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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장. 강릉, 명이 아가씨 (9/21)

제 9 장. 강릉, 명이 아가씨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기 저 길 한복판,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이쪽을 보고 있는 이가 정녕 공주마마시란 말인가. 친척 누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에 시연이인가 싶어 나와 본 서율이었다. 정말 시연이었다 해도 노복들을 놔두고 예까지 어쩐 일인가 싶었을 텐데 하물며 공주마마시라니! 황당함에 입이 다물어지지도 않을 정도였지만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급히 공주께로 향한다.

“여기까지 어인 걸음이십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스승님이 아니 오시니 제가 올 수 밖에요. 지금 저를 피하고자 하십니까?”

은명은 인사말도 생략한 채 다짜고짜 그의 면전에 대고 쏘아붙였다.

“피하다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허면 마음에 담아두었던 여인이 중전마마로 간택이 된 게 속상해서 그러는 것입니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일주일에 딱 한 번뿐인 강론을 한 달 내내 빼먹으시다니요. 정말로 무책임하십니다!”

삐뚜름한 태도로 은명은 작심이라도 한 듯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쉬지 않고 퍼부어댔다. 지나던 사람들이 흘끔흘끔, 혹은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전혀 거리낌도 없었다.

“마마, 송구하옵니다.”

“엇!”

주변을 살피던 서율은 느닷없이 사과를 하더니 은명의 허리에 팔을 감고 누가 볼세라 구석진 곳으로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귀한 분이 오셨으니 관청 안으로 정중히 모시는 게 마땅한 도리이겠으나 지금으로서는 절대로 불가한 일이었다. 잘못하다간 공주에 관한 해괴한 소문만 되레 키울 수도 있는 일. 무조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모셔야 했다. 병조와 사헌부의 건물 사이, 인적이 매우 드문 골목에 다다른 서율은 허리에 감았던 팔을 풀고 공주를 똑바로 직시하였다.

“저는 사헌부의 관리입니다. 수사가 시작되면 몇날며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다반사이지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중요한 수사를 맡았기에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어 걸음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 할 것입니다.”

“……그러하십니까?”

방금 전 갑작스런 그와의 신체 접촉으로 크게 흔들려버린 은명은 주체할 수 없이 뛰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간신히 답을 하였다. 공주의 이런 상태를 전혀 알 리 없는 서율은 딱딱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중전마마가 되실 분 또한 그렇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누이와도 같은 분이었을 뿐, 마음에 담아두었다니요! 정말 큰일 날 소리를 하고 계십니다.”

“정말이십니까?”

“정말입니다. 이제 소신이 여쭙겠습니다.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공주마마께서 탈 것도 없이 이리 길거리를 돌아다니시다니요?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

이판의 여식을 마음에 둔 게 아니었다는 대답을 들은 이후, 은명은 그 어떠한 말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뒤틀렸던 심사는 눈 녹듯 사라지고 뱃속에 나비 한 마리가 파닥파닥 날아오른다. 간질간질, 두근두근, 저도 모르는 새 그 옛날 보령의 관아로 향하며 느꼈던 어린 공주의 설렘이 새록새록 돋아나고 있는 것이다.

“후우……. 오늘은 이만 환궁하십시오. 강론은 보름 안으로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주의 침묵을 답하기 싫은 것으로 오해한 서율은 체념한 듯 시선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제 감정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 지도 모른 채 넋을 놓고 있던 은명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자마자 가라고 재촉을 하다니! 서운함이 솟구친 은명은 불같은 성미를 누르지 못하고 발끈, 서율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을 전부 기함시킨다.

“산중에서 제 마음을 고백하였기에 고의로 저를 피하신다, 생각하였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아무리 저를 피하신다 하여도 스승님을 향한 제 마음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세월, 스승님을 그리워한 건 사실입니다.”

“헉!”

