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절벽 (8/10)

7. 절벽

“헤일라.”

리안은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부축을 받고 나오는 여자를 보고 퍽 놀란 낯이었다. 다정함과 애틋함을 반반 녹여 넣어 누가 보아도 연인을 염려하는 모습이다. 미아르는 가증스러워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자신이 귀족으로서 오래도록 교육받지 않았다면 경멸을 그대로 드러내 버렸을지도 몰랐다.

“왜 이래, 응?”

미아르는 헤일라가 깜찍한 연기에 속아 넘어갈지 궁금해 숨을 죽였다. 헤일라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잡아채 품 안에 넣는 남자에게 몸을 맡겼다.

“레테가…… 무슨 말이라도 한 거야?”

“…….”

“헤일라.”

“언니가.”

그의 얼굴에 약간의 기대감이 스쳤다. 그러나 헤일라는 리안을 한 번 흘긋 올려다보고 다른 말을 고르는 듯 침을 삼켰다.

“언니가, 예언의 능력이 있대.”

헤일라가 바라본 건 리안의 너머에 있는 미아르였다. 신관인 미아르라면 거짓 없이 사실을 이야기해 줄 것이라 믿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예를 갖춘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깜짝 놀랐답니다.”

“네가 직접 듣는 쪽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미아르와 리안이 번갈아 답했다. 헤일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미 모든 사실을 예감한 사람처럼 초연했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대신 잔뜩 겁을 먹은 아이처럼 중얼댈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내가…… 아이를 가졌대.”

말을 마치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 헤일라는 어딘가 매우 지쳐 보였다.

“헤일라.”

“왜 말 안 했어? 왜, 왜…….”

넌 알고 있었잖아…… 헤일라는 리안에게만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로 그를 책망했다. 강렬한 분노보다는 서글픔이 서려 있는 원망이었다.

“……레테가 말했어?”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야기하려고 했어. 레테가 알 거라고는 나도…… 예상 못했네. 많이 놀랐지.”

리안이 헤일라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숨넘어갈 듯 우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어, 어떡, 어떡해…… 흐으, 언니…….”

“쉬이, 괜찮아, 괜찮아 헤일라.”

“언니가, 언니가…… 나 안 본대…… 흐윽.”

“진정해. 진정하고…… 일단 좀 쉬자, 응?”

리안이 그녀를 이끌었다. 사랑스러운 헤일라. 그는 속으로 그렇게 읊조리고 헤일라를 안아 올렸다. 미아르는 그런 둘을 보며 멀리서 눈살을 찌푸렸다.

‘직접 보고 들어야 더 실망할 테니까.’

리안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레테와 헤일라가 만나면 서로에게 큰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리안이 폭로하기 전에 자신의 입으로 제 능력을 밝힐 여자였으니까.

그래서 헤일라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둘이 안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큰 말다툼이 있거나 일방적인 폭언이 퍼부어질 것이라는 건 알았다. 기실 헤일라 이외에 모든 이들이 예상한 일이었다.

‘이제 새로운 가족을 찾을 때라는 걸 헤일라도 깨달아야지.’

우는 건 가슴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번 기회에 둘의 사이가 단단히 틀어지길 바란 것이다. 미친놈.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그리고 미친놈의 술수인 걸 다 알면서 따라 주는 미친년도 상당히 골치가 아팠다.

레테. 차기 대신관이 되어 주어야 할 여자.

리안과 레테 사이에서 잘못 선을 넘었다가 죽어나는 건 자신이다. 그래서 미아르는 불쌍한 헤일라를 그냥 못 본 체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아르가 리안의 말을 거들기 시작했다.

“네에, 다음에 또 오시면 되니까요.”

“응, 레테는 다음에 보자. 오늘은 너무 놀랐어. 힘들지…….”

헤일라는 무어라 위로하는 말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결국 리안의 품에 안겨 신전을 나왔다. 그녀는 이명과 사람의 말소리 사이에서 부유하다가 제 배를 감싸 안았다. 박약한 몸짓이었다.

* * *

리안은 가만히 누워 중얼대는 헤일라의 옆에 바짝 앉아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리안.”

“밥 먹어야지.”

“싫어…….”

그녀의 배는 둥그렇게 부풀어 있는데 반해 팔다리는 비쩍 말라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몇 달간 음식을 입에 넣기만 하면 다 게워 낸 탓이다. 리안은 헐벗은 헤일라의 몸을 구석구석 쓰다듬었다. 그때 얇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언니가 아기를 미워하는 것 같아.”

“레테가?”

“그래서 나랑 안 만나 주나 봐…….”

레테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헤일라와 만나 주지 않았다. 이제 신관의 자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아르도 어찌해 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리안은 레테가 헤일라를 만나 주지 않는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이에 좌절하는 건 헤일라 혼자였다.

헤일라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제 잘못이라 중얼대며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변하는 건 없었다.

처음에는 리안도 레테가 제 동생을 금방 불러들이리라 생각했다. 그때 둘 사이를 차단해 감정의 골을 깊어지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년은 정말로 제 동생을 버리기라도 한 듯 헤일라의 손길을 거부했다. 문 앞에서 문전박대하기도 서슴지 않았다. 울다 지쳐 쓰러져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쯤 되자 리안도 헤일라의 상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 바보 같은 여자는 매사 제 탓이었으니까. 헤일라는 자신이 언니의 몸도 마음도 완전히 망가트렸다 자책했다. 정작 망가져 가고 있는 건 자신이면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리안은 그저 짜증이 났다. 하지만 감히, 헤일라를 다그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우니 화를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영리한 남자는 다른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럼 없앨까?”

“…….”

“없애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하자고 했잖아.”

아기 말이야. 리안이 얇은 귓가에 속삭였다. 헤일라가 바르르 떨었다. 명백히 놀라 떠는 모양새였다.

“어, 어…….”

“역시 안 되겠다. 오늘 의원 불러서 약을 쓰자.”

“리, 리안.”

“아기 없애고 레테한테 찾아가자. 그럼 되지?”

리안의 손이 헤일라의 사타구니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흣, 왜, 왜…….”

“매일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못되게 굴고 있잖아.”

두툼한 손가락이 갈라진 살덩이를 진득이 문질렀다. 헤일라가 다리를 오므렸지만 살집이 사라진 허벅다리는 그의 한 손도 막지 못했다. 그녀는 손가락이 내벽에 닿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어 소리 질렀다.

“안 돼!”

헤일라가 발작하듯 몸을 튕겼다. 질질 흐르기 시작하는 애액을 치대던 리안이 손을 떼어 냈다.

“뭐가.”

약간은 냉정해 보였다. 헤일라는 덜컥 겁이 났다. 정말로. 리안이 정말로 일을 칠 것 같았다. 그는 그럴 수 있는 남자였다. 그녀는 이제야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자그마한 아기의 존재를 떠올렸다.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아기, 아기!”

“왜?”

그는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반문했다.

“아기 따위는 아무런 의미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야!”

“레테가 가장 중요하잖아. 그래서 아기는 돌보지도 않잖아.”

“…….”

“계속 이러면 어차피 죽어.”

헤일라의 숨이 잠시 멈추었다. 아기가, 죽어? 멍하니 따라 하는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그는 잔인하게 되짚어 주었다.

“그래. 네가 밥도 안 먹고 이렇게 힘들어하면 아기는 죽어.”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하는 대화도 아닌데 헤일라는 처음 듣는 사람처럼 충격에 빠져 중얼댔다.

“나 때문에…….”

“응.”

그녀는 또 울었다. 배를 감싸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댔다.

“아기가 살았으면 좋겠어?”

“응, 응…….”

“그래.”

리안이 조금 웃으며 헤일라의 아래 살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손을 집어넣어 작은 공알을 살살 굴렸다.

“앙, 아앙…….”

“쉬이, 괜찮아. 이거 하고 밥 먹자.”

“흣, 리안…… 아기…….”

“아기도 좋아하는 거야. 걱정 마.”

쩔벅대는 소리가 헤일라의 귀를 자극했다. 리안은 멈추지 않고 그녀의 음핵을 귀여워해 주었다.

“아기도 우리를 좋아할 거야.”

“흣, 으응…….”

“우리는 가족이 될 테니까…….”

“아아! 흣, 으응!”

말랑한 살점이 엉망으로 짓뭉개지면서 여체에 열이 오르게 만들었다. 헤일라가 자지러지며 배 위에 손을 얹은 리안과 손을 마주 잡았다.

“아!”

절정에 오르면서 둥근 배가 다시금 위로 올라왔다. 헤일라는 훌쩍이며 리안에게 바투 붙었다. 그는 여자를 제 몸 위에 올렸다. 이전보다 더 봉긋해진 가슴이 단단한 상체에 눌려 짜부라지는 모양이 썩 만족스러웠다.

“아기도 우리 가족이잖아. 그렇지?”

“응, 응…….”

“레테 몸은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까…… 네 몸 먼저 챙기는 거야.”

“흑, 응…….”

리안은 요즘 들어 매일 한 말을 속삭여 주면서 한숨을 삼켰다.

오늘로 헤일라와 같은 이야기를 나눈 지 서른 번째였다.

* * *

이제 헤일라는 거동을 할 때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배가 불렀다. 해산하려면 두 달은 더 남았지만 워낙 말라 부른 배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의원은 헤일라를 두고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산모라 일렀다. 물론 의원의 언질이 없어도 리안은 헤일라에 한해 유별난 사내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헤일라는 여전히 레테 타령을 멈추지 못했다. 결국, 그는 오늘도 언니에 관해 이야기하는 헤일라를 붙들고 아기를 죽일 것이냐 물었다. 언제나 그랬듯 헤일라는 사랑스럽게 눈물지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매일 같은 이야기를 해도 처음 듣는 듯 토끼 눈을 뜨는 여자는 이후에야 밥을 챙겨 먹고 잠을 잤다.

“응, 읏,”

그리고 여자가 잠에서 깨어난 뒤에는 언제나 둘이 알몸이 되어 뒹굴기 일쑤였다.

지금도 리안은 헤일라를 비스듬히 누여놓은 채 위에 올라타 가슴을 빨고 있었다. 헤일라는 가만히 누워 그를 받았다. 오래 빨려 퉁퉁 불은 채 툭 튀어나와 있는 유두가 불그스름했다. 남자는 언제나 함몰되어 있는 젖꼭지를 빼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요즘에는 들어가 있는 걸 보기가 더 힘들었다.

“리안…….”

그녀가 말을 늘려 불렀으나 리안은 비켜 주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한 손으로 남은 가슴을 쥐고 비틀었다. 새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는 키들대며 입을 뗐다.

“쉬이…… 가만히 있어.”

약간의 흥분과 조급함이 혼재된 목소리에 헤일라가 코를 훌쩍였다. 다음에 일어날 일은 너무나 뻔했다. 리안이 바지를 벗고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흉흉하게 선 성기가 퉁, 하고 튕겨 나왔다. 리안의 손가락이 핏줄이 불거진 그것을 두 손가락으로 주욱 쓸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쥔 뒤 뭉근하게 풀어진 입구에 대고 비볐다.

“흐윽.”

곧이어 뜨거운 살덩이가 다물린 입구를 열고 들어섰다. 천천히 음미하듯, 길을 내듯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온다. 여자가 목을 뒤로 한껏 젖혔다. 꺾인 목에서 달달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리안은 그 장면을 관음하며 눈 아래를 붉혔다.

“리안, 조심해…….”

그녀는 남자의 팔뚝을 꼭 잡고 부탁했다. 헥헥대며 애원하는 모습이 음심을 더욱 자극했으나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은 끝까지 넣지 않고 반쯤 삽입한 상태에서 왕복했다. 절벅, 절벅 하는 음란한 소리가 음부에서 흘러나왔다. 헤일라는 호흡을 조절하며 제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리안이 눈매를 휘며 헤일라의 입에 혀를 집어넣었다. 그 순간 선단이 꾸욱, 하고 끝까지 밀려 들어왔다.

“흐앗!”

“흣.”

아기집 입구였다. 아기가 있는…… 헤일라는 기겁하며 리안의 팔뚝을 긁었다.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 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의지와는 반대로 축축한 아래가 그의 것을 야물게 쥐었다. 리안이 조이는 감각을 즐기듯 탄성을 터트렸다.

“안 돼, 거긴…….”

“괜찮아.”

그대로 허리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선단이 쓰다듬듯 아기집을 비볐다. 헤일라가 바들바들 떨며 허리를 올리자 리안이 배에 얹어진 헤일라의 손을 지그시 눌러 압박했다.

“허리 들지 말고. 힘들잖아.”

“힉, 흐익…… 하지 마…… 빼, 빼…….”

리안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망울망울 솟는 헤일라의 눈물을 보고 허리를 뒤로 물렸다. 쑥 빠져나간 성기가 질 위쪽을 쓸고 다시 위로 퉁겨 올라가는 느낌이 선연하게 전해졌다. 헤일라는 쌕쌕대면서 그의 눈치를 봤다. 리안은 배를 끌어안고 훌쩍이는 헤일라를 보며 수음하기 시작했다.

“하, 흣, 헤일라…….”

그 모습에 안쪽이 바짝 죄어 왔다. 리안의 평소 표현대로, 물이 질질 샌다. 헤일라는 황금빛 속눈썹을 내리깔고 아랫배가 조여 오는 감각을 애써 외면했다.

“흣, 윽.”

흉흉한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그러나 리안은 쉬이 사정하지 못했다. 헤일라는 자신을 갈구하는 리안을 볼 수 있었다. 조금은 괴로워 보이기도 했다.

헤일라는 리안의 자위하는 모습을 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그때 리안이 제 것에서 손을 뗐다.

“헤일라.”

“……응.”

“이거, 어쩌지.”

남자의 검지가 꺼덕이는 성기를 가리켰다.

“안 가라앉아.”

“안에는 안 돼!”

헤일라가 기겁하면서 말했다. 삽입은 안 된다는 강경한 의지가 엿보였다. 오늘은 리안의 꿰임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강한 직감이 그녀를 지배했다.

그는 항상 조심스레 삽입해 흔들면서도 가끔 이성을 잃으면 헤일라가 엉엉 울 때까지 몸을 섞었다. 아이 걱정은 하지도 않고. 예상하건대, 오늘이 바로 그날이 될 것 같았다. 헤일라가 다시금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의원도 더 조심하랬잖아.”

“헤일라…….”

그의 얼굴이 축 처졌다. 헤일라는 마음이 조금 흔들렸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럼…… 빨아 줘.”

“뭐?”

“내 자지 빨아 줘, 헤일라. 네 안이 아니면 쌀 수가 없어.”

아파…… 그가 불쌍하게 중얼댔다. 리안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기둥과 헤일라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해 줄 거지?”

헤일라의 마음이 조금씩 약해졌다. 구강성교는 해 본 일이 없어 당황스러우면서도 리안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러나 온전히 답하기도 전에 리안이 가는 발목을 잡아 아래로 쑤욱 내렸다. 헤일라의 몸이 침대 중앙까지 내려왔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리안이 발목을 주무르다가 기어서 그녀의 얼굴까지 올라왔다. 헤일라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봤다.

리안이 여체 위로 훌쩍 올라왔다. 그런데 자세가 조금 묘했다.

“왜 등을 보이고 앉아?”

리안은 헤일라의 위에 엎드렸다. 그녀의 입 위에 흉악한 핏줄이 돋은 성기가 꺼덕댔다. 저절로 침이 꼴깍 삼켜지는 광경이었다. 다만 이상한 건 헤일라의 다리 쪽으로 얼굴을 향한 자세였다.

“이게 더 편해. 입 벌려 볼래?”

이게 더 편해? 헤일라는 그 말에 의문을 느꼈지만 그대로 입을 약간 벌렸다. 그러자 리안이 친절하게 둥그런 선단을 입안에 넣어 주었다.

“우음…….”

몽글몽글한 액이 솟아 있던 살덩이에서는 묘한 냄새가 났다.

“욱, 우욱.”

“헤일라, 빨아 봐, 응?”

그는 팔로 제 몸을 지탱한 채 요구했다. 헤일라는 이미 입속을 가득 메운 것이 안으로, 안으로 밀려 들어와 구역감이 치밀었다. 그 와중에도 빨라고 하는 리안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후웃, 얼른.”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헤일라는 등만 보인 채 요구하는 리안이 미웠다. 순간 헤일라의 다리가 활짝 벌려졌다. 그의 손에 의해서였다.

“웃, 우웃.”

“자, 얼른 빨아야지.”

그는 아이를 어르는 투였다. 억울하기도, 한편으로는 수치스럽기도 했다. 결국 헤일라는 볼이 홀쭉해질 만큼 세게 입을 썼다. 쭙쭙 빠는 색정적인 음률이 리안의 귓가에 똑똑히 박혔다.

“그래 그렇게…… 음, 잘하네.”

훈련도 안 했는데 기특하게.

리안이 아낌없이 칭찬하며 헤일라의 아랫배를 소중히 쓰다듬었다. 헤일라의 배가 움찔댔다. 손이 닿은 부분이 바짝 죄는 기분이었다. 아래를 옴찔대자 리안이 낮게 웃었다.

투박한 살덩이가 더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읍, 웁…….”

“목을 연다는 느낌으로…… 흐읏.”

헤일라가 괴롭게 컥컥대자 리안이 아쉬워하며 엉덩이를 위로 올려 깊이를 조절했다. 이번에는 간신히 숨통이 틔었다. 헤일라는 그 상태에서 간신히 혀를 굴리고 고개를 약간씩 저어 가며 기둥 여기저기를 자극했다. 만족스러운 탄성이 그녀의 아래에서 터져 나왔다. 리안은 칭찬하듯 헤일라의 배를 계속 쓰다듬었다.

나름대로 잘하고 있나 보다. 그런데 왜 사정을 못하지?

헤일라는 턱이 아파 찔끔 눈물이 났다. 얼른 끝내고 싶어 기둥 옆에 붙어 있는 동그란 것을 살며시 잡고 주물렀다. 순간 리안의 허리가 찌르르 울렸다.

“우움?”

헤일라는 목울대를 울려 의문을 표했다. 여기가 좋은가?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부위인데 말랑하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헤일라는 다시금 부드럽게 살을 쓰다듬었다. 리안이 탄식하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웃!”

그리고 헤일라의 아래에 축축한 혀가 닿았다.

“우! 우우!”

