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뱀 하나
“오백 다르트라뇨? 저번 달에는 백이면 됐잖아요!”
얼핏 분이 서린 목소리가 신전 앞 약재상에 퍼졌다. 길게 늘어진 줄 가장 앞에서 목까지 시뻘게진 계집애 하나가 두 손을 옹골지게 쥐고 따졌다.
“한 달 새에 다섯 배를 올리면……!”
“미안하지만 신전 방침이야.”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를 지키는 노인은 매정하게 항의를 쳐 냈다. 귀찮음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에는 노련함마저 엿보였다. 그는 앞을 막고 서서 귀찮게 구는 여자애 뒤를 흘긋 살폈다. 소매가 다 닳아빠진 남루한 옷이 계집애의 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듬성듬성 무성의하게 잘려져 눈을 덮고 있는 덥수룩한 앞머리. 얼마나 추녀이면 저렇게 얼굴을 가리고 다닐꼬. 굳이 머리칼을 들춰 보고 싶지도 않을 만큼 행색이 말도 아니었다. 노인은 짜증을 섞어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안 살 거면 그냥 가지. 너 말고도 사려는 사람은 넘쳐.”
뒤를 보라는 듯 턱짓하는 몸짓은 얄밉기 짝이 없다. 계집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면서 주머니를 뒤적였다. 세 시간 넘게 줄을 선 데다가, 약을 사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리라. 눈 아래까지 수북이 덮인 앞머리가 파르르 떨렸다.
“……여기요.”
내민 돈은 칠백 다르트였다. 지루한 낯으로 앉아 있던 노인은 내밀어진 돈을 보고는 호오, 하고 다시 손님을 훑었다.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한 건 둘째 치고, 웃돈을 얹어 주는 요령까지 익힌 걸 보면 보통은 아닌 여자였다.
약재상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약초나 환약에 잡초 같은 가짜를 섞어 양을 불리는 걸 아는 거다. 자주 거래하는 이들은 웃돈을 얹어 주는 방식으로 제대로 된 약을 얻어 냈다.
“제대로 된 거로 내놔요. 어머니가 많이 아파요.”
사실은 언니였지만, 이쪽이 동정심을 자극하기는 조금 더 쉬웠다. 노인은 알겠다며 주문받은 약재를 찾으러 뒤를 돌았다. 곧이어 약품을 담은 한 묶음의 보자기가 앞에 놓였다.
“13구역의 53번, 104번째 집이에요.”
그녀는 노인의 물음도 기다리지 않고 언제나 읊던 인적 사항을 늘어놓았다. 약을 사기 위해서는 살고 있는 집의 주소까지 하나하나 기록해야 하는 제국의 법도 때문이었다.
“이름.”
“이름은 필요 없었잖아요.”
“신전.”
얼핏 계집의 입에서 심한 욕설 비슷한 것이 흘러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노인이 고개를 들기 전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헤일라.”
그녀는 제 이름을 말하고 미련 없이 뒤돌아 쌩하니 갈 길을 갔다. 그 뒷모습이 퍽 야무졌다.
* * *
헤일라는 품 안에 보자기를 꼭 안고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신전의 앞이라고는 하지만, 그곳을 지키는 호위들은 평민들 따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귀한 약재를 도둑맞는 일이 빈번했다.
뭣 모를 때에는 소매치기에게 당하거나 약재상들의 횡포에 울고불고하기도 했었지. 과거를 떠올리자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래도 그때 즈음, 모두가 한통속이라는 걸 빠르게 깨달은 자신이 조금 대견스러워졌다. 동시에 착잡함이 가슴께를 뻐근하게 만든다.
그녀는 조금 걷다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지점에 다다랐다. 수도의 중심에 자리 잡은 세니르 신전의 정문. 부담스러울 정도로 하얗기만 한 건축물의 정문은 그 또한 백색의 철문이었다.
귀족이나 신관이 아니면 감히 발도 들여놓을 수 없는 아주 견고한 문. 그리고 그 옆엔 남루한 이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들은 높은 담벼락 앞에 몸을 말고 신을 향한 경배와 소망을 쏟아 내고 있었다.
“여전하네.”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헤일라는 불쾌감이 인 얼굴로 빠르게 발을 놀렸다. 언니 레테의 약을 사는 일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괜한 것을 봐 기분만 버렸다.
“신전 같은 건 망해 버렸으면.”
부루퉁하게 중얼대면서도 누가 들을세라 빠르게 입을 닫았다. 소심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타론 제국의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신은 자신의 힘이 담긴 성물과 신전으로 제 존재를 증명해 냈다. 때문에 신실한 제국민들 앞에서 불경한 말을 하는 건 위험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엄연히 말하면 신이랑 신전은 좀 다르지 않나? 게다가 신의 이름을 앞세워 의술을 독점한 비열한 신관들은 비렁뱅이가 되어야 마땅했다. 그걸 인정치 않는 게 더 나쁜 거다. 약값을 또 다섯 배나 올린 신전에 대한 분노가 차오르며 헤일라는 보자기를 더 꽉 안았다.
“아……! 사제님……!”
그때 신전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마차 하나가 눈에 띄었다. 신관들이 타고 다니는 백색 마차였다.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돌려 마차 쪽에 대고 몸을 굽혔다 일으키기를 반복했다. 신의 말을 받는 신관을 신처럼 떠받드는 타론 백성들이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었다.
“흥…….”
웃기지도 않아. 헤일라는 부러 이죽거리고 뒤돌아서 빠르게 걸었다. 예언 조금 받는다고 신처럼 행세하고 다니는 이들에 대한 질투이고 시기였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열등감이었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헤일라는 저 빈민들과 함께 레테가 신의 선택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신관이 되면 원하는 치료를 모두 받을 수 있으니까. 헤일라는 아픈 언니가 나을 수만 있다면 신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일 정도는 우스웠다.
그러나 신을 고깝게 여기는 헤일라의 미운 마음 때문인지 신은 자매를 굽어살피지 않았다. 예견된 불행이었으나 그 뒤로 헤일라는 신과 신전 둘 다를 미워했다.
“집에나 가자.”
이래서 여기 오는 게 싫었다. 무익한 생각만 하면서 저를 탓하게 되니까. 그녀는 발걸음을 조금 더 빨리 놀렸다. 얼른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레테가 먹고 싶다고 하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몸을 닦아 준 다음에, 집을 치우고, 또…… 그다음에는…….
“헤일라.”
흙길을 거닐던 발이 멈추었다. 강박처럼 이어 가던 계획의 마지막 즈음에 존재를 드리울 뻔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듣기 좋은 미성으로 헤일라를 멈추게 한 남자는 나긋한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다.
날이 더운데도 단정한 검은 머리칼과 옷매무새는 집에서 나갈 때와 같았다. 키가 너무 커서 정면으로 쳐다보면 가슴팍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조금 꺾어 올려다보니 그가 낮게 웃으며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땀에 젖은 긴 앞머리를 옆으로 살짝 넘기니 아래로 둥그렇고 선한 눈매가 드러났다. 앞머리를 걷어 냈을 뿐인데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둥그런 이마 선과 나폴나폴 귀여운 눈썹, 아래로 약간 쳐져 쓰다듬어 주고 싶은 눈과…… 그 중심이 자리 잡은 선명한 금색 눈동자. 그는 혼자서만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다시 머리칼로 눈과 이마를 덮어 버렸다.
살이 닿으니 쑥스러운지 헤일라의 목이 아래로 수그러졌다. 그녀는 처진 고개를 약간 사선으로 돌리며 웅얼댔다.
“……오늘 일 바쁘다고 했잖아.”
“일찍 끝나서 마중 나왔어.”
“고마워. ……리안.”
리안은 헤일라 자매와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다. 몇 년 전 죽어 가던 리안을 헤일라가 구해 준 뒤 쭉 동고동락했다. 언니 레테와는 끔찍하게 사이가 나쁘지만, 헤일라가 의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헤일라의 짐에 자연스레 손을 가져다 댔다. 불퉁한 얼굴이지만 싫지는 않은지 그녀도 못 이기는 척 보자기를 넘겨주고는 나란히 서서 걸었다. 항상 같은 길을 지나는 둘은 익숙한 흙길을 지나 낮은 산의 초입에 들어섰다. 그녀의 집은 산 중턱에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 없었어?”
헤일라는 습관처럼 그의 하루에 관해 물었다. 그 모습이 꼭 제 아이의 하루에 관해 되짚어 보는 어미 같았다. 남자는 그녀를 흘긋 보고 단조로운 어투로 대답했다.
“아무 일도.”
느긋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였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헤일라의 긴 머리칼을 슬쩍 잡아 손끝에 말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그때 기다란 상처 하나가 눈에 그녀의 눈에 띄었다. 리안의 손바닥에 피가 굳은 흔적이 있었다.
“야, 너, 여기…….”
“아아.”
“무슨 반응이야, 이건? 안 아파?”
“아파.”
거짓말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한. 헤일라는 불퉁해져서는 미간을 모았다. 거짓말이고 아니고를 떠나, 상처를 달고 다니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실 그녀는 가까운 이들의 모든 고통을 탐탁잖아 했다. 아픈 이를 가족으로 둔 탓이다.
