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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장. 향몽(香夢) (14/21)

제 14 장. 향몽(香夢)

한낮에도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미틈달 초순. 은명은 최 상궁과 함께 화경궁 안채에서 새로 도착한 고운 비단을 살펴보고 있었다.

“마마, 은을 입힌 실로 이 아청색 비단에 매화를 수놓아 치마로 지으면 어떠하시겠습니까? 고상하고 기품 있어 뵈실 것이옵니다.”

“그럴까? 장옷을 만들어도 좋을 것 같은데. 자네들도 하나씩 지어 입고 남는 것은 아정이 옷 한 벌 해줘야겠다. 그 아이는 이 짙은 다홍색이…… 헉!”

아정이 얘기를 하던 은명은 갑자기 사색이 되어 들고 있던 비단을 내던지고는 한 곳에 모아놓은 종이들을 급히 뒤적거렸다.

“왜 그러시옵니까?”

“방금 여기 뭉치로 있던 파지들이 다 어디로 간 것이냐? 설마 아까 몽땅 가져 나간 것은 아니겠지?”

“그거라면 나인들이 태운다고 모두 가져나가지 않았습니까.”

“뭐라?”

은명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뛰쳐나갔고, 최 상궁도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속히 뒤를 쫓았다. 아정이가 오면 주려고 제륜에게 안부의 글을 쓰던 은명은 궁녀들이 비단을 들고 들이닥치자 파지를 모아놓은 곳에 서찰을 살짝 숨겨놓았다. 그 후 곱디고운 비단에 정신이 팔려 나인들이 파지를 들고 나가는데도 신경조차 쓰지 못했던 것이다.

제륜 오라버니, 평안하십니까.

저는 강녕합니다. 많이 보고 싶습니다.

한 번 만나러 와 주시겠습니까.

짧은 글이었지만 제륜이란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은명은 자신의 멍청한 실수를 자책하며 난이와 수비가 불을 지피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보았다. 파지들은 전부 땅바닥에 모아져 있었다. 아무도 손대지 말라, 명을 한 은명은 허둥지둥 헤집어 보지만 서찰은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았다.

“마마, 왜 그러십니까? 무엇을 잃어버리셨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가져 나온 파지들은 이것들이 전부인 것이냐?”

“예, 일부는 이미 태워버렸습니다. 중요한 게 있었던 것입니까? 혹, 지평 나리께서 보낸 서찰이 섞여 있었는지요?”

난이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되묻자 은명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동작을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답했다.

“이미 태웠나 보구나. 되었다, 중요한 건 아니야. ……후우.”

십년감수한 은명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대체 정신을 어디에 내어놓고 사는 것인지. 그러고 보면 제륜 오라버니뿐 아니라 김서율을 만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에게 청혼을 받은 그날 이후, 은명은 병환을 핑계로 강론을 중단했고 문안을 오고 싶다는 그의 청도 거절하였다. 혼인을 받아들일 수도, 거절을 할 수도 없었기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자 서율은 그 뜻을 받아주는 대신 꼬박꼬박 서찰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에게서 서찰을 받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지만 얼굴을 마주할 수 없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괴로운 일이었다.

“후우-.”

“땅이 꺼지겠습니다.”

갑갑함에 저도 모르게 연거푸 깊은 한숨을 몰아쉬는데 정한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런 기별도 없이 화경궁에 제멋대로 들이닥치다니! 그러고도 느긋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은명은 헛웃음마저 터진다. 안 그래도 하루가 길어 지루하던 참에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이 반갑기까지 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매화차를 음미하는 정한군의 얼굴에서 행복감이 넘쳐흐른다. 보료 위에 앉아 그의 여유로운 모습을 바라보는 은명 또한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생뚱맞게 칩거에 들어가신 겁니까? 한창 좋을 때 몰아붙여 목표한 바를 이루셔야지요.”

정한군의 염치없는 질문에 은명은 미소를 지우고 황당해하는 어조로 대꾸하였다.

“참으로 뻔뻔하십니다. 감히 공주에게 사람을 붙여놓고 어찌 이리 당당하게 질문까지 던지십니까?”

“처음부터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지평과의 일이 궁금하여 그런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죽을죄를 지어놓고도 반성은커녕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냉각기가 찾아온 것입니까, 그게 아니면……”

“그가 혼인을 청하였습니다.”

개구진 얼굴로 이죽거리던 정한군은 꽤 놀랐는지 순식간에 두 눈이 동그래졌다가 제자리를 찾는다.

“이거야, 원…… 크크, 마마께서는 진정으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를 의빈으로 주저앉히겠다, 선언하시더니 정말로 그리 만드시다니요.”

은명의 얼굴에 서글픈 기운이 살몃살몃 번져나갔다. 그러한 변화를 놓치지 않은 정한군은 조금 더 자극적인 말로 누이의 신경을 건드려 보기로 한다.

“지평 또한 놀라운 사람입니다. 형벌 같은 고약한 삶을 스스로 짊어지겠다, 나서다니요. 그럼 이제 그가 망가지는 몰골을 구경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후후후, 제가 그런 말까지 하였습니까? 그러고 보면 저자에 떠도는 저에 관한 소문은 전부 사실이었나 봅니다. 포악하고 안하무인인데다 교만한, 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재미있다는 듯 웃고는 있었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은명의 눈에는 조금씩 눈물이 괴어오르고 있었다. 화경궁에 틀어박혀 시름에 잠긴지 어언 한 달. 그 긴 시간 동안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혼자서 속을 끓이다 보니 신경은 쇠약해졌고, 초조함과 예민함은 극에 달해 버렸다. 스스로도 감정을 제어하기가 어려울 만큼.

“저의 본모습을 알게 되면 그가 치를 떨며 끔찍해 하겠지요? 후훗, 괜히 혼인하였다 추한 모습을 들키느니 그냥 이대로 그의 가슴을 찢어놓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뛰어난 사람이니 의빈으로 발목이 잡히지 않는다면 재상의 반열까지도 오르지 않겠습니까. 저는 한때 그를 홀리던 왕실의 여인으로 야사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후후후……”

은명의 횡설수설은 도를 넘어서더니 결국에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가 옳았다. 애초에 두드리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다.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해서 마마께서는 이대로 야사의 주인공이 되려 하십니까?”

급작스럽게 전개된 지금의 상황이 꽤 당혹스러울 만도 한데 정한군은 조금도 놀라거나 황당해하지 않았다.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시종일관 차분하게 은명을 상대해주고 있을 뿐이다.

“한데 말입니다. 그에게 직접 물어는 보셨습니까? 마마와 함께하는 것보다 조정에 남아 재상의 반열에 오르고 싶다, 그가 한 말이었습니까?”

“그건…….”

“마마께서는 지금 지평의 뜻과는 상관없이 혼자서 그의 미래를 결정지으려 하시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한다고 하는 일이 때론 당사자에게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어찌 모르시는 겁니까? 두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 과연 무엇일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한량처럼 굴며 언제나 재미만을 추구하던 그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단 말인가. 평소 볼 수 없었던 낯선 모습에 은명은 고개를 들어 멍하니 정한군을 주시하였다.

은명이 새삼 놀라워하는 것도 모르고 정한군은 또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한창 복잡해지고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더 바빠지는 것인가? 앞으로 이 아이를 어찌 한다……’

이틀 뒤, 중궁전.

‘기어이 공주에게 혼인을 청하셨습니까!!’

‘끝내 공주를 택하시다니요. 집안도, 미래도, 전부 던져버릴 생각이신 겁니까!’

화경궁에 심어 놓은 궁녀가 다녀간 뒤로 중전은 붉어진 눈에 눈물방울을 떨어트리며 노여워하고 있었다. 곱고 단아하게 미소 짓던 예쁜 얼굴은 사라지고 분노와 절망, 보기 흉한 집착으로 얽매인 어리석은 여인만이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어떠한 일에도 이성적으로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 이 나라의 국모였지만 중전의 나이 이제 겨우 열아홉. 자신의 위치와 역할보다는 오랫동안 묵혀왔던 연정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아직은 미숙한 나이였다. 안빈이 들어와 자리를 잡는데도 중전은 오로지 자신만의 감정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마마, 곧 있으면 떠나야 할 시간이온데 어찌하여 옥루를 보이고 계시옵니까? 어디가 불편하시옵니까?”

“공주가 싫습니다.”

오늘은 금상이 비빈들과 함께 온천으로 행차하기로 되어있는 날. 분주히 차비를 하여도 모자를 판에 중전이 넋을 놓고 앉아만 있으니 보다 못한 지밀상궁이 안빈에게 도움을 청하였던 것이다. 득달 같이 달려온 안빈은 중전의 대답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참으려고 했습니다. 누르려고도 하였습니다. 헌데 참아지지가 않습니다, 눌러지지가 않습니다! 흐흑…… 궐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을 원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마마, 말소리를 낮춰주십시오. 듣는 귀가 있을까 두렵사옵니다.”

안빈이 문 쪽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지만 중전은 눈물을 닦아내며 엄청난 말을 뱉어내었다.

“공주가 도주한 경산부원군의 손주와 내통을 하고 있답니다.”

“예에?”

안빈은 소스라치게 놀랐고 중전은 차가운 눈빛을 번뜩이며 고개를 단호히 치켜들었다.

“일국의 공주가 국법을 어기고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으니 지엄한 왕실의 체통이 바닥까지 떨어지게 생겼습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공주를 눈앞에서 치워버려야겠습니다. 알려주십시오,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붉어진 중전의 눈에 이성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언젠가 다른 인연을 만나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참하고 어여쁜 안사람과 그를 닮은 아이들. 얼마든지 참고 그 모습을 보아줄 용의가 있었다. 그렇지만 공주는 아니었다. 제 손으로 곱고 아름다운 여인을 뽑아 김서율과 짝을 지어줄망정 공주와 그가 이어지는 꼴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보지 않을 것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서율은 급작스럽게 중궁전에 불려와 잠시나마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만큼 나뭇잎들이 울긋불긋 물이 올라 곱기도 하였다. 단풍이 드는 줄도 모르고 얼마나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인가.

곧 있으면 사직에서 물러나야 할 몸. 행궁 습격 사건과 진상품 도난 사건만큼은 직접 매듭짓고 싶은 마음에 조금의 여유도 없이 강행군을 이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 바람에 본의 아니게 공주의 칩거를 너무 오래 방치해 두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지만. 공주가 떠오르자 옅은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오는데 저만치 궁녀들을 물린 중전이 홀로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시기에…….’

언제부터인지 중전을 마주하는 게 불편했지만 서율은 신하된 도리로 마음을 다해 예를 표했다.

“평안하십니까, 중전마마.”

“어서 오세요, 지평. 예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목소리가 이상해 고개를 들어본 그는 울음기가 남아있는 중전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조금 후에 전하를 뫼시고 온천으로 향하게 되어 있어 본론만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때나마 그의 지어미가 되는 꿈에 가슴을 두근거렸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제 입으로 직접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오게 되리라고는.

“이 사람이 지평의 짝을 찾아드리고자 합니다. 홍문관 대제학의 삼녀 박혜원. 가문, 외모, 성품,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도성 최고의 규수이지요. 지평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난데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너무도 황당하여 입도 떼지 못하던 서율은 어이없는 기색을 감추고 재빨리 선을 그었다.

