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18 장. 보슬비가 내리던 어느 날. (18/21)

제 18 장. 보슬비가 내리던 어느 날.

더 없이 인자한 얼굴의 안빈이 조용히 대전에 들어와 깊은 잠에 빠져있는 금상의 머리맡에 좌정하였다. 안 첨정이 탕약에 손을 썼으니 금상은 내일 아침쯤에야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난 뒤에야.

“오늘 오전, 대비마마의 능으로 향하는 세자를 배웅하였습니다. 풋, 불쌍한 세자…… 오늘이 지 제삿날인 줄도 모르고 전하의 병구완을 하는 신첩에게 어찌나 감사하다는 말을 하던지…….”

오늘은 그동안 공들여 훈련시킨 무사와 사병들을 총동원해 세자와 정한군, 그리고 그들의 측근들까지 모조리 처단하는 날. 부친은 오직 세자와 정한군을 죽이고 이현군을 허수아비로 내세우는 일에만 몰두할 것이다. 하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천륜도 끊어버린 그의 권력욕을 채워주고자 지금까지 고분고분 협력해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 중, 고도로 훈련된 자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빼돌려져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어느덧 유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곧 있으면 세자가 있는 곳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전하, 달디 단 수면을 취하시고 일어나십시오. 내일 아침, 신첩이 제일 먼저 전하께 끔찍한 소식을 전해 올리겠나이다.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실 것입니다.”

금상을 내려다보는 안빈의 입가에 냉담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부슬부슬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는 날씨. 대비의 능에 들러 제례를 마친 행렬이 여장을 풀 남양의 행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세자의 연과 정한군의 교자 뒤를 소수의 관원과 내관, 궁녀들이 따랐고, 그 뒤를 금군들이 따른다. 말을 탄 김서율과 익위사의 관원들은 연과 교자의 양 옆으로 넓게 포진해 행렬을 전체적으로 호위하고 있었다. 제법 규모를 갖추기는 했으나 일반적인 능행차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해가 떨어질 시각. 비가 조금씩 거세지는 느낌에 동궁전의 내관이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 잠깐 사이,

피융-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며 화살이 쏜살같이 날아들었고,

“헉!”

“아아악!”

사내의 신음과 함께 궁녀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저하!”

첫 번째 화살이 날아와 세자의 가슴에 정확히 박혀버린 것이다. 모두가 세자에게 집중하는 사이 또 다른 화살이 날아와 정한군의 등을 꿰뚫어 버린다. 곧이어, 저 멀리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자가 화살에 맞았다! 모두를 죽여야 한다!”

“와아아아!”

엄청난 고함소리와 함께 수풀이 우거진 언덕 너머에서 칼을 든 사병들이 벌떼 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석칠은 언덕의 정점에 서서 세자와 정한군을 공격한 화살로 김서율의 목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백발백중, 활을 힘껏 당기며 목표물을 무섭게 쏘아보는데 단단한 바위 같던 석칠이 움찔, 어깨를 들썩이고 말았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지금, 김서율이 평온하고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정확히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그가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석칠은 모골이 송연해지는데 세자를 따르던 금군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고 있었다.

‘금군들끼리 싸움이 붙었다?’

계획대로라면 행렬의 금군들은 모두 저희를 도와 세자를 공격해야 했다. 한데 싸움이 붙었다는 건? 불안한 마음에 시선을 돌려본 석칠은 얼굴이 대번에 굳어져 버리고 만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어야 할 세자와 정한군이 몸을 일으켜 제 손으로 활을 뽑아내고 있는 게 아닌가.

‘갑옷이다! 갑옷을 입고 있었어!’

연과 교자에서 뛰쳐나온 두 사람은 순식간에 익위사 관원들에게 둘러싸여버렸다. 그리고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병조의 관군들. 그렇다면,

‘좌상이 움직였다!’

그때, 허공을 가르며 벼락같이 날아오는 물체가 있었다.

“으윽.”

석칠이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팔뚝에 격렬한 통증이 퍼져나간다. 관군의 궁수가 그의 팔뚝을 정확히 조준하여 화살을 쏘았던 것이다.

‘저들이 나를 생포하려 하는구나!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역모에 가담한 금군들을 해치운 서율은 다시 한 번 세자와 정한군의 안전을 확인했다. 노용식이 보낸 사병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하였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저 멀리, 석칠이란 자는 팔에 화살을 맞고도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며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상처 부위는 천으로 대강 동여맨 듯 보였다.

‘오냐, 행궁에서 그분을 공격한 게 바로 네놈이렷다.’

관군과 사병이 뒤엉켜 이미 피가 흩뿌려지기 시작한 수풀 길. 들러붙는 사병들과 몇 차례 검을 겨룬 서율은 저를 향해 기세 좋게 달려오는 석칠을 마주보았다. 동시에 행궁에서 아파하던 공주의 모습도 떠올랐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놈. 서율은 검을 단단히 움켜쥐고 석칠을 향해 힘껏 달려 나간다. 저놈만은 기필코 제 손으로 생포하고 싶었다.

냉혹한 미소를 짓던 안빈의 얼굴이 창백히 질려 굳어가고 있었다. 깊이 잠들어 있어야 할 금상이 눈을 뜨고 안빈을 싸늘하게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이었군. 우참찬은 그렇다 해도 그대는 아닐 거라 믿었는데.”

“저, 전하……”

“끌고 가라.”

“예!”

임금의 조용한 명에 방안 어디선가 겸사복 둘이 기척도 없이 나타나 답을 하였다. 그림자처럼 나타난 그들의 존재에 안빈은 경악하여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대전에서 짐짝처럼 끌려 나갔다. 양팔을 붙들려 내쳐지는데 대전은 이미 병조의 관군들에게 몇 겹으로 둘러싸여 엄호를 받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금군이 궐 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야 했다. 안빈의 얼굴빛이 점점 더 흙빛으로 변해 가는데 저 멀리, 금군장과 그의 측근들이 줄줄이 포박되어 끌려가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제 궁녀들 또한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것이야!’

