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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린 짐승 (7/10)

6. 어린 짐승

노을이 지는 낮과 밤의 경계였다.

져 가는 빛조차 들지 않는 낡은 골목으로 여자 하나가 숨어들었다. 낡은 로브를 걸친 여자는 옷에 달린 모자로 얼굴의 반을 덮은 채였다. 걸음을 빠르게 옮겨 골목 깊숙한 곳에 앉아 있는 남루한 노인에게 다가갔다. 여자가 바로 앞에 도착했을 때,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씨익 웃었다.

“오셨는가?”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적지 않은 돈뭉치를 꺼내 내밀 뿐이었다.

“여태 안 오시길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했다고.”

가래 섞인 걸걸한 목소리는 불쾌감이 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여자는 묵묵히 서서 노인이 무언가를 꺼내 건네길 기다렸다.

약초가 잔뜩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그녀는 안을 흘끔 열어 보고 주머니를 몇 번 흔들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뒤 꽁꽁 싸매 제 품 안에 넣었다.

“다음 달에 또 올게요.”

“그러시게.”

헤일라는 퍽 익숙한 거짓말을 하고 돌아섰다. 다시 이 노인을 만나러 올 일은 없을 것이다. 횟수로 다섯 번은 채웠으니 이제 다른 이를 찾아봐야 할 때였다.

그녀는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사람을 고용해 왔다. 신전 앞 약재상에서 레테의 약을 사기 위해 중간책이 필요했다. 헤일라는 꾸준히 중간책을 바꿨다. 입단속을 대가로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는 있으나 언제 배신당할지 모르는 노릇이니까.

누구도 믿을 수 없으니까. 누구도.

노인은 더 이상 여자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뒤돌아 걷는 헤일라의 귀에 돈 세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때, 노인 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헤일라.”

움찔.

헤일라는 걸음을 뚝 멈추었다. 자신을 숨기기 위해 적지 않은 웃돈을 주고 심부름을 시켜 왔다. 그런 만큼,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런데 왜.

“헤일라.”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등 뒤에 식은땀이 맺혔다.

“헤일라.”

아니다. 노인이 아니야.

이 목소리는…….

그 애의…….

헤일라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온 관절이 삐거덕댔다.

“뭐야, 뭐가 잘못됐나?”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는 여전히 헤일라와 노인 둘뿐이었다. 노인은 불만이 가득 낀 얼굴로 고개를 팩 쳐들었다. 돈을 황급히 품 안에 챙기는 게 헤일라가 약초에 트집을 잡을까 봐 염려하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노인을 찬찬히 훑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다시 걸었다. 헤일라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되뇌었다.

“헤일라.”

그냥 새로운 이명이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반복적인 굉음이나 울림 소리에 시달렸다. 그것은 부모의 목소리나 언니의 비명 소리로 종종 바뀌곤 했다.

“오랜만에 듣네.”

“헤일라.”

그러므로 ‘그 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제 귀를 주먹으로 퍽퍽 쳤다. 그래도 소리가 멈추지 않자, 어느 순간부터는 입을 헤 벌린 채 바닥만 보면서 걸었다.

그녀는 갑자기 왜 자신이 이런 이명을 듣게 되었는지를 반추해 보았다. 최근에 그 애에 관해 생각할 일이 있었나. 영영 떠올리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는데.

아, 혹시 오늘 아침 언니와의 대화 때문일까?

지난 삼 년간 헤일라와 레테의 대화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헤일라는 더 이상 레테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고 언니는 그런 동생에게 여전히 무정했다. 부양의 의무만으로 묶인 사람들처럼 둘은 냉랭하기만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레테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직도 그 새끼가 좋니?’

그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쪽 눈알을 파내는 취미까지 생겼던데.’

전쟁에 나가 인간을 무참히 도륙하고, 시신의 눈알을 찔러 죽은 자를 능멸하기로 유명한 새로운 공작가의 주인.

‘뭐, 공작까지 됐으니 그런 흠은 흠도 아닌가.’

리안. 리안 휴리트.

헤일라는 레테가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우습게 여겼다. 이미 다 끝난 사람에 관해 왜 말을 꺼내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침대 옆 협탁에 어제 사 둔 빵만 둔 채로 대답 없이 집을 나왔다. 그저 피곤했다.

어떤 변덕, 또는 옛날에 종종 부리던 패악의 연장선이라 여기고 넘겼다. 그런데 레테가 한 말이 가슴에 박혀 있었나 보다. 떨어지지 않아 잔상으로 남아 이명으로 치환된 것이리라.

“얼른…… 집에 가서…….”

그녀는 환청을 떨치기 위해 중얼댔다. 해야 할 것을 나열하는 입술이 버석 말라 있었다.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하고, 또…… 얼른 자야지…….”

레테의 뒤치다꺼리를 한 뒤에는 언제나 수면 속으로 자신을 잠갔다. 요즘은 잠이 한없이 달았다. 어느 날에는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자는 시간이 더 많기까지 했다. 그만큼 수면이 주는 안온함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헤일라에게 있어 유일한 안식이었으므로.

하염없이 걷다 보니 번듯한 제집이 보였다. 이전에 살던 집에 비해 훨씬 깔끔하고 튼튼한 거주지였다. 타센이 은밀하게 준비해 내어준 집이다.

3년 전 신전에서 나온 뒤 헤일라는 바로 이 집으로 왔다. 이후에는 계속 여기서 기거했다. 타센은 약속대로 집 안에 레테를 안전하게 옮겨 두었고, 그곳에는 몇 년간 생활하며 레테의 약값을 충당할 돈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람 하나 버리고 돌아선 대가치고는 과했다.

하지만 여기가 싫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 문고리를 잡았다. 벌써부터 하루를 마친 듯 탈력감이 몰려왔다. 헤일라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기름칠이 잘 되어 있는 문은 아무런 잡음도 내지 않고 매끄럽게 열렸다. 익숙해질 법한 낯섦에 헤일라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누군가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들일 일 없는 낯선 남자의 투박한 신발. 헤일라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익숙한 낯 하나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당신이…….”

“…….”

“당신이 왜.”

리안을 배신하고 타센에게 정보를 제공한 남자다. 헤일라를 타센에게 데리고 간 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남자는 입을 다문 채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몇 번 입을 달싹대다가 답했다. 그 모습은 언뜻 초조해 보였다.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무슨…….”

“리안 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리안? 헤일라가 멍청하게 그의 말을 따라 했다. 그리고 불길함을 감지한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녀는 그를 밀치고 레테의 방 쪽으로 달렸다. 남자는 쉽게 물러나 주었다.

“언니.”

다급한 음성을 비웃듯 침상은 텅 비어 있었다. 깨끗하지만 쓸쓸한 방에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주인이 없었다.

“언니!”

비명에 가까운 부름이었으나 레테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집에 없는 것이다.

그 애, 리안의 짓이다.

“헤일라.”

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목덜미에 소름까지 쭈뼛 돋았다.

다 잊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건 다 잊었다고, 공을 세우면서, 인정받으면서 잘 지낸다고 믿고 싶었는데. 헤일라는 그가 이제 와서 이런 짓을 벌이는 이유를 가늠해 보았다. 눈앞이 뿌옜다.

리안이 자신을 찾을까 봐 자취를 감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정말 적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일 뿐이었는데. 정말로 찾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섞였다.

죽였을까? 언니를 죽였을까?

나한테 복수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아직…….

배 속의 내장이 뒤섞이는 듯 아찔했다. 모든 가정이 끔찍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으려던 순간이었다. 남자가 헤일라의 어깨를 부축했다. 그녀는 그것을 쳐내려 허우적댔지만 힘이 부족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무력했다.

진절머리가 난다.

“가셔야 합니다.”

“당신…… 이번에는 리안한테 붙은 거야?”

분노의 불씨가 다른 이에게 튀었다. 시뻘게진 눈이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리안은 당신이 배신자라는 걸 알아?”

“알고 계십니다.”

맥이 탁 풀린다. 알고 있다고 한다. 모든 걸 알고도 이 남자를 보냈다고…….

그녀는 이제 어느 것도 가늠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서 저를 보내신 겁니다.”

“그게 무슨,”

“헤일라 님께서 가지 않으시면 저는 죽습니다. 그분을 배신한 대가로.”

“…….”

“누구라도, 죽게 내버려 두실 분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

어처구니가 없었다. 리안은 자신 때문에 남이 다치는 걸 못 견디는 헤일라의 성정을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언니와 관련된 과거 때문이라는 사실까지도 안다.

레테를 납치한 것도 모자라 이런, 이런 저열한 방식까지 써서……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가지 않으실 겁니까?”

“……나한테 선택권이 있기는 해요?”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헤일라는 멀건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금발에 약간 까무잡잡한 남자는 이전처럼 침착한 표정이었다. 이전에, 타센의 뒤에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이런 표정이었다.

“온전히 선택하실 수 있도록 배려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배려? 우스웠다.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조롱이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자신을 찾고 있는 이상, 그저 리안이 닦아 놓은 길을 걷는 게 그녀에게 준비된 몫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면.”

“…….”

“가면, 언니가 있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살아 있죠? 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가냘프게 떨렸다. 거기에는 약간의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후회까지 녹아 있었다.

레테가 자신을 속인 이래로 헤일라는 그녀에게 살갑게 대한 날이 없었다. 사랑이나 애정 따위를 내보이려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레테가 화를 내도, 음식을 던져도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발작을 해도 응급처치를 하며 옆을 지키고 있을 뿐, 돈을 받고 고용된 피고용인처럼 언니의 수발만 들었다.

미웠다. 그러나 미워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헤일라에게는 그때도 지금도 언니밖에 없었다.

언니의 안위는 헤일라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자신 때문에 레테가 다쳐서는 안 되었다.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된 언니다. 언니밖에 없었다…….

리안을 버려 가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기형적인 신념이 대가리를 들었다.

그녀의 초조한 물음에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일라는 잠시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손의 떨림이 멈출 때까지 몇 분간 단순하게 호흡했다.

그리고 안정을 되찾은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갈게요.”

* * *

‘불쌍한 계집.’

파이라는 마차 안에 마주 앉은 여자를 두고 생각했다. 헤일라라는 여자는 티가 날 정도로 입안의 살을 짓씹고 있었다.

그는 동정심에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다가 입을 닫았다. 반 협박해 끌고 온 주제에 할 말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말을 건 쪽은 여자였다. 헤일라는 그를 똑바로 보고 물었다. 약간 당황한 파이라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헤일라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창밖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이라는 잠시 자신의 처지를 되짚어 보았다.

그는 병에 걸린 연인을 살리고자 리안의 아래로 들어간 남자였다. 파란 집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는 유능한 용병 출신이었고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를 매일 감시하고 쫓아다니는 일이 면이 서지 않는다 느낄 뿐이었다. 그래도 사람을 죽여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연인의 병세가 악화되었고 파란 집의 의원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리안은 남자의 충성을 사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으나 더 이상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기적. 기적이 필요했다.

그러나 국왕도, 리안도 장기적인 신전 치료를 주선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런 파이라 앞에, 타센이 나타난 것이다.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하던데.’

타센은 무감한 낯으로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신의 계시를 받은 사자처럼 확신에 차 손을 내밀었다.

그가 건넨 것은 알 수 없는 약이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검은 알갱이. 그러나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했다. 파이라는 그날 그것을 제 연인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정말 마법처럼 사랑하는 연인의 기운이 돌아왔다.

나중이 되어서야, 타센이 죽은 뒤에야 그 약이 강한 마약임을 알게 되었다. 중독성이 강해 끊으면 고통스러운 갈증과 허기에 미쳐 죽어 가는 마약이었다. 아직 암시장에서도 거래되지 않는 바다 건너 나라의 물건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타센에게 발설한 이도, 마약을 구해 건네라 지시한 이도 레테라는 계집이었다. 예언의 힘을 가진 마지막 신관이자 헤일라의 유일한 혈육.

어쨌든 파이라는 그 약을 구하기 위해 다시 리안에게 목줄을 쥐여 준 처지였다. 조금이라도 복용 기간이 늦춰지면 연인은 괴로움에 발발 떨며 그에게 매달렸다. 연인의 죽음이 적어도 존엄하기를 바라는 파이라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런 멍청하고 미련한 인간이 저였다.

자신은 소중한 것을 지키느라 다른 이의 소중한 것을 희생시키는 전형적인 쓰레기이기도 했다.

그 결과가 이 여자의 현재였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측은지심이 들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에 자연스레 마음이 움직인다.

파이라는 타센의 명으로, 타센이 죽은 뒤에는 리안의 명으로 헤일라를 아주 오래 지켜봐 왔기 때문에 알았다. 여자는 텅 빈 껍질이 되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연인에게 배신당한 계집의 삶은 너무 쉽게 무너졌다.

그래서 때때로 파이라는, 그녀의 쇠락에 일조한 자신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언니는 잘 있는 거 맞죠.”

게다가 미련하기까지 해서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구석이 있지 않은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관심 한 조각 받으려 꺼덕대는 제 주인과 계집의 언니가 환장할 만도 했다.

이 여자는 사랑을 버리질 못했다. 자신은 놓아 버렸다 생각할지도 모르나, 몇 년간 지켜본 파이라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저 언니와 연인을 놓고 싶어 할 뿐이다.