“소신은 따로 생각해둔 바가 있습니다.”

“곧 저희 어머니께서 정경부인을 찾아 뵐 것입니다. 좌상 대감께는 제가 따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마, 저는 이미 청혼을 하였고, 그 사람의 대답을 듣는 즉시 정혼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말씀은 감사하오나……”

“공주는 안 됩니다.”

말허리를 싹둑 잘라버리는 중전의 사늘한 말에 서율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와의 일을 어떻게 알고 계신단 말인가.

“금상께서 그 혼인을 허하실 것 같습니까? 좌상께서 공주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혼인이 이루어지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서율은 확신을 담아 힘주어 말했다. 중전께서 이미 알고 계신다면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었다.

“전하께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청할 것이고, 아버님도 끝까지 설득하여 공주마마를 반드시 소신의 내자로 들일 것입니다. 공주께서 마음을 다치실까 염려되어 이러시는 거라면 조금도 심려치 마십시오.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화살이 되어 중전의 심장을 쏘아대고 있었다. 저와 혼담이 오갈 땐 시종일관 무관심으로 응대해 절망감을 안기더니 공주와는 어쩜 저리도 적극적일 수 있단 말인가. 얄궂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서율이 조금도 미워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든 분노와 원망은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공주에게로만 향하고 있을 뿐.

‘그리도 좋으십니까? 이래도 계속 공주를 연모할 수 있겠습니까?’

싸늘하게 식은 중전이 차가운 목소리로 또박또박 엄청난 사실을 입에 올렸다.

“김서율을 의빈으로 만들어 형벌 같은 삶을 살게 하겠다.”

그의 얼굴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어지자 중전은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몰아붙였다.

“누가 한 말인지 아십니까?”

“……”

“공주가 정한군을 앉혀놓고 그런 선언을 했었답니다. 지평께서 망가지는 몰골을 옆에서 찬찬히 구경하겠다면서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제 외조부를 닮아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철부지가 바로 공주입니다. 앉아서 그런 작당이나 하는 공주에게 오라버니께서 놀아난 것이란 말입니다!”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가슴이 내려앉고 사지가 떨려와 서율은 입을 닫고 엄청난 충격에서 헤어 나오려 발버둥을 쳤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에서, 부르르 떨고 있는 그의 주먹 쥔 손에서, 중전은 김서율이 감정적으로 휘청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이것으로 그도 공주에게 오만 정이 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그와 공주의 혼인만큼은 막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한참의 침묵 후 나온 그의 대답은 중전을 또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상관없습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중전은 믿기지가 않아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소신에게는 그것이 형벌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요, 원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삿된 마음을 품은 공주가 괘씸하지도 않으십니까? 차라리 다른 이와 혼인을 하십시오. 조선 최고의 신붓감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마마께 이 사실을 고해바친 자가 누구입니까? 공주마마를 탓하기 전에 그 진위 여부부터 가려야 할 것입니다.”

방울방울 이슬이 지던 중전은 흠칫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투는 청을 하고 있었으나 중전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날카로운 의심이 배여 있었다.

“이 일을 고자질한 사람은 분명 화경궁의 궁녀일 터. 공주마마를 성심성의껏 모시지는 못할망정 함부로 입을 놀려 감히 상전을 음해하려 하다니요! 이는 왕실을 능멸하는 행위입니다.”

“오라버니……”

“이번 일은 절대로 간과하지 않겠습니다. 제 손으로 관련자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반드시 치르도록 할 것입니다.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소신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서율은 예를 올린 뒤 쌩하니 돌아서 버렸다. 걷고는 있지만 발바닥이 땅에 닿는지 안 닿는지 감각마저 사라진지 오래였다. 머리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솟구치고 심장은 그대로 터져버릴 듯 격하게 뛰어 올랐다.

혼인이란 여인에게 특히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 바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공주께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시간을 드려야 한다, 생각했었다. 해서 병을 핑계로 화경궁에 꽁꽁 숨어버렸을 때에도 그 뜻을 존중하고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참을 만큼 참아주었으니 오늘은 기필코 공주를 찾아가 끝장을 보고야 말 것이다. 서율의 걸음은 더욱 더 조급해지고 있었다.

눈만 보일 정도로 장옷을 깊이 뒤집어쓴 은명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좁은 골목에 숨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틀 전, 안부 서신을 잃어버린 은명은 직접 찾아뵙겠다, 아정이를 통해 제륜에게 전갈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영수와 영재를 보러 간다는 핑계로 최 상궁을 화경궁에 떼어 놓고 난이마저도 중간에 따돌린 다음 힘들게 찾아온 길이었다. 두 번 반복하기는 어려운 과정.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꼭 오라버니를 뵈어야 했다.

‘난이와 무사들이 알아채기 전에 빨리 오셔야 할 텐데.’

“마마!”

얼마나 기다렸을까, 말 그대로 아주 곱상하게 생긴 젊은 청년이 은명에게 다가오며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나 깜깜한 밤, 흐릿하게만 보았던 얼굴. 그동안은 몰랐지만 이렇게 보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낯익은 얼굴이었다.

“대범하시다 칭찬을 해드려야 합니까? 마마의 무모함에 감탄이 나올 지경입니다.”

“늘 어둠 속에서만 뵙질 않았습니까. 이렇게 밝은 햇살 아래서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환한 곳에서 뵈오니 정말 외숙을 닮으셨습니다. 이제야 정말로 저를 업어주시던 그 오라버니를 찾았다는 게 실감이 납니다.”

은명은 뭉클하여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언제쯤이면 오라버니와 이렇게 밝은 곳에서 편히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차라도 한 잔 마시며 그동안의 일들을 천천히 들어보고 싶습니다.”

“곧 그런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헌데 어디를 가십니까? 차림이……”

“마마를 뵙고 도성 밖 창고를 둘러보러 갈 예정입니다.”

“하여 상단이 그리 텅 비어있었던 것이로군요.”

상단 본관이라면 응당 사람들로 북적거릴 거라 예상했었다. 그래서 이곳에 숨어서 혹시라도 눈에 띌까 얼마나 경계를 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살펴보니 단단히 조심했던 게 민망해질 정도로 상단은 한적한 모습이었다.

“그래서가 아닙니다. 실은……”

생글생글 웃으며 준혁의 말을 듣고 있던 은명은 갑자기 사색이 되어 장옷을 더 깊이 쓰고 준혁의 옆으로 딱 달라붙었다. 무슨 일인가 하여 준혁이 돌아보니 저 멀리, 공주의 궁녀와 무사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오라버니, 저는 이제 가야 합니다. 이거 받으시어요.”

은명은 품 안에서 종이 꾸러미를 꺼내 준혁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의주에 있는 식구들에게 보내는 서신입니다. 대신 전달하여 주십시오. 가능하면 답장도 꼭 받고 싶습니다.”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준혁은 서찰을 재빨리 넘겨받고 편안히 웃어 보였다.

“얼른 가보십시오. 후에 다시 얘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리 뵈어 정말 좋았습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시어요.”

은명은 준혁에게 예쁜 미소를 남기고 총총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 울상이 된 난이에게로 향했다. 공주가 무사히 호위무사들에게 둘러싸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준혁은 한숨을 내쉬며 서찰로 시선을 옮기는데,

“나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양병수의 수족으로 준혁이 늘 경계하고 조심하는 차 행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행수가 돌아온 것이냐?”

“아닙니다, 대행수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도방은 대체 무슨 일이기에 아침부터 사람들을 죄다 모아선…… 아니다. 허면 누가 따라올 것이냐? 네가 갈 것이냐?”

“도성 밖에 임 행수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임 행수는 별다른 특징 없이 평범한 자였으니 눈앞에 있는 자와 함께 가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음흉하고 능글맞은 차 행수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준혁은 겉으로 온화한 미소를 띠우며 수고의 말을 잊지 않는다.

“수고했다. 따라올 것 없으니 면포전으로 돌아가 있거라.”

준혁이 자리를 떠나자 차 행수는 저 멀리 흐릿해지는 공주를 슬그머니 쳐다보며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띠었다.

“저분이 공주마마이신가? 곧 벼락을 맞게 생겼구만 아무것도 모르시는구나, 쯧쯧.”

히이이잉-.

곧이어 준혁의 출발을 알리는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공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예, 대방 어르신께서도 안녕히 가십시오, 영원히 말입니다.”

온천으로 향하는 임금의 행렬이 있었기 때문인지 도성 안은 구경꾼들로 보통 때보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틈을 빠져나온 준혁은 성문을 벗어나 한적한 길로 접어들자 빠르게 말을 몰았다. 한참을 달려 약속장소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저 앞에 익숙한 인영 두 개가 튀어나와 급히 말고삐를 당긴다.

“안녕하십니까, 대방 어르신. 오랜 만에 인사 올립니다!”

“너, 만석이가 아니냐!”

도성 밖에서 소작을 하며 근근이 먹고 사는 박 노인과 그의 열두 살 난 손자, 만석이었다. 작년 여름, 준혁은 다 죽어가는 만석을 등에 업고 의원에게 빌고 있는 한 사내와 박 노인을 우연히 목격한 적이 있었다.

값을 치를 형편이 안 돼 진료를 거부당하는 모습이 어찌나 측은하던지. 어릴 적 혈혈단신으로 사경을 헤매야 했던 과거가 떠올라 곧바로 의원에게 돈을 주고 맥을 짚어보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이의 상태가 안정 되자 의술이 뛰어난 공 의원에게 데리고 가 끝까지 치료를 받게 해주었다. 그렇게 죽어가던 아이가 이제는 건강을 되찾아 그에게 아는 척을 해온다. 그럴 때마다 준혁은 기특한 마음에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보내주고 있었다.

“여기는 어쩐 일인가?”

“상감마마 행차 행렬을 보고 싶다고 이 녀석이 하도 조르는 바람에 나왔습니다.”

“고운 항아님들을 아주 많이 보았습니다! 저기 보십시오, 저기! 아직도 보입니다.”

박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이 하고 싶어 들썩거린 만석은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행렬의 꼬리부분을 가리키며 신이 난 모습이었다.

“그래, 좋았겠구나.”

“대방 어르신!”

헤헤거리는 만석에게 맞장구를 쳐주고 있는데 임 행수가 도착했다. 시간이 빠듯했던 준혁은 박 노인을 내려다보며 빠르게 말을 전했다.

“창고에 가는 길이니 오후에 인편으로 약재 몇 가지를 보내 주겠네.”

“매일 이렇게 신세만 져서 송구스럽습니다.”

“남아돌아 주는 것이니 부담스러워하지 말게. 다음에 또 봄세!”

준혁은 박 노인과 만석의 배웅을 받으며 말을 세차게 출발시켰다. 그렇게 임 행수를 대동해 한참을 달려 땀이 슬쩍 차오를 때쯤, 뒤에서 무언가 바람을 가르며 날카롭게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좋지 않은 예감에 뒤를 돌아보려는데 왼쪽 어깨 뒤편에 불로 지지듯 숨 막히는 통증이 퍼져나갔다.

