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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탈피샘 (4/10)

3. 탈피샘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준비했는데.”

풀이 팍 죽은 목소리. 하지만 헤일라의 눈에는 가증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침대에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여자의 죄책감을 자극하려는 알량한 수작이다. 그녀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침묵을 지켰다. 리안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계속 이렇게 굶으면 몸 상해.”

“내 몸 걱정을 하긴 하는구나.”

비아냥을 담아 잔뜩 꼬아 놓은 목소리가 그를 힐난했다. 리안이 자신의 입으로 지위를 실토한 다음 날부터 또 열심히 흘레붙었던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딱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남자는 침상에 털썩 앉았다. 가지런히 대령 되어 있는 음식들을 흘긋 보고 다시 헤일라를 마주 본다.

“그럼 오늘도 이것들은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겠다는 말이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들은 사람처럼 앞만 응시했다. 리안은 잠잠히 지켜보다가 표정 변화 없이 간이 테이블을 잡았다.

와장창! 곧이어 식기들이 깨지고 음식이 질펀하게 나뒹구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확인한 헤일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미 리안이 테이블을 들어 바닥에 내던진 뒤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대체 뭐가 불만이야, 응?”

“그걸 몰라서 물어? 지금 내 꼴을 봐!”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 발에 달린 족쇄가 달그락댔다. 리안은 무감하게 한 번 시선을 주고 여상한 태도로 답했다.

“이게 뭐.”

“너…….”

“내가 시작하기 전에 말했잖아.”

“…….”

“쉽게 안 끝낸다고.”

이불 아래 살짝 내밀어져 있던 한쪽 다리가 아래로 죽 끌려 내려갔다. 남자는 발목을 억세게 쥔 채로 천이 덧대어져 있는 속옷을 벗겨 낸 뒤 음부가 벌어지도록 했다. 고여 있던 정액이 꿀렁이며 흘러나왔다.

“이렇게. 한번 시작하면 내 자지 가장자리가 헐어 버릴 때까지 할 거였다고, 처음부터.”

“읏, 이거, 놓…….”

“넌 내가 만족할 때까지 해 주기로 했으니까.”

그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처럼 결백해 보였다. ‘정말로’ 헤일라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내고 있다. 헤일라는 그제야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리안의 눈동자에 정제되지 않은 난폭함이 일렁였다.

“한 번 대 주고 날 떼어 내려고 했으면서 이 정도로 지치면 안 되는 거 아냐?”

“……한 번 하고 떨어져 나갈 마음, 처음부터 없었잖아.”

“…….”

“그리고 날 먼저 속인 건 너야. 나보다 더한 기만으로 사람 바보 만든 건 너라고!”

대화가 도돌이표로 돌아왔다. 며칠 전부터 둘이 대화를 시작하면 꼭 이렇게 맺어졌다. 리안이 공작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힌 직후부터 헤일라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녀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삼 년 넘게 함께 생활하며, 갈 곳이 없다는 핑계로 눌러 붙어 있던 리안이다. 부모도 형제도 없다는 말로 동정심을 자극해 왔던 사람이 알고 보니 엄청난 권력을 쥔 공작가의 아들이었다고 하면 누가 배신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게다가 제대로 된 설명을 요구하는 헤일라를 몸으로 찍어 누른 건 리안이었다.

“기만.”

“그래! 넌, 넌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내, 내 부모님 이야기도…… 다 알고 나한테 그런 거짓, 거짓말…….”

부모 이야기를 하는 헤일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들의 죽음을 떠올리는 그녀는 언제나 유약했다.

“난 그런 적 없는데.”

삐딱하게 입술을 말아 올린 리안이 대꾸했다. 헤일라는 울컥한 목소리로, 그러나 누가 들을까 봐 낮게 읊조렸다.

“너도, 아니 네가, 네 부모님을…….”

죽였지. 차마 문장을 끝맺지 못하는 헤일라에게 리안이 친절을 베풀었다. 그녀는 패륜을 직접 입에 담은 남자보다 더 사색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큰 방에는 둘밖에 없었다.

“그래. 하지만 휴리트 공작은 살아 있어.”

언젠가 리안이 했던 고백이었다. 저가 부모를 죽인 패륜아라도, 괴물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겠냐고. 헤일라는 그때 이 애를 끝까지 돕겠다고 다짐했다.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남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도록 초석을 마련해 주자고. 그렇게 다짐했었다.

부모를 살해한 일에 관해 말하는 그가 너무 지쳐 보였고 또 그 얼굴이…… 레테와 닮아 있어서.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던 거다.

하지만 그게 모두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헤일라는 리안이 자신을 기만했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레테가 부모님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에게 그런 거짓말을 꾸며 낸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리안이 해 온 거짓말과 자신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돌이켜 보면 아예 불가능한 행동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한테 제대로 된 설명도 해 주지 않고 있잖아.”

“…….”

“네가 이렇게 구는데 내가, 내가 어떻게 널 믿어?”

억울함이 덕지덕지 발린 원망의 말들이 그에게 박혔다. 리안은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꼭 끌어안았다. 헤일라는 어쩐지 마주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으나 애써 참았다.

“그래.”

무언가를 결정한 듯 단정적인 투였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남자의 변화에 조금 긴장했다.

“네가 말해 달라고 하면 말 못할 것도 없지.”

리안은 내키지 않는 게 역력한 얼굴로, 그러나 꽤 가벼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대신에 무서워하면 안 돼?”

헤일라는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이 그녀를 칭찬하듯 머리칼을 한 번 쓸어내렸다.

“너한테 한 말 중에 거짓말은 없었어.”

자신이 원하는 진실 앞에서 누구나 그러하듯, 헤일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샅샅이 훑는 리안을 피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봤다.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죽었고.”

“…….”

“아버지는 내가 곧 죽일 거야.”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헤일라는 꿈에서도 듣지 못할 엄청난 고백에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타론 제국의 공작을, 제 아비를 죽일 계획이라 털어놓는 그의 말을 온전히 믿어도 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리안이 거짓말을 늘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정말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게 맞다면, 그가 계속 헤일라의 집에 머물렀던 게 설명된다.

그녀는 퍽 간단하게 털어놓은 리안에게 다른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입술을 물고 뜸을 들였다. 부모를 죽이려는 이유에 관해서 캐물어 그의 상처를 들추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보다도…… 그의 슬픔을 알고 이해하면 용서하게 될 까봐 두려웠다. 게다가 리안의 불행을 귀로 직접 들으면 어떻게든 감싸 주고 싶을 것 같았다. 그녀는 유약한 성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왜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아무렇지 않아?”

“뭐가?”

“실수로 죽인 거랑, 때만 노리다 뒤를 쳐서 죽이는 건 꽤 다르다고들 생각하던데.”

그는 여전히 관찰하는 눈이었다.

아, 그렇구나. 헤일라는 그제야 리안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무렇지도 않아.”

“…….”

“그냥 슬퍼.”

무언가 울컥하는 게 그녀의 속에서 튀어 올랐다.

“……세상에는 부모 같지 않은 부모가 많으니까. 내가 널 그런 이유로 미워할…… 리가 없어. 그냥 네가 불쌍해서 슬프기만 하다고.”

자식을 물건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제 부모를 떠올리는 눈이 점점 흐려졌다. 헤일라는 평생 동안 부모가 죽기를 바랐고, 복수심에 찌들어 썩어 가는 몸으로 그들을 죽인 언니를 이해했다. 그래서 레테를 도와 시신을 처리했던 거다. 그러니 그녀가 리안을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다행이다.”

리안은 한결 편해졌는지 한숨을 내쉬고 다시 헤일라를 껴안았다. 오랜만에 그와 대화다운 대화를 해내 긴장이 풀린 그녀도 힘을 죽 풀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럼 신전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공작 정도가 되는 권력자가 아니면 신전 출입은 어려웠다. 그는 잠시 주춤하다가 드물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결국, 전부 털어놓기로 한 남자는 헤일라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설명했다.

“내 친척이 날 도와주고 있거든.”

친척? 되묻는 목소리가 퍽 천진했다.

“내 어머니의 자매.”

헤일라가 헙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휴리트 공작이 공주와 혼인했음을 모르는 제국민은 없다. 게다가 하나뿐인 공주의 자매는, 이 나라의 황제였다. 그녀는 너무 먼, 아니 까마득한 거리감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그런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챈 리안이 그녀를 더 꽉 얽었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네.”

“…….”

“넌 나랑 못 헤어져.”

그가 그렇게 말해 봐야 헤일라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와 자신의 신분 차이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너무 한꺼번에 들이닥친 충격적인 사실들에 머리가 얼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리안과 자신은 안 될 사이였나 보다.

헤일라는 그렇게 자조적으로 웅얼거리다가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흉흉하기 짝이 없다. 이제 리안의 광기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헤일라는 이게 아주 위험한 신호임을 눈치챘다.

“나 또 궁금한 거 있어.”

한쪽 눈썹을 올린 그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 그녀를 빤히 들여다봤다.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표정이다. 헤일라는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럼, 왜 이제 와서……”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리안은 굳이 뒤에 말을 다 듣지 않고도 의중을 눈치챘다. 신분이나 재력을 이용해서 충분히 자신을 휘두를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지금까지 참아 온 것인지를 궁금해하는 것이리라.

“아.”

그가 여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어 몇 개를 고르다가 상냥하게 말했다.

“배운 대로 하면 네가 너무 가엽잖아.”

헤일라의 얼굴에 물음표가 띄워졌다. 그러나 그것이 경악으로 바뀌는 건 금방이었다. 리안은 자신이 어릴 적 겪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리안이 다섯 살 정도 먹었을 때였다. 그는 날이 좋은 봄날, 귀여운 토끼를 발견하고는 잡아 가두었다. 돌보는 일이 쉽지는 않았으나 우리를 만들어 먹을 것을 주고 매일 쓰다듬었더니 그 토끼는 길이 들어 아이의 무릎으로 다가오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리안은 토끼를 보면 기분이 좋았고 조금은 간질거리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감정이라고는 아프다, 싫다 정도만 학습해 왔던 아이는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토끼에게 이름을 지어 준 뒤에는 퍽 기분이 상쾌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는 아버지가 명령한 대로, 자신이 느끼는 바를 매일 보고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럼 그 토끼를 영영 네가 가지면 되겠구나.’

리안의 말을 들은 아비는 작게 속삭이며 아들을 제 서재로 안내했다. 그 방 안에는 여러 동물이 있었다.

‘저렇게 만들면 된다. 네가 직접 만들어 주어야 의미가 있겠지.’

데면데면하지만 하늘 같은 아버지였다. 저가 따라야 할 방향이라 학습하였으며 의구심을 가진 적 없었다. 그래서 리안은 공작의 말대로 했다. 그 토끼는 공작의 방에 있던 수많은 동물 중 하나처럼 박제되어 리안의 방을 장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걸 볼 때마다 썩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헤일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아이에게 비정상적인 행위를 강요한 공작에 대한 분노와, 잘못된 가르침으로 엇나가 버린 리안의 가치관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나, 하는 아득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헤일라는 아주 조금의 이야기만 듣고도 리안이 아버지를 죽이려는 이유가 납득되었다. 분명 공작은 아이가 커 갈수록 더 심한 학대를 자행했을 테다. 정상이, 아니었다.

“처음에 네가 좋아졌을 때는 박제라도 해야 하나 싶었어. 그런데…… 역시 난 살아 있는 네가 아니면 안 돼.”

당연한 상식을 엄청난 진리인 것처럼 엄숙하게 알려 주는 모습이 묘했고, 또 동시에 안쓰러웠다. 헤일라는 이런 순간에 늘 약해졌다. 리안이 마땅히 배워야 할 감정을 처음 배운 사람처럼 굴 때, 그리고 그게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

그녀는 잠시 눈을 꾹 감았다. 갇혀 있는 동안 그가 보였던 과한 집착증과 더불어, 애정을 갈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헤일라, 여기 좋지? 응? 좋은 거지?’

‘아, 아응, 흐아아!’

‘흣, 내가 매일 기분 좋게 해 줄 테니까…… 나랑 같이, 평생…….’

‘싫, 어, 아아!’

‘같이 있자. 나 버리지 마…….’

강제적으로 취하면서도 절절 끓는 눈빛은 어쩌지 못하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아파하면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댔다. 그녀가 자지러지는 부분을 어떻게든 찾아 집요하게 굴면서 끊임없이 반응을 확인하고 몰아붙였다.

마지막에 하는 말은 항상, 영영 함께하자는 애원이었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리안의 이런 행동들을 애처롭게 여기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헤일라는 그의 불행을 듣고 나서까지 리안을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아버지가…… 항상 그러셨어? 항상 그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아니.”

“…….”

“평소에는 말을 잘 안 했지. 손을 올리는 게 먼저였거든.”

리안은 사실 아비의 가르침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육체적 고통은 인간을 통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그리고 박제. 좋아하는 걸 영영 가질 수 있는 방식이니 역시 나쁘지 않다. 다만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꽤 영리한 편이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고를 줄 알았다. 헤일라가 자신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듣고 꺼림칙해하지 않고 오히려 가슴 아파한다는 걸 눈치챈 남자는 그걸 효율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타센, 아니 아버지는 날 아주 싫어했어. 밤마다 체벌실로 불러서 나를 매질하고…… 아, 한 대 맞을 때마다 나는 괴물이라는 말을 하도록 훈련시켰어. 여기에 상처도…….”

그가 이전에 산에서 굴러 찢어졌다고 둘러댔던 갈비뼈의 상처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찔렀지. 내가 자고 있을 때. 가까스로 피해서 도망 나왔고, 너를 만난 거야.”

리안과 헤일라는 산에서 만났다. 그가 피를 줄줄 흘리는 걸 보고 간단한 치료를 해 준 게 둘의 인연이었으니까. 정말 잘못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을 만큼 큰 상처라 도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아버지로부터 얻은 자상이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헤일라는 입을 열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손으로 두 입을 가렸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렸다. 물기가 한가득인 금안을 홀린 사람처럼 보면서 리안이 섧게 웃었다. 가증스러웠지만 아주 훌륭한 연기였다.