처소로 끌려가는 안빈에게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백단향의 내음이 은은하던 안빈전은 그새 관군들이 겹겹으로 에워싼 살벌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그 을씨년스러운 곳에 홀로 내던져진 안빈은 몸이 우들우들 떨려 왔지만 실성한 여인처럼 웃음 또한 새어 나왔다.

“후후후. 예, 전하. 세자를 열심히 지키십시오. 저는 제 한풀이만 하면 될 것입니다.”

겸사복들이 내던진 대로 방바닥에 엎어져 있던 안빈이 상체를 일으키자 머리에서 무언가가 뚝 떨어져 내렸다. 내려다보면, 영롱한 금강석이 화려하게 박혀있는 아름다운 금비녀. 중전이 금상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 확신하던 날, 안빈은 그 비녀를 꺼내 머리에 꽂고 당당하게 햇살 아래로 나아갔었다.

지난 누리달, 현법사.

“마마께서 밤낮으로 애쓰고 계시다는 말은 전해 들었습니다. 저하께서도 매우 감사히 여기고 계십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안빈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서율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공손히 예를 갖춘다. 후사 하나 없이 낭군인 금상만을 바라보고 계시니 그 속내가 오죽이나 불안할까. 안쓰러운 마음에 서율은 그 자리에 머물며 멀어지는 안빈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건!’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서율은 순간적으로 강렬한 현기증을 느꼈다. 안빈의 머리를 아름다운 모양으로 잡아주고 있는 것은 노란빛의 금강석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금비녀. 이 년 전, 상아 연적과 황모필을 엿 값으로 만드는 물건이라며 제륜이 보여주었던 바로 그 비녀인 것이다.

‘안빈께서!’

서율의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빈의 아비는 우참찬 노용식. 튀지 않는 성정으로 묻힌 듯 살아왔으나 전(前) 병마절도사의 북평사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 우참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부친의 평가는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대단한 수완가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속이 음흉하고 알 길이 없어 가까이 하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인물이니라.]

음흉하고 위험한 인물! 그렇다면 창 과(戈), 그 글자가 뜻하는 것은? 순간 무언가 번뜩하고 머릿속을 스쳐 지난다. 양병수는 글을 깨우치긴 했지만 경서에 관한 지식이 깊지 않은 장사치였다. 대단한 뜻을 두고 사용한 글자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우참찬의 사저가 있는 곳은 벌리(伐里). 양병수는 그 글자 중 창 과(戈), 단 한 글자를 그대로 따와 그를 지칭하는 문자로 사용했던 것이다!’

아무런 논리도, 의미도 없이 단순히 가져다 쓴 글자를 그동안 이치에 맞게 풀어보려 머리를 굴리고 있었으니……. 이제껏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던 진짜 이유에 실소가 터지면서도 서율의 심장은 거칠게 고동치고 있었다. 꽉 막혀 있던 부분이 단박에 뚫려버린 것이다.

지난 더위달 자선당.

“익위사의 관원 중 믿을만한 자들을 다섯만 내어주십시오. 셋은 위쪽으로 보내고 나머지 둘은 소신이 데리고 아래 지방을 뒤져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이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바로 연락을 주십시오. 아무 일이 없다 해도 두 달 이상 좌상께서 소신을 지방으로 돌린다면 저하께서 공문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노용식을 철저히 감시하고는 있으나 워낙 치밀하고 주도면밀하여 쉽게 허점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는 일. 서율은 부친의 명에 따라 지방으로 향하는 김에 양병수와 닿아 있던 곳을 추려 직접 뒤져볼 계획이었다. 필시 그 어딘가에 사병들의 근거지가 있을 것이다.

“저하, 듣고 계십니까? ……저하!”

세자는 며칠 전부터 혼자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노용식의 거미줄 같은 인맥과 군자금으로 숨겨놓았을 추정 자산, 그리고 그간의 행적들을 꼼꼼히 확인한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그의 채근에도 세자는 얼마간의 침묵을 고수하더니 진중한 눈빛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내려가기 전, 좌상께 지금의 상황을 모두 말씀드리게.”

“아직은 발설할 단계가 아닙니다. 외람되긴 하오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친이 세력들을 움직여 노용식을 조사한다면 보다 빠르게 그들을 쳐낼만한 증거를 잡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 그렇다 해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세자에게 가져다줄지, 혹은 다른 용도로 사용할지 그 의중은 장담키 어려웠다. 세자 또한 그러한 현실을 모를 리 없었다.

“모르겠는가, 나는 지금 자네 부친에게 택군(擇君)의 기회를 주는 것이야.”

“저하! 그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시옵니까?”

“자네도 알지 않은가,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승산이 없네. 저들은 이미 오랜 세월을 거치며 비대해졌고, 병조뿐 아니라 금군조차도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야. 여기서 섣불리 움직였다간 도리어 역습을 당하겠지. 내가 가진 거라곤 익위사의 관원 수십 명이 전부일세.”

적을 빤히 알면서도 대처할 수 없는 현실이 비참해 며칠 간 잠도 이룰 수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미약한 기반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왕세자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는지 실감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서고에 처박혀 무수히 고심하고 또 고심을 해봤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단 하나의 결론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다 당하느니 조금이나마 존재하는 가능성에 희망을 걸어본다.

“좌상이라면 무슨 수를 쓰든 그들의 약점을 손에 쥘 것이다.”

최상의 패는 좌상이 그 약점을 쥐고 세자에게 오는 것이다. 그러나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쥐고 있는 약점을 그의 구미에 맞게 이용한다면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결국은 비열한 노용식이 아닌, 합리적인 좌상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후후, 그렇다고 내가 자포자기하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게. 나 역시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노력할 것이야.”

세자의 입가에 씁쓰름한 곡선이 그려지고 있었다.

삼일 전, 보영당의 사랑채.

“싫습니다! 저도 선대왕마마의 능행차에 동참할 것입니다!”

“시끄럽다, 목소리를 낮추어라.”

각고의 노력 끝에 저들의 거사일을 알아낸 세자는 서율과 수찬, 그리고 좌익위와 우익위를 모아놓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한데 능행차에서 다른 이를 정한군으로 위장시킨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당사자가 병풍 뒤에서 나타나 강력히 항의를 해온 것이다.

