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장. 마지막 선물
방안에는 후끈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맞닿아있는 그의 입술이, 그의 숨결이 너무나도 뜨겁고 정성스러워 은명은 뱃속이 간질간질, 하늘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장작불을 지펴놓은 듯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생소함마저 느낀다. 녹아내릴 듯 농몽한 와중에서도 낯선 느낌을 감당키 어려워 주춤 물러나 보지만 앉아있는 곳은 그의 단단한 무릎 위. 도망칠 곳도 없는 그곳에서 그가 전하는 뜨겁고도 열정적인 열기를 마지막까지 받아내고 있었다. 이윽고 입술이 떨어졌지만 뱃속에서 파닥이는 수많은 나비의 날갯짓이 버거워 은명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요 며칠 그에게서 조급함이 느껴지는 건 저만의 착각이었을까. 이리 보는 게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수도 없이 보채는 모습이었다. 손을 잡아 달라, 입을 맞춰 달라. 해달라는 만큼 아낌없이 내어주었음에도 그는 항상 무언가 부족하고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러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는데 은명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답을 내어주었다.
“저는 조금 후에 한양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예?”
갑작스러운 통보에 은명은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눈 안에 담는다.
“때가 온 것입니까? 하지만 어찌 이리 급작스럽게……”
“이리 되어 송구하오나 지체하지 않고 마쳐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저는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니 마마께서도…… 아니, 당신께서도 언제나 그러했듯 아무것도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화경궁도, 당신의 행복도, 그리고 저, 김서율도.”
“물론입니다, 포기라니요. 저는 이루어내기 위해 꿈을 꿉니다. 걱정 마십시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당차게 대답하는 은명이 어여뻐 그의 눈가에, 그의 입가에, 부드러움이 번진다. 하지만 일순, 긴장된 얼굴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각인시킨다.
“또한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함께 늙어갈 것입니다. 이미 수도 없이 제게 입술을 허락하셨고, 새벽이 올 때까지 저를 안아주신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혼례만 올리지 않았을 뿐, 당신께서는 이미 제 아내가 되신 겁니다. 다른 사내에게는 절대로 가지 못하십니다. 조금의 곁눈질도 허용치 않겠습니다.”
“흐읍…….”
쉴 새 없이 말을 토해낸 서율은 낙인이라도 찍듯 은명의 연약한 입술을 거칠게 빼앗아 깊고 길게 음미하였다. 숨이 벅차오를 정도로.
“후아-.”
그에게서 간신히 벗어난 은명은 막혔던 숨길을 크게 몰아쉬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무릎에 앉혀놓고 이미 몇 번이나 그가 입술을 범한 상태라 입술 전체가 아릿하니 얼얼할 지경이었다. 이제 보니 최 상궁과 난이를 마을로 보낸 것은 다 앙큼한 속셈이 있어 그리했던 것이다. 은명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이러려고 보모와 난이를 심부름 보낸 것이었습니까? 이리도 거하게 작별인사를 하시려고요?”
서율은 곰살갑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기 전에 당신께 큰 기쁨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큰 기쁨이라 하셨습니까?”
“……도련님!”
은명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때마침 밖에서 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 보십시오. 기뻐하실 거라 자신합니다.”
그의 무릎에서 내려온 은명이 방문을 여는 순간, 치경과 함께 눈에 들어온 또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삿갓을 쓰고 있어 한눈에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은명은 이미 안도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무사하셨습니까? 살아계셨습니까?’
얼마나 걱정을 하였는지, 얼마나 궁금해 하였는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었으나 하나씩 하나씩 되찾아지는 기쁨에 은명은 두둥실 구름을 탄 듯 달려 나간다. 저 앞, 풋풋한 얼굴로 팔을 활짝 벌리고 있는 제륜, 화경궁의 오라버니에게로.
세자가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이는 그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고 있는 김서율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에 기가 질려 괜스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는 이는 애꿎은 희립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중간에 끼어서는…….’
살벌한 동궁전의 분위기에 정한군은 진즉에 내빼버렸지만 그럴만한 위치가 못되는 희립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죽을 맛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중간에 끼어 오금을 저려야 한단 말인가. 그의 고생과 노고가 하늘에 닿았는지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들었다.
“왜 이리 소식이 없는 것이냐?”
“소신이 직접 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세자의 괜한 역정에 이거다 싶은 희립은 호기를 놓치지 않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갔다. 이제 남아있는 사람은 세자와 김서율. 서율에게 한시도 고까운 눈을 떼지 않았던 세자는 노기가 그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뭐로 보이느냐?”
“장차 보위에 오르실 이 나라의 국본이십니다.”
“그렇게 잘 아는 인사가 감히 국본이 하는 말을 허투루 듣는다?!”
분기를 누르며 조근조근 위엄 있게 말을 이어오던 세자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팽팽 놀아댈 것이냐?”
“한양에 올라온 이후, 저하께서 이미 아시는 이유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사헌부에서 네 코빼기를 본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야?”
“사직상소를 처결하여 주십시오. 소신은 더 이상 조정에 뜻이 없사옵니다.”
반년 전, 김서율은 분명 사직상소를 올리고 도성을 떠났다. 하지만 돌아와 보니 그는 사직이 아닌 밀지를 받고 암행감찰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의 주변에 이러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세자와 부친,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부친께서는 핏줄의 일이라 할지라도 권력을 사사로이 쓰는 법이 없으셨기에 남은 이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동복누이를 비정하게 쫓아버린 이 나라의 국본.
작년 겨울, 공주께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유배를 떠났다는 소식에 허겁지겁 자선당을 찾아왔었다. 전하께서 효경왕후마마를 지켜내신 것처럼 세자께서 공주마마를 지켜 달라, 빌고 또 빌었다. 하나 세자에게서 들은 말이라고는,
[지금은 침묵해야 할 때이다.]
짤막한 말 한마디가 전부, 아무리 애원을 해봐도 일체 침묵으로만 대응을 하셨다. 그날 이후 김서율의 마음속에는 세자에 대한 서운함과 노여움이 가시지 않고 남아있었다.
이러한 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자는 잠시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가소롭다는 듯 한마디를 쏟아내었다.
“너는 절대로 부마가 되지 못할 것이다.”
공주와의 사이를 훤히 꿰뚫고 있는 듯한 말에 잠시 움찔했지만 서율은 이내 평정을 찾는다. 유배지까지 쫓아갔는데 모를 리 없었다. 공주의 소식에 세자 앞에서 소란을 피워 제 스스로 마음을 내보이지 않았던가. 아니, 평소 공주의 행적을 매일같이 보고 받는 세자였으니 처음부터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더 이상 감출 것도 없다는 생각에 서율은 마음속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였다.
“소신은 이미 공주마마와 정혼을 하였습니다.”
“내 허락도 없이 내 누이와 정혼을 하였다?”
“저하께서는 오라버니의 자격을 스스로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이미 폐위를 당해 왕실의 명부에서도 지워졌으니 앞으로 공주마마에 관한 모든 것은 소신이 책임 질 것입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례하였기에 이 자리서 경을 친다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어차피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내지른 상황. 한데 세자의 표정이 어쩐지 오묘하기만 하다. 딱히 무어라 설명할 순 없지만 배부른 고양이와도 같은,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이 언뜻 스치는 모습이랄까. 잘못 보았나 싶어 무엄하게도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세자에게서 조금은 누그러진,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매우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말대로라면 은명이는 이제 공주가 아니다. 앞으로도 결코 복위되는 일은 없을 것이야. 하여 그 아이와 혼인하는 사내는 죽는 그날까지 의빈이 될 수 없다. 너는 무엇 때문에 조정을 떠나려 하는 것이냐?”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표정과 음성은 태연했으나 너무도 많이 뜻이 함축된 세자의 말에 서율의 머릿속이 사고를 정지한 채 텅 비어 버렸다.
“그게 무슨……”
하지만 자세히 캐물을 새도 없이 밖에서 내관의 급한 전갈이 흘러들었다.
“저하, 도승지와 수찬 입시옵니다.”
‘왔구나!’
