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탈피
우웅, 우웅-
리안은 기묘한 울림소리에 눈을 떴다. 손발이 결박되어 있고 눈까지 가려져 있어 자신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건지 눈치채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명확하게 감각할 수 있는 어떤 냄새가 이곳이 범상찮은 공간임을 방증하고 있었다.
피 냄새.
옅은 피 냄새가 코끝에 감돌았다. 그는 손목과 발목에 찬 족쇄가 단단한 철쇄 재질임을 눈치채고 침착하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몸을 조금씩 돌려 보니, 천으로 가려진 눈임에도 어느 한 부분이 강하게 빛나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리안은 침음을 흘리며 혀를 찼다.
아비를 죽이려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리안이 자신만 알고 있는 저택의 지하실 통로로 들어서는 순간, 강한 수면초와 독초 향을 맡고 몸이 마비되어 쓰러졌다. 리안이 독에 내성을 갖도록 어릴 때부터 관리해 온 사람이 타센이었으므로, 리안에게 통하는 독의 종류를 아는 이도 타센뿐이었다. 그러니 이건 공작이 준비해 둔 술수가 맞았다.
리안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부드럽게 기름칠 된 문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자신의 등장을 숨길 마음조차 없는지 발소리를 죽이지도 않았다. 저택에서 리안을 포박해 여기까지 옮긴 이들이리라. 그리고 어쩌면.
“많이 컸구나.”
리안은 가장 아니었으면 싶은 인간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욕설을 뇌까렸다. 지척까지 다가온 중년의 남자는 앉아 있는 리안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를 관찰하듯 뜯어보았다.
“아이들은 금방 자란다더니. 타델리아 말대로야.”
그는, 리안의 아버지 타센 휴리트는 제 아내였던 여자가 했던 말을 짚으며 건조하게 웃었다.
“함께 살 적에는 몰랐는데 몇 년 새 이렇게 덩치가 커져서는……”
뭇 아버지들이 했다면 은은한 감동과 서운함을 담았을 말이거늘, 타센의 목소리는 공허하기만 했다.
“그 여자는 어디로 옮겼지?”
“그 여자?”
“지하에서 썩어 가던 네 여자.”
리안은 혐오하는 어떤 존재를 입에 담는 양 타델리아에 관해 물었다. 그 순간 두꺼운 손이 억세게 검은 머리칼을 틀어쥐었다. 두피까지 얼얼해질 고통에도 리안은 신음 한 자락 토해 내지 않았다.
“어머니라고 해야지.”
호칭을 정정하는 타센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모욕당해 분노하는 남자 같지 않았다. 공문서를 처리하는 행정가처럼 무미건조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는 타델리아의 부탁대로 좋은 아버지여야 했고, 좋은 아비는 아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마땅히 벌을 주어 행동을 교정해야 한다. 그러니 이것은 그저 마땅히 해야 할 훈육이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가 보이는 괴이한 모습에 공포감을 느끼고 복종했겠지만, 리안은 익숙한 듯 그저 침묵했다. 타센은 길게 숨을 내쉬고 약간 성가시다는 표정을 한 뒤 머리채를 쥔 손을 약간 뒤로 젖혔다.
곧이어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리안의 이마가 돌바닥에 사정없이 박혔다. 타센의 옆에 서 있는 이가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건만, 비정한 아비는 멈추지 않고 머리를 잡아 올려 다시 땅으로 내다 박았다. 땅이 옅게 진동할 정도로 센 강도였건만, 리안은 입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뜨끈한 피가 줄줄 흘러 얼굴의 반을 덮을 때가 되어서야 타센은 폭력을 거두었다.
“정말 변한 게 없군.”
그는 머리가 으깨져도 타델리아를 어머니라 하지 않을 아들을 알았기에 리안을 놓아 주었다. 언제부턴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아들을 보는 시선이 오묘했다.
“타델리아는 다른 곳에서 쉬고 있다. 친절한 네 사람이 알려 주어서.”
죽어 박제된 여자에게 쉬고 있다는 표현은 부적절했다. 그러나 이미 미쳐 버린 아비에게 짚어 줄 의욕 따위는 들지 않았다. 리안은 비린 피가 붉게 적셔 놓은 안대 안에서 눈을 끔뻑였다.
누구일까.
그는 궁지에 몰렸음을 알았는데도 태연하게 가늠해 보았다.
누가 입을 놀린 걸까.
다시 한번 속으로 중얼대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이가 많지는 않았다. 원래부터 공작을 살해할 계획에 관해 아는 이들은 몇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인즉, 배신자를 색출하는 게 어렵지는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리안은 여기서 빠져나간 뒤, 며칠이 지나든 몇 년이 지나든 반드시 색출해 낼 작정이었다. 그는 꽤 치밀하게 이 계획을 준비했다. 그런 만큼 실패한 데 대한 화풀이는 결코 간단하게 끝나지 않으리라. 밀고자는 리안이 타센의 손에 죽으리라 생각하고 재물을 선택했겠지만, 리안은 결코 죽을 일이 없었다.
타센 휴리트가 타델리아 공주의 아들을 죽이는 일을 저지를 리가 없으니까.
“네 어미가 아니었다면 넌 진즉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그런데도 타델리아를 화마 속에 처넣으려고……”
리안은 부러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다 들통난 데다가, 영혼마저 떠난 껍데기를 불 속에 집어넣는 게 뭐가 잘못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죽은 여자를 못 잊어 그대로 방부 처리해 둔 공작 쪽이 더 악질적이지 않은가.
공작저에는 휴리트 가문의 가주만 알고 있는 지하실이 존재했다. 가주의 서재, 서재의 가장 오른쪽에서 세 번째 칸 책장을 뒤로 세게 밀면서 특정한 위치에 있는 책을 뽑으면 책장이 완전히 뒤로 밀리면서 지하로 가는 계단을 만들어 낸다.
리안은 다섯 살 때부터 나흘에 한 번씩 아비의 명에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타델리아와, 정확히 말하면 영원히 시간이 멈춘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공작은 최초로 지하실을 내려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함께 지하실로 걸음 하지 않았다. 그저 리안에게 지하실에 내려가서 해야 할 일들에 관해 짚어 주었다.
어머니라고 부르며 인사할 것, 무슨 음식을 먹었고 어떤 인간을 만났는지 이야기할 것. 경외와 사랑을 담아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투명한 유리관에 입 맞출 것.
공작은 타델리아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리안은 그녀를 사랑하길 바랐다. 적어도 리안이 느끼기에는 그러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며, 리안이 어미를 사랑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 같았다. 이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시간이 지나 리안이 그 지루한 의식을 하지 않게 되었을 정도로 머리가 컸을 때, 그는 타델리아의 시신에 말을 거는 무익한 일 대신 지하실을 꼼꼼하게 둘러보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과 사용감이 남아 있는 책상과 의자, 두꺼운 책들이 잔뜩 꽂혀 있는 책장, 꽤 큰 침대까지.
지하실은 누군가를 가둬 두기 위해 여러 가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대상이 죄인은 아닌 게 확실했다. 이렇게 너르고 안락한 감옥은 죄수에게 주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니 아마도, 감금의 대상은 타델리아였으리라.
그의 어머니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지하에 갇혀 타센에게 얽매여 부자유했다. 시시한 사실을 알아낸 리안은 부모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책장에 있는 여러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가 열다섯이 되었을 즈음, 아주 좋은 통로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타델리아가 읽었을 책을 꺼내는데, 묘하게 양장 제본된 책등 중앙이 오목하게 파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여러 번 책을 빼내기 위해 힘주어 누른 모양새였다. 유독 책들이 뻑뻑하게 꽂혀 있는 책장의 세 번째 칸에 꽂힌 책이었다.
여인의 힘으로는 한 번에 책을 빼내기 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타델리아의 관을 흘금 보았다. 그리고 다시 책장을 여러 번 살펴보다가 책장을 세게 밀면서 그 책을 반쯤 뽑아내 보았다. 지하로 들어올 때와 같은 방식이었다.
리안은 책장이 뒤로 매끄럽게 열리는 걸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책장의 뒤에는, 비밀스러운 통로가 있었다. 타센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날은 통로의 존재만 확인하고 지하실에서 올라왔지만, 그는 몇 번의 탐색 끝에 리안은 통로가 외부와 연결되어 있음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왜 탈출하지 않았을까? 지하실로 들어설 때 내부에 있는 통로 안쪽으로 들어가 레버를 내리면 다시 책장이 원위치 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지하실 책장도 마찬가지니 손쉽게 탈출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궁금증을 품은 리안은 아비의 눈치를 살피며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떠봤지만 타센은 비밀 통로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언젠가는 탈출할지도 모르는 어머니를 왜 지하에 홀로 가둬 두었냐고 물었었다. 이에 타센은 문이 오직 하나뿐이고, 그 앞은 번견이 지키고 있으니 상관없었다는 답만 들려주었다. 번견은 공작 본인을 이르는 것이리라.
서재를 집무실과 겸해서 쓰는 이유가 타델리아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는 뜻이었다. 그는 자신이 집무실에서 일할 때는 타델리아를 지하에 가둬 두고, 일과가 끝나면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들에게 자신이 아내를 감금했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었다.
이후에도 리안은 그 지하실 비밀 통로의 존재를 함구했다. 언젠가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는 어미의 흔적으로 찾아낸 구멍을 통해 도망칠 수 있었다. 타센에게서 부상을 입고 저택에서 도망친 날, 그는 통로를 이용해 수도 외곽으로 도망쳤다. 헤일라와 마주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타센이 그 통로를 알고 있을 줄이야.
