 여자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무언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정 의심스러우면 네가 모으는 수면제랑 네이오라를 함께 써. 그리고 그날 내가 저택을 빠져나가는 걸 도와주지.”
베르디안의 제안을 듣던 헤일라가 명징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어느 때보다도 온전하고 이성이 번뜩이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약간 비아냥대며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날 도와요? 언니가 이것도 시켰어요?”
“아니. 이건 안 시켰어. 그런데 꼭 말을 해야 아나? 걘 분명 내가 이러기를 바랐을 거야.”
“…….”
“너랑 리안이 붙어 있는 꼴을 끔찍해했으니까. 그 앤 좀 끈질겨서, 죽어도 제가 원하는 그림을 보고 죽어야 할 것 같았거든. 내가 대신 이뤄 주려고.”
그는 그냥 그러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넌 도망을 가야 해. 아주 멀리멀리.”
“날 죽이지 않는 건요? 언니는 그걸 가장 원했을 텐데.”
헤일라가 씁쓸히 웃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레테라면 차라리 동생을 죽여 달라 부탁했을 것 같은데. 언니는 그러고도 남을 인사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언니를 이해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베르디안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을 비웃듯 피식댔다.
“너는 네 언니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구나.”
무언가에 잔뜩 물이 들어 우그러진 것 같다. 베르디안은 그만큼 축축하고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이 헤일라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언니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알아요.”
언니와 평생을 함께 살아온 사람은 자신이었다. 언니가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했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레테와 자신의 역사라고는 한 톨도 알지 못하는 이는 함부로 판단할 계제가 못 되었다.
“글쎄.”
그럼에도 베르디안은 의뭉스런 대답만 남기고 화제를 전환했다.
“약속한 때에 리안에게 약을 먹여 재우기만 해. 그럼 내 사람이 널 데리고 공작가의 지하로 안내할 거야. 밖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가 있는 곳이거든.”
“……당신의 사람?”
“아아, 너도 아는 사람인데.”
베르디안은 가볍게 웃고는 덧붙였다.
“내 말만 잘 따르면, 다른 나라 가서 자리 잡고 사는 건 힘들지 않을 거야.”
“아니, 잠깐…….”
“나머지는 다음에 사람을 통해서 전하지. 곧 리안이 돌아올 테니.”
헤일라는 시간의 흐름을 그제서야 깨닫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리안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긴장으로 목이 죄어 왔다.
그녀는 베르디안을 추궁하는 걸 포기하고 우선 누웠다. 베르디안이 자신이 원래 앉아 있던 소파 쪽으로 가 앉는 게 보였다. 그는 담배 파이트에 곧바로 불을 붙였다. 그걸 확인한 헤일라는 곧바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베르디안이 바꿔 끼운 오른쪽 귀걸이가 유독 더 무겁게 느껴졌다.
* * *
사흘 전 황궁으로 바퀴를 굴렸던 공작의 마차가 휴리트 저택 앞에 멈췄다. 그 안에서 헤일라를 안은 채로 내린 리안이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황궁에서 있었던 소동을 암암리에 전해 들은 사용인들은 공작이 무사히 돌아온 데에 안심했지만, 동시에 그의 비틀린 심기에 긴장했다. 공작은 돌아온 직후부터 헤일라와 방에 틀어박혔다.
“미안해, 헤일라.”
둘은 옷만 갈아입은 채로 침상 위에 기대앉아 있었다. 혼인 서약을 미처 마치지 못하고 저택으로 돌아온 게 죄스러운지, 리안은 헤일라를 껴안고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누가 보면 헤일라가 정식 공작 부인이 되는 걸 필생의 염원으로 여긴 줄 알았을 것이다.
“응, 으응…….”
헤일라는 백치 같은 목소리로 칭얼대며 리안의 목을 껴안았다. 꼭 껴안고 품 안으로 파고들자, 리안은 무엇에 감동을 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여자를 꽉 껴안았다.
“걱정 마. 곧 해결될 테니까…….”
리안은 어르는 투로 속삭이고는 황금빛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었다. 쪽쪽, 귓불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여자의 가는 다리 사이로 향하는 두툼한 손의 움직임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헤일라는 다리를 바짝 모으며 신음 소리를 냈지만 리안은 등을 토닥이며 등 뒤의 단추까지 끌렀다.
참으로 한결같은 작태다. 헤일라는 속으로 짜증이 이는 것을 느끼며 단단한 가슴을 살짝 밀쳤다. 리안은 익숙한 듯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
“많이 피곤해?”
“잘래, 잘래…….”
“음.”
리안은 대답하지 않은 채 헤일라의 머리칼만 한참을 쓰다듬었다.
“그럼 씻고 자자.”
리안은 헤일라의 옷을 한 꺼풀 벗기며 웃었다. 그녀는 리안에게 몸을 맡기고 눈만 끔벅댔다. 마른 알몸이 두툼한 팔에 들려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건 금방이었다.
리안은 손으로 물 온도를 확인하고 헤일라를 욕조에 앉혀 놓았다. 그리고는 욕조 턱에 앉아 손으로 물을 퍼 헤일라의 어깨에 뿌려 몸을 적셔 준 뒤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뜻하다, 그렇지?”
“응…….”
그리고 예상한 대로 헤일라와 리안은 욕실에서도 손을 뻗어왔다. 그는 정성스레 씻긴 여체를 카우치에 눕혔다. 헤일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불안하게 좌우를 둘러봤다.
“싫, 싫어…….”
“아니야. 무서운 거 아니야.”
리안은 킥킥대며 헤일라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상냥하게 이마에 입 맞춰 준 남자의 성기는 흉흉하게 발기해 있었다. 배꼽까지 닿아 있는 남근을 본 헤일라는 겁을 먹은 사람처럼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리안에게 손목을 잡혀 꼼짝없이 몸을 내어주었다.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리안은 일방적으로 헤일라를 밀어붙였다. 음핵을 문대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구멍을 넓혔다. 그리고는 곧바로 삽입해 허리를 쳐올렸다.
헤일라는 수증기가 어그러진다 느낄 정도로 아찔했다. 그녀는 행위가 얼른 끝나기만을 바라며 그에게 매달렸다.
“아, 아응!”
“흣.”
리안이 삽입한 상태에서 마른 여체를 들어 올렸다. 무릎 아래를 제 손으로 받쳐 상체만 벽에 붙이자, 바짝 긴장한 헤일라의 안쪽이 확 졸아들었다. 흰 발끝은 곱아들었고 종아리는 위아래로 허우적댔다.
“아, 아아…….”
불안한 자세에 헤일라의 엉덩이가 움찔댔다. 리안은 축축한 혀로 목덜미를 핥으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동시에, 팔에서 힘을 약간 뺐다.
“히익!”
헤일라의 몸이 약간 내려간 순간 리안이 허리를 쳐올렸다. 어느 때보다 깊은 삽입감에 헤일라가 진저리를 치며 리안의 팔뚝을 잡았다.
“시, 시러, 아, 아……!”
“헤일라, 헤일라.”
리안은 혀로 윗입술로 핥으며 눈이 풀린 헤일라의 얼굴을 감상했다. 그리고 몇 번이고 같은 방식으로 성기를 박아 댔다. 헤일라는 자궁이 밀려 올라가는 것 같은 압박감을 오롯이 견디며 리안의 어깨를 긁었다. 그는 그것조차 황홀한지 더해 달라 속삭이며 도톰한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달칵.