둘 사이에 오가던 긴장된 기류가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뜻으로 뭉친 군신으로 되돌아가 시선을 주고받는다.
“들라 하라.”
조금 전 의금부로 달려갔던 희립이 도승지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세자에게 은밀히 신호를 보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세자였으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도승지를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예까지 어인 일이오?”
“저하, 의금부로부터의 전갈이옵니다. 도주한 의천 상단의 대방이 스스로 의금부를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하옵니다.”
드디어 시작인 것이다. 세자는 김서율에게 시선을 돌려 근엄하게 명을 내렸다.
“지평은 속히 사헌부로 복귀하도록 하라. 당분간은 바빠질 것이다.”
의천 상단 본관. 피둥피둥 살이 쪄 번지르르 기름이 흐르는 양병수의 얼굴에 음흉한 욕망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그가 천박하게 입을 다시며 훔쳐보고 있는 여인은 저 멀리, 새로 들어온 물품을 확인하며 열심히 수기 중인 아정이었다. 올해 열여섯, 한창 꽃망울을 틔울 나이로 반가에서 태어난 아이. 그 행동거지와 말씨가 음전하여 보면 볼수록 군침을 삼키게 하는 아이였다.
“처음 봤을 땐 비썩 말라 막대기 같더니만 언제 저리 물이 올랐을꼬?”
마음 같아선 청월관의 기녀로 만들어 마음껏 품어주고 싶지만 양반이랍시고 또 얼마나 뻗대며 피곤하게 할까.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쩝쩝 다시는데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차 행수가 슬그머니 그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나리, 아정이 저 아이를 데리고 올깝쇼?”
“뭐야?”
엉큼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왔지만 차 행수는 비굴한 얼굴로 그의 기분을 맞췄다.
“대방 나리께서 곁에 두고 어여삐 여겨 주시면 저 아이도 틀림없이 좋아할 것입니다. 제 주제에 횡재한 것이지요! 제가 가서 은밀히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뒤처리는 입안에 혀처럼 구는 차 행수가 감당할 터. 양병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망측한 상상을 하며 그의 입가에 혐오스러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바깥에서의 일을 모두 끝낸 아정은 대행수의 방으로 건너와 그의 일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수북이 쌓여있는 문서들을 정리하면서도 문득 문득 떠오르는 준혁에 관한 생각이 멈춰지지 않는다.
‘어찌하여 소식이 없으실까?’
그제, 일을 마치고 귀가해보니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한 게 반가운 손님이라도 맞은 듯 모두가 들뜬 모습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불고기에 지짐이까지 한바탕 잔치를 벌일 분위였다.
[어머니, 이것들이 다 뭐예요?]
[대방 어르신께서 가져오신 것이다.]
반가운 소식에 아정은 그가 있다는 뒷마당으로 달려가 보았고 건강한 모습의 준혁과 마주하였다. 그의 얼굴에는 한동안 보지 못했던 편안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나는 곧 의금부로 갈 것이다.]
[예?]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아정은 무척이나 놀랐지만 그는 평온한 얼굴로 안심시켜 주었다.
[곧 상단으로 돌아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 어떤 소식이 들려온다 해도 동요하지 말고 네 자리를 지키면 되는 것이다. 이미 여러 번 말하였듯 문제가 생기면 대행수에게 의지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혹, 그조차도 감당키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거든 사헌부의 지평, 김서율 나리를 찾으면 된다.]
[김서율…… 나리요?]
[그가 공주마마와 나의 역할을 대신해 줄 것이다.]
의금부란 말에 괜스레 겁부터 먹었지만 차분한 그의 모습에 아정도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도 들려오는 소식이 없자 점차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색은 안 하지만 대행수 또한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아무도 없으니 그에게 살짝 말을 꺼내볼까 망설이는데 기척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차 행수가 들어섰다.
“무슨 일인가?”
“대방 어르신께서 아정이를 잠시 찾으십니다.”
“아정이를?”
너무나도 뜻밖의 전언이라 대행수와 아정은 마뜩찮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파렴치한 작자가 어찌하여 아정이를 찾는단 말인가.
“무슨 일로 말단 서기인 아정이를 찾으신단 말이냐?”
“대방께서 상단의 사환을 찾는 것이 무슨 일이겠습니까. 심부름 시킬 일이 있으신가 보지요.”
답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속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투였다. 대행수를 대하는 차 행수의 무도함은 시간이 갈수록 정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대행수는 끈 떨어진 뒤웅박. 어차피 얼마 뒤면 상단에서도 쫓겨날 것이니 더 이상 굽실거릴 필요도 없다는 자세였다.
“대행수님, 제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차 행수의 무도한 말투에 보다 못한 아정이 정리에 나섰다. 사람들이 그득한 한낮의 본관인데 별일이야 있으랴. 지금으로서는 쳐다보기도 싫은 양병수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속절없이 당하는 대행수가 안타깝기만 한 아정이었다.
청에서 들여온 크고 고급스러운 책상과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있는 방. 반년 전까지만 해도 이 방은 고매함이 묻어나는 멋스러운 곳이었다. 그 운치 있던 준혁의 향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 사리사욕에 찌든 양병수의 역한 냄새가 곳곳에 스며들어 아정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게다가 되도 않는 양병수의 황당한 제안에 우지끈, 두통까지 일었다.
“지금 총서기라 하셨습니까?”
“그래. 내 지난 일 년 간 너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일처리 하나하나 야무지고 꼼꼼한 게 아주 쓸 만하더구나. 어떠냐, 내 밑에서 총서기 일을 한번 맡아보지 않겠느냐?”
보면 볼수록 음흉하고 탐욕에 절어있는 저 징그러운 낯짝. 필시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하였다. 혐오감과 공포감에 아정은 등골이 서늘하게 식어온다. 하지만 섣불리 건드렸다간 외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는 일. 아정은 냉정을 되찾고 건조한 어조로 일언지하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제 말단 서기에 불과한 제가 어찌 감히 총서기를 맡을 수 있단 말입니까. 소인은 지금의 자리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허, 겸손도 지나치면 안 되는 것을. 오늘부터 내 곁에서 내가 시키는 것만 하면 될 것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한 발, 한 발, 다가오며 말하자 그와 동시에 아정은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답했다.
“나리,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지금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허하여 주십시오.”
“그래? 내가 네 부탁을 들어주면 너는 내게 무엇을 해줄 것이냐?”
어느덧 구석으로 몰린 아정은 꼼짝없이 양병수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현재 있는 자리를 지키겠다는데 굳이 제가 해드려야 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네 자리를 원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는 있느냐?”
“왜 이러십니까!”
후욱, 목덜미에서 끈적끈적한 그의 숨결이 느껴지자 섬뜩해진 아정은 양병수를 힘껏 밀쳐내고 문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우악스러운 그의 손에 허리를 붙잡혀 내동댕이쳐진다.
“아악!”
양병수의 책상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친 아정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는데 밖에서 임 행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무슨 일이냐!”
“강준혁이 지금 의금부에 하옥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그래? 하하하하…… 하하하하……”
갑자기 끼어든 임 행수의 목소리에 짜증스럽게 반응했던 양병수는 강준혁의 소식에 좋아죽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나리께서?’
부딪친 이마가 부풀어 오르고 있음을 느끼며 양병수의 책상 밑으로 숨어들던 아정은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어떡하든 이 고비를 넘기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이 틈을 타 소리를 질러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어차피 저들은 모두 양병수의 사람들. 다급한 마음에 책상 밑에 쪼그리고 앉아 도망칠 궁리로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저게 뭐지?’
책상 안면의 위쪽, 모서리 부근에 칸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언뜻 봐서는 있는지조차 모르게 자리하고 있어 그 틈으로 책자의 끄트머리가 나와 있지 않았다면 아정 또한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궁금증이 일었지만 우선은 이 방을 빠져나가는 데에만 총력을 기울어야 했다. 아정은 다급하게 눈동자를 움직이다 휘황찬란한 자기들이 요란하게 줄지어있는 장식장 위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래, 내가 지금 하던 일이 있으니 그 일이 끝나는 대로 너를 부르도록 하마.”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 추한 몰골의 양병수가 역겨운 웃음을 토하며 장식장 옆에서 와들와들 떨고 있는 아정이에게로 다가섰다.