언니가 발작을 하는 날이면 새벽 내내 옆에 앉아 돌보며 무언가 맺힌 눈빛을 한다. 연인에게 빌려주었던 손수건과 같은 천 조각을 버리지 못하고 서랍 가장 아래 칸에 넣어 두었다. 그들이 좋아하던 음식을 저도 모르게 만들고는 뒤뜰에 쏟아 버리곤 한다.

그러다가 정말 견딜 수 없이 과거가 그리워지면, 그래서 힘에 부치면 여자는 잠 속에 자신을 파묻었다.

“그보다는 헤일라 님 스스로를 챙기십시오.”

“저는…….”

“그분에 관해 알아 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그러니 미쳐 버린 제 주인에 관해 경고해 두자. 이 여자가 주인 옆에 가능한 한 오래, 더 망가지지 않고 버텼으면 하니까.

알량한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한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 * *

파이라는 저택의 정문까지만 헤일라를 안내했다. 그는 하녀로 보이는 여자에게 헤일라를 넘겨주고 떠났다. 명 받은 다른 일이 있다고 했다. 레테가 이 안에 있는 것이냐는 물음에도, 그 일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도 파이라는 답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이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고만 이야기했다.

“다른 신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피고용인임이 분명해 보이는 젊은 여자는 쌀쌀맞게 헤일라를 맞이했다. 상대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꼿꼿한 자세였다. 헤일라는 제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흙투성이의 낡은 구두. 깔끔한 메이드복을 입은 하녀는 더러운 것이 저택을 어지럽히는 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헤일라라는 미천한 여자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됐어요.”

이곳은 리안의 저택이었다. 그에게 속하는 무엇도 더는 받고 싶지 않았다. 하녀는 성가시다는 듯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감정을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무례함이 엿보였다. 그녀의 시선에는 약간의 경멸도 묻어났다.

“지저분한 신발을 신고는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알았어요.”

헤일라는 조용히 신발을 벗었다. 맨발로 차가운 돌바닥에 발을 디디니 찬 기운이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하녀는 그것을 보고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앞장서서 걸었다. 헤일라는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뒤따랐다.

저택에 들어서기 전, 파이라라는 남자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분은 광증을 앓고 계십니다. 심기를 거스르지 마십시오.’

신전에서 전대 공작을 죽인 이후로 그는 병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다른 이의 왼눈을 광적으로 탐하게 되는 광증. 그가 주기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파이라는 리안이 신전에서 제 아비의 왼눈을 찔러 죽인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헤일라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녀가 신전에서 도망친 뒤 열흘 만에 타센 휴리트가 죽었다고 공표되었다. 그리고 리안 휴리트가 곧바로 공작위를 승계받았으니, 부자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리안은 아비에게서 벗어나는 대가로 영원한 저주를 얻은 것이다.

“그가 저주받은 데는 네 역할이 크지 않았니?”

“네가 버리고 가서 그는 평생 남의 눈알을 파고 다니게 되었네.”

“기쁘지는 않아 보이는구나.”

죽은 어미와 아비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헤일라는 애써 익숙한 힐난을 무시했다. 그녀는 계단을 오르며 발을 내딛기 위해 근육을 쓰는 데 온정신을 다하려 노력했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 층에 다다른 뒤 긴 복도의 두 번째 방문 앞에서 둘은 멈춰 섰다. 헤일라를 데리고 온 하녀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물러났다.

감시하는 듯한 눈빛. 그녀는 헤일라가 들어가는지 아닌지 매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 따위, 헤일라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면.

그렇게만 하면 이 너머에 리안이 있는 것이다.

헤일라는 그 사실에 압도되어 주먹을 쥐었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눈을 질끈 감고 문고리를 잡았을 때는 심장 박동이 손끝까지 전해지는 듯하였다.

끼익-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삼 년 만의 재회였다.

* * *

“헤일라.”

이번에는 이명 따위가 아니었다. 리안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줄 때의 울림과 목소리. 아니 이전보다는 조금 낮아졌나. 덩치도 더 커진 것 같았다. 거리가 조금 있는데도 눈에 띈다. 헤일라는 빠르게 눈을 깜빡거려 보았다.

“헤일라.”

리안이었다. 그는 널찍한 업무용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일어났다. 검은 눈이 조금 커졌다. 그는 잠시 입술을 벌리고 벙긋댔다. 이는 헤일라가 예상했던 반응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리안은 아주 가볍게 놀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빨리 왔네.”

금세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와 인사를 건넬 정도로.

“오는 길에 불편한 건 없었지?”

생각보다 약간 빨리 방문한 객을 대하는 태도 같았다.

“헤일라?”

아니, 아닌가.

헤일라는 그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뒷걸음질 쳤다. 등에 문이 닿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당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렇지 않은가?

“마중을 나가려고 했는데 일이 많아서…… 화났어?”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볼 수가 있지.

“너…….”

“응?”

“너, 왜…… 왜 그런…….”

어떻게 옛날과 같은 얼굴로 나를 대할 수가 있어.

“왜 이래?”

그는 마치 삼 년 전, 아니 그보다 더 전과 비슷했다. 헤일라와 리안 사이에 사랑 말고 아무런 감정도 없던 때처럼 살가웠다. 그저 잠시 집을 나갔다 귀가한 연인을 반기는 사람 마냥 밝았다. 반드시 있어야 할 분노의 부재에 오싹하기까지 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하지만 그는 헤일라의 물음에도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더니 아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잊었다 깨달은 사람 같았다.

“미안해.”

“…….”

“이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내가 눈치가 없었지?”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이야기해.”

그녀는 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 리안의 재회 따위가 아니었다. 레테의 안위.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의 기행에 홀리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리안은 바짝 긴장한 연인을 염려하듯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늦게 데리러 가서 미안. 나도 보고 싶었어.”

“너 미쳤어?”

“헤일라?”

그는 몹시 당황하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헤일라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성큼 다가와 그녀의 두 팔뚝을 쥔다. 알싸하고 청량한 향이 훅 끼쳐 들었다. 왜인지 아찔했다.

3년. 3년이었다. 헤일라라고 해서 그가 증오스럽기만 한 건 아니었다. 분노와 배신감은 시간과 고됨에 의해 조금씩 마모되었다. 사막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퍽퍽한 외로움이 그녀를 덮칠 때마다 그가 그립지 않았냐고 한다면, 그래. 그건 거짓말일 테다.

왜 아니겠는가? 그는 안식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웃으며 재회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 추억이 아무리 아름답게 빛이 나도 그것은 깨어진 유리 조각이 반사해 내는 빛이었다. 허상보다 위험한 잔상.

게다가 헤일라는 리안을 버렸다. 조금이라도 분노의 감정이 있을 터인데 어째서 이토록 다정하기만 한가. 비상식적인 간극이 마치 갈라진 땅처럼 느껴져 두려웠다.

헤일라는 간신히 이성을 부여잡고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이거 놔.”

“다 사정이 있었어, 정말이야.”

“진짜 왜 이래!”

완강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순간 그의 얼굴에 섬찟한 무표정이 떠올랐으나 헤일라는 그를 밀쳐내는 데 사력을 다해 보지 못했다. 리안은 금방 표정을 바꾸어 어미에게 거절당한 아이 같은 올망졸망한 눈을 하고 헤일라를 바라보았다.

“다 알고 있었니? 내가 어디 사는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어?”

꽉 문 입술 아래가 아렸다. 이제까지 리안에게 들키지 않으려 모자를 눌러쓰고, 비렁뱅이를 포섭해 약을 구했던 나날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응.”

리안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네 거처를 내가 모르면 안 되잖아.”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양, 태연하기까지 했다. 그는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하는 헤일라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리안은 천천히 다가와 헤일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낭창한 허리가 꼿꼿하게 굳었다. 그가 낮은 숨을 토해 낸 탓에 목덜미가 간질거렸다.

“그럼, 그럼 왜 그냥 뒀어?”

“…….”

“그럼 왜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언니를, 나를…….”

목이 꽉 막혔다. 헤일라는 더듬더듬 말하다가 갈피를 잃은 사람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말 못해. 미안.”

리안은 헤일라를 품에 안아 좋기만 한지 푸스스 웃으며 이야기했다. 완전히 미친 것 같았다. 헤일라가 그를 세게 밀어냈지만 딱딱한 남자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안긴 채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언니는.”

“…….”

“언니는 어디에 있어? 이 집에 있는 거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헤일라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여기 오면 보여 준다고 했잖아. 돌려준다고 했잖아!”

침묵을 지키는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 머리칼만 살살 쓰다듬을 뿐이었다.

“리안, 제발!”

헤일라가 다시 한번 리안을 밀쳐내자 그가 순순히 밀려났다. 그리고는 밀쳐진 제 가슴팍을 힐금 보고 헤일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요요한 검은 눈이 그녀를 범하듯 훑었다.

“제발?”

그가 되물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리안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헤일라에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 섞인 애원을 보낸 건 헤일라였다.

“언니는 잘 있는 거지? 그냥, 그냥 나한테 화가 나서 잠깐 어디 데려다 놓은 거지?”

“…….”

만약 리안이 언니를…… 끔찍한 상상이 그녀를 덮쳤다. 담아 두었던 두려움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절박함을 담아 다시금 물었다.

“아니면 내가 보고 싶은데 미안해서, 그래서 그냥…… 장난처럼, 응? 그런 거야?”

“여전히.”

리안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섬뜩했다.

“여전히 레테를 끔찍하게 챙기는구나.”

“……리안.”

“응.”

헤일라의 부름에 그가 히죽, 웃었다.

“걱정하지 마. 레테는 잘 있으니까.”

불길했다.

“네가 그 애를 이렇게나 걱정하는데, 어떻게 해치겠어.”

그의 말은 이상했다. 마치, 헤일라가 레테를 아끼지 않으면 결코 살려 두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는 듯하였다. 사람의 목숨이라는 걸 아주 하찮게 여기는 사람 같았다.

헤일라는 그 말의 저의에 대해 차마 묻지 못하고 숨만 골랐다. 그의 입에서 무슨 미친 소리가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자극해서는 안 되었다.

“레테는 잘 있어. 그러니까 나랑…….”

헤일라의 목울대가 가볍게 울렸다. 몇 초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갖 음탕한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자신에게 바랄 것은 그런…… 그런 나쁜 짓밖에 없을 테다.

하지만 리안은 내민 것은 의외로 아주 쉽고 간단한 선택지였다.

“저택 구경이나 하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 구경하면, 보내 줄 거야? 언니도, 돌려놓고?”

“음.”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안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 보고도 그럴 마음이 든다면 그렇게 할게.”

저택의 호화로움에 넘어가 그녀가 레테를 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리안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내 마음이…… 바뀌는 일은 없을 거야.”

리안은 답하지 않았다.

* * *

“자꾸 붙지 마.”

더욱 단단해지고 넓어진 몸뚱어리가 헤일라에게 바짝 붙어 걸었다. 헤일라는 널찍한 복도를 걸으면서 그녀의 옷자락에라도 한 번 닿아 보려고 애쓰는 남자를 두고 경고했다.

리안은 이 층 복도에서부터 내내 그녀에게 딱 붙어 걸었다. 이제 응접실 하나 봤는데 벌써 피로했다. 뒤에 사용인들까지 줄줄 달고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연인 사이를 과시하려고 안달 난 사람 같았다.

“발은 왜 그래?”

그가 그녀의 맨발을 보고 물었다. 리안이 화제를 전환했으나 헤일라는 냉랭하게 답할 뿐이었다.

“말 돌리지 말고.”

“발 차가워지는 거 싫어하잖아?”

움찔. 헤일라의 검지가 약간 꿈틀했다. 손발이 쉽게 차가워지는 헤일라는 발이 차가워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걸 기억하는 그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또, 이 대화가 너무 옛날과 비슷해서 짜증이 났다. 꼭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금방 나갈 거니까 상관없어.”

헤일라는 왜인지 변명하는 사람처럼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더러워질까 봐 벗고 온 것뿐이야.”

“누가 그러라고 했어?”

일순 복도에서 둘을 뒤따르던 하녀들 모두가 긴장했다. 물론 리안은 여전히 상냥했다. 올라간 입꼬리, 적당히 휘어진 눈. 그러나 기묘하게 무언가 엇나간 느낌이었다.

“……제가 다른 신발을 드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흙투성이 신을 신고 계시기에…….”

헤일라를 방으로 안내했던 하녀였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주변 시종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으나 하나같이 리안의 반응에 집중하고 있었다.

언제나 집 안을 돌보는 데에는 무심하던 주인이었다. 처음 공작이 되었을 때 집 구조며 가구를 뜯어고치라 명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가끔 남루한 차림의 인간들이 저택을 방문하긴 했지만, 리안은 사용인들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이들이라고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어떤 의도로 왔는지도, 무슨 일을 하고 나가는지도 사용인들은 알지 못했다. 밤에는 사용인들이 모두 저택 밖의 숙소에서 지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가끔 방문하는 객들이 깊은 밤이 되어 저택을 나갔다는 파이라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리안의 객에게 깍듯했던 하녀들도 그들의 차림새에 따라 대우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주인이 돌보지 않는 집의 기강은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져 있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여도 주의를 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헤일라라는 여자에게도 냉랭하게 대했을 뿐인데.

