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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뱀 둘 (3/10)

2. 뱀 둘

“대단한 정성인데?”

신전의 가장 깊숙한 방에 키득대는 소리가 울렸다. 평범한 신자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방. 헤일라는 방의 중앙에 자리한 침대에 몸을 묻고 누워 리안의 시중을 받는 중이었다. 삼 일 내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고 끙끙댔지만 그는 지극 정성으로 수발을 들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신관의 확신을 받아 낸 뒤로는 기분이 퍽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베르디안은 문가에 서서 리안의 추태를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다가 여자의 외양을 구경해 볼 심산으로 둘에게 다가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안은 앓고 있는 여자의 이마만 젖은 수건으로 닦아 줄 뿐이었다. 남의 시중이라고는 생에 처음으로 들어 볼 것 같은 남자는 함함한 미소를 지으며 헤일라의 옆을 지켰다.

“예뻐.”

축축한 금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속삭이는 꼴이 가관이었다. 게다가 여자의 볼에 입 맞추는 낯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여자가 웅얼거리면 다정하게 토닥거리면서 지분거리기를 며칠째였다.

헤일라의 흰 목덜미에는 물감처럼 번진 붉은 기가 묻어 있었다. 간호를 한답시고 내내 물고 빤 장본인은 그 옅은 자국을 사랑스럽다는 듯 만지작댔다.

베르디안은 리안의 낯간지러운 행동을 유심히 살피다가 여자의 얼굴을 슥 훑었다. 며칠 앓아 얼굴이 여위기는 했지만 확실히 눈에 띄었다. 반짝거리는 백금발과 흰 피부, 오목조목 자리 잡은 이목구비가 단정했다. 수북한 앞머리를 자르면 기구한 팔자는 빳빳하게 펼 수 있을 정도의 외모였다.

그래도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릴 만큼의 미인은 아닌데.

베르디안에게 여자는 그저 욕구를 풀 수 있는 보드라운 생명체에 불과했다. 어여쁘면 귀여워해 주고 싶기는 하지만 그건 그냥 기르는 개를 아끼는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기실 모든 인간이 그에게는 그런 존재였다. 가치가 있는 것은 저를 즐겁게 해 주는 인간. 또는 생의 마지막 숨을 할딱이며 살육의 감각에 젖게 해 주는 인간들 정도였다.

그리고 베르디안이 유일하게 친우라 명명하는 리안은, 어릴 적부터 그와 기질이 엇비슷했다. 잔인하고 몰인정하며 어딘가 뒤틀린…….

그는 흐응, 하고 무언가를 가늠하듯 리안과 헤일라를 번갈아 보다가 조금 떨어져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변해 버린 리안은 이전보다 재미가 없는 것 같다. 베르디안은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치면서 리안의 행각을 꾸준히 살폈다.

“흣, 싫어…….”

“쉬이, 괜찮아. 나야. 응, 옳지…….”

헤일라는 리안이 치대는 게 갑갑한지 무의식중에도 종종 몸을 뒤척였다.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축축했다. 베르디안은 리안이, 상당히 번거롭게 구는 여자의 몸을 누르고 입을 막아 버릴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거부를 표하는 헤일라에게 짜증을 내기는커녕, 달콤한 말을 속살거리며 달래기 바빴다. 둘이서만 살면 이런 일은 없을 거라는 둥, 지켜 주겠다는 둥,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같은 말만 해 대면서.

지켜보던 베르디안은 마침내, 리안이 지금 행하는 모든 일이 잠시 유희로 즐기는 연극 같은 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전에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너, 완전히 돌아 버렸네.”

그리고 리안은 정말로 완벽하게, 이 계집에게 미쳐 있다. 베르디안은 헤일라를 바라보는 리안의 얼굴에서 완연하게 무르익은 광기를 읽어 냈다.

리안은 여자가 품 안에서 칭얼대는 건 다정하게 어르면서, 자신이 아닌 언니의 이름을 부르면 강박증을 앓는 사람처럼 비슷한 말만 해 댔다. 죄다 여자를 세뇌하기 위한 말들이었다. 레테가 얼마나 너를 증오하는지 아느냐고 물으며 너에게는 저밖에 없다고 속살댔다.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여자를 붙들고 할 짓은 아니었다.

“조금은.”

리안은 베르디안의 말에 옅게 웃으며 답했다. 베르디안은 그때부터 헤일라에 관해서는 관심을 끄기로 했다. 아무래도 헤일라는 그의 인생을 즐겁게 하는 유희에는 별다른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사랑 놀음에 푹 빠진 리안도 당분간은 그럴 것 같았다.

“황제 폐하께서 네가 언제쯤 약속을 지키실지 궁금해하시던데.”

리안은 황제를 상대로 꽤 뻔뻔했다. 처음 공작의 집을 나왔을 때는 필요한 돈과 인력을, 지금에 와서는 헤일라를 치료하기 위해 신전의 방과 치료사를 맡겨 둔 사람 마냥 요구했다. 언제까지 황제가 리안의 방자함을 참아 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리안은 황제와의 ‘약속’에 관해서는 별 계획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곧.”

“그 말만 서른 날째잖아.”

그리고 나도 인제 그만 시달리고 싶다고. 친우와 황제 사이에서 말을 전하는 베르디안은 불만이 잔뜩 끼어 있는 얼굴로 뇌까렸다. 후작 가가 황실과 결탁하여 장기 암시장의 주최권을 유지하고 있는 일만 아니라면 이런 귀찮은 일은 떠맡지 않았을 테다.

리안은 베르디안 쪽을 흘금 보고 다시 헤일라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쳤다. 보드라운 이마에 난 길쭉한 상처를 피해 조심조심 손가락을 놀리니 칭얼대는 신음이 샜다. 베르디안의 같잖은 재촉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어여뻤다. 이걸 두고 다른 곳으로 걸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예뻐.”

그는 홀린 듯 헤일라를 내려다보다가 침대에 턱을 괴었다. 베르디안은 못 말린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아마 계집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내내 저런 얼굴일 게 뻔했다.

“성년이 되고 이 년 이내. 잊지 않았겠지.”

“그럼.”

“…….”

“타센을 죽이고 다음 공작이 되기에 무리 없는 나이가 됐지.”

리안은 건조하게 답하고는 다시 헤일라의 손을 주물럭댔다. 제 아버지를 명명하는 단어가 차갑기 그지없다. 베르디안은 잘 알고 있어 다행이라는 핀잔만 남겼다. 다행히 황제와의 거래를 머릿속에서 지운 건 아닌가 보다.

황실만큼의 세를 누리는 공작가는 늘, 황족의 날카로운 걸림돌이었다. 의술과 예언의 힘을 독점하고 있는 신전만 견제하기도 힘에 부치는데, 휴리트 가는 강력한 군권을 쥐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들이 다스리는 북부의 사병 규모와 군사들의 실력은 황실 궁의 군사들보다 월등했다.

“저 여자 집에 머무를 때부터 입이 닳도록 말했다만, 타센은 이미 네 거처를 알고 있어. 폐하께서는 타센이 바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네 말을 믿고 기다려 주시는 거다. 그런데……”

“그만. 폐하와 네 인내심이 다 닳았다는 건 나도 알아.”

리안은 조금씩 커지는 베르디안의 목소리가 헤일라를 깨울 것이 염려되어 말허리를 잘라 냈다.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 전해. 나도 얼른 아버지의 목을 따서 은쟁반 위에 올려 두고 싶거든. 물론 폐하께 양보해야겠지만.”

게다가 현 휴리트 공작은 황제의 여동생을 약탈혼으로 빼앗은 것으로 유명한 사내였다. 황제는 동생을 겁탈한 리안의 아비를 끔찍하게 증오했다. 그러니 타센 휴리트를 빼닮은 조카를 아끼는 태도는 퍽 의외로운 일이었다. 비록 조카에게 아비의 목을 베어 오라 주문하기는 했지만…….

“나도 얼른 헤일라랑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딱히 상관없어 보인다. 리안은 아비를 죽이는 패륜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공작가의 주인을 자신이라 여기고, 마음속으로는 이미 저 계집을 부인으로 삼아 둔 것 같았다.

굳이 토를 달지 않는 거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일어난 베르디안은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문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지루하다 못해 피로가 쌓이는 기분이다.

“오늘 밤에도 이 방에는 아무도 들이지 마.”

“그래.”

아, 달뜬 숨을 내뱉는 여자를 몰래 탐하려는 셈이 너무나 빤해서 짜증이 올라왔다. 자신은 리안 때문에 황궁과 신전을 오가느라 며칠째 장난감들과 놀지도 못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재미를 톡톡히 보는 꼴이라니.

오늘은 신전의 신관 계집 몇과 질펀하게 뒹굴어야겠다. 베르디안은 스스로 이 정도는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을 받드는 여인들은 퍽 달았다. 배덕감에 절어 바동대면서도 질질 싸는 모습은 신관은커녕 짐승 같아 더욱 마음에 들었다. 아마 저 헤일라라는 여자보다 훨씬 만족스럽겠지.

“그리고 황궁에는 열흘 뒤에 들른다. 그전에는 서신을 보내는 거로 하지.”

등 뒤에서 벼락처럼 떨어진 리안의 통보였다. 그것도 몇 주간은 베르디안을 전달책으로 더 써먹겠다는.

리안도 그냥 저 계집이랑 같이 뒤졌으면.

베르디안은 저주를 퍼부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몸 섞을 신관의 목을 조르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그는 방을 나서며 분 섞인 한숨을 흘려 냈다.

* * *

사방이 캄캄했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데 갉작거리는 어떤 생명이 발꿈치를 타고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환상이었다. 축축한 게 자꾸 목덜미며 가슴에 닿아 저를 핥아 댔다. 남의 손이 닿은 적 없는 아래를 닦고 벌려 희롱하기도 했다.

헤일라는 몸부림치다가 반짝 눈을 떴다. 깨끗한 천장만 보였다. 달뜬 숨과 땀에 젖은 잔머리의 감각만 진하게 느껴졌다.

“헤일라.”

“……리안.”

그녀는 눈을 뜨고 멍하니 저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렸다. 언니가 밀쳐서 쓰러진 뒤에, 머리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흐르고…… 막다른 길에 서 벽을 더듬는 기분으로 기억을 이어 봤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절한 게 맞는 것 같다.

“언니는?”

담담한 얼굴은 잔잔하기만 했다. 리안은 조금은 실망한 낯이었다. 이 꼴이 되고도 언니를 먼저 찾는 헤일라에 대한 원망도 섞여 있었다.

“돌봐 줄 사람을 보냈어.”

“……응.”

“사흘 동안이나 의식이 없었어, 너.”

헤일라는 그렇구나, 하는 말만 남기고 잠시 눈을 감았다. 리안은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펴 그 안에 뺨을 묻었다. 누가 봐도 연인을 염려하는 남자의 절박함이었다. 그는 손바닥에 깊이 입 맞추고 얼굴을 들었다.

“계속 레테랑 살 수 있겠어?”

리안은 더듬거리며 어렵사리 말 꺼내는 연기를 매끄럽게 해냈다. 레테가 보았다면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손뼉이라도 쳐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일라는 그런 리안을 보다가 잔잔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냥 사고였어.”

“헤일라.”

“난 언니랑 계속 살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안 변해.”

“……그래. 우선 식사부터 하자.”

그는 부러 딱딱한 음성을 꾸며 내며 작은 종을 울렸다. 신전의 시종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일순 헤일라의 눈이 동그래진다.

“부드러운 음식으로 준비해.”

익숙하게 명령하는 모습이 꼭 귀족 같았다. 그는 깔끔하게 준비되어 나온 음식을 침대 위 간이 탁자 위에 올려 손수 식혀 주었다. 걸쭉하고 고소한 죽 냄새가 금세 코끝에 닿았다. 헤일라는 빠르게 준비된 음식과 사용인을 흘끔대다가 물었다.

“여기는 어디야?”

“같이 일하는 사람 집. 형편이 나쁘지 않아서 약도 구해다 줬어.”

“혹시 귀족이야?”

방은 한눈에 봐도 넓고 아늑했다. 그가 귀족과 연이 닿아 있을 일은 없겠지만 평생 사치품과는 관련 없던 헤일라가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이 정도밖에 없었다.

“아니. 그냥 장사꾼.”

“아아…….”

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런 지인이 있다는 게 의외롭기는 했지만, 제국은 황실의 전폭적인 투자로 주변국과의 상업이 극히 발달되어 있었다. 귀족만큼 부유한 평민 상인도 없지는 않았다. 단지 그녀 주변에 없었을 뿐.

헤일라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을 멀뚱히 응시하다가 그가 내미는 음식을 억지로 입에 넣었다. 아주 오랫동안, 씹어 뭉갤 구석이 없을 때까지 머금고 있었다. 삼키는 순간 전부 게워 낼 것 같았다. 뭉그적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리안이 등을 쓸었다.

“잘 먹어야 금방 나아. 상처도 잘 아물고.”

입 주변을 닦아 주는 손과 닿는 눈길이 애틋했다.

“그래.”

언제나 이런 다정이 좋았다. 숨 쉬듯 그녀를 아끼고 돌보는 남자의 눈에는 꿀 같은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부모는 처음부터 주지 않았던, 언니는 이제 주지 않는 사랑에 발끝부터 녹는 기분이었다. 마치 꿈속에서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실제로 오래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리안과 꼭 붙어 함께했다.

그러나 허상은 잡을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그녀는 긴 꿈에서 깨어난 순간 깨달았다. 이제는 마냥 안온함에 취해 있을 수 없다.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헤일라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레테를 떠올렸다.

‘영영 돌아오지 않으려고 한 거잖아. 병들어서 추하게 죽어 가는 나한테 질려서, 지쳐서…….’

절벽 끝에선 사람도 그보다 위태롭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절박하고 고통에 찬 레테는 본 일이 없었다. 어떤 고통에도 의연하고 냉랭하던 언니였다. 한때는 고고했던…… 닮고 싶었던 나의 우상.

그런 언니가 칼을 휘두를 정도로 이성을 잃기까지 자신은 무얼 했던가.

“우욱…….”

헤일라는 저도 모르게 이불 위에 먹던 걸 모두 게워 냈다. 리안은 놀라지 않고 그녀의 등을 쓰다듬듯 두드린 뒤에 하녀를 불렀다. 손이 떨릴 정도로 동요하는 사람은 헤일라 혼자였다.

“괜찮아, 오랜만에 식사하면 이럴 수 있어.”

놀랐지. 속삭이는 리안은 여전히 다정했다. 아기처럼 포대기에 안겨 소중하게 다뤄지면 자연히 동반되는 나태한 안정감. 너무 따뜻해서 그냥 눈을 감고 수면 아래로 잠기고 싶은 기분이었다. 방금의 음울한 상념이 옅어졌다.

아아, 헤일라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해…….”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리안은 잠시 놀란 듯 손을 멈칫했다가 이내 부드러운 뺨에 입 맞췄다.

