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제 10 장. 달물결 위로 바치는 꽃 (10/21)

제 10 장. 달물결 위로 바치는 꽃

벌써 꽤 오랜 침묵이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의천 상단의 대방, 강준혁에 대한 보고를 마친 치경은 다음 명이 떨어지길 기다렸지만 그의 상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화경궁으로 가셔야 할 시간이 촉박하였음에도 서두르기는커녕 외려 혼자만의 세계로 더 깊이 빠져드는 모습이었다.

‘이상해지셨다.’

근래 들어 상전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는 경우가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평소보다 일찍 퇴청하셨기에 강론 준비를 하시려나 보다 미루어 짐작했었다. 그런데 보고를 하러 들어와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깊은 상념에 빠져계셨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늘 진 눈 밑, 까칠해진 얼굴, 어두워진 분위기…… 설마? 서율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던 치경은 흠칫 놀라 어깨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다시 악몽을 꾸기 시작하셨다!’

몇 년 간 평온하셨건만 갑자기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치경의 얼굴 위로 안타까움이 스쳐 가는데 침묵을 지키던 서율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다 죽어가던 그를 살려내어 아들로 삼았단 말이지?”

“첩실을 들여도 아이를 가지지 못해 크게 상심해 있었던 모양입니다. 평안도 어디쯤 산길에 쓰러져있는 강준혁을 발견한 뒤, 사람들에게 하늘이 보내준 아들이라 소개하였다 합니다.”

“무예가 그리 뛰어나단 말인가?”

“도련님의 명을 받고 조금 날랜 자를 붙였다가 처음 일주일간 허탕을 쳤습니다. 지금은 고도로 훈련된 자가 따라붙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강준혁과 양병수의 행적을 낱낱이 쫓되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선 아니 되네.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는지, 하나도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야.”

“예,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서율은 또다시 깊은 사념(思念)에 침잠되어 갔다. 며칠 새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아무리 넋을 놓고 있어도 할 일은 칼같이 하고야 마는 서율이 정각에 맞춰 화경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한 달하고도 보름 만에 강론이 재개된 것이다. 오랜만에 걸음을 해서 그런지 최 상궁과 난이, 수비가 줄줄이 뛰어나와 살갑게 그를 반겼다. 특히 최 상궁은 무뚝뚝함을 지우고 최대한 웃어 보이려 노력하고 있었다. 지평을 친절하게 맞아들여 그가 되도록이면 강론을 빼먹지 않게 할 작정인 것이다.

한성부의 판관이 우상의 자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공주는 신분이 탄로 날까 외출을 자제하는 대신, 김서율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시는 내내 식사도 못하시고 하늘만 바라보며 어찌나 한숨을 쉬어 대시던지. 상사병이 재발되는 게 아닌가 싶어 더럭 겁이 날 정도였다. 일주일에 한 번, 꼬박꼬박 그가 얼굴을 내밀어준다면 그나마 공주께 위안이 되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은 최 상궁은 미소를 지으며 사근사근 인사말을 건넸다.

“오셨습니까, 실로 오랜만에 걸음을 하셨습니다.”

“잘 지냈는가.”

이때, 난이가 부산스럽게 끼어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공주마마께서 그동안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모릅니다.”

노골적인 나인의 말에 서율은 대꾸 없이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애써 웃어 보이던 최 상궁은 얼굴에 노기를 띠며 난이를 노려보았다.

“정신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그런 말을 다 해버리면 어찌하누!”

“사실이지 않습니까. 오늘만 해도 지평 나리가 오신다니까 하루 종일 경대 앞에 붙어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한단 말이냐? 공주마마의 위신을 생각했어야지.”

“에이, 일전에 공주마마께서 나리께 하신 말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마께서 사헌부에 쫓아가 뭐라 하셨는지 아십니까?”

누가 엿들을 새라 난이는 주위를 슬쩍 돌아보더니 못마땅해 하는 최 상궁에게 바투 다가가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귀에서 들려오는 은밀하고도 엄청난 얘기를 들으며 최 상궁의 얼굴은 충격과 경악으로 서서히 일그러져 갔다.

기척이 들려오자 은명은 경상 서랍에서 작은 면경을 꺼내 얼굴을 한 번 더 비추어 보았다. 사헌부에 다녀온 이후, 오매불망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그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오자 후다닥 면경을 치워버리고 떨리는 가슴을 차분히 진정시킨다.

‘한심하구나.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혀 실소가 터져 나왔지만 안달이 나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김서율은 어느덧 맞은편 경상 앞에 앉아있었다. 긴장이 되어 차갑게 식어버린 손끝이 떨리고 있었지만 은명은 무심함을 가장하여 다소 딱딱한 어조로 안부를 건넸다.

“바쁜 일은 잘 마무리 하셨습니까?”

“쉽게 해결될 일은 아닙니다. 그럼 강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약간 실망스럽기까지 하였다. 조금 더 담소를 나누어도 좋으련만 저리 곧바로 시작해 버리시다니. 풀이 죽은 은명은 할 수 없이 그를 따라 서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간이 흐르고 강론은 한창 절정을 향해 치달았지만 귀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재어 자른 듯 반듯한 그의 이목구비에 넋이 팔리고, 쓸데없는 걱정이 집중력을 떨어트린 까닭이었다.

‘최 상궁이 시각을 맞추지 못하면 어떡하지?’

강론이 끝나는 시각에 맞춰 최 상궁이 다과를 들여오기로 하였다. 그렇게라도 하여 그를 조금 더 이곳에 잡아두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그와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니 조바심이 뭉글뭉글 솟아오른다. 강론이 끝나면 칼같이 일어서는 그였다. 들어오는 시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면 그대로 놓쳐버릴 수도 있는 일. 괜한 걱정에 애간장이 달아오른 은명은 앞뒤 가리지도 않고 불쑥, 강론과 전혀 상관없는 사담을 꺼내 놓고 말았다.

“매화차를 좋아하십니까?”

“……”

뜬금없는 소리에 서율이 의문의 빛을 띠고 공주를 바라보았다.

“화경궁엔 매화원이 있습니다. 매년 매화꽃을 따다 그늘에 잘 말려 차로 즐기고 있지요. 향이 그윽하고 머리를 맑게 해줍니다. 그래서 피접을 다닐 때도 늘 화경궁에서 보내온 매화차를 마시곤 하였지요. 오늘 강론이 끝나면 그 매화차를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

“어찌 그리 보기만 하십니까? 매화차가 싫으십니까? 그러하시면 국화차도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매화와 국화를 특히 좋아하시어 화경궁을 온통……”

“마마.”

