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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또 다른 시작 (21/21)

외전 2. 또 다른 시작

끝도 없이 펼쳐진 시전과 왁자지껄 떠들며 쉼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이곳이 바로 말로만 듣던 그 운종가가 틀림없으렷다. 볼거리가 넘쳐나 어머니께서 한때 즐겨 찾으셨다는 이곳. 오라버니들도 자주 지나다녀 이제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는 이곳.

‘그러므로 이곳은 내가 꼭 한 번 와봐야 하는 곳일 지어니.’

올해 여덟, 보들보들 뽀얀 얼굴의 재인은 구석진 곳에서 먹빛의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심호흡만 크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이곳은 자신이 한번쯤은 들러주어야 하는 곳.

‘조금만 구경하다 가는 것이야. 어머니께서도 내 나이쯤 혼자서 시전을 구경하셨다잖아!’

다홍빛 비단치마에 새하얀 저고리. 그 위에 꽃수가 놓아진 분홍빛 조끼를 입은 아이는 누가 보아도 대가댁의 귀한 아기씨였다. 허나 시중드는 몸종 하나 없이 커다란 눈망울만 요리조리 굴리며 불안해하는 모습이 하 수상쩍어 보인다.

재인은 며칠 전, 보모와 난이 그리고 저의 유모가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어린 시절 누더기를 몰래 주워 입고 시전으로 나들이를 가신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어린 재인은 그 말을 훔쳐듣고 제 멋대로 해석해버리고 말았으니.

‘얼마나 흥미로운 곳이면 그렇게까지 하셨을까?’

조막만 한 머릿속에 자리한 그 막연한 호기심은 날로 커졌고, 끝내 오늘 사달을 일으키고 말았다. 어머니와 함께 숙부 댁에 가기로 한 오늘, 꾀병으로 아픈 시늉까지 해대며 집에 남아 있는데 성공한 것이다. 현재 어머니랑 아버지는 출타 중이시고, 두 오라버니들은 글공부를 하러 집을 비운 상태였다. 보영당의 아기씨인 저는 공식적으로 오수에 들어있는 시간이니 앞으로 족히 한 시진은 자유로울 것이라.

“후우, 후우.”

재인은 어디인지도 모를 벽에 붙어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당당히 허리를 펴고 운종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기대와 설렘, 약간의 걱정이 뒤섞여 팔딱 팔딱 뛰는 가슴을 부여안고서. 그리고 정확히 일각 후,

“우아~”

‘이럴 줄 알았느니! 이렇게 신기한 곳이 가까이에 있을 줄 내 알고 있었느니!’

그나마 남아있던 죄책감마저 사라진 지금, 재인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곳저곳에 들러붙어 구경거리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야 말로 무아지경. 한 식경 만에 몰려있는 사람들을 제치고 극성스럽게 제일 앞으로 가보는 일도 척척 해낸다. 차림새를 보고 사람들이 길을 내어준 것이지만 여덟 살 어린아이가 알 게 무어랴. 그저 모든 것이 신기방기 재미있기만 하였다. 랄랄라, 콧노래가 절로 솟아나온다.

“야, 너 말 못해? 벙어리야?”

한적한 골목길. 열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들이 여린 체구의 한 남아를 둘러싸고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무명옷에 말도 못하고 낑낑대는 모습이라니. 딱 보아도 시비를 걸기에 안성맞춤인 아이였다.

“흙탕물을 튀었으면 잘못했다, 사과를 해야지. 입도 벙긋 않고 쳐다만 보면 어쩌자는 것인데?”

분명 들이미는 것은 음식을 흘린 자국이건만 사내아이는 흙탕물이라 우기며 억지를 부린다. 더 나아가 옆에 끼고 있던 서책을 빼들어 아이의 머리를 톡, 톡, 내리치기까지 하였다. 이에 당하는 아이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신경질적으로 노려보자 덩치 큰 아이는 피식, 비소까지 흘렸다.

