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장. 과거의 숨겨진 조각
정전으로 향하는 세자의 옥안에 단호함이 넘쳐나고 있었다. 얼마 전, 금상께서는 강원도에 안치된 공주의 유배를 풀고 한양으로 올리라는 교지를 내렸다. 이에 대신들의 반대가 빗발쳤고, 세자는 며칠째 정전에 들어 그들의 잔소리를 들어주고 있었다.
‘그동안 들을 만큼 들어 주었으니 오늘은 기필코 끝장을 내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정전으로 들어섰다. 세자가 좌정하자 고요히 침묵하던 대신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저하, 화경궁 마마께서 유배를 가신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사옵니다. 어찌하여 벌써 유배를 풀라 하시옵니까? 이는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그 아이가 역모를 꾀했습니까, 아니면 강상의 죄를 범했습니까? 몰래 찾아온 사촌오라비를 차마 물리치지 못해 잠시간 이야기를 나눈 것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벌이 지나치게 과했습니다.”
물러서지 않겠다, 세자는 속마음을 대신들에게 명확히 내보이며 어제까지와는 다르게 강한 어조로 맞받아 쳤다.
“화경궁 마마께서는 역도의 도주를 묵인하셨으니 과한 처벌은 절대로 아니었사옵니다.”
“당시 그 아이의 행동엔 일말의 고의성도 없었습니다. 간밤에 홀로 있다 경황없이 맞닥트린 일인데 그 아이가 무슨 수로 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잠들어 있던 아랫사람들을 모조리 깨워 관아에 발고라도 해야 했단 말입니까? 어디로 갔는지, 언제 다시 찾아올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허나 그 다음날이라도 관아에 알리지 않으셨으니 마땅히 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 반년이 넘도록 충분히 벌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면 그 아이도 반성을 했을 것이니 이제는 유배를 풀 때도 되었습니다.”
물러설 땐 순순히 물러서 주지만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고야 마는 성정. 그 고집스러움을 익히 알고 있는 대신들은 어제까지와는 또 다른 세자의 반응에 일이 점점 더 커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문제를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좌상 밖에 없었다.
반대파의 시선이 좌상에게로 몰리자 세자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스쳐 지난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넘어야 할 가장 높고도 험준한 태산. 그와의 정면 대결을 최대한 미루어왔던 세자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좌상에게 그의 의견을 물었다.
“좌상, 경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세자의 세력과 그 반대 세력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이제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좌상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표정만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좌상 또한 심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혜빈의 간곡한 목소리 또한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행궁 사건으로 구석까지 밀렸던 저와 옹주에게 공주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제 차례입니다. 앞으로는 대감께 어떠한 부탁도 드리지 않을 것이니 이번만큼은 공주가 돌아올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십시오.]
금상께서 교지를 내리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온 혜빈이 그에게 청했던 은밀한 부탁. 좌상은 여전히 공주와 아들의 사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앞으로도 그 생각은 절대로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사견(私見)일 뿐. 유독 침묵이 길었던 좌상에게서 마침내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정도면 충분히 반성을 하셨을 것입니다.”
선공후사(先公後私). 공적인 일을 먼저 끝내고 사사로운 일은 뒤로 미룬다. 좌상이 내린 결론이었다. 세자와 그 지지 세력들은 상황을 망각하고 하마터면 입이 찢어져라 웃을 뻔하였다. 하나 좌상을 따르던 많은 수의 대신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어안이 벙벙한 얼굴들이었다.
“대감,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화경궁 마마보다 더 중한 죄를 짓고도 반년을 채우지 않고 유배가 풀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금상의 병환이 자심하시어 금지옥엽을 가까이 두고 싶어 하시니 그 어심을 헤아려 드리는 것 또한 신하 된 도리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이리 쉽게 용서를 해버리면 공주를 폐위시키고 유배를 보낸 자신들은 무엇이 된단 말인가. 차마 그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께름하여 말을 얼버무리는데 세자가 얼른 끼어들었다.
“물론, 그 아이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도주한 역도와 만난 이후 관아에 고하지 않은 것은 큰 죄라 할 수 있습니다.”
다독이는 듯한 발언에 반대를 하던 대신들이 샐쭉해져 있는데 세자에게서 엄청난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하여 그 아이의 유배를 풀되 신분을 복권시키지 않을 것이며 왕실의 일원으로서 받는 모든 예우 또한 내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신료들이 세력에 구분 없이 경악하여 눈이 휘둥그렇게 떠진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술렁이는 소리에도 세자는 흔들림 없이 준비해둔 말들을 끝까지 읊어나갔다.
“거처는 궐 밖 화경궁이 될 것이며 더 이상 왕실의 일원이 아니니 화경궁이란 현판 또한 내릴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곳은 이은명이라는 규수의 개인 사유지가 될 것입니다.”
“저하, 사유지라니요? 그곳은 효경왕후마마께서 거처하시던 곳입니다. 왕실의 명부에 오르지 못한다면 그곳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 또한 잃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쉼 없이 몰아치는 세자의 말에 정신이 멍멍하면서도 대신들은 한 치의 오류도 용납지 않았다. 하나 세자 또한 무턱대고 그런 말을 내지르지는 않았을 터.
“화경궁은 승하하신 대비마마의 사유재산으로 지어진 것으로 건립 당시, 국고와 왕실의 재산이 한 푼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후로도 따로 관리되어 왔을 뿐 왕실에 귀속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그럴 리가……”
과거, 호화롭게 건립되는 화경궁의 공사에 대신과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곤 하였다. 국고와 왕실의 재정을 낭비한다,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대비께서는 일절 침묵을 고수하며 손수 공사를 주도했고 완공 후, 며느리인 효경왕후의 궐 밖 거처로 내어 주었다. 한데 그 모든 비용이 사비로만 충당되었던 것이라니!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본곁에서 물려받은 할마마마의 재력은 익히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승하하시면서 그 모든 재산과 화경궁을 모후의 앞으로 남기셨습니다.”
대신들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대비께서는 조상대대로 이 나라 최고의 부를 소유했던 집안의 무남독녀였다. 그 집안에서는 양자를 들여 대를 잇도록 하였으나 대부분의 막대한 재산이 대비께로 상속되었음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무슨 연유로 그 많은 재산을 금상도 세자도 아닌 며느리에게 남겼단 말인가? 비상식적인 상황에 대신들은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했고 세자는 서둘러 마무리를 지었다.
“신분이 복권되지 않는다 해도 모후와의 천륜까지 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여 곤전으로서가 아닌, 사적으로 소유하셨던 효경왕후마마의 사유재산은 여식인 이은명, 그 아이가 모두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경궁은 정전에서 논쟁을 벌일만한 대상물이 아님을 유념하도록 하십시오.”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는다면 바로 이러한 느낌이었을까. 그렇다고 사유재산을 두고 대신들이 왈가왈부할 수도 없는 일. 결국 이도 저도 막지 못한 반대파의 대신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일단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세자가 농간을 부리는 것이라면 절대로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 절치부심을 해대며.
쨍그랑- 술잔이 부서지며 술기운이 들어간 중전의 호통소리가 내전에 울려 퍼졌다.
“뭐하고 있는 것이야, 술을 더 내오라 하지 않았더냐! 너까지 나를 무시할 참이냐!”
“마마, 고정하십시오. 이미 많이 드셨나이다.”
공주의 소식을 전해들은 중전은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이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처지가 한심하였고, 꼬여버린 인생이 막막하였다.
중궁전의 상궁과 궁녀들이 내사를 받은 이후, 금상과 세자가 자신을 찾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깜깜무소식, 후에 수발 상궁 중 하나가 모든 중죄를 뒤집어썼고 중전에게는 근신하라는 하명만 떨어졌다. 다행이구나, 처음에는 안도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형벌이었는지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 부덕의 소치라며 올린 아비의 사직상소는 빠르게 처결되었고 금상은 중전을 보려 하지 않았다.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득달같이 달려갔지만 대전에는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이후, 모든 공식행사에서 중전은 제외되었다. 동궁과 후궁들, 그리고 종친들에게 문안을 받는 것조차 금지되었고 내외명부의 일은 빈궁에게, 임금의 병구완은 안빈에게 넘겨야 했다. 중전은 무심함 속에 철저히 버려진 것이다. 차라리 벌을 받는 것이 나았지 이리 앉아 끝도 없이 모욕을 당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서러움에 찔끔찔끔 눈물이 흘러나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사념을 깨트린다.
“마마.”
흐릿해진 눈을 들어보니 안빈이었다. 그러고 보니 안빈은 언제나 저를 교묘히 부추겨온 위인이었다. 행궁 사건이 터졌을 때에도, 공주를 유배 보내는 일에 가담했을 때에도.
“코빼기도 안 비치던 안빈께서 예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약주가 과하시다 들었습니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그게 정말 다입니까? 저를 또 이용해 먹으려고 오신 것은 아니시고요? 내가 모를 줄 압니까. 행궁 사건이 터졌을 때 왜 나에게 전하의 병환을 비밀로 하자 하였습니까? 혜빈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서? 아니면 정말 공주를 죽이고 싶어서? 내게 활시위를 당긴 것도 그대였습니까? 내 이 모든 사실을 금상께 소상히 아뢸 것입니다!”
순간, 안빈의 얼굴이 싸늘히 내려앉았다.
“그리하시지요. 우리 같이 폐출되어 나란히 이웃해 살면 되겠습니다.”
낮고도 강단 있는 안빈의 목소리에 중전은 술이 확 깨는 듯하였다.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안빈이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면 정말로 그리 될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안빈은 옆에서 부추기기만 했을 뿐, 그 말을 듣고 모든 일을 주도했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던가. 몰랐다고 빼기에는 너무도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허나 어쩌지요? 저는 억울할 것도 없겠지만 중전께서는 괜찮으시겠습니까? 공주가 지평과 혼인하는 마당에 폐서인이 되어 지켜보는 것 또한 처량 맞지 않겠습니까?”
“혼인…… 이라니요?”
“공주라는 굴레도 벗고, 재산도 어마어마하게 물려받게 생겼으니 돌아오면 김서율과 혼인하지 않겠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복권되지 않는다 하나 아비가 지존이요, 오라비가 차기 지존인데 그 누가 공주를 공주가 아니라 생각하겠습니까? 빈궁도 시누이를 어여삐 여기고, 원자도 제 고모님을 끔찍이 아끼겠지요. 공주의 위세는 죽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속상한 현실에 중전이 눈물을 떨어트리지만 안빈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러한 시국에 얌전히 근신하지는 못할망정 술을 드시다니요? 이 나라의 국모라 할지라도 마마께서는 후사가 없으십니다. 그 말인 즉, 금상께서 서거라도 하시는 날엔 한갓진 뒷방에 처박혀 모두에게 잊힌 채 늙어갈 분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후사 없이 절로 쫓겨나야하는 후궁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자리이지요. 그 알량한 대비 자리라도 건지고 싶으시거든 자중자애하세요. 이것이 같은 여인으로서 이 사람이 드릴 수 있는 마지막 간언입니다.”