세자가 이 날 친우들과 보영당에서 술자리를 갖는다는 걸 알게 된 정한군은 굉장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왜 저에게는 함께하자, 말씀 한 마디 없으셨을까. 배신감과 장난기가 동시에 발동한 그는 일찌감치 주인도 없는 보영당을 찾아 사랑채의 병풍 뒤에 숨어있었다. 동궁전의 내관과 궁녀, 익위사의 관원들이 보영당에 나타나 사랑채를 에워싸고 경계태세를 갖추기 전에.

‘한창 분위기가 좋을 때 뛰쳐나가 마구 심술을 부릴 것이다!’

정한군은 이를 갈며 거의 반나절을 넘게 병풍 뒤에 숨어있었다. 한데 세자와 아는 인물들이 들어오고, 은밀히 대화가 오고가는데 그 내용이 어마어마하였다. ……역모가 진행되고 있었단 말인가!

심각한 상황에 나서지도 못하던 정한군은 다른 이를 저로 위장한다는 대목에서 벌컥 성을 내며 뛰쳐나가고 말았다.

“어찌하여 지금까지 제게 함구하셨습니까? 저를 배제하면 달라집니까? 그런다고 저들이 소신을 살려두겠습니까? 소신 또한 저들의 구미에 맞는 왕자는 아닐 터, 이대로 살려둘 리 만무하지요.”

“목소리를 낮추라 하였다. ……너는 좌상께서 보호하여 주실 것이다.”

“저하! 차라리 일정을 취소하십시오. 알면서도 가시려 하십니까?”

“숨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라. 저들은 거병범궐(擧兵犯闕)이 가능할 정도로 세력을 키워놓은 상태다. 금군조차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야. 만에 하나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나 하나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수를 쓰든 이번 행차에 충돌을 일으켜 저들의 정체가 드러나도록 해야 했다. 그렇게만 되면 최악의 경우,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는 없어도 좌상이 그들의 약점을 쥐고 정한군을 보위에 올릴 수는 있을 것이다. 정한군이라면 전하도, 누이도, 빈궁과 아이들까지도 보호해줄 것이니 세자는 어떻게든 그를 살릴 생각이었다.

“노용식이 권력을 잡으면 너뿐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다. 전하와 혜빈, 옹주는 물론이요, 은명이와 빈궁, 원자와 아이들 또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야. 그러니 너는 살아라. 내가 죽으면 다음 보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가 가져야 하는 것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나도 미약한 왕실의 기반. 그 비참한 현실에 정한군은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김서율에게 울분을 터트렸다.

“자네 부친은 뭐 하는 사람이야? 신하면 신하답게 굴 것이지, 어디서 뒷짐 지고 앉아 구경만 하겠다는 것이야! 병조가 제 사병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그럴 거면 좌상 짓은 때려치우고 스스로 보위에 오르라고 해!”

“정한군, 그 무슨 무엄한 말이더냐?”

“제 말이 틀렸습니까? 노용식과 김대원이 다를 게 무에 있습니까? 왕실을 농락하는 건 그놈이나 이놈이나 똑같은 것이지요!”

세자의 저지에도 정한군은 펄펄 뛰었고, 서율은 유구무언일 뿐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능행차에 저도 참여할 것입니다. 병권을 틀어쥐고 전하와 저하를 농락하는 놈은 저도 필요치 않습니다. 살아서 그런 놈의 꼭두각시가 되느니, 소신껏 살다가 죽겠다는 말입니다!”

“어허, 뉘 앞에서 그런 망발을 하는 것이냐!”

세자와 정한군이 팽팽히 대립하는데 벌컥, 문이 열리고 내관이 방안으로 급히 뛰어들었다.

“저하!”

“무엇이냐? 은명이가 벌써 돌아온 것이야?”

“그런 것이 아니오라……”

동궁전의 내관은 곤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열려있는 문 사이를 흘끔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리는데 검은빛의 무복을 차려 입은 건장한 중년의 사내가 두 명의 무사를 대동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그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방 안의 모든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해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병판!”

병판과 그의 수하들까지 가세하자 널찍하여 텅 빈 듯했던 보영당의 사랑채가 제법 채워진 듯하였다. 뜻밖의 상황에 잠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날이 서있던 정한군은 아니꼬운 마음을 확실하게 내비쳤다.

“이제 보니 참으로 파렴치한 분이십니다.”

“정한군, 그만하여라.”

“예, 저하. 한 마디만 더 하고 그만두겠습니다. ……대감,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대감께서는 특정 세력, 특정 인물이 아니라, 이 나라와 군왕을 위해 존재하는 신하입니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정한군의 여과 없는 비판에 병판은 세자에게 정중히 사죄부터 올렸다.

“진즉에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이리 지연되어 송구하옵니다. 이쪽의 움직임을 저들이 눈치 챌까 저어되었고, 병조와 금군에 섞여있는 저들의 무리를 선별하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미행이 따라붙어 변복을 하신 겁니까?”

“그러하옵니다.”

그의 방문에도 별다른 환대를 하지 않았던 세자는 말없이 술잔을 들어 목을 축인 뒤, 냉철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좌상과는 미리 얘기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좌상 대감의 사저에서 오는 길이옵니다.”

“일전에 좌상께 분명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사람에게 오신다면 그 마음도 같이 주셔야 한다고. 하여 제가 돌려드릴 수 있는 건 이 마음밖에는 없습니다. 어떠한 정치적 거래나 대가도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신, 어떠한 거래를 하거나 대가를 받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소신이 아는 한, 좌상 대감 역시 마음 없이 움직이는 분은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을 졸이며 기다려 왔던가. 마지막 순간, 뜻하지 않게 찾아온 기다림의 보람은 세자로 하여금 온몸이 타오를 것 같은 희열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체통 없이 굴 수는 없는 법. 세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하명하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진척 상황에 대해 보고해 보십시오.”

“거사일이 앞당겨졌습니다.”

“무슨 뜻이오? 선대왕마마의 능행차 일이 아니란 말입니까?”