“크크, 이마에 혹이 나겠구나. 그 꼴이 무엇이냐. 얌전히 말을 들었으면 내 고이고이 예뻐해 주었을 것인데…… 으엇!”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양병수에게서 가느다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정이가 던진 자기의 파편이 튀어 한쪽 뺨을 얇게 그어버린 것이다. 연달아 몇 개의 자기가 부서지고 그가 주춤거리는 사이, 아정은 문을 향해 힘껏 달려 나갔다. 하지만 미처 절반도 닿지 못하고 그에게 머리채를 붙잡히고 말았다.
“이년이!”
양병수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아정이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겨 바닥으로 쓰러트린 후 그 위에 올라타 연약한 몸을 내리 눌렀다.
“아아악!”
징그럽고, 역겹고, 혐오스러워, 아정이가 죽을힘을 다해 몸을 바동거리는데,
타앙-.
문이 활짝 열리고 우르르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누구야!”
동작을 멈춘 양병수가 버럭 성깔을 부리며 올려보다 놀라움에 몸을 움찔거렸다. 관군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으흐흑……”
있는 힘껏 몸부림을 치던 아정은 관군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한성부의 판관이요, 최근 의금부의 일을 겸직하게 된 송익정이 있었던 것이다.
“너, 그 꼬맹이!”
그 또한 아정이를 알아보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멍이 들어가고 있는 이마,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그리고 저 추악한 사내. 방안의 풍경만으로 상황이 대충 짐작되고도 남았다.
‘공주께서 아끼시던 아이를…….’
괄괄한 성미인 익정은 분노가 끝 간 데 없이 치솟아 아정이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기름진 몸뚱이를 발로 힘껏 차버리며 외쳤다.
“이런 썩을 놈 같으니라고!”
“아악- 아이고, 아이고! 살려주십시오!”
양병수는 저 만치 나가떨어졌지만 분이 풀리지 않는 익정은 그대로 쫓아가 사정없이 몇 번이고 더 발길질을 가했다. 죄인의 인권이고 뭐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참군과 군관들이 뜯어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사달이 일어났을 것이다.
“대체 왜 이러십니까, 아야야.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요, 저 아이는……”
“잘 생각해 보거라,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양병수가 엄살을 부리며 억울함을 호소하자 이성을 되찾은 익정은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차갑게 말했다.
“왜, 지은 죄가 한 두 개가 아니라 다 기억도 안 나는 것이냐?”
“나, 나리……”
“여태까지 지은 죄만 해도 감당키 어려울 것인데 너는 지금 죄목이 하나 더 추가되었느니라. 매도 아까운 놈 같으니라고. 끌고 가!”
관군들이 포승줄로 양병수를 묶기 시작하자 익정은 나머지 관군들에게 몸을 돌려 위엄 있게 명을 내렸다.
“지금부터 이곳을 샅샅이 뒤진다. 작은 것 하나라도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의천 상단 본관에 마련된 객실에서 대행수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그는 양병수의 방으로 뛰어들려 했지만 무도한 차 행수에게 막혀 단번에 저지되고 말았다. 힘이 없던 그가 선택한 길은 공권력의 도움을 받는 것. 허겁지겁 포청으로 달려가 나졸들을 이끌고 부리나케 본관으로 돌아와 보니 상황은 이미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늘이 보우하사 때마침 의금부의 관군들이 양병수를 체포하러 들이닥쳤던 것이다.
‘저 아이를 잘 돌봐주라는 대방 어르신의 말씀을 지키지 못할 뻔했구나.’
가슴을 쓸어내린 대행수가 자리에 누워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정이에게 다정히 말을 건넸다.
“이리 다쳐서 어찌하누……. 공 의원님께 기별을 보내놨으니 저녁때쯤 집으로 들르실 것이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여라. 이참에 나흘 정도 푹 쉬는 것도 좋겠구나.”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 놀래가지고 어찌 일을 하겠느냐. 양병수와 그 패거리들은 모조리 붙잡혀갔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당분간 이곳은 내가 관장할 것이다. 장담하건대, 그들은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야.”
“그러하시면 조금 있다 대방 어르신의 방에 잠시 들렀다 가도 되겠습니까? 떨어트린 게 있는데 어디쯤인지 짐작하고 있으니 그것만 찾아 오늘은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그리 하려무나.”
대행수가 방을 나가자 아정은 두려움에 이불 속으로 몸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들은 분명 관군이 아니었어!’
포승줄에 묶여 끌려 나가던 양병수가 관군들 중 누군가를 보고 흠칫 놀라는 걸 아정은 똑똑히 목격하였다. 해서 그의 시선이 닿았던 관군 두 명을 곁눈질로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진 다른 동료들 몰래 무언가를 숨기는 듯하였다. 해서 판관께 귀띔해드리려 다가갔지만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작년 여름, 화경궁을 다녀오는 길목에서 그와 양병수가 은밀히 만나는 것을 연달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멀쩡했던 그가 달포 뒤 두 번째로 보았을 땐 왼쪽 뺨에 흉측한 상처를 새기고 있어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지 그는 달짝지근한 향을 풍기며 흉터가 보이지 않도록 조심조심 관군 흉내를 내고 있었다. 수십 명의 관군들 중, 간자(間者)가 몇이나 되는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판관께 아뢸 수는 없는 일. 아정은 조용히 입을 닫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렸다가 잠잠해지면 책상 안쪽을 다시 살펴보는 거야. 거기에 분명 무언가가 있어.’
아정은 쉴 새 없이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준혁이 했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혹, 그 조차도 감당키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거든 사헌부의 지평, 김서율 나리를 찾으면 된다.]
의금부의 추국장.
날씨는 맑고 화창하였으나 추국장의 풍경은 그 쾌청함마저도 잊게 할 정도로 엄숙하기만 했다. 강준혁과 양병수는 물론이요, 사건에 관련된 용의자와 목격자 다수가 나와 있는 자리. 사람 수가 워낙 많아 정확히 누가 앉아 있는지 일일이 확인키는 어려웠으나 양병수는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강준혁과 눈이 마주치자 비소까지 날리는 느긋함을 보인다.
“멍청한 놈, 제 발로 기어들어 오다니. 노비 놈 주제에 신분을 숨기고 감히 의천 상단의 대방 자리를 꿰차고 앉아?”
“……”
“그러고도 모자라 내게 혐의를 씌우겠다? 그래, 그래. 그냥 죽기에는 억울했겠지. 최후의 발악을 해보려는 모양인데 그럴수록 우스워지는 건 바로 네 자신일 뿐이다. 네가 세상으로부터 어떻게 버려지는지 내 똑똑히 보아줄 것이야.”
침묵으로 일관하는 준혁을 마음껏 조소하며 양병수는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박 노인과 그 손자는 애초에 없애 버렸고 진실이든 아니든 그가 서제륜이라 증명해줄 사람도 있었다. 주요 문서는 이미 어르신의 수하가 빼돌린 데다 비밀장부는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양병수는 막 자리를 잡고 있는 대신들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경산부원군이라는 무거운 이름 때문인지 삼정승을 비롯한 육조의 판서와 당상관들이 대거 모습을 보인 듯했다.
‘저들 중 분명 벌리 어르신이 계신다.’
얼굴은 모르지만 오랜 세월 들어온 그 탁한 음성은 대번에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참에 얼굴이나 알아두어야겠단 생각에 중신들끼리 속닥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내관의 목소리가 추국장 안에 힘차게 울려 퍼졌다.
“세자 저하 납시오!”
잠시 후, 와병 중인 임금을 대신해 친국에 나선 세자가 김서율을 비롯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을 이끌고 추국장에 들어섰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호기롭고 당당한 기운을 발하는 젊은이. 잠룡이라 하지만 몸이 약한 금상을 대신해 열일곱부터 국정을 돌보기 시작한 세자였다. 현재 스물여섯인 그는 능력과 연륜을 두루 갖춘 차기 지존의 절대적 권위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세자는 빠르게 추국장 안을 눈으로 훑으며 마지막으로 준혁에게 시선을 던졌다. 자신과 누이를 제외한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외조부의 핏줄.
