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12 장. 현명한 단념 (12/21)

제 12 장. 현명한 단념

그제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선비의 부탁으로 도성에 발을 들여놓은 순복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어물어 문희립이란 선비를 찾아갔던 그는 거기가 예판 대감의 사저라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하였다. 그리고 지금, 그 댁 집사를 따라 당도한 이곳이 대궐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크게 놀라는 중이다.

“저기, 나리. 저는 그냥 문희립이란 선비님을 뵙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도련님께서 지금 궐에 계신단 말일세. 안 내키면 그냥 나한테 맡기고 가던지. 대체 누가 뭘 전하라고 한 건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문 선비님께서 오시면 그분한테만 전해드릴 겁니다.”

예판 댁 집사는 지금 이게 잘 하는 짓인지 심란하기만 하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허름한 옷차림에 예사롭지 않은 점이라곤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젊은이였다. 다른 때 같으면 도련님을 뵈어야 한다고 우기든 말든 당장에 쫓아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꼭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신분도 모르는 자를 궐 앞까지 데려오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데려와 보니 이러다 혼쭐이 나는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밀려온다. 공주마마께 무슨 변고가 생겨 궐 안팎이 홀딱 뒤집힌 상태가 아닌가. 대감마님도, 도련님도, 그제 새벽 급히 입궐하신 후 깜깜무소식이었고, 도성 곳곳에는 관군들이 살벌하게 떼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찜찜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어느 틈에 전갈을 받고 달려온 희립이 대번에 나무라듯 말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지금은 비상시국이네.”

“송구합니다. 헌데 이 자가 도련님을 꼭 뵈어야 한다고 사정을 하는 통에……”

“문희립 선비님이십니까?”

순복이 얼른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렀네만, 자네는 누구신가?”

“김서율이란 분을 아시는지요?”

“뭐라! 지평을 알고 있는가? 혹, 그 친구를 보았는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서율의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란 희립은 순복을 붙잡고 쉴 틈 없이 캐물었다. 너무도 격한 반응에 당황한 순복은 주춤거리며 품에서 서찰을 꺼내 주었다. 희립은 얼른 낚아채 급히 읽어보더니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쉰다. 집사와 순복은 무슨 일인가 싶어 눈치를 살피는데 이번에는 희립이 다짜고짜 그의 팔을 덥석 잡아끌었다.

“같이 들어가세.”

“어디를 말씀이십니까?”

“지금 당장 세자 저하를 뵈러 가잔 말일세.”

“예에? 아우, 살려주십시오, 저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자네를 탓하려는 게 아닐세. 따라오시게.”

겁에 잔뜩 질린 순복은 희립에게 질질 끌려 눈 깜짝할 새 궐 안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산속에서 태어나 산에서만 살아온 그에게 잊을 수 없는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병세가 호전되어 가던 금상은 공주가 습격을 받아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세자와 비빈, 정승들이 병상을 지키고는 있지만 대전 안은 무겁고 스산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을 뿐. 행궁 습격사건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직면해 어느 누구도 감히 먼저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노심초사 이리 저리 눈치만 살피는 가운데 세자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듯했다.

파발을 받고 행궁을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익위사 관원 중 세 명이 달리는 말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처음에는 공격을 받은 건가 싶어 긴장했지만 알고 보니 모두가 꾸벅꾸벅 졸다가 떨어진 것이었다. 황당해하는 사이 무시무시한 자객들이 출몰했고 한동안 간을 졸이는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도중에 치경이 나타나 도와주지 않았다면 세자 또한 큰일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순 있었지만 행궁 또한 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을 땐 눈앞이 어질어질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하였다.

[궐에서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은명이를 잘 지켜주어야 하느니라.]

그 옛날 모후께서 하신 당부의 말씀이 떠올라 세자는 눈가가 욱신욱신 거렸다. 누이를 지켜주라는 말씀은 목숨을 바쳐 따라야 할 그분의 마지막 유언. 가엾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부탁이었다. 오늘로 공주와 지평이 실종된 지 벌써 삼일, 세자는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가봐야겠소.”

“고정하십시오, 저하. 지금 모든 인력을 풀어 공주마마와 지평을 찾는 중이옵니다.”

“언제까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란 말이오!”

세자가 영상에게 벌컥 짜증을 내는데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임금이 공주를 찾는다.

“은명아, 은명아…….”

“아바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선아…… 은명이를, 은명이를 데려와 다오. 그 아이를 데려와 다오…….”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소서.”

‘이리 걱정이 되는 여식을 어찌 그동안 계속 모른 척만 하셨습니까!’

금상은 사경을 헤매다 정신만 차리면 공주의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다. 마음 놓고 한번 안아보지도 못했던 여식. 어미의 폐위를 막으며 태어난 효녀였지만 그로 인해 부원군의 정적들로부터 눈엣가시와 같은 취급을 받아 온 아이였다. 중전과 딸아이가 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 얼마나 조바심을 냈는지 모른다. 화경궁의 모녀를 지키고자 지아비이자 아비인 그가 선택한 방법은 수수방관. 군왕의 눈 밖에 난 모녀로 각인시켜 그들의 관심에서도 영원히 멀어지게 하고 싶었다.