“조심해야지. 아, 여기 넣어 놨는데…… 잠깐만.”
그녀는 주머니 안을 뒤적거리다가 꼬질꼬질한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오래돼서 모양은 이래도 항상 깨끗하게 세탁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리안의 손에 둘러 주었다.
그녀는 꼼꼼하게 처치를 끝내고 다시 걸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요즘은 잘 하지 않던 질문을 입에 담아 보기로 결정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랑은 이제 좀 친해졌어?”
“별로.”
그럴 줄 알았으나 놀랍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였다. 헤일라는 약간 길게 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이제 막…… 얼굴에 물건 집어 던지거나 그러지는 않지?”
“응.”
진짜? 정말로? 과거 그가 레테에게 사과를 집어 던졌던 기억이 떠올라 살짝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노련한 조련사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추궁하고자 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마음에 안 들어도 말로 잘,”
“폭력은 안 써. 네가 싫어하니까.”
“……그럼 왜 다쳤는데?”
결국, 묻고 싶은 말이 터졌다. 그녀는 볼록한 앞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헤일라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알려 주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그런 와중에 다쳐서 오니 걱정이 배가 됐다. 일하는 곳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싸움질한 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까지 들었다. 언니에게 드러냈던 폭력성을 떠올리면 영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잘 지내야 하는데. 섞여 들 줄 알아야 하는데.
시름에 가까운 상념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났다. 익숙한 잔소리쯤으로 치부하던 리안도 헤일라가 그를 올망졸망한 눈으로 계속 탐색하자, 못 이기겠다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름도 다 외웠고, 네가 저번에 준 쿠키도 다 같이 나눠 먹었어. 다들 고맙다고 했고. 문제없어.”
모두 헤일라가 그에게 알려 준 ‘사람들과 친해지는 비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리안은 헤일라를 달래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그녀의 말을 잘 들었는지 요목조목 설명했다. 그 모습이 퍽 진지해 헤일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손은 짐 옮기다가 조금 다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아프지만.”
“알겠어. 말해 줘서 고마워.”
전부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안심이 됐다. 일일이 가르친 보람이 있다고 작게 중얼거리자 리안이 피식 웃었다.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는 거야. 나는 네가 일하면서 그걸 배웠으면 좋겠어.”
줄줄 이어지는 잔소리가 언뜻 보면 지나칠 수 있지만, 헤일라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축에 속했다. 리안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죽여 버린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 남자였다. 무력을 사용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 버릇을 고치고 보통의 사람처럼 행동하게 하는 데는 그녀의 공이 컸다. 헤일라는 속으로 흐뭇해하며 잔소리를 이어 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항상 하던 말을 덧붙였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랑도 잘 어울려 살아야 할 거 아냐.”
말을 맺어 놓고 조심스레 그의 낯을 살폈다. 리안은 그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자주 언급을 해 놔야 마음의 준비를 하기 쉬울 것이다. 헤일라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리안을 집에서 내보낼 때가 다 되었다. 언제까지고 제집에서 데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법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녀는 언제고 그런 의중을 담아 대화를 흘려보내곤 했다. 지금도 그런 순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리안은 이에 동요할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큰 손이 헤일라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래, 넌 사교적인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
동그란 어깨가 움칠 튀어 올랐다가 곧 그녀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런 뜻이……!”
“레테가 나으면 모임에도 종종 나가자고.”
그 말에 소금 뿌린 물고기처럼 튀어 올랐던 헤일라가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아, 그는 이제 어리숙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질이 나빴다. 헤일라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레테가 나으면.
그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헤일라만큼 리안도 잘 알았다. 그러니 레테에 관해 말을 건넨 이유 또한 빤했다.
“아아, 그런데 레테는 요즘 어때?”
제 심기를 거스른 데 대한 유치한 보복이었다. 리안이 원하는 답은 뻔했다. 레테의 발열과 발작이 요 근래 심해진 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약간 날카로워진 헤일라는 가볍게 눈을 흘긴 뒤 최대한 얄밉게 받아쳤다.
“좋아지고 있어. 열도 내렸고 오늘 아침엔 죽도 다 비웠는걸.”
“다행이네.”
“아마 더 나아질 거야.”
“그래, 이제 좋아질 일만 남았지.”
끝까지 얄미웠다. 그러나 레테에 대한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도 더 이상 애매한 방식으로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 헤일라는 침묵하는 리안을 흘금 보다가 삼 년 전에 그가 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언니는, 죽이는 쪽이 깔끔하지 않겠어?’
그 말을 하던 소년은 건조한 낯이었다. 서로에게 애정이 없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몰인정한 태도였다. 그는 눈물까지 그렁대며 씩씩대는 헤일라의 반응을 보고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눈치채지 못했었다.
물론 함께 지낸 지 삼 년이 넘어가는 지금도 레테에 관해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리안은 정말로 꾸준히 레테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가끔씩 은근하게, 레테 없는 세상을 가정하는 모습만 봐도 속내가 빤하게 보였다.
“그런데 신전에 관심 있어?”
별안간 질문하는 리안에 헤일라가 무슨 뜻이냐는 물음을 담아 그를 응시했다. 눈 아래까지 내려간 앞머리 가닥 사이로 동그란 타원형의 선한 눈매가 드러났다. 리안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가 닫혔다. 그는 신의 사과를 훔쳐본 무구한 소년처럼 시침을 떼고 제 말을 이어 갔다.
“아까 신전 앞을 유심히 보길래.”
“……그냥. 신관이 되면 원하는 치료는 다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아아. 그는 알 만하다는 듯 밋밋한 음성이었다. 모든 행위가 언니라는 작자와 연결된 헤일라에 약간의 염증을 내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예언이 내려올 거라면 벌써 내려졌을 거야.”
“나도 알아.”
신관으로 선택받기 위해서는 미래를 읽는 예언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받는 때는 보통 열다섯 살 전이었고, 그 이후에 능력이 발현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헤일라도 레테의 열다섯이 끝나는 해에 신전 앞에서 몸을 말고 틈틈이 기도하던 정성을 멈췄다.
리안이 작은 손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이 부드럽고 말랑한 손을 적당한 힘으로 단단하게 쥐었다. 헤일라는 못 이기는 척 힘을 풀고 제 손을 맡겼다. 그의 접촉은 암울한 생각을 할 때마다 묘하게 안정을 도왔다.
“식사하고 호수에 가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황금빛의 긴 머리칼이 함께 팔랑거렸다. 리안과 함께 살게 된 후로부터 매일 기다리는 소소한 낙을 떠올리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밤바람을 맞으며 호수에 발 담그는 감촉은 분명 상쾌할 테다.
이전 같았다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쪼그려 앉아 조금 울다가, 집에서는 레테가 퍼부을 폭언을 가늠하면서 음울하게 걸었을 것이다.
리안과 함께 있으면 턱 끝까지 차오른 물이 가슴께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헤일라는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리안이 자신과 함께 지내 주기를 바랐다.
어차피 그는 떠날 사람이었으니까.
* * *
헤일라는 나무 결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든 닳고 닳은 나무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리안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들릴락 말락 한 한숨만 내쉬고 다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그가 떠난 자리를 음울하게 흘긋 보고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지만, 천천히 문을 열고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자마자 마르고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일라의 언니인 레테였다.
“어디 다녀와?”
“신전에. 약이 다 떨어져서.”
시장에 들러서 언니 좋아하는 과일도 잔뜩 샀어. 헤일라는 쾌활하게 말하면서 침대 맡에 작은 쟁반을 놓았다. 레테의 식사였다. 오랜 시간 정성을 다해 뭉근히 끓인 수프와 속이 편한 으깬 감자 요리가 따뜻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흐응.”
레테는 그저 콧소리를 한 번 내고 숟가락을 들었다. 진하게 끓여진 수프를 휘적거리다가 입안으로 한 입 넣고 우물거렸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점성이 입안 가득 고였다.
“어때? 맛 괜찮지?”
헤일라는 계속 조잘거렸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언니의 시중을 드는 동생은 항상 쾌활하게 말을 걸고 언니의 기분을 살폈다. 다리를 쓰지 못해 답답할 레테에게 바깥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일이 제 몫이라 생각하는 아이였다.
“좋은가 봐?”
“언니랑 있어서 좋지, 그럼.”
헤일라는 다정스럽게 레테의 손등을 쓸었다. 멀거니 그걸 내려다본 레테는 앙상한 제 손과 동생의 손을 비교해 보았다. 단단하고 혈색 있는 손톱에 보드라운 손등. 도톰한 살결. 레테는 마른 나뭇가지가 흔들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듯 제 손을 동생에게서 빼냈다.
“……이제 일은 안 나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헤일라는 꽤 큰 식당의 부엌에서 조리하는 일을 맡았다. 비죽비죽 잘려져 있는 긴 앞머리와 허름한 차림새 때문에 고용인은 그녀를 절대 손님에게 내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주방 구석에서 조용히 음식만 만들었었다.