[정녕 이대로 괜찮은 것이냐? 내가 보위에 오르고 시간이 흐르면 외조부와 외숙들은 어찌할 수 없어도 너만은 연좌를 풀어 신분을 복권시킬 생각이었다. 만약 여기서 네 말대로 한다면 너는 영원히 서제륜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야. 제륜아, 이 나라의 세자가 아닌 너의 피붙이 형으로서 다시 한 번 물으마. 정녕 이대로 괜찮은 것이냐?]
[예, 저하. 소인이 원해서 가는 길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천대받는 신분이라 하나 땀을 흘려 스스로 벌이를 하는 이 생활이 소인에게는 맞는 듯싶습니다.]
[허나 대대로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던 집안의 유일무이한 장손이 아니냐.]
[소인이 강준혁으로 살아간다 해도 서제륜이 아닌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출사를 하지 않고도 종묘와 사직을 위해 얼마든지 음지에서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서제륜이 아닌, 의주 거상 강준혁으로 살며 저하께서 구상하고 계시는 이 땅의 미래를 위해 조금이라도 조력할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십시오.]
‘눈빛, 목소리, 신념, 모든 것이 확고했다. 가문이야 후일 너의 아들이나 손자를 양자로 들여 이으면 그만. 좋다, 네가 그토록 원한다면 그래서 네가 행복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네 뜻을 존중해주도록 하마.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부디 살아만 다오.’
마음을 다잡은 세자는 양병수를 향해 근엄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네가 이곳에 끌려온 연유를 알고는 있느냐?”
“예, 저하. 소인이 의천 상단을 차지하고자 전 대방이었던 강준혁, 저 자를 모함했다는 죄명이라 들었사옵니다.”
“그래, 맞다. 내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마. 만일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솔직히 자백한다면, 그를 참작해 어느 정도 형량을 줄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다 이 자리서 그 죄가 낱낱이 밝혀진다면 결코 참형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어떠냐, 너는 아직도 스스로가 무죄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저하, 감히 뉘 앞이라고 소인이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소인은 그저 억울하고 또 억울할 뿐이옵니다. 부디 청하옵건대 이곳에서 모든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혀 주시옵소서.”
양병수가 억울하다며 우렁차게 울대를 울리자 호판이 끼어들었다.
“저하, 중전마마를 시해하려 했던 자는 저자가 아니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죄인 강준혁의 죄를 확인하기 위함임을 유념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습니까? 나는 이 자리가 그 진범을 밝히는 자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진범이라니요? 소신이 알아본 바로는 양병수의 혐의를 인정할 만 뚜렷한 증좌도 없다 들었사옵니다. 그에 반해 강준혁은 금군의 활을 맞은 게 분명하였고, 증인과 증좌 또한 명백하지 않사옵니까?”
“호판께서는 어찌 그리 확신을 하십니까? 만약 누군가 금군의 활을 훔쳐, 혹은 금군 중에 간자가 있어 화살을 빼돌렸다면, 그때는 어찌할 것입니까?”
파격적인 세자의 발언에 늘 그러했듯 좌상을 제외한 대신들 모두가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양병수와 시선을 마주친 호판은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하, 어찌 그리 참담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그런 일은 결단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옵니다.”
“있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될 일. 지평!”
“예, 저하.”
세자의 명에 김서율이 답했다.
“사족을 모두 빼버리고 요점만 간단히, 빨리 정리하여 주게.”
서율은 세자께 예를 올리고, 양병수와 임 행수를 바라보았다. 양병수는 해볼 테면 해봐라, 뻔뻔한 얼굴이었고 임 행수는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임정식, 너는 그날 어가 행렬이 도성을 빠져나간 직후 강준혁과 함께 도성 밖 상단의 창고로 향했다. 한데 너는 네 상전이 화살을 맞는 모습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였을 뿐 아니라 도성밖엔 혼자 다녀왔노라, 거짓 증언까지 하였다. 네 죄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음을 알고는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도성 밖 창고는 저 혼자 갔었습니다. 그날 객주에 있던 사환들이 이미 모든 것을 증언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양병수의 사람들이 아니더냐?”
“자네 지금 뭐 하는 것인가?”
호판이 또다시 끼어들었다.
“자네 혹 강준혁에게 뇌물이라도 먹은 것인가? 어찌 그리 저놈의 말만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것이야?”
“증인이 있습니다.”
조용히 답하는 김서율의 말에 추국장 안은 일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네 이름이 만석이라 하였느냐?”
“예, 그렇습니다.”
느닷없이 아이의 똘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아지자 증인들이 자리한 곳 맨 뒤편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열 두셋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 만석이라 불린 아이가 사람들을 헤치며 씩씩대는 얼굴로 걸어 나왔다.
‘저, 저 아이는! ……분명 죽은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을 하였는데!’
아이의 얼굴을 확인한 임 행수는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 얼굴이 급속도로 식어 내린다.
“그날의 일을 본 대로 소상히 말하여 줄 수 있겠느냐?”
“예. 저는 도성 밖에 살고 있는데 그날 상감마마의 행차가 있다하여 저희 할아버지와 함께 행렬을 구경 갔었습니다. 행렬이 멀리 사라지고 끝부분이 보일 때쯤 말을 타고 나오시는 대방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어르신과 안부를 주고받는데 또 한 명이 말을 타고 나리께 다가왔습니다. 두 분이 도성 밖에서 만나기로 하신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로 온 자가 누구인지 기억하느냐?”
서율의 물음에 아이는 망설임 없이 임 행수를 가리키며 울분에 젖은 말을 토해내었다.
“저자입니다. 저자는 또한 저희 할아버지와 동생을 죽이도록 시킨 자입니다. 제가 수풀 속에 숨어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부디 저희 할아버지와 동생의 원한을 풀어 주십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나는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
“너는 이 아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임 행수의 발악에 서율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어가 행렬이 있던 그날, 도성 밖에서 저 아이와 박 노인을 만났고, 입막음을 위해 산속에서 저들의 목숨을 해하지 않았느냐?”
“그, 그건…….”
“왜, 분명히 베어버렸는데 이 아이가 살아있어 놀란 것이냐? 네가 죽인 아이는 저 아이의 쌍둥이 동생이었다.”
“허억!”
“이 아이는 도성 밖에서, 이 아이의 동생은 자손을 보지 못하는 숙부의 집에서. 태어나자마자 따로 떨어져 자라났기에 마을 사람들조차 저 아이가 쌍둥이인줄 몰랐던 것이다. 너는 실로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재회를 나누던 저 아이의 동생을 죽인 것이다. 이래도 부족하더냐? 그렇다면 목격자는 또 있느니라.”
지금까지 만도 벅찰 지경인데 목격자가 또 있다 하니 임 행수는 눈앞이 캄캄해져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또 다른 목격자는 허름한 옷차림을 한 초로의 노인으로 자신을 약초꾼이라 소개하였다.
“약초를 캐러 갔다가 박 노인과 쌍둥이 형제를 만났습죠. 이 아이가 약재를 구경하고 싶다며 혼자서만 저를 따라왔는데 갑자기 저자와 칼을 든 자들이 여럿 나타났습니다. 저는 들키면 죽을까 싶어 얼른 이 아이의 입을 막고 숨어서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사면초가였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는데 김서율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상전을 배신한 것으로도 모자라 금수만도 못한 짓을 하였구나. 더 이상 그 어떠한 관용도 없을 것이다.”
“살려주십시오! 저는 단지 시키는 대로만 하였을 뿐입니다!”
“시켜서 한 짓이었다? 그 일을 누가 시켰단 말이냐?”
임 행수의 눈동자가 차 행수와 양병수에게로 번갈아 향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기가 죽을 만큼 매서운 눈빛이었다.
“그것이…….”