“어머니가 날 낳다가 돌아가셨거든.”

“그게 이유야?”

그가 힘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내가 괴물이라고 생각해?”

결국, 헤일라의 눈에서 눈물이 터졌다. 그녀는 엉엉 울면서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둥, 너는 결코 괴물이 아니라는 둥 횡설수설하며 히끅댔다.

리안처럼 맞으면서 자란 건 아니지만 헤일라 또한 혹독한 매질과 굶주림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당한 학대도 끔찍했지만, 옆에 항상 레테가 있었고, 혼자가 아니어서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리안은 계속 혼자였을 것이고, 그 고통을 온전히 감당해야 했을 거다. 그녀는 이제 그의 비틀린 애정 표현과 강압적인 행동의 원인이 어렴풋이 이해됐다.

리안은 자신을 위로하는 헤일라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 벅차서 그대로 파고들어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얼굴을 부비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신전에 들어와 사이가 나빠진 뒤로는 해 주지 않던 애정 표현이었다.

“고마워, 헤일라.”

그녀의 품에 파고들어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음산했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 * *

“어떤 이유가 있었다 한들 네 행동은 잘못됐어.”

한껏 딱딱함을 가장해 이야기했건만, 리안은 영 집중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헤일라는 엉엉 운 다음 머리가 핑 돌아 죽은 듯이 잠들었다가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성을 되찾고 리안을 불러 앉혔다. 두 팔을 허리에 얹은 모습은 자못 비장했다.

“네가 나한테 왜 그랬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이런, 이런 건…….”

“하루 종일 섹스하는 거?”

“아니! 내가 싫다고 하는데도 하는 게 문제라고!”

헤일라는 얼굴을 붉히고 빽 소리쳤다.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남자는 적나라한 단어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너도 좋아했잖아.”

“아냐.”

“맞을걸. 내가 조금만 건드려도 아래에서 물이 질질…….”

“그만!”

그가 불퉁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헤일라는 진지한 얼굴로 사실을 짚었다.

“내 몸이 어떤 반응을 보였건 그건 상관없어. 내가 싫다고 거부했고, 네가 그걸 묵살했다는 게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너는.”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약간 굳어졌다.

“이제 내가 싫어졌다는 거네?”

“……그건.”

둘 사이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헤일라의 기세가 약간 주춤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 사이로 리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는걸.”

“뭐……?”

“그렇게 안 했으면 날 버렸을 테니까. 그것보다는 조금 미움 받는 쪽이 나아.”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며 제 앞의 차를 홀짝거리는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헤일라, 나는 귀족이야.”

그는 딱딱하게 굳은 여자를 들여다보며 웃었다.

“아비가 어떤 인간이든, 귀족들은 늘 이런 식이지. 잘못이고 아니고는 크게 상관없이.”

“…….”

“그러니 네가 날 떼어 내려고 하면, 난 언제든 ‘이런 방식’을 쓸 거야.”

아이가 생기면 더 좋을 테고. 그가 마지막 말을 정확한 발음으로 읊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헤일라의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망연하게 그와 시선을 맞추는 여자는 어딘가 허탈해 보이기까지 했다. 리안은 그런 모습까지 아름답다고 감탄하며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날 버리겠다는 나쁜 생각은 버려, 알았지?”

“리안.”

“레테 때문에 이러는 거 알아.”

차마 답하지 못하는 헤일라를 보며 리안이 눈을 휘었다.

“난 그 애를 죽여서라도 널 가지게 될 거야. 그러고도 남지.”

“너…….”

이 정도면 퍽 귀여운 겁박이었다. 동시에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예상대로 헤일라는 안타까울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내 옆에만 있어 주면, 그러지 않아.”

“…….”

“나는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웃는 모습이 예쁘거든. 그러니까 기회를 주는 거야.”

달콤한 과자로 순진한 아이들의 꿰어 내는 마녀처럼 그가 속살거렸다. 레테를 치워 버리기 위한 판을 다 짜 두어서 돌아가려는 것임에도, 그녀를 위하는 척 가증을 떨었다. 그리고 헤일라는 그의 유혹에 아주 간단하게 넘어왔다.

“……좋아.”

리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잡고 함께 일어나려는 순간, 헤일라가 어떤 조건을 붙였다.

“대신 약속해.”

“약속?”

흥미로움을 담은 물음이었다. 헤일라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 족쇄 풀고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 앞으로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 그리고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겠다고 약속해.”

최소한의 안전선이었다.

헤일라는 이제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애초부터 사고방식이 달랐다. 리안은 정말로 헤일라에게 미쳤고, 무슨 수를 써서든 제 옆에 둘 심산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그녀 정도의 평민을 얽어 평생 가둬 놓을 만한 능력이 있다.

적어도 지금은, 그의 선택에 따라야 했다. 그렇다면 자신 또한 언니를 지키기 위해 하나의 보루를 갖고 있어야 했다.

“……특히 언니한테 해코지하지 말아 줘.”

결연함이 묻어나는 말투에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나 있었다. 리안은 그것이 귀엽다고 느끼면서도 괜히 괴롭히고 싶어졌다.

“그래, 좋아. 그런데 내가 만약 그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할 생각인데?”

“……끝이겠지.”

“우리 사이는 그런 걸로 끝나지 않아.”

그가 얼굴을 찌푸린 채로 단언했다. 헤일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네가 날 안 놔줄 테니까.”

“…….”

“그냥, 내 안에서 너랑은 끝이라는 말이었어. 그거 이외에는 별거 없을지도 모르지.”

리안은 사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 그저 레테를 끔찍하게 여기는 헤일라가 또 거슬리는 말을 했다,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이런 소리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들키지 않을 테니 상관없었다. 그리 허술하게 준비하지도 않았으며, 어찌 되었든 그녀는 영영 그의 소유였으니까. 그렇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그저 알았다고 대충 답하면서 헤일라에게 키스했다.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이 상황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 * *

“미아르 님……?”

침대에 누워 있던 헤일라가 문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미아르는 짓궂은 눈웃음을 지은 뒤 다시 한번 방 안을 휘 둘러보고 완전히 들어왔다. 잠입을 시도하는 자객 같은 움직임이었다.

“네, 저랍니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다가와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지내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신지?”

집주인이 객에게 물을 법한 인사말이다. 이곳이 신전이고 미아르는 신관이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동일지도 몰랐다. 헤일라는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앉아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누구인지 들었나 보네요?”

“저번에는 죄송했어요.”

헤일라는 다소 딱딱하게 대답했다. 신관이 고귀한 존재이며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는 법도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먼저 속인 쪽이 미아르이니 이제 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건 모양새가 이상했다.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면서 고민 상담까지 해 주지 않았나.

게다가 헤일라는 신관과 신전에 묘한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아르가 평민인 자신을 가지고 논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망상임을 스스로 알았지만, 쉬이 교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아르는 평민의 무례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사람처럼 씩 웃었다.

“에이, 됐어요. 속인 쪽도 내가 먼저였고.”

“하대해 주세요.”

“귀한 분의 연인이신데 그럴 수는 없죠. 혹 불편하신 게 있다면 뭐든 저에게 말씀하세요. 시종들에게 일러두셔도 좋고.”

미아르는 이전처럼 예의를 차리며 살갑게 굴었다. 이전에 속였던 일에 관해 사과하고 신전 생활은 어땠는지 친절하게 물어 왔다. 헤일라는 그런 그녀의 꿍꿍이를 의심하면서도 처음보다는 유해진 말투로 답했다. 여전히 퉁명스러운 마음은 있었지만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대접받아 보기는 처음이라 마음이 약간 흐물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오늘은 신전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었다. 리안과 약속을 마친 날 바로 떠나려고 했지만 쉼 없이 시달린 몸에는 조금의 휴식이 필요했고, 결국 둘은 사흘 뒤에 돌아가기로 합의를 봤다.

“마지막 날이신데, 신전 구경을 시켜 드리려고요.”

“신전을요?”

“네, 부디 거절하지는 마시길.”

헤일라가 우물쭈물하자 우아하게 가슴에 손을 얹은 여인이 유혹하듯 되물었다. 함께 가요, 네? 하는 음성이 애처로울 만큼 간절하게 들렸다. 헤일라는 간단하게 거절하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신전의 안은 귀족이라 해도 쉽게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평생 보지 못할지도 몰라, 신전을 둘러보는 게 굉장한 영광으로 꼽히기도 했다. 물론 레테의 약을 구하는 일로 신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헤일라는 손톱만큼도 영광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신이라는 작자가 가장 아낀다는 신전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저 그런 건물에, 그저 그런 물건들밖에 없다면 속으로 잔뜩 비웃어 줄 수도 있을 테다.

“그럼 리안이 돌아오면 같이…….”

“아니!”

리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미아르의 표정이 돌연 굳었다.

“여자들끼리 편하게 둘러봐요, 우리.”

“리안이 신전 안을 궁금해할지도…….”

“제집처럼 드나드는 분이세요. 이미 다 봤는데, 또 둘러보자 하면 피곤해하실 거예요.”

아, 그런가. 헤일라는 일리 있는 설득에 간단하게 넘어갔다. 생각해 보니 굳이 리안과 동행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헤일라는 은근히 눈치가 빠른 듯하면서도 리안의 일에 한해서는 꽤 쉽게 속아 넘어갔다. 미아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안 몰래 접근했는데 들키면 곤란했다.

“게다가 그분은 저한테 좀 화가 나 있으시거든요. 왜, 저번에 제가 헤일라 님께 다가간 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봐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만약 그 뒤에 헤일라와 리안이 화해하고 타협을 보지 않았다면 리안은 정말로 미아르에게 분풀이를 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어찌어찌 잘 해결되어 그는 굳이 처벌하지 않는 아량을 보였고, 미아르는…… 다시 한번 기회를 엿보기 위해 다가왔다.

“리안이 많이 화내던가요?”

그의 폭력성을 날것 그대로 지켜본 바가 있기 때문에 헤일라는 미아르가 걱정됐다. 그녀는 진심을 담은 눈으로 미아르의 눈을 마주치며, 무엇이든 저가 도울 일이 있다면 알려 달라고 일렀다. 미아르는 이토록 쉽게 남을 염려하는 헤일라의 순진함에 다시금 놀랐다.

“너무 걱정은 마세요. 어차피 신전 안에서 살생은 금하고 있으니.”

“……리안은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는 애가 아녜요.”

맞는데. 미아르는 속으로만 받아치며 겉으로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나마 신전 안이 아니었다면 이런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짓은 하지도 않았을 거다.

신전 안에서는 인간을 죽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살생했을 때 신의 저주를 받기 때문에 그 누구도 살생하지 않았다.

인간의 생명은 신이 창조한 것. 창조주의 공간에서 피조물을 파괴하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된다.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경전에서는 이 때문에 신이 저주를 내린다고 서술해 두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신전은 타국과의 교류를 위한 담화의 장이나, 전쟁 중 황제의 피난처로 자주 사용되었다.

“네, 네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럼 이제 나가 볼까요?”

미아르가 손바닥을 두 번 치자 옷가지와 장신구를 든 시종들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언젠가 보았던 것 같은 장면에 눈만 끔뻑이자 미아르가 좀 더 적극적으로 여러 옷을 권했다. 전부 흰색이었지만 다소 화려하고 야릇한 디자인들이라 옷을 고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헤일라는 가죽 벨트에 깔끔한 장식 하나만 달린 새하얀 튜닉 드레스를 선택했다. 어깨의 금색 피불라 브로치가 그녀의 눈동자 색과 아주 잘 어울렸으나 눈동자는 머리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미아르는 그 모습을 보고 왜 얼굴의 반절을 가리고 다니냐며 아쉬워했다. 헤일라는 그저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미아르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종의 귓속말을 듣고 급히 헤일라를 이끌었다. 리안이 돌아오기 전에 헤일라의 환심을 조금이라도 더 사 둬야 했다.

* * *

“자, 여기가 셀테리움이랍니다. 신관들이 매일 저녁 모여 기도를 올리는 공간이에요. 저 중앙에 걸려있는 펜타곤 모양 보석은…….”

미아르가 설명하는 내내 헤일라의 입은 다물리지 않았다. 압도적인 웅장함과 화려함이 벽이며 바닥, 하다못해 천장까지 뻗어 있었다. 머물렀던 방도 호화로웠지만,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너무, 너무 예뻐요…….”

“후후, 만족스러워하시는 걸 보니 기쁘네요.”

헤일라는 문득 제 모습이 얼뜨기 같아 보이지는 않았을까 염려되어 입을 딱 다물고 침착하려 애썼다. 그러나 처음의 다짐과는 정반대로 현세의 공간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을 보고 놀라지 않을 재간은 없었다.

미아르는 그런 헤일라를 보고 알 만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경계심은 잘 벼려져 있지만 둥근 천성이 비죽비죽 솟아올라 속내를 감추는 데는 영 재주가 없는 게 꽤 귀여웠다. 미아르는 오늘 헤일라를 완전히 뒤로 넘어가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꽤 들떴다.

“이다음은 성물을 보러 갈까요?”

“성물이요? 신의 검?”

성물을 입에 담자마자 헤일라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미아르가 후후 웃으며 헤일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예상했던 대로 보석이며 사치에 대해 손톱만큼도 모르는 평민 계집은 이 정도 아량에도 몹시 흥분하며 몸 둘 바를 몰랐다. 하기야, 신전을 둘러보는 것과 성물을 눈에 담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진짜 보여 주시려고요?”

“물론이죠. 저는 꽤 유능한 신관이랍니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신전은 정말로 넓어서, 반 시간 정도는 정원을 통해 걸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전의 가장 안쪽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세니르 신전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리듀카, 신의 심장이라 불리죠.”

지붕이 첨탑 형식인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둥근 돔 모양 지붕의 건물은 색 또한 유독 튀었다. 온통 붉은 벽돌들로 촘촘하게 쌓아 올려진 건물은 다른 것들과 다르게 조금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성물을 보관하고 있는 성스러운 장소라기에는 조금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지키고 있는 시종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는 누가 지키나요? 성물…… 신의 검을 누가 훔쳐 가면 어쩌려고…….”