말도 안 되는 봉급을 받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일해야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그 일이 꽤 마음에 들었다. 식당 주인은 아랫것들을 착취하면서도 게을러서 가끔 식재료 한두 개를 빼돌려도 잘 들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켜서 죽도록 얻어맞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헤일라는 그 직장에 감사했다. 언니가 굶지 않도록 식사를 내어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젠 나가지 않지. 헤일라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리안은 자매의 집에 머무는 대신 결코 적지 않은 돈을 주었다.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돈이 필요했고 리안은 숙박비라 생각하라고 간단하게 맺음 지었다.
그 돈을 모아 두어서 몇 개월은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셈이 섰다. 그래서 몇 달 전부터 헤일라도 일을 그만두었다.
무엇보다 레테에게는 간병인이 필요했으니까.
헤일라의 모든 판단과 생활은 레테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리안에게 갖는 부채감보다는 이쪽이 중했다. 헤일라는 자신이 없을 때 레테가 고독하게 죽어 갈까 매일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순간 레테의 눈빛이 변했다.
“너, 그 새끼한테 다리 벌리고 화대 받아?”
단순한 조롱이 아니다. 레테는 날카롭지만 이성적인 얼굴이었다. 일순 헤일라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가늠하면서 점점 안색이 파리해졌다. 믿지 못하는 눈이다. 둘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미지근했던 공기가 과열되어 눈앞에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무슨…….”
“다리 벌리고 돈 받냐고 묻잖아.”
“그만해, 언니…….”
“옷 벗어 봐.”
헤일라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저와 같은 색의 또렷한 금안이 번들거리는 것을 보니 파드득 소름이 일었다. 이러지 말라고 중얼거려도 레테는 옷을 벗으라고 소리 질렀다. 제 눈으로 확인해야 멈출 패악이었다. 이럴 때마다 무서웠다. 선득하고 서럽다가, 또 언니의 숨이 넘어갈까 염려되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벗으라고!”
퍽, 스튜를 담은 접시가 동그란 머리를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 좋은 금발에 누런 스튜가 질질 흘렀다. 먹기 좋게 미리 한 김 식혀 둔 게 천운이었다.
잠시 중심을 잃은 헤일라는 휘청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언니를 마주 봤다. 여전히 분노에 차 있다. 침대 위에 있는 손이 떨리는 이유는 분을 못 참아서겠지. 헤일라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학습된 무기력이었다.
“알았어.”
그녀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윗옷 단추를 푸는 손이 달달 떨렸다. 무슨 기분인지 저도 알기가 힘들었다. 어릴 적 언니와 함께 목욕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언니가 옷도 벗겨 주고 머리도 감겨 주었는데. 왜 그때가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다.
눈물이 흐르니 뺨에 묻은 스튜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발로 문대면서 언니에게 다가갔다. 레테는 꽤 강한 힘으로 팔을 끌어당겨 동생의 벗은 몸을 샅샅이 훑었다. 목덜미, 가슴, 등허리와 엉덩이, 사타구니까지 모조리 확인한 뒤에야 헤일라를 밀쳐 냈다.
“네가 어떻게 구르든 내 알 바 아니야.”
“…….”
“그래도 창녀가 되는 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레테는 동생을 증오했다. 적어도 헤일라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녀는 저뿐만 아니라 동생까지 절망으로 난자되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면서도 동생이 완전히 망가질까 전전긍긍했다. 자신처럼 될까 봐 두려움에 압도되었다. 가끔 헤일라는 레테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었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후두둑. 눈에 매달려 있던 투명한 방울들이 떨어졌다. 레테의 일갈을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는 어떤 말도 돌지 않았다. 헤일라의 눈이 레테에게로 향했다. 식은땀 때문에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잔머리, 오랜 병치레로 핼쑥해진 볼, 푸석한 머리칼, 그 아래, 이제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붉은 반점들…….
헤일라는 레테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대고 엄지로 느리게 쓸어 주었다. 이마를, 눈 옆을 지나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어 주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어릴 적 동생이 흥분하면 그녀를 달래기 위해 레테가 종종 쓰던 방법이었다. 헤일라는 장난기 많은 어린애였고 언니는 혀를 차면서도 동생을 건사했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알아.”
하지만 그런 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헤일라가 레테의 삶을 갉아 먹고 살아남았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그녀는 언니를 사랑하며 영영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흥분감을 가라앉히느라 가쁘게 호흡하던 레테는 눈알을 굴려 저를 쓰다듬는 동생을 느리게 훑었다. 그리고는 매섭게 손을 쳐 냈다.
“저거나 치워.”
헤일라의 눈이 곧바로 엉망이 된 바닥으로 향했다. 오래된 집이라 저렇게 두면 쥐나 벌레가 들끓을 게 뻔했다. 얼굴과 옷매무새를 대충 정리한 헤일라는 방구석에 준비되어 있는 마른걸레를 들고 왔다.
“잠시만. 금방 치울게.”
뜨거운 수프에 언니가 데이지는 않았는지, 옷에 묻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확인한 뒤 헤일라가 한 말은 이게 다였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내가 죽기를 바라지?”
얇은 음성이었다. 헤일라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언니를 올려다보았다. 레테가 자조한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죽어 버리면 그 새끼랑 둘이 영영 살 셈이잖아.”
“무슨 소리야. 왜…….”
“글쎄.”
레테는 입꼬리를 약간 올려 웃었다. 최근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몇 년 전, 그래도 둘의 세계가 단단했을 때에나 가끔 흘리던 웃음이었다. 다정하고 무른 동생의 순진함을 조소하면서 꾸짖는.
“레테, 내 언니.”
헤일라는 어질러진 바닥을 닦다 말고 레테의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언니의 마른 손을 쥐고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언니야.”
“…….”
“언니를 버리는 건 나를 버리는 일이야.”
단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헤일라는 신이 앞에 있다 해도 이렇게 맹세했을 것이다. 레테는 그녀의 세계였다. 단 하나 남은 혈육이었으며 자신의 희망이었고 동시에…… 죄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이 오히려 생기를 돋우었다. 레테는 고요한 얼굴로 헤일라를 훑다가 이내 손을 빼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헤일라의 흰 뺨을 문질렀다. 눈물이 옮아 붙은 손끝이 촉촉해졌다.
“그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 * *
“……언니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
씻기 위해 호수로 향하던 중 헤일라가 툭 던진 말이었다. 리안은 어두운 길에서 헤일라가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살피다가 달갑지 않은 화제에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왜?”
“자기가 죽기를 바랐냐고 묻더라. 또, 그러고 나면 너랑…… 살 거냐고…….”
레테의 허상을 짚는 일이었지만 괜히 쑥스러워 뭉개듯이 이야기했다. 리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번에 심하게 앓아서 무서웠나 보지.”
헤일라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레테가 그렇듯 리안도 레테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따뜻한 손이 헤일라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생각을 끊는 리안의 방식이었다.
“사실 본인이 죽기를 가장 바라는 건 레테일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지.”
화를 내기보다는 어르고 달래 가르치려는 말투였다. 이제는 리안에게 결핍되어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그는 가족에게 갖는 애정에 관해 먼지만큼의 관심도 공감도 하지 못하는 이였다.
헤일라에게 애착을 가지게 된 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건조한 소년이었다. 그러니 이럴 때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알려 주는 게 필요했다. 그녀는 리안과의 대화법을 어느 정도 익히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다음에 한 말은 그녀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어차피 평생 나랑 살 거잖아.”
그의 엄지가 헤일라의 손등을 뭉근하게 눌렀다. 놀란 헤일라가 파드득 떨며 제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제힘으로 빼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당황해 빼액, 소리쳤다.
“수, 수작 부리지 마!”
수작. 레테가 리안을 표현하는 말에는 꼭 저 단어가 들어갔다. 레테는 리안이 헤일라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다며 경멸을 드러내곤 했다. 저도 모르게 내뱉었는데 꽤 상황에 맞는 말이었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재미있다는 듯 헤일라의 머리칼을 몇 가닥 들어 올려 돌돌 돌리는 손가락이 길고 단정했다. 몇 번 튕기듯 부드러운 결을 쓰다듬다가 살살 정리해 주는 손길은 익숙해 보였다. 그의 손끝이 목덜미를 살짝 스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몰라. 나 먼저 씻는다.”
시냇가가 보이자마자 헤일라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욕실이 없는 집에 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목욕할 수밖에 없었는데, 리안이 오고 난 뒤부터는 한 명이 망을 봐 주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약속이 되었다. 몸을 씻을 때마다 전전긍긍했던 헤일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물론 서로의 몸을 보지는 않았다. 그냥 수풀 뒤에서 망을 봐 주는 정도였다. 어쩌다 한 번 실수로 그의 몸을 본 적은 있지만…… 헤일라는 그때가 떠올라 일순 얼굴이 붉어졌다. 아주 단단하고 자신과는 많이 달랐던 몸. 자잘한 상처가 언뜻 보였지만 매끄럽고 근육이 잘 잡혀 있었다. 그 몸을 기억해 내자 목덜미까지 빨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 앉아 있을게.”
리안이 눈가를 휘며 웃었다. 아. 씻다가 눈이 마주쳤을 때도 꼭 저렇게 웃었는데. 다 아는 사람처럼 여유롭고 뭉근한 호선을 그리면서.