“나도 그래.”

그녀는 엷게 웃었다. 위선자인 저와 사랑을 주고받는 리안이 가여웠다. 후두둑, 또 눈물이 떨어졌다.

“왜 울어?”

리안은 드물게 당황했다. 먹은 걸 다 게워 낼 때는 침착하게 대처하던 그도 종잡을 수 없는 여자의 감정 앞에서는 더듬거렸다. 물기를 덜어 내는 손길이 서툴다.

“리안.”

“응.”

“내가 잘못 한 거야.”

그는 말이 없었다. 그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언니가 불안해하는 걸 알면서도…… 널 좋아해서, 곁에 두고 싶었어. 레테 상태가 점점 나빠진다는 걸 알았는데도 고집 피웠어.”

난 언니가 미쳐 간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헤일라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흐느꼈다. 들키고 싶지 않아 입을 틀어막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모든 걸 고백해야 할 때였다.

“널 내보내면 네가 영영 나 같은 건 잊고 떠날까 봐 무서웠어. 너랑 있는 게 너무 좋아서, 언니를 방치했어.”

언니를 위해 산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매일 레테를 가장 사랑한다는 속살거림은 거짓을 바른 달콤한 얼음과자일 뿐이었다. 신이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만큼 텅 빈 최면. 레테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언니가 그렇게 된 건 제 탓이 맞다.

죄가 끝없이 어깨 위에 얹어졌다. 어쩌면 이게 운명이라는 추일지도 모른다. 헤일라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할 말이 있었다. 이제는 끝을 내는 게 좋다는 걸 알려야 했다. 지지부진하게 미뤄 왔던 둘의 마지막을 장식해야 할 때였다.

헤일라는 절망과 결연 그 어디쯤을 부유하는 얼굴로 입을 달싹거리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리안. 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고하려는 입술 위에 다급한 손이 얹어졌다. 남자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짙었다. 그는 막힌 입을 두고 눈만 끔뻑대는 헤일라를 내려다보다가 이를 꽉 물었다. 턱에 진 굴곡이 저조한 기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쉰 뒤 손을 내렸다.

“너 지금 많이 아파.”

“……난 지금 제정신이야.”

“사흘을 내리 앓고 정신을 차린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어. 억지 부리지 마.”

정신이 나가 버린 여자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그 태도를 고수함으로써 헤일라의 반박을 모두 차단했다. 어떤 말도 허락하지 않았다.

약을 탄 쓴 물을 갖다가 억지로 마시게 하고는 눕힌 뒤 잠에 들 때까지 옆을 지켰다. 드물게 보이는 고압적인 태도였다. 그러면서도 옆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말을 걸 수 없도록 암묵적으로 눈치를 주었다.

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수백 가지의 문장을 머릿속으로 조립하다 이내 관두었다. 결국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처지였다. 그런 만큼 그녀는 시간을 들여 그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레테에게 상처를 주고 후회했던 것처럼, 리안에게도 이기적으로 굴어서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어. 언니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헤일라는 가볍게 자책하고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책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옆에 있다. 옆에. 아마도 잠을 깰 때까지 있어 주겠지. 정리해야 하는 인연임에도 리안의 존재에 안도하는 저가 한심했다.

그리고 그가 옆을 지켜 줄 날이 얼마나 남았을지 가늠해 보다가, 문득 그가 함께하는 이 순간이 너무나 감사해서 손끝이 떨렸다. 애써 티 내지 않았지만 리안의 눈에 충분히 들어올 만큼의 움직임이었다. 헤일라는 눈을 뜨지 않았고 리안도 금세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약 기운 때문에 머리가 점점 둔해지면서 노곤해진 헤일라는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색색 대는 숨소리를 내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둘만 있는 방에 탁, 하고 책 덮는 소리가 울렸다. 평소에 헤일라의 잠든 얼굴을 수 시간 동안 홀린 듯 감상하는 남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리안은 그저 제 손안에 들린 책의 표지만 빤히 응시하다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책을 두고 침상에 다가갔다. 여전히 땀에 조금 젖어 있는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는 익숙한 손짓으로 그걸 걷어 내다가 이마에서 볼로, 볼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턱 끝으로 중지를 미끄러트렸다. 그대로 목 중앙에 손끝을 올린 채 몇 초간 미동이 없다가 손 전체를 써서 얇은 목을 쥐었다. 한 손에 목덜미까지 잡힐 정도로 가녀렸다.

힘을 조금만 주면 틀림없이 바스러져 버릴 생명.

리안은 어느 정도의 힘으로 그녀의 죽음을 손에 넣을 수 있는지 가늠하다가 움칠 떨고는 손을 떼어 냈다. 저가 생각해도 위험한 순간이었다.

“너는 왜 항상 내가 생각지 못한 일을 벌이지?”

아래에 꿇어앉고 조신하게 손을 모아 침상 위에 올린 남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실수할 뻔했잖아.”

성가신 아이를 꾸짖는 말투였다. 목을 쥐었던 손을 반복적으로 쥐었다 펴는 움직임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년 때문에……”

감히, 그 버러지를 선택하겠다고…… 그는 헤일라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면서 음울함을 묻히고 미간을 모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 팔을 둘러 온기를 나누어 주었으면서 지금은 단호하게 끊어 내려는 게 여간 괘씸한 게 아니었다.

리안은 손을 뻗어 헤일라의 볼을 쓰다듬고 가만히 대었다. 이런 순간이 익숙한 듯, 몽중을 헤매는 데도 여자는 볼을 묻고 남자의 체취에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고롱대는 소리가 유순하게 흘러나왔다.

“으응…….”

“이렇게 예쁘게만 굴어야지.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그는 큰 손의 온기에 부빗거리는 얼굴에서 퍽 매정하게 손을 빼내고 약하게 코를 튕겼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공격당한 코가 옅게 찡그려지는 반응을 진득하게 살폈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리안은 그대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녀를 상대로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할 필요는 없었다.

* * *

“그 아가씨께는 언제 걸음 하실 예정이세요?”

여자치고는 저음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리안은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공연장의 관람석에 앉아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개인실처럼 마련된 관람석의 긴 소파에 앉아 있는 건 그 혼자였다.

“낯선 곳에서 무서우실 걸 알면서…… 정말 악취미는 여전하세요.”

웃음 섞인 타박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리안은 무대를 내려다보며 눈꼬리를 매끄럽게 휘었다.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

끄웨에에엑! 그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기괴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무대 중앙에 묶여 해부당하고 있는 남자는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몰골이었다. 재갈을 물려 놓은 입의 살점들도 이미 너덜너덜해져 치아가 그대로 내보였다.

그럼에도 관람객들은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거나 저들끼리 담소를 나누었다. 리안처럼 높은 층에 개인 공간을 배정받은 이들은 대리석 난간에 몸을 기울이고, 금테 두른 작은 망원경으로 잔혹함을 낱낱이 살피려고 했다. 게다가 몇몇은 낄낄대며 얼른 성기의 표피를 발라내라고 아우성이었다.

리안 또한 고통스러운 비명에는 무감한, 권태로운 낯이었다.

“장사하는 사람한테 취미랄 게 있나요. 저는 그저 쓰레기를 팔아 돈을 버는 것뿐이랍니다.”

“돈에 환장하는 영감이 들으면 좋아하겠어.”

루드비히 대신관을 일컫는 말이었다. 순간 미아르의 볼이 움칠 튀어 올랐으나 곧바로 태연한 얼굴을 가장해 냈다. 후후. 여자는 작게 웃으며 리안의 앞으로 나아가 난간에 손을 짚었다. 아래가 아주 잘 보였다. 상체가 구부려지며 자연히 굴국이 진 엉덩이 아래로 붉은 원단의 치맛단이 내려앉아 있었다. 본래 신관이라면 고를 수 없는 색이다.

하기야, 신전에서 금하는 살육을 이런 식으로 소비하는 여자였다. 일반적인 신관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여기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았다.

귀족 출신의 신관 미아르. 그녀는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뛰어들기로 유명했다. 재물을 끌어모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 부도덕하거나 신의 교리에 어긋나는 일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장서서 하는 데 도가 텄다. 이건 신전에 연이 닿아 있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공공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왜 사흘이나 아가씨를 혼자 두시는지 말해 주지 않을 셈인가요?”

미아르가 야살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 뒤로 다시 기괴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둘은 그 소리를 배경 삼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일 아니야.”

“어머, 정말 그럴듯한 변명이네요.”

“…….”

리안은 한번 물면 결코 놓지 않는 미아르의 개 같은 성격을 아주 잘 알았다. 대신관마저도 이 성격에 학을 떼 미아르가 밀어붙이는 일이면 그저 따르는 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귀찮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죽일 뻔했어.”

“……며칠이나 간호했던 아가씨를요?”

“응.”

“와…….”

정말 화끈하시네요! 미아르는 속에 말을 삼키며 살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슬쩍 그의 옆에 앉아 대화를 이어 갔다. 왜냐고 묻는 속삭임이 꽤 비장했다.

“헤어지자고 했거든.”

“……알 만해요. 그런데 확실히 공자님답지는 않은데요. 꽤 아끼셨는데 바로 죽일 생각을…… 원래 그렇게 성급한 편은 아니었잖아요?”

리안은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미아르가 저에 대해 다 안다는 듯 떠드는 게 같잖으면서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들이나 하는 짓을 저지를 뻔했다. 순간의 감정에 못 이겨서 일을 망치는 건 머저리들이나 하는 실수였다.

“그렇지.”

그녀가 저를 버리려고 하는 게 자신을 미치게 한다면, 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게 먼저였다. 안 그래도 리안은 꽤 오래전부터 헤일라의 곁에서 레테를 치우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조력자를 만들고, 많은 상황을 꾸며 내고, 차근차근 일을 진행해 왔다.

그리고 예정대로 몇 달만 참으면 레테라는 방해꾼은 사라진다. 안 그래도 리안은 충동적으로 일을 벌일 뻔한 것에 관해 후회하는 중이었다.

“원인을 제거하면 곁을 떠날 리가 없는 착한 아이인데 내가 성급했어.”

앞에 놓인 따뜻한 차를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신 남자는 한층 나긋해진 얼굴이었다. 리안을 꽤 오랜 시간 봐 온 미아르는 그가 전에 없이 관대해졌다고 평하며 난간에 턱을 괴었다.

확실히, 헤일라라는 여자는 어딘가 삐그덕대는 리안을 조금 바꾸어 놓았다.

“뭐어, 그래도 팔다리 중에 하나는 자르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우리들이 배운 대로. 리안은 귀족의 됨됨이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배운 자였다. 악랄하고 교활하게 원하는 것을 취하는 게 그들의 미덕이었다.

게다가 타론 제국의 귀족들은 천것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귀족의 피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명이며, 그걸 받지 못한 평민과 노예는 가축처럼 여겼다. 귀족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식들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키며 존재를 구분 짓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니 미아르가 헤일라의 팔다리를 잘라 그녀를 취하라고 종용하는 태도는 그들에게 있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애 언니만 없어지면 되는 일인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

“흐응.”

미아르는 리안 앞에서 잔뜩 몸을 사리면서도 궁금증이 이는 순간에는 참지 못하고 폭탄을 던지곤 했다. 그게 지금 같은 때였다.

“그래도 생각대로 안 되면요?”

순간 둘 사이에 정적이 일었다. 기괴한 신음만 부유하는 침묵이었다. 리안은 아주 잠시 동안 제 찻잔 안에 이는 균열을 관찰했다. 그 안에 비치는 눈동자는 텅 빈 흑색이었다.

헤일라의 옆에 있는 그 기생충 같은 계집이 떨어지지 않고, 헤일라가 여전히 언니를 포기하지 못하고, 리안을 버린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지껄이는 그런 상황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역시 다리 한쪽 정도는 잘라 두는 게 편하시겠죠?”

윗입술을 혀로 핥은 미아르가 리안을 충동질했다. 개미집 위에 물을 부어 두고 반응을 기다리는 잔인한 아이 같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독할 정도로 교활한 구석이 있었던 여자다웠다.

“그럴 일은 없어.”

그는 단호하고 냉랭하게 일갈했다. 헤일라의 몸은 손끝의 거스러미라 해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럼 놓아주시게요?”

“설마. 묶어 두는 일 정도는 하겠지.”

조그마한 헤일라를 안락한 성에 가둬 두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계속 못된 말만 하면 저도 어쩔 수 없겠지. 울면 달래 주고 매 순간 사랑을 속삭이면서 얼러 나중에는 스스로 그에게 자신의 목줄을 쥐여 주도록 유도하면 된다.

배를 몇 번이고 부르게 해서 인질이 될 아이들도 여럿 두어야지. 헤일라는 피붙이에 약하니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을 테다. 그는 눈앞에 그려지는 황홀한 미래에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비리게 웃었다. 묘한 음흉함을 눈치챈 미아르가 체통을 잊고 킥킥댔다.

“역시 휴리트 집안 인간들은 전부 오싹오싹해.”

아드님이 아버지에게 미치진 못하는 것 같지만요. 미아르는 낄낄거리면서 제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녀는 공작이 공작 부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아는 몇 안 되는 이였다. 아무래도 리안이 제 부친의 ‘그런’ 광기까지 빼다 박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우스운 모양이었다.

미아르의 말에 리안의 눈매가 움푹 파였다. 아비와 저를 비교하는 데 불쾌감이 인 게 분명했다. 치고 빠지기에 훌륭한 재능을 타고난 그녀는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화제를 전환했다.

“부탁하신 물건, 여기 있어요.”

곱게 접어 무언가를 싸 둔 흰 종이였다. 종이를 열어 확인해 보니 붉은색과 푸른색 조각 몇 개가 가지런히 싸매져 있었다. 헤일라와 자신의 사이를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 그는 습관적으로 주머니 안에 있던 그녀의 손수건을 꺼내 주물럭거렸다. 거친 천 조각과 엄지가 마찰해 까끌까끌한 감촉이 스몄다.

“이제 아가씨께 가 보실 생각이 좀 드시는지?”

태울 애는 다 태우지 않았나. 미아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리안은 지금 헤일라를 벌세우는 중이었다. 아는 사람이라고 없는 신전에, 그곳이 신전인지도 모르는 고아 계집이 덩그러니 앉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아파서 움직일 수 없으니 여종들의 시중을 받아야 하는데, 신전의 종들은 평민의 몰골로 신전에 옮겨졌던 헤일라를 기억하고 멸시할 게 틀림없었다. 그치고는 꽤 귀여운 심술이었으나 상당히 소모적이고 무익해 보였다.

“아직.”

그러나 리안은 유치한 행각을 한동안 이어갈 심산 같다. 고립시켜 놓고 기어이 그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뜻이다.

역시나 악취미다.