마음을 적극 표현하라던 난이가 뒤에서 호흡곤란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당당하고 확신에 찬 공주의 고백이 지나치게 솔직했던 것이다. 유교를 숭상하는 이 나라 조선에서, 꽃다운 나이의 처자가, 그것도 공주마마께서 다른 이들을 이리 가까이에 두고 저렇게까지 과감한 고백을 하실 줄이야! 난이와 호위무사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고, 서율은 실로 오랜만에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산에서의 고백을 끝까지 모른 척하려 했건만. 민망해진 그는 황황급급 공주를 제지하였다.

“마마, 지금 너무 과하십니다.”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 말씀드렸습니다.”

“아랫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입니다!”

“어차피 다 알게 될 일입니다! 앞으로는 제 마음을 숨기지 않는 것은 물론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작정입니다.”

은명은 도전적인 눈빛으로 서율을 응시하며 외쳤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저 고집스러운 표정, 대체 저분을 어찌한단 말인가. 공주의 강력한 의지와 따가운 시선이 버거워 서율은 숨이 탁 막히는 듯하였다.

그의 표정변화를 지켜보던 은명은 서서히 물러나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이러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언제쯤 오겠다는 확답을 받아내고, 경직되어있는 그와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화기애애하게 전환하고 싶었을 뿐.

‘이 불같은 성질머리를 고쳐야 할 터인데…….’

더 있다간 김서율이 완전히 질려버리고 말리라.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린 은명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 더욱 불손한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럼, 보름 안에 오시는 것으로 알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저 할 말만 하고 홱 돌아서버린 것이다. 두 발짝 정도 걸음을 떼었을 때 너무 무례했음을 깨달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일. 은명은 울고 싶은 얼굴로 더욱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멀어지는 공주의 뒷모습을 보며 서율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제 할 말만 하고 돌아서는 저 버릇을 아직도 고치지 못하셨단 말인가. 황당하여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빤히 보지 마시게. 그러다 훅 빠져 버리는 수가 있으이.”

흠칫 놀라 돌아보니 어느 틈에 정한군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다가와 있었다.

“대감!”

“사람을 묘하게 홀리는 분이시거든. 혹, 벌써 넘어간 건 아닌가?”

“예?”

“공주마마 말일세. 강론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시는 것 같으이. 방금 내가 다 듣고 보았으니 발뺌할 생각일랑 마시게. 분명 여인이 길거리에서 사내에게 연정을 고백하는 꽤 신선한 장면이었으니까.”

“대체 여기엔 무슨 일이십니까?”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네.”

절대로 그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율은 추궁할 기운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정한군은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바투 다가와 속살거렸다.

“솔직히 말해보시게, 자네 지금 심정이 어떠한가? 두근거리는가, 아니면 난처하고 괴로운가?”

“공주께서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강론에 임하고 계십니다.”

그의 말에 정한군은 피식 웃더니 희담인 듯 진담을 던진다.

“싸고도시기는. 조심하시게, 내 마음은 나도 잘 모르는 법이거든.”

“제 마음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억지로 눌러서도 아니 되지. 그러다 터져버리면 실로 감당키 어려울 것이야.”

“대감, 지금 선문답을 하고자 하십니까?”

“웃자고 하는 소리일세. 선선하니 머리 식히기 딱 좋은 날이 아닌가. 여유를 좀 가지시게. ……후훗, 당분간은 그냥 놔둬도 되겠어.”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빙그레 웃어 보인 정한군은 공주와 마찬가지로 휙 돌아서버린다. 제 멋대로 왔다가 제 멋대로 사라지는 건 두 이복남매가 어찌 저리도 닮으셨는지.

“살펴 가십시오.”

뒤늦게 인사를 올린 서율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관청으로 향했다. 며칠간 누적되었던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문득 개운치 못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춘다. 그러고 보니 공주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이다. 화경궁으로 곧장 돌아가시라 다짐을 받았어야 했건만. 그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엉뚱한 곳으로 새지는 않으셨을 테지.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더 이상 아홉 살 어린아이도 아니고, 궁녀와 군관도 곁에 있질 않은가. 정말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 분이었다.