“어쭈, 네가 더 세게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이걸 그냥……”

서책을 둘둘 말아 쥔 손으로 왜소한 체구의 아이를 한 대 내리치려 하는데, 밑에서 누군가 톡톡 제 소매를 잡아당겼다. 뭔가 해서 내려다보면 오호, 깜찍한지고. 귀한 댁 아기씨로 보이는 웬 여아가 양손을 허리 위에 척 얹더니 저를 올려다보며 야무지게 말했다.

“폭력은 나쁜 것이다.”

“너는 뭐냐?”

귀한 걸로 따지자면 저희들 또한 마찬가지. 가장 덩치 큰 아이가 여아를 따라 양손을 허리에 얹더니 새치름하게 물었다. 걸핏하면 서당을 빼먹고 운종가를 어슬렁거린 지 올해로 두 해. 모친의 손을 잡고 나온 규방의 여아들을 수없이 봐왔지만 눈앞의 저 아이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삼대 일이라니, 창피하여라.”

그들의 가슴팍에도 미치지 않을 만큼 작은 몸집이지만 재인은 위축되지 않고 또랑또랑 말을 이었다. 지나다가 우연히 보게 된 광경이었다. 아직 구경할 게 천지에 널려있어 시간이 빠듯했지만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다. 얼른 말리고 또 구경하러 가면 되는 것이니.

“쳇, 너도 혼나고 싶으냐?”

“됐고,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갈 것이다. 보아하니 칠칠맞게 음식을 먹다 흘린 모양인데 집에 가서 유모에게 빨아 달라 하여라.”

위협적인 말에도 재인은 심드렁하게 답하더니 말 못하는 소년의 팔을 잡아끌었다.

“근데 이 쪼그만 게!”

여아의 잔망스러움에 약이 오른 사내아이는 한 대 때리려는 듯 망설임 없이 팔을 치켜 올렸다. 이에 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위를 올려다보는데, 눈 깜짝할 새 목검 하나가 나타나 따닥 쳐내버렸다.

“아앙……”

눈앞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저를 때리려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어디선가 나타나 무심한 얼굴로 목검을 휘두르는 사내아이도 보였다. 혼란스러운 전개였지만 재인은 조금의 놀라는 기색도 없이 새로 나타난 아이에게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와, 예쁘다……’

허름한 무복을 입은 그 아이는 기가 막히게 예쁘장하였다. 대리암을 깎아 놓은 듯 날렵하고 반듯한 이목구비에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피부, 거기에 길쭉하고 호리호리한 체구가 인상적이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외모하면 절대로 빠지지 않았지만 여자보다 더 곱상하게 생긴 남자아이는 처음이었다.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시비 걸던 아이들은 모두 도망쳐버렸고, 예쁘장한 그 소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쯤 되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말 한마디 건네는 게 정상이지 아닐까? 해서 재인은 그 아이의 등에 대고 황급히 불러보았다.

“잠깐만 기다려!”

한데 저 아이,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내 말이 안 들린 것일까? 재인은 다시 한 번 아니, 여러 번 크게 외쳐보지만 돌아오는 건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괜한 오기가 끓어오른 재인은 후다닥 쫓아가 앞길을 가로막고 말았다.

“그냥 가면 어찌해? 이왕 도왔으면 끝까지 도와야지.”

고맙다 인사하고, 명자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다 되었느니!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살짝 상해버린 재인이었다.

재인은 무복 입은 아이와 말 못하는 아이를 잡아끌고 반 시진은 넘게 빙빙 돌아다닌 것 같았다. 말 못하는 아이가 또 봉변을 당할까봐 집까지 데려다 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제 한 몸 감당하기도 힘에 부쳤다. 귀머거리는 아니었지만 알고 보니 저 아이, 말귀도 못 알아먹고 길눈도 상당히 어두웠다. 허나 이제 보니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으니,

‘히익, 조선인이 아니었던 것이냐?’