따끔한 조언을 끝으로 안빈은 쌩하니 자리를 떠나버렸고 중전은 신음하며 두 손에 얼굴을 깊이 묻어버렸다.
‘모두에게 잊히는 사람…….’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요, 차라리 죽느니보다 못한 이 끔찍스러운 삶. 잊히지 않기 위해 궐에 들어와 중전이 되었건만 결국은 그리 되는 것이란 말인가. 차라리 윤보희로 살았다면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단아하고 순수했던 이판의 고명딸, 윤보희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돌이킬 수 없는 호시절이 안타까워 중전의 눈에서 회한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할까. 초라하고 메마른 이 인생, 살아내야 할 날들이 끝없이 멀고도 아득하기만 하였다.
설레는 마음에 쉬이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서율은 밖으로 나와 상쾌한 밤공기를 쐬고 있었다. 깜깜한 하늘 위에 둥그러니 떠 있는 만월이 오늘따라 더 포근하고 정겨워 보인다. 며칠 후면 이 마음의 주인이 돌아오는 날. 그날이 되면 말을 타고 도성 밖을 나가 제일 먼저 그분을 맞이하리라. 고요한 미소를 띠우며 설레는 마음을 다스리는데 부친의 목소리가 정적을 삼켜버린다.
“내일 전라도로 내려가거라.”
갑작스레 들려온 부친의 음성에, 그리고 뜻밖의 하명에, 서율은 감을 잡지 못하고 그 저의를 되물었다.
“전라도로 가라니요,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곳에 복잡한 송사가 생겨 너를 보내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조정의 관리가 공무를 수행하라는 명에 ‘그렇지만’ 이라니? 아침 일찍 떠날 채비를 갖추고 등청하도록 하여라.”
“아버님!”
좌상이 그대로 등을 돌리려 하자 서율은 다급히 부친의 발목을 잡았다.
“하명을 하시니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허나 저를 그분과 떨어트릴 생각은 말아 주십시오.”
“너는 그분과 절대로 함께 할 수 없을 것이다.”
좌상이 냉정하게 아들의 뜻을 꺾어버리지만 서율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었다.
“아니오, 소자는 그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분이 아니면 안 됩니다. 모르시겠습니까, 매달리는 것은 소자입니다! 다시는, 절대로, 그분의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한 여인을 연모한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무너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끝까지 살아남은 단 하나의 이유. 그렇게 지켜낸 연모의 대가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또 다른 지옥이었다. 연정이란 하찮게 버려질 수도, 한 사람의 인생을 생지옥에 가둬 놓을 수도 있는 쓸모없는 감정이었던 것이다. 비록 이 몸은 죽을 때까지 그 잔인한 감정에 휘둘릴지언정 아들만큼은 그리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차라리 연정이란 감정을 몰랐으면 하였다.
‘하지만 이미 가슴까지 젖어버렸다면 내가 이리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잠시간 찾아온 회의적인 생각을 좌상은 말끔히 물리쳐버린다. 공주를 아들의 짝으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셀 수도 없을 만큼 꼽을 수 있었다.
“언제까지 과거에 연연해하실 것입니까? 아버님께서도 서제륜을 눈감아 주시고, 그분이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으셨습니까!”
“한때나마 모시던 스승님께 마지막 도리를 다 하고 혜빈마마의 청을 들어드린 것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 쓸데없는 감정을 끌어다 붙이지는 말거라. 나는 여전히 네가 대제학의 여식과 정혼하길 바란다.”
더 이상의 반문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 좌상은 매정히 돌아서 걸음을 떼지만 서율은 부친의 등에 대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소자에게는 오직 그분뿐입니다. 단 한 사람, 그분이 아니면 다른 누구도 싫습니다!”
목청껏 외쳐보았지만 부친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완전히 감추어버렸고 그에게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살아갈 곳, 내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곳. 화경궁, 아니 보영당(寶柍堂). 보배로울 보, 매화나무 영. 승하하신 아리따운 왕후마마께서는 매화를 특히 좋아하셨으매 오래도록 머무른 그곳에 손수 매화를 그득히 심으셨더라. 그 귀한 매화가 자라는 곳으로 왕후의 따님께서 돌아오셨으니, 더 이상 공주가 아닌 그분을 사람들은 보영당 아씨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낮 더위가 한풀 꺾이고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의 초입. 고운 복색의 은명은 보영당 후원에 서서 옷 안으로 스며드는 상쾌한 바람을 맞고 있었다. 한양에 올라온 지 어언 두 달. 내 집으로 돌아와 기쁘기 한량없지만 아정이와 정한군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아직은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김서율은 공무가 바빠 지방으로만 돌고 있었고, 세자는 쌍심지를 켜고 있는 대신들의 시선에 찾아오지 못했다. 또한 제륜은 안심하고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아직까지도 고심 중이라 하였다.
잠시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고 은명은 눈을 감았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보영당 곳곳의 내음을 담기 위하여. 풀 냄새, 나무 냄새, 흙냄새, 그리고…….
“좋은 향기가 나는 것이냐?”
오라버니. 눈을 뜬 은명의 눈가가 급속도로 빠르게 젖어 들었다. 돌아보면, 준수한 선비마냥 차려입은 세자가 설렘과 미안함, 애틋함이 교차하는 얼굴로 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시절, 궐에서 맛난 것을 먹을 때면 조금씩 남겨두었다 가져다주시던 오라버니. 차가운 얼굴로 유배를 보내긴 하였으나 그 속은 누구보다 더 애가 타고 힘들었을 것을 알기에 은명은 눈물이 흐른다. 안쓰럽고, 또 미안하여서.
“오라버니!”
‘어마마마와 나를 살린 보석 같은 아이. 그리 보낸 나를, 그리 버려 둔 나를, 네가 서운해 할까, 원망스러워 할까, 얼마나 가슴 졸이며 걱정을 하였는지.’
한달음에 달려와 와락 안기는 누이를 두 팔에 안으며 세자는 안도하였고, 또 안타까웠다.
‘앙상하게 야윈 너를 어찌하면 좋을까. 그간의 고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 오라비가 너에게 최고의 행복을 선사할 것이다.’
난출난출, 능소화가 바람에 실려 너울거리는 여름의 끝 무렵, 보영당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따끈한 국화차의 향내가 머무르는 방 안. 좌상은 안빈의 부친이자 우참찬, 노용식을 객으로 맞아 별다른 감흥도, 치렛말도 없이 묵묵히 차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태평하긴 노용식 또한 마찬가지. 그가 전(前) 병마절도사의 밑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좌상과는 짧게나마 경산부원군의 밑에서 함께 수학한 사이였다. 서로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되었으나 딱히 친분을 다진 적은 없는 데면데면한 사이. 이것이 두 사람의 정확한 관계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관계일 뿐. 노용식이 그의 인생에 어디까지 관여하고 있었는지 좌상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얼마 전, 양병수가 허튼 짓을 하여 조정 대신들이 줄줄이 엮여 들어갔음에도 끝까지 그의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다. 앞으로도 절대로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양병수를 처단한 지금 그의 꼬리를 잡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였으니까. 때가 될 때까지 앞으로 나서지도, 눈에 띄지도 않되, 조정의 모든 중대사에는 저만의 방식으로 은밀히 관여한다. 이것이 바로 빈손으로 시작한 노용식이 오늘날까지 무탈하게 보이지 않는 부와 권력을 쌓아 올린 비결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습게도 김대원, 그의 인생을 아무도 모르게 송두리째 흔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쿡쿡, 자네가 난 인물은 난 인물일세.’
그토록 노력을 기울였으나 저의 손에서 휘둘리지 않았던 단 하나의 인물. 노용식은 차를 마시며 맞은편의 좌상에게 흘끗 시선을 던졌다. 그를 한없이 부러워하고 시샘한 적이 있었다. 가진 거라곤 머리와 입 밖에 없었던 저에 비해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난 동문. 훌륭한 가문, 건장한 풍채, 뛰어난 능력. 경산부원군의 총애를 받는 그가 보기 싫어 병마절도사, 박인준의 밑으로 들어갔으나 그 또한 김대원을 귀애할 줄이야.
[김대원이 말일세. 그 아이를 내게 보내주지 않겠는가. 내 그 아이를 북평사로 쓰며 훌륭한 무관으로 키워낼 것이네.]
[그 아이는 무관이 아닌 문관의 재목일세. 문관이 되어 문무관을 전부 아우를 인재.]
변방에 머무르던 그가 스승을 모시고 얼마간 경산부원군 댁에 머무를 때였다. 우연히 듣게 된 스승과 전(前) 스승의 대화. 고단한 삶을 버티게 해준 그의 유일한 희망, 자신이 노리고 있던 그 자리를 스승께서는 김대원에게 주려하고 있었다. 이날 이때껏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변방에서 죽을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저이건만! 한없는 투기심과 열등감, 그리고 자격지심이 끓어올라 분노하고 좌절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 두 스승의 주위를 배회하다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前) 스승께서 급박하게 몇몇 가문을 숙청하려 한다는 것. 은밀히 귀를 기울이던 그는 그 명부에 김대원의 집안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아니, 쾌재를 불렀다. 그래,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었다. 한데, 전(前) 스승께서는 엉뚱한 생각 또한 품고 계셨다.
숙청을 시작하기 전, 그만은 도피시켜 청국으로 보낸다. 이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란 말인가. 전(前) 스승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중요한 건 김대원이 이 위기를 벗어나 훗날을 기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여 타고난 모사꾼인 노용식은 김대원에게 보내는 경산부원군의 긴급서찰을 중간에서 감쪽같이 가로채고 말았다. 위쪽 지방에 머무르던 김대원이 도망칠 수 있는 적기를 놓쳐 사형수로 전락할 수 있도록. 하여 경산부원군이 그를 절대로 빼내오지 못하게 되도록.
“한데 어인 일로 이 사람을 다 찾아오셨습니까?”
좌상의 진중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리자 과거를 질주하던 노용식은 애초에 머리를 비우고 있었던 사람마냥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모두가 눈치를 살피며 제 등을 떠밀기에 어쩔 수 없이 걸음하게 되었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하신 일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나 보옵니다.”