후에 세력을 키우고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로 그 아이를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어미를 꼭 닮은 얼굴. 딸아이를 볼 때마다 그리운 그 사람이 떠올라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저 가끔 앞에 앉혀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으로 나름의 애정 표현을 해왔을 뿐. 이제는 어색해하며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아이를 볼 때마다 임금 짓은 다 때려치우고 아버지로서만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늦어버린 것인가? 언젠가는 꼭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건만…… 아가……’

금상의 눈에서 회한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세자 또한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데 희립이 헐레벌떡 대전에 입시하였다. 정승들 뒤로 앉아 있던 예판은 자식의 칠칠치 못한 태도에 질겁하여 속삭이듯 나무란다.

“어느 안전이라고 경거망동을 하는 것이냐!”

“소, 송구합니다. 저하, 지평에게서 서찰이 당도하였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세자는 서찰을 건네받아 허겁지겁 읽어 내렸다.

“서찰을 가져온 자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직접 만나 보아야겠다.”

“익위사 숙직실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전하!”

“서찰을 이리 주고 너는 어서 가보아라. 어서.”

세자가 희립과 함께 대전을 떠나자 금상은 중전과 상궁들의 부액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힘이 없어 서찰을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글을 읽는 두 눈은 또렷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자세한 소식을 알 리 없는 대신들은 시시각각 안색이 변하며 좌불안석이었다. 혜빈이 얽혀있어 공주의 안위 여부에 따라 조정의 집권세력이 하루아침에 뒤바뀔 수도 있는 일. 한쪽 구석에 죄인처럼 숨죽이고 앉아 있던 혜빈은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여 심장이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잠시 후, 서찰을 모두 읽은 금상은 아찔하다는 듯 눈을 감는다. 이윽고 눈을 떴을 땐 딱딱하게 굳어있는 좌상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평이 공주를 살렸구려. 고맙소, 좌상.”

“황공하옵니다.”

좌상은 큰 감정변화 없이 고개를 조아렸지만 혜빈은 온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최악의 사태는 면한 것이다.

누군가 부드러운 천에 물을 묻혀 입술을 축여주고 있었다. 타는 듯한 갈증이 조금씩 해갈되어 가는 이 느낌. 기분 좋은 향기마저 감돈다.

‘스승님? 아니야. 이건…… 오라버니의 향. 오라버니?’

은명이 억지로 눈을 떠 몇 번 깜박거리자 수척해진 얼굴의 오라버니가 보였다.

“정신이 드느냐?”

꿈인가 싶어 사력을 다해 손을 뻗어보지만 기력은 금방 쇠한다. 다행히도 팔을 완전히 떨어트리기 전에 세자가 얼른 그 손을 잡아주었다. 오라버니의 따뜻한 감촉이 생생히 느껴져 꿈이 아님을 실감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최 상궁도, 난이도, 수비도, 하도 울어 퉁퉁 부은 얼굴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모두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은명은 또다시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기가 힘든 모양이군.”

“탕약을 드셔야 할 터인데……”

“중간에 멈춰서 먹이는 한이 있어도 한 식경 뒤에는 출발할 것이다. 최 상궁, 너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공주가 깨어나면 지체 없이 탕약을 먹이도록 하여라.”

“예, 저하.”

세자는 걱정스럽게 누이의 머리를 쓸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았다. 서율에게 가보기 위함이었다. 마침 희립과 함께 밖으로 나와 있던 서율은 세자의 등장에 동작을 멈추고 예를 취했다.

“수고가 많았다, 지평. 자네에게 큰 은혜를 입었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한데 자객들의 시신이 전부 사라졌다 들었습니다.”

서율의 물음에 세자의 얼굴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시신을 치운 게 맞았군. 핏자국을 지운 흔적이 남아 있어 그랬을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네만 정말로 그랬을 줄이야.”

“혜빈께서 보낸 나인에게서 가루가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혜빈은 좌상의 동의 없이 움직이는 분이 아니시지. 물론 좌상께서 그리 무모한 분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네. 그 아이가 재물에 눈이 어두워 단독으로 범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고, 누군가 그 아이를 죽인 후 가루를 넣어놨을 수도 있었음이야.”

“의심 가는 데가 있으시면 철저히 조사하여 주십시오. 소신도 모르는 일이 집안에서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나 이번 사건이 매우 이상하다는 점은 알고 계셔야 합니다. 만약 보위와 관련된 일이었다면 저하만 노렸어야 했습니다. 한데 그들은 공주마마 또한 집요하게 노렸습니다. 수찬의 말을 들어보니 저하보단 공주마마를 주목표로 삼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경산부원군과 왕실에 원한을 가진 이들을 전부 용의선상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세자의 심정은 한층 더 착잡해지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더 지나야 이 지겨운 꼬리 물기를 다 끊어낼 수 있단 말인가. 할 일은 태산이었지만 우선은 공주와 지평이 몸부터 추슬러야 했다.

“자네는 먼저 돌아가 휴식을 취하도록 하게.”

“소신은 괜찮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 지금 여기서 얘기를 더 나눈다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니 일단은 돌아가 치료부터 받도록 하게.”