그렇게 겪고도 서율은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공주가 언제나 그 설마라는 생각에 뒤통수를 치는 분이었다는 것을. 약 반 시진쯤 지났을까,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였다가 흩어진다는 운종가의 입구를 바라보며 은명은 홀로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길고 넓게 뻗어있는 거리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파.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흥분한 은명은 옆도 뒤도 살피지 않고 저 멀리 운종가의 입구만 바라보며 발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몇 걸음 나아갔을 때,

“비켜!”

돌연 귀청이 찢어질 듯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사내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눈앞에 커다란 말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허억.”

숨 막히는 공포감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데 눈 깜짝할 사이, 뒤에서 누군가 은명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말은 아슬아슬 인명사고를 피해 엄청난 속도로 그곳을 지나쳐갔고, 위태로운 고비를 넘긴 은명은 현기증이 일어 넋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아득하니 깊은 적막에 휩싸였던 찰나의 시간이 흐르자 왁자지껄 생동감 넘치는 세상의 소리가 다시금 들려오기 시작했다. 서서히 정신을 차린 은명은 자신이 웬 단단한 돌덩이를 껴안고 있음을 인지했다. 한데 돌덩이가 어찌 이리도 따뜻하단 말이냐. 이상한 기분에 슬며시 고개를 들어보니 김서율 만큼 키가 크고 호걸의 풍모를 가진 한 사내가 은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앗!”

벌건 대낮에 길 한복판에서 외간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은명이 화들짝 놀라 빠져나오는데 사내는 괜찮으냐는 말도 없이 호통부터 내리쳤다.

“정신이 있소, 없소? 번잡한 대로에서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무작정 앞만 보고 건너려 하다니. 나는 가야겠으니 다들 알아서 피해가라, 뭐 그런 것이오?”

멋들어진 전립에 흑색과 자줏빛이 도는 관복을 차려 입은 저 사내는 한성부의 관리가 틀림없었다. 죽을 뻔했던 사람인데 무작정 혼부터 내는 게 괘씸스러웠지만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다 잘못을 한 건 사실이니 은명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하였다.

“그런 행동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 또한 상하게 할 수 있으니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오.”

길거리에서 혼이 나고 있음에도 가만히 서서 싫은 소리를 전부 다 듣고 있다? 익정은 눈앞의 소저가 점점 더 기특해지려 하고 있었다. 끌어당겼을 때부터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때문에 정신이 들면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따끔하게 혼을 내리라 별렀던 것이다.

한데 품에서 빠져나간 소저는 언뜻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지체 높은 가문의 규수인 것 같았다. 꽃과 나비가 수놓아진 연미색 삼회장저고리와 풍성하고도 고운 연보랏빛 치마를 입은 모습에 귀태가 흐른다. 뿐인가, 한쪽 머리 위로는 청보석과 백옥, 진주가 조화를 이룬 더 없이 진귀해 보이는 장신구를 꽂고 있었다.

저 정도면 최고 명문가의 규수가 틀림없었다. 미안하다, 사과를 하고 얼른 자리를 피해버리거나 샐쭉하게 눈을 흘길 만도 하건만 입을 꾹 다물고 서서 쏟아지는 잔소리를 전부 듣고 있다니. 그런 태도가 대견했던 익정은 이쯤에서 진심 어린 조언이나 해주고 마무리를 짓기로 하였다.

“보아하니 대가댁 규수 같은데 어찌하여 장옷을 쓰지도 않고 혼자서 시전으로 향한단 말이오.”

“시전을 구경하러 갈 것인데 장옷을 덮어쓰면 시야가 좁아져 불편하지 않겠느냐.”

지금까지 침묵하며 잔소리를 들어주었던 은명은 답답한 소리를 하는 사내 때문에 끝내 입을 열고 말았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꾸지람을 들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은 오지랖일 뿐, 목숨을 구해준 은인일지라도 이건 아니지 싶었다.

한편, 웬만해선 당황하지 않는 익정이 기가 차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저를 생각해 마지막으로 해준 말이었건만 그새를 못 참고! 저 답답해하는 표정은 무엇이고, 부리는 집사 나무라듯 말을 편히 놓고 있는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규수의 뻔뻔함에 익정은 부글부글 열이 끓어오른다.