“되었다. 이자를 끌고 가거라!”
“차 행수입니다. 양병수 어르신의 명이라며 제게 그 일을 강요하였습니다!”
“네 이놈! 예가 어디라고 지금 거짓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는 것이냐!”
임 행수의 입에서 진실이 나오자 양병수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고, 차 행수 또한 펄쩍 뛰어오르며 추국장을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이에 서율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조용!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냐! ……임정식, 너는 그날 강준혁 저자가 너와 함께 도성 밖 창고로 가기 위해 만났음을 시인하는 것이냐?”
“흐흑…… 예에. 그날 강 대방 어르신께서는 행렬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요.”
타고난 성정이 평범하고 소심했던 임 행수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진실을 내뱉자 양병수가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였다.
“네 이놈!”
“그럼 어쩝니까? 저렇게 증인까지 있는 것을요!”
“아닙니다, 저놈은 지금 자신이 저지른 죄를 저에게 덮어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만!”
쩌렁쩌렁, 추국장이 떠나가라 양병수가 소리를 질러대자 김서율은 차가운 호통을 내리쳤다.
“한 번만 더 소리를 질렀다간 공무를 방해한 죄가 추가될 것이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양병수 너는 중전마마께 위해를 가한 후, 강준혁에게 그 죄를 덮어씌우려 하였던 것이로구나.”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떼야 한다. 잡아떼면 어르신이 어떻게든 손을 써주실 것이야. 어르신, 저를 구해 주실 것이지요? 저는 시키는 대로만 하였을 뿐입니다!’
더 이상의 느긋함은 남아있지 않았다. 조여드는 불안감에 눈자위가 벌겋게 달아오른 양병수는 대신들 사이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빠져나갈 길을 모색하였다.
“아닙니다, 중전마마의 시해사건은 결단코 모르는 일입니다!”
“보자보자 하니 갈수록 가관이구나!”
김서율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지켜만 보던 세자가 벌컥 성을 내며 입을 열었다.
“바짝 엎드려 싹싹 빌어도 모자를 판에 대체 네놈은 목숨이 몇 개인 것이냐? 내 정리를 해주랴? 너는 상단의 대방 자리가 탐이 났던 것이다. 저자가 서제륜이다, 밀고를 하긴 하였으나 증거가 부족하였겠지. 하여 감히 곤전께 위해를 가하고 저자에게 죄를 덮어씌웠던 것이다.”
“당치도 않으시옵니다.”
“시끄럽다. 증인이 이리도 많은데 아니라고 잡아떼 봤자 너만 피곤할 뿐.”
“저자는 서제륜이 확실하옵니다!”
“확실? 증좌가 있느냐? 설마 경산부원군 댁의 전 집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자가 서제륜을 직접 대면한 것은 세 살 때가 마지막이었다. 열아홉 해가 흐른 지금, 서제륜의 얼굴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자를 증인이라 들이밀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 또 누가 있느냐? 화경궁의 궁녀? 그 아이 또한 소리만 들었을 뿐 얼굴은 보지 못하였다, 이실직고 하였느니라.”
“이것은 저를 몰아내려는 서제륜의 계략이옵니다. 모략이옵니다!”
“그 입, 다물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토록 기회를 줬건만 너는 일말의 반성조차도 보이지 않는구나. 사람의 목숨이 그리도 하찮더냐? 네 성에 차지 않고 네 이(利)에 맞지 않으면 사람을 모함하고 가차 없이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냐?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가 한계이니라. 여봐라, 저자를……”
“있습니다! 다른 증거가 있사옵니다!”
관졸들이 달려들자 양병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품에서 비단 뭉치 하나를 꺼내보였다.
“강준혁은 어린 시절, 상단에 양자로 입적되기 전부터 청보석으로 만든 거북 모양의 장식물을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신주단지 모시듯 한 번도 몸에서 떼어낸 적이 없었습니다. 필시 예사 물건은 아닐 터, 확인하여 주십시오. 얼마 전, 저자가 흘리고 간 것을 소인이 주워 보관하고 있었사옵니다.”
‘양병수가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서율과 준혁은 생각지도 못한 반격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두 사람이 시선을 주고받는데 이판이 놀란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가 청보석을 살펴보았다.
“이, 이건! ……보십시오, 이건 경산부원군께서 항시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입니다. 이자는 서제륜이 분명하옵니다.”
“그건 청나라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지불할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문할 수 있는 물건이옵니다.”
부친의 것인 줄 알았건만 조부님의 물품이었다니! 다급해진 준혁이 항변해 보았지만 대신들의 얼굴은 모두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청보석에 대해 몰랐던 세자는 등에 식은땀이 솟아오른다. 서율과 제륜의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 틀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였다. 정신이 혼미해져 왔지만 세자는 최대한 마음을 다잡고 질문을 던졌다.
“이판은 부원군께서 지니고 계셨던 물건을 자세히 본 적이 있으십니까?”
“자세히 본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분께서 거북 모양의 청보석 장식물을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은 대신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옵니다.”
“거북은 장수와 부귀의 상징입니다. 능력이 되는 자라면 얼마든지 거북 모양의 청보석을 주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 수 있는 자가 조선에 얼마나 된다, 보십니까? 그것도 어린 나이에 저런 것을 지니고 있었다면……”
갑자기 말끝을 흐리던 이판은 무언가 떠오른 듯 얼굴이 환해지며 말을 이었다.
“이것을 증명해 줄 분이 계십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좌상 대감이십니다.”
이판의 대답에 세자와 서율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좌상께서 당시 사신단으로 청나라를 다녀오시며 경산부원군의 부탁으로 직접 청보석을 가져왔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좌상, 이판의 말이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신은 한 번 본 물건은 절대로 잊는 법이 없습니다. 당시 그 어른의 취향대로 중간에서 모양을 바꾼 것도 소신이오니 얼마든지 확인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확신에 찬 그의 말에 서율의 낯빛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고 좌상은 그런 아들을 지켜보며 냉소를 금치 못했다.
‘모자란 놈. 너는 아직도 멀었느니라.’
청보석이 옮겨지고 있었으나 보나마나 강준혁, 저 아이는 서제륜이 틀림없었다. 추국장에 들어와 강준혁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약관을 넘긴 윤석이가 살아서 돌아온 듯 착각마저 일었다. 한때 그토록 따르고 존경했던 경산부원군의 손자, 그리고 그분의 조카. 그분을 만날 때면 때때로 막냇동생 윤석이가 따라 나오곤 하였다. 유난히도 자신을 따르던 착하고 순했던 아이. 행복했던 그 시절, 윤석이가 저의 자식들을 죽이고 자신이 그의 목숨을 거두게 될 줄을 그 누가 알았을까.
‘네 아비를 그대로 닮았구나.’
좌상의 시선이 두려움에 젖은 강준혁의 얼굴을 배회하는데 청보석이 그에게로 전달되었다. 햇살을 받아 파랗게 빛을 발하는 거북이 청량하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보는 것이지만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스승님께 직접 가져다 드린 그때의 그 장식물.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고신을 받고 하옥되어 계신 스승님을 마지막으로 찾아뵌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진두지휘하였노라 잔인하게 밝히기까지 하였다. 치를 떨며 무엄한 놈이라 소리치면 제자에게 당한 스승의 처참한 몰골을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스승님께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다른 말을 남기시고 홀연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후회하지 말거라. 네가 했던 선택을 절대로 후회하지 말거라. ……잘 하였느니. ……과연 나의 으뜸가는 수제자로다.]
‘그런다고 제가 슬퍼할 거라 생각하셨다면 오산이십니다. 당신은, 제자를 배반한 비정한 스승이었을 뿐.’
‘……어찌하여 그러신 겁니까? 저는 당신을 아버님이라 부르며 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윤석이를 내 동생으로 맞이하여 그분과 함께 당신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살고 싶었습니다. 나는, 당신은, 우리 모두는…… 어찌하여 이리 되었단 말입니까?’
좌상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부탁입니다. 막내만은 살려주십시오. 제발 한 명만, 단 한 명의 목숨만은 구명하여 주십시오!]