엄청난 실수를 해 버린 걸까. 이런 식으로 따라다니며 시중들라고 한 것도 처음이라, 안 그래도 책잡히지 말라고 하녀장이 신신당부했는데. 하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긴 침묵 끝에, 마침내 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것으로 끝이었다.

역시!

하녀는 긴장이 확 풀림과 동시에 입가에 작은 미소를 걸쳤다. 그리고 조금은 의기양양하게 다시 제자리에 섰다.

저 여자도 별것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리안과 헤일라는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가 온갖 방을 다 열어 보았다. 헤일라는 점점 지루해져 가는 낯빛이었지만 리안은 집에 관해 열심히 설명했다. 서재, 침실, 응접실, 다이닝 룸, 손님방까지 전부 둘러본 뒤에야 그는 만족했다.

“이제 다 본 거야?”

“아니. 아직.”

헤일라가 작게 한숨 쉬자, 그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와 눈을 맞춰 왔다.

“집, 마음에 안 들어?”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할 게 뭐가 있어. 네 집인데.”

“우리 집이 될 수도 있는데.”

“…….”

“네가 원하면.”

스읍,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사용인 무리에서 누군가 헛숨을 쉰 탓이다. 그러나 리안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전부 바꿔도 돼. 네 취향이 제일 중요하니까.”

“리안.”

“응.”

“우리 이미 끝났잖아.”

“…….”

“그런 말 안 했으면 좋겠어. 네가 뭘 보여 줘도 난 너랑은 안 살아.”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리안은 헤일라의 손을 꼭 쥔 채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린 듯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리 와, 헤일라.”

너한테 꼭 보여 주고 싶은 게 하나 남았어…….

마치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외면하는 아이 같았다. 헤일라는 마지못해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제 마지막이었다. 이곳만 보면 어찌 되었든 그와의 약속은 모두 지키는 셈이었다. 그녀는 리안도 약속을 지켜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파이라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리안을 따라 걷는데 나이 든 집사가 다가와 알렸다. 파이라라면…… 헤일라는 저를 이 저택에 데려다 놓은 남자를 떠올렸다. 집사의 뒤를 보니 정말로 그가 서 있었다. 상자 하나를 손에 든 채였다.

“그래.”

그는 그 말만 하고 헤일라의 손을 잡아 지하로 통하는 두꺼운 철문 앞으로 이끌었다.

“……여기로 들어가는 거야?”

꼭 감옥의 입구 같은 모양새였다. 리안이 천진한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은 불길한 쇳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그에 헤일라의 어깨가 움칠 튀었지만 리안은 그녀의 손을 더 꼭 쥘 뿐이었다.

“휴리트가의 저택에는 지하실이 아주 많아. 꽤 유명할 정도로.”

리안이 파이라에게 명령했다.

“너만 따르고 나머지는 여기 남도록.”

파이라를 제외한 나머지 시종들은 모두 문 앞을 지키라는 의미였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더 커지는 듯했다. 헤일라는 긴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을 더 굳혔다.

머릿속에 삐- 하는 소리가 들리고, 신전에서 리안이 저를 억지로 취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헤일라는 애써 기억을 물렸다.

“자, 이리로.”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고 싶지 않았지만 아래는 어두웠다. 손을 잡지 않으면 엎어져 창피를 당하기 딱 좋았다. 헤일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갔다. 리안의 손은 따뜻했다. 꼭 이전처럼.

아니, 생각하지 마. 떠올리지 마. 다 지나갔어.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마음속으로 중얼댔다.

“헤일라.”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모두 내려가고 문 하나가 더 나왔을 때 리안이 그녀를 불렀다. 지하 깊숙한 곳인지라 목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꼭 낙뢰가 내리치기 전 하늘이 울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헤일라는 주눅이 든 사람처럼 조용히, 응, 하고 답했다.

“지난 삼 년간 매일매일 생각했어.”

“…….”

“네가 왜 나를 떠났는지, 왜 레테에게 갔는지.”

내가 거짓말을 해서, 그래서만은 아니었잖아, 그렇지?

리안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빠르게 속삭였다. 헤일라는 문에 등이 붙은 채, 아니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바짝 얼어 그를 밀어냈다.

“너는 정말 귀여워.”

“읏, 리안.”

“작고 약한 것들이 짓밟히는 걸 싫어하다 못해 두려워해. 그게 너 때문이라면 더더욱.”

단단한 손이 얇은 팔뚝을 점점 더 꽉 움켜쥐었다.

“불쌍한 걸…… 그냥 못 지나치잖아.”

“윽, 아파!”

이제 헤일라는 필사적으로 리안을 밀어냈다. 그러나 리안은 다정한 말투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너는 내가 싫은 게 아니야, 헤일라. 싫어했던 게 아니야.”

쿵. 이 또한 이명인가. 헤일라는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너무나 선명하게 귓가에 쿵, 쿵 소리가 울렸다.

“그냥 선택을 잘못한 것뿐이야. 그년이 불쌍해서, 그래서 마음이 기운 거야.”

리안이 헤일라의 등 쪽으로 손을 둘러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끼이이이익-

불길한 쇳소리가 다시금 그녀의 정신을 지배했다.

“그래서 준비했어.”

그가 딱딱하게 굳은 헤일라의 어깨를 억지로 잡아끌어 몸을 돌렸다.

이상해. 무서워, 도망가고 싶어…….

본능이 소리쳤으나 여자는 그가 이끄는 대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축축한 바닥이었다. 다음으로는 방부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역한 기운에 입과 코를 가볍게 막으니 리안이 미안하다는 듯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리안은 저것만 보고 얼른 나가자는 말을 하고 오른쪽 벽면을 가리켰다. 헤일라는 순순히 그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저게…… 저게 무…….”

인간의 무언가였던 조각들이.

“무슨!”

잔뜩 전시되어 있었다. 헤일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렸다. 토기가 올라와 욱욱대며 헛구역질을 했다. 리안은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았다.

“고개 돌리면 안 되지, 잘 봐.”

“흑, 아아!”

리안이 토기를 참지 못한 헤일라의 턱을 쥐었다. 토사물이 손에 질질 흘렀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헤일라의 얼굴을 방 안을 향해 들이밀었다. 오른쪽, 왼쪽 벽면에 살덩이들이 빼곡히 늘어져 있었다.

“네가 나를 떠난 시간 동안 너와 닿았던 이들의 조각이야.”

“아, 아, 아…….”

말도 안 된다 읊조리는 그녀의 목덜미에 리안이 고개를 처박고 쿡쿡 웃었다. 헤일라의 머릿속에 언제 닿았을지 모르는 이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리안은 친절하게 조각들의 주인을 소개해 주었다.

“가장 오른쪽에 위에 있는 건 네가 작년 겨울에 만졌던 아이의 머리칼.”

“하, 지마!”

“그 옆에 있는 건 저번에 네가 신전 심부름을 시켰던 늙은 여자의 손…….”

“그만, 그만!”

“아래에 있는 건 이 년 전 시장에서 네 발을 밟은 남자의 발이야.”

코끝에 피비린내가 스치는 착각이 일었다. 방에 있는 수십 개의 신체 조각들이 자신을 향해 기어 오는 듯 아찔했다.

다 죽은 거야? 나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자신 때문에. 리안이 죽였다고 한다. 정신이 혼미했다.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헤일라가 그의 품에서 허우적댔다. 리안은 기쁘게 그녀를 품 안에 들여 안아 주었다.

“너는 불쌍한 것들에 약해.”

“흑, 으윽, 으으…….”

“그래서 이렇게 하기로 했어. 네가 나랑 떨어져 있으면…….”

“허윽, 윽, 흐읍…….”

“너랑 닿은 모든 것들은 더 불쌍해질 거야.”

비명에 가까운 애원, 그리고 원망의 말들이 엉망으로 섞여 토해졌다. 그러나 리안은 품 안의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가를 부드러이 닦아 줄 뿐이었다.

헤일라가 옛날에 주었던 그 천 조각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때와 완벽히 똑같은 모양으로 그의 손에 들려 있다. 헤일라가 발발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충격을 넘어선 공포감이 그녀를 지배했다. 꿀렁, 하고 몸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는 기분이었다.

“이제 나랑 계속 같이 있을 거지?”

“아, 아아, 아아아……!”

헤일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것이 끔찍했다. 믿고 싶지가, 믿을 수가 없었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 리안을 제치고 이 끔찍한 공간에서 벗어나, 얼른 어디로든……!

“아직 마음을 못 정한 거야?”

리안은 시종일관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헤일라는 팔을 흐느적대며 울음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파이라 쪽을 바라봤다. 무언의 지시. 파이라는 굳은 얼굴로 제 품 안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리안이 그것을 받아 들고 헤일라와 눈을 마주했다.

텅. 헤일라의 머릿속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이걸 먼저 보여 줄 걸 그랬나.”

헤일라의 심장이 퍼덕댔다.

그녀는 이전에, 리안에게서 종종 일반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하곤 했다. 그것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서 가끔 발견되는 순수한 광기였다. 물론 그것에 놀라기는 했으나 공포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일반에 관한 학습이 부재한 탓이라 여겼으므로.

그러나, 그러나 지금은…….

저 눈은 너무…….

헤일라가 그의 모든 것에 압도되어 있을 때, 리안이 보석 상자처럼 고급스러운 붉은 원단의 상자를 달칵, 하고 열어젖혔다. 그것이 헤일라의 눈앞에 들이 밀어진다. 그리고, 그리고…….

“어, 어, 어, 어…….”

작은 함의 중앙, 꼭 반지가 끼워져 있어야 할 것 같은 자리에.

“설마, 이거.”

손가락이 있었다. 뼈에 살가죽이 들러붙어 있는 마른 손가락 두 개.

헤일라는 리안에게 붙잡힌 채 우두커니 두 살덩이를 내려다보며 꺽꺽댔다. 리안이 키득대며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 맞췄다.

“네가 매일 지겹도록 닦은 손가락이야.”

레테의 손가락.

저것은 레테의 손가락이다.

“그러니까 내 곁에 있어, 응?”

그렇지 않으면 그년이 더 불쌍해져…….

그의 말이 점점이 들러붙어 헤일라를 미치게 했다. 눈물이 마르지 않고 쏟아 내렸다. 그러다가 호흡이 가빠질 때 즈음, 남자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얼굴을 핥았다. 굉장히 안타까운 사람처럼 걱정스레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사람처럼 머뭇대다가 말했다.

“입 벌려 봐, 헤일라.”

그가 고백하는 남자처럼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니, 명령했다.

“키스하자.”

뜨거운 살덩이가 헤일라의 입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 * *

“헤일라는?”

“아직 주무십니다.”

으음. 리안은 의자에 손을 괴고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제 공간에서 곤히 잠든 헤일라를 상상했기 때문이리라. 파이라는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흐, 어으, 흐으, 사, 살려, 주,”

어두운 지하실에 신음 소리와 애원이 섞여 울렸다. 리안은 행복한 기억을 잠시 접어 두고 아래쪽으로 힐금 눈길을 주었다. 아래에는 하녀 하나가 제 종아리를 부여잡고 널브러져 있었다.

“안 죽여.”

그는 자못 자상한 주인처럼 이야기했다. 그리고 칼을 들고 발발 떨고 있는 하녀장에게 명령했다.

“얼른 해.”

자지러지는 소리가 다시 공간을 메웠다. 애원과 원망, 그리고 두려움이 섞인 비명이었다.

이곳은 헤일라가 실신한 그 지하였다. 리안은 헤일라가 울다가 실신한 직후 그녀를 제 침실에 뉘어 두고 모든 사용인을 지하실로 이끌어 모았다. 그 뒤가 이 모양이다.

헤일라를 맨발로 돌아다니게 한 하녀의 발목. 모든 사용인이 살아서 나가기 위해 무딘 도끼로 이 발목을 내리쳐야만 했다. 완벽히 절단될 때까지 누구도 이 공간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이 리안의 뜻이었다.

끔찍한 광경이다.

기괴한 지하실을 메운 신체 조각이 그간 저택을 드나들었던 남루한 이들의 살덩이임에 놀랄 새도 없었다. 사용인들은 기겁하면서도 살기 위해 주인의 명에 따랐다. 거부한 자들은 그 즉시 목이 썰렸으므로.

철퍽!

쇠붙이가 무언가를 내리찍고 빠져나갔다. 얼굴이 퍼렇게 질린 하녀가 결국 게거품을 물었다.

그 순간, 웨엑, 하고 시종 하나가 구토를 해 버렸다.

모두가 바짝 얼어 리안의 심기를 살폈다. 쥐고 있는 도끼로 토한 시종의 목을 잘라 내라 명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리안은 혀만 가볍게 차고 말았다.

“주의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모두가 고개를 조아리고 벌벌 떨었다.

“내 앞에서는 더러운 꼴을 보여도 상관없지만…… 헤일라 앞에서는 안 돼.”

그는 정말로 제 앞에 토사물을 쏟아 낸 남자를 처벌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경고 또한 진심이었다. 리안은 사용인들을 제대로 길들여 두어야겠다 생각했다.

자신 앞에서야 어떤 꼴을 보이든 상관없었다. 더러워도, 냄새나도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헤일라 앞에서는 다르지.

헤일라는 더러운 것을 보아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입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생각해야 했다.

앞으로 쭉, 그렇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 * *

티끌까지 새하얀 공간, 타론 제국의 성지, 신이 사랑한 장소, 세니르 신전.