“아아.”

미아르가 씩 웃었다. 그녀는 태양이 뜨고 지는 이유에 관해 묻는 어린아이에게 세상이 뒤집혀도 바뀌지 않을 진리에 관해 읊는 사람처럼 조곤조곤 알려 주었다.

“성물은 결코 이 문을 지나지 못해요. 신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물건이 제 영역을 떠나는 걸 좌시하지 않는답니다.”

“…….”

“그러니 이 앞에 인간 따위를 세워 지키는 건 신에 대한 모독이죠.”

헤일라는 처음으로 미아르가 진짜 신관처럼 보였다. 신처럼 고귀해 보여서라기보다는, 신의 본질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어서, 그랬다.

“자, 들어가서…….”

그녀가 헤일라를 문 쪽으로 이끌려고 할 때였다.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겹겹이 주름진 프릴이 달린 머리쓰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튜닉은 헤일라가 입은 것과 같은 고급 재질에, 자연스럽게 주름이 져서 발목까지 내려왔다. 두르고 있는 망토 또한 끝단에 맺혀 있는 섬세한 자수가 돋보였다.

헤일라는 미아르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녀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대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이제까지와는 자못 다른 차가운 음성으로 상대방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이었나?”

“예.”

“결과는?”

“…….”

그가 헤일라를 경계하는 눈빛을 흘긋 던졌다. 누구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다가 미아르의 뒤에 약간 제 몸을 숨겼다. 마치 머리만 숨기면 상대가 저를 찾지 못한다고 믿는 토끼처럼.

“됐다, 내 손님이니 그냥 말해.”

“……실패였습니다.”

“흐응…….”

미아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지루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헤일라에게 짐짓 쾌활한 어조로 얼른 들어가 보자고 속삭였다. 문 안쪽에서 나온 이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헤일라는 그들을 지나치는 순간, 묘한 냄새를 맡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미아르가 손을 잡아끌었다.

“저분들은 누구세요?”

“아아, 신관들이요. 제 아래 기수예요.”

신관들에게도 서열이 있다. 기수로 그것이 정해지지는 않지만 미아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평민은 설명해도 알아먹지 못할 생리였다.

둘은 그대로 리듀카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정말로 텅 비어 있었고, 정중앙에 빛나는 기둥 하나만 자리하고 있었다. 헤일라는 홀린 듯 빛기둥을 바라보았다. 빛이 바닥에서 치고 올라와 신전의 천장까지 닿아 있어 더욱 아득하게 느껴졌다.

“가까이 가서 보세요.”

그녀는 초대되지 못한 손님처럼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주춤대며 다가서자 빛기둥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발치에 매달린 그림자가 고르지 못한 빛줄기 때문에 늘어나고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점점 다가갈수록 하얀 검 하나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것을 살피다가, 묘한 위화감에 눈을 찌푸렸다. 헤일라는 용기를 내서 좀 더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얼굴을 쭉 내밀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왜 그러세요?”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온 기척을 느끼고 헤일라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명백하게 긴장한 낯에, 미아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신의 권역에 들어와 으레 하는 긴장과는 결이 달랐다. 헤일라는 위험을 감지한 사람처럼 동요하고 있었다.

“…….”

“편하게 말씀하세요. 괜찮아요.”

“피…….”

“피요?”

“피 냄새가 나요.”

헤일라는 몇 년간 레테를 간호하며 매일같이 피 냄새를 맡았다. 공기 중에 흩어진 미세한 혈향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방금 문 앞에서 만난 신관들. 뒤를 돌았을 때 본 신관의 옷자락에 점점이 묻어 있던 빨간 동그라미들…… 그건 핏자국이 맞았던 거다.

설마 했던 헤일라는 성물 쪽으로 다가가면서 애써 부정하던 게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미아르가, 이 공간이 두려워진 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여기서.”

의미심장한 물음에 미아르는 금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탐스러운 붉은 빛이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이런 걸 세간에서는 감이 좋다, 라고 하죠?”

헤일라는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잘못하면 딸꾹질이 샐 것 같았다.

설마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신에게 바치는 산 제물? 가난한 집안의 처녀 계집을 신전에서 사다가 제물로 바친다는 낭설을 들은 적이 있다. 아니, 그런데 왜 하필 나를? 헤일라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경우의 수에 관해 생각하다가, 마지막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난, 난…… 처녀가 아녜요.”

미아르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한 번은 들어 볼 요량으로 계속 쳐다만 보고 있으니 헤일라가 급히 조잘거렸다.

“리안이랑 그것도, 그, 잠자리도 이미 많이 했고요. 제물이 되기엔 자격 미달이라는 거죠. 시, 신께 바치는 건데 좀 더 깨끗한…… 그러니까 순결한 인간을…….”

“…….”

“게다가, 게다가 전 심성도 아주 고약하거든요. 막 깨끗한 그런 인간이 아니라서…… 어릴 때는 도둑질도 두 번이나 했어요…… 죄, 죄가 많은 몸…….”

필사적으로 자신의 무쓸모에 관해 설명하던 목소리가 주눅이 들어 점점 작아졌다. 진짜 여기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겁도 나고…… 헤일라는 울먹거리면서 미아르를 살짝 올려다봤다. 여자는 묘한 표정이었다.

“지금 제가 여기…… 당신을 죽이러 왔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에요?”

“하.”

대체 평민들 사이에서 무슨 말들이 도는 건지. 미아르는 허탈하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신전은 신에게 인간을 바치지 않아요.”

“그럼 왜 피가…… 사람 피가 아닌가요?”

“사람 피는 맞고.”

“…….”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우리가 죽인 게 아니니까.”

미아르는 턱으로 헤일라의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여전히 빛나고 있는 백색 기둥이 울렁울렁 푸른빛을 띠었다. 속에 있던 하얀 검이 유혹하듯 천천히 돌아갔다.

“……누군가 검을 썼군요.”

“그래요.”

“대체 누가…….”

신전 안의 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신관이거나, 신전에 거금을 쾌척한 귀족 정도만 사용이 허가되었다. 헤일라는 기억을 되짚다가, 며칠 전 레테와 이야기 나누었던 게 번뜩 떠올랐다.

“펠든 백작?”

리아이 영애에게 구애하다가 거절당해 검을 쓰겠다 선언했다는 남자. 헤일라는 설마 하는 눈으로 반응을 살폈다.

“네, 그 멍청한 남자. 결국 죽어 버렸답니다.”

너무 뻔해서 지루하다는 태도. 헤일라는 백작이 검을 쓰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에 꽤 큰 충격을 받았는데, 상대는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만 까딱댔다.

“하지만 백작은 리아이 영애를 진짜 사랑한다고…… 그래서 성물로 그걸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잖아요.”

“네에, 그랬죠.”

“그런데 왜 죽은 거예요?”

“…….”

“왜, 왜 실패한 건지 모르겠어요. 자발적으로 쓰겠다고 했는데 실패할 이유가……!”

“순진하신 분.”

미아르가 고운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기둥 쪽으로, 헤일라를 지나쳐 다가갔다.

“이리로.”

내민 손이 마냥 깨끗했다. 고생 한 번 하지 않은, 잘 다듬어진 고운 손이 헤일라를 홀렸다. 그녀는 천천히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미아르는 그대로 헤일라를 훅 끌어 기둥의 코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지척에서 보니 기둥은 훨씬 거대했다. 그리고 기둥의 빛이 쏟아져 나오는 아래는, 놀랍게도 뻥 뚫려 있었다.

“헤일라 님은 특별하니 비밀을 하나 알려 드리죠.”

“…….”

“보답은 됐어요. 우리 사이에 무슨.”

호탕하지만 상당히 노골적인 언사였다. 헤일라는 찝찝했지만 백작이 어째서 성물을 쓰는 데 실패했는지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진실 된 마음을 도려내 준다는 신의 검. 거짓된 감정을 도려내려 하면 죽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거짓된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개죽음을 감수할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혹시 성물이 알려진 바와 다른 기능을 하는 걸까?

헤일라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다가 기둥 아래의 공간을 유심히 살펴보라는 미아르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저거, 저거 설마…….”

“쉬이,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으니 조심하셔야 해요.”

부정하지 않는다. 헤일라는 숨을 흡 들이쉬면서 급히 몸을 뒤로 젖혔다. 의뭉스런 신관에게서는 이미 두 걸음 물러난 뒤였다. 갑자기 주변의 온도가 훅 떨어진 것 같았다.

“설마 처음 보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죄송해요. 저는 매일같이 보는 거라 조심성이 부족했네요.”

“정말, 저 안에 있는 게 전부…….”

시신인가요? 헤일라가 차마 마지막 단어를 내뱉지 못하고 입을 막았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미아르는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부요. 신전의 자정 작용 덕에 내일이면 싹 사라져 있겠지만…… 아, 저 기둥 안으로 넣으면 무엇이든 하루 만에 다 없어지거든요. 숨겨진 비밀 장소라고 할 수 있죠.”

그럼 시신이 매일 저렇게 무더기로 쌓인다고? 헤일라는 구토감이 치밀어 올라 욱욱댔다. 미아르가 깜짝 놀랐는지 한걸음에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었다. 너무 다정하게 토닥여서 오히려 더 메스꺼웠다.

“어머, 어머, 정말 많이 놀라셨나 보네.”

“욱, 우윽…….”

다행히 토사물들은 금세 바닥에서 지워졌다. 이전에 리안의 피가 지워지던 형상과 같았다.

“미안, 미안해요. 이 비밀을 알게 되면 다들 신기해만 하길래 이렇게 싫어할 줄 몰랐어…….”

정말로 이럴 줄은 몰랐다. 미아르가 만나 왔던 귀족들은 검을 보면 그저 감탄을 쏟아 냈고 그 아래의, 하루면 썩어 사라지는 시신들을 보고는 신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기둥 아래에 잠든 인간들의 무지몽매함에 혀를 차는 행동은 덤이었다. 그 누구도 이렇게 구역질을 해 대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태생부터 자신 이외의 타인을 고깃덩어리 정도로 교육받아 온 귀족다운 발상이었다.

그녀는 결국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헤일라를 친히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싱그러운 풀향기가 진동하는 정원 쪽으로 와서야 구역질은 잦아들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헤일라가 먼저 물었다.

“……이해가 안 돼요.”

“뭐가요?”

“그 안에 있던 시체들이요! 그렇게 쌓일 만큼 많은 시신이 왜 신전에 있는 거예요? 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실제로 신전의 신물을 쓰는 인간은 오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였다. 기회가 있는 부유한 귀족들은 굳이 신물을 써서 죽음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고, 신관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평민은 돈이 없으니 아무리 간절해도 신물을 사용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펠든 백작의 선언이 큰 파급력을 가져왔던 것이었다.

미아르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끙, 신음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순진한 아가씨가 알아먹을지를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평민들은 그걸 정말 믿나 보네요.”

“무슨…….”

“신물처럼 돈이 되는 걸 우리가 그냥 썩힌다는 게 말이 돼요?”

신물은 성스러운 신의 검이다. 신을 모시는 신관이 입에 담기에는 지나치게 불경한 말이었다.

“헤일라, 나…… 아니, 우리는 돈이 필요해요. 그게 있어야 명예도, 권력도 영원한 거죠. 그래서 사용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쓰고 있답니다.”

“…….”

“이 세상에 신물을 간절히 원하는 빈민이 아주 많은 건 알고 있죠?”

헤일라는 마지못해 끄덕였다. 실제로 궁핍과 위험에 항시 노출된 빈민들은 정신적인 고통에도 자주 시달렸다. 가령 사랑하는 부모, 형제, 가족, 연인의 죽음을 겪는다거나, 억울하게 팔다리가 잘려 나간다거나 하는 일들로 괴로워했다. 이외에도 그들이 고통 속에서 감정을 도려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리고 검을 쓰는 데 성공하면 구슬이 나오잖아요.”

아주 비싼. 미아르가 덧붙이며 눈꼬리를 주욱 휘었다. 그 모습이 마치 악마 같아 헤일라는 등을 바짝 세웠다.

“감정을 전이시킬 수 있는 구슬. 얼마나 매력적인가요. 다른 이를 불행하게 빠트릴 수도 있고, 다른 무언가에 홀려 갖고 있던 모든 걸 제 손으로 놓아 버리게 할 수도 있어요! 귀족들에게는 아주…… 탐스러운 황금 사과죠.”

“다른 이요? 구슬을 제삼자에게 쓴다고요?”

경악에 찬 헤일라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신물로 얻은 구슬은 당사자 간의 지극히 사적인 산물로 취급되거나 혹은 정반대로 신의 증명으로 분류되어 신전에서 보관하고는 했다. 그걸 다른 이가 깨트리게 한다니. 상식 밖이었다. 아니, 그건 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 될 만한 중죄였다.

“효과는 똑같거든요. 실의, 억울함, 분노, 사랑…… 어떤 감정이든 구슬로 빠져나오게 되면 그 감정의 집약체가 되어요. 그리고 그걸 깨트리면 구슬에 담겨 있던 감정이 절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게 되죠. 아시는 바와 같이.”

미아르가 잠시 약간 마른 아랫입술을 날름 핥았다. 그녀는 신을 모시는 신관이라기보다는 악마의 하수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대상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가령 미워하는 사람이 없으면 분노 같은 감정도 날뛸 수 없는 거 아닌가요?”

헤일라는 평민이었다. 구슬을 깨면 감정이 전이된다는 담백한 사실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슬의 효과에 관해 상세히 알지 못했다. 그저 깬 사람이 일찍 생을 마감한다는 속설 정도만 익히 들었을 뿐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에요. 구슬을 깬다는 건 당신 생각보다 훨씬 더,”

미친 짓이야. 미아르는 애써 마지막 말을 삼키고 숨을 골랐다. 심약한 아기 새가 놀라지 않도록 풀어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친절한 신의 사자가 되어 보기로 했다.

* * *

“모든 이들은 각각의 감정에 대한 민감도가 달라요. 이 구슬은 그걸 최상으로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한답니다. 훨씬 더 쉽게 분노하게 만들고, 훨씬 더 깊게 사랑하게 만들며, 훨씬 더 간단하게 실의를 느끼게 만들어요. 평범한 인간이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정도로요.”

