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장.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
자시가 되어가는 깊은 밤. 어둠을 밝혀주는 빛이라고는 하늘에서 내려주는 달님의 기운이 전부인 황량한 이곳. 얼마 전까지 따스한 온기와 은은한 등불과 기분 좋은 향기가 휘날리는 곳이었다고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치경은 씁쓸한 마음으로 어둠이 짙게 깔린 안채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오늘로 상전이 집을 나선지 나흘째. 침묵을 지키던 좌상은 오늘 아침 지평을 데려오라 명을 내렸다. 사람을 붙여 놓았기에 행방은 처음부터 정확히 알고 있었다. 주인을 잃고 텅 비어 있는 이곳, 화경궁의 싸늘한 안채. 공주의 소식에 자선당으로 달려갔던 상전은 이후, 이곳으로 숨어들어 공주가 쓰던 방안에 덩그러니 앉아만 있었다. 먹지도, 수면을 취하지도 않고 몇날며칠 냉골에 들어앉아 있으니 오늘을 넘기면 사달이 일어나고 말 터. 마음이 급해진 치경은 다시 한 번 상전을 채근하였다.
“도련님,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대감마님께서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 허하셨습니다.”
묵묵부답.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끌고 나올 듯 좌상의 무사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치경은 결국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이 속이 이리도 갑갑할지언데 도련님께서는 오죽이나 괴로우실까.’
배시시 웃어주던 어린 공주의 새하얀 얼굴이 떠올라 치경은 말없이 깜깜한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고즈넉하게 떠 있는 저 하늘의 그믐달이 몹시도 조요한 밤이었다.
푹신한 보료 위에 도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공주는 여전히 아름답고 햇살처럼 눈이 부셨다. 때로는 오만하게, 때로는 어여쁘게, 때로는 발칙하게, 스승인 이 사람을 들었다 놨다 얼마나 들쑤셔대는지. 그런 모습이 마냥 귀여워 입가에 저절로 곡선이 그려진다. 그러다 문득 한기를 느끼고 정신을 차려보면 그믐달의 기운이 켜켜이 내려앉은 화경궁의 컴컴한 내실. 아리따운 공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저 혼자 냉골 바닥에 덩그러니 앉아있을 뿐이다. 공주께서 계시는 곳은 강원도의 어느 후미진 구석.
‘강원도는 추운 곳입니다. 한설이 몰아치고 왜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의 매서운 추위를 어찌 견디시렵니까?’
아홉 살 어린 나이에도 찬바람이 불면 등이 시리다 하였던 분. 조금만 추워져도 손끝부터 차가워지시는 분이었다. 엄동설한에 새파래진 입술을 덜덜 떨면서도 악착같이 관아를 들락거리던 모습이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끝끝내 모르는 척 돌아설 수밖에 없었지만 꽁꽁 얼어 빨개진 두 손을 한번쯤은 이 손으로 녹여주고 싶었다. 이번 겨울, 드디어 그분의 손을 잡아드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송구합니다. ……쫓겨나시는 줄도 모르고, 따뜻한 방안에 누워 제가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뻣뻣이 얼어버린 그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매듭달 초순,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안빈의 처소. 단정히 쪽을 진 머리 위로 안빈이 영롱한 장식의 비녀를 꽂고 경대 속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뛰어난 미색은 아니지만 참하고 우아함이 흐르는 외모는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세월의 흔적과 맞물려 고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물끄러미 제 모습을 들여다보는데 상궁의 목소리가 적막을 가른다.
“마마, 우참찬 드셨사옵니다.”
“뫼시어라.”
문이 열리고 우참찬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자 안빈은 근엄한 눈빛으로 부친을 바라보았다.
“아버님께 참으로 실망입니다.”
“공주마마의 일 때문에 그러시옵니까?”
알면서도 태연히 웃으며 너스레를 떠는 부친이 안빈은 보기가 싫었다. 저밖에 모르는,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인 사람. 부정(父情)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이 여식을 권력의 도구로만 이용하는 사람.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안빈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분명, 죽여 달라 하였습니다.”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아버님!”
“크크…… 예, 알겠습니다. 후미진 곳으로 쫓겨난 공주 따위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당장이라도 살수들을 보내 마마의 한을 풀어드릴까요?”
“그럴 수는 있으신 겁니까? 행궁에서 이미 능력의 한계를 보이셨습니다.”
안빈의 나직한 빈정거림에도 우참찬 노용식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들에게 수없이 허리를 굽히고 또 굽혔는지 모른다. 때론 비굴하게, 때론 초라하게. 하찮은 것들에게도 주저 없이 고개를 숙인 저인데 딸자식이자 이 나라 빈마마의 칭얼거림 쯤이야.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법이지요. 사람이란 게 어찌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내 이번에는 제대로 한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세자가 바보입니까? 행궁에서 그토록 고생을 시켰는데 참으로 그곳에 누이를 홀로 보냈겠습니다.”
“후후후, 역시 저의 따님이십니다. 그렇잖아도 살펴보았더니 일반인으로 위장한 최정예 무사들이 유배 길에 몰래 따라 나섰더이다.”
“유배가 풀리는 그날까지 잠복하여 근접 경호를 하겠지요. 그냥 두세요. 지금 죽이기엔 다들 너무 슬퍼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가 웃으며, 모두가 행복해 할 때…… 저는 그런 때가 좋습니다.”
차가운 미소를 날리는 안빈을 보며 우참찬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찰뿐이었다. 빈의 자리를 꿰찬 것 말고는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딸년이었다. 조금만 지나면 모든 권세가 이 손에 쥐어질 것인데 왜 쓸모없는 공주 따위나 죽여 달라 저리 귀찮게 구는 것인지. 정작 죽여야 할 세자는 저리도 건실히 자리를 잡고 있건만.
“보기 좋은데 계속 하고 계시지, 왜 빼버리십니까?”
노란빛의 금강석이 화려하게 반짝이는 금비녀가 안빈의 머리에서 사라지고, 수수한 비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부친의 아쉬운 소리에도 안빈은 휘황찬란한 백색의 기다란 보석함을 열어 그 안에 금강석 비녀를 넣어버린다.
“잠시 꽂아본 것뿐입니다. 병환 중인 금상께 가는 길이니 자중을 해야지요.”
“꽂고 계십시오. 빈마마이신데 그 정도는 해주셔야지요.”
“나중에요. 전하의 곁에 제가 최후의 일인으로 남았을 때, 그때 이 비녀를 꽂을 것입니다.”
“혜빈도 쫓아낸 마당에 나머지 후궁들이야 허수아비들 아닙니까? 중전 때문에 그러십니까? 치워드릴까요?”
“아직은 중전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만 대전에 들 것입니다. 따뜻한 차 한 잔 올리라 할 터이니 천천히 즐기다 가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안빈이 문으로 향하는데 웃음기가 섞인 우참찬의 탁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도 성가시거든, 이 아비에게 하명만 하십시오. 고분고분해질 만큼, 딱 그만큼만 혼을 내 드리겠습니다.”