레테는 세니르 신전의 제 방을 훑으며 사색하다가 눈썹을 내리깔았다. 눈동자에는 신을 향한 경애도, 신전을 향한 애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텅 빈 그늘에 홀로 서 있는 사람처럼 공허한 얼굴이었다.

미아르가 각별히 레테의 모든 것에 신경을 쏟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신이 가장 편애하는 신관인 만큼 대우를 해 주고 있는데도 레테는 만족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방은 작지 않은 적당한 크기였으나 가장 귀한 것들만 오롯이 모아 둔 방이었다. 정갈하고도 고풍스러움이 넘치는 태피스트리, 장인이 혼을 쏟아부어 만든 조각상과 진짜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정교한 정물화. 그리고 신의 사자에게만 주어진다는 녹색 관이 방의 끄트머리에 장식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책에 관심을 보이기에 온갖 고서와 귀한 금서들이 산재한 방까지 내어주었으나 흥미도 잠시 잠깐이었다. 레테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물고기같이 축 늘어졌다.

만약 그런 레테에게 질리지 않고 찾아오는 베르디안이 없었다면, 이 방 안은 매일 죽은 듯 고요했으리라.

“오늘은 이걸 하고 놀자.”

그가 레테에게 끈덕대기 시작한 지 오십여 일이 훌쩍 넘었다. 납치당하듯 신전에 처박힌 지도 그 정도 되었다는 의미였다. 고급 의술을 이용한 치료를 받은 지도 그즈음 되었다. 몸은 한결 가벼워졌으나 레테의 뾰족한 성정은 그대로였다.

“꺼져.”

그럼에도 베르디안은 꿋꿋하게 제 할 말을 이었다. 체스판을 침대 위에 조심스레 올려 두고 말들을 세팅하는 손길이 우아했다.

“체스라는 게임이야. 여러 말들을 움직여서…….”

“알아.”

레테가 지루하다는 듯 말을 끊어 먹었다. 반짝. 그의 눈이 빛났다.

“알아? 어떻게?”

“몸 팔 때 배웠어.”

남 일 말하듯 무심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매음굴에서 그런 것도 가르치나?”

남자 또한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방을 지키고 있던 신전의 종들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신성한 공간에서 매음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부끄러움이 전혀 없는 저 얼굴들을 보라. 신께서 노하실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레테 님의 심기를 어지럽혀 좋을 게 없는데…….

시종들은 고개를 수그리고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분풀이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두려움이 기어 올라왔다. 그러나 레테는 불쾌감이라고는 전혀 스미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종종 높은 것들이 오기도 했으니까. 심기 맞춰 주려면 적당히 져 줄 수 있는 수준까지는 배워야지.”

“좆질 하러 가서 웬 체스야. 미친놈들.”

레테가 베르디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너도 여기 좆질 하러 온 거 아냐?”

그녀는 피해 가는 법이 없었다. 그는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눈을 피했다.

“하러 왔으면 바지나 벗어. 시끄럽게 주절대지 말고.”

레테가 검지로 그의 바지 허리춤을 슬쩍 끌어 늘였다. 손가락이 세 개밖에 남지 않은 왼손이었다. 베르디안의 시선이 손가락에 닿았다.

“왜, 흥이 식었어?”

그녀는 자신의 빈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웃었다. 숫제 약을 올리는 듯도 하였다.

“아니면 병이 옮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나? 이제 와서.”

물론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은 레테가 더 잘 알 테다. 그는 레테와 관계를 가지면서 신전에서만 제공하는 해독약을 복용하고 있었고, 병이 옮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레테가 앓는 병은 아주 값비싼 텔피데리움이라는 약초만 복용하면 성관계 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약초가 아주 귀하고 비싸기 때문에 매음굴에서는 구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레테는 저런 말을 종종 했다. 고통과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태연하다. 당당했고 또 그만큼 스스로에게 무심해 보였다.

“그래도 벗어. 내가 하고 싶으니까.”

레테가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녀는 꼭 스스로를 상처 내는 말을 할 때마다 저렇게 웃었다.

손가락을 잘라 낼 때만 해도 그랬다. 레테는 손가락을 받으러 왔다는 파이라의 말을 듣고도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타인을 업신여기며,

‘그 칼 내놔. 내 몸에 더러운 손 대지 말고.’

스스로 제 손가락을 잘라 건넸다. 손을 떨지도 않고 잘 드는 칼로 제 손가락 두 개를 내리쳤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사내가 홀리지 않을 수 있을까? 신전을 기웃대다 그 장면을 마주한 베르디안은 그 뒤로부터 레테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지분댔다. 예상대로 레테는 지루했던 그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매일 찾아오는 단조로운 순간들 때문에 죽어 버리고 싶었던 베르디안은 레테를 만나고 삶의 의미를 찾은 양 행복했다.

이런 인간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하여, 레테가 어떤 명령을 해도 따라 줄 의향이 있었다. 그녀는 그가 갈구하던 즐거움을 주는 인간이었다. 가능한 한 오래 옆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희롱하며 괴롭히고 싶기도 했다.

“분부대로.”

그는 바지 버클을 끄르며 뭉근히 웃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 들었어? 네 동생, 매일 리안이랑 그 짓 하느라 바쁘다던데.”

“…….”

“애 배는 날도 머지않았다고 모두가 수군대는 모양이야. 조카 생기겠다, 그치?”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차가워졌다. 베르디안은 속으로 낄낄대며 레테의 반응을 가늠해 보았다. 평소처럼 뺨을 칠지도 몰랐고, 꺼지라 일갈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동생 이야기를 끔찍이 싫어하니까.

어느 쪽이 되었든 그녀의 반응을 관음하며 달래는 건 온전히 제 몫이리라. 마음에 들었다. 레테가 앓는 병 때문에 그녀와 몸 섞은 다음 날에는 끔찍하게 맛이 없는 약을 입에 처넣어야 하는 데도 상관없을 만큼.

베르디안은 두근대는 마음으로 푸석한 금발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방정하지 못한 아랫도리가 꺼덕대는 게 반쯤 풀어진 바지 틈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읍.”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꺼내기도 전에 레테가 그의 머리칼을 틀어잡고 입을 맞춰 왔다. 늘어져 있던 체스 말들이 흑백으로 섞이며 바닥으로 타다닥, 곤두박질쳤다. 순식간에 혀가 침입해 그의 입안을 헤집는다. 레테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 마냥 눈을 꼭 감고 행위에 몰두했다.

도발에 대한 무시였으며 동시에 조롱이었다. 이렇게 하면 그는 자신이 하려던 모든 일을 멈추고 본능에 따라 행동할 테니.

남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가 곧 천천히 감겼다. 베르디안은 레테의 예상대로, 어쩌면 그보다 더 짙게 행위에 몰두했다. 그녀의 조롱에 저를 맞추듯.

마른 가슴을 움켜쥐고 목덜미를 잡아채는 손이 크고 억셌다.

* * *

“노아, 제발 부탁이야. 오늘만 네가 대신 들어가 줘, 응?”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 역력한 루아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노데이나는 눈만 떼룩 떼룩 굴렸다.

“……안 돼?”

하녀 루아스의 표정이 바짝 굳었다. 노데이나가 고개를 푸욱 숙이자마자 거친 손길로 그녀의 두 어깨를 꽉 잡아 왔다.

“제발 부탁이야, 응? 나 오늘 몸이 좋지 않아서…….”

“미안해, 나는…….”

“아, 그래! 노아, 너 돈이 급하다 했잖아. 어머니 약값! 그거 내가 빌려줄게, 응?”

노데이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사실이었다. 돈이 급했고 그 돈이 없으면 이번 달 약도 구할 수 없을지 몰랐다. 휴리트가는 사용인의 봉급에 박하지 않았으나 병자가 있는 집안은 언제나 돈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루아스가 부탁하는 일은 죽어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공작의 침실에서 수발드는 일은 하녀 따위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값진 일로 취급되었으나 최근의 휴리트가에서는 가장 끔찍한 일로 치부되었다.

“그래! 그럼 다음 달 봉급에서 반 떼어서 너 줄게. 그냥 줄게. 응? 그래도 싫어?”

노데이나가 망설이는 기색이 보이자 불안했는지 루이스가 더욱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웠다. 노데이나의 입술이 끔벅댔다. 확실히 거부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어머니의 마른 손이 떠올랐고 그다음으로는 어머니의 수발을 드는 동생이 떠올랐다.

그녀는 창백한 낯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루이스의 얼굴이 환해진다. 루이스는 기다렸다는 듯 제가 손에 꼭 쥐고 있던 작은 환 하나를 노데이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고맙다고 외치는 동료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를 스쳤다. 루이스는 하녀장에게 자신이 말할 테니 얼른 가 보라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노데이나가 마음을 바꿀까 봐 몹시 서두르는 게 분명했다.

노데이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주인의 방 앞에 다다랐다. 그녀는 루이스가 쥐여 준 환을 잽싸게 씹어 삼켰다. 씁쓸한 맛이 역했지만 방 안의 최음 향을 견디기 위해서는 해독약을 미리 음용해야 했다. 약을 겨우 씹어 삼킨 뒤 노데이나는 식은땀이 밴 손으로 문을 열었다.

“아악, 악!”

안쪽에서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거기에 더해지는 아찔한 최음 향이 코를 찔렀다. 미리 환약을 먹지 않았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졌으리라. 노데이나가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아흐흐, 윽, 싫, 싫어…….”

쇳소리가 섞인 듯 탁한 여자의 애원과 사출된 액체가 찔벅이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다른 사용인 하나가 다가와 노데이나에게 턱짓했다.

침상 옆에 던져져 있는 수건을 치우고 새로운 것으로 갈아 놓으라는 명령이다. 가장 직급이 낮은 하녀가 하는 일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모두가 꺼려 하는 일이었다.

꿀꺽, 노데이나는 침을 삼키고 새 수건을 받아 든 뒤 침상 쪽으로 향했다. 방의 가장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자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울렸다.

“힉! 힉!”

여자는 정확한 말을 내뱉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것 같았다. 그러나 저택 안의 그 누구도 그녀를 섣불리 동정하지 않았다.

얼마 전 죽은 하녀 하나 때문이었다. 발이 잘려 죽었다는 하녀. 노데이나는 그날 휴가를 낸 유일한 사용인이었고 그래서 도끼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모두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리안 휴리트를 두려워하였고 그의 말에 복종했다. 주인의 말 한마디면 죽는시늉까지 할 기세였다.

그가 그날 도끼질한 이들에게 거액의 돈을 준 일 또한 사용인들의 입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일을 그만둔 이는 무어라더라, 호수에 빠져 죽었다고 하던가.

과연 사고였을까? 사용인 모두가 침묵했다. 그리하여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은 아주 충실해졌다. 씨받이 마냥 매일 남자의 아래에 깔려 엉엉 우는 여자를 모두가 외면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이었다.

“흐우우, 사람들…… 리안…… 너한테도…….”

움찔. 노데이나의 어깨가 들썩였다. 여자가 말하는 것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그래, 그렇게 벌리고……”

뒤로는 주인의 목소리였다. 노데이나는 침대 아래 널브러진 수건을 개어 옆으로 놓아두고 새로운 수건을 협탁에 올려 두었다. 손길이 다급했다.

“시러…… 시러어…….”

“응? 싫어?”

“흐…… 응…….”

“그럼…….”

남자가 귀엣말로 무어라 속삭였다. 노데이나가 있는 곳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 여자가 경기를 일으키듯 파드득댔다. 캐노피를 사이에 두고도 그 격렬한 몸짓이 느껴질 정도였다.

“안 돼! 안 돼!”

“응, 그런데 네가 싫다고 하니까…….”

“흐, 아, 나, 내가…….”

“응, 네가 싫다고 해서. 그래서.”

“……나, 때문, 나 때문에…… 언니랑, 아…….”

등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노데이나는 저도 모르게 침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본 것이 아니다. 미친 주인이 여자를 어떤 식으로 길들이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소름 끼치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벌어진 침상 캐노피 사이로 리안 휴리트와 눈이 마주쳤다.

* * *

“눈 떠.”

감은 왼쪽 눈 위에 축축한 혀가 닿아 눈꺼풀을 밀어 올리듯 핥았다. 생경한 자극에 헤일라가 경련하듯 떨었으나 그 움직임도 찍어 눌린 소동물의 것 마냥 박약해 보였다.

침대의 사면에 처져 있는 캐노피 사이로 빛이 흘러 남자의 얼굴 윤곽을 비껴갔다. 몽롱한 눈을 한 헤일라는 겨우겨우 숨을 내쉬면서도 리안의 명을 착실히 따랐다.

방금 젖은 천이 훑고 지나간 보드라운 살결 위에 큰 손이 얹어졌다. 그는 방금 자신이 손수 닦아 준 여체를 탐음하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러 끈적했던 목덜미 아래로, 긴장으로 바짝 서서 단단해진 젖꼭지를 지나 오목한 배꼽, 깊고 은밀한 사타구니 안쪽을 더듬었다.

부스럭 소리와 인기척이 침대의 캐노피 밖에서 느껴졌다. 그가 침대 밖으로 던진 젖은 천을 수습하는 하녀의 움직임일 테다. 방 안에 있는 것은 헤일라와 리안 둘뿐만이 아니었다. 부지런히 향을 피우고 그가 명하는 모든 것을 수행하기 위한 사용인들이 자리를 지켰다.