그 순간, 헤일라의 눈이 반짝 뜨였다. 리안이 밟은 타일이 요란한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다행히 리안은 정사에 완전히 취해,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헤일라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달칵, 달칵.
리안이 약간씩 자세를 움직일 때마다 그가 밟고 있는 타일이 들썩였다. 헤일라는 그제야 끔찍한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리안이 밟고 있는 타일 아래, 수면제가 숨겨져 있다.
“아아, 헤일라…….”
긴장감에 질 내벽이 확 수축하며 남근에 다닥다닥 들러붙었다. 리안은 느른하게 숨을 내쉬며 잠시 눈을 감았다. 안쪽을 온전히 느끼기 위함이었다. 습한 동굴이 성기 뿌리까지 탐하려는 듯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헤일라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아, 흣, 그만, 그만!”
헤일라는 리안에게 애원하며 울먹였다. 당장 행위를 멈춰야 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들킬지도…….
“아아!”
쑥, 하고 들어온 기둥이 헤일라의 자궁구를 문지르며 밀어 올렸다. 짓눌렸다가 미끌대며 틀어졌다. 몸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망가지는 듯한 감각에, 헤일라는 허리를 떨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단단한 어깨에 물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하아…….”
그걸 느낀 리안이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고 중얼대면서 다시 헤일라를 카우치에 눕혔다. 그리고는 진득하게 얼굴을 관찰하며 볼에 입을 맞췄다. 아무래도 헤일라의 표정을 느긋이 관음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남자는 더 흥분해 허리를 흔들어 댔다. 헤일라는 엉엉 울면서도 그가 자리를 옮겨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그를 받았다.
정사가 모두 끝났을 때 즈음에는 탈력감에 눈앞이 아롱대는 걸 간신히 견뎠다.
잘못을 저지른 뒤에 꼬리를 치며 주인에게 잔망을 떠는 강아지처럼, 리안은 격한 관계 뒤에는 더욱 상냥해졌다. 그는 헤일라에게 가운을 입히고 침실로 돌아와 이불 안으로 그녀를 밀어 넣고 한참 동안 토닥여 주었다.
베르디안과의 거래, 그리고 낯선 장소, 마지막으로 리안과의 거친 정사까지. 불면증 환자 행세를 하는 헤일라였지만, 지금만큼은 잠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체취를 좇으며 까무룩 잠들었다.
그리고 헤일라가 잠든 지 두어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림자처럼 방에 숨어 있던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검게 물들이고 있는 남자는 한참 동안 침묵하며 리안의 뒷모습만을 바라봤다. 공격할 때를 기다리는 맹수라기보다는, 주인의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냥개 같은 모습이었다.
리안이 헤일라의 뺨을 어루만지고는 목을 울렸다.
“말해. 잠들었어.”
지금은.
리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심복에게 물었다. 파이라는 아니었다. 파이라는 지금 연인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그는 파이라 이외에 리안을 보필하는 심복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파이라도 모르는 리안의 사람이었다. 리안이 헤일라의 머리칼을 검지로 꼬며 물었다.
“약은 어디에 숨겼지?”
“……욕실 구석의 타일 아래였습니다.”
아. 리안이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감탄과 은은한 안타까움이 배어든 목소리다.
“그래서 오늘 그렇게 조였구나.”
구석진 곳에 몰았을 때 아래를 바짝 조이던 걸 기억해 낸 리안이 설핏 웃었다. 귀여운 헤일라. 그가 잠든 여자의 귓가에 속살댔다. 그리고는 상체를 숙여 헤일라의 도톰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헤일라 님이 숨겨 두신 약들과는 무관하지만, 베르디안 루데인 후작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가 저택에 사람을 심었습니다.”
유능한 부하는 자신이 파악한 바를 지체 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베르디안과 황제의 거래, 그리고 앞으로 그들이 헤일라를 어떤 방식으로 빼돌릴지 예측하여 설명하는 솜씨는 꽤나 훌륭했다.
“후작 쪽을 잘 살펴. 내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헤일라를 빼낼 수 있는 건 베르디안밖에 없으니.”
“예.”
“정문 쪽은 은밀함과는 거리가 머니까, 아마 지하와 이어지는 통로 쪽에 있다가 헤일라를 데려갈 거야. 그러면…… 그때 죽여.”
리안은 오랜 친우를 죽이라 명하면서도 고저가 없는 목소리였다.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것처럼 철저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심복을 내보내고는 침상에 누워 있는 여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달빛과 침묵, 그리고 내려앉은 어둠뿐이었다. 파란의 중심에 설 여자는 여느 때보다 더 순진한 얼굴로 잠에 취해 있었다.
* * *
리안과 헤일라가 저택에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노데이나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세리아를 돌보고 있었다. 옆에서는 유모가 세리아의 입 옆에 흐른 침을 닦아 주고 있었다. 보드라운 천의 촉감이 좋은지, 아기는 입을 오물대며 헤죽 웃어 댔다.
“아이구, 우리 예쁜 아기씨.”
노데이나는 뿌듯한 얼굴로 함께 따라 웃었다. 평화로운 오후의 한때였다.
“아우우, 아우우우!”
세리아가 몸을 뒤척대며 눈앞의 딸랑이를 향해 손을 휘적댔다. 뒤집기를 할 기세였다. 세리아는 이제 곧잘 뒤집기를 하였다. 얼마 전에는 스스로 앉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곧 길 수도 있을 것이라며 유모가 말했으니, 이제 정말 다 컸다. 팔불출의 마음으로 노데이나는 가슴을 틀어쥐었다.
그때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리아 아가씨 식사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주인 마님에게 아가씨를 데려가려는 하녀의 등장이었다. 오늘은 리안이 황궁으로 잠시 출타 중이라, 하녀장이 헤일라의 옆에 딱 붙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하녀를 보낸 것이리라. 아침은 마님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유모가 분유를 먹였는데, 지금은 괜찮으려나.
노데이나는 걱정되는 마음을 안고 주섬주섬 세리아의 짐을 챙겼다. 요즘 들어 칭얼댐이 잦아진 아가씨를 달래기 위한 여러 장난감들이었다. 장인이 섬세하게 세공한 유리 안에 조개 조각들이 들어가 있어 흔들면 청량한 소리를 내는 딸랑이도 챙겼다. 요즘 세리아가 특히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다.
“겨우 정신이 돌아오셨어요. 얼른 가자고요.”
새로 들어온 신입 하녀가 귀찮다는 듯 노데이나를 채근했다. 유모님에게는 차마 말 못 하고 나한테만. 다이네라는 저 하녀는 싹싹한 성격으로 하녀장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아부 떠는 실력이 남다르다는 의미였다. 노데이나는 입을 삐죽대면서도 빠릿하게 움직였다.
세리아를 데리고 공작의 방문 앞에 당도하는 건 금방이었다. 그들은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셋은 익숙하게 기다렸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파이라였다. 요즘 들어 통 보이지를 않더니,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나 보다. 노데이나는 그렇게 여기고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헤일라 님, 세리아 아가씨예요.”
노데이나는 부러 경쾌하게 헤일라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한 번에 세리아의 주린 배를 채워 주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유모가 그에 화답하듯 비쩍 마른 여자에게 세리아를 내밀었다. 다행히 헤일라는 아기를 거부하지 않고 안아 들었다. 모두가 안심했다.
“여기 젖병을…….”
노데이나는 헤일라에게 젖병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세리아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웅, 으우, 으우우우……!”