“심어놓은 세작에 의하면 삼일 뒤, 대비마마의 능행차일로 거사일이 변경하였다 하옵니다.”

세자와 서율, 그리고 그 측근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좌상을 뵈어야겠습니다. 지금 사저에 계십니까?”

“조금 전, 현법사로 향하셨을 것입니다.”

“이 마당에 지금 절에 가셨단 말입니까?”

정한군이 벌컥 성을 내었지만 병판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우며 모두를 안심시켰다.

“하여 저들은 더욱 안심하고 있겠지요. 걱정 마십시오, 저하. 대책은 모두 마련되어 있습니다.”

“모반의 싹들을 한꺼번에 뿌리째 뽑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자는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예, 그래서 역공을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번거롭지만 저하와 정한군마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하!”

어둑어둑 저물어가는 노을빛 아래, 역적들이 거의 전멸되고 있는데 병판이 당도하여 세자에게 달려왔다.

“산채는 어찌되었습니까?”

“전부 소탕하였습니다. 이현군과 우참찬을 비롯해 이번 일에 가담한 자들 또한 모두 추포되었다 하옵니다.”

이렇게 한 고비를 무사히 넘기는가. 목에 걸린 마지막 돌덩이를 뱉어내듯 세자가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쉰다.

“수고하셨습니다, 병판.”

고도로 훈련된 사병들이라 하나 겹겹이 에워싼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였다. 게다가 동료의 삼분지 이 정도가 쓰러져버리자 나머지 사병들도 의욕을 잃고 항복을 해온다. 김서율이 움직임을 멈추고 쓰러져 있는 석칠에게 다가간 것도 그 즈음이었다. 실력이 굉장하여 그가 화살을 맞지 않았다면 쉽게 쓰러트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석칠은 정신을 잃었으나 호흡은 안정되게 이어가고 있었다.

“그자가 석칠이란 자더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세자가 얼굴에 난 석칠의 흉터를 보며 물었다.

“예, 모든 사건에 이자가 관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수고했다, 지평.”

세자가 노고를 치하하는 사이, 의식이 없는 석칠은 관군들에게 포박되어 질질 끌려가듯 멀어져 간다. 그런데,

“잠깐.”

상찬을 들으며 세자에게 고개를 숙이던 서율이 갑자기 그들을 불러 세웠다. 관군들은 걸음을 멈추었고 세자와 정한군, 병판은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긴가민가하던 서율의 낯빛이 석칠에게 가까워지며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가슴팍에 살짝 삐쳐 나와 있는 새하얀 물체.

‘서찰인가?’

역시나. 그의 옷자락을 들쳐보니 서찰이 하나 들어있었다. 증거는 이미 충분하였으나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서율은 내용을 꼼꼼히 확인해보았다.

‘안빈이 보낸 서찰이라.’

잠시 후, 서찰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온몸에 오한이 일어나 숨을 쉴 수 없었다.

‘보영당이 위험하다! 왜, 왜, 그 사람을 건드린단 말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정한군이 다가갔으나 서율은 서찰을 던져버리고 말을 향해 힘껏 달려 나갔다. 웅성대는 소리가 나는 듯했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보영당은 분명 이번 일에서 제외되었다. 해서 그곳은 평소 지키던 무사들의 수보다 조금 더 보강하였을 뿐이다. 한데 안빈은 그곳을 주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지키는 숫자를 파악하여 그들을 압도할만한 자객을 준비시켜 놓았을 것이다.

‘이 고비만 넘기면, 오늘만 잘 넘기면 다 끝나는 것인데! 제발 무사 하시기를, 제발 늦지 않기를…… 제발…, 제발……’

화르르, 온몸이 화염에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서율은 전속력을 다해 말을 힘차게 몰아붙였다. 해는 뉘엿뉘엿 저 너머 서산을 넘어가는데 그가 있는 이곳은 도성에서 까마득히 멀기만 하였다.

“비가 그치면 추워지겠지?”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내다보며 은명이 중얼거리자 최 상궁은 바느질을 멈추고 아기씨를 바라보았다. 창가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뒷모습이 어쩜 저리도 귀여우신지.

“그러다 감환 걸리셔요.”

“그래도 속은 시원해.”

은명은 창을 그대로 열어두는 대신 보모에게 다가가 무릎을 베고 몸을 편히 누인다. 어머니는 아니지만 어머니와도 같은 사람.

“잠시 만요, 소인이 창을 닫고 오겠습니다.”

“그냥 둬. 비오는 소리가 듣기 좋잖아.

보모는 바느질감을 내려놓고,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은명의 머리를 가만 가만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아기씨, 무엇이 그리 답답하십니까?”

“그냥…….”

‘어머니도, 전하도…… 좌상 대감과 외조부님도…… 모두 모두 불쌍하고 가여워.’

며칠 전 은밀히 궐에 다녀오신 이후로 아기씨는 가끔 기운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짠하고 애처로워 보모는 따뜻한 손길로 등이며 머리를 다정히 쓸어주었다.

“그럼 조금만 있다가 창을 닫는 겁니다.”

“음……”

제 손을 잡고 스르르 눈을 감는 아기씨를 보며 보모는 상전을 처음 뵈었던 날이 떠올랐다. 새하얗고 보들보들한 피부에 큰 눈망울이 어찌나 새까맣고 맑던지. 낯선 이가 안으면 앙 울어버리는 여느 아기들과 달리 보모를 알아보는 것인지 저를 보고 방싯방싯 웃어주기까지 하였다.

‘유난히도 조그맣던 우리 아기씨께서 언제 이리 어여쁜 아가씨로 자라나셨는지……’

감회에 젖은 최 상궁은 코끝이 시큰거려오는데,

우당탕-

날벼락이 떨어지듯 문짝이 부서지며 하나로 뒤엉킨 사내 둘이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 중 한 명은 의식을 잃고 너부러졌고, 다른 하나는 검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벌떡 일어나 있던 은명은 두 눈이 크게 팽창되어 쓰러진 자를 내려다보았다. 보영당을 지키던 호위무사. 그렇다면 저자는,

‘침입자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쳐들어온 것이냐!”