안빈은 염증 어린 눈길로 부친을 슬쩍 돌아보았다. 모든 것을 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다는 저 오만 방자한 얼굴. 하긴, 첫정에 미쳐 물불 안 가리는 중전이라면 손쉽게 처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중전은 자신의 방패막이. 세를 불리기 위한 부친의 희생양으로 내어줄 순 없었다.
“내버려 두세요. 중전은 지금 자멸하는 중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처소를 나서자 냉랭한 한파가 전신에 부딪힌다. 피부가 아릴 정도로 매서운 추위였지만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차가운 바깥공기가 안빈은 외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입궐하기 전까지 부친의 매서운 손아래서 얼마나 많은 구타를 견디며 살아야 했는지. 아들을 낳지 못한 어미는 저 사람의 폭력 아래 내내 시달리다 쪽방 구석진 곳에서 초라하게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저 작자는 아들을 낳아 안방을 차지한 기생 년을 끌어안고 꽃놀이를 갔었다 한다.
천륜을 저버리고 여식을 도구로만 생각하는 그 때문에 아파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도 딱 그 정도로만 대해드리면 그만일 뿐.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 했던가. 아비는 딸을 이용해 권력을 잡고자 하나, 딸은 그 아비를 이용해 복수를 하고자 했다.
대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주를 보내고 금상이 자리보전을 시작한 지 벌써 여러 날. 노련하게 굴던 혜빈은 쫓아냈고 첫정을 잊지 못해 감정을 질질 흘리는 중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저 숨 막히는 대전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 금상의 옆에는 자신만이 남게 될 것이다. 지독히도 사모했지만 끔찍한 지옥을 맛보게 해주신 분. 안빈의 얼굴에는 늘 드리워져 있던 인자함 대신 시린 미소가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하…… 괴로우십니까?’
유배지로 떠나는 공주를 지켜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임금을 보는 건 시작일 뿐이었다.
‘고작 그 정도로 앓아누우시면 곤란합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그 생가슴을 후벼 파는 극심한 아픔을 이 사람이 처절히 느끼게 해드릴 것입니다.’
저 앞에 대전의 궁녀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안빈의 얼굴에는 다시금 자애로운 빛이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대제학의 여식과 정혼하여라.”
두 달 전, 아들은 끝내 탈진한 상태로 정신을 잃고 집으로 옮겨졌다. 펄펄 끓는 신열 속에 정신을 잃었다 깨었다, 시름시름 자리보전을 하였더랬다. 백약은 무효했고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그 녀석 참, 열병을 지독히도 앓는구나. 그래도 때가 되면 일어나겠지, 모르는 척 돌아서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놀랍게도 아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파르게 말라 허깨비 같은 몰골을 하고서도 업무에 복귀해 무섭도록 일에만 매진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안도하고 있었는데 오늘 오전 세자로부터 기막힌 소식이 당도하였다.
“소자는 이미 정혼을 하였습니다.”
“여인의 마음, 연정, 그런 건 모두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믿을 수 있고 너를 지켜주는 건 오직, 네 가족과, 네 능력과, 네 건강한 신체일 뿐. 네 이성을 홀리는 여인이 아닌 우리 집안에 스며들어 가족이 될 수 있는 여인과 혼인을 하여라.”
“저를 홀리는 분이 아닌, 제게 힘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강건하고 현명한 분이십니다.”
“하여 사직을 청한 것이냐? 이성이 온전하여서?”
“어차피 조정을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소자가 맡던 일들을 처리하고 넘겼으니 잠시간 도성을 떠나 있겠습니다.”
이미 떠날 차비를 마치고 앉아있는 아이. 저 눈빛, 저 마음가짐이라면 더는 말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좌상 또한 말릴 생각은 없었다. 심지가 곧은 아이이니 밖으로 내돌린다 하여도 엇나가지는 않을 터. 허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정확히 짚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 원한다면 더 이상 붙잡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이것만은 명심하여라.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강원도에 계시는 그분은 절대로 우리 가문의 문턱을 넘으실 수 없다. 그 연유는 네 몸에 잘 새겨져 있느니라.”
모든 일을 해결하는 그날까지 침묵하기로 한 서율은 담담한 얼굴로 일어나 공손히 절을 올렸다.
“건강하십시오, 아버님. 소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나온 서율은 습관처럼 사랑채 저 뒤편 높은 누각을 올려다보았다. 공무로 먼 길을 떠날 때면 사랑채를 나선 아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높은 곳에 서서 오랫동안 지켜봐 주시는 어머니. 오늘도 마지막까지 저를 배웅하기 위해 높은 누각에 올라 계셨다.
밤이 지나는지, 아침이 오는지, 시간의 흐름조차 모르고 병석에 누워있던 작년 십이월. 눈을 뜰 때마다 옆에 계시는 어머니의 옷차림이 바뀌는 걸 보며 하루하루가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깊은 밤, 오직 침묵하며 옆자리를 지켜주시던 어머니께서 조용히 입을 여셨다.
[그분은 네게 어떠한 분이시냐?]
[……]
[이 어미는 어리석어 아무것도 모른다. 정치도, 당론도, 가문의 이해관계도 늘 복잡하고 어렵기만 하구나. 그저 먼저 보낸 내 새끼들이 가슴 아프고, 건강하게 살아주는 내 자식들이 고마울 뿐. 얘야……]
[……]
[한데 이 어리석은 어미도 알고 있는 시경의 구절이 하나 있단다. ……당체지화 편기반이하니, 기부이사 실시원이로다. 이 구절을 읽으며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였단다. 그런데 말이다, 이 나라 남정네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선현께서도 그 구절을 읽고 이 무지한 어미와 같은 생각을 하셨다 하더구나.]
서율은 그 다음 날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였다. 누각 위의 어머니께서 얼른 가라고 손짓을 하신다. 그동안 자식으로서 끼쳐드린 심려가 너무도 컸기에 서율은 잠시 서서 어머니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마음고생을 시켜드려 송구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어머니.’
서율은 저 멀리 보이는 어머니께 크게 반절을 올린 후 발길을 돌렸다. 그분이 계시는 강원도를 향하여.
당체지화, 편기반이 (唐棣之華, 偏其反而)
기부이사, 실시원이 (豈不爾思, 室是遠而) -시경
아름다운 산앵도나무 꽃이 훨훨 휘날리는구나.
어찌 그대를 그리워하지 않으리요마는, 그대 머무는 곳이 멀고도 멀구나.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미지사야(未之思也)이니, 부하원지유(夫何遠之有)리오. -논어
진실로 그리워하지 않는 것이니, 진정 그리워한다면 가지 못할 먼 곳이 어디에 있으리오.
혹한기가 이어지고 있는 시샘달 초순의 강원도. 솜을 대어 두툼한 무명옷을 입은 은명은 안마당에 소복이 쌓인 눈을 쓸고 있었다. 병석에서 막 일어나 안쓰럽도록 야위어 있었지만 먹빛의 눈동자만은 여전히 초롱초롱하였다. 불어오는 칼바람에 손이 빨갛게 얼어 가는데도 야무진 비질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었다. 마을에 내려간 최 상궁과 난이가 보면 야단법석을 떨겠지만 은명은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바깥보다야 낫지만 방안에 있어도 웃풍이 거세어 추운 것은 매한가지. 비질이라도 하면 땀이 날 정도로 몸이 데워지는 것은 물론, 밤에도 달콤하게 곯아떨어질 수 있었다.