같은 길을 얼마나 빙빙 돌았을까. 다리가 아파 조금 쉬자 하려는데 입도 벙긋 않던 그 소년, 갑자기 청국어를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명 조선인의 모습을 하고 있건만!

재인도, 검을 든 소년도, 뜨악해서 쳐다보는데 어디선가 청국인들이 나타나 우르르 달려들었다. 여러 명이 호들갑을 떨며 그에게 들러붙어 난리도 아닌 것이 아무래도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가 몰래 나들이를 나온 듯했다.

그 모습에 검을 든 소년은 시원스레 등을 돌리고 그곳을 떠나버린다. 하여 재인도 슬그머니 그 뒤를 따랐다. 말도 못 알아듣는데 거기 더 있어봤자 무슨 소용 있으리.

‘늦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늦어버린 소년이 걸음을 서두르는데 뒤에서 누군가 제 옷을 잡아당겼다. 돌아보면, 아까 쫓아왔던 그 여자아이가 게슴츠레 풀린 눈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나를 업어주지 않겠느냐? 몸이 곤하여 아무래도 업혀야겠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더니 온몸이 후들 후들, 죽을 듯이 고단하였다. 오수를 건너뛰고 한참을 걸었더니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것이다. 한데 저 아이, 답은 않고 흘끔 쳐다보기만 한다. 말을 알아듣는 거 보면 분명 벙어리는 아닐 것인데. 재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달고 있는 줌치를 꺼내 앞으로 내민다.

“공으로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값을 넉넉히 쳐줄 것이니 북촌까지만 나를 업어다 다오. 더 필요하면…… 어?”

그냥 가버린다. 저 아이,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리고 있었다.

“어디 가? ……야, 너어! ……나 다리 아프단 말이야!”

실은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발바닥도 아프고,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거늘. 서럽고 힘이 들어 눈물이 핑 돌던 재인은 결국 도와달라는 말을 대성통곡으로 대신하였다.

“으허엉…… 나 여기가 어디인지 모른단 말이다! 어머니이…… 엉엉엉…… 아악!”

한참 우는데 갑자기 세상이 뒤집혔다. 피가 머리로 몰리는 이 불쾌한 기분. 감히 보영당 아기씨인 저를 짐짝처럼 어깨에 둘러 멘 것이렷다! 재인은 방금 전 아쉬웠던 상황을 까맣게 잊고 요란하게 버둥거리며 앙앙거린다.

“이거 내려놓지 못할까! 얌전히 등에 업어야지, 누가 볼썽사납게 이리 둘러메라 하였느냐!”

쉬지 않고 쫑알쫑알, 작은 주먹으로 그의 등을 팡팡 내리치며 항의했으나 소년은 꿈쩍도 안 했다. 그런데 힘들었던 것일까. 얼마 가지도 않고 그가 재인을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막상 그리 되니 무서워지는 건 재인이었다.

“너 설마…… 나를 버리려 하는 것이냐? 나는 여기가…… 어!”

여기는 북촌이었다. 가마를 타고 다니며 창 너머 익히 보아왔던 곳. 저 모퉁이를 돌면 분명 보영당이 나올 것이니, 이리도 가까운데 있었단 말이냐. 잠시 당황스러웠던 재인은 소년의 무심함에 괜히 발끈하여 기어이 또 한마디를 보태고 만다.

“나에게 좀 잘 해주면 아니 돼? 어찌하여 여인을 그리 험히 다루는 것이냐! 내 너처럼 무엄한 아이는 처음 보았느니라. ……뭐, 그래도 ……오늘은 정말…”

“꼬마,”

고맙다고 말하려 하였다. 일관되게 무람없긴 했지만 오늘은 정말 여러모로 고마웠다 감사를 표하려 했었다. 한데 그 소년, 사람 말을 싹둑 잘라먹더니,

“……되게 시끄럽네.”