“허억!”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준혁이 말 머리 위로 털썩 엎어져버린다. 그런데 모든 것을 지켜보았을 임 행수는 그대로 준혁을 추월해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양병수 이 개자식, 기어이……’

뼈가 바스러지는 고통에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사이 뒤에서 또다시 바람을 가르며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화살이 한 두 개가 아닌 것 같았다. 준혁은 끔찍한 통증을 참으며 힘차게 말을 몰아 아슬아슬 공격을 피했지만 보나마나 이중 삼중으로 살수들을 배치해 두었을 것이다.

‘조심한다고 경계를 해왔음에도 어이없이 당하고야 말다니!’

실로 한심스러웠으나 일단은 살아야 했다. 준혁은 오른편 길 가장자리 아래로 넘실넘실 굽이치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위험하긴 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모 아니면 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은 쪽을 택하는 수밖에.

결심을 굳히고 길가로 바싹 붙어 달리던 준혁은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되려는 순간, 말을 버리고 과감히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험준한 낭떠러지 밑, 유유히 흐르는 시퍼런 강물 속으로 쏜살같이 뛰어든 것이다.

촤악-.

말에서 뛰어 내린 살수들은 준혁이 사라진 곳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활을 쏘아대었다. 그러나 화살들은 힘없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만 할 뿐 강물 속에선 어떠한 낌새도 나타나지 않았다.

“목표물은 화살을 맞은 상태라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부터 이 근방 강가를 전부 수색하도록 한다.”

“예!”

왼쪽 뺨 위로 흉측한 칼자국이 나 있는 석칠은 수하들에게 명을 내린 후 싸늘한 눈으로 준혁이 사라진 강가를 내려다보았다.

해야 할 일들을 미친 듯이 몰아서 끝내버린 서율은 집으로 돌아와 외출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의빈으로 만들어 형벌 같은 삶을 살게 하겠다. 강론 초반, 독기를 품고 있던 공주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았을 말이었다. 물론, 그것이 진심일 리 없었다. 맹랑한 듯 보여도 알고 보면 누구보다 마음이 여리신 분. 문제는 공주께서 의빈이란 자리를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시다는 점이었다. 형벌이라 칭할 만큼 끔찍하게 여기는 삶을 함께하자 승낙할 리 없었다. 한 달 내내 칩거하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으리라.

집에 들어와 잠시 앉아보지도 못하고 서율은 화경궁을 향해 또다시 대문을 나섰다. 오늘은 혼사 문제를 깨끗이 매듭지을 작정이었다. 공주와의 관계를 만천하에 터트리고 복잡하게 얽혀 드는 꼬리들 또한 확실히 정리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대문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와 몇 발짝 걸음을 떼었을 때 서율은 별안간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마마.”

한 달 내내 꽁꽁 숨어있던 공주가 도자기 같이 매끄러운 얼굴에 특유의 도도함을 담고 서율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을 내리셨다.’

원하는 답도, 받아들일 수 있는 답도, 오직 하나뿐이었다. 내심 긴장한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한가로이 지켜만 보고 있던 은명이 또랑또랑 명을 하였다.

“조용한 곳으로 안내하여 주십시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도련님!”

황토로 지어진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흙을 만지던 노복 하나가 서율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쌀쌀한 가을임에도 따스한 기온이 유지되고 있는 이곳. 농익은 낙엽의 향취 대신, 달보드레한 꽃향기가 퍼지고 있는 이곳은 좌상이 공을 들이고 있는 개인 온실이었다.

“잠시 이곳을 비워주게.”

“예.”

종복들이 나가는 사이 은명은 한적한 온실 안을 거닐며 꽃구경에 열중하였다.

“좌상께서 이런 취미가 있으셨군요. 국화와 난은 그렇다 쳐도 얼음장 같이 차가우신 분께서 이런 꽃들을 좋아하시다니요. ……그런데 이 꽃들, 화경궁의 후원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보이지 않으십니까?”

사뿐사뿐 꽃들 사이를 거닐며 때때로 기분 좋게 향기를 들이마시는 공주의 모습이 마냥 태평하기만 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서율이 먼저 입을 떼었다.

“이제 우리 둘 뿐입니다. 긴히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일전에 제가 월류지에서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상대를 위해 감추고 자제하는 이상한 배려 따위, 하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한 발 한 발 다가와 눈앞에 선 은명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하셨습니까?”

“거의 그럴 뻔하였습니다. 생각보다 제가 여리고 착한 사람이지 뭐겠습니까?”

서율에게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찌 그런 말을 저리도 진지하게 하신단 말인가. 너무도 어이가 없었지만 서율은 끝까지 가보기로 하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시는 것인지.

“하여 여리고 착한 생각이라도 하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거의 그럴 뻔하였다고. 하지만 결국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자니 죽을 때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 너무도 커 눈도 감지 못할 것 같았거든요. 죽기 전에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는 저의 결심, 꼭 지킬 생각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단호하고 고집스러운 저 표정. 서율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공주가 결심을 굳힌 것이다. 그토록 바라고, 듣고 싶었던 그 결심을.

그에게 가까이 다가선 은명은 국운을 짊어진 장수마냥 위엄이 서린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정녕 의빈이 되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랬다면 청혼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주의 치마폭에 싸여 대의를 져버렸다,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실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 아니니 연연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후손들이 기억하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에 김서율이란 석 자는 영원히 회자되지 못 할 것입니다.”

“죽은 후의 일이 알게 무엇입니까. 저에게 중요한 건, 숨 쉬고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입니다.”

마치 질문을 던져주길 기다렸던 사람처럼 그의 대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보일 듯 말 듯, 눈가에 물기가 차오른 은명은 한동안 그를 주시하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다시 한 번 그의 다짐을 받는다.

“지금 하신 말씀, 절대로 잊으시면 아니 됩니다.”

“물론입니다.”

“저에게 최선을 다하십시오. 이십 년 후에도, 사십 년 후에도, 늘 한결같아야 합니다.”

“언제나 그리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시면……”

은명은 그의 한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며 말을 이었다.

“저의 낭군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길고 긴 고민 끝에 내린 가장 이기적인 결론. 이것은 또한 두 사람 모두를 위한 최상의 결론이기도 하였다.

“당신께서 후회하지 않으시도록 제가 평생을 받들어 모시며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여쁜 아내가 되어 드릴 것입니다.”

공주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이제와 보니 다 부질없는 생각들이었다. 그의 여인은 품안을 벗어나 속을 썩이더라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와 당당히 행복을 꿰차는 사람. 이러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 생각하니 서율은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차 차올랐다.

“대답 안 하십니까?”

“해야지요.”

그는 대답과 동시에 은명의 머리를 끌어당겨 입술을 삼켜버렸다.

“흐읍.”

한 달 동안 참아온 마음을 모두 풀어버리기라도 할 듯 그는 성급하게 정인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말캉하고 따뜻한 촉감이 입안 곳곳을 헤집으며 은명을 자극해온다. 깊고 농밀한 입맞춤이 지나치게 뜨거워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지만 그에게 머리와 허리가 단단히 붙잡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퍼붓는 대로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는. 홧홧한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어질 때쯤, 그의 움직임이 나긋나긋 부드러워지더니 천천히 입술을 떨어트렸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습니까?”

가까이서 불어오는 그의 숨결에 은명은 눈앞이 어릿어릿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도도함을 잃지 않는다.

“일단은 되었습니다.”

“이 길로 당장 저하를 찾아뵙겠습니다.”

“저도 같이 갈 것입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느니 눈앞에서 확인하는 게 낫겠지요.”

얼굴이 한껏 달아올라 있는 공주가 여유로운 척 구는 양이 귀여워 서율은 허리를 더 바짝 끌어안으며 엄살을 피웠다.

“저하께서 제게 불호령을 내리시거든 옆에서 편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시어요. 스승님께 함부로 하는 사람은 오라버니라 하여도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환히 미소 짓던 서율은 아직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의 의도를 알아 챈 은명 또한 부끄러워하면서도 살짝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받아들인다. 닿을 듯 말 듯, 두 사람의 입술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데,

“마마!”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호위무사 하나가 안으로 뛰어 들었다. 찰싹 붙어있던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어트린다. 무사의 난입이 당황스러웠지만 웬만큼 급하지 않은 이상 저리 할 수 없었다. 서율은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무사에게 차분히 연유를 묻는다.

“무슨 일인가?”

“도성 안이 크게 술렁이고 있습니다. 중전마마를 암살하려던 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암살? 그게 무슨 소리인가?”

경천동지할 소식에 서율은 크게 놀라며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행차 행렬이 도성 밖을 나선지 얼마 안 돼 화살 공격이 있었답니다. 연이 기울어지고 중전마마께서 화살을 맞아 큰 난리가 났었던 모양입니다.”

“전하께서는? 전하께서는 무사하신가?”

“자세한 건 모릅니다. 중전마마의 이야기만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상께서는 무사하시다는 말일 수도. 하지만 확인하기 전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잔뜩 긴장하여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두 손을 맞잡고 있던 은명은 서율을 올려다보며 초조하게 물었다.

“대체 누가 감히…… 혹, 저번에 행궁을 덮쳤던 그자들일까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마마께서도 위험할 수 있으니 가능한 한 빨리 화경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서율과 무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은명을 가마에 태우고 곧바로 출발시켰다. 황망한 상황에 정신이 없었던 은명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자 바깥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게 불안하였다. 그래서 살며시 창을 열어보는데 밖에서 누군가 쾅 소리가 나도록 도로 닫아버린다. 이어서 김서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열지 마십시오.”

행궁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다소 무섭기는 하였으나 그가 곁에 있으니 안심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가마 안에서 시간이 꽤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끼익-.

화경궁에 다다랐는지 육중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착한 건가 싶어 은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밖에서 또다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저는 일단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 스승님!”

그대로 돌아간다는 말에 가마 안에서 큰소리로 그를 불러 보았지만 대문이 닫히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가마가 땅 위에 멈춰지고 은명이 서둘러 내려 보았으나 대문은 이미 굳게 닫혀버린 상황. 잠시 멍해있던 은명은 곧바로 정신을 수습하여 최 상궁 옆에 얌전히 서 있는 수비에게 긴급히 명을 내렸다.

“수비 너는 지금 당장 궐에 좀 다녀와야겠다. 중전마마께서 큰일을 당하셨다 하니 어디를 얼마나 상하셨는지, 전하께서는 무사하신지 알아갔고 오너라. 빨리 다녀와야 한다.”

“예, 마마.”

수비가 입궐 준비를 하러 총총걸음으로 사라지자 은명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중전의 소식에 크게 놀랐던 것일까, 은명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안해지고 있었다.

“그놈을 찾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왔단 말이냐? 무슨 일이 있어도 강준혁 그놈을 꼭 찾아와야 한다. 중전마마를 시해하려 했던 대역 죄인이란 말이다!”

청나라 양식을 본떠 좌식으로 꾸며진 준혁의 집무실. 스스럼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양병수가 주저 없이 대방의 자리를 차지하며 뒤따라 들어오는 차 행수와 임 행수를 몰아붙였다.

“금군의 화살을 맞은 것은 틀림없겠지?”

“그건 틀림없습니다. 제가 뒤에서 달리며 분명히 확인을 하였습니다.”

“알았으니 어서 가서 그놈을 찾아와. 살아있는 놈을 찾아다 의금부로 넘기든, 시신을 찾아다 내 앞에 가져오든, 둘 중 하나를 완수하기 전까진 상단에 발도 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어르신!”