안긴 자세가 불편한 건지 계속 뒤척이며 허우적댔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미를 보면 좋아 헤죽대기 바빴는데…….
노데이나가 급히 딸랑이를 꺼내 들었다. 꽤 묵직한 것을 열심히 흔들어 경쾌한 소리를 내어 보았으나 아기를 달래기는 역부족이었다. 노데이나는 딸랑이를 헤일라의 옆에 내려다 두고 다른 장난감을 찾았다.
“아휴…….”
그때 하녀장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침상 쪽으로 성큼 다가와 무표정한 얼굴로 헤일라를 내려다보았다. 하녀장이 세리아를 빼앗아 든 건 순식간이었다. 세리아의 울음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그럼에도 하녀장은 자신이 달래겠다며 헤일라에게 세리아를 내어주지 않았다. 굉장히 단호한 태도였다.
따지고 보자면 꽤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정신이 나간 여자에게 우는 아기를 맡기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짜증이 난다고 아기를 던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목이 날아가는 건 사용인들이었다. 그러나 헤일라도 물러서지 않고 무엇에 씐 사람처럼 팔을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아기, 아기…….”
헤일라가 멍한 얼굴로 세리아를 불렀다. 방 안의 모두가 헤일라와 하녀장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기, 아기가…….”
헤일라는 침상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 서 있던 하녀장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차마 그것을 쳐 내지 못한 하녀장이 하, 하고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헤일라의 힘이 억센지, 그녀는 풀썩, 하고 침대에 걸터앉게 되었다.
“내 아기, 돌려, 돌려주세요…….”
헤일라가 중얼중얼 말했다. 세리아는 이제 히끅대며 숨넘어갈 듯 울고 있었다. 노데이나와 유모는 세리아가 걱정되어 안절부절못했다.
“이거 놓으…….”
“아기, 아기, 아기…….”
하녀장이 세리아를 안은 채 제 치마를 부여잡고 헤일라를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아, 정말!”
결국 폭발한 하녀장이 헤일라를 탁, 하고 밀쳤다. 순간 선을 넘어 버렸다고 생각한 하녀장의 몸이 얼었다. 그녀는 리안의 심복인 파이라를 흘긋 보았다. 그러나 그는 딱히 하녀장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
하녀장은 등줄기에 땀이 주룩 흐르는 걸 느끼며, 나중에 저 남자에게 돈이라도 조금 쥐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단 안심하며 다시 헤일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찌 되었든 무례를 저질렀으니 사죄를…….
퍽!
그러나 그 순간, 둔탁한 마찰음이 하녀장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주룩, 하고 무언가 흐르는 감각이 목덜미에 느껴졌다.
“꺄아악!”
누군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무미건조한 얼굴이던 파이라까지도 이번에는 꽤 놀란 눈치였다.
“아기…….”
헤일라가 손잡이만 남은 딸랑이를 들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노데이나는 재빨리 쓰러지는 하녀장에게서 세리아를 안아 들었고, 하녀장의 몸은 그대로 무너졌다.
“하, 하녀장님!”
신입 하녀 다이네가 쓰러진 하녀장을 부여잡고 사람을 불렀다. 파이라와 함께 침실을 지키던 기사 하나가 다가와 하녀장을 업었다. 유모는 세리아의 눈과 귀를 막고 급히 방을 나갔다.
노데이나도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방 안에는 반드시 하녀가 상주해야 한다는 리안의 명에 따라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다이네와 함께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난장판이 된 침대 아래를 눈으로 훑은 뒤 다이네에게 눈짓했다. 헤일라가 내려와 발을 다치지 않게끔 하라는 의미였다.
“헤일라 님, 우선 그것부터 내려 두시고…….”
노데이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응당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헤일라의 멍한 눈이 노데이나에게 닿았다.
챙그랑!
그리고 헤일라가 유리 손잡이를 바닥에 던졌다. 노데이나는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침대 밖으로 비죽 나와 있는 헤일라의 발을 쥐어 침상 위로 올려 주었다.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어 주셔요, 네?”
그녀는 최대한 상냥히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얼른 치울 것을 들고 와 바닥을 쓸어야 했다. 그리고 새로운 하녀 두어 명을 더 불러 함께 시중을 들어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의 끈이 끊기는 건 금방이었다.
“내가 가만히 있길 바라면.”
“…….”
“나랑 대화를 좀 하죠.”
어느 때보다 또렷한 헤일라의 목소리 때문에. 노데이나는 이채가 감도는 맹금류의 눈동자를 본 사람처럼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목을 돌려 파이라를 바라봤다. 주인의 충실한 심복이자 헤일라의 감시자가 아닌가. 그러나 노데이나와 눈을 맞춘 파이라는 고요함만 유지할 뿐이었다. 그 옆에 있던 다이네 또한 과하게 침착했다. 헤일라의 변화에 놀란 건 자신뿐이었다.
대관절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노데이나는 뛰룩뛰룩 눈을 굴리며 입술을 벌렸다. 헤일라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였다.
팍!
얼이 빠진 노데이나의 멱을 잡고 헤일라가 자기 쪽으로 끌어들였다. 와삭, 하고 구두에 유리 조각들이 짓이겨졌다.
“정신 차려요.”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냉연한 목소리, 초점이 돌아온 눈동자, 억센 힘…….
“당신이 해 줘야 할 일이 있어요.”
저택의 모두가.
“그리고 날 돕지 않으면, 당신을 죽일 거야.”
이 여자에게 속고 있었구나!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시지요.”
노데이나의 뒤에서 파이라가 헤일라를 독촉했다. 헤일라는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열흘 뒤, 난 이 저택을 떠나요.”
경악에 찬 노데이나가 눈을 크게 뜨고 힉, 소리를 냈다.
“그때 당신은 리안의 차에 이걸 타요.”
달그락, 하고 하녀의 손 위에 알약 몇 개와 귀걸이 한 개가 놓였다. 헤일라는 친절하게 알약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두라고 조언하고는, 귀걸이를 열어 안에 든 액체를 보여 주었다.
“저, 전, 저는…….”
“왜, 못하겠어요?”
“그, 열흘 뒤라면, 주, 주인님도 계시는…….”
“판단은 내가 해요.”
헤일라는 단호하게 노데이나의 반박을 일축했다. 사실 헤일라 또한 리안이 없을 때 도주하는 게 나을 거라 여겼던 때가 있었다. 그게 빠져나가기는 더 쉬울 테니까.
하지만 리안을 피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리안이 심어 놓은 인간을 다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저택에 리안이 없어도 그는 하루가 채 가기 전에 자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고, 그건 그가 전장에 있다 해도 다르지 않으리라.
반드시 그를 깰 수 없는 잠 속으로 유인해야만 했다. 약을 쓰든, 저주를 이용하든 머리를 잠재워 손발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조치해야 한다.
헤일라는 계획에 대해 전혀 모르는 어리숙한 하녀의 어깨를 쥐고 속삭였다.
“배신하면, 당신은 저택 지하에 묻힐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노데이나의 다리 힘이 완전히 풀렸다. 그녀는 한참 동안 주저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서는 울먹이며 유리 조각을 치웠다. 그리고는 나가 보아도 되겠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헤일라는 거기에 대고,
“입을 잘못 놀리면 어떻게 될지는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라고만 말했다. 노데이나는 울먹이면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고 쫓기듯 방에서 나갔다.