“……”
“승하하신 대비께서 핏줄이 아닌 며느님께 재산을 남기셨다는 것 또한 믿을 수 없다 하더이다. 보영당 마마께 한 밑천 떼어드리고자 세자께서 조작을 하신 게 아닐까, 모두가 의심하는 듯하였습니다. 심지어 몇몇은 그 진위를 밝히겠다며 비밀리에 조사까지 착수한 모양입니다.”
세자가 보여준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일 처리는 일부 중신들에게 뿌듯함 대신 걱정거리를 안겨주었다. 그런 분이 보위에 올라 과거의 일을 되짚어 보겠다, 나서기라도 한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그들로서는 지금이라도 세자의 숨통을 쥐어보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금상께서 선위를 생각 중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지요? 좌상께서는 저어되는 바가 조금도 없으신지 저들이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저어라니요? 지금은 자중하고, 또 자중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저 차분함. 저 차가움. 이제는 싫증이 나고 있었다. 신물이 나려 하고 있었다. 노용식은 그런 속마음을 숨기고 권력이란 굴레에서 자유로운 척 한가로이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
“그저 저들의 의견을 전해드리는 것뿐입니다.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으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제 할 일은 모두 마쳤으니 차나 한 잔 즐기고 돌아가겠습니다.”
서찰을 가로채는 것을 시작으로 노용식은 그림자가 되어 김대원의 인생을 줄기차게 따라다녔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의 인생을 흔들어 댄다…… 이 얼마나 짜릿하고 재미난 일인가. 양심의 가책? 그런 것 따윈 느껴보지 못했다. 가진 거라곤 타고난 입놀림과 잔꾀가 전부였으니, 그 재산을 이용해 나름의 노력을 하였던 것일 뿐.
‘수제자가 그리도 안타까웠다면 애초에 그 가문을 건드리지 마셨어야지요. 그러므로 김대원의 모든 원한과 증오는 스승님, 당신 혼자만의 몫입니다.’
찻잔에서 입을 뗀 노용식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내일 오전에 찾아뵙겠다, 기별을 놓거라.”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안빈이 궐로 들어오라 사람을 보내 채근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기분이 언짢거늘 쓸모없는 딸년의 칭얼거림에 심기가 더욱 상해버린다. 노용식은 씩씩대며 사랑채로 들어가 갓이며 답호, 두루마기까지 훌훌 벗어버리고 보료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에 오랫동안 그의 수족 역할을 해왔던 집사가 상전의 불편한 심기를 달래려 눈치껏 들어와 다리를 정성껏 주무른다.
“그래도 안빈마마의 명이신데 들어가 보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급히 상의 드릴 일이 있으신 것 같던데…….”
“상의는 무슨! 보영당의 공주가 두 달 간 푹 쉬었으니 슬슬 죽이고 싶으신 게지.”
노용식의 호통에 흠칫하였던 집사는 얼른 대화의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좌상 대감 댁에서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쯧쯧, 좌상은 존재 자체로 불쾌한 분이 아니시더냐. 사내란 자고로 성미가 괄괄해야 하거늘.”
지난 날, 아무 것도 모르고 도성으로 돌아온 김대원은 관군들에게 쫓기다 벼랑 밑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뒤 그는 살아서 돌아왔다. 어떻게 떨어졌는지 부상은 심각하였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미 처참한 몰골이었던 그는 간신히 참형을 면해 귀향지로 향했다. 도망자로 살지는 않겠다, 당당히 기회를 엿볼 것이다. 뭐, 그런 마음이었을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노용식은 호기심이 일었다.
[믿고 의지했던 이에게 배신당한 사실을 알게 되면 저 잘난 이가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그는 사람을 시켜 최진욱이 뒤에 서한철 대감이 있었음을 알렸다. 네 아비와 어미, 형제들을 베어버리고 가문을 풍비박산 낸 사람은 다름 아닌 네가 그토록 따르고 존경하던 네 스승이었다. 확실한 증거도 들이밀었다. 한데 기대보다 반응이 너무 뜨뜻미지근하였다. 절망하고 괴로워하면서 어찌 피의 복수를 시도하지 않는단 말인가. 해서 조금 더 그를 약 올릴만한 꺼리를 찾아보았다. 때마침 그의 정인과 안영대군이 가례를 올린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서윤영, 김대원이 끔찍이도 연모하던 제 스승의 여식.
[쯧쯧, 부전여전이라. 아비는 권력에 미쳐 제자를 버리고, 그 여식은 왕실의 며느리가 되고자 정인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구나. 김대원이 저리 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끌끌 혀를 차면서도 그 소식이 기꺼이 그의 귀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서 대감이 오래 전부터 왕실과의 혼담을 주고받았고, 대군과 서윤영은 진즉부터 은밀히 만나왔다는 무성한 소문도 함께 전했다. 그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실의에 빠졌으나, 노용식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다. 뜨거운 피에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기를 바랐건만 되레 차갑게 식어버렸으니까. 세월이 흐르고 김대원은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럴수록 미련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피에 절어 날뛰는 모습을, 그로 인해 그가 처참히 무너지는 몰골을 보고 싶다.]
그를 향한 집착이 강해지던 그때 서윤석을 알게 되었다. 해서 그에게 접근해 항간에 떠돌던 소문과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적절히 혼합해 전달하였다.
경산부원군의 마지막을 지킨 이는 김대원이었고, 그가 부원군을 살해하였다. 중전이 그를 찾아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었음에도 고신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네 아비를, 좌상은 금부(禁府)의 옥까지 쫓아가 조롱하고 살해한 것이다.
마음 약한 서윤석은 피가 끓어올랐고, 수족들은 그에게 술을 먹였다. 증오와 원망이 이성을 뒤덮고 활활 타오르도록. 그가 김대원의 사저에 은밀히 잠입할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왔고, 그의 외동딸과 셋째 아들의 뒤를 쫓아 위치도 알려주었다. 서윤석이 그를, 혹은 그의 가족을 해코지한다면 마침내 김대원이 폭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예상대로 그는 피를 보았으나 실망스럽게도 마지막에 이성을 찾고야 말았다. 금상과는 막후교섭까지 벌인 듯했다. 끝내 좋은 구경 한 번 못하고 그의 약점도 손에 쥐지 못한 것이다.
“보기 싫은 놈…….”
“그렇습죠? 얼른 찾아와야 하는데 말입니다.”
“뭐라?”
혼잣말을 하던 그는 집사의 엉뚱한 반응에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았다.
“강준혁 말입니다. 그놈을 빨리 처단하고 의천 상단을 어르신께서 가져와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게 뭐 대수라고.”
“예에? 그래도 거기가 가장 탄탄하고 알짜배기입니다.”
“어차피 이현군이 보위에 오르면 다 해결될 일이야.”
금상의 이복아우 이현군. 이번에 보위에 앉혀 그의 꼭두각시로 내세울 인물이었다.
‘새로운 인물로 보위를 잇게 하고 나의 사람들로 조정을 채울 것이다. 평생을 그림자로 살아온 나, 노용식. 이제부터 밝은 하늘 아래서 새로운 권력의 중추가 되는 것이다.’
온몸에 짜릿한 쾌감이 흐른다. 그러기 위해선 세자와 정한군을 우선적으로 처단해야 했지만 그를 위한 준비도 빈틈없이 마련되어 있었다. 군사훈련도 마무리 되었고, 금군별장과 병조의 주요인사, 그리고 이번 세자의 행태로 반발심이 일어난 무리들 또한 전부 손아귀에 넣었다.
“대감마님, 혹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주인의 말에 집사가 입술을 축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얼마 후면 선대왕마마의 능행차가 있지 않은가? 금상께서 일어나질 못하시니 세자와 정한군이 나서겠구먼. ……모레쯤 모두를 소집해 놓게.”
“예, 대감.”
아직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이현군을 내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 위에 누가 있었는지 확실히 각인시키고 말 것이다. 노용식의 얼굴에 기대감과 비장함이 동시에 떠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나의 세상이 오는 것인가.’
은명은 오늘도 운종가를 휩쓸고 있었다. 넓고도 다채로운 이곳에서 호기심은 만개하였다. 재작년, 넋을 놓고 구경한 곳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예 충격을 받은 은명은 틈만 나면 나들이를 나와 시전을 온통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도성 안 제일의 유명인사가 된 것은 지극히도 당연한 일.
처음에는 악명 높은 예전의 그 공주마마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고개도 들지 못하였었다. 그저 몰래 숨어서 훔쳐보기만 했을 뿐. 허나 소문과 실제는 확연히 달랐다. 오밀조밀 어여쁜 외모와 이것저것 물어오는 은명의 붙임 있는 성격에 시전 상인들은 조금씩 말문이 트였고, 이제는 먼저 안부를 여쭙기도 하였다.
상인들은 보영당 아씨가 제 점포를 찾아주길 바랐고 대가댁 여식들은 은명의 꾸밈새를 보기 위해 장옷을 뒤집어쓰고 멀리서 염탐을 하였다. 거기다 혼기에 접어든 명문가의 도령들이 절세가인 보영당 아씨를 보고자 운종가를 기웃거리고 있었으니……. 도성의 상권은 때 아닌 호황을 누린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고 있었다.
“아가씨, 이건 어떠십니까?”
“글쎄…….”
난이가 붉은 빛의 산호가락지를 권하자 은명은 부러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난 두 달, 은명이 줄기차게 운종가를 휩쓸었던 또 다른 속내를.
‘의천 상단의 단골이 되어 보란 듯이 그곳을 들락거릴 것이다.’
큰손 고객과 상단 대방의 만남. 거듭 고심을 해봐도 이보다 더 좋은 수는 없었다. 그간 운종가 곳곳을 돌며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으니 슬슬 의천 상단을 찾는다 해도 의심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품질 좋고 귀한 물건이 넘쳐난다는 한양 최고의 상단이 아닌가.
“이곳의 물품은 아씨의 마음에 차지 않을 것입니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점포 주인이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그래서 어디 장사를 하겠는가? 어여쁘다, 잘 어울린다. 이리 공치사를 해야 내가 넘어갈 것인데.”
“하하하. 장사는 다른 손님께 하면 됩니다. 그러지 마시고 차라리 의천 상단으로 가보십시오.”
은명의 입 꼬리가 티 안 나게 실룩거렸다. 드디어 기다리던 답이 나온 것이다. 좋기는 하지만 호들갑은 금물.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은명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되물었다.
“의천 상단?”
“예, 거기 본관으로 가시면 조선에서 보지 못한 진귀한 물건들이 많이 있다 들었습니다. 모두가 그곳과 거래를 하고 싶어 하지만 가격이 원체 높아 아쉬운 대로 이곳을 찾고 있는 것입지요. 아씨께서는 마땅히 그리로 가셔야합니다.”
“그러한가?”