착 가라앉은 차갑고도 단호한 음성. 말허리를 잘려버린 은명은 그 싸늘함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무슨 실수라도 하였던가.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이 은명을 바싹 움츠러들게 하고 있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마의 외가에 해를 끼친 원수 가문의 자식으로만 여겨 주십시오. 화경궁에 제가 처음으로 걸음을 했던 바로 그날처럼 말입니다. 차가운 눈으로 저를 보아주시고, 싸늘한 말투로 저의 모든 것을 못 마땅히 여겨 주십시오.”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눈동자가 일렁이기 시작한 은명은 마음을 억지로 다잡으며 그 까닭을 물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마마도 저도, 그래야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러셔야 합니다.”

공주의 단호한 거절에 서율은 그보다 더 단호하게 맞받아쳤다. 또다시 밀어내려 하는 것인가. 걷잡을 수 없는 서운함에 은명도 고집스럽게 맞선다.

“제가 마음을 털어놓았기 때문입니까? 제가 부담스러우십니까?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겠다,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마께서는 잔인하고 못된 분이십니다. 이기적인 철부지이십니다.”

서늘하고도 가차 없는 그의 말에 은명은 눈가가 따끔거렸다. 목 안 깊숙이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울컥 솟구치는 듯도 하였다.

“제가…… 그렇습니까?”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겠다. 결국 마음대로 하시겠단 말씀이 아니십니까? 상대의 의중, 기분, 상황, 그 무엇도 아랑곳없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겠다, 이 말씀이 아니십니까? 마마와 저는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보름 동안 노심초사 얼마나 그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가 화경궁으로 찾아와 주길, 눈앞에 나타나 주길. 하지만 그게 전부였을까.

“……연이 닿지 않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끊임없이 마음을 표현하려 하십니까?”

“그러면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지난 세월, 혹시라도 그가 찾아오면 어떻게 대해줄까, 불을 끄고 침수에 들어 밤을 하얗게 지새우도록 오만가지 상상을 해왔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분명 기다림이었다. 육 년이란 시간동안, 단 하루도 그를 기다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런 마음도 모르고 야멸차게 냉대하는 그가 섭섭해 은명은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만 간다.

“정말 냉정하십니다.”

“서운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이 열리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혹여라도 제 마음이 열려 마마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는다, 고집을 부리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럴 수는 있는 것입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저는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제 마음이 열리고 오직 마마만이 눈에 들어온다면 가문이고 관리로서의 장래고 그 무엇도 상관치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의빈으로 들어앉겠다, 나설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

은명은 잠시 이 대화를 멈추고 싶었지만 서율은 그마저도 싹둑 자르며 사정없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의빈이 되어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팔다리가 모두 잘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하며 저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 저지른 일이기에 내색조차 못하고 속으로만 앓겠지요. 속병을 앓다 보면 마마도 끔찍이 싫어질 것입니다. 저는 옹졸하고 편협한 인간입니다.”

“그만하십시오.”

“물론, 책임감이란 미명하에 겉으로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으십니까? 혹, 그런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망가지고 마마께서는 그런 저를 구경하시며 함께 지옥 속에서 살아가시렵니까?”

팔과 등에 오들오들 소름이 돋아나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고 계획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건만 막상 그의 입에서 그런 말들이 줄줄 새어 나오자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고 숨이 막혔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은명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얽혀 있는데 서율은 작심이라도 한 듯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다행히도 지금의 저는 마마께 단 한 자락의 연정도 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마께서 계속 이러신다면 제 마음이 언제 열릴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자꾸 두드리지 마십시오. 품고 있는 감정을 모두 몰아내시고 저에게는 손톱만큼의 마음도 내어주지 마십시오. ……오늘의 강론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다음 시간에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서율은 말을 끝내자마자 딱딱하게 인사를 올리고 야멸차게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의 무정한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은명은 눈물이 그득히 괴어오른다. 김서율도, 최 상궁도, 그를 향한 이 마음을 철부지의 버릇없는 행동쯤으로 여긴다는 것을 은명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른다. 어린 공주에게 그러했듯 열여섯이 된 공주에게도 그는 여전히 하늘이었음을. 영웅이었음을.

‘하늘이 무너지고, 영웅이 추락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철없는 어린아이의 투정이었나 봅니다. 나를 돌아봐 달라, 내 상처를 알아 달라, 당신께 떼를 쓰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외가의 몰락, 집안의 원수, 단죄, 그 모든 건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그가 다른 여인과 혼인하는 게 싫었을 뿐. 그에게 어여쁜 안사람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미칠 듯한 투기심이 솟아올랐다. 두렵고 무섭기도 하였다. 보령에 두고 온 여자아이를 그가 영영 잊을까 하여. 침수에 들어 그가 찾아오는 상상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될까 하여. 그래서 정한군을 붙들고 지금까지 그 난리를 쳐댔던 것이다. 그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 은명은 부끄러움과 속상함에 저절로 눈물이 터져 나왔다.

“흐윽…… 화가 나서 잠시 못된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부족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화경궁을 나선 서율은 곧장 월류지로 향했다. 가슴이 꽉 막히고 답답해 도저히 집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멍한 얼굴로 물가를 향해 정처 없이 걷고 있는데 그의 귓가에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아른거렸다. 쌀쌀한 늦가을의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오는 그곳에 여러 명의 아이들이 물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아이들은 놀이를 하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우르르 서율의 옆을 지나쳐간다. 그런데,

“아얏!”

그들 중 끄트머리에 쫓아오던 여자아이 하나가 그의 앞에서 철퍼덕 크게 엎어지고 말았다. 서율은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주었고 눈물이 차올랐던 아이는 울먹거림을 멈추고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어 보였다.

자그마하고 꼬질꼬질한 여자아이는 곧 씩씩하게 친구들에게 돌아갔지만 그는 그 여아에게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입가와 눈가에 애틋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마저 걸려있었다. 아이의 순진한 눈망울을 보는 순간, 과거의 문이 활짝 열리고 기억의 저편에서 안아주고 싶을 만큼 어여쁜 여자아이를 떠올리고 말았던 것이다. 새하얗고 깨끗한 피부에 먹빛의 맑고 커다란 눈망울을 가졌던 아이.

[그대, 나를 업어주어야겠다. 나를 번쩍 업거라, 응?]

[너처럼 어린 현감은 내가 본 적이 없거늘.]

[내가 조금 더 자라 그대를 나의 지아비로 삼아줄 것이야.]

맹랑했던 어린 공주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그리움을 머금었던 서율은 이내 고통스러운 기억이 몰려와 가슴이 써늘하게 식어버린다. 벗어날 수 없는 악연의 고리가 너무나도 버거워 눈가엔 붉은 기운마저 켜켜이 번져가고 있었다.

‘남들은 저를 선재라 부르지만 저는 세상 제일가는 바보입니다. 비겁한 자입니다.’

:

‘아십니까? 육 년 전 그날, 저의 손을 잡고 배시시 웃으시던 바로 그날, 제 마음은 이미 열렸습니다. 무방비한 저에게 다가와 너무 쉬이 열어버리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저는 결코 함께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연입니다.’