이제 이해가 되셨나요? 미아르는 이해가 느린 학생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고 뿌듯함을 느끼는 선생 같았다. 인내심을 갖고 좋은 일을 한 자신에게 약간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헤일라는 그런 미아르에게 찬물을 끼얹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럼 가난한 사람들의 간절함을 이용해서 신전을 배 불린다는 말이네요.”

신전을 둘러보는 내내 온화했던 헤일라의 눈에 경멸이 일었다. 그녀는 미아르에게 잠깐이나마 호감을 가진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을 착취하고 병에 걸린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신전 사람이 좋은 사람일 리가 없는데 정신이 나갔었다.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쓰레기 같은 짓을 일삼고 있었다.

“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등가교환이죠.”

“…….”

“그들은 신물을 쓸 기회를 얻고, 우린 그들에게서 구슬을 얻는 거예요. 서로 이득을 보는 셈이죠. 그걸 일방적인 ‘이용’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미아르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구슬을 생산하기 위해 인간을 선별하는 과정은 꽤 악랄했지만, 앞의 여자는 그걸 모르는데 왜 빈민이 일방적으로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금 싱긋 웃었다. 아무렴 어떻냐는 얼굴이었다. 헤일라는 그제야 귀족으로서의 미아르가 눈에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그녀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럼 저 사람들이 전부 자의로 지원했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저렇게 많이 죽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자기감정도 잘 모르는데 목숨 걸고 신물을 쓸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주 많이. 기둥 아래를 봤잖아요.”

“검이 잘못된 거 아니에요? 신전이 사람들을 속였거나…… 전 정말 이해가…….”

“인간이.”

헤일라의 말을 끊어 낸 미아르가 단호하고도 밋밋하게 읊조렸다.

“인간이 거짓말할 수 있는 상대는 인간뿐이에요. 신 앞에서 피조물들이 거짓을 고해 봐야 같잖은 재롱밖에 안 된다는 거죠.”

“…….”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한답니다.”

얼이 빠진 눈으로 자신을 보는 어여쁜 여인을 두고, 미아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게 예쁜데 평민으로 태어나서 그런지 어리석기 짝이 없다. 조금 더 똑똑하고 야심 있는 여자였다면 함께 사업이라도 도모해 볼 텐데. 아무래도 구슬리기는 그른 것 같다.

미아르는 그냥,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에게 선의를 베푸는 마음으로 헤일라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펠든 백작에 관해 물었었죠? 자, 우리 잘 생각해 보자고요. 그는 아주 욕심이 많고 거드름 피우기를 좋아하는 대부호였죠. 태어나면서부터 조부가 쌓아 둔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며 갖고 싶은 모든 걸 가졌어요. 부모들 또한 하나뿐인 아들이었던 그를 끔찍이 사랑했답니다.”

“…….”

“또 운이 좋게도 그는 꽤 반반한 얼굴을 갖고 있어서, 웬만한 여인들을 모두 자빠트릴 수 있었어요. 가지고 있는 재물을 조금, 제 외모를 조금, 허세 가득한 귀족식 에스코트를 조금 섞어 내기만 하면 모두 간드러진 웃음을 보여 주었거든요. 그런데 저보다 하나 잘난 것 없는 집안의 리아이라는 영애는 그에게 눈길 한 번을 안 줬어요.”

그녀는 헤일라가 알지 못할, 종이 너머의 일들에 관하여 상세히 읊어 주었다. 미아르의 평대로 ‘순진한 평민 계집’인 헤일라는 그 이야기에 혼이 빠진 채 경청했다.

“지독하게 구애했죠. 정말 지독하게.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들어도 치를 떨 만한 방법으로. 왜냐하면 펠든은 정말 자기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거든요. 하지만 날이 가도 가도 영애의 마음은 손에 쥐어지지 않았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치고 지쳐 악에 받친 펠든에게 리아이가 속삭였어요.”

미아르가 연극을 하는 배우처럼 헤일라에게 바싹 다가가 귓가에 속살댔다.

“성물을 이용해 당신의 마음을 증명해 주세요.”

“…….”

“리아이를 가지지 못할 바에야 망가트릴 작정이었던 백작은 당연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죠. 하지만 헤일라, 그가 정말 사랑했던 게 리아이였을까요?”

신의 검은 ‘향하는 대상이 분명한, 진실하고 강렬한 감정’만을 소거해 준다. 정확히 검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구슬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은 이미 세간에 퍼져 있었다.

그런데 만약 사랑하는 대상을 잘못 말하게 되면?

그제서야 눈치챈 헤일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자신 이외의 다른 인간을 사랑할 위인이 못 됐어요. 리아이를 향한 건 사랑이 아니라 그저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 정도.”

헤일라는 머리로는 미아르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이 제 마음에 관해 착각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눈치챘는지 미아르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인간은 의심이라는 칼로 자신을 베지 않는 법이랍니다. 남을 찌르는 방법만 알기 때문에 벌을 받는 거예요.”

“…….”

“물론, 똑똑한 인간은 신이 내리는 징벌까지 이용하지만.”

“그게 무슨…….”

“리아이 영애 말이에요.”

적발의 여인이 탐스러운 머리칼을 찰랑이며 쾌활하게 말했다.

“정말 펠든이 죽을 걸 몰랐을까요?”

“다 알고 백작이 검을 쓰게 했다는 건가요?”

“또 그런 표정이네요. 날 의심하는 얼굴이야.”

정곡을 찔린 헤일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미아르는 이제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헤일라에게 바짝 다가가 그녀의 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둘의 눈이 선명하게 마주쳤다.

“어찌 되었든 잘 알아 두세요. 신은 선한 인간의 편이 아니야.”

“…….”

“영리한 인간 편이지.”

곧 공작 부인이 될 테니 이 정도는 알아 두어야 할 테다. 미아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은 헤일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헤일라를 고이 방 안까지 모셔다 놓고 나갔다.

그리고 리안이 돌아왔을 때, 헤일라는 부러 있었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할 필요도 없는 경험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앉아 모두 잊어버리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리안과 헤일라는 집으로 돌아왔다. 레테가 있는 곳으로.

* * *

사실 헤일라는 리안과 결혼해서 신분 상승을 한다든가, 나이가 들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손을 잡고 걷는다든가 하는 꿈 같은 건 꿔 본 적이 없다. 언젠가 떠날 사람, 자신에게는 과분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콱 박혀 있었다.

이 다짐은 그가 공작가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더 굳건해졌으면 굳건해졌지, 결코 물러지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그에게 더 이상 의지하지 않겠다 다짐한 건 이 때문이었다. 헤일라는 천천히 제 마음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하는 행동으로 미루어 봤을 때 집착이 쉬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리안의 마음도 언젠가 변할 수 있었다.

그때가 오면 깔끔하게 관계를 매듭지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 두려고 했다. 설령 영영 그가 자신을 놓지 않아도 일방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비참해지지 않으려면 자립심을 키워야 하는 법이었다. 그녀는 이 정도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는 영리한 아이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지 서른 날도 지나지 않아 헤일라의 굳센 결심은 쉽게 무너졌다.

“하으으응!”

동그랗게 부푼 가슴이 시트에 눌려 나부죽하게 퍼졌다. 헤일라는 침대에 완전히 엎드려 허덕대느라 젖은 채로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리안은 그런 여자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두툼한 손가락 하나를 구멍에 쑥 집어넣었다.

“시, 싫어!”

“왜? 힘들다고 해서 눕혀 줬잖아.”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오히려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헤일라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감을 잡을 수 없어서, 오히려 더 쉽게 포기가 됐다. 며칠을 참아 온 남자는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래에서 이물감이 사라지고 작은 공알을 돌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등허리가 절로 떨렸다.

그녀는 집에 돌아온 뒤 완벽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혼자만의 결심은 쌍방의 관계 속, 아니 어쩌면 지극히 일방적인 구애 속에서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리안은 데면데면해진 레테와 헤일라가 다시 이전 같은 묘한 상하 관계로 돌아가 그녀의 마음이 안정기에 달하자마자 제 마음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거 봐. 뒷구멍까지 푹 젖었네.”

리안은 아래에서 나온 물을 음부 전체에 문지르며 펴 바르고는 마지막으로 엉덩이 골까지 선을 긋듯 손가락을 놀렸다. 마지막으로 뒷구멍을 엄지로 쓰다듬자 볼록하게 솟은 두 살덩이가 반사적으로 수축해 중앙으로 모였다.

“내 손가락까지 먹으려고? 욕심이 과해, 헤일라.”

그가 엉덩이 사이에 꽉 붙들린 엄지를 짓궂게 구부려 자극했다. 다른 한 손은 아래에서 꺼덕이고 있는 길쭉한 덩어리를 쥐고 장난스레 툭툭 흔들었다. 맺혀 있던 투명한 선액이 물줄기처럼 곱게 파여 있는 척추골에 방울져 떨어졌다.

미지근한 액체의 정체를 아는 헤일라는 그저 숨을 죽이고 엉덩이에 힘을 풀었다. 순종적인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던 리안이 무언가 재미있는 게 떠오른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요령이 없어서 그래.”

“응……?”

“잘 배우면…… 그러니까 매일 가르침을 받으면 너도 금세 지치지 않게 될 거야.”

“…….”

“아카데미를 다니는 학생들처럼.”

리안은 아카데미라는 말에 힘을 주면서 헤일라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다니고 싶어 했잖아.”

아래에 깔린 여자는 미동도 없었다. 헤일라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눈치채고 입을 더 꾹 다물었다.

“매일 내가 선생님을 하는 거야. 너는 영리한 학생이 돼서 예쁘게 울고…… 착하게 배우면 이다음엔 진짜 아카데미에도 다닐 수 있게 해 줄게.”

리안이 근래 들어 자주 쓰는 방식이었다. 그녀가 간절히 원하던 것들을 하나씩 늘어놓고 구슬린다. 헤일라는 언젠가 아카데미로 향하는 마차를 보며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때 리안은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냐고 물었고, 헤일라는…… 대답을 피했다.

아카데미는 귀족가의 아이들이 다니는, 황실과 신전이 공동으로 설립한 교육기관이었다. 어마어마한 학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귀족이라 해서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부유하고 권위 있는 귀족만 누릴 수 있는 특권.

그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는 헤일라에게 아카데미는 사치였으므로, 그녀는 그것에 큰 서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리안은 대답을 피하는 헤일라의 눈에서 갈망과 미련을 엿봤다. 모든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다는 걸 부러 숨길 필요가 없는데 비열하게 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시, 싫…… 싫어, 아흣!”

순식간에 아래가 꿰뚫렸다. 리안은 이미 모든 게 결정된 사람처럼 꾸역꾸역 안쪽을 파고들었다. 평소보다 훨씬 깊이 삽입하자 귀두에 자궁구가 닿았다. 그는 환희에 젖어서 속삭였다.

“헤일라, 허리를 조금 더 세워.”

“흣, 으응, 너, 너무 안쪽, 아프,”

“얼른. 스승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와야 착한 학생이 될 수 있는 거야. 아카데미에 가려면 지금 잘 배워야지, 응?”

“아으, 리안, 아, 나, 못하겠…….”

짝! 그 순간 둔부에 아찔한 타격음이 울렸다. 동시에 안쪽이 바짝 졸아들어 리안의 성기를 자극했다. 그는 당장 헤일라를 찍어 누르고 저 좋을 대로 처박고 싶은 욕구를 내리눌렀다. 대신에 정말로 다정한 스승처럼 헤일라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꾸짖었다.

“선생님이라고 불러야지. 선생님 자지 받는 법 배우기로 했잖아?”

“흐, 으아, 안쪽이 이상해, 힉, 깊어…….”

짜악! 울먹이는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체벌이 가해졌다. 이번에는 다른 쪽 엉덩이였다. 발그스름한 자국이 탐스럽게 오르기 시작했다.

헤일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배 안쪽까지 들어찬 이물감에 발발 떨었다. 남자는 위에서 모두 지켜보다가 긴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징그러울 만큼 길고 두터운 기둥을 뿌리까지 밀어 넣었다. 몸속 내장이 위로 들리는 감각에 헤일라의 동공이 풀렸다. 내뱉는 숨조차 간헐적으로 변했다.

“아, 아, 으아…….”

“허리.”

“흐으…… 네, 네에…….”

헤일라는 어떤 애원도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이 장단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꽈악 차오른 아래가 저릿대는 통에 계속 시달리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부들대는 팔로 몸을 지탱하려다가 힘이 풀려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자 리안이 그대로 골반을 잡고 엉덩이만 높게 올린 자세로 고정시켰다. 원래 찔리던 지점 위를 미끄러트리듯 꾹 누르는 귀두 때문에 헤일라가 자지러지며 울었다.

뭐든,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그녀를 지배했다.

“자, 잘못했어요, 선생님, 아, 아아…… 흐, 힘들어, 흑, 못해…… 못해요…….”

“……어리광이 심해.”

“네, 네에, 나빴어요, 제가 나빴어요. 선생님…… 아픈 거 싫어요……”

리안은 그녀를 탓하면서도 만족스러움에 절어 입꼬리를 올렸다. 완전히, 육체뿐만 아니라 사고까지 그의 뜻대로 통제되는 헤일라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잘 짜인 등 근육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헤일라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삽입된 성기를 반쯤 빼냈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압박감이 조금 풀어졌다 싶더니 리안이 더 단단하게 골반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처럼 아기집 입구가 밀어 올려질 만큼 강한 삽입이 이어졌다.

“아아!”

“성실하게 따라와야 예쁨받을 수 있을 텐데.”

“아, 아냐, 망, 망가져요, 아! 여기서, 흣, 이러면 안 돼…….”

“이렇게 스승 앞에서 뻗대면 아카데미에서도 미움받아.”

질퍽거리며 박아 대는 남자는 자비가 없었다. 헤일라는 엉망이 된 얼굴로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이런 거, 이런 거 아냐…… 이런 거 안 배워, 하읏!”

“헤일라는 아직 안 다녀 봐서 모르잖아.”