“불을 지르면 무슨 방법을 써서든 뛰어들 걸 알았거든. 그러면 일이 더 쉬워질 테니 거리낄 이유가 없어.”
리안은 지하실에 들어와 불을 지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피부에 닿기만 해도 마비가 시작되는 강한 독을 타델리아의 온몸에 발라 두려고 했다. 타센이 불길 속에서 시신을 옮길 때 독에 중독되어 쓰러지면 여러모로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 일찍 발견되어 구조되어도 독 때문에 평생 침대에 누워 눈알만 굴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 흔적으로 찾은 통로라. 이렇게 써먹으면 ‘어머니’도 좋아하지 않으셨겠어? 널 죽일 수 있는 기회인데.”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리안은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타센의 반응을 확인할 수 없었다. 타센은 잠시 침묵하다가 리안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안대 너머로 공작 특유의 집요한 눈길이 느껴졌다.
“그럴 리가.”
돌아온 대답은 시시했다. 공작은 타델리아가 그의 죽음을 바랐을 것이라는 리안의 대답을 간단하게 부정했다. 그는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랑이라는 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지. 타델리아는 그중에서도 특히 더 어리석은 편이었다. 네가 그 점을 쏙 빼닮았어.”
이상했다. 그는 마치 타델리아가 공작 자신을 사랑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사랑과 신뢰를 같은 선상에 두고, 사리 분별을 못해서 일을 그르치는……”
“미안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리안은 헤일라를 사랑했지만,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영원을 약속한다 해도 어떤 계기가 있다면 리안을 뿌리치고 달아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래서 단단한 족쇄를 만드는 데 애썼던 것이고. 하지만 아들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미간을 좁히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찰 뿐이었다.
“너는 정말로…… 네 어미와 닮았구나.”
“…….”
“끝까지 의심조차 하지 않아. 이 꼴이 되고서도……”
리안은 저도 모르게 타센의 의도대로 용의 선상에 있는 이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황제는 타델리아의 몸에 불을 붙일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게 뻔해 알리지 않았다. 아는 것은 베르디안과 뒷일을 처리할 해결사 하나, 미아르와 그녀의 수족 하나. 그리고……
불안과 불쾌가 스멀스멀 목덜미를 둘러쌌다. 수작질이라 부정하며 아비에게 분노를 터트리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눈앞이 선명해졌다. 타센은 리안의 눈을 감고 있던 천을 풀어낸 뒤 옆으로 던지고 그의 앞에서 비켜섰다. 리안의 시야가 트였다.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의 시야 안에 공간 안의 모든 것이 들어찼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갇혀 있던 곳이 신전의 가장 신성한 공간, 리듀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천장을 찌르듯 높이 솟은 빛기둥도, 그 속에 있는 신의 검도, 몇 년 만에 대면한 아비의 얼굴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단 한 사람.
“헤일라.”
창백한 얼굴로 타센의 앞에 서 있는 헤일라만이 그의 눈에 또렷이 잡혔다.
“헤일라.”
그는 몇 번이고 타센의 옆에 망부석처럼 서 있는 헤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을 바라는 호명이 아니었다. 차마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서 존재를 부정하고자 입을 빠끔대는 것뿐이었다.
“응, 안녕.”
헤일라는 거리낌 없이 화답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해 냈다. 당신을 버렸다 고백하는 신처럼,
“리안.”
평소처럼 어여쁜 모습을 하고서. 그에게 다가섰다.
* * *
꿈은 때때로 인간을 과거의 끔찍한 중턱에 데려다 놓는다. 차라리 하늘을 나는 괴물이 나타나 인간들을 도살하거나, 불을 뿜는 용이 날아와 모든 걸 부숴 버리는 허무맹랑한 허상이면 좋으련만. 그러면 차라리 허상을 쉽게 파훼할 수 있을 텐데, 지독한 꿈은 기억에서 한 치도 빗겨 가지 않았다.
‘너한테는 기회를 주려고 해.’
헤일라는 며칠 전 과거를 답습하는 꿈속을 유영했다. 그 속에서 흰옷에 피를 흠뻑 적시고 웃는 레테는 마치 낫을 든 저승사자 같았다. 그녀는 낡은 나무 집 주방에 서서 헤일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가 어떻게 집에 왔지? 꿈속의 헤일라는 멍청하게 생각했다. 어머니께서는 언니가 서부 백작가에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로 고용됐다고 알려 주었다. 돌림병이 낫고 이 년이 지나도록 언니를 만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헤일라는 레테가 자신을 만나러 휴가를 냈을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껏 편지에 답장조차 없던 언니가 돌아온 건 기쁜 일이었다. 그럼에도 헤일라는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대며 뒷걸음질을 쳤다. 온몸에 언젠가 살아 있었을 생명의 혈흔을 두른 언니가 무서웠던 까닭이다.
‘고맙게 생각지 않아도 좋아. 어쨌든 넌 지금 선택해야 해야 하거든.’
피 묻은 칼을 발견한 건 순전히 레테 때문이었다. 그녀는 목을 빳빳이 세운 채로 눈알만 움직여 동생을 훑은 뒤, 식탁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첨예하게 벼려진 단도가 손잡이까지 시뻘게진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레테의 붉은 옷과 피로 진득해져 있는 손, 그리고 떨어져 있는 단도는 아주 잘 어울렸다.
그 순간, 헤일라는, 언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눈치챘다.
드디어 죽였구나. 지긋지긋했던 부모와 자식 간의 끈질긴 악연이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부모의 악덕이 자매의 삶에 산적해 있었으므로 살인의 동기는 충분했다. 그러나 동시에 동기가 부족했다. 레테는 언제나 자신이 부모들을 죽일 것이라 말해 왔지만 실행하지 않았으므로, 갑자기 피를 볼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지난 이 년간 레테는 부모를 찾아오지 않았고, 부모 또한 그러했다. 헤일라는 이것이 언니의 행복에 크게 기여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왜?
혼 없는 몸뚱어리 두어 개가 집 안에 있다 생각하니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헤일라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움직임을 무어라 해석했는지 레테가 핏방울 묻은 볼을 씰룩이며 웃었다. 그리고는 우아한 귀족처럼 나붓하게 걸어 부엌 바로 옆의 방 문고리를 잡았다. 부모라 부르던 이들이 쓰던 방이었다.
달칵, 하고 문이 열리면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마찰음이 들렸다. 어쩐지 헤일라는 그 순간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았다.
‘자, 어느 쪽이지?’
문이 활짝 열렸을 때, 도축장에서나 흐르는 고약한 내음이 훅 끼쳐 들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살덩이들, 해체되어 있는 내장, 낭자한 핏물…… 그리고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어미의 금색 머리칼과 아비의 투박한 손가락들.
헤일라는 아찔한 기분에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그럼에도 레테는 차분하게 읊조릴 뿐이었다.
‘여기?’
그녀는 빼빼 마른 손으로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돌연 웃음을 머금고,
‘아니면, 저쪽?’
고깃덩이가 된 인간들 쪽을 가리켰다. 가여운 동생에게 고약한 심술을 부리는 언니는 미소 짓고 있음에도 어딘가 초라해 보였다. 아니, 그보다는…… 부모에게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불안한 낯가죽이 아닌가.
반짝.
지나치게 선명한 과거를 보여 주던 꿈이 부서졌다. 눈을 뜬 여자의 얼굴에는 온통 눈물이 흠뻑 적셔져 있었다. 헤일라는 그걸 무성의하게 손등으로 닦으며 일어났다.
재수 없는 꿈이다. 일어나려 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헤일라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발을 디뎠다. 그녀를 숨어서 지켜보며 조롱하는 이는 있지도 않거늘, 그녀는 보란 듯이 힘주어 걸었다. 일종의 오기였다.
“다 지난 일이야.”
나직하게 쉰 소리를 내 봤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헤일라는 비척비척 걸어 주방을 확인했다. 간단한 아침 식사 거리가 준비되어 있는 걸 보니 리안은 일찍 집을 나선 모양이었다.
그녀는 언니를 살피기 위해 레테의 방으로 향했다. 아침잠이 많은 편인 레테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파란 집에서 구해 온 약을 먹인 뒤로는 혈색도 점점 좋아졌다. 리안의 말대로 신전에 가서 좋은 치료를 받으면 침상에서 일어나 이전처럼 걸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이 지긋지긋한 불행이 조금은 떨어져 나가게 되는 거다. 헤일라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약간 나아졌다.
빈민들이 으레 그러하듯 헤일라 또한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이들에 비해 특히 더 불행한 편에 속했다. 언니가 사창가에 팔려 가 난치병을 얻고, 조각난 부모의 시신을 손수 묻는 경험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헤일라는 신이 자신을 미워해서 인생을 망친다 생각하곤 했다. 언니와 리안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끝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언니는 곧 좋은 치료를 받아 이전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올 테고, 리안과는 혼인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의 헤일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음날을 고대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더 좋은 미래를 마음껏 욕심내게 되었다. 리안과 레테가 자신의 세상을 구했노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 잘될 거야.
헤일라는 꿈 때문에 뒤숭숭한 마음을 다잡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불안해할 이유가 없는데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언니가 좋아하는 버섯 요리와 따뜻한 수프를 정성스레 끓이기 시작했다. 뻑뻑한 식감을 선호하는 레테의 취향에 맞추어 오래도록 서서 수고를 들였다.
적당히 간을 하고 오래도록 저어 뭉근히 졸인 뒤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한 김 식힐 겸 식탁 위에 음식을 놓아두고 깨끗한 물을 대야에 담아 레테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벽이 얇아서 그런지, 레테는 깨어 있었다.