:

‘이쯤에서라면, 이쯤에서 서로를 냉대한다면, 저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못난 저를 철저히 미워하여 주십시오.’

어둠이 내려앉으며 으스스 떨릴 만큼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늦가을의 어느 저녁. 서율은 뿌리라도 내릴 것처럼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날 이후 서율은 공주에게 한층 더 거리를 두며 찬바람을 쌩쌩 날렸고, 은명도 더 이상 그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서로 서책만 내려다보며 강론이 진행되다가 마칠 시간이 되면 서율은 지체 없이 화경궁을 떠나버렸다. 오늘도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쌩하니 나가버린다. 은명은 병풍을 향해 힘없이 모로 누워 속상한 마음을 달래보지만 울렁이는 마음을 쉬이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기억하십니까? 보령의 시전에서 엉엉 우는 저를 안아 달래주셨지요. 그때는 참…… 따뜻하였습니다.’

돌아갈 수 없는 그때를 떠올리며 은명의 얼굴 위로 가을바람처럼 쓸쓸한 기운이 번져 나갔다. 그는 지나치게 단호했고 은명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린 듯 했다.

저 하늘의 해님과 달님은 오늘도 이 세상을 비추시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나를 옛날처럼 대해 주지 않으실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 잡을 수 있을까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데

저 하늘의 해님과 달님은 오늘도 이 세상을 비추시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나를 좋아해주지 않으실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 잡을 수 있을까요, 내게는 말도 하지 않으시는데

저 하늘의 해님과 달님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시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지 않으실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 잡을 수 있을까요, 당신을 잊을 수가 없는데

어찌해야 님의 마음 잡을 수 있을까요, 내게는 못된 짓만 해대는데……

<시경, 해님과 달님 中>

이듬해 잎새달, 금상의 병환으로 미루고 미루어졌던 왕과 왕비의 가례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윤씨 처녀가 중전으로 간택되어 별궁에 입궁한지 자그마치 일곱 달 만에 치러진 국혼이었다. 이로써 올해 열아홉, 아직은 어리다 할 수 있는 보희는 문무백관들의 하례를 받으며 공식적인 왕의 비(妃)가 되었다. 조선에서 가장 높고 가장 귀한 여인에 등극한 것이다.

내외명부의 여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새로운 중전마마께 하례를 올렸던 이날, 공주만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병치레 중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천인공노할 대불경죄라 하여 처벌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 허나 공주에 한해서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모두가 당연시 여기는 분위기였다. 더 나아가 일부는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하였다.

공주가 대궐에 모습을 보인 건 그로부터 정확히 열흘이 지난 후였다. 오랫동안 앉혀놓고 말없이 바라만 보는 금상이 부담스러워 은명은 일부러 주강(晝講)시간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대전에 들었다. 그럴듯한 잔꾀였으나 소득은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일각이 넘도록 임금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했다. 언제부터인지 금상과 눈을 마주치지 않게 된 은명은 어머니의 비밀을 알고 난 이후, 용안을 뵙는 것이 더욱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늘도 시선을 아래로 두고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아팠다더니 얼굴이 많이 상하였구나. 당분간은 취연당에서 지내도록 하여라.”

침묵이 이어지던 중 불쑥 들려온 말이었다. 깜짝 놀란 은명은 저도 모르게 금상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지만 곧바로 시선을 다시 피해버렸다.

“싫은 것이냐?”

“아니옵니다. 그리 하겠사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 식경 동안 이루어진 부녀간의 만남에서 대화는 고작 서너 마디가 전부, 덤으로 벌까지 받게 되었다. 얼마간 꼼짝없이 궐에서 지내게 생긴 것이다. 만사가 짜증스러웠지만 내전에 들러 중전께 하례를 올리는 일이 아직 남아있었다. 은명은 솟구치는 역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서둘러 중궁전으로 향했다.

약 일 년 전, 궐에서 마주친 공주에서 깊이 고개 숙여 예를 올렸던 보희는 이제 상석에 편히 앉아 공주의 큰절을 받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공주. 많이 미령하였다 들었습니다. 좀 어떠십니까?”

“이제 쾌차하였습니다. 하례가 늦어 송구하옵니다, 중전마마.”

“아닙니다. 쾌차를 하셨다니 다행입니다.”

다과상이 나오고, 은명은 중전이 본곁에서 들여왔다는 향그러운 목련차를 시음하였다. 코끝이 살짝 화해지는 게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어지는 중전의 말에 은명의 기분은 또다시 바닥으로 끝도 없이 추락해버렸다.

“공주, 그만 궁으로 들어오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화경궁에서 나고 자라, 그곳이 더 편하고 좋습니다.”

“공주의 길례가 추진될 예정입니다. 하가를 하시려면 궁에 머물며 준비를 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은명은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릴 뻔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았음에도 중전은 모르는 척, 혼사에 관한 말들을 나긋나긋 이어 나갔다.

“심려는 마세요. 최고 명문가의 자제를 의빈으로 들일 것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아직 길례를 올리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주께서는 올해 열일곱이십니다. 늦어도 열둘에는 하가를 하였던 왕녀들의 전례를 비추어 보았을 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으셨습니다.”

중전은 얌전하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지만 중간 중간 윗사람으로서의 위엄도 내보이고 있었다.

“전하와 세자저하께서도 저의 뜻을 모두 존중해주고 계십니다.”

“공주의 혼사문제는 중전인 이 사람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는 중전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이행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공주께서도 공주가 해야 할 도리를 모두 행하셔야지요. 일국의 공주란 남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무한한 특권을 누리지만 그만큼의 책무 또한 무거운 자리입니다. 원하는 대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법이지요.”

“저는,”

“마마, 세자저하와 빈궁마마께서 드셨사옵니다.”

중전의 말에 반박을 하려 했을 때 밖에 세자와 빈궁이 당도했고, 은명은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동궁 내외가 예를 올리고 자리에 앉자 보희는 만면에 미소를 띠우면서도 뜻밖이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뜻밖입니다. 빈궁이야 그렇다 쳐도 세자께서 이 시간에 내전을 다 찾아주시다니요.”

“마침 비는 시간이 생겼고, 공주도 들어 있다기에 와 본 것입니다.”

“그러셨습니까.”

“밖에서 들어보니 공주의 하가 문제를 논의 중이셨던 것 같습니다.”

“공주도 이제 짝을 찾으셔야지요.”

“그 문제에 관해선 심려치 마십시오. 왕실 법도에 따르면 늦은 것이 사실이나 사가로 치면 아직 한창인 나이입니다. 이왕지사 늦은 거, 공주는 세속의 나이에 맞춰 하가를 시킬 생각입니다.”

세자의 말에 은명은 속으로 크게 안도했지만 중전은 물러서지 않았다. 중궁에 오르면 가장 먼저 하고자 했던 일. 자신이 그러했듯 공주에게도 그가 아닌 다른 이를 지아비로 짝지어주고 싶었다. 그와 공주는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인연임을 확실히 해두어야 안심할 수 있었기에.

