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돋을볕이 오실 때까지
달빛에 취해 서로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중전은 충격과 고통으로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큰 욕심이 있어 찾아온 건 아니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기에 꽃을 띄우는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멀리서나마 지켜보고 싶었을 뿐. 한데 그곳에 공주가 버젓이 나타날 줄이야.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중전은 현기증이 일었다. 누님의 생일날, 혼자서 꽃을 바치러 오는 걸 불문율처럼 여기던 그가 쉽사리 동행을 허하였단 말인가. 정녕 공주에게 옆자리를 내어 주었단 말인가. 공주는 그를 향한 연정을 당당하고 솔직하게 고백까지 하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눈이 부셨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부러워 시새움이 끓어올랐다.
‘나는 왜 저리 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날 월류지에서 기다리겠다 할 것이 아니라 길을 막아서자마자 마음을 털어놓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았을 것인데…….’
당장이라도 그리 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불가했다. 조선에서 가장 귀한 여인에 오른 대가는 김서율을 포기하는 것.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었다.
‘어쩌다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단 말인가?’
이제는 정말 끝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와버린 것이다. 시야가 뿌예진 중전은 자신을 이리 몰아간 사람이 공주라도 되는 양 은명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공주가 미웠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다가갈 수 없었던 그 자리를 공주는 매번 너무도 쉽게 차지하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 치솟았지만 억지로 삼켜버린다. 여기서 눈물까지 흘리면 더욱 초라하고 비참해지기만 할 뿐. 마지막 자제심을 발휘하여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중전은 도망치듯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내전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큼 감정이 격해진 상태였다. 그 어떠한 말도 지금은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보희의 바람과는 달리 중궁전 안마당에는 혜빈과 안빈이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사냥을 나가신 전하께서 급작스럽게 환궁하신다는 전언이 있었을 테지. 선대왕의 목숨을 앗아간 종기가 금상의 옥체에도 이미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중전이 미복 차림으로 나타나자 안빈은 그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혜빈은 성정대로 쓴소리부터 하였다.
“대체 어디를 다녀오시는 겁니까? 전하께서 급히 환궁하신다는 기별을 받았는데 내전이 비어 있어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잠시 나갔다 온 것입니다.”
“마마, 여기는 사가가 아니라 대궐입니다. 중궁에 오르신 분이 볼 일이 있다고 자유로이 궐 밖을 출입하시다니요!”
“혜빈!”
늘 다소곳했던 중전이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자 혜빈과 안빈뿐 아니라 주위의 궁녀들 또한 깜짝 놀라 모두가 숨을 죽였다.
“지금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 게 아닙니까? 여기서 가장 윗사람은 바로 접니다!”
“마마,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안빈은 끼어들지 마세요.”
안빈이 중재를 하려 나서자 단박에 막아버린 중전은 싸늘하게 식어있는 혜빈에게 거침없는 일갈을 날렸다.
“가끔 내명부의 수장이 누구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동안은 중궁전이 비어있어 혜빈께서 수고를 해주신 건 잘 알겠습니다. 허나 이제 제가 들어왔으니 본분을 망각하지 마시고 자중을 하셔야지요. 그만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계세요.”
극도로 예민해진 중전은 어머니뻘 되는 후궁들을 남겨두고 안으로 휘익 들어가 버렸다. 민망해하는 안빈도, 노기를 띠고 있는 혜빈도 중전에게는 그저 관심 밖의 사람들일 뿐이었다.
아침 일찍 중궁전으로부터 들어오라는 기별을 받은 은명은 늦은 오전쯤에야 내전 후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원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중전은 저만치 걸어오는 공주를 싸늘한 눈길로 지켜보며 심기가 복잡하기만 하다.
‘내가 이리 된 것이 공주, 너 때문일까?’
중전의 머릿속이 화끈 달아오른다.
‘어제 네가 있었던 그 자리는 원래 나의 자리였다. 현법사에서도 내가 있어야 할 그의 옆자리에 네가 서 있었다. 네가 나를 이리 몰아간 것이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되어버렸다!’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공주는 법도에 따라 예를 올린 후 까칠해진 중전의 안색을 살피며 문후를 여쭈었다.
“어디가 편찮으시옵니까?”
‘너 때문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나는…… 너를 원망하기로 했다.’
중전은 공주의 물음에 대답도 않고 길게 시립해 있던 궁녀들에게 자리를 물리라 명했다. 모든 궁녀들이 물러가고 중전과 단 둘이 남게 된 은명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단아하고 온화하던 중전의 얼굴에서 이상하리만치 냉기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듣자 하니 김 지평에게 강론을 듣고 계신다지요?”
“예, 틈틈이 좋은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공주, 언제까지 지평을 괴롭힐 생각이십니까?”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그를 괴롭히고 있다니. 눈이 동그래졌던 은명은 자신이 그를 연모하고 있음을 중전께서 아시는가 싶어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괴롭힌다니요? 제가 스승님을 괴롭게 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지평에게는 원래 다섯 분의 숙부가 계셨습니다. 지금은 그 중, 두 분만이 살아계시지요.”
그 말을 끝으로 중전은 입을 다물고 은명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걸까. 그의 숙부가 세 분이나 돌아가셨음을 알려주려 하신 건 분명 아닐 것이다. 은명은 그 다음 말이 궁금해 중전을 재촉하였다.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십니까?”
공주의 물음에 중전이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다 싶더니 무시무시한 말을 가차 없이 뱉어 내었다.
“나머지는 모두, 공주의 외조부가 죽였습니다.”
너무도 엄청난 말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소리에 창백히 질린 은명은 주먹을 말아 쥐고 자세히 파고들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저희 외가를 무너트린 건 좌상 대감과 그 세력들이었습니다.”
“공주의 외조부가 먼저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좌상이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일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좌상은 스승이었던 부원군을 믿고 따르고 존경하였습니다. 하지만 부원군은 그의 부친에게 역모의 죄를 씌어 가문을 몰락시키고 피붙이들을 모조리 처단하였습니다.”
콰쾅!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진 듯 눈앞이 까마득하였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다. 은명의 상태가 어찌 되었든 중전은 사정을 두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어디 좌상뿐이겠습니까? 우리 집안과 우상, 그밖에 조정의 많은 대소 신료들이 그때의 모함으로 쫓겨나 사지에서 끔찍한 지옥을 맛보아야 했지요. 사람들은 그때의 사건을 최진욱, 그자가 주도했다고 믿고 있지만 최진욱이 뒤에는 서한철 대감, 그자가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지금까지 제가 모르고 있었을 리 없습니다.”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 은명은 쥐어짜듯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지만 중전에게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으니 모를 수밖에요. 공주가 조정의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저 예쁘고 좋은 것만 보고 자란 귀한 공주마마가 아니십니까!”
“저는……”
“후에 무죄가 입증되어 돌아올 순 있었지만 죽은 가족을 다시 살려낼 순 없었고, 정신을 놓아버린 자들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총명하다 소문이 자자했던 지평의 막내 숙부를 보십시오. 그게 다 서한철, 그자가 만들어 놓은 흔적입니다!”
잠자리를 쫓아다니던 그의 숙부가 은명의 머릿속에 아슴아슴 떠오른다. 비를 피하며 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 또한 귓가에 울려 퍼졌다.
[가문이 화를 입었을 때 조부님의 마지막을 눈앞에서 목격하셨다 합니다.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무섭고 끔찍하셨겠지요.]
그 모든 원흉이 이제껏 불쌍하다 여기던 외조부 때문이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라와 왕실에 충성하며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아온 분이 아니었던가. 은명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지만 중전의 다그침은 계속 되었다.
“뿐인 줄 아십니까? 금상께서 보위에 오르자 또다시 그들을 내치려 하였습니다. 우리 쪽에서 먼저 손을 쓰지 않았다면 나도 지평도 지금쯤 목숨을 잃었거나 관비로 살아가고 있었겠지요. 한 번씩 주고받았으니 서로 억울할 것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가까이서 마주보는 것 또한 껄끄럽지 않겠습니까? 이쯤에서 그만 강론을 접으세요. 더 이상 지평을 괴롭히지 마시란 말입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은명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이대로 울어버릴 수는 없었다. 믿을 수도 없었다. 은명은 마음을 냉정히 가라앉히고 중전을 직시하였다.
“제가 마마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 생각하신다면, 그건 착각이십니다.”
“공주, 윗사람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입니까!”
“그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확인도 안 하고 덜컥 믿으란 말씀이십니까. 게다가 모두가 쉬쉬한다는 그 일을, 마마께서는 아침부터 저를 불러 이리 말씀하고 계시다니요! 일단은 잘 들었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은명은 중전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짧게 예를 올린 뒤, 홱 돌아서 빠르게 자리를 떠나버렸다. 좌상과 이판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사색이 되어 있는 공주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마, 공주 아기씨와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공주의 안색을 보고 마음이 쓰인 이판이 중전에게 빠르게 다가가 물었다. 중전 또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주께서 아무것도 모르시기에 제가 옛날이야기 좀 해드렸습니다.”
“옛날이야기라니요? 그게 무슨…… 설마, 부원군에 관한 일 말씀이십니까? 마마!”
이판은 딸자식의 경솔함에 펄쩍 뛰었고, 좌상은 감정 변화 없이 중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버지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하고 있음에도 중전은 개의치 않았다.
“좌상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까딱하다간 지평이 부마가 될 판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좌상은 가만히 있는데 이판이 도리어 더 큰 반응을 보인다.
“아드님의 장래가 이대로 끝장나는 꼴을 그저 구경만 하시겠습니까?”
“마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버님, 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리 나섰겠습니까? 남녀 간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당장 강론부터 중단시키세요. 사전에 단속을 철저히 하시란 말입니다!”
중전은 씩씩거렸고 이판은 식은땀을 닦아내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좌상만은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눈빛만이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세자와 김서율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자선당에는 또 다른 이유로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정녕 그 기방 창고에 궐로 들어왔어야 할 진상품이 가득했단 말이냐?”
“꽤 오랜 시간 조직적으로 행해온 것 같은데 지금까지 그 부담을 고스란히 백성들이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세자가 주먹으로 경상을 크게 내려치며 외쳤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어 죽고 있는 판에 조정의 신료들이 상단과 지방의 말단 관료까지 끌어들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니!”
“양병수가 청월관의 실소유자라 하지만 그는 꼭두각시일 뿐 분명 조정의 누군가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 낭청은 아직도 숨을 죽이고 있는가?”
“외부와의 접촉을 모두 끊고 두문불출 중입니다. 연적과 붓도 아직 그대로라 하니 그자가 불안감을 씻고 다시 운신할 때까지 일단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 청월관……”
세자가 다음 말을 이으려는 순간,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들려와 정신을 분산시켰다. 중요한 일을 논의 중이니 주변을 모두 물리라 명하였거늘. 예민해져 있던 세자는 못마땅한 심기를 여과 없이 분출하였다.
“밖에 웬 소란이더냐?”
“그것이……”
세자의 호통에 황급히 들어온 내관이 무언가를 고하려는데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은명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세자와 서율, 두 사람 모두 크게 놀라 공주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네가 기별도 없이…… 궐엔 언제 들어온 것이냐?”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확인시켜주십시오, 저하.”
공주의 음성에서 다급함이 묻어 나왔고, 치마를 꼭 쥐고 있는 두 손 역시 후들후들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저하께 들어야 할 말이 있으니 스승님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십시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 공주에게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서율은 일단 침묵한 채 조용히 자리를 피해 주었다.
김서율이 물러가고 방문이 굳게 닫히자 은명은 세자 앞에 털썩 주저앉아 다그치듯 물었다.