“그러다 화를 입고 후회나 하지 마시오.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니.”

“밝은 대낮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내가 화를 입다니? 만일 내가 화를 입는다면 그게 어찌 나의 잘못이라 할 수 있느냐. 그건 순전히 도성의 치안을 관할하는 그대 같은 한성부의 관리들이 무능한 탓이다.”

소저의 맹랑함에 뒤에서 지켜보던 한성부의 참군이 발끈하며 나섰다.

“말씀이 지나치시오, 한성부를 모욕하다니! 게다가 이분이 누구인 줄 알고 함부로 하대를 하는 것이오!”

정칠품 조정 관리의 호통에도 고운 차림의 소저, 눈 하나 깜짝 않고 새치름히 고개를 핑 돌려버린다. 철이 없는 것인지, 원래 저리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인지. 하도 어이가 없어 참군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데 잠자코 지켜보던 익정의 눈가에 어느덧 장난기가 몰씬몰씬 피어오른다.

“어느 댁 규수인가?”

“그건 어찌하여 묻느냐?”

“나는 한성부 판관, 송익정이다. 혹 그대에게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게 다 내가 무능한 탓이 아니겠는가? 후에 소저의 부친께서 쫓아와 한성부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도 있는 일. 댁까지 무사 귀환을 책임져 줄 수밖에.”

점잖고 딱딱하던 익정의 목소리가 유들유들 놀리는 듯한 말투로 변해 있었다.

“정말 한성부의 판관인가?”

“그렇소만. 설마 내가 한성부의 판관이라 하여 지금까지 뱉은 말을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젊은 나이에 종오품 판관이었다. 보통 연치만 보고 직급을 낮게 추측하였다가 그의 직책을 알고 난 뒤 급박하게 겸손해지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왔다. 그런데 저 건방진 규수, 놀라기는커녕 곁눈질로 익정의 위아래를 대충 훑더니 심드렁하게 묻는다.

“과거는 보았느냐?”

자다가 봉창을 두드려도 유분수지, 과거를 보았냐니! 저 수상쩍다는 표정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익정은 난생처음 뒷목이 뻐근해져 옴을 느꼈다.

“과거를 보지 않고 어떻게 조정에 출사를 한단 말이오!”

“젊어 보이는데 벌써 한성부의 판관이라니. 혹, 아주 어린 나이에 대과에서 장원급제를 하였느냐? 그게 아니면…… 어느 댁 자제인가?”

어느 댁 자제냐는 물음에서 은명은 저도 모르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어 보였다. 평소 정의로운 기개가 넘치던 익정의 자존심이 바닥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지금 내가 부정한 방법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이리 생각하는 것이오?”

“아가씨!”

명예가 실추되었다는 생각에 익정이 폭발 일보직전까지 치달았는데 저 멀리서 사색이 된 난이와 군관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공주의 신분을 드러내는 덩 말고, 평범한 가마로 바꿔오라는 통에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마마께서 자취를 감추어버려 얼마나 식겁을 하였는지. 난이의 눈가엔 눈물까지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마…… 아니, 아가씨,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시면 어찌합니까? 소인의 간이 쪼그라들 지경입니다.”

“나도 어쩌다가 혼자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말에 치일 뻔했었는데 이분이 구해주셨어.”

공주가 말에 치일 뻔했었다는 소리에 난이는 물론, 호위무사까지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린다. 만약 사고를 막지 못했다면 자신들도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었다. 아찔한 상상으로 으스스 온몸에 한기가 든 난이는 진심을 다해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은명은 차츰 난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간단히 다녀온다는 핑계 하에 난이만 데리고 나왔지만 실은 운종가에 나와 보려 일부러 깐깐한 보모를 떼어놓고 왔던 것이다. 가마를 바꾸라며 난이와 군관의 정신을 쏙 빼놓은 것 또한 몰래 떨어져 나오기 위함이었다. 공주에게 사고가 생기면 그 모든 책임은 고스란히 저들의 몫일 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는 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본의 아니게 아랫사람들을 괴롭힌 꼴이 된 은명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데 난이가 눈물을 머금고 사정을 해온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어요. 아가씨께서 다치기라도 하신다면 소인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이리 나왔는데 어찌 그냥 돌아간단 말이냐. 볼 것도 많고, 신기한 것도 참 많구나. 너는 보고 싶지 않느냐?”