비가 내리던 겨울밤, 소박한 옷을 입고 찾아온 그분은 에이도록 차가운 얼음비를 맞으며 왕비의 체면도 잊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처절하게 빌었다. 그냥 들어가려던 그의 태사혜를 붙들고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 애원했었다. 애원하는 순간마저 차마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태사혜 가죽만 겨우 붙들었던 여인. 그분은 그런 사람이었다.
옛 기억에 목울대가 뜨겁게 달구어졌던 좌상은 표정을 다스리고 다시 찬바람이 이는 얼굴로 무장을 하였다.
“경이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그것이 정녕 경산부원군의 유품이 맞습니까?”
관절이 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움켜쥔 세자는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 긴장하며 물었다. 이에 무표정한 좌상에게서 나온 대답은 실로 간결하기만 하다.
“아닙니다.”
대를 이을 단 한 명의 목숨. 그분의 마지막 부탁이 가슴에 사무쳐 서제륜, 저 아이를 차마 죽이지 못하였던 것일 수도…….
부친에게서 나온 의외의 답변에 서율은 움찔하였다. 대신들은 웅성거렸고, 특히 이판은 펄쩍 뛰며 재차 확인을 요구했다.
“대감, 정말로 아닙니까?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충분히 보았습니다. 언뜻 보았을 땐 맞다고 생각하였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완전히 다른 물건이었습니다. 이건, 전(前) 경산부원군의 것이 아닙니다.”
좌상은 목걸이를 의금부 아전에게 도로 건네주며 확실히 못을 박았고, 그의 확고함에 대신들은 뭐라 반박조차 못하고 술렁이기만 했다.
긴장감에 눈앞이 잠시 어지러웠던 세자는 그 틈을 타 퍼뜩 정신을 차린다. 좌상이 무슨 연유로 저리 나오는지 알 수 없으나 이쯤에서 모든 것을 끝내버려야 했다.
“이것으로 강준혁은 서제륜이 아니며 곤전을 시해하려 했던 범인도 아님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너!”
세자가 무서운 눈초리로 양병수를 노려보았다.
“너는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아닙니다! 소인은 결백하옵니다. 결백하옵니다, 세자 저하!”
“이게 무엇인지 알아보겠느냐?”
그의 하소연에 세자가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양병수의 얼굴 또한 벼락을 맞은 듯 사정없이 무너져 내린다.
“네 조력자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너의 비밀장부이니라. 책상 아래에 비밀장소를 만들어 고이 숨겨두고 있었다지? 여기에,”
세자가 목소리를 높이며 대신들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동안 네가 뇌물을 바쳐온 고위관리들의 신원과 이번 암살시도 사건에 관련된 금군의 명자도 낱낱이 적혀있느니라. 너는 물론이요, 이 장부에 명자를 올린 자들은 그 누구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추국장 전체가 다시 어수선해졌고, 양병수는 지옥에라도 떨어진 듯 대신들을 훑으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에게 두려운 건 세자도 국법도 아니었다. 사람과 국법 위에 존재하며 보이지 않게 이 세상을 쥐고 흔드는 책략가, 벌리 어르신. 오직 그분만이 그를 섬뜩하게 할 수 있었다. 세상이 그를 버린다 해도 그분만 손을 내밀어 준다면 그는 아무 문제없었다. 한데 그분 몰래 만들어온 장부가 이런 식으로 공개될 줄이야!
‘어르신, 어르신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저들은 결코 어르신을 알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살려주십시오. 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양병수가 속으로 몸부림을 치는데 서릿발 같은 세자의 명이 떨어졌다.
“강준혁을 무죄방면하고 양병수를 비롯한 그 일행을 하옥하라. 호판과 호조참의 또한 의금부에 하옥한다.”
“저, 저하!”
세자의 추상같은 하명에 호판이 크게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호판, 조금 전 김 지평에게 뇌물이라도 먹었느냐 호통을 치셨지요? 본인이 하도 뇌물을 먹다보니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리 보이시는 건 아닙니까?”
“어찌 그리 황망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양병수의 비밀장부에 명자를 올린 대신들은 한 명도 무사할 수 없다 이미 경고를 하였소. 그 중 호판과 참의는 뇌물을 받은 액수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에 오늘은 일단 두 사람부터 추포를 하는 것이오. 그대들은 뇌물을 수수하고 나라의 재산이 빼돌려지는 것을 묵인하지 않았소? 이 장부 뿐 아니라 그동안 내사를 벌여 충분한 증거가 수집되어 있으니 부끄러움이 남아 있다면 조용히 수사에 협조하도록 하시오.”
호판의 얼굴 위로 좌절의 빛이 떠오르자 세자는 대신들에게 고루 시선을 던지며 경고를 보냈다.
“그 밖에 저자에게 조금이라도 뇌물을 받은 분이 계시다면 의금부에 남아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양병수, 저자가 장부 정리 하나는 기막히게 꼼꼼히 해놓았지 뭐겠습니까. ……죄인들을 모두 압송하라.”
양병수 일행과 호판, 호조참의가 줄줄이 끌려 나가자 세자는 좌상을 한번 흘끗 쳐다보더니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어찌되었든 좌상 스스로가 묵인해준 일. 그럴 리야 없겠지만 행여나 그의 마음이 바뀔 세라 세자는 달리듯 걸음을 빨리하여 추국장을 빠져나갔다. 서율도 빠르게 그 뒤를 따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대신들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좌상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채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하고 이판의 목소리에 발목이 잡힌다.
“대감, 어디를 가십니까?”
“조정에 공석이 여럿 나오게 생겼으니 미리 대비를 해야지요. 그리 재물을 탐하지 말라, 일렀거늘……. 양병수와 조금이라도 연이 닿았던 분들은 오늘 안에 스스로 자백을 하셔야 할 겁니다. 이 사람은 신분을 망각하고 부정을 저지른 자들을 감싸줄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
“대감,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청보석이 진정 경산부원군이 지녔던 게 아니었습니까?”
대신들의 시선이 모두 좌상에게로 모아지자 그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싸늘함이 퍼져 나왔다.
“그가 경산부원군의 핏줄이었다면 내가 이대로 놔주었을 거라 생각들 하십니까?”
“흐흠, 흠…….”
좌상은 말 한마디, 눈빛 하나로 상황을 정리해버리고 다시 걸음을 떼었다. 경산부원군을 처단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선 사람이 바로 좌상이었다. 그런 좌상이 거짓을 말할 이유가 딱히 없다는 생각에 대신들은 공연히 헛기침만 해댄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이판은 끝까지 무언가 못미더운 얼굴이었다.
“대감, 대감!”
“이보게!”
이판이 걸음을 떼어 좌상의 뒤를 따르자 우상이 쫓아와 그를 가로막았다.
“잡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좌상께서 아니라 하시지 않는가! 그보다 자네는 중전마마께 가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 마마께서 저를 찾으십니까?”
그의 태평스러운 말에 우상은 답답해하며 소식을 전했다.
“아직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중궁전이 발칵 뒤집혔다네. 궁녀들이 전부 붙들려가 내사를 받고 있단 말일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수비라는 궁녀가 서제륜의 얼굴을 보았다고 증언하였던 게 거짓이었다는 걸 자네도 듣지 않았는가. 한데 그 배후에 중궁전이 있었다는 게야. 중전께서 화경궁 마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던 모양일세.”
“그, 그게 무슨!”
“얼른 가보시게. 감시한 거야 덮을 수 있다 쳐도 거짓 증언을 종용한 건, 책임을 면치 못하실 것이야.”
얼굴이 노랗게 뜬 이판이 허둥지둥 의금부를 빠져나가자 우상은 한숨을 길게 내리 쉬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퇴청하지 못할 듯싶었다.
하늘 위의 햇살이 지나치게 밝은 탓이었을까. 의정부로 향하는 좌상의 눈가가 욱신욱신 아파오고 있었다.
‘만족하십니까?’