세자의 명에 서율의 시선은 저절로 공주가 누워 있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 공주는 분명 궐에서 병구완을 받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다시는 화경궁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 때문일까,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하지만 배웅을 하겠다며 서 있는 세자를 마냥 기다리게 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돌아서긴 하지만 서율의 얼굴 위로 아쉬움과 애잔함이 진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은명이 나인의 등에 업혀 방을 나온 것은 그로부터 약 일각 후. 수많은 관군과 금군들이 고개를 숙여 덩으로 향하는 공주를 맞이해 주었다. 옮겨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인지한 은명은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불시에 검은 인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편안히 눈을 감고 있을 순 없었다. 다행히도 위험한 낌새는 전혀 없었지만 은명은 예상치 못한 인물을 발견하고는 움찔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송 판관!’

저 앞에, 충격을 받아 파리해진 얼굴을 한 익정이 있었다.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눈이 마주쳐버린 걸 어찌해야 할까. 은명은 눈을 질끈 감고 나인의 어깨 맡에 얼굴을 폭 파묻어 버렸다.

‘미안하오, 송 판관. 몸이 낫는 대로 그대를 찾아가 꼭 사과할 것입니다.’

익정은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어 몇 번을 깜박거리고는 덩에 몸을 실고 있는 공주마마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분명 명이 소저였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

그러한 착각도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최 상궁과 난이를 보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포청에서, 화경궁 앞에서, 명이 소저를 늘 따라다니던 이들이 분명하였다. 그들의 차림새는 누가 보아도 상궁과 나인. 더 이상의 확인은 필요치 않았다. 명이 소저는 공주마마였던 것이다.

[송 판관께 거짓말을 한 것도 있습니다.]

공주가 했던 말이 퍼뜩 떠오른다. 공주마마의 함자가 은자, 명자라는 사실도 떠올랐고, 마지막으로 피접을 나가셨던 장소가 강릉이었다는 것 또한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명이 소저가 공주라는 암시는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럼에도 콩깍지가 씌어버린 익정은 오직 명이 소저만 바라보고, 명이 소저가 하는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지극히 감정적이 된 익정은 코끝이 시큰거리기도 하였고, 실소가 터질 것 같기도 하였다. 세자와 공주를 호위하는 일에 차출되어 왔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토록 보고 싶고 그리워했던 사람이 바로 그 악명 높은 공주마마셨다니!

‘제가 울어야 하는 것입니까, 웃어야 하는 것입니까?’

익정은 혼란스러움이 채 가시지도 전에 세자와 공주의 행렬을 따르기 위해 말 위에 올라야 했다. 휘하의 관군들을 통솔해야 했지만 두 눈에 보이는 건 오직, 명이 소저가 타고 있는 덩뿐이었다.

[모처럼 오누이가 오붓하게 보내는 시간이었습니다. 전하의 환후 그리 중하지 않다는 어의의 말이 있었기에 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혜빈께서는 대체 무슨 의도로 파발을 띄우신 겁니까?]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한 책임까지는 면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혜빈은 금상의 부름을 받고 대전으로 향하며 어제 중전이 야멸차게 쏟아낸 말들을 떠올려 보았다. 공주가 무사히 환궁한 지 어언 한 달.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고 혜빈의 입지는 최악으로 좁아져 있었다. 내외명부의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궐 밖에 나돈다는 참담한 소문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힘에 겨웠다. 옹주가 분풀이도 할 겸 동복 오라비인 정한군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좌상 몰래 이번 일을 꾸몄다는 것이 소문의 요지였다. 비난의 화살이 죄 없는 자식들에게 향하고 있으니 어느 어미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저 앞에 지엄한 대전이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멈춰서 얼마간 대전을 주시하던 혜빈은 고운 입매를 비틀어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오늘따라 대전이 왜 저리 오싹해 뵈는 것이냐.”

“마마……”

“마음이 이리 약해지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끝인가 보이.”

혜빈은 눈물을 찔끔거리는 상궁에게 싱긋 웃어 보이더니 마음을 다독이며 대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바마마, 이번 일은 결코 혜빈께서 관련된 일이 아닙니다. 공주와 옹주가 아웅다웅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복자매간에 있을 수 있는 사소한 신경전이었습니다. 옹주가 심약한 아이라는 건 전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혜빈 또한 그렇습니다. 성정이 괄괄하시긴 하오나 누군가를 해칠 분은 절대로 아니십니다.”

“중전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안빈은 후사가 없다. 다른 후궁들 역시 마찬가지다. 세자와 공주가 사라졌을 때 가장 득을 보는 이는 오직 혜빈뿐이다.”

혜빈과 옹주에게 튀는 불똥을 어떻게든 막아주고 싶었던 세자는 며칠 전부터 대전을 드나들며 금상을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왕께서는 그때마다 같은 말만 반복하며 전혀 틈을 주지 않으신다. 공주가 환궁하던 날부터 이미 굳히고 계신 결심. 그 의중을 알고는 있었지만 끝까지 막아보고 싶었던 세자는 마음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때마침 혜빈의 도착을 알리는 내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하, 혜빈마마 드셨사옵니다.”

“뫼셔라.”

