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장. 흐드러진 봄날, 꽃비를 맞으며
탕약을 마시고 자다 깨기만을 수없이 반복하길 여러 날. 시간이 얼마나 어떻게 지났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며칠을 보냈을까. 몽롱한 정신의 은명은 두런두런 들리는 이야기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를 써본다. 누군가 이마와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져 주었고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주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이었다.
‘스승님?’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 눈자위가 붉어진 김서율이 곁에 있었던 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의 다리를 베고 있는 듯하다. 그 온기가 따뜻하고 포근하여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게 더 더욱 무거워진다. 결국 시야가 채 맑아지기도 전에 은명은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는데,
“온몸이 이리 불덩이 같으니…… 어린것이 얼마나 아프고 놀랐을꼬.”
‘아버지?!’
뜻밖의 목소리에 은명이 눈을 뜨고 자세히 살펴보면, 창백한 안색의 금상이 미복차림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가, 정신이 드느냐?”
“……아버지.”
딸아이에게 처음으로 들어보는 호칭에 금상은 울컥하여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중전에게는 언제나 ‘어머니’라 불렀지만 저에게는 한 치의 틈도 없이 ‘전하’라 불렀던 아이. 한번쯤은 아버지라 불러주었으면, 혼자서 얼마나 바라고 또 바라왔는지.
“오냐, 아버지다…… 미안하구나, 은명아. 아버지가 미안하구나.”
따지고 보면 안빈이 딸아이를 공격한 건 전부 제 탓이었다. 지켜주고 싶었으나 도리어 상처만 주고 위험에 내몰았으니 이 죄를 다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나 기특한 딸아이는 저를 원망하는 대신 걱정의 말을 해준다.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용안이 편치 않으십니다.”
“아비는 괜찮다, 괜찮다…….”
병색이 완연했지만 어쩐지 고통에서 벗어난 듯 편안해 보이는 용안이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은명은 불길한 기분이 들어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하게 식어 내린다.
‘설마!’
은명의 얼굴 위로 불안감이 드리워지는데 금상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다. 그리고는 지평의 이름을 친히 불러보셨다.
“서율아.”
사위도 자식이라 하였으니 한번 이렇게 불러보고 싶었다. 딸아이의 짝이 저 녀석이 될 것이라 들었을 때 얼마나 안심이 되고 기뻤는지 모른다.
“예, 전하.”
“이 아이를 많이 아껴주어야 한다. 마음으로 아끼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어야 한다.”
“성심을 다 할 것이옵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래, 내 너만 믿을 것이다.”
금상은 웃고 있었지만 은명은 서늘해지는 이 마음이 너무도 무섭고 안타까워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우리 딸내미는 어인 눈물이 이리도 많을꼬.”
‘가엾은 아버지…… 소녀가 어리석었습니다. 평생토록 외로우셨을 아버지께 소녀가 먼저 다가갔어야 했는데……’
“아버지…… 부디 오래오래 곁에 계셔 주십시오. 착하고 다정한 여식이 되겠습니다.”
은명의 눈에서 눈물이 그득히 고여 넘쳤고, 임금의 눈에서도 주르륵 옥루가 흘러내렸다. 상왕으로 물러나 이 아이와 딱 일 년만 함께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손을 잡고 산책을 하고, 다정히 마주앉아 바둑도 두고, 맛있는 반찬도 밥술 위에 올려주고 싶었다. 간절히 원하고 꿈꾸지만 다음 생에서 그럴 수 있기를 기약해 보는 수밖에.
“언제나 착하고 다정한 여식이었다. 네게 아버지란 소리를 꼭 한번 듣고 싶었는데 이리 선뜻 불러주지 않았느냐. 앞으로는 아프지 않을 것이다.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 이 아비가 지켜줄 것이니.”
“흐흑, 아버지……”
“한숨 자고 일어나면 평온해 질 것이다. 이 아비가 재워줄 것이야.”
공주가 태어났다는 전언을 들었을 때 화경궁으로 곧장 달려가 보지 못했던 금상은 매일 밤 혼자서 꿈을 꾸었다. 작고 소중한 딸아이에게 아비가 직접 자장가를 들려주는 꿈. 언젠가는 꼭 자장가를 불러 줄 것이다 다짐했던 금상은 열여덟 해라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드디어 그 간절했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부드러운 손으로 딸아이의 머리를 쓸어주고, 토닥토닥 손등을 어루만지며 금상은 오랫동안 연습해왔던 자장가를 작은 소리로 읊조려 주었다.