“흐우…… 아니에요…… 이상해, 이상한 거야…… 읏, 선생님…….”

도리도리. 필사적으로 고개를 휘젓는 얼굴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헤일라는 엎어진 채로도 열심히 얼굴을 움직이며 훌쩍댔다.

“거, 짓말, 거짓말이야…… 거짓말쟁이야……. 아흣, 이제 그만…….”

“하아…….”

헤일라의 몸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리안은 더 이상 한가롭게 역할극이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어 보였다.

“맞아. 이런 음탕하고 난잡한 꼴로 교실을 뒹굴 수는 없겠지. 똑똑한 헤일라.”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 밑. 눈물이 덕지덕지 묻어 끈적이는 머리칼. 유두부터 가슴골까지 말라붙어 있는 정액. 비리고 찝찌름한 정사의 냄새.

리안은 아름다움이 과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얼굴로 헤일라를 훑었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움직이는 동시에, 튀어 오르는 배를 오른손 끝으로 지그시 압박했다. 헤일라는 혼이 빠져 아무 말이나 해 댔다.

“아, 아흐, 누르지 마, 누르지 마요…….”

“안에 있는 거 느껴져? 응?”

리안은 그대로 손을 내려 헤일라의 자궁 쪽, 그러니까 자신이 진입하고 있는 통로를 뭉근하게 내리눌렀다. 비쩍 마른 살가죽 아래 검붉은 덩어리가 선연하게 맥동했다. 자극을 견디지 못한 헤일라가 몸을 뒤틀었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 하악!”

리안은 작은 여자의 질 주름 하나하나까지 모두 느끼기 위해 천천히 움직이며, 동시에 결합된 지점을 압박해 선명히 감각했다. 지독한 아집이었다.

그는 헤일라의 꺽꺽대는 신음이 감미롭다고 생각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광기가 서려 번들거리는 눈동자 안에는 온통 여자 하나뿐이었고, 그는 더 완벽히 하나가 되기 위해 박아 삽입하는 속도를 올렸다.

아주 약간씩만 뽑아냈다가 박아 넣는데도 접합부에서 애액이 질질 샜다. 헤일라는 할딱대다가 간신히 실낱같은 이성을 붙잡고 애원했다.

“안, 안에는 안, 안…… 오늘은, 아, 아앙!”

보드라운 혀가 그녀의 입술을 물고 기어이 입을 막았다. 어설픈 애원을 차단하는 입맞춤은 지독하게도 부드러웠다. 긴 혀가 입안을 쓸고 휘저어 호흡에 온 정신이 빠진 동안 리안은 부지런히 허리를 놀렸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을 때 드디어 둘이 함께 절정에 올랐다.

“흣…….”

“하읏…….”

안에 퍼지는 뜨뜻한 정액의 비린내가 코끝에 스치는 착각이 일었다. 그만큼 지독하고 집요하게 그녀를 덮어 온 냄새였다. 헤일라는 바르르 떨다가 몸에 힘을 주욱 뺐다. 리안이 몸을 바짝 붙여 여체를 안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헤일라가 힘없는 몸짓으로 그의 손을 쳐 냈다.

“화났어?”

잘게 세공되어 있는 크리스털 조각이 달린 조명 때문에 침대로 쏟아지는 빛이 부서져 내렸다. 헤일라는 반사되는 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고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리안이 여체를 기어이 다시 돌렸을 때, 헤일라는 얼굴에 눈물을 매달고 있었다.

“싫었어?”

“넌, 진짜 나쁜…… 나쁜 놈이야…….”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쉬이 울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훌쩍이던 헤일라는 순간 엉덩이 골에 다시 닿는 딱딱한 감촉에 숨을 멈췄다. 도망쳐 보려 했으나 이미 리안이 어깻죽지를 잡아 눌러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번들거리는 아랫구멍이 저도 모르게 벌름거렸다. 울컥, 하고 정액이 새어 나오는 감각이 선연했다. 리안이 헤일라의 목덜미를 혀로 주욱 쓸었다.

“그런 것 같아. 질이 나쁘지.”

“흐, 아……!”

“그래도 날 좋아해 주니까…… 응, 착한 헤일라.”

그녀는 리안의 아래에서 엉엉 울면서도 그가 온몸을 핥아 주며 달래면 진정이 되었다. 점점 길들여지는 자신을 알았으나 빠져나올 새가 없었다. 리안은 헤일라의 자괴감 절은 눈을 보고 샐쭉 웃으며 젖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오늘은 네가 보고 싶어 했던 연극을 보러 가자.”

“…….”

아주 예전에 수도에서 가장 큰 극장에서 열리는 유명 배우들의 연극에 관한 이야기를 일간지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헤일라는 호수로 가는 내내 리안에게 그 연극 내용에 관해 떠들었던 기억이 있다. 의상실에서 잡다한 일을 하며 주워들은 줄거리를 이어 붙여 엉성했지만, 그는 헤일라의 목소리를 경청했었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아는 체하며 떠들어 댄 게 후회됐다.

“안 갈래.”

“왜? 보고 싶어 했잖아.”

“안 보고 싶어.”

“이틀 전에도 그렇게 말했었지.”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며 리안이 피식 웃었다. 헤일라는 약간 볼이 발그레해져 고개를 모로 돌렸다. 이틀 전 리안이 납치하듯 헤일라를 승마장으로 데려갔다. 싫다고 난리를 쳤지만 리안이 물러서지 않을 걸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눈치채고 얌전히 굴었다.

그리고 도착해서는…… 굉장히 즐겁게 놀았지. 말을 타는 게 그렇게 즐거운 일인지 몰랐다. 윤기가 흐르는 말은 아름다웠고 리안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는 건 신기한 기분이 들도록 했다. 상쾌하다는 감각을 별로 느껴본 적이 없는데 딱 그런 느낌이었다.

사실 리안이 억지로 쥐여 주었음에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어릴 적부터 먹어 보고 싶었던 유명한 제과점의 과자와 케이크도, 생에 한 번도 입에 대 본 적 없었던 고급 차도, 유명 악단의 연주회도, 바다 건너 넘어온 보드라운 비단옷도…….

집에 돌아오고 나서 늘 이런 식이었다. 리안은 헤일라에게 결핍된 게 무엇인지, 차마 토해 낼 수 없었던 욕망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이용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여과 없이 과시하며 유혹한다. 아카데미도, 헤일라가 얼마나 학생들을 부러워하는지 알면서 유혹적으로 내밀지 않았나.

저열한 방법이다.

하지만 헤일라는 리안이 미워지는 동시에 간절해졌다. 기형적이고 자연스러운 만족감이 그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결심을 점점 뭉툭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헤일라가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품게 했다.

그가 강요하는 안락은 사막을 헤매며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비렁뱅이에게 바닷물을 한 바가지씩 주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마시면 더 갈증이 날 것을 알면서도 손을 대도록 하는. 상냥한 폭력이었다.

헤일라가 거부를 전혀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리안은 싫다고 하면 레테가 있는 집 안에서 정사를 치르려고 들었다. 옷을 벗겨 침대에 찍어 누르는 일은 그에게 힘든 게 아니었다. 실제로 몇 번이나 그에게 안겨야 했다.

그때마다 얇은 벽 너머에 있는 레테에게 신음이 들리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고 리안의 목덜미를 씹어 댔지만, 중간에 멈추는 일은 없었다. 결국, 리안의 뜻대로 헤일라는 제 발로 걸어 그를 따라다녔고, 그때마다 리안은 언니를 걱정하는 헤일라를 위해 사용인을 두어 레테의 수발을 들게 했다.

오늘도 그래 왔던 수많은 날 중 하루였다. 리안은 호화로운 여관으로 헤일라를 데리고 온 뒤 허겁지겁 탐했다. 그리고 욕망을 원 없이 배설한 뒤에 또 당근을 내밀 듯 제의하는 것이다.

“언니가 기다릴 거야.”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배달부가 바뀌었잖아. 오늘 신문사에 가서 만나 봐야 해.”

“아아.”

은근한 지루함이 묻어나는 탄성이다. 리안은 얼마 전 헤일라가 일간지를 문 앞에 버리듯 두고 가는 배달부를 불러 세운 일을 기억해 냈다.

‘마리는 일 관뒀어요. 말도 없이 그만둬서 이번 달 내내 내가 대신 배달했다고요.’

퉁명스럽게 대답한 젊은 여자는 곧바로 뒤돌아 산을 걸어 내려가며 투덜댔다. 헤일라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었다.

이전부터 헤일라가 집에 없을 때 레테가 신문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마리라는 배달부가 레테의 방 안까지 신문을 가져다주었었다. 물론 무료할 언니를 위해 헤일라가 웃돈을 얹어 주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젠 우리가 없어도 돌봐 주는 사람이 있잖아.”

신문 건네는 거 정도는 고용인들이 하게 둬. 리안은 헤일라의 변명을 짧게 쳐 내며 웃었다. 그녀 또한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우물대기만 했다. 어느 정도는 집에 돌아가기 위한 변명이 맞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늘은 공연 못 봐. 집에 갈래.”

그녀는 리안이 이미 아주 비싼 자리로 표를 구해 두었음을 알았다. 언제나 큰 금액을 들여 좌석을 선점해 두고 헤일라가 가지 않으면 돈을 허공에 날리게 된다고 기죽은 척을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에게 더 이상 휘둘리기 싫었다.

방금까지 너무 지독하게 시달리기도 했고, 또…… 아침에 레테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게 계속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 그럼 다음에 가자.”

마음이 넉넉해진 사람처럼 흔쾌히 헤일라의 거부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낯설다. 헤일라는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쪼르르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리안은 쿡쿡 웃었다. 뒤따라 욕실로 들어가는 남자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욱, 우욱…… 윽…….”

레테의 각혈이 시작된 것은 다음날 새벽의 일이었다. 끙끙대는 신음에 잠기운이 바싹 달아난 헤일라는 노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언니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이불보를 부여잡고 있는 레테를 발견한 뒤 침착하게 하얀 천을 턱 아래에 대어 주고 비상약을 꺼내 물에 섞었다. 물을 데울 시간이 촉박해 차가운 물에 풀었더니 가루가 녹는 게 더뎌 애가 닳았다.

“언니, 이거 좀 마셔, 응? 조금 차가우니까 조심해서…….”

헤일라가 간신히 스푼으로 덩어리진 가루 알들을 뭉개고 언니를 일으켰다. 익숙한 일이었지만 오늘처럼 이불을 흠뻑 적실 만큼 피를 토한 적은 별로 없었는데. 헤일라는 물컵을 쥔 손을 더 다부지게 쥐었다. 평소에 없던 일도 아니잖아. 잘 넘어갈 수 있어.

속엣말을 중얼대며 레테의 아랫입술에 약이 떠져 있는 스푼을 살짝 대어 주었다. 세 스푼, 네 스푼 정도 마신 뒤에는 호흡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지켜보던 헤일라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물약을 입에 넣으려던 레테가 가슴께를 부여잡고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큽, 커억…….”

발작의 징조다. 얼른, 얼른 환약을…… 무엇을 챙겨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데도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했으니까. 오늘따라 무언가, 아주 잘못될 것 같다는 불길함이 일었다. 손이 잘게 떨린다.

“헤일라.”

“……리안…….”

드물게 놀란 눈을 하고 방 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형편없이 흐느끼는 헤일라를 꼬옥 잡아 주었다. 그리고는 약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그걸 준비해 올 때까지 그녀는 언니의 옆을 지켰다.

발작을 완벽히 잠재울 방법은 없다. 그저 증상을 완화하는 약을 다량으로 음용한 뒤 운이 좋기를 기도해야 했다. 레테가 가지고 있는 병은 그만큼 지독하고 무서운 병이었다.

처음에는 가끔 몸이 뻐근한 정도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몸의 근육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혼자서는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한다. 병상에 누워 있다 보면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는 호흡 조절이 힘들고 병이 심해지면 발작이 찾아온다고 했다.

온몸이 흉한 반점으로 모두 뒤엉키고 나면 발작하다가 죽을 운명이라 모두 혀를 찼다. 신전에 가서도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대답만 듣기를 여러 번이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신전에서 치료받을 수 없는 평민에게는 사형 선고와 진배없다는 말이었다.

“언니, 내 목소리 들려? 응?”

그럼에도 레테는 꽤 잘 버텨 주었다. 독한 구석이 있는 여자는 무수한 발작에도 악착같이 호흡을 되찾고 또렷한 동공으로 다시 제 동생을 마주해 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헤일라는 경련하는 언니에게 리안이 준비해 온 환을 먹이고 꽉 안아 주었다.

쿵쿵쿵, 지나치게 빠른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려 혼란스러웠다.

“흐, 헉, 헤, 일라, 헤일…….”

“응, 응, 나 여기, 여기 있어. 언니…….”

초점이 흐린 병자가 자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마른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그 손을 제 볼 위에 올려 얼굴을 쓰다듬도록 했다.

“하으, 어디, 어디…….”

“언니 옆에, 옆에 있잖아. 나 여기 있는데 왜…….”

좀처럼 의식이 회복되지를 않았다. 레테의 코와 입에서 자꾸 탁한 색의 피가 흘러나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쉬어 가는 목에서는 갈라진 신음 소리만 흘러나왔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마지막?

속에서 신물이 역류해 구역질이 샜다. 무슨 감정인지 헤아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내면을 되짚어 볼 여유는 없었다. 헤일라는 언제나처럼 눈물만 뚝뚝 흘리면서 언니의 손을 쥐었다. 눈은 뜨고 있는데 죽기 직전의 생선처럼 생기 없이 파닥이기만 하는 레테가 낯설었다. 각혈과 발작을 일으킨 지 한 시간이 넘어가는데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있다.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된 건지 잊어버리지 마. 넌 평생 나 못 버려.’

언젠가 악에 받쳐 레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무나 당연해서 화도 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언니를 안아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못…… 못 버리게 한다고 했잖아. 쉽게, 절대 안, 죽, 흐윽…….”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헤일라의 목소리가 점점 더 흐려졌다.

“이러지 마, 죽지 마…….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나 정말, 정말 노력했는데…….”