“후우-.”
잠시 비질을 멈춘 은명은 어느새 이마에 차오른 땀을 닦으며 뻐근히 아파오는 허리를 톡톡 두드려준다. 운동으로 하는 것이라 하나 평생을 고이고이 보살핌만 받아온 귀하신 몸. 조금의 움직임만으로도 금방 지쳐버리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더욱이 몸에서 땀이 난다 하여도 손과 발, 코끝과 귀가 시리는 건 여전하였다.
“호- 호-.”
입김으로 빨갛게 얼어붙은 시린 손을 녹인다. 그런데, 어디선가 익숙한 향기가 바람에 묻어와 은명의 가슴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쿵, 쿵, 쿵.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언젠가 김서율을 마주하며 그러했던 것처럼 팔딱팔딱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왜 이러지?’
이리도 공연히 가슴이 뛸 때면 은명은 반사적으로 그를 떠올리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이 가슴을 뛰게 했던 사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있는 것도 아닌데 이 가슴이 왜 이러는 것이냐……’
그리운 이가 떠올라 잠시 울컥한 은명은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가 없는 곳에서 가슴이 이렇게 주책없이 뛰다니……’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몸에 이상이 있어 가슴이 뛰었던 것이로구나. 피식 웃으며 생각을 떨쳐버린 은명은 다시 비질을 시작하려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빗자루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휘이이이잉- 휘이이이잉-
꿈인가 싶기도 하였다. 사나운 겨울바람이 가져다 준 달콤한 환상인가 싶기도 하였다. 하지 말라면 절대로 하지 않으시는 분. 찾아가는 건 언제나 저의 몫인 줄 알았건만.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환상이라면 조금 더 보여주기를, 바라고 또 바라기만 할 뿐.
“마마……”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나온 사람. 그대에게 퍼부었던 말들은 진심이 아니었노라고, 이 마음은 그러지 아니하였노라고 얼마나 말해주고 싶었는지. 그대에게 준 상처가 안타까워 그만 병이 나고 말았다고 얼마나 투정을 부리고 싶었는지.
“흐흑……”
그리운 내 님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지만 무정한 이 눈물이라는 것이 온 세상을 흐릿하게 만들어 버린다. 급한 마음에 빨갛게 얼어붙은 손으로 흐려진 시야를 맑게 하는데 그의 체취가, 그의 숨결이, 피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꿈이었다면, 환상이었다면, 이리도 따뜻할 리 없었다. 그의 너른 어깨에 얼굴을 묻은 은명은 마음 놓고 눈물을 쏟아내었다.
“잊으란 말은 마십시오. 갈수록 더 또렷해지기만 할 뿐, 그럴 수는 없습니다.”
“흑흑흑……”
버려도 쫓아오고, 싫다 하여도 좋다 하고, 언제나 그만 바라보다, 그의 전부가 되어버린 사람. 이번에는 그의 차례였다. 버려도 쫓아가고, 잊으라 하여도 기억하고, 싫다 하여도 끝까지 좋아하여 이 사람의 전부가 될 것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깊은 밤의 중궁전. 벌써 얼마나 마셨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중전이 홀짝홀짝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병석에 누운 금상의 병수발을 들었으니 이제는 끓어오르는 이 울화를 풀어낼 차례. 눈만 감으면 그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라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침수에 들 수가 없었다.
[김서율이 사직상소를 올리고 도성을 떠난다 하더이다.]
안빈이 가져온 은밀한 전언에 허겁지겁 그의 뒤를 쫓아갔었다. 먼 길을 떠나는 그의 앞에 나타나 정면으로 길을 가로막았다. 놀라는 얼굴로 어쩐 일이시냐 물어 와야 정상이건만 그는 무엇도 담지 않은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 무심함에 심장이 내려앉으면서도 중전은 두서없이 나오는 대로 말을 늘어놓았다.
[그 아이는 더 이상 공주도 뭣도 아닙니다. 어찌하여 하잘 것 없는 여인네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려 하십니까?]
소리를 지르는 내내 그는 침묵하였으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는 써늘함과 경계심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화경궁의 나인을 매수해 공주를 그리 만들었다, 책망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그가 남기고 떠난 한 마디의 말은 중전이란 체면도 잊고 길바닥에 맥없이 주저앉게 만들었다.
[소신은 모든 것을 버리려 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을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날의 일이 생생이 떠오르자 뜨거운 피가 거꾸로 솟구쳐 중전은 술을 따라 단번에 들이마셨다. 부끄러움도 잊고 날뛰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그의 관심을 받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자신이 아닌 경산부원군의 핏줄이었으니.
‘그 아이는 원수의 손녀인데, 그토록 안타까워하는 당신의 숙부를 그리 만든 가문의 핏줄인데, 왜 그 아이는 되고 저는 안 되는 것입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울부짖으면서도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에게 자신은 여인이 아니었던 것임을. 저를 바라보는 눈빛엔 그와 비슷한 감정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임을.
‘그런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월류지에서 내가 기다린다 하였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와주었을 것이다. 왕비가 될 것이란 소문이 돌았을 때 제일 먼저 달려와 주었을 것이다.’
“후후후,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사람이었던 것을……”
중전에게서 자조 섞인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비참함에 솟구치는 눈물 또한 흘러내렸다.
부친이 양병수와 의천 상단을 이용해 부를 쌓기 시작하면서 안빈은 대궐 안 사람들을 꾸준히 매수해 왔다. 대전과 혜빈전을 비롯한 각 후궁전은 물론이요, 중궁전과 동궁전, 공주전에 이르기까지 궐 안 곳곳 안빈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눈앞에 앉아있는 중전의 지밀상궁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여 술에 취해 쓰러지셨다고?”
“예, 평소보다 더 많이 드셨습니다.”
“수고하였네. 그만 물러가 쉬시게.”
내전 상궁이 물러가자 안빈의 얼굴에 조소의 빛이 떠올랐다. 필요에 의해 보희를 중전으로 들이기는 하였으나 잠시간 보듬어주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사모하는 님의 등을 보며 홀로 애태우는 모습이 저를 닮은 듯 애처로웠기 때문이었다. 하나 팔자는 제 성격이 좌우한다 했던가. 중전의 행태는 안빈의 동정심마저 깡그리 사라지게 하였다.
‘모자란 것. 제 팔자가 얼마나 좋은지도 모르고……. 쯧쯧, 복에 겨워 그리하는 것이지.’
명문가의 고명딸로 태어나 안빈이 생전 누려보지 못한 가족의 귀애함을 듬뿍 받으며 자라난 아이. 딱히 어떠한 노력도 없이 금상의 정실부인 자리를 단번에 꿰차고 앉은 아이였다.
‘그러고도 저리 추태를 부리고 있으니…….’