“공주는 왕실의 일원입니다. 당연히 궁중의 법도를 따라야지요.”

“왕실의 자녀들이 가례를 일찍 올리는 건 군왕과 동궁, 그리고 그 비빈들 외의 종친이 궁에서 살 수 없다는 법도 때문입니다. 그것이 공주가 화경궁에 머물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공주의 길례는 물론 화경궁에 거처하는 일까지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정중히 예를 다 하고는 있었지만 세자는 확고히 당부하고 있었다. 그 의중을 알아들은 중전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저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세자가 아직은 어렵고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이 사람은 그저 공주를 위해 좋은 짝을 찾아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예, 중전마마이시니 공주의 길례에 책임감을 느끼셨을 테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 아이에 관해서만큼은 전적으로 저와 빈궁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리하지요.”

미소를 띤 중전의 입가가 왠지 딱딱해 보이는 건 은명의 착각이었을까. 오라버니 덕에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어쩐지 궐 안이 전보다 더 갑갑해진 느낌이었다.

‘당분간 이곳에서 어떻게 버틴단 말인가…….’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떠 있는 사월의 어느 밤. 기생들의 눈이 휙휙 돌아갈 만큼 훤칠한 외모의 두 사내가 청월관의 대문을 들어섰다. 사헌부 지평, 김서율과 홍문관 수찬, 문희립이었다. 오늘의 과제는 청월관의 내부 구조를 파악하는 것. 머릿속에 이곳의 구조를 암기해 돌아가면 며칠 내 고도로 훈련된 무사들을 보내 은밀히 곳곳을 살펴 볼 계획이었다.

미리 기별을 놓지 않으면 올 수도 없는 데다 대기 인원은 또 얼마나 많던지. 두 사람은 기별을 놓은 지 약 석 달 만에 이곳에 걸음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규율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사헌부에 몸담고 있는 서율과 책 속에 묻혀 먹물 냄새나 맡으며 지내온 희립이었다. 그들에게 기방이란 미지의 신세계. 호기롭게 발을 들여놓긴 했으나 막상 기녀들이 우르르 달려 나오자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하다. 냅다 품으로 파고드는 저들이 무섭기도 했고 코끝을 찌르는 분내에 멀미가 올라올 것 같기도 하였다. 까르르 웃으며 교태를 부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정신은 더욱 사나워지는데 때마침 구원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자네들이 여긴 어쩐 일인가?”

중전의 오라비들과 청월관을 찾은 익정이 조금은 놀란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평, 자네가 이제 기방 출입도 다 하는가? ……아니면 혹, 지금 공무 중이신가?”

기방은커녕 관원들이 주막에서 술을 마시는 것조차 엄히 제한하는 사헌부였다. 그러한 규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서율이 도성 최고의 기방에 버젓이 출입을 하다니. 웬만해선 호탕하게 웃어넘기는 익정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들 때문에 당황했던 서율은 순식간에 표정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조금은 뻔뻔스럽게 대꾸를 하였다.

“고위관리들도 종종 오가는 곳인데 저와 수찬이라고 못 올 리 있겠습니까. 명성이 하도 자자하기에 어떤 곳인지 궁금하여 와봤습니다.”

“아하하……, 자네에게 그런 면도 있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따라오게. 내 오늘 기방 구경, 확실하게 시켜주지.”

익정은 제 할 말만 하고 성큼성큼 먼저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조용히 둘러보고 돌아갈 계획이었던 두 사람은 뜻밖의 상황이 난감하기만 하다. 하여 선뜻 따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앞서 가던 익정이 홱 돌아보며 채근을 해온다. 처음이라 어색해서 쭈뼛거린다, 오해한 것이다.

“굳이 그렇게 초짜 티를 팍팍 내야겠는가? 어서 들어오게.”

“자, 자, 이렇게 만난 것도 기념이 아닌가. 어차피 다 아는 얼굴들인데 부끄러워하지 말고 함께 술이나 한 잔씩 하세.”

중전의 오라비들까지 나서 독촉을 하자 서율과 희립은 얼떨결에 그들과 함께 가장 큰 방에 떠밀리듯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익정은 가장 먼저 술부터 한 잔 쭉 들이켜고는 서율을 흘끗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여리여리 고운 얼굴이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

‘쯧쯧, 사내란 자고로 투박하니 시원시원한 호방함이 흘러야 하거늘. 저리 샌님같이 생겨서야, 원……’

밖에서 여인들의 속살거림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서로 이 방에 들어오겠다, 안달들이 났을 것이다. 도성 최고의 신랑감들을 한 방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할까. 과거 급제자들의 평균 연령은 삼십대 중반. 그에 비해 이십대 초반, 대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익정과 희립은 도성에서도 손꼽히는 인재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자타공인 도성 최고의 신랑감, 김서율까지 와 있으니 육탄전이 벌어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이윽고 문이 활짝 열리고 정식으로 차려진 상차림이 들어왔다. 윤기가 도는 음식에 탐스러운 과실까지, 눈이 돌아갈 만큼 먹음직스럽고 푸짐한 차림이었다. 뒤이어 화려하면서도 도도한 품새의 한 여인이 낭창낭창 아리따운 기생을 여럿 이끌고 안으로 들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지목된 이들이니만큼 하나같이 미색이 출중하기만 하다. 수기생으로 보이는 이가 여인들에게 자리를 지정해주고 자신은 익정과 서율 사이로 다소곳이 들어앉았다.

“자네들 오늘 정말 운수대통일세. 청월관에 오자마자 농월이를 만난 이는 자네들이 아마 처음일 게야.”

앙그러진 음식을 보느라 여념이 없던 서율은 이판의 장남인 현석의 말에 옆에 앉은 농월이란 기생을 흘끔 쳐다보았다. 도성 최고의 일패기생이자 청월관의 수기생이라는 그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치장을 하였음에도 천박하기는커녕 오히려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기이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농월은 서율과 희립을 흘끗 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고 팽 토라져 말했다.

“이런 모욕은 처음입니다. 귀한 분들이 오셨다기에 청월관 최고의 아이들을 데리고 왔건만 음식 쪽으로 눈길을 빼앗기다니요. 고고한 선비님께서 그리 식탐이 있어 뵈진 않는데 말입니다.”

“불쾌하였다면 사과하겠소. 단지 신기해서 그랬을 뿐이오.”

“뭐가 그리 신기하신가요? 이런 음식 처음 보십니까?”

“작년과 올해, 기근으로 농작물의 피해가 꽤 컸다고 들었소. 한데 이리 좋은 품질의 음식들이 쏟아져 나오니 그저 신기할 수밖에.”

서율의 진지한 말에 방안의 기생들이 전부 픽 웃어버리자 이판의 삼남인 현철이 대신 설명에 나섰다.