게 중에는 남자도 있었다.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난잡한 정사를 치른다는 게 상식 밖의 일처럼 느껴지는지, 헤일라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항상 울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리안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남자는 선뜻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모든 건 제 것이었다. 스스로를 내어준 것도 헤일라였다. 몸을 섞을 때마다 경매장에 끌려가는 노예 마냥 추연하게 굴 이유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둔덕에 머물던 제 중지를 음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몬드처럼 예쁘게 빚어진 눈이 크게 뜨였다.

“아아!”

뻑뻑한 아래가 이물질의 침입에 더욱더 조여들었다. 헤일라는 파드득 떨면서도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침대보만 꽉 쥐었다. 천으로 둘러싸여 바람이 통하지 않는 침대 안쪽의 공기가 후끈거렸다.

그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여자를 찍어 누른 채로 음부의 털을 헤집으며 음핵을 더듬었다. 물기가 부족해 문지르는 것만으로는 자극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움직여 안을 더듬기를 멈추지 않는다. 고운 목소리가 엷게 갈라져 울릴 신음을 매 순간 고대하기 때문에.

“히익, 시러, 시러어…….”

그러나 헤일라는 옅은 신음만을 내뱉으며 고개만 도리도리 내저을 뿐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득바득 버티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한숨 쉬듯 웃는 리안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내리깔렸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

“모두 우릴 위해 준비된 것들이야.”

기실 세워 놓은 하녀들은 구체적인 소문을 입에서 입으로 얽어 수도의 모든 이가 하나의 사실을 알도록 하려는 장치였다. 살생 이외에는 흥미를 두지 않던 리안 휴리트 공작에게 연인, 또는 정부, 그도 아니면 노예가 있다더라. 공작이 그녀와 밤을 보내고 숨길 생각도 없이 난잡하게 성교를 하며…….

“내 부인이 되어 주겠다고 했잖아, 헤일라. 고집부려도 소용없어.”

말을 마친 뒤, 리안은 쪽 하는 소리를 내며 헤일라의 안에 넣었던 중지를 핥고 빨았다. 그의 중지와 입술 사이에 실처럼 가느다란 점성이 이어져 있다가 죽 늘어났다. 리안이 눈웃음을 치고서 헤일라의 뺨에 입 맞췄다.

“사람들을, 으응, 내보내…… 리안…… 너한테도, 흣, 나빠아…….”

“다리 벌려.”

헤일라가 퍽 온전한 문장을 내뱉었다. 최음 향이 옅어졌나. 리안은 가볍게 혀를 찼다. 마치 아이를 어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녀의 애원을 투정으로 치부하고 무시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손수 허벅지 안쪽을 잡아 벌리고서는 헤일라를 칭찬했다.

“그래, 그렇게 벌리고…….”

“시러…… 시러어…….”

거부의 몸짓이 이어졌다. 동그란 둔부를 뒤틀어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애쓴다. 리안의 얼굴이 웃은 채로 멈추었다. 싸늘함이 감돌았다. 그는 상냥함을 가득 바른 목소리로 물었다.

“응? 싫어?”

“흐…… 응…….”

“그럼…… 내 마음대로 해?”

헤 하고 벌어진 입이 몇 번 빠끔댔다. 황금빛 눈알이 몇 번 흔들리다가 이내 몸 전체가 파들파들 떨렸다.

“안 돼! 안 돼!”

“응, 그런데 네가 싫다고 하니까…….”

“흐, 아, 나, 내가…….”

“응, 네가 싫다고 해서. 그래서.”

“……나, 때문, 나 때문에…… 언니랑, 아…….”

“응, 너 때문이야.”

리안이 캐노피 바깥의 하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자, 저기 봐 봐 헤일라. 누가 널 훔쳐보고 있지?”

갈색 머리의 하녀는 젖은 수건을 손에 쥔 채 달달 떨었다. 차마 눈도 피하지 못하고.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헤일라에게까지 닿았다. 여자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간다.

“저 여자도…….”

“아아악! 싫어! 싫어!”

그녀는 하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싫다며 비명을 질러 댔다. 하녀는 재빨리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헤일라의 발작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쉬이, 쉬, 괜찮아. 안 죽일게. 응, 착하게 굴면…….”

너만 착하게 굴면…….

리안은 요즈음 매일같이 하는 말을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헤일라는 무익한 반항을 멈추고 엉엉 울기만 했다. 굴복의 의미이기도 했다. 체념의 빛을 비추는 눈이 늪처럼 깊고 우울했다.

남자는 그런 헤일라를 보면서 뿌듯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느리게 움직여 아래에 가져다 댔다. 조그마한 구멍 위를 살살 돌리고 또 그 위로 더듬더듬 올라가 툭 튀어나온 알맹이를 뭉그러트렸다.

여자는 선득함에 몸을 달달 떠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가슴이 씨근댈 때마다 색이 옅은 유두가 봉긋거리는 것이 퍽 마음에 찼는지 급히 가슴을 크게 베어 물고 빨았다. 안쪽에 예쁜 꼭지가 숨어 있음을 알기에 혀로 달래듯 파내다가 다시 강하게 빨아 들이기를 반복했다.

헤일라는 매일 학대당하는 젖꼭지와 음부에 다시 자극이 쏟아지자 고개를 꺾고 숨을 골랐다. 아프다. 하지만 참아야 해. 착하게 굴어야 해…….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 사실만 존재했다. 다른 건 없었다. 그가 그렇게 가르쳤다.

“이제 들어갈게.”

그가 가슴에서 입을 떼고 은근하게 속삭였다. 머릿속까지 푹 퍼져 빠르게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여자의 눈이 느리게 뜨이다가 이내 꽈악 차오르는 감각에 동공이 확장됐다.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커다란 귀두가 미끌대는 질구를 관통했다.

“하앙!”

“쉬이, 힘 빼야지.”

“아, 리아안! 흑,”

그는 낮은 숨을 깊게 토하며 제 여자와 완전히 결합한 것에 대한 음험한 만족감을 내비쳤다. 매일 그녀를 탐하면서도, 할 때마다 아주 오랜만에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는 여체를 거칠게 찍어 누르면서도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오히려 더 개처럼 박아 헤일라의 교성이 사용인들의 귀에 들어가도록 애썼다. 다시 도망갈 엄두도 낼 수 없게. 그는 무성한 소문을 흩뿌리고 헤일라를 사람들 앞에 내던져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기둥 때문에 하반신이 벌벌 떨렸다. 헤일라는 쉼 없이 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리안, 리안, 하고 애처롭게 울어 대는 여자의 음성은 한계까지 확장되어 빠끔거리는 그녀의 아랫구멍만큼이나 그를 자극했다.

“다리 닫지 마.”

“흐, 흐아, 아아…….”

그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려 자신을 보호하려는 여자의 무릎을 잡아 빼고 허벅지 아래를 눌러 다리를 들게 만들었다. 해부당하는 개구리 마냥 몸이 열려 아래가 훤히 보이는 자세에도 수치심이 들고 일어날 새가 없었다.

그가 완전히 밀고 들어와 내장이 짓눌려 배 안쪽이 엉망으로 짓이겨지는 감각에 헤일라가 힉힉 거리며 침상을 더듬었다. 그런 여자가 가여울 법도 하건만, 리안은 허리를 뒤로 뺀 뒤 다시 강하게 쳐올렸다. 진득하게 꽉 조이는 내벽 때문에 남자가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입술을 벌리고 발발 떠는 하얀 헤일라의 얼굴을 핥듯이 관음했다.

헤일라의 번들대는 눈동자가 광기 서린 남자의 얼굴을 반사해 비췄다. 결국,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리안은 자신의 성기를 품고 있는 배꼽 아래, 아기집 아래쪽을 검지와 중지로 꾸욱 눌렸다.

“나 봐, 헤일라.”

“욱…… 으윽…….”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할 거야. 네 여기에 쑤셔 박아서 자지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그는 매일 하던 말을 다시 씹어 뱉었다. 그의 말은 날것의 감정을 그대로 싣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는 그도 저가 뭐라 지껄이는지 몰랐다.

그만큼 강렬했으며 광막한 감각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버리기 전에 진즉 이렇게 묶어 뒀어야 했는데. 처음 봤을 때 목덜미를 낚아채 꼼꼼히 살라 먹어 떠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할걸. 이렇게 맛있는 것을 떨어져 있던 삼 년간 다른 수컷들이 눈독 들였을 상상을 하니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리안이 두 손으로 헤일라의 양 볼을 잡고 깊이 입을 맞췄다. 일방적으로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훑고 여린 살덩이를 빨아 삼켰다. 간신히 호흡하던 경로를 틀어막고 거칠게 허리를 놀려 저를 박아 넣었다. 음모끼리 비벼져 까끌대는 자극마저 미치게 좋았다.

헤일라의 얼굴이 눈물과 타액으로 점차 흐려졌다. 남자는 그저 박고, 박고, 박다가 여자의 고통스러운 신음과 찌그러진 눈에서 나오는 눈물에까지 발정하며 흘레붙었다.

“흐앗!”

“윽.”

순간 헤일라의 내벽이 강하게 수축해 성기의 굴곡에 맞춰 다닥다닥 빈틈없이 달라붙어 자극했다. 쾌감 한 점 받아먹지 못하고 가혹한 두께의 양물에 학대당하던 여체가 찌릿한 감각에 튀어 올랐다.

남자는 그녀가 반응한 지점을 다시 찔러 넣었다. 이불보만 쥐고 있던 손이 그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내저었다. 절벽 끝에 다다른 사람처럼 절박한 얼굴이었다.

“괜찮아, 응? 조금만 힘 빼 봐, 윽, 헤일라…….”

“힉, 히익, 아, 않…….”

어르는 음성이 작위적이었다. 남자는 헤일라가 반응하는 곳을 부드럽게 누르고 비비면서 자극했다. 어깨를 밀어내는 손을 잡아채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핥아대는 남자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다정했다.

결국, 헤일라의 배가 둥그런 모양을 띠며 튀어 올랐다. 착해. 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눈을 휘었다. 쾌감에 표정이 풀려 턱 끝이 떨리는 헤일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한참 동안, 교접 부위에 포말이 일 정도로 오래 정사를 이어 나갔다. 그가 파정하고 아랫배에 뜨뜻한 액체가 고였을 때는, 샅에 부딪혔던 여린 살갗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던 리안의 폭력은 어느 날 갑자기 중지되었다. 관계 도중 헤일라가 하혈한 날부터였다.

그날도 리안은 정신을 잃은 헤일라의 아래에 붙어 정신없이 허리를 쳐올리고 있었다. 얇은 다리를 양옆으로 벌린 채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유연하게 몸을 움직였다.

축 늘어진 몸에도 반응하는 억센 몽둥이 모양의 성기는 쉬지 않고 작은 구멍을 농락했다. 철퍽 철퍽 살 부딪히는 소리와 남자의 낮은 신음이 섞여 방을 메웠다.

리안은 손에 쥔 허벅지 안쪽 살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폭 파인 배꼽을, 그 위에 퉁퉁 불어 젖꼭지가 쏙 비져 나온 가슴을 훑었다. 관음은 남자를 파정의 늪으로 이끌었다. 리안이 다시금 퍽, 하고 헤일라의 안쪽을 찍어 눌렀다.

그런데 일순 뜨거운 무언가가 그의 성기를 타고 주룩 흘러내렸다.

무언가 이상했다. 애액은 이렇게 묽게 흐르지 않는데. 리안은 황급히 상체를 뒤로 젖혔다. 꺼덕이는 성기가 폭, 하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허연 정액만 흘러야 할 구멍에서 다른 색의 무언가가 비죽비죽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였다.

“무슨…….”

그가 멍청하게 말을 내뱉었다. 명백히 달거리는 아니었다. 그녀의 주기는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 리안은 모든 행동을 멈추고 헤일라를 약간 흔들었다. 그녀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항상 그랬듯 그냥 거친 행위에 지쳐 잠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몸도 조금 차가웠다. 냉기가 등허리를 스쳤다.

무언가,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정신을 지배했다.

리안이 급히 헤일라의 몸을 이불로 감쌌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여의원 몇을 불러 상태를 살피게 했다. 행위는 간결했고 빨랐으나 명백히 정상인 상태는 아니었다.

그때 공작의 눈이 어떠했더라. 리안의 모습을 본 그날의 가신들은 다시금 치를 떨었다. 주인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난감을 실수로 망가트린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차라리 의원을 들들 볶거나 윽박질렀다면 덜 두려웠을 텐데. 그는 그저 여자의 옆에서 눈을 굴리고, 머뭇거리면서 손을 툭, 건드렸다. 슬금슬금 손을 꼭 잡는데도 여자가 반응이 없자 숨을 가쁘게 쉬었다. 표정이 일그러진 건 그다음이었다.

헤일라. 약간 쉰 소리로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리안이 반 미친 사람처럼 조금씩 쥔 손에 힘을 가할 때 즈음, 헤일라의 아래를 확인하고 상태를 살피던 의원들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리안은 멍한 눈으로 그들과 눈을 맞췄다. 이성이 나가기 직전의 눈동자였다. 의원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스읍,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큰 병은 아닙니다.”

방에 있던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왜 안 일어나지?”