“진실을 말해주십시오.”
“무엇을 말이냐? 대체 왜 그러는 것이야?”
“최진욱 대감의 배후에 외조부님이 계셨습니까?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직후 한 번 내쳤던 그들을 또다시 치려 하셨던 것입니까?”
세자의 얼굴 위로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오라버니의 표정 변화를 주시하던 은명은 듣지 않아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중전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단 말인가. 봇물이 터지듯 눈물이 쏟아져 나온다.
“사실이었군요. 오라버니도 알고 계셨던 거야. 나만 모르고 있었어!”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그게 중요합니까! 흑…… 난 아무것도 모르고……”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일방적인 피해자도, 일방적인 가해자도 없는 일이었다.”
“정사 따위 저는 모릅니다! 왜 진실을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 적어도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니었음을 알려는 주셨어야지요!”
은명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살상을 저지른 가해자였다니. 외조부로 인해 죄 없는 사람들이 짓밟히고 목숨을 빼앗겼단 사실에 은명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동안 저들을 얼마나 원망하였던가, 얼마나 삿된 마음을 품었던가.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더 깊은 상처가 되어 은명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었다. 차라리 죽도록 억울한 편이 백 번 천 번 나았던 것이다.
정신없이 동궁전을 뛰쳐나오는데 저 앞에 놀란 얼굴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김서율이 보였다. 강론 초반, 그에게도 수많은 독설을 퍼부어댔고 그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은명은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모르는 척 그를 지나쳐버렸다. 무슨 면목으로 그를 마주본단 말인가.
“은명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쫓아 나온 세자가 다급히 은명의 팔을 붙들었다.
“이렇게 가버리면 어찌하느냐?”
“더 이상 궐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오라버니도 뵙고 싶지 않으니 당분간 저를 찾지 마십시오!”
오라버니에게 붙잡힌 팔을 거칠게 뿌리친 은명은 그대로 자선당을 떠나버렸다. 상처받고 아파하는 어린 누이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세자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내가 받았던 그 고통을, 너는 모르게 하고 싶었다. 어머니와 내가 겪었던 그 지옥으로부터, 너만은 지켜주고 싶었다.’
사헌부로 돌아온 서율은 눈물을 흘리던 공주가 자꾸만 아른거려 정신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웬만해선 흔들릴 분이 아니시건만 중전께서 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눈이 마주쳤을 때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려버리던 공주가 떠오르자 가슴이 꽉 막히는 게 통증이 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해서 저도 모르게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사헌부의 아전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리, 화경궁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화경궁?”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율은 가장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정문 밖을 나가보니 저 멀리, 화경궁의 나인 하나가 홀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혼자뿐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화경궁의 군관이나 다른 궁녀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언젠가 그러했듯 공주께서 직접 오셨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건만. 서율은 실망한 기색을 지우고 난이에게 다가가 보았다.
“지평 나리!”
“너 혼자 온 것이냐?”
“예, 공주마마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마마께서 당분간 강론을 중단하겠다 하십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이 기분. 이상한 일이었다. 마음을 끊어내라 다그친 건 자신이었다. 그분만 감정을 자제해 주시면 이 마음도 곧 접을 수 있으리라, 그리 믿고 있었다. 헌데 막상 공주께서 강론을 중단하겠다 말씀하시니 무섭게 밀려드는 이 허전함과 서운함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솟구치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서율은 당황스럽기까지 하였다.
“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거기까진 소인도 잘 모르옵니다. 말씀을 전하였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난이가 인사를 올리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잠깐.”
이대로 화경궁의 나인을 보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공주와의 애매한 관계 또한 확실히 정리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에 불과할 뿐, 그는 아직 그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은 자신이 없었다.
“내가 마마를 뵈어야겠다. 지금 화경궁으로 갈 것이다.”
“지금 화경궁에 아니 계십니다.”
“어디를 가셨느냐?”
“답답하시다며 후원에 계시다가 지금은 모전교 쪽에 계십니다.”
“그럼 그리로 갈 것이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서율은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말았다. 수도 없이 공주를 밀어내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분을 떠나보낼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 아니, 공주가 이대로 저를 영영 놓아 버릴까 그는 두렵기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조급하고 불안해진 마음에 그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남촌의 사건현장을 둘러보고 한성부로 돌아가던 익정은 모전교를 건너며 시선이 한 곳으로 고정되어 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환영이 되어 나타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여인. 명이, 그녀가 저 다리 너머에서 며칠 전 쏟아진 비로 물이 한껏 불어난 개천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한양에 꽤 오래도록 머무는 모양이었다. 멀리 있어 아는 척을 하지 못했지만 삼월에도, 며칠 전에도, 익정은 화경궁을 향해 걸어가는 명이 소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공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니 만큼 오늘도 아쉬워하며 지나쳐야 하겠지만 그러기엔 그녀가 지나치게 어두운 모습이었다. 이대로 지나가면 하루 종일 신경이 쓰여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익정은 모전교를 건너자마자 한성부 관원들을 먼저 보내고 말머리를 그녀에게로 돌렸다.
히이이잉-
바로 뒤에서 말 울음소리가 크게 울렸지만 명이 소저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익정은 개천가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버드나무에 말고삐를 단단히 매어 놓은 뒤 그녀에게 다가갔다. 연한 하늘빛 꽃송이가 정교하게 수놓아진 새하얀 저고리와 풍성한 파란색 치마. 시원한 색감이 그녀의 자태를 한층 더 깨끗하고 맑아 보이게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정적을 깨트리는 목소리에 그녀의 고개가 콧날이 살짝 보일 정도로만 틀어졌다 제자리를 찾는다. 그 이상은 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런다고 주눅이 들 익정도 아니었다.
“참 열심히도 돌아다니십니다. 우연히 마주친 게 벌써 몇 번째인 줄 아십니까? 명이 소저께서는 규방 여인에 관한 저의 상식을 완전히 무너트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오늘은,”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는 그녀가 익정의 말을 매몰차게 끊어버렸다.
“지금은, 제가 누군가와 말을 나눌 기분이 아닙니다. 송구합니다만 그냥 이대로 저를 모른 척 지나가 주십시오.”
“제가 모른 척 지나가면 소저께서는 지금의 속상한 마음을 속으로 삭이기만 하시겠지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오나 그런다고 울적한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겠지요.”
그녀의 순순한 긍정에 익정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제가 파악한 소저의 성정대로라면 그럴수록 외려 역효과만 일어날 뿐입니다. 어떠십니까,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문제를 해결해 드릴 수는 없지만 답답한 그 속을 조금이라도 뚫어드릴 순 있을 것입니다.”
즉흥적인 제안에 그녀가 그제야 뒤를 돌아 시선을 맞추어 준다. 물기가 선명히 남아 있는 눈망울. 익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저 울적해하는 줄 알았건만 울고 있었던 것이다. 포청 앞에서 능글맞은 벼슬아치와 거침없이 싸움을 벌일 정도로 대찬 여인이 아니었던가. 그가 애 말라 하는 것도 모르고 은명에게선 더 없이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답답한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뚫어놓고 싶습니다. 허나 기꺼이 송 판관을 따라 나섰다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폭발해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모든 화를 판관께 고스란히 쏟아 부을 것이고, 그래도 풀리지가 않으면 제가 가진 모든 권력을 이용해 분풀이를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철부지에 불과합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그래도 답답한 이 마음을 뚫어주고 싶으십니까?”
은명의 말투는 더 없이 서늘했지만 그럴수록 익정은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테지요.”
“좋습니다. 기꺼이 그대와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결정을 내린 은명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주변 사람들을 모두 물린 채 홀로 익정을 따라 나섰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공주의 추상같은 명에 어찌 항명할 수 있으랴. 수비와 호위무사가 멀어지는 공주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데 뒤에서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어찌하여 아무도 마마를 따르지 않았던 것이야!”
“지평 나리! ……마마께서 아무도 따르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내와 단 둘이만 가시게 했단 말이냐?”
서율의 노여움에 수비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함께 있던 군관이 끼어들었다.
“보이지는 않으나 다른 무사들이 마마를 호위하고 있습니다. 마마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목적지에 당도하면 어디에 계시는지 연통이 올 것입니다.”
애간장을 태우며 사헌부에서 모전교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그였다. 멀리서 공주를 알아보고 처음에는 얼마나 안도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옆에 있던 건장한 사내를 보는 순간, 서율은 놀라움으로 그 자리서 걸음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익정이었다. 공주께서 사내답고 호탕함이 넘치는 바로 그 익정과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고 계셨던 것이다. 알 수 없는 분노로 머리 꼭대기가 뜨끈뜨끈 달아오르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공주가 홀로 익정을 따라 나선 것이다.
서율은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저 두 분이 어떻게 서로를 알고 있단 말인가. 문득, 청월관에서 익정이 빈궁마마의 친척 동생에 관해 물었던 일이 떠올랐다.
“화경궁에 빈궁마마의 친척 동생이 머물고 계시느냐?”
“아니요, 그런 분은 아니 계시는… 헉!”
고개를 저으며 부인하던 난이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닫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아 보지만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다.
“그동안 마마께서 마음대로 바깥출입을 하셨던 것이냐?”
“그게……”
“일단 화경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예? 사헌부로 다시 안 돌아가십니까?”
폭발 일보 직전까지 치달은 서율은 이미 화경궁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피융-
은명은 과녁을 열 보정도 가까이에 대어 놓고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중전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 자신이 김서율에게 쏟아 부었던 모진 말들도 떠올렸다. 정신없이 비실비실 웃음만 흘려대던 그의 막내숙부도 떠오른다.
‘그래서였습니까? 살아생전 어머니께서는 단 한 마디, 원망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피융-
‘화경궁에 갇혀 그 긴긴 세월, 오로지 침묵으로만 일관하셨지요. 한 번씩 피를 토해낼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시면서도 조정의 잔인한 처분을 언제나 담담히 받아들이셨습니다.’
피융-
‘아름다운 화경궁에서 저는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송구합니다, ……그 생지옥 속에서 저 혼자만 행복하였습니다.’
어느덧 시야가 흐려진 은명은 결국 마지막 화살을 허공에다 쏘아버리고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무엇이 그리 답답한 게요. 무엇이 그리 소저를 울게 하는 것이요.’
활 쏘는 법을 가르쳐주고 뒤로 물러나 있던 익정은 흔들리는 여인의 두 어깨를 지켜보며 가슴 한쪽이 뻐근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몇 번의 만남으로 마음속에 깊이 들어와 버린 그녀. 당장이라도 달려가 눈물을 닦아주고 시름과 걱정을 대신 해결해 주겠노라,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지켜보는 것마저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 지금으로선 이렇게 멀리서 지켜보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 어깨를 떨어대던 그녀가 이만 돌아가겠다며 그에게로 왔을 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한 얼굴이었다. 물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심사를 노골적으로 풍기고는 있었지만……. 돌아오는 내내 입도 벙긋할 수 없었던 익정은 새삼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껏 살아오며 누군가의 기분에 이토록 휘둘려 본 적이 과연 언제였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정말 여러 가지로 멀쩡한 사람을 눈치 보게 만드는 여인이었다.
“내일이 되면 손목과 팔, 어깨부위까지 몹시 뻐근해질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요.”
하도 새침해 있기에 대꾸도 안 해 줄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가 호응을 보이자 그는 더 길게 대화를 끌어가고 싶었다.
“원하시면 다음에도 활을 쏘게 해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방법을 알았으니 후원에 과녁을 마련할 것입니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그냥 저에게 부탁을 하시지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래야 우리가 또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은명은 걸음을 멈추고 익정을 마주보았다.