“그렇습니다.”
갑자기 끼어든 이 우렁찬 목소리는 익정이었다. 아정이와 정한군을 제외하고 은명이 최근 들어 가장 줄기차게 마주하고 있는 인사.
“송판관이 아니십니까?”
“그곳의 물건이 훌륭하기로 정평이 나 있지요. 바로 이 근처이니 소신이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운종가를 휘저으며 수도 없이 익정과 마주치곤 하였다. 해서 때때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인들이 있을 때면 자연히 그를 찾아가 문제를 부탁하게 되었다. 그 횟수는 날로 늘어났고 어느새 은명은 그를 이웃집 오라버니처럼 편히 대하고 있었다.
“의천 상단을 잘 아십니까?”
“예. 그 상단의 대방이 일전에 역도로 몰려 경을 칠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알게 되었는데 성정이 반듯하고 신뢰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시지요.”
은명은 익정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히 의천 상단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제륜을 만날 생각에 한껏 부풀어 아니, 언제나 그러했듯 자신을 향한 익정의 아련한 눈길 같은 건 알아챌 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정은 조금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
‘이쯤에서라면. 이쯤까지라면…… 서율, 그 친구도 이해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마음껏 웃으시고, 마음껏 행복해 지십시오.’
공주는 모를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마주친 그와의 우연한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찬바람이 불던 작년 미틈달 하순, 강원도로 향하는 유배 길을 듬직한 그가 도성 밖 멀리까지 동행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마음을 몰라주어도, 돌아봐 주지 않는다 하여도, 이리 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우직한 사내는 충분하다는 것을.
사내이기에 혹시나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겨울, 강원도로 향하는 초라한 소교를 따르며 그런 마음조차 깨끗이 비워버렸다. 혹시나 오늘은 마주치지 않을까, 기대감에 하루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옆에서 웃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또한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다행이었다. 시전 상인들이 인사를 해오자 공주는 밝게 웃으며 화답을 해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
그 웃음이 눈부시도록 환하고 어여뻐 익정의 한쪽 가슴이 찌르르 울리고 있었다.
“제가 웃어야 합니까, 울어야 합니까?”
집무실에 은명과 단 둘이 마주앉은 준혁은 식지도 않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투덜대었다. 벌건 대낮에 익정과 함께 방긋 방긋 웃으며 상단의 정문을 들어서던 누이의 그 태연함이란. 얼마나 놀랐는지 사환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한참이나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훗, 당연히 웃으셔야지요. 오라버니께서는 오늘 어마어마한 재력가를 단골로 확보한 것입니다. 단골이란 미명 하에 앞으로는 대놓고 드나들 작정이니까요.”
“이리 뵙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가장 자연스럽고도 안전한 방법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오라버니께서도 정기적으로 물건을 들고 보영당으로 와주십시오.”
수고로운 고생 뒤에 이어지는 편안하고 아늑한 이 안정감이란. 은명이 잔잔한 미소를 띠우는데 기척이 들리며 대행수가 들어와 보석함을 하나 건네주고 나간다. 준혁은 그 함을 앞으로 쭉 밀어주었다. 은명은 호기심에 열어보고는 두 눈이 회동그랗게 떠진다. 자수정과 금강석이 화려하게 박힌 백옥잠과 가란잠, 홍보석이 반짝이는 옥제석류잠, 그리고 진주 뒤꽂이에 각종 장신구까지. 실로 진귀하고 탐나는 패물들이 그득히 담겨있었다.
“선물입니다. 돌아오시면 드리려고 준비해둔 것이지요.”
“저에게요? ……하지만 너무 과합니다.”
“오라비의 마음이니 받아주십시오. 한번쯤은 이런 것들을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숙영이에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이리라. 가엾으신 분……. 애잔함이 묻어나는 그의 얼굴에 은명은 즉석에서 패물을 착용해보았다. 오늘 입은 복색은 매끄러운 영산홍빛 매화은박치마에 수가 놓아진 백색의 저고리. 은명은 그에 어울리는 분홍빛 자수정들을 땋아 내린 댕기 머리에 별처럼 촘촘히 꽂고, 월계화를 본뜬 산호와 홍보석 장식물을 옆머리에 꽂았다.
“어떻습니까?”
“보기 좋습니다. 잘 어울리십니다.”
마음이 짠해진 은명은 또 다른 소식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 놓았다.
“외숙과 외숙모님…… 그리고 제현 오라버니와 숙영이…… 모두 어디에 계시는지 궁금하시지요?”
“그건……”
마치 알고 있다는 듯 깊고 선명한 먹빛의 눈동자가 진중한 빛을 발하며 준혁을 바라보았다.
“저하께서도 얼마 전에 아셨는데 전하께서 수습을 하셨다 합니다. 외조부님이 계신 곳에 모두 같이 계시다 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햇빛이 잘 드는 따뜻한 곳이라 합니다. 어디인지 알려 드릴 것이니 먼저 다녀오십시오. 그리고 조만간 저도 꼭 데려가 주십시오.”
명치끝에 걸려 있던 마지막 가시 하나. 웃을 때도 그곳이 아파 크게 웃을 수 없었고, 산해진미를 먹을 때도 그곳이 막혀 체하기 일쑤였다. 평생 가시를 박고 살아야 되나 보다, 제 몸처럼 여기며 포기하고 있었건만.
“……흐흑”
가장 크고 아팠던 마지막 가시가 빠져나가자 준혁은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은명도 오라버니를 따라 눈물을 흘렸다.
딱 거기까지가 좋았다. 부친의 농간으로 지방에서 진을 빼고 도성에 도착한 지 반 시진. 도성을 비우고 돌아오는 길이면 늘 그러했듯 서율은 치경과 함께 주막에 들러 국밥을 주문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 마지막으로 이곳에 들렀을 땐 공주에 대한 험담이 난무하여 중간에 숟가락을 놓아버린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한 여인에 대해 미친 듯이 지껄이는 중이었다. 서율은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주모가 먹어보라 내어준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보영당 아씨라……. 누구더란 말이냐.’
백성들이 공주 외의 여인에게 저토록 관심을 보이는 것은 실로 처음인지라 서율은 자연히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그럼, 그렇지.’
한참을 집중해서 듣다 보니, 보영당 아씨는 화경궁의 제 정인인 것이라. 저번과는 다르게 쏟아지는 칭송에 서율은 어느새 피로를 말끔히 잊고 하늘로 붕 떠버린 기분이었다. 맞장구치는 주모가 기특해 주문한 국밥이 나오기도 전에 제일로 값비싼 음식을 추가로 주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만 좋았다.
“보영당 아씨를 보겠다고 성균관 유생들이 강론을 아예 무단으로 빼먹는다며? 저번에도 보니까, 운종가에서 요래 숨어가지고. 응? 요러고 보고 있더라니까. 아주 안달들이 났어요, 안달들이.”
그의 기분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훗, 그런 애송이들은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서율은 아무렇지 않은 척 유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아삭아삭, 사과 씹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에 치경은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소문은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성균관 유생뿐이겠어? 듣자 하니,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혼기 찬 자제들이 전부 그 보영당을 주시하고 있다는구먼.”
“마나님들이 더 적극적이라잖아. 꽃 같은 인물에, 다정한 성정에, 게다가 상감마마의 따님이시니, 그분을 며느님으로 들이는 집안은 그야말로 복덩이를 잡은 것이지.”
“매파를 어디로 보내야 되나 눈치들만 보다가 지난 다과모임 이후로 혜빈마마께 한꺼번에 보내고들 있다지?”
그가 도성을 비운 사이, 제 정인은 조선 최악의 신붓감에서 조선 최고의 신붓감으로 그 위치가 수직상승이 되어 있었다. 공주의 신분이 아니니 그분과 혼인하는 이는 더 이상 부마가 아니었다. 대가댁 총명한 자제들과의 혼사에 아무런 장애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 혜빈의 초대로 외명부의 여인들과 가졌던 다과에서 서글서글한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해 혼기 찬 자제를 둔 명문가의 마나님들을 전부 홀려버리셨단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시는 분이 무슨 바람이 들어 모임엘 가셨단 말인가.’
까다롭게 굴기 시작하면 한없이 까칠해지지만 유하게 굴기 시작하면 누구라도 단번에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여인. 저한테만 보여주던 그 어여쁜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도성 안 사람들을 전부 휘어잡은 것이리라.
‘아, 싫다.’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던 귀한 보물이 손가락 사이로 허무하게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푸짐하게 시킨 음식이 이미 나와 있었지만 서율은 아까부터 사과만 먹어대고 있었다. 아니, 무엇을 먹고 있는지 본인도 모르는 듯하였다.
‘쏟아지는 혼담이 무슨 대수일까. 그분의 정인은 나, 김서율. 얼굴도 모르는 것들과 존재감부터가 다르다.’
서율은 마음을 가다듬고 고고한 자태로 숟가락을 들어 국밥을 휘휘 저었다. 입안이 소태같이 썼지만 괜한 오기도 생겼다. 내 오늘은 기필코 이 국밥을 끝까지 다 먹고야 말리라. 하지만 처음으로 한 술 푹 떠서 입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근데 요즘 한성부 판관 나리하고 좋아 보이시던데. 볼 때마다 같이 계시더라고.”
송익정,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거론되고 말았다.
“에이, 그분은 사별하셨잖아.”
“이제 의빈이 되시는 것도 아닌데 뭐가 어때서! 사별이라지만 슬하에 자식도 없지, 우상대감의 장남이시지, 능력도 인물도 출중하시지. 그리고 내가 봤더니 두 분이 굉장히 잘 어울리시더라고. 그림 같아, 그림.”
탁-.
‘여기까지.’
결국 이번에는 한 입 먹어보지도 못하고 숟가락을 놓아버린 서율이었다.
가을의 향취가 물들기 시작하는 월류지. 그곳에서 서율은 초조하게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바람이 만들어주는 월류지의 고매한 물결도, 전추라, 석죽, 승금황, 등 곱디고운 청초한 가을꽃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공주가 언제 오나, 쭉 뻗은 길목만 주시하고 있을 뿐. 조금 전, 저조한 기분으로 주막을 나와 보영당으로 향하던 그는 기가 막히게도 운종가에서 은명을 만나고 말았다. 그것도 제 정인을 훔쳐보는 다른 사내들 덕분에.
[저기 저, 보영당 소저 아니신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운 운종가에서 신기하게도 제 여인에 관한 말만 귀에 쏙 꽂혀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딱 봐도 안쓰럽게 생긴 것들 셋이서 몸을 숨기고 어딘가를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향초를 파는 어느 점포. 그곳에 그분이 계셨다. 그립고 그리웠던 나의 사람…….