내가 부르는데…… 그는 헤일라의 이름을 중얼대며 손끝을 만지작댔다. 남자는 얇은 가운을 제대로 여미지도 않은 채 헤일라의 이름만 불러 댔다.

공작이 이미 미친 건 아닐까. 이 말을 했다가 이 여자도 나도 죽는 것 아냐? 의원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말을 지금 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잠시 갈등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말해야 했다. 자신이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숨겼다가 더 큰 화를 부르리라.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아기님을 품고 계시는 듯합니다.”

리안의 눈이 반짝, 하고 뜨였다.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방금과의 간극이 너무 커서, 주변의 모든 이들은 더욱 바짝 긴장했다.

“임신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무리를 하셔서 하혈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다행히 유산되지는 않으신 듯하나, 최대한…….”

“아이.”

“…….”

의원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 있던 모두가 침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이…….

“헤일라.”

전에 없이 격양되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잠든 여자를 불렀다. 그는 계속해서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하고 하나의 단어만을 입에 담았다.

“드디어…….”

환희에 차 잠든 헤일라의 볼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면서 천천히 손을 내렸다. 아랫배에 손끝이 닿자마자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손을 떼어 버렸다. 다시 천천히 팔을 뻗어 배에 손바닥을 뭉근히 비벼 보았다.

“아…….”

그는 자고 있는 헤일라의 조막만 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가장 단단한 족쇄를 그녀의 발목에 채워 두었다는 안도, 그리고 행복이 그를 감쌌다.

“헤일라…….”

폭력과 갈취를 일삼는 무법자에게 신이 선물을 내린 날이었다.

* * *

리안은 그날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했다. 그는 오롯이 다정해졌다. 그렇게 변화하고 스무날 정도가 지났다. 이제 저택의 사람들도 리안의 변화에 발맞춰 약간 숨을 틔었다.

이전처럼 주인의 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일을 떠넘기는 하녀들도 사라졌다. 조금 무섭기야 했으나, 주인은 더 이상 미친 짓거리를 일삼지 않았다. 모두가 일상을 되찾아 가는 듯하였다.

오늘도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남자는 흐뭇한 얼굴로 묽은 수프를 후후 불어 스푼으로 떠올리고 헤일라에게 가져다 대었다. 멍한 얼굴의 헤일라는 베개에 기댄 채로 입술을 약간 벌렸다. 그는 요령 좋게 그 안으로 음식을 밀어 넣었다. 입가에 약간 묻은 수프는 혀를 할짝여 닦아 주었다.

“아기 같다.”

귀여워. 그는 나른하게 속삭였다. 지금의 상황에 더없이 만족하는 사람 같았다. 헤일라는 그가 뭐라고 하든 멍한 눈으로 앞만 응시했다. 최음 향이 걷힌 지 꽤 여러 날이었는데도 머릿속이 윙윙댔다.

하루 이틀 사이에 해독되는 환각제가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상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옆에서 무어라 떠들어 대도, 헤일라는 무슨 말인지 인지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부유하는 단어라고는, 리안, 리안, 리안, 아, 그리고…….

누구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중요한 사람 같은데.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 같은데…….

머리가 꽉 막힌 듯 답답했다. 그러나 묻힌 인간에 관해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리안의 질문에 대답을, 대답을 해야 한다. 아, 리안이 무언가를 또 물어 왔다.

대답 못하면 화낼 거야. 혼나. 혼나는 거 싫어.

헤일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시중드는 일에 심취한 리안은 눈치채지 못하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맛있어? 이제는 속 안 울렁거려?”

작은 머리통이 천천히 아래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들렸다. 그녀의 최선이었다. 기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대답부터 한 것이나, 리안의 얼굴은 더욱 밝아졌다. 최근에 속이 메슥대어 음식들이 들어가는 족족 토해 내었는데, 이제는 상태가 퍽 호전되어 다행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는 꽤 오랫동안 그녀의 식사 시중을 들고난 뒤 손수 식기를 들어 침대 밖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에게 넘겼다. 리안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헤일라.”

바투 붙어 오는 움직임이 조심스럽다. 그는 제 여자와 나란히 침대에 기대앉았다. 어깨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여자의 배를 쓰다듬었다.

“헤일라.”

“으응…….”

리안의 눈에 기묘한 성취감이 어렸다. 시선은 헤일라의 납작한 배에 집중된 채였다. 크고 두툼한 손이 배꼽을 중심으로 느릿하게 원을 그렸다.

“레테 만날래?”

조악한 호의를 베푸는 남자는 한없이 자비로워 보였다.

“레, 테?”

“응. 레테.”

레테. 레테? 헤일라는 계속 중얼댔다. 리안은 친절하게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네 언니를 만나고 싶지 않느냐며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옆으로 넘겨 주었다.

언니.

헤일라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 변화를 감지한 리안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자신이 말을 꺼냈으면서도 심사가 뒤틀렸다.

“그래. 언니.”

“언니, 언니, 언니,”

단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여러 번 입안에서 발음을 굴리던 헤일라는 어느 순간 뚝, 하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 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무어라 중얼댔다.

“가야 되는데…….”

“…….”

“가도 돼?”

매섭게 벼려져 있던 그의 눈매가 약간 누그러졌다. 리안은 잘했어, 하고 헤일라의 엉덩이를 가볍게 쓰다듬은 뒤 볼에 입을 맞추었다.

“응. 대신에 이거 잘 먹으면. 열 밤만 자고 만나러 가자.”

그가 하녀에게 지시해 받아든 동그란 것을 손 위에 펼쳐 들었다.

“열 밤……?”

불안한 듯 눈을 좌우로 굴리자 리안이 손을 꽉 잡아 왔다. 헤일라는 입을 꾹 다물고 그에게 바짝 붙었다.

“말 잘 들을 수 있지?”

“응, 응…….”

그녀가 조금 급하게 대답했다. 언뜻 초조해하는 기색을 보인 듯도 하였다.

“자, 아, 하자.”

리안이 시종에게서 건네받은 작은 약 몇 알을 펼쳐 헤일라에게 내보였다. 며칠 전부터 먹는 약이었다. 헤일라는 눈을 꼭 감고 입을 벌렸다. 곧 약이 혀 위에 얹어지고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꿀꺽, 삼키고 입을 벌렸다. 언제나처럼 리안이 그녀의 입안을 살핀 뒤에야 헤일라는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녀가 먹은 것은 아이에게 해가 가지 않으면서 몸에 쌓인 환각 성분을 해독할 수 있는 약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해할 수도 없는 상태인 헤일라는 그저 리안이 이끄는 대로 착실히 따랐다.

그렇게 십여 일이 흘렀다.

* * *

신전에 발을 들인 건 이번으로 세 번째던가.

헤일라는 천천히 눈을 끔벅대며 리안과 나란히 걸었다. 신전의 복도를 걷는 둘의 앞과 뒤에는 여러 명의 시종들이 포진해 있었다. 리안은 아직도 자신이 허튼짓을 할지 모른다 생각하는 듯했다.

도망 따위, 칠 수도 없는데 그걸 이 남자만 몰랐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머릿속을 정리해 버렸다. ‘감히’ 그에게서 도망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몸속에 쌓여 있던 환각제가 걷힌 뒤에도 헤일라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리안이 입에 넣어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그가 옷을 벗겨 몸을 물고 빨면 앙앙대며 울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요즘에는 리안 쪽에서 성기를 삽입하는 성교는 피하고 있어 괴로움은 덜했지만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 하게 되리라.

자신은 명실상부 리안 휴리트의 것이었다. 제 뜻과 관계없이 그리 정해져 버렸다. 반항하면 더 괴로워진다. 나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아프고…… 더 이상 그런 건 싫었다.

리안의 말대로 나만 참으면 되었다. 모든 상황이 그랬다. 망치지 말아야지. 아무것도 선택하지 말아야지…… 주제를 알고 리안에게 복종하자. 그럼 언니를 살려서 신전에 잘 데려다 놓은 것처럼, 그는 아무도 해치지 않을 거다. 헤일라는 그렇게 머릿속에 엉킨 실들을 싹둑, 잘라 내었다.

“레테 님께서는 여기서 머무르고 계십니다.”

신전의 시종이 멈춰 서서 리안에게 고개를 조아린 뒤 설명했다. 리안은 문 너머의 모습을 점치는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헤일라가 시선을 흘긋댔다.

“……들어가도 돼?”

소심하게 묻는 목소리의 끝이 약간 떨렸다. 눈치를 보는 모습도 이렇게 귀여울 일인지. 리안은 작게 탄식하고 표정을 풀었다. 고개를 숙여 헤일라의 오른뺨에 입을 맞춘다.

“그럼. 만나러 온 거잖아.”

“응, 응.”

그녀는 안심한 듯 리안의 손을 꽉 쥐었다. 가르친 내용을 잘 따라 하는 어린아이 같아, 그가 작게 웃었다.

“언니랑 둘이 이야기할래?”

헤일라가 놀란 듯 입을 약간 벌렸다. 그래도 되냐고 되묻는 목소리에 옅은 감동이 끼어 있었다. 혈육과의 오붓한 만남을 허용해 주다니. 굉장히 자비로운 처사였다. 헤일라는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워했다.

“그래. 들어가 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방문에 노크를 했다. 언제나처럼 레테에게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헤일라는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뒤에서 저를 지켜보는 리안의 눈빛이 등허리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조금은 무섭기도 하였다.

탁.

드디어 방 안으로 완전히 몸을 밀어 넣었다.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 헤일라는 깊게 안심했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 방 안을 쭉 둘러보았다. 리안의 저택만큼 화려한 방이었다.

“언니…….”

그리고 그 사이에 앉아 있는 레테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잘 어울렸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침대에 앉아 있었지만 또 언제나와는 달랐다.

뭔가…….

“뭘 그렇게 서 있어.”

“…….”

“왔으면 앉아.”

레테가 턱을 까닥였다. 헤일라는 파드득 놀라 움칠대면서도 그 명령에 착실히 따랐다. 침대 옆 의자는 아주 푹신했다.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 같은 발 받침까지 있어 편안하게 앉을 수 있었다.

헤일라는 언니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조금 딱딱하고 냉랭하게 굳은 얼굴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동생을 대했다.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하나? 헤일라는 속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손끝을 탁, 탁, 건드렸다. 레테는 헤일라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손.”

“아, 미안.”

레테는 헤일라가 초조할 때마다 손톱 소리 내는 걸 못마땅해했다. 헤일라는 언니의 심기를 건드릴까 황급히 맞잡은 손을 떼어 냈다. 다시금 레테를 찬찬히 살피는 얼굴이 신중했다.

오늘은 필사적으로 레테의 기분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리안과 함께 지내게 되었고, 언니는 신전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해야 하니까. 레테를 충분히 이해시키고, 그녀가 흥분하지 않도록 옆에서 잘 설명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이전처럼 데면데면하게 굴면 안 되었다. 자신을 미워하는 언니지만 오늘만큼은 애써서…….

하지만, 차마 얼굴을 보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시선을 내린 것은 그래서였다.

“아.”

그때 헤일라는 잊고 있던 폭력의 흔적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아…….”

레테의 왼손에는 세 개의 손가락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헤일라는 거기에 시선을 뺏겨 멍하니 탄식했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려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너한테 보낸다고 들었는데.”

그러나 레테 쪽은 너무나 태연했다.

“몰랐어?”

오른손으로 왼손의 비어 있는 부분을 쓰다듬는 행위는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잘랐어. 손가락을 받아 가야 한다고 하기에.”

따르지 않아도 되는 명령이었음에도 따랐다. 그럼에도 여자는 저 좋을 대로 이야기를 각색해 동생에게 털어놓았다.

“그 새끼 짓이야.”

레테의 짙은 황금색 눈이 헤일라의 반응을 꿰뚫어 보려는 듯 반짝 빛났다. 그러나 헤일라는 덜덜 떨고만 있을 뿐 다른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았다.

“헤일…….”

“언니.”

헤일라의 떨림이 멈추었다. 레테는 냉랭하게 동생과 시선을 마주했다.

“미안해.”

미안? 레테가 헤일라의 사과를 따라 했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말을 안 들었거든. 그래서 그래.”

“…….”

“아, 어, 어떡해, 아, 아…….”

헤일라는 레테가 붕대를 감고 있는 손 쪽으로 제 손을 뻗어 왔다. 마른 손은 그 손길을 피했다.

“무슨 말이야? 그게 왜 네 탓이지?”

“내가, 내가아, 리안 말을 안 들었어.”

“그래서.”

“흑, 그래서 언니 손가락, 윽, 언니…….”

내가 또 언니한테, 언니를, 언니 손이…….

헤일라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댔다.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의 끔찍한 잔상과 고통스러워했던 레테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미안해…….”

또 이 모양이었다.

“너 때문에 또 레테만 다쳤어.”

누군가가 말했다.

“언니가 널 미워하는 것도 당연하지.”

익숙하지만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 헤일라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귀를 콱 틀어막았다. 언니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도 볼 수 없었다.

“지난 삼 년 동안 언니를 벌세웠어. 그럴 자격도 없는 년이.”

아니다. 언니를 괴롭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니었다. 그냥 도저히 이전처럼은 웃을 수 없어서, 그러면 리안이 떠오르니까. 아니, 사실은 언니 앞에서 웃을 수가 없어서…….