바동거려 봤지만 리안의 얼굴은 이미 갈라진 두 살덩이 안쪽에 박혀 있었다. 그는 제 허리를 부드럽게 내려 목구멍 깊숙이 성기를 박았다. 입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을 터득한 듯했다.

“그거 알아? 내 거 빨면서 너 엄청 젖었어.”

“욱, 웃.”

“귀엽게…….”

리안은 집게손가락을 하고 부드러운 살덩이를 벌렸다. 외부의 자극에 구멍이 벌름대고 있었다. 리안의 흉기 같은 성기를 받아 내는 게 신기할 정도로 조그만 구멍이었다. 그는 혀끝에 단단히 힘을 주고 음핵부터 질구까지 느리게 쓸었다. 가슴팍에 닿은 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느껴져 기꺼웠다.

헤일라는 목구멍이 막힌 채로 자극에 젖어 허우적댔다. 리안의 뜨거운 숨이 예민한 점막을 훑고 달라붙었다. 아래를 관찰하는 그의 습윤한 눈길이 예상되어 더욱 수치스러웠다.

다리를 허둥대자 리안이 제 성기를 목구멍 안쪽으로 더욱 밀어붙였다. 동시에 아래를 더 집요하게 빨아 댔다. 심지어 뭉퉁한 혀의 일부가 질구를 깔짝대며 진입을 시도했다. 헤일라가 꺽꺽대며 거부할수록 그는 더 대담해졌다.

리안이 더 짓궂게 굴수록 그의 몸과 배가 맞닿는 면적이 커졌다. 밀착한 근육들 때문에 배가 눌려 요의가 밀려왔다. 헤일라는 반항을 포기하고 그의 성기를 입에 문 채 축 처졌다. 헤일라의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챈 남자는 무엇에 흥분했는지 혀를 더 우악스럽게 놀리기 시작했다.

“흐우!”

갉작. 리안이 자그마한 공알을 약간 베어 물자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그때부터 리안이 그 지점을 빠르게 핥고 깨물기 시작했다. 쩌걱이는 마찰 소리와 헤일라의 신음 소리가 엇갈려 퍼졌다.

다리 사이가 속절없이 떨려 왔다. 헤일라가 발발 떨며 입을 오물거리자, 리안이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아래와 위가 모두 혼란하게 들어찼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웁, 웁!”

참을 수 없이 무언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헤일라는 필사적으로 몸을 바동거리며 울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쏟아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뭉근한 혀가 아래의 살점들을 짓누르고 압박하다가, 다시금 음핵의 옆 부분을 찌르듯 핥아 올렸다. 그리고 입술 전체가 달라붙어 동그란 살점과 그 옆의 여린 살들을 함빡 입안에 넣어 빨아 들였을 때,

“흣.”

“욱, 우욱…….”

헤일라의 성기에서 핏, 핏 하고 투명한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샅이 부들부들 경련하듯 떨리고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잘했어, 잘했어 헤일라.”

뭘 잘했다는 건지 리안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헤일라의 아래를 싹싹 핥기 시작했다. 허리짓도 재개되었다.

목구멍이 벌어져 욱욱대는 신음이 몇 차례 울린 이후에야, 남자는 파정했다. 리안이 물려 두었던 성기를 빼내고 헤일라를 품에 넣을 때까지 헤일라는 수치심에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흐, 으윽, 어엉…….”

“쉬이, 괜찮아, 왜 울어, 응?”

“너, 너, 이 나쁜…….”

“이상한 거 아니야. 좋아서 그런 거야. 헤일라, 나 봐 봐.”

그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리안은 여자를 토닥이며 머리칼을, 둥근 이마를, 예쁜 눈썹을 매만졌다. 그리고 손가락이 왼눈의 눈꺼풀에 닿아 잠시 멈췄다. 헤일라가 한쪽 눈만 뜬 채로 그를 노려봤다.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거 놔.”

종종 관계 후에 왼눈을 지그시 누르는 리안을 잘 알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울려 주고 싶지 않았다. 팩 고개를 돌리자 리안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바싹 붙어 왔다.

“미안, 미안해. 용서해 줘.”

그가 어리광 부리듯 헤일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볐다. 입을 비죽 내민 채였지만 헤일라 또한 더는 리안을 밀어내지 않았다. 리안은 헤일라의 등허리와 날갯죽지를 지분거리다가 긴 머리칼을 검지로 꼬았다.

“헤일라, 나 잠시 떠나 있어야 해.”

“……말했잖아.”

가물가물 감기는 눈동자에 그의 상이 맺혔다.

“기억나?”

리안은 꽤나 놀랐다. 요즘 헤일라는 언니와 아기에 관한 대화를 잊는 건 물론이고 당일 겪은 일도 잘 잊었다. 리안이 한 말이나 스스로 답한 대화도 떠올리기 어려워했다. 남자의 출정 소식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꽤 고무적인 변화였다.

“내가 어디 가는데?”

“으응, 멀리…… 북동부.”

칭찬의 입맞춤이 그녀의 동그란 이마 위에 떨어졌다. 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제 눈을 부비고 물었다.

“왜 가?”

“그건 기억 안 나?”

“폐하의 명…….”

“그래. 간단한 심부름 같은 거야.”

리안이 다시 한번 헤일라를 꼭 안아 주었다. 하지만 헤일라는 토라진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거짓말이잖아.”

검은 눈썹이 위로 바싹 올라갔다. 그는 헤일라의 다음 말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녀는 정확히 십육 초가 지난 다음에야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왼쪽 눈…… 때문에 가는 거잖아.”

헤일라는 자신이 신전으로 돌아간 사실과 파이라에게서 저주의 존재를 들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언니를 만나 나눈 이야기도. 그래서 다급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소문 다 들었어.”

“내 이야기를 들었어?”

무감한 낯으로 물었으나 말끝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시종일관 차분하던 남자의 태도에 자그마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공작은…… 죽고, 네가 공작이 됐어. 그 뒤로 네가…… 네가 전장에 나간다고…….”

저주받았대. 헤일라가 속살거렸다. 동그란 입술이 찬찬히 벌어지고 오므라들기를 반복했다. 최근 들어 뱉은 문장 중 가장 길었다.

“그날, 죽인 거지? 나랑 마지막으로 본 날.”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의 일을 함구하려는 것처럼. 헤일라가 손을 뻗어 그의 왼눈을 더듬었다. 살짝 살짝씩 누르기를 반복하며 말했다.

“여기, 여길…….”

“맞아.”

“흣.”

남자의 손이 검은 눈에 닿은 헤일라의 손을 잡아챘다.

“무서워?”

그는 조금 복잡해 보였다. 반면 헤일라는 아주 평온하고 차분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인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아니.”

그녀는 졸린 눈을 하고 또렷하게 답했다.

“그냥.”

“…….”

“그냥…… 이상해.”

“뭐가?”

리안은 계속 질문하는 자신이 바보 같다고 느끼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못했다. 그의 눈에 약간의 기대감과 흥분이 서리기 시작했다.

“너한테 화, 나서. 처음에는 네가 벌 받았다고 생각했고, 그다음에는, 걱정되고, 또 그다음엔…… 속상했어.”

속상했어. 그 말을 들은 리안이 헤일라의 손을 감싸 쥐고 제 입에 작은 손을 갖다 댔다. 손바닥에 축축한 입술이 닿았다. 그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뜨였다. 그걸 보는 헤일라의 표정은 말갰다.

“그리고 궁금했어. 저주받은 네 모습. 그런데 이전이랑 같아서…… 이상해.”

이상하다. 헤일라는 그 말을 두어 번 반복했다. 그리고 수마 속으로 자신을 잠갔다. 리안은 잠든 헤일라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커튼 사이의 빛이 길게 늘어져 헤일라의 고운 얼굴을 반으로 갈랐다. 아름다움에 어쩐지 가슴이 아렸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리안은 헤일라가 했던 것처럼 단어를 입안에서 여러 번 굴렸다.

나를 생각했다고. 미친 모습까지도 궁금했다고…….

리안의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헤일라…….”

심장이 크게 뛰었다. 리안이 고개를 천천히 내려 그녀의 닫힌 눈꺼풀에 입 맞췄다.

“이전이랑 같아 보였구나.”

천진하게 잠든 연인의 모습을 훑던 남자가 혀로 제 아랫입술을 빨았다.

“다행이다.”

그가 입 맞춘 눈은 왼쪽 눈이었다.

* * *

“헤일라에게는 네가 말했나?”

“……예.”

파이라는 바짝 긴장했으나 리안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 말았다. 여자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라도 언질을 준 것은 제 잘못이 맞았다. 그런데도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찝찝했다. 어느 정도의 구타까지는 예상하고 있었는데.

파이라가 은근히 리안을 살폈다. 눈치를 보는 것이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리안은 나긋한 어조로 뜬금없는 말을 했다.

“상관없대.”

충실한 심복은 답하지 않고 앉아 있는 주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서워하지도 않았어. 다 알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감동에 젖은 듯도 하였다. 파이라의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일순 리안이 사람을 죽일 때의 표정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삼 년간 리안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리안이 미쳐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다.

리안 휴리트는 사람의 왼눈에 집착하다가 결국은 이성을 잃고 파내는 광증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광증이 상당히 산발적인 양상을 보여 일상생활도 불가했다.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다가도 광증이 도졌으니까.

결국에는 광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죄인들을 저택의 지하로 몰래 이송해 도륙하곤 했는데, 그러지 못하는 날이면 반 미쳐 날뛰었다. 아무도 모르게 시신이 되어 저택을 나간 사용인도 꽤 되었다. 밤이 되면 시종들을 모두 내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미 리안이 저주받았다는 사실이 소문으로 돌기는 했지만 소문이 소문인 것과 사실로 입증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최대한 빨리 헤일라를 데려오려 했던 리안은 계획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제 손으로 사랑해 마지않는 여인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헤일라를 살펴. 그리고 닿은 것들은 전부 여기로 데려와.’

물론 그 시간들 속에서도 정상적인 방식으로 여자를 돌보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감히 만지지 못하는 연인과 닿은 이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아니, 어쩌면 신체 조각을 모으며 헤일라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갈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그녀와 닿았던 것들을 애틋하게 쓰다듬곤 했으니까.

아무튼 그는 최대한 빨리 연인을 데려오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뭐더라. 파이라의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 끔찍한 과거를 회상하면 언제나 얼굴을 펴기가 힘들었다.

리안이 처음으로 선택한 장소는 전장이었다. 피비린내가 가득 찬 곳에서 수백의 목을 베어 내고 그보다 더 많은 안구를 적출 해낸 뒤에야 안정을 찾았다. 그는 그곳에서 광기를 짓누르는 훈련을 감행했다. 물론 사람의 머리통을 산산이 으깨 놓기도 했고, 눈알만 깔끔하게 도려내는 방법을 배운답시고 죄인들로 실험을 하기도 했지만 효과는 있었다.

그래 놓고 광증을 참아 낼 때마다 곧 헤일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아주 기뻐했다. 손에 피를 가득 묻히고 웃는 모습은 기괴했다.

그러나 언제나 복병은 존재하는 법.

헤일라.

헤일라가 가장 큰 문제였다.

어느 날 베르디안이 리안에게 선물이랍시고 금발에 금안을 가진 여인을 보내왔다. 반쯤 친우의 반응을 살피려는 수작이었을 테다. 여자는 리안의 침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맞이하고, 자연스럽게 옷을 벗었다.

다행히 전장을 다녀온 직후의 그는 광증이 가라앉아 안정적인 상태였다. 그래서 파이라는 리안이 여자를 적당히 밖으로 내보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야 했다.

헤일라와 같은 머리 색에 같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시신이 된 채로 저택을 나갔다. 그제서야 리안과 파이라는 무언가 잘못되었다 직감했다. 제국에서 쉬이 찾아볼 수 없는 금발의 금안. 그것이 리안을 자극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비슷한 인간을 구해 와.’

참을성이 동난 리안은 인간을 구하기 시작했다. 금발에 금안. 또는 헤일라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죄인들을 모았다. 그리고 실험을 시작했다.

서른두 번째 인간이 죽어 나갔을 때 즈음에서야 리안은 원하는 답을 얻었다.

헤일라는 광증을 자극한다.

왜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신전의 저주에 관한 자료는 표본이 극히 적은 관계로 거의 없다시피 했다.

리안은 헤일라를 불러들이기 전까지 매일 밤 지하에서 금발에 금안을 가진 인간을 하나씩 죽여 왔다. 가끔은 안구만 적출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며 상해를 입히지 않게끔 조절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파이라가 헤일라를 데려온 날 그녀에게 경고를 아끼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헤일라라는 여자는 특별했다. 공작의 광증을 증폭시키는 자극제와 다름이 없었다.

고로 이 남자가 가장 파내고 싶어 하는 눈알은 아마도 연인의 왼쪽 눈알일 테다. 과연 그것을 알고도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파이라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이제 슬슬 출발하셔야 합니다.”

파이라의 재촉에 리안이 작게 혀를 찼다. 그러나 못 들은 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레시티움의 군대가 타론 제국의 국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시간을 끌 만큼 끌었으니 이제는 가야 한다.

게다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그래.”

리안은 부러 헤일라가 자는 채로 두고 나왔다. 분명히 깨어 있는 모습을 보면 그냥은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리안은 그대로 방을 나서서, 아이를 품은 제 여자가 자고 있을 방문을 힐긋 바라보고 걸음을 떼었다.

스무날. 스무날 안으로 필요한 만큼의 피를 뽑아내고 헤일라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 * *

주인이 떠난 저택은 조용했다. 특유의 음산함이 죽죽 늘어지기는 했지만 모두가 평화롭다 여겼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도, 여자가 비명을 지르는 일도 없었으니.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불안에 떠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리안이 안 와요…….”

“시일이 조금 더 걸린다고 합니다.”

“언니도…… 답장이 없어요.”

“내일은 올 겁니다.”

“오늘은요?”

헤일라는 정원에 앉아 우울하게 물었다. 하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지만 헤일라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 앞에 놓여진 찻잔이 유독 외로워 보였다. 꽃보다 푸르른 녹음을 더 선호하는 그녀의 취향대로 정원은 생기가 가득했지만 헤일라는 기가 팍 죽어 있었다.

“식사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식사를…….”

“절 버린 건 아니겠죠?”

“헤일라 님.”

“언니는, 언니는 어쩌고 있어요? 정말 절 안 찾아요?”

늘어져 있는 하녀들 모두가, 속으로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겨워하고 있었다. 열흘 가까이 같은 질문과 답변의 반복이었으니.

그러나 누구도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비굴하리만치 다정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사용인들이 헤일라의 주위에 줄지어 서 있다. 어딘가 기괴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이를 눈치챌 여유가 없었다.

“흐윽…….”

조용한 울음이 터졌다. 전담 하녀의 얼굴에 옅은 금이 갔다. 그녀는 떨리는 입매를 애써 끌어올려 헤일라의 옆에 바짝 붙었다. 어딘가 초조함이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울면 아기님이 놀라십니다. 진정하세요. 주인님과 레테 님 모두 곧 돌아오실 거예요.”

“아기?”

아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헤일라의 눈물이 뚝 멈췄다. 그녀는 아기의 존재를 처음 들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이 짓도 열흘째 반복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용인들이 이 연극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아니, 조금은 필사적으로.

“예, 아기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진정하세요.”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인다. 하녀는 능숙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아기님이 계신데 리안 님이 헤일라 님을 버리실 리가 없죠. 레테 님도 헤일라 님이 아기를 무사히 낳으면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고요. 후계만 낳으시면 명실상부 공작 부인이 되시니 모든 게 안정을 찾겠지요.”

“정말요?”

“물론입니다. 제가 누구 앞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헤일라의 고개가 아래로 투욱 떨어졌다. 애원에 가까운 하녀의 권유가 계속되었다. 찬 바람을 오래 쐬면 아기에게 좋지 않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식사를 해야 아기가 잘 자란다, 리안이 일러둔 말을 잘 들어야 그가 금방 돌아온다…….

헤일라는 하녀의 말을 듣고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삭이 된 몸은 쉽게 휘청였다. 허우적대기 전에 잡아 준 하녀들 덕에 그녀는 어기적어기적 걸어 방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식사 전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피곤하고 피곤했다. 방금까지 하녀와 무슨 이야기를 한 것 같았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뭉그러트리고 침상에 아무렇게나 누웠다.

누군가 몸 위에 포근한 이불을 덮어 주는 게 느껴졌다. 자세가 불편해 몸을 뒤척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나고, 지나고…… 꿈인지 망상인지 모를 형상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쉭, 쉭 하고 지나가는 장면들 속에는 그녀의 부모, 레테, 마을 사람들, 그리고 리안까지 있었다. 그들은 웃고 있다가도 찡그렸고 찡그리다가도 울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마지막은…….

새빨간 피를 뒤집어쓰고…….

“헤일라 님! 일어나셔요!”

끔찍한 잔상의 허상이 절정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즈음, 누군가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아, 현실이구나. 헤일라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안도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낯설다.

평소 자주 듣던 하녀의 음성이 아니었다. 좀 더 젊고, 어리숙하고,

“황제 폐하께서 오셨어요!”

다급한 목소리.

* * *

절제된 호화로움을 두르고 있는 응접실은 적막함이 아주 잘 어울렸다. 다만 헤일라가 그것을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안, 안녕하세요.”

그녀는 스스로가 조금 멍청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방금 했던 인사를 반복했다. 황제, 페이네리아는 앉은 채로 오만하게 헤일라를 훑어보았다. 헤일라는 비쩍 마른 다리로 부른 배를 감당하기 힘들어 고개를 숙인 채로 부축을 받고 있었다.

황제가 허하지 않으면 앉을 수 없었기에 인사를 받아 주기 전까지 계속 서 있어야 한다고 했다. 헤일라는 자신이 서 있는 이유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바짝 긴장했다.

실수하면 안 돼. 리안의 이모님이셔. 황제 폐하라고 했어…… 그녀는 울렁대는 속을 애써 억누르며 침을 삼켰다.

“앉지.”

그런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혹적인 여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황제는 상석의 우측을 턱짓했다. 평소 헤일라를 모시던 노련한 하녀가 의자를 빼 주었다. 아, 폐하를 모셔야 해서 다른 아이를 보냈구나. 노련한 사용인의 침착한 모습에 감탄하며 걸음을 옮겼다. 헤일라는 정해 준 자리에 착하게 앉아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매가 많이 다르군.”