최 상궁은 은명을 얼른 등 뒤로 감추며 호통을 쳤으나 사내는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순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최 상궁이 달려들어 검을 쥔 그의 손을 양손으로 힘껏 붙들며 외쳤다.

“피하십시오, 마마! 어서요!”

“최 상궁!”

“으윽!”

죽을힘을 다해 붙들었지만 최 상궁은 사내의 주먹에 저 멀리 나가 떨어져버렸다. 그리고 자객이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와장창, 자기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에 끔찍한 통증이 몰아닥쳤다. 은명이 화병으로 그의 머리를 가격하여 쓰러트린 것이다.

“최 상궁, 괜찮은가?”

“피하셔야 합니다.”

은명이 파리해진 얼굴로 허겁지겁 다가오자 최 상궁은 지체 없이 그 손을 잡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누군가 등불을 꺼트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보영당 여기저기서 검과 검이 부딪히는 요란한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체 저들은 누가 보낸 자들이 말인가? 단 한 가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영당으로 자객들이 쳐들어온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은명은 그 최악의 상황을 애써 부정하며 최 상궁이 이끄는 대로 후문을 향해 내달렸다.

“헉!”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 눈앞에 검은 인영 여러 개가 순식간에 나타나 사방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는 잠깐의 틈도 없이 은명에게로 돌진해 사정없이 검을 휘둘러버린다.

“아악!”

촤악-

“으헉!”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최 상궁의 신음이었다. 자객이 검을 내리치는 찰나, 보모가 제 몸으로 은명을 감싸고 등에 자상을 입은 것이다. 어머니처럼 믿고 의지했던 보모가 눈앞에서 스르르 무너지는 모습에 은명 또한 무너져 내렸다.

“최 상궁!”

“얼른, 얼른 도망가셔요…… 우리 공주마마…… 다치시면 안 됩니다……”

검을 든 자객들에게 사방을 포위당한 지금, 어디로, 어떻게 도망을 간단 말인가. 설사 사방이 뚫려있다 하여도 저를 키워주고, 저를 돌봐주다, 저 대신 칼을 맞은 최 상궁을 버려두고 어찌 홀로 가버릴 수 있단 말인가. 은명은 등에 자상을 입고 몸을 벌벌 떨고 있는 보모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끈적끈적 뜨거운 피가 느껴지자 은명의 목구멍이, 눈동자가, 온몸이, 화끈화끈 데어 올라 고함을 질렀다.

“의원을 부르라! 의원을 불러줘!”

은명의 처절한 애원을 무시하고 최 상궁을 베었던 자가 또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음산한 목소리 하나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잠깐.”

어둠 속에서 그들의 상전으로 보이는 자가 나타나 검의 움직임을 저지시킨 것이다.

“지금 끝내야 합니다.”

“끝낼 것이다. 내 빚을 다 갚아준 후에.”

“이놈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런 무도한 짓을 벌이는 것이냐! 천벌을 받을 놈들 같으니, 나를 죽여라! 나를 죽이지 않고는 절대로 이분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찰박찰박, 물기를 머금을 풀잎을 밟으며 사내가 은명에게 성큼성큼 다가서자 최 상궁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악착같이 몸을 일으켜 은명을 제 품에 꼭 감싸 안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하지만 사내에게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지푸라기처럼 우스운 존재에 불과할 뿐.

“으학.”

잔인한 발길질 한 번으로 최 상궁을 멀찌감치 떼어낸 사내는 은명의 한쪽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살려줘, 보모를 살려다오! 흑흑…… 의원을 불러줘! 제발 자비를 베풀어다오!”

짐짝이라도 되는 양 땅바닥을 모두 훑으며 질질 끌려가면서도 은명은 보모를 살려 달라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최 상궁은,

“안 된다, 이놈들! 차라리 나를 죽여라, 나를 죽이란 말이다! 마마! 마마……”

멀어지는 공주를 향해 손을 뻗치다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네의 주변을 새빨간 핏물로 점점 더 붉게 물을 들이며.

끌려가느라 온몸이 쓰렸고 맥이 쭉 빠져버렸다. 후원의 어느 후미진 곳에 다다르는 순간, 사내는 은명의 멱살을 틀어쥐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사내에게서 맡아지는 비릿한 냄새.

‘이건!’

행궁에서 목을 조르던 자에게 맡았던 그 역겨운 가죽 냄새였다. 그렇다면 이자는! 그의 정체를 알아 챈 순간, 사내가 은명을 우악스럽게 던져버렸다.

“아악! ……허억.”

그 힘에 떠밀린 은명은 화원에 놓인 바위에 부딪혔다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런데 바위에 가슴을 심하게 부딪친 것인지 옆구리와 가슴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와 숨을 쉴 수 없었다.

이들이 여기서 마음껏 검을 휘두른다는 건 보영당을 지키던 무사들이 모두 전멸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서율은 오라버니를 호위하고 도성 밖을 나선지 이미 오래, 더 이상의 희망은 없었다. 지금보다 더 험한 꼴을 당하기 전에 차라리 여기서 그만 죽여주었으면 하는 바람만 남아있을 뿐.

“후후, 살고 싶으냐?”

행궁에서 공주를 놓치고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울분이 끓어오른다. 몸을 다쳐 몇 달을 끙끙 앓았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문책을 당해 있는 대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고도 딱히 화풀이 할 대상조차 없어 이날 이때껏 바득바득 이를 갈며 얼마나 애먼 가슴을 쳐대야 했는지. 이 밤, 그때의 일을 확실히 되갚아 줄 요량으로 보영당의 침입을 자원하기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품어온 앙심이기에 상대가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도 모자를 판이었다. 한데 더 이상 공주도 아니라는 이가 겁을 상실하였는지 힘들게 상체를 일으켜 강단 있게 저를 쏘아보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다는 소리가,

“부끄러운 줄 알아라.”

“뭐야?”

“검도 쓰지 못하는 여인을 죽이자고 무리 지어 쳐들어와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을 함부로 취하다니! 그러고도 부끄러운 줄은 모르고 승자라도 되는 양 우쭐대는 꼴이 아주 가관이구나!”