미아르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뒤를 돌았다. 어쨌든 물건을 주고 상응하는 대가를 약속받았으니 그녀로서는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돈 받았으면 됐지. 귀족 출신 신관치고는 상당히 담백한 셈법이었다. 그녀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에게 조용히 일렀다.

“신전으로.”

“예.”

미아르는 문이 닫힌 이후로, 정말 리안에게는 한 톨의 관심도 갖지 않았다. 이다음 돈 될 일 찾기도 바빴다.

* * *

“아직도 못 찾았나?”

세니르 신전 내에서 가장 화려한 방이었다. 공연장에서 빠져나와 곧바로 신전으로 도착한 미아르는 자신의 방 콘솔 앞에 앉아 짜증스레 물었다.

“수소문하고 있지만 차도가 없습니다.”

“하.”

그녀는 자신의 붉은 머리를 한 묶음으로 틀어 올리는 종에게 나가라고 눈짓했다. 단장을 돕던 종이 나가자마자 그녀의 심복 하나가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황궁과 귀족들에게는 철저히 숨기고 있습니다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그건 나도 알아!”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르는 통에 바짝 얼어 버린 심복이 뒤로 물러섰다. 미아르는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서랍을 열어 성심성의껏 귀걸이를 골랐다. 가장 좋아하는 붉은색을 짚으려다가, 신관복이 흰색임을 감안해 사파이어가 박힌 깔끔한 귀걸이를 골랐다. 그걸 손수 귀에 끼우는 여자는 마치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얼마나 사리 분별이 안 되는 새끼길래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건지.”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시정잡배처럼 걸걸했지만. 그녀는 완벽하게 치장한 제 모습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일어섰다. 퍽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은 화가 누그러진 낯이었다.

“일단 이번에 나온 예언들 전부 수집해서 황궁에 전달해.”

“……예.”

그래 봐야 반쪽짜리일 걸 알면서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마땅히 나타나야 할 신관 하나가 빈다는 사실을 알릴 수는 없으니까.

“저, 그런데 정말 끝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않으면?”

말꼬리를 잡아 따라 하는 입매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끝까지 황실에 숨길 수는 없지 않…….”

“끝까지 숨겨야지.”

“…….”

“그러지 못하면 사실을 못 숨긴 네놈들 목부터 날아가는 거고.”

미아르의 얼굴에서 표정이랄 게 싹 가셨다. 어느 때보다 진심 어린 태도였다.

이건 신전의 입지가 걸린 일이니까.

예로부터 신전은 황궁과 귀족 사이에서 꽤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예언의 힘을 갖고 있지만 의술에 관한 독점권만 쥐고 있을 뿐, 절대 권력을 탐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아니, 사실은 그럴 수 없다는 표현이 옳았다.

신의 가호는 변덕스럽기 짝이 없으니까.

물론 몇 세기에 한 번은 정말 강력한 힘을 가진 예언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구체적이고 선명한 꿈을 꾸며, 강렬하게 염원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상에 관한 미래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런 신관만 나타난다면야, 신전은 그 어떤 황제가 나타난다 한들 겁먹지 않았을 테다.

그러나 대부분은 제국의 대소사에 관한 예언만을 받으며 그조차도 모든 신관이 받은 것을 합쳐야 완성되었다. 고르지 않은 예언의 능력. 그렇기 때문에 신전은 언제나 신중해야 했다. 그들이 이전부터 의술을 독점적으로 관리해 온 것도, 예언 이외의 다른 패를 쥐기 위해서였다. 예언의 힘이 약해졌을 때를 대비해야만 하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약한’ 정도가 아니었다.

“하…… 루드비히, 일생에 도움 안 되는 새끼…….”

“……미아르님.”

미아르의 입에서 대신관에 관한 불경한 욕설이 나오자 심복이 슬슬 눈치를 봤다. 그러나 도끼눈을 한 눈매에 입을 꾹 다물었다.

예언의 힘을 가진 신관의 수는 열일곱. 한 명이 죽으면 제국의 아이 중 하나에게 예언의 힘이 발현되어 신전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 열일곱 명보다 많은 적도, 적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 일 년 전 대신관이 죽은 다음 날 새로운 아이가 신전에 들어오는 게 순리였다.

……적어도 일주일 안에는 나타날 것이라 모두 장담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신전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신관들 또한 새로운 신관에 관한 예언을 내려받지 못한 채 일 년을 흘려보냈다. 결국 신전은 서른 날 안으로 밝히려 했던 대신관의 죽음을 은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더 절망적인 사실은, 지금 신전에 있는 열여섯 신관의 예언 능력이 점점 형편없어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아르, 그녀 자신까지도.

“하…… 미치겠네.”

그녀는 제 손가락에 끼워진 몇 개의 반지들을 쓰다듬으며 절망을 담아 읊조렸다. 아무래도 나타나지 않는 그 열일곱 번째 신관이 누리는 가호가 남달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예언의 능력을 흡수하고 있는 듯했다.

아아, 신전의 권력이 쇠하면 지금처럼 돈을 쓸어 모으기도 힘들어질 테고, 또, 이런 보석을 잔뜩 선물 받을 기회도 점점 줄어들 텐데.

미아르는 자신이 환장하는 돈 냄새가 멀어지는 게 끔찍했다. 보석도, 옷도, 저를 보고 선망하는 사람들의 눈빛도 여전하기를 바랐다. 신을 모시는 신관이라기보다는 탐욕스러운 상인 같다지만, 상관없었다.

돈만 있으면 신앙심도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권력도, 신권도 결국은 다 돈으로 휘두를 수 있다면 돈이야말로 신이 아닌가? 미아르는 점점 멀어지는 제 신을 다시 찾아올 방법에 관해 생각하며 방금 묶은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녀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돈 냄새 나는 일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거라고 되뇌면서.

방을 나온 미아르는 거침없이 신전의 흰 대리석 위를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따르던 종이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고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잠시 혀를 입천장에 붙였다 떼 소리내기를 반복하며 고심하듯 이마를 찌푸렸다. 복잡한 경우의 수를 가늠할 때 자주 드러내는 버릇이었다.

“……그 여자.”

“예?”

“헤일라라는 여자 말이야. 어디 있지?”

번득이는 눈을 마주친 심복이 어깨를 움칠 떤 뒤, 헤일라가 머무는 방이 어딘지를 더듬더듬 답했다.

“생각해 보니 그 여자, 꿰어 두면 돈줄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혼자 중얼거리는 미아르를 힐긋거리는 심복의 얼굴에 경악에 가까운 두려움이 퍼졌다. 신전에서 권력이라면 대신관 다음으로 누리는 주인님이지만 언제나 문제가 될 만한 일을 기획하는 여자가 아닌가. 그럼에도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그녀의 뒤만 따랐다.

“아, 넌 지금부터 내가 말한 걸 한 시간 내로 전부 준비해서 그 애 방으로 들여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서신을 리안 휴리트에게 전달 해.”

“……신전을 나간 뒤에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황궁에서 온 서신이라 할지라도 신전에 들이기 전에는 검수를 거쳤다. 미아르는 리안에게 온 황제의 서신을 혹시 몰라 통과 보류로 처리했다. 신전에 객을 두고 리안이 황궁으로 가 버리면 혹 귀찮은 뒤치다꺼리를 맡게 될까 봐 통과를 보류해 두었던 것인데,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탐스러운 적발을 한 여인의 입꼬리가 우아하게 올라갔다. 미아르의 귀에 지폐 세는 경쾌한 소리가 울리는 환청이 들렸다. 소름 끼치도록 황홀하다.

“준비를 단단히 해.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테니.”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신관을 기다리는 대신 장기적으로 돈이 될 일을 벌여야 했다.

미아르, 그녀 자신만의 영달을 위해서.

* * *

리안 휴리트가 황성으로 떠난 날 오후였다.

“리안은 언제쯤 돌아오나요?”

문을 열자마자 가녀린 미성이 흘러나왔다. 미아르는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목소리의 주인이 리안의 여자임을 눈치챘다.

정갈한 몸짓으로 테이블 위에 음식을 차리던 여종은 잠시 시선을 주고 하던 일을 마저 마쳤다. 그리고 무감한 표정으로 그릇을 모두 옮긴 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일을 끝마치면 돌아온다 하셨습니다. 이외에는 전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아마 사흘째 저 변명만 내리 했겠지. 미아르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앵무새처럼 같은 대답만 반복하면서 헤일라가 안심할 수 있는 그 어떤 단어도 흘리지 않았을 모습이 훤했다.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낮지만 쾌활한 목소리가 끼어들자 여종이 흠칫하고 뒤로 돌아 고개를 조아렸다. 조금 무례했던 언행이 책잡히지는 않을까 염려되는지 긴장한 모습이다.

확실히 헤일라를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미아르는 익숙하게 눈짓으로 여종을 물리고 헤일라의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었다. 고고하면서도 당당한 태도를 두른 채였다.

“미아르라고 해요.”

긴 앞머리 사이사이로 보이는 동그란 눈이 깜빡거렸다. 누구인지 가늠하느라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양이 퍽 귀염성 있다. 헤일라는 갑자기 등장한 여자를 우물쭈물 관찰했다.

“리안이랑 아는 사이세요?”

살랑거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긴 미아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진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 올망졸망하니 놀리는 맛이 있을 것 같았다. 저 구질구질한 머리도 조금 가지고 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본인이 머무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여자를 못 살게 굴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다.

“그분과 조금 인연이 있어서요. 옆에 못 있는 동안 아가씨를 돌봐 달라고 하더라고요. 일이 생각보다 길어진다고.”

당연히 거짓말이다. 미아르는 여종이 가져온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다시 생긋 웃었다. 그래도 리안이 곧 돌아온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쯤 황제의 성화에 못 이겨 황궁에 가고 있을 테고, 오늘 밤이면 미아르가 헤일라를 찾아갔다는 소식을 듣겠지. 그러니 늦어도 이틀 뒤면 신전에 도착할 게 분명했다.

“오늘은 저와 조금 어울려 주세요. 그러다 보면 시간도 금방 가겠죠.”

조금 화는 내겠지만 미아르는 결과적으로 리안에게도 이로운 일을 할 셈이었다. 그녀는 둘의 사랑을 조금 돕는 동시에 헤일라와 돈독한 친분을 쌓을 예정이었다. 엉뚱해 보일지 몰라도, 이 일을 꾸민 데에는 나름의 논리적인 이유가 존재했다.

지금 이 기세라면 헤일라가 차기 공작 부인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공자가 하는 짓을 보니 평민 계집을 잠깐 끼고 놀려는 심산은 아닌 게 분명하고, 리안은 평민의 신분을 세탁해 공작 부인으로 만드는 미친 짓을 기어이 이루어 낼 위인이다.

고로, 헤일라와 친해지면 이후에 사업을 벌일 때도 도움이 될 테다. 언제 불안정해질지 모를 신전의 입지를 위해서라도-제 돈다발을 위해서라도-헤일라와의 연을 만들어 두고 리안에게 빚을 지워 놓는 건 필요한 일이었다.

머릿속 계산기를 다시 두드린 미아르는 멀뚱멀뚱 저를 보는 헤일라를 향해 박수를 짝! 하고 쳤다.

“제가 아주 야심 차게 준비했으니 헤일라 님 마음에도 분명 쏙 들 거예요!”

미아르는 헤일라가 관심을 두지 않는 식사를 치워 버리라고 명한 뒤 그녀를 질질 끌고 긴 소파에 앉았다. 그 앞은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고 뒤에 큰 액자 하나만 걸려있었다.

“저…… 리안이랑 무슨…….”

“자! 얼른 들여와!”

정확히 리안과 무슨 관계인지를 묻는 헤일라의 말은 허공으로 가볍게 날아가 버렸다. 제 할 말이 제일 중요한 미아르식의 화법이었다.

* * *

그녀는 대답 대신 텅 빈 공간에 무지막지하게 물건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어……?”

가짓수가 어마어마한 고급 의류들이 쏟아져 나왔다. 귀족들의 연회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한 드레스부터, 집에서 가볍게 걸치는 네글리제까지 수백 가지 옷이 순식간에 진열됐다. 거기에 어울리는 신발, 장갑, 장신구까지 줄줄이 간이 탁자 위에 얹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헤일라도 어렴풋이나마 저것들의 가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어…… 저기…….”

“어떠세요?”

이걸 보고 눈이 뒤집히지 않을 여인은 없다. 미아르는 의기양양한 표정이 돼서 헤일라의 어깨를 감쌌다. 미아르가 준비한 보석들은 남녀 불문하고 귀족이라면 눈독을 들일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정말 끝내주죠?”

리안은 헤일라의 옆에 있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평민인 척을 했다고 했다. 멍청하게도! 반짝이는 걸 앞에 들이밀고 살랑살랑 유혹하지는 못할망정 푼돈이나 가져다주며 옆을 지켰다는 순진함이 믿기지 않았다. 세상은 돈이고 사랑도 돈이고 결국 마음도 돈인데!

유혹이라고는 손톱의 때만큼도 모르는 남자를 위해, 미아르는 수고를 좀 들였다. 그녀는 확실한 방법으로 헤일라를 꿰어 낸 뒤 리안의 앞에 곱게 포장해 내밀 작정이었다. 평생을 비루하게 살아온 여자인 만큼 이 방법은 아주 잘 먹힐 터였다.

“……이걸 미아르 님, 아니, 음…….”

“언니라고 부르세요!”

미아르는 헤일라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붙이며 부담스러운 호칭을 종용했다. 귀족들 사이에서야 흔치 않은 호칭이었지만 아랫것들이 친밀함을 드러내기 위해 언니니 동생이니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많은 수를 써서 미래의 공작 부인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단장해 주면 빛을 발할 어여쁜 외모도 마음에 들고. 헤일라는 입술을 빠끔거리다가 네에, 하고 말을 이었다.

“그럼 미아르 언니께서 이걸 다 준비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럼요. 전 돈이 꽤 많거든요. 물론 리안 님도요! 그분은 아주 징그러울 정도로 많죠.”

미아르는 정말로 부럽다는 말을 흘리며 둘 앞에 늘어져 있는 보석 중 하나를 골라 내밀었다. 금빛 머리 색과 아주 잘 어울리는 섬세한 목걸이였다. 하지만 헤일라는 멍하니 그걸 보기만 하다가 엉뚱한 질문만 늘어놓았다.

“리안이 부자라고요?”

“네에, 그분은 돈을 갈아 물을 만들어 목욕도 할 수 있을 만큼의 재력을 갖고 계신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닐까요?”

무척이나 감동한 얼굴을 해야 할 여자는 딱딱한 표정으로 미아르와 마주 봤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니 가관이다.

“동명이인인 것 같아요. 리안은…… 리안은 그렇게 부자가 아녜요. 제가 알아요.”

헤일라는 말투는 고집스럽기까지 했다. 눈빛은 결연하다. 자신이 가진 지식에 대해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는 자세가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순간 미아르의 등골에 땀 한 줄기가 내려앉았다.

실수했나?