하여 안빈은 중전을 보듬어 주는 대신 철저히 이용하기로 하였다. 공주를 공격하고, 혜빈을 쫓아내는 데까지만 이용하려 했으나 계획을 전면 수정, 자신의 방패막이로 만든 것이다. 수비 또한 안빈의 사람. 화경궁의 궁녀를 매수한다는 내전 상궁의 은밀한 전언에 자신이 심어 넣은 수비를 들여보냈다. 중전에게 보고를 할 시에는 공주와 김서율의 관계를 특히 낱낱이 고해 올리라는 은밀한 명과 함께. 안빈이 만들어준 판인지도 모르고 중전은 투기에 미쳐 제대로 펄펄 날뛰어주었다.
평소 끔찍이 여기는 누이를 제 손으로 유배까지 보내놓고 가만히 넘어갈 세자가 아니었다. 무슨 꿍꿍이로 그리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필시 궐 안을 한바탕 뒤집을 터. 그때가 되면 모든 비난의 화살은 중전에게만 꽂힐 것이고 안빈은 그토록 염원해 온 최후의 일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안빈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스쳐 지난다.
잎새달 초순, 강원도. 감환으로 깊은 잠에 빠져있던 은명은 다리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감촉에 서서히 깨어났다. 눈을 뜨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조심조심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것이리라.
지난 일월,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김서율은 아무렇지 않게 비좁은 문간방을 차지해버렸다. 단출한 무명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지붕을 포함한 초가삼간의 외부를 수리하는 것. 어디선가 나타난 치경과 함께 하루 종일 뚝딱거리더니 겨울 내내 괴롭혀 왔던 웃풍이 방에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부뚜막에다 불까지 활활 지피니 방안이 어찌나 훈훈하던지.
[따뜻하시지요? 겨울이 지날 때까지 방에서 나오시면 아니 됩니다. 방이 추워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얼어붙은 은명의 손을 호호 불어주며 그가 다짐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그 약속을 지켜내었다. 부지런히 나무를 해왔고, 새벽에도 틈틈이 일어나 불을 꺼트리는 법이 없었다. 추운 바람을 가르고 생선도 끊임없이 잡아 상에 올렸고, 간간히 어디선가 꿩을 잡아오기도 하였다. 김서율 덕분에 강원도의 생활은 윤택해졌고, 최 상궁과 난이 또한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었다.
언제나 듬직한 사람이었지만 한양에서 내려온 그에게 뚜렷한 변화도 몇 가지 감지되었다. 은명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이다.
우선, 은명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굉장히 불안해하였다. 바깥일을 할 때를 제외하곤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는 비좁은 초가삼간 안에서 언제나 은명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말로 하는 애정표현 또한 거침이 없었다. 옆에서 서책을 보다가도 멍하니 은명을 들여다보며 민망한 말들을 서슴없이 매우 진지하게 쏟아내곤 하였다.
[참으로 어여쁘십니다. 새하얀 옥안에 눈도 성신처럼 빛이 나시고, 코랑 입술도 곱상하시고, 머리카락도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게 하나같이 전부 어여쁘십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해서 바느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그를 주시하였다. 그러면 그는 또 아무렇지 않게 다시 서책을 보기 시작했다. 한쪽 손으로 은명의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고서. 이후로도 그는 어마어마한 말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게 불쑥 불쑥 건네곤 하였다. 움찔거리던 최 상궁과 난이마저 이제는 그러려니, 일상으로 보아 넘길 정도로.
“이제 그만하십시오.”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앉자 은명이 목소리를 내었다.
“깨셨습니까? 제가 마마의 단잠을 방해하였나 봅니다.”
“아닙니다. 시원하고 좋습니다. 그래도 그만하십시오.”
오랜 시간 주물러 팔이 아플 터인데 그는 꿈쩍도 않고 계속 다리를 조물조물 거린다. 이것 또한 그의 커다란 변화 중 하나였다. 예전의 그였다면 저리도 스스럼없이 은명의 몸에 손을 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데 무슨 생각인지 은명의 팔다리와 손, 또는 치맛자락을 끊임없이 조몰락거렸다. 물론, 그 이상의 신체접촉은 꿈도 꾸지 않는 눈치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가족처럼 서로에게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바라보면 여전히 설레고 좋았지만 팽팽히 흐르는 긴장감 대신 끈끈하고 돈독한 애정이 덧대어진 것이다.
“그만하시고 이리 와서 손을 잡아 주십시오.”
그냥 두면 하루 종일 다리를 주무를 것 같아 은명이 먼저 손을 내민다. 그러자 서율은 입 꼬리를 빠르게 치켜 올리며 냉큼 머리맡으로 가서 은명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내 비썩 말라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공주의 손을 느끼며 가슴이 아릿해져 온다. 기이한 일이었다. 언제나 가까이 붙어 있음에도 공주를 볼 때면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는 게 목구멍이 뜨거워지곤 하였다. 솟구치는 아련한 감정에 서율은 가만히 은명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오늘따라 옥안이 더욱 맑아 보이십니다.”
내내 누워있어 몰골은 분명 엉망이었다. 하지만 은명은 그러려니 웃어넘긴다. 익숙해지기도 하였지만 농이라며 타박을 놓기에는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너무도 진지하였다.
“저는 이리 사는 것도 좋습니다. 마마께서는 어떠하십니까?”
“당신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듣기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라……”
더 이상 공주가 아니니 마마라 부르지 말라 하였건만 그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해서 은명은 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그가 좋아할 만한 다른 호칭을 생각해 보았다. 마음에 들었는지 예상대로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나간다.
“그럼, 부인이라 부를 수 있는 그날까지 우선은 당신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은명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힘주어 말을 이었다.
“스승님과 함께 할 수 있어 좋습니다. 매일매일 이리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웃을 수 있어 어느 때보다 마음도 편안합니다.”
절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시름에 잠겨 있지는 않을까, 공주를 마주하기 전까지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함께 지내며 지켜본 공주는 여전히 씩씩하였고, 한결같이 당당하였으며, 귀여울 만큼만 도도하였다. 봄이 왔음에도 쌀쌀한 기운을 못 이기고 이리 몸져 누워버리는 것 말고는.
“오늘 산에 다녀오실 것이지요?”
“예, 아직은 밤에 불을 더 떼야 할 것 같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의 낯꽃이 활짝 피어오른다.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 그는 은명이 들려주는 이 말을 특히 좋아하였다. 하지만 기분이 한껏 고조된 서율과는 달리 은명은 가슴 한쪽이 짠해지고 있었다. 그와 마주보며 빙긋 미소를 지으면서도 시선은 자꾸 거뭇해져 있는 그의 눈 밑으로 향하게 된다.
‘또 악몽을 꾸셨습니까? 무엇이 그리도 당신을 괴롭히는 것입니까? 혹 저 때문입니까? ……오늘은 제가 그 연유를 꼭 알아낼 것입니다.’
갑자기 찾아온 그를 은명은 말없이 받아주었다. 약속이나 한 듯 그와 함께 과거사에 대해 함구했고, 집에는 뭐라 말하고 왔는지, 관직은 어찌 되었는지, 한 번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앞으로의 일에 관해서도 알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 이 감정에 충실할 뿐. 하지만 한 가지, 그에 관해 결단코 물을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 언젠가 산속 민가에서 쓰디 쓴 목소리로 그가 말한 적이 있었다, 악몽 또한 병이 될 수 있노라고. 그동안 조용히 지켜본 결과 김서율은 분명 그 병을 앓고 있었다. 악몽이란 병마가 그의 몸과 마음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건강과 영혼을 야금야금 집어삼키고 있었다. 힘들어 하는 그를 아무도 모르게 지켜보던 은명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 결론을 내리고 그가 나무를 하러 간 사이 치경을 은밀히 불러들였다.