저런 얼굴을 마주하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일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고개만 주억거리게 되었다. 왜 내가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풍덩. 헤일라는 시원한 물에 몸을 담가 열을 식혔다. 굴곡을 띤 나붓한 몸이 물속을 유영했다. 따뜻한 물을 쓰지 못해 얼른 씻고 나가야 감기에 걸리지 않을 터였다. 헤일라는 꼼꼼하게 씻은 뒤 몸을 일으켰다.
그때, 리안이 지키고 있던 반대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몸의 반 이상을 드러내고 있던 헤일라는 깜짝 놀라 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요란하게 울렸다.
리안이 빠르게 몸을 놀려 소리의 주인을 추격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손에서 무언가 반짝, 하고 빛났다.
* * *
누가 물을 뜨러 왔다가 길을 잃었나? 헤일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추워. 그녀는 리안이 얼른 다른 이를 쫓아내 주었으면 했다. 약간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사이에 재빠르게 움직여 옷을 껴입었다.
대충 머리를 닦고 소란이 일었던 쪽으로 향했다. 리안이 누군가의 입을 막고 위에 올라타 누르고 있었다. 아래에 깔린 남자는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으나 별로 힘을 쓰지는 못했다. 리안은 제 뒤에 다가온 헤일라를 흘긋 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단도였다.
“……너…….”
“아, 혹시 몰라서.”
그는 별 의미 없다는 투였지만 헤일라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단도로 뭘 하려고. 헤일라의 정색에도 리안은 어깨만 들썩였다. 그녀는 둘에게 다가가 리안의 아래에 깔린 게 누구인지 살폈다. 분명 다짜고짜 힘으로 찍어 눌렀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까.
“아, 이 애…….”
“으아아아아아!”
헤일라가 뭐라 입을 떼자마자 아래에 깔려 있던 남자애가 리안을 뿌리치고 일어나 달려 나갔다. 많이 놀랐는지 오른쪽 신발 한 짝이 벗겨졌는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팔꿈치로 리안을 쿡 찔렀다.
“잘했어.”
“뭐가?”
“일부러 놔 줬잖아. 쟤 내가 아는 애거든. 과일 가게 데미 아저씨네 둘째야. 길을 잘못 들었나 봐. 많이 놀란 것 같으니까 다음에 신발 갖다주면서 사과해야겠다.”
이야기는 거기서 끊겼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헤일라는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기가 신경 쓰여 툭툭 털었다. 그러다 땅에서 눈을 떼지 않은 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애가 지나간 발자국이 남은 방향을 바라보는 눈이 어딘가 낯설었다.
“너도 얼른 씻어.”
그의 손을 뒤에서 쥐니 마주 잡아 왔다. 리안은 헤일라의 젖은 머리를 보고는 수건이 있는 자리로 걸음을 옮겨 머리 위에 얹어 주었다. 수건 위로 손을 얹어 천천히 쓸어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 냈다. 거의 다 닦여 물이 떨어지지 않게 되어서야 그는 몸을 씻으러 들어갔다.
그날 만난 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일주일 뒤였다.
* * *
사위는 적막했다. 리안은 퀴퀴한 동굴 안쪽에서 단도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벌건 물이 손에 가득 묻어 찐득거리는데도 동요가 없었다.
“눈은 그대로 두라니까. 다 돈인데.”
베르디안이 투덜거렸다. 제국의 후작치고는 가벼운 말투였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끅끅거리는 남자를 발끝으로 몇 번 쳤다. 리안이 부탁했다기에 직접 ‘회수’ 작업을 하러 왔는데 제 친우는 저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리안은 저가 도려 내어 난자한 눈알을 발로 으깬 뒤 칼을 깨끗하게 닦기만 했다.
“그럼 이건 우리가 가져간다?”
루데인 후작가에서 주최하는 암시장에서는 인간의 장기가 매매 대상이었다. 신전에서 치료를 받을 돈이 있어도 이식할 장기는 언제나 부족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암시장에서 장기를 사고팔았다. 물론 그들의 뒤에는 거래를 묵인하는 황가와 신전이 있었다.
현 루데인 후작인 베르디안은 직접 밀매에 참여한 적은 없던 리안이 시신 한 구를 넘기겠다고 했다기에 궁금증이 일어 찾아온 참이었다.
“아직.”
“여기서 더 상하면 제값 못 받을 텐데.”
그는 공작의 아들인 리안이 아비와 척을 지고 가문을 나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알고 있었다. 죄질이 더러운 수배범들의 팔다리 힘줄을 끊어 놓고 브로커들에게 파는 일을 주로 했다. 그 브로커들은 고깃덩어리를 해체해서 암시장에 가져다 팔았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의 반절은 웬 계집애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리안이 눌러앉아 산다는 다 쓰러져 가는 집의 주인이라 했다. 이름이, 헤일라라고 했던가. 얼마 전에 리안이, 정말로 주기 싫다는 얼굴로 조잡한 쿠키 하나를 건네며 말했던 이름이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상관없어.”
피를 두어 방울 볼에 묻히고 해사하게 웃는 낯이 기괴했다. 상념에 잠겼던 베르디안은 리안의 얼굴을 보고 잠시 주춤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부터 의뢰받은 건은 시신이었으니 상관없었다.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는 법이거든.”
헤일라가 가르쳐 줬어. 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눈알이 뽑힌 남자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었다. 남자는 몇 분간 속에 고여 있던 토사물을 게워 내고는 꺽꺽댔다. 눈이 파이면서도 저가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 알지 못해 속으로 비명만 질러 댔었다.
“읏, 큽…… 크흑…… 사…… 사려…… 살려 주세, 으…….”
남자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꾸물꾸물 기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피 섞인 침이 줄줄 흘렀다. 처참한 광경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안타깝다 느끼지는 않았다.
리안은 신음 소리를 들으며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에 혈향 가득한 숨이 꽉 찼다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미안. 그건 안 돼.”
“아, 으, 아아, 흐으으…….”
“요즘 계속 헤일라를 쫓아다녔잖아. 창문 너머로 흘긋거리다가 나랑 눈 마주쳤었지?”
“으, 자, 잘못…… 했, 어요…… 아, 아…….”
리안은 몇 시간 전에 이 남자의 눈에 담겼던 헤일라의 벗은 몸을 떠올렸다. 동그란 물방울처럼 부풀어서 귀여워진 젖가슴에 낭창한 허리선, 그 위로 금발이 쏟아져 꼭 인외존재라 착각할 만큼 고아했다.
저도 처음 본 몸이었다. 한 번 본 걸로 좆물이 질질 흐를 만큼 애가 달았다. 이 새끼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니 배알이 뒤틀렸다.
헤일라는 알지 못했지만, 이 남자는 한 달 전부터 그녀를 따라다니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집 주변을 맴돌거나 헤일라의 동선을 파악하려 애쓴 증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무엇보다.
“너, 이전에도 고아 계집애 한 명을 따라다녔었잖아.”
보호자가 없는 여자 하나를 납치해 강간하고 죽인 이력이 있는 놈이었다. 나름대로 뒤처리를 잘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도시에는 눈이 많았다. 들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는 이들이 문제 삼지 않은 것뿐이다.
리안은 이런 쓰레기가 헤일라에게 접근하려고 한다는 사실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다. 얼른 헤일라를 붙잡는 것들을 정리하고 안락한 곳에 가둬 두고 싶다.
일단, 이 버러지부터 처리하고.
베르디안은 눈을 뽑아 팔라고 저를 구슬렸지만 헤일라의 나체를 담은 눈을 이 세상 어딘가에 구르도록 둘 수는 없었다. 난자하여 깨끗이 없애는 게 마땅했다. 그리고 눈 다음은, 무가치한 생명을 없애 헤일라와의 모든 연을 끊어 내야만 한다.
“얌전히 있어. 금방 끝나니까.”
리안은 바둥거리는 남자를 누르고 다리 사이에 축 처진 성기를 잡았다. 미리 준비해 둔 무딘 칼을 꺼내 기둥을 잘라 냈다. 스걱 스걱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렸는데, 베르디안은 역겹다며 투덜대면서도 눈을 떼지 않고 히죽댔다.
“아아악! 악! 아악!”
“시끄럽네. 역시 거기서 안 하기를 잘했어.”
그 애는 비명 소리를 싫어하니까. 리안은 성기를 천천히 잘라 내며 피식 웃었다. 마침내 성기가 완전히 몸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남자의 숨은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리안은 그 남자의 머리칼을 쥐고 입안에 잘린 성기를 그대로 처박았다. 그리고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천으로 입안을 메우고 다시 재갈을 물렸다. 기도가 막혀 기괴한 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아마 몇 분 이내로 저 남자는 숨이 부족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제 성기에 목이 막혀 죽는다니. 이보다 더 개죽음일 수는 없었다.
“수거할 애들도 생각해 줘야지.”
베드디안은 낄낄대면서 마음에 없는 말을 뱉었다. 그 또한 정상은 아닌지라, 이런 광기 짙은 순간들이 견딜 수 없이 즐거웠다. 소금에 절여진 미꾸라지처럼 팔딱거리는 고깃덩이의 다리 사이에 붉은 피가 번지고 있었다.