레테에게 냉랭하게 대했던 지난날들이 헤일라를 들쑤셨다. 행동에 증오의 마음이 전혀 녹아 있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점점 늪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나쁜 년. 또 귓가에 환청이 울렸다.

이어서 삐- 하는 이명이 헤일라를 지배했다. 그녀는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혼란했다. 오직 누워 있는 언니만 빼고. 그녀의 비어 있는 왼손만 빼고, 말이다.

“내가 다 해결할게.”

귀에서 두 손을 천천히 내린 헤일라가 말했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갑자기 이성을 되찾은 사람 같아 보였지만 기실 정반대였다.

“언니, 이제 다 괜찮을 거야.”

“…….”

“손, 손은, 응.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불편하지 않도록 내가 애쓸게. 리안한테 부탁하면 돼. 착하게 굴면, 응, 리안은 좋은 애니까 분명히,”

“하.”

한숨이 말을 가로막았다.

“이거 완전 애를 반병신으로 만들어 놨네.”

신랄한 욕설이 퍽 생기가 도는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정신 못 차리지.”

레테가 헤일라의 팔뚝을 잡아챘다.

“내 손가락을 자른 건 리안 휴리트지 네가 아니야.”

“…….”

“네가 말을 안 들어서가 아니라, 네가 말을 듣게 하려고 이 짓을 벌이는 거라고.”

“흐, 아아…….”

“고개 숙이지 마!”

다시금 제 귀를 막으려 하자 레테가 그 손을 쳐 내며 일갈했다.

“리안, 그 애를 미워해야지, 응?”

레테는 무언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처럼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까지…….”

그 뒤로 언니가 뭐라 더 중얼거렸지만 헤일라는 듣지 못했다. 이명이 너무 심해 언니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동생의 꼴을 허탈하게 지켜보던 레테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조금 웃었다.

“그래. 넌 이런 애였지.”

목소리에는 약간의 비탄과 슬픔이 서려 있었다.

“헤일라.”

그녀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음에도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해 줄까? 넌 이렇게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

“흣, 윽…….”

“네 주변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 쓰레기들뿐이거든…….”

옛날이야기를 해 주는 자비로운 어머니처럼, 레테는 느리게 읊조렸다. 헤일라는 덜덜 떨면서도 언니의 이야기가 귓가에 흘러들어옴을 인지했다. 언니를 더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화나게 하지 않으려면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집중하려 최선을 다했다.

“너는 언제나 내가 이곳에서 치료받기를 원했지. 그래서 신전에 매일같이 아침 기도를 다니기도 했고.”

갑작스레 옛날이야기였다. 헤일라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레테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조금 우스웠어. 아니, 재밌었어.”

“…….”

“내가 이미 갖고 있는데, 그걸 언니한테 내려 달라고 신한테 비는 네 꼴이.”

물에 젖은 속눈썹이 빠르게 몇 번 팔랑였다. 헤일라는 레테의 말이 혹여나 환청이 아닐까 하고 언니의 입을 바라보았다.

“나, 사실 예언의 능력을 갖고 있었거든.”

소리를 내고 있는 건 레테가 맞았다. 헤일라는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얼어 있었다. 레테는 그런 동생을 보고도 매끄럽게 웃었다. 공허한 미소였다.

“처음에는 흐릿한 꿈일 뿐이었는데…… 점점 선명해졌어. 네가 식당에서 맞아 다리를 접질렸던 날에도 이상한 꿈을 꿨거든. 그 쓸모없는 물건을 데려온 날도. 그래, 미리 수를 썼어야 했는데 막을 수가 없었지.”

그녀는 약간 음울한 얼굴로 제 다리를 내려다봤다. 헤일라는 멍하니 그 움직임을 따라 눈알을 굴렸다. 근육이 흐물흐물해져 심하게 얇아진 다리의 윤곽이 이불 너머 비쳤다. 그와 동시에, 리안과 처음 만나던 날 아침, 나가지 말라 패악을 부리던 언니의 모습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파드득, 소름이 돋았다.

“그다음, 그다음 일들도…… 전부 알 수 있었어. 그래서 내내 신문을 배달하던 년을 이용해서 공작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일일이 일러뒀지.”

헤일라는 조금의 침묵을 둔 뒤 대답했다. 이제 얼굴에는 핏기가 아예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 자락을 잡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지? 내가 본 편지에는…….”

헤일라는 공작이 내밀었던 편지의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했다. 거기에는 미래의 내용 따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냥 리안이 어디에 머무는지,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정도만…… 리안과 언니가 어떤 거래를 했는지만 쓰여 있었는데.

“멍청하긴.”

“…….”

“공작의 저택을 한낱 배달부가 드나들 수 있겠어? 당연히 널 속여 먹으려는 수작이지.”

레테는 신랄하게 뇌까리고는 헤일라 쪽으로 바짝 상체를 들이밀었다.

“그날 공작은 리안 휴리트가 세워 둔 대역이 제 아들이 맞는지 확인하러 은밀하게 야산으로 향했어. 난 알았고…… 그래서 멍청한 배달부에게 거기서 접근하라고 했어.”

대가가 그 새끼한테 받은 목걸이였던가. 천한 년의 목숨 값치고는 비쌌어. 그렇게 이르는 목소리는 은밀했고 나긋했다. 헤일라의 머릿속에, 날조된 편지 마지막 문장이 스쳤다.

‘그리고 이 편지를 전달한 계집은 조용히 처리해 주시길.’

신문 배달부, 마리를 죽이라 공작에게 한 말.

그 문장만은 거짓된 것이 아니었나 보다. 언니는 정말로 사람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어째서?

헤일라는 정리되지 않는 머리를 붙잡고 애를 썼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언의 능력이 있었으면서 왜 고통을 참고만 있었을까.

애초에 왜 치료를, 왜 신전에 오지 않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언가 이유가 있는 걸까? 그렇겠지? 언니는 똑똑하니까, 예언까지 받는다고 하니까.

헤일라는 애써 호흡을 정리하며 묻고자 하는 것들을 입 밖으로 뱉었다. 물론 생각대로 잘되지는 않았다. 분노인지 당혹감인지 모를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쉽게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왼손이, 레테의 두 손가락이 비어 있었으니까.

“왜, 그랬는데? 왜, 왜, 죽였, 아니, 왜, 신전에 안, 오고, 이제까지…….”

“…….”

“병이, 병이 심해질 때까지 왜…… 죽이지 않아도 되는데, 왜…….”

더듬대는 목소리가 약간씩 젖어 들어갔다. 그럼에도 헤일라는 최선을 다해 제 할 말을 했다.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헤일라의 인내가 부질없음을 비웃듯, 레테는 천진하게 웃었다.

“하하하.”

“언, 언니.”

“넌 언제나 이랬어. 순진한 얼굴로 울면서…… 왜 그랬냐고 물어. 어차피 말해 줘도 이해 못할 텐데.”

“아니, 아니야, 나는, 난…….”

“알려 줄게.”

레테는 동생을 밉지 않게 흘기며 웃었다.

“배달부 계집을 죽인 건 아주 개인적인 일이니 말 안 할 거야. 대신에 다른 거. 그래, 예언자인 사실을 숨긴 이유 정도는 네가 알 권리가 있겠네.”

헤일라가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약한 희망이 스민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희망은 얼마나 쉽게 바스러지는 것들이던가.

“숨기지 않으면 널 묶어 둘 수가 없잖니.”

결국 버림받았을걸. 레테는 세상의 하나뿐인 혈육의 마지막 소망을 짓밟으면서도 웃는 낯이었다. 눈물에 흩어져 언니의 얼굴을 선명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헤일라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웃고 있었다.

“그런, 그런 것 때문에.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겨우?”

“그래! 겨우, 그런, 말도 안 되는,”

나를 신뢰하지 못해서 자신을 망쳤다고. 내가 언니를 버릴까 봐 몸 망가지는 걸 방치했다고?

고통스러웠다. 느꺼운 속이 타오르면서 속에 켜켜이 재를 쌓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나 슬픔 따위의 간결한 감정이 아니었다. 확실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레테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믿으라고, 믿으라고 했잖아.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었잖아…….”

지난했던 과거가 헤일라를 찔러 왔다. 비참함에 적셔지는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견딜 수 있었던 일터, 세상에 찌들어 가며 울었던 날들, 그러면서도 언니 앞에서는 웃었던 자신.

“우리는 가족도 아니었던 거야?”

놀랍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얼굴에 그어졌다. 비참하게.

“무슨 말이든 좀 해 봐……!”

“가족?”

레테가 정면을 보면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언뜻 보인 그녀는 무표정이었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게 가족이야?”

그러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가히 최초라 해도 될 정도로 낯선 모습에, 헤일라가 바짝 긴장했다.

“그럼 넌 내 가족이 아니네.”

“…….”

“헤일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동생과 눈을 마주쳤다.

“난 그날의 너를 알아. 신전에서, 너.”

레테는 울고 있었다.

“다시 돌아갔었지?”

이런 모습은 언니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처량하게 울면서 매달리듯 묻는 모습 따위는.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를 버렸잖아.”

그녀를 울게 만든 건 헤일라 자신이었다. 아찔할 정도의 두통이 몰려왔다.

아. 신이 있다면.

신은 정말로 나의 편이 아니구나.

헤일라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 * *

삼 년 전, 리안을 버리고 신전을 나가던 헤일라는 열심히 달렸다. 달리다가 신이 벗겨진 사실도 모른 채 발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흙길을 밟았다. 그러나 발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통이 있어야 발이라도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었으리라.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리안 휴리트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리안. 리안. 리안. 리안. 리안.

리안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과 찰나의 감정들이 헤일라를 난자했다. 눈물 때문에 눈앞은 잘 보이지도 않는데 리안과의 추억만은 선명하게 펼쳐졌다.

그와 처음 만났던 날, 그의 웃는 모습을 처음 본 순간, 최초의 설렘으로 달아올랐던 뺨의 열감, 사랑한다 속삭였던 남자의 목소리, 나붓하게 휘어지던 눈꼬리와 제 어깨를 쓰다듬던 다정한 손길, 리안이 퍼붓던 사랑…… 그리고 마지막 순간 애걸했던 비참한 얼굴까지.

“네가 나를 버리고 가면 나는 죽을지도 몰라…….”

귓가에 생생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리안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환청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야. 다 거짓말이야!

그녀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농락했는지, 어떤 거짓말을 했고 어떻게 배신했는지를 떠올리려 부단히 노력했다. 최선을 다했다.

“헤일라…….”

그럼에도 발걸음은 천천히 느려졌다.

“헤일라…….”

“제발 그만……!”

결국 발걸음을 멈춰 우뚝 섰을 때, 그녀는 홀로 중얼댔다. 눈물과 엉킨 목소리는 형편없었다. 뺨에 덕지덕지 붙은 머리칼이 헤일라를 더욱 야위게 보이도록 했다. 황금색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이리저리 굴렀다.

“못 가, 못 가…… 가면, 가면 언니가…….”

‘네 언니는 죽어.’

“언니가…….”

언니는 죽는다. 리안을 버린 언니가 치료받을 수 있는 방법은 공작에게 기대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리안을 택하면 공작은 언니를 죽인다 했지. 그리고 공작은 리안을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했어! 그게 거짓말이라도…….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난 언니를 버릴 수가…….

“헤일라, 살려 줘.”

나는…….

그녀는 홀로 중얼대다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자신이 미친 듯이 달려온 길이 보였다.

“나는…….”

리안.

헤일라는 그대로 뛰었다.

그만이, 리안만이 헤일라를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서라도 살려 내야 할 사람. 만약의 만약이라 하더라도 그가 죽는다는 상상 따위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돌아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그의 곁에서 죽고 싶었다. 함께 죽는다 해도.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그를 버릴 수는 없다.

헤일라 스스로도 몰랐던 진심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그렇게까지 속았는데도 천치처럼 그를 사랑한 것이다. 유일한 안식이었고 일탈이던 그 남자가.

선택의 순간 헤일라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리안뿐이었다. 언니가 아니라 리안 휴리트 하나만 존재했다.

그렇게, 레테는 밀려났다. 너무나 가뿐하게. 그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녀는 숨 가쁘게 뛰었다. 리안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믿음만 안고 그곳으로 향했다. 리듀카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신이 벗겨진 발에서 피가 질질 흘렀다. 헤일라는 개의치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비명을 지르듯 그의 이름을 부른다.

“리안!”

하지만 헤일라의 선택을 비웃듯 리듀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헤일라는 신의 검에 눈이 꿰뚫린 타센 공작을 보고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엉금엉금 기어 타센을 툭 건드리자 피 냄새가 훅 끼쳤다. 죽은 자의 냄새였다.

“……죽었, 죽었어…….”

누가? 헤일라는 고민할 가치도 없는 사실을 고민해 보았다. 그렇게라도 부정의 여지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알만하지 않은가? 모든 상황이 살인자가 누구인지 가리키고 있었다.

리안. 리안 휴리트가 타센 휴리트를 죽였다.

아비를 죽인 아들.

신전의 저주를 받은 리안.

“안 돼.”

중얼대는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났다. 저주를 받게 된 리안이 패륜아라는 세간의 눈총까지 받아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제국에서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은 중죄였다. 일이 잘못되기라도 해서 극형에 처해지면…….