“소저를 만날 수 있는 핑계를 제게 만들어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대답은 매우 빠르고 주저함이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이미 마음에 품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시작된 감정이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송 판관께서는 제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명이 소저의 한마디 한마디에 익정은 아릿아릿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조심조심 말해줄 수도 있으련만 정말 인정머리 없는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은명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사내의 고백을 받고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곧바로 정리에 들어갔다.
“저는 어리석고 못된 사람입니다. 송 판관께 거짓말을 한 것도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 이 못난 사람을 품으셨다면 마음에서 빨리 지워달라는 소리입니다.”
“저는 안 되는 것입니까?”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사려 깊고 다정한 분이시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저 모퉁이를 돌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 나오니 이쯤에서 헤어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은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깊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 은명은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야멸차게 돌아서는 그녀를 보며 익정은 단번에 거절당했음을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품었던 연정이었다. 서운했던 것일까, 느닷없이 목구멍과 눈동자가 따끔거려오자 익정은 또 다른 이유로 당혹감에 휩싸였다. 씩씩한 기상으로 뭇 사내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아온 자신이었다. 한데 여인에게 거절당했다고 이리 심약해져는 민망하게 훌쩍거리기까지 하고 있으니. 그럼에도 자꾸만 울고 싶은 이 마음을 어찌한단 말인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쓰라린 감정에 익정은 목에서 솟아오르는 울먹거림을 꿀꺽꿀꺽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
‘품었다면 빨리 지우라니요. 그게 지운다고 지워지는 감정이겠습니까. 당신은 정말 몰인정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리 설레고 좋은 걸 어찌하겠습니까.’
김서율이 화경궁 안채에 자리한 지 벌써 두 시진. 그 긴긴 시간, 조금의 미동도 없이 정좌하고 있는 중이다. 공주께서 익정에게 옆자리를 내어준 사실은 그에게 묵직한 충격을 남겨 아직까지 평정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분노가 끝도 없이 치밀어 온몸이 홧홧하니 불에 덴 듯하였다. 폭발할 것 같은 기운에 서율은 불끈 주먹을 말아 쥐는데 드르륵 문이 열리고 공주께서 성난 걸음으로 들어와 상석에 털썩 주저앉는다.
“당분간 강론은 듣지 않겠습니다. 기별을 드릴 때까지 기다리시지 바쁘시다는 분이 어찌 그리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터질 듯한 분노를 간신히 누르며 서율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가슴이 답답하여 조금 거닐다 왔습니다.”
“그는 우의정 대감의 장남이자 한성부의 판관입니다. 신분을 속이고 그와 함께 다니시다가 두 분을 모두 아는 누군가가 목격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쓸데없는 추문에 휘말릴 수도 있음을 왜 생각지 않으십니까!”
단단히 화가 난 그는 저절로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제게 마음을 품지 말라, 똑똑히 전하고 왔습니다.”
“벌써 그렇게 가까워진 것입니까? 마마께서는 정말 여러모로 저를 놀라게 하십니다!”
중전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이 되어 달려온 서율은 본래의 목적을 잊고 엉뚱하게 엇나가고 있었다. 공주의 말인 즉, 익정이 벌써 마음을 고백하였음을 뜻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진전되었다는 게 서율은 참을 수가 없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무슨 일이든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그가 이번에는 연정에 눈이 멀어 찌질한 투기심에 사로잡힌 것이다. 하나 생전 처음 겪는 일이니 그게 무슨 감정인지 어찌 알 수 있을까. 또한 본인조차 모르는 김서율의 감정을 공주가 먼저 알아챌 리 만무했다. 은명에게는 그저 비꼬는 말로만 들려올 뿐.
“이제야 알겠습니다. 스승님께선 언제나 제게 차갑고 가혹하셨습니다. 하여 쉽게 버리고 끊임없이 밀어내기만 하셨지요. 공주랍시고 알지도 못하면서 스승님을 원수의 자식처럼 취급을 하였으니 그동안 대꾸도 못하시고 얼마나 억울하셨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송 판관과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 이리 말씀을 하셔야지요!”
“차라리 시원하게 말해주지 그러셨습니까. 애초에 싸움을 건 쪽은 네 외조부였다. 네 외조부가 나의 아버지께 누명을 씌우고, 나의 조부와 조모를 처참하게 죽였으며 그 덕에 나의 숙부가 정신 줄을 놓아버린 것이다!”
흥분한 은명은 말을 하면서도 눈물을 찔끔찔끔 내보였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있던 서율은 둔기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마마!”
“지금의 좌상, 우상, 이판, 병판, 대제학 가문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일방적인 피해자인양 온갖 모진 소리를 다 쏟아냈으니 그동안 얼마나 가소로우셨겠습니까. 네 외가는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 모든 것이 다 인과응보였다, 왜 진실을 말해주지 않은 것입니까! 왜 저를 이리 비참하게 만드셨습니까!”
그동안 금기시 되어온 말이었다. 예를 숭상하는 이 나라에서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사제지간의 진흙탕 싸움. 경산부원군이 야비하게 선제공격을 했고, 이쪽에선 그보다 더 비열한 방법으로 철저히 되갚아주었던 부끄러운 과거였다. 때문에 모든 죄를 당시 병판이었던 최진욱 대감에게 돌리고 그 뒤에 부원군이 있었음을 쉬쉬하며 모두 덮어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공주의 입에서 그때의 일이 튀어나올 줄이야.
‘중전께서 공주마마께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인가? 그분은 그 일을 어찌 아시고? 이판대감……. 지켜지는 비밀이란 없단 말인가.’
흐느낌을 간신히 참아내느라 공주의 온몸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서율은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작은 숙부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당분간은 화경궁을 찾지 말아주십시오. 지금은 스승님을 뵙는 것조차 불편합니다.”
차갑게 위로를 거절한 은명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음을 확고히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얼굴 위로 근심이 드리워진다. 이대로 화경궁을 떠나고 싶진 않지만 공주께서 받은 상처가 꽤 깊어 보였다. 당분간 시간을 드려 마음을 추스르게 하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일지도. 결국 서율은 예를 취하고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저하께서도 그때의 일을 이미 알고 계셨단 말인가?’
집으로 들어선 서율은 사랑채로 향하며 자선당에서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화를 입은 가문 중에서도 몇 명만이 알고 있는 일급비밀이었다. 그런데 그 비밀을 세자와 중전께서 알고 계셨고 이제는 공주까지 알아버린 것이다. 머리가 복잡해진 서율이 한숨을 내리 쉬며 고개를 드는데 좌상 대감이 사랑채 마당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분이었지만 그때그때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를 통해 서율은 부친의 기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지금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이신다.
“들어오너라.”
좌상은 짧은 말만 남기고 안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그 불편한 심기는 아마도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이라. 곧바로 따라 들어가 자리를 잡자 좌상은 오랫동안 말없이 아들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무엇이든 꿰뚫어 볼 듯한 부친의 날카로운 시선은 여지없이 그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안면이 딱딱하게 마비되어 갈 무렵 부친의 군더더기 없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공주께서 너를 마음에 두고 계시더냐?”
사족을 모두 빼버린 단도직입적인 답변을 원하고 계신 것이다. 하여 서율은 부친의 뜻에 따라 이제 확실히 깨달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된 그의 감정을 솔직하게 실토하였다.
“그분을 소자가 마음에 담고 말았습니다.”
쾅-
아들이 선선히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자 좌상은 주먹 쥔 손으로 경상을 세차게 내리쳤다. 이제껏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반응. 서율은 속으로 매우 놀라고 있었다. 그 무엇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던 분, 화가 날수록 더 차갑게 식어버리시는 분이 아니었던가. 그 정도로 원한이 깊고 깊으신 것이리라. 그의 마음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는다.
“네가 어찌! ……당장 강론을 중단하거라!”
“가고 싶어도 당분간은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등바등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눈길이, 마음이, 온몸의 신경이, 전부 공주에게로만 향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부친의 원한이 아무리 깊다 하여도, 머릿속에서 아무리 안 된다 부르짖어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해서 서율은 이제 그러한 자신을 인정하고 그 사람을 향한 이 마음을 솔직히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러고 싶었다.
“아버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자 아직 미욱하여 솟구치는 감정을 그리 쉽게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집안의 이해관계보다도, 아버님의 분노보다도, 그분의 눈물이 더 신경 쓰이고 더 가슴 아플 따름입니다.”
좌상 또한 속으로 크게 놀라고 있었다. 학문과 무예, 그리고 일밖에 모르던 아이였다. 그리 가르쳤고 그리 이끌어왔다.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덧 여인을, 그것도 공주를 마음에 담아버린 것이다.
“부탁입니다, 아버님. 지금은 소자를 모른 척하여 주십시오.”
더 잡고 있어봤자 무슨 소용 있을까. 물끄러미 바라보던 좌상은 고개를 차갑게 돌려버리고 말았다.
“못난 놈……. 물러가거라.”
자리에서 일어난 서율이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서려 하자 좌상의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이 널찍한 방안에 한 번 더 울려 퍼졌다.
“연정이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고 하찮은 감정에 불과한 것이니라.”
양병수는 따라붙은 자들을 힘겹게 따돌리고 오랜만에 벌리 어르신을 찾아뵈었다. 발을 치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음에도 저 노인네 앞에만 서면 왜 이리 식은땀이 나는 것인지. 아마도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자신은 저자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으니까.
“날랜 자들로 몇 명 뽑아 개장국 한 그릇씩 푸짐히 먹여 두시게.”
“예? 그럼……”
“과천으로 향하신다지?”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으로 보내려 하십니까?”
“후훗, 저리 죽이고 싶어 하시는데 낸들 어쩌겠는가. 원대로 죽여 드려야지. 명심하시게, 윗분은 적당한 시점에서 빠져나오고, 아랫분은 확실히 명줄을 끊어드려야 할 것이네. 절대로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야.”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해 보이라 전하겠습니다.”
“이 기회에 그동안 따라붙은 꼬리들도 전부 잘라내시게.”
“예, 어르신!”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무척이나 성가셨지만 건드리지 말라는 명으로 그동안 얼마나 불편했었는지. 이번 일을 잘 치르고 나면 다음은 강준혁 차례가 될 것이다. 양병수의 얼굴 위로 음흉한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 문후를 올리겠다며 아침 댓바람부터 홀로 들이닥친 세자는 중전과 마주앉아 서로를 싸늘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궐에서 가장 중요한 미덕은 입조심이라 하였습니다. 한데 내명부의 수장으로 모범을 보이셔야 할 중전마마께서 상궁들도 하지 않는 실수를 하시다니요.”
“실수라고요?”
“마마께서는 사사로이 공주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세상 어느 어미가 딸에게 그런 말들을 고의로 퍼부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실수를 하신게지요.”
오라비가 동복누이의 편을 드는 것은 천륜지정. 그럼에도 당분간 공주를 감싸는 그 어떠한 말도 듣고 싶지 않았던 중전은 울화가 치민다.
“제가 공주에게 몇 마디 한 것을 못 참으시고 아침부터 이리 달려오시다니요.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어찌 이리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까.”
“그때 사건의 최종 결정권자는 선대왕마마셨습니다. 왕실이 내린 결단이었지요. 공주에게 말씀하신 대로라면 왕실은 중전마마 본곁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온데 마마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간택에 참여를 하셨던 것입니까?”
세자의 물음에 보희는 말문이 막힌다.