솔솔 바람 불어오니 풀잎들이 살랑살랑
다사로운 햇살 받아 자늑자늑 달빛 받아
우리 아기 고운 아기 이불 가에 놓아주면
잘랑잘랑 미소 띠고 어여쁘게 자는구나
자장 자장 잘도 잔다, 고운 아가 우리 아가……
귀뚜라미 선율이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가을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딸에게 불러주는 감미로운 자장가였다.
달포 후, 어느 달 밝은 겨울 밤. 상복을 갖춰 입은 은명이 추운 날씨에도 밖으로 나와 소담스레 떠 있는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난 이십여 년 간 보위를 지켜온 선왕께서 승하하시어 지금은 나라 전체가 국상 중인 시기였다.
선왕께서는 승하하시기 직전, 어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석에서 일어나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직접 처리하셨다. 곧 보위에 오를 아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게 하겠다, 강한 의지를 보이셨다고 한다.
안빈은 사약을, 우참찬과 이현군, 그리고 역모에 가담한 금군과 병조의 인사들은 극형을 선고 받았다. 우참찬의 재산은 모두 국고로 회수되었는데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나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라 하였다. 처음부터 그 재산을 전부 찾아내었던 것은 아니다. 삼분지 일도 회수하지 못한 상황에서 안빈의 자백으로 비밀장소를 발견, 뒤늦게야 그가 착복해온 재산을 빠짐없이 몰수할 수 있었다.
안빈은 재산이 숨겨진 장소를 고백하며 선왕께 한 가지 청을 올렸다. 자식 된 도리로 아비가 극형을 받는 모습을 볼 수는 없으니 그 전에 자신을 먼저 처결해 달라, 부탁을 올린 것이다. 죄질은 극히 나쁘다 할 수 있으나 그동안 겪었을 심적 고통을 감안, 안빈에게는 사약이 내려졌다. 안빈의 사후, 선왕께서는 시신을 거두어 옹주의 묘 옆에 묻어주고 그 명복을 비는 제사를 지내 주었다.
모든 일을 끝내고 몸져누웠던 선왕께서 다시 한 번 힘을 내신 건 보영당의 딸아이를 보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딸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마지막으로 그를 일어나게 하였고, 좌상의 사저로 걸음하게 하였던 것이다. 은명에게 자장가를 불러주셨던 그 다음 날 새벽, 선왕께서는 기나 긴 여정을 마친 듯 편안한 미소를 띠우고 승하하셨다.
선왕의 고명대신이 되어 그 곁을 지켰던 좌상께서는 신속하게 세자를 보위에 올리고 새로운 임금, 새로운 시대를 선포하였다.
은명은 눈을 감고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다. 정신이 번쩍 들만큼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 선명한 상태로 은명은 그리운 목소리를 떠올려 보았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들려주었던 그 잊지 못할 자장가를.
‘달님…… 다음 생에 다시 한 번 인연이 닿아 범부(凡夫)로 환생한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길 빌겠습니다. 둘도 없이 가까운 부녀가 되어 아버지의 곁을 지키는 다정한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르륵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며 살포시 눈을 떠보면 밤하늘의 달빛이 유난히도 은명에게 집중되어 쏟아지고 있었다.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달님이 화답해 주시는 듯하였다.
그 이듬해 봄이 지나고 또 한 번의 봄이 찾아왔다.
두 달하고도 보름 만에 도성에 들어선 서율은 감개가 무량하여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지난해 좌상에서 영상으로 승차하신 부친께서는 지방 곳곳을 살펴보신다며 서율을 정신없이 내돌리셨다. 스무날, 달포, 석 달. 아래 지방 곳곳을 연달아 쉬지 않고 돌아다닌 후, 겨울이 되어 간신히 돌아와 보니 이번에는 왕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을 두루 살펴보고 오라나? 너무도 기가 막혀 그는 하사 받은 봉서를 손에 쥐고 금상께 쫓아가기까지 하였다.
[감찰어사는 아무나 하는 줄 아는가? 군왕의 어여쁨을 받고 있으면 감사하다 넙죽 절을 한 뒤 떠나갈 것이지 예가 어디라고 쫓아오는 것이야!]
[충청도에서 돌아 온지 사흘 밖에 되지 않았사옵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사흘이나 쉬었으면 이제 밥값을 해야지. ……박 내관, 이 인사 옆으로 새지 않게 도성 밖까지 확실히 데려다 주고 오도록 하게.]