“마마……”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공주의 기별에 무슨 일일까 궁금해 했던 치경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너 또한 스승님께 여쭈었다. 다시 악몽을 꾸시는 게 아니냐고. 내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으니 피해 갈 생각은 말거라.”
“소인이 올릴 수 있는 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병은 감추는 게 아니라 하였다. 내가 몰랐으면 모르되 한집에 살면서 이미 알았으니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 병인 경우 원인부터 차근차근 짚어 나가야 하느니라. 대체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악몽을 꾸기 시작하신 것이냐?”
은명의 다그침에도 치경은 꿈쩍하지 않았다. 외모만큼이나 한없이 우직한 성정. 이대로는 그의 입을 열 수 없음을 은명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맥없이 물러날 은명도 아니었다.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스승님께 직접 여쭐 수밖에 없다. 물론 너만큼이나 융통성이 없는 분이시니 끝까지 함구하시겠지. 허나 나 또한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터. 최악의 경우, 나는 그를 쫓아낼 것이다.”
“제발 고정하십시오. 그런다고 나갈 분이 아니십니다.”
“몇날며칠 마당에 서서 버티시겠지. 나 또한 버틸 것이다. 해가 떨어지면 아직은 추운 날씨, 스승님께서는 쓰러지실 때까지 아니, 쓰러지신다 해도 마당에서 꼼짝도 안 하실 것이다. 네가 답을 하지 않으면 오늘 당장에 벌어질 일, 그리도 진을 빼놓고 싶은 것이냐?”
흔들리지 않던 치경의 눈가에 망설임이란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일말의 희망을 엿본 은명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욱 더 그를 몰아붙였다.
“혹 너는, 내게 자격이 없다 생각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다만 좌상 대감 댁의 매우 은밀하고도 사적인 이야기인지라.”
“내가 밖에다 좌상 댁의 일을 떠벌리기라도 한단 말이냐! ……모르겠느냐, 많이 괴로워하신다. 저리 내버려두었다간 언젠가 몸을 크게 상하실 것이다.”
공주의 말은 전적으로 옳았다. 몇 년 간 평온하시던 상전은 무슨 연유에선지 재작년부터 다시 악몽을 꾸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가 지켜본 결과 최근 들어 부쩍 심해진 듯 보였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그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대로 두었다간 몸에 큰 무리가 생길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차라리 공주께 도움을 청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말씀을 올린다 해도 공주께서 모든 것을 아실 수는 없다!’
마음을 굳힌 치경은 은명을 마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 도련님께서 괴한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으십니다.”
“습격?”
“좌상 대감의 큰 따님과 둘째 아드님은 세간에 알려진 대로 마진을 앓다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발언에 은명은 놀라움으로 두 눈이 휘둥그렇게 떠진다.
“허면 괴한의 습격을 받아 돌아가셨다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십일 년 전 여름, 병판 김대원의 사저.
병판의 삼남, 서율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자세로 앉아 서책을 보는 중이었다. 올해 열두 살, 아직은 어린 나이임에도 그 자세가 어찌나 바르고 꼿꼿한지 소년을 보는 이들마다 줄줄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딱 한 사람만 빼놓고.
“징그러워.”
“그 소리만 벌써 세 번째입니다. 들어오시려면 들어오시고, 가시려면 얼른 가주십시오.”
소년의 말에 활짝 열려있는 문밖에서 제법 어린 티를 벗고 있는 어여쁜 소녀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 열다섯, 병판의 외동딸 재희였다.
“애늙은이.”
“누님!”
참고 참았던 서율이 눈앞에 털썩 주저앉는 재희에게 제법 엄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이다음에 혼인을 하면 절대로 신동은 낳지 않을 거야.”
“낳고 싶다고 누구나 신동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애늙은이 같아. 하나도 안 멋있어. 귀엽지도 않아. 아이면 아이다워야지!”
어린 서율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내일은 유두절. 누님이 저러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너어, 멋진 사내가 되고 싶지 않아? 그러지 말고……”
“싫습니다.”
“싫어?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누님과 함께 꽃을 따러 가지는 않겠습니다. 여자아이처럼 꽃을 따다 띄우면서 멋진 사내가 되게 하여 달라, 빌라니요! 모순적이다, 생각지 않으십니까?”
재희의 간절한 눈빛을 얄미울 만큼 딱 부러지게 거절한 서율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서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일각 후, 침울한 표정의 서율은 평평한 소쿠리를 하나 들고 쫄래쫄래 재희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때마다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때마다 데리고 가 달라 조르지나 말거라.”
“이번 한 번 뿐이라는 그 약조, 꼭 지키십시오.”
재희는 동생의 투덜거림을 들으면서도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시키면 뭐든지 열심히 하는 아이. 저리 툴툴거려도 원추리가 피어 있는 곳에 다다르면 서율은 분명 부지런히 꽃을 따다 안겨줄 것이다. 누군가 그 뒤를 조용히 따르는 줄도 모르고 몸종들을 따돌린 두 남매는 토닥토닥 뒷동산을 오르고 있었다.
“아악!”
이 모든 게 꿈인 것만 같았다. 복면을 쓴 사내가 단도를 치켜들고 있는 것도, 여리디 여린 누님이 그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것도. 그러지 말고 가라고 어서 도망치라고 누님에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가슴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끔찍스런 통증에 정신이 가물가물하였다.
“어서 가! 너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다. 너는 도망치란 말이다!”
단도에 이미 피를 무친 사내는 재희를 힘껏 밀치며 외쳤다. 하지만 땅바닥에 고꾸라졌던 소녀는 아우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사내의 다리를 죽자 사자 부여잡았다.
“살려주세요, 제발 제 동생을 살려주세요!”
가슴에 자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서율을 보며 재희는 필사적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사내는 기어이 소녀를 떼어내고는 바닥에 힘없이 누워 피를 흘리고 있는 소년에게 단도를 깊이 박아버렸다. 눈을 질끈 감고서……. 그런데,
“으헉!”
아래에서 들려온 신음은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소녀가 제 몸으로 아우를 감싸고 등에 칼을 맞은 것이다.
“으흐흑…… 누님!”
서율은 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배꽃처럼 환하고 밝았던 누님의 얼굴이 고통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허헉… 서율아…… 너… 멋있…어 귀여워… 월류지… 같이 가고 싶어서… 거짓말 한… 거야. 떼써서… 미… 안…”
“누님……”
재희는 그대로 쓰러졌고, 서율은 힘없이 오열을 터트렸다. 멍하니 정신을 놓았다 서율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그 사내 역시 뜨거운 눈물을 끊임없이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그자는 대감의 사저에 숨어들어 둘째 도련님을 칼로 찌른 후, 아기씨와 셋째 도련님의 뒤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대감마님의 무사들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지평 나리 또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날 이후 나리께서는 악몽을 꾸기 시작하신 겁니다.”