세자가 자리를 비켜주고 금상과 단둘이 남게 되자 혜빈은 곧바로 자신의 억울함부터 호소한다.

“전하, 궐 안팎에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 신첩 또한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이는 말도 안 되는 음해일 뿐, 신첩과 옹주는 터럭만큼의 흉심도 품지 않았사옵니다!”

“나 또한 혜빈이 그랬다고 생각지는 않소. 옹주는 더 더욱 그러하오. 허나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중차대한 사건이니 만큼 이대로 마냥 두고 볼 수만도 없는 일이오. 아랫사람을 다스리지 못한 죄를 받는다 생각하고 정한군의 사저로 출궁해 자숙의 시간을 보내도록 하시오. 후에 사건의 진위가 모두 밝혀지면 그때 다시 부르도록 하겠소.”

금상의 단호한 대답에 지금까지 눈물을 글썽이던 혜빈은 피식 무람없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웃음은 무엄한 듯 보이기도 하였고 체념한 듯 보이기도 하였다.

“아니요, 그런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첩에게는 위기이나 전하께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십니까?”

“혜빈!”

금상의 싸늘한 음성에도 혜빈은 전혀 물러섬이 없었다.

“신첩이 입궁한 첫날부터 전하께서는 늘, 이 혜빈을 출궁시킬 방법에 대해 고심을 해오셨습니다. 이십여 년 만에 드디어 뜻을 이루셨는데 다시 불러 주실 리 만무하지요!”

어떠한 부정도 하지 않고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는 금상을 마주보며 혜빈은 서러움에 목이 메었다. 이십 년이 넘도록 곁에서 모셔왔지만 단 한 번도 낭군이 되어 주지 않으셨던 분. 끓어오르는 비통함을 추스르며 혜빈은 의연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배고픔을 아십니까? 양반이란 알량한 허울 때문에 밖에 나가 구걸조차 못하고 식구들이 굶어 죽는 걸 두 손 놓고 지켜봐야 하는 그 비참함을 아십니까? 신첩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이십여 년, 궐에서 호의호식을 누리면서도 그 배고픔과 비참함은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혜빈의 눈에서 서러움의 눈물이 투둑 떨어져 내린다.

“두 아우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세상을 뜬 이후, 온 가족이 다 함께 드러누워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사지에서 돌아온 좌상께서 곡식을 들고 사가의 대문을 두드리셨지요. 간택 후궁 문제로 저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저는 망설이지 않고 그분의 손을 잡고 궐로 들어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첩이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 들어왔겠습니까?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가족들이 배를 곯다 죽어가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기 위해 들어왔던 것입니다!”

“혜빈…….”

“나가라 하시면, 정한군이 보위에 오를 가능성이 사라지면, 제가 죽을 만큼 억울해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러하시다면 그건 큰 오산이십니다. 저는 오직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이 자리를 독하게 지켜온 사람입니다. 사가로 내쫓긴다 하여도 곡식이 그득 찬 든든한 창고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제게는 안락하고 편안한 대궐입니다! 흐흑……”

어느새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혜빈은 잠시 눈을 감고 격해진 감정을 다스리더니 다시 눈을 뜨고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정한군과 옹주의 안위를 평생토록 보장하여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신첩, 정한군의 사저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다 눈을 감겠습니다.”

“정한군과 옹주 또한 나의 자식들이오.”

“허면 약조해주신 것으로 믿고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혜빈은 예를 올리고 서둘러 방안을 빠져나갔고, 금상은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대에게 잘못이 없음을 안다는 과인의 말은 사실이오. 허나 나는 이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 그대가 나가야 좌상의 기세가 수그러들고, 좌상의 세가 약해져야 세자가 기반을 잡을 수 있소.’

잦은 병치레로 세자에게 정무를 맡기는 날이 많아지고 있었다. 생명이 꺼져가는 임금이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주변을 정리하고 다음 보위를 단단히 다져주는 것. 재위기간 내내 신하들의 눈치를 보느라 뜻 한 번 제대로 펼치지 못했던 고단한 이 삶을 고스란히 물려줄 순 없었다. 영민하고 올곧은 세자만큼은 모두가 우러러 보는 성군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이쯤에서 혜빈이 자리를 비워주어야 했다. 군왕이란 때로는 가족들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희생시킬 줄 알아야 하는 비정하고도 파렴치한 자리.

‘사가에서 내 욕이나 실컷 퍼부으며 속 편하게 사는 것도 즐거울 것이오.’

씁쓸히 미소 짓는 금상의 얼굴 위로 고단하고 외로운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대전을 급히 빠져나오던 혜빈은 좌상을 맞닥트리고 움찔했지만 빠르게 눈물을 닦아내며 애써 초연한 척하였다.

“지평은 좀 어떻습니까?”

“……”

좌상은 말없이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고 혜빈은 이내 기가 죽어 사실을 털어놓는다.

“출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

“대감께 많은 것을 받아왔는데 받기만 하고 도움을 드리지 못해 면목이 없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던 혜빈은 뜻밖의 말에 놀란 얼굴로 좌상을 올려다보았다.