“원래 청월관은 최상품만 내어놓는 것으로 유명하다네. 그렇기에 값도 다른 곳에 비해 월등히 비싼 것이지. 아마 이 근방의 돈은 여기서 죄다 쓸어가고 있을 걸세. 오늘은 중전마마의 책봉식을 기념하여 우리가 한턱내는 것이니 마음껏 먹고 마시게나.”

현철은 두 사람에게 술을 가득 따라주었고, 이를 지켜보던 현석은 무언가 떠오른 얼굴로 서율을 바라보았다.

“참, 자네가 공주마마의 강론을 맡고 있다 들었네.”

“일주일에 한 번 지식을 조금씩 전달해 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혹시 화경궁에 거처하고 있는 빈궁마마의 친척 동생도 본 적이 있는가?”

서율이 화경궁에 드나든다는 소리에 익정이 솔깃해하며 끼어들었다.

“빈궁마마의 친척 동생이라 하셨습니까? 글쎄요…… 저는 그저 짧은 시간만 머무를 뿐입니다. 공주마마와 측근 궁녀들 외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가?”

서율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익정은 실망스러운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린다. 그의 엉뚱한 행동에 다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는데 눈치 빠른 농월에게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혹 저번에 말씀하신 그 여인이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가.”

“운종가 입구에서 만나 나리를 당황시켰다던 그 여인 말입니다. 판관 나리를 만난 이후 술자리에서 다른 생각을 하신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 진정 빈궁마마의 친척 동생이 맞기는 한 겁니까?”

“흠흠.”

무안했는지 익정이 헛기침을 하는 사이 현석은 다시 서율을 붙들고 걱정거리를 털어놓았다.

“우리 중전마마 말일세. 나이 차는 얼마 안 나도 이제 중전이 되셨으니 어쨌거나 공주마마께는 어머니가 아니신가. 화경궁에 잘 좀 부탁드린다고 자네가 말씀을 올려주시게. 마음에 안 찬다고 공주께서 버럭버럭 성을 내진 않으실까 걱정이 되어 그런다네.”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공주에 대한 나쁜 소리가 듣기 싫었던 서율이 얼른 두둔을 했지만 방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재미있는 꺼리를 하나 잡았다는 듯 기생들이 우스갯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공주마마의 성정이 괄괄하신 건 도성 안 사람들 전부가 아는 사실 아닙니까?”

“괄괄? 포악하신 게 아니고?”

“그래서 여태 시집도 못 가셨다잖아, 받아주는 데가 없어서.”

“호호호.”

탁-!

웃음을 쏟아내던 방안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소음에 화들짝 놀라 일제히 서율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우후죽순 쏟아지는 기생들의 농지거리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상이 부서져라 세게 내려놓았던 것이다. 방안에 정적이 흘렀고, 술잔을 꼭 쥐고 있는 그의 손은 분노로 약하게 떨리기까지 하였다.

“감히 일국의 공주마마를 함부로 들먹이며 욕을 보이다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나서지 마라.”

서율의 분노에 농월이가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데 익정이 말을 막았다. 잔칫집 같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서율의 분노는 끝 간 데 없이 솟아올랐다.

“분명 너희들도 이 자리에서 듣고 있었다. 나는 공주마마의 스승이고, 여기 계시는 분들은 이제 마마의 외숙들이 되신다. 그런 우리 앞에서 공주마마를 서슴없이 욕보였으니 너희들이 우리의 면전에 대고 침을 뱉은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니 그렇습니까?”

중전의 오라비들은 서율의 물음에 동의를 하면서도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하였다. 기생들의 농에 허허거리며 같이 웃다가 외숙이라는 말에 뒤늦게야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기생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서율은 점점 더 냉랭해져 갔다.

“고관대작들만 상대한다는 자들의 말버릇이 고작 이 정도였다니. 혹 그분들이 너희들의 이런 농지거릴 들으며 낄낄대더냐?”

“아닙니다, 나리. 소인들이 무지몽매하여 허언을 하였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한양 최고의 기방이라 하여 와봤더니 진심도 생각도 없는 것들이 모여 앉아 남의 주머니나 터는 곳이었구나.”

기생들을 꾸짖은 서율은 익정과 중전의 오라비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흥을 깨트려 송구합니다만 저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조만간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서율은 지체 없이 일어나 방을 나가버렸고 희립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지금까지 도도하게 앉아 자리를 지키던 농월이도 아이들이 너무했다 싶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부랴부랴 두 사람을 쫓아나갔다.

“뭘 또 저렇게까지……. 하여간, 누가 사헌부 지평 아니랄까봐 깐깐하기는.”

흥이 완전히 깨져버린 기방 안. 중전의 오라비들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낮게 투덜거렸고 입을 잘못 놀려 호되게 된서리를 맞은 기생들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여유롭게 술을 홀짝거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씁쓸한 듯 흐릿한 미소를 걸치고 있는 익정이었다.

‘여리하게 생긴 게 나서야 할 땐 주저 없이 질러대는구나. 사내라 이건가?’

기생들이 공주를 희롱거리로 삼았을 때 한성부의 판관으로서 듣고만 있어야 하나, 순간적으로 고민을 했었다. 안 듣는 데선 나라님의 욕도 하는 판에 공주라고 피해갈 수 있으랴. 자리가 자리인지라 모르는 척 넘어가주기로 하였다. 한데 김서율은 그러한 상황에 구애 받지 않고 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지적하고 나섰다. 익정은 그의 행동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론 소극적이었던 자신이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였다.

“나리, 지평 나리!”

각 방으로 들어가는 상차림을 빠르게 살피며 마당까지 나온 서율은 농월이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용서하십시오, 나리. 저희 같은 천한 기생 년들이 무슨 생각이 있어 그런 말을 하였겠습니까. 저 아이들도 지금 혀를 깨물며 반성하고 있을 겁니다. 소인 또한 반성하고 있습니다.”

“천하다?”

[누구더러 천하다 하느냐, 누구더러 도둑이라 하느냐!]

[신분이 천하다 하여 그 사람 자체가 천한 것은 아니라 하였다. 또한, 신분이 귀하다 하여 그 사람 자체가 귀한 것도 아니라 하였다.]

말 한마디에 저절로 그 분을 떠올리다니.

‘김서율, 네가 미친게로구나…….’

온 세상을 저 혼자 비추고 있는 듯한 여인을 눈앞에 두고도 서율은 남루한 차림의 여자아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옛날, 천하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은 여인 앞에서 경기를 일으킬 것 같이 화를 내던 여자아이. 순식간에 마음이 흔들린 서율은 조금은 꿈을 꾸는 듯 아련해진 눈으로 농월을 바라보았다.

“너는 무엇을 반성하고 있느냐?”

“아이들의 단속을 잘못하여 이런 사달을 일으켰으니 당연히 소인부터 반성을 해야지요.”