자매? 헤일라가 속에 말로 황제의 말을 따라 했다. 머리가 느리게 돌아가다가 하나의 지점에 꽂혔다. 레테. 언니.

“언니를 아세요?”

“조금.”

페이네리아는 어딘가 언짢아졌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헤일라는 조금 겁먹은 채로, 그러나 멈추지 않고 물었다.

“어, 언니는 잘 지내나요?”

흐리멍덩하던 눈에 약간의 생기가 스몄다. 듣지 못했던 언니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이 헤일라를 깨웠다. 흥분감이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게 궁금한가?”

“네?”

“생각보다 더 멍청한데.”

움찔. 헤일라의 어깨가 오므라들었다. 헤일라는 페이네리아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녀를 흘금흘금 바라보았다. 귀족가에서 흔히들 말하는 ‘못 배워 먹은’ 행동이었다. 이를 헤일라가 알 리가 없었다. 턱없이 높은 지위를 받은 여인은 왕자의 옷을 입은 거지처럼 어색해 보였다.

“아아, 자네 탓을 하는 건 아니야.”

그건 아니지. 페이네리아는 약간 빈정대는 투로 중얼댔다. 그러나 명백히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헤일라는 그 간극을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앞으로는 그렇게 말하면 못 써.”

헤일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조급할수록 누구보다 여유로운 척할 줄 알아야지. 그게 귀족이란다.”

“아…….”

“그렇게 궁금한 걸 바로 묻는 귀족은 없어. 보통 선물을 내밀거나 비슷한 화제를 꺼내서 상대가 입을 열도록 유도해. 적당히 맞춰 주는 게 상대방의 미덕이기도 하고.”

“네, 네에…….”

황제는 웃으며 잘 기억해 두라고 이야기했다. 헤일라의 머리통을 부드러이 톡톡, 두드려 주는 행위가 다정해 보였다.

“전할 말이 있어서 온 것뿐이니 걱정 말게.”

언니에 관해서는 이야기해 주지 않으시는구나. 헤일라는 약간 의기소침해졌지만 이를 티 내지 않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에, 하는 목소리가 꽤 명료했다. 페이네리아는 그나마 말을 잘 듣는 모습에 기분이 풀렸는지 살짝 웃었다.

“그럼 자네들은 나가 봐.”

“……폐하.”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군.”

휴리트 가의 하녀들은 모두 바짝 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황제의 시녀가 도끼눈을 뜨고 그런 그들을 쳐다봤다.

“여기서 당장 목을 따이고 싶은가?”

황제의 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하녀들은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나갔다. 방에 남은 건 페이네리아와 헤일라, 그리고 황제의 시녀 둘뿐이었다. 헤일라는 저도 모르게 눈치를 보며 고개를 슬슬 숙였다.

“곧 신전에서 세느리움이 있는 건 알고 있겠지.”

“아.”

세느리움의 날. 십 년에 단 하루 있는 날이었다. 신에게 경배를 올리는 날. 신전의 신관들과 고위 귀족들이 세니르 신전에서 제를 올리는 행사였다.

타론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로, 이날만은 모두가 풍족하게 놀고먹었다. 황궁에서는 술과 식량을 양껏 풀었고 신전에서는 거액을 기부한다. 사람들은 신전 앞에 잔뜩 모여 자신의 염원을 중얼댄다. 그런 날이었다.

“거기에 와 주어야겠어.”

“어…… 저는.”

“곧 출산일이 아닌가? 거기서 둘의 혼인을 발표하며 성대하게 기도를 드리면 좋겠는데.”

“…….”

“너무 어려워하지 않아도 돼. 난 리안의 어미와 다름없는 이거든. 그 아이의 혼인이니 내가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게 당연하잖나.”

“네…… 그런데 리안은…….”

“그 전날까지는 올 테니 걱정 마. 일은 거의 다 끝나 가는 단계라고 보고받았거든.”

내가 그 정도 알아볼 능력은 되어서. 그녀가 매력적으로 웃었다. 헤일라는 애써 웃음을 따라 해 보았지만 눈은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불편하다. 어렵다. 맹렬함을 담은 눈빛과 마주하자면 골이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아, 사흘 뒤야.”

“네?”

“저택에서만 싸고돌아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하는 것 같기에.”

헤일라가 달아오른 뺨을 머리칼로 가리려 고개를 약간 숙였다. 황제의 시녀가 만류하려고 귓속말을 하려 다가가는데, 황제가 손짓으로 그 움직임을 물렸다.

“내 조카님의 허물이지. 자네가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야.”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황제가 미소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처럼 황금색 드레스가 물결치며 내리깔렸다. 그에 맞춰 황금색의 귀걸이가 짤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아름다웠다.

곧바로 나갈 것 같았던 페이네리아의 눈이 어디에선가 멈췄다. 침대맡에 있던 꽃이었다.

“라가스타.”

“아, 저게, 어…….”

“해독에 좋은 꽃이라지. 리안이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른가 본데. 구하기 힘든 해독 꽃이거든.”

“네에…….”

“그런데 이거, 꽃말이 뭔지 알고 있나?”

“행복…….”

리안이 말해 주었다. 헤일라는 혹여 틀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페이네리아는 멍하니 꽃만 보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야.”

“아니에요?”

“그래. 그건 신전의 치들이 몇백 년 전에 날조한 거야.”

신전의 의술을 관리하는 집단. 그들은 약에 쓰이는 풀떼기들까지도 신이 내린 것이라는 명목을 내세웠다. 신의 베풂은 항상 고고하고 아름다운 것. 약초들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꽃말은 대대적으로 각색되었다.

헤일라는 그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가 동한다.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다.

“진짜는 신전과 황궁의 고서에만 쓰여져 있지. 나도…… 전해 들은 것뿐이지만.”

아마 리안도 모를걸.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슬프게 웃었다.

“그럼, 그럼…… 진짜 꽃말은 뭐예요?”

헤일라는 분위기를 약간 바꿔 보려고 애써 활달하게 물었다. 그러나 황제는 어딘가 뒤틀린 말투로 답했다.

“거짓과 배신.”

적발을 귀 뒤로 넘기는 팔목에서 짤랑, 하고 팔찌가 흔들린다. 아, 진짜…….

예쁘다. 헤일라는 금세 멍해져서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옷을 보내지. 입고 오도록.”

페이네리아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던 헤일라는 약간 당황하여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 따라 일어났다. 인사하는 몸이 부른 배 때문에 약간 기우뚱했다.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살의가 헤일라의 배에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그러나 헤일라는 고개를 숙이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에 뵈어요.”

부드러운 인사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황제는 그대로 묘한 침묵만 남기고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황제의 선물인 드레스와 장신구들이 저택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하루 뒤, 삼 일째.

리안이 전장에서 돌아왔다.

* * *

페이네리아가 다녀간 지 이틀 만이었다. 리안은 딱딱한 갑옷을 입고 있지도, 얼굴에 핏자국을 달고 있지도 않았다. 제 여자에게 보이는 모습은 완벽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사내였으니, 저택에 도착하기 전 다른 곳에 들렀으리라. 파이라는 헤일라의 뒤에 서서 생각했다.

“헤일라.”

저택으로 들어선 리안은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는 헤일라를 보고 걱정스러움을 담아 그녀를 불렀다. 헤일라는 약간 풀이 죽어 있는 채로 그에게 다가갔다.

“늦어서 미안해.”

헤일라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약속한 날보다 훨씬 일찍 돌아왔는걸.”

틀어 올려 묶은 금빛 머리칼이 찰랑댔다. 리안은 한숨 쉬듯 웃다가 발그레한 뺨을 쥐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무슨 일은 없었고?”

그는 다 안다는 낯이었으나 헤일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뒤에 있던 사용인을 슥 훑어본 리안은 헤일라에게 귓속말했다.

“들어가자.”

“응, 응.”

방에 들어와서도 그는 다른 말이 없었다. 몸이 괜찮은지, 아기는 잘 있는지 배를 쓰다듬고 입을 맞춰 줄 뿐이었다.

“리안…… 응, 흣,”

손길이 사타구니를 더듬자 헤일라가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리안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왜 그래?”

“세느리움에 가야 한대.”

그녀는 막막하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귀족들이 어떤 방식으로 의식을 치르는지, 어떻게 축제를 즐기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넌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 아기가 태어나면 정식으로 절차를 밟을 예정이니까…….”

그는 짐짓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이미 지방 귀족의 아래로 양녀 입적까지 마쳐 놓았다는 희소식도 속삭여 주었다. 그러나 헤일라는 입안의 살을 잘근 물었다. 초조함의 표현이다.

“옷, 받았어…….”

“옷?”

의외의 상황에 리안의 입매가 굳었다. 헤일라가 눈을 흘깃대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품 안에 있는 여체가 돌처럼 딱딱해진 걸 느끼고 리안이 표정을 풀었다.

“나 잘못했어……?”

벌 받는 거 싫어…… 헤일라가 중얼댔다.

옷을 선물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증표였다. 상대가 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 정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어떤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신호인 것이다.

황제에게 의복을 선물 받고 약속한 자리에 나가지 않는 건 그를 모욕하는 행위가 된다. 하지만 헤일라는 그걸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헤일라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약간 떨었다.

“아냐, 아냐 헤일라. 잘했어.”

리안은 안타까움과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착해라. 그는 메마른 여자의 등허리를 쓸었다.

실제로도 헤일라는 리안의 말을 거스른 게 없었다. 식사도 잘했고 말도 잘 들었다고 했다. 게다가 꼬박꼬박 그를 찾았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 여자가 일국의 황제를 상대로 유연한 대처를 할 수 있었을 리가. 그는 헤일라를 십분 이해했다. 아니, 그는 헤일라가 황제의 뺨을 쳤다고 해도 이해했을 사내였다.

뱀같이 교활한 황제의 술수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헤일라와 나들이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가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며 딱 붙어 있는 헤일라의 모습을 보는 것도 분명 즐거울 테다. 게다가 헤일라의 같잖은 혈육에게 그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있을 테니 더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나랑 같이 가면 돼. 그럼 아무 일도 없어.”

“계속 같이 있는 거야? 계속?”

헤일라는 재차 불안해하며 물었다. 리안은 그런 모습에서 저열한 만족감을 느꼈다. 아랫배가 묵직해진다.

“물론이지.”

리안이 헤일라의 옷을 한 꺼풀 벗기며 웃었다.

* * *

그는 충실하게 약속을 지켰다. 아니, 헤일라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들러붙었다. 황금 단추가 달린 고급 망토와 헤일라가 골라 준 붉은색 커프스는 그가 귀족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리안의 행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경건해야 할 의식 도중인데도 헤일라의 손을 꼭 붙들고 있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헤일라가 더욱 이상하다고 여긴 지점은 그런 추태를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배가 뭉치지는 않아? 조금이라도 안 좋아지는 것 같으면 바로 이야기해야 해.”

“괜찮아.”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주변을 잔뜩 살피는 헤일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안은 끝없이 말을 걸었다.

“어디 아픈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과한 걱정이다. 과보호였다. 분명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헤일라는 얼굴이 조금씩 달아오름을 느꼈다. 자꾸 이렇게 그에게 정신이 팔리면 안 되는데. 여기가 어디인지, 왜 여기 서 있는지 잊어버리면 큰일이었다. 조바심이 피어올랐다.

헤일라는 황제가 공작가에 다녀간 이후로 계속 신전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주입했다. 최근 들어 자신이 했던 말도 곧잘 잊는 그녀로서는 굉장한 노력이었다. 중지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글씨를 써 두고 방 안에 붙여 두기도 했다.

황제님이라고 하니까. 리안의 이모님이라고 하니까. 밉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이곳은 레테가 사는 곳이다. 헤일라는 언니를 만나서도 바보같이 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언니는 그런 모습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불온한 육신과 영혼을 바쳐 신의 대리인의 이름으로…….”

드문드문 신관의 기도문 읊는 목소리가 들렸다. 헤일라는 그것에 집중하려 안간힘을 썼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황제와 신관들을 제외한 모든 귀족들이 단상의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어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워낙 넓고 높이가 높은 공간이라 리안의 말이 다른 이들의 기도까지 방해하지는 않았으리라. 헤일라는 그리 믿었다.

그녀는 귀찮게 구는 리안에게서 눈을 떼고 신전 중앙 본당을 쭉 훑어보았다. 구경의 목적은 아니었다. 이전에 미아르가 소개해 준 적이 있는 곳이었다. 헤일라는 레테를, 그러니까 신관이 된 언니를 찾기 위해 흘금거렸다.

“누구 찾아?”

리안이 기민하게 눈치챘다.

“레테?”

부정하기도 전에 물어 온다. 헤일라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까닥였다.

“아, 내가 말 안 했구나.”

뭘? 입 모양으로 물었다. 리안은 짐짓 반응을 기대하면서도 여상한 태도를 유지했다.

“레테는 마지막 기도회에서나 볼 수 있을 거야.”

헤일라가 입을 열기도 전에 리안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신관 임명은 리듀카에서 하는 게 관례라.”

“대신관…….”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단어를 따라 했다. 리안은 흡족하게 웃으며 황금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래. 이제 알겠지? 레테 걱정 같은 건 할 게 못 된다는 거.”

헤일라의 얼굴이 약간 음울해졌다. 그래서 날 찾지 않은 거로구나. 이제는 필요가 없고, 또 대신관이 되는데 나 같은 동생은 걸림돌만 될 테니까. 코끝이 찡했다.

그때 리안이 부른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이제 우리만 생각하면 돼.”

아기. 우리. 그는 그렇게 속삭였다. 헤일라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은 부른 배를 하고 그의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동생의 모습을 볼 레테가 그려져 피식댔다.

“휴식의 시간을 가진 뒤 리듀카의 앞에서 뵙겠습니다. 올해는 대신관 임명식이 있을 예정으로, 모든 방문객이 리듀카 출입이 허가되었음을 밝힙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아들인 귀한 금붙이들을 앞에 두고 의식을 주관하던 신관 하나가 선언하자마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리듀카에?”

“세상에…… 그런 영광을.”

“대신관 임명식과 세느리움이 겹쳐서인가? 허어.”

“아무려면 어떤가! 무려 리듀카인데!”

여기저기서 환희에 찬 감탄사들이 쏟아졌다.

리듀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장소였다. 신전에 입장하여 세느리움을 지내는 이들이 대귀족들이라 하더라도 신관이 아닌 이상에야 리듀카는 너무나 먼 장소였다. 그런 곳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흥분했다. 징그러울 만치 체통을 지키는 부류는 시간이 조금 지나고 헛기침을 하며 체면을 차리려 했지만 이미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 뒤였다.

미리 언질을 들어 알고 있던 리안은 반응을 살피며 헤일라를 조용히 이끌었다. 쉴 수 있는 휴게 공간으로 가서 얼른 헤일라를 쉬게 하고 싶었다. 별 같잖은 것들의 시선이 그녀와 그녀의 둥근 배에 닿는 것도 끔찍하게 싫던 차였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그때 누군가 그의 앞에 끼어들었다. 타이런 후작이었다. 후작가는 베르디안의 가문을 포함하여 제국에 단 두 개. 하지만 명성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선대 타이런 후작이 상당히 많은 사업을 벌여 두고 수습하지 못해 빚더미에 앉은 건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들인 새로운 후작은 야심이 넘치고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사내라 했다. 최근 남서부의 소국과 독점적인 향신료 수입 계약을 맺어 쌓인 빚을 거의 다 탕감했으며 재정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는 다른 산업에 손을 뻗치고 싶은 눈치였다.

군수산업. 휴리트 가문이 독점적으로 관리하며 지휘권을 갖고 있는 분야였다. 타이런 후작은 리안과 친분을 쌓아 군수산업의 무기 제조 물자를 대고 싶어 했다. 그래서 모두가 두려워하는 리안에게 끊임없이 초대장을 보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 없던 리안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말을 건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능한 이에게 행운만 찾아오지는 않는 법이다.

“예, 그럼.”

리안은 상대가 무안할 정도로 빠르게 대화를 차단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평소 공작께…….”

“아니. 내 아내가 몸이 많이 무거워서 그건 힘들겠습니다.”

그는 제 아내를 소개시켜 줄 마음도 없는지 품 안에 꽁꽁 싸매고 있었다. 귀족 간의 법도나 예의, 그런 것은 개념과 함께 집어 던진 모양새였다. 타이런은 열심히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다음에.”

물러서야 할 때였다. 그는 촉이 좋은 편이었다.

“차후 초대장을 보낼 테니 꼭 시간을 내어 주시지요. 그…….”

애매했다. 누군가는 노예일 것이라 하였고 누군가는 미천한 정부가 될 여인이라 하였다. 그러나 휴리트 공작은 만삭의 여인을 데려와서는 ‘아내’라고 못 박았다.

미쳐 버린 휴리트 공작이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공작 부인과 함께 방문해 주시면 더없는 영광일 겁니다.”

리안이 헤일라 쪽을 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기분이 좋을 때나 보이는 얼굴. 보란 듯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고 싶을 때나 짓는 표정이다. 헤일라는 품 안에서 그걸 확인하고 힐끔 바깥을 보았다. 리안에게 말을 건 멀끔한 남자 하나가 보였다.

아, 눈이 마주쳤네.

그녀는 건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쩐지 상대의 뺨이 약간 붉어졌다. 남자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헤일라는 후작을 관찰하느라 리안을 보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리안이 잠시만, 하고 그녀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후작에게 바짝 붙어 무어라 속삭였다. 돌아와서는 헤일라의 어깨를 감싸 문 쪽으로 이끌었다.

뒤돌아 힐금 본 남자의 얼굴은 상당히 창백했다.

* * *

“눈 한쪽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불편한 일이야.”

“…….”

“조심하지.”

경고를 들은 후작의 몸이 바짝 굳었다. 바로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아르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가까이 있는 심복들만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소리였지만 명백한 무례다.

그러게 조심하라 일렀는데.

미아르는 타이런 후작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둘 다 돈에 환장한 인간들이라 맞는 구석이 아주 많았다. 동업도 하고 담합도 하다 보니 퍽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리안에게 웬만하면 다가가지 말라 일러두었거늘. 자신감이 넘쳐 자만에 닿은 결과였다.