“대감……”

“사저에서 정한군의 효도를 받으시며 마음 편히 사는 것도 좋으실 겁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생을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끝까지 보장하여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흑……”

언제나 말이 없고 표정이 없어 좌상은 혜빈에게도 어렵고 무서운 분이었다. 한데 벼랑 끝으로 내몰린 최악의 상황에서 이렇게 손을 내밀어주실 줄이야. 서러움과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온 혜빈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좌상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말았다.

왼쪽 팔에 부목을 대고 자선당에 들어있는 서율을 보며 세자는 혜빈의 일로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몸이 부서져라 공주를 지켜줬는데 일 그렇게 되어 자네에게 면목이 없네.”

“심려치 마십시오. 저하께서 그러실 일이 아닙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왕실의 안녕과 혜빈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진범을 밝히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급하다는 일이 무엇인가?”

“낭청의 밑에서 서기로 일하던 자가 목을 매었습니다.”

“뭐라? 자진을 하였단 말인가?”

“살해를 당한 후 자진을 한 것처럼 위장된 것이었습니다. 곳간은 모두 비어져 있었고, 낭청은 이미 도주하였습니다.”

치료를 받던 서율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낭청의 서기와 접촉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깜깜무소식, 급기야 낭청의 집까지 쫓아가 직접 동정을 살피기에 이르렀다. 대낮인데도 집안에 적막이 흐르는 게 대번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여 수하들을 들여보내 은밀히 살펴보게 하였더니 그 지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내 잠복해 있던 수하들을 추궁하자 서율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에 한 식경 정도 자리를 비웠음을 실토하였다. 아마도 그 틈을 이용해 낭청이 일을 벌였을 것이다.

“서슴없이 살인을 저지르다니!”

조정의 현직 관리였던 자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렇게까지 하였다는 게 세자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꼬리를 잡았다 싶으면 이내 몸통을 숨겨버리는 저들. 이토록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사건은 실로 처음이었다.

“청월관 수사를 눈치 채고 시선을 돌리기 위해 행궁을 습격했던 것인가? ……일단 서기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주고, 남은 식솔들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몫을 챙겨주도록 하게.”

“예, 저하.”

“이거야 원, 진상품 관련 사건도, 행궁에서의 사건도, 점점 더 오리무중이 되어가는군. 죽은 궁녀에게선 특이한 점이 전혀 없었네. 그 아이를 죽이고 가루를 넣어둔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싶으이.”

“가능성은 모두 열어놓고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자네가 행궁에 도착하기 전 그들을 막아냈다는 자가 누구인지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는가? 공주는 너무 어두워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더군.”

짐작 가는 바가 있기는 했지만 모든 게 확실해지기 전까지 우선은 침묵을 지켜야 했다.

“단서가 잡히면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일단 저하의 호위 인원을 더욱 늘리시고 정한군과 옹주마마의 사저에도 은밀히 무사들을 배치하여 주십시오.”

“이미 그렇게 해두었네. 공주까지 화경궁으로 나가게 되면 그 문제도 꽤 복잡해질 것이야.”

감정변화가 거의 없던 서율은 공주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귀가 번쩍 뜨였다. 어쩌면 화경궁으로 돌아오지 못하실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세자께선 지금 공주를 다시 내보낼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뭘 그리 놀라는가?”

“소신은 그저, 저하께서 다시는 공주마마를 궐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실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러려고 했었지. 한데 어디 내 말을 순순히 따르는 아이인가. 계속 궐에 두었다간 과로로 쓰러질 판이라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율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세자는 저 혼자 무언가를 떠올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허 참, 내 정말 기가 막혀서……”

연분홍 치마에 새하얀 모시 저고리만 입은 은명이 누리달 땡볕 아래 낑낑거리며 대궐 후원을 걷고 있었다. 한쪽 팔을 부액하고 있는 최 상궁은 손수건으로 공주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거의 울상이었다.

“마마, 이리 무리를 하시다 도리어 몸져누우실까 소인 두렵사옵니다.”

“어의가 운동을 해야 빨리 낫는다 하지 않았느냐. 지금 밖에 나가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거늘, 취연당에 처박혀 낫기만을 바라고 있을 수는 없다.”

취연당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어언 달포가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 환궁하여 신열이 펄펄 끓는 와중에서도 정신만 들었다 하면 화경궁으로 돌아가겠다, 고집을 부리는 통에 세자의 분노를 샀었다. 혼쭐이 난 은명은 잠시 주춤거렸지만 곧 단식에 돌입, 급기야 어의에게서 괜찮다는 말이 떨어지면 내보내주겠노라, 약조를 받아내고 말았다. 은명은 그 길로 내의원의 의관과 의녀들을 총 집합시켜 옥체를 빨리 낫게 하라며 들들 볶아대었다. 본인 스스로도 건강회복에 적극 열의를 보인 것은 당연한 일. 쓰디 쓴 탕제를 닥치는 대로 퍼마시는 것은 물론, 요즘은 운동을 한답시고 넓디넓은 대궐을 온종일 절뚝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마, 과유불급이라 했나이다. 대체 궐 밖에 무슨 할 일이 있다고 이러시옵니까?”