“그래, 잘못을 했다면 지금처럼 반성을 하고 용서를 구하면 된다. 그러나 하지 않아도 될 천하다는 말로 무조건 스스로를 낮추거나 비하하진 말거라.”

“예?”

“진정 네 자신이 천하다 생각하느냐? 아마도 너는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조용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그의 말에 농월은 할 말을 잃었다. 지체 높은 양반들은 참을성이 없어 조그만 일에도 벌컥벌컥 자주 성을 내었다. 그러면 일단 화부터 달래어 그 순간을 모면하고자 일부러 자신들을 낮추어 말하곤 하였던 것이다.

“네 스스로를 먼저 귀히 여기거라. 자신을 귀히 여기다 보면 말과 행동에서 기품과 진심이 저절로 우러나온다. 그러다 보면 주변 사람들 또한 너를 귀히 여기고 있을 것이다. 신분이 천하다 하여 그 사람 자체가 천한 것은 아니라 하더구나.”

서율은 그 말을 끝으로 지체 없이 돌아서버렸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해있던 농월은 뒤늦게야 퍼뜩 정신을 차린다. 하지만 벼락같은 깨달음을 준 그는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쉬운 마음에 농월은 뒤에서 큰 소리로 다급히 외쳤다.

“나리, 꼭 한 번 다시 들러주십시오. 이년이 모시겠습니다!”

서율은 이미 대문을 나서고 있었지만 농월은 잊을 수 없는 말 한마디에 몽롱하게 취해 가고 있었다.

“스스로를 먼저 귀히 여긴다…….”

“처음에 잠시 나갔다 오더니 그새 둘러본 것인가? 별채도 많고 상당히 복잡하던데 말일세.”

“……”

근방의 돈이 몰리는 곳답게 예상보다 건물이 많고 구조 또한 복잡해 희립은 꽤 당황스럽기까지 하였다. 서율이 잠시 자리를 비운 시각은 단 일각. 물론 대책 없이 박차고 나왔을 것이란 불안감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김서율은 분명 돌아가는 대로 그 복잡한 곳을 눈앞에서 보고 그리듯 소상히 그려낼 것이다. 그런 그의 능력이 대단하다 여기면서도 가끔은 부럽기도 하였다. 괜히 심술이 난 희립은 넋을 놓고 있는 친우에게 장난삼아 핀잔을 던진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가? 설마 농월이의 미모에 정신이 팔린 것은 아니겠지?”

“쓸데없는 소리.”

멍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서율은 희립의 핀잔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레 넘기긴 했으나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누더기를 걸치고도 당당했던 어린 공주를 떠올리느라 벗이 하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깜깜한 밤이라 표정을 들키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아직은 차가운 봄바람이 소소히 불어오는 춘사월의 어느 밤. 서율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마, 이제 그만 제 마음에서 나가 주십시오!’

“하아~ 살았다!”

싱그러운 푸른달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훈훈한 미풍을 산들 산들 느끼며 은명은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하옥되었다 석방된 죄인들의 기분이 바로 이러했을까. 궐에서 달포 만에 풀려난 은명은 화경궁 근방에 다다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덩에서 뛰쳐나와 랄랄라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리도 좋으십니까?”

“숨통이 탁 트이는구나. 이제야 살 것 같다.”

어린아이처럼 신나 하는 공주를 보며 최 상궁과 나인들의 얼굴에도 저마다 미소가 피어오른다. 금상의 명으로 은명은 지난 한 달, 취연당에 갇혀 이름도 맛도 알 수 없는 온갖 시커먼 약물들을 있는 대로 들이켜야 했다. 게다가 궐에서 있었던 네 번의 강론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리도 싫으십니까? 그리도 부담이 되십니까?’

끔찍하도록 무표정했던 김서율이 떠오르자 순식간에 풀이 죽은 은명은 스르륵 시무룩해지는데 저 앞에 낯익은 얼굴의 한 소녀가 보였다. 야무진 입매와 맑고 또렷한 눈망울, 그리고 홀쭉하니 연약해 보이는 체구. 아정이었다. 아정이가 작은 광주리를 하나 들고 어딘지 얼이 빠진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은명은 아이의 상태를 전혀 살피지 않고 쪼르르 달려가 아는 체부터 하였다.

“아정아!”

“에구머니!”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져 있던 아정은 은명을 알아보고 기절초풍하여 땅바닥에 털썩 엎드려버린다. 무슨 일인지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기까지 하였다.

“왜 그러느냐?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인이, 소인이, 공주마마를 알아 뵙지 못하고…… 요,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정은 화경궁의 안채에서 맨바닥에 코를 박고 있었다. 편히 앉으라, 아무리 권해도 한사코 저러고 있으니……. 은명은 불편해 보이는 아정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면서도 입가엔 저절로 곡선이 그려지고 있었다. 참으로 귀여운 아이가 아닌가. 때마침 궁녀들이 소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아정이가 가져왔다는 녹두 지짐이를 들여온 것이다. 따뜻하게 데워서 그런지 고소한 냄새가 방안 가득 퍼지며 식욕을 자극한다.

은명이 젓가락을 들어 맛을 보기 시작하자 아정은 그제야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보았다. 아직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짐이를 부쳐 명이 아가씨를 처음으로 찾아온 오늘, 화경궁의 노비로부터 엄청난 사실을 듣고 말았다. 아가씨께서 공주마마셨다니! 마른침을 삼키며 아정은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 것을 가져와 송구하옵니다.”

“마침 출출하였는데 솜씨가 제법이구나. 아주 맛있다.”

배가 고팠던 은명은 깨작거림 없이 정말 열심히 젓가락질을 했고, 아정은 그런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느냐?”

“아, 아닙니다. 소인은 그저 마마께서 소문이랑 다르신 것 같아…… 헉,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잘못하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아정이 바르르 떨어대자 은명은 후훗 웃으며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소문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다. 그 중에 절반은 맞는 말이니까. 그렇지 않아도 네가 일을 시작하였다기에 궁금해서 한번 부르려 하였다. 한 상단에서 서기 일을 한다고?”

“예, 의천 상단이라는 곳인데 그곳 대방 어르신이 감사하게도 소인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오나 분점에서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 대방이란 자가 수상하거나 음흉해 보이지는 않더냐?”

음험했던 곽 봉사를 떠올리며 은명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아정은 적극적으로 그 대방이란 자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아직 미취하셨는데 저보다 더 곱상하게 생기셨습니다.”

“그리 젊은 자란 말이냐?”

“예, 올해 스물 하나로 선친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선하고 좋은 분이십니다.”

“그래? 어쨌든 네가 전보다 건강해 보여 마음이 놓이는구나. 그런데 말이다, 상단에서 그런 일을 해도 괜찮겠느냐?”

아무리 몰락하였다 하나 반가의 여식이 밖으로 도는 게 은명은 내키지가 않았다. 하지만 아정은 확고하게 결심을 굳힌 듯 야무진 어조로 답을 올렸다.