물론 모두가 거리를 두라고, 보통 위험한 인사가 아니라고 만류하는 데에도 다가간 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공작의 마음에 들고, 그의 살기에 눌리지 않을 자신.

그러나 한순간의 겁박으로 타이런 후작은 자신의 만용을 깨달았다. 그의 표정이 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두려움과 후회가 반씩 섞인 얼굴은 퍽 볼 만했다.

미아르는 후작에게 눈인사를 한 뒤 살짝 빗겨 지나쳤다. 그리고 리안의 뒤통수에 대고 차분하게 말을 걸었다.

“공작 각하.”

그는 턱을 약간 틀어 미아르를 응시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리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서는. 미아르는 그의 방종을 탐탁잖아 하면서도 상냥함을 유지했다.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번에 출타하신 일에 관해서요.”

미아르는 리안의 옆에 딱 붙어 서 있는 헤일라를 흘긋 눈짓한 뒤 리안과 눈을 마주쳤다. 무언의 신호였다.

헤일라 님이 들어서 좋을 건 없는 이야기겠죠?

“헤일라. 잠시만 다녀올게.”

그가 여자의 손을 들어 올려 안쪽 손목에 입을 맞추었다.

“응…….”

헤일라는 누가 보아도 불안에 떨고 있었지만 그를 보채지 않았다. 황제의 명이라 들은 탓이다.

“파이라가 함께 있을 거야.”

“그리고 저도요.”

미아르가 눈을 찡긋댔다. 그녀는 리안 보란 듯이 헤일라의 팔짱을 꼈다.

“우리 꽤 친하다고요. 게다가, 저 남자 정도로 되겠어요?”

리안은 약간 신경이 긁히는 기분이었지만 침묵했다. 오늘은 주제를 모르는 대귀족과 신관 나부랭이들이 신전 안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날이었다. 만약 권세를 앞세워 헤일라에게 치근덕대기라도 하면…….

리안은 불쾌함이 차고 오르는 걸 느꼈다. 아무리 많은 벌레를 눌려 죽여도, 주제를 모르는 벌레들은 계속 알을 깠다.

“대신에 다음번 거래에서는 제 편의를 조금 봐주시는 거예요.”

거래. 편의. 미아르는 다음번에 있을 광산 거래를 들먹이고 있었다. 역시, 아무런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 여자는 아니었다. 물론 신전의 권위자가 헤일라 옆을 지키고 있는 건 꽤 편리한 일일 테다. 하지만…….

“미아르 에르단도.”

미아르는 이제 레테의 아랫사람이었다.

“여기에 너 말고 헤일라에게 접근할 인간은 없어. 그래도 다들 머리 굴리는 솜씨 하나는 타고난 치들이라.”

그는 어쩌면 레테의 명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이를 헤일라의 곁에 둘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 내 사람이 하나밖에 없을 것 같나? 그렇게 순진하지 않잖아.”

미아르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세상에나! 저를 이토록이나 박대하시다니. 다시 생각해 보셔요. 우리, 좋았잖아요?”

그 말에 헤일라가 약간 의심스러운 눈으로 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리안은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헤일라의 어깨를 감싼 채 본당을 나섰다. 아무래도 헤일라를 준비된 장소에 데려다 놓은 뒤에야 황제에게로 향할 성싶었다.

미아르는 그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다가 성큼성큼 제게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성난 황소의 발길질과 비슷했다.

“그년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고!”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거친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녀를 모시는 시종은 연신 눈치를 봤다.

“도움은 안 되어도 방해는 되지 말아야 할 것 아냐.”

해 달라는 건 다해 줄 수 있는데도 심드렁한 계집. 무예 잘났다고 그리 고고하게 구는지, 전혀 협조를 하지 않았다. 돈 되는 일을 알려 주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신관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예언도 던져 주지를 않았다.

‘대신관 임명식엔 모두가 참여하도록 하는 게 좋겠어.’

‘싫어? 예언이 필요 없나 보네.’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배고파서 쓰레기통 뒤지던 때로?’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올리던 모습이란…….

미아르의 이가 갈렸다.

귀족 아비의 끔찍한 사랑을 피해 도망쳤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데리고 도망쳤던 자신. 그때의 기억을 아무렇지 않게 들추는 레테가 증오스러웠다.

게다가 레테의 존재 때문에 리안의 괜한 경계를 샀고 헤일라에게 접근하기는 더더욱 불가능해졌다. 미래의 공작 부인을 꼬여내 자신의 편으로 만들 계획이 완전히 날아간 것이다. 덩달아 공작가와 손을 잡아 새로운 사업을 도모할 기회도 사라졌다.

아, 차라리…….

차라리…….

미아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고개를 팩 돌려 걷는 뒷모습이 꽤나 싸늘했다.

* * *

헤일라는 리안이 데려다 놓은 자리에 앉아 미아르에 관해 생각했다. 좋은 관계였다는 의미는 뭘까? 그녀는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리안의 단호한 답을 듣고도 울적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미아르 님과 리안이 이전에 그런, 깊은 관계였던 건가. 아니 어쩌면 지금도…….

망상이 똬리를 틀었다. 그녀는 요즈음 종종 아주 작은 일에도 깊이 매몰되어 우울감을 느꼈다. 가끔은 리안이나 시종들의 표정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였다.

잔뜩 부푼 배를 안고 계속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헤일라는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리안이 옆에 있었다.

“리……안.”

“잘 잤어?”

순간 헤일라의 사고가 정지했다.

여기 어디지. 다 하얗다. 이상해. 무서워.

왜 집이 아닐까?

헤일라는 멍한 정신으로 고개를 휘휘 저어 보았다. 리안이 그녀 모르게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지우고 물었다.

“혹시 신전에 온 게 기억 안 나?”

“신전……?”

그녀는 약간 겁먹은 얼굴로 눈을 끔벅댔다. 곧이어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엉덩이를 들썩댔다.

“아…… 옷, 선물 받아서…….”

“그래. 잘 기억하네. 잘했어.”

리안은 헤일라가 기특하다는 듯 꼭 안았다.

“그런데 왜 여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어.”

목소리에는 약간의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마저 귀여워서, 리안은 웃음 섞인 한숨을 쉬어 버렸다.

“괜찮아. 그냥 쉬고 있었어.”

휘유, 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헤일라는 리안의 품에 파고들어 볼을 부볐다. 요즘 들어 자주 보이는 행동이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안심하면서 나오는 습관 같았다.

“자, 이제 가야 해.”

“어디? 집?”

그녀는 그것을 조금 고대하는 듯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향해야 할 곳이 집은 아니었다.

“리듀카.”

레테를 만나러 가야지. 리안이 귓가에 속살댔다. 굉장히 고대한 사람처럼 조금은 떨리는 음성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헤일라의 흥분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리라.

“……언니.”

“응, 네 언니. 오늘 리듀카에서…….”

“대신관이 된다고 했어.”

“그래.”

헤일라는 언니에 대해 스스로 찾아낸 기억이 뿌듯하게 느껴져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헤일라는 방긋방긋 웃으며 그의 손을 쥐고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나는 순간, 헤일라의 몸이 멈칫했다.

“헤일라?”

“어…….”

뭐지? 묘한 위화감이 그녀를 감쌌다.

“어디 아파? 배가 아픈 거야? 아니면 속이 안 좋아?”

그가 재차 물었으나 헤일라는 도리도리 고개만 돌렸다.

“음, 아냐.”

별일 아니었다. 그냥 뭔가 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을 뿐. 헤일라는 리안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었다. 방을 나가 조금 더 걸으니 조경이 훌륭한 정원이 나왔고, 정원을 지나 우거진 나무 몇 그루를 지나니 사람들 무리가 보였다.

“리듀카야.”

아, 여기. 헤일라는 리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왜 아니겠는가. 이곳은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끔찍한 기억만 남은 장소였다. 하지만 여기를, 여기를 들어가야…….

“괜찮아.”

그가 헤일라의 배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묘한 안정이 느껴졌다.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테니까. 걱정할 거 없어.”

그래. 괜찮아. 이제 리안은 나쁜 짓 같은 거 안 하니까. 예전 일 같은 건 다 잊어버려도 돼. 헤일라는 끔찍한 기억들을 모조리 구겨서 제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리듀카의 안에서는 정숙해 주십시오.”

한 젊은 신관이 앞에서 주의 사항을 읊었다. 헤일라는 제 머리칼을 꼬며 리안의 가슴팍에 살짝 기대었다. 서 있는 게 힘들었다.

얼른 언니를 보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그때, 리안의 가슴팍, 그러니까 헤일라가 기대고 있는 부분의 오른쪽 단추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아, 맞아.

일순 사소한 변화가 기억났다. 번개를 맞은 듯 찌릿한 느낌.

옷.

붉은색 커프스. 황금색 단추. 원단은 비슷하지만 디테일이 달랐다. 커프스와 단추의 색이 모두 은색이다.

옷이 바뀌었네. 리안의 옷이 바뀌었어.

황제를 만나기 전후, 리안의 옷이 달랐다. 헤일라의 깨달음과 동시에 리듀카의 문이 열렸다. 매끄럽게 열린 문은 순백색이었다.

이후에 펼쳐진 광경. 두꺼운 빛기둥과, 그걸 제외하고는 온통 검은 공간, 아, 그리고…….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비명을 시작으로 모두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오, 신이시여.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헤일라의 시선이 천천히 굴러 다른 사람들처럼 중앙에 닿았다.

리듀카의 정 중앙, 누군가가 검에 꿰뚫린 채로 누워 있었다.

심장과 왼눈에 자상이 남아 있는,

황금빛 머리칼의 여자가.

* * *

“어, 어어…….”

시신의 머리칼 끝자락을 확인한 헤일라가 어깨를 들썩였다.

“어, 저거…….”

“헤일라.”

리안이 그녀를 끌어당기며 시야를 막으려 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헤일라가 그를 억세게 밀어냈다.

“리안, 저거…… 저거, 누구야?”

“진정해. 내가 알아보고,”

“모두 내보내! 젠장, 이런 미친.”

“이게 무슨…….”

“대신관이…….”

“신전에서 어찌 이런…….”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중앙으로 다가가는 미아르가 보였다. 사람들을 인도하던 신관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모두를 바깥으로 내몰려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이는 없었다. 신의 검에 심장이 꿰뚫린 여자. 엉망으로 널브러진 시체를 보고 흥분하지 않을 인사는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요? 설마 부정한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저 시신은 누구지? 대신관이 되기로 했다던 그 신관 아니요?”

“신전에 살인마가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모두가 불안에 떨었다. 신전 안에서는 호위도, 날붙이도 최소한으로만 지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적이 많은 대귀족들이 마음 놓고 있을 수 있었던 건 신전이 살생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전은 무장해제의 신성한 공간이니까.

그런데 아니게 되었다는 걸, 모두가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 버렸다.

“게다가 저 시신은 누가 봐도……!”

살인의 흔적들. 손이 찔리고 몸 여기저기 자상이 가득했다. 정확히 심장을 꿰뚫은 검을 제외하고도 온몸에 투쟁의 흔적이 가득했다. 멀쩡한 건 빼빼 마른 두 다리뿐.

마치 다리를 쓰지 못하는 여인인 걸 알고 공격한 양 상처는 상체에만 그득했다. 잔인할 정도였다.

그리고…….

“왼쪽 눈이…….”

찔린 왼쪽 눈에 모두의 시선이 꽂혔다. 그 눈동자가 리안을, 그러니까 헤일라의 남자에게로 향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안은 무서울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헤일라가 입을 벌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낯선 그가 보인다. 아아, 리안 또한 보고 있는 것이다. 시신이 된 누군가를. 그것의 비어 있는 눈을.

저 검은 눈에 비치는 건 무엇이지?

“헤일라, 우선 돌아가자.”

자신에게 향한 의심 따위는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그는 의연했다.

“아니면 의심이 사실이거나?”

누군가가 헤일라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너 지금 놀라면 안 돼, 응?”

“아기는 핑계야. 알잖아.”

“헤일라?”

“저게 어떤 얼굴인지 너는 알아.”

황금빛 동공이 확장됐다. 아, 헤일라는 그제야 리안을 감싸고 있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희열.

“헤일라, 살려 줘.”

레테가 속살댔다. 헤일라는 리안을 한 번 보고, 언니가 분명한 시신 쪽을 다시 한번 봤다. 신관들이 급히 씌워 둔 흰 천이 붉게 물들어 갔다.

“언니…….”

헤일라의 몸이 허물어졌다. 어디선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점점 멀어진다. 그게 언니의 음성이었는지, 리안의 음성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헤일라는 그대로 쓰려져 잠들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커다란 손이었다. 제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굳은살이 박인 손. 헤일라는 그것이 리안의 것임을 눈치챘다.

“다 괜찮아질 거야.”

이 상황에 이렇게 말할 이는 한 명뿐이니까.

“괜찮아. 괜찮아, 헤일라.”

뭐가? 헤일라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언니가 죽었다.

아니, 언니가 죽었나?

정말로?

혼몽함에 허우적대던 헤일라는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리안을 쳐다보지 않고 시선을 천장으로 향한 채였다.

“……언니는.”

항상 성실히 답하던 남자는 조가비처럼 입을 딱 다물고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리안.”

헤일라는 다시 묻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잠시 난감한 기색을 보이고 한숨을 쉬었다.

“범인을 찾고 있어.”

“죽은 거야?”

“…….”

“정말 죽었어?”

작은 손가락 사이사이에 리안의 손가락이 얽혀 들었다. 리안은 깍지를 낀 채로 헤일라의 손을 제 입가로 가져다 댔다. 뭉근하게 입술이 부벼지는 감각이 전해졌다.

“내가 더 잘할게.”

아. 헤일라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눈물이 한 방울 주룩, 흘러내렸다. 리안이 엄지로 눈물을 훔쳐 주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왜, 왜…….”

“그건 알 수 없어. 하지만 곧 밝혀지겠지.”

리안은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했다. 헤일라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의 낯을 마주했다. 리안은 온화함과 근심이 반반 섞인 얼굴로 애써 웃었다.

“걱정하지 마. 네 가족이야. 네 가족을 죽인 치는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아.

헤일라의 몸이 바짝 굳었다. 그의 웃옷에 달린 은색 단추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레테가 죽었고, 리안은 자리를 비웠으며, 리안의 옷은 바뀌어 있었다. 온몸이 난자되어 있던 레테의 시신이 떠올랐다.

범인의 옷은 분명 피투성이가 되었겠지? 어떤 가능성이 그녀의 머릿속을 꿰뚫었다. 끔찍한 의심이 빼곡히 들어차기 시작한다.

그는 조금 더 쉬라고 했다. 아기가 많이 놀랐을 것이라고. 문제는 자신이 모두 해결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만 계속했다. 아기에게 어머니라는 말을 각인시키듯, 또는 누군가에게 세뇌하듯 반복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헤일라를 진정시키는 데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자극하는 행위였다. 헤일라가 손을 발발 떨며 허우적댔다. 그를 떨쳐 내려 바둥대는 모양새였다. 그의 살점을 긁어내고 주먹으로 얼굴을 쳐도 리안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들어왔다. 파이라였다.

“신관 미아르가 독대를 청합니다.”

심문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리안은 헤일라를 흘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리안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는 그 속의 불신을 기민하게 읽어 냈다.

그러나 웃었다. 전혀 초조해 보이지는 않았다.

“귀가는 독대 이후에만 허한다는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래.”

무려 대신관의 죽음이었다. 쉽게 신전을 빠져나갈 수 있을 리 없다. 리안은 한시라도 빨리 헤일라를 저택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금방 다녀올게.”

리안은 파이라와 헤일라를 두고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헤일라가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리안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눈물이 떨어져 그의 등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 * *

“진짜 죽었네.”

리안은 옮겨진 레테의 시신을 무감하게 내려다봤다. 그 옆에 있던 미아르가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리안 님, 아니, 휴리트 공작. 정말 당신이 죽인 게 아니라고요?”

“아닌데.”

그는 짤막하게 대답한 후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어딘지 모르게 사냥을 끝낸 포식자 같기도 하였다.

“그 시간에 뭘 하고 있었죠?”

“폐하를 알현하고 있었지. 머리가 나쁜가?”

미아르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확실히 그랬다. 황제도 리안과 함께 있었다고 이야기했고 황제의 시종들도 그렇다고 답했다. 그녀는 늘어트린 적발을 마구 헤집으며 입술을 물어뜯었다.

“이런 망할…….”

그녀는 지금 신전 안에 있던 모두를 하나씩 불러들여 심문하고 있었다. 말이 심문이지 그냥 무얼 하고 있었는지를 묻는 정도에서 끝이었지만,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했다.

무려 살인이었다. 살인! 신전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잘된 일 같은데.”

“무슨.”

“너한테도, 나한테도.”

짧은 침묵이 둘 사이에 머물렀다. 리안이 레테의 시신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게 죽었으니 이제 새로운 신관이 나타나겠지. 너도 골칫덩이가 사라졌으니 차라리 편하다 생각하고 있지 않나?”

“그건……!”

“네가 죽인 건 아니고?”

“아니에요! 물론, 물론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리안이 미아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알잖아요. 신관끼리는 살인할 수 없다는 거.”

“그런 규율에 얽매이는 인사던가, 네가.”

“그래요. 아니죠.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살인 쇼를 벌일 만큼 위험한 발상은 안 해요. 이건 신전의 입지가 뒤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라고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사람을 죽이거나 죽이는 일에 가담하면 끔찍한 광증에 시달려 그 흔한 살수들도 행동하지 않는 공간.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신성한 공간이라 여겨졌다. 그런데 대신관의 임명식 날 대신관이 될 여자가 죽어 널브러졌다. 이는 신전의 명예에 큰 타격이었다.

“여하튼 시신의 왼눈이 칼에 찔려 있어요. 리안 님도 의심을 피해 갈 수는 없을걸요. 무엇보다 그 아가씨, 헤일라 님…….”

“의심하겠지.”

그럼 어떻게? 미아르는 리안에게 묻듯 그를 응시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겨 시신과 조금 떨어져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걸치고 있는 로브가 출렁이며 걷히고 웃옷의 은색 단추가 조명을 받아 반짝, 빛이 났다.

“상관없어. 이제 헤일라한테는 나뿐이거든.”

“당신 정말 미쳤군요.”