그러나 오랜 만의 재회로 감격해 할 틈도 없이 그의 눈에 들어온 또 다른 주위 풍경이 있었다. 군데군데 숨어서 제 정인을 훔쳐보는 것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내, 저것들에게 확실히 보여줄 것이다!]
뻗쳐오르는 분기에 여봐란 듯 정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데 치경이 그 앞을 가로 막았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세자와 부친께 노여움을 산단다.
[월류지로 가 계십시오. 제가 마마를 그리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부친께서 반대하시는 마당에 저하의 노여움까지 산다면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었다. 결국 치경의 꼬드김에 넘어간 서율은 여기서 이리 안절부절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도성을 너무 오래 비운 것이야……’
지난 두 달은 부친이신 좌상 대감을 다시 보게 된 나날이었다. 평소, 공과 사를 칼같이 구분하여 뭇 선비들의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으신다는 어른. 바로 그분께서 두 달이 넘도록 무소불위의 권력을 사적으로 마구 휘두르며 서율이 한양 땅에 발도 붙이지 못하도록 전횡을 일삼으신 것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를 쉴 틈 없이 내돌리시더니 얼마 후엔 탐라로 가라는 공문이 떨어져 얼마나 기함을 하였는지 모른다. 공무고 뭐고 일단은 올라가야겠다, 길을 떠나려던 차에 당장 도성으로 돌아오라는 세자의 공문이 당도한 것이다.
한양에 들어서며 그분을 볼 생각에 얼마나 설레었던가. 이 사람이 보고 싶어 울적해하고 계시면 어쩌나 내심 걱정까지 하였더랬다. 한데 아까 보니 향초를 고르시며 어찌나 신나하고 계시던지. 그 천진한 웃음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익정과 줄기차게 좋아보였다는 그 목격담, 그림 같이 어울렸다는 누군가의 의견은 정황상 모두 사실인 것이다.
‘익정 형님과 그렇게 다정하셨다, 이거지? 조금의 곁눈질도 허용치 않겠다, 내 그리 다짐을 받았건만…….’
이번에야 말로 상처받은 이 마음을 확실히 표현하고 다시는 저 이외의 사내와 가까이도 하지 못하게 하리라. 노엽고도 서운한 마음에 주먹을 불끈 쥐는데 저 멀리, 붉은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날아오는 게 보였다. 청금석을 녹여 놓은 듯 청명한 하늘 아래 영산홍빛 치마가 너울너울. 그의 정인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쿵, 쿵, 쿵.
그 모습에 서율의 맥박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솟아오른다. 동시에 고집스럽게 굳어 있던 얼굴도 순식간에 이완되어 버렸다.
‘화를 내려 하였거늘, 절대로 웃지 않으려 하였거늘…….’
만면에 희색이 가득한 제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서율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결국 줏대 없이 활짝 웃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스승님!”
그리웠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자 그의 가슴이 뭉클 달아오른다. 뛰는 모습조차 저리도 어여쁜 사람이거늘, 어찌 화를 낼 수 있을까.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평생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는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사뿐히 날아드는 바알간 나비를 너른 가슴에 와락 안아버린다. 상쾌한 사과향이 은근한 매화향과 뒤엉키고 따뜻한 체온에 가슴을 녹이며 오랜 만에 만난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로를 마주 안고 있었다.
부드러운 풀밭 위에 사내의 답호가 널찍하게 펼쳐져 있고, 그 위에 누워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두 남녀가 있었다. 서율은 그의 한쪽 팔을 베고 누운 은명의 외모가 그동안 더욱 성숙해졌음을 깨닫는다. 올해 나이 열여덟, 한창 물이 오른 그의 공주는 날이 갈수록 아름다움이 배가 되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거야 원, 밖으로 나다니지 마시라 할 수도 없고…….’
사대부 가문의 규수들보다 바깥출입이 더 철저히 금지된 공주마마 시절에도 거침없이 외출을 즐기셨던 분. 그간의 행적을 고려해 보았을 때 지금은 거의 통제 불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보기에도 아까운 내 사람, 다른 사내들이 훔쳐보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찌 모르는 척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 말 못할 그의 고민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의 뺨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은명이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다정히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
“야위셨습니다. 많이 고단 하셨습니까?”
“저하께서 불러주지 않으셨다면 도망칠 뻔하였습니다.”
“좌상께서 참으로 심술 맞으십니다.”
그의 투덜거림에 은명이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며 씁쓸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대감께 아주 밉보인 모양입니다.”
좌상의 반대를 훤히 꿰뚫고 있는 듯 은명의 새까만 눈동자가 더 짙은 빛을 띠었다. 이에 잠시 긴장했던 서율은 제 뺨을 어루만지는 정인의 손을 쥐어 가슴에 꼭 끌어안는다.
“서운하십니까?”
“저를 한양으로 불러 주실 때 도움을 주셨다 들었습니다. 제가 많이 미우신 건 아닐 겁니다.”
“쉽게 정을 주는 분이 아니긴 하시지만 진심을 몰라주는 분도 아니십니다.”
서율은 은명의 손을 제 가슴에 꼭 누르며 속내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아버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이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연모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당신은 제게 넘치도록 과분하고 아까운 분이십니다.”
강원도에서 매일 같이 들어 익숙해진 상황임에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은명의 얼굴이 연한 붉은 빛을 띠었다.
“앗!”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이 어여뻐 서율은 은명의 상체를 번쩍 안아 제 가슴 위에 올려놓고 얼굴을 마주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라던 은명은 가까이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에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버린다.
“아버님께서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기실 겁니다. 어쩌면 저보다 당신을 더 좋아하실 수도 있겠지요. 이미 조선 최고의 신붓감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그의 공주께서는 아직까지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렇다면 굳이 알려드리지는 않으리. 서율은 곧바로 다른 말로 넘어가 버린다.
“그나저나 도성 안 사람들이 이제 당신을 보영당 아씨라 부른다지요? 어떠십니까, 새로운 호칭이 마음에 드십니까? 공주마마가 그립지는 않으시고요?”
그의 다정한 물음에 은명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가슴 위로 폭 안겨들었다. 좌상에 대한 생각에 심기가 어지러워진 탓이다. 따지고 보면 좌상이 저를 싫어할 만한 이유는 무궁무진하였다. 외조부, 외숙, 그리고 어머니…….
‘서찰의 주인은 좌상 대감이 틀림없겠지?’
그럴 거라 짐작은 하지만 그 내용의 심각성을 헤아렸을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얼음장 같은 좌상과 어머니의 조합은 여러모로 어색하기만 하다.
‘조금만 더 지켜보자.’
결국 또 같은 결론을 내린 은명은 머릿속을 비우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어 버린다. 따뜻한 그의 체온과 향긋한 풀 내음이 복잡해진 머리를 맑고 개운하게 정화시켜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가을밤 정한군의 사저. 사랑채에 세자와 마주앉은 좌상은 황금빛을 띠는 가향의 국화주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향긋한 국향이 입안에 감돌며 깊은 맛을 내는 게 일품이었다.
세자는 그런 좌상의 움직임과 표정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신념이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으며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바탕으로 휘둘리기보다는 휘두르는 존재. 세자의 입장에서 보면 실로 탐이 나는 인재였다. 과거에는 그리도 무섭고 싫은 존재였건만……. 한 치도 장담할 수 없는 인생사가 오늘따라 가슴에 와 닿아 세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진다.
“앞으로의 결과에 상관없이 한번쯤은 이렇게 뵙고 싶었습니다.”
“소신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예, 그러시겠지요. 그래도 제가 가진 생각은 말씀을 드려야겠다 싶어 자리를 청한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아직은 제가 이 나라의 국본이 아닙니까?”
세자는 숙성된 국화주로 적당히 목을 축인 후 좌상을 응시하였다.
“저는 말입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문과 당파 또한 염두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저와 생각이 다르다 하여 함부로 배척하지 않을 것이고, 저와 생각이 같다 하여 무조건 감싸고 따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기회는 골고루 균등하게, 책임은 하나하나 막중하게 따질 것이며, 시대에 필요한 변화와 개혁은 조금도 늦추지 않을 것입니다. ……예, 압니다. 참으로 꿈같은 소리이지요.”
세자의 얼굴 위로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드러났다 사라진다.
“허나 꿈을 꾸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였습니다. 하여 제가 무사히 보위에 오른다면 지금 읊어대었던 꿈들 중 하나라도 이루기 위해 전력투구할 작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깨어지고 너덜너덜 다치게 되겠지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제가 흔들릴 때마다 곁에서 중심을 잡아주고 바른 길로 이끌어줄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좌상. 작금의 위기를 넘기면 그 역할을 경께서 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재야에 묻힌 현명한 원로들을 찾아보도록 하십시오.”
“경께서는 왕권보다 신권이 강해야 한다, 생각하시지요?”
“위험한 발언을 하십니다.”
“허나 대감도 저도 결국 목표하는 바는 같을 거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마음 놓고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안정되고 강건한 나라. 경의 소신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궁극의 목표를 잃고 허우적거릴 때 따끔한 조언 한마디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탁월한 정치 감각과 노련함을 고루 갖춘 그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다면 무엇이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자는 진심을 내보였지만 좌상은 냉담하기만 하였다.
“소신의 조언이 필요하신 겁니까, 아니면 소신이 부릴 수 있는 능력을 빌리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그 능력에 관해서라면 이미 선택권을 드렸습니다. 지평에게 들으신 그대로 저는 그것에 대해 함구할 것입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제게 오지 않는다 하셔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허나 제게 오신다면 그 마음도 같이 주셔야 합니다. 지금의 제안은 경이 제게 오신다는 전제 하에 드리는 것입니다.”
좌상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지만 일말의 침묵 후 역시나 감정 없는 어조가 흘러나왔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호기롭고 일처리 또한 시원시원한 세자는 그 기질이 확실히 외가 쪽을 많이 닮아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라 머릿속을 스치지만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좌상은 술잔을 마저 비우고 마무리를 하였다.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물러가자 혼자 남은 세자는 그제야 얼굴 위로 초조한 기색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 국본이란 이름이 무색할 만큼 스스로의 처지가 초라하고 미약해 입안에 씁쓸함만이 맴돌고 있었다.
“저하, 더 이상 피하지 말고 답하여 주십시오. 정녕, 보영당 마마를 고의로 폐위시킨 것입니까?”