행수들이 도망치듯 방을 나가자 양병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안을 쓱 둘러보았다.

‘큭큭, 드디어 이곳이 내 차지가 되는구나.’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그는 품에서 작은 사기 호리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알싸한 백주향이 콧속 깊이 파고들었다. 자신을 위한 축배. 양병수는 씁쓸하고 톡톡 쏘는 액체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목구멍이 알알해질 만큼 독하고 강한 술이었지만 그에게는 세상 그 어떤 꿀물보다 향기롭고 달콤한 액체였다.

“크하하핫…… 헉!”

몇 모금이나 술을 연거푸 들이 마신 후 밀려오는 행복감에 박장대소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날카롭고 차가운 금속이 목의 급소를 따끔하게 찔러오는 느낌. 순식간에 얼어붙은 그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강준혁! 지금쯤 물귀신이 되어 있어야 할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날카로운 단도를 들이 댄 채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너, 넌!”

“만족스러우냐? 깜냥도 안 되는 게 호시탐탐 이 자리를 노리더니 급기야 일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그 자리가 그렇게 탐이 나더냐?”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잠수를 하여 위기를 모면한 준혁은 도성으로 돌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의원에게 먼저 들렀다. 그곳에서 화살을 빼내고, 흰 천으로 상처를 단단히 동여맨 뒤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기 위해 이 방에 몰래 잠입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가는 즉시 든든한 지원군들이 있는 의주로 돌아가 양병수를 처단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천지가 개벽할 소리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 파렴치한 작자는 저를 그저 죽이려고만 한 게 아니었다. 중전의 암살을 시도한 시해미수범으로 몰아버리다니!

노여움이 끝까지 치솟은 준혁은 칼을 쥔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그로 인해 양병수의 목에선 붉은 피가 조금씩 번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 나더러 대역 죄인이라 하였느냐? 아버님이 총애하던 첩실의 동생이라고 외숙 대접을 좀 해줬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언젠가 네놈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 알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늘 말씀하셨지, 너를 조심하라고. 네가 호시탐탐 상단을 노리고 있으니 기어이 내 목숨 또한 노릴 것이라고. 너는, 상단을 통째로 말아먹을 놈이니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고!”

“지,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보십시오!”

“나를 왕비의 시해범으로 몰아버리면 이 상단을 모두 네 손아귀에 쥘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이를 어쩌지? 그 전에 내 손에 먼저 죽게 생겼으니 말이다!”

“서제륜!”

준혁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자 양병수가 다급하게 서제륜이라는 이름을 내질러버렸다.

“네가 서제륜이라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냐?”

“지금 어디서 수작질이야!”

“나는 그저 좌상 대감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얼굴도 모르는 좌상이 나를 서제륜이란 사람으로 둔갑시켜 중전마마의 시해범으로 만들었다? 그래, 마지막 소원이라면 그 형편없는 소리를 내 기꺼이 믿어 주도록 하지. 그럼, 잘 가거라.”

준혁이 쥐고 있는 칼에 힘을 세게 가하려는데 양병수가 숨이 넘어갈 듯 빠르게 입을 놀렸다.

“궁금하지 않은 것이냐? 네 가족이 누구에게 몰살을 당한 것인지 말이다!”

“몰살? 내 아버님께서는 재작년에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어디서 그 야비한 혓바닥을 놀리는 것이야!”

경산부원군의 막내아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도주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한데 이자가 어떻게 가족들이 몰살당한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도방의 입에서 흘러나와 속으로는 상당히 놀랐지만 준혁은 그저 모르쇠로만 일관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양병수에게서 어마어마한 소리가 터져 나오자 준혁도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좌상 대감의 짓이다. 좌상이 한을 품고 경산부원군의 마지막 남은 핏줄까지 모조리 몰살시킨 것이다!”

준혁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칼끝에 더욱 힘을 가했고, 양병수의 목에선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해. 내가 죽으면 형님께서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이 상단은 그대로 무너지게 돼 있어. 좌상은 너를 결코 곱게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어른의 원한이 어찌나 뼛속 깊이 박혀 있는지 너를 꼭 중전마마 시해범으로 만들어야겠다며 이를 갈더군. 이판도 경산부원군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으니 그의 손자가 중전에게 원한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말이다!”

“내가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으냐?”

“피붙이가 눈앞에서 죽어나갔고, 똑똑하던 막냇동생이 반편이가 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 어른이 지금까지 처절히 한을 품고 있을 만도 하지. 좌상은 너 하나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부원군의 핏줄이란 핏줄은 단 하나라도 찾아내어 끝장을 볼 생각이시다. 설령 그분들이 왕족이라 해도 말이다.”

준혁이 흔들리고 있음을 확신한 양병수는 더욱 자극적인 말들을 쏟아 부으며 품 안으로 슬금슬금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 상단을 분해시켜 버리겠다, 좌상이 겁박을 하였거든. 나는 이 상단을 지키기 위해 차악의 선택을 하였을 뿐이야!”

마지막 말과 함께 양병수는 손에 가득 움켜잡은 불그스름한 가루를 준혁의 얼굴에 세차게 던져버렸다.

“으아악!”

끔찍한 고통에 준혁은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정체불명의 가루가 눈 속으로 엄청나게 들어온 것이다. 그 틈을 타 준혁을 떨쳐낸 양병수는 도망을 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강준혁이다, 강준혁이 나타났다! 강준혁을 잡아라!”

우르르 여러 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은 혹시 몰라 챙겨두었던 화약을 품에서 모조리 꺼내 소리가 나는 쪽의 바닥을 향해 힘껏 내던져버린다. 화약들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강한 마찰음과 함께 시꺼먼 연기가 마구 분출되었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준혁은 손을 더듬거리며 반대편으로 있는 힘껏 달려 나간다. 그러나 눈이 떠지지 않아 마음처럼 빠르게 움직여지진 않았다.

‘지금 도망치지 못하면 이대로 저들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물질을 빼내기 위해 눈물이 엄청나게 쏟아지는 가운데 어디를 상한 것인지 붉은 핏물이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나는 살아야 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우리 가족 모두를 대신해 살아남은 단 하나의 목숨. 이건 내 목숨이 아니란 말이다!’

힘들고 괴로운 마음에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단 하나의 이유. 그것은 부친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당부 때문이었다.

[제륜아, 이 모든 것은 다 아비의 잘못이니라. 우리는 전부 살아서 도망칠 수 없다. 그러나 너 혼자라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노하지도, 원망하지도 말거라. 오직 네가 살아남는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 네가 살아있으면 가족 모두가 살아있는 것이니 부디 우리 몫까지 오래도록 살아다오!]

준혁은 가슴 속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께서 걸어주신 청보석 목걸이를 한 손에 움켜쥐었다.

“흐흑, 아버지!”

‘저는 살아야 하는데…… 앞이, 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살아야 하는데, 꼭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 목숨은 나 혼자만의 목숨이 아닌 것인데!’

어디에 어떻게 서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어 준혁은 필사적으로 허공에 대고 팔을 허우적거렸다. 이때, 저 멀리서 사람들의 외침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역적이 이곳에 숨어있다. 빨리빨리 움직여!”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직은 해가 높아 금세 눈에 띄고 말 것이다. 애가 탄 준혁이 몸부림을 치듯 온 힘을 다해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는데,

“이쪽도 뒤져봐!”

바로 코앞에서 사나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두려움에 전신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찰나, 누군가 팔을 홱 끌어당겨 어느 구석진 곳으로 주저앉혔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준혁이 놀라움에 허우적거리자 바로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쉬잇! 접니다, 아정이요.”

이어서 거친 고함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지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몇 번이나 귓가를 스쳐 지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조금의 기척도 없이 주위가 잠잠해지자 준혁은 눈 위로 팍팍한 재질의 천이 덮이는 느낌을 받았다. 상황을 알 수 없어 화들짝 놀란 그가 반사적으로 아정이의 손목을 꽉 붙든다.

“이렇게 감싸 두면 눈을 진정시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어차피 지금은 아무것도 안 보이실 겁니다.”

아정이의 침착한 목소리에 준혁이 긴장감을 풀고 손목을 놓아주자 머리 뒤로 천이 아프지 않게 묶이는 게 느껴졌다. 곧이어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그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흠칫 어깨를 들썩이고 말았다. 아정이의 작고 따뜻한 손이 자신의 거친 손을 부드럽게 감싸온 것이다.

“지금부터 제 손을 잡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저만 믿으세요, 여기를 안전하게 빠져나가겠습니다.”

[오라버니, 저만 믿으세요. 아버지, 어머니께 들키지 않게 제가 잘 인도하겠습니다.]

소곤거리는 아정이의 말에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어린 누이, 숙영이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당부를 잊고 밖에서 아이들과 신나게 놀다가 화경궁으로 들어가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선녀 같이 조그마한 누이는 그의 손을 잡고 아무도 모르게 안으로 안내해주곤 했었다.

“자, 이제 가겠습니다. 저만 믿으세요.”

‘차가운 검에 쓰러지던 너를 구경만 했던 오라비인데…… 이런 나도 오라비라고 네가 이 아이를 보내준 것이냐……’

그 옛날, 그리웠던 기억이 물 밀리듯 몰아쳐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오른다. 두 눈은 천으로 둘둘 동여매어 온 세상이 캄캄했지만 준혁은 무시무시한 암흑 속에서 휘영청 밝은 달 하나를 만난 것 같았다.

어슬 무렵, 가마에서 내린 은명은 영수와 함께 아정이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비가 입궐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함흥차사. 소식을 기다리느라 애가 마르던 차에 영수라는 아이가 명이 아씨를 찾는다는 전갈이 들려왔다. 오늘 낮에도 보고 왔는데 그새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은명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영수를 불러들였다.

[누이가 아씨를 꼭 모셔오라 하였습니다. 부탁입니다, 제발 저와 함께 가주십시오.]

영수는 은명을 보자마자 무턱대고 함께 가자며 한참을 졸랐다. 아정이는 오라 가라 할 아이가 아니었기에 은명은 자연스레 제륜을 떠올리게 되었다. 때문에 주위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종국엔 영수를 따라 나서고 만 것이다. 집으로 들어서자 아기를 업은 아정 어미가 영재를 데리고 쌀쌀한 날씨에 밖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아씨.”

“날도 추운데 밖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부뚜막에다 물을 좀 끓이고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누추한 곳까지 오시라하여 송구합니다. 아정이가 아씨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는데 몸이 많이 아픈지라…….”

아정 어미는 평소 머리를 조아리느라 은명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시선을 꼿꼿이 맞추며 암암리에 무언가를 전달하려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게.”

제륜과 관련된 일임을 확신한 은명은 난이와 무사들을 밖에 남겨놓고 홀로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방안에 몸을 반쯤 들여놓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은명은 아연실색하였다. 낮에 보았을 때만해도 건강하고 파릇파릇하던 오라비였다. 헌데 그는 지금 상체와 두 눈에 핏자국이 선명한 광목천을 감고서 방안에 누워 괴로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급히 문을 닫은 은명이 준혁에게 바짝 다가가 앉자 옆에서 상처를 돌보던 아정이가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어쩌다 이리 되셨습니까? 안되겠습니다, 당장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안 됩니다.”