* * *
노데이나가 나간 뒤 헤일라는 침대 위로 꾸물꾸물 올라갔다. 남아 있는 다이네와 파이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다.
“저 하녀, 믿을 수 있는 애인가요?”
다이네가 가볍게 물었다. 그녀는 팔랑팔랑 걸어 다니며 침실 안을 둘러봤다. 방 안을 품평하려는 의도를 숨기지도 않은 채였다.
“아뇨.”
헤일라는 어딘가 초연한 얼굴이었다.
“나는 누구도 안 믿어요.”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헤일라는 가슴이 욱신대는 걸 느끼며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모두가 신입 하녀라 알고 있는 다이네가 헤일라의 침대 맡에 도착했다. 그녀는 앉아서 꺄르르, 웃었다.
“어머, 베르디안 님 말대로 정말 재미있는 분이네. 그런데 왜 저 하녀한테 약을 줘요? 저 하녀 입은 어떻게 막을 생각이신지.”
다이네의 말에는 묘한 책망이 담겨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심어 리안의 차에 수를 쓰자는 베르디안의 제의를 거절한 데 대한 반감 때문이리라.
헤일라는 피식 웃으며 침상에 기대 누었다.
“그건 당신들이 알아서 해야죠.”
순간 다이네의 눈빛이 예리하게 바뀌었다. 그녀의 낯은 웃은 채로 굳어 있었다.
“정말 날 도울 생각이면 하녀 하나 구워삶는 일 정도는 해 줄 거라 생각해요.”
아, 그러니까 저 여자는…… 부러 낯선 하녀를 끌어들여 베르디안을 시험하고 있었다. 정말 헤일라를 빼내지 못해 애가 닳은 거라면 알아서 수습해 보이라는 것이다.
건방진…….
다이네가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입매를 우그러트렸다. 그걸 뒤에서 보고 있던 파이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
“당신의 주인이 한 말을 잊지 마.”
파이라는 그 말만 하고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리안이 올 때가 되어 경계하기 위함인 듯했다. 다이네가 턱에 힘을 잔뜩 주었다가 이내 눈꼬리를 확 휘었다.
“네, 물론이죠.”
베르디안은 헤일라의 말에 복종하라고 일렀다. 어릴 때부터 그의 심복으로 살아왔던 다이네로서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럼 전 저 하녀를 열심히 겁박하고, 음, 당일에 세리아 아가씨를 데리고 지하로 가면 되는 거죠?”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녀는 살기를 숨기며 헤일라의 손을 꼭 잡았다.
“걱정 마세요. 베르디안 님은 헤일라 님 편이거든요. 못 믿고 계시지만…….”
점점 더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헤일라는 아픈 티를 내지 않고 다이네의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것을 깬 건 파이라였다.
“리안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창밖을 보고 있던 파이라가 다가와 경고하듯 속삭였다. 다이네와 헤일라는 언제 눈을 맞춰 신경전을 벌였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헤일라는 침상에 완전히 누워 몸을 돌렸고, 다이네는 그 옆에 서서 평범한 하녀처럼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게 정돈되었다.
끼익.
문이 열렸고,
“다녀왔어, 헤일라.”
리안 휴리트가 돌아왔다. 그는 헤일라에게 몹시 미안한 사람처럼 허둥지둥 침상으로 뛰었다.
“미안해, 화가 많이 났다고 들었는데.”
그는 이미 아래에서 헤일라에게 머리를 얻어맞은 하녀장을 치우라고 이른 참이었다. 헤일라의 심기를 건드린 사람을 고용하여 아주 공교로운 낯이었다.
“아, 아…….”
헤일라는 백치처럼 말을 더듬으며 리안을 흘금댔다. 그리고는 손을 꼬물대며 어쩔 줄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눈알을 굴렸다.
“많이 놀랐구나…….”
리안은 그런 헤일라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그 사람 이제 여기 못 와. 헤일라 못 괴롭히게 내가 혼내 줬어.”
나 잘했지? 리안이 헤일라에게서 조금 떨어져 눈을 빛냈다. 칭찬을 바라는 듯했으나 그녀는 제 손만 내려다보며 검지의 거스러미를 뜯었다.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는 등뼈가 도드라진 등을 천천히 두드리며 헤일라를 진정시키려 했다. 기실 여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도 리안은 괜찮다고 계속 속삭였다. 이 상황을 약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리안은 헤일라를 안은 채로 하녀가 준비해 온 과일을 흘금 보았다. 그는 청포도 한 알을 포크에 찍어 헤일라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헤일라는 우물대며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댔다.
그녀의 눈이 찰나에 번뜩였다가 다시 빛을 잃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붙어 있던 둘은 정원에 산책을 나갔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리안이 안고 산책을 시켜 주는 격이었다. 기르는 개를 끔찍이 여기는 주인처럼 그날도 리안은 헤일라의 모든 걸 관찰하고, 관리했다.
그런 단조로운 날들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리고 열흘이 지났다.
“드디어.”
레테의 망령이 헤일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드디어, 약속의 날이 되었다.
* * *
“헤일라, 오늘 세리아랑 산책한 거 재밌었지?”
리안은 살갑게 묻고는 헤일라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멍한 얼굴을 하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에 초록색 잎을 가진 꽃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리안이 헤일라의 주의를 돌리려 입을 열었다.
“세리아 말이야. 어제 혼자 기는 데 성공했대.”
그는 요즘 들어 아기에 관한 이야기를 부쩍 많이 해 댔다. 헤일라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의미한 반응을 하지 않으려는 부단한 노력이었다. 그녀의 정신은 오롯이 방문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취침 전 가벼운 허브티로 티타임 갖는 걸 꽤 좋아했기 때문에 반드시 헤일라를 앉혀 두고 티타임을 가졌다.
그리고 오늘이 헤일라와 베르디안이 약속한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방 안에는 리안과 자신밖에 없었고, 이제 곧 노데이나라는 하녀가 들어와 약이 든 차를 리안에게 건넬 것이다.
부디 계획대로 되어야 할 텐데.
헤일라는 소매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칼을 매만졌다. 다이네가 몰래 넣어 준 것이었다. 칼날이 손잡이 쪽으로 접히는 작은 칼은 꽤 날이 서 있었다. 티 테이블 아래 모아 둔 손에 땀이 찼다.
“주인님, 말씀하신 허브티입니다.”
문밖에서 끝이 약간 떨리는 노데이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 계획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여자였다. 저 여자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할 텐데. 헤일라는 초조함을 애써 억눌렀다.
그러나 노크에서도 노데이나의 긴장은 여실히 드러났다. 아, 저렇게 떠니까 더 불안하잖아. 헤일라가 리안이 고개 돌리는 사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손바닥으로 파고든 손톱 때문에 살이 푹 패는 게 느껴졌다. 드디어 하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음.”
리안은 방으로 들어온 노데이나를 향해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짓했다. 노데이나는 네, 주인님, 하는 말만 남기고 부리나케 방을 나갔다.
티 테이블 위에는 꽃이 그려진 찻주전자와 찻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그러나 뜨거운 차가 따라져 있는 잔은 하나뿐이었다. 헤일라가 이전에 뜨거운 차로 제 손을 지지려고 했던 사건 이후 헤일라는 미지근한 차만 마실 수 있었다. 찻주전자 안에 있는 게 헤일라의 몫이었다.