미아르는 리안이 정체를 숨겼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거지에 가까운 비렁뱅이인 척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함께 살붙이고 살면서 어느 정도 돈 냄새를 풍기기는 했겠지,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돈이 아주 많은 줄은 모르고 아쉬운 말을 하지는 않았나 보다, 하지만 내가 내미는 걸 며칠 누리다 보면 마음이 달라지겠지, 했는데.

이 여자는 부자 남자를 별로 안 좋아하나 봐. 미아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 모양으로 중얼댔다.

리안에게 불리한 사실을 자신이 홀라당 밝혀 버린 것 같다. 게다가 이 여자는 보석이나 아름다운 옷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눈빛이 무감했다.

이럴 수가 있나? 내내 탐욕스러운 귀족과 그 귀족을 모시는 영악한 시종들과 실리를 위해 사람도 살리고 죽이는 신관들 사이에서 자라고 배운 미아르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무엇으로 잘못을 만회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돈이 통하지 않는 평민이라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평소에 돈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저는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서…… 리안이 그렇게 엄청난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그 애가 돌아오면…… 이야기를 해 볼게요.”

“제가 괜한 말을 했어요. 죄송해요…….”

미아르는 최선을 다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적당히 넘어가긴 했는데, 헤일라는 어딘가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

젠장. 신관의 지위를 이용해 적당히 뭉개 오기는 했지만 미아르도 리안은 무서웠다. 그는 정말 수틀리면 신관의 목도 딸 수 있었다. 그녀는 제 목숨보다 돈이 귀했지만 그래도 그런 개죽음을 바라지는 않았다.

“저, 혹시 화나셨어요?”

헤일라는 말이 없었다. 비록 천한 계집이었지만 미아르는 그녀의 기분을 알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보석도, 귀한 옷감도 아니면 뭐로 환심을 살 수 있을까.

“아뇨. 화 안 났어요. ……그럼 언니께선 리안과 같이 일을 하시는 분인가요?”

“아, 네. 그렇죠.”

“그렇구나. 그냥 제가 리안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조금 섭섭하고, 아니, 사실 섭섭할 이유도 없죠.”

헤일라는 횡설수설하면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미아르는 그제야 여자의 볼이 조금 붉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왜? 만약 미아르 본인이었다면 뛸 듯이 기뻐 상기되었을 텐데 헤일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냥 언니께서 생각보다 리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놀랍기도 하고…….”

“…….”

“리안은 저한테 일 얘기를 잘 안 해요. 가족 이야기도…… 생각해 보면 본인에 관해서도 별 이야기를 못 들었어요. 이런 좋은 방을 선 듯 내어줄 부유한 동료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요. 아마 저한테는 설명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겠죠.”

“…….”

“돈 얘기도…… 아무래도 남인 저한테 다 털어놓기는 부담스러웠나 봐요. 세상이 워낙 험해서 사기를 치려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도 저를 경계했을 수 있고…… 언니는 아무래도 함께 일하는 분이라 리안이 더 믿는 것 같은데 그게 조금…….”

아, 그렇군. 돈 많은 남자가 싫은 게 아니라…….

미아르는 그제야 헤일라의 감정이 어떤 종류인지 깨달았다. 뿌연 안개가 낀 망망대해에서 등대를 찾은 기분이었다.

“혹시, 질투하세요?”

쿡, 하는 웃음이 경쾌하다. 붉은 기가 헤일라의 목까지 번졌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다가 포기했다.

“걱정 마세요. 전 그냥 동업자거든요. 냉정하게 말해서, 돈이 안 되면 얼굴도 볼 일이 없는 사이죠. 그분도 똑같이 생각할걸요.”

“…….”

“그리고 리안 님이 이렇게나 헤일라 님을 아끼시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두 분은 연인이 아닌가요?”

미아르가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면서 나긋한 숨을 쉬었다. 꼭 유혹하는 여신의 모습 같았다. 헤일라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저흰 그냥 친구예요.”

아, 이것도 의외였다. 그다지 깊은 관계는 아닌 것 같다는 보고가 진짜임을 확인하니 더 어이가 없어졌다. 그렇게 광적으로 집착하면서 몸 한 번 안 섞은 건가? 미아르는 리안이 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을 생각하면 국가적 손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제가 보기엔 아가씨도 리안을 꽤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질투도 하시고. 이어진 말에 헤일라의 볼이 조금 더 붉어졌다.

“좋아하는 건 맞는데…… 누구를 연인으로 두기엔 제가 여유가 없거든요. 언니가 있어서요. 언니가 제일 먼저예요. 리안을 좋아하지만 그는 제 첫 번째가 될 수는 없어요.”

순진한 아가씨는 조금 찔러 보자 제 속마음을 술술 불었다. 이제껏 이런 이야기를 할 상대가 없어서 그런지 의심 없이 털어놓는 모습이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아아, 언니를 정말 좋아하나 봐요?”

어찌 들으면 비아냥에 가까웠지만 헤일라는 그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미아르는 슬슬 헤일라를 자극해 보기로 했다.

“뭐, 남녀 사이의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거니까요. 알다가도 모르고 모르다가도 모르고.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리안 님이 언젠가 다른 여자랑 혼인해서 애를 낳고,”

“…….”

“몸을 섞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뭐 그런 것들요.”

그를 흠모하는 여인이 꽤 많답니다. 헤일라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상냥했다. 그만큼 잔인하기도 했다. 바짝 닿는 저음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헤일라는 그다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미래를 그려 보게 되었다. 미아르의 말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리안은 아주 미려했고, 능력도 뛰어났으며 마음을 열고 나면 마냥 상냥했다. 지금이야 그 다정이 저를 향하지만 언젠가 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애정을 퍼붓겠지.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면서 웃어 주고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면서…… 입을 맞추고…….

“……네.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죠.”

헤일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인지 모르게 분이 차는 저가 뻔뻔하다고 느껴졌다. 그를 거절한 건 자신이면서 리안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미래가 이토록 끔찍하게 느껴지다니. 헤일라는 불현듯 깨달은 자신의 이중성에 몸서리가 쳐졌다.

“맞아요. 두 분이 헤어지면 정말 그렇게 될 거예요. 리안 님이 아가씨를 영영 잊어버리게 될 지도요.”

흡, 숨을 삼키는 모습이 퍽 애처로웠다. 미아르는 미간을 좁히며 혀를 차는 것으로 안타까움을 꾸며 냈다. 그녀는 헤일라의 손을 제 손바닥 위에 올리고 손등을 쓸어 주었다.

“하지만…… 제 첫 여자를 잊는 남자는 없답니다.”

첫 여자, 라는 말을 따라 읊조리는 말간 얼굴이 너무 순수해서, 미아르는 옅은 죄책감이 기어 올라옴을 느꼈다. 그러나 멈출 필요는 없었다.

“리안 님은 몇 년 전부터 성년이 된 지금까지 아가씨밖에 몰랐잖아요. 한 번도 여자를 안은 적이 없으시죠. 아가씨도 그렇죠?”

“……네.”

리안이 공작저에 살 때 누구보다 방탕하게 굴러먹었음을 미아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교묘하게 사실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는 뱀처럼 은근하게 속삭였다.

“만약 저라면, 헤어지더라도 잊히지 않도록…….”

말하던 도중 문이 벌컥 열렸다. 미아르가 있는 방의 문을 이토록 무례하게 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불길한 예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흐리멍덩한 헤일라의 음성이 울렸다.

“……리안.”

황궁에 있어야 할 리안 휴리트가 귀신처럼 서 있었다.

* * *

“괜찮으십니까.”

방에서 쫓겨난 뒤 신전의 복도를 걷던 미아르는 질문을 듣고도 대답이 없었다. 심복은 방금부터 혼이 나간 듯한 미아르가 걱정되는지 재차 물었다.

그 누구도 리안이 황궁으로 가던 마차를 돌려 신전으로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마부의 말에 따르면, 그는 헤일라의 방에 미아르가 들어섰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당장 신전으로 마차를 돌리라고 명했다고 한다. 게다가 황궁에서 나온 시종이 염려를 표하자 그 자리에서 목을 썰었다. 옆에 있던 베르디안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든, 명령을 철회하지 않았다고.

미아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쫓아낸 게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미친 남자였다.

“당분간 호위를 조금 늘리시고 신전 밖으로는 나가지 않으시는 게…….”

“흐음.”

미아르는 옅은 신음소리만 내고 제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환복도 하지 않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주변인들이 무어라 걱정을 쏟아 내건 말건, 미아르의 머릿속은 다른 것으로 꽉 차 있었다. 그녀는 긴 머리를 흰 침구 위에 한껏 늘어트리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가 제일 먼저예요. 리안을 좋아하지만…… 그는 제 첫 번째가 될 수는 없어요.’

헤일라가 애처로운 얼굴로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미아르는 몸을 빙글 돌려 손으로 턱을 괴었다.

“착한 애는 아니었네.”

거짓말쟁이였어. 그녀는 재미있는 유희 거리를 찾은 아이처럼 다시 낄낄거렸다.

미아르는 리안이 들이닥치는 순간, 그의 표정이 아니라 헤일라의 얼굴만 쳐다봤다.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강렬했다.

아름다운 보석에도, 빛이 흐르는 비단에도, 귀한 장신구들에도 눈길을 주지 않던 여자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질반질한 눈으로 그를 봤다.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반짝대는 얼굴이었다.

미아르는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사막의 모래도 보았고, 세상에서 가장 투명하게 빛난다는 보석도 보았고, 신이 내렸다는 보물도 본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빛도 리안을 보는 헤일라의 눈빛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 얼굴로, 그런 표정으로 남자를 보면서 그가 두 번째라고 말하는 건 반칙이지.

미아르는 헤일라가 자신을 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리안도, 그를 버릴 준비를 한다는 헤일라도 영 멍청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둘은 서로를 결코 버릴 수 없을 테다. 헤일라가 누군가를 버린다면, 그건 리안이 아니라 그녀의 언니 쪽이 될 것이다. 그녀는 씩 웃으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 * *

헤일라는 기본적으로 순종적이다. 그건 그녀가 생존하기 위해 터득한 일종의 무기였다.

그녀가 어릴 적, 폭력적이고 탐욕스러운 부모는 복종하지 않으면 학대에 가까운 폭력을 휘둘렀다. 뺨을 맞는 언니를 보고 두려움에 떨면서 무릎을 꿇는 건 일상이었다. 울면서 두 손을 싹싹 빌면 부모는 그제야 언니를 때리던 손을 내렸다.

식사 시간에 상한 빵 하나에도 투정하지 않고 방긋방긋 웃으면 그들은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레테는 그런 헤일라의 태도를 경멸하며 다그쳤지만 맞는 게 싫었던 아이는 언니의 말을 무시했다.

맞는 게 싫고, 굶는 게 싫으면 순종하는 게 맞았다. 어린 헤일라는 오히려 언니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언니가 맞을 때 울면서 비는 건 멈추지 않았다. 레테가 아픈 건 자신이 아픈 것만큼 싫었다.

어쨌든 그녀는 순종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부모가 레테 대신 헤일라를 선택한 이유에는 헤일라의 순종적인 성격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고, 레테가 그 부모를 죽이는 순간에도 언니에게 순종했으며, 이후에는 평생을 언니에게 헌신하겠다 맹세했다.

결론적으로 헤일라는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시키는 대로 무언가를 하는 게 너무 익숙하고,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가 너무 당연해서 화조차 내 본 적이 없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는 삶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헤일라가 직접 선택한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다리 벌려.”

하느작대며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헤일라는 서툰 몸짓으로 그의 명령에 따랐다. 온몸이 벌게진 채 엉거주춤 움직이는 여자가 가여울 법도 한데, 리안은 표정 없는 낯으로 차가운 명령만 읊조렸다.

“부끄러워?”

그는 눈물이 맺힌 눈을 보고 수치심을 자극하려는 의도로 물었다. 정작 모욕을 받은 사람처럼 이를 악물고 있는 것도 그였지만.

“한 번 먹고 떨어지라고 한 건 너야.”

한기가 스민 말투였다. 리안은 미아르가 나간 직후, 헤일라가 저에게 했던 말을 토시 하나 빼먹지 않고 기억했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 없어.”

훌쩍거리면서도 막힘없이 제 할 말을 하는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억울한 모양이다. 그러나 리안은 우악스럽게 밀어붙이는 걸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날 좋아한다고 했어. 그래서 몸은 섞고 싶은데, 여길 나가면 헤어지자고 했잖아. 틀려?”

딱딱했던 음성에 감정이 섞이고 있었다. 용암의 기포가 폭, 폭 터지는 소리가 헤일라의 귓가에 환상처럼 울렸다.

“이런 눈으로.”

순식간에 잡힌 볼이 그의 한 손안에 모두 들어왔다. 꽉 잡힌 탓에 입이 조금 벌어졌음에도 리안은 금안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헤일라는 그의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서러워져서 입 안쪽의 살을 깨물었다.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 남자가 미웠고 또 그런 식으로밖에 말하지 못한 자신의 멍청함이 싫었다.

그래도 제 말을 물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헤일라는 리안의 첫 여자가 되고 싶었다. 욕심이었지만 그랬다. 영영 헤어질 날이 머지않았는데, 이대로 그와 헤어지면 금세 잊힐 게 분명했다. 언니 말대로 영원한 건 없으니 리안처럼 조건이 훌륭한 남자라면 좋은 여자를 만나 언젠가 행복한 가정을 이룰 테다. 너무 당연하고 뻔해서 비참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해서. 첫 관계를 맺어서라도 마음속에 남겨 두고 싶었다.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나를 잊지는 않았으면.

참으로 이중적이고 몰염치하다. 알면서도 그에게 요구한 건 자신이다. 이건 살면서 한 번도 부려 본 적 없는 욕심이라는 것이었다. 미아르가 자극한 헤일라의 간헐적인 욕망은 훌륭한 방식으로 리안과 헤일라 사이를 파고들었다.

“……네 말이 맞아.”

“맞다고?”

흡사 으르렁거리는 맹수 같았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그러나 헤일라는 그에게 얼굴이 잡힌 채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너랑 자고 싶어. 하고…… 싶어.”

“…….”

“한 번은 하고 끝내고 싶어.”

그리고 이후에는 보지 말자. 작게 덧붙인 여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을 고르느라 얇은 천 안에 가려져 있는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래.”

오랜 침묵 끝에 대답이 돌아왔다. 헤일라의 가슴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기쁜지 슬픈지 알 수가 없었다. 눈꺼풀을 들어 그를 마주했다. 관계 중에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을 작정이었다. 모든 순간을 다 기억하고 싶었다. 그런데, 리안의 눈이, 조금…….

리안은 헤일라의 오목한 배 양옆에 제 무릎을 두고 자리를 잡았다. 가녀린 상체가 눌리지 않도록 몸을 띄운 상태로 채 벗겨지지 않은 헤일라의 윗옷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방금보다 훨씬 신사적인 태도였다. 그녀는 일순 느꼈던 기괴한 위화감을 금방 잊었다.