“미안.”
리안은 베르디안의 타박에 성의 없이 사과했다. 기척 없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베르디안의 수하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가뿐하게 일어서서, 남자의 숨이 끊긴 것을 확인하고 숨을 들이켰다. 피 냄새가 밴 공기가 다시 폐부에 들어찼다. 헤일라의 말간 얼굴이 스치듯 지나갔다. 동시에 괴물의 피가 흐른다는 아비의 저주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물론 환상에 불과했지만, 어쩌면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죽 웃은 리안은 피로 절여진 몸을 씻기 위해 동굴을 나섰다. 아마 그는 살육을 저지른 밤이 다 가기도 전에 헤일라의 침상 옆에 자리할 것이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 * *
리안은 곧 무너질 것 같은 집의 나무 문을 잡아 열었다. 기름칠이 덜 된 문에서 기이한 소리가 났다. 다행히 이 집에 사는 자매들은 잠귀가 아주 어두운 편이라, 누구 하나가 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리안은 저가 머무는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헤일라에게로 향했다. 허락을 구하지 않고 문을 여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여자는 곤히 자고 있었다. 꼭 이불을 덮고 베개에 오른쪽 얼굴을 파묻고 자는 게 습관인지 언제나 이런 모습이었다. 말랑한 볼이 보드라운 천에 눌려 입술 모양이 오므라든 게 가슴을 간질일 정도로 어여뻤다.
약간 드러난 얼굴은 달빛이 반만 비추어도 환하게 빛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아래, 이불 위로 나붓하게 휘어진 굴곡이 그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 낮에 보았던 동그란 가슴이 저도 모르게 그려졌다.
리안은 천천히 이마 선을 쓰다듬다가 눈 옆을 문질렀다. 반짝거리는 금발 때문에, 헤일라는 태양 빛을 반사하며 빛나는 모래알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실선의 감촉을 아끼면서 여자의 머리카락 한 움큼에 입을 맞추었다.
“하…….”
아래가 도독하게 차올라 있었다. 리안은 헤일라가 새근거리며 내쉬는 숨이 닿는다는 상상만 해도 서는 사내였다. 그는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제 바지를 내렸다. 퉁겨져 나온 성기는 이미 투명한 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리안은 종종 하던 대로 헤일라의 무구한 얼굴을 앞에 두고 수음할 작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바지춤에서 삐져나온 투박한 천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낮에 그녀에게서 받았던 손수건이었다. 그걸 들어 제 코끝에 가져다 대니 헤일라의 품 안에서 나는 깨끗한 향기가 퍼졌다. 손안에 있는 성기가 점점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흐읏…….”
리안은 그 천으로 제 아래를 감쌌다. 꼭 헤일라가 작달막한 손으로 자신을 자극하고 있다는 착각이 일었다. 볼에 오도독 소름이 돋으면서 눈 아래가 발긋해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위아래로 놀리면서 엄지로 귀두 끝 구멍을 깔짝거렸다.
헤일라가 직접 벌려 쑤셔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멀었다. 리안의 목에서 신음이 샜다. 아무리 오래 기둥을 쓸고 쥐어짜도 쉽게 다다를 수가 없었다. 그는 헤일라의 침대에 얼굴을 묻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부볐다. 그녀의 향기가 더 필요했다.
“아, 헤일라…….”
으음. 그때 헤일라가 뒤척거렸다. 리안은 침대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인 채로 제 한 손과 방정하지 못한 아랫도리를 가렸다. 헤일라의 촘촘한 속눈썹이 팔랑거리면서 선명한 금안이 드러났다. 그녀는 제 침상 옆에 앉아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를 보고도 그다지 놀란 낯이 아니었다. 리안의 방은 외풍이 심해서, 추운 날이면 그는 종종 헤일라의 방에 이불을 깔고 잠을 청했기 때문이었다.
“어디…… 아파……?”
잠에 푹 빠진 목소리가 몽롱했다. 헤일라는 얼굴에 붉은 기가 도는 리안을 보고는 열이 오르는 거냐고 물었다. 꿈과 현실 그 어딘가를 착각하며 웅얼거리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아니, 그냥 추워서. 나 오늘 여기서 잘래.”
“응…….”
그녀는 배시시 웃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리안은 천천히 오른손을 움직여 꺼덕거리는 제 성기를 쓸었다. 잔뜩 새어 버린 투명한 물 때문에 축축해진 손수건은 윤활제처럼 그의 움직임을 도왔다. 척척대는 소리가 조금씩 방 안을 울렸다.
헤일라의 눈이 다시 뜨이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찌릿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아…… 헤일라.”
“으응?”
“손수건, 못 쓰게 됐어.”
리안이 정액 범벅이 되어 버린 손수건을 손으로 주무르며 생긋 웃었다. 허연 액체가 나무 바닥에 느릿하게 떨어졌다. 비린 향이 조금씩 올라온다. 이 천진한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눈을 찡긋거리면서 웅얼거렸다.
“괜찮아.”
그리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리안은 나른하게 웃으면서 다시 침대보에 제 얼굴을 묻었다.
“헤일라…….”
인내하는 밤이 너무 길었다.
* * *
“아, 오늘은 사과가 좋다고 해서 이걸로 사 왔어. 엄청 달지?”
헤일라는 레테의 옆에서 조잘거리면서 한 입 크기에 맞춰 잘라 둔 사과를 포크에 찍어 주었다. 레테는 따분한 얼굴로 그걸 조금 받아먹다가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며칠 내내, 장 볼 때를 제외하고는 시중드는 동생이 옆에 있어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평소라면 시끄러우니 입 닫으라고 일갈했을 텐데 오늘은 그저 듣고만 있다.
“그리고 또 엄청난 소식도 들었어. 수도에 소문이 쫙 퍼졌다고 하더라고. 펠든 백작이라는 사람 이야기인데…….”
“신의 검을 쓴다고 선언한 사람 이야기라면 이미 알아.”
헤일라의 입이 조가비처럼 딱 다물렸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끔뻑대는 동생의 멍청한 얼굴에, 레테는 혀를 차면서 침대 옆 협탁의 일간지를 턱짓했다.
“이미 대문짝만하게 실렸어.”
“아아! 그렇구나.”
내내 집에만 있어야 하는 레테 때문에, 일간지는 항상 구해 두었는데 그걸 빠짐없이 읽고 있었나 보다. 레테는 일간지 쪽을 보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멍청한 놈이지. 배가 부르니 정신 나간 짓을 해 대는 거야.”
“음, 그래도 뭐…… 정말 좋아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최근 수도를 달군 이야기의 주인공인 펠든 백작은, 저가 구애하며 쫓아다니던 리아이 영애가 사랑을 받아 주지 않자 신전에서 검을 쓰겠다고 공적인 자리에서 밝혔다. 너무 충격적인 선언이었기 때문에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신의 검은 세니르 신전에 꽂혀 있는 신의 전유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흑색과 백색이 오묘하게 섞여 칼날의 빛이 울렁대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검이었다. 그것을 사용자의 심장에 꽂아 넣으면 상대를 향한 특정 감정을 구슬의 형태로 도려낼 수 있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물건 중 하나로 꼽혔다.
“구슬을 여자한테 바치겠다고 했다며? 그러다 숨넘어가 봐야 정신 차리지.”
레테가 푸석한 머리칼을 꼬아 넘기며 조소했다. 헤일라는 언니가 심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하기는 힘들어 입을 다물었다.
신은 전능하지만 자비롭지는 않아서, 자신의 신물을 허락 없이 사용한 인간을 용서치 않는다. 타론 제국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신의 검을 사용하는 데 성공하면 원하는 감정을 없앨 수 있지만 검을 쓴 대가로 저주를 받는다. 상대를 향한 마음을 도려내면, 그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서도 영영 느끼지 못하는, 감정의 영원한 소멸. 그것이 저주였다.
그러나 제 감정과 마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복수심에 치받는 이들이 종종 신의 검을 쓰겠다 나서고는 했다.
“안 죽을 자신 있으니까 일을 벌인 거겠지, 뭐.”
“흐응.”
그러나 귀족들이 사용을 꺼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진짜 문제는 실패했을 때였다. 상대에 대한 감정이 거짓이어서 검을 쓰는 데 실패하면 그대로 심장이 꿰뚫려 죽음을 맞이했다.
검이 뽑힌 자리에 구슬이 탄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죽음이었다. 그래서 신의 검을 사용하는 의식은 제국민들의 큰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제 목숨을 걸고 증명하는 사랑, 뭐 그런 건가…… 유치한데.”
레테는 나른하게 눈을 내리감다가 사과 하나를 더 포크로 찍어 건네는 헤일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말간 눈에는 다른 사심 따위 비치지 않았다.
“너는 어때.”
“응?”
“넌 써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뭘?”
“세니르 신전에 있다는 검.”
헤일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이내 언니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물었다는 데 조금 감격해서 숨을 가득 들이켰다가 푸우, 하고 내쉬었다.
“음, 아니. 딱히 없어.”
“왜.”
“응?”
“……아냐.”