그런데 리안은 가만히 멈춰 있기만 했다.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는 건 언제나 리안의 일이었는데. 그는 고요하게 헤일라를 응시할 뿐이었다. 검은 보석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눈은 깜빡이지도 않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혹시, 계획이 어그러졌나? 설마 저 어눌해 보이는 하녀가…….
진득한 고요에 질식해 죽을 것 같다 생각한 찰나였다. 리안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움직이는 손은 떨림 한 점 없이 차분했다. 그가 찻잔을 입에 대고 허브티 한 모금을 꼴깍, 넘겼다.
드디어!
헤일라는 스스로에게 신호를 보내듯 숨을 여러 번 쉬고 천천히 목을 움직였다. 그녀는 일이 번거롭지 않도록, 노데이나가 제 몫을 잘 해냈길 바랐다.
리안은 헤일라를 앉혀 놓고 계속 차만 홀짝였다. 평소에는 무슨 말이든 붙여 보려 안달이었는데. 그녀는 멍한 눈빛을 꾸며 내며 그를 응시했다.
티 테이블 위의 찻주전자를 한 번 보고 천천히 리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탁, 하고 찻잔이 테이블로 내려앉았다. 힐긋 본 그의 찻잔은 비어 있었다.
정말로 다 마신 거다. 헤일라는 자꾸만 기대가 차오르려는 마음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리안은 그런 헤일라를 비웃듯 천진하게 물었다.
“재밌었어?”
“…….”
“네가 재미있었으면 됐어.”
그는 나른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헤일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남자는 헤일라를 약간 안쓰럽게 바라봤다.
후두둑, 순간 소름이 끼쳤다. 헤일라가 입술을 빠끔대다가 간신히 물었다.
“……왜, 마신 거야?”
다 알면서 왜. 헤일라의 뒷말이 조용히 흩어졌다. 그녀는 마지막 확인을 하는 마음이었다. 정말로, 다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노데이나가 정말 리안에게 모든 사실을 고했을까. 그녀에게는 정말로 중요한 일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헤일라는 자신을 돌보지 않는 신에게 마지막으로 빌면서 손안의 땀을 무릎에 닦아 냈다.
“네가 준비한 건데 안 마시면 서운할 거 아냐.”
아.
리안은 그런 헤일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얇게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는 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이건 타면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수면제만 넣으라고 했어. 미안.”
노데이나에게 건넸던, 네이오라가 들어 있는 귀걸이였다.
아, 역시.
또 배신당했구나.
노데이나가 리안에게 계획을 발설한 게 틀림없었다. 베르디안과 그의 사람들이 어떤 말로 겁박을 했는지 몰라도, 하녀는 결국 리안에게 붙는 걸 선택했다.
다행이다.
“……미친놈.”
헤일라는 탄성처럼 욕설을 내뱉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녀는 사나운 표정 아래로 희열을 숨겼다. 다행스럽게도, 그 어눌한 하녀는 리안에게 쪼르르 쫓아가 수면제에 관한 걸 실토했다.
“역시 너는, 너는 괴물이야.”
계획대로 리안이 모든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경멸을 덧씌워 그에게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당황한 사람처럼 말을 더듬으며 눈물을 매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테이블 아래에 있는 소맷자락에서 작은 칼을 꺼내 들었다. 남자에게 달려들어 칼을 휘두른 건, 그다음이었다.
* * *
“흡, 흐윽…….”
노데이나는 사용인들이 기거하는 별관 제 방에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훌쩍대는 울음소리가 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써야 했다.
“어머니…….”
그녀는 이 순간 가장 염려되는 사람을 부르며 하염없이 울었다. 불안감이 똬리를 틀고 노데이나를 자극해 댔다.
주인님께 귀걸이를 넘기고 모든 사실을 실토해 버렸다. 루데인 후작이 겁박한 대로, 정말 가족들이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후작과 주인마님 쪽에 붙었다간 자신이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가족들이었겠지…… 공작은 그런 사람이니까.
“어쩔 수, 어쩔 수 없었…….”
노데이나는 이런 말들을 중얼대며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헤일라를 맨발로 걸어 다니게 했다는 이유로 발목이 잘린 하녀처럼 비참하게 죽고 싶지도 않았고, 하녀장처럼 지하에서 목이 맨 채 발견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녀장이 죽은 바로 다음 날 리안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다행히 공작은 아주 기뻐하며, 자신과 가족들의 안위를 약속해 주었다.
그래도 불안하다. 혹시, 아주 만약에 주인님이 실패해서, 그래서 나와 내 가족들이 잘못되면…….
똑똑.
그녀의 이불 한구석이 눈물로 푹 젖어 들었을 때 즈음이었다. 누군가가 오래된 나무 문을 두드렸다. 노데이나는 흠칫 떨며 문 쪽을 응시했다.
똑똑.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두려움이 그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눈앞이 뿌옜다.
날 죽이러 왔어. 날, 날…….
아아…….
숨이 가빠지는 걸 느끼며 하녀는 덜덜 떨었다. 그녀는 문을 따고 들어온 장정들이 자신을 끌고 가는 상상을 했다. 아니, 어쩌면 이 자리에서 목이 썰릴지도 몰랐다. 상상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때, 누군가 문밖에서 그녀를 불렀다.
“노데이나.”
“……집사님.”
이 목소리는 늙은 집사였다. 노데이나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대충 닦으며 일어났다. 집사라면 적어도 자신을 죽이러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묘한 안도감과 민망함을 느끼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집사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얘져 있었다. 마치 아주 큰일을 맞닥뜨린 사람 같았다.
“잠시 나와. 네가 해 줄 일이 생겼구나.”
노데이나는 싫다고 하고 싶었으나 상전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그를 뒤따랐다. 집사도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앞장섰다.
둘이 도착한 곳은 주인의 방 앞이었다.
“지금부터 네가 보고 듣는 건 모두 비밀에 부쳐야 할 게다.”
집사의 경고를 끝으로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을 본 노데이나는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아, 아, 헤, 헤일라 님…….”
노데이나의 눈동자가 헤일라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만큼 잔인하고…… 또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보다시피 주인마님과 주인님의 몸이 좋지 않다.”
노데이나는 집사의 설명을 들으며 눈알을 천천히 굴렸다. 그러고 보니 주인님이 없었다. 공작이…… 그리고 마침내 노데이나의 시선이 침상에 닿았다.
주인은, 노데이나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주인은 죽은 사람처럼 침상에 누워 있었다. 미동도 없는 모습은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경한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여자 쪽은…… 왼쪽 눈을 다쳤다. 피가 철철 흘러 왼 얼굴과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작은 사고가 있었어.”
분명 공작의 소행이었다. 그럼에도 집사는 태연자약하게 사건을 포장했다. 노데이나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버렸다.
“주인님과 주인마님께서 많이 다치셨다. 그러니 신전에 가야겠지.”
“그, 그럼 얼른 사람들을 불러서…….”
노데이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러나 집사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많은 인원은 안 된다.”
그래. 그렇겠지. 공작이 결국 미쳐 제 부인의 눈알을 파냈다는 소문이 제국 전체에 퍼질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러니 너와 파이라 님, 둘이 주인님과 마님을 모시고 신전으로 가.”
아, 아…….
노데이나는 멍청한 소리만 내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집사를 한 번 보고, 헤일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헤일라는 왼눈을 지혈하며 발발 떨고 있었다.