“내가 그저 놀고먹기만 하는 사람이더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되었다, 지금은 운동에만 집중해야 할 시간이니라.”

걱정을 해주는 최 상궁에게 면박을 주는 것은 미안했지만 입을 다물게 하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중요하게 만나야 할 남정네가 셋이나 된다고 어찌 털어놓을 수 있을까.

우선은 화경궁에서 제륜 오라버니를 기다려야 했고, 기다리는 동안 송 판관을 찾아가 사과를 해야 했다. 그리고 김서율도 있었다. 그를 만나 강론을 재개하고, 산속에서 좋았던 그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었다. 그가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꼭 안아주었던 따뜻한 품과 든든했던 등, 환희 웃어주었던 아름다운 미소까지.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 후딱후딱 넘겨버렸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부끄럽고도 아주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어쩐지 더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은명이 안달복달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가까워졌을 때 자꾸자꾸 얼굴을 보며 더 익숙해져야 하는 법. 이리 무턱대고 떨어져 있다가 그가 다시 예전처럼 거리를 둘까봐 은명은 불안하고 초조하였다. 만약 그러한 사태가 벌어진다면 공주의 체면이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그를 상대로 괴상망측한 짓을 저지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스승님이 찾아와 주실 분은 절대로 아니시지. 안 오시면 내가 빨리 몸을 회복하여 찾아가는 수밖에.’

언제나 찾아가는 것은 저의 몫이 아니었던가. 은명은 자극을 받아 갑자기 더욱 빠르게 걷기 시작했고, 화들짝 놀란 최 상궁은 어쩔 수 없이 쫓아가면서도 걱정을 늘어놓았다.

“고정하시옵소서, 마마! 벌써 반시진도 넘게 쉬지 않고 걸으셨나이다.”

“괜찮다, 앞으로 한 식경은 더 걸을 수 있을 것이야.”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은명은 극성스럽게 걷는 일에만 매진하였다.

“후후후.”

내외명부 여인들이 모임을 갖고 있는 후원의 어느 누각. 한 공간 안에 세 가지의 각기 다른 기류가 확연히 나누어져 조성되어 있었다. 중전을 위시한 여러 후궁들과 부부인, 외명부의 여인들은 유쾌한 웃음을 나누고 있었고, 혜빈을 위시한 옹주, 좌상 댁 정경부인, 그리고 몇몇 외명부의 부인들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이에 그 어느 쪽 장단도 맞출 수 없는 빈궁과 안빈은 불편하고 난처한 얼굴로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인생무상이라 하였던가. 이십여 년 간 내외명부를 주름잡았던 혜빈의 위세는 완전히 바닥으로 추락하여 한눈에 보기에도 측은할 지경이었다.

“혜빈, 궐에서 즐기는 마지막 연회가 아닙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이 시간을 즐기도록 하세요.”

“예, 마마. 그리하고 있습니다.”

중전의 말에 혜빈은 긍정의 대답을 내놓긴 했지만 임금의 눈 밖에 난 후궁의 설움을 톡톡히 느끼는 중이었다. 중전은 위로랍시고 출궁을 하루 앞둔 혜빈을 억지로 끌어다 이 자리에 앉혀놓았다. 게다가 어머니가 걱정되어 아기와 함께 찾아온 옹주를 곧장 이리로 불러 따가운 눈총까지 받게 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게 이 자리에 끌려와 벌게진 얼굴로 아기만 내려다보는 옹주를 보고 있자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평소의 혜빈이었다면 벌써 따지고 들었겠지만 이번만큼은 이상하게 위축이 되어 입도 벙긋 못하고 불편하게 앉아만 있었다.

“출궁을 하셔도 가끔은 궐에 놀러 오십시오. 이렇게 모임이 있을 때마다 참석도 하시고요. 그럴 수는 있는 것 아닙니까?”

차 귀인의 말에 중전이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아무렇지 않게 혜빈의 가슴에 생채기를 낸다.

“물론 그러셔야지요. 허나 당분간은 조용히 자숙의 시간을 가지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궐 안팎에 엉뚱한 오해를 하는 자들도 많이 있다 들었습니다.”

혜빈보다 좌상 댁 정경부인의 눈치를 더 많이 살피던 중전의 모친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얼른 다른 화제를 끄집어냈다.

“공주 아기씨께서는 환후가 좀 어떠하십니까?”

“좋아지고는 있지만 그리 끔찍한 일을 겪었는데 어디 쉬이 나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사람들의 이목이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는 치마에 저고리만 입은 채 당당하게 서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궐에서 당의를 갖춰 입지 않고도 저리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공주다!’

빈궁이 크게 놀라 가장 먼저 달려 나간다.

“공주,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어찌 이리 달아올라 계십니까!”

“덥습니다. 시원한 것 좀 마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얼른 가서 얼음을 띄운 화채를 내오너라.”

빈궁이 공주를 부액해 자리로 가 앉는 동안 비빈들과 외명부의 여인들은 전부 얼이 빠져 두 사람을 주목하였다. 내외명부 여인들과 거의 척을 지고 살았던 공주께서 어찌하여 이런 자리에 스스로 나오셨단 말인가. 모두가 어리둥절해있는 사이 얼음을 띄운 화채가 나오자 은명은 정신없이 들이켰고, 궁녀들은 그 주위에 들러붙어 부채질을 시작했다.