“잘 잤어?”
배시시 웃으며 묻자 레테는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약간 잠에 젖어 있는 얼굴이었다. 헤일라는 익숙하게 침대 옆에 앉아 수건에 물을 적시고 꼭 짜서 레테에게 건넸다. 레테는 그것을 받아 들고 젖은 천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 낸 뒤 헤일라에게 다시 주었다.
헤일라는 물에 수건을 다시 적신 뒤 이불을 조심스레 걷어 언니의 다리를 부드럽게 닦아 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새로 구입한 목욕 천은 언제나처럼 보드라웠다. 아무리 돈에 쪼들려도, 헤일라가 언니의 몸 닦는 천만큼은 결이 좋은 것만 구입해 사용한 덕분이었다.
“이제 그만 닦아도 돼.”
“아, 응.”
헤일라는 반점이 올라와 약간 거뭇한 복숭아뼈 주변을 살짝 문질러 준 뒤 손을 거두었다. 자잘했던 반점이 약간씩 커지는 게 느껴져 울적했지만, 티를 내면 끔찍이 싫어하는 언니를 알기에 애써 더 밝게 웃었다.
“식사 챙겨 올게! 오늘은 특별히 더 맛있을걸?”
나무 쟁반에 음식을 담아 나른 헤일라는 침대에 간이 탁자를 펴 올린 뒤 따끈한 음식을 차렸다. 언제나처럼 정성을 들인 식사였다. 레테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어 수프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식사 내내 말없이 수저만 놀렸다.
평소에는 반도 먹지 못하고 남기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그릇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깨끗하게 음식을 비웠다. 헤일라는 그것이 못내 감격스러워 활짝 웃었다.
“괜찮네.”
레테는 동생의 반응이 멋쩍은지 어중간한 칭찬만 남기고 상을 치우라고 닦달했다. 헤일라는 실실 웃으며 자리를 정리하고 약을 챙겨 준 뒤 다시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오늘도 마을에 가지?”
오늘은 언니 기분이 정말 좋은가 봐. 헤일라는 레테가 먼저 말을 걸어 주었다는 사실에 사뭇 감동하여 속으로 중얼댔다.
“응! 혹시 저녁에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 다 말해! 뭐든 다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됐어. 필요 없어.”
“에이, 그러지 말고. 방금처럼 잘 먹어야 얼른……”
낫지. 헤일라는 언젠가부터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자책했다. 말을 조심했어야 하는데. 언니는 자신의 몸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비관적이었고, 그래서 동생이 희망적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악을 썼다. 환자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헤일라 또한 어느 순간부터 병이 낫는다는 말 따위를 하지 않게 되었을 정도였다.
그녀는 날아올 레테의 폭언을 예상하고 침묵했다. 하지만 헤일라가 받은 답의 정말로 의외였다.
“닭고기를 넣은 스튜.”
레테는 화를 내지 않고 동생의 물음에 친절하게 답해 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닭고기를 넣은 스튜는, 헤일라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어릴 적 레테가 자주 해 주던 음식이다.
“왜 그렇게 봐?”
“……아니, 아냐, 아무것도. 또 먹고 싶은 거 없어?”
“없어.”
“응, 그럼 얼른 다녀올게!”
레테의 묘한 변화가 긍정적인 신호임을 확신한 헤일라는 신이 나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눈가는 약간 붉어져 있었다. 헤일라는 몇 번이나 레테의 이부자리를 점검한 뒤 방을 나서려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런데 손목을 뒤틀어 한 치 정도 문을 움직였을 때 레테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헤일라.”
단단한 쇠 위에 얹어져 있던 얇은 손이 움칠 튀었다. 자신이 호명되어서가 아니었다. 이름 한 글자 한 글자를 읊는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나……
“조심해서 다녀와.”
너무나 그리운 때와 겹쳐 있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찍 들어와야 해.”
걱정과 애정을 담은 차분한 목소리. 분명히 레테의 것이었던, 그러나 지난 몇 년간은 레테의 것이 아니었던 다정함이 녹아 있는 걱정이었다. 헤일라는 천천히 뒤돌아서서 응, 하고 작게 대답했다. 언니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하고 바닥만 응시한 채였다. 얼굴을 보면 눈물을 쏟아 내어 레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게 뻔했다.
헤일라는 방을 빠져나와 삐져나오는 콧물을 씩씩하게 휴지에 푼 뒤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 * *
언제나처럼 식재료를 사기 위해 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둘에게 먹일 음식을 직접 한다는 데 자부심이 있었고, 그래서 매일 부지런을 떨며 시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날 헤일라는 계획했던 그 무엇도 해내지 못했다.
시내에 도착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붙잡혔기 때문에.
복면을 쓴 사내들은 헤일라 같은 가녀린 여인 정도는 아주 손쉽게 납치하여 끌고 갔다. 마침내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한 그녀는 달달 떨면서 리안과 레테를 걱정했다. 어두운 방 안에 앉아 감히 눈앞에 앉아 있는 이를 볼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사랑하는 둘에 관해서만 생각했다. 자신을 납치했다면 리안과 레테에게도 해를 끼칠지 모르니까.
잠깐 찾아온 행복으로 족하니, 제 목숨 하나로 둘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리라 맹세하며 신에게 빌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자가 둘 사이의 탁자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헤일라의 턱을 들어 올렸을 때 모든 생각이 정지했다.
리안과 착각할 정도로 닮은 얼굴. 그는 무료함과 건조함을 섞은 표정까지 사랑하는 남자를 닮아 있었다.
“흠.”
그는 창백한 볼을 꽉 잡고 거칠게 얼굴을 돌려가며 외모를 감상했다.
“예쁜데.”
후한 평가를 내놓은 타센은 손을 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제 나를 보지. 아래는 그만 보고.”
그는 의외로 신사적이었다.
“……당신, 공작이죠.”
“그래.”
“저를 죽이실 건가요?”
“나는 그냥 이야기를 하러 온 것뿐이야.”
이야기? 의심이 가시지 않은 헤일라는 그저 고개만 한 번 까닥였다. 그리고 정면으로 바라본 공작의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아아, 만난 적이 있던가.”
언젠가 리안의 뒤에 서 있던 사람. 리안이 이것저것 일을 시키는 것을 봤었다. 둘이 집을 비웠을 때 레테를 돌보는 일을 맡기기도 했었다. 지금 공작과 함께 있다는 건,
“리안이 네 뒤에 붙여 둔 놈이야. 이제는 내 사람이지만.”
“그를 배신했군요.”
헤일라는 분한 얼굴로 공작 뒤의 남자를 쏘아봤다. 그러나 동요하는 사람은 헤일라 혼자였다.
“선택이지. 충성을 얼마에 팔지 정하는 건 본인이야.”
“그게 배신이에요.”
“이상한 것에 집착하는구나. 네가 궁금해야 할 건 따로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가 제일 궁금하네요.”
“물론 그것도 꽤 중요하겠구나. 하지만 내가 ‘어떻게’ 아들의 사람에게 접촉했고 회유했는지가 조금 더 중요하단다.”
그는 사뭇 다정한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리안은 조심성이 꽤 좋은 편이지. 거처를 알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어.”
리안은 황제의 도움으로 자신의 대역 여럿을 두고 제국 각지를 움직이도록 했다. 그중 몇 명은 공작이 눈치챌 수 있을 만큼 허술하게 숨었고, 몇 명은 치밀하게 몸을 숨겼다. 이것까지 리안이 명령한 부분이었다. 공작이 아들을 오래도록 찾지 못한 이유였다.
“네 언니라는 여자가 알려 주지 않았다면 널 데려오지도, 리안의 사람을 회유하지도 못했을 거야.”
“……언니?”
여기서 왜 레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언니는 혼자서는 걷지도 못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공작과 접촉해 은밀한 이야기를 나눈단 말인가. 얼이 빠진 와중에도 분기가 찼다. 지금, 감히, 누구를 걸고넘어지는 거지.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삶을 견뎌 보려 안간힘을 썼던 언니였다. 그럼에도 매번 진탕을 뒹굴어 종래에는 모든 희망을 빼앗긴 가족이었다. 그리고 레테를 절망으로 처박은 건 항상 이 남자처럼 파렴치하고 교활한 인간들이었다.
“보아하니 믿기 힘든가 본데, 레테라는 여자가……”
“그 입 닥쳐.”
끔찍했다. 레테는 아무렇게나 다루어지고 밟혀도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소중하고 소중한, 헤일라의 유일한……
헤일라는 거칠게 의자를 밀고 일어난 뒤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그가 쥐어 잡아 폭력을 행사한다 해도, 레테를 기만하는 행위에 동참할 수는 없었다. 잘 짜인 각본 속에서 아픈 언니가 휘둘러지는 꼴을 보지 않을 테다.
주먹을 꽉 쥐고 등진 헤일라를 붙잡은 건 차분한 음성이었다.
“높은 나무의 열매일수록 낮은 곳에서 취해야 하는 법인데.”
헤일라의 발끝이 주춤, 하고 멈췄다.
“타바에는 나무에 올라가서 따는 나무가 아니야. 아래에서 도구를 사용해 떨어트리거나 나무를 거칠게 흔들어서 수확하지.”
“…….”
“성격이 어지간히 급해. 숨을 죽이고, 어떻게 해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지 진득하게 고민할 줄 알아야 쟁취할 수 있는데. 타바에를 구할 때도, 지금도 너무 성급하지 않나.”
그가 성가시다는 듯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헤일라는 천천히 뒤돌아 다시 타센을 응시했다. 리안과 헤일라 단둘만 있었던 장소의 일을 그가 어떻게 알고 있나. 혼란에 잠겨 숨이 턱 막혔다.