“네가 그걸 원하면…….”

“흣…….”

“난 뭐든 하는 병신이니까.”

너도 알지? 리안은 가는 목덜미를 주욱 핥으며 속살거렸다. 파드득 떠는 몸체는 리안의 등에 가려 뒤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완전히 잡아먹히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한 번 하면 못 멈추는데, 괜찮아?”

그건 헤일라도 바라는 바였다. 그녀는 오늘 리안의 처음을 완전히 가지고 싶었다. 순진한 처녀는 그쪽이 저에게 좋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리안이 멈추지 않는 게 첫 관계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녀의 정상적인 사고로는 추론해 낼 수 없는 정보였다.

어쨌든, 당연히 괜찮다는 씩씩한 대답을 얻어 낸 그는 묘하게 안쓰러움을 느끼는 사람처럼 여자의 머리며 이마를 오랫동안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손길을 받으며 그녀는 리안에 대한 죄책감을 누르려 부단히 애썼다.

움직임이 다시 시작되고 헤일라의 옷이 완전히 벗겨졌다. 치마만 들쳐 두었던 방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투명하다고 느낄 정도로 하얀 피부와 동그란 어깨선이 유독 도드라졌다. 리안은 헤일라가 겨우 가슴만 가려 둔 몸을 샅샅이 훑었다. 만지고 핥는 접촉보다 시선이 닿는 게 더 강렬한 자극처럼 느껴졌다.

“손 치워야지.”

이제 와 별 고집을 다 부린다는 투였다. 리안은 그대로 제 윗옷을 훌렁 벗어 침대 아래로 던졌다. 그런 뒤에 바로 자신의 가슴을 어설프게 가리고 있던 작은 손을 잡아 치워 버렸다. 헤일라는 남자의 몸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한 채로 파드득 떨었다.

“하…… 끝내주네.”

차가운 공기에 발딱 서 있을 법도 한데, 그녀의 젖꼭지는 옅은 색소가 퍼진 유두 안쪽에 푹 빠져 있었다. 가슴에 집중된 리안의 시선을 느꼈는지 헤일라의 눈가가 붉어졌다. 어릴 적부터 민감하게 여겼던 치부를 들킨 기분이었다.

“예뻐.”

다시 가슴을 가리려고 하는 헤일라를 저지하며 리안은 퉁명스러웠다. 기분은 저조한데 쓸데없이 어여뻐서 불만이 그득한 얼굴이다.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쓰다듬었다. 아래에서 위를 쥐었다가 쏙 들어간 유두 끝을 뭉근하게 돌려 누르니 등허리가 약간 휜다.

“흐…… 거긴 싫…….”

리안은 거부를 흘려들을 채로 함몰된 유두 주변을 마사지하듯 주물럭댔다. 보드라운 정점은 존재를 드러낼 듯 말 듯 솟아오르지 않았다. 그는 세상 아름다운 걸 보는 눈으로 유륜을 쓰다듬다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위에 입을 가져다 댔다. 기겁한 쪽은 헤일라였다.

“아아!”

살점이 사정없이 빨렸다. 흡입되는 정점에 열감이 몰리면서 아랫배가 확 죄는 감각이 선연했다. 남자는 난잡한 소리를 내면서 가슴을 빨다가 입에 가슴을 한가득 문 채로 헤일라를 올려다봤다. 눈이 맞았다.

탁한 눈동자가 유려한 곡선으로 휘어졌다.

그는 보란 듯이 입을 떼고 저가 빨아 들이던 살갗을 혀로 핥아 올렸다. 헤일라는 그가 종용하는 대로 그곳에 시선을 둘 수밖에 없었다.

“나오니까 더 예쁘다.”

함몰되어 있던 꼭지를 기어이 빼낸 남자는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다른 쪽도 해 줄까?”

반절은 진심, 반절은 희롱이었다.

히끅. 저도 모르게 딸꾹질이 샜다.

이런 건 이상해. 중얼거리려고 했는데 목이 막혀 색색 소리만 나왔다. 헤일라는 이런 변태적인 행위에 관해서는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남녀 간의 섹스는 그저, 그저 거기에 그걸 넣고, 또 그거를 조금 흔들다가 끝나는 거라고…… 꼴딱꼴딱 넘어가는 침이 그녀의 혼란을 대변했다.

“그래. 여기는 조금 이따가.”

뭘? 헤일라는 멍청하게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그대로 먹혔다. 큰 손이 작은 뒤통수를 잡아 가뒀다. 얽어내는 입술에는 자비가 없었다. 이제까지의 귀여운 입맞춤은 연기였다는 듯 도톰한 입술을 빨아 들이고 깨물다가 안쪽으로 진득하게 파고들었다.

숨이 막혀서 눈물이 줄줄 흐를 때가 되어서야 리안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그가 뉘어 준 대로 베개에 파묻혀 숨만 색색 흘리는 여자를 감상했다. 입가에 타액을 잔뜩 묻히고 벌건 눈가에 눈물은 그렁그렁 달고 있으면서, 헐벗은 가슴은 한쪽만 잔뜩 빨려 퉁퉁 불어 있다. 귀여운 젖꼭지는 그가 살살 달래 꺼내 놓은 것 하나만 비죽 솟았다.

그 난잡한 모습이 남자의 흥분을 부채질했다. 헤일라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리안의 혀가 살짝 내밀어져 그의 윗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 * *

리안은 우아한 손짓으로 병의 꼭지를 따고는 진득한 액체를 제 손 위로 쏟았다. 엄지와 검지를 마찰한 뒤 천천히 간격을 넓히니 쩌억 소리가 나며 죽 늘어났다. 아래에서 그걸 지켜보던 헤일라가 바르르 떨었다. 겁을 먹은 소동물 같은 표정이다.

“그, 건…… 뭐야?”

“아, 이거.”

그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진즉 벗겨 낸 헤일라의 갈라진 둔덕 쪽을 내려다봤다. 미처 다리를 오므릴 생각도 하지 못한 여자의 왼쪽 다리를 낚아챈 리안이 능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훤히 벌려진 다리 사이. 보슬보슬한 음모를 한 번 쓰다듬자 헤일라가 그러지 말라고 웅얼거렸다.

“괜찮아. 안 아프게 해 주려는 거야.”

쓴 약을 먹이기 전 아이를 달래는 말투다. 친절하지만 그다지 신뢰는 가지 않는.

“흐, 으응…….”

리안은 손을 여자의 가랑이에 얹고 두 엄지로 음부를 활짝 벌렸다. 도톰한 살덩이가 결대로 갈라지며 약간의 물기를 머금은 속살을 내비쳤다. 그는 잠시 동안 넋을 놓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데 열중했다.

“그렇게 보지 마…….”

수치심에 발발 떨면서도 모든 게 처음인 헤일라는 그저 몸을 내맡겼다. 귀까지 벌게져 울먹울먹하는 모습이 더러운 가학심을 충동질했다. 분명히 보드라울 살 주름을 핥아 올릴까, 하는 고민이 그를 덮었다.

뒷구멍까지 졸아들 정도로 기겁하면서 엉엉 울겠지.

리안은 충동을 내리누르며 욕망을 갈무리했다. 앞으로 즐길 날이 많은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입술을 갖다 대는 대신, 헤일라의 선홍빛 음부에 윤활제를 치덕치덕 문댔다.

“하아…… 으응!”

손가락은 느리게 움직이며 조그마한 구멍 위를 살살 돌리고, 또 그 위로 더듬더듬 올라가 툭 튀어나온 알맹이를 뭉그러트렸다. 헤일라는 생에 처음으로 듣는 자신의 교성에 놀라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짓궂은 손끝은 구멍 안을 건드리지 않고도 자극점을 찾아내는 재주가 탁월했다.

“질질 흘러, 헤일라.”

“흣, 아냐, 아니…… 아아!”

“아까워. 정말, 맛있을 텐데.”

옴칠대는 구멍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던 리안이 고개를 꺾어 들어 시선을 마주해 왔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허락을 구하는 신호. 헤일라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다리를 오므리려 바동댔다. 결국 가볍게 웃으며 물러난 쪽은 리안이었다.

사실은 이제 그도 참기가 힘들었다. 빳빳하다는 감각만 존재하던 아래가 이제 얼얼했다. 선단에서 쿠퍼액이 질질 새는 바람에 아랫도리가 꿉꿉해진 지 오래다.

철컥대는 소리가 울리고 하의가 벗겨짐과 동시에 그의 성기가 퉁겨져 나왔다. 헤일라 또한 처음으로 그의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도 잊고 멀거니 그의 성기를 응시했다.

“어, 어, 어, 어, 그거…….”

흉측하다고 느낄 정도의 크기. 입에도 다 넣을 수 없을 것 같은, 아니 몸의 그 어디와도 맞물릴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다. 헤일라는 겁이 와락 나서 훌쩍였다. 리안은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게 보면 조금 상처받는데…….”

“어, 아냐, 안 돼, 안 되는 거…….”

잠시 아래를 내려다본 남자는 꺼덕거리다 못해 제 뱃가죽에 닿아 있는 살덩이를 손으로 훑었다. 검붉은 기둥에 투두둑 불거져 있는 퍼런 핏줄들이 흉한 인상을 주기는 했다. 그래도 좆의 생김새는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데. 조금 억울함이 올라왔지만 헤일라를 달래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이미 멈출 수도 없었다.

“미안해, 헤일라 건 다 예쁘기만 한데 내 자지는 흉해서.”

그래도 금방 좋아하게 될 거야. 리안은 발긋한 눈가를 휘면서 붉게 달아오른 뺨에 짧게 입 맞췄다.

“조금만 참자.”

리안이 입을 떼고 은근하게 속삭였다. 머릿속이 충격으로 푹 퍼져 빠르게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여자의 동공이 확장됐다.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커다란 귀두가 미끌대는 질구를 관통해 경계를 넘고 있었다. 칼로 생살을 가르는 아픔이 헤일라의 아래를 짓이겨 놓았다.

“흐, 아아! 아악!”

“쉬이, 아픈 건 금방, 끝나.”

“아, 리안, 리안! 아파! 아파아!”

그는 여전히 유한 음성으로 여체를 도닥이고 있었다. 하지만 번들거리는 흑색 눈동자는 여자와 완전히 결합한 것에 대한 음험한 만족감을 여과 없이 내비쳤다. 자비 없이 내벽을 넓히는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흐, 흐아, 아아…….”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기둥은 하반신이 벌벌 떨리도록 만들었다. 헤일라는 쉼 없이 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리안, 리안, 하고 애처롭게 울어 대는 여자의 음성은 한계까지 확장되어 빠끔거리는 그녀의 아랫구멍만큼이나 그를 자극했다.

“나 못, 하, 으응, 못하겠어…….”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려 자신을 보호하려는 몸짓이 리안의 손에 막혔다.

“다리 닫으면 혼나.”

그는 여자의 무릎을 잡아 빼고 허벅지 아래를 눌러 다리를 들게 만들었다. 해부당하는 개구리처럼 몸이 열려 아래가 훤히 보이는 자세에도 수치심이 들고 일어날 새가 없었다. 리안이 순식간에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쑥, 하고 무언가 빠지는 듯,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배꼽 아래에 퍼졌다.

“아, 아, 아으, 흐…….”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입만 빠끔빠끔 댄다. 꼭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처참한 얼굴이었다. 리안은 그 모습이 가여우면서도, 또……

미치게 좋았다.

“헤일라.”

그녀의 우둘투둘한 내벽이 다닥다닥 들러붙어 기둥을 조이고, 귀두 구멍까지 감싸 품었다. 힘겹게 오물오물 삼키는 아래가 꼭 귀여운 헤일라 본인과 닮았다. 리안은 점막을 스치는 모든 감각을 기억하려는 사람처럼 잠시 여체를 꽉 안고 멈춰 있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녀는 남자가 움직이는 대로 숨소리 하나까지 휘둘리며 할딱였다.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내장이 짓눌려 배 안쪽이 엉망으로 짓이겨지는 감각에 헤일라가 힉힉거리며 침상을 더듬었다. 그런 여자가 가여울 법도 하건만, 리안은 허리를 뒤로 뺀 뒤 다시 강하게 쳐올렸다. 그리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여자의 이름만 반복해서 읊었다.

헤일라의 얼굴이 눈물과 타액으로 점차 흐려졌다. 남자는 그저 박고, 박고, 박다가 여자의 고통스러운 신음과 찌그러진 눈에서 나오는 눈물까지 샅샅이 핥으며 흘레붙었다.

“흐앗!”

“윽.”

순간 헤일라의 내벽이 강하게 수축했다. 쾌감 한 점 받아먹지 못하고 가혹한 두께의 양물에 학대당하던 여체가 찌릿한 감각에 튀어 올랐다. 리안은 홀린 듯 그녀가 반응한 지점을 다시 찔러 넣었다. 이불보만 쥐고 있던 손이 그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내저었다. 절벽 끝에 다다른 사람처럼 절박한 얼굴이었다.

“괜찮아, 응? 조금만 힘 빼 봐, 아, 제발…….”

“힉, 히익, 시, 싫…….”

어르는 음성이 작위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리안은 헤일라가 반응하는 안쪽을 부드럽게 누르고 비비면서 자극했다. 어깨를 밀어내는 손을 잡아채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핥아 대는 행동들이 가증스러울 정도로 다정했다.

“아앙……!”

결국 헤일라의 배가 둥그런 모양을 띠며 튀어 올랐다. 착해. 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눈을 휘었다. 쾌감에 표정이 풀려 턱 끝이 떨리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한참 동안, 교접 부위에 포말이 일 정도로 오래 정사를 이어 나갔다.

* * *

“신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소. 검을 주시오.”

“제발, 리어, 제발 멈추어요.”

묵직한 선율과 함께 예스러운 구색을 정갈하게 맞춘 주인공들이 무대를 누볐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극의 분위기에 맞춰 수십의 연주자들이 사력을 다해 가락을 짜낸다.

“아아! 그대의 구슬이 우리의 사랑만치 빛나고 있어요. 나는 이제…….”

단 한 명을 위한 무대의 마지막 대사였다. 탐스러운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은 벨벳 카우치에 눕듯이 앉아 여주인공을 지켜봤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가 노란 조명을 받아 더 매끄럽게 빛났다.

“당신과 하나 되는 것이겠지요…….”

연인을 잃은 비운의 여인이 구슬을 삼킨 채 쓰러졌다. 그것으로 두 번째 막이 내린 공연장에는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마지막 막을 남겨 두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임에도, 극의 하나뿐인 관객은 미동조차 없었다.

“폐하.”

지루한 공연의 이 막이 끝나자 갖은 인내심을 끌어모아 입을 닫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베르디안이었다.

“……벌써 경과의 약속 시간이 다 되었나 보군.”