새하얀 얼굴에 먹빛의 총명한 눈동자. 그분이 다소곳이 미소를 지어 보낸다. 고맙다고, 또 미안하다고……. 언제인지 모르게 가슴에 스며들어 평생을 그 자리에 박혀 있는 사람. 보고 싶기도 하였고, 보고 싶지 않기도 하였다. 오늘은 그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빛을 보신 날.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그분의 탄생일.
‘당신께 드리는 저의 마지막 성의입니다.’
철 지난 매화향이 어디선가 불어와 코끝을 간질이자 눈가에 아릿아릿 물기가 솟아올랐다. 이에 좌상은 빠르게 눈을 깜빡여 조금의 흔들림도 허용치 않는다. 하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눈동자까지 어찌 감출 수 있을까.
‘그러니 제발…… 다시는 저를 찾아오지 마십시오.’
따스하게 내리쬐는 유월의 햇살 아래, 압도적인 관록을 자랑하는 노회한 재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연모하는 이에게 상처 받고 오랫동안 아파하는 우직한 사내만이 남아 있을 뿐.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고도 한참이 지난 시각. 옥에 갇혀 잠도 이루지 못하는 양병수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모든 게 끝일 리가 없었다. 그동안 어르신을 위해 수도 없이 살생을 저지르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재물을 바쳐오지 않았던가. 앞으로의 이(利)를 위해서라도 자신을 이렇게 버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왔구나!’
순식간에 주변의 불이 꺼지더니 검은 인영 하나가 소리도 없이 눈앞에 모습을 보인다. 검은 복장에 검은 복면. 어르신의 심복, 석칠이 온 것이다. 양병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열렬히 그를 환영하였다.
“석칠이 자네인가? 왜 이제야 온 것이야? 이럴 줄 알았네. 자네가 올 줄 알았어. 어르신께서 나를 쉽지 버릴 리가 없지!”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답지 않게 코끝이 찡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비어져 나오던 양병수의 웃음은 어느 순간 싸늘히 식어버린다. 석칠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너무도 서늘하였기 때문이다. 옥문을 열 생각은 않고 왜 저리 보고만 있단 말인가?
“혹 비밀장부 때문에 그러는가? 염려 마시게, 어르신의 함자는 적지 않았으니까. 저들은 목록을 보고도 절대로 어르신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야! 나를 믿어 주게.”
불안해진 양병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최선을 다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자네가 변복까지 하고 가서 장부를 빼돌렸는데 비밀장부가 있어서 화가 났는가?”
“하고 싶은 말은 끝났는가?”
‘억양이 없는 저 목소리. 죽는다! 저자는 나를 죽이러 온 것이다!’
공포에 질린 양병수는 순식간에 공황 상태에 빠졌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이제 갓 대방이 되어 상단을 겨우 손아귀에 넣었는데, 예전보다 더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초라하게 이런 곳에서 이렇게 버려지고 싶진 않았다.
“이보시게, 나를 여기서 꺼내주지 않겠는가? 자네에게 재물을 주지. 자네의 자손까지 풍족하게 쓰고도 남을 만큼 내 아낌없이 줄 것이네. 어르신께는 내가 이미 탈옥을 하였더라, 그리 보고를 하면 되지 않겠는가!”
다급해진 양병수는 마지막까지 죽을힘을 다해 매달렸지만 돌아오는 답이라고는,
“그 유언은 전해 드리지.”
“헉.”
짧은 말 한마디와 급소에 정확히 날아와 박힌 독침뿐이었다. 탐욕을 쫓아 평생을 누군가의 하수인으로만 살아온 양병수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영원히 침묵하고 말았다.
서율은 막내 숙부가 요양 중인 현법사로 향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모든 것이 시원하게 뚫릴 듯하다, 완전히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준혁과 아정이의 목격담을 종합해 보면 행궁을 습격했던 이들은 나라의 진상품을 빼돌린 이들과 동일하였다. 예상대로 양병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그 뒤로 조정의 배후세력이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는 꼬리를 잘라버리고 몸통을 감추어버렸다.
창 과(戈). 발견된 비밀장부를 살펴보니 막대한 금액의 뇌물이 명자가 아닌, ‘과’라 표기된 자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재물이 오랜 시간 꼬박꼬박 그에게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양병수의 사택과 집무실 구석구석을 뒤지고, 戈(과)자가 뜻할 만한 문무관들의 명자와 별호, 그 행적들을 샅샅이 살폈지만 아무런 소득은 없었다. 양병수가 살해를 당한 지금 누구에게 어떻게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의금부 옥사에 자객을 보낼 정도라면 그 세력은 이미 비대해질 만큼 비대해져 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세자 또한 전에 없이 답답해하고 있었다.
[오래도록 이렇게 많은 재물이 꼬박꼬박 필요했다는 것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거두려면 이 정도의 비용은 필요했겠지.]
[병력을 늘리고 도성 근처의 산을 은밀히 뒤져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다. 빠른 시일 내에 병조를 개편하고 아무도 모르게 금군을 늘려야겠어. 허나 그러려면 좌상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인데. ……일단, 자네 부친께는 침묵해주게.]
좌상은 병판의 자리를 처남인 서율의 외숙에게 넘기면서도 지금까지 병권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투명하고 공정하려 애쓰기는 하지만 권력의 비정함 앞에 그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까.
부친께서 세자의 편에 서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서제륜을 눈감아 주시기는 하였으나 그도 세자도 그를 빌미로 일말의 희망을 품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부친의 속내를 알 수 없어 외려 더 불안하기만 할 뿐. 수십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뒤엉켜있는데 나긋한 목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김 지평이 아니십니까.”
정신을 차려보면 화사한 차림의 안빈이 그를 보며 선하게 웃고 있었다. 어느새 법당 근처까지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신(臣), 지평 김서율, 안빈마마께 문후 올립니다.”
“다행히 저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현법사에 좌상대감의 아우 분이 요양하고 계신다 하더니, 숙부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그러하옵니다.”
“저는 이제 마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먼 곳까지 걸음을 하셨습니다.”
“요즘 전하의 옥체가 점점 더 미령해지시니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고작 이런 것밖에는 없습니다.”
안빈의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로 수심에 차 있었다. 혜빈이 출궁하고 중전이 근신 중인 지금, 금상 곁에 남아 병수발을 주도하는 이는 안빈이었다.
“마마께서 밤낮으로 애쓰고 계시다는 말은 전해 들었습니다. 저하께서도 매우 감사히 여기고 계십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안빈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서율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공손히 예를 갖춘다. 후사 하나 없이 낭군인 금상만을 바라보고 계시니 그 속내가 오죽이나 불안할까. 안쓰러운 마음에 서율은 그 자리에 머물며 멀어지는 안빈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현법사에서 돌아온 안빈은 곧바로 대전에 들어 금상의 탕약 시중을 들었다. 내관과 궁녀들을 모두 물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금상의 수족이 되어 부지런히 몸을 놀린다. 금상은 탕약을 마신 후, 안빈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편히 누웠다.
“고맙소, 안빈. 그대가 고생이 많구려.”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신첩은 하루 빨리 전하께서 쾌차하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고맙… 소……”
금상은 정신이 몽롱해지며 미약한 신음과 함께 수마에 완전히 빨려 들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안빈에게서 애틋하면서도 써늘한 냉조가 섞여 나왔다. 내의원의 안 첨정은 안빈의 사람이라 하명한 대로 탕약에는 수면 가루를 섞어놓은 것이다. 독이 아니니 따로 검출될 일은 없을 터.
소의로 입궁한 그녀는 우연히 이루어진 한 번의 합방으로 회임을 하고 귀인이 되었다. 낭군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체념한 그때, 하늘에서 내려준 하해와 같은 축복. 모든 것을 포기하였지만 금상을 닮은 아들을 낳아 그 아이에게 의지하며 조용히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회임 육 개월째,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열에 시달렸고 위기가 찾아왔다. 그녀는 굳건히 버텨냈지만 결국 팔삭둥이 옹주를 낳고 말았다. 온몸에 흉측한 물집이 잡혀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던 작은 아기. 제발 살려 달라, 하늘에 빌었지만 태어난 지 열흘 만에 가엾은 아기를 가슴 속에 영원히 묻어야만 했다.