좌상이 떠나간 빈 방. 국화주를 벗 삼아 세자가 홀로 상념에 젖어있는데 느닷없이 정한군과 김서율이 방으로 들이닥쳤다. 정한군은 죄를 지은 사람 마냥 세자 곁에 찰싹 달라붙었고, 김서율은 꼬장꼬장한 얼굴로 제 부친이 머물렀던 자리에 앉아 그를 정시하였다. 이 방에서 밀담이 오가는 사이, 다른 방에서 정한군이 서율과 술잔을 기울이던 중 취기가 올라 말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에이, 형님과 나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지. 자네 그거 아나? 우리 보영당 마마 강론 말일세. 그거 저하께서 일부러 자네를 콕 집어서 맡기신 것이라네.]
안 그래도 공주의 폐위가 계속 의심스러웠던 서율이 그의 말꼬리를 잡고 꼬치꼬치 따져 물은 것은 자명한 일. 뒤늦게 실수하였음을 깨달은 정한군은 끝내 수습하지 못하고 냅다 뛰어와 세자 뒤에 숨어버린 것이다.
“분명히 해두지만 공주를 고의로 폐위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네. 물론 고집을 부렸다면 폐위와 유배는 막을 수도 있었겠지. 대신 은명이를 제외한 모두가 다쳤을 것이야.”
“허면 처음부터 소신에게 일부러 강론을 맡기신 건 사실입니까? 대체 언제부터 보영당 마마와 소신 사이에 개입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개입이라니? 나는 그저 조용히 지켜보았을 뿐이네. 강론 또한 보령에서 둘이 알고 지낸 사이였다 하니 생판 모르는 남보다 나을 것 같아 부탁을 하였던 것이지.”
그 옛날, 김서율이 제 어린 누이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소식에 어찌나 화가 나고 괘씸하였던지. 도성에 올라와 그가 처음으로 인사를 오던 날, 세자는 속으로 단단히 벼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말문은 막혀버리고 말았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조금은 넋이 나가 그늘이 져있는 얼굴. 집으로 돌아온 기쁨과 안정감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서 번져 나오는 아련한 공허감이 제 누이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세자는 어렴풋이 추측했었다.
그렇게 육 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대신들과 화원정으로 향하던 그때, 멀리서 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호기심이 일었다. 뒤에 쫓아오는 김서율과 누이가 서로를 발견한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어릴 적 풋감정은 흐지부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추측하면서도 솟구치는 장난기를 제어할 수 없었다. 하여 대신들을 이끌고 충동적으로 공주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세자는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김서율의 얼굴과 떨고 있는 누이의 뒷모습을. 마침 공주의 스승을 물색 중이었던 세자는 그 순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주의 강론을 김서율에게 맡겨보자.
“정말로 그것이 다였습니까?”
물론, 서율과 은명의 과거를 간략히 귀띔해주며 정한군에게 공주의 마음을 떠보라 시키기도 하였다. 한데 정한군은 이미 누이와 차를 마시며 엄청난 대화를 나누고 난 이후였다. 과거의 일로 치부하기엔 누이의 감정이 너무도 생생히 살아있었다. 하여 세자는 서율을, 정한군은 공주를 떠보며 자연스레 두 사람을 예의 주시하였던 것이다. 사실은 이러하나 쓸데없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댈 필요는 없는 일. 세자는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버린다.
“다른 게 또 무에 있을까. 내가 그리도 한가한 사람이더냐?”
“내가 뭐라 하였는가, 저하와 나는 그저 뒤에서 조용히 지켜본 것이 전부일세. 물론, 후에 공주께서 힘들어 하시기에 내가 조언을 조금 해드린 적은 있었지. 자네 그거 아나? 자네의 청혼을 받고 공주께서 화경궁에 숨어 계셨을 때, 쫓아가서 부추기고 용기를 드린 사람이 바로 나일세. 후에 혼례를 올리게 되면 이 사람의 공을 절대로 잊지 마시게.”
“혼례는 무슨!”
정한군의 말에 세자가 정색을 하며 말을 끊어버린다. 이에 서율도 정한군도 움찔하여 세자를 바라보았다.
“좌상께서 은명이를 반대하고 계신다지? 문중에서 쫓아내려면 쫓아내시라, 좌상께 반항하고 있다는 자네의 근황 또한 내 익히 들어 알고 있네. 보기보다 참 유치한 위인일세.”
“그것은…….”
수상쩍은 세자와 정한군 때문에 잠시 정신이 없었던 서율은 또 다른 공격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져 버린다.
“말이 나온 김에 이것만은 명확히 해두지. 나는 내 누이를 족보에서 지워진 근본 없는 놈에게 절대로 시집보내지 않을 것이야. 찾아보면 훤칠하고 총명한 명문가의 자제는 얼마든지 널려있거든.”
“저하!”
“은명이를 지어미로 맞이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반드시 좌상 대감의 허락을 받아 오도록 하게. 좌상과 정경부인께서 쌍수 들고 환영하지 않는 이상, 나 또한 자네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야.”
그 말을 끝으로 세자는 고개를 단호히 돌려버렸고, 정한군은 옆에서 얄밉게 키득거렸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는 요즘, 서율에게서 긴긴 한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진 궁궐 안 대전. 금상의 침수가 마련된 곳은 대전에서 가장 깊숙하고도 작은 규모의 내실이었다. 날이 쌀쌀해지는 관계로 금상의 옥체를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며칠 간 이 방에 머무르는 것이라 하나 그 속내는 따로 있었으니. 눈앞의 이 아이, 궐 안의 출입이 금지된 딸아이를 이렇게나마 은밀히 마주하기 위함이었다.
‘아비를 보아주기로 한 것이냐?’
움푹 꺼지고 짓무른 눈에 파리하게 말라있는 용안.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진 금상은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딸아이와 눈을 맞춘다. 언제부터인지 내내 시선을 피하던 아이, 아비를 타인처럼 무심하게 바라보던 딸아이가 오늘만큼은 저의 눈을 오롯이 보아주고 있었다. 이렇게 마주보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목울대가 뜨거워진 금상은 눈앞이 뿌예지는 것을 느끼며 한쪽 손을 앞으로 내민다.
손을 달라 하시는 것일까? 금상을 지켜보던 은명은 주춤거리며 다가가 생애 처음으로 부왕의 손을 잡아보았다. 김서율보다 훨씬 곱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어색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따뜻하고 다정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손을 잡고 산책을 하던 옹주를 많이도 부러워했었다. 하여 그 어린 마음이 아리고 또 서러웠었다.
쓰라린 과거의 기억에 가슴이 울렁이는데 손을 잡고 있던 금상이 무언가를 은명의 주먹에 조심스레 쥐어주었다. 무엇일까? 천천히 제 주먹을 펴보던 은명은 놀라움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알알이 박혀있는 보랏빛 자수정이 기품 있고 아름다운 어머니의 은가락지. 외조모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어머니께서 가져가셨나 보다, 찾는 것을 포기했던 그 은가락지인 것이다.
“이건……”
“네 어미가 떠나던 날, 가져온 것이다. 그거라도 있어야 이 아비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조금만 가지고 있다 돌려주려 하였거늘, 이제야 네게 돌려주게 되었구나.”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그 사람을 보며 숨을 쉬는 자신이 끔찍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은 가락지 하나만 챙겨 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환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숨이 다 하는 날까지 세자와 공주를 지켜주겠노라, 그 사람과 했던 약조를 져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비가 많이 서운하였느냐?”
서운하였다. 화가 났었다. 너무도 속상하여 수풀에 들어가 혼자서 울어버린 적도 많았다. 왜 나를 미워하실까, 왜 나를 싫어하실까.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이, 부친이 저를 귀애하는 나름의 방법이었음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상황이었음을.
“너를 볼 때마다 ……울어버리고 싶었다.”
한 번도 왕이 되고자 한 적이 없었다. 대군으로 태어났으나 한갓진 곳에서 가족들과 유유자적 평화롭고 싶었다. 한 여인의 지아비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로만 살아가고 싶었다. 원하지 않게 권력의 정점으로 끌려나와 수많은 암투에 몸을 맡긴 채,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주어야 했다. 내 자식도 마음대로 안아보지 못하는 이 자리가 그에게는 버겁고 싫기만 하였다.
“후회하느니라. 차라리 너를 안고 한번 울어버렸다면 위신은 상했어도 너를 곁에 두고, 네가 커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인데……”
“전하……”
떠오르는 딸아이의 기억이라곤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이 앉아있는 모습이 전부였다. 웃는 모습도,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도 알지 못한다. 보지 못한 모습이 셀 수도 없이 많거늘,
“언제 이리 커버렸을꼬……”
지나간 세월이 한스럽고 안타까워 꾹꾹 눌러두었던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제와 이러는 게 무슨 소용 있을까 만은 마지막 숨을 내쉬기 전에 딸아이에게 제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실은 이 아비가 너를 많이 어여뻐 하였노라고.
“흠흠!”
금상도 은명도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데 밖에서 내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오고 있는 것이다. 딸아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하였다. 제 어미가 어떻게 떠나간 것인지, 제 외조부가 어떠한 멍에를 지고 있는 것인지. 얽히고설켜 수없이 꼬여버린 복잡한 고리들, 더 늦기 전에 금상은 그 마지막 고리를 풀고 자식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다. 이것이 죽기 전, 그가 해야 할 마지막 역할인 듯하였다.
“아가, 잠시 저 옆방으로 들어가 있거라.”
“옆방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잠시면 된다.”
금상이 자리한 내실은 양 옆으로 작은 곁방이 각각 하나씩 연결되어 있었다. 여름에는 양쪽을 활짝 열어 넓고 시원하게 사용했지만 날씨가 추워지면 문을 닫고 한동안 비워두는 곳이었다. 그 중 부왕이 가리키는 곳으로 들어가 보니 어두운 방 안에 푹신한 방석이 하나 놓여있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듯 문 가까이 놓여 있는 그곳에 은명은 다소곳이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일일까? 불안한 마음으로 깜깜한 암흑 속에 앉아있는데 곧이어 내관의 침착한 목소리가 그곳까지 울려 퍼졌다.
“전하, 좌의정 드셨사옵니다.”
‘좌상 대감께서?’
저도 모르게 긴장해버린 은명은 숨을 죽이고 문가로 더 바짝 다가가 앉는다.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상궁도 내관도 모두가 자리를 비운 금상의 내실. 임금과 좌상, 단 둘이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은 분명 독대라 할 수 있었다.
“갑자기 보자고 한 것인데 응해주어 고맙소.”
뜻밖의 상황이었음에도 좌상은 담담한 얼굴로 차분히 답을 올렸다.
“황공하옵니다.”
“그대는 참…… 한결같은 사람이오. 늘 침착하고 이성적이지. 그대의 그런 점이 과인은 부럽기도 하였다오.”
빈정거림도 날카로운 가시도 들어있지 않은 순수한 상찬. 이에 좌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겸손을 표했다.
“과찬이시옵니다.”