준혁이 통증을 참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앞이 보이지 않아 손을 더듬거리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은명이 오라버니의 손을 황급히 감싸 쥐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제현이와 숙영이도 부모님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셔요, 의주에 잘 살고 계시다 하지 않았습니까?”

충격적인 소식에 경악하여 은명은 소름이 끼친다.

“송구합니다, 마마께서 충격을 받으실까 거짓을 고하였습니다. 효경왕후마마의 사십구재가 끝나는 날, 살수들이 가족을 공격해왔고 저만 간신히 도망쳐 나왔습니다.”

“대체…… 대체 누가 그리 잔악무도한 짓을 하였단 말입니까!”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은명은 눈물을 쏟아내며 속삭이듯 외쳤다.

“도방 놈의 말에 의하면 좌상 대감이 우리 가족을 몰살시키고 저를 중전마마의 시해미수범으로 몰았다 합니다. 사헌부의 김 지평이 처음부터 제 신분을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저를 죽이려 했던 자의 말인지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좌상 대감이라니요? 중전마마의 시해범이라니요?”

은명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상황에서 낮에 일어났던 일들을 들으며 온몸이 벌벌 떨려왔다. 그럼 이제 어찌한단 말인가. 오늘 아침, 상단에 남아있던 자들은 전부 양병수의 사람들이었다. 준혁이 오전 내내 상단에 있다가 창고로 향한 것을 아무도 증명해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찌되는 것이란 말인가.

“제가 나설까요? 시전에서 잠시 보았다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안 됩니다! 마마와 저는 끝까지 모르는 사이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럼 이제 어찌합니까? 제가 어찌 도우면 되겠습니까?”

친척들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좌상의 일을 고민할 새도 없었다. 우선은 오라비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은명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

“제가 서제륜이란 사실을 쉽게 증명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여 왕비 암살범이란 누명을 씌우려 했던 것이겠지요. 우선은 아정이의 이모 댁으로 갈 것입니다. 오늘 낮에 도성 밖에서 저와 만났던 이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연락을 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혼자서 힘들게 살아오신 오라버니께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괴로운 마음에 은명은 꼭 붙잡고 있는 준혁의 손등에 이마를 갖다 대고 눈물을 펑펑 쏟아내었다.

“울지 마십시오, 저는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우리 가족을 대신해 앞으로도 끝까지 살아남을 것입니다. 이리 뵈었으니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자신이 떠나야 오라비도 갈 수 있었다. 몸을 일으킨 은명은 가락지와 노리개, 머리 꽂이 등 몸에 지니고 있던 모든 장식물들을 빼서 아정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마마, 이리 귀한 것을!”

“가지고 있거라. 급하게 필요할 것이다.”

아정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명은 아정이의 손을 꼭 붙잡고 떨리는 음성으로 간곡히 부탁을 하였다.

“너도 들어 알겠지만 이분은 나의 외사촌 오라버니시다. 승하하신 효경왕후마마의 하나 남은 친정 조카란다. 오라버니를 살려다오.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다오. 어린 너에게 이런 엄청난 짐을 지어 미안하지만 너밖에 부탁할 곳이 없구나. 내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대화를 통해 상황을 대충 짐작하긴 했지만 공주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오금이 저려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영리하고 야무진 아정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주를 살뜰하게 안심시켜 주었다.

“걱정 마십시오. 저희 이모님도 대방 어르신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나리께서 안전하게 자리를 잡으시면 마마께 따로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고맙고, 또 미안하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마마와 대방 어르신이 아니었다면 저와 우리 가족은 살아있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 고마운 말에 은명은 아정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다시 준혁의 손을 움켜잡았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겠습니다. 꼭 살아남아 저에게 다시 돌아오겠다, 약조하여 주십시오!”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더듬거려 누이의 손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는 당부의 말 또한 잊지 않았다.

“마마, 아무것도 속단하지 마십시오. 김서율, 그자라면 마마의 질문에 솔직한 답을 내어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김서율과 제륜 오라버니가 아는 사이라는 것 또한 처음 듣는 소리였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불길한 예감을 애써 접으며 은명은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하였다.

“다시 뵙는 그날까지 부디 강녕하시길.”

화경궁으로 돌아가는 가마 안에서 은명은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촌 오라버니의 위태로운 안위와 외숙 일가의 죽음. 그리고 그 모든 일의 배후에 좌상 대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은명의 심장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님께서 오라버니의 신분을 알고 계셨다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아무것도 속단하지 말자.’

은명이 억지로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가마는 화경궁에 당도하였다. 가마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온 은명은 생소한 분위기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가 떨어져 어둑어둑한 밤, 평소대로라면 한적하니 운치 있는 등불이 밝혀져 있어야 했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의금부와 한성부의 관군들이 환하게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이중 삼중으로 곳곳을 에워싸고 있었다.

“마마, 지금 당장 궐로 들어가셔야 한답니다.”

최 상궁이 평소답지 않게 헐레벌떡 뛰어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아뢰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관군들은 어찌하여 화경궁에 들어와 있는 것이야?”

“관군들과 감찰시녀들이 화경궁을 한바탕 뒤집었습니다.”

“뭐라? 그게 무슨 말인가?”

“공주마마!”

너무도 무엄한 말에 은명이 기막혀 하는데 익정이 걱정스러운 낯빛을 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송 판관이 아니십니까?”

“지금 마마를 궐로 모셔 오라는 어명이 내려졌습니다.”

“어명이요? 허면 전하께서 명하셨단 말입니까?”

익정은 주변을 살피더니 은명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돌아가는 상황을 귀띔해준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의천 상단의 대방이란 자가 중전마마의 암살을 시도하였다 합니다. 헌데 그자가 현재 도주 중인 전 경산부원군의 손자, 서제륜이란 발고가 있었습니다.”

“그 대방이란 자가 중전마마를 시해하려 했단 증거가 있습니까?”

“사건 당시, 금군이 도망치던 시해범의 왼쪽 어깨 부위에 화살을 맞혔고, 그는 그 상태로 도주를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두 시진 후, 의천 상단 대방이 도성 안 의원에게서 왼쪽 어깨 부위에 맞은 화살을 빼고 치료를 하였다 합니다. 그 화살은 이번에 사용된 금군의 것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증인과 증거가 모두 확보된 상태입니다.”

‘아, 제륜 오라버니!’

어지럼증을 느낀 은명이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익정은 더욱 애가 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마마께서 서제륜 그자와 화경궁에서 은밀히 만나는 것을 보았다는 밀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런 일은 하늘에 맹세코 없었습니다. 저희가 늘 마마 곁에 붙어있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것입니까?”

완전히 얼어붙은 은명을 대신해 최 상궁이 펄쩍 뛰어오른다. 익정은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뒤집어질 만한 소식을 알려주었다.

“화경궁에 있던 수비라는 나인이랍니다.”

“어마야!”

수비라는 말에 공주 옆에 꼭 붙어있던 난이가 신음을 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 나인이 마마께서 서제륜에게 보내는 서찰을 증거로 내밀었다 합니다.”

이틀 전, 불에 타버렸다고 안도했던 그 서찰이 틀림없었다. 불에 타버린 것이 아니라 수비가 가져간 것이었다니!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수비가 그 모든 연들을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는 사실에 최 상궁이 비분강개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마마께서 저한테 어떻게 대해줬는데……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마!”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었다. 어떻게든 견뎌내어 그동안 힘들고 외롭게 살아온 제륜 오라버니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어야 했다. 은명은 남아 있는 기운을 전부 끌어모아 마음을 다잡고, 차분하게 명을 내렸다.

“궐로 들어갈 것이니 차비를 하여라.”

“예, 마마.”

최 상궁과 난이가 부랴부랴 안으로 들어가자 은명은 익정을 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송 판관.”

“소신은 마마의 당당함과 용기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상황이 몰아닥치든 의연하십시오. 그러면 길이 보일 것입니다.”

익정의 진심 어린 조언에 은명은 아렴풋한 미소를 사붓이 지어 보였다. 칠흑 같이 깊고 깊은 밤을 견딘 자만이 샛맑은 아침을 맞이하는 법. 가녀린 두 어깨가 감당해야 할 암흑의 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도성 안의 분위기는 며칠 째 매우 흉흉해져 있었다. 도주한 대역 죄인을 검거하기 위해 관군들은 곳곳을 파헤치며 불심검문을 벌였고, 백성들 사이에선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 있었으니 중신들과 금상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정전(正殿)이었다.

“경들은 말을 삼가시오!”

병환으로 모든 정무를 세자에게 맡기고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벌써 수개월.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던 금상은 이번 사태가 악화되자 병든 몸을 이끌고 정전에 들어 고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배후라니? 아무것도 확인된 바 없건만 감히 공주를 죄인이라 단정 짓는 것인가!”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목격자와 증좌가 있사옵니다.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리기 위해서라도 공주마마의 심문은 불가피하옵니다.”

“금군의 화살을 맞았다는 그 대방이란 자가 서제륜이 맞기는 한 것이오? 증좌가 있소?”

“범인이 잡히면 전 경산부원군 댁의 집사와 수비라는 나인을 불러 확인을 할 것입니다.”

금상은 이판의 말에 정색을 하며 받아 쳤다.

“그렇다면 일단 그 대방이란 자부터 잡아오시오.”

“허나 나인에게 확보한 공주마마의 서찰에는 분명 ‘제륜’이란 명자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는 의천 상단의 대방과는 별도로 공주께서 도주한 역도와 내통하고 계셨다는 증거가 아니겠사옵니까?”

금상과 함께 정전에 자리한 세자는 얼굴이 점점 더 굳어가고 있었다. 서찰에 관해 물었을 때 공주는 입을 다물고 끝까지 침묵하였다. 아닌 것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아닌 것이요, 답하기 곤란할 때에는 입을 다물어버리는 아이. 누이의 침묵은 시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다!’

세자가 다급히 머리를 굴리는데 저 멀리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김서율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을 이끄는 좌상의 차남이자 공주의 스승. 세자는 그에게 주저 없이 도움을 청했다.

“지평, 그대도 서찰을 읽어 보았소?”

“읽어 보았습니다.”

“그대가 보기에는 어떠한가? 그것만으로 공주가 서제륜과 내통을 해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율의 확고한 대답에 대신들은 저희들끼리 시선을 맞추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허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 정전의 모든 이들은 또다시 김서율을 주목했다.

“공주마마를 잘 아는 이들이라면 그리 단정 지을 수만도 없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세히 말해보라.”

긴장해 있던 금상이 반색하며 물었다.

“강론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온데 공주께서는 평소 그리운 이들을 향한 마음을 서찰의 형식으로 옮기시곤 하였습니다. 그 대상은 생과 사로 존재하는 모든 이들을 총 망라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연히 보았을 땐 승하하신 효경왕후마마께 올리는 서찰이었습니다.”

대신들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해가는 가운데 좌상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매우 평온한 모습이었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살아 계시는 어머니께 안부를 전하는 서찰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비록 역적의 자손으로 노비가 되었으나 서제륜은 사사로이 공주마마의 외사촌이 되는 자이기도 하옵니다. 피붙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효경왕후마마께 그러했듯 서찰의 형식으로 글을 남겼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다 함께 힘을 모아도 모자를 판에 좌상의 아들이 판을 깨놓으려 하다니! 대신들이 당황하여 술렁거리는 사이 세자가 얼른 지원사격에 나섰다.