미아르가 진저리 쳤지만 리안은 달리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믿어 줄 거야.”

믿지 않으면 스스로 미쳐 버릴 테니까. 헤일라에게 끊임없이 결백을 속삭이면 그녀는 결국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정하게 어르면서 오랜 시간 길들이고 아이를 여럿 안겨 주면 안정될 게 분명하다. 리안은 그리 믿었다.

무엇보다 헤일라는 리안을 사랑하지 않나. 사랑은 그런 것이다.

리안은 불현듯 기분이 좋아져 미소 지었다. 그때 둘이 있는 방의 문 건너에서 소리가 들렸다.

“헤일라 님께서 오셨습니다.”

다음 심문 순서는 다른 귀족이었다. 헤일라는 리안의 심문 뒤에 바로 저택으로 귀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왜 여기에.

리안과 레테 모두 의문을 품었다. 리안이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배를 감싸 안고 서 있는 여인은 헤일라가 맞았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얬다. 그녀의 옆에는 파이라가 곤란한 낯으로 서 있었다.

“나도 심문받으러 왔어.”

“무슨 소리야?”

“누가 죽였는지 조사하고 있다며.”

“넌 안 받아도 돼. 이제 나랑 집에 갈 거야.”

“네, 헤일라 님은 그때 방에 계셨던 게 완벽히 입증되어서요. 딱히…….”

“아니.”

헤일라의 단호함에 둘의 입이 닫혔다.

“그럼 확인이라도 할래.”

“헤일라.”

“리안, 나가 줘.”

그녀는 리안 쪽을 보지 않았다. 오로지 흰 천이 덮여 있는 시신에만 집중했다. 리안은 약간 충격을 받은 듯 얼었다.

“그건 안 돼. 넌 지금…….”

“리안.”

“…….”

“널 믿고 싶어.”

다시 한번 나가라는 명령이 그에게 떨어졌다. 리안은 잠시 숨죽이고 있다가 헤일라를 지나쳐 나갔다.

여자는 비척비척 걸어 미아르의 앞에 섰다. 혈색이 빠져 시체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게다가 그새 입술을 얼마나 물어 댔는지 잔뜩 부르터 있었다. 안쓰러울 만큼 엉망인 입이 천천히 열렸다.

“시신은, 제 언니가 맞나요.”

미아르는 잠시 대답을 고르다가 한숨을 쉬었다.

“맞아요.”

“확인할게요.”

“괜찮겠어요?”

미아르가 헤일라의 배를 흘긋 봤다. 그녀는 답하지 않고 시신 쪽으로 다가갔다. 아무도 헤일라를 말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러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누가 무어라 해도 헤일라는 레테가 인정한 유일한 가족이었다.

하얗고 마른 손이 천을 걷었다. 헤일라는 떨지도 않았다. 공허함만이 그녀를 메우고 있었다.

“아.”

작은 탄성이 터졌다. 헤일라는 그대로 몇 번 아아, 하고 신음하다가 죽은 자의, 그러니까 레테의 창백한 뺨에 손을 올렸다.

“언니.”

맞았다. 레테가 맞았다. 잘려진 두 손가락이 뭉툭한 것까지 꼭 맞았다.

“언니.”

결국, 이런 방식으로 언니의 죽음을 보게 된 것이다.

“언니…….”

뺨은 차가웠다. 왼눈은 칼에 찔린 자상으로 엉망이었다. 코끝은 약간 파랗게 변해 있었고 입술 또한 그랬다. 손가락에 닿은 아랫입술이 너무 딱딱해서, 헤일라는 섬찟한 마음에 손을 내렸다.

“살려 줘, 헤일라.”

이미 죽어 버렸으면서.

“살려 줘, 살려 줘…….”

환청이 심해지는데도 그녀는 레테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언니의 입은 굳게 닫혀 있으니까. 그것을 확인한 여자는 환청에 휘둘릴 이유가 없었다.

“헤일라…….”

그러나 언니의 목소리에 눈물이 흐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아,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헤일라는 언제나 언니의 마지막을 그리곤 했으나 결코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허무가 슬픔을 파고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내심 헤일라가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던 미아르는 그녀가 언니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보이자 가까이 다가섰다. 당연히 헤일라를 위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괜히 신전에서의 일 때문에 유산이라도 하면 그 책임을 신전이 져야 할지도 몰랐다. 책임은 곧 배상액이고 배상액은 돈이었다. 절대 안 될 일이다.

그녀는 뒤에 있는 시종들에게 눈짓했다. 몇몇 이들이 헤일라에게 주춤주춤 다가서 그녀를 부축해 밖으로 내돌리려 했다.

“안 가요.”

“…….”

“누가 그랬는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알기 전에는 못 가요.”

헤일라는 꽤나 똑바르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떼를 쓴다고 되실 일이 아니에요. 이건…….”

“언니 일이에요! 내 언니예요, 내 언니라고요!”

마침내 폭발한 듯, 헤일라는 격렬히 소리쳤다. 떼를 쓴다니. 자신은 떼를 쓰는 게 아니었다. 유일한 가족인 자신이 언니의 죽음에 관해 파헤치지 않으면 누가 억울함을 풀어 줄 수 있을까?

언니는 이렇게 죽었으니 내가 해야 한다. 내가.

언니는, 언니는…….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었다.

“그럼, 이것만 말해 줘요.”

그리고, 앞으로 헤일라가 함께 살아갈 사람이…….

“리안이 언니를 죽였나요?”

그녀의 언니를 죽인 사람이어서도 안 되었다. 묻는 헤일라의 얼굴이 불안에 일그러져 있었다.

* * *

미아르는 조금 복잡한 심경으로 헤일라를 내려다봤다. 헤일라는 서 있는 것도 버거운지 기우뚱대면서도 꽤 매서운 눈초리로 미아르를 노려봤다. 거짓을 고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미아르는 속으로 세어 봤다.

문 옆에 서 있는 인간 하나, 헤일라의 우측에 서 있는 인간 둘.

우선 방에 있는 신전의 시종 중 리안에게 매수된 자들은 이 정도였다. 물론 더 있을 수도 있었고. 미아르는 그들이 곧 리안의 눈과 귀일 것을 알았으므로, 헤일라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대신에, 최대한 중립적인 어떤 것들을 알려 줄 수는 있었다.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리안 님은 그 시간에 폐하를 알현하고 계셨어요. 기억하시죠?”

헤일라의 기억력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걸 모르는 미아르는 줄줄 말을 늘어놓았다.

“폐하께서도, 폐하를 모시던 시종들도 모두 리안 님과 함께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리안 님이 현장에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신전을 둘러본답시고 여기저기 들쑤셨던 귀족들이 살해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더 크겠죠.”

“폐하께서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어요.”

미아르가 눈을 크게 떴다. 오늘 하루 종일 멍해 보이던 여자는 무언가 달라진 낯빛을 하고 공격적으로 물었다.

“폐하는 리안을 아낀댔어요. 그래서 보호해 주려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언니를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말이 안 돼요. 언니는 대신관이 될 사람이랬잖아요!”

그녀는 이제 미아르까지 불신의 눈으로 쏘아봤다. 어쩌면, 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헤일라가 중얼대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정신이 온전치 않아 생각을 입 밖으로 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허.”

미아르는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웃었다.

“연인은 닮는다더니. 리안 님도 그리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전 아니랍니다.”

미아르는 억울하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전은 최소한의 사용인만을 두고 있다. 사용인들은 가업을 이어 가며 신전의 종이 되는데, 이들 또한 신관은 아니므로 일반인의 신분이었다. 그래서 이전부터 ‘원칙적으로는’ 한 신관당 두 명의 시종만을 부릴 수 있었다. 물론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레테가 이를 걸고넘어지면서 제 주변에 있던 시종들을 모두 정리하라고 일렀다. 그녀의 까탈에 지치다 못해 죽어 나갈 것 같다던 시종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렇게 레테의 옆에는 덩치가 큰 신입 시종 하나와 시녀 하나만이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오늘, 하나는 레테 님이 심부름을 시켜 나갔어요. 베르디안 님께 뭔갈 부탁드렸는데 빠트린 말이 있다면서 보냈다더군요. 이건 그분이 곧 돌아오시면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죠.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한 명의 시종. 레테의 의자를 끌어 그녀를 옮겨 주던 덩치 큰 시종은 리듀카까지 레테를 데려다주었다고 증언했다. 그러고 나서, 레테가 혼자 있겠다며 시종을 내쫓았다고 한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네요.”

이건 아직 비밀이랍니다. 미아르는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시종은, 그러니까 꽤 어리숙한 시종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아, 몸이 닳을 대로 닳은 우리 주인 신관이 또 남자를 불러들였구나. 괜히 토 달았다가 내 목만 뽑혀 나가지, 하고요. 그대로 리듀카를 나간 시종은 마구간에서 내내 짚을 날라 주는 걸 도왔답니다.”

헤일라는 약간 흐릿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어깨가 점점 처졌다.

“언니가, 남자랑…….”

믿기 힘든 사람처럼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매일 베르디안 후작님과 붙어먹으셨거든요. 다른 남자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기는 하죠.”

정말로 다른 남자가 있었다면 베르디안 님도…… 미아르는 말하다 말고 가뭇하게 감기는 헤일라의 눈을 보았다. 그녀는 피식 웃고 연약한 여자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자아, 이쯤 하죠.”

그녀는 헤일라의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헤일라가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쯤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헤일라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집착 어린 눈동자가 사방으로 왔다 갔다 했다.

“그럼, 그럼 폐하는요? 폐하랑 리안의 말은…… 믿을 수 있는 거예요?”

옷이 바뀌어 있었어요. 옷이…….헤일라는 미아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댔다. 대체 누구를 의심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여자는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믿어야죠.”

“…….”

“그게 황제 폐하의 말인데.”

헤일라의 다리가 휘청였다.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 * *

사실은 그랬다. 리안 휴리트도, 미아르와 신관들도, 최근 레테에게 반쯤 미쳐 있었던 베르디안도 레테를 죽일 이유가 충분했다.그러나 헤일라는 리안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그녀가 리안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몰랐다면, 그에게 농락당한 역사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를 믿었을 것이다. 리안은 상냥한 연인이자 제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비였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헤일라는 잘 알았다. 뼛속까지 리안 휴리트를 잘 알았다.

그로 인해 망가진 사람이 자신이었으니까. 헤일라는 이를 악물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그녀를 짓눌렀다. 목에 덩어리가 맺힌 듯 이물감이 느껴졌다.

“혼자 걸을게.”

“안 돼.”

리안은 헤일라가 방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를 안은 채로 걸었다. 반 강제로 안긴 헤일라는 다리를 바동댔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옷은 왜 갈아입었어?”

기습적인 질문이었다. 리안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제 복장을 내려다봤다.

“시녀가 와인을 엎질렀어.”

침착한 대답이었지만 헤일라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공교로운 기색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우연일까?”

레테의 목소리가 헤일라에게 물었다.

“헤일라, 날 믿어야 해.”

“믿을 사람이 없어서 저 새끼를? 농담이겠지.”

“난 폐하와 함께 있었어.”

“거짓말.”

“믿기 힘들면 폐하를 알현하러 가도 좋아.”

“전부 한통속이야.”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내가 왜 네 언니를 죽이겠어. 이제 곧 우리 아이도 태어나잖아.”

“그래, 그 애. 날 죽인 남자의 애새끼.”

리안과 레테가 내뱉는 문장이 자꾸 엇갈려 들렸다. 헤일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랫입술을 물고 귀를 꽉 막았다. 리안은 무감한 눈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걸었다. 단순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밀어내는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침묵은 두 사람이 저택에 도착해서도 계속 이어졌다. 리안은 헤일라를 침상 위에 올려 두고 옆에 앉았다.

“한숨 자. 너 쉬어야 돼.”

리안은 놀라울 정도로 헤일라의 상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정신적인 충격과 피로감이 온통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사실 레테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기억을 더듬어 보려 노력하는 게 헤일라의 최선이었다. 정신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싫어.”

“말 들어.”

“싫어!”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한 그의 모습에 헤일라가 약간 주춤했다. 그러나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

“안 자. 언니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나도 알아야 할 거 아냐! 자고 있는 사이에,”

“네가 잠든 사이에 전부 덮어 버리려는 속셈이지.”

흠칫, 헤일라가 떨었다. 리안이 천천히 팔짱을 꼈다.

“맞아.”

그가 한쪽 눈썹을 올리고 나긋이 웃었다.

“자고 일어나면 다 해결돼 있을 거야. 무도한 이는 내가 꼭 잡아 줄 거고.”

헤일라. 그가 침상에 기대앉아 있는 여자에게 바싹 붙어 속삭였다.

“착하지, 헤일라.”

철컥.

목에 쇠사슬이 감기는 기분이 들었다.

“얼른 자자.”

그의 뒤로 누군가가 보였다. 언제나 헤일라를 보필하던 하녀였다. 그녀가 향로에 무언가를 넣는 모습이 보였다.

“아…….”

코끝에 알싸하면서도 냉한 향이 스쳤다. 눈앞이 핑 돌았다. 리안이 몸을 끌어안고 도닥여 주는 게 느껴졌다.

수면 향이구나.

언니가 죽은 날. 언니를 죽인 사람이 리안이라 의심하는 나와, 그런 나에게 수면 향을 피워 주는 리안.

끔찍하다.

눈앞이 아른아른했다. 헤일라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잠들지 마!”

“헉!”

귀를 찢을 듯 맹렬한 소리였다. 발작하듯 온몸을 떠는 헤일라에 놀란 듯 리안이 어깨를 잡았다. 왜 이러냐 묻는 그의 목소리가 레테의 고함에 묻혔다.

“또 멍청하게 다 잊어버리려고!”

“내가 죽은 것도 맘 편히 잊으려는 작정이지?”

“나쁜 년.”

“아니, 아니, 난…….”

헤일라가 더듬대며 대답을 해 보았지만 레테의 환청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녀는 째지는 비명 소리를 내기도 했고 애처롭게 우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 종래에는 끊임없이 헤일라에게 주지시켰다.

“난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끔찍한 저주였다. 리안은 흥분해 벌벌 떠는 헤일라를 가라앉히기 위해 그녀를 끌어안고 내내 부드럽게 얼렀다. 내가 잘못했다느니, 화낸 거 아니라느니 하는 다정한 목소리가 헤일라에게 퍼부어졌으나 그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원인은 다른 데 있었으니까.

결국, 그날 헤일라는 잠들지 못했다. 독한 수면 향이 무색할 정도로 눈이 시뻘게질 때까지 깨어 있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리안이 준비한 수면 향도, 다른 모든 방도도 그녀를 잠의 안식으로 인도하는 데 실패했다.

바야흐로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 * *

잠들지 못하는 날이 길어지자 헤일라의 뺨은 점점 수척해지기 시작했다. 길어야 삼 일에 두어 시간을 자는 일상이 계속되자, 본래도 말라 있던 팔과 다리는 이제 뼈밖에 남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배는 불뚝 튀어나와 아기의 태동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헤일라는 의자에 멍하니 앉아 창문만 봤다. 눈 아래 거뭇한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은 채였다.

“헤일라.”

그녀는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게 리안에게 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식사해야지.”

묽게 끓인 수프와 부드러운 빵, 잘게 다진 고기 요리가 그녀의 앞에 놓였다. 하지만 고소한 냄새에도 헤일라는 반응하지 않았다. 구역질을 토해 내지도 않았지만 눈길을 주지도 않은 채였다.

리안이 작게 한숨을 쉬고 의자를 그녀의 옆으로 끌어 앉았다. 작은 스푼을 들어 수프를 떠 주니 그제서야 헤일라가 눈길을 보냈다.

“아, 해 봐.”

그는 말만 그렇게 하고 헤일라의 턱을 열어 직접 입안으로 넣어 주었다. 최근 들어서는 계속 이런 식으로 식사를 해야 했다.

음식이 그대로 주룩 새었다. 그럼에도 리안은 참을성 있게 그녀의 입 주변을 닦아 주고 다시 음식을 넣어 주었다.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식사는 끝이 났다.

“네가 죽였대.”

리안은 익숙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헤일라는 믿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언니가 자꾸 그래. 네가 죽였다고…….”

“아니야.”

“거짓말이래. 다 거짓말이래. 자꾸 나한테 화내. 언니가 화내…….”

“이제 우리뿐이잖아. 나 믿어야 돼.”

“안 죽이겠다고 했잖아. 나 말 잘 들었잖아. 왜 그랬어?”

둘은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처럼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리안은 이제 익숙해진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헤일라는 멀쩡히 듣다가도 돌연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히끅 댔다.

사용인들은 헤일라가 완전히 미쳐 버렸다고 했고, 신전에서 나온 신관은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환청을 듣는 것이라 했다. 리안은 그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의 헤일라는 미쳐도 아름다웠다.

“쉬이, 진정해.”

하지만 이대로는 조금 곤란했다. 사람은 아름다움만으로 생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식사도 해야 했고 잠도 자야 한다.

이전에는 무언가를 잊기도 잘 잊었는데 레테가 죽었다는 사실은 쉬이 지워 버리지도 못하는 듯했다. 아쉬운 일이다. 차라리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면 편할 것 같은데.

그는 위험한 생각을 하며 헤일라를 도닥였다. 백치가 된 여자를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며 보듬어 주는 것도 굉장히 뿌듯하고 즐거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리안은 아쉬움과 헤일라에 대한 걱정을 담아 한숨을 쉬었다.

“언니…….”

헤일라가 코를 훌쩍댔다. 리안이 부드러운 천으로 코를 닦아 주었다.

“이제 자자.”

그리고는 헤일라를 안아 들고 침상에 뉘어 주었다. 빛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예민해져 아예 눈도 감지 못하는 요즘의 그녀를 위해, 리안은 침상의 캐노피 천을 모두 닫아 빛을 차단했다. 시종들이 천과 천을 만나게 하는 걸 지켜보던 헤일라가 모두 쳐진 커튼을 보고 갑자기 중얼댔다.

“저기…… 누구 있어?”

“뭐가?”

“저어기, 저기 뒤에, 날 지켜보고 있어.”

리안이 일어나 꽁꽁 닫아 둔 천을 들쳤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히익!”

이번에는 헤일라가 다른 반대편을 보고 기겁했다.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달달 떨었다. 남자가 침대 밖으로 나가 시종들에게 캐노피 천을 다 걷어 내라고 명령했다.