한심하다는 듯 퉁명스러운 한 마디를 남겨놓고 매정히 돌아서버렸다. 김재인, 여덟 살 인생에 ‘어처구니없다’라는 말을 완벽히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날 오후, 정한군의 사저에서 돌아온 은명은 보모와 함께 별당으로 가보았다. 딸아이가 오수에 들었다 여태껏 일어나지 못했다는 유모의 말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 아가!”

방에 들어선 은명은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절로 높아져버렸다. 오수에 든 지 벌써 두 시진도 넘었을 시각인데 딸아이가 자리에 대(大)자로 뻗어 거의 실신한 듯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이 아픈 것인가? 덜컥 겁이 난 은명은 재인을 품에 안아 이마를 짚어보았다.

“아가, 많이 아픈 것이냐? 응?”

“음냐, 음냐… 어머니… 소녀 피곤 하옵니……”

눈도 뜨지 못하고 중얼거린 재인은 말도 채 끝맺지 못하고 어머니의 가슴에 그대로 고개를 떨구어버린다. 그 상태로 이튿날 아침까지 일어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고되고 힘든 하루는 그렇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오늘은 전하의 탄일을 이틀 앞두고 가까운 가족들끼리 궐에서 조촐한 모임을 갖기로 한 날. 세자를 비롯해 오라버니들과 투호 놀이를 하다가 슬슬 지겨워진 재인은 홀로 동궁전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오라버니들과 세자의 배동들은 내기가 붙어 정신이 없는 상황. 함께 놀 생각시들이 어디에 있을까 하여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의 기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얍! 얏!”

딱히 할 것도 없고 심심하던 차에 재인은 자연히 그쪽으로 걸음을 하였다. 중문을 지나서 몇 발짝 더 걸음을 해보니 널따란 곳에서 한 아이가 열심히 목검을 휘두르며 수련에 전념하고 있었다. 슬쩍 동작을 훔쳐보는데 예쁘장한 저 얼굴, 참으로 눈에 익었다.

‘어라, 저 아이……’

허름한 무복과 손때가 묻은 저 목검, 그리고 여자보다 더 어여쁘게 생긴 얼굴. 달포 전, 운종가에서 보았던 그 아이가 틀림없었다. 그 아이가 얼마나 과묵했는지 고새 잊어먹은 재인은 반가운 마음에 쪼르르 달려가 보았다.

“예서 무얼 하느냐?”

“앗!”

불쑥 나타난 새하얀 얼굴 탓에 하마터면 목검으로 여아를 내리칠 뻔하였다. 누가 보아도 아슬아슬 위험했던 상황. 그럼에도 눈앞의 저 아이, 이 와중에 방긋방긋 웃고만 있다.

‘누구냐, 넌!’

집중력이 흐트러지긴 했으나 어차피 대충 마무리하고 저하께 가보아야 할 시각이었다. 옆에서 그 아이가 쫑알쫑알 거리는 듯했지만 해원은 귀를 닫아버리고 묵묵히 주변을 정리하였다. 애들이랑 놀아줄 시간 따윈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정해진 일정대로 해원은 급히 걸음을 옮겼지만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재인은 상황을 오해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제 딴에는 하도 반가워 인사도 건네고 일전에 고마웠다, 감사의 뜻도 표했건만 어찌 한마디 대꾸도 없이 저리 쌩한 얼굴로 가버린단 말인가. 뒤통수에 대고 소리도 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저가 땅에 뿌리를 박고 무심히 서 있는 나무도 아니거늘 어찌하여 사람을 이토록 무시한단 말이냐.

“내 너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야!”

결국 재인은 그 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대궐이 떠나갈 듯 소리를 질렀다. 아, 분통이 터지는 도다!

‘그러니까 저하의 무사였단 말이지?’

상감마마부터 십 수 년 간 영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할아버지까지, 모두가 모여 있는 가족들의 모임. 재인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약과를 아그작, 아그작 씹으며 세자 뒤에 서 있는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름한 차림에 뛰어난 검술 실력, 누가 보아도 어린 세자를 호위하는 무사가 틀림없었다.