“네 언니는 리안이 너를 따라나설 걸 몰랐을까.”
“…….”
“리안은 그날 산 깊은 곳에 있던 오두막을 어떻게 찾았을까.”
그가 품에서 질감이 나쁜 싸구려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던지고 그것을 펴 보라 턱짓했다. 분명 종이 한 장일 뿐인데 묘한 위압감이 감돌았다. 이상한 일이다.
별거 아닐 거야.
나비처럼 가뿐하게 나무 책상 위에 내려앉았건만, 들어 올리려 하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추처럼 느껴졌다. 까끌한 봉투를 겨우 들어 올려 매만지니 불규칙한 굴곡이 손끝에 잡혔다. 한 손으로 봉투의 양 끝을 눌러 벌리고 탁자 위에 내용물을 쏟아 냈다.
나온 것은 두 번 접어 둔 종이 한 장과 약으로 보이는 붉은 조각 하나, 그리고 같은 모양의 푸른 조각 하나였다. 헤일라는 이게 무어냐는 듯 물음을 담아 타센을 응시했지만, 그는 침묵을 지키고 조각들과 함께 나온 종이에만 시선을 주었다.
……읽어야 할까?
그녀의 입이 잠깐 달싹였다. 이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저걸 펼쳐 읽었는데, 혹시, 아주 만약에……
“읽, 지 않을 거야.”
종이를 든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였다.
“당신이 하려고 하는 모든 일은, 전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테니까.”
“아아, 내가 원하는 대로는 움직이지 않겠다.”
미처 맺지 못했던 진심을 그가 대신 내뱉었다. 정말로 재미있는지 목소리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속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떤가.”
“…….”
“네가 이 편지를 보기를 바라는 게 네 언니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언니가 왜. 무슨 이유로? 그럴 이유도 없었다. 어찌 되었든 리안은 언니의 치료를 도왔고, 나는.
“신문 배달하던 여자, 기억하고 있겠지. 웃돈까지 얹어 주면서 집 안으로 일간지를 나르게 했다던데.”
나는 언니의 동생인데.
“그 여자를 통해 편지를 보냈더구나. 저택으로.”
‘마리는 일 관뒀어요. 말도 없이 그만둬서 이번 달 내내 내가 대신 배달했다고요.’
무책임한 동료에 대한 불쾌감을 담아 뇌까리던 배달부의 말이 기억 어딘가를 스쳐 지나갔다. 선명해서 외면할 수도 없는.
“이게 그 편지란다. 마지막에는 아주 친절하게, 너에게 보여 주어도 상관없다고 쓰여 있지.”
그래도 외면할 텐가? 공작은 매끄럽게 웃었다. 먹잇감이 움직이는 방향을 기민하게 살피는 뱀 같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
“네 언니가 나에게 한…… 부탁이야. 믿기지 않으면 돌아가서 물어도 되는 일 아닌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언니가 원한 거라면. 헤일라는 그것을 알아야 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다시 자리에 앉고 편지를 집어 들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헤일라는 자신의 믿음이 굳건히 버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깟 편지 한 장은 아무것도 바꿔 놓을 수 없으리라. 자신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견고해져 있다 자신했다.
그러나 진창으로 처박히는 건 아주 쉬웠다.
‘리안 휴리트가 귀족임을 알아본 제가 먼저 그에게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정갈하면서도 독특하게 끝이 말려 올라가는 언니의 글씨체가 맞았다.
‘그가 시키는 대로 동생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죠. 리안 휴리트는 헤일라가 지쳐서 자신에게 의지하기를 바랐거든요. 아무튼, 저는 그 대가로 보름에 한 번 제공하는 카탈로그에서 원하는 장신구 하나를 골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언니일 수 있단 말인가? 종이 위에는 구체적인 폭력의 수위와, 모멸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단어들. 그리고 노골적인 만큼 확실한 패악의 대가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타바에를 구하러 가게 만든 것도 약속된 일이었습니다. 하루 늦게 돌아오면 헤일라를 구타해 상처입히는 것까지도요.’
연결되기 어려워 보이는 행위와 대가가 헤일라 자신을 중심으로 얽어 들어 완벽하게 균형을 맞추었다. 언니가 매일같이 자신에게 패악을 부리고, 남자는 자신을 달랬던 일. 레테가 타바에를 구해 오라 무리한 요구를 하고, 리안이 돕겠다고 따라나선 일.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춤을 췄다.
‘얼마 전 그는 헤일라를 완전히 꿰어 내기 위해 저에게 독약과 명약을 복용하도록 종용했습니다. 이후에는 리안 휴리트의 뜻대로 되었고요.’
그의 신분을 알게 되어 멀어지고자 했을 때 급작스럽게 나빠진 언니의 건강. 기다렸다는 듯 뻗어진 리안의 손길. 레테를 구하기 위해 혼인을 해야 한다며 안절부절못하던, 죄스러워하던 리안.
‘공작께서 내게 더 큰 것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항상 내 삶을 망가트린 게 신이라 생각했는데.
‘이후에 이걸 동생에게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그 애 또한 기꺼이 공작님의 뜻에 따르게 될 테지요.’
사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망치고 있었다.
또렷하게 쓰여 있는 문장들이 띄엄띄엄 머릿속에 입력되었다가 그대로 부서졌다. 모든 감정의 경계가 유화의 선들처럼 모호하게 흩어졌다. 어지럽다.
그 와중에도 마지막 문장은 간결해 눈에 잘 띄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전달한 계집은 조용히 처리해 주시길.’
* * *
다른 어떤 사족도 붙어 있지 않았다. 헤일라는 떨리는 턱을 악물고 손끝으로 활자들을 더듬어 보았다. 종이는 허상이 아니었다.
“너는 네 언니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 여기니까.”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여자는 새로 들이닥칠 혼란을 거부하고 싶은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러나 타센이 멈춰 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았어야지.”
“…….”
“네 언니는 너의 그 같잖은 죄책감 덕에 가장 좋은 패를 쥐고 있었던 거야.”
모든 감정이 휩쓸고 지나가 무엇을 감각하는지 스스로 가늠하지 못하는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타센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텅 비었지만 아름다운 금안을 정확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레테라는 계집은 끝에 가서 리안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
“너와 달리 영리하지. 어디 붙어야 저가 사는지 잘 알아. 그러면서 분에 넘치는 이득까지 취하지.”
태생이 아까운 계집이야.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헤일라는 벌이 귓구멍 안을 파고들 듯 괴기스런 소리가 귓속을 지배해 공작의 목소리에 집중하지 못했다.
타센은 그런 헤일라를 보고 나직이 한숨을 쉬고 등받이에서 몸을 떼었다. 그리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탁자 위에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그는 헤일라가 어떤 상태이든 저 할 말을 마치고 싶은 사람 같았다.
“자, 이제 너에게도 선택지를 줘야겠지.”
공작의 입에서 나오는 선택지는 죄다 헤일라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고통을 주입시키는 그에게 욕을 퍼부을 힘도 없는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럼에도 타센은 멈추지 않았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뒤에 그는 잠시 침묵했다.
누군가 무너지는 모습을 관찰하는 남자는 바위처럼 메말라 있었다. 세월의 풍파에 마모되어 연약해진 바위. 그만큼 지치고 고통에 차, 언제고 부서지기만을 염원하는, 그리하여 가장 거대한 파도만을 고대하는 낡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답은 내일까지 준비하도록.”
* * *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헤일라는 리안을 배신한 수하가 안내하는 대로 작은 방에서 나와 다시 산의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미친 듯이 뛰었다. 뛰고, 뛰고, 뛰어 집으로 향했다.
낡고 낡은 나무 문을 부수듯 밀쳐 집으로 들어가서 언니의 방을 찾아 앞에 섰다. 그 앞에서 헉헉대며 숨을 골랐다. 손을 문고리 위에 올려 두니 서늘한 온도가 손바닥 안쪽으로 기어들어 왔다.
얼른 들어가야 했다. 서두른 만큼 얼른 문을 열고 언니를 마주한 뒤에, 자신이 들은 허무맹랑한 말들을 언니에게 털어놓고, 또 한심스레 멍청한 말에 넘어간 자신을 언니가 타박하길 기다려야 하는데……
‘너에게 기회를 주려고 해.’
왜 갑자기 그날이 떠올랐을까?
“들어와.”
딱딱한 명령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문 너머의 레테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언제나와 같은 언니의 음성이었다. 평소 가슴을 선득하게 만드는 냉정함이 오늘만큼은 정겹게 느껴졌다.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헤일라는 살포시 웃으며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손이 떨렸으나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레테를 마주하면 이깟 떨림은 금세 잦아들 테다.
“언니.”
나 정말 이상한 말을 들었어. 언니가 나를 리안한테 팔아넘기려고 이제까지 연기를 했대. 리안은 언니한테 피를 토하는 약을 주고, 언니는 그걸 먹은 거래.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도 공작이 너무 사실처럼 이야기해서 정말인 줄 알았어. 나는 너무 놀라서…….
마차를 타고 산 아래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준비해 둔 말들이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침대로 달려가 종알종알 불안과 안도를 동시에 늘어놓으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앞에 서서는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다.
레테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이 헤일라를 외면하는 모습일 뿐인데 불길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저 자신의 문제라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헤일라는 오른발을 떼 한 걸음 다가갔다.
“언니.”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녀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레테가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그래.”
“…….”
“잘 다녀왔니?”
그 순간 헤일라는 자신의 입이 왜 얼어붙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내 말대로 빨리 돌아와 줬네.”