“이거 봐, 헤일라. 아무도 없잖아.”

그가 안심하라는 어투로 그녀를 얼렀다. 헤일라는 이불 속에 있던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러나 리안의 말은 틀렸다. 더욱 선명해진 형체가 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아, 아아…….”

형체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푸석한 금발, 허연 피부, 그리고 비어 있는 한쪽 눈과 두 손가락…….

욱신.

“헤일라, 왜 그래.”

리안이 의사를 불렀다. 다급함이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헤일라는 욱신대는 배를 붙잡고 신음하면서도 형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흐, 아아…….”

언니.

레테의 환영이 그녀에게 들러붙었다.

다리 사이로 무언가 흘러내렸다.

* * *

아이가 사라졌다. 홀쭉해진 배를 끌어안고 묻자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리안은 그 말을 하고 난 뒤 단 한 순간도 헤일라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아마 유산된 사실을 말하는 게 지금이 처음은 아니리라. 충격을 받고 잠에 빠져든 뒤 자신이 잊어 다시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러 번 들었다 해서 충격이 반감되는 건 아니었다.

아홉 달 품은 아이가 죽었다. 언젠가는 발로 어미의 배를 밀어내는 게 느껴질 정도로 커 버린 아이였는데. 사라졌다. 죽어 버렸다.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안아 주지도 못하고 보내 버렸다.

“아이는 또 생길 거야.”

그는 정말로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새로 생기는 아이와 사라진 아이는 같지 않다는 걸 모르는 멍청이처럼 말했다. 그게 끔찍하게 싫었지만, 헤일라는 가만히 있었다. 따질 기력도 없거니와 무어라 말해야 할지도 막막했다.머릿속이 점점 비어 간다. 졸음이 쏟아졌다.

“잘래…….”

몇 시간 전에 잠들었다 깨어났지만, 헤일라는 다시 꿈속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이제 잠을 자는 건 힘들지 않았다.

아이가 없어진 뒤로 언니의 목소리가 멈췄기 때문이다. 언니의 환영은 그냥 헤일라가 자주 앉는 창문 앞 의자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거나 책을 읽었다. 본래 레테가 침대에 앉아 자주 하던 일이었다. 그런 일상적인 모습이 더 지독하게 느껴졌다.

리안이 헤일라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목덜미를 주무르자, 헤일라가 움칠 떨며 뒤척였다.

“뭐, 하고 싶은 일은 없어? 먹고 싶은 거나.”

뭐든 원하는 게 없느냐고 물었다. 무용한 질문이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차올랐다.

“보고 싶어.”

리안에게서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언니 보고 싶어…….”

저런 가짜 말고. 불러도 대답해 주지 않는 환상 말고.

“아기도…… 보고 싶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얼굴로 웃는지 알고 싶었다. 언니 이외의 유일한 혈육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아이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헤일라도 이뤄질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리안이라도, 휴리트 공작이라도 이루어 줄 수 없는 게 있는 거다.

“그런데 볼 수가 없어서…….”

평생을 함께해 그리운 사람과 단 한 순간도 온전히 감각해 본 적 없어 그리워할 수도 없는 아기가 사무쳤다. 눈물이 옆얼굴로 흘렀다. 리안은 조용히 눈물을 닦아 주기만 했다.

“나로는.”

“…….”

“나로는 안 돼?”

약간은 화가 난 듯도, 섭섭한 듯도 한 질문이다. 헤일라는 약간 웃었다. 답이 없는 헤일라에게 리안이 조급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난 너만 있으면 돼. 그냥 하는 말 아니야.”

리안은 약간 필사적이었다. 진심을 전하려 애쓰고 있었다. 헤일라는 그를 보며 이전의 자신과 언니를 떠올렸다. 내 진심을 언니가 믿어 주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자신과 그걸 지켜보던 언니.

어쩌면 언니도 이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일라는 비참함을 느끼며 몸을 말았다.

“난 너만으로는 안 돼.”

언니도, 아기도, 가족도 필요했다. 소중한 걸 아주 많이 만들고 평온함에 둘러싸여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많이 잃어서 꿈꾸는 것도 뻔뻔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너랑 있으면, 너만 남아.”

맹목적인 사랑과 갈구가 버겁다. 종래에 그것이 날 망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살아가며 자연스레 만들어질 소중한 것들이 리안 때문에 망가질 일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리안, 나…….”

그가 불안을 직감하고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헤일라는 눈을 꽉 감고 말을 이었다.

“나, 원하는 게 있어.”

“헤일라.”

“아무도 안 만날게. 넌 그걸 못 견디니까. 아무도 없는 데서 살게. 혼자 조용히 있을게. 그러니까…….”

“그만.”

“이제 나 놔줘.”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리안 없이, 아무도 없이.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고 괴롭지 않은 삶을 살고 싶어졌다.

헤일라는 너무 지쳤다. 천천히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려 했다. 그런데 그때 언니의 환영이 고개를 돌렸다.

“도망쳐.”

턱. 리안이 헤일라의 몸을 잡아채 돌렸다.

“또 시작이네.”

광기가 들러붙어 번들대는 검은 눈이 그녀를 느리게 훑었다.

“헤일라, 그거 알아?”

그가 음산하게 중얼댔다.

“애가 떨어진 지는 벌써 두 달이 지났어.”

두 달? 헤일라가 속으로 기겁했다.

두 달이나. 그럼 두 달 동안 자신은 내내 잊고, 깨닫고, 슬퍼하다가, 잊었다는 게 된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완벽히 미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길게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잊어 본 적은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기억하기에는.

“흣, 윽…….”

충격에 빠져 넋이 빠진 헤일라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리안이 움직였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이 헤일라의 샅을 벌렸다. 도독한 살점이 거친 손에 뭉개졌다.

“의원은 네가 애를 밸 수 있는 몸이 됐다고 말했고.”

“아……!”

“그런데 너는 또 나를 떠나려고 해.”

내가 뭘 해야 할까…… 리안이 말을 늘였다. 헤일라가 발작하듯 허리를 튕겼다. 음핵이 꼬집힌 탓이다. 리안은 헤일라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행위를 이었다.그러다 쑤욱, 중지가 여성의 안으로 진입했다. 손가락은 굴곡진 안쪽을 더듬다가 오른쪽 아래를 비벼 눌렀다. 히익, 하는 소리가 들리자 손을 떼고 입가로 들고 가 투명한 액을 혀로 맛보았다.

보란 듯이 그녀와 눈을 맞추고.

짝! 남자의 얼굴이 돌아갔다. 헤일라가 가쁜 숨을 쉬며 옷을 추슬렀다. 하지만 미약한 시도는 리안의 손길 한 번에 끝이 났다. 얇은 이불과 옷이 침대 아래로 떨어진다.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발길질도 해 보고 손으로 뿌리쳐 보기도 했지만 남자는 단단하고 강했다.

무력하다.

“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우는 여자에게 물었다.

“싫다고, 싫다고 했잖아! 그만하자고 했잖아. 놔 달라고! 이제 너랑 이런 짓 안 할 거야.”

아기도 너도 다 필요 없다고……. 헤일라가 스스로를 감싸 안았다.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였다. 그 모습이 얼핏 몸을 옹송그린 초식동물 같았다.

“……그래?”

순간 리안이 약간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동요한 헤일라는 입을 빠끔댔지만 그를 말리지는 못했다. 갑자기 변해 버린 리안의 눈빛이, 느릿한 손길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얼굴의 근육들이 그를 평소와 달리 보이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 같아. 헤일라는 잔뜩 겁먹었다.

리안이 갑자기 두 손을 그녀의 뺨에 올렸다. 오른 엄지가 왼 눈꺼풀을 꾹 누른다. 안구를 싼 뼈를 충분히 즐기듯 쓸고 그 아래, 볼록하고 연약한 알맹이를 눌렀다.

“분명히 힘을 조금만 줘도 부드럽게 뽑힐 텐데.”

황금색 구슬이.

구슬.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헤일라는 이전에 파이라에게 들었던 저주에 관해 들었다.

사람의 왼눈을 뽑아 간다는 리안의 저주. 헤일라는 단 한 번도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공포에 압도되었다. 죽음 이전에, 눈이 뽑히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녀를 달달 떨게 만들었다.

“아흣.”

신음과 함께 그의 망상이 멈추었다. 리안이 흠칫 떨며 손을 뗐다. 헤일라가 떨고 있는 걸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왼눈을 손으로 가리고 남자에게서 멀어지려 필사적으로 허우적댔다. 그가 헤일라를 진정시키려 손을 뻗었을 때는 끔찍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제물처럼 비참한 얼굴을 하기도 했다.

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그는 천천히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갔다. 방을 가로질러 협탁의 서랍으로 향했다. 무언가를 꺼낸 남자는 서랍도 닫지 않은 채로 헤일라에게 다가왔다. 비척대는 모습이 바람에 뿌리 뽑히기 직전의 나무 같았다.

“헤일라.”

그가 쥐고 있는 건 칼이었다. 헤일라는 리안이 자신을 찔러 죽이려는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떨었다. 아니면 왼눈을 찔러 도려내거나.

“내가 그렇게 싫어?”

“리, 리안.”

“놔 달라고?”

“흑, 왜 이래!”

리안이 헤일라의 손아귀에 억지로 칼을 쥐여 주었다. 의외의 행동에 놀란 것도 잠시, 헤일라는 그의 의중을 깨닫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던 헤일라는 뼈가 으스러질 듯 제 손을 쥐어 오는 악력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엉엉 울기만 했다.

“난 못해. 놓는 일 같은 건 없어.”

헤일라가 숨을 삼켰다. 물기에 젖은 헐떡임이 반복됐다.

“그런데 너한테 죽어 주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그건 괜찮아.

리안이 칼을 쥔 헤일라의 손을 잡은 채로 칼날을 제게 들이밀었다. 점점 남자의 가슴 쪽으로 향하는 칼끝에 헤일라가 억억대며 경기를 일으킨다.

하지만 칼이 멈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안 돼!”

“네가 나를 버리면 난 죽어. 예전부터 알려 줬잖아.”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 그러나 리안의 가슴팍에서는 이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칼끝이 살을 파고드는 게 손잡이를 통해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러지 마, 이러지 마…….”

“왜?”

리안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버리는 것도 가지는 것도 너야.”

선택. 헤일라는 작게 읊조렸다. 리안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이 베여 아릴 텐데도 여상했다.

“어떻게 할 거야?”

다정한 겁박이었다. 리안이 칼을 놓으려 안간힘을 쓰는 여자를 내려다보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손에 강제로 쥐여 주었던 칼을 빼내 침대 밖으로 던졌다.

챙!

날붙이가 바닥과 마찰해 요란한 소리를 냈다. 헤일라가 헉헉대며 두 손을 들어 확인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앞으로는.”

“…….”

“날 못 죽이겠으면 버린다는 말도 하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못을 박는 말은 한없이 가벼웠다. 그러나 리안 또한 화를 꽉 누르고 있는 게 여실해 보였다. 그가 쥔 주먹 위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리안이 화를 삭이려 일어나 방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고리를 잡고 돌리지 못한 채 몇 초를 망설였다. 결국, 그는 빠르게 뒤돌아 뛰듯이 헤일라에게 달려들었다. 몸을 옹송그리고 있는 여자의 팔뚝을 잡고 돌려 눕혀 입을 맞추었다.

얼굴이 쥐어진 채 강제로 입이 열린 헤일라는 그의 화를 오롯이 받아 냈다. 그녀의 가슴팍에 리안의 가슴에서 흐른 피가 흩뿌려졌다.

* * *

벗은 몸으로 그에게 안겨 있던 헤일라는 리안의 호흡이 고르게 변한 것을 느끼고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의 등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는 남자는 어미가 없으면 한 시도 잠들지 못하는 아기처럼 굴었다.

화가 나서 몸을 섞을 때는 죽일 듯 맹렬하게 몰아붙여 놓고서는 이렇게 투정 부리듯 바투 붙어오는 꼴이란. 헤일라는 음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목덜미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가슴이 아렸다. 동시에 갑갑했다.

품에서 벗어나려 약간 힘을 주었다. 그러자 아래에서 점성 있는 액체가 쏟아져 샌다. 남자가 사출한 정액이었다. 헤일라는 리안에게 떠나겠다고 한 직후부터 하루 반나절 내내 그에게 아래를 내주었다. 그는 어딘가 초조해 보였고 자제력을 잃은 듯도 보였다. 어찌 되었든 정상은 아니었다.리안은 ‘애가 들어섰다고 생각될 만큼 배가 부르면 좆질을 멈추겠다’고 했고, 정말로 정액이 배를 꽉 채웠다 싶을 만큼 아릴 때가 되어서야 배를 쓰다듬으며 배꼽에 입을 맞췄다.

밤의 일을 생각하자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이 차올랐다. 다시 생길지도 모를 아기에게 미안했다. 그 아기가 소중해져서 평생 잃을까 봐 전전긍긍할 자신이 그려졌다.

어쩌면 리안은 아기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 아니, 필시 아기는 나 때문에 다치게 될 것이다. 불행해질 것이다. 언니처럼, 나와 닿았던 모든 사람들처럼, 이전에 배 속에 있었던 아기처럼…….

바보처럼 또 눈물이 새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힐난이 들려왔다.

“울지 마.”

언니였다. 헤일라는 모로 누운 채로 앞을 응시하다가, 환영이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을 굴려 바라보니 언니가 맞다. 틀림없는 레테의 환영이었다.

“운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환영은 퍽 언니처럼 굴었다. 살아생전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인데도 꽤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구부러지지 않는 강인함이 언니와 똑 닮았다. 언니의 환영이니 당연한가. 헤일라는 저도 모르게 언니에게 하듯 물어 버렸다.

그럼 어떻게 해?

죽어 버린대.

죽일 자신이 없으면 벗어날 생각도 하지 말래.

리안을 죽일 수는, 더 이상 누가 죽는 건…….

그녀는 리안이 깰까 봐 속으로 웅얼댔다. 환영은 그런 조심스런 태도까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쉬어 흉곽을 부풀렸다.

“멍청하긴.”

조롱조였지만 헤일라는 동그란 눈으로 언니의 말을 경청했다. 그녀는 말을 아주 잘 듣는 동생이었다.

여전히.

“꼭 저 새끼를 죽일 필요가 뭐 있어?”

레테의 왼손이 천천히 헤일라에게 다가왔다. 두 손가락이 잘려 나간 손이었다.

“생각을 좀 바꿔 봐.”

* * *

언니의 환영은 그 뒤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이틀이, 사흘이, 나흘이 지났는데도 가끔 웃으며 헤일라와 눈을 맞출 뿐이었다. 그 사이 리안에게 안기는 것은 헤일라에게 일상이 되었다.

지금도 헤일라는 리안의 다리 위에 앉아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아!”

“헤일라, 읏…….”

절정에 달해 달달 떠는 게 목덜미를 물어뜯겨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소동물 같았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리안은 감탄하며 뒤통수를 끌어안았다.

얕게 쳐올리는 허릿짓에 따라 섬세하게 짜인 등 근육이 움직였다. 헤일라는 견디기 힘든 고양감에 리안의 등에 손을 감았다. 긁어내리는 손톱에 얇은 살점이 끼었다. 그것마저 기분 좋은 자극인지 리안이 탄성을 터트렸다.

헤일라가 제 행동에 지레 놀란 듯 손을 떼어 꼭 쥐었다. 리안이 주먹 쥔 손을 등으로 감각하고 한숨 쉬듯 웃는다.

“더 해.”

“흣, 아앙, 잘못했…….”

“아냐, 응? 더 해도 돼.”

그녀가 남긴 자국이라면 뭐든 좋아서 하는 말인데, 헤일라는 빨라지는 삽입 속도에 겁을 먹었는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묻어 버린다.철벅대는 소리가 더욱 크게 둘을 자극했다. 리안은 헤일라의 양쪽 둔부를 꽉 쥐고 벌렸다. 힉힉대는 신음이 아름다운 음률처럼 그의 귓가에 닿을 때마다 검붉은 성기가 발간 내벽을 짓뭉갰다.리안은 한참이 지나서야 헤일라의 안쪽에 사정하고 헤일라를 눕혔다. 성기는 여전히 안쪽에 넣어 둔 채였다.

“빼, 빼.”

“이렇게 막아 둬야 아기가 잘 들어서지.”

그녀는 싫단 말을 하지 않았다. 무기력한 상태가 된 지는 날이 꽤 지났다. 시선이 리안의 가슴에 닿았다. 더 이상은 피가 비치지 않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며칠 전, 헤일라가 거부의 의사를 표시했을 때 그가 자신의 손으로 칼을 찔러 넣은 자리였다. 헤일라는 그것을 떠올리고는 눈을 감았다. 아래에 꼽힌 남자의 성기가 약간씩 팽창하는 게 느껴졌다.

“싫으면 마개를 구할까?”

리안은 옴찔거리는 아래의 감각을 즐기며 물었다. 필시 기겁할 헤일라를 알고 농을 치는 것이리라. 알면서도 헤일라는 그의 뜻대로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젓는 게 그의 눈에는 한없이 어여뻤다.

“안 해.”

“…….”

“네가 싫으면 안 하지.”

“아닐 텐데.”

순간 헤일라가 눈을 팍 떴다. 리안은 그녀의 몸에서 내려와 아래를 닦아 주느라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언니? 언니야?

헤일라는 속으로 멍청하게 불렀다.

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리 애원해도 들리지 않던 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약간 흥분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언니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 같은데 나타나지 않아서 얼마나 초조했는지.헤일라는 눈을 꼭 감고 레테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나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헤일라는 백치처럼 같은 물음만 계속 띄웠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조급 조급해져 언니의 이름만 계속 불렀다. 돌아오라고. 나 좀 구해 달라고 빌었다.

“바보 같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멍청이.”

응. 맞아. 나는 언니가 없으면 안 되는데 내가 바보 같았어. 언니, 언니…….

죽어 없어진 언니를 그리는 헤일라가 비참함에 잠겼다.

“찔러.”

그러나 언니가 한 말에 무조건 수긍할 수는 없었다. 리안을 죽일 수는 없었다.

안 돼, 못해. 누가 죽는 건 싫어. 나 때문에, 자꾸, 나 때문에…….