자격 없는 양육자들이 자신을 상품 취급할 때 유일하게 버팀목이 되어 주던 언니였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 유일한 가족.

“내가 잘못했으니까…… 죽지 마…….”

나의 존재 때문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가여운 언니. 기어코 나는 레테를 살리지 못하는 건가? 나 때문에 죽는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헤일라는 정신없이 울며 허덕댔다. 그 와중에도 미안하다고 강박적으로 되뇌며 레테의 손을 놓지 않았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안이 침대 옆에 주저앉은 여자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쌌다.

“헤일라.”

“아, 흐으, 언니, 언니…….”

“헤일라. 진정해, 응?”

“흡, 어, 어떡해, 언니, 언니가 안 움직여…….”

“그래.”

안 움직이네. 예의 그 무기질적인 눈이 시체처럼 누워 있는 레테를 훑었다. 그러나 헤일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그 속에 녹아 있는 비린 만족감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곁에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옷깃을 붙드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싫어, 안 돼, 안 돼, 언니, 흐으, 언니, 죽으면…….”

“살리고 싶어?”

온유한 목소리가 섬광처럼 헤일라의 귀에 꽂혔다. 눈물범벅인 얼굴이 가늘게 떨리며 돌아갔다. 그의 손에.

“살릴 수 있어.”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헤일라는 멍하니 그를 보다가 간신히 숨을 되찾은 사람처럼 헐떡였다.

“어, 어떻, 어떻게…….”

“사실 계속 수소문하고 있었어. 파란 집에서 레테가 앓는 병에 잘 듣는 약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파란 집. 귀한 약을 구할 수 없는 평민들이 주로 향하는 불법적인 의약품 거래소였다.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은 의원 역할을 도맡아 하며 어마어마한 돈을 챙긴다.

신전과 황궁에서 평민을 위해 건립한 의료원은 정해진 병만 치료해 주며 약도 신전에서 허가한 약만 제공하기 때문에 아무리 부유한 상인이라 한들 난치병을 치료하기 힘들었다. 파란 집은 그 점을 이용해 제 배를 채우는 곳이었다.

“마침 어제 찾았어. 방금 사람을 보냈으니까 곧 돌아오겠지. 조금만 기다리자.”

헤일라라고 해서 찾아보지 않은 게 아니다. 하지만 찾는 데에도 돈과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들고, 찾는다고 해도 그들이 제시하는 비용을 지불할 처지가 안 됐다. 십 년간 일한 돈을 다 가져다 바쳐야 필요한 약 열 알을 얻을 수 있다고 들었을 때 파란 집은 포기했다.

“리안…….”

“다 괜찮아질 거야.”

생각지 못한 구원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거절은 사치였다. 제 목숨이 아닌 언니의 목숨이 걸린 일에 자존심이며 염치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헤일라는 그가 단단하게 얽어 오는 손을 맞잡았다.

쿵, 쿵,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지만 애써 잠재우려 눈을 감았다.

“나만…… 믿으면 돼.”

그러면 다, 괜찮아. 그가 진하게 웃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다, 괜찮아졌다.

* * *

“……고마워.”

“완치된 것도 아닌데 뭘.”

그는 정말로 겸연쩍은 기색이었다. 크게 힘써 준 사람치고는 과한 겸손이다.

“네가 아니었으면 언니는 오늘 죽었을 거야. 의사도 그렇게 말했고.”

“아주 약간의 연명 치료를 했을 뿐이야.”

여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애써 외면하던 사실을 리안이 일깨운 탓이다. 헤일라는 긴 한숨을 내쉬고 지친 얼굴로 웃어 보였다.

“항상 그랬는걸.”

“…….”

“언제나 언니는 죽음에서 돌아왔어. 오늘처럼. 그러니까 앞으로도…….”

“헤일라.”

“문제없어. 괜찮아. 괜찮을 거야.”

“하지만,”

“시끄러워!”

헤일라가 붉어진 얼굴로 뇌까렸다. 충혈된 눈에 간신히 멎었던 눈물이 차올랐다.

“그럼, 그럼 어쩌라는 거야! 나보고, 어쩌라고!”

“…….”

“믿는 거밖에는 못해. 그것밖에 못하잖아!”

방문한 의원은 레테에게 환약 한 알과 물약 서너 스푼을 복용하게 한 뒤 호흡과 맥박, 그리고 몸의 반점들을 꼼꼼히 살피며 진찰했다. 몸 여기저기를 살짝 씩 눌러 보면서 무언가를 종이에 체크 해 두는 얼굴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혹시 병세가 심각하다고 말하면 어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진단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해? 헤일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욱여넣으며 리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아무래도 약으로 호전될 만한 상태는 아닌 듯합니다. 신전으로 가서 치료를 받는다면야 또 모르는 일이지만…….’

파란 집에서 어떻게든 치료해 줄 수 없냐는 리안의 물음에 의사는 난색을 표했다. 파란 집이라 해서 모든 병을 고쳐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신전의 의술을 따라잡을 만큼의 돈도 능력도 없다는 게 이유였다.

어쩌면 파란 집의 의사가 언니를 완전히 고쳐 줄지도 모른다고 희망에 들떠 있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결국, 헤일라는 짧으면 두 달 안에 언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선고를 들었다. 뒤에 따라붙는 의사의 목소리는 금이 간 것처럼 이명에 가려졌다. 그녀는 엉엉 울다 다리에 힘이 풀려 결국 리안의 부축을 받고 겨우 침대에 앉을 수 있었다.

“신전에 가면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몰라.”

반면에 리안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아, 그런 말을 듣기야 했지.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신전은 귀족과 황족, 그리고 신관들만 출입할 수 있었고 평민은 결코 들일 수 없는 것이 법도였다. 그걸 헤일라보다 더 잘 아는 리안이 왜 이런 말을 꺼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

확신에 찬 말투. 헤일라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옅은 희망을 감지하고 몸을 바싹 굳혔다.

“……얼마 전에는 힘들다고 했잖아.”

신전에서 돌아온 뒤 헤일라가 어렵사리 물은 적이 있었다. 신전에 헤일라를 들여 치료한 것처럼 레테도 그렇게 해 줄 수 없느냐고. 염치없고 뻔뻔한 부탁임을 알았지만, 점점 나빠지는 레테의 병세에 절박해져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리안은 정말 안타까운 사람의 얼굴을 하고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헤일라를 데리고 들어갔을 때는 대신관이 잠시 자리를 비워 한산했던 때였고, 레테처럼 귀한 약과 어려운 치료가 동반되는 환자는 몰래 들여도 금세 티가 난다는 게 이유였다.

게다가 장기적인 치료를 해야 하기 때문에 헤일라와는 경우가 다르다고도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파고 들어갈 여지 없이 불가능함을 납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힘들어. 이대로는.”

“방법이, 있는 거야?”

그래. 생각해 보면 리안은 귀족이었다.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왔지만 그래도…… 그라면 다른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헤일라는 아직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워 리안을 붙잡았다. 그가 놀라서 흔들리는 몸을 재빨리 부축해 주었다.

“뭐든, 뭐든 해.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리안.”

무언가 침잠해 있는 듯한 눈이 헤일라를 지그시 응시했다. 가늠해 보려는 의도가 다분한 눈빛이다. 그녀는 그것을 읽어 내고 다급하게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이는 없지만…… 만약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한 거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되는대로 내뱉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퍼부었다. 그만큼 간절한 일이다. 그녀는 자존심을 모두 내던져 가며 빌었다.

“제발 우리 언니 좀 살려 줘, 응?”

“……헤일라. 신전에는 귀족만 출입할 수 있어.”

“알아, 아는데…….”

“그리고 너와 내가 혼인하면 너는 귀족이 되겠지.”

혼인? 헤일라가 멍청한 얼굴로 그 두 글자를 따라 했다. 예상치 못한 단어에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로제아르라는 지방이 있어. 그곳의 유서 깊은 백작가는 대대로 금발의 아이만 태어난다고 해.”

“리안, 잠시만, 난…….”

“만약 휴리트 공작가와 연을 맺을 수 있다면 변방 귀족인 그들이 고아 둘을 양녀로 받아 주지 못할 이유가 없어, 헤일라.”

“…….”

“그렇게 되면 너는 나와 혼인할 수 있을 테고, 레테는 신전 출입의 자유를 얻은 뒤 내 지원을 받아 치료도 받을 수 있겠지.”

머리를 쇠망치로 맞은 것 같다. 헤일라는 아득하게 멀어지는 의식을 잡으려 노력했다. 언니를 살리는 대가로 자신이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지 되새기느라 바빴다. 아니, 아니지.

내가 무언가를 ‘내놓는다’는 표현이 가당키나 한가?

“파란 집을 찾아서 레테를 낫게 해 주고 싶었어. 그런 다음 너에게 청혼하려고 했지. 알아. 이런 상황에서 혼인해야 레테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저열해 보이는지.”

“…….”

“하지만 정말로…… 난 네 진심을 얻고 싶었어. 온전히 네 의지로 나를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파란 집의 의원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해서…….”

그는 무언가 굉장히 잘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 마치 잘못을 저질러 놓고 어미에게 혼이 나는 건 아닐까 싶어 손톱을 뜯는 아이 같았다.

“귀족들은 이해타산에 아주 충실한 생물이야. 너와 내가 혼인하지 않는다면 입적을 허락할 이유가 없어서…….”

“아니, 잠시, 잠시만.”

헤일라가 단호하게 말허리를 끊어 내자 그는 굳은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녀의 입술만 바라보는 눈에 애가 닳아 있었다. 그녀는 그런 모습을 확인하고는 울컥 울어 버릴 것 같아 침을 한 번 삼켰다.

“왜 그렇게 미안해하는 거야?”

“…….”

“공작가의 후계자가 될 너랑, 나랑 혼인을 하자고? 말도, 아니,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네가 그렇게 미안해할 일이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그는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묻는 사람 같았다. 헤일라는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꽉 찌푸리고 언성을 높였다.

“누가 봐도 네가 손해야.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귀족은 이해타산에 아주 충실하다고. 귀족? 아니! 모든 사람이 그래. 그리고 모든 사람의 눈엔, 아니 내 눈에도! 난 공작가에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고.”

“…….”

“내가 너와 혼인해야 언니가 치료받을 수 있다는 말을 전하면서 네가 그렇게…… 그렇게…….”

약간의 울먹임이 새어 나왔다. 헤일라는 말끝을 흐리면서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헤일라는 여전히 리안이 미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순간은 견디기 힘들었다. 높은 지위를 갖고 있음에도 그녀에게 절절 매는 남자를 보면 어쩔 도리 없이 약해지고 마는 것이다.

리안은 헤일라가 리안의 감정을 의심할 수 없게끔 만든다. 그것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왜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느냐고 원망하고 싶다. 왜 나의 초라함을 탓하지 않아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드냐고 패악을 부리고 싶다. 차라리 헤일라를 천대했다면 이토록 이상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아니야.”

“…….”

“헤일라, 나 봐.”

“흐으, 싫어, 놔, 놔아,”

리안이 무릎을 구부려 침상에 앉은 헤일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이려 하자 볼을 쥐고 고개를 들도록 했다.

“나는 네가 없으면 미쳐서 죽어 버릴 거야.”

“흣, 흐윽…….”

“너한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나한테는 늘 넘쳐서…….”

리안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헤일라를 껴안았다. 그의 품 안은 따뜻했다. 헤일라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에게 제 얼굴을 파묻었다.

숨이 벅찼다. 모순적이게도, 아주 조금, 행복하다 여겼다.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줘, 헤일라.”

마치 자애로운 신이 귓가에 속삭이는 듯 아득했다.

* * *

레테가 깨어난 건 삼 일 뒤였다. 파란 집의 의원이 준 약을 꾸준히 먹이자 낯빛이 천천히 돌아왔고, 의식을 찾았을 때는 바로 물을 마실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았다. 평소 같았으면 속에 있는 걸 모두 게워 내고 신경질적으로 손을 쳐 냈을 텐데, 이번에는 그저 헤일라의 수발을 가만히 받아 들이는 모습이 낯설었다.

“기분은 좀 어때?”

조마조마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될 정도로 투명한 눈빛이다. 레테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약간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쿠션으로 등받이를 만들어 앉게 해 달라는 의미였다. 헤일라는 능숙한 간병인답게 빠른 몸놀림으로 언니의 상체를 일으켜 주었다.

“적당해.”

“……응.”

“그렇게 눈치 볼 거 없어. 안 좋아질 일밖에 안 남았잖아.”

“언니.”

“죽는 건 두렵지 않아.”

“…….”

“인간은 누구나 죽어.”

레테의 자조적인 목소리를 듣는 헤일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날 버리지 마.”

마치 그것이 죽음보다 더 두렵다는 듯. 레테는 그렇게 속삭이듯 말을 흘리고 입을 닫았다. 무언가 속에서 울컥 차올라 소리라도 지리고 싶었지만, 언니의 몰골을 뜯어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창백함이 좀먹은 얼굴. 입술은 허옇게 일어나 있었고 볼에는 생기가 없다. 거무죽죽한 눈 아래는 오래된 병증을 방증하듯 축 처져 있었다.

헤일라는 또 지겨운 눈물이 차오름을 느꼈다. 이제 울지 않을 때도 되었는데 또 비져 나오는 게 지긋지긋하다.

“안 버려.”

레테는 동생의 눈물을 끔찍이 싫어했다. 유약한 성품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부러 눈에 힘을 주고 또박또박 선언했다.

“절대, 안 버려.”

“그래?”

마지막 기회를 주는 사람처럼 조금은 의미심장하게, 조금은 서글프게 물어 온다. 헤일라는 고개를 거칠게 끄덕이면서 언니의 품에 안겼다. 레테의 몸이 더 깊게 베개 속에 파묻혔다.

“언니를 가장 사랑한다고 했잖아. 정말, 정말이야.”

“…….”

“죽지 마. 그러니까 죽지 말라고.”

“……그래.”

헤일라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이런 식의 대답은 처음이었다. 죽지 말라는, 건강 하라는 말에 언제나 레테는 비소를 지었으니까.