정인의 얼굴이 아른거려 잠도 이루지 못했던 서율은 그렇게 은명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쫓기듯 도성 밖을 나서야 했다. 충청도에서 돌아와 보니 은명은 모친과 혜빈을 동행하여 온천으로 유람을 떠나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알고 보니 적은 내 가족과 처가 식구들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도착입니다. 어떻습니까, 도련님. 국밥 한 그릇 하셔야지요.”
“되었네. 내 안 먹겠다 하지 않았는가.”
뚱한 얼굴의 상전을 보며 치경은 절로 한숨이 터졌다. 재작년, 주막에 들렀다 한 술 뜨지도 못하고 숟가락을 놓아 버린 상전은 그런 말을 했었다.
[내 혼인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국밥을 먹으러 오지 않을 것이야!]
그날 이후, 혼사가 성사되지 않은 지금까지 상전은 뱉어낸 말을 충실히 지켜내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뱉은 말을 실천하는 것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길고 긴 뒤끝이었다. 하긴, 재작년에 있었던 일명, 남득평 폭행사건은 그 뒤끝의 정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행궁과 보영당에서 공주께 위해를 가하고 동료들을 버려둔 채 홀로 도주했던 인물, 남득평. 상전은 끈질기다 못해 집요한 추적 끝에 그가 숨어있는 곳을 찾아내고는 관아에 연통을 넣었다. 한데 교묘히 시간을 계산해 관졸들이 한 식경쯤 늦게 당도하도록 조작을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득평이에게 한 식경 동안 맨 주먹으로 싸워 이기면 도주를 도와주겠노라 미끼를 던졌다는 것이다. 미련한 그놈은 선뜻 고개를 끄덕거렸고, 결국 죽기 직전까지 온몸을 처참히 얻어터진 후에야 항복하고 말았다.
금상과 영상께 번갈아 불려가며 꾸중을 들은 것은 당연한 일. 그 와중에도 상전은 죄인으로 붙잡은 후에는 최상의 인권을 제공하였다며 끝까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한다.
‘얼른 장가를 보내드려야지, 원.’
치경이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젓는데 상전은 삐딱해진 눈빛으로 어딘가를 쏘아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 보면 벗들과 조잘조잘 떠들며 어딘가로 바삐 걸어가고 있는 송익현이 보였다. 익정의 아우로 어린 시절부터 꽤 가깝게 지내온 사이지만 상전은 작년부터 그를 매우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글쎄 그게 바로 나라니까. 내가 저번에 월류지에 갔다가 보영당 아가씨를 뵈었으이. 나를 어찌나 반기시던지 한참을 서서 안부를 주고받았다네.”
“그 뒤통수가 자네였다고? 시기적으로 너무 늦는데. 훨씬 이전에 어떤 사내랑 굉장히 가까워 보이셨다는 소문이거든.”
“그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인가. 자네들도 알지? 우리 형님이랑 보영당의 규수께서 늘 다정하신 거. 그 소문의 사내는 나 아니면, 우리 형님일세. 혹 누가 물어보거든 우리 형제 중 하나를 대도록 하게. 알겠는가?”
송익현, 저 녀석은 언제부터인가 제 정인을 형수님 감으로 점찍고 있는 듯했다. 딱 들어도 그 뒤통수는 바로 저이거늘, 어찌하여 어이없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단 말인가. 하도 기가 막혀 장승처럼 굳어버린 서율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저런 꼴까지 보아야 하는가.’
평소 같으면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겠지만 서율은 가차 없이 돌아서 버렸다. 부친께서 보영당을 밥 먹듯이 들락거리고 있건만 어찌하여 사람들은 저와 공주 사이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단 말인가. 눈치 없이 구는 도성 안 사람들의 행태에 서율은 천불이 오른다.
‘눈치가 없어도 어느 정도껏이어야지!’
조만간 그 사람과 손깍지를 끼고 월류지로 놀러가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칠 때까지 걷고 또 걷고야 말리라. 서율은 씩씩거리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선왕께서 승하하신지 일 년이 넘었으니 이대로 부친께 달려가 납채를 보내 달라, 조를 생각인 것이다.
‘아니지, 그 사람을 보지 못한 지 벌써 넉 달이 되어 가는데…… 보영당에 먼저 들러 애정을 확인해 보아야 할까?’