“마마를 만나기 전, 저는 정말 막막하였습니다. 하루하루 기한이 다가오면서 곽 봉사에게 끌려가는구나, 낙담한 상태였지요. 저는 그대로 끌려가 빚을 갚은 다음 죽으려 하였습니다. 그리 결심을 하고 보니 죽으면 모든 게 끝인데 허무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진작 이렇게 밖으로 나가 일을 해서 생계를 꾸렸다면 지금처럼 더 빨리 웃으며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저희 가족은 더 이상 다음 끼니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소인은 이제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행복하기만 합니다.”

“……죽으면 모든 게 다 끝이다?”

‘그래, 죽으면 모든 게 다 끝인 것을. 하여 죽을 때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 해놓고 그 사람의 쓴소리에 바보 같이 내가 휘둘리고 말았구나.’

아정이의 한마디가 은명의 가슴에 깊은 여운을 안기고 있었다. 어리고 약하지만 강단 있는 아이. 은명은 그런 아정이 더 없이 장하고 대견스러웠다.

“일도 시작하였으니 내가 옷 한 벌을 지어 주마.”

“아니옵니다! 지금까지 받은 것만으로도 차고 넘칠 지경이옵니다.”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모친과 동생들 것도 한 벌씩 보내줄 것이니 사양하지 말거라. 대신 내가 공주라는 것은 너만이 알고 있어야 한다.”

“마마……”

언니가 있었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살뜰히 챙겨주는 공주의 다정함에 아정은 어느덧 두려움도 잊고 먹먹해진 가슴으로 은명을 마주보고 있었다.

‘의천 상단에서 알아 챈 것일까?’

치경은 눈이 가려진 채 어딘가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미행을 붙인 자들을 단속하고 돌아가던 중 순식간에 날아든 그물에 꼼짝없이 걸려든 것이다. 칼 한 번 빼보지 못하고 붙잡힌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지만 어떠한 기척도 내지 않고 순식간에 일을 해치운 저들도 분명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대체 어디로 끌려가고 있단 말이냐. 이대로 죽는 한이 있어도 도련님이 하시는 일에 절대로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한참을 걷다보니 조용하고 서늘한 실내로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고신을 하려는가? 억지로 무릎을 꿇게 된 치경은 긴장감에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주먹을 그러쥐는데 눈에 둘러져 있던 천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흐릿해진 초점을 맞추기 위해 우선은 눈꺼풀을 여러 번 깜박거렸다. 쾌쾌한 곰팡내가 나는 것으로 보아 외딴 곳에 위치한 어느 광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대낮인데도 어둑어둑한 실내, 눈앞에 보이는 여인의 고운 치맛단. 치맛단? 헛것이 보이나 싶어 두어 번 눈을 힘껏 감았다 뜨는데 위에서 여인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우냐? 아니면 믿기지가 않는 것이냐?”

“고, 공주마마!”

믿을 수가 없었다. 공주께서 어찌 저리 심술궂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계신단 말인가.

“이놈을 끌고 오라 명하신 분이 공주마마셨습니까?”

“나의 명이었다.”

“소인이 마마께 큰 죄를 지은 것이옵니까?”

“지금부터 네게 빚을 받으려 한다.”

“빚이요? 소인이 마마께 빚을 지었습니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속을 알 수 없는 공주의 말과 행동에 치경은 사고마저 정지해버렸다. 대체 이게 무슨 감벼락 같은 말씀이신지.

“어찌 그리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게냐? 정말 모르는 것이냐?”

“황공하오나 소인, 마마께 무슨 빚을 지었는지 정녕 모르겠사옵니다.”

“감히 네가 나를 버리지 않았느냐.”

“그건……”

보령에서의 일을 언급하고 계신 게 틀림없었다. 치경과 재회한지 어언 일 년, 어째서 이제 와 과거의 일을 들먹이신단 말인가. 분명 공주께 무슨 꿍꿍이가 따로 있음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일을 여전히 마음의 빚으로 담아 두고 있던 치경은 얼굴 위로 죄스러운 기색이 크게 번져가고 있었다.

“그때의 일은 정말로 송구하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리 되었지만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정녕 나에게 빚을 지었다, 이리 생각하느냐?”

“그 어떠한 벌을 내리신다 하여도 소인 달게 받을 것입니다.”

“그래? 허면 말해 보아라. 어찌하면 내가 스승님과 은밀히 만날 수 있겠느냐?”

“예에?”

뚱딴지같은 소리가 믿기지 않아 치경은 고개를 번쩍 들어보았다. 당황스러운 건 주위의 궁녀와 무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잡아들이라 하명하시는 모습이 하도 근엄해 저자가 죽을죄를 지었구나, 잔뜩 긴장해 있던 참이었다. 한데 공주께서는 치경이 단짝 동무라도 되는 양 고민스러운 얼굴로 진지한 고민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벌써 반년 째 나와는 사적인 얘기를 나누려 하지 않으시는구나. 오죽 답답했으면 내가 청나라로 가버릴까, 그런 생각도 하였느니라. 그렇지만 오늘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더 이상 주눅 같은 건 들지 않기로 하였다. 문제는 지금 당장 네 상전을 뵈었으면 좋겠는데 강론이 아직 닷새나 남아있다는 점이란다. 이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조용히 어디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

“마마……”

공주의 엉뚱함에 치경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지만 은명은 의자에서 내려와 그에게 바싹 다가앉으며 애가 타는 얼굴이었다.

“그물로 잡아온 게 많이 언짢았느냐? 나의 무사들과 너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화가 났다면 노여움을 풀고 나를 좀 도와다오.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너밖에 없느니라.”

“마마, 제발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어허, 최 상궁! 그게 지금 무슨 소리냐?”

보다 못한 최 상궁이 잔소리를 하자 은명이 발끈하며 맞선다. 치경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좋은 소식 하나를 슬쩍 던져 주었다.

“날을 기가 막히게 맞추셨습니다.”

“뭐라? 그게 무슨 소리냐?”

최 상궁을 향해 으르렁대던 은명은 귀가 번쩍 뜨여 치경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해시쯤, 월류지로 가보십시오. 줄기를 깨끗하게 잘라낸 꽃 몇 송이도 꼭 챙기셔야 합니다.”

“월류지? 꽃은 무엇에 쓰는 것이냐?”

“오늘 밤에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공주의 눈망울에 궁금증이 잔뜩 돋아나고 있었다. 치경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심란하기도 하였다.

‘이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월류지로 접어드는 입구에서 서율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처음에는 또 환영을 보는 줄 알았다. 그러나 환영에 궁녀와 무사들까지 보이지는 않을 터.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공주가 이제는 신통방통하기만 하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월류지로 가시지요? 저도 동행할 것입니다. ……스승님과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너희들은 예서 기다리고 있거라.”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들으시겠습니까? 저는 아무 상관없으니 스승님께서 선택을 하십시오. 지금 여기서 제 말을 들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단 둘이 있을 때 조용히 들으시겠습니까?”