레테는 시선을 사선으로 긋고는 사과를 우물거렸다. 헤일라는 조금 갸웃거리다가 사과를 하나 더 깎기 시작했다.
“오늘 사람이 하나 왔던데.”
문득 생각이 났다는 말투였다. 헤일라는 움찔 떨다가 손에 쥐었던 큼직한 사과 하나를 떨어트렸다. 그 반응에 레테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그녀는 동생이 긴장을 숨기는 데에는 재주가 없음을 잘 알았다.
“뭐야?”
“음…… 별건 아니고,”
“마을에 사람이 하나 없어져서, 그 가족들이 수소문하는 중이거든.”
둘 사이에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리안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 문가에 섰다.
“미안. 너무 오래 안 나오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리안은 토끼 눈이 된 헤일라를 보고 부드러이 덧붙였다. 언제나 레테의 방에서는 삼십 분도 채우지 못하고 쫓겨났는데 한 시간도 넘게 방 안에 있으니 걱정이 될 만도 했다. 리안은 몇 년간 레테의 횡포를 생생하게 지켜본 이였으니까.
“아, 응. 언니랑 이야기하느라.”
“하.”
그래도 이런 상황은 곤란해…… 헤일라는 레테와 리안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를 봤다. 레테는 바짝 벼려진 시선으로 리안을 쏘아 봤다.
“멀쩡한 거 봤으면 알짱거리지 말고 꺼져.”
“하하. 성격은 여전하네.”
가벼운 표정이었지만, 리안 또한 감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헤일라는 분위기를 전환시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입만 웅얼대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둘 사이에 끼면 꼭 기 센 짐승들 사이에 눌린 소동물이 된 것만 같았다.
“그래서, 누군데?”
“응?”
“없어졌다는 사람.”
헤일라는 바로 답하지 않고 텀을 두었다. 그녀는 언니에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쩌면 누군가 죽었을지도 모를 상황에 관해서는 적당히 함구했다. 환자가 있는 집은 으레 그러하듯 죽음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과일 가게 둘째 아들.”
산에 오르는 걸 마지막으로 아무도 못 봤대. 리안이 드물게 친절을 베풀어 설명까지 덧붙여 주었다.
“죽었겠네.”
“아, 언니!”
“왜? 흔하잖아. 산에서 나자빠져 뒤지는 거.”
레테는 가볍게 말하고는 미간을 모았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헤일라는 리안을 내보내려고 눈짓하기 위해 잠시 고개를 돌린 채였다. 얼른 나가라고 고갯짓하자 리안은 어깨만 들썩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저 고집쟁이.
“그런데 그 애 네가 아는 애 아닌가?”
언니는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었다. 헤일라는 얼마 전에 저가 조잘거렸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냥 보냈어. 리안도 예전처럼 막무가내는 아니더라고.’
리안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는 언니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종종 그런 식으로 칭찬하곤 했는데 하필이면 이렇게 연결됐다. 낭패다. 헤일라는 아직도 자리를 떠나지 않은 리안을 힐긋거렸다. 지금이라도 제발 나가 줬으면.
“저 새끼가 죽인 거 아냐?”
“……언니!”
레테는 동생 쪽을 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리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멸시를 담아 말했다. 눈동자에 담긴 경멸이 필요 이상으로 진실했다. 둘은 만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긴장감과 울적함이 동시에 차올랐다.
“설마.”
리안은 그렇게만 답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가려나 보다. 안도감이 가슴께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조용히 처리할 능력이 있었으면 너부터 묻었겠지.”
“야!”
씩씩대는 건 헤일라 혼자였다. 오히려 악담을 주고받은 둘은 평온하다. 레테는 시끄럽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싸늘하게 명령했다.
“너도 이제 나가. 저거랑.”
그리고 땅에 굴러다니는 사과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쓰레기는 둘 다 치우고.”
손가락이 마지막으로 가리킨 건 리안이었다. 헤일라는 냉큼 사과를 줍고 자리를 정리했다. 언니가 물건을 던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이 정도에서 상황이 정리된 데 깊이 감격하며 마지막으로 언니의 이부자리까지 살폈다.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뒤를 돌려고 하는 찰나 레테의 음성이 닿았다.
“그리고, 내일은 타바에를 구해 와.”
레테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방증이었다.
* * *
숲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 했다. 사람 손이 잘 닿지 않는 깊은 산중으로 들어섰을 때 헤일라는 다시 한번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안을 돌아봤다.
“난 정말 괜찮아.”
돌아가라는 의미였다. 리안이 자신을 도울 필요는 없었다. 타바에를 찾아 산을 헤맨 지 여러 날이 지났다. 레테의 짜증은 점점 심해지고 지독해져서 오늘도 간단한 짐을 꾸려 나온 길이었는데, 리안이 방긋거리며 따라나섰다.
쉬는 날이라 바람을 쐬고 싶다나. 핑계도 이렇게 뻔한 핑계가 다 있나.
“나도 괜찮아.”
리안은 헤일라를 앞질러 걸어갔다. 밟히는 마른 나뭇잎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평소의 행동을 떠올려 보면, 아마 더 말려도 소용없을 거다. 그녀는 그냥 리안과 함께 산을 뒤지기로 마음먹었다. 저녁엔 정말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픈 목 뒤를 주무르며 다시 나무 위를 주의 깊게 살폈다. 오늘은 꼭 과일을 구해 레테에게 주고 싶었다. 심술이기는 했지만 귀한 과일이니 몸에도 좋을 테다. 언니를 끔찍하게 아끼는 헤일라는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사고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타바에인지 뭔지 하는 과일은 안 보였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곧 하늘에서 자취를 감출 시간이었다. 오늘도 분명 언니가 들들 볶겠지. 리안도 함께 찾아 주었는데 소득 없이 돌아가게 되어 의기소침해졌다. 입술이 저도 모르게 비죽 튀어나온다.
리안이 작게 한숨을 쉬고 물었다.
“그걸 이렇게까지 해서 구해야 해?”
“언니가…… 먹고 싶다고 하니까.”
타바에는 구하기 쉬운 과일이 아니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나기는 하지만 재배 환경이 까다로워 수급이 많지 않았고, 귀족가에 납품하는 물량이 대부분이라 헤일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깊은 산중에서 직접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레테의 심술이 지독한 이유였다. 리안은 보기 드물게 풀이 죽은 헤일라의 얼굴을 감상하면서 걸었다.
“어어!”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고조된 목소리가 울렸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 껍질이 잔뜩 벗겨진 나무 하나에 과일이 몇 개 열려 있었다. 타바에였다. 여섯 개의 모서리가 있고 각진 모양이 책에서 본 그것이었다. 헤일라는 흥분해서 그곳으로 다다다다 뛰었다. 다 큰 처녀가 열댓 살 먹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다.
“내가 금방 올라가서 따 올게!”
저기를? 리안에게야 쉬운 일이었지만 밤톨 같은 여자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높이였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조금 다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어디 하나가 부러지거나…… 그렇게 되면 산을 내려가기도 힘들 텐데.
만약 이 산에서 자신의 신변이 잘못되어도 헤일라는 레테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리안은 궁금증이 일었다. 지독한 실험 정신 같은 것이었다. 다리를 다쳐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로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저에게 도움을 청하는 여자를 상상했다. 묘한 만족감이 배에 묵직하게 똬리를 틀었다.
* * *
“야아!”
리안이 몽상하고 있는 사이 헤일라는 이미 꽤 높은 곳까지 올라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찔한 높이였다. 헤일라는 생각보다 능숙하게 과일에 닿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줄기가 억센지 따는 데 애를 먹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과일을 흔들어 댔다. 열댓 번 정도 강하게 자극을 주니 와직 소리를 내며 과일이 가지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불길한 소리가 리안에게까지 닿았다.
투툭.
과일과 함께, 그녀가 매달려 있던 두툼한 가지도 함께 부러졌다. 내심 이 상황을 고대하던 리안도 움칠 떨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헤일라가 떨어질 자리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행동한 뒤에 어느 정도의 부작용이 따를지도 계산하지 못한 채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몸과 제 몸이 겹쳐졌다. 무자비하게 무게를 더해 추락한 몸이 리안의 몸을 뒤로 넘겼다.
“아악!”
“윽.”
둔탁한 소리와 둘의 탄성이 섞여 울렸다. 저도 모르게 일을 친 리안은 눈을 꾹 감고 침음을 흘렸다.
“리안?”
헤일라는 저를 받치고 있는 몸을 더듬었다. 따뜻한 몸.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는 리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달았다.
“피…….”
강하게 넘어지면서 뾰족한 무언가에 살을 찢겼는지 리안의 팔과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리안은 황망하게 피 묻은 손을 더듬는 헤일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얼른 비키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헤일라는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파르르 떨더니 무언가를 확인하듯 다른 곳을 더듬댔다. 작고 말랑한 손이 남자의 몸을 구석구석 더듬으며 확인했다. 당황한 리안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그 모습만 지켜보다가 그녀의 손이 허벅다리를 더듬을 때 바짝 굳었다.
“일단…….”
“아, 피, 피가…….”