“운동을 하셨습니까? 너무 무리를 하시면 탈이 날 수도 있습니다.”

“공주, 이리 다니셔도 괜찮은 겁니까?”

빈궁의 말이 끝나자마자 중전이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안부를 물어왔다.

“어의가 운동을 권하였습니다.”

“그래요? 헌데 어쩐 일로 이런 자리에 다 들르셨습니까?”

“옹주의 아기를 보러 왔습니다. 제가 화경궁에 머무는 바람에 아직 조카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했거든요.”

공주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외명부의 부인들을 비롯해 중전과 혜빈, 옹주까지도 모두가 크게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기를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은명이 혜빈에게 묻자 혜빈과 옹주는 당황해 하면서도 아기를 넘겨주었다. 빈궁의 도움을 받아 아기를 안아 든 은명은 작고, 보드랍고, 옹주를 닮아 어여쁜 아기를 보며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가야, 이모가 이제야 너를 안아보는구나. 후후, 옹주를 닮아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게 참으로 어여쁩니다.”

‘……공주, 무슨 의도로 이러시는 겁니까? 이 사람을 망신 주려 하십니까, 아니면 정말로 아기가 보고 싶어 오신 겁니까?’

예기치 못한 은명의 행동을 보며 혜빈의 심경은 한층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자신과 옹주가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직접적인 피해자인 공주의 공격까지 받게 된다면 처지는 더욱 곤란해질 수도 있는 일. 진범이 잡히지 않는 이상 영원히 몰염치한 인간으로 낙인 찍혀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참, 내일 출궁을 하신다구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혜빈은 창백히 굳어졌지만 은명은 마냥 태연해 보였다. 두 사람의 해묵은 관계를 잘 알고 있던 주위사람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간혹 정한 오라버니께서 화경궁에 놀러 오기도 하십니다.”

“예, 가끔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정한군이 좋아하는 정과도 종종 보내주신다고요. 그동안 감사의 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정과를 보낼 땐 국화차도 같이 보내드리겠습니다.”

혜빈이 국화차 애호가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혜빈과 옹주는 공주의 말에 울컥, 속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솟아오른다.

‘……저와 옹주를 도와주러 오신 겝니까?’

보일 듯 말 듯 눈에 물기가 차오른 혜빈은 먹먹해진 가슴으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이리 초라하게 앉아 당하고 있는 꼴이 안 돼 보이더이까? 그 오랜 세월 아웅다웅 싸우다 보니 미운정이라도 단단히 박히신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내친김에 확실히 도와주시지요. 제가 아주 열불이 나서 못살겠습니다.’

공주의 사근사근한 음성과 상냥한 시선에서 확신을 가진 혜빈은 과감하게 한 발을 더 내질러버렸다.

“아랫사람을 다스리지 못한 과오로 마마께 고초를 겪게 해드렸거늘, 어찌 감히 선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혜빈께서 보내주신 효갈비를 맛있게 먹었는데 그로 인해 된서리 맞으셨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리 되긴 하였으나 누가 감히 혜빈의 진심을 의심하겠습니까.”

“안 그래도 요즘 하도 쑥덕이는 소리로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는데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생각 없고 할 일 없는 자들이 쓸데없이 지껄이는 소리입니다. 그런 소인배들의 잡답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세요.”

은명의 마지막 한마디로 누각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초반에 웃던 이들은 졸지에 소인배가 되어 웃음을 잃어버렸고, 딱딱하게 굳어 좌불안석이었던 이들은 개운한 표정으로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쯧쯧, 이십 년 넘게 알랑대더니 하루아침에 돌아앉아? 하여간 인정머리들 하고는…….’

은명은 경직되어 있는 이들을 흘끗 쳐다보며 얼굴 가득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근처를 지나다 혜빈과 옹주의 상황을 목격하게 된 은명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부딪힐 때마다 가차 없이 두 사람을 눌러온 자신이었지만 막상 그들이 당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상당히 불쾌하고 장이 꼬여오는 듯했다.

어찌되었든 옹주와는 피를 나눈 가족이요, 혜빈은 정한군의 모친이었다. 저들에게 쏟아지는 싸늘한 시선만은 막아주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누각 안으로 뛰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 했던가. 다행히 눈치 빠른 혜빈이 손바닥을 짝짝 맞춰주어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호호호.”

혜빈 특유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누각 안에 다시금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혜빈의 웃음소리가 없는 연회는 연회가 아니라 하였던가.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은명도 빙긋 웃어버리고 말았다. 저 웃음소리도 가끔은 생각이 날 것 같았다.

출궁을 앞둔 혜빈은 하직인사를 올리려 대전으로 향하는데 마침 금상을 뵙고 나오던 중전과 마주쳐 걸음을 멈춘다. 이렇게 마주친 게 내키지 않았는지 중전은 새초롬하였으나 혜빈은 여유로웠다.

“대전에 들렀다 따로 인사를 올리러 가겠습니다.”

“취연당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냥 여기서 하시지요.”

“그렇다면 주변을 물러주십시오.”