“네가, 나를 버리지만 않으면.”

“…….”

“안 죽을게. 살 거야.”

설핏 웃기까지 한다. 헤일라는 그게 너무 감격스러워서, 벅차올라서 어쩔 도리 없이 푹 안겨 울고 말았다.

“응, 응, 고마워, 고마워, 언니…….”

내가 꼭 언니를 구할 거야……. 속으로 다짐하며 주먹을 꼭 쥐는 낯이 약간의 희망과 행복에 젖어 있었다. 마치 신이 그녀에게 기회를 준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어쨌든 헤일라는 그날, 리안에게 찾아가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둘은 한참 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가만히, 온도를 공유했다.

* * *

타론 제국의 의료 체계는 굉장히 기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급 꼭대기의 인간들은 이걸 누구보다 잘 파고들었고 아래의 인간들은 말 그대로 ‘먹고 사는’ 일에 치여 나라의 체계나 부조리 따위에는 눈 돌릴 틈이 없었다.

게다가 ‘신’이 존재하는 것이 자명한 땅이 타론이었다. 한 치의 굽음도 없는 빳빳한 땅에 터를 잡고 서 있는 세니르 신전이 그 증명이 아닌가. 고로 우민들은 신전의 말을 곧 신의 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병이란 신이 내리는 형벌임을 그저 감내했다.

정당하게 일한 값을 치러서, 신전의 발전에 기여하지 않으면 그 벌을 사할 최소한의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게 신전의 논리였기 때문에, 신전이 모든 의약품과 의술을 관리하는 데도 이견을 두지 않았다. 난치병을 치료할 기회가 귀족과 황족, 신관에게만 있다는 사실 또한 별로 놀라울 게 없었다. 어차피 보통 평민이나 노예는 어마어마한 치료비를 댈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돈이 아주 많지만, 태생의 한계를 안고 있는 제국민들의 불만이었다.

본디 가진 자들의 고통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법. 그들은 병이 제 목숨 줄을 위협할 때가 오면 반기를 들 수 있었다. 돈이란 그런 힘을 부여해 주는 수단이니까.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파란 집.”

비공식적으로 신전이 관리하는 의료원의 이름이었다. 돈을 가진 미천한 자들의 입은 뒷거래로 쑤셔 막고, 신전은 막대한 금전적 이득을 취득한다.

귀족들과 황족은 몰래 숨어서 치료받는 이들을 보고 우월감을 느끼며 다디단 와인을 마신다. 돈은 많지만, 태생적인 한계를 끊임없이 주지당해 온 평민들은 제 몸이 평안을 되찾으면 다시 안락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체계를 바꿀 필요도 딱히 느끼지 못했다.

제국은 이런 방식으로 제국민을 ‘관리’했다.

“처음부터 뒷거래는 다 해 뒀었던 거지?”

“역시 똑똑해.”

리안은 레테의 침대 옆에 서서 바짝 야윈 레테에게 선심 쓰듯 칭찬을 던졌다.

“네가 고분고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처음부터 예상했으니까.”

잔뜩 꼬아 놓은 비아냥도 잊지 않고 덧붙인다. 레테는 그저 침대에 누워 창문 쪽을 흘긋 바라봤다. 헤일라가 뒤돌아 마을로 내려가는 뒷모습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가증스러운 새끼.”

둘만 있을 때 레테가 혐오를 드러낸 건 오랜만이다. 기분이 퍽 좋은 남자는 그저 흘려들으며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면서 들고 있던 둥근 천 가방 하나를 바닥에 가볍게 던졌다. 두 팔을 허벅다리에 얹은 채 상체를 조금 숙인 리안은 다소 위험한 기운을 풍겼지만, 레테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내가 시키는 대로 했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콱, 하고 누워 있는 여자의 볼을 잡아채는 손길이 꽤 험악했다. 공중에서 마주친 둘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는 지금 이전에 주었던 붉은 독약을 한꺼번에 음용한 행동에 관해 지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했어야지. 둘이 붙어먹으면서 희희낙락하는 꼴을 내가 언제까지 지켜봐 줄 거라 생각했어?”

매일 밤 헤일라에게 들러붙어 결국에는 엉엉 울게 만드는 남자였다. 그는 연인의 애원대로 삽입하지는 않았지만, 깨어 있는 레테가 들을 수 있도록 충분히 공을 들였다. 리안에게는 그저 영역을 표시하는 짐승 같은 행동이었다. 언니만 머리에 담고 있는 헤일라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아아, 그래.”

그가 레테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양손을 들어 보였다.

“네 덕분에 일이 빨리 풀린 건 인정하지.”

“알았으면…….”

“곧 신전으로 가게 될 거야.”

그의 말을 끝으로 꽤 긴 침묵이 둘 사이를 갈랐다.

“원하는 치료, 재물, 뭐든 약속한 대로 지급해 주지.”

“…….”

“……끝까지 약속만 잘 지킨다면.”

“헤일라를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

“그 애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게 서로에게 좋을 테니까.”

서로? 레테는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리안은 레테의 소리 없는 조롱을 기민하게 읽어 냈다.

“먼저 제안을 한 건 너야.”

“나도 알아.”

그의 말이 맞았다. 헤일라를 기만하고 그의 아가리에 집어넣을 수 있게 해 주겠다 제안한 건 레테였다. 그녀는 그 대가로 평생 사치스럽게 살 수 있는 돈과 치료를 요구했다. 사창가에서 어리고 아리따워 고급 창녀로 분류되던 레테는 귀족들의 말투와 행동거지를 질릴 정도로 봐 왔다.

그런 레테가 첫눈에 리안의 태생을 알아차린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녀는 네게서 귀족 냄새가 난다며 제 손을 잡으라 유혹했다. 리안은 탐욕스럽고 동생을 증오하는 레테의 제안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그 애가 어디서 어떻게 굴려지든 난 신경 안 써. 네 손에 죽어도, 아니 죽으면 오히려 좋지. 개운할 것 같아.”

리안의 미간이 구겨졌으나 레테는 언제나처럼 주저하지 않고 입을 놀렸다.

“그러니까 굼뜨게 행동하지 말고 얼른 진행해. 내가 생각보다 참을성이 없거든.”

“서른 날.”

“…….”

“서른 날 안으로 모든 게 정리될 거야.”

너와 헤일라의 관계까지 전부. 뒷말은 나오지 않았으나 영리한 레테는 다음 말을 능히 읽어 냈다.

“그럼 이제 들을 수 있겠어.”

“…….”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그냥 나를 죽이고 가둬서 취하면 그만인 헤일라에게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저의.”

레테는 처음 제안했을 때 이걸 받아들이는 리안에게 물었었다. 사실 그는 레테의 손을 뿌리칠 수도 있었다. 귀족이라고 지레짐작해 오는 말이야 그저 뿌리치면 그만이고, 레테는 은밀하게 죽일 수도 있었다. 더불어 그에게는 헤일라를 가둬 삼킬 힘도 충분하다. 왜 자신의 말대로 하냐는 그녀의 물음에, 리안은 끝이 다가오면 알려 주겠다 약속했다.

“그게 너한테 중요한가?”

“궁금하니까?”

그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얼굴에는 그답지 않은 후련함도 조금 엿보였다.

“웃는 게 예쁘잖아.”

“…….”

“내 품에 안겨서 매달리고, 우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하…….”

“스스로 원해서 안겨 올 때가 가장 만족스러워. 수고를 들일 가치가 충분하지.”

……게다가 적당한 부채감도 심어 줄 수 있고. 그는 헤일라가 평생 안락한 철창 안에서 자신만 바라보며 헌신하기를 바랐다.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소유이며 다정한 신을 얻는 방법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걸 위해서라면 벌레보다 증오하는 헤일라의 피붙이도 잠시 살려 둘 가치가 있다 여겼다. 그는 헤일라에 한해 굉장히 자비롭고 참을성이 넘쳤다.

“역시 그렇구나.”

“그럼 이제 네가 답해야겠어.”

이제까지는 그랬다. 리안은 정말로, 레테를 조금 더 살려 둘 요량이었다.

그가 천천히 일어나 던져두었던 천 가방을 들었다. 여기저기 흙이 묻어 있어 남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가방의 끝자락은 붉은색으로 옅게 물들어 있었다. 리안은 그걸 열어 안에 있던 내용물을 레테의 다리 위에 그대로 쏟아 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네, 역시.”

몸통이 조각난 새는 멀겋게 눈을 뜨고 있었다. 레테는 그걸 무감하게 내려다봤다.

“이게 뭔지 모르겠다는 변명할 생각이면…….”

“딱히?”

레테의 입매가 위로 휘었다. 침착함을 넘어 당당함까지 담아 그를 조롱하는 대답이었다.

“난 그냥 살 구멍을 하나 더 뚫어 둔 것뿐이야. 네가 실패하면 거래고 뭐고, 다 날아가는 건데.”

이 정도는 대비해야지? 이제 그녀는 조금 낄낄거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

“그래서 공작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리안은 종이 위에 흩어진 문자를 읽어 내리는 사람처럼 나긋했다. 레테는 토막 난 새의 다리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거 보면 안 물어도 알 텐데?”

“겁이 없군.”

새의 다리에는 작은 끈 같은 게 묶여 있었다. 그건 펴서 물에 담그면 불어나 종이처럼 펴지는 밀서였다. 그리고 발신인은,

타센 휴리트. 리안의 아버지이자 공작인 남자였다.

“공작을 죽이려는 패륜아. 물론 네가 완벽하게 미친놈인 만큼 실패할 것 같지는 않지만 패는 여러 개일수록 좋잖아?”

“하.”

“네 쪽이 실패하면 네가 주기로 했던 전부를 공작이 제공하기로 했거든. 또 궁금한 게 있어?”

창백한 손이 짚고 있던 새의 다리 조각을 레테는 리안을 향해 던졌다. 그건 남자의 단단한 배를 치고 아래로 힘없이 추락했다.

“아아, 내 쪽에서는 뭘 건넸는지 말을 안 했네. 너랑 헤일라의…….”

얄밉게 오물거리던 입이 큰 손에 의해 막혔다. 조막만 한 얼굴의 반이 리안의 손바닥으로 가려졌다.

“그만.”

“…….”

“죽여 버릴 것 같으니 그만 떠들어.”

악력이 레테의 하관을 으스러트릴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여자의 입에서는 어떤 신음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옅은 식은땀만이 고통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리안은 그 모습을 훑고는 손을 떼어 냈다.

“헤일라 없이는 구걸도 못하는 계집년이 할 수 있는 거야 빤하지. 병든 몸뚱어리로 다리를 벌릴 수도 없었을 테니까.”

“…….”

“우리 둘을 살피고 입을 놀릴 수 있다는 것. 딱 그 정도가 네 가치야. 굳이 네 입으로 들을 가치도 없어.”

“그래. 꽤 정확하게 맞췄네. 네가 생각한 게 맞아. 그런데,”

“…….”

“대비라는 건 정말 중요하거든. 너처럼 운이 좋은 인간들이야 평생을 모르고 살았겠지만.”

레테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났다. 그녀는 의뭉스런 얼굴로 엉망이 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한숨 쉬었다.

“조심해.”

한순간이지만, 그 모습은 마치 고요히 진리를 읊는 신처럼 경건해 보였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비극을 낳는 법이니.”

인간에게 신이 내린 세 번째 가르침. 성서의 첫 번째 페이지에 자리한 글귀였다.

“네 것이 아닌 걸 탐내는 주제에 허점까지 보이면 큰일 날지도 몰라.”

공허한 공간에 여자의 키득대는 웃음소리만 부유했다. 리안은 미동 없이 듣고만 있다가 천천히 왼쪽 입꼬리를 올렸다.

“겁이 없는 줄 알았는데.”

발치에 떨어져 있는 새의 다리 조각이 무자비한 발에 의해 천천히 으깨졌다. 잔여물들이 바닥에 새겨지듯 눌어붙었다. 리안은 그러면서도 레테에게 고정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마치 지금 밟아 뭉그러트리는 대상이 레테인 것처럼.

“그냥 멍청한 거였네.”

둘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맺어졌다. 리안은 메마른 전신을 훑고 뒤를 돌았다.

* * *

“웁, 으웁…….”

“더.”

“후우, 욱.”

“더 쑤셔 넣어. 그래, 그렇게 목을 열어서…….”

낮은 조도의 방안, 너른 의자에는 남자 하나만 앉아 있었다. 베르디안은 낄낄대면서 다갈색 머리칼을 콱 쥐어 제 사타구니 쪽으로 여자의 얼굴을 당겼다. 우욱, 하고 괴로움에 묻힌 신음이 낮게 퍼졌다.

“한 발도 못 빼겠어, 이러다가.”

그는 낄낄대면서 더 정성을 들이라며 여자의 볼을 톡톡 쳤다. 거대한 성기를 목 끝까지 밀어 넣은 여자가 간신히 구역질을 참고 혀를 쓰기 시작했다. 아아, 하는 낮은 탄성을 뱉은 남자가 소파 등받이에 완전히 상체를 기댄다.

“적당히 끝내.”

리안은 남의 정사를 지켜보는 게 불쾌한지 얼굴을 구기고 채근했다. 당장이라도 방을 나설 기세로 몸을 일으키자, 베르디안이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젠장. 내가 좆물 못 빼서 뒤지면 그건 전부 네 탓이야.”

저급한 농에는 대답도 주지 않은 채 리안이 작게 한숨만 쉬었다. 정말로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방증이었다. 베르디안은 다시 여자의 머리채를 쥐고 빠르게 몇 번 흔들었다. 그렇게 수 분 동안 자위에 가까운 봉사를 받은 뒤에야 걸쭉한 절정에 다다를 수 있었다.

“사람을 불러 두고 일을 치르고 있던 건 너다.”

“서운한데. 같이 쑤시는 걸 꽤 좋아하는 누구를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뿐이라고.”

리안은 난잡했던 과거사를 들추는 친우를 다시금 무시하고 아직 방에 남아 있는 여자를 향해 턱짓했다. 그녀는 베르디안의 아래에서 떨어져 나간 뒤 능숙하게 젖은 천을 가져와 그의 아래를 닦아 주는 중이었다.