“허, 이것 봐라?”

“천박한 것들. 이곳은 너희 같은 무뢰배들이 짓밟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니라.”

눈물이 흐른다. 말할 때마다 가슴에 무시무시한 통증도 일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더 이상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고 싶었다.

“자존심도 자존감도 없는 것들 같으니. 죽여라, 흐흑…… 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너희 같은 잡배들에게 목숨이 거두어 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이, 정신 나간 것 같으니……”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고 사내는 분에 못 이겨 연약한 여인의 몸을 발로 마구 짓이기기 시작했다. 잔인한 말들 또한 서슴없이 내뱉었다.

“으윽!”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우리는 다음 왕을 모실 호위대이니라. ……네 오라비도, 네 이복 오라비도, 너와 죽고 못 살던 좌상의 아들놈도 이미 모두 죽어버렸다. 너는 이제 공주도 아니고, 보영당의 주인도 아닌, 관비에 불과한 것이다!”

은명의 몸이 식을 대로 식어버린다. 사고도 정지해 버렸고, 더 이상 그 어떤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모가 일어났단 말인가. 정녕, 모두가 그렇게 가버렸단 말인가.

‘오라버니…… 스승님…… 아니, 아니야!’

김서율이, 오라버니들이, 그렇게 가버릴 분들이 아니었다. 이 모든 건 이대로 자신을 굴복시키기 위한 저들의 속임수일 뿐. 분노가 치솟은 은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후의 발악을 해본다. 발길질을 하던 사내에게 달려들어 그의 다리를 있는 힘껏 깨문 것이다.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빼내어.

“아악-.”

사내의 날카로운 비명이 어둠을 갈랐고, 그의 주먹이 마구잡이로 날아들었지만 은명은 끝까지 버티며 그에게 고통을 가했다. 잠시 후, 무언가 번쩍하고 눈에서 불이 들어와 은명은 힘없이 흙바닥에 내쳐지고 만다. 가물가물 정신이 들었을 땐 땅바닥의 냉기가 등을 통해 스멀스멀 전해지고 있었다. 사내는 제 다리를 부여잡고 땅바닥에서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고, 그의 동료 중 하나는 검을 빼 들고 은명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되었다.’

힘이 빠져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얼굴 위로 빗물이 수없이 떨어져 눈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세상이 뒤집히지 않고서야 저들이 이렇게 활개를 칠 순 없었다. 모두가 그렇게 가버렸다면 은명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저들의 손에 목숨을 맡기지도 않을 것이다. 은명은 감각이 사라져버린 손으로 옷고름에 차고 있던 은으로 된 패도(佩刀)를 꺼내들었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사람은 황량한 대궐에 홀로 누워계신,

‘아버지……’

그러고 보니 아직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드린 적이 없었다. 보고 싶었다. 한번만 더 용안을 뵙고 따뜻했던 그 손을 다시 한 번 잡아 보고 싶었다.

챙-, 챙-, 챙-.

“놓쳐서도, 죽여서도 아니 된다. 내 저들에게 살아있는 지옥을 맛보게 해줄 것이니!”

누군가의 호통소리와 함께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모든 것을 포기한 은명은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아온 대로 패도를 급소에 가져다 대었다.

“마마!”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멈칫하는데 누군가 달려와 은명의 손에서 패도를 빼앗아 저 멀리 던져버린다. 그리고는 은명의 상체를 일으켜 제 품에 감싸 않았다.

“으윽……”

“어디를 다치신 겁니까? 어디가 아프십니까? 불을 가져 오너라, 불을!”

요란하던 금속성의 소리가 수그러들고, 웅성웅성 사람들의 말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곧이어 환한 불빛이 비춰지자 은명의 모습을 확인한 좌상과 정율, 그리고 그 수하들이 경악하여 입을 열지 못한다.

“이럴 수가, 감히 이런 짓을……”

비몽사몽간에도 은명은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좌상이시란 말인가? 몇 번의 깜박거림으로 시야를 맑게 해보면 늘 얼음장 같았던 그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시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흐흑…… 흑흑흑……”

“괜찮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많이 놀라셨으니 일단은 모시겠습니다.”

모두가 먹먹해지는 가운데 은명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저들이 저하를…… 스승님과 정한군을…… 모두 죽였다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함정을 파놓은 것입니다. 무사하십니다, 모두가 무사하십니다.”

“……정말입니까? 정말 모두가 살아계신 겁니까?”

“소신을 믿으십시오.”

‘하늘님, 감사합니다.’

깊고 깊은 안도감에 눈물을 쏟아내던 은명은 최 상궁이 살아있다는 말을 전해 듣자 곧바로 혼절해버리고 말았다. 지켜줄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는 좌상의 품에 기대어.

좌상 댁 안채에는 좌상과 정경부인, 그리고 정율의 처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어의의 손놀림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떠하신가?”

“늑골이 골절되었을 뿐 아니라 팔과 다리의 골도 상하였고, 온몸에 어혈이 퍼져있어 한동안은 고통스러우실 것입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이 아릿함.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병판에게 보고를 받고 현법사로 향하면서 은명의 맑은 눈망울이 떠올랐었다. 그분과 너무도 닮아 첫 만남 이후로 떠올리는 것조차 거부해왔던 얼굴. 그 말간 얼굴이 지워지지 않아 마지막 순간, 오늘 밤이 지날 때까지 보영당에 사람을 붙여놓으라 지시했었다.

그렇게 모든 방비를 끝내고 현법사에 도착했는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내내 가슴을 짓눌러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겨낼 수 없는 그 막연한 감정에 좌상은 끝내 안정을 찾지 못하고 애초의 계획보다 하루 먼저 돌아오고 말았다. 한데 평교자에서 내리자마자 보영당을 지키던 무사들로부터 급한 전갈이 당도한 것이다.