이런 얼굴을 볼까 봐 겁이 나서였다. 모든 것을 다 알고서 매끄럽게 웃고 있는 가증스러움을 마주할까 봐.
돌덩이 같은 발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이라도 더 확실히 레테의 얼굴을 봐야 했다. 그리고 입을 열어 무어라도 물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성대는 얼어 버린 수도관처럼 아무런 목소리도 내놓지 못했다.
“지친다.”
“…….”
“너도 그렇지?”
짧은 시간 어둡고 긴 호수처럼 음침한 고요가 둘 사이에 흘렀다. 레테가 잠시 입을 달싹이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말했다.
“이제 돌아가자.”
“……어디로?”
“예전으로.”
예전으로. 헤일라는 귀로 들은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녀의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가늠해 보려는 최대한의 노력이었고 부정해 보려는 발버둥이었다. 그러나 파도가 배를 피해 가지 않듯, 불행 또한 헤일라를 빗겨 가지 않았다.
“오늘, 너도 들었으니 알 거야. 리안 휴리트가 어떤 남자인지.”
“…….”
“네게 얼마나 미쳐 있는지. 그 남자는 널 망칠…….”
“거짓말.”
그녀는 마치 묵직한 돌을 움직이는 사람처럼 천천히, 힘겹게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해. 내가 들은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
“평소처럼 화내면서, 그걸 믿었냐고, 모지리라고 욕해 줘야지, 응?”
헤일라는 그녀가 언니를 사랑했던 만큼의 믿음을 담아 레테를 마주 봤다. 무슨 변명을 하든 믿을 요량이었다. 아무리 허무맹랑한 말을 한다 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못된 악인의 꼬임에 넘어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할 참이었다.
그녀는 언니의 말을 아주 잘 듣는 착한 아이니까. 레테가 하라고 하는 대로 하고, 사실이라 이르는 것을 믿고,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는 동생이니까. 그렇게 살면 버림받지 않고 영영 언니와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헌신에 애정으로 보답받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 해도.
“왜?”
그게 혼자 맺은 약속임을 지금 알게 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은가.
“내가 한 게 맞아. 아마 네가 들었을 말들 전부다. 공작에게 그렇게 부탁해 두었으니까. 내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믿음이 가지 않았어?”
레테는 무섭도록 담담했다. 그녀는 잠자리의 날개를 다 떼어 두고 혼이 나면서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아이처럼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헤일라는 자신의 안에서 자그락대는 환청을 들었다.
“왜?”
그만.
“왜 그랬는데?”
물어보지 마.
헤일라 속에 있던 것이 그녀를 다그쳤다. 그러나 입은 멋대로 추궁을 이어 갔다. 입에서 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답이 돌아오지 않자 호흡이 더 가빠지며 목소리가 째질 듯 커졌다.
“왜! 왜! 왜!”
안 돼!
헤일라의 속에서 무언가 퍽,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직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네 삶은 내 것이라고 했잖아.”
일말의 희망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선고였다.
레테는 변치 않는 진리를 읊는 사람처럼 단호하게, 동생의 마지막 염원을 짓밟았다. 망설임이나 후회 따위는 모르는 사람처럼 거침이 없었다.
“날 위해 모든 걸 하겠다며?”
그녀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의 아찔함으로 헤일라를 밀어 넣었다. 숫제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인내심 깊은 포식자 같기도 했다. 헤일라는 헐떡이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꿈, 그래 꿈이라 생각하자. 호수에 푹 빠졌다가 나오면, 깰 수 있을 테다. 그렇게 해도 안 되면 집에 있는 무딘 식칼로 손을 찔러 보자. 그것도 안 되면 낭떠러지로 가서……
자신이 무슨 사고를 이어 가는지도 모르고 뒷걸음질 치다가 등에 단단한 문의 감촉이 닿음을 느꼈다. 그녀는 얼른 뒤를 돌아 문을 열려고 했다.
그때 레테의 황금색 눈이 맹금류처럼 반짝, 빛났다.
“설마 이 정도 일로 날 버리려고?”
그녀는 뒤돌아 현실과 자신을 갈라놓으려는 동생을 손쉽게 되돌려 놓았다.
“좋은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거니? 응?”
아, 또다. 헤일라는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지겹도록 되감기는 언니의 의심증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반응을 지켜보는 눈. 어떤 결과가 나올지 빤히 안다는, 분노에 절인 목소리.
“나를 버려도 불행할 텐데.”
결코 하지 않을 배신의 대가를 친히 읊어 주는 잔인한 나의 언니. 모든 것이 끔찍하게 익숙한 만큼 현실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동생의 애정과 헌신을 의심하고 불신하며 짓밟는 나의 유일한 가족.
천천히 뒤를 돌아본 레테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건조하고 냉정했다. 헤일라는 비틀대면서 다시 언니 쪽으로 걸어갔다. 정말인지 확인해야 했다. 아니, 확인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망가진 정신을 붙들고 간신히 호흡하며 나아갔다.
“더 불행해질 거야.”
“아니야.”
“널 물건처럼 휘두르려는 새끼 밑에 깔려서 몸 파는 것밖에 못하는 인생을 살게 될 테니까.”
“아니, 아니…….”
“넌 그렇게 될 거야. 오히려 내가 알려 준 덕에…….”
짜악!
“입 닥쳐.”
* * *
레테의 얼굴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바닥으로 제 뺨을 문질러 본 뒤 헤일라를 마주했다. 그때 다시 한번 더 헤일라의 손바닥이 뺨을 가격했다.
“닥쳐, 닥치라고!”
이제 헤일라는 제 언니의 비쩍 마른 몸 위에 올라가 미친 듯이 얼굴을, 어깨를, 몸통을 때렸다. 레테는 반항하지 않고 모든 폭력을 감내했다. 레테의 코에서 피가 흐를 때 즈음 되어서야 헤일라의 손찌검이 멈췄다.
“흐, 으, 아! 아아……!”
풀썩 무너져 레테의 몸 위에 쓰러진 헤일라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샜다.
“아아아악!”
그녀는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고, 울다가 겨우겨우 숨을 고르고 레테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레테는 미동도 없었다. 마치 헤일라를 기다려 주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헤일라는 그것이 너무나 우스워서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한순간 돌변해 레테의 목을 두 손으로 쥐었다.
“왜 그랬어?”
“…….”
“왜 그랬냐고! 왜! 나한테,”
“안 그랬으면.”
“…….”
“네가 날 버렸을 테니까.”
하. 헤일라의 목에서 쉰 한숨이 세었다.
“그 새끼를 선택할 테니까.”
찰싹!
다시 한번 헤일라가 레테의 뺨을 쳤다. 그러나 아주 약한 힘으로 뺨을 쓰다듬듯 때린 것뿐이었다. 레테가 돌아간 고개를 느릿하게 돌려 동생과 눈을 맞추었다. 헤일라는 일그러진 얼굴로, 울면서 웃었다.
“내가 언니 거라서, 내가 배신할 것 같아서 나를 속였다고? 아니!”
헤일라는 탈력감에 물들었던 몸에 분노가 북받침을 느끼며, 가증스러운 언니를 향해 울음 섞인 비웃음을 흘렸다.
“언니는,”
그녀는 절망에 허우적거리는 채로 처연하게 떨었다. 언젠가 레테가 바랐던 모습 그대로.
“언니는 그냥 날 망가트리고 싶었던 거야.”
언젠가 레테가 바랐던 모습 그대로.
“너는 날 증오하니까. 그것밖에 안 남았으니까.”
몸이 서서히 무너지며 바닥과 무릎이 닿았다. 헤일라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눈물을 떨구었다. 차마 믿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스스로의 입으로 내뱉는 이 상황이 치가 떨렸다.
“바보 같았어. 언니 말이 맞아. 머저리처럼 혼자 붙잡고 있었던 거야. 그러면 언젠가, 언젠가 다시 언니 동생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기회가 올 거라고……”
“헤일라.”
“이미 다 끝난 건데…….”
레테가 계속 불러도, 그녀는 어딘가 망가진 사람처럼 중얼댔다.
“그래서.”
“…….”
“그래서 날 버릴 거니?”
헤일라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언니와 눈을 맞췄다. 이 꼴이 되고도, 자신을 이 꼴로 만들어 두고도 믿음과 약속을 운운하는 레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도 그런 게 중요해?”
“버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어리석지 않은 여자였다. 그녀는 영리하고 계산이 빠르며 이치를 파악하는 데 능했다. 그러니 헤일라가 느끼는 분노와 상실감, 그리고 분노를 전혀 모르는 게 아닐 터였다.
“내가 이렇게 안 했으면 넌 날 버렸어. 그 새끼를 선택했을 거라고. 결국에, 그렇게 됐을 거라고!”
그럼에도 이렇게 악을 쓰는 건, 이토록 잔인하게 구는 건, 정말로.
“……그냥.”
나를 한 치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그냥 그때 죽을걸.”
헤일라는 멍하니 중얼댔다. 피비린내가 온 집안을 휩쓸고 옷소매까지 닿았을 때, 언니가 고깃덩이들을 가리키며 저 꼴로 죽고 싶은 거냐고 물었을 때 그냥 죽을 걸 그랬다.
“그때 언니한테 죽어 줄걸.”
헤일라는 그 말을 남기고 한참을 서 있다가 천천히 뒤돌아 방을 나왔다. 침대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헤일라는 텅 빈 눈으로 대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정처 없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무작정 산을 올랐다.
죽었어야 했는데. 그때, 그냥, 그때…….