“궐에 들어오신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고 그러신 것 같으니 이번 일은 이쯤에서 묻어두겠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이 또다시 반복된다면 저도 계속해서 모르는 척 묻어 둘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마마께서는 왕실을 수호하고 번성시켜야 할 대궐의 어른이십니다.”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공주를 데리고 며칠 간 행궁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소자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세자는 쌩하니 나가버렸고 아침부터 기분이 상한 중전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분노하였다.
‘상극인 게야. 공주와는 전생에 철천지원수였던 것이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면전에서 쓴소리를 한 세자보다 공주가 더 밉고 끔찍스럽다니. 안색이 점점 붉으락푸르락 변해 가는데 밖에서 안빈이 당도했음을 알리는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안빈이 들어와 예를 올리고 다소곳이 마주 앉는다. 거동은 정갈하였으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한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가뜩이나 기분이 저조했던 중전은 그러한 안빈을 보자 더욱 못마땅하여 쌀쌀맞게 묻는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앞에서 세자 저하를 뵈었습니다. 매우 언짢아 보이시던데 혹 공주마마와의 일을 추궁하러 오셨던 것인지요?”
안빈의 물음에 중전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짓는다.
“궐에는 비밀이 없다더니 그 말이 참이었나 봅니다. 공주와의 일을 어찌 아신 겝니까?”
“걱정이 되었는지 부원군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버님께서요?”
“마마, 공주를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예, 공주 뒤에 세자가 저리 버티고 있으니 무서워서 어디 한 마디라도 하겠습니까? 하지만 세자가 저리 오냐오냐하고 금상께서 침묵을 하시니 공주가 더 안하무인이 되는 것입니다. 못된 버릇을 똑바로 잡아 줄 어른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안빈은 말을 할수록 흥분하고 있는 중전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금상께서 공주의 행동을 그저 침묵하고 계신다, 이리 생각하십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마마께서도 차차 깨닫게 되실 겁니다. 여하튼 혜빈도 어쩌지 못한 공주입니다. 금상과 세자께서 버티고 계시는 한, 그 누구도 공주를 함부로 건드릴 순 없습니다.”
아직 공주에 대한 감정이 누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와중에 안빈까지 공주를 감싸는 듯한 발언을 하자 짜증이 난 중전은 벌컥 성을 내어 버린다.
“나는 이 나라의 중전입니다! 중전이 공주에게 한 마디를 할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가 그리 큰일이라고 이 난리를 치는 것입니까. 세자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화가 났기로서니 곤전인 내게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마마, 듣는 귀가 많사옵니다.”
안빈에게서 고개를 홱 돌려버린 중전은 치솟는 분노를 감당치 못해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온화한 성정과 정숙한 몸가짐으로 한때 조선 최고의 신붓감이라 칭송 받았던 여인. 그 아름다웠던 이가 어찌 이리 조그만 일에도 파르르 떠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일까. 어린 중전을 바라보는 안빈의 얼굴에 측은한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호호호.”
후원을 사뿐사뿐 거닐던 혜빈이 상궁의 말을 전해 들으며 통쾌하게 웃어젖힌다. 혜빈의 웃음소리는 시원스러웠으나 상궁은 큰 웃음소리가 민망하여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마, 진정하십시오.”
“즐거워서 웃는 건데 뭘 그러느냐. 호호호…….”
“그리 재미있으십니까?”
“지 감정 하나 주체 못해 일을 저질러 세자에게 당한 꼴이 재미있지 않느냐. 공주를 불러다 그런 소리를 내뱉다니. 내가 이 재미로 궐에 산다니까.”
내전에서 기분이 상했던 그날 밤, 혜빈은 처소로 돌아가 중전을 미행했던 무사를 불러들였다. 중궁전에 심어두었던 궁녀로부터 중전이 잠행을 나간다는 기별을 받고 몰래 그 뒤를 밟게 하였던 것이다. 놀랍게도 왕비의 출궁 이유는 김서율. 혜빈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중전께서 지평을 연모하였음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국모가 된 지금까지 저리 질질 끌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어차피 이어질 수도 없는 공주와 지평을 두고 채신머리없이 투기까지 하고 있었다.
“쯧쯧, 그리 덜 떨어진 분이었다니. 정 포기를 못하겠으면 내게 와 지평의 안사람이 되게 하여 달라 싹싹 빌 것이지, 궐에는 왜 들어 왔누! 이 나라의 국모는 물론, 지평의 안사람이 될 그릇도 못 되는 사람이니라.”
못마땅한 얼굴로 혜빈이 혀를 끌끌 차는데 저 앞에 빈궁이 마주 오고 있었다. 기분이 나름 고조되어 있던 혜빈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참으로 분주해 보이십니다.”
“행궁으로 행차하시는 저하를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에 하는 일도 없이 이리 뛰어만 다니고 있습니다.”
“홀몸도 아니신데 아랫것들 시키시지 뭘 이렇게 직접 뛰어다니십니까. 회임 초반엔 더욱 조심하셔야 합니다.”
“공주께서도 함께 가시니 제가 더 신경이 쓰입니다.”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참, 따로 생각나는 음식은 없으십니까?”
빈궁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뭇거리는 게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눈치 빠른 혜빈은 편안한 얼굴로 채근하였다.
“괜찮습니다, 말씀해보세요. 그 정도는 제가 챙겨드리겠습니다.”
“……실은, 작년에 사가에서 해 온 음식이라며 주셨던 그 효갈비가 요즘 자꾸 떠오르기는 합니다. 저하께서도 참 좋아하셨는데.”
“호호호, 이번에도 군 아기씨인가 봅니다.”
말해 놓고 민망했는지 빈궁이 얼굴을 붉히자 혜빈은 빙긋 웃으며 선뜻 해주겠다, 나선다.
“진작 말씀을 하시지요,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양념이 배려면 하루 이틀 시간이 걸릴 것이니 당장 준비하라 연통을 넣겠습니다. 준비가 되면 빈궁께는 물론 행궁으로도 보내드리지요. 공주께서도 좋아하실 겝니다.”
“이리 신경을 써주시니 고맙습니다.”
빈궁은 혜빈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정말 화끈하고 뒤끝 없는 성격이었다.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또 금방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말을 건넬 때에는 시누이인 공주와 비슷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성정이 비슷하여 두 분이 안 맞으시는 건가?’
뒤를 따르던 나인들 중 하나가 의뭉스러운 빛을 띠는 줄도 모르고, 빈궁은 기분 좋은 속웃음을 짓고 있었다.
행궁을 끼고 빙 둘러져 있는 산속의 어느 오래된 나무 위. 굵은 가지에 편안하게 걸터앉은 준혁은 천리경으로 행궁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어디 보자…… 앗, 저기 계시네!”
저 아래서 세자가 공주의 옆에 붙어 활쏘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더 자세히 보고 싶었던 준혁은 굵은 가지를 꽉 붙잡고 몸을 앞으로 쭉 빼려는데,
바스락, 바스락-.
바로 밑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천리경에서 눈을 떼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덩치 큰 장정 둘이 나무 밑을 막 지나는 게 보인다. 검은 색 무복으로 몸 전체를 감싸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주변을 경계하는 그들. 나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그들은 준혁과 마찬가지로 행궁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도, 그들도, 행궁 안이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으나 목적은 분명히 달라 보였다. 준혁에게서 개구진 미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면, 그들에게선 소름 끼치는 살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세자가 싫다는 은명을 우격다짐으로 잡아끌어 과천행궁에 내려온 지 벌써 나흘. 조용한 곳에서 허심탄회한 대화의 시간을 가지시려나, 했는데 그건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내려오자마자 누이 곁에 찰싹 붙어 말타기, 활쏘기, 봉희 등 몸에 무리가 가는 운동을 쉴 새 없이 시켰다. 덕분에 그동안 잠을 못 자고 뒤척였던 은명은 이제 밤만 되면 정신없이 곯아떨어지기 일쑤다. 오늘도 간신히 활쏘기를 끝내고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는데 세자는 대번에 말타기로 바꾸자는 제안을 해온다. 이에 한계에 다다른 은명은 불평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른 집은 여식이 다칠까 하여 말 근처에도 못 가게 한다는데 오라버니는 너무 하십니다. 그러다 제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엄살은……. 내가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걷게만 하는데 뭘 그리 겁을 내느냐?”
“겁을 내는 게 아니라 고단합니다. 어찌 나흘 내내 먹을 때만 빼고 하루 종일 움직이라 하십니까. 쉬고 싶단 말이어요.”
“그럼 함께 걷겠느냐?”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금세 다른 제안을 해오는 세자를 보며 은명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이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회임한 빈궁을 궐에 홀로 두고 이리 애를 쓰는 모습이시라니. 오라비에게 투덜거린 게 괜히 미안해진 은명은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월의 햇살이 기분 좋게 내리쬐어 느긋하게 걷기에는 안성맞춤인 날이었다. 사방으로 보이는 건 파릇파릇한 신록과 푸른 하늘. 살랑살랑 불어와 은명의 몸을 감싸는 간들바람이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기만 하다. 어머니…… 도취된 듯 바람을 느끼던 은명은 허공을 응시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그래.”
누이의 보폭에 맞춰 조용히 따라오던 세자가 부드럽게 답했다.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러는데 말입니다. 십 년 전,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승하하시던 그 해에 무슨 큰 사건이 있었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궁금했다. 찾고 싶었다. 어머니의 그 분을……. 용서를 구하고 계셨으니 필시 큰일이 벌어졌을 터. 그 해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캐다 보면 누군가 윤곽이 잡히지 않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다른 일도 많았을 것인데 이상하게 그 해에는 어머니를 보내드린 일 외에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제가 너무 어려 그러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네 기억이 맞을 것이다. 유난히 평온하고 넉넉한 한 해였지. 풍년이 들어 백성들의 살림이 윤택해지고 왕실을 뒤흔들었던 정쟁이 다소 수그러져 궐 안팎이 꽤 안온하던 시기였다. 대행왕비께서 붕어하지 않으셨다면 평안한 한 해로 길이 기억되었을 것이다. 이듬해 대신들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구나.”
“그렇군요. 평안한…… 한 해였군요.”
그러고 보면 어머니의 그분이 꼭 좋은 가문에서 나고 자라 큰일을 해온 사람일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렇다면 범위는 확대되고 서찰의 주인을 찾는 일은 더욱 더 어려워진 것이다.
‘어머니…… 시간이 다소 걸린다 해도 참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분을 찾아내어 어머니께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을 꼭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분에게 또 다른 의미의 바람이 불어올 수도 있음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안타까움에 목구멍이 따끔거리는데 오라비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평소 해보고 싶었던 게 있으면 말해 보아라. 남은 기간, 네 원대로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다.”
오라버니가 얼마나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이러고 있는 것인지 은명도 잘 알고 있었다. 계획대로 칠일을 꽉 채워 돌아가면 세자는 한동안 쉴 틈도 없이 빠듯하게 일에만 매달려야 할 것이다. 그런 오라비가 안쓰러워 은명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없습니다. 이제 그만 도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내 걱정을 하는 것이라면 안 그래도 된다. 우리가 또 언제 이렇게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느냐. 나는 여기서 칠일을 꽉 채우고 돌아갈 것이다. 조만간 반가운 손님도 당도할 것이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거라.”
“손님이요? 누가 또 오기로 하였습니까? 혹, 정한 오라버니가 오시는지요?”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세자는 말없이 그저 웃기만 하더니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되어 은명의 손을 꼭 잡는다.
“많이 힘들었느냐?”
때가 되었다 생각한 것일까. 세자가 현재 가장 아픈 곳을 직접적으로 파고들었다. 은명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침착하게 답을 하였다.