제발 무사하시기를 바랐다. 털끝 하나도 상하지 않으셨길 바랐다. 그런데 보영당에 도착하고 보니 상황은 심각하였다. 도처에 쓰러져 자상을 입고 신음하는 무사들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랜만에 스스로 검을 잡았을 만큼 다급한 순간이었다. 지켜주고 싶었다. 그분의 분신을, 아들의 심장을.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달빛에 반짝이던 은장도와 자결하려던 공주의 모습이 떠올라 좌상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내외가 엄격한 조선, 누구보다 예를 중시하는 까다로운 그였지만 이 자리를 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적어도 서율과 세자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자리를 뜨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여러 명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리였다.

“은명아!”

벌컥, 문이 열리며 우르르 뛰어 들어오는 사람들. 서율과 세자, 그리고 정한군이었다. 김서율은 은명을 보자마자 그 자리서 완전히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침에 보았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 곳 하나 성한 곳 없이 울긋불긋 처참한 몰골이었다. 세상이 핑글핑글 어지러웠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은명아, 은명아……”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예를 올리고 있었지만 세자는 아무것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정신을 잃은 채 끊어질 듯 여린 숨을 몰아쉬는 가여운 누이만 눈에 들어올 뿐.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데 좌상의 침착한 음성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전하께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저하를 몹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니 우선은 환궁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른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보영당 마마는 당분간 소신의 집에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가을과 겨울이 끝나고 이듬해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은명이 좌상 댁 안방을 차지하게 된 순간이었다.

하루 종일 내려앉은 적막감을 깨트리며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안빈이 감고 있던 눈을 떠보면 문이 사납게 열리며 금상이 들어섰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분노한 얼굴로 손에는 검까지 쥐고 있었다. 홀로 일어나 앉지도 못하던 금상이 딸아이의 소식에 검을 빼 들고 달려온 것이다.

“아바마마 고정하시옵소서!”

걱정이 된 세자와 내관이 곧바로 쫓아 들어와 말리는데도 금상은 그들을 뿌리치고 안빈의 목에 번뜩이는 검을 가져다 댔다.

“왜 그 아이를 죽이려 하였소? 어찌하여 그런 참담한 짓을 저질렀단 말이오!”

검이 따끔하게 목을 찔러옴에도 안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서릿발 같이 차가운 답을 뱉어내었다.

“전하께서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뭐라? 과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 아이를 죽이려 하였다?”

“예, 그래야 전하께서도 신첩의 고통을 알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지아비의 싸늘한 눈초리에도 안빈은 지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가는 이미 붉을 대로 붉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그동안 쌓여온 설움과 한이 드러나고 있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도 어미들은 모성을 느낍니다. 하물며 열 달을 품고, 열흘이나 살아서 고통 속에 죽어간 자식은 어떠하겠습니까? 전하께는 죽여도 되는 하찮은 아이였겠지만 신첩에게는 단 한 번 찾아온 목숨과도 같은 아기였습니다! 효경왕후 마마의 자녀들은 그리도 귀애하시면서 신첩에게 찾아온 아이는 어찌하여 빛도 보지 못하게 하신 겁니까!”

비명에 가까운 안빈의 고함소리에 금상은 검을 떨구고 얼이 빠진 얼굴이 되어버렸다.

“전하께서 하신 그 엄청난 일을 알고 신첩은 혀를 깨물고 죽으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죽어버리면 그 누가 제 가엾은 아기를 기억이나 하겠습니까? 태어난 순간부터 고통 속에 살다가 떠나간 그 아이가 가여워, 신첩은 전하를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주가 그렇게 된 건, 다 전하의 탓입니다!”

처음 듣는 엄청난 소리에 세자는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금상 역시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었다.

“자식들을 보호하고 싶으시다면 신첩을 반드시 죽이셔야만 할 것입니다. 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신첩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자와 공주에게 칼을 들이 댈 것입니다!”

악에 받쳐 소리를 내지른 안빈은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목메어 울기 시작했다.

비척거리며 대전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운 금상은 넋을 잃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충격을 심하게 받은 모습이었다. 금상의 곁을 지키던 대전의 내관은 보다 못해 조용히 말씀을 올렸다.

“전하, 시각이 많이 늦어졌사옵니다. 이만 생각을 접으시고 침수에 드시옵소서.”

“대체 안빈이 그 일을 어찌 알았단 말이냐……”

금상은 좀처럼 눈을 붙이지 못하고 힘없는 소리만 중얼거렸다. 집권 초반, 그는 정한군을 등에 없고 세자를 위협하던 대신들에게 완전히 질려버리고 말았다. 해서 그가 미약하게나마 세력을 갖추자 제일 먼저 믿을 만한 사람을 어의로 앉히고 비밀리에 왕명을 내렸다.

[후궁들의 회임을 방지하도록 하시오. 지금부터 그 누구도 용종을 잉태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오.]

이미 자녀를 둘이나 출산한 혜빈에서부터 새로 입궁하는 간택 후궁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적용된 지침이었다. 그런데 당시 소의였던 안빈에게 두 번의 회임 방비책을 들여보낸 뒤 태맥이 잡혔다. 탕제를 복용시키기 전, 아무도 회임한 이가 없음을 확인하였는데도 그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금상은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매화나무가 만발한 안빈의 처소에 들렀던 일을 떠올리곤 사색이 되고 말았다.

[태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 탕약을 마시게 하였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전하, 진정하시옵소서. 아직 회임 초반이시고 두 번밖에 드시지 않으셨으니 아기씨께 큰 해가 가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정말이오? 아기는 물론, 소의의 몸에도 해가 가는 것은 아니겠지?]

[소신이 따로 보완하는 약을 지어 올리겠나이다. ……하온데 정녕 괜찮으시겠사옵니까? 만에 하나 왕자 아기씨라면 저하의 처지가 더욱 곤란해지실 것이옵니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자식을 죽일 수는 없지 않겠소. 옹주가 태어나 주길 바라는 수밖에.]

소망대로 이듬해 옹주가 태어났지만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고 금상은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혹, 그때 그 탕약 때문인 것은 아니요? 그 탕제 때문에 귀인이 고열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아기가 그리 된 것이 아니냔 말이오?]