치경은 말을 마치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얘기를 들으며 크게 놀라던 공주는 어느 순간부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질 듯 눈물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이러다 탈진하지 않을까 싶어 치경은 조마거리는 마음으로 걱정의 말을 하였다.
“괜찮으십니까?”
“괴한을 잡았느냐?”
“예. 현장에 흔적을 남겨놓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이더냐?”
“술에 취한 무뢰한이었습니다.”
치경은 대화를 얼른 마무리하고 궁녀들을 불러올 심산이었다. 그렇지만 이어서 들려온 공주의 말에 사지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거짓말……”
은명은 숨 막히는 아픔에 정신이 가마득해지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었다. 그저 본능적인 육감이, 과거의 복잡한 관계가, 떠오르는 맞물린 기억이, 그리도 무서운 추측을 끌어내고 말았을 뿐.
“……나의 외숙이 아니었더냐!”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치경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며 은명은 저 깊은 나락으로 끝도 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달물결 위로 꽃을 띄운 뒤 비감에 잠겨있던 그의 쓸쓸한 모습만이 생생히 떠오르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고 있는 어슬 무렵. 치경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마당에 서서 아련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모르실 거라 생각하고 올린 말씀이었다. 한데 공주는 그러한 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 오랜 세월 좌상 댁에서 철저히 함묵해온 사실을 단번에 알아채고 말았다.
‘하지만 어떻게?’
공주의 외숙인 서윤석, 그자는 순하고 점잖은 사람이었다. 최진욱 뒤에 자신의 부친이 있었음을 모르면서도 가문을 몰락시킨 좌상을 그저 원망에 찬 눈길로 바라보기만 했을 뿐, 악다구니 한 번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린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칠 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에 왜 그토록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열두 살의 상전은 형님과 누님의 장례가 끝난 뒤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기만 하였다. 그리고 그런 아들을 지켜보는 대감의 얼굴에서 치경은 처음으로 불안감이 떠오르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누워 있는 아들을 보며 막냇동생을 떠올리시는 듯하였다. 뛰어나게 영리했으나 충격으로 사경을 헤매다 정신을 놓아버린 불쌍한 사람.
그리고 그 즈음, 화경궁의 중전마마께서 갑작스레 서거하셨다. 그 소식을 접하던 대감의 얼굴을 치경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담담하면서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 차가우면서도 절망이 내려앉은 듯, 아무렇지 않으면서도 생살이 찢겨나간 듯 고통스러운 낯빛. 짧은 순간이 흐르고 평정을 되찾은 그분은 침묵하고, 또 침묵하였다. 그러나 중전마마의 사십구재가 끝나던 그날 밤, 대감은 치경을 포함한 뛰어난 무사들을 은밀히 불러들였다.
[그를 비롯한 그의 식솔들은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말거라.]
명을 받아 날래게 움직였지만 서윤석은 용케도 그의 장남을 빼돌렸다. 그러나 그들의 수중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행적을 찾아 거의 따라 잡았을 무렵, 뜻밖에 추적을 멈추고 귀환하라는 좌상의 명이 당도하였다. 그리고 치경은 그날 부로 김서율의 수행무사가 되었다.
“무사님, 정말 우리 마마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닙니까?”
최 상궁의 떨리는 목소리에 치경은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나 현재로 돌아왔다. 잠시 외출을 다녀온 사이 조금씩 기운을 차려가던 공주가 다시 몸져누워버렸으니 보모로서 어찌 근심스럽지 않을까. 그러나 절대로 새어 나가선 안 되는 일이기에 치경은 별일 아닌 듯 평온히 받아넘겼다.
“답답하시다며 바깥바람을 조금 쐬셨습니다.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힘드셨나 봅니다.”
문 밖에서 사납게 휘불리는 봄바람의 거친 소리가 들려온다. 은명은 그 바람소리를 들으며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십일 년 전 유두절의 아침을 듬성듬성 떠올려 보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건강하셨던 어머니가, 산간폭포로 소풍을 가자셨던 어머니가, 그날 아침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셨다. 외숙 또한 어디서 다쳤는지 오른손에 광목천을 칭칭 감고 어머니의 방 근처에 넋을 놓고 앉아계셨다. 혼이 빠져 버린 듯 초점 없이 벌게진 눈을 하고서. 병석에 누운 어머니는 그날부터 외숙을 찾지 않았고 외숙도 방안에 들어앉아 두문불출하였다. 가끔 정신을 차릴 때면 어머니도, 외숙도, 그저 힘없이 눈물만 쏟아내셨다. 그로부터 얼마 후,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고 말았다. 그리고 그 서찰…….
“나리!”
밖에서 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았는지 거의 탈진하여 기진맥진했던 은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마!”
갑작스러운 은명의 돌발 행동에 모두가 크게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막 나뭇짐을 내린 김서율 또한 버선발로 달려오는 은명을 영문도 모른 채 바라보기만 하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칠거리면서도 은명은 무작정 그의 손목을 잡아채 방으로 이끈다.
“마마, 고정하십시오.”
서율은 차분히 타일러보려 했지만 정인의 예기치 못한 행동에 말문이 완전히 막혀버리고 만다. 은명이 허겁지겁 달려들어 그의 옷고름을 푸르고 저고리 섶을 풀어헤치기 시작한 것이다.
“마, 마마!”
당황한 서율이 은명을 말려보는데 어찌할 틈도 없이 옷섶이 활짝 열리고, 무예로 다져진 탄탄한 그의 맨가슴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남아 있는 흉터.
“흐흑……”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은명은 입술을 바르르 떨며 온몸을 적셔버릴 듯 눈물을 쏟아내었다. 서율 또한 날벼락을 맞은 얼굴이었다. 공주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가슴 위에 사선으로 새겨진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상처. 듣지 않아도 어떻게 된 상황이지 알 수 있었다. 공주께서 그 일을 알아버리고 만 것이다.
“마마, 이것은……”
그러나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은명의 눈물이 너무도 서글퍼, 너무도 애달파, 그 또한 왈칵, 눈물이 솟구친 것이다. 하여 서율은 입을 여는 대신 그의 단단한 품안에 은명을 꼬옥 감싸 안았다. 서로의 온기가, 서로의 위로가, 절실히도 필요한 순간이었다.
아직은 사방에 고요가 내려앉은 어슴푸레한 새벽. 이미 잠자리를 빠져나온 아정은 부엌에서 바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상단 일이 바빠져 대방 어르신을 찾아뵙지 못한지 벌써 보름. 내일까지 모든 일을 마치고 모레 쉬는 날에는 상단이 아닌 공 의원 댁으로 가리라, 벼르고 벼른다. 그러기 위해서 아정은 식구들을 위해 아침을 차려 놓고 일찌감치 일을 하러 갈 생각이었다.
‘내일까지 전부 끝마쳐야 할 텐데……’
조바심이 이는 것을 다독이며 장을 뜨러 부엌을 나선 아정은 이내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나리!”
푸르스름한 미명 속에 준혁이 어딘가로 떠날 차비를 하고 서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네게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공주마마께 가십니까?”