단호하고 고집스러운 저 표정. 공주께서 또 무언가 단단히 결심하신 게 틀림없었다. 저런 표정을 하고 있을 땐 아무도 말릴 수 없음을 익히 알고 있는 서율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은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최 상궁에게 꽃송이가 든 비단 꾸러미를 건네받아 얼른 그 뒤를 따른다. 서율의 손에도 비단 꾸러미가 들려있었다. 그도 꽃송이를 가져온 것이리라. 꽃송이의 용도도, 서율과의 조용한 시간도, 무척이나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얼마간 걸어온 두 사람이 월류지에 당도하자 서율은 늘 해왔던 일인 양 지체 없이 비단 꾸러미의 매듭부터 풀어내었다. 안의 내용물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보자기를 활짝 풀어헤치니 소담스레 새하얀 함박꽃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동시에 황홀한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은은히 퍼져 나갔다.

“와……”

기분 좋게 향취에 빠져 있던 은명은 서율의 다음 행동에 자그마한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가 줄기를 깨끗하게 잘라낸 꽃송이를 달이 환하게 투영된 월류지 위로 하나씩 띄어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달빛이 은은히 비낀 물결 위로 수십 송이의 꽃들이 두둥실 떠가는 광경이 장관이었다. 꽃을 가져오긴 하였으되 무엇에 쓰이는 지 전혀 짐작조차 못했던 은명은 그 모든 게 꿈결인양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일평생 보지 못했을 광경. 이 밤을 그와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꽃을 모두 띄어 보낸 김서율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소원을 비는 것일까.

“무엇을 하신 겝니까?”

조용히 지켜보던 은명은 그가 눈을 뜨자마자 참아왔던 호기심을 드러내었다. 달물결 위로 떠 있는 꽃송이를 바라보며 서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어디서 들었는지 달이 머무는 이곳에 가끔 월궁항아님이 내려온다고 믿기 시작하셨습니다. 누이는 명절이 되면 다른 곳으로 놀러 가는 대신 이곳으로 와 달물결 위로 꽃을 바치며 소원을 빌었지요. 아름다운 꽃을 받은 항아님께서 감동을 받아 한 가지 소원을 들어 줄 수도 있다, 그리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어리석을 만큼 굳건하여 열다섯 어린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가장 아름다운 꽃을 따다 열심히 바치셨습니다.”

“누님이 빌었다는 그 한 가지 소원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도 궁금합니다, 그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그에게서 슬픈 기운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좌상 댁 정경부인이 외동딸을 잃고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다 조카딸을 데려다 키웠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그런가보다 무심히 넘겼는데 슬픔이 짙게 깔린 그를 보고 있자니 은명도 가슴 한편이 아릿해져 왔다.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둘째 형님께 찾아온 마진이 옮았습니다. 두 분이 함께 가셨으니 먼 길 외롭진 않으셨을 겁니다.”

“누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 대신 해 오신 겁니까?”

“자주는 못합니다. 일 년에 한 번 누님의 생일날이 되면 이렇게 찾아오고 있습니다.”

“오늘이 누님의 생일이었군요. ……누님처럼 소원을 비셨습니까? 어떤 소원을 비셨습니까?”

“누님이 다시 환생하시면 그토록 바랐던 그 한 가지 소원을 꼭 이루어 달라, 그리 빌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은명도 화려한 모란꽃을 달빛이 쏟아지는 물결 위로 띄어 보낸 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달님의 힘이었을까, 은명이 눈을 뜨니 한결 부드러워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원을 비셨습니까?”

“스승님과 제가 연을 맺게 하여 주십사……”

은명은 정면으로 마주보는 서율에게서 순간적으로 냉랭한 기운이 퍼져 나옴을 놓치지 않았다.

“……빌었을까 겁이 나십니까?”

“지금 농을 하고 계십니까!”

말장난을 하면서도 당당한 저 말투와 태도. 지존의 따님이시기에 그러한 것인지, 원체 저렇게 생겨 먹으신 것인지. 서율이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공주가 야무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저를 방해하지 않게 하여 달라 빌었습니다.”

“방해를 하다니요?”

“방해하지 마십시오, 헷갈리게 하지 마십시오. 어찌나 언변이 좋으신지 스승님의 말씀에 제가 결심했던 것들을 줏대 없이 홀딱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반년이 넘도록 말입니다. 애초에 저는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흉내도 내지 못합니다. 잔인하고, 못되고, 이기적인 철부지라 하셔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상대를 위해 감추고 자제하는 그런 이상한 배려, 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마, 대체……”

“마음이 열리면 어찌할 것인지 물으셨습니다. 허면 저도 묻겠습니다. 그러다 제가 내일 죽으면 저는 어찌합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스승님이야 신하 된 도리로 공주가 죽었으니 조금 안타까워하다 마시겠지요. 하지만 이리 저리 눈치만 살피다 스승님도 실컷 못보고 죽어야 하는 저는 얼마나 후회되고 억울하겠습니까?”

“어찌 이리 부끄러움도 없으십니까?”

“스승님에 관해선 부끄러움을 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하여 스승님을 향한 제 마음은 접을 수가 없습니다. 응답해 달라, 돌아봐 달라, 떼쓰지 않겠습니다. 저는 저대로 스승님을 연모할 터이니, 스승님은 스승님대로 제게 흔들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십시오. 함께 지옥 속에서 살겠냐고 물으셨습니까? 스승님께서 넘어오지 않으시면 될 일입니다. 저는 지금 이대로도 좋습니다.”

“마마!”

“마음껏 저를 미워하십시오. 싫어하십시오. 벗들에게 제 흉을 보셔도 괜찮습니다. 허하여 드리겠습니다. 허나 제 마음을 강요하진 마십시오. 제 마음은 제 것입니다. 죽기 전에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는 그 말, 꼭 지키고야 말겠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퍼부어댄 은명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서율을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잔소리가 쏟아지기를 기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에게선 어떠한 쓴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나 싶기도 했지만 달빛에 비치는 그의 얼굴이 조금은 부드러워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언제나 그러했듯 초조해진 은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찌 그리 빤히 보고만 계십니까?”

“앞에 계시니 시선이 가서 보고 있습니다. 금지옥엽의 옥안이시니 이리 바라보는 제가 무엄한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오라…….”

각자의 마음은 각자 알아서 하자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하나 그것이 서율의 입을 다물게 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윽이 풍겨오는 매화향. 훈풍이 하늘하늘 불어올 때마다 공주에게서 은근한 암향부동(暗香浮動)이 전해져 그의 방어벽이 자꾸만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달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오월의 어느 밤,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어버린 은명은 그의 눈가가 더 없이 다정하고 애잔한 빛을 띠어가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밝은 대낮엔 감히 이리 할 수 없으니, 지금이라도 이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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