베르디안은 능구렁이처럼 거짓말을 일삼는 황제를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다 알고도 세워 둔 장본인이면서 미처 몰랐다는 얼굴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게다가 내로라하는 배우들과 공연단을 죄다 독점해 혼자 즐기는 악취미도 그다지 고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살갑게 말을 거는 베르디안 또한 보통은 아니었다.

“미안하게 됐어. 그냥 부르지 그랬나?”

“아닙니다. 제국의 태양을 뵙는 자리인데, 기다리는 것 또한 기쁨이지요.”

입에 발린 말이 듣기 나쁘지는 않았는지, 페이네리아는 그저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그래, 내 조카님은 어찌 지내고 있는지 들어 볼까.”

페이네리아는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황족 특유의 여유로움과 고아함이 묻어났다. 그녀는 베르디안을 보면서 눈꼬리를 휘었다. 보고를 시작하라는 의미였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저가 알고 있는 바를 읊었다.

“여전히 신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전히 헤일라라는 여인을 끼고?”

“……예.”

“단단히 씌었나 보구나.”

그녀는 꽤 유쾌하다는 투였지만 베르디안은 황제의 심기가 얼마나 어지러운지 잘 알았다. 그런 만큼 더 이상 첨언하지 않았다. 대신에 리안이 황제에게 쓴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올해 안에 모두 끝내겠다……라.”

흰 종이에 적힌 정갈한 글씨를 모두 읽어 내린 황제는 손가락을 들어 시종을 불렀다. 시종은 황제가 보는 눈앞에서 곧바로 편지를 태워 재로 만들었다. 제 아비를 올해 안에 죽이겠다는 조카의 서신을 굳이 세상에 남겨 둘 이유는 없었다.

“내 조카님은 참으로 배짱이 좋아. 아니 그런가, 루데인 경.”

미간을 모은 채로 웃는 여인은 어딘지 모르게 의뭉스러웠다.

“짐을 상대로 이리 여유로워서야.”

“방만함을 꾸짖으실 셈이십니까?”

고저 없이 물었으나, 그 얼굴에 피어난 감정은 명백한 기쁨이었다. 약간의 희열 또한 묻어 있음을 페이네리아도 모르지 않았다. 지독할 정도로 유희만 쫓는 남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베르디안은 지난 며칠간 리안의 뒤를 봐주며 참아 왔던 지루함이 싹 가실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붕 떠올랐다.

어떤 식으로 벌을 주려나? 리안을 버리는 패로 쓰는 쪽이 가장 흥미롭겠지만, 여동생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했던 황제이니만큼 그 아들인 리안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은 낮았다. 오히려 헤일라라는 여자를 숨기거나 처리하는 쪽이 더 말이 된다. 혀를 살짝 내밀어 마른 입술을 핥은 베르디안이 다시 자연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아직은.”

그러나 그의 소망은 황제의 한 마디에 땅에 처박혔다. 페이네리아는 긴 머리를 손으로 꼬았다.

“거진 이십여 년을 기다렸다.”

“…….”

“몇 달 더 인내하는 일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믿고 있어.”

“리안 휴리트를 말입니까?”

그 미친놈을? 베르디안이 뒷말을 애써 삼켰다.

“타델리아의 아들을.”

“…….”

“내 자매의 아들이, 그녀의 복수를 매듭지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오싹. 베르디안의 목덜미에 소름이 일었다. 페이네리아가 히죽 웃는 얼굴은 지독히 아름다우면서도 괴이쩍었다. 하루 이틀 쌓아 온 광기가 아니라는 의미겠지. 방금까지 맛봤던 좌절감이 순식간에 휘발되고 그의 속에 만족감이 추적추적 쌓였다. 역시 이 여자도 재밌는 구석이 한가득이었다.

페이네리아 라이노라 로프라노프. 리안의 어미인 타델리아 공주를 타센 공작에게 빼앗긴 뒤, 제 남자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왕관을 쓴 여인. 부모도, 배우자도, 자식에게도 애정 한 톨 나눠 주지 않으면서 죽어 버린 자매에게만 집착하는 황제.

그녀가 타델리아에게 가지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언젠가 베르디안이 이에 관해 물었을 때, 라베이츠 황태자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며 진저리를 쳤었다. 황제가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델리아 공주보다 자신의 가치가 아래임을 잘 알고 몸을 사렸다.

“어제 또 꿈에 그 애가 나왔거든.”

“…….”

“여전히 웃는 모습이 어여뻤어. 그래서 타델리아가 좋아하던 라넌큘러스로 정원을 하나 만들라 일렀지. 언젠가 리안과 거기 앉아 다과를 나눌 생각이다.”

모든 게 끝난 다음에…….

나른함인지 울적함인지 모를 진득함이 배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리안을 아끼시는군요.”

공주가 리안을 낳으면서 죽었는데도. 베르디안이 굳이 덧붙이지 않았어도 의미가 전달되었는지, 황제는 오른쪽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그러나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곧 극의 마지막이 시작되겠어. 경은 이만 물러가도록.”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베르디안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예법에 따라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뒤 방을 빠져나왔다.

신전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하앙!”

음란한 교성과 함께 얇은 물줄기가 주름진 침구 위에 흩뿌려졌다. 리안은 침상에 기대앉아 헤일라를 안은 채로 낮게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에 깔려 있던 여유로움마저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지나친 욕정과 흥분만이 리안을 움직이게 했다.

흐려진 눈을 하고 입도 다물지 못하는 여자가 사랑스럽다는 듯 뺨을 핥아 올리는 혀가 뱀의 것처럼 길었다. 리안은 헤일라를 다리 위에 올린 채로 다시 손을 움직였다. 구멍에서 빠져나와 둔덕을 활짝 벌리는 손길에 여자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저도 모르게 반응하며 벗어나려 하는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얌전히.”

“흐, 아아, 힘들, 힘들어요, 힘들어요…….”

리안의 입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샜다. 헤일라는 이제 애원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이성이 마비됐다. 그 모습이 자못 사랑스러워 볼에 입을 찍어 누르자 고개를 돌려 허겁지겁 입을 맞춰 왔다. 며칠간 시달리며 몸이 배운 바가 있는 것이다.

제정신이 아니라, 입술을 문대고 혀를 내밀어 휘젓는 정도에 그쳤지만, 남자는 그것만으로도 감격스럽고 대견해 둔부를 꽉 쥐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잘했어.”

“흐, 아앙…… 아아앙…….”

“조금만 더 하자. 좋아하는 거 해 줄게.”

리안의 손가락이 다시 작은 공알 주변을 문지르고 동시에 다른 쪽 손의 손가락이 작은 구멍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섰다. 힉힉대는 소리와 함께 얇은 허리가 튀어 올랐다.

“아으, 흐으, 못, 더 못해요, 못하겠어…….”

“이런.”

“쉬, 쉴래, 쉬고 싶어, 힉…….”

“쉬고 싶어?”

“으응, 응, 응…….”

쾌락에 취해 풀린 눈으로 고개만 열심히 끄덕인다. 리안은 헤일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힘주어 꽉 안았다. 며칠 동안 반수면 상태로 미음과 물만 마신 여인의 몸은 아주 얇았다. 그럼에도 찝찔한 남녀의 땀 냄새와 정사로 인한 온갖 음란한 체액들이 섞여 만들어 내는 헤일라의 체취는 지독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엎드려.”

탁한 한숨을 뱉은 뒤 다정함을 벗어던진 리안이 명령했다. 흡사 엄격한 훈련사 같기도 했고, 소동물을 가차 없이 찍어 누르는 포식자 같기도 했다. 헤일라는 우우, 하고 우는소리를 하면서도 어기적어기적 몸을 움직였다. 혹독하게 훈련한 결과였다. 삽입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는 걸 그녀도 은연중에 학습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취하라는 자세는, 너무…….

“더.”

“으…… 아…….”

헤일라는 엎드렸으나 두 손으로 앞을 짚지 못했다. 배운 대로, 엉덩이와 음부를 힘껏 벌려야 했기 때문이다. 수북한 체모를 비집고 앞쪽 구멍을 벌린 뒤 다른 손으로 오른 둔부를 슬쩍 가르는 손이 달달 떨렸다. 푹신한 베개에 박힌 얼굴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더 벌려.”

그럼에도 여전히 가혹하기만 한 남자는 거칠게 명령했다. 헤일라의 수치심, 아니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완전히 뭉개는 방식으로 그녀를 길들이는 남자다웠다.

헤일라가 첫 경험을 대가로 그와의 이별에 관해 이야기한 뒤, 리안은 마지막 방어선이 허물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방어선은 포악하고 잔인한 자신에게서 헤일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행복한 헤일라를 가지기 위해서.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도 헤일라는 자신의 손으로 리안 휴리트라는 폭탄을 터트렸다.

요컨대, 리안은 완전히 돌아 버린 상태였다.

“옳지.”

그제야 만족스러울 정도로 활짝 쪼개진 두 덩어리 사이에 옴찔대는 구멍이 귀여웠다. 리안은 잘했다며 헤일라의 등허리에 입 맞췄다. 불뚝 선 성기의 선단을 엉덩이 사이에 슬쩍 비비자 여체가 바짝 굳는다. 이 무자비한 남자가 혹시나 저를 더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엄습했다.

“하지 마, 으응, 거기, 시러…….”

리안은 잠시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으로 헤일라의 몸을 훑다가 이내 다시 상냥한 투로 말했다.

“그래. 오늘은 착하게 굴었으니까 힘든 거 안 해.”

자비로운 목소리에 헤일라의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흐아앙!”

그리고 곧바로 질구가 꿰뚫렸다. 단숨에 뿌리 끝까지 치고 들어온 성기가 유약한 자궁구를 밀어 올렸다. 이미 그가 싸질러 놓은 정액들이 삽입을 도왔으나 억센 자극을 견디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리안은 입술을 벌리고 발발 떠는 하얀 여자의 목덜미와 어깨선을 핥듯이 관음했다. 다닥다닥 달라붙어 뜨끈한 정액을 갈구하는 내벽에 영영 나를 파묻고 싶다. 짙은 황금색 동공이 광기 서린 남자의 얼굴을 반사해 비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참지 말걸.”

“흐, 우으, 흣…….”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한 리안이 툭 튀어나온 골반을 가볍게 쥐었다. 동시에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덩어리진 모양으로 흘러내렸다. 불쾌한 배설감에 헤일라의 손이 아래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녀는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도 모른 채 팔을 얼굴로 가져다 대고 훌쩍였다. 리안의 규칙적인 움직임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터억, 터억 소리가 과하게 커져 갔다.

“찔끔찔끔 맛만 봤던 게 돌아 버릴 정도로 후회돼.”

“욱…… 으윽…….”

“자지 껍질이 벗겨졌을 때부터 널 찾아서 박아 넣었어야 했는데. 처음부터…….”

씹어 뱉은 말은 날것의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저가 뭐라 지껄이는지 몰랐다. 그만큼 강렬했으며 광막한 감각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버리려 하기 전에 먹어 치웠어야 했는데. 처음 봤을 때 목덜미를 낚아채 꼼꼼히 살라 먹어 떠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맛있는 게 제 손에서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거친 손길에 헤일라의 몸이 뒤집혔다. 삽입한 채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안쪽 깊숙한 곳이 쓸려 신음이 셌으나 소리는 곧 흩어졌다. 리안이 두 손으로 헤일라의 양 볼을 거칠게 잡고 깊이 입을 맞췄다. 일방적으로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훑고 여린 살덩이를 빨아 삼켰다. 간신히 호흡하던 경로를 틀어막고 거칠게 허리를 놀려 저를 박아 넣었다. 음모끼리 비벼져 까끌대는 자극마저 미치게 좋았다.

“아앙, 하아, 아아!”

“여기, 좋아하지?”

“아니, 아니이…… 힉!”

“거짓말.”

허리를 아래로 놀려 질구 아래를 늘이듯 압박하면서 자궁구에서 조금 빗겨 간 지점으로 올려 치자 헤일라가 자지러졌다. 오래도록 집요하게 여체를 탐음해 알아낸 자극점이었다. 그는 만족감이 들어찬 눈으로 들큼한 냄새가 밴 가슴을 쪽쪽 빨아 주었다. 계속되는 자극에 바들대는 쪽은 헤일라뿐이었다.

“또 숨어 버렸어.”

리안이 다시 함몰된 유두를 보고 불만스러운 투를 가장했다. 기실 그는 작고 동그란 유두를 입으로 뽑아내는 걸 아주 좋아했음에도. 그녀에게 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가슴을 쥐어짜듯 압박한 뒤 입술을 대서 주욱 빨아 들인다. 헤일라의 안쪽이 바짝 졸아들어 귀두부터 뿌리까지 전부를 쥐어짰다.

“하으으으…….”

“흣…….”

결국 먼저 절정에 달한 헤일라의 몸에서 힘이 죽 빠졌다. 리안은 자극된 성감에 헤일라의 가슴에서 입을 떼고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환이 여린 둔부에 부딪히면서 매 맞는 소리가 났지만, 내장이 짓눌리는 고통에 허덕거리는 여자는 피부에 느껴지는 고통을 몰랐다.

꺽꺽대며 바동거리는 여자와 엉덩이에 골이 파일 정도로 가혹하게 움직이는 남자는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행위가 끝났을 때에도, 리안은 헤일라를 꽉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 * *

눈꺼풀이 무겁다.

눈을 뜨기가 유독 힘들다. 헤일라는 코끝을 찌르는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뒤척였다. 이 냄새는 뭘까 잠시 고민하다가 언젠가 고급 살롱에서 일할 때 맡아 본 값비싼 향유 향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가 이런 거 좋아하는데. 헤일라는 반사적으로 레테를 떠올렸다. 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일어나야 하는데, 얼른 언니한테 줄 아침을 차려야…….

“아.”

무언가에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헤일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제야 이제껏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몽롱함을 단번에 물릴 만큼 강력하고 충격적인 일들.

‘아흐으으, 그만, 하앙, 리안…….’

‘쉬이, 착하게 굴어야 쉬지. 응?’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다시 온갖 색들이 터졌다가를 반복했다. 기분이 좋았다가 푸욱 꺼졌다가, 하늘을 나는 것 같다가 땅에 처박히기를 여러 번이었다. 그리고 모든 순간에 리안이 자신의 몸을 탐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의 첫 여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맞지만 이렇게 그가 제멋대로 하는 걸 원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애원하며 매달려도 결과는 같았다. 도망치려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잡히면 더 혹독한, 입에 담기조차 수치스러운 행동을 강제당했다. 그는 탐하고, 탐하고, 탐해서 헤일라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리안이…… 나를…….”

헤일라는 그가 그럴 리 없다고 되뇌면서도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해일처럼 쏟아지는 기억들이 잔인하리만치 선명했다. 아래에 깔려 우는 자신, 그런 여자를 사랑스럽다는 듯 핥아 올리던 남자.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다시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주룩. 다리 사이에서 걸쭉한 정액이 뭉텅이로 새어 나왔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헤일라의 행동이 모두 정지했다.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여자가 주춤주춤 일어나 이불을 걷어 다리 사이를 확인했다. 자신이 부정하던 그의 행태가 다리 사이에서 고스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아아…….”