준혁이 그대로 돌아설 것만 같아 아정은 급히 물었다.
“만석이네 가족을 먼저 찾아보고 그 다음에 강원도로 갈 것이다. 대행수가 네 뒤를 봐줄 것이니 힘든 일이 있거든 그를 찾도록 하여라. 돌아오는 대로 기별을 넣으마.”
“잠시 만요, 나리!”
돌아서는 준혁을 멈춰 세운 아정은 바쁜 걸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오더니 비단 꾸러미 하나를 내민다.
“공 의원님께 약재 값을 맡기고 남은 것과 공주마마께서 주신 패물입니다. 먼 길, 노자로 사용하십시오.”
“노자는 충분하니 네가 맡아 두어라.”
“그럼, 잠시 만요!”
아정이가 또다시 부엌으로 헐레벌떡 뛰어가자 준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난다. 숙영이가 살아 있다면 필시 저런 모습이었으리라. 이번에 아정이가 내민 것은 무명천으로 싸여진 두툼한 꾸러미였다. 점심으로 가져가려 만든 것을 내온 것이다.
“방금 만든 주먹밥입니다. 변변치 않지만 시장할 때 드십시오.”
“고맙구나. 이건 감사히 받으마. 내 다녀올 것이니 건강히 지내고 있거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안개 속으로 준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정은 오래도록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쓰러운 오라버니를 멀리 떠나보내는 누이의 심정이었다.
동살조차 비추지 않는 깜깜한 새벽. 조요한 빛이 쏟아지는 신월 아래, 잠에서 깨어난 은명이 밖으로 나와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바람. 허공을 굽이굽이 유영하다 온몸에 휘감기는 서늘한 바람이 상처를 보듬어 주러 온 어머니인 것만 같아 살갑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의 외숙과 그 식솔들이 도주한 것으로 처리된 것이냐?]
[상감마마께서는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일을 벌인 그 다음날 대감께서 찾아뵈었다, 들었습니다. 관노비가 되었다 하나 함부로 목숨을 해할 수는 없는 분들. 도주한 것으로 처리하는 대신……]
[좌상의 자녀들이 살해된 것을 영원히 덮고, 제륜 오라버니의 목숨을 구명한 것이로구나. ……한데 좌상께서는 어찌하여 오라버니를 놓아주셨을까? 좌상의 권세라면 조용히 처단하고 덮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인데.]
[소인도 자세히는 모르옵니다.]
치경과의 대화를 떠올리던 은명은 자연스레 어머니가 남긴 서찰의 구절이 떠올라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하찮은 이 한 목숨 내어 놓는다 하여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복잡한 고리를 끊어낼 방도가 전혀 없기에 이렇게밖에 사죄드릴 수 없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얽히고설킨 복잡한 고리…… 어머니…… 혹 서찰의 주인은 좌상 대감이었습니까?’
좌상 대감의 온실에 함초롬히 피어있던 꽃들이 떠올랐다. 화경궁의 후원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하나같이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꽃들. ……어머니를 떠올리며 심으셨던 것일까? 하지만 그는 어머니께 칼을 겨누었던 사람.
‘그분을 연모하셨습니까?’
쏴아아아- 쏴아아아-
답답한 은명이 속으로 크게 외쳐보지만 바람은 그렇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였고, 아니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만약 사실이라면 두 분께서는 어쩌다 그리 되었단 말인가. 외조부의 허망한 욕심이 오해를 낳고, 생이별을 하게 되었던 것일 수도. 김서율과 자신이 각각 다른 이와 혼인하여 서로의 가족을 죽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뒤죽박죽 모든 것이 뒤섞여 속이 울렁거리는데 바람 소리를 뚫고 그의 신음이 들려왔다.
‘악몽을 꾸십니까?’
[재작년부터 다시 악몽을 꾸기 시작하셨습니다.]
[제륜 오라버니를 만나고부터군. 헌데 오라버니를 어찌 알아 보셨을까? 두 분이 서로 만난 적도 없었을 것인데…….]
저도 모르게 그의 방문 앞까지 뛰어간 은명은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잠시 주춤거렸다. 보령에서 도망친 이유도, 한사코 저를 밀어내기만 했던 이유도, 이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와 마주하는 게 괴로우셨겠지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더 이상 고통스러운 과거의 잔상에 당신도, 저도, 휘둘리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마음을 다잡은 은명은 문을 열고 그가 누워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발을 들여놓았다. 잠들어 있는 순간까지도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사람. 그의 이마에 맺혀있는 물기를 닦아주고 은명은 이불 속 그의 옆자리를 파고들었다.
누군가 목을 조여와 숨을 쉴 수 없었다. 감감해지는 의식 속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영롱하게 빛나는 조그마한 물체. 숨 막히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는데 피부에 서늘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시원하게 숨통을 뚫어주는 한 줄기의 바람. 서서히 눈을 뜬 서율은 비몽사몽, 누군가 자신을 안고 있음을 느낀다. 사방이 그윽하여라. 고요한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다는, 맑고도 은근한 기운의 매화향이었다.
‘공주마마?’
“마마!”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황급히 몸을 떼려 하자 은명은 품안으로 그의 머리를 더욱 세차게 끌어안았다.
“쉬잇. 곧 돋을볕이 오실 시각입니다. 그때까지만…… 잠시라도 편히 눈을 부치십시오.”
은명은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토닥토닥 다독여주기도 하였다. 그 다정한 손길에 서율은 서서히 진정되어 간다. 이곳은 은애하는 여인과 오순도순 함께 지내는 한적한 초가삼간. 그의 목을 조르는 사내도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어린아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가슴 아픈 지난날이 너무도 서러워 서율은 은명의 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배시시 웃는 공주가 시리도록 어여쁠 때면 누님의 해맑은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돌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만 행복해지기에는 그리 보낸 누님과 형님이 너무나도 가엾고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공주에게 상처를 주었다. 오랫동안 모르는 척 아프게 하였다. 하지만 공주가 상처 입고 아파할수록 가슴 속에 멍울이 지는 건 그 자신이었다.
‘차라리 모든 걸 아시게 되어 홀가분합니다. 이제는 숨길 것도 없으니 더 이상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겠지요.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당신과 나, 우리 둘이서 말입니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바람이, 어머니가, 속삭이는 듯하였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억지로 모르는 척하지도, 잊으려 하지도 말라고. 때로는 아파하고 때로는 바람에 흘려보내며 혼자가 아닌 둘이서 극복해가면 되는 것이라고. 아련히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가 어머니의 속삭임과도 같아 은명의 눈에서 한 줄기 그리움의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풋향기가 산과 들을 뒤덮고 햇살마저 은혜로운 싱그러운 푸른달. 감미로운 바람을 맞으며 서율과 은명은 풀밭에 누워 한가로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조금의 틈도 없이 견고해졌고, 은명은 이곳에 유배를 왔는지 소풍을 왔는지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온 세상이 푸르고 푸르러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루 종일 그와 함께 속살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방안에서 그렇게 붙어 지내는 두 사람은 밖에서조차 내내 함께하였다. 그가 밭을 매러 가면 은명도 봄나물을 캐겠다며 쫓아가 온갖 잡풀을 뜯어오기 일쑤라. 최 상궁이 경악스러워하는 줄도 모르고 그에게 새참으로 먹이겠다며 정의도 내릴 수 없는 음식을 만들기도 하였다. 더 신통한 것은 김서율이었으니 최 상궁과 난이도 한 입 먹고 뱉어버린 그 음식을 그는 한 번도 남기는 적이 없었다.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새참이 식겠습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조금만 쉬었다가요.”