“왜요, 저를 혼내기라도 하시렵니까?”

“궐 생활을 오래했던 연장자로서 진심 어린 조언 하나 해드리려 합니다. 아랫것들이 있는 자리라 해도 저는 상관없으니 마마의 뜻대로 하십시오.”

중전은 마뜩찮은 얼굴로 궁녀들을 모두 물리고 혜빈을 쳐다보았다.

“부디 그 진심 어린 조언이 쓸모 있는 내용이기를 바랍니다.”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분은 마마가 아니십니다. 승하하신 효경왕후마마이십니다.”

“뭐라고요?”

“전하께서도 언젠가는 깨닫게 되시겠지요. 중전께서는 그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누구도 전하께 효경왕후마마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혜빈도 내관들의 입소문을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어느 봄날, 꽃비가 떨어지는 매화나무 아래에 한 규수가 시름에 잠긴 채 서 있었다고 한다.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던 안영대군께서는 흩날리는 매화 꽃잎 속의 규수를 보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계셨다고 했다. 그 규수가 바로 서윤영, 죽어서도 금상의 마음을 틀어쥐고 있는 효경왕후였다.

금상께서 보희를 처음 보았던 그날, 꽃비를 맞으며 시름에 잠겨있는 모습에서 잠시나마 마음 속 정인을 떠올렸을 것이다. 찰나의 우연으로 쉬이 중전에 오르고 금상의 총애를 받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누군가의 미약한 그림자일 뿐. 지난 세월, 지아비의 껍데기만 안고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림자로 살아야 하는 중전에게 약이 되는 쓴 소리를 한번쯤은 해주고 싶었다. 아직은 어린, 그녀의 장래를 위하여.

“혜빈, 그걸 지금 조언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처음으로 품었던 연정을 모두 끊어내시고, 전하 한 분께만 온 마음을 다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마마께 드리는 진심 어린 조언입니다.”

혜빈의 말에 뜨끔해진 중전은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많이 변하셨습니다. 혹자는 마마께서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아니요, 제 눈은 정확합니다. 마마께서는 심성이 곱고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한데 어쩌다 이리 되신 겁니까? 취할 수 없는 이를 향한 연모의 정이 마마를 이리도 변하게 한 것입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에 중전은 정신이 아찔해지고 있었다.

“다 보입니다, 마마. 어찌 그리 감정 관리를 못하십니까. 지평과의 사사로운 인연은 이미 모두 끊겨버린 것입니다. 궐로 들어오시며 마마 스스로 그리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집착을 보이지 마십시오.”

“집착…… 이라고요?”

“칠전팔기(七顚八起), 십벌지목(十伐之木), 그 모든 끈기가 다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자고로 이 세상엔 피나는 노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는 게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 순리를 거스르고 허무맹랑한 망상을 목표로 삼는다면 다치는 건 자기 자신일 뿐. 그럴 때는 깨끗이 단념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현명한 단념이라 부르고 있지요.”

중전의 입가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혜빈은 거침이 없었다.

“마마의 마음을 지평이 알고는 있습니까?”

“……”

“마마께 현명한 단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앞으로는 오직 전하만을 향해 온 마음을 기울이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시면 마마께서 계시는 그 자리 또한, 영원히 계속될 거라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 하셨습니까?”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시어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혜빈은 깊이 허리를 굽혀 반절을 한 후 대전으로 향했다. 궐에서 잔뼈가 굵은 그의 관록과 기에 눌려버린 것일까. 중전은 창백히 질린 얼굴로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금상과 혜빈이 이십여 년 만에 갑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편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과인에게 서운하시오?”

“언제나 옹주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셨지만 공주마마를 향한 마음이 더 크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는 서운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후사가 없는 다른 후궁들에 비하면 팔자가 더 없이 좋은 편이지요. 남은 평생을 자손들과 함께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궐 밖에서의 생활이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혜빈의 담담한 말에 금상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나 배포 하나는 시원시원한 여인이었다.

“그대에게 나쁜 감정이 전혀 없다는 것만 알아주시오.”

“예, 전하. 군왕으로서 내리신 결단이었음을 신첩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과인에게 변고가 생긴다 해도 세자가 그대와 정한군, 그리고 옹주를 지켜줄 것이오. 궐에서 있었던 나쁜 기억은 모두 지우고 사가에서 아이들과 행복하기를 바라오. 혹 먹고 싶은 궐 음식이 있으면 참지 말고 언제든 수라간에 기별을 넣고. 내 이미 수라간 최고상궁에게 당부를 해 두었다오.”

‘마지막에서야…… 마지막이 되어서야 진짜 안사람에게 하듯 걱정을 해주십니다. 이십여 년 동안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입니다.’

금상의 진심 어린 말에 혜빈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지만 꾹 참아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시각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여 주십시오.”

출궁이라는 새로운 길을 받아들인 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정갈하게 앞으로 모았다.

“부디 수복강녕하시옵소서.”

좌상의 세력을 대표하는 후궁이 아닌 오직 지아비를 염려하는 내자의 마음으로 혜빈은 정성껏 큰절을 올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금상의 얼굴에는 서글서글한 미소가 편안히 번져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