저 집사는 알고 있을까? 우리가 백치라 믿었던 주인마님은 아주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어쩌면 이것도, 모두 헤일라의 계획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결국 하녀의 도움 없이 리안 휴리트를 잠재우는 데 성공했고, 이렇게…… 밖으로 나갈 구실을 만들어 냈다. 여기서 오직 집사만 그 사실을 몰랐다.
노데이나는 피가 차갑게 굳는 것 같았다. 그러나 종래에,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틀렸다. 공작은 결국 자신의 부인에게 당해 몸져누웠다. 자신은 이제 곧 저택 어딘가에 묻힐 것이다. 그건 지금 여기서 사실을 말하나 그렇지 않으나 비슷하겠지.
“저, 저는…….”
노데이나는 자신 쪽을 보고 있는 헤일라와 파이라를 흘긋 보고 천천히 말했다.
“네, 네,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신전으로…… 따르겠습니다.”
결국 그녀는 헤일라의 치맛자락을 잡고 가족의 안위만이라도 보장받게 해 달라 빌어 보는 쪽을 선택했다. 가족만이라도 살려 달라 빌어 봐야 했다. 처절하게 죽더라도 그리해야 했다.
노데이나는 저택의 조용한 복도를 지나 문 앞에 준비되어 있는 마차에 탔다. 마차 안에는 헤일라와 파이라, 그리고 정신을 잃은 공작이 함께 타고 있었다. 다른 호위들은 신전까지 은밀히 뒤를 따르기로 하였고, 반절은 세리아 아가씨를 지킨다 하였다.
탁.
마차의 문이 닫혔다. 마차가 움직이자마자, 노데이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도저히 압박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 죄, 죄송합…… 니다.”
그녀의 사죄에도, 마차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침묵과 피 냄새. 오직 그 두 개만 작은 공간 안에 흘렀다.
“정말, 정말 죄송합…….”
“됐어요.”
드디어 헤일라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고통에 찬 얼굴이었지만 발음은 아주 정확했다.
“애초에 당신이 배신하지 않을 거란 기대는 안 했어요. 그럴 이유도 없고. 오히려 협박한 건 내 쪽이잖아요.”
“아, 하, 하지만 제 가족들을, 죽, 죽이실 게…….”
아닌가요? 노데이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훌쩍였다. 그러나 돌아온 건 퍽 다정한 목소리였다.
“걱정 말아요. 당신은 루데인 후작도 휴리트 공작도 배신하지 않았으니 해를 입을 이유가 없어요.”
루데인 후작을 배신한 게 아니라고? 노데이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그게 무슨…… 루데인 후작님의 모략이 아니어요?”
노데이나는 헤일라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후작과 주인마님이 한통속이 아니었나? 분명 다이네가…… 그런데 다이네는 어디 있지?
흠칫. 노데이나의 뒷목이 서늘해졌다. 후작의 사람이, 다이네가 보이지 않았다.
헤일라는 노데이나의 표정을 읽은 듯 그녀가 궁금해하는 걸 친절히 알려 주었다.
“후작은 내가 자길 배신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원래 난 지하로 빠져나가서 그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럼, 그럼 다이네는…….”
“그녀는 기절시킨 채로 지하에 뒀어요. 알아서 후작이 있는 쪽으로 빠져나가겠죠.”
헤일라는 피가 줄줄 흐르는 왼눈을 꾹 누르며 웃었다. 이제 답이 다 되었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콧잔등에는 고통으로 인한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노데이나는 얼이 빠져 입을 약간 벌린 채 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어느새 마차는 저택의 정문을 지나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 * *
저택을 완전히 빠져나온 뒤, 조용하던 파이라가 품 안에 있던 보자기에서 무언가를 꺼내 헤일라에게 건넸다. 그건 초록색 덩어리였다. 마치 약초를 곱게 빻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시키신 대로 준비했습니다.”
“고마워요.”
헤일라는 파이라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왼눈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는 천을 떼어 내자 잘게 빻은 약초를 눈 쪽에 덧댄 거즈가 보였다. 아마도 지혈을 위해 임시로 붙여 둔 것 같았다.
“제, 제가 들어 드리겠습니다.”
노데이나는 그렇게 말하며 피 묻은 천과 초록색 덩어리가 쌓여 있는 보자기를 받아 들었다. 그런데 받아 드는 순간, 피 냄새와 함께 익숙한 향기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루아두?”
언젠가 헤일라가 정원에 가득 심어 달라 부탁한 꽃이었다. 그 꽃이 왜. 순간 노데이나는 언젠가 다른 하녀 하나가 투덜대던 걸 기억해 냈다.
‘진통 계열에 효과가 있긴 한데…… 번식력이 좋은 약초라 흔한 탓에 신전에서도 딱히 키우는 걸 규제하지 않는대. 그냥 초록색 들꽃인 거지, 뭐. 마님은 왜 저런 걸 키우나 몰라.’
노데이나는 루아두를 곱게 잘라 빻은 덩어리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걸까. 언제부터…… 파이라 님과는 처음부터 한통속이었나? 어떻게?
노데이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하며 손을 떨었다. 그때 헤일라가 그녀의 손 위에 있던 루아두 덩어리를 들고 갔다. 그녀는 자상으로 엉망이 된 제 눈 위에 그걸 올리고 다시 거즈를 덮었다.
언뜻 보기만 해도 끔찍한 상처였다. 저 정도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이제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의문이었다. 노데이나가 이런저런 생각들에 빠져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에도 질문할 수 없어서 답답하고 또 겁이 났다. 혹여나 무언가 잘못될까 봐. 이 또한 자신을 시험하는 것일까 봐.
“……아기를 부탁해요.”
노데이나를 현실로 끌어 올린 건 헤일라였다. 노데이나는 깜짝 놀라 헤일라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조금, 놀랐다. 헤일라는 세리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공작을 보고 있었다.
“리안은 아기를 해치지 못해요. 날 잡아 둘 명목은 이제 아기뿐이니까. 하지만 사랑을 주면서 키울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러니 아이를 부탁해요.”
아. 그제야 노데이나는 헤일라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식은땀 때문에 덕지덕지 말라붙은 잔머리들, 음울에 젖은 눈, 굳은 입매…… 그녀는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본 하녀는 홀린 듯 이제껏 궁금해 왔던 걸 묻고 말았다.
“……세리아 아가씨는 왜 두고 가세요?”
너무 충동적인 질문이었나. 노데이나는 헤일라가 대답을 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 끌지 않고, 헤일라는 답을 내놓았다.
“어차피, 신전에서 나갈 때의 난 아기를 데리고 갈 생각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
“……!”
“사실 당신을 데리고 나온 이유는 따로 있어요. 말을 좀, 전해 줘요.”
아, 아, 설마.
노데이나는 헤일라의 씁쓸한 눈빛을 보고 어떤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다. 그것은 아주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깨어날 리안에게 전해 줘요. 난 오늘 신의 검을 쓸 거라고요.”
노데이나의 눈이 커졌다. 헤일라는 눈을 꽉 감고 다시 뜬 뒤에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그녀는 호흡을 고른 후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난 오늘 사랑을 버릴 거예요.”
말도 안 돼!
노데이나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깨닫고 손을 떨었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루데인 후작을 따돌리고,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신전으로 온 것이다. 가서 검을 쓰려고!
“그러다가 잘못, 잘못되면!”
말리고 싶었다. 말려야 했다. 노데이나는 천한 평민이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알았다. 감정이 거짓된 것이라 소거하지 못하면 그대로 심장에 검이 찔려 죽는다고 하였다. 실제로 몇 년 전 펠든 백작이 검을 쓰다가 그대로 죽었다.