두려웠다가 화가 났다가, 또 모든 상황을 부정하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은, 그가 그럴 리 없다고 되뇌면서 다리 사이에 흐르는 허연 정액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것으로 끝났다. 시큰한 냄새가 확 끼쳐 코를 찔렀다.

리안은 좋은 사람인데. 날 사랑해 주고 아껴 주는 유일한 존재인데. 절대 나한테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인데 왜.

굳게 믿어 왔던 진리는 한순간에 전복되어 그녀를 덮쳤다.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공간에서 리안과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의 그는 다른 사람이다. 헤일라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유를 묻더라도 좀 더 안전한, 열린 공간에서여야 했다. 만약 여기서 만나 다투게 된다면…… 그래서 붙잡히면…….

영영 못 나갈지도 몰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화들짝 놀라 입을 막았다. 아무리 그가 강제적으로 자신을 취했다 해도 영원히 누군가를 감금하는 건 과한 망상이었다.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야. 잠시 나쁜 짓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미안하다고 사과할 거야. 헤어지기 싫어서 그랬겠지. 리안은, 그런 애는, 그런…….

헤일라는 미친 여자처럼 중얼대다가 우선 여기를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섰다. 어쨌든 최대한 리안과 거리를 두어야 했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불확실해 레테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상당히 걱정됐다.

“아…… 아흐…….”

얼마나 박아 댔는지 일어서자마자 다리 사이가 쪼개질 듯 아렸다. 헤일라는 벽을 짚고 간신히 몇 걸음 걸었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하고 균형을 잡지 못해 저도 모르게 옆에 있던 장식장을 거칠게 잡아 흔들었다. 반동 때문에 장식장 가장 위에 있던 도자기가 흔들거렸다.

“아, 안 돼!”

한눈에 봐도 값비싼 물건이었다. 헤일라는 어지러운 시야 안에서도 도자기를 사수하려고 하느작거렸다. 물론 그 노력은 그다지 효용이 없었다.

요란한 소리가 울리고 매끄러운 백자가 산산조각 났다. 그 아래를 황망하게 응시하던 헤일라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쓸데없이 정교한 모양이 눈에 잘 들어왔다. 분명 값이 나가는 물건일 테다.

……물어 주려면, 얼마가 필요할까. 리안이 곤란해지는 건 아닐까.

헤일라는 유리 조각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조심조심 조각을 모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 절절맬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다 리안 때문이니까. 리안이 ‘이런 짓’만 하지 않았어도 도자기가 깨지는 일은 없었을 테다. 전부 리안 탓이다. 리안, 리안…….

헤일라는 비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산산조각 난 도자기 조각이 널브러진 게 꼭 리안과 자신의 관계 같아 덜컥 두려워졌다. 이런 식으로 맺고 싶었던 관계가 아닌데. 이렇게는…….

헤일라는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공허한 물음을 던져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때 방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리안.”

그는 아무 말 없이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말라붙어 있는 볼, 땀이 번들거리는 목덜미,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아 비치는 젖꼭지가 유독 도드라졌다. 그는 손으로 몸을 더듬듯 눈으로 찬찬히 훑은 뒤 날카로운 조각을 쥔 손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헤일라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헤일라는 급히 일어나 거리를 유지하려다가 다시 뒤로 휘청거렸다. 리안은 그녀를 놓치지 않고 잡아챘다. 스쳐본 그의 눈이 서늘했다.

“흐웁!”

허리를 바짝 휘감은 팔이 묵직하게 아랫배까지 눌렀다. 리안은 남는 손으로 헤일라의 뒤통수를 우악스럽게 쥐고 입 맞췄다. 급작스러운 접촉에 그녀의 입이 열리고 두터운 혀가 보드라운 입술을 헤집고 들어왔다. 부드러운 안쪽 점막을 공들여 핥고, 타액을 빨아 들이는 질척한 접촉이었다. 혀가 섞이는 소리가 헤일라의 귓가에 닿았다.

명백히 성적인 의도를 담고 있는 키스였다. 품에서 벗어나려고 바동거릴 수조차 없었다. 상체는 갈비뼈가 아플 정도로 단단히 붙들려 있었고 쥐어진 머리칼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머리 가죽까지 뽑힐 만큼 억세게 쥐어져 있었다. 아프고 숨이 막혀 생리적인 눈물이 흘렀다.

“우, 아흐, 읍…….”

“아아, 미안.”

헤일라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야 그의 입술에 상처를 내고 입을 떼어 낼 수 있었다. 리안은 피가 뚝뚝 흐르는 데도 그냥 웃고만 있었다. 그런데 눈은 전혀 웃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괴이쩍었다. 그래.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이다. 한 꺼풀 벗겨진 다른 사람 같았다.

헤일라는 저도 모르게 종아리에 힘을 바짝 주고 한 발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가 들어온 방문을 응시했다. 분명 리안이 열고 들어왔다. 고민은 짧았다. 그녀는 있는 힘껏 그를 밀치고 문 쪽으로 달려갔다. 이성보다는 당장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이 그녀를 지배했다.

의외로 쉽게 밀려난 그를 제치고 달렸다. 헤일라는 정신없이 밭은 숨을 내쉬며 문까지 뛰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고……

철컥.

철컥철컥철컥철컥.

“이거 봐, 이럴 줄 알았어.”

뒤에서 허리를 감아오는 팔이 익숙했다. 하지만 그건 결코 따뜻한 느낌은 아니었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칼이 목덜미에 스쳤다. 리안은 휘어진 목덜미에 이마를 대고 부볐다. 아이가 투정하는 모양새와 비슷했다.

“집에서 뛰면 안 돼. 네가 가르쳐 줬잖아.”

“이, 러지 마. 나 이제 집에 가야 해. 여긴 내 집이…….”

레테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언니의 이야기는 그를 자극할 게 분명했다. 헤일라는 얌전히 숨을 죽이고 있다가 배 위에 얹어진 그의 손에 제 손을 포갰다. 눈을 질끈 감고 그의 행동에 대해 반추해 보았다.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에 관해서도 헤아렸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제 탓도 있었다. 헤일라는 리안의 큰 손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등허리에 느껴지는 딱딱한 물성에 온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무서워?”

그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헤일라의 목선과 귓가를 입술로 지분거리다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가는 몸을 안아 올려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헤일라는 여전히 느껴지는 딱딱한 물건의 감촉에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잔뜩 겁을 먹고 있는 게 맞았다.

“무서워할 거 없어.”

“…….”

“너한테도 좋은 거야. 그냥…… 즐기면 돼.”

그는 진심인 듯 다정하게 웃었다. 파드득 소름이 돋았다. 리안이 여체를 안아 올려 성큼성큼 걸어 침대에 눕혔다.

“아악……! 싫어!”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자의 반항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리안은 헤일라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제가 할 일을 착착 진행했다. 첫날밤 신부의 옷을 벗기는 신랑처럼, 조금 수줍은 듯 뺨이 붉었다. 그게 더 헤일라를 두렵게 했다.

“너, 너 완전히 정신 나갔어. 아!”

“하하.”

리안은 그냥 웃기만 했다. 나름 충격을 받으라고 뺨을 후려쳐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 헤일라의 붉어진 손을 보고, 작게 속살거리기만 했다.

헤일라는 씩씩거리면서 배꼽까지 풀어진 단추를 절망적으로 바라봤다. 꾸물거리며 옷을 여미려고 하는데 리안이 손목을 쥐고 붉어진 손바닥을 빤히 보더니 혀를 내밀어 날름, 하고 핥았다. 부드럽고 축축한 살이 뭉개지며 살갗을 쓸고 지나가는 감촉이 낯설었다.

싫다기보다는…… 이상했다. 타액이 묻은 지점이 약간씩 차가워졌다. 열감이 사라지고 남은 선선함이 헤일라의 기분을 더 이상하게 만들었다.

* * *

“귀여워.”

얼빠진 표정으로 제 손바닥을 보는 헤일라는 정말로 귀여웠다. 남자는 하늘거리는 옷을 후두둑 소리가 나도록 찢은 뒤 바닥에 던졌다. 원피스 형식의 옷이 사라지자 몸을 가리고 있는 건 아래 속옷뿐이었다. 헤일라는 완전히 드러난 가슴에 기겁하면서 바둥거렸다.

“안…… 히익!”

츕츕대는 소리가 방에 울렸다. 리안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헤일라의 두 손을 누르고 가슴에 입술을 댔다. 옅은 색소가 도는 젖꼭지를 가볍게 물다가 가슴을 깊게 물었다. 적당한 크기에 모양이 잘 잡힌 가슴이 입안에서 엉망으로 뭉개졌다가 퍼지기를 반복했다.

찌릿거리고 싸한 감각이 헤일라를 물들였다. 리안은 능숙하게 가슴을 지분대며 자극했다. 다리 사이에 열감이 몰렸다. 채 가시지 않은 당혹감 때문에 도리질 치던 헤일라는 제 가슴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리안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다가 제 가슴께에 빼곡하게 수놓아져 있는 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아, 흣, 이거, 이거, 뭐…….”

할딱거리기만 하던 여자가 다른 말을 웅얼거리자 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혀로 할짝거리던 남자는 헤일라가 몸에 새겨진 화인을 이제야 발견했음을 깨닫고 이마를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물었다.

“예쁘지?”

“…….”

“매일 새로 새겨 줄 테니까…….”

미친 소리를 하는 남자는 설레는 얼굴이었다. 아, 헤일라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리안은 헤일라가 헤어지자고 한 말 때문에 잠시 정신이 나간 게 아니었다. 원래 미친놈이었던 거다. 소름이 쭈뼛 돋았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몸을 취하고, 그걸 자랑이라고, 저런 해사한 얼굴로…….

아무리 그를 애틋해하는 헤일라라도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도망치자.

헤일라는 그 간단한 사실만을 머리에 욱여넣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장 힘으로는 리안을 제압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우욱…….”

헤일라는 입을 가리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녀는 리안의 팔을 꼭 쥐고 한껏 괴로운 연기를 시작했다. 리안은 갑작스러운 반응에 당황한 듯 잠시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왜 그래? 응?”

“읏, 욱…… 갑자기 또 토, 할 것 같아서…….”

일견 그의 눈빛에 묘한 기대감이 스몄으나 헤일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리안은 순식간에 차분한 모습으로 돌변해 헤일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사람을 불러올게.”

리안은 다리 사이에 불룩 솟아 있는 성기를 수습하지도 않을 채 여상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조금만 참…….”

그리고 무자비한 포식자가 침대를 빠져나가자마자, 헤일라는 있는 힘을 다해 자리를 박차고 뛰었다. 이번에는 문 쪽이 아니었다. 그녀가 노린 쪽은, 도자기가 깨진 곳이었다. 꽤 재빨리 몸을 놀린 여자는 저가 깨트린 도자기의 파편 중 가장 뾰족한 것을 골라 집었다. 작은 손이 퍽 다부지게 그 조각을 쥐고 제 목에 가져다 대었다.

“움…… 움직이지 마.”

서투른 협박이지만 목소리는 꽤 앙칼졌다. 리안은 가는 목에 닿은 도자기 조각이 떨리는 걸 건조한 눈으로 지켜봤다. 무채색만 보이는 사람처럼 메마른 표정이다. 그럼에도 헤일라는 자신이 쥔 패를 가지고 태연한 척 연기하려 노력했다.

“지금 안 내보내 주면 이대로 내 목을 그을 거야. 죽어 버릴 거라고.”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이런 엉성한 겁박에 묶이지 않았다. 리안은 표정 하나 드러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힘을 줘서 목 안쪽으로 옅게 찔러 넣은 조각 때문에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는데도 리안은 멈추지 않았다. 바짝 독이 오른 표정의 여자가 악을 썼다.

“오지 말라니까! 허억……!”

헤일라는 저에게 비정상적인 집착을 내보이는 리안에게는 이런 방식이 아주 잘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걸 수 있는 희망이 이것뿐이기도 했다. 그를 찌르겠다 으름장을 놓을 수도 있겠지만, 헤일라는 자신이 연기로도 그에게 흉기를 들이밀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남자의 반응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뒷걸음질 치는 일뿐이었다. 곧 등 뒤에 벽이 느껴졌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헤일라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녀는 여전히 목에 조각을 가져다 대고 발발 떨고 있었다. 리안은 그 손을 뚫어지게 보다가 흉기를 든 손을 쥐었다. 정확히는 목을 겨냥하고 있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잡았다. 되레 놀란 건 그녀 쪽이었다.

“나쁜 물이 들었네.”

“…….”

“역시 레테랑 같이 살아서 좋을 게 없어. 이런 거나 배우고.”

보고서를 읽는 사람처럼 고저 없는 말투였다. 그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유리 조각을 세게 쥐어 남자의 손에 상처가 난 까닭이었다.

헤일라는 놀라 도자기 조각을 놓았다. 그러나 리안은 주먹을 더 꽉 쥐었다. 이제는 피가 줄줄 샜다. 제 목을 긋겠다고 협박하던 여자는 리안의 상처에 방금의 배로 덜덜 떨었다. 이러다가 손쓸 수 없이 상처가 깊어지면, 손에 문제라도 생기면…….

헤일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아, 그러지 마! 놔! 그거 놓으라고!”

그녀가 무슨 얼굴로 어떤 말을 하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선 또한 한 곳에 계속 머물렀다. 옅은 상처가 나 있는 헤일라의 목. 결국 주룩주룩 흐르는 피에 헤일라가 울음을 터트릴 때 즈음 되어서야 리안은 손을 폈다.

그녀는 상처를 살피려고 리안의 큰 손에 제 손을 더듬더듬 가져다 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고개가 옆으로 확 넘어갔다. 리안이 헤일라의 머리칼을 쥐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리안이 목덜미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헤일라의 입에서 흐르는 고통에 찬 신음에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나는 네가 아픈 게 정말 싫다고 생각했었는데.”

“윽, 흣…….”

“이렇게 자꾸 네 몸에 상처를 내면, 네 팔이라고 해도 자르고 싶어질 것 같아.”

“…….”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러면 안 돼, 응?”

꾸며 낸 웃음. 또 눈은 서늘한 채 입꼬리만 올린 얼굴이었다. 헤일라는 이를 악물었다. 잡힌 머리칼에서 올라오는 고통이 점점 심해졌다. 그녀는 리안이 고통으로 하여금 대답을 종용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럴수록 입매는 더 굳게 다물렸다.

결국 헤일라의 고집을 꺾지 못한 리안이 머리칼을 잡은 손을 풀고 그녀를 들어 올렸다. 오른손에서는 여전히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는 널브러진 유리 조각들을 발로 밟고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굳은 얼굴로 리안의 품에서 바들대던 헤일라가 바닥을 바라본 건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예기치 않은 기현상이 눈에 띄었다.