“허면 그 서찰은 공주가 혼자서 끄적거린 글이라 할 수도 있는 게로군.”

“저하, 이것은 그리 간단하게 단정 지을 문제가 아니옵니다.”

세자의 말에 안빈의 부친인 우참찬이 선을 그으려 하자 서율도 뒤이어 방어에 나섰다.

“그렇사옵니다. 서찰만 가지고 단순히 그리움에 겨워 적어놓은 글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공주께서 서제륜과 내통해 왔다는 직접적인 증거라 단정 지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증인이 있지 않은가?”

“깜깜한 밤, 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았다는 것 또한 석연치가 않습니다. 최종 결론을 내리기 전, 진술의 신빙성을 되짚어보고 도주한 범인을 잡아들이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김서율이 입을 열면 열수록 서찰과 수비의 진술은 증좌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같은 편이라 조금도 의심치 않았던 그의 반격에 대신들은 우왕좌왕하였고 금상은 그 틈을 타 주저 없이 저들의 청을 일축하였다.

“화경궁의 상궁과 나인들이 심문을 받고 있으니, 새로운 정황이 포착되기 전까지 공주의 심문은 절대로 허할 수 없소.”

“허나, 전하……”

“중요한 건! 중궁을 시해하려 했던 범인을 잡는 것이오. 그대들은 범인 하나도 제대로 추포하지 못하면서 처소에 얌전히 있는 공주를 심문하겠다는 것인가?”

“망극하옵니다.”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은 듣고 싶지 않소. 당장 범인을 추포해 내 앞에 데려다 놓으시오. 그대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내 이번에 똑똑히 지켜볼 것이니!”

금상이 이토록 강경하게 나오는 것은 효경왕후의 폐위 문제가 거론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용상을 버거워하며 대신들을 두려워했던 임금. 당시에도 거칠게 밀어붙이면 왕비의 폐위 정도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폐위를 주청 드리자 겁에 질려있던 금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좌중을 압도하는 지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위를 내려놓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강한 의지를 내보였던 것이다.

대신들은 지금 그때의 금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공주를 가까이하지 않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언제나 싸고도신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뚜렷한 증좌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공주의 심문은 물 건너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때,

“전하.”

중저음의 목소리로 좌중을 사로잡는 이가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 목소리에 대신들은 희망의 빛을 띠었고, 금상과 세자는 긴장하였다. 이제껏 침묵을 지켜왔던 좌상이 드디어 입을 연 것이다.

“말씀하시오, 좌상.”

“전하의 분부대로 현재 가장 시급한 문제는 범인을 추포하는 일입니다. 허나 수비라는 나인의 증언 또한 가벼이 넘길 수만은 없는 문제입니다. 그 나인은 공주마마를 오랫동안 곁에서 모셔 온 측근 중의 한 명이 아니옵니까?”

가장 염려했던 부분이 거론되자 세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확실한 증좌도 없이 상전을 발고하였다간 되레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발고를 하였다는 것은 그만큼의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누가 타당한 명분을 내세워 논리적으로 따져 묻느냐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지금, 좌상은 이쪽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든 것이다.

“목숨을 걸고 발고를 한 것이니만큼 모든 진술을 거짓이라 치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공주께서 역도와 함께 있는 모습을 세 번이나 보았다 진술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착각일 수 있어도 세 번이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오?”

초조해진 금상이 다음 말을 재촉했다.

“감찰시녀들에게 내사를 받고 있는 화경궁의 궁녀들을 의금부로 압송하라 명하여 주십시오.”

부친의 요청에 서율은 입안이 버석하게 마르는 것 같았다. 의금부라면 조사를 받는 강도부터가 달라진다. 최악의 경우, 궁녀들이 고신을 받을 수도 있는 일. 그렇게 되면 공주는 버티지 못하고 달려가 모든 것을 시인하고 말 것이다. 서율은 두려움이 차오른 눈으로 부친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의 존재를 이미 알고 계신 겁니까?’

그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지만 좌상은 서릿발 같은 표정으로 상황을 정리하여 버렸다.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조치임을 헤아려 주십시오.”

“헤아려 주십시오!”

좌상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신들은 한 목소리로 금상을 압박하였다. 한 발 물러나 공주를 건드리지 않는 대신 궁녀들을 강도 높게 조사하겠다, 김대원이 천명한 이상 무턱대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놓아야 하는 것.

“그리 하시오.”

금상의 씁쓸한 하명에 서율은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조회를 마친 서율은 가장 먼저 부친에게 달려가 자신의 짐작이 맞는지 확인부터 하였다.

“서제륜의 존재를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까?”

“조회에서의 네 행동은 지나치게 어리석고 실망스러웠느니라.”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마주보던 좌상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아들의 태도를 질타하였다.

“답변을 피하고자 하십니까?”

“자신의 편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다른 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이냐.”

“사실대로 말씀하여 주십시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서율은 단호한 음성으로 고집을 부렸다.

“너는 그자가 서제륜이다 확신하는 것이냐?”

“그런 확신으로 궁녀들을 의금부로 보내신 게 아니셨습니까?”

“그 아이가 정말로 돌아온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진심이시다!’

짐작이 틀렸음을 확인하는 순간, 좌상의 싸늘한 음성이 서율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공주마마를 지켜드리고 싶으냐?”

“그분께서는 무고하십니다.”

“그렇다면 어서 가서 입단속부터 철저히 해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공주께서 서제륜을 만난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떠한 긍정의 답변도 결코 용납지 않을 것이니!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드릴 것이다.”

서늘한 경고와 함께 돌아서는 부친의 뒷모습을 보며 서율은 등에서 식은땀이 솟아올랐다. 지금의 권신들에게 경산부원군이란 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에게 죄를 씌우고 오늘날까지 이어온 부귀영화. 자칫하다 그때의 잘잘못이 들춰지기라도 한다면 그동안 쌓아 온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권신들은 부원군이라면 사소한 일까지 경기를 일으키며 예민한 반응을 보여 왔다. 하물며 서 대감의 친손자가 관련된 일이 터지고 말았으니. 공주를 희생양으로 삼는 한이 있어도 저들은 이번 일을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다.

그날 밤, 강준혁을 덮쳤을 때 화경궁에 걸음하지 말라, 확실히 못을 박았어야 했다. 공주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진즉에 막았어야 했다. 그분을 위한다고 모른 척했던 일이 결국은 이렇게 화가 되어 돌아올 줄이야. 다행히 오늘은 세자의 특별 배려로 공주를 뵐 수 있는 날. 어서 가서 입단속부터 철저히 해두어야 한다. 서율은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며 취연당으로 걸음을 떼었다.

아정은 준혁의 지시에 따라 상단의 일에 충실하였고, 관아의 조사에도 착실히 임했다. 그리고 쉬는 날이면 남촌에 있는 공 의원 댁을 찾아 준혁의 병간호 또한 맡고 있었다.

처음 이모 댁에 머물렀던 준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아정은 위험을 무릅쓰고 공 의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평소 준혁과 신의를 다져온 사이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 의원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달려가 긴급 처방을 해줬고, 이후엔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성심껏 치료를 해주고 있었다.

‘그 물건이라도 찾아드리면 좋을 텐데…….’

오늘도 공 의원 댁을 찾아 뒷마당에서 약을 달이던 아정은 속상한 마음에 한숨을 내리 쉬었다. 이모 댁에서 열이 올라 헛소리를 하면서도 찾으시던 물건. 대방께서 양병수에게 도망쳐 나올 때까지만 해도 목에 걸고 있었다던 청보석 장식물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정신없이 숨다 뛰다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어딘가에 떨어트린 것이리라. 찾아보겠다며 나섰지만 대방은 위험할 수 있다며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전부 잃어버린 듯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안 좋은 일이 연일 터지고 있는 요즘, 그거라도 찾아드리고 싶지만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본 적이 없어 막막하기만 하다.

“어! 날도 추운데 어찌 나오십니까?”

덜컥,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천으로 눈을 싸매고 있는 준혁이 손을 더듬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아정은 얼른 뛰어가 부축을 해준다.

“안에만 있으니 답답하구나. 잠시만 앉아있다 들어갈 것이다.”

마루 끝자락에 걸터앉은 준혁을 위해 아정은 옆방에서 이불을 들고 와 그의 다리를 덮어주었다. 뒷마당은 약재를 쌓아두는 창고가 연결되어 있어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곳이었다. 안전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볕이 잘 들지 않아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고맙구나. 공 의원께서는 아직 안 돌아오신 것이냐?”

“오실 때가 되었는데. 조금 늦어지시나 봅니다.”

침울해 있는 준혁을 보자 아정도 마음이 울적해졌다. 어젯밤, 대행수로부터 또 하나의 가슴 아픈 소식이 전달되었다. 도성 밖에서 준혁과 마주쳤던 박 노인과 그의 손자가 산에 밤을 따러 갔다 도적을 만나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가 행렬이 지난 이후 준혁이 도성 밖으로 나왔음을 증명해줄 유일한 증인들이었다. 때문에 준혁은 그들의 죽음이 우연이 아닐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아정 또한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저절로 양병수를 떠올리고 말았다. 요즘 자신을 훔쳐보는 양병수를 보고 있자면 끔찍이도 징그러웠던 곽 봉사가 저절로 연상되곤 하였다. 아정의 팔에 소름이 오도독 돋아나는데 기척이 들리며 공 의원이 뒷마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의원님, 이제 오십니까?”

“어찌 되었습니까? 정말 박 노인과 만석이가 목숨을 잃은 것입니까?”

아정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준혁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며 다급히 물었다. 양병수의 감시를 받고 있는 대행수 대신 공 의원이 박 노인의 집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런 것 같네.”

“이럴 수가! ……도적을 만난 게 확실하다 합니까?”

“가족들을 만나지는 못하였네. 주변에 물어보니 박 노인과 그 손자가 시신으로 발견된 다음날, 남은 식솔들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네. 장례도 치르지 않고 시신까지 전부 없어졌으니 자취를 감춘 것인지 변을 당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으이. 대행수가 은밀히 찾아본다 하였으니 기운을 내시게.”

살해당한 게 분명하였다. 그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준혁은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공주의 전각인 취연당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오갈 수 없도록 금군들이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함께 지내던 궁녀들이 모두 끌려가고 공주께서는 이곳에 홀로 갇혀 계신 것이다. 마음이 착잡해진 서율은 무거운 발을 이끌고 전각 안으로 들어서는데 수라간 나인들이 상을 내오고 있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 밥상. 공주께서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못하고 계시는 것이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공주는 수척해진 얼굴로 보료 위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유령처럼 앉아있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지만 서율은 차분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사를 하셔야 속이 든든해지고 버티실 수 있습니다. 수라간 상궁에게 간단히 드실 수 있는 음식을 다시 올리라 하였으니 무조건 드십시오.”

그가 들어올 때부터 입을 다물고 바라만 보던 공주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천천히 입을 떼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보러 와 주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늦었습니다.”

“혹시나 보러 와 주실까, 두렵기도 하였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생기를 잃은 먹빛의 눈동자에 서서히 물기가 차올랐다.