천천히 걷던 걸음이 어느샌가 빨라졌다. 그러다가 점점 더 속도가 더해져 미친 듯이 위를 향해 뛰었다. 그녀는 달리고, 달리고, 달리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철푸덕,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으나 반응하는 것은 작은 산짐승들뿐이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헤일라는 그 사실을 깨닫고 일어나지 않았다. 흙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몸을 구부려 무릎을 안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옆으로 줄줄 흘러내려 가 귓가까지 닿았다. 그녀는 아무래도 좋은 사람처럼 그냥 눈만 깜빡, 깜빡 감았다 떴다. 시야가 자연스레 발끝에 닿았다.
“아.”
그곳에는 리안이 선물한 신발이 흙투성이가 된 채 발에 끼워져 있었다. 아주 값비싼, 편안한, 익숙한, 신발이.
“욱…… 우욱…….”
갑자기 헛구역질이 올라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결국 낮에 먹었던 모든 걸 흙 위에 게워 냈다. 토기가 멎지를 않아 결국 가슴을 치며 모든 걸 게워 냈다. 하지만 멀건 쓴물만 흘러나올 때가 되어서도 속에 무언가 얹힌 듯 꽉 막힌 압박감은 옅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그녀를 짓눌렀다.
“흐, 으윽, 으으으…… 흐, 허어…….”
그녀는 깊은 바다에서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숨쉬기가 힘들어져 가슴을 퍽퍽 쳤다.
“아, 흐으으으……. 으윽…….”
차라리 정말로 익사해 버렸으면.
몸을 늘어트리고 힘을 뺐다. 헤일라는 몇 시간 동안 그렇게 스스로를 방치했다. 해가 움직이며 자신의 그림자가 휘어지는 것만을 응시하다가 점차 어두워져 그조차 희미해졌을 때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멀건 얼굴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그녀는 엉망이 된 제 몸을 추스르지도 않고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어둑한 산이, 높은 나무가, 축축한 흙이 낯선 사람처럼 한참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아, 닭고기 스튜 해야 하는데.”
헤일라는, 언니가 화내면 어떡하지, 하고 중얼댄 뒤 비척비척 걸었다. 그녀는 어두운 산길을 내려가면서 몇 번이고 넘어졌다. 그러나 저 혼자 히죽, 웃은 뒤 다시 일어나 서둘러 산을 내려가 집으로 향했다.
자신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집으로 쉬지 않고 걸었다.
* * *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헤일라는 천천히 레테의 방문을 열었다. 불이 꺼져 있는 방은 어두웠고 레테는 몸을 돌린 채로 미동이 없었다. 헤일라는 굳이 확인하지 않고 언니가 자는 것이라 여기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서 닭고기 스튜를 대신할 음식을 고민하다가 채소와 토마토를 꺼내 손질하기 시작했다.
탁탁탁, 스걱, 스걱.
텅 빈 공간에는 칼질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헤일라는 다듬어진 재료를 기계처럼 썰고, 썰고 썰다가 채소가 심하게 짓물렀다는 걸 깨닫고 냄비에 옮겨 담았다. 낭패감이나 당혹감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물을 붓고, 스튜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잘 저어 주었다.
몇 시간 뒤 걸쭉하게 끓인 스튜를 그릇에 옮겨 담고 쟁반 위에 올렸다. 그리고 익숙하게 언니의 방에 들어가 레테의 침대 옆 탁자에 쟁반을 올려 두고,
“언니, 밥 먹자.”
하고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늘은 내가 깜빡하고 시장을 못 가서 닭고기 스튜는 못했어. 그래도 언니 식사는 꼭 해야 약을 먹으니까…….”
그녀는 이제껏 해 왔던 말을 줄줄 뱉으며 레테를 내려다봤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미동이 없다. 언니가 왜 화가 났지? 역시 해 달라고 한 음식을 안 해 줘서 그런가 봐. 헤일라는 가볍게 자책하고 재차 미안하다 사과했다. 그러나 레테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 약이랑 같이 두고 갈 테니까 꼭 먹어, 알았지?”
그리고는 평소처럼 일어나 방을 나섰다. 곧 돌아올 리안을 맞아 주어야 하니까.
그 뒤에 헤일라는 젖은 수건으로 몸에 묻은 흙을 대충 닦아 내고 옷을 갈아입은 뒤 자신의 방 침대에 앉았다. 앉아서는 해야 할 일들을 곱씹었다.
리안이 오면 식사를 챙겨 주고, 같이 호수에 가서 몸을 씻은 다음, 아, 또,
“뭐였지?”
또다시 삐- 하는 소리가 머릿속에 꽉 찬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귀를 퍽퍽 내리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 생각났다. 공작에 관해 이야기해 줘야 해.
헤일라는 떠오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계속 중얼댔다.
공작이 언니랑 연락하고 있었어. 공작이 언니랑 이상한 일을 꾸미는 것 같아. 네가 위험해질지도 몰라. 리안, 조심해. 조심해. 조심해. 조심해. 조심해…….
“그런데 왜 이걸…… 말해 주려고 했더라.”
사고가 엉켜 하나로 귀결되지 못하고 여기저기 부유했다. 헤일라는 다시 머리를 퍽퍽 때린 뒤 눈을 끔뻑거렸다.
“아, 위험해서…….”
또…… 아, 생각났다. 헤일라는 실실 웃었다. 여자가 낄낄대는 목소리가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위험하니까 말해 줘야지. 리안한테…….”
분명 놀라겠지. 리안은 자신에게 어떻게 알았냐며 당혹함에 젖은 얼굴을 할 테다. 그러면서, 널 위해서였다고, 언니에게 매일 구박만 받는 너를 위해 그랬노라고 울면서 용서를 구할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가 그렇게 행동할 이유는 그것뿐이다. 헤일라는 그런 남자에게 마땅히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리안이 울며불며 매달려도 처음에는 받아 주지 말아야지. 화를 내고, 때리고, 꼬집고 소리 지르면서 악을 쓸 생각이었다. 쉽게 용서해 주지 않아야 앞으로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가 그가 정말로, 정말로 뉘우치는 것 같으면 용서해 주겠다 선언하겠다.
그와 이야기가 잘되면, 그래. 언니랑도 다시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레테를 쉽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언니는 아프니까. 몸이 나으면 나에게 미안해할 것이다. 분명히 그러겠지. 언니가 그렇게 된 건 내 탓이니까 내가 참아야 해. 참아서……
잘할 수 있을 거야. 이제까지 최선을 다했으니까.
* * *
그녀는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중얼대고 다시 일어섰다. 헤일라는 자신이 느꼈던 모든 감정을 발끝까지 눌러 내리며 입술 끝을 올렸다. 두 팔로 스스로를 감싸 안았다. 온몸이 달달 떨림에도 웃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앞으로 일어나 살아갈 수 있는 구석을 남기기 위해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고통으로 더 큰 고통을 막아야 견딜 수 있었다. 방을 천천히 걸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달칵.
그때 문이 열렸다.
“헤일라?”
아.
“왜 그렇게 서 있어.”
리안.
헤일라는 자신이 소리 내어 그를 불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이 아니었는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응, 응, 사실은…….
“헤일라.”
그가 성큼 다가와 자신의 뺨을 쥐었을 때가 되어서야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꼴이 왜 이래.”
리안이 화가 난 얼굴로 무어라 묻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고자 했던 말도, 해야 하는 말도 모두 눈물과 함께 뽑혀 나간 듯했다. 헤일라는 잔뜩 젖은 목소리로 무어라 대답을 하려 하다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매달렸다. 파고들었다. 애원했다.
훌쩍 뛰어들어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추었다. 그만큼 따뜻한 품이 절박했고 확신이 필요했다. 이 남자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혀를 섞고 체온을 나누며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리고,
“나한테 숨기는 거 있으면, 지금 말해.”
“너까지, 나한테 못되게 굴면, 나 정말로, 정말로……”
“그러니까 숨기는 거 있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줘.”
“다 용서해 줄 테니까, 앞으로가 중요한 거니까, 응?”
쿵. 쿵.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의 입에서 속죄의 말들이 쏟아지기를 고대하며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리안이 잘못했다 말하면, 언니에게 매번 구박받는 네가 가여워 그리했다 하면 나는, 그게 변명이라도 고개를 끄덕거려 줄 테니까.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 제발……
그러나 파도가 배를 피해 가지 않듯, 불행 또한 헤일라를 피해 가지 않았다.
“걱정 마, 헤일라.”
리안 휴리트는 끝내 그녀를 배신했고,
“약속은 지켜. 무슨 일이 있어도 배신 같은 거 안 하니까.”
기만했으며,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다정했다.
그녀의 세계가 무너지는 데는 몇 마디면 충분했다. 그제야 비로소 헤일라는 그의 사랑에 자신이 질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붙잡고 있던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가차 없이 짓밟혔는지 깨달았다. 모든 진심을 쏟아부어, 목숨도 바칠 수 있을 만큼 사랑했던 이들에게 자신은 그저 정복하고 싶은 계집이었고 쓰다 버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아, 나는 이제 죽고 싶지 않았다.
“울지 마.”
나를 기만한 당신들을
“사랑해.”
죽이고 싶다.
* * *
신전에 널브러진 남자를 보면서 읊조리는 헤일라는 침착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어 온몸을 떨고 있는 리안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정말로…… 뭐가 잘못된 건지 오래오래 생각해 봤어.”
“헤일라.”
“역시 그때 죽어 버렸어야 했던 걸까? 언니가 팔려 가기 전에 쓸모없는 몸뚱이를 불 속에 집어 던져서라도 사라졌으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헤일라.”
그가 자신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속이 메스꺼워져 얼굴을 와락 구겼다.