“예, 충격적이었습니다. 외조부로 인해 희생된 분들께 죄스러웠고, 고통 속에 사셨을 어머니와 오라버니, 그리고 외가 식솔들이 안타까웠습니다. 허나 계속 우울해하진 않을 겁니다. 외조부의 핏줄로서 책임져야 할 괴로움은 감당할 것이고 누릴 수 있는 기쁨은 기꺼이 누리며 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어요.”
“이제 정말 다 컸구나. 은명아, 나는 네가 그 일을 죽을 때까지 몰랐으면 하였다. 미련하게도 나는, 네가 예쁜 것만 보고 예쁜 생각만 하며 살아주길 바랬던 것 같구나. 세상은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아버지와 같은 오라버니. 부왕의 정을 모르고 자란 은명에게 세자는 오라비요, 아버지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런 오라버니의 배려와 아픔도 모르고 크게 성을 내버린 지난날이 후회스러워 은명은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무조건 감추고 모르게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앞으로는 무턱대고 숨기는 대신 네게 털어놓고 상의를 하도록 하마. 뒤늦게 다른 곳에서 진실을 알게 되면 네가 어떤 기분이 들지, 미리 짐작하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저하의 탓도 아닌데 제가 무람없이 성을 내어 송구합니다. 잘못하였습니다.”
은명이 반성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세자는 그런 누이가 귀여워 말랑말랑한 뺨을 장난스레 꼬집어 주었다. 두 오누이 사이에 다시금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재미는 있었지만 피곤한 하루였다. 뻐근해진 몸을 뜨거운 물에 푹 담갔다 다시 뽀송뽀송 말린 은명은 폭신한 금침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늘도 역시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스르르 달콤한 수면이 쏟아져 내린다. 정신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려던 찰나,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와 귀를 성가시게 하였다. 가만히 누워 그 소음이 잠잠해지길 기다려 보지만 쉽게 수그러들질 않는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인가 싶어 은명은 결국 옷을 다시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금군들이 이리 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는 게 꼭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같이 가세.”
은명은 최 상궁을 대동하고 서둘러 세자가 머무는 인양전으로 나가보았다. 세자는 밖으로 나와 익위사 관원들과 심각한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오라버니, 무슨 일입니까?”
“소란스러워서 깬 것이냐?”
“잠들기 전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입니까?”
“전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는구나.”
“예?”
은명이 심각해지자 세자가 얼른 다음 말을 덧붙였다.
“걱정하지 말거라. 이미 알고 있는 병환이니 어의들이 손을 썼을 것이다.”
“지금 궐로 돌아가십니까?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다. 나는 말을 타고 올라갈 것이니 너는 내일 아침 남은 이들을 이끌고 올라오너라.”
공주가 움직이려면 덩을 타야 했다. 그러면 시간이 많이 지체되는 것은 당연한 일, 세자가 말을 타고 먼저 궐로 돌아가는 게 맞는 순서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어두운 길이니 조심하십시오.”
걱정이 된 은명은 세자가 익위사 관원들과 말을 타고 떠나는 것을 배웅한 뒤에야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머물고 있는 처소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이상한 점이 감지되었다. 가만 보니 최 상궁의 뒤를 따르는 나인들의 수가 현저히 적었던 것이다. 아무리 침수에 들었다 나온 것이라 하나 공주가 일어나 밖에서 머문 지 벌써 반 시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긴 시간 동안 나인들이 한번 내다보지도 않고 있었단 말인가? 여태껏 이런 적이 없었거니와 최 상궁 또한 그러한 행동을 묵인할 인사가 아니었기에 은명은 무슨 일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나인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어디가 아픈지 초저녁부터 빌빌대더니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녁으로 나온 음식들 중 상한 것이 있었나 보옵니다.”
“그럼 진즉 의원에게 보일 것이지!”
“배앓이를 하여 지친 것일 수도 있으니 우선은 쉬게 놔두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도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걱정이 된 은명이 최 상궁을 바라보는데 그 또한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 뒤에 서 있는 나머지 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반쯤은 눈을 감고 있는 게 어디가 아픈 것인지, 너무 피곤해 가수면 상태인 것인지, 한눈에 보기에도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나는 들어가 바로 침수에 들 터이니 최 상궁과 너희들도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여라.”
“예, 마마. 소인이 금침을 봐드리겠나이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와중에서도 최 상궁은 책무를 다 하겠다며 나섰다.
“준비는 이미 되어 있으니 그럴 필요 없네. 어서 들어가 몸이나 좀 뉘이게. 들어가서 바로 눈을 붙여야 하네.”
은명은 궁녀들이 들어가서 쉴 수 있도록 재빨리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걱정은 되었으나 저녁때까지는 모두 쌩쌩한 모습들이었으니 최 상궁의 말대로 수면을 취하게 하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은명도 옷을 벗고 자리에 눕자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대로 수마에 빨려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잠을 잤을까.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무언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예리한 육감에 은명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꿈인 듯 생시인 듯 어둠을 뚫고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검은 인영이 있었다.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일까. 다음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은명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상체를 일으키고 말았다. 눈앞에서 누군가 두 손을 높이 치켜드는데 그가 움켜쥔 물체가 달빛을 받아 시퍼렇게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이다! 상황을 막 인지한 찰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악!”
은명이 비명을 지르자 자객은 칼을 더 높이 쳐들어 힘껏 내리치려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당탕-
누군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 검은 인영의 검을 대신 받아내었다. 몇 차례 자객의 검을 더 받아낸 그는 큰소리로 다급히 외쳤다.
“피하십시오!”
뛰어 들어온 사람 역시 천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도움을 주러 온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은명은 자리옷을 입은 채 정신없이 뛰쳐나가며 힘껏 소리를 질렀다.
“자객이다! 자객이 들었다! 아무도 없느냐! 최 상궁! 아무도 없는 것이냐!”
아무리 목청 높여 소리를 쳐봐도 공허한 메아리만 되돌아올 뿐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는다. 인양전으로 허겁지겁 뛰어가며 울부짖던 은명은 싸한 느낌에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어둠 속을 둘러보았다. 행궁 전체가 괴기스러울 만큼 적막에 잠겨 단 한 줄기의 불빛도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은명이 기침만 해도 기가 막히게 듣고 달려오던 최 상궁이 비명 소리를 못 들을 리 없었다. 밤새 보초를 서는 금군들이 행궁을 이리 컴컴하게 놔둘 리 만무했다. 무슨 일이 터진 것이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데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간신히 고개만 돌려보니 검은 인영 하나가 은명을 향해 검을 쳐들고 날아오르듯 높이 뛰어올라 있었다.
‘죽는다!’
공포에 휩싸인 은명은 그대로 얼어붙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정녕 이대로 죽는 것이란 말인가? 그때 휘리릭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중검 하나가 날아와 검은 인영의 몸을 정확하게 맞추었다. 은명을 향해 날아올랐던 그 인영은 신음을 내며 두 보 앞에서 처참하게 바닥으로 고꾸라져버린다. 두려움의 눈물이 또르르 흘렀지만 은명은 칼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문을 부수고 나타나 목숨을 구해준 그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준혁은 공포에 질려있는 은명을 데리고 달빛이 스미지 않는 어두운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구석에 몸을 쪼그린 은명은 바람에 흔들리는 수양버들처럼 달달 떨고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였다.
“나를 살려주었구나. 너는 누구이더냐?”
“저를 알아보실지 모르겠습니다.”
준혁은 얼굴을 가린 천을 내렸지만 은명은 너무 어두워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어두워서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대체 누구이더냐?”
“접니다. 제륜, 서제륜.”
“제륜…… 오라버니?”
“예, 화경궁에서 일 년 넘게 함께 살았던 그 제륜입니다.”
“세상에!”
은명은 놀라움과 반가움, 그리고 안도감에 눈물을 주르륵 쏟아내며 제륜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동안 얼마나 그리워하며 애타게 찾아 헤매었던가. 오랜 세월 수소문을 해봤지만 소식 한 조각 들을 수 없어 그토록 안타까웠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나타나실 줄이야.
“그동안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다들 어디에 계셨습니까? 외숙과 외숙모는 건강하신지요? 제현 오라버니와 숙영이는 잘 지내는지요?”
‘모르시는가!’
일순 준혁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지만 사방이 어두워 은명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합니다.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대체 저들은 누구입니까? 금군들이 전부 당한 것입니까?”
“모두 쓰러져는 있으되 잠든 것으로 보입니다.”
“잠이 들었다고요?”
은명은 침수에 들기 전, 최 상궁과 궁녀들이 지친 얼굴로 눈을 반쯤 감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그렇다면 누군가 음식에 약을 타 두었다는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준혁의 다급한 목소리에 더 이상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제 손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우선 행궁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준혁은 은명의 손을 잡고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쫓아가기가 버거울 정도로 빠른 걸음이었지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은명은 거의 뛰다시피 하여 보조를 맞춘다. 중문을 몇 번 지나자 눈앞에 상당히 널찍한 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이 마당을 가로질러 또 하나의 마당을 건너면 행궁 밖으로 나가는 남문이 나올 것이다. 손을 꼭 잡은 두 사람은 마지막 힘을 내어 마당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그런데 중간쯤 도달했을 때 인기척도 없이 여섯 개의 검은 인영이 나타나 순식간에 준혁과 은명을 포위하였다. 두려움에 휩싸인 은명은 몸을 떨며 준혁의 팔에 찰싹 달라붙는다.
“오라버니……”
빙빙 돌며 숫자를 확인한 준혁은 은명의 허리를 바싹 끌어당겨 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마마를 먼저 이 포위망에서 내보낼 것입니다. 남문을 나서는 즉시 고을 관아로 향하십시오. 남문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계속 달리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저 혼자만 살겠다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같이 가요, 오라버니.”
“제 인생 최대의 목표가 무병장수입니다. 살고 싶어 이리 하는 것이니 저를 살리고 싶으시면 제 말에 따라주십시오.”
준혁의 말에 울컥한 은명은 눈물이 그렁하여 속삭였다.
“이제 겨우 만났는데……”
“화경궁으로 찾아 뵐 것입니다. 명심하시오, 절대로 뒤를 돌아보시면 안 됩니다. 살고자 하신다면, 저를 살리고자 하신다면, 무조건 뛰셔야 합니다.”
준혁은 말을 마치자마자 은명을 옆구리에 낀 채 과감하고도 기습적으로 정면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검은 인영들 또한 한꺼번에 달라붙었고, 준혁은 그들을 막아내며 빈 공간 사이로 재빨리 은명을 밀어버렸다. 눈 깜짝할 새 포위망에서 튀어나온 은명은 땅바닥에 흉물스럽게 엎어졌지만 발딱 일어나 남문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 나간다. 손바닥과 무릎이 심하게 까져 피가 맺혀있었으나 아프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었다. 가엾은 사촌오라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면 다리가 부러져도 뛰어야 했다.
‘돌아보면 안 돼. 살려면, 오라버니를 살리려면, 무조건 달려야 돼.’
은명이 포위망을 뚫고 남문을 향해 달려가자 자객들 중 한 명도 재빨리 그 뒤를 쫓았다. 오늘의 사냥감은 공주. 저분이 죽어줘야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쉴 수 있었다. 쫓아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금방 따라 붙은 자객은 빨리 끝내고픈 욕심에 쥐고 있던 검을 공주의 등에 내리 꽂으려 오른 팔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으아악!”