[절대로 아니옵니다. 그 탕제 때문이었다면 그로부터 달포 안에 문제가 생겼어야 했습니다. 고열에 시달리신 건, 회임 여섯 달째의 일이옵니다. 자책하지 마시옵소서.]

하나 어찌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일만 없었다면 옹주가 건강하게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금상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내내 괴로워했었다. 하여 조금 전, 안빈이 퍼붓는 소리에도 대꾸조차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 또다시 죄책감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정말 아니었을까? 기가 막히게도 그 일 이후, 안빈은 불임이 되지 않았는가.”

“전하, 그 탕제를 마신 다른 후궁마마들께서는 불임을 확인할 수 있는 맥이 짚어지지 않사옵니다. 안빈마마께서는 맥으로 짚어질 만큼 뚜렷한 이상 징후를 보인다는 사실을 유념하여 주시옵소서.”

“……그래, 그랬었지. 한데 안빈은 대체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단 말이냐.”

“안 첨정이 아니겠사옵니까.”

안 첨정, 어의를 도와 그 일을 함께 도모했던 의원. 우참찬의 간자로 밝혀지기 전까지 금상도 어의도 신임해온 인물이었다.

“그자가 사실을 정확히 몰랐던 것인가?”

“아니옵니다. 그자 또한 정확히 알고 있었사옵니다. 우참찬에게 매수된 자이오니, 노용식 그자가 농간을 부린 것일 수도 있사옵니다. 허하여 주신다면 소인이 내일 금부에 하옥되어 있는 안 첨정을 직접 심문해보도록 하겠나이다.”

“……그래, 그리 하도록 하라.”

커다란 고비를 넘긴 이 밤,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어야 했지만 금상은 쉬이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고통 속에 죽어간 핏덩어리 옹주가 떠올랐고,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을 공주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평생을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진 꼴이었으나 노용식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다. 약이 오르긴 했지만 이대로 절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다행히 오늘 밤, 황 집사가 손을 써 이곳을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남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군자금도 숨겨놓았고 왕족은 얼마든지 널려있으니, 그늘에 숨어 또 다른 역모를 계획하면 그만이었다. 재물만 있으면 못할 게 없는 이 세상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이까짓 돌발 상황쯤 아무것도 아니라 치부하던 그였지만 창백한 낯짝의 안빈이 옥사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성질머리가 솟아올랐다.

‘감히 무사들을 빼돌려 보영당을 공격하고는 뻔뻔하게 내 앞에 나타나다니!’

그 무사들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여기까지 끌려와 쓸데없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부아가 치민 노용식은 버럭 소리부터 내질렀다.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셨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기다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그리 머리를 쓸 줄 모르시는 겁니까? 앞으로는 어떠한 도움도 받을 생각은 마십시오. 마마께 해왔던 금전적인 지원은 오늘로써 모두 끊어버릴 것입니다. ……복장 터지게 하지 마시고 그만 가보십시오. 더 이상 마마를 뵙고 싶지 않습니다.”

아비의 야멸찬 소리에도 안빈은 피식 웃어버리고 만다. 이틀 전, 대전 내관이 끌고 온 안 첨정의 고백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비는 그와 말을 맞추고 저에게 거짓을 고하였던 것이다. 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하여 그가 시키는 대로 궐 안에서 움직여 줄 수 있도록. 딸자식을 십 수 년 간 지옥 속에 몰아넣고도 미안한 기색은커녕 자신을 궁지로 몰았다 질책까지 하고 있었다.

‘저 사람에게 나는 자식도 아니었구나. 어찌하여 저런 사람의 말을 그동안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단 말인가……’

공허함에 텅 비어버린 눈을 하고서 안빈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황 집사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석칠도, 그 어떤 무사도, 아버님을 구해주러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안빈의 말에 노용식은 파리해진 얼굴로 다가와 옥사의 창살을 움켜쥐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마마!”

“석칠은 옥사에 하옥되었고, 황 집사는 모든 것을 자백하고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하더이다. 방면되지 않는 이상 아버님은 이곳을 나가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허면,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 마마! 기다리십시오! 부디 이 늙은 아비를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기운이 쪽 빠져버린 안빈이 돌아서려하자 노용식은 대번에 안면을 바꾸며 사정을 해왔다.

“마마, 아비에게 어찌 이리 야박하십니까? ……좋습니다. 거래를 하시지요. 군자금으로 숨겨놓은 재산이 있습니다. 압수당한 현재의 재산보다 족히 몇 갑절은 넘을 것입니다. 그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꺼내주기만 하십시오.”

“그 군자금…… 제가 전하께 드렸습니다.”

“그 무슨 답답한 소리십니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둔 재산이 있습니다. 저와 석칠이 밖에는 모르는 곳입니다.”

“예, 석칠이는 저의 사람이었습니다.”

안빈의 말에 노용식은 우지끈 온몸이 얼어버리는 듯하였다.

“그게 무슨……”

“석칠이는 제가 아버님께 심어놓은 간자였습니다. 아버님이 저를 이용하였듯 저 또한 아버님을 믿지 못하였으니까요.”

그런 줄 알았다. 아비를 믿지 않는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와 보니 그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죽도록 연모한다던 지아비는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지만, 천륜도 저버린 자라 여겼던 아비는 한 번도 믿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굳건히 신뢰하고 있었다.

‘저런 자도 아비라고 이제껏 믿고 의지하였던 것인가……’

옹주가 죽었을 때 같이 죽었어야 했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이제껏 모진 목숨 이어오며 못된 짓을 하였더니 천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다 끝났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것을 잃으셨습니다. 이렇게 뵙는 것 또한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노용식은 혼이 빠져버린 듯 신음하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고, 안빈은 그대로 돌아서서 밖으로 걸음을 하였다.

거세게 내리던 작달비가 그새 보슬보슬 부드러운 빗물로 바뀌어 있었다. 내일은 옹주가 있는 곳으로 떠나게 되는 날. 이승에서 맞는 마지막 보슬비를 촘촘히 맞으며 안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옹주, 죄 많은 이 어미는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어미이나 그래도 그 전에 얼굴 한 번만 보여주면 아니 되겠습니까? 보고 싶습니다, 우리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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