“너랑 엮여서 이렇게 고통스러울 일도, 언니한테 배신당할 일도 없었을 거야. 응, 그랬겠지.”
“헤일…….”
“역겨우니까 내 이름 부르지 마.”
리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의 입에서 결코 나오지 않을 말을 들은 사람 같았다. 헤일라는 그것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나를 기만했으면서 다정을 기대한 걸까?
거짓으로 만든 세계에 그녀를 담가 자신으로 함빡 적셔 놓으려던 리안 휴리트. 그가 처음으로 멍청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습다 생각하는데도 속이 짓무르듯 명치가 알알했다.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모르고 싶었다.
“……죽을지도 몰라.”
그를 버려야 할 시간이었다.
“네가 나를 버리고 가면 나는 죽을지도 몰라…….”
리안은 이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토해 내듯 지껄였다. 그러니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걸하는 꼴이 비참했다.
하지만 헤일라는 이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럼 죽어야지.”
그는 벌을 받아야 했다.
“네가 여기서 죽어도 나는 어쩔 수 없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다 끝나 버렸잖아.”
그게 공평했다. 그게 맞았다. 헤일라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웃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리안은 심판을 받는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묶인 손을 뻗어 헤일라에게 닿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그의 손길을 쉽게 피했다. 아주 약간의 거리가 벌어진 것뿐인데도 리안은 발작하듯 헐떡이며 무릎으로 기었다.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 믿는 사람 같았다.
그가 어떤 모습이든 헤일라는 잔인한 심판을 이어 갔다.
“약속, 잊지 않았지.”
‘이 족쇄 풀고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 앞으로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 그리고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겠다고 약속해.’
‘내 안에서 너는 끝난다는 말이었어.’
“네가 끝낸 거야.”
꽃이 개화하듯 천천히 그녀의 눈이 뜨였다. 넓게 퍼진 황금빛 꽃잎처럼 눈동자가 곧게 빛났다. 눈물 때문에 반질반질한 표면이 그를 더 선명하게 담았다. 리안은 헤일라 쪽으로 천천히 기어가 그녀의 발끝에 손끝을 올렸다.
“헤일라, 제발…….”
애원이 길게 늘어져 그녀의 발치까지 닿았다. 그러나 헤일라는 다리를 뒤로 물리면서도 그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끝내 외면할 생각이었다.
“네가 끔찍해, 리안.”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완성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영영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레테는.”
매몰찬 마지막 말을 내뱉고 뒤를 돌아서려 했을 때, 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까지 절절 끓는 애원을 퍼부었던 남자는 없었다. 그는 형형한 눈을 하고 그녀만을 바라봤다.
“그년도 널 속였어. 그년이 먼저 나한테 접근했다고.”
“……그래.”
오늘 그의 앞에서 한 말 중, 이것 하나만이 진심이었다. 헤일라는 레테를 버리지 못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언니는 내가 끝까지 책임질 사람이야. 너랑은 달라, 리안.”
“거짓말.”
신경질적인 웃음이 터졌다. 이제 리안은 낄낄대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모습이 기괴했다.
“너는 그냥 나를 버리기로 한 거야.”
“…….”
“넌 그년을 더 사랑하는 거야. 그래서 날, 나만 버린 거야……”
그는 버림받은 어린 짐승처럼 흐느꼈다. 그 모습을 보는 헤일라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울고 있는 연인들은 더 이상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 공작을 지나, 리듀카를 나가는 문을 향해 걸었다. 울음소리가 새지 않도록 입술을 콱 깨물며 나아갔다.
리안은 죽지 않는다. 헤일라는 그렇게 되뇌며 다리를 움직였다. 그의 꺽꺽거림을 훌륭하게 외면했다.
공작은 아들을 죽이지 않겠다 약속했다. 그저 저택으로 데려가 후계로 세울 것이라 말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는 리안을 죽이려 했던 남자니까. 리안은 아버지가 저를 죽이려 해서 저택을 빠져나왔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헤일라의 말을 들은 타센은 귀찮다는 듯 앞머리를 쓸어 올려 흉이진 제 이마를 보여 주었다.
‘그날 나를 죽이려 한 건 내 아드님이었는데.’
아직도 믿음을 버리지 못한 멍청한 계집을 힐난하는 어조였다. 공작은 리안이 자객이라 생각하고 방어했고, 그 과정에서 리안도 다쳤다고 했다. 리안은 계획에 실패하자 도망쳐 산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헤일라가 발견해 인연이 시작되었다.
‘난 그 애를 못 죽여.’
그 말을 하는 남자는 어딘가 아득해 보였다.
헤일라는 더 묻지 않았다.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공작이 리안을 죽이고자 했다면 헤일라 자신을 인질 삼거나 거주지를 찾자마자 등에 칼을 꽂아 넣었으리라. 그러나 타센은 그러지 않았다. 정성스럽게 판을 짜고, 수고를 들여 헤일라를 회유하고 있다.
공작은 리안이 언니에게 약속했던 치료와 재물을 자신이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미 리안이 자매를 찾을 수 없도록 거처까지 마련해 두었다고 알려 주었다. 레테와 이미 이야기가 된 부분이라고. 헤일라는 이 대목에서 실소를 흘렸다.
‘그 대가로 너는 리안을 버려 줘야겠어.’
그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확실히 아들과의 연을 끊으라고. 왜냐고 묻는 헤일라에게 공작은 침묵으로 답했다. 헤일라는 그저 타센이 무능한 평민 계집을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맞을 수는 없다 여긴다 생각했다.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괜찮다.
헤일라는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밖으로 나가는 문이 지척에 있었다. 신전의 심장이라는 리듀카의 백색 문 앞에 다다랐다. 차가운 문의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렸다. 쿵쿵, 심장이 울렸다.
그런데 만약, 아주 만약에 공작이 거짓말을 한 거라면?
아들을 정신적으로 몰아붙이고 죽이려는 수작이라면?
그녀는 공작의 제안을 듣고 매 순간 생각해 왔던 리안을 위한 만약을 이 순간에도 떠올렸다. 그를 염려했다. 완전히, 놓지 못했다. 게다가 공작은 헤일라의 앞에서 리안의 머리채를 잡고 구타하지 않았나. 그도 결코 정상은 아니었다.
목이 삐걱대는 목각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리안이 약간의 희망에 차 거친 숨 속에 헤일라의 이름을 섞어 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헤일라는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타센 휴리트는 보란 듯이 웃었다.
‘내 제안을 거절하는 건 네 자유지. 하지만.’
네 언니는 죽어.
리안을 배신하고, 타센에게 의탁한 언니였다. 만약 리안이 살게 된다 해도 언니의 치료를 도울 리가 없었다. 아니,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헤일라는 결국 다시 뒤 돌았다. 공작이 리안을 죽인다는 경우의 수는 그녀의 망상에 불과했다. 게다가, 리안은 이제껏 그녀에게 진실을 말한 적이 거의 없지 않은가.
또 속으면 안 돼.
그녀가 속삭였다. 그러나 동시에 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거짓말.
힐난하는 말은 날카롭고 정확했다.
넌 그냥 언니가 더 소중한 거야. 저 애를 버린 거야!
헤일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활짝 열린 문을 비집고 빛이 쏟아졌다. 신전의 정원은 이전과 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왜인지 아름다운 꽃과 푸른 잎으로 단장되어 있는 길은 끔찍한 가시밭처럼 보였다. 뒤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절규가 쉴 새 없이 들려오는 탓일까.
헤일라는 귀를 막았다. 그리고 무작정 앞으로 내달렸다.
도망쳤다.
* * *
여자가 문을 박차고 나간 뒤에도 리안은 그녀의 이름만 중얼댔다. 그리고 그녀가 나간 문 쪽으로 꿈틀대며 나아갔다. 철로 되어 있는 수갑이 발목과 손목에 채워져 있음에도 끈질기게 그녀를 쫓으려 했다. 타센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걸음 만에 아들을 따라잡아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학습 능력이라는 게 없군.”
내 아들이 맞는 건가? 그는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제 아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눈에는 살의도, 증오도 없었다. 공허만이 녹아 있는, 죽은 물고기 같은 눈이었다.
“볼 만 하구나.”
타센은 놀랍지도 않은지 그저 픽 웃었다.
“너를 버리고 제 혈육의 안위만 좇는 여자인데.”
“…….”
“그런 계집 때문에 이런 표정이라니.”
정말 많이 변했어. 그는 퍽 유쾌하게 말하고는 머리칼에서 손을 놓았다.
“배신당해서 이 꼴이 됐는데도…….”
리안은 계속 침묵했다. 타센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그래, 날 도와준 이가 너한테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는데.”
“…….”
“다른 입이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겠지. 그 정도로 무능하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리안이 정한 날을 정확히 알고 기다릴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리안은 헤일라에게 정확한 날짜를 알리지 않았다. 순전히 그녀가 걱정할까 봐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그저 일을 나가겠다고만 했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을 흉내 냈었다.
그런데 그날 공작저의 지하에는 리안을 포획하기 위한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치 그가 그 시각에, 그 장소에 정확히 도착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헤일라가 배신했다는 그림은 그럴 듯했지만 아귀가 맞지 않았다. 게다가 피워져 있던 독초, 그것은 휴리트 가문의 인간들이 유일하게 내성을 갖지 못하는 ‘필로테리움’이었다. 어릴 때부터 소량의 독을 복용해 내성을 키우는 휴리트 가문도, 필로테리움 만큼은 너무 독해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필로테리움은 피웠을 때 반 시간밖에 효과를 내지 못하고, 신전이 엄격하게 관리해 공작가라 해도 대량을 구해 두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타센은 리안이 언제 침입할지까지 다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게다가 지금 둘이 마주하고 있는 신전은 또 어떤가. 리안을 신전의 중심에 가둬 두기 위해서는 관련자의 도움까지 필요했을 터. 황제와 미아르의 눈을 피해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이거나, 둘 중 하나거나. 어쨌든 헤일라만 리안을 배신한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구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헤일라의 잔상만 좇던 남자가 이제야 아비에게로 눈을 돌렸다. 멀겋게 바랜 얼굴에 박혀 있는 눈알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타센이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고 미소 짓다가 신의 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비극을 낳는 법이니.’”