“하지만 역시 이 상태로 지낼 수만도 없는 것이겠지요.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말고 하문하라, 늘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궁금한 게 있으시면 참지 마십시오.”

은명에게 다른 일이 더 있음을 직감한 서율은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답을 올렸다.

“제륜 오라버니를 뵈었습니다.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까?”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오라버니는 누명을 쓴 거라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좌상께서 주도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아니라는 그의 답에 안도해야 하는데 은명은 눈앞이 어질어질하였다. 진짜로 두려운 질문은 바로 이 다음이었으니까.

“십 년 전, 제륜 오라버니를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이 누군가가 보낸 살수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 물을까 말까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는지 모른다. 아니라면 다행이었으나 만에 하나 그것이 진실이라면……. 그는 알까? 이 세상에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때론 진실을 알고자 하는 게 아니라 안심시켜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그 누군가가…… 좌상 대감이십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융통성이 떨어지는 사람. 미련할 만큼 진실만을 입에 담는 김서율이었다.

“사실입니다.”

“흐으윽……”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그의 짝이 되고자 함이었다. 어미를 잃고 아비의 등만 바라보다 가슴에 멍울이 진 어린 시절. 그는 천덕꾸러기였던 저에게 따뜻하게 웃어주고 어여쁘다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머니와 행복했던 화경궁에서 다시 한 번 그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건만……. 결국은 인연이 아니었던 것일까. 정녕 그와는 악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자객을 보내 서제륜의 가족을 몰살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눈에 띄게 어두워진 서율은 침착하면서도 냉정하게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순순히 인정하였다. 평생을 모르는 척 외면하고 싶었지만 피해갈 수도 없는 진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게 되지 않을까 얼마나 두려워했었는지 모른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 일인데 어떠한 이유가 타당할 수 있을까. 서율은 침묵을 선택하였다.

“외조부께서 돌아가시고 칠 년도 넘었을 때인데 갑자기 그리 처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목숨만 남았던 분들이었습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넘쳤다. 십 년 넘게 기다려온 핏줄들이 정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나고 있었다. 그래서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돌아오지 못하셨던 것이다.

“죽고, 죽이고, 복수하고, 원망하고…… 정말로 지긋지긋합니다.”

시선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있던 서율은 중얼거리듯 내던지는 은명의 울먹거림에 얼어붙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친과 권신들의 손에서 공주를 보호하는 일. 뻔뻔스럽다 하여도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이 고비를 넘기는 일에만 집중할 것이다.

“서제륜에 관해서라면 입도 벙긋 마십시오. 좌상 대감께서 벼르고 계십니다. 마마께서 그자와 만나온 게 밝혀지면 아무도 무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를 죽이기라도 하시겠답니까?”

은명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서율은 꿋꿋이 당부의 말을 이어나갔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어떠한 소식이 들려와도, 마마께서는 침묵하셔야 합니다.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렇게 기다리시면 제가 모든 것을 조용히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차분하려 애쓰고 있지만 상처 받아 떨고 있는 공주를 보고 있자니 서율도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서제륜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실마리를 풀려면 그자와 만나야 합니다.”

“……”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그를 믿는다. 자신조차 너무도 변덕스러워 미덥지가 않았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그만은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리고 약했던 숙영이, 그 아이가 떠올라, 미치도록 가슴이 아파, 은명은 다른 말을 뱉어내고 말았다.

“믿을 수 없습니다.”

공주의 말은 살이 되어 그의 가슴에 불로 지지 듯 격한 통증을 남긴다.

“좌상의 아드님인 그대를, 내가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공주가 마음에도 없는 독언을 퍼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 속에 불어오는 되알진 칼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신뢰하고, 또 신뢰받고 싶었던 분. 서율은 목 안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응어리를 꿀꺽 삼켜버리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직접 찾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올린 말씀, 명심하여 주십시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서율은 깍듯이 예를 올리고 방을 나섰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흐윽……”

은명은 오열이 터져 나왔다. 그도 자신도 크게 상처 입고 말았다.

“고신을 하라 하세요. 의금부로 끌려간 게 언제인데 아직도 이리 깜깜무소식입니까?”

등에 화살을 맞은 보희는 아직 자리에 누워 안정을 취해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무엇이 그리 답답한지 핏기 없는 얼굴로 의대를 차려 입고 앉아 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중전의 큰 오라비인 현석은 처음 보는 막냇동생의 모습에 식은땀이 또르륵 흘러내린다. 순진하고 수줍음이 많던 아이였는데 언제 저리 차갑고 어려운 분으로 변해버린 것인지.

“송 판관께서 의금부의 도사와 절친한 사이라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함께 동문수학한 지기입니다.”

중전의 다섯 오라비들 중 현재 관직에 몸담고 있는 이는 오직 장남 현석뿐. 때문에 외가 쪽으로 먼 친척뻘인 익정 또한 불려와 중전의 분기를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이런 일은 중간 관리 선에서 처리해야 합니다. 익정 오라버니께서 그자를 만나 가벼운 고신부터 시작하라 하세요. 고통이 없으니 저리들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뭐라고요?”

익정의 단호한 거절에 보희는 얼굴이 차갑게 식어 내린다.

“고신을 가해 자백을 받는다면 누구라도 범죄자를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사의 목적은 사건의 진위를 가리는 것이지, 공주마마께 죄를 씌우는 것이 아님을 유념하여 주십시오.”

“공주는 죄를 지었습니다.”

“어찌 그리 확신을 하십니까?”

“그 핏줄이 어디 가겠습니까!”

“마마!”

중전과 익정의 불꽃 튀는 대립에 현석은 조마조마하여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자신은 중전이 친동기간임에도 어렵기만 한데 익정은 그렇지도 않은지 꼿꼿이 마주보며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마마께 위해를 가한 것은 도주한 범인이지 공주마마가 아니십니다.”

“그걸 어찌 압니까? 공주가 그자를 부추겨 저를 공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억지이십니다! 금군의 화살을 맞은 상단의 대방이 서 대감의 손자라는 것도 아직은 확실치가 않습니다.”

공주를 옹호하는 익정의 발언은 중전의 노기에 더욱 불을 지폈다. 왜 모두들 그 아이를 싸도 돌지 못해 이토록 안달을 하는 것인지. 부아가 난 중전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써늘해진 눈초리로 익정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오라버니께서도 공주를 사사로이 만나곤 하신다지요?”

익정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수비라는 나인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고해바친 것이리라.

“공주는 참으로 재주가 좋은 아이입니다. 어찌 그리 사내들의 마음을 단번에 휘어잡는 것인지.”

“마마!”

“왜요?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듣기 민망한 발언에 오라비인 현석이 펄쩍 뛰어오르자 중전은 되레 화를 내었다. 너무 놀라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익정은 얼굴 위로 차가운 빛이 드리워진다.

“제가 알던 그분은 어디 가신 겁니까? 대체 어쩌다 이리도 변하신 겁니까!”

“변한 건 내가 아니라 오라버니십니다! 언제나 공정하고 칼 같으셨던 분이 사사로운 감정에 이리 휘둘리시다니요! 좋습니다. 못 하시겠다면 제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요.”

중전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자 현석은 기겁을 해서 말렸다.

“마마, 아직 움직이시면 아니 되십니다.”

“비키세요!”

보희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방을 나섰고 현석은 익정을 보기가 무안해 얼굴을 붉혔다. 누이를 궐로 들여보낸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 처음으로 의구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혈색 없는 얼굴의 은명과 냉랭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중전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침묵이 꽤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먼저 입을 뗀 사람은 중전이었다.

“곧 고신이 시작 될 것입니다. 공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있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그걸 알려 주러 오신 겁니까?”

중전이 보기에 은명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공주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세자와 지평이 막아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생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 두 사람이 이번 일로 다칠 수도 있음을 왜 생각지 않으시는 겁니까? 세자는 보위에 오르기도 전에 신하들이 등을 돌릴 것이고, 지평은 채 피어 보기도 전에 반대세력만 키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마께서는 오늘도 스승님 때문에 걸음을 하셨던 것이군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중전의 면박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은명이 고요하면서도 조금은 냉소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저를 적대하셨습니다.”

“공주도 저를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으셨지요.”

“연유가 궁금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마마께서는 다른 후궁들보다 저를 더 경계하시고 꺼림칙해 하실까. 이제는 분명히 알겠습니다. 마마께서 제게 적의를 드러내실 때마다 그 중심에는 늘 스승님이 계셨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마음으로 궐에 들어오신 겁니까?”

그가 이판 댁 여식을 좋아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인 적이 있었다. 그 반대의 상황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눈에 보아도 알 것 같았다. 그를 향한 중전의 애타는 마음과 투기에 잠식되어 버린 일그러진 얼굴을.

잠시 찌푸려졌던 중전의 아미가 곧게 펴지더니 입가에 야릇한 비웃음이 그려졌다.

“곤전인 나를 모욕하는 것으로 이 위기에서 벗어날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세요. 지평은 어릴 적부터 우리 집안과 가까이 지낸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철딱서니 없는 공주 때문에 막심한 피해를 입고 있는데 내가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많은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만큼의 시기와 질투 또한 집중적으로 받고 있지요. 그런 사람이 공주를 두둔하기 위해 정전에서 자신의 기반세력을 묵살하였습니다. 저들이 과연 두고 보기만 하겠습니까? 공주 때문에 지평은 미운 털이 아주 제대로 박혔습니다!”

그에 대한 생각에 은명은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셈 같은 건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 믿을 수 없다, 상처를 주었음에도 지금 이 순간 김서율은 자신을 구해내기 위해 동분서주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제 한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공주야 이 위기를 넘기고 시간이 흐르면 세자의 비호 아래 갖은 호사를 누리며 살아가겠지요. 그러나 기반을 잃은 지평은 아닐 것입니다. 온갖 견제와 비방, 수도 없는 모략에 시달리다 유배를 가거나, 운이 나쁘면 사약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뜻 한 번 펼치지 못하고 요절하는 비운의 선재는 역사에 수도 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똑똑히 기억해두세요. 만약 지평이 그리 된다면 그건 순전히 공주의 탓입니다!”

중전은 어찌하여 이런 헛수고를 하는 것일까. 저리 애쓰지 않아도 평생을 함께 해온 최 상궁과 난이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아픈 그 사람을, 나 몰라라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인데. 은명은 이제 그만 중전과의 피곤한 말싸움을 매듭짓기로 하였다.

“저를 부추기러 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스승님의 말씀대로 침묵하고 방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겠지요. 그래도 저는 의금부로 가서 저의 사람들을 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은 마십시오. 이것 또한 수없이 해왔던 저의 선택들 중 하나일 뿐, 마마의 부추김에 흔들린 게 아닙니다.”

“죄를 지었으면 시인을 하고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부추긴다니요! 내 누누이 말하지만 공주의 말버릇은 참으로 고약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궐에 들어오신 것 또한 마마의 선택이라 들었습니다.”

“그래서요?”

중전의 비꼬는 어조에 은명은 차분히 대꾸하였다.

“스스로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깊은 밤, 두 오누이가 취연당에 단 둘이서 마주앉아 있었다. 피로가 짙게 내려앉은 오라버니의 얼굴을 잠시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은명은 조용히 목소리를 내었다.