손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끼며 검을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순식간에 손등과 팔뚝에 날카로운 표창들이 따다닥 날아와 박힌 것이다. 자객이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어느 틈에 쫓아온 준혁은 그의 등을 단번에 베어버렸다. 두 명이 쓰러지고, 네 명이 더 남아있는 상황. 그 넷과 정면으로 대치한 준혁은 낮고 스산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놈들은 여기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그때의 어린아이가 아니란 말이다!’
효경왕후마마의 사십구재가 끝나던 그 밤, 그의 가족은 무시무시한 살수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눈앞에서 온 가족이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데도 조용히 숨을 죽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시간.
우여곡절 끝에 의천 상단 대방의 양자가 되어 서제륜에서 강준혁이 된 그는 가장 먼저 검부터 손에 쥐었다. 손바닥이 짓무르고 온몸에 멍이 가실 날이 없었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독하게 달려들어 실력을 갈고 닦았다.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처참했던 그 밤의 고통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그들 일가가 도주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공주께서는 사실을 알고 계실 줄 알았다. 공주마마와 재회하면 차가운 땅바닥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부모님과 동생들의 무덤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공주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는 눈치였다.
‘아버지, 어머니! 대체 어디에 누워 계십니까? 제현아, 숙영아, 땅속에 온전히 묻히기는 한 것이냐?’
불쌍한 가족들이 깊은 산속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게 아닐까? 그대로 짐승들의 먹잇감이 되었다면……. 무서운 상상에 준혁은 온몸이 뜨거워졌고, 그 분노를 앞에 있는 자객들에게 고스란히 쏟아 부었다. 그 옛날, 부모님을, 동생들을, 잔인하게 베어버린 살수들이 그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준혁은 폭주하여 순식간에 셋을 베어버리고 마지막 남은 하나와 서로 검을 맞대고 힘겨루기에 돌입했다. 이미 여러 명을 혼자서 상대한 터라 힘이 많이 빠져있었다. 반면 뒤로 빠져 지휘를 하던 자객, 석칠은 여유가 넘쳐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검을 쥔 손에 힘을 바짝 주며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서는데 난데없이 달짝지근한 냄새가 준혁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살랑 바람이 불어오며 상대 놈에게서 뜻밖에 달디 단 내음이 전해진 것이다.
‘자객에게서 달달한 향이 난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석칠은 괴력을 발휘해 준혁을 밀어내며 검을 힘차게 내리쳤다. 재빨리 피했지만 왼쪽 팔에 검이 스치며 준혁은 쓰라린 통증을 느낀다.
“이런…… 결국은 피를 보는군.”
준혁이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동여매며 중얼거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석칠은 날렵하게 날아가 빠르게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 순간, 상처를 동여매던 준혁은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품고 있던 단도를 꺼내 상대의 얼굴을 휙 그어버렸다. 몸을 급히 뒤로 빼긴 했지만 석칠의 얼굴에선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 바로 밑에서 입술까지, 왼쪽 뺨 위로 흉측한 칼자국이 나버린 것이다.
“받았으니 돌려줘야지. 나는 셈이 정확한 사람이거든.”
준혁의 싸늘한 말에 석칠의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준혁도, 석칠도, 이제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쪽이 죽을 때까지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수밖에. 상처를 단단히 동여맨 준혁은 검을 힘주어 잡고 상대를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
‘나는 꼭 살아야 한단 말이다!’
“헉, 헉, 헉……”
준혁과 함께 있던 곳을 벗어난 은명은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저기 곤히 쓰러져있는 금군들을 보고 흠칫 놀라기를 여러 번. 하지만 뒤에서 자객이 쫓아오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온몸의 솜털이 바싹 곤두서는 것 같았다. 저 앞에 남문이 보인다.
‘여기서 잡히면 안 돼!’
“아악!”
이를 악물고 달리기에 속력을 가하는데 갑자기 머리카락이 전부 뽑혀나갈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몸이 뒤로 홱 젖혀지며 세상이 뒤집혀 버린다. 쫓아오던 자객이 무엄하게도 공주의 댕기 머리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겨 땅바닥에 처참히 팽개쳐 버린 것이다.
손등과 팔뚝에 표창을 맞은 자객은 독이 끝까지 올라 있는 상태였다. 혹시 몰라 상체 앞뒤로 단단한 가죽을 대어 치명상을 피하긴 했지만 등 뒤, 가죽 사이로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찌릿찌릿 통증이 퍼져 상당히 쓰라리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공주를 죽이기만 한다면 이러한 고생을 모두 잊게 할 만큼 엄청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검은 놓쳤으나 땅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가냘픈 공주 정도야 맨손으로도 얼마든 목숨을 거두어 줄 수 있었다. 감정 없는 얼굴로 공주에게 다가간 자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느다란 목을 어마어마한 힘으로 내리 눌렀다.
“크헉……”
숨이 막힌 은명이 사지를 바동거릴수록 자객은 두 손에 더 큰 힘을 가했다. 숨을 쉴 수 없어 꺽꺽대는 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이 고통으로 참혹히 일그러져 간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눈동자에선 뜨거운 눈물이 마구 분출되어 흘렀다. 도움을 요청할 수도, 도와줄 사람도 없는 상황.
‘어머니……’
공주의 반항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한 번 더 강하게 조여 완전히 끝을 내야 하는 법. 자객은 작정을 하고 두 손에 더욱 힘을 주는데 무언가 눈앞이 번쩍하고는 몸이 붕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뒷목에서 뜨거운 액체가 주룩 흐르는가 싶더니 퍽 소리와 함께 사내는 땅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 버렸다.
“공주마마? ……마마!”
“아학…… 헉, 헉, 헉……”
은명은 괴로움에 한쪽 머리를 땅에 박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 누군가 저를 가슴에 안아 올린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향기가 물씬 스며들었다. 낯익은 목소리의 누군가가 떨리는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쓸어주었지만 숨이 차고 정신이 없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마마, 마마! 괜찮으십니까? 어찌 이럴 수가! ……천천히, 숨을 천천히 내쉬어야 합니다!”
환청이 들리는 것인가,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다니. 은명이 눈을 깜박여 시야를 맑게 하자 달빛 속에서 저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김서율이 보였다. 정말로 그였다. 그가 와 있는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은명은 서율을 확인하자마자 밀려드는 안도감에 왈칵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흐흑, 흑흑흑……”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서율도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미어져 은명을 품속에 와락 끌어안는다. 흙바닥에 깔려 목숨이 위태로웠던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숨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공주께서 어찌 이토록 참담한 지경에 처하셨단 말인가.
“괜찮습니다. 소신이 왔으니 이젠 괜찮습니다.”
공주의 뺨이 닿아있는 그의 목덜미가 눈물로 축축해지고 있었다. 서율은 은명의 머리 위로 뺨을 맞대고 한쪽 손으로 머리와 등을 살살 쓸어주며 잠시 울음이 잦아들길 기다린다. 그러나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행궁을 벗어나지 않으면 더 큰 위험을 맞닥뜨릴 수도 있는 일. 서율은 공주를 품에서 떼어내 눈물을 닦아준 뒤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다.
“지금 당장 행궁을 떠나겠습니다.”
“저, 저…… 안……”
제륜 오라버니를 데려가야 한다. 은명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을 심하게 졸린 바로 직후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를 않는다.
“송구합니다, 지금은 지체할 수 없습니다. 마마를 업겠습니다.”
은명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서율은 그대로 공주를 업고 말을 세워둔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떼었다. 은명은 애가 타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데 제륜이 있는 곳이 섬뜩하리만치 고요하기만 하다.
‘살아계십니까? 무사하십니까? 제발 살아주십시오. 제 앞에 다시 나타나 주십시오!’
은명이 계속 뒤를 돌아보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밝은 달빛 아래로 인영 하나가 보란 듯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이렇게 숨을 쉬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어서 가시라는 듯. 인영을 확인한 은명의 두 눈이 회동그랗게 떠지며 안도의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제륜 오라버니가 무사하셔! 무사하셔! 흐흑…… 앞으로는 제가 돌봐드릴 것입니다. 저를 꼭 다시 찾아와 주십시오.’
사촌오라비가 살아있음을 확인한 은명은 눈물을 훔쳐내더니 몸을 바로 하여 서율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이제는 정말로 안심할 수 있었다.
말에 올라탄 은명은 서율이 자신을 앞으로 태우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행궁에서 천천히 걷는 말 위에 타본 것이 경험의 전부인데 앞으로 타다니. 차라리 그의 등 뒤에 붙어 얼굴을 묻고 아무 것도 보지 않는 게 훨씬 나았다. 은명은 등 뒤로 바싹 붙어있는 서율을 돌아보았다.
“제가 뒤로 타겠습니다.”
“안 됩니다. 저들이 따라붙어 활을 쏘거나 단검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예? 그럼 스승님께서는……”
“출발하겠습니다. 꽉 잡으십시오.”
서율은 공주의 갈라지는 목소리를 끊어버리며 급하게 말을 출발시켰다. 그리고는 한참을 달렸다. 마주 오는 바람이 따가워 숨쉬기도 벅찬 은명은 상체를 잔뜩 구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저 뒤에서 여러 마리의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따라온 것일까?’
은명은 서율을 쳐다보고 싶었지만 어마어마한 말의 속도에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 하였던가. 은명은 모든 것을 서율에게 맡기고 방해만 되지 말자는 생각으로 상체를 동그랗게 웅크러트린다.
‘끈질긴 놈들.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찌하여 공주마마를!’
서율은 말의 속력을 최대한으로 높이고 있었다. 세자로부터 수원에서의 조사를 마치는 대로 행궁에 들르라는 기별을 받고 얼마나 들떠 있었는지 모른다. 드디어 공주를 뵐 수 있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서둘러 오던 중 치경의 말에 문제가 생겨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착을 해보니 행궁을 지켜야 할 금군들이 모두 잠든 듯 쓰러져 있었고, 몇몇은 검에 베인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들 중 숨이 붙어있던 한 금군이 피를 토하며 상황을 알려주었다.
[저하께서…… 헉, 떠나신지 한 식경이… 안 되었습니다. 공주마마께선…… 안에 계십니다. 위험합…… 저하도, 공주마……]
금군은 그대로 숨이 끊어졌고 서율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치경에게 명을 내렸다.
[당장 저하의 뒤를 쫓아가주게. 무슨 일이 일어도 저하를 지켜드려야 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치경은 신속히 세자의 뒤를 따랐고, 서율은 공주의 처소로 향했다. 공주께서 계셔야 할 곳의 문짝이 부서지고 방안이 난장판이 된 것을 보고 그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다행히 그곳에서 목숨을 잃은 자는 자객이었고, 곳곳에 자객으로 보이는 자들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하여 공주께서 무사들의 호위를 받아 무사히 행궁을 빠져나가신 게 아닐까, 잠시 안도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남문 쪽에서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한 여인을 죽이려 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귀하신 분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잔인하게 죽이려 하였다니! 경악스러웠고 분노가 솟아올랐다.
공주를 앞에 태우고 전속력으로 내달리는데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여기서 잡히면 공주도 자신도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사내로 태어나 연모하는 여인을 지키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공주가 죽어가는 모습을 이 눈으로 어찌 볼 수 있을까. 이분만은 고이고이 지켜드리고 싶었다. 눈곱만큼의 상처도 용납할 수 없었다.
피융- 피융-
속력을 더욱 높이는데 뒤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서율이 더 강하게 말을 채찍질 해보지만 이미 먼 길을 달려온 말이라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때,
퍽!
히이이잉-.