리안은 상황을 수습해 보려고 말을 건넸지만 헤일라는 혼란한 사람처럼 울먹이기만 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눈치챘을 때는 헤일라가 리안의 상처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릴 때였다.
“정신 차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헤일라는 호흡을 힘들어했다. 리안은 몸을 일으키고 맞은편 어깨에 손을 올려 눈을 맞췄다. 뺨을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명료한 목소리로 숨을 천천히 쉬어 보라고 말하자 그녀의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나 괜찮으니까.”
“응, 응…….”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진 뒤였다. 어스름이 낀 산은 어둡고 위험하다. 리안은 욱신거리는 다리의 상처를 가늠했다. 산을 못 내려갈 정도는 아니다. 그러다 생각의 향로를 전환했다.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언제나 헤일라의 하루를 통째로 갖는 일을 그렸다. 그리고 타바에를 구하러 나갔다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헤일라와 산에서 머무르게 되는 건 그의 계획에도 있는 일이었다. 단지 생각보다 빠르게 기회가 찾아왔을 뿐.
그의 동업자도 둘이 돌아오지 않으면 마땅히 신호라 여기고 약속한 대로 행동할 것이다. 리안은 오늘 산을 내려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일어…… 걸을 수 있겠어?”
“좀 힘드네.”
“그럼, 그럼 업혀!”
헤일라는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더니 몸을 낮게 쪼그려 조그마한 등을 내보였다. 업히라고 말하는 순간 내비쳤던 결연함은 한없는 진심을 담고 있어 웃음이 삐져나오지 않게 주의해야 했다.
저도 절뚝거리면서 누구를 업고 가겠다고. 리안은 속으로 혀를 차다가 낑낑거리는 꼴이 마음에 들어 느긋하게 일어나 헤일라의 뒤에 섰다. 곧 짊어질 무게를 가늠하는 헤일라가 침을 꼴딱 삼키는 모습이 훤히 비쳤다. 리안은 그것을 가엾게 여기다가,
“으앗!”
퍽 소리가 나게 헤일라의 위에 엎어졌다. 저보다 훨씬 단단하고 무거운 남자를 등에 이게 된 헤일라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리안의 다리를 손으로 받쳐 안정성 있는 자세를 만들어 보려고 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악! 흐악!”
자꾸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샜다. 리안은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지켜보다가 가늘고 긴 목에 팔을 둘렀다. 고개에 얼굴을 묻고 조금 웃었지만 안간힘을 쓰느라 정신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했다.
리안은 이제 그만 장난치고 일어나 오늘 하루 머물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떨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에 헤일라의 목덜미에 바짝 붙어 숨을 들이쉬었다. 체향이 달았다. 머리칼이 보드라워 손으로 쓸어도 보았다.
“읏…… 됐…… 됐다…….”
그런데 그때, 정말 놀랍게도, 헤일라는 리안을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족 보행을 배운 이후부터는 단 한 번도 누군가가 저를 안아 올린 적이 없었는데. 리안은 저답지 않게 당황해 입을 달싹거렸다. 되었다고, 내려도 된다고 거부하려고 하는데…….
“아악!”
“윽.”
헤일라는 십 초를 버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황한 리안은 그녀의 등에 기댄 채 그대로 넘어졌다.
“읏…… 흣…… 미안…….”
울먹임이 밴 목소리였다. 리안은 혼곤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답지 않은 장난을 쳐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나.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 이 꼴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샜다.
“푸흣…….”
헤일라는 입을 비죽거리다가 다시 제 위에 있는 리안에게 기어가 그의 팔을 살폈다. 큰 상처는 아니었는지 피가 계속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제품에서 익숙한 손수건을 꺼내 남자의 팔에 매 주었다.
“같은 게 또 있었네.”
“아, 응. 항상 쓰는 거니까.”
리안이 얼마 전 정액으로 푹 적신 손수건과 같은 손수건이다. 그는 은근한 눈을 하고 물었다.
“이거, 내가 가져도 돼?”
“뭐 별거라고.”
어디에 사용할지는 꿈에도 모른 채, 헤일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넌 이런 데를 어떻게 알아?”
리안은 어둑한 산길을 익숙하게 해치고 허름한 오두막에 도착했다. 약간 부은 발목을 한 채 헤일라에게 반쯤 기대 이동하는 모습은 의심할 것 없는 병자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가 엄살을 부린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로 리안에게 바짝 붙어 기댈 것을 요구했다. 그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일하면서 봤어.”
“그놈의 일은 대체 뭘 하는 거야?”
툴툴거리는 음성에는 은근한 궁금증이 끼어 있었다. 리안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 좀 있다가 날 밝으면 내려가자.”
밤에는 산짐승들이 산의 주인이었다. 헤일라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도 혼자 있을 레테가 걱정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몰라 식사와 물, 용변 주머니 등은 모두 준비해 두었지만 말없이 집을 비우면 언니가 걱정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때 리안이 벌떡 일어났다. 날렵한 움직임이었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는 어디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 그래?”
그녀 또한 바짝 긴장한 채로 시선을 옮겼다.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구석에서 무언가 빠르게 움직였다.
“아, 벌레.”
천천히 다가가 작은 손바닥의 반만 한 벌레를 집어 들었다. 리안은 기겁한 얼굴로 고개를 모로 돌렸다.
“너…… 싫어했지?”
어딘가 신이 난 얼굴이었다. 헤일라는 함께 산 날이 얼마 안 되었을 때 그가 식탁 아래를 기어 다니던 벌레를 목격하고 돌처럼 굳었던 사건을 기억해 냈다. 곰도 때려잡을 것 같은 리안은 조막만 한 벌레에 진저리치며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래.”
헤일라는 그에게 다가가려다 말고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보고는 장난을 멈췄다. 저 때문에 다친 남자애에게 짓궂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창문 밖으로 벌레를 던지고 벌레를 집었던 손을 윗옷에 슥슥 닦았다. 리안은 그 자리를 유심히 살폈다. 저 옷에는 절대 닿지 않겠다는 의지가 결연하게 느껴지는 표정이다. 헤일라는 픽 웃고 난 뒤 리안의 옆에 앉았다.
“야, 저런 벌레도 무서워하면 혼자는 어떻게 살려고 그래?”
넌지시 묻는 음성은 담담했다. 헤일라는 다시 리안과의 막연한 이별을 그려 보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리안의 체류는 기약 없이 길어지는 중이었지만 언제까지나 함께 지낼 수는 없다는 것이 헤일라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리안을, 아니, 그녀의 감정이 어떻든 헤일라는 리안의 발목을 잡을 마음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책임져야 할 언니라는 존재가 있었으므로. 리안에게까지 그 짐을 지우지는 않을 셈이었다.
“이제 슬슬 더부살이 생활 청산해야 하잖아.”
“내가 나갔으면 좋겠어?”
“그런 말이 아닌 거 알면서.”
“그렇게 들려.”
“……난 너랑 있으면 좋아.”
그녀의 충동적인 발언에도 리안은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헤일라를 응시하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마주치지 못하는 쪽은 헤일라였다. 고집스레 정면만 보는 볼이 조금 부풀어 있었다.
“그럼 계속 같이 있으면 돼.”
꿰어 내는 태도가 여상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곱슬거리는 금발을 손가락에 돌돌 말아 쓰다듬기를 반복했다.
“……모르는 거 아니잖아.”
“레테?”
“…….”
“아직도 알려 줄 마음은 없는 거야?”
리안은 언제나 자매의 기이한 관계에 관해 물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관계이기는 했다. 일방적인 헌신과 일방적인 착취는 가족이라기보다 노예와 주인처럼 보였다.
“……미안. 말 못해.”
헤일라는 말끝을 뭉개면서 눈을 내리감았다. 아롱아롱 맺힌 것은 필시 눈물일 것이다. 리안은 천천히 손을 얽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얽어 들어간 손가락이 뱀처럼 질기고 요요했다.
* * *
리안은 자매의 비극에 관한 실상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어쩌면 헤일라 그녀 자신보다 더 깊이. 그럼에도 능구렁이처럼 헤일라의 입을 통해 사실을 알고 싶어 했다. 그 일을 입 밖에 내는 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그는 지독하게 들러붙었다.
레테는 헤일라에게 있어 떨칠 수 없는 하나의 그림자이며 과거이고, 아마 평생 놓지 못할 끈 같은 존재일 것이다. 리안은 언젠가 심복을 통해 알아낸 헤일라의 과거에 관해 떠올렸다.
돈밖에 모르는 부모가 딸 둘을 키워 내 늙은 귀족의 첩으로 팔아넘겨 한몫 챙기려고 했다는 아주 뻔하고 지지부진한 사실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헤일라는 어릴 때부터 미색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언니인 레테는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퍽 미인이었다. 부모는 꽤나 기대했을 것이다. 계집애 둘을 버리지 않고 키운 건 오로지 팔아넘기기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헤일라는 재수 없게 돌림병을 얻게 되었고, 부모는 무엇에 ‘투자’하는 것이 더 이윤이 남을지 생각했다. 결론은 헤일라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충분한 투자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유순한 헤일라 쪽이 휘두르기 훨씬 쉽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레테를 사창가에 팔아넘긴 돈으로 헤일라를 치료하고, 이 년 뒤 레테는 병을 얻은 채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 그 공백 사이에 자매의 부모는 죽었다. 실종이라 하였으나 리안은 살인이라 단정했다. 아마 둘 중 하나가 죽였으리라. 또는 둘이 함께.