갑자기 우뚝 멈춰선 서율이 제자리에 서서 잠시 심각한 고민을 하는데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저희 집 종복과 부친의 호위무사들이었다. 저들이 운종가를 돌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것은 부친께서 불시에 보영당에 들렀으나 주인이 집을 비우고 운종가를 나돌아 다니고 있음을 뜻했다. 치경은 이미 알아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풍경에 편두통이 돋아난 서율은 손으로 한쪽 머리를 짚으며 의천 상단으로 급히 걸음을 돌렸다. 납채고 뭐고, 정인을 빨리 찾아내어 부친 앞에 데려다 놓아야 할 것이다.
가마에서 뛰어내린 은명은 난이의 도움을 받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늘은 실로 오랜만에 운종가를 실컷 쏘다니다 제륜 오라버니를 보러 갔었다. 간 김에 아정이까지 불러내어 신나게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영수가 헐레벌떡 상단으로 뛰어온 것이다.
[아가씨, 저자에 영상대감 댁 사람들이 쫙 깔려 있습니다.]
[뭐라? 오늘은 분명히 우상 댁에 가신다 하였는데! ……오라버니,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귀한 차 하나만 내어 주십시오.]
그리고는 냅다 가마를 타고 보영당으로 달려온 은명이었다. 죽어라 달려온 건 가마꾼들이었지만 긴장을 한 탓인지 은명 또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때마침 보모가 급하게 찻상을 내왔다. 준비를 끝낸 은명은 제륜에게서 빼앗아온 귀한 차를 두 손에 꼭 쥐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는 사랑채로 향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긋나긋 정숙한 몸가짐으로.
‘아, 더워라…….’
재작년 가을부터 작년 봄에 이르기까지, 은명은 영상 댁에 머물며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모조리 사로잡았다. 정경부인과 정율 처를 시작으로 그 댁 종복들을 모조리 홀려버린 뒤, 정율까지도 단번에 휘어잡은 것이다. 정이 얼마나 담뿍 들었는지 은명이 보영당으로 돌아오던 날에는 모두가 쫓아 나와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영상은 유독 힘이 들었다. 당시에는 제일 먼저 마음을 잡았노라 자신했지만 어디까지나 착각이었을 뿐. 그날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어지간히 애를 태우고 있었다. 물론, 꽤 긍정적이기는 하였다. 보영당으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무사들을 배치시켜 주셨고, 초대를 하면 무뚝뚝하긴 하지만 꼬박꼬박 응수해주셨다. 뿐인가, 언제부터인가는 지나다가도 차를 청하러 들르시더니 이제는 보영당에 은명이 없으면 찾으러 다니기까지 하신다. 해서 은명은 그냥 제 멋대로 믿고 있었다.
‘……속으로는 분명 예뻐하고 계실 거야.’
쪼르륵-
우려낸 차를 찻잔에 따르는데 긴장이 되어 손이 다 떨려온다. 여전히 무뚝뚝하셨지만 이제는 딱히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오늘 같이 잘못을 하다 걸린 날에는 심히 눈치가 보일 뿐. 그래도 지난 시간, 은명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나름의 타개책을 터득해 왔다. ……일단은 웃어야 한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그렇게 당하시고도 무서운 줄 모르고 어디를 돌아다니십니까?”
생글생글 웃으며 살갑게 말을 붙이지만 영상은 엄격한 얼굴로 응수하였다. 조신하게 찻상을 들고 들어오긴 했지만 급하게 달려오느라 발그레해진 두 뺨을 어찌 숨길 수 있을까.
“의천 상단에 귀한 차가 들어왔다 하여 가보았습니다. 대감께서 오시면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요. ……들어보십시오, 흑차입니다.”
영상은 깐깐한 표정으로 차를 시음해보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입매가 금방 부드럽게 풀렸다. 알고 보면 마음도 약하고 감수성도 풍부한 분이었다.
“어떠십니까?”
“흠…… 독특한 풍미와 부드러운 맛이 과히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요!”
여기서 자연스레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다음번에는 저 멀리 안남국과 섬라곡국이라는 곳에서 차와 향신료를 들여온다 합니다. 혹,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듣기로는 일 년 내내 따뜻한 곳이라 하던데요.”
“더운 나라이기는 합니다. 허나 안남국 같은 경우, 북쪽 지방은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있지요. 그래도 눈이 내리거나 얼음이 얼지는 않는다 합니다……”
멀고도 낯선 나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혼날까봐 조마조마했던 마음은 어느덧 희미해지고 있었다. 영상과 은명이 죽이 맞아 은근히 즐기기까지 하는 이 시간. 이야기꽃을 한창 피우다 보면 시간이 어찌 흐르는지 모를 정도로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최근 들어 영상께서는 눈매와 입매를 곱게 접으며 미소까지 띠기 시작하셨다.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고 있는 것인가…….