엉덩이에 화살을 맞은 말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크게 놀란 은명이 거칠게 숨을 토하며 몸을 더욱 웅크렸지만 곧 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말이 앞발을 높이 쳐드는 순간, 서율은 은명을 가슴에 단단히 끌어안고 길옆으로 나 있는 비탈길 아래로 서슴없이 몸을 날렸다.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아아악!”
은명은 서율의 품속으로 깊이 파고들었고, 서율도 있는 힘껏 은명을 끌어안았다. 어떡하든 공주만은 살리고 싶었다.
서율과 은명은 서로의 손을 잡고 쉴 틈 없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갓이 사라져버린 서율은 상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은명은 자리옷 위에 그가 벗어준 답호를 걸치고 있었다. 침수에 들었다 경황없이 뛰쳐나온 터라 맨발에 수당혜만 신고 있는 상황. 덩굴과 풀잎에 수도 없이 긁혀 발등이 따끔거렸지만 은명은 꿋꿋이 견디며 그의 걸음에 속도를 맞췄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물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울창한 나무숲을 빠져나오자 꼭꼭 숨어있던 계곡이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암석과 시원스레 흐르는 계곡물. 그 광경은 운치 있고 신비로웠지만 무엇 하나도 서율의 시선을 사로잡진 못했다. 산과 계곡을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한다는 생존을 위한 생각만이 그득했을 뿐.
“흐흑……”
하지만 작게 흐느끼는 은명의 울음소리는 단번에 그의 마음을 꿰뚫고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잘못 들었나 싶어 돌아보니 유백색 망월 아래 공주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많이 힘드십니까?”
작은 얼굴에 흐르는 눈물이 가여워 그가 까닭을 물었으나 은명은 말없이 고개만 가로 저었다.
“다리가 아프십니까?”
애틋한 그의 물음에 은명은 또다시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뱃속을 온통 할퀴고 있는 불안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전하의 환후 위중하시다 하여 오라버니께서 급히 행궁을 떠나셨습니다. 한데 환후가 생긴 것이 아니라 변고가 있었던 것이면 어찌합니까? 오라버니 신변에도 일이 벌어졌으면 어찌합니까? ……혹, 저만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요?”
“마마…….”
“만약 그렇다면…… 저 혼자 이리 살아 무얼 하겠습니까?”
불온한 생각을 가진 자들이 세상을 뒤집지 않고서야 감히 어느 누구도 행궁에 잠입하여 공주에게 검을 들이댈 순 없었다. 제가 당한 이 꼴을 가족들 또한 당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은명은 속이 뒤집히고 심지(心志)가 녹아내렸다.
그 구슬픈 눈물이 처연하여 서율은 저도 모르게 공주를 가슴에 끌어안는다. 왕족이란 세상 그 누구보다 귀해질 수도, 세상 그 누구보다 비참해질 수도 있는 존재. 그러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잠재워드리고 싶었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이 밤만 잘 넘겨주십시오. 이 고비만 잘 넘기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마마를 저하께 모셔다 드릴 것입니다. 소신을 믿어주십시오.”
서율은 애통해하는 은명을 안심시켜 주고자 안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서로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안고 있다 보니 맞닿아 있는 공주의 몸에서 열이 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행동이지만 특수한 상황인 지금, 그는 망설임 없이 은명의 이마와 뺨에 손을 가져다 대본다. 전체적으로 뜨끈뜨끈한 게 열이 심하게 오르고 있었다. 외조부의 일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이 밤, 황망한 일까지 당하고 말았으니 축적되었던 모든 충격이 이제 몸 밖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었다. 서율은 얼른 무릎을 구부려 등을 내민다.
“업히십시오.”
“괜찮습니다. 걸을 수 있습니다.”
“어서요! 추격하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짐스러워진 것 같아 민망하였다. 하지만 서율의 목소리가 워낙 단호해 은명은 잠깐 업혔다 내려야겠단 생각에 그의 등에 상체를 기댄다. 그런데,
“으윽.”
은명이 몸을 기대자마자 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왼쪽 어깨를 바르작거리며 떠는 게 부상을 심하게 입은 듯 보였다. 대체 언제 그랬단 말인가. 말에서 떨어지던 순간 고통스러워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가 몸으로 감싸고 있어 은명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정작 본인의 몸은 돌보지 못했던 것이다. 미안함과 안쓰러움에 어느새 눈물이 쏙 들어간 은명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를 얼마나 다치신 겁니까?”
“송구합니다. 괜찮으니 이제 업히십……”
통증을 진정시킨 서율이 다시 채근하려 했지만 보드라운 손이 이마에 와 닿자 말문이 콱 막혀버린다. 고통을 참느라 흘러내리던 이마의 식은땀이 공주의 손에서 아스라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요. 저는 걸어가겠습니다. 이렇게 애를 쓰시는데 바보같이 어리광만 부려 부끄럽습니다.”
다감한 손길로 그의 땀을 마저 닦아준 은명은 씩씩하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바로 그때,
“아앗!”
쉬시식, 무언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오는 소리와 함께 은명은 신음을 토하며 그대로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불에 덴 듯 격렬한 통증이 일었다. 뒤에서 여러 개의 표창이 한꺼번에 날아와 은명의 어깨와 다리 그리고 발목에 차례대로 꽂혀버린 것이다.
놀란 서율이 은명의 상처를 확인하는 동안 눈앞에 세 개의 검은 인영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붙은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염려는 하였지만 이렇게까지 끈질길 줄이야. 대체 저들은 무슨 연유로 이토록 공주를 죽이려 한단 말인가. 서율은 은명을 얼른 뒤로 숨기고 몸속에 품고 있던 죽장도를 꺼내 들었다. 삼대 일이니 승산은 있었다. 아니, 무조건 처치해야 한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이냐? 너희들이 해하려 하는 분이 어느 분이신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것이냐?”
“우리는 명을 따르고만 있을 뿐.”
감정이 메마른 스산한 대답과 함께 저들은 비릿한 혈향을 품은 장검을 일제히 뽑아 들었다. 서율은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등 뒤로 바싹 붙어있는 은명에게 나지막이 속닥거렸다.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해보겠습니다.”
“싸움이 시작되면 힘드셔도 열 보 앞에 있는 바위 뒤로 가셔야 합니다.”
“부상이 심하십니다. 대적이 되겠습니까? 저들이 원하는 사람은 저일 것입니다. 그러니 스승님께선…… 앗!”
얼토당토않은 말에 화가 난 서율은 은명의 손목을 힘주어 잡았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제가 뛰라고 하면 아파도 참고 뛰셔야 합니다. 만약 엉뚱한 생각을 하신다면 아무리 마마시라 해도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에.”
서율이 어찌나 팔에 힘을 주고 쏘아붙이는지 은명은 손목이 아파 순순히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어둠을 이용해 다른 손으로 슬며시 단도를 움켜 쥔 그는 작은 소리로 외쳤다.
“지금입니다, 뛰십시오!”
그 말을 기점으로 자객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서율은 한 명의 복부에 단도를 명중시킨 후 두 명을 한꺼번에 상대했다. 그러나 은명은 몇 걸음 채 떼지도 못하고 바닥으로 털썩 쓰러지고 만다. 발목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전신으로 퍼져 가는 통증에 몸서리가 쳐지고 열 보가 백리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은명은 이를 악물고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동바동 애는 써보았으나 어느덧 두 개의 인영 중 하나가 발치께로 바투 따라붙었다.
“헉!”
모골이 송연해진 은명은 흠칫 놀라 움츠러들었고, 이를 본 서율은 남아 있는 인영에게 검을 던져버린 후 몸으로 그를 덮쳐버렸다. 그와 자객이 하나로 겹쳐져 바닥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이, 쓰러져 있던 인영이 절뚝거리며 또다시 은명을 쫓는다. 조금 전 서율이 던진 검에 허벅지를 맞았던 그가 천으로 대충 다리를 감싸고 마지막 힘을 다해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지쳐버린 은명은 기진맥진하여 힘없이 자객을 올려다보는데 어느새 상대를 처리한 서율이 득달같이 따라붙었다. 자객과 그가 서로 칼을 맞대고 몇 합을 주고받았지만 왼쪽 어깨에 부상을 입은 서율은 밀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어깨가 멀쩡했던 자객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서율을 넘어트린 뒤 어깨를 베어버렸다. 지독한 고통에 그는 칼을 놓쳐버렸고 자객은 바닥으로 떨어진 검을 저 멀리 차 버린 후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이냐? 너부터 보내줄 것이다!”
화가 단단히 난 자객이 날카로운 검을 번쩍 들어 올리는데,
“으헉!”
옆구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와 바닥으로 검을 맥없이 떨어트린다. 공주가 바닥에 나뒹굴던 단도를 주워 자객을 공격한 것이다. 위협을 가하던 커다란 덩치는 놀람과 충격으로 은명을 돌아보았지만 얼마 못 가 스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사방이 고요해진 가운데 은명도 주체할 수 없는 현기증을 느끼며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토악질이 날 정도로 눈앞은 어지러웠고 제 옷에 불이라도 붙은 듯 온몸이 따끔거렸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 누군가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였다.
“……십니까? 마마, 괜찮으십니까?”
오른 팔로 은명을 간신히 받치고 있는 서율은 두려움으로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아무래도 공주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제는 열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이 불덩이처럼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표창으로 인해 철독이 오르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함부로 뽑을 수도 없는 일, 빠른 시간 내에 의원에게 보여야만 한다. 은명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전신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얼른 도망쳐야 하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열이 심해진 은명은 의식이 혼몽해지는 가운데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걱정 마시고 잠시 눈을 붙이십시오.”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었을 뿐 아니라 죽을 뻔하였고, 사람을 직접 해치기까지 하였다. 곱디곱게 자란 공주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밤이었다.
“어서 도망가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저들도 쉽게 깨어나지 못합니다.”
은명은 이제 두 눈이 거의 감기고 있었다.
“이제 그만…… 아침이 밝았으면 좋겠습니다.”
“곧, 돋을볕이 오실 겁니다.”
마지막 말을 들으며 은명은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렸고, 서율은 그런 공주가 애잔하여 품 안에 힘껏 끌어안았다.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길고도 길었던 밤이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굳은 얼굴로 혜빈전을 찾은 좌상이 불안해하는 혜빈과 마주앉아 있었다.
“지평에게선 아직 기별이 없는 것입니까?”
“아직은 그렇습니다.”
“벌써 이틀째입니다. 정말 지평이 공주마마와 함께 있기는 한 것일까요?”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벌였단 말입니까! 초조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찌 제가 보낸 파발을 받고 세자께서 떠나시자마자 그런 사달이 일어났는지…….”
세자가 궐을 떠나고 나흘째 되던 날, 제조상궁으로부터 대전의 상황이 수상쩍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세자가 떠나자마자 전하께서 몸져누우셨는데 중전과 안빈이 쉬쉬하며 병환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전갈이었다. 욱하는 성미의 혜빈은 그 즉시 대전으로 밀고 들어가 금상의 환후를 확인한 후, 세자에게 파발을 띄웠다. 그런데 세자가 움직이자마자 행궁에, 그리고 말을 내달리던 세자 앞에, 기다렸다는 듯 자객이 출몰한 것이다.
행궁의 금군과 궁녀들은 대부분 수면 가루가 들어간 국을 먹고 깊이 잠들어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혜빈이 효갈비를 싸 보낸 궁녀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발견되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국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백색의 수면가루가 살해된 궁녀의 몸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혜빈과 좌상이 입단속을 위해 그 궁녀를 살해한 것이라 수군거리고 있었다. 까딱하다간 이번 사건의 배후로 완전히 낙인찍힐 판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좌상의 차남인 지평이 공주를 보호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치경이 세자를 구했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평이 공주마마를 잘 보호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이번 사건의 배후로 지목 될 것입니다.”