헤일라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타센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핏자국은 세니르 신전의 기적으로 이미 지워지고 있었다. 남은 건.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작은 손이 꽂혀 있는 칼을 잡았다. 그리고 고기에 박힌 칼을 꺼내듯 단번에 뽑아냈다. 투둑, 뽀얀 얼굴에 핏물이 두 점 튀었다.

신의 검은 살아 있는 것의 손에 쥐어지자 우웅, 하는 울림을 주었다. 소름이 끼쳤다. 헤일라는 검을 들고 중앙으로 향했다. 여전히 웅장한 빛줄기가 그녀를 반겼다. 빛줄기 안으로 검을 집어넣자 자연스레 빛의 중심부로 검이 올라갔다.

헤일라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죽은 타센이 있는 쪽이었다.

이제 처리해야 할 건 시신뿐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공간에는 시신까지 먹어 치워 주는 편리한 구멍이 존재했다. 헤일라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시체를 끌었다. 몇 번이고 뒤로 넘어지면서 구멍까지 죽어 버린 살덩이를 인도했다.

철퍽.

마침내 고단한 시간이 끝나고 검은 구멍 속으로 공작을 밀어 넣었을 때 그녀는 제 안의 무언가도 함께 잘려 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인의 흔적은 깨끗하게 지워졌다. 리안이 떠난 그 자리를 청소한 것은 다름 아닌 헤일라였고, 그러므로 둘은 공범이었다.

그러나 헤일라 이외에는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공범을 자처한 여자는 이 일을 영영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잠깐 누렸던 선택과 일탈일 뿐이라 자신을 다잡았다.

리안은 죽지 않았고, 공작이 남긴 돈으로 레테를 건사할 수 있었다. 나쁘지 않은 미래였다.

헤일라가 가장 사랑한 게 레테였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리듀카를 나온 헤일라의 얼굴에 붉은 태양 빛이 쏟아져 아름답게 부서졌다.

그녀는 자신의 표정을 아무도 보지 못해 다행이라 생각하며 울었다.

* * *

레테는 그날의 헤일라에 관해 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이 마치 절규처럼 터져 나왔다.

“내가 먼저라고?”

“…….”

“날 가장 사랑해?”

“언니, 난, 나는…….”

“입 닥쳐!”

뼈밖에 남지 않은 두 손이 꽉 쥐어졌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마치 가지밖에 남지 않은 고목의 흔들림처럼 보였다.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분위기. 레테는 아주 오랜 기간 안에 차곡차곡 쌓아 온 무언가를 터트려 내고 있었다.

“넌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지.”

비참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진심 따위는 알 길이 없을 거라고. 허울뿐인 말로 안심시키면 그만이라고 여겼을 거야.”

헤일라는 아니라고 받아치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아니라고 말한들 의미가 있을까?

레테는 옛날부터 이야기했다. 모든 진심은 결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너는 내 옆에서 진심을 증명해 보이라고.

그러니까 뭐라 변명해도 자신은 레테를 버린 것이 맞았다. 그날 헤일라가 선택한 건 리안이었으니까. 찰나의 선택이 헤일라의 지난날을 통째로 거짓되게 만들었다.

헤일라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사실 나도 그랬어. 그러기를 바랐어. 알기를 바란 적 없어…….”

목소리가 물기에 절어 있었다. 레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생을 흘긋 보고 시선을 깔았다.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

아, 헤일라는 저게 어떤 얼굴인지 알았다. 마음이 진창에 굴러 이제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게 된 사람의 낯이다. 모든 걸 포기해서 이제는 악도 쓸 수 없는, 그래서 비참한…….

리안에게 이별을 고할 때의 자신도 꼭 저랬으리라.

“언니.”

안 돼.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언니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면서 매달리고 싶었다. 언니의 가는 팔목을 부여잡고 엉엉 울면서…….

“가. 어디로든.”

버리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목이 콱 막혀 억억대는 소리만 났다.

“놔 줄게.”

언니가 나를 버린다.

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니가, 레테가 자신을 버린다. 언제나 동생이 떠나갈까 전전긍긍하며 분노에 떨던 언니가, 이제는 혈육을 놓아주겠다고.

포기하겠다고 한다. 혼자 남겨 두고 떠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몸도 마음도 넝마가 된 채로 떠나게 만든 것은 나다.

심장 속의 피가 모두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헤일라가 파랗게 질려 갔다.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무릎을 꿇었다. 생경한 종류의 두려움이 그녀를 덮쳤다.

설명하고 싶었다. 무슨 말이든 해서 언니를 설득해야……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을, 언니가 자신을 다시 믿을 수 있도록…….

그런데 어떻게.

자신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데 언니라고 이해해 주려나. 나 때문에 이렇게 된 언니인데 이해해 달라고 할 수 있나?

헤일라가 말은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댔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서 목소리를 내기는 하는데 형태가 없는 소리에서 그칠 뿐이다. 레테는 새하얀 바닥에 무릎 꿇은 동생을 멀거니 바라봤다. 동생은 침대에 걸쳐있는 이불보가 레테라도 되는 양 꼭 쥐고 있었다. 헤일라와 레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레테의 주의를 끌려고 필사적으로 지껄였다. 대부분이, 언니를 버린 것이 아니라는 둥, 언니를 사랑한다는 둥 하는 말들이었다.

“하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헤일라의 변명을 갈랐다. 레테는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화나게 한 걸까? 또 내가 잘못한 거야? 헤일라가 초조하게 지껄였다.

“언니, 정말로…….”

“어이가 없네.”

레테는 오른손으로 제 뺨의 물기를 걷어 내며 말했다.

“내가 불쌍해?”

“아, 흐, 언니,”

“멍청한 년.”

그녀는 초연하게 뇌까렸다. 그리고 동생에게, 어리석은 헤일라에게 말했다.

“너, 애 뱄어.”

처지를 모르는 혈육에게 알리는 음성치고는 지나치게 무심했다. 헤일라의 몸이 바짝 굳었다. 일순 몸의 떨림이 뚝 멈추고, 입에서 아, 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헤일라가 제 배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진짜 불쌍한 건 너야. 리안 휴리트가 저주에 시달리는 건 알고 있지?”

“…….”

“넌 그 저주가 기껏해야 인간 눈알 파는 정도라고 생각할 거야. 근데 사실 그게 다가 아냐.”

레테가 헤일라의 머리칼을 콱 쥐고 귓가에 제 입술을 붙였다. 무언가를 속살댄다. 말이 이어질수록 몸에서 힘이 빠졌다. 놀라움, 두려움, 막막함, 마지막에는 슬픔이 그녀의 눈동자에 스쳤다.

헤일라는 쥐고 있던 이불보를 놓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선뜻 믿기 힘든 진실이 그녀를 난자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테는 동생의 충격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헤일라의 귓가에 종이 두어 번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테가 시종을 부르는 소리였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헤일라를 부축해 방 밖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무언가 끈이 풀린 사람처럼 계속 무슨 말만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작별 인사를 듣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레테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 * *

“갔어?”

“응.”

베르디안은 따분함이 묻어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의자에 팔을 괴었다.

“화났어?”

레테는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남자의 질문과는 다르게 레테는 평온해 보였다.

“그냥 그런 것 같아서.”

“글쎄.”

그녀는 미묘하게 질문을 피해 갔다. 베르디안은 약간 떠보는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그 얘기도 했어? 널 화나게 한 년 말이야.”

“아니.”

“왜?”

레테는 베르디안이 개처럼 끈질기다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동생 생각해서?”

쓸데없이 냄새를 잘 맡는다는 점까지 개 같았다. 레테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신호로 눈을 감았다. 머리를 뉜 베개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까칠하긴.”

베르디안이 이야기하는 건 배달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가 타센에게 죽이라 언질을 남긴 여자.

마리라는 배달부는 언제나 자신을 멸시하고 조롱했다. 사창가를 구르던 더러운 창녀, 동생의 피를 빨아먹는 구더기 같은 여자라 혀를 찼다. 레테가 말을 하지 않아 헤일라는 알지 못했지만 매일 빠짐없이 신문을 던지고 나가며 한마디씩 더러운 말을 얹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레테에게 폭언을 퍼붓는 걸 고된 하루의 낙 정도로 생각하는 여자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랬다. 하지만 레테를 오물 보듯 보던 마리는 레테가 건넨 목걸이는 귀하디귀하게 품 안에 구겨 넣었었다.

꼴이 얼마나 우습던지. 마리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레테가 한 사람을 수렁으로 빠트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레테는 무력한 병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 여겼으니까.

그래서 죽은 것이다. 그래서.

하지만 그게 과연 마리라는 여자의 잘못일까. 사실 모두가 그렇지 않았나. 동생마저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머저리로 생각했는데.

헤일라를 떠올리느라 감은 눈이 찌푸려졌다. 레테를 본 베르디안이 침대 맡에 앉았다.

“네 주변에는 언제나 죽이고 싶은 인간들뿐이야.”

그가 레테의 옆머리를 다정히 쓸어 넘겼다. 다 안다는 듯한 말투가 묘하게 거슬렸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레테는 약간의 애틋함이 묻은 손짓을 즐기기로 했다. 다정함이 어울리지 않아 더 서투르게 느껴지는 남자들의 손길은 싫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싫어하지 않을 만한 것이 그것 말고는 없었다. 입안이 썼다.

묘한 변화를 알아챈 베르디안이 곰곰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죽여 줄까?”

“야.”

그녀의 부름에 약간 흥분한 남자가 레테를 내려다봤다. 어느샌가 레테의 눈이 뜨여져 있었다. 와락 짜증을 내는 듯도 하였다.

“응?”

“너나 먼저 뒈져 버려.”

짜증이 난다는 투였다. 베르디안은 가볍게 투정 부리듯 이불에 얼굴을 부볐다.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혼이 나 버렸다.

“너무해.”

“…….”

“그래서, 다음에는 언제 또 볼래?”

“뭘.”

“동생 말이야. 좋아하잖아.”

“방금은 죽여 준다더니.”

“네가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

“안 좋아해.”

“좋아해.”

“그 입 좀…….”

“나한테까지 거짓말할 거 없잖아.”

레테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베르디안이 입을 비죽거렸다.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베르디안은 여자의 심기를 살피며 조심조심 손을 쓸었다. 엄지로 팔목을 부드러이 누르는 손길이 뭉근했다. 몸을 섞기 전 남자가 은근히 건네는 신호이기도 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의 움직임은 레테의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에 멈췄다.

“걘 이제 안 봐.”

“진짜?”

주인을 독차지하게 된 강아지처럼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좋아하지 마.”

“아닌데.”

이죽대는 낯이 얄밉기 짝이 없다. 베르디안이 레테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진짜 오늘이 마지막인 거야? 왜?”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네 일을 내가 모르는 게 말이 돼?”

“미친놈.”

“응, 대체로 그런 편이지.”

그래서, 왜? 왜 그런 건데? 남자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는 이제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와 레테의 목에 제 얼굴을 부빗대기까지 했다.

레테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허공을 보는 여자의 머릿속을 따 보고 싶다. 베르디안은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눈 아래가 약간 발갛게 물들었다. 그때 레테가 약간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죽을 거야.”

베르디안의 몸이 일순 바짝 굳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웃고 있으나 명백히 이채가 서린 얼굴이었다.

“무슨 소리야?”

“…….”

“예언이라도 받은 거야?”

레테. 베르디안이 드물게 이름을 불러 왔다. 천천히 목을 빨고 쪽,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레테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가 자신이 빨았던 자국을 핥으며 재촉했다. 그녀가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자 긴 머리칼을 콱 쥐고 목을 고정했다. 숨이 가빠지는 게 느껴져 레테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그럼 뭐야.”

“…….”

“몸도 좋아지고 있잖아. 이제 발작도 안 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모르는 게 있나?”

평소와 다르게 차가운 목소리였다. 상대를 가차 없이 으스러트려 끝을 보는 루데인 후작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레테는 의외의 모습에 조금 웃었다.

움찔.

그의 몸이 떨렸다.

“난 헤일라에게 죽은 사람이 될 거야. 진짜 죽는다는 게 아니라.”

이 바보야.

그녀가 다시 웃었다.

“그걸 위해 네가 할 일이 있어.”

“뭔데.”

“약을 하나 구해 와.”

“하…….”

베르디안은 약간 어이가 없어져 한숨을 쉬었다.

“아주 아주 지독한 수면제야. 먹으면 숨이 옅어지고 맥박도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의술을 모르는 일반인은 죽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네이오라. 레테가 구해 오라고 한 약은 네이오라였다. 면역이 있는 인간이 없을 정도로 지독한 수면 약초. 그런 만큼 제국에서는 구하기도 힘들었다. 신전에서도 취급하지 않아 타국에서 밀매해야 했다.

“그래. 알겠어, 알겠다고.”

그럼에도 베르디안은 순순히 레테의 말에 복종하기로 했다.

“대신에 배신하지 마.”

“배신?”

“내가 없는 사이에 도망이라도 가면 찾아서 죽여 버릴 거야.”

“하하.”

“다른 새끼랑 붙어먹어도 마찬가지야. 그것만 아니면 어떤 병신 짓이든 따라 줄 테니까…….”

베르디안이 어리광을 부리듯 레테에게 안겨 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무감히 내려 보다가 손을 올려 머리칼을 대충 쓰다듬어 주었다.

다음날, 레테의 충실한 시종을 자처한 남자가 먼 길을 떠났다. 짧지 않은 여정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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