작년부터는 정경부인께 한시를 지어 보내기도 하셨다. 오랜 세월 조용히 곁을 지켜준 내자에게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리라. 더 없이 멋지고 또 현명하신 분. 영상을 바라보는 은명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혜빈이 댁에 오셨다는 전갈에 영상이 서둘러 보영당을 나섰다. 은명은 대문까지 쫓아 나가 대감을 배웅하고는 있지만 심장이 팔딱팔딱 뛰어오르며 꿈을 꾸는 듯하였다. 이는 은밀히 전해진 보모의 전언 때문이었다.
[나리께서 오셨습니다. 매화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넉 달 만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워하였는지. 은명이 님 생각에 넋이 빠져 있는데 중저음의 목소리가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소식을 알려주었다.
“곧 납채를 보낼 것입니다.”
“예?”
“뭘 그리 놀라십니까? 아들놈을 저리 계속 늙히실 겁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대감. 그럴 수는 없지요!”
갑자기 전해진 소식에 놀랍고도 흥분되어 은명의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올해로 스물, 여기서 더 기다려야 하나 안 그래도 불안해하던 참이었건만.
“혼사 준비는 혜빈께서 알아서 해주실 것이니, 따로 신경 쓰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저자를 나다니지 마십시오. 따로 필요하신 게 있으면 사람들을 보영당으로 부르시면 될 일입니다.”
그리고는 퉁명스레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부인에게는 전부터 어머니라 부르시더니 이 사람은 아직까지도 대감입니까?”
뜻밖의 투덜거림에 잠시 얼이 빠졌던 은명은 곧이어 이 세상을 전부 얻은 듯 환희에 휩싸였다. 하여 영상에게 달려가 출발하려는 평교자를 붙잡고 씩씩하게 외쳤다.
“저잣거리를 나다니지 않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아버님!”
서슴없이 나오는 아버님이란 호칭에 영상이 움찔하여 내려다보면 은명은 감격에 젖은 얼굴로 밝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이에 영상은 별다른 반응 없이 짐짓 헛기침을 하고는 평교자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등 뒤로 들려오는 은명의 목소리에 결국은 속웃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조만간 또 들러 주십시오, 아버님!”
큰며느리는 점잖고 듬직하여 믿음이 간다면, 은명은 여식을 하나 얻은 기분이었다. 하도 사고를 쳐대 신경이 쓰이고 손이 가지만 절대로 미워할 수 없는 막내딸. 가만 생각해보면 그분 또한 젊었을 적 저런 모습이었다.
완연한 봄. 사월의 풋풋한 바람에 그윽한 매화향이 불어온다. 이제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생각나는 한 사람.
‘……아마도 저 아이들의 인연이 더 강했나 보옵니다. 하여 우리가 그리 어긋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지요. 누구의 탓도 아니었던 겁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당신의 아드님도, 당신의 따님도, 이 숨이 다 하는 날까지 지켜드릴 것입니다.’
‘……바람이 되셨습니까? 그리 가시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부디 그곳에서만은 평안해지십시오.’
뭉쳐있던 응어리가 풀리고 남아있던 살얼음마저 녹아버린 지금, 영상의 가슴에 따사로운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매화꽃이 화사하게 피어있는 보영당의 매화원. 유유한 봄바람에 꽃보라가 너울거리는 가운데 시원시원하고 수려한 외모의 젊은 선비가 고아한 자태로 서 있었다. 너른 어깨와 정갈한 차림새, 거기다 반듯한 자세를 하고 있는 그 선비는 곧 저의 낭군이어라. 은명은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주체 못해 듬직한 그를 향해 두 다리를 힘껏 내달렸다.
“스승님!”
오랜만의 재회로 눈가가 촉촉해진 은명이 그에게 와락 안겨 들었고, 마음이 붕 떠오른 서율은 달보드레한 정인의 입술을 훔쳤다. 녹녹하면서도 달큰한 제 여인의 향기가 입안 가득히 퍼져 서율은 가슴팍이 간질간질해진다. 하여 나긋나긋, 부드럽게 시작한 그의 입맞춤은 조금의 틈도 없이 밀착되어 갈수록 강렬하고 농밀해져 갔다. 그리움이란 갈증에 시달려온 지난 넉 달은 잔인할 만큼 길고도 지루하기만 했다. 때문에 밤새도록 이리 입맞춤을 한다 하여도 그 지독한 갈증을 풀어내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하아, 하아.”