그리고 사랑이라니?
이 여자는 공작에게 그렇게 시달리고도 남자를 사랑하는 건가? 믿을 수 없었다. 착각이 분명했다. 필시 심장이 뚫려 죽고 말 것이었다. 그녀는 그냥 공작의 뜻대로 어딘가 망가져 그를 사랑하고 있다 착각하고 있다. 노데이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녀는 공작의 옆에 앉은 파이라를 보면서 눈짓했다. 제발 좀 말려 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파이라는 묵묵히 창문 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속이 타는 건 노데이나 혼자였다.
속이 타들어 가던 찰나, 어딘가 초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차라리 그랬으면 해요.”
헤일라는 다시 리안 휴리트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회한에 사무쳐 있는 듯도 하였고, 애틋해 보이기도 했다. 노데이나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만류가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빠져나가시게요…….”
“내 걱정해 주는 거예요? 고마워요.”
헤일라는 약간 장난스러운 태도였다. 애써 지어내는 모습인 걸 알지만, 노데이나는 그럼에도 조금 놀랐다. 주인마님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 또래의 계집처럼 평범하게 웃을 줄 아는 여자였구나.
“마차는 주인을 신전 본관까지 모신 뒤 다시 나와야 해요. 난 중간에 내려서 검을 쓰고, 마차가 빠져나갈 때 즈음 다시 이걸 타고 나갈 거예요. 만약 살아남는다면요.”
헤일라는 노데이나의 불안을 잠재워 주려는 듯 친절하게 설명을 이었다. 약초 덕에 고통이 조금 가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마차의 의자, 안이 비어 있어서 이 안에 숨으면 돼요. 난 예전에도 한 번 이런 방법으로 빠져나간 적이 있으니 걱정 말아요.”
노데이나는 더 이상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응하느라 속이 조금 메스껍기도 했다.
“……신전입니다.”
그리고 마차가 신전 앞에 도착했다. 동시에 헤일라는 걸치고 있던 케이프의 모자를 푹 눌러 썼다. 그 모습은 헤일라를 노데이나와 다를 바 없는 하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곧이어 신전의 문지기들이 다가와 마차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파이라가 무어라 설명을 하니, 문지기들이 황급히 공작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신전의 문을 개방했다.
“마차는 두 시간 이내에 다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마차에 타신 분들 이외에는 신전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문지기들은 깍듯한 목소리로 신전의 규율에 관해 설명하고는 마차의 문을 닫아 주었다. 신전으로 진입하고부터는 마차 안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그닥 다그닥. 말이 달리는 소리만 유리창 너머로 희미하게 전달될 뿐이었다.
노데이나는 혹여나 기절한 공작이 깨지는 않을까, 헤일라가 마음을 바꿔 주지는 않을까, 파이라가 헤일라를 말려 주지는 않을까 살폈다. 어쩌면 셋 중 하나를 바랐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문으로부터 한참을 또 달렸을 때, 마차가 멈췄다. 나무가 우거진 것을 보아, 신전의 본관은 아닌 듯했다. 노데이나는 불안감에 휩싸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헤일라가 천천히 움직였다.
“……고마워요. 그리고 많이 미안해요.”
헤일라는 그렇게 말하며 노데이나와 파이라를 번갈아 보았다. 이번에는 공작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은 채였다. 자신은 둘째 치고, 파이라에게는 무엇이 미안한 것일까? 노데이나는 잠시 생각했지만 마차에서 내리는 헤일라의 모습 때문에 이를 금세 잊었다.
홀로 멀어지는 헤일라의 뒷모습은 작고 초라했다. 그러나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풀숲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리듀카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는 듯했다.
노데이나는 인영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마차의 문을 닫았다. 다시 신전의 본관으로 향할 것이라고 들었다. 아마 파이라는 리안이 쓰러져 신전에 다녀온 사이 헤일라가 사라졌다고 거짓을 고할 속셈인 것 같았다.
정말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겠지.
헤일라 님은, 살아서 여길 나갈 수 있는 걸까.
세리아 님은 앞으로 어떻게…….
나는, 내 가족들은…….
사고가 마비될 정도로 불안이 범람했다. 노데이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제 치마를 틀어쥐었다. 왠지 모르게, 마지막으로 본 헤일라의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
모든 게 너무 복잡해서, 그냥 기절해 버렸으면 싶었다.
수풀이 우거졌다는 표현만으로는 묘하게 부족했다.
신전의 모든 것은 불규칙해 보이면서도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뿌리 내린 나무도, 풀도, 꽃들도 모두 소름 끼칠 정도로 가지런히 조형되어 있다. 누군가가 건들지 않는데도 유지가 된다 하였던가. 신전은 이 또한 아주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이전에는 신전의 자랑거리를 같잖다 여겼으나……. 적어도 지금은 도움이 되었다.
헤일라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리듀카로 향했다. 산에서 오래 살았던 여자는 초목이 가득한 길을 기억하는 데 능했다.
리듀카로 향하는 길에는 기묘한 정적 속 자박대는 헤일라의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그녀는 걸으면서 피어난 꽃과 싱그러운 풀을 자비 없이 짓밟았다.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화풀이일지도 몰랐다. 걷는 내내 잡념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일라는 파이라의 마지막 모습이 유독 기억에 박혔다.
‘저도, 죄송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웃었던가. 도톰한 입술에 미소가 맺혔다. 자신도 그런 표정이었을까? 언니를 간호하는 내내.
그렇다면 언니가 저의 미소에 진저리 쳐 왔던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우그러들어 당장이라도 짓뭉개질 것 같은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멍청해.”
……나랑 비슷하고.
헤일라는 자신과 엇비슷한 파이라의 어리석음을 곱씹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조금 더 일찍 놓아주지 못한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신이 정해 준 기한 동안만 숨을 쉬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결국, 연인에게 마약을 쓴 남자는 제 손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죽여야 했다.
죽여 달라는 절규를 외면하지 못하고 벌인 일이었다.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해 준다는 약을 베르디안에게 받아 연인을 죽이고, 연인으로 위장한 다른 여자를 병상에 눕혀 리안을 속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헤일라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헤일라 님의 뜻대로 움직여 드리려 합니다.’
더 이상 누구도 따를 필요가 없어진 남자는 속죄의 마음으로 헤일라의 부탁을 들어주겠다 했다. 그 덕에 헤일라는 베르디안까지 따돌리고 이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파이라의 사랑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이지를 잃게 만들고, 부질없는 것에 집착하게 만들어 결국은 서로를 불행에 빠트리지 않았나.
게다가 정말로 질리는 점은,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사랑에 취한 자들은 똑같은 선택을 반복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나도.
헤일라는 끔찍하다는 단어만 중얼중얼 반복하며 걸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그러다가 뚝 멈춰 서서는, 지독한 인간이 파이라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녀는 스쳐 지나가는 많은 기억들을 뭉개며 자신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몸을 떨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내려다본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레테와 리안이 번갈아 가며 떠올랐다. 그들이 퍼부어 주었던 사랑들이 떠올랐다. 토기가 올라왔다.
“다행이야. 이제라도 알게 돼서…….”
그래도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깨달음도 기회도 모두 손에 쥐었으니.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는데 입술에 습한 기운이 닿는다. 헤일라는 그것이 눈물이라는 걸 알았지만 닦지 않은 채로 다시 나아갔다.