리안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조심하라고 했잖아.’”
결코 생각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 애는 내 거야.’”
벌어진 입술이 닫히지 않았다. 동공이 길게 찢어졌다.
“왜, 놀랐나?”
리안은 어째서 그 계집이 한 말이 타센의 입에서 나오는지 이 순간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너무 하찮아서 경계조차 하지 않았던 병에 걸린 계집이, 네 모든 걸 망쳐 놨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
“조심했었어야지, 리안. 내가 말하지 않았나. 상대를 완전히 알지 못하면 긴장해야 한다고.”
꿇어앉은 남자는 가는 신음을 내뱉은 뒤 주먹을 꽉 쥐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이고 이마를 찧어 핏물이 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순간 뚝, 하고 행동을 멈추고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는 갑자기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져서는 공작을 향해 일갈했다.
“예언.”
자신이 간과한 단 하나의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래. 레테라는 계집이 예언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더구나.”
휴리트는 품 안에서 편지 몇 장을 더 꺼내 다리를 굽혀 리안의 눈앞에서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약간 색이 바랜 싸구려 편지지는 여기저기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레테가 신문 배달부를 통해 공작에게 전달한 종이 뭉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헤일라에게 건넨 한 장을 뺀 나머지 종이들이었다.
“내가 찾은 게 아니야. 그쪽이 날 찾았지.”
공작은 아들이 몰랐을 법한 사실들을 하나둘 짚어 주었다. 영리하고 주도면밀한 예언자가 누구를 이용해 공작에게 접근했는지. 그리고 레테의 뜻대로 움직인 배달부가 어떻게 공작에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 전부.
“천한 것들이 발을 들일만큼 공작저가 만만하지는 않아. 네 여자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타센은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넘긴 헤일라에 관해 말하며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날 네 대역의 시신을 확인하러 수도 외곽에 있는 숲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웬 여자 하나가 앞을 막아서더군. 레테라는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어디로 가야 나를 만날 수 있는지. 국왕과 네 눈을 피해 나와 접촉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
“신문 배달부라는 여자는 네게서 얻은 목걸이로 꿰어 내고, 나를 이용해 필요 없어진 전달책을 죽여 없앴다. 영리한 여자야.”
게다가 레테는 중요한 내용을 여러 번 주고받을 수고를 줄이기 위해 한 번에 모든 예언을 정리해 보냈다. 리안이 언제 어떻게 저택에 침입할 것이고, 리안의 심복을 꿰어 내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리안과 연결되어 있는 신관들을 어떻게 외부로 유인해야 하는지 가감 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타센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까지 계산이 되어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하, 하하…….”
리안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손안에 모든 것을 쥐고 있었는데, 정작 놀아나고 있던 건 자신이었다.
“그럼, 그 새는.”
굳이 보낼 필요가 없는 새였다. 되짚어 보면 그냥 위장에 불과한 말들이 나열되어 있는 전서구였다. 더 이상 전달받을 예언이 없다면 굳이 새를 보내 리안에게 둘의 관계를 노출시켜 위험 부담을 떠안을 이유가 없었다.
“아아. 그거.”
타센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걸 알릴 방법이 없잖나. 그래서.”
“…….”
“편지는 당연히 위장이었지만…… 물에 불린 편지를 새에게 먹여서 신호를 확인했다.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으면 새는 그대로 창문 밖으로 날아갔을 테고, 무언가 엇나가 우리가 접촉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난 그 새에게 치명적인 독을 종이에 발라 두기로 약속했거든.”
편지를 말소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일이 틀어지면 새가 죽을 테고, 그러면 접촉해야 한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새는, 단 한 번도 물에 푼 종이를 먹고 죽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전부 그년의 계획이었다고…….”
치료나 귀물 따위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년은 처음부터…… 처음부터…… 동생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 모두를 속이고 있었다.
깊은 살심과 제대로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자책, 그리고 헤일라에 대한 감정이 거칠게 섞여 넘실댔다. 리안은 손을 덜덜 떨면서 묶인 팔을 들어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런 아들을 보고 공작이 짐짓 자애롭게 말했다.
“괴로워 보이는구나.”
“…….”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신당하고, 밑바닥 인생이라 멸시했던 계집에게 농락당하고…… 꼴이 우습게 됐어.”
리안이 숨을 헐떡였다. 일평생 지나치게 잠잠하기만 했던, 그러면서도 헤일라에게만 반응해 왔던 모든 감각이 살갗을 뚫고 그를 휘감았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니, 사랑 같은 건 쓸모가 없다고.”
그건 너를 불행하게 해. 말을 내뱉는 타센은 묘한 표정이었다. 앞에 있는 리안을 보면서도 뒤에 있는 다른 무언가를 보는 사람처럼 몽롱했다. 그러나 리안은 깊은 좌절감에 허우적대느라 아비의 변화를 기민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육신을 갈기갈기 도륙하고 싶다는 충동만 더욱 진해질 뿐이었다.
“나를 죽이고 싶은 얼굴이야.”
타센은 리안의 속내를 단번에 꿰뚫고는 낮게 웃었다. 그리고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넘긴 뒤 천천히 걸었다. 그는 공간의 중앙, 신의 성물이 자리하고 있는 빛의 기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 하나를 꺼냈다.
“그 예언자도 그러더구나. 네가 나를 죽일 거라고.”
자, 시험해 볼까.
그는 빛 속으로 손을 뻗어 신전의 심장과도 같은 성물을 끄집어냈다. 그 천연덕스러움에는 익숙함마저 엿보였다. 타센은 리안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자아, 이제 완전해지는 일만 남았어.”
“…….”
“네가 심장을 찔러 그 사랑이라는 것만 도려내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이루어 주마.”
마치 말을 잘 들으면 아이에게 조르던 장난감을 사 주겠다 선언하는 부모 같았다. 그만큼 가볍고 다정했다.
“공작위와 모든 제물이 네 것이야. 물론, 원한다면 그 자매들도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지. 그리고, 나도.”
“…….”
“나도 기꺼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마.”
그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벅차 보였다. 중간중간 말을 멈추고 얼굴을 일그러트리거나 심호흡을 하기도 했다. 이토록 긴장하는 타센은 처음이었다.
“왜.”
아비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답지 않게 망설이며 입술을 물었다.
“내가 성물을 써서 네게 남는 게 뭐야.”
기형적인 양육 방식이었다. 정 붙일 곳을 두지 못하도록 하고, 붙이면 기어이 죽여 없애는 게 공작이었다. 리안은 타센이 자신을 증오해 그런 방법을 쓰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리안은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하지?”
리안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타센은 그런 리안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웃었다. 그는 갑자기 울고 싶은 사람 같았다.
“아니.”
단호했다. 그만큼 진실했다.
“너를 위해서.”
타센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타델리아가, 너를 잘 키워 달라고 하기에. 그래서.”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얼굴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너무 지쳐서…… 타센이 무어라 혼자 중얼대더니 고개를 휙 들어 리안의 어깨를 더 세게 쥐었다.
“사랑 같은 건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인간의 번뇌와 고통의 팔 할은 사랑에서 온다. 나는 그걸, 너한테서 완전히 떼어 낼 의무가 있어.”
타델리아가…… 그는 고장 난 기계처럼 죽은 부인의 이름을 불렀다. 리안은 그제서야 타센이 쥐고 있는 검으로 눈을 돌렸다. 옅게 떨리는 검은 칼날이 리안의 예측을 확신으로 굳혔다.
타센 휴리트는 이미 한 번 성물을 사용했다.
리안에게서 헛웃음이 샜다. 지난 시간 보아 왔던 아비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타델리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듯 무감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놓지 못했다. 타델리아에게 아무런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차마 버리지 못했다.
그의 아비는 타델리아의 육신을 그대로 보존해 둔 채 울지도 웃지도 않고 시간을 죽였다. 그것이 사라진 감정의 잔재임을 이제야 알았다. 사랑 없이 껍데기만 남은 남자가 감정의 그림자만을 안고, 맹목적으로 죽은 여자의 유언에만 매달렸던 것이었다.
“사랑을 버려. 그래야 인간은 완전해져. 너도 이제는 알게 됐잖니.”
헤일라라는 아이는 결국 너를 버렸어. 지금 네 꼴을 봐.
타센은 아들을 세뇌시키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난한 여정에 마침표를 찍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차가운 돌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는 영원을 맹세하는 고결한 기사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애걸하는 비렁뱅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묘한 부조화가 타센을 감쌌다.
“그 애도 선택을 했다. 이젠 네 차례야.”
공작이 리안에게 검을 쥐여 주었다. 리안은 손목이 마주 묶인 상태로 검은색 검을 쥐었다.
“하나를 버리고 모든 걸 얻는 거다.”
“하나를 버리고, 모든 걸,”
“그래.”
리안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그려졌다. 타센은 그 속에서 과거의 잔상을 발견하고서 흠칫, 떨었다.
그리고 곧이어 첨예한 신의 칼끝이 살을 파고들었다. 푸욱, 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