이윽고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은명은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하지만 하얗고 봉긋한 이마에 제 입술을 맞대고 있던 서율은 좀처럼 호흡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은명에게 또다시 입술을 요구해 왔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가느다란 허리를 꼭 끌어안고서.
조급하면서도 쉴 새 없이 퍼붓는 그의 움직임에 은명은 아찔하면서도 숨이 막혀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오랫동안 은명의 입술을 물고서 놓아주지 않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혼몽해졌을 때 그가 힘을 주던 팔을 풀고 입술을 떼더니 그대로 품속에 안아버렸다.
“잘 지내셨습니까?”
“아하…… 예, 잘 지냈습니다.”
그리움에 지쳐 그가 심술이 난 것도 모르고 은명은 곧이곧대로 답을 주었다.
“정말이십니까? 사실대로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팔도를 돌아다니느라 떨어져 지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데! 저처럼 밤잠을 못 이루는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나 그대가 없어서 적적하였다 한 마디만 해주어도 좋으련만. 그 속도 모르고 고개를 번쩍 든 그의 공주는 마냥 씩씩하기만 하시다.
“아니요, 정말 잘 지냈습니다. 어머님이랑 유람도 다녀오고, 아버님이랑 차도 마시고, 정한 오라버니랑 꽃놀이도 다녀왔습니다.”
“예. ……그러셨군요.”
아, 씁쓸하여라. 그의 가슴 한 구석에서 휑한 바람이 불어온다.
“한데 어찌하여 사랑채로 들지 않으신 겁니까? 아버님이랑 한창 재미있었는데.”
“즐거워 보이시기에 방해가 될까 기다린 것입니다.”
지나치게 즐거워 보여 내심 서운하였다, 어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 있을까. 이리로 향하며 이게 무슨 짓인가 싶기도 했지만 정인에 관한 한 길어지는 뒤끝과 좁아지는 이 아량을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다. 아마도 너무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낸 탓에 애간장이 달았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익현이 그 녀석!’
무슨 수를 쓰든 이 달 안에 납채를 성사시켜야 했다. 서두르려면 백 마디 말보다 한 자락의 빠른 소문이 더 효과적일 터.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조금 아까 떠올렸던 비책을 조만간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서율은 은명의 손을 잡더니 손깍지를 단단히 끼었다.
“산책을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산책이요? 막 올라오셔서 피곤하실 터인데.”
“아니요!”
뚱딴지같은 소리에 은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율은 펄쩍 뛰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절대로 피곤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 월류지에 가보고 싶습니다.”
수척한 얼굴에 눈 밑이 거뭇해진 그는 깍지 낀 손에 힘을 가하며 더 없이 강한 의지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의 상태가 걱정되긴 했지만 저리도 가고 싶어 하시니 어찌해야 할까. 잠시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결국 은명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그럼 잠시만입니다.”
‘납채 이야기는 월류지에 가서 해드려야겠다. 분명 좋아하시겠지?’
은명은 반가운 소식을 전해줄 생각에 방긋방긋 웃으며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반면,
‘이 상태로 아무나 딱 세 명 아니, 다섯 명만 눈을 맞추고 오는 것이다. ……흠, 수다스러운 사람들과 마주쳐야 할 것인데.’
서율은 쓸데없는 생각으로 엉뚱한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가시지요.”
꽃비가 난분분하게 흩어지는 매화원 사이로 두 사람이 깍지 낀 손을 살짝 살짝 흔들며 나란히 걸음을 옮긴다.
“참, 스승님!”
“예?”
“아시지요?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내내 그리웠습니다.”
“후훗.”
서율은 그제야 입 꼬리가 양 옆으로 찢어져라 올라간다. 서운했던 마음도 스르르 녹아내리고 몸도 마음도 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바로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한 마디의 말로도 이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그와 평생을 함께 할 단 하나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대감이 아니라 아버님이라 부르십니다.”
“아버님께서 내심 바라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제게 신호를 주시지 뭐겠습니까.”
“하여 곧바로 아버님이라 불러 드리신 겁니까?”
“물론이지요. 조금 놀라시기에 적응되라고 한 번 더 크게 불러드렸습니다.”
“하하하.”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어느 따스한 봄날, 함께하는 두 사람을 축복이라도 하듯 산들산들 포근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