‘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무슨 저명한 학자인 스승을 따라 조선에 왔던 청나라의 왕자가 나흘 전 떠났다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달포 전, 그 아이가 없어져 난리가 났었다나? 원래는 진즉에 떠났어야 했는데 집을 나갔을 때 저를 도와준 아이를 찾는다며 열흘이나 더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집 나간 아이에 관한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재인이었다. 낯선 곳에서 가출이나 하는 아이 따위, 내 알게 무어랴.

무시, 무시, 무시!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수도 없이 당해온 이 무시를 속 시원히 갚아주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재인은 소년을 바라보며 씨익, 사악하게 웃는다. 후회하게 만들어줄 것이로다.

“우리 재인이, 이리 와 보거라.”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유일한 여자아이. 거기다 외모면 외모, 성정이면 성정, 제 누이를 꼭 닮은 조카딸을 금상은 몹시도 귀애하였다. 재인이 사뿐사뿐 걸어가 예를 올리자 전하께서는 조카딸을 번쩍 안아 무릎에 앉혀주셨다.

“재인이 잘 지냈느냐? 어찌하여 궐에 자주 놀러 오지 않는 것이야. 달포에 한 번씩은 꼭 들어와야 하느니라.”

“예, 전하.”

그 다음은 익히 알고 있었다. 재인의 생일은 오늘로부터 이레 뒤. 하여 전하는 늘 이 모임에서 재인에게 묻곤 하셨다.

“그래, 곧 우리 재인이 생일이 다가오는데 이 외숙이 무엇을 해주면 좋을까? 아가, 혹 뭐라도 가지고 싶은 게 따로 있느냐?”

“예, 전하. 소녀, 꼭 가지고 싶은 것이 하나 있나이다.”

평소와 다른 야무진 대답에 어른들과 아이들이 일제히 재인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전하께서 물으시면 항상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다, 답하던 아이였기에 웬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게 무엇이냐? 우리 재인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이 숙부가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이다.”

“저 아이,”

재인이 입을 떼며 손가락으로 정확히 소년을 가리켰고, 사람들의 시선도 모두 그쪽으로 향했다.

“저 아이를 소녀에게 주십시오.”

아이들은 멍한 시선으로 해원을 바라보았으나 어른들은 잘못 보았나,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재인이 가리킨 곳에는 세자의 배동이자 전(前) 병마절도사 권혁찬 장군의 적손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가, 지금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이 아이가 지금 어디서 노비를 보고 달라는 것인가? 하지만 궁녀들이 아닌 이상, 일개 노비가 이 근처를 함부로 오가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어른들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재인은 금상의 무릎에서 내려와 도도하고 맹랑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다소곳이 걸어가 해원의 코앞에서 걸음을 멈춘 재인은 눈앞의 소년을 한 번 찌릿, 노려보고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전하, 이 아이를 소녀에게 주십시오. 보영당으로 데리고 가 소녀의 호위무사로 삼을 것이옵니다.”

내 옆에 찰싹 붙여 놓고 두고두고 무시해줄 것이다! 말도 안 시키고, 대답도 안 해줄 것이야! 재인은 뿌듯함과 기대감으로 해원을 뚫어지게 올려다보았고, 어른들은 기가 차서 입도 떼지 못했다.

감히, 권 장군의 손자를!

재인을 무심히 내려다보던 해원은 당사자가 아닌 양, 시선을 돌려 저기 저, 먼 산을 바라다본다. 아까 수련장에서 보았던 저 아이, 가만 보니 달포 전 운종가에서 만났던 바로 그 이상한 여아였던 것이다.

강직한 무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굳은 신념과 씩씩한 기상을 길러온 소년, 권해원. 십사 년, 길고 긴 인생 끝에 말 많고 시끄러운 여자아이에게 하찮은 물건 취급을 당하고야 말았으니.

‘황당하여라…….’

두 아이에게서 뜨겁고도 싸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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