절망 속에 시름시름 앓던 어느 날, 더 이상 회임이 불가능하다는 소견이 날아들었다. 금상께 면목이 없었고 왕실에 누가 된다 생각하였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금상께서는 그녀에게 빈이란 첩지를 하사하셨다. 편안할 안(安)이란 작호를 받아 안빈이라. 절망과 무기력에 빠져있던 안빈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더랬다.
[마마, 아기씨께서 그리 태어나신 것도, 마마께서 수태가 불가능해지신 것도, 모두 금상의 명으로 비밀리에 행해진 것이라 하더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금상께서는 효경왕후와 혜빈 외에는 후사를 보지 못하셨습니다. 금상의 아기씨를 회임하신 분은 마마가 마지막이셨지요. 그 연유를 알았습니다.]
어느 날, 부친이 가져온 참혹한 진실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시름하던 안빈을 단번에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정일품 내명부의 품계는 아기를 잃은 그녀에게 금상이 건넨 같잖은 대가였을 뿐.
[불쌍한 나의 아기……]
온몸이 찢겨지는 아픔에 밤새도록 오열하다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온 마음을 다해 은애하던 정인에 대한 배신감,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하고 아기를 떠나보낸 어미로서의 절절한 한. 거기다 부친에게 당해 온 어린 시절의 서러움이 집약되어 모조리 금상에게로 조준되고 말았다.
아기를 그리 보낸 금상도, 여식의 상처를 들쑤셔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아비도, 더 이상 안빈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안빈은 덕을 갖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칼을 품고 맹세하였다. 참고, 견디고, 이 마음을 다스려 최후의 일인으로 우뚝 서고야 말리라. 사랑하는 자식을 잃는 그 크나 큰 아픔을 임금에게 반드시 되돌려주고야 말리라. 참으로 오랜 시간 차근차근 준비하고 기다려왔다.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최후의 일인으로 전하의 곁에 남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보십시오, 전하. 전하 곁에 남아있는 이가 누구인지를! ……전하께서 옹주에게 가했던 그 아픔을 저 또한 공주에게 고대로 되돌려 줄 것입니다. 그토록 사모했던 여인, 효경왕후의 소생을 잃었을 때 전하의 고통도 배가 되겠지요?’
안빈은 서러움이 차올라 금상의 어수를 가만히 손에 쥐었다. 따뜻하여라. 시린 마음에 와 닿은 그의 온기가 너무도 다정하여 눈물샘을 자극했다. 눈물이 주르륵 쏟아져 내린다. 안빈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금상을 내려다보았다.
“전하, 온 마음을 다해 은애합니다. 또한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을 증오합니다. 하여 저는 끝까지 당신을 연모하고, 끝까지 당신을 저주하겠습니다. 병석을 털고 일어나십시오. 제 분풀이는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약초를 캐던 노인에게 의탁하여 몸을 숨겼던 만석이네 가족은 가까스로 공 의원과 연락이 닿았고, 세자의 보호 아래 무사히 증인으로 금부에 설 수 있었다. 이후 누명을 벗은 준혁은 곧바로 복귀하여 상단 내 양병수의 세력을 모조리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침체되었던 상단은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고 정신없이 바쁜 준혁을 아정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였다.
그런데 오늘, 준혁이 기다리고 있겠다는 연락과 함께 약도 하나가 손에 쥐어진 것이다. 물어물어 찾아온 곳은 디귿자 형의 건물 한 채가 들어선 아담한 규모의 기와집.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머뭇거리는데 안에서 왁자지껄, 익숙한 목소리가 여럿 흘러나왔다.
‘이 목소리는!’
놀란 아정이 끼익 소리와 함께 대문을 밀고 들어가자 수많은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어머니!”
안마당에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비롯해 준혁과 대행수, 그리고 공 의원과 만석이네 식구들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누님, 여기가 우리 집이래요! 상감마마께서 귀한 것들도 아주 많이 보내주셨어요. 우리 이제 부자에요!”
장마가 지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튼튼한 건물과 번듯한 대문, 그리고 담장. 거기다 고즈넉한 한 그루의 감나무까지. 쩍쩍 갈라져 빗물이 새던 제 집에 비하면 이곳은 그들에게 대궐이나 다름없었다. 흥분한 영재가 한참 동안 뭐라 떠들어 댔지만 아정은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대청마루에 놓인 귀한 물건과 진수성찬, 그리고 마당에 쌓여있는 저 곡식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정은 수북이 쌓여있는 금과 비단, 그리고 묵직한 엽전꾸러미들을 얼떨떨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다 무슨 소리에요? 이건 다 뭐고요?”
“아정아, 네가 공을 세워 상감마마께서 이 집과 귀한 물건을 내려주셨다 하는구나. 이 어미는 가슴이 떨려서 원……. 나리, 정말 이리 받아도 되는 것입니까?”
“임금님께서 하사하신 것이니 당연히 받으셔야지요.”
공 의원이 제 일처럼 기뻐하며 냉큼 어식 앞에 자리를 잡는다. 주인공인 아정이가 당도하였으니 이제는 궐에서 나라님이 드신다는 귀하디귀한 음식을 맛보아야 할 차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맛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모습이 정겹고도 감동스럽기만 하다. 코끝이 시큰해진 아정이가 멍멍한 상태로 바라보고 있는데 준혁이 그 옆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나리,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슨 공을 세웠다고 이리 엄청난 것들을 받는단 말입니까?”
“네가 비밀장부를 발견하여 사건을 더 확실히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니 어찌 그 공이 작다 할 수 있겠느냐.”
아정은 눈물을 글썽이며 준혁을 마주보았다.
“혹 공주마마께서 힘써 주신 것은 아닌지요?”
[은명이가 너를 부탁하면서 아정이란 아이에 대해서도 말을 하더구나. 마침 그 아이가 비밀장부를 발견하였으니 아바마마께 말씀 드려 그 공을 치하하려한다. 알아보니 사는 곳이 변변치가 않다지? 내가 그 아이에게 집을 마련해주면 어떠하겠느냐?]
[집은 소인이 마련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 아이의 큰 은혜를 입어 그 정도는 소인이 직접 해주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하사품이나 넉넉히 내려주어야겠구나.]
“네 스스로 노력하여 네 힘으로 얻은 것이다. 저 정도면 얼마간의 논밭을 구입하여 소작을 줄 수도 있을 것이야. 더 이상 네가 밖으로 나가 일을 하지 않아도 식구들과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준혁의 안쓰러운 시선이 보랏빛을 띠어가는 아정이의 이마에 머물렀다.
“많이 아팠겠구나.”
“괜찮습니다. 다 지나간 일입니다.”
“나를 위해 네가 해주었던 그 모든 일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고마웠다.”
이 모진 목숨을 구해준 아이. 양병수에게 눈을 다치던 그날, 끝없는 암흑과 고통 속에서 의지할 데라곤 이 아이의 작은 손밖에 없었다. 자칫하다간 아정이의 목숨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었던 순간. 모르는 척 내버려 둘 수도 있었건만 이 작은 아이는 끝까지 준혁의 손을 놓지 않았다. 평생토록 잊지 않을 것이다. 평생토록 고마워할 것이다.
준혁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떠오르자 아정이 또한 잔잔한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폭풍우처럼 몰아쳤던 역경들을 이겨내고 밝은 세상에서 이리 떳떳하게 마주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얼마나 달콤한 일인지.
“공주마마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누구보다 좋아해 주실 것인데…… 나리, 마마께서는 잘 지내고 계시겠지요? 뵙고 싶습니다.”
준혁의 명치끝에 걸려 있는 또 다른 가시 하나.
[공주마마를 언제까지 저리 내버려두실 것입니까?]
[준비가 끝났으니 곧 터트릴 것이다.]
[터트리시다니요? 저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후, 두고 보면 알 일이다.]
“아마도 곧…… 뵐 수 있지 않겠느냐.”
준혁의 시선이 강원도로 이어진 하늘 위로 고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