“쉬셔야 하는데 이리 늦은 시각에 뵙자고 하여 송구합니다.”

“아니다. 나도 네게 긴히 할 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세자는 무언가 힘든 결정을 내린 듯 비장한 모습이었다.

“먼저 말해보거라.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행궁에서 자객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을 때 저는 당연히 죽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칼이 꽂히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 그 검을 막아주었지요. 그 사람은 제게 도망가라 소리치고는 목숨을 걸고 저를 위해 싸워주었습니다. 그렇게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제륜 오라버니께서 말입니다.”

김서율이 도착하기 전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부분이 정확하게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세자는 크게 놀라는 듯하더니 다시금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족을 모두 잃고 오늘날까지 혈혈단신, 외롭게 살아오신 분입니다. ……알려주십시오, 오라버니. 어찌하면 모두가 살 수 있는 것입니까?”

한동안 침묵하던 세자는 표정변화 없이 간결하게 답을 알려주었다.

“너를 내놓으면 될 것이다.”

“저를 내놓으면 저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너도 들어 알 것이다. 어마마마께서 살아생전 어떠한 고충을 겪으셨는지. 외가와 관련된 일이라면 저들은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려 들겠지.”

저들은 공주를 본보기로 삼고자 할 것이다. 그때의 일을 조금이라도 들춰내려는 자들에게 하물며 공주조차도 무사할 수 없음을 똑똑히 보여주려 할 것이다.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오라버니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은명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등골이 시리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무서우냐?”

“무섭습니다.”

“그래도 견뎌내거라.”

세자의 단호한 말에 은명은 시선을 들어 오라버니를 들여다보았다. 핏발이 벌겋게 올라있는 눈동자와 까끌까끌해진 얼굴, 거칠게 말라붙은 입술. 오라버니께서 하실 말씀이란 자신의 거취에 관한 것이라는 걸 은명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를 확인이라도 해주듯 세자는 딱딱한 어조로 입술을 떼었다.

“전하께서는 모두를 버리고 너만을 구하고자 하신다. 그 옛날 어마마마를 구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번 쟁점에서 너를 지키지 않기로 하였다. 저들에게 너를 내어줄 것이다. 내 뜻을 따라 주겠느냐?”

“……예.”

“아바마마도, 네 스승도, 너를 구하겠다 나서는 사람은 내가 모조리 막아설 것이다. 또한, 처벌 수위를 놓고 저들이 왈가왈부하지 못하도록 나는 단시간 내에 너에게 아주 중한 벌을 내릴 것이다.”

봇물이 터지듯 은명에게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서운해서가 아니었다. 앞으로의 일들이 무섭기는 하였으나 그 또한 눈물이 쏟아지는 이유는 아니었다. 지난 며칠, 마음을 졸이며 애태웠던 감정들이 이제는 한계에 다다라 더 이상 억제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서운한 것이냐?”

“아닙니다. 빨리 정리하여 주십시오.”

동생이 아니라 딸아이와 같은 아이.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이날 이때껏 애지중지 보호해온 누이였다.

이 아이는 모를 것이다. 강보에 싸여있던 조그만 누이가 보고 싶어 여덟 살 나이에 이 오라비는 밤잠을 설치곤 하였다는 것을. 그 작은 입으로 언제쯤 오라버니라 불러 줄까 혼자서 기대하며 설레곤 하였다는 것을. 피접을 나갔을 때에도, 화경궁으로 나가 있을 때에도 매일매일 보고 싶어 하였다는 것을.

무수히 쏟아지는 감정들을 빈틈없이 숨겨버리며 세자는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나는 전하를 찾아뵙고 이번 일에 대한 전권을 달라 청할 것이다. 그 사이 너는 의금부로 가서 사실을 시인하도록 하여라. 단, 내가 시키는 선까지만 실토를 하여야 한다.”

여전히 눈물이 넘쳐흐르고 있었지만 은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라버니의 말씀을 주의 깊게 경청하였다.

그 엄청난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강준혁을 찾아다닌 지 여러 날.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해결할 것인데 공주께서 스스로 의금부를 찾으셨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아니, 아직은 입을 떼지 않으셨길 바라며 서율은 미친 듯이 의금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정문을 지나고 본관으로 허겁지겁 뛰어드는데 저 앞에 공주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황. 순간적으로 온몸에 힘이 빠진 서율은 그 자리서 걸음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이 모든 게 그저 꿈이기를 바랄 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진술을 마치고 나온 은명은 김서율을 발견하고 따끔, 가슴에 통증이 일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한기에 사지가 얼어 붓고 눈가가 저릿저릿 찌르는 듯 아팠다.

“무슨 짓을 하셨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그의 목소리에 노기가 가득하였다.

“알고 있습니다.”

“무사치 못하실 거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각오는 되어 있으신 겁니까?”

“각오하고 있습니다.”

절망하는 김서율을 꼿꼿이 마주보며 은명은 준비해둔 말들을 최대한 딱딱하게 풀어놓는다.

“잠시 향몽을 꾸었던 것입니다. 달콤하긴 하나 깨어나면 아무 것도 아닌 허무한 꿈. 스승님은 제게 그런 존재이십니다.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와 있었던 모든 일들을 깨끗이 지우도록 하십시오.”

감쳐두었던 진실을 모조리 밝혀 변명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 또한 공주에게는 상처가 될 터. 얽히고설켜 징글징글하게 발목을 잡는 과거가 이제는 원망스럽기만 하다. 이성이란 감정 선이 무너져 내린 서율은 단 한 가지 생각만 부여잡고 있었다. 이대로 공주를 보내면 안 된다는 것.

“마마께서는 저를 놓지 못하십니다. 벌써 후회하고 계시겠지요.”

“좌상 대감은! ……내 어머니의 식구들을 모조리 죽여 제대로 앙갚음을 하였습니다. 저 또한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습니다! 허나 그리 할 수 없으니 차라리 보지 않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좌상은 물론이요, 그 핏줄들 또한 모조리 끔찍하고 치가 떨립니다. 앞으로는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김대원과 관련된 자들이라면 그 누구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야멸차게 쏘아붙인 은명은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돌아서서 걸음을 떼었다. 이리 끝내버리지 않으면 제 몸이 부서진다 하여도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사람. 그는 항상 옳았다. 은명은 벌써부터 그가 보고 싶었다.

‘더 이상 애쓰지도 말고, 다치지도 마십시오. 다 잊으십시오. 저도, 오늘의 일도……. 복잡하게 얽혀있는 악연이라 하여도, 가여운 나의 가족들을 살해한 좌상의 아드님이라 하여도,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저만이 스승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워할 것입니다.’

멀어지는 은명도, 남아있는 서율도 시야가 점점 더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아버님, 소자입니다. 송구하오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드신 게 아니라면 시간을 조금만 내어주십시오.”

해시가 끝나가고 있는 깊은 밤.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었던 서율은 공주를 구해낼 방도를 찾아 사방을 헤매다 결국 부친을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빠듯한 시간 안에 사건을 해결하기엔 그의 힘이 너무도 미약하였다. 이제 그가 기댈 수 있는 곳은 공주를 노리는 세력의 수장이자 도성 안 최고의 실세, 부친밖에 없었다. 큰 사랑채에서는 희미한 불빛조차도 새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미 잠자리에 드신 게 분명했지만 내일 아침 조회가 열리기 전까지 어떡하든 부친을 설득해야 했다.

“아버님!”

“왜 이리 늦은 것이냐?”

서율이 한 번 더 목소리를 높이는데 정경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네 방으로 가 보아라. 대감께서 초저녁부터 너를 기다리고 계신다.”

모친의 말씀에 서율은 지체 없이 자신의 처소로 걸음을 하였다.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좌상은 술상을 앞에 두고 홀로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버님.”

“늦었구나. 와서 한 잔 받거라.”

긴히 올릴 말씀이 있었기에 서율은 좌정하여 부친이 따라주는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후래삼배(後來三杯)라 하였느니.”

급한 마음에 좌상이 따라주는 대로 연거푸 석 잔을 들이 마신 그는 초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공주마마의 처결을 조금만 미루어 주십시오.”

“이미 서제륜을 만났다, 모두 시인하셨느니라.”

“그렇기는 하지만 이번 일은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좌상은 조바심으로 식은땀까지 흘리는 아들을 보며 여유롭게 답을 하였다.

“미심쩍은 일은 도주한 자를 잡아 자세히 파헤쳐보면 될 일이다.”

“공주마마이십니다!”

“그래서 더욱 빠르게 처결해야 하느니라.”

“찾아온 핏줄을 거절하지 못하고 짧은 시간 만나셨을 뿐입니다. 겨우 그런 걸 가지고 중죄를 내린다면 이는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가 아닙니까?”

“역도를 숨겨준 죄를 겨우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서제륜은 단순한 죄인이 아니다. 대신들이 경산부원군과 관련된 일이라면 왜 저리 경기를 일으키는지 정녕 모르는 것이냐? 그 문제는 왕실에도 대신들에게도 영원히 묻어둬야 할 치명적인 약점이니라.”

“하오나……”

며칠 간 너무 과로한 탓이었을까, 갑자기 부친의 모습이 둘, 셋으로 겹쳐 보였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 분을……”

세상이 빙글빙글, 눈앞이 어지러웠다.

“구해주십……”

어느 순간, 몸에서 기운이 쫙 빠져나간 서율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리고 만다. 가만히 지켜보던 좌상은 상 밑에 두었던 또 다른 술병을 꺼내 들었다. 아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홀로 따라 마시고 있던 술. 좌상은 술잔을 들이키며 낮에 세자가 은밀히 전해온 말들을 되새겨 보았다.

[대감의 뜻대로 해드릴 것입니다. 지평은 공주의 스승이었으니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틀 정도 알아서 묶어두도록 하십시오.]

오래 전 그때처럼 한바탕 들고 일어나야 할 것이라 생각했던 좌상에게 세자의 말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공주를 싸고도는 것은 금상보다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지 않으셨던 분. 필시 다른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처신하면 될 일. 일단은 세자의 뜻에 조용히 따르기로 하였다. 우선은 대신들의 견제를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아들 녀석부터 살려내야 했으니까.

내일 오전에 정신이 들면 참을 수 없는 갈증에 약을 탄 물을 한 번 더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모레까지는 일어나지 못할 터. 그동안 피로가 쌓였을 것이니 이틀 정도 깊은 수면을 취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좌상이 방을 나서자 정경부인과 장남, 정율이 종복들을 데리고 들어와 정리를 시작하였다.

성조 23년 11월 23일

공주가 의금부에 나와 역도와 내통한 사실을 시인하였다. “그가 화경궁에 찾아와 세 번 만난 것은 사실이나 상단의 수장이라는 말은 금시초문이오.” 라고 역도와 의천 상단과의 연관성을 부인하였다.

성조 23년 11월 24일

공주와 목격자 수비의 진술에 따라 공주의 보모와 나인 난이를 무죄로 방면시키다.

성조 23년 11월 25일

공주의 신분과 지위를 박탈하고 강원도에 안치하게 하라는 비망기를 내리다.

공주가 병중임을 감안하여 유배지까지 소교(小轎)를 타고 가는 것을 허하다.

공주가 소교를 타고 요금문(曜金門)으로 나가 유배지로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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