갑자기 헤일라의 귀에 미친 듯이 웃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광음에 헤일라가 귀를 틀어막았다. 리안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헤일라에게 바짝 달라붙었지만 이미 이상행동이 시작된 뒤였다.

“멍청한 년!”

“언, 언니…….”

“헤일라, 왜 그래, 응?”

“아…….”

리안의 목소리를 뚫고 레테가 끝없이 속살댔다. 끔찍한 잔상이 곁에 계속 머물러 괴롭다.

“누가 리안을 죽이래?”

“그럼? 그럼…….”

“너.”

“헤일라!”

“너만 죽으면 돼.”

네 손으로. 레테의 환청이 쨍, 하는 마찰음과 함께 멈췄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차에 하녀 하나가 자기 그릇을 깬 소리였다.

“리안.”

그녀가 식은땀에 절은 얼굴로 리안을 돌아보았다. 리안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헤일라를 감싸 안았다.

나중이 되어서야 헤일라는 자신이 세 시간 동안 발작 증상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주 찰나의 시간 언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생각했는데 모두 착각이었던 것이다. 헤일라는 손톱을 이로 물어뜯었다.

그러나 자신이 미친 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날 이후 헤일라는 레테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발작하며 언니의 이름만 내내 불러 대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리안은 안심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뒤, 헤일라가 제 손목을 그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아주 깊숙하게.

* * *

뚝, 뚝.

한 방울씩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습하고 꿉꿉한 지하의 냄새, 그리고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는 돌벽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빛줄기가 몇 가닥 들어오기는 했지만 어두침침한 분위기는 어디 가지 않았다.

“레테.”

베르디안이 무너진 기둥에 걸터앉아 레테의 이름을 불렀다. 공허한 혼잣말이 시작되었다.

“레테…….”

그가 손에 쥔 물병을 으스러트릴 듯 꽉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야, 자포자기한 듯 물이 고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남색 빛이 도는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히윽, 윽, 우욱.”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졌다. 베르디안의 우측에 손발이 묶인 채 널브러져 있는 신전의 시녀였다. ‘그날’ 레테의 심부름으로 베르디안에게 갔던 여자.

“다시.”

베르디안이 냉랭하게 명령했다.

“레, 테 님, 께서, 흑, 베르디, 안 님께 전해야 할 말이 있다, 고 하셔서.”

“…….”

“가 보라고, 서둘러 가라고, 하, 하셨…… 습니다, 아, 그, 부탁한 건,”

베르디안이 시녀의 말을 끊고 무어라 중얼댔다. 그 말을 들은 시녀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네, 네, 네!”

베르디안은 서른여덟 번째 같은 대답을 들으면서도 처음 들은 사실을 확인하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정말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네, 레테 님께서, 어, 그 말을 전하라고만, 흑,”

그렇게 돌아가실 거라고는 생각도…… 시녀가 바들바들 떨었다. 맞아 불어 터진 뺨이 끔찍하게 아팠다.

“그럴 리가 없는데.”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정말로 그렇게 전하라고!”

“그럼 나한테 거짓말한 거라고?”

레테가? 베르디안이 벌떡 일어나 시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한 손으로 볼을 쥐어 올리니 하녀가 자지러졌다.

“그 애는 살기로 했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대는 베르디안의 얼굴은 광기에 절어 있었다.

“동생한테만 죽은 사람이 되고, 나랑, 영원히.”

“…….”

“살기로 했다고.”

분명히 그랬다. 약을 먹고 죽은 사람이 된 뒤 베르디안과 함께 바다 건너 다른 대륙으로 떠나겠다 했다. 여행을 하자고. 동생을 얽지 않고, 저도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 보겠다고.

그런데 죽어 버렸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베르디안이 믿을 수 없다고 중얼대다가 시녀의 목을 잡아챘다. 목을 죄는 손의 악력이 점점 세졌다.

“큭, 제발, 살, 살려…….”

시녀는 살려 달라 애원하며 베르디안의 손을 꼭 쥐었다. 살려 달라, 는 말을 들은 베르디안이 천천히 손을 뗐다.

“살려 달라고.”

“흐윽, 컥, 허억.”

“그럼 레테를 지켰어야지.”

“허윽, 윽.”

“살렸어야지!”

“레, 흐윽, 레테 님께서 베르디안 님께…….”

가라고 했다. 가서 전하라고,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고 했다.

“꼭 말을 전해야 한다고, 큭.”

시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레테 님께서, 명령으로, 라고 애원했다. 숨이 끊기기 직전, 베르디안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헉, 허억…….”

시녀는 내내 괴로운 숨을 토해 냈다. 죽음의 문턱에 닿은 충격이 꽤나 컸음이다.

“그딴 게 마지막 부탁이라고…….”

베르디안이 허탈함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시녀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직후부터 애벌레처럼 기어 출구 쪽으로 향했다.

푹.

그때 그녀의 목덜미에 칼이 박혔다.

“레테.”

베르디안의 공허한 호명이 피비린내와 함께 흩어졌다.

“레테…….”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철퍽, 내디뎠다. 발걸음은 레테의 마지막 염원 쪽을 향하고 있었다.

* * *

헤일라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잠시 멍한 기분을 가다듬었다. 커다란 창에서 쏟아지는 햇빛, 더없이 평화로운 오후, 몸에 닿는 보드라운 침구의 촉감과 깨끗한 향기…….모든 것이 그녀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베개에 누운 채로 조금 고개를 돌리니 언제나처럼 나른하게 눈매를 접은 남자가 그녀를 향해 웃었다.

아, 눈이 마주쳤네.

헤일라, 하고 부르는 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로 퍼지듯 빙빙 돌았다.

그는 기쁜 듯 침상 옆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동시에 쓰러지기 전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잠시 업무 지시를 하러 나간 리안. 리안이 나간 새 목욕 시중을 들던 하녀들. 그런 하녀 하나를 밀쳐 항아리가 깨지게 하고, 그 조각으로, 손, 손목을…….

그때 언니가 웃었는데. 진짜 예쁘게.

……전부 꿈이었나?

괜스레 작게 중얼거려 봤다. 이렇게 평온한데, 그런 기억들이 현실일 리가 없을 것 같았다. 헤일라는 이제껏 겪은 모든 일이 꿈일지도 모른다고 저 좋을 대로 결론지었다.

“하읏…….”

하지만 손을 움직이려 힘을 주었을 때, 무수한 칼질이 만들어 낸 자상이 다시 한번 근육을 끊어 놓듯 고통을 흩뿌렸다.

헤일라는 왼손을 후벼 파는 고통에 할딱거리며 눈을 꽉 감았다가 떠 보았지만, 감각은 허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내려 고통의 진원지를 살폈다. 두텁게 얹어진 치료용 천 위로 스며들어 있는 핏물이 선연했다.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야.”

차분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헤일라의 귓가에 윙윙댔다. 숨소리가 발작적으로 가빠졌다.

“아파?”

리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상한 태도였다. 사랑하는 연인의 손톱 아래에 잔가시가 박힌 것을 걱정하는 다정한 남자의 낯이었다.

그게 소름 끼치도록 이질적이라 눈 아래가 바르르 떨렸다. 무구했던 눈동자에 고통과 경멸이 날뛰기 시작했다. 현실을 자각하자마자 모든 기억이 징그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그려진 탓이다.당장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바즈락거리다가 오른손이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보드라운 가죽 수갑은 침대 헤드와 연결되어 있었다. 끈은 진한 노란색이었다.

‘난 샛노란 색이 가장 좋아.’

언젠가 그에게 했던 말이다. 볼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충격 탓에 저도 모르게 움찔댄 왼쪽 손목에서 다시 고통이 올라왔다. 울컥 찌푸린 얼굴에 큰 손이 닿았다. 리안은 미간에 잡힌 주름을 살살 펴면서 어르는 투로 말했다.

“약 잘 먹고, 밥 잘 먹고, 내 말 잘 들으면 금세 나아.”

“저건 거짓말이야.”

언니의 환영이 속살거렸다. 그건 헤일라도 알았다. 자상으로 절여진 손목이 저도 모르게 달달 떨렸다. 영영 왼쪽 손목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환초…… 환초라도…….”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주룩 흘러 턱 끝에 매달릴 즈음에는 리안에게 부탁한다는 수치심도 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살점이 조금씩 떼이는 감각들이 끔찍했다. 차라리 수면으로 다시 안식을 찾았으면.헤일라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리안의 옷깃을 꼭 쥐어 봤다. 절박함이 담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자약한 얼굴이었다. 절절매는 여자를 의아한 눈으로 보던 남자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파?”

“아…… 리안……. 손, 이, 너무…… 흐, 아프…….”

“아픈 걸 원하는 게 아니었어?”

매끄럽게 웃는 낯은 아름다웠다. 아, 저건 누군가를 아래로 처박을 때 짓는 표정이다. 헤일라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렸다. 자신을 기만하는 남자의 뺨을 치고 싶으면서도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사정하고 싶다. 징그러운 이중성에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 쪽으로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리안은 고통을 경감시킬 그 무엇도 그녀에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벌. 벌이다. 헤일라는 어렴풋이 깨닫고는 아랫입술을 빼물었다. 분노와 원망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미안. 환초는 안 돼.”

“흐, 으으…….”

“그렇게 보지 마.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야.”

내가 어떻게 그래? 남자는 울음에 섞인 감정을 읽어 내고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천천히 눕힌 뒤 오목한 아랫배에 큰 손을 얹어 천천히 쓸어내렸다. 언제나처럼 애정이 담뿍 담긴 손길로.

“애가 또 들어섰대.”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얼굴의 근육이 단단하게 굳어 어떤 모양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헤일라는 멀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안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의 너머로 흐릿한 잔상이 비쳤다. 레테였다.

“임신이 잘 되는 몸이라 다행이지.”

이제 네가 죽으면 이 아기도 죽는 거야…….

안도가 젖어 든 목소리. 뿌듯함이 배어 있는 단단한 눈매. 저건 연기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헤일라가 죽으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혼곤한 정신을 다듬기도 전에 리안이 츠읍, 하고 헤일라의 목덜미를 빨아 들였다. 명백히 성적인 의도를 담은 접촉이다. 진저리가 쳐졌다.

“싫어…… 싫…….”

끔찍하다. 누운 채로 고개를 젓자 베개 바스락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의 뒤에 있던 망령이 이제는 침대 옆으로 바싹 다가와 소곤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워. 이러지 마. 둘 다 떨어져.

와중에도 남자는 부지런히 헤일라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두 사람의 말이 섞여 귀 안쪽부터 머릿속이 온통 혼탁했다.

“언니, 레테…….”

저도 모르게 입에서 언니의 이름을 뱉어 내자 리안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래. 레테.”

리안은 그녀의 판판한 배를 다시 뭉근히 눌렀다. 무언가를 곰곰이 그리는 얼굴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그걸로 할까?”

헤일라의 도톰한 입술이 갈라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들은 말이 그저 질 나쁜 농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보통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반절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는 이것이 헤일라의 환심을 사는 방법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죽였으면서. 제 손으로 내 언니를 죽였으면서!

헤일라가 거세게 반발했다. 사지를 뒤틀며 악을 썼다. 리안의 뺨을 치고, 팔을 꼬집고 가슴을 할퀴었다. 그러나 돌 같은 몸을 가진 남자에게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번에는 애가 떨어지지 않게 내가 더 신경 쓸게.”

“하지 마! 놔!”

“쉬이, 헤일라, 상처가 벌어질지도 몰라.”

그는 차분하게 팔뚝을 누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땀 때문에 눌어붙은 잔머리와 분노로 달아오른 붉은 얼굴이 조화되어 아름답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따위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리안은 헤일라에게 바투 붙어 하의를 벗기 시작했다. 철컥대는 벨트 소리에 헤일라가 기겁했다.

“죽어, 죽어 버릴 거야. 죽어 버릴 거야!”

순간 리안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하.”

그리고는 가볍게 웃는 게 아닌가. 헤일라는 발갛게 달아오른 코를 훌쩍댔다.

“그럼 끝일 줄 알고 이러는 거야? 귀엽긴.”

“…….”

“네가 죽으면 내가 어쩌지 못할 것 같아? 그래, 확실히 그렇지. 그런데 뒤를 생각해 봤어? 난 우리 애를 데리고 죽어 버릴 거야.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하니까.”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이다. 레테와 자신을 두고, 가족이니 영영 함께해야 한다고 했던 것을 감히, 이 남자가 따라서 하고 있는 것이다.

헤일라가 발작하듯 고개를 저었다. 아아악, 소리 지르는 목소리마저 황홀하다는 듯 리안이 눈을 휘었다.

“넌 우릴 사랑하니까 절대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없는 거야…….”

그녀는 엉엉 울었다. 리안은 그저 바라만 보다가, 급작스럽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말라붙은 입술을 가르고 축축한 살덩이가 침범했다. 익숙하게 입안을 빨고 쓰다듬다가 아랫입술을 물고 자근거렸다. 피가 배어 나오자 제 버릇을 개 주지 못한 리안이 게걸스럽게 그걸 빨아 먹었다. 비린 향이 미미하게 끼쳤다.

그것으로 행위가 시작되었다. 남자의 성기가 질구를 넘는 게 느껴질 때 즈음, 헤일라는 완전히 널브러져 헉헉대고만 있었다. 삶의 의지를 놓지도, 잡아채지도 못하는 여자는 부유하는 죽은 생선 덩어리처럼 섬찟했다.

“헤일라.”

그때, 망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자 언니가 침대에 손을 올린 채 재미있다는 얼굴로 생긋거리고 있었다.

레테, 내 언니. 입을 달싹여 속엣말로 혈육의 이름을 불렀더니 레테는 더 천진한 얼굴이 되었다. 헤일라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제 위에서 헉헉대는 남자를 봤다. 흐릿한 잔상 속 그는 여전히 정사에 심취해 있었다.

“죽는 거에도 실패해 버렸네. 이제 안 되겠다.”

“찔러. 그 방법뿐이야.”

언니의 음성은 여전했다. 레테는 쿡쿡대며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와 리안과 헤일라 사이에 벌어져 있는 틈으로 손을 뻗었다. 희끄무레한 손은 존재감 없이, 그러나 정확히 움직였다.

헤일라의 가슴, 심장을 감싼 표피 위를 가리킨 손이 새하얗다.

“신전으로 가서, 검으로, 여기를 찔러.”

사랑을 버리라 속삭이는 여인은 마치 신처럼 고고해 보였다.

* * *

“아, 리안, 하읏, 그만……!”

문밖까지 여자의 고양된 신음이 흘러나왔다. 복도를 지키던 시종은 안절부절못하면서 서로 눈치를 살폈다.

“손목을 그었다더니.”

몸을 온통 태양 빛 황금으로 휘감은 황제, 페이네리아가 팔짱을 꼈다. 머리를 높게 올려 묶어 약간 까무잡잡한 목덜미를 드러낸 그녀는 오만하게 고개를 들고 문 앞을 지킨 시종에게 물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응?”

계집이 손목을 그었다고 들었다. 간신히 목숨 줄만 근근이 붙여 두었다고. 내심 콱 죽어 버렸으면 했는데 아쉽게 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리안이 계집에게 정이 좀 떨어졌기를 기대했건만. 기대와는 정반대로 일이 진행되는 듯하여 입안이 썼다.

“그렇기는 한…….”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노련한 늙은 집사가 젊은 시종의 말을 가로채며 등장했다. 황제의 눈썹 한쪽이 무섭도록 치켜 올라갔다.

“오랜만이군.”

아직 살아 있었나? 황제는 약간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집사와는 구면이었다. 동생 타델리아를 되찾겠다고 난동을 부렸던 공주 시절, 그때 자신을 막아섰던 것도 이 능구렁이 같은 집사였다. 서로에게 좋은 기억이 아닐 터.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그럴 리가. 그대가 짐을 상대로 농을 치는군.”

“…….”

“타델리아가 없는데 내가 잘 지냈을 턱이 있는가?”

“송구합니다.”

노인은 인사할 때보다 더 깊이 허리를 숙였다. 페이네리아는 불쾌한 기시감을 느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문이나 열어.”

“죄송합니다만 공작님의 허가 없이는 방문을 열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내가 왔다고 알리시게.”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이 남다른 노인이었다. 권력이 분산되어 있다손 쳐도 황제는 황제. 그럼에도 집사는 리안의 명에 절대복종했다. 그것이 이 노인이 삼 대째 휴리트 가문을 보필할 수 있었던 이유이리라.

“불손하구나. 감히…….”

황제의 옆에 있던 시녀가 벌게진 얼굴로 뇌까렸다. 지고하신 황제 폐하를 이리 문전박대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황제 폐하가 납시셨다는 사실은 이미 휴리트 공작에게 전해졌을 터였다. 황제의 마차를 보고 부리나케 본채로 달려가던 하녀를 본 바가 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이렇게 질펀한 정사만 이어 가고 있다는 건…….

불충이다.

시녀가 다시금 언성을 높여 문 너머까지 닿게 하려 입을 벌렸다. 그때 황제가 한 손을 들어 아랫것을 제지했다.

“그만. 되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내 조카님께서 저승문을 열고 돌아온 연인을 귀여워하는 중이라고 하잖니. 방해하면 쓰나.”

명백한 비아냥이었으나 모두 떫은 표정을 감출 뿐이었다. 페이네리아가 한 수 접어 주는 모양새를 보이는 건 드문 일이다. 호전적인 성향이 강한 그녀를 모두가 알았기에 현재의 상황에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황제는 문 쪽을 흘금 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그때, 누군가 굳게 닫혀 있던 나무문을 열었다. 누런빛과 달콤한, 동시에 쌉싸름한 향이 흘러나왔다. 여러 환초가 섞여 타면서 만들어 내는 향이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태연자약하게 내뱉는 인간은 리안이었다. 여러 줄로 늘어진 귀걸이가 황제의 고갯짓에 따라 찰랑였다. 샹들리에의 빛이 금실 같은 귀걸이 줄기에 반사되었다. 황제의 얼굴 또한 화려하게 펴졌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녀는 충신이 아닌 가족에게 인사를 건네듯 편안하고 밝아 보였다. 페이네리아는 격의 없이 리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신전에서 이후로는 한 번도 낯을 비추지 않았어. 서운하구나.”

“죄송합니다.”

“말은 잘해.”