“……저게 뭐야?”

그가 흘린 핏방울이 낭자해야 할 바닥이 깨끗했다. ……정확히는, 핏자국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당장 지금도 그가 밟고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흔적들이 남아 있어야 할 터인데 순식간에 원래 색인 백색으로 바닥이…….

“……세니르 신전.”

경악이 섞인 목소리였다. 헤일라는 망연한 얼굴로 리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제국민은 신의 존재를 감히 의심하지 않는다. 신의 검이 기적과 같은 신비함으로 그들을 사로잡았으며, 예언이 제국을 지켜 왔기 때문에. 그리고 신의 가호가 함께 한다는 세니르 신전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니르는 존재만으로도 신의 증명이라 불리는 신전이었다. 온통 백색 빛만 가득 머금은 신전의 모습은 경외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당연하게도 신의 증명이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떤 형태로 훼손되든 수 분 내로 복구되는 기적.

무엇이 묻든, 어떻게 망가지든 원래 모습을 되찾는 기적이 세니르 신전의 특징이었다. 이것은 제국, 아니 세계를 통틀어도 발견된 적 없는 신의 가호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헤일라는 리안의 피가 지워지는 장면을 보고 이 장소가 어디인지 눈치챘다.

“말도 안 돼…….”

신의 영역은 선택받은 자들만 들어올 수 있으매, 부유한 상인이나 일반 귀족들은 감히 발을 들일 수조차 없다. 하지만 눈앞의 기적은 세니르에서가 아니면 결코…….

“너, 뭐야?”

리안을 똑바로 마주 보는 헤일라의 눈이 비로소 또렷해졌다. 적대감을 품은 눈빛이었다.

* * *

레테는 잠귀가 예민한 편이었다. 타고난 기질이 예민하고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헤일라가 방으로 몰래 들어와 잔머리를 넘겨 주거나 이불을 정돈해 줄 때도 깨어 있는 때가 훨씬 많았다. 단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는 자신이 싫어서 자는 척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헤일라일 리가 없는 불청객을 위해 자는 척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동생은 이렇게 거칠게 문을 열지도, 무겁게 걷지도 않는다.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예상했던 객이 눈에 들어왔다.

“헤일라 상태가 꽤 괜찮아졌나 보네. 네가 자리를 다 비우고.”

레테가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매달았다. 모르는 이가 보면 다정한 여인이라 생각할 정도로 온화한 모습이었다. 리안은 그녀를 무감하게 훑고는 순식간에 몸을 붙여 왔다. 독한 약초 향이 알싸하게 코끝을 간지럽혔다.

“헤일라는 지금 수면초를 먹고 자고 있어.”

“어쩐 일로 환약이 아니라 수면초를?”

“머무는 곳이 어딘지 알아 버려서 싸웠거든. 안 재우면 내가 괴롭히게 될 것 같아서.”

“아아, 조심했어야지.”

말라비틀어진 손이 푸석한 금발을 쓸어 귀 뒤로 넘겼다. 레테의 앙상한 손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팔찌가 걸려 있었다. 웬만한 귀족들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고가의 장신구였다.

헤일라를 기만한 대가로 리안에게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기껏 도왔는데 좋은 성과가 안 나오면 내가 속상해.”

“…….”

“좀 더 완벽하게 속였어야지. 나처럼. 넌 항상 마지막이 서투르더라.”

“일 처리를 그따위로 해 놓고 뻔뻔하게 지껄이네.”

원래 약속된 건 헤일라의 뺨을 치는 정도였다. 칼을 휘둘러 며칠간 앓을 상처를 내는 건 리안의 계획에 없었다. 충격받은 헤일라를 꿰어 내 잠시 집에서 빼 와 그녀가 저를 더 의지하도록 하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나도 그렇게까지 다칠 줄은 몰랐거든. 어쨌든 잘된 일인 것 같은데? 신전에 가둬 두면 너도 더 편할 테고…… 죽을 정도도 아니었잖아.”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리안이 천천히 레테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윽!”

리안이 순식간에 레테의 목을 쥐고 뒤로 밀어 침대에 파묻히도록 했다. 그리고 빠르게 레테의 몸 위에 올라 옆에 있던 베개를 빼어내 레테의 얼굴 위에 갖다 댔다.

“헤일라의 몸에 손을 대는 건 내 허락을 받았어야지. 그 앤 내 건데.”

“웁! 으웁!”

그는 그대로 힘을 가해 지그시 얼굴을 눌렀다. 이대로 오 분만 있어도 질식사한다. 보드라운 면에 눌려 생명이 꺼져 가는 기괴한 소리가 방을 채웠다. 리안은 만족에 차서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레테는 아래에서 바동거리다가 리안의 손등에 제 손을 올려 필사적으로 긁어 댔다.

신음 소리가 점차 간헐적으로 변한다. 리안은 인간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를 떠올리다가,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레테에게도 좋은 일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조금 했다. 동생을 팔아넘겨 제 욕망을 채우려는 행태를 고려하면, 레테는 죽은 제 부모의 뒤를 따라 생을 마감하는 쪽이 어울렸다.

“아, 미안. 다른 생각을 조금 하느라.”

“헉, 흐윽…….”

하지만 역시 처음 계획대로 하는 쪽이 저답다. 리안은 누르던 손을 거두고 베개를 아래로 던졌다. 아무리 헤일라에게 정신이 팔려 있다고 해도 차근차근 일을 처리하는 게 옳았다. 그녀가 생각보다 타격을 받아 헤어지자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모든 계획이 틀어질 정도의 변수는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죽이기에는, 이제까지 들인 수고가 아까웠다. 이 계집과 몇 년 전부터 거래하면서 헤일라를 움직이고, 또 그녀 앞에서 숱하게 연기해 왔으니까. 그는 널브러져 개처럼 헥헥대는 레테를 내려다보면서 눈을 휘었다.

“다시는 시키지 않은 일을 해서 번거롭게 만들지 마.”

가까스로 호흡을 찾은 레테가 제 목을 쥐고 더듬거렸다. 리안은 부드러이 레테의 금발을 쓸어내렸다. 헤일라의 머리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머리 색에 그의 다정함이 섞여 들었다. 소름 끼치는 손길이었다.

“너, 하, 역시 미친놈이야.”

“하하.”

리안은 퍽 유쾌한 얼굴이었다. 정말로 재미있는 말을 들은 표정이었다.

“너는 아닌 것처럼 말하는데.”

“나처럼 진창에서 구른 년이 미치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기적 아니겠어? 공작 아들로 태어나 호사 누리고 산 누구와 비교하면 섭섭하지.”

“그 미친놈한테 동생을 착실히 팔아넘기면서도 뻔뻔해. 그 점이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만.”

리안은 무익한 대화를 얼른 끝내고 싶은지 곧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주머니에서 종이에 곱게 쌓인 무언가를 꺼내 레테에게 건넸다. 목을 가다듬으며 그걸 펴 본 레테의 얼굴이 옅게 찌그러졌다.

“매일 붉은 조각을 하나 먹고, 삼 일에 한 번 검은 약초를 먹으면 돼. 각혈을 유도하는 독, 그걸 해독하는 명약이니까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러다가 죽으면?”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그럴 일은 없어.”

리안이 안타까움을 담아 미간을 찌푸렸다.

“흐응.”

“이번에 성공하면, 넌 바라던 대로 신전에서 평생 치료받으면서 살게 돼. 물론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호사를 누리면서.”

헤일라는 영영 못 보겠지만. 리안은 마지막 말을 삼켰다. 그건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레테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둘이 가장 처음 ‘거래’를 시작했을 때 리안이 알려 주었던 바니까.

“신전으로 날 보내야 한다고 헤일라를 꿰어 내려는 셈이구나.”

“비슷해.”

레테는 평온해 보였다. 실상 레테의 치료를 담보로 헤일라의 모든 것을 취하려는 속내를 빤히 알았음에도 분노하지 않는 낯이었다. 그녀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안 될걸. 날 떨어뜨리고는 살지를 못하는 애라서.”

“……마치 그러기를 바라는 사람 같은데.”

“현실이 그래.”

오만한 눈빛. 리안은 가끔, 헤일라에 한해 저런 눈을 하는 레테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지긋지긋해하면서도 동생이 자신에게 보이는 책임감에 저열한 희열을 느끼는 게 고스란히 비쳤다. 헤일라 앞에서 가증스럽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동생을 증오하기만 하는 것 같은데, 이런 순간에는 꼭…….

리안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다. 헤일라를 사랑하는 것도, 헤일라가 사랑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는 리안 휴리트 하나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만들 작정이었다.

“모르는 일이지. 우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

“…….”

“네가 죽으면 평생 함께 살기로 약속했어.”

오늘 그와 대면하고 처음으로, 레테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것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리안은 짜부라진 벌레를 으깨는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짐밖에 안 되는 언니가 아무리 발악해 봐야, 마지막에 옆에 남는 건 나라는 걸 그 애도 아는 거지.”

레테의 고개가 아래로 조금 기울었다. 리안은 그녀가 아주 조금쯤은 비참함에 찌그러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쿡.”

그러나 돌아온 건 천박함을 띤 웃음소리뿐이었다. 레테와 리안의 눈이 마주쳤다. 고요함이 폭풍처럼 둘 사이를 헤집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레테 쪽이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

“근데, 내가 살아 있는 한 헤일라는 절대 날 못 버려.”

레테가 제 윗옷 가장 첫 단추를 끌렀다. 그리고 옷을 약간 젖혔다. 목 끝까지 올려져 있던 천이 내려와 쇄골 아래쪽까지 드러냈다.

“이거에서 절대 못 벗어나.”

흉측한 반점이었다. 검은 반점들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미 병증은 생명의 모서리까지 침범한 게 분명했다. 리안은 저 병을 알고 있었다. 지독한 불치병.

보통 매음굴의 여자들이 주로 걸리는 성병 중 하나였다. 저 병을 얻으면 매음굴에서도 쫓겨나게 될 정도로 지독한 병이었다. 반점이 몸에 퍼진 뒤에는 몸이 썩어 들어간다. 한 점의 동정도 비치지 않고 관찰하는 리안이 우스운지 레테는 낄낄거렸다.

“이건 동생을 살리려는 갸륵한 우리 부모의 몸부림 때문에 얻은 거거든.”

늙은 귀족의 후처로 헤일라를 보내 한몫 챙기려 했던 부모들. 그리고 헤일라가 걸린 돌림병. 그 병을 낫게 하기 위해 필요했던 돈. 헤일라보다 외모가 못한 레테를 사창가에 팔아 돈을 마련한 부모. 그 돈으로 병을 극복하고 건강한 몸을 찾은 헤일라.

병을 얻은 대신 자유의 몸이 되어 부모를 죽인 레테. 가족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사는 가여운 헤일라. 그래서 헤일라는 언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그것이 자신을 갉아먹는 일이라 할지라도 망설임이 없었다.

“내가 시켜서 그 구질구질한 머리로 몇 년간 돌아다니는 꼴을 보라고.”

외모를 꾸미지 않는 것도 오직 레테 때문이었다. 레테는 어느 날, 헤일라의 머리칼을 잡아채 서걱서걱 잘라 냈다. 지저분하게 잘라 만든 앞머리를 보고 황망해하는 헤일라를 두고, 그녀는 저가 되었다고 할 때까지 그 꼴로 다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도 이상으로 앞머리가 길어질 때마다 쥐어뜯듯 머리칼을 잘라 냈다. 그럼에도 헤일라는 조용히 복종하는 쪽을 택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리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는 곧 여상한 태도로 말을 받아쳤다.

“글쎄. 그래도 신전에 기어들어 가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으면 헤일라가 널 버리기를 간절히 바라야 할 거야.”

“…….”

“징그럽도록 실리를 따지는 편이니 잘 알겠지만.”

“그래…… 하지만 신의 뜻은 우리의 바람에 있지 않다고들 하니.”

제국의 유명한 격언이었다. 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일어났다. 당장 레테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방을 나갔다.

잠시 사늘한 공기가 여자의 주변에 감돌았다.

남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던 레테는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모든 표정을 지우고 천천히 풀어진 단추를 잠갔다. 그리고는 모든 게 지루한, 초연한 노인 같은 나른함을 두르고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멍청하긴.”

너나 헤일라나 사랑에 눈이 멀어서…… 레테는 입을 위로 쭉 찢어 비죽 웃었다. 저를 경멸스러운 눈으로 깔아보던 리안의 눈빛이 떠올랐다. 신전을 담보로 그녀를 겁박하던 모습도. 그 속에 담긴 동생에 대한 염려도.

레테는 그 점이 너무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신전에서 받는 치료 따위, 레테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건데. 그녀가 정말 원하는 건 언제고 단 하나였다.

“그 애는 내 거야.”

헤일라가 누구를 선택하든 그녀는 영영 제 것이었다. 그 아이는 나에게 매여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위로가 되는 신의 안배.

레테는 남자가 집 밖으로 나간 걸 침대와 붙어 있는 창문으로 확인한 뒤, 그것을 힘겹게 열었다. 총총, 난간에 앉아 있던 작은 새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의 손길이 익숙한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가냘픈 손 위로 올라왔다.

레테는 능숙한 손길로 새의 왼발에 묶여 있는 끈을 풀어냈다. 협탁에 놓아둔 물컵 안에 끈을 넣고 몇 번 흔든 뒤 꺼내 이불 위에 펴 놓으니 점점 불어나며 작은 종잇조각이 되었다. 그 위에는 울긋불긋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흐응.”

레테는 문자를 주욱 읽어 내린 뒤 흐물흐물해진 종이를 잘게 찢어 새의 앞에 내밀었다. 전서구는 축축한 조각이 제 먹이라도 되는 양 빠르게 먹어 치웠다.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그녀는 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리고 날아가지 않는 새를 향해 속삭였다.

“얼른 네 주인에게 돌아가렴.”

어울리지 않는 친절한 음성이 작위적이다. 작은 새는 여전히 고개를 까닥이기만 하면서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레테는 드물게 장난기가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가기 싫으니? 응?”

그러고는 손 위에 작은 생명을 얹은 뒤 창밖으로 부드럽게 던졌다. 미물에게 향해야 할 곳을 일러 주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돌아가야지, 공작가로.”

그 새끼의 아비가 기다리잖니. 마지막 말을 다 읊조리기 전에 새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레테는 허공을 자유롭게 유영하던 새를 더듬듯 멍하니 바라보다가 창문을 부드럽게 내려 닫았다. 나붓하게 침대에 등을 기대는 모습은 고요함을 머금고 있었다.

레테는 자신이 지금 무슨 기분인지 느리게 되짚어 보았다. 모든 게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음에도 머릿속에 선들이 제멋대로 뒤엉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저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속내는 신도 모를 만큼 깊고 아득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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