“지은 죄가 없으니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허나 마마와 제가 덫에 걸린 것만은 사실입니다. 금상의 환후 날로 깊어지고 계십니다. 세자께서 사라지시면 원자아기씨 아직 어리시니 다음 보위는 정한군에게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지요. 가장 득이 되는 이가 바로 마마와 우리 집안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말입니다! 저하께 변고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을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그걸 뻔히 아는 제가 무엇 때문에 그런 허튼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게다가 공주마마까지요!”
혜빈은 속이 터져 안절부절못했지만 큰일을 많이 겪어온 좌상은 시종일관 차분하였다.
“마마의 마음은 중요치가 않습니다. 모든 정황이 마마와 이 사람을 주범으로 몰아가는 상황이고, 백성들은 곧 그 말에 현혹될 것입니다. 살해된 마마의 사람에게서 수면 가루가 나온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허면 이제 어찌합니까?”
“일단은 지평을 믿고 기다려봐야지요. 지평이 공주마마를 지켜낸다면 우리는 책임을 피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으로 막아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살아남기 위해 궐에서 독하게 버텨왔지만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긴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누가 이런 마음을 믿어줄까. 혜빈은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강렬한 햇빛으로 힘겹게 눈을 뜬 서율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자신이 누워 있는 협소한 방 안을 눈으로 둘러보았다. 지난 밤,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 의식 없는 공주를 등에 업고 깜깜한 산길을 얼마나 헤매었던가. 하늘이 도우셨으매 허름한 민가 하나를 발견한 뒤 공주를 부탁하고는 곧바로 혼절해버리고 말았다.
간밤의 일을 전부 떠올린 서율은 몸을 급히 일으키는데 왼쪽 어깨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천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음에도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고통은 상당하였다. 마침 젊은 청년 하나가 탕약을 들고 들어오다 몸을 일으킨 그를 보고 화들짝 놀라 외쳤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같이 오신 분은 어디에 계시는가? 상태는 어떠하신가?”
서율은 통증을 참아내며 공주의 안부부터 챙겼다.
“탕약을 드시고 처음보다 안정이 되긴 하셨지만 아직은 맥이 약하십니다. 지금 저희 누이 방에 누워계십니다.”
“의원은 다녀갔는가?”
“아버지께서 평생 약초만 캐신 분입니다. 경험이 풍부해 산 아래 어중간한 의원보다는 나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직접 확인을 해야겠네.”
“탕약을 드시기 전엔 안 됩니다.”
서율은 탕약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뜨겁고도 매우 써서 오만상이 찌푸려졌지만 꿀꺽 삼켜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겁지겁 방을 나서던 그는 이내 걸음을 멈추고 다시 청년을 돌아보았다.
“얼마나 지난 것인가?”
“어제 새벽에 들이닥치셔서 하루 반나절 꼬박 정신을 잃으시고 지금에야 일어나신 겁니다.”
“고맙네.”
서율은 득달같이 공주가 누워있다는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모로 누운 은명은 창백한 안색에 식은땀을 흘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목 전체가 보기 흉할 정도로 울긋불긋 어혈이 들어 있었고 어깨에 광목천을 댄 곳에는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였다.
얼마나 무섭고 아팠을까. 그의 얼굴 위로 안타까움이 드리워지는데 지난 밤 쓰러지면서 보았던 공주의 발등이 떠올랐다. 즉시 발밑으로 옮겨가 이불을 살짝 들춰 보니 여기저기 긁혀 상처투성이가 된 하얀 발이 모습을 드러낸다.
‘잠자리에서 경황없이 당하셨으니 버선을 챙겨 신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어젯밤 공주가 풀과 나뭇가지에 수없이 긁히며 온 산을 돌아다녔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하여 서율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공주의 한쪽 맨발을 가만히 움켜쥐고 말았다.
그로 인해 비몽사몽 약기운에 취해 있던 은명이 서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흐릿해진 시선을 맑게 하려 눈을 두어 번 깜박이는데 저 밑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익숙한 인영이 있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 감촉.
“……앗!”
곧이어 상황을 전부 파악한 은명은 소스라치게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온몸에서 전해지는 통증으로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른다. 부끄러운 마음에 그의 손에서 발을 빼려 하는데 표창에 맞은 상처 때문에 그마저도 힘에 부쳤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러면 발을 놓아 주십시오. 맨발을 보이는 것도 수치스러운데 하물며 손에 쥐고 계시다니요! 지금 무얼 하고 계신지 알고는 계십니까?”
은명이 발을 꼼지락거리며 어떻게든 빼보려 했지만 서율은 꿈쩍도 않는다. 놓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는 공주에 관한 그 무엇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보드라운 발등 위로 빨갛게 부풀어 오른 상처가 그의 가슴 위에 새겨진 것처럼 쓰리고 아팠다.
그러나 그가 어떤 심정인지 알 리 없는 은명은 창피하고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인의 맨발을 손에 쥐고 있단 말인가.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이렇게밖에 모시지 못해 송구합니다.”
죄책감이 묻어나는 얼굴. 이 목숨을 구해주었음에도 그깟 상처 조금 입게 했다고 김서율은 크게 죄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은명은 씁쓸한 공허감이 엄습해 온다. 그에게 저는 모셔야 할 왕실의 공주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듯했다.
보령의 시전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김서율에게 만큼은 평범한 여인이고 싶었다. 하지만 또렷이 존재하는 그와의 경계선이 너무도 선명해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다가갈 수 없었다. 어쩌다 과감히 선을 밟고 넘어가면 그는 그만큼 더 물러나 또 다른 경계선을 만들어 버린다. 속절없이 애태우고 미련하게 쫓아가는 건 언제나 저만의 몫일 뿐. 무한히 반복되는 제자리걸음에 은명은 속이 상했다.
“목숨을 구해주신 건 당연한 것이고, 그깟 상처 조금 돌보지 못한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까? 공주란 참으로 대단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제가 외조부의 일을 오해하였을 때에도 그저 침묵하셨을 테지요.”
아직도 힘들어 하고 계시는가. 공주의 반응에 그의 얼굴이 확연히 굳어져버린다.
“산속이라 그런지 발이 시립니다. 그만 이불 속에 넣어 주십시오.”
공주가 기운 없이 누워 눈물만 글썽거리자 서율은 가녀린 발을 다시 이불로 덮어주고 머리맡으로 다가가 앉는다.
“스승님 덕분에 제가 살았습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풀이 죽은 목소리. 서율은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고 힘없이 말을 잇는 공주를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하였다.
“지난번에 역정을 내어 송구합니다. 화를 내려던 게 아니라 스승님께 모질게 했던 말들을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강론을 쉬겠다 한 것도 차마 얼굴을 뵙지 못할 것 같아 그런 것이었습니다. 왜 자꾸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튀어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공주의 강론을 떠맡아 스승님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예, 매번 마마의 독설이 힘들긴 하였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너무도 당연하게 수긍하는 그의 반응이 조금은 당황스럽다.
“저는……”
“아직 제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말까지 자른다. 물론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기에 은명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하였다.
“돌이켜보면 마마께서는 늘 저를 고생시키셨습니다. 보령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등에 업어야 했지요. 제 생애 등에 무언가를 짊어진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지난밤은 또 어떠하였습니까? 자객을 눈앞에 둔 긴장된 상황에서 어이없는 마마의 언행으로 집중력과 사기가 매우 저하되기도 하였습니다.”
“그건,”
“어디 그뿐입니까? 심한 부상으로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마마를 등에 업고 평탄한 길이 아닌, 계곡을 가로질러 와야 했지요. 지금은 이렇게 반성하고 계시지만 과연 얼마나 가겠습니까? 또다시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 닥쳐오면 지금과 같은 마음을 잊고 벌컥 성을 내시는 것은 물론 독설 또한 마구 날리시겠지요.”
“예, 그동안 어찌 참고 계셨습니까!”
잘못한 건 알지만 직설적으로 날리는 그의 비판에 은명은 그만 성질대로 말대꾸를 하고 말았다. 해놓고도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 은명은 시무룩하여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것 보십시오.”
“송구합니다. 아직은 수양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니 이해하여 주십시오.”
“정말 소신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다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말로는 반성한다 하지만 싫은 소리 조금 들었다고 은명은 눈물이 핑 돌아 퉁명스럽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를 탓하는 건 아니지만 기분이 언짢아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정확히 짚어보면 그 역시 지지 않고 꼬박꼬박 독언으로 맞받아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때,
“후훗.”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나 싶어 위를 올려다 본 은명은 이내 놀란 토끼눈이 되어버린다. 그가 정말로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은명이 멍해 있는데 그에게서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야 공주마마 같으십니다. 허름한 옷을 주워 입고도 늘 당당했던 분이 아니셨습니까. 어떠한 상황에서든 마마의 그 모습을 잃지 마십시오.”
“저는 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많은 이들을 원망하고 미워하였습니다. 너무도 죄스럽고 부끄럽습니다.”
“권력싸움이란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승기를 잃은 쪽이 모든 잘못을 떠안게 되는 것이지요.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마마께서 죄스러워하실 일이 아닙니다.”
한 순간이라도 공주가 풀이 죽어 있는 게 보기 싫었다. 해서 일부러 속을 조금 긁어 주었더니 여지없이 파르르 떨며 본 모습을 드러내신다. 햇살처럼 언제나 당당하고 반짝이시는 분. 조금 당황스럽고 기가 차는 한이 있어도 서율은 공주의 그런 모습을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었다.
“악몽을 꾸진 않으셨습니까?”
더욱 애틋해진 목소리로 그가 은명의 목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나중에라도 시달릴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악몽을 꾸게 되시면 혼자서 앓지 마시고 꼭 어의에게 알리셔야 합니다. 그것 또한 병이 될 수 있지요.”
그의 음성에 쓰디 쓴 기운이 묻어 있었다. 마치 그런 병을 직접 앓았던 사람처럼. 은명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오르자 서율은 분위기를 싹 바꾸며 말한다.
“쉬고 계십시오.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하니 제가 가서 궐 안 사정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가지 마십시오! ……아직은 무섭습니다.”
지난밤의 기억이 생생히 살아있는 은명은 기겁을 하며 서율의 옷소매를 움켜잡았다.
“그러하시면 믿을만한 벗에게 서찰을 쓰겠습니다.”
“예, 차라리 그편이 낫겠습니다.”
은명이 눈물을 글썽이며 안도하는데 이마에서 그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열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이어서 머리에서도, 뺨에서도, 그의 손길이 느껴진다. 생각지도 못한 다정함에 은명은 조금 놀랍기도 하였고 코끝이 시큰거리기도 하였다. 상처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이 그의 손 안에서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서율은 이것이 미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감히 공주의 머리를, 얼굴을, 마음대로 쓰다듬고 있다니. 알고는 있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손길이 힘든 시간을 보내온 공주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얼마간의 위로가 되어줄 수 있었기에. 이렇게라도 그 시간들을 보상받고 싶었다. 보드라운 공주의 얼굴 감촉이 어깨의 통증마저도 잊게 해준다.
“열이 높으십니다. 조금 더 눈을 붙이십시오. 깨어나시면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 감격스러운 순간을 조금 더 누리고 싶었지만 따사로운 그의 위로에 은명은 또다시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온몸이 욱신욱신, 뜨끈뜨끈, 통증과 신열에 혹사당하고 있는 것이다. 열 기운을 감당치 못한 은명은 끝내 스르르 정신을 놓아버렸지만 입가에는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