그의 한쪽 팔을 베고 누운 은명은 잔잔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최근 들어 그는 은명을 품에 안고 가슴 벅찬 입맞춤을 수도 없이 해오곤 하였다. 이렇게 사방이 트인 야외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산책을 하다가도, 밭일을 하다가도, 이렇게 한가로이 누워있다가도 느닷없이 다가선 그는 은명에게 열정적인 입맞춤을 마구 퍼부어댔다. 세상이 빙그르르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로.
하루하루 행복하고 꿈같은 나날이었지만 이대로 제 욕심만 채울 수는 없었다. 무조건 모르는 척 침묵하는 것이 상책이 아님을 깨달은 지금, 함께하는 미래를 위해 은명은 그의 삶에 관여하기로 하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상체를 일으킨 은명은 따뜻한 햇살 아래, 나른하게 누워 있는 그의 허리춤으로 바싹 다가가 앉았다. 무슨 할 말이냐는 듯 그가 시선을 들어 은명을 마주보았다.
“저는 이곳에서 잠시 안빈낙도하는 것일 뿐, 계속해서 이리 지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고단하십니까?”
그가 잔잔한 미소를 띠우며 물었다.
“신분 따위야 어찌 되어도 상관없지만 화경궁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이자 제가 눈을 감아야 할 곳. 그곳으로 반드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스승님께서도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도성으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서 저를 기다려 주십시오.”
“물론, 저는 돌아갈 것입니다.”
너무도 순순한 반응에 은명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이미 결심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때가 되면 갈 것입니다.”
“그게 언제인데요?”
“아직은 아닙니다.”
그는 은명을 제 가슴 위로 다시 끌어당기며 답했다. 말을 돌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진심인 것 같기도 하여 아리송하였다. 그래도 빈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 무슨 생각이 있을 터.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결론을 내리며 얌전히 그의 품에 기대어 눕는다. 그러더니 잠시 후, 은명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두 눈을 반짝이며 상체를 다시 일으켰다.
“정말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실은 제가 새로운 걸 만들어 보았습니다. 생선살을 다져 만든 것인데 맛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찌 생선을 다 만지셨습니까?”
“생선은 최 상궁이 다져 주었습니다. 아직은 징그러워서…… 하지만 그 외의 것은 다 제가 하였지요. 드셔 보시겠습니까?”
저 뿌듯해 하시는 모습. 손수 음식을 해 오시는 공주에게 어찌 감동받지 아니 할 수 있으랴. 다만 그에게도 마음의 준비라는 게 필요했다.
“예, 잠시 뒤에. 조금만 더 있다가 먹겠습니다.”
기분 좋은 미풍이 불어오는 깜깜한 어느 밤. 준혁은 은명이 안치되어 있는 유배지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공주께서 거처하고 계시는 곳. 근 반년 만에 이루어지는 재회라 마음이 조급했지만 우선은 멀리 떨어져 주변의 동태를 살펴야 했다. 처음 공주의 소식을 접하고 믿기지가 않아 그는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마당까지 허겁지겁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때 아정이가 말리지 않았다면 큰 사고를 쳤을지도 모를 일.
자신 때문에 고초를 겪고 있는 사촌 누이만 생각하면 준혁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기필코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고 말리라, 단단히 작심을 하고 있는 그였다.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데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하나가 아닌 둘. 일반인이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움직임이 가벼운 것으로 보아 무예에 능한 자들이 분명하였다.
‘나를 쫓는 것인가?’
조용히 표창을 꺼내 쥔 준혁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빠르게 던져버리고 질주를 시작한다. 하지만 용케도 그의 공격을 피했는지 저들은 금세 뒤를 따라붙었다. 그들이 턱밑까지 쫓아오자 준혁은 할 수 없이 검을 빼들고 과감히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런데,
탕-, 탕-, 탕-.
이 소리는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상대가 검을 빼들지 않은 것이다. 달빛 아래, 어렴풋이 보이는 인영은 어딘지 낯익기까지 하였다.
“……김서율?”
“기다리고 있었네.”
“……이얏!”
모든 것을 잃고 관노비가 된 가족들을 참혹하게 베어버린 좌상의 핏줄. 피가 거꾸로 솟구친 준혁은 온 힘을 내어 그에게 공격을 가했다. 검과 검이 맞닿았지만 김서율은 여전히 검집을 끼워둔 상태. 분노에 찬 준혁은 위협적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검을 빼! 나를 죽이지 못하면 네가 죽을 것이다!”
“나를 이길 수는 없네. 검을 내리게.”
“웃기는 소리.”
고함을 내지르며 준혁은 힘차게 검을 휘두른다. 그러나 유유히 공격을 피한 서율은 아물고 있는 그의 상처 부위를 정확히 가격하였다.
“으윽!”
“그런 몸으로는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네.”
준혁이 통증으로 몸을 떠는 사이 서율은 그의 오른 손을 가격해 검을 멀리 치워버렸다. 그리고는 치경에게서 물통을 건네받아 한 모금을 들이마신 후, 극심한 아픔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준혁에게 건네주었다.
“통증을 줄여줄 걸세.”
향긋하면서도 알싸한 향기가 퍼지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준혁은 술을 건네받아 벌컥 벌컥 들이마신다.
“청월관 근처에서 재회한 후 협상을 벌이던 그날, 자네가 경산부원군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술을 마시던 준혁은 꽤 놀란 얼굴을 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초반부터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하지만 어떻게……”
“자네가 목에 걸고 있던 그 거북 모양의 청보석 장식물.”
“그걸 어찌 알고 계신 겁니까?”
피비린내와 술 냄새가 원추리의 향기를 뒤덮고 정신을 잃어가던 그때. 숨을 쉴 수 없어 고통스러운 와중에서도 혼절하기 직전까지 눈에 보이던 물체가 하나 있었다. 괴한의 목에서 달랑거리는 거북 모양의 청보석 장식물.
다 잊었다고, 극복하였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날, 준혁의 목에서 달랑거리던 그 청보석을 보는 순간, 괴로워하던 누이가 떠올라 온몸에 조알 같은 소름이 돋아 올랐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걸 어찌 아신 겁니까?”
준혁의 채근에도 서율은 침묵한 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날이 풀리고, 공주가 안정을 되찾았음에도 오늘날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었던 이유. 그것은 오직 서제륜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가 있어야만 반격이 가능할 터. 양병수와 화경궁의 끄나풀, 그리고 조정의 배후 세력들까지, 공주를 저리 만든 자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이 손으로 반드시 쓸어버리고 말 것이다, 한양을 떠나오며 단단히 작심한 서율이었다. 서제륜을 만났으니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에 순식간에 전신이 화끈 달구어졌지만 서율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풀어야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군. 일단 치료부터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