오늘 리안이 다쳤을 때 헤일라가 발작적으로 이성을 잃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남이 다치는 걸 가장 끔찍하게 여기니까.
“응, 괜찮아.”
“…….”
“그런데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면서 떠나라고 하지는 마.”
“리안.”
“나 꽤 쓸모 있지 않아?”
그는 여상하게 저의 쓸모를 운운했다. 상대의 죄책감을 자극하려는 의도이기도 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는 숙박비라는 명목으로 과한 액수를 다달이 지급하고 있었다. 리안 덕에 힘든 주방 일을 그만두고 레테를 돌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헤일라는 찬물에 감자를 씻느라 손이 다 부르트던 겨울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허리도 펴지 못한 채 감자와 흙 채소를 손질하면서 울었던 것도. 그날 받은 일당이 겨우 한 끼 식사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도.
그래서 귀퉁이가 썩은 감자를 주머니에 넣어 훔치다가 뺨을 맞거나 몽둥이로 구타당하곤 했다. 주인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을 썩은 감자였음에도 헤일라를 화풀이 인형 대하듯 때렸다.
리안을 산에서 발견한 그날도 헤일라는 주인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그러므로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리안은 그녀가 지옥인 줄 몰랐던 지옥에서 발을 뺄 수 있게 도와준 장본인이었다.
쓸모가, 아주, 많았다.
하지만 헤일라는 그의 말에 가슴이 아렸다. 원치 않았다. 리안이 자신의 효용에 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곁에 있으려 하는 게 싫었다. ……그가 상처받는 게 속상해서.
“네가 쓸모없는 인간이라도 상관없어.”
리안은 꽤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헤일라의 마음을 조각내지 않고 들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나는 언니 거니까.”
일순 둘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부는 듯했다. 리안은 잠자코 있었다. 헤일라는 조금 비참한 기분이 되어 읊조렸다.
“내 모든 건 언니 거야. 그래서 그래.”
헤일라는 멀쩡하게 모든 말을 뱉고 조금 울었다. 처음에는 티 내지 않으려 손끝으로 눈 아래를 톡톡 쳤는데 이제 그렇게는 감출 수 없을 만큼 눈물이 질질 흘렀다. 끅끅거리는 소리가 빈 오두막에 처량히 흘렀다.
“헤일라.”
“흐, 읏, 흐윽…….”
“쉬, 괜찮아.”
울다 지친 여자를 끌어안은 리안이 마른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는 조금 땀에 젖어 있는 머리칼을 뒤로 넘겨 주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헤일라는 더욱 깊게 안기며 입을 열었다.
“너도…… 다 알고 나면 내가 싫어질 거야.”
“…….”
“난…… 나쁜 애야…….”
헤일라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멀쩡하게 살아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나쁜 년이었다. 언니 목숨에 빌붙어 살아남은 파렴치한.
“아닐걸.”
“맞아.”
“그래도 상관없어.”
헤일라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색색대는 꼴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리안은 그녀를 더 꽉 껴안았다.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남자였다.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지.”
그리고 누구 거든 상관없어. 그가 하는 말 모든 게 달았다. 지난했던 모든 세월이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헤일라는 리안과 함께 있을 때마다 괴로운 일들을 잊을 수 있어 행복했다. 짓눌리는 기분이 아니라서 모든 순간이 평온했다.
허리를 조여야 한다는 이유로 다섯 살 때부터 습관적으로 자매를 굶기던 부모님도, 언니를 팔아넘긴 돈으로 꾸역꾸역 살아남은 자신도, 그런 주제에 언니를 사랑하는 나에 대한 환멸도 잊을 수 있었다.
마치 구원처럼.
“레테가 죽으면 영영 함께하자.”
그래서 헤일라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모든 게 평온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상관없었고 그저 안온했다. 남자의 품에 파고드는 말랑한 몸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좋아해.”
그러니 이 말 또한 누가 하였든 큰 의미는 없는 것이다. 여린 음성 뒤로 밤새 우는 소리가 아득하게 퍼졌다.
* * *
그대로 한숨도 자지 못하고 둘은 동이 트는 걸 지켜봤다. 리안의 겉옷을 함께 둘러매고 해 뜨는 걸 지켜본 헤일라는 포근한 밤에 꿈을 꾼 사람처럼 천천히 눈을 뜨고 다시 현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생각보다 금세 멀쩡해진 리안의 다리에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레테를 걱정하느라 아무렴 어떤가, 하고 넘겨 버렸다. 레테가 어떤 방식으로 화를 낼지 그녀도 예측할 수가 없어서 벌써 피로가 몰려왔다.
“잠시만 밖에 있어. 내가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만. 응?”
헤일라는 불똥이 리안에게 튀는 게 싫어서 그를 문 앞에 세워 두고 먼저 집으로 들어섰다. 심호흡을 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낡은 문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삐그덕거렸다. 평소처럼 애써 밝은 표정을 꾸며 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온갖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는 주방, 공기 중에 떠다니는 쿰쿰한 냄새. ……열려 있는 레테의 방문.
“언니!”
비명과도 같은 부름이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 혹시 내가 없는 새에 누가 찾아온 건 아닐까. 언니 혼자 있는 집에…… 언니를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턱이 덜덜 떨렸다. 혹시나, 아주 만약, 레테에게 어떤 일이 생긴 거라면 나는…….
헤일라는 울먹거리면서 계속 레테의 이름을 불렀다. 밖에 있는 리안을 불러야 할까? 판단이 흐렸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의 탁자 아래였다. 숨을 죽이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언니.”
레테였다. 레테가 손에 무언가를 꽉 쥔 채로 엎어져 있었다. 헤일라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쭈그려 앉았다. 언니의 생사를 확인하려 뻗는 손에 잔 상처가 빼곡했다.
“……언니, 언니, 언니…….”
피부에 닿은 몸이 차가웠다. 헤일라는 레테를 세게 흔들었다. 몇 번을 반복하자 희게 질린 레테의 얼굴이 조금씩 움직였다. 살아 있다.
“아, 아, 언, 언니…….”
“…….”
레테는 말이 없었다. 헤일라는 언니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몸을 더듬다가 하의가 조금 축축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흰 잠옷에 누런 자국이 있다. 소변 자국. 헤일라는 큰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며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웠다. 평소처럼 부축해 욕실로 데려가려 했다. 실례를 한 언니를 리안에게 보일 수는 없으니.
그때, 레테의 손에 들려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왜 돌아왔어?”
집에 하나밖에 없는 무딘 식칼.
“……언니.”
“그 새끼랑 도망간 거였잖아. 그런데 왜.”
“아냐. 아냐, 언니. 정말 아니야.”
헤일라는 레테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면서 설명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익숙했지만 이런 얼굴로 흉기를 들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헤일라는 필사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며 언니를 달래 보려 했다. 그러나 레테는 여전히 어딘가 부서진 얼굴이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으려고 한 거잖아. 병들어서 추하게 죽어 가는 나한테 질려서, 지쳐서…….”
“타바에를 구하려고 한 거라니까? 그러려고, 나랑, 리안이랑…….”
빼빼 마른 손이 헤일라의 어깨를 억세게 밀었다. 리안의 이름이 언니를 자극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 레테는 무어라 중얼대다가 손을 꽉 쥐었다. 그 박약한 떨림이 칼끝까지 전해져 날카롭게 빛났다.
희멀건 언니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눈물로 반질거렸다.
“아악!”
항상 뭉툭하고 다정한 음성만 뱉던 입에서 째지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헤일라는 칼을 휘둘러 제 목을 찌르려고 한 언니의 팔에 매달렸다. 레테는 병자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는 힘으로 동생을 밀쳐 내고 다시 칼을 자신의 목에 들이밀었다. 칼끝의 궤적이 선명한 핏방울의 동선을 자아냈다.
“제발, 제발! 언니, 흐, 언니…….”
레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 죽음을 방해하는 동생의 뺨을 무자비하게 치고 밀쳤다. 헤일라는 꽤 끈질겼다. 레테가 휘두른 칼에 손등이 베여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가 레테가 저도 모르게, 헤일라의 머리를 칼등으로 가격했다. 억센 힘이었다.
둔탁한 타격음 뒤에 비쩍 마른 여체가 뒤로 넘어갔다. 일순 모든 것이 멈추었는데 헤일라의 몸만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녀는 그대로 넘어져 딱딱한 바닥에 얼굴을 찧었다. 오래되어 나무가 우글우글 올라온 바닥이었다. 찧은 이마에서 피가 새었다.
“……헤일라.”
정적이 흘렀다. 레테는 칼을 떨어트리고는 헤일라 쪽으로 기어갔다. 얼빠진 얼굴이었다. 동생을 천천히 흔들어 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때 현관문이 삐걱대며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곳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는 남자가 서 있었다.
리안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순간 파드득, 창밖에 새 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