밉지 않게 타박하는 붉은 입술이 은은히 올라갔다. 단번에 기분이 좋아진 게 틀림없었다. 호전적인 만큼 단순한 여인이다. 주변의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그러니까 동생을 되찾겠답시고 황제가 되지 않았겠는가. 걸출한 만큼 단순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리안은 그런 황제를 꽤 잘 다루었다.

“모시겠습니다.”

집사가 길을 터 주며 고개를 조아렸다. 복도에 서서 이야기를 계속 나누는 건 귀족의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니 아랫것이 눈치껏 적당한 장소로 안내해야 했다.

“아니.”

그런데 황제는 집사가 응접실로 안내하려는 것을 막아섰다.

“나는 조카님 방에서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침실은 가장 내밀한 공간이었다. 보통은 응접실에서 사람을 맞이하는 게 예의였지만 지극히 가까운 이들과는 침실의 티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일반적이었다. 귀족들의 방이 넓고 티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러나 안에는 리안의 여인이 있다. 황제는 그를 시험하듯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안 되겠나? 하고 물었다.

“타론의 그 누가 폐하의 발걸음을 돌리게 하겠습니까? 신하 된 도리로 그럴 수는 없지요.”

리안이 공손하게 손짓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나온 문 쪽으로.

“제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한없이 순종적인 듯하나 그 호전성을 꿰뚫어 보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저 안은 방금까지 그가 헤일라라는 여자와 뒹굴던 공간이다. 모두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황제는…….

“역시 내 마음을 아는 건 조카님뿐이야.”

리안이 눈짓하자 옆에서 힐금대던 하녀가 재빨리 문을 밀어 열었다. 황제와 리안은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너른 침대와 굴곡진 티 테이블, 누군가를 위해 꽉꽉 채워 둔 책장, 거대하고 정교하지만 가냘픈 여자는 어찌 다룰 수 없을 뭉툭한 장식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은실이 수놓아져 있는 태피스트리의 대조차 단단하게 엮은 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얼핏 들여다보면 연인을 위해 잘 조형된 방 같지만, 실상, 리안 휴리트만을 위한 인형의 집이다.

황제는 인형이 죽은 듯 널브러져 있을 침상의 중앙에 눈길을 던졌다. 작은 발 하나가 이불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사용인들이 문을 열어 두어 진득한 정사의 향은 옅어져 있었지만, 꾸물대며 잠들어 있는 저 여자 그 자체가 힘겨운 잠자리의 증거물이었다.

리안이 다른 이들에게 제 여자임을 그토록 증명해 내고 싶어 하는 여인이다. 고약하게도, 그는 황제에게까지 여인을 내보이고 있었다. 약간 부푼 배가 이불의 실루엣으로 비쳤다.

기시감이 황제를 눌렀다. 과거로 그녀를 끌고 간다.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일까.

“폐하.”

리안이 부드럽게 황제의 시야를 막았다.

“앉으시지요.”

“내 눈이 이 계집 발에 닿는 것도 싫은가 보구나.”

약간 빈정거리는 말투에도 리안은 침착하게 황제를 에스코트했다.

“그랬다면 이 방으로 모시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래, 그래.”

황제는 무익한 타박을 멈추고 티 테이블 앞에 앉았다. 곧이어 하녀들이 아름다운 잔에 붉은빛의 홍차와 다과를 준비해 늘어놓았다.

기실 늘어놓은 다과에 황제가 좋아하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견과를 잔뜩 넣은 파이와 초콜릿 덩어리를 녹여 섞지 않고 박아 넣은 쿠키 따위는 다른 이의 취향이었다. 타델리아. 리안의 어머니. 황제는 다과들을 보고 눈에 띄게 기뻐했다.

“어미와 입맛이 똑 닮았어.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게지.”

“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아랫것을 둔 덕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아름다운 여자의 낯빛에 아쉬움이 섞여 들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곤 뒤에 있던 시녀에게 눈짓했다. 시녀는 두 손으로 트레이를 전달받아 공손하게 내밀었다. 황제가 든 것은 황실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었다.페이네리아는 친히 리안에게 내어 주었으나 그는 받아 들지 않고 흘금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이걸 전해 주러 오셨습니까.”

“내 친히 움직이지 않고서야 조카님의 무거운 발을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그럴 리가요.”

사실이었으나 그는 가당찮다는 듯 짐짓 놀라는 척을 했다. 그러나 조카 사랑이 남다른 페이네리아는 그저 흐뭇하게 여기고 넘겼다.

“황태자의 약혼식이야. 조카님이 참석해 주셔야지. 그리고…….”

황제가 나른한 눈으로 침상 쪽을 훑었다.

“이번에는 저 아이와 함께 와.”

리안의 손가락이 책상을 톡, 톡 쳤다. 황제의 의중을 가늠하는 것이리라.

“정식으로 혼인을 하려는 게 아니거든 오지 않아도 좋고.”

귀족들의 혼인 서약은 황궁에서만 가능했다. 황제의 직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 귀족 간의 결합. 그러니 헤일라를 정식 부인으로 맞기 위해서는 황제가 필요하다. 언젠가 말을 꺼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이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아직 아이도 낳지 않았는데.

리안은 평민인 헤일라를 격렬히 반대했던 과거의 페이네리아를 떠올리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

“다만 아무 조건도 내걸지 않으시기에.”

황제가 한껏 과장하듯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이런, 조카님이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나는 네게 목숨을 내어줘도 아까워할 이가 아니야.”

“예, 그렇지요.”

그렇지 않다. 리안은 황제가 목숨을 아끼지 않는 상대가 제 어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타델리아의 대용품일 뿐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이용하기에 좋으면 그만이다.

“감사합니다. 다만 혼인 서약은 해산한 뒤에나 맺으려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진행하고 싶지만…… 보시다시피 몸이 약해서.”

배가 부른 임산부를 매일 밤 괴롭히는 남자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꽤 그럴듯한 변명이라, 황제는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정말로 타델리아의 아들을 아꼈으므로.

“그렇게 하지. 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역시나 맨입으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리안은 머릿속으로 미리 준비해 둔 뇌물들을 나열했다. 비옥한 영지 몇 개와 광산들. 그러나 황제가 내건 조건은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조카님 신부가 될 여인이랑 다과를 나눠 보고 싶어.”

“그건 어렵습니다. 다른 조건을 거시지요.”

문장을 끝맺고 호흡 한 번 하기도 전에 리안이 거절했다. 조카의 칼 같은 태도에, 페이네리아는 몹시 공교롭다는 듯 말했다.

“다른 조건은 없어.”

“폐하.”

“내가 아들처럼 아끼는 조카님의 아내가 될 여자지. 둘이서 이야기 한 번 못 나누는 게 말이 안 되잖나.”

둘 사이의 기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주변의 시종들이 바짝 긴장해 고개 숙인 채 눈알만 굴렸다.

“좋아요.”

네 개의 눈동자가 휙 돌아가 침상에 꽂혔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 할래요.”

부스스 일어나 이불로 몸을 가린 여자가 꽤나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폐하랑…… 이야기하고 싶어요.”

현실과 꿈속을 아직도 구분하지 못하는지, 헤일라는 계속 눈을 끔벅댔다. 그러면서도 똑똑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

“폐하랑 이야기할래요. 둘이서,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리안의 얼굴에서 표정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걸 본 헤일라가 약간 어깨를 움츠렸으나 중얼대기는 멈추지 않았다.

“헤일…….”

“그래, 그리하지.”

“안 됩니다.”

“당사자도 괜찮다 하는데 무얼 걱정하나? 과보호도 적당히 해.”

황제가 리안의 반발을 일축하며 일어났다. 그녀는 느릿하게 걸어 헤일라에게 다가갔다. 침상에 걸터앉자, 헤일라가 천천히 기어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리곤 귓속말로 어떤 이야기를 한다.

“푸흡.”

말을 들은 황제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리안은 티 테이블에 앉아 그걸 지켜봤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이 되레 남자의 분노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렇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지금, 제가 있는 자리에서 나누시지요.”

페이네리아가 혀를 찼다. 리안이 고집을 꺾지 않을 심산임을 눈치챈 것이다. 그녀는 근육이 잘 붙은 다리를 꼬아 앉고 두 팔을 침상에 내려놓았다. 헤일라는 황제가 가 버릴까 봐 그녀의 팔을 꼭 쥐었다. 불손한 행위였으나 페이네리아는 그냥 두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나?”

적발의 황제는 도전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다른 이가 아닌 헤일라를 보고 있었다.

“……네, 네에.”

헤일라가 부스스한 머리칼이 흔들릴 정도로 고개를 까닥였다. 리안이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 제 여자가 다른 이에게 쩔쩔매는 걸 견디기 힘든 게 분명했다. 꼴이 어지간히 우스운지, 황제는 유쾌하게 웃으며 헤일라의 뺨 한쪽을 쓰다듬었다.

“자, 그럼 크게 말해 봐.”

“…….”

“뭐가 궁금하다고?”

방금 헤일라가 페이네리아에게 귓속말한 걸 다시 설명해 보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눈알만 빙글빙글 돌리다가 꿀꺽 침을 삼키고 리안 쪽을 봤다. 그는 빙긋 웃었다.

“그, 그날…….”

“조금 더 크게.”

“그날! 언니가 죽은 날, 폐하랑…… 폐하랑 리안이랑 같이, 같이 있던 게 맞는지…….”

모든 게 리안의 예측대로였다. 그녀는 황제에게 그날의 진실을 묻고 싶었던 거다. 너무 빤해서 놀랍지도 않았다.

헤일라는 가끔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걸 빼면 요즘도 금방 무엇이든 깜빡깜빡하고 리안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황제를 본 순간 레테가 떠올라 그날의 진실에 관해 묻는다. 보통 집념이 아니었다.

“아아.”

헤일라가 손을 모으고 제 손가락을 탁, 탁 뜯었다. 황제가 그 모습을 보여 쯧, 하고 혀를 찼다.“그렇게 급히 묻지 말라 했는데…….”

이전의 만남에서 헤일라에게 건넨 조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조급해도 여유로운 척. 헤일라는 반짝, 그녀의 조언이 떠올랐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말해 주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하는 게 얼굴에 쓰여져 있었다.

“아니, 아니네. 조금씩 연습하면 될 일인데 내가 조급했어.”

“…….”

“못 말해 줄 것도 없는 일이야. 그런데 리안이 말을 안 해 준 겐가? 이렇게 바짝 얼어서는…….”

리안을 향한 눈동자가 흥미로 번들댔다. 남자는 침묵했고 헤일라는 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얼었다.

“함께 있었어.”

틱. 헤일라의 손톱이 부러졌다. 그녀는 멀건 얼굴로 황제를 바라봤다. 한 번 더 답을 해 주길 고대하는 얼굴. 그러나 황제는 더 이상의 설명을 붙이는 일 없이 그저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해야 할 말은 다 한 것 같군. 그만 가 보지.”

다음에 봐. 그녀는 헤일라의 귓가에 속살댄 뒤 구부렸던 몸을 바르게 폈다. 곧은 자세가 고귀한 귀족다웠다.

리안은 페이네리아가 나가자마자 헤일라에게 다가가 끌어안고 다독였다. 화를 내거나 다그치지 않고 꼭 안아 등허리를 쓸고 배를 뭉근히 만졌다.여체는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헤일라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입술도 달싹이지 않은 채 눈만 끔벅였다. 그녀는 황제의 말을 소화해 내기 버거워 보였다. 묵직한 정적이 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주룩. 헤일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동시에 약간 쉬어 갈라진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정말, 아냐?”

공허한 질문이다.

“진짜 네가 죽인 게 아냐?”

“아니야.”

“그럼 누구야?”

“나도 몰라. 하지만 곧 밝혀지겠지.”

리안은 애매하게 말하고는 헤일라를 유심히 훑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시선. 뱀처럼 집요한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피하지 않고 눈빛을 받아 내다가 그의 가슴팍에 머리통을 툭 기댔다.

“거짓말이지?”

“…….”

“넌 항상 거짓말을 했으니까. 또 거짓말이지?”

헤일라는 어느 순간부터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매달렸다. 하지만 리안은 알고 있었다.

“거짓말 아니야.”

이건 희망을 품은 얼굴이었다.

“못 믿어도 돼.”

“정말?”

“난 진짜 아니니까. 곧 다 괜찮아질 거야. 믿을 수 있게 될 거야.”

그녀는 더 할 말이 남은 듯 입을 뻐끔댔으나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정말로 약간, 믿고 싶어졌기 때문에.

기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도 했다.

미쳐 버리기 전에 그냥 믿어 버리자. 편해지자…… 잠깐 그렇게 생각도 했다.

긴장으로 피로감이 높게 쌓여 있었던 헤일라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리안은 만족에 젖어 그녀를 더 꽉 안았다. 부른 배가 뱃가죽에 닿아 오는 느낌이 좋았다.

그는 모든 게 다 잘될 것이라 속삭였다.

다음날, 페이네리아가 헤일라를 위한 것이라며 귀한 꽃을 보내왔다. 그 꽃다발은 헤일라의 품에 안겨졌다. 그것을 안은 여인은 꽃에 얼굴을 묻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황송해하는 것이리라. 좋아라하는 것이리라. 사용인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리안은 아마도 꽃의 이름을 잊었을 연인에게 친절히 그 이름을 되짚어 주었다.

라가스타였다.

* * *

“왜 보여 주신 겁니까.”

“뭘.”

파이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마음먹은 듯 이야기했다.

“황제가 보낸 꽃 말입니다.”

“아.”

리안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태도. 파이라는 그런 반응에 진절머리가 났다.

“다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황제의 옆에 붙어 다니는 시녀 둘 중 하나, 호위 기사 다섯 중 둘. 모두 리안의 사람들이었다. 몇 년간 은밀하게 매수하고 심어 둔 자들. 이전에 황제와 헤일라가 나누었던 대화를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전해 들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알고 있었다. 황제가 헤일라에게 보낸 꽃의 꽃말도, 그게 헤일라에게 미칠 영향도. 그러나 리안은 부러 막지 않았다. 연인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렸다.

부정하는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각이는 펜촉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숨길 이유가 있나.”

“하지만 헤일라 님께서 충격을…….”

“헤일라에게 중요한 건 현실을 아는 거야.”

어떤 현실을 말하는 거지? 당신이 제 언니를 죽인 현실? 파이라는 차마 내뱉지 못한 욕지거리를 속으로 읊조렸다.

“그래서 황제를 이용해 알려 주신 겁니까? 공작께서 레테 님을 죽인 사실을요.”

탁. 리안이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나?”

“……설마 아닙니까.”

“글쎄.”

누군가를 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재치라고는 생쥐의 눈곱만큼도 가지지 못한 남자니까. 그렇다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파이라의 머리가 지끈댔다.

“그럼 헤일라 님이 알아야 하는 현실은…….”

“질문이 많아.”

파이라가 사죄의 말을 올렸지만 리안은 괘념치 않는 듯했다.

“레테를 죽인 게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

“누가 죽였든 헤일라가 서 있을 자리는 리안 휴리트의 옆이라는 것. 그게 현실이지.”

리안이 자신을 속였다. 리안이 나쁜 짓을 했다. 리안이 언니를 죽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 없다.

그는 이 사실을 헤일라에게 확실히 심어 주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영원히 체념하기를 기다렸다. 몰아붙이고 몰아붙여, 마침내 다시는 리안을 버릴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잔인하십니다.”

“그런가?”

가벼운 대답이었다. 리안은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가볍게 웃고 말았다.

“지금 헤일라는 뭘 하고 있지?”

“식사 후 산책을 하고 계실 시간입니다.”

매끄럽게 굴곡진 나무 의자의 다리가 바닥에 마찰음을 내며 밀려났다. 리안은 창문 쪽으로 다가가 작은 헤일라가 돌아다니고 있을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지독할 정도로 가득 심어진 장미 사이로 하얀 여자가 보였다. 황금빛 눈동자가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분명히 텅 비어 있으리라.

그는 약간 슬퍼졌다. 이전처럼 생기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 지 꽤 되었다. 영영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약간 저리기까지 했다.

“결국은 나를 이해해 줄 거야.”

헤일라는 나를 사랑하니까. 리안은 그렇게 중얼댔다. 파이라가 잠시 입을 달싹였다가 꾹 닫았다.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리안이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버리겠다’라고 한 이후로 헤일라는 단 한 번도 자해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아기를 가진 이후부터 식사를 거르지도 않았다. 힘들어하면서도 결국에는 자신보다 그들을 끔찍이 아끼는 게 눈에 보였다.

불쌍하고 미련한 여자. 차라리 사랑이라는 걸 영영 몰랐다면 편하게 도망이라도 칠 수 있었을 텐데 아이 때문에 그조차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제 잔인한 주인은 그걸 너무나 잘 알았고 교묘하게 이용한다.아마 앞으로의 모든 일들 또한 리안 휴리트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라. 리안 휴리트는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 쪽으로 쓰러지는 여자를 기쁘게 받아 평생 품을 것이다.

파이라는 자신의 숨이 턱턱 막히는 착각에 잠시 목 근처를 매만졌다. 주인과 이야기하면 가끔 이렇게 속이 뒤집혔다. 너무 끈적하고, 텁텁하고, 지네가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기어 올라오는 압박감이 몸을 지배한다.

“헤일라에게 가지.”

그러나 오늘도 파이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리안을 보필하고, 불쌍한 여자 하나를 제물 삼에 제 여자의 약을 구하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리될 것이다. 그가 냉정하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리안의 뒤를 따랐다. 헤일라 이외에는 무엇도 관심 없는 남자는 뛰듯이 걸어 정원까지 도착했다.

아, 꽃에 파묻혀 있는 여자가 주인을 발견했다. 그의 부름에 여자는 인형처럼 가만히 기다리고 섰다. 오늘따라 그것이 이다지도 슬퍼 뵈는 까닭이 무엇일까?

파이라는 가늠할 수 없는 음울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동정하지 말자. 차마 바꿀 수 없는 것에 손을 뻗지 말자. 연인만을, 우리만을 생각하자…… 스스로를 다독였다.

코끝이 아릴 정도로 아찔한 장미 향이 그들 모두를 감쌌다. 리안 이외에 아무도 반기지 않는 시간이 부드러이 흘렀다. 아마도 끝없이 반복될 순간 중 한 조각에 불과하리라. 파이라는 가볍게 체념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실 거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그러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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