“한데 경이 하나 성급하였던 게 있었소.”
“소신이 놓친 게 있었사옵니까?”
“그 사람.”
일순 좌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금상께 그 사람이란 효경왕후마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실 금상께서 과거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좌상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제껏 한 번도 그에게 효경왕후에 관한 말을 사적으로 입에 올린 적이 없으셨기에.
“그 사람은 경이 살아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소.”
좌상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자 금상은 피식,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역시 그대는 몰랐구려. 그 사람이 변명도 하지 않았나보군. ……그래, 바로 그런 사람이었지.”
쓴웃음이 지나간 자리에 아련하고도 꿈을 꾸는 듯 그리운 미소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그 옛날, 매화나무 아래에 서 있던 왕후를 보고 첫 눈에 연모하게 되었소. 그 사람의 주변을 수도 없이 맴돌았었지. 결국은 용기를 내어 다가갔고, 또 청혼도 하였지만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하고 말았소. 곧 정혼할 것이다, 딱 잘라 거절을 하더군.”
당시 대군이었던 금상은 한동안 방황하며 가끔 멀리서 윤영 낭자를 훔쳐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방황을 하였을까. 심란한 마음에 유람을 떠났던 그는 부왕의 부름을 받고 궐에 들어갔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토록 사모하는 여인과의 가례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니 윤영 낭자의 정인은 얼마 전 역적으로 몰린 우상의 장남이었고, 그는 벼랑 끝에서 추락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금상은 수소문 끝에 윤영 낭자가 머물고 있다는 암자로 부랴부랴 쫓아갔었다.
김대원이 추락사 한 것으로 알려진 그 벼랑에서 멀지 않은 곳. 그곳에 위치한 암자에서 낭자는 스스로 상복을 차려 입고 김대원의 영생을 빌며 삼천 배를 올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온몸을 떨면서도 밤새도록 멈추는 않는 그 모습이 처연하고도 안타까웠다.
동이 틀 무렵, 삼천 배를 마치고 법당을 나온 낭자는 비칠거리는 걸음으로 방이 아닌 숲속의 그 벼랑으로 향했다. 저 앞, 보기에도 오싹한 끝자락이 보이건만 낭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였다. 조금만 더 가면 까마득한 낭떠러지. 금상은 그제야 낭자의 의도를 알고 경악하였다. 정신없이 뛰어가 마지막 순간 간신히 허리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놓아달라고, 제 아비가 저지른 것이니 아비의 죄를 이렇게라도 씻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불쌍한 그 사람, 혼자서는 차마 보낼 수가 없다며 울부짖는 낭자를 금상은 끝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왕실에서 주관하는 만큼 가례는 예정대로 준비되어 갔지만 그 사람은 그날로 병석에 드러눕고 말았소. 하지만 나도 그 사람을 포기할 순 없었소. 하여 집으로 쫓아가 고집을 부렸지. 정인을 위해 이미 목숨을 한 번 버렸으니 남아있는 생은 당신의 목숨을 살린 나에게 달라…….”
옛일을 떠올리는 금상의 눈가에 쓸쓸한 기색이 번져 나갔다.
“얼마 뒤, 경이 살아서 돌아온 걸 알게 되었지만 나도 부원군도 그 사람에게는 침묵하기로 하였소.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고 판단하였던 것이지. 훗날 경이 형님을 모시고 대군저로 왔을 때, 그 사람은 비로소 그대가 살아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오.”
꼭 바르쥔 좌상의 두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 이제와 사실을 안다 하여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 속으로 애써 냉정하려 하지만 이미 온몸에서 비명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부원군을 원망하지 마시오.”
“……”
“그분에겐 사적인 욕심이 조금도 없었소. 그저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미련하게 강하였을 뿐.”
금상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좌상의 귓가 또한 윙윙 울리고 있었다. 여기서 또 무슨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만하시라, 외치고 싶었지만 금상은 진실을 털어놓기로 작정하였고 좌상은 들을 수밖에 없었다.
신권이 강해지는 게 두려웠던 부왕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금상의 형님이었던 유약한 세자 걱정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시름시름 앓던 그가 떠올린 사람은 충성심이 강했던 서한철 대감. 부왕은 어느 이슥한 밤, 그를 불러 왕명과도 같은 청을 내렸다. 우상을 비롯해 왕권을 위협하는 여러 가문을 숙청하고, 그의 여식을 왕실의 며느리로 내어 달라. 뛰어난 무장이었던 그가 왕실의 일원이 된다면 세자에게 힘이 되어 주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직한 충신이었던 그는 묵묵히 어명을 수행한 직후 스스로 조정을 떠나 칩거하였다. 왕명이라 하나 제자들을 제 손으로 그리 만들었으니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조용히 칩거하던 그를 다시 불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금상의 모후, 대비였다. 큰 아들의 사후, 작은 아들이 무사히 보위에 오르도록 반란군을 진압한 부원군에게 조정으로 돌아와 달라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 년 후, 과거의 일을 낱낱이 알고 있던 대비는 지아비가 하였던 부탁을 또다시 사돈에게 건넸다.
[부원군, 저들의 세력이 점점 더 불어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간 종묘와 사직은 저들 손에 놀아나고 말 것입니다. 부디 선대왕의 유훈을 받들어 주십시오!]
금상은 이 모든 진실을 옥에 갇힌 부원군을 은밀히 만나러 갔다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모진 고신으로 처참히 망가진 장인이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 곳. 그 옥사 앞에서 모후가 울음을 삼키며 앉아있었던 것이다.
[미안합니다, 사돈. 내 어떻게든 그대를 살릴 것이니, 부디 정신을 놓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마마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는 겁니다.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습니다. 마마께서도…… 금상께서도…… 중전마마와 세자저하께서도……]
[이 일을 어찌 하나, 흐흑…… 이 늙은이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소신이…… 부족한 탓입니다. 명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 죄…… 죽어 마땅하옵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금상의 짓무른 눈가가 또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시겠소? 화경궁은 마음의 죄를 씻을 수 없었던 모후께서 조금이라도 그 빚을 갚고자 지은 것이었소.”
[주상, 내 그곳을 화경궁이라 할 것이오. 그림처럼 경치가 맑고 수려한 곳. 중전이 그곳을 좋아해 줄까요? 아름다운 경치라도 보며 그 속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부호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소리만 들으며 자랐던 모후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하여 저 때문에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고 죽어간 사돈의 처참한 잔상을 끝까지 떨쳐내지 못했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대비는 미안해하였고 괴로워하였다.
[주상, 화경궁은 중전의 것이오. 내가 가진 모든 것, 나로 인해 전부 잃은 그 아이에게 주고 싶소. 그런 것이 무슨 위로가 될까마는 내가 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는 없다오. ……무슨 일이 있어도 중전과 세자, 그리고 공주는 지켜주시오. 내 그래야 저승에 가서 그 어른을 뵐 수 있을 것이니.]
미처 알지 못했던 과거의 끊어진 조각들을 이어 맞추며 좌상은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부원군도 그 사람도 그대에게 변명 한 마디 하지 않았다니…… 참으로 미련한 부녀가 아니오?”
하지만 금상은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돋아난 붉은 실핏줄과 관절이 하얘지도록 움켜쥔 두 주먹, 그리고 요동치는 목울대까지. 하여 금상은 그런 그의 반응에 미약한 희망을 걸어보기로 하였다.
“부원군은 아무 잘못이 없소. 모든 것은 왕실의 기반이 미약한 탓이었소. 부왕과 모후를 대신해 과인이 그대에게 사과를 하리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좌상. 그대와 그대의 가족들에게 내 끝없이 사죄하고 또 사죄를 할 것이오.”
“……다 지나간 일이옵니다.”
“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소. 이리 숨을 쉬고 있는 게 신기할 뿐이지. ……해서 과인도 그대에게 부탁을 하나 하려 하오.”
금상의 눈가에서, 목구멍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정한군과 옹주는 혜빈이 있으니 내 안심할 수 있소. 허나 우리 세자와 공주, 아니 이제 평범한 아이가 된 내 딸아이. 아비도, 어미도, 지켜줄 외가도 없는 그 아이들을 어찌하면 좋겠소? ……좌상, 그대가 지켜주시오.”
금상에게서 간절하고도 애가 타는 절박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우리 세자, 다행히도 왕가의 유약함보단 외가의 씩씩한 기상과 영명함을 이어받았다오. 세자는 지레 겁을 먹고 상대를 무조건 처단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 아이가 다스릴 세상은 모두가 공존하며 건강한 경쟁을 벌이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웃으며 살 수 있는 나라. ……나 대신, 그대가 보아주시오. 그대가 보필해주시오.”
좌상이라면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아이들을 지켜준다면 금상은 지금이라도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부탁을 남기지 못해 지금까지 죽지 못하고 살아있었던 것일지도.
“그리고 우리 은명이…… 그 아이는 외모뿐 아니라, 성정 또한 제 어미를 꼭 빼닮았다오. 아비의 정도 모르고 자란 그 어린것을 그대가 딸처럼 품어주면 아니 되겠소? 부디 서운한 감정은 모두 과인에게 쏟아버리고 두 아이들을 그대의 자식처럼 생각해 주시오. 내가 이렇게 부탁을 하겠소, 좌상.”
부왕께서도, 모후께서도, 바로 이러한 심정으로 그 어른께 부탁을 하였던 것이리라. 금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곁방에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명 또한 숨죽여 오열하고 있었다.
“독대를 하였답니다, 독대를!”
노용식을 비롯해 세자에 반하는 조정의 인사들이 대거 소집되어 있는 이현군의 사저. 이들이 모여 있는 이유는 이틀 전 늦은 밤, 금상이 좌상을 은밀히 불러들여 독대를 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진정하십시오. 평소 전하와 좌상의 관계를 돌이켜본다면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금상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는 없으나 좌상이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나 김서율이 세자의 사람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은 아들의 뜻에 따를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니지요. 우리가 아는 좌상이라면 아들을 내칠지언정 본인의 소신을 꺾을 사람은 절대로 아닙니다.”
떨어지는 낙엽조차 신경이 쓰일 만큼 민감한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금군별장과 병조참판 등 군부의 유력인사들이 제 편이라 하지만 좌상이 움직인다면 판세는 달라질 수 있었다. 병판이 그의 처남이었고, 그 스스로가 병부를 쥐고 흔들 만큼 군부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고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초조해진 이현군은 느긋하게 침묵을 고수 중인 노용식에게 조심히 그의 의견을 물었다.
“우참찬, 그대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하나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왕설래 하던 자들이 일제히 노용식을 주시하였다.