그녀의 우직함에 보답하듯, 곧이어 웅장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쩍 마른 손이 문을 천천히 민다.
“아.”
리듀카다.
리안의 아버지가 죽고, 나의 언니가 죽은 곳.
속엣것을 버리기 위해 인간들이 날파리처럼 모여든다는 신의 공간.
헤일라는 말을 삼키며 발을 들였다. 여전히 광활한 빛만이 공간의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이외에는 모두 암흑이었다. 그녀는 침음을 삼키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빛기둥은 다가갈수록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그 안에 있는 검 또한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흣…….”
갑자기 왼눈에 통증이 일었다. 아무래도 약초의 효력이 다한 것 같았다. 새것으로 갈아야……. 헤일라는 품을 뒤적였다. 파이라에게 받아 둔 루아두를 써야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인영 하나가 빛기둥 앞에 서 있었다.
레테였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
“언니.”
저것은 허상이다. 내가 만들어 낸. 헤일라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죽은 날처럼.
“왜 베르디안을 따라가지 않았지? 그럼 훨씬 더 쉬웠을 텐데.”
헤일라는 레테가 자신의 상처 입은 왼눈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내가 준 약을 썼으면 더 편했을 텐데…….”
레테는 화내지 않았다. 차분했다.
“처음부터 내가 준 약 따위는 쓸 생각 없었던 거지?”
“……응.”
“왜?”
레테는 정말로 궁금한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깊이 침잠한 고요함이 레테를 감싸고 있었다. 여자는 정말로 생전의 언니와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였더라. 이런 모습에 겁을 집어먹지 않게 된 게.
헤일라는 실감 나게 유영하는 언니의 환영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무의미한 꼬리 물기임을 깨닫고 눈을 깜빡였다.
레테는 죽었다. 그녀에 관해 되짚는 건 산 자의 미련일 뿐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헤일라는 품 안에 있던 걸 천천히 꺼냈다. 반짝, 하고 무언가 빛났다. 네이오라가 담긴 귀걸이였다.
“언니.”
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레테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고마워.”
“…….”
“어릴 때 나 지켜 준 거. 원치는 않았겠지만…… 나 살려 준 거. ……그리고, 내 언니로 살아 준 거.”
“너…….”
레테는 자신이 헤일라에게 남긴 마지막 유품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네이오라를 담은 귀걸이는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헤일라는 레테의 환영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공간을 훑었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귀걸이의 윗부분을 톡, 땄다. 안에 들어 있던 네이오라가 작게 출렁였다.
“그런데 나는, 난…… 더 이상 언니 뜻대로 살기 싫어.”
탁, 하고 헤일라가 발돋움했다. 그녀는 레테를 지나쳐, 검이 있는 빛기둥에 네이오라가 담긴 귀걸이를 던져 넣었다. 안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미안해…….”
울먹이는 목소리는 네이오라와 함께 저 아래로 묻혔다. 흔적도 없이 모든 것을 빨아 들이는 신의 구덩이 속에 레테의 선물은 영영 잠들게 되었다.
헤일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신의 검이 지척에 있다. 빛을 통과한 손이 검 끝에 닿았다.
가벼운 진동이 몸에 전달되었다. 비로소 손에 검의 손잡이가 완전히 잡혔다. 그걸 빛에서 빼낸 헤일라는 검을 쥔 채로 망설이다 이내 천천히 뒤돌았다. 어미에게 혼이 날까 두려워하는 아이의 눈을 하고.
왜 그랬을까? 자신을 원망할 게 뻔한, 어쩌면 폭언을 퍼부을지도 모를 언니인데. 왜 아득바득 뒤를 돌아 언니의 인영을 확인하려 했을까?
어쩌면 죽음이 덮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어리광을 부릴 대상을 찾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검을 든 여인은 제 언니를 보기 위해 빛을 등졌다.
그러나 돌아서서 확인한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언니.”
평평한 어조로 레테를 불렀으나 자신의 목소리만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언니.”
헤일라는 길을 잃은 아이가 어미를 부르듯 몇 번이고 언니를 찾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언니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섬광처럼, 또는 신의 계시처럼, 어떤 깨달음 하나가 헤일라에게 내리꽂혔다.
이제는 만날 수 없다. 예상했던 레테의 분노에 찬 얼굴도, 실망감이 씐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가 자신에게로 날아들고 있음에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에,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말아 쥐었다. 인간의 피를 취하는 데 혈안이 된 마귀처럼, 검은 격렬하게 울려댔다. 어리석은 인간을 재촉하는 신의 유희였다.
헤일라는 천천히 검을 올려 왼쪽 가슴 위로 조준했다. 그녀는 그것을 내리찍듯 아래로 휘두른다. 여린 살갗을 쇠붙이가 찢어 갈랐다.
찰나의 시간 동안, 그녀의 눈앞에 어떤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뛰지 말라고 했지. 다쳐.’
‘우리는 가족이니까. 내가 지켜 줄게.’
그것은 아주 어린 시절의 언니이기도 했고
‘식사하고 호수에 가자.’
‘그럼 계속 같이 있으면 돼.’
따뜻하다 믿었던 리안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마지막은…….
‘……좋아해.’
“허억.”
울컥, 몸속의 무언가 역류했다. 아니, 빠져나간다. 아, 아니다. 이건…….
사고가 정지했다. 눈조차 감기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그러나 아름다웠던 소리들이 사그라든다. 검이 심장에 닿는 순간부터 모든 게 뚝, 뚝 끊겨 종래에는 눈앞이 점멸했다.
가냘픈 여체는 그대로 쓰러져 일각 동안 미동이 없었다. 황금빛 눈은 동그랗게 뜨여 있는 채였고, 머리칼은 형편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영락없이 생명이 뽑힌 인형의 모습이다. 누군가가 봤다면 시신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손끝이 움직였다.
방금까지 ‘헤일라’였던 여자가 천천히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검이 심장에 박혀 있는 상태인데도 그녀는 흐물흐물 몸을 움직이며 무어라 중얼댔다.
소곤소곤. 속닥속닥. 텅 빈 눈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하던 여자의 오른손이 움직인다. 그리고 가슴에 박혀 있는 검의 손잡이를 턱, 하고 잡았다. 그것이 살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빠진 건 순식간이었다.
잇새로 작은 신음조차 새지 않았다. 인간이 창조한 검이었다면 필시 목숨이 다했을 것이다.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으니.
그러나 여자가 쥔 검은 신의 유산이었다. 검이 뽑힌 자리에서는 새붉은 피 대신 맑은 구슬 하나가 톡, 하고 굴러떨어졌다.
드디어 떨어져 나갔다. 드디어.
그녀는 머리칼을 늘어트린 채 앉아, 멀건 얼굴로 정면만을 바라봤다. 그러다 손을 올려 제 뺨을 더듬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피다, 아래에 떨어진 검과 구슬을 발견한다. 그녀는 구슬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그녀의 오른 눈동자가 색 없이 투명한 구슬을 통과했다.
헤일라는 텅 빈 눈으로 자신의 구슬을 감상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한참을 앉아 고개만 갸웃댔다.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무기질적인 표정이었다. 검에 찔려 쓰러져 있을 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 시체 같은 모습이다.
어쨌든 헤일라는 자유가 되었다.
구슬을 품에 넣은 여자는 천천히 걸어 리듀카를 빠져나왔다. 여자의 걸음걸이는 무서우리만치 차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