“나가 봐, 예쁜아.”

베르디안은 마음껏 욕망을 배설해 만족감이 어린 목소리였다. 허공을 향해 건넨 지폐는 꽤 큰 액수여서, 여자는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리다가 문밖을 나갔다.

“매음굴 출신인가?”

“왜, 관심이 가?”

이제 취향이 조금 바뀌었어? 그는 흥미가 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안은 밋밋하게 침묵하며 베르디안을 응시했다. 대답을 종용하는 귀족적인 방식이었다. 베르디안은 시시하다며 툴툴댔다.

“지방 매음굴에서 넘어온 계집이 꽤 반반하다고, 마담이 소개해 줬지. 입도 쓸 만하고, 아래도 꽉 조이는 맛이…….”

“그렇군.”

중간에 잘린 말이 허공에서 부유한다. 베르디안은 멋쩍은 얼굴로 어깨만 으쓱했다.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었다.

사실 리안은 남자가 휘두르는 대로 성을 팔면서 비굴하게 굽신대는 여자를 보고 레테를 떠올렸다. 헤일라를 위해 매음굴에 팔렸었다는 여자는 과거에 어땠을지 궁금했다. 고고하기로는 여느 귀족과의 여식들 못지않은 계집이니 길들이기가 어지간히 고역이었겠지.

하지만 리안은 누군가의 아래에서 굴복하고 복종할 레테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헤일라의 자매는 고귀한 무언가에 더 잘 어울렸다. 집요하고 탐욕스러운 면이 더더욱 그런 면을 돋보이게 했다.

“내가 공작이 되면 신전에 사람을 하나 둘 생각이야.”

“그 여자 언니라고 했나?”

“그래.”

“죽이려고?”

베르디안이 여상한 태도로 물었다. 리안이 바로 답하지 않자 그의 얼굴에 흥미가 돌았다.

“아마도.”

애매한 대답은 조급증을 부추긴다.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가 눈썹을 위로 들어 올리고는 등받이에 팔 하나를 올렸다. 바지만 꿰어 입었다면 꽤 귀한 태가 났을 법한 자세였다.

“애매한 답인데.”

“애매한 여자라.”

처음에는 그저 성가신 걸림돌이라 생각했다. 헤일라의 머릿속을 온통 메우고 있는 거머리 같은 계집. 하지만 그래 봐야 몸도 성치 않은 계집 하나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손을 잡은 게 실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근래에 들어서야 하게 됐다.

“그년이 타센과 내통하고 있다.”

순간 베르디안의 눈에 놀라움이 스몄다. 그는 날카로워지거나 염려하는 대신 몸을 앞으로 바짝 숙이고 입술을 혀로 핥았다.

“불구가 된 계집이라며?”

“새.”

“…….”

“며칠간 비슷한 새가 자꾸 창가에 앉는다는 보고를 받아 확인했는데 전서구 역할을 하고 있었어.”

“공작 쪽에서 먼저 접촉했네.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으니.”

“들킨 것도 이미 알고 있어. 놀라지도 않더군.”

공작은 그리 어설픈 인물이 아니었다. 아마 이후에 들킬 것까지 염두에 두고 레테에게 접근했겠지. 레테는 그걸 알고도 제안을 받아들인 거다. 간이 큰 계집이었다.

“이야, 대단한 여자잖아?”

“여러모로 대단하지.”

“다리도 못 쓰는 계집한테 크게 데였는데?”

베르디안은 낄낄대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여자에 대한 호감이 서린 눈빛이었다. 재미있는 대상만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만하게 구는 남자다웠다.

“인정해야겠지…….”

자존심이 상하지만 리안은 레테를 얕봤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완전히 속을 알 수 없다는 점도 확신하게 되었다.

처음 리안은 레테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그녀를 죽이고, 헤일라까지 완벽하게 취할 계획이었다. 레테에게는 헤일라를 영영 보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헤일라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일 년 정도는 정기적으로 만나게 해야 했다.

그리고 신전에 데려다 놓고 천천히 중독되는 마약류와 약을 함께 복용하게 만들면 교묘하게 몸을 쇠하게 만들 수 있었다. 워낙 몸이 약해져 있으니 신전에 들어간다 해도 완전히 회복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헤일라도 받아들이지 못할 결과는 아니다.

리안은 시간을 들여 헤일라가 레테의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판을 짜려 했던 것이다. 그래야 슬픔을 온전히 극복하고 자신에게 안겨 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제거 시기를 앞당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완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적이니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되겠지만…….

“타센 다음은 그 계집이 될지도.”

어찌 되었든 레테를 제거해야 하는 때가 조금 더 앞당겨지기는 할 것 같았다. 베르디안이 한숨 쉬듯 웃었다.

“그래. 그럼 이제 들어 보자고.”

공작을 죽일 묘수.

그 밤 내내 둘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비를 죽이려는 아들의 치밀한 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 * *

어둑한 시간에 귀가한 리안은 대문을 열고 맡아지는 새콤한 스튜 냄새에 작게 웃었다. 언제나처럼 헤일라가 그를 위해 준비해 둔 식사일 테다. 그는 모퉁이를 돌아 있는 허름한 식탁에 헤일라가 앉아 있기를 기대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작고 누추한 집이라 그의 걸음 몇 번만으로 부엌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를 맞이하고 있는 건 텅 빈 식탁뿐이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구나. 항상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용히 붙여 둔 심복에게서 다른 연락이 없는 거로 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매일 헤일라의 손길이 닿는 나무 조리대 위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자연스레 곧 닿을 헤일라의 감촉이 상상되어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정말…… 괜찮아?’

얼마 전 집을 나서는 길에 그녀가 건넨 말이 문득 떠올랐다.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는 입술은 사랑스러웠다. 헤일라는 요즈음 타센에 관한 것을 넌지시 물으며 낮게 심호흡하곤 했다. 오늘은 입술을 세게 깨물기에 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아비를 죽이려는 남자가 끔찍하냐고 반문하니 그녀는 사색이 되어 도리질 쳤었다.

‘다른 방법이 있는 건데 나 때문에 살인을 결심한 거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머뭇대는 게 어여뻐서 잠시 뜸을 들였더니 울먹임이 새었다.

‘언니를 살리는 데 정신이 팔려서 생각 못했어. 그런데…… 괜히 나 때문에 모르는 척 안 보고 살 수도 있는 아버지를, 굳이, 굳이 죽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 그랬으면 좋겠어…… 흩어진 말들을 후회하는지 눈을 질끈 감는다. 리안은 그런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으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짧게 웃었다.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오래전부터 준비했거든.’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저택에 함께 살 때부터 아비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지금의 준비는 지난한 여정의 과정일 뿐이었다. 헤일라를 만나지 않았다 해도 필시 타센을 죽였으리라.

‘레테 상태가 좋지 않아서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야. 신경 쓰지 마.’

‘……미안해.’

실상 레테 때문이 아니라 황제와의 언약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임에도 적당히 부채감을 심을 수 있을 만한 말을 골랐다. 그는 본격적으로 거사를 준비하며 헤일라에게는 레테의 핑계를 대곤 했다.

‘위험한 건 아니지? 정말 지하에 불만 지르고 나오는 거지?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거, 안전한 곳인 거 맞지?’

‘고용한 자객들이 많아. 걱정하지 마. 그리고 정말 내가 하는 일은 불을 놓는 것뿐이야. 폐하와 약속까지 했는걸.’

물론 황제가 리안의 계획을 안다는 것도, 자객을 고용했다는 것도 거짓이었다. 불만 지른 뒤 빠져나온다는 것도 거짓이었다. 그는 타센이 끔찍하게 아껴 지하에서 절대 내돌리지 않는 ‘어떤 것’에 독을 바른 뒤 불을 지를 예정이었다.

타센은 반드시 제 손으로 그걸 지하에서 빼내려고 발버둥 칠 테고, 닿기만 해도 감각을 마비시키는 특수한 독은 그를 화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 전에 호흡기관까지 마비돼서 죽어 주면 더 좋고.

리안은 건조하게 생각하면서 천천히 걸어 손끝으로 나무 조리대를 끝까지 쓸었다. 그런데 그때, 방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레테의 방은 아니었다. 헤일라가 집에 있었던 걸까? 그는 묘한 의구심을 느끼며 나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헤일라?”

헤일라였다. 그녀는 침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서 있어.”

나직한 음성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춰 온다. 아아, 리안은 흐트러진 눈동자를 감상하며 그 속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를 잠시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그런 무익한 상상은 도톰한 입술이 열리자 금세 사그라들었다.

여자는 무어라 말하고 싶은지 입술만 달싹였다. 묘한 위화감이 둘 사이를 갈랐다. 헤일라의 눈매가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눈물이 쏟아질 즈음 되었을 때 리안이 다시 한번 물었다. 조급증이 일었다.

“무슨 일 있었어?”

“…….”

“헤일라.”

왠지 모르게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샅샅이 살핀 남자는 헤일라에게 성큼 다가가 한 손으로 뺨을 쥐어 올렸다.

“꼴이 왜 이래.”

자세히 보니 턱이며 손등이 까져 살이 물러져 있었다. 또 그 계집인가? 그는 레테가 헤일라를 상처 입혔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제 여자가 저렇게 엉망인 꼴로 눈물을 흘릴 일이 없었다.

하루빨리 죽여 버리고 싶다.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옆방으로 달려가 목을 졸라 숨을 거두고 싶다. 리안의 분노가 명치까지 밀려 올라왔을 즈음 헤일라가 무어라 젖은 목소리로 웅얼댔다. 그는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 헤일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야트막한 몸을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헤일라가 빛나는 금발을 팔랑이며 그에게 안기는 것이 먼저였다.

움칠, 단단한 어깨가 위로 튀었다. 헤일라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푹 묻고 볼을 부비적댔다. 그때가 되어서야 리안은 능숙하게 여체를 품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매달리는 걸 본 적이 있던가. 헤일라는 강박이라도 앓는 사람처럼 그에게 매달렸다.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히뜩대며 달라붙었다. 사랑스럽게도.

“레테가 뭘 집어 던지기라도 한 거야?”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헤일라는 그냥 고개만 약간 끄덕이고 숨을 죽였다. 색색대는 게 꼭 아기 같아, 리안은 저도 모르게 픽 웃고는 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은 뭐 때문이었는데?”

혈육의 패악을 너무나 당연하게 감내하는 여자였다.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그러했다. 떼어 놓기 전까지는 맞춰 주어야 하는 부분임을 이제는 알았다.

“……너무, 못되게 굴어서 싸웠어.”

“싸워?”

의외였다. 그녀는 결코 레테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다. 고분고분한 정도를 넘어 설설 기는 수준인데. 선 듯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를 너무 미워해서…… 싸운 거야.”

아아. 리안은 작게 탄식하고는 헤일라의 머리칼을 다시금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레테가 도를 넘어 폭언을 퍼부은 게 분명했다. 그의 여자는 결코 쉽게 화내는 성정이 아니었다.

“나는 언니가 너무 좋은데, 정말 소중한데, 없으면 안 되는 가족인데, 언니는 아니었나 봐.”

내가 밉기만 한 가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몸이 그를 타고 주룩 흘러내렸다. 리안은 재빨리 헤일라를 안아 들어 침대에 앉혔다.

“나, 죽고 싶어.”

순간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헤일라.”

“죽고 싶어. 죽고 싶어, 리안.”

어떤 순간에도 꿋꿋하기만 한 여자였다. 언제든 한계에 다다를 수 있을 정도로 위태로웠으나, 죽음을 입에 담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할까.

리안은 헤일라가 절망에 짓무르고 있는 순간조차 자신을 위해 소비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는 잠시, 어떻게 행동하는 쪽이 그와 그녀의 아름다운 미래에 도움이 될지 고민해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만약 너까지 나를 배신하면, 나는 못 살아.”

그럴 거야. 분명히 그렇게 되어 버릴 거야…… 그녀는 홀린 사람처럼 중얼대며 그의 옷깃을 뭉쳐 쥐었다.

“그러니까.”

홀리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황금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쳐 온다.

“그러니까 안 그러겠다고 말해. 잘못한 거 있으면, 지금, 지금이라도 다 말해. 다 용서해 줄 테니까, 앞으로가 중요한 거니까, 응?”

대관절 레테가 무슨 말을 했기에 이렇게 예쁘게 미친 걸까. 그는 이 와중에도 헤일라의 눈이 탐나서 눈가를 살살 매만졌다. 그리고 태연자약한 얼굴로, 그러나 숭고한 맹세를 하는 기사처럼 속삭였다.

“걱정 마, 헤일라.”

어차피 스스로가 모르는 기만은 언젠가 공기처럼 흩어질 테니.

“약속은 지켜. 무슨 일이 있어도 배신 같은 거 안 하니까.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그는 지금의 배신이 훗날 우리를 더 완전하게 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울지 마.”

그러므로 헤일라는 눈물 흘릴 필요가 없었다. 영영 알지 못할 남자의 잘못에 두려움을 품는 건 덧없는 행위였다. 리안은 약간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헤일라를 꽉 안고 사랑을 속삭였다.

헤일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닫았다.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등 쪽으로 팔을 둘러 리안을 더 꽉 껴안았다. 리안은 그것이 무언의 대답이라 넘겨짚었다.

이후에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리안은 헤일라에게 붙여 둔 수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레테에게도 찾아갔다. 밖에서는 별일이 없었다는 수하의 대답에 안심했고, 헤일라에게 죽어 버리라 폭언을 퍼부었다는 레테의 말을 듣고는 살심을 억눌러야 했다.

어쨌든 그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언제나처럼 헤일라는 그를 의지했고, 앞으로는 더더욱 불안에 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지근한 침묵만 남긴 그날 이후, 헤일라는 어느 시간에 멈춰 선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리안이 공작가로 나서는 그날 아침까지 혼이 빠진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라 여겼으며, 공작을 처리한 뒤 내내 함께 생활하며 어르고 달래면 아물 상처라 여겼다.

남자는 그것이 감정이 문드러진 사람의 모습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영영 곱씹으며 후회할 만한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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