“독대 이후 좌상은 사저에서 칩거 중이고, 세자와 김서율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아까운 시기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닷새 뒤가 승하하신 대비마마의 탄신일이 아닙니까. 손주이신 세자와 정한군이 틀림없이 대비의 능을 찾을 것입니다. 제향일을 기리기 위한 선대왕의 능행차에 비한다면 그 규모 또한 소박할 것이니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닷새 뒤면 지금부터 좌상이 눈치 채고 움직인다 하여도 대응하기에는 버거운 시간이었다. 어차피 사병들도 도성 밖에 모두 집결해 있으니 차라리 급습을 하여 신속하게 끝내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금군장께서는 세자가 도성을 벗어나는 즉시, 궐문을 잠그고 궐 안을 장악하도록 하십시오. 특히 금상이 계시는 대전을 완전히 손에 넣어야 합니다.”
“맡겨 주십시오.”
“세자와 정한군을 처단한 후, 곧바로 궐로 들어가 금상에게 선위를 받아낼 것입니다. 선위 교지가 떨어지는 즉시 좌상과 그 측근들을 모두 추포하여 옥에 가두고 그 다음날로 즉위식을 거행하면 모든 게 끝나는 것입니다.”
“좌상과 그 측근들이 쉽게 추포가 되겠습니까?”
이현군이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이며 묻자 노용식은 능글맞게 씨익 웃으며 답을 하였다.
“훈련된 무사들을 이미 모두 붙여 놓았습니다. 명이 떨어지면 곧바로 잡아들일 것입니다.”
높고도 파란 하늘이 인상적인 상쾌한 가을의 어느 날, 은명은 정경부인이 외출한 틈을 타 좌상의 사저를 찾았다. 금상과의 독대 이후, 그는 병가를 내고 며칠 째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김서율에게 전해 들으니 사랑채에 틀어박혀 꼼짝도 않으신다 하였다. 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모든 창과 문에 발을 내려 대낮인데도 조금은 어둑어둑한 내실. 그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굳어버린 바위처럼 앉아있었다.
좌상은 시선을 들어 은명을 마주보다 잠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하였다. 이제는 늙고 목석이 되어버린 자신 앞에 맑고 빛나는 모습을 간직한 그분이 찾아온 듯 착각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그분이 아닌, 그분이 남기고 간 또 다른 분신. 좌상은 울렁이는 마음을 감추고 건조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저하의 손을 잡아 달라, 설득하러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허면 김씨 문중의 며느리가 되고 싶어 오신 겁니까?”
“대감의 며느리가 되고 싶습니다. 허나 그것이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계시는 것입니까?”
서찰의 마지막 구절 때문이었을까. 좌상의 무뚝뚝함에도 그를 보는 은명의 눈길은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당신에게선 향기가 납니다. 당신만의 그윽한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아십니까, 당신의 향기가 언제나 저를 아프게 하였습니다. 아니,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주었다는 분. 어쩌면 겉으로 보이는 그의 차가움과 무뚝뚝함은 가슴 속 응어리가 쌓여 만들어진 방어막일지도 모른다. 이제 보니 저를 향한 김서율의 우직한 연정은 전부 제 부친을 닮아 있음이었다. 답은 않고 살갑게 마주보는 은명이 어색했는지 좌상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일부러 더욱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서찰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보여주었을 그의 다사로운 본모습을 언젠가는 저도 볼 수 있기를 소원하며 은명은 답을 올렸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어 그동안은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주인을 찾았으니 전해드리고자 온 것입니다.”
은명은 어머니의 서찰을 꺼내 얌전히 경상 위에 내어놓았다. 둔하고 어리석어 한때나마 그리 가신 어머니를 오해하고 원망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혹시라도 이어질 지독한 악연의 풍파에서 그렇게나마 어린 자식들을 보호하고 싶으셨던 것일 게다. 아마도 이 서찰이 그러한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부디 이 서찰을 끝으로 어머니도, 좌상 대감도, 그에 얽혀 있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평안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이 년 전, 처음으로 그 서찰을 발견하고 많이 힘들었습니다. 대감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금만 아파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은명은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고 좌상은 파리해진 얼굴로 서찰을 응시하였다. 매화꽃물을 먹인 설화죽청지. 이것을 사용하던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그의 눈가에 물기가 그득히 괴어오른다.
‘더 이상은 버겁습니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저는 이제 무섭습니다.’
아니다, 아무것도 몰랐다. 이 말 한마디가 그리도 어려웠을까? 그 사람의 변명이라면 어떠한 말이라도 곧이곧대로 믿었을 것이다. 어찌하여 그토록 잔인한 분풀이를 고스란히 받고만 있었단 말인가.
‘그래도 읽어는 보아야겠지요. 제가 당신께 또 무슨 짓을 하였는지 똑똑히 마주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두려움이 전신에 퍼져 오슬오슬 몸이 심하게 떨려왔지만 좌상은 손을 뻗어 천천히 서찰을 펼쳐보았다. 눈시울이,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좌상 대감이 정경부인과 현법사로 갔다? 크크, 내친 김에 거기서 제 아들 장례까지 치르면 되겠구먼.”
석칠의 보고에 노용식이 비릿한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내일 세자와 정한군의 목숨이 끊어지는 즉시, 김서율의 목을 쳐야 할 것이다. 다른 이에게 맡기지 말고 네가 직접 처리하도록 하여라.”
“예, 어르신. 한데 보영당은 어찌 할까요?”
“쯧쯧, 그깟 여자아이 하나 죽여서 뭐 하려고?”
“안빈마마께서……”
“세자가 죽으면 거기도 끈 떨어진 신세이니 그때 가서 내어주면 될 일이지. 보영당을 지키는 무사가 한둘이더냐? 거기를 건드리려면 최고의 무사들을 대거 투입해야한다. 지금 같이 중요한 시기에 뭐 하러 아까운 인력을 낭비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만 나가 봐.”
노용식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못마땅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제 덕에 궐로 들어가 정일품 빈까지 되었으면 두고두고 고마워나 할 일이지, 무슨 놈의 요구사항이 그리도 많은 것인지. 각고의 노력 끝에 궐로 보내놨더니 제 어미를 닮아 왕자 하나 낳지 못하고 유세만 부리는 꼴이 가관이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참고 보아주는 것도 이제는 마지막이었다. 거사만 성사되면 딸년이고, 좌상이고,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것들은 눈앞에서 모조리 치워버리고 새로이 시작할 것이다.
‘후후후, 이제 하루 남았는가.’
지금까지 숨죽이고 살아온 이 지질한 인생. 내일이면 삽시간에 권력을 손에 쥐고 이 세상 꼭대기에 서리라. 젊은 시절 이리 저리 치이며 서러웠던 그가 임금의 머리 위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게 생겼으니……. 이 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 권력을 손 안에 움켜쥐고 있다가 오십이 넘어 얻은 귀한 아들에게 물려준다면 더 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행복한 상상으로 노용식의 얼굴에 뿌듯한 설렘이 한가득 떠오르고 있었다.
푸른 하늘 밑, 신선한 공기와 환한 빛이 가득한 이 세상. 한들한들 나뭇잎이 바람에 실려 너풀거리는 풍경이 정겹기도 하였다. 이른 아침, 은명은 보영당의 후원에 나와 맑고 서늘한 아침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고 있었다.
“기분이 좋으십니까?”
기척도 없이 반가운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어?”
김서율이었다. 푸른색 관복 대신 쪽빛과 아청색의 평복을 입고 사헌부의 표식이 달린 갓을 쓰고 있었다. 물안개가 끼어 있는 이른 아침, 날렵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 훤칠하고도 수려해 은명은 수줍게 웃으며 그를 반긴다.
“아침 일찍부터 어인 일이십니까?”
“당신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이런 말을 할 때면 은명은 날아갈 듯 기분이 좋기도 하였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후훗. 할마마마의 능행차가 있는 날, 세자 저하를 보필해야 하실 분이 여인에게 이리 정신이 팔려 쫓아오시다니요.”
“아침에 눈을 떠보니 찬바람이 불지 뭐겠습니까.”
짐짓 놀리는 듯한 은명의 어조에 그가 잔잔한 미소를 띠우며 답했다.
“예?”
“모르십니까, 저는 바람만 불어도 당신이 걱정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아픈 것도 싫고, 당신이 슬픈 것도 싫습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은명이 피식 웃어버리는데 그가 양손을 따뜻하게 맞잡으며 물었다.
“아버님을 뵈셨다고요?”
“아아, 그래서 오셨군요.”
“오늘 아침에야 박 서방에게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어찌하여 제게 언질조차 주지 않으신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별일 아닙니다. 대감께 전해드릴 것이 있어 잠시 찾아 뵌 것이었습니다.”
“전해드릴 것이라니요?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후후, 일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어쩌면 대감께서 스승님보다 저를 더 좋아하시게 될 수도 있다고요. 정말 그리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은명의 얼굴에 진지하면서도 자신 있는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사저로 찾아갔던 그날, 다감한 저의 시선에 당황하여 흔들리던 좌상의 눈빛이 아직도 선연히 떠오르는 듯하였다. 김서율의 그런 눈빛을 이미 경험한 바 있었기에 그 흔들림이 주는 또 다른 의미를 은명은 대번에 직감할 수 있었다. 저를 향한 좌상의 심경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 정경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참석했던 외명부 여인들과의 다과 모임. 비록 대화 한 마디 없이 서로 고개 숙여 맞절을 한 것이 전부였지만 모임 내내 어찌나 꼼꼼히 뜯어보시던지. 그 시선을 받으며 은명은 최선을 다해 주위 사람들에게 사근사근히 굴었다. 그럴수록 정경부인의 눈빛 또한 흐뭇해져 갔으니, 스스로가 여우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여쁨을 받는 것도 다 제 할 탓이 아니겠는가. 은명은 이제 본격적으로 좌상과 정경부인께 다가갈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리 없는 서율은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하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앞으로는 아무 걱정 마십시오. 이제는 웃을 일만 남았습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다 같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제 정인이 점점 모를 소리만 하고 있었으나 서율은 피식 웃어버린다. 지금도 이렇게 행복한데 앞으로 더 행복해진다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 한달음에 달려와 보았지만 다행히도 그의 공주는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밀려드는 안도감에 서율은 은명을 보드랍게 감싸 안았다. 장담하건대 부친께서도 조만간 이 사람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시리라.
“바람이 차갑습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저희 두 오라버니들도 잘 부탁드립니다.”
“예, 다녀오겠습니다. 금방 다녀올 것입니다.”
다녀오겠다, 속삭이면서도 서율은 한참 동안 은명을 품에 안고 놓아주지 못했다. 말랑말랑 따뜻한 정인의 품안이 아늑하고도 포근하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