“참말로 왜 이러십니까!”

“걱정하지 말거라. 내 다시는 너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울상을 짓고 있는 난이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도 은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은 거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포기할 수 있으랴.

그때, 참군과 함께 멀뚱히 보고 있던 익정이 궁금한 얼굴로 질문을 해왔다. 그새 화가 스르르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도성에 사는 것이 아니었소? 뭐가 그리 신기하시오?”

“음…… 나는 강릉에서 왔느니라.”

갑작스러운 물음에 뭐라 답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 은명은 저도 모르게 마지막 피접장소인 강릉을 입에 올렸다.

“강릉?”

“한성부의 관리가 이리 버티고 있으니 도성의 치안상태는 의심할 바 없겠지? 당분간 내가 도성 안을 다니며 구경을 할 것이니, 한성부 관리로서 그대들의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길 바라네.”

익정과 참군은 자신들을 마치 저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새파란 규수의 언사에 기가 막혔고, 난이와 무사는 또 다른 이유로 몸서리가 쳐졌다.

“당분간…… 도성 안을 구경할 생각이시라고요? 정말이십니까? 이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네. 아까 했던 말은 명심하도록 하지.”

익정에게 대충 인사를 건넨 은명은 잔뜩 겁을 먹은 난이를 수습해 얼른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걸음을 멈추더니 어안이 벙벙해진 한성부의 두 사내를 돌아보며 씩씩하게 외쳤다.

“참, 날 구해줘서 고마웠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저 규수에게 감사의 인사도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아랫사람 취급을 하다니! 규수의 아름다운 미소에도 익정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 이런 곳이 존재하고 있었을 줄이야! 거리의 시끄러운 소음으로 귀가 얼얼해져도, 아이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로 눈물이 쏙 빠지게 콜록거려도, 은명에겐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선전과 신전, 어물전, 유기전 등 각양각색의 점포들과 색기를 줄줄 흘리는 요염한 자태의 기생들, 그리고 신명 나는 놀이판까지. 물건 구경, 사람 구경, 재주 구경, 음식 구경 등등 그야말로 별천지가 따로 없는 세상이었다.

어린 시절, 보령에서 보았던 시전은 시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눈동자를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앞으로, 앞으로 끝도 없이 나아가는데 누군가 불쑥 튀어나와 길을 가로막는다. 난이가 양팔을 옆으로 크게 벌리고 서서 공주의 앞길을 차단한 것이다.

“뭐 하는 것이냐?”

“제발 더 이상은 가지 마십시오. 오늘 하루에 다 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미 멀리까지 와버리셔서 돌아가시는 데만도 시간이 한참 걸릴 것입니다.”

기분이 한껏 고조된 터라 이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난이의 울 것 같은 얼굴을 보자 은명도 차츰 마음이 약해져 간다. 하루 종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전 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썼는지 얼굴이 퀭한 것이 보기에도 딱할 지경이었다.

“알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꾸나. 대신 돌아갈 땐 저 골목으로 빙 돌아서 갈 것이다. 저쪽으로도 가는 길이 있겠지?”

“예에?”

큰길을 따라 일직선으로만 걸어왔던 은명은 골목 사이사이로도 꽤 많은 점포가 있음을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난이와 군관이 기절초풍하는 상황에서도 은명은 부푼 기대감을 안고 지체 없이 골목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골목 안은 밖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생담배를 피우는 절초전에서 장정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먹고 있는 개장국집, 일어서서 술을 마시고 있는 목로술집까지. 그 생경한 광경에 또다시 정신이 팔린 은명은 자신도 저런 곳에 들어가 뭐라도 하나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살금살금 피어오른다. 마침, 보령에서 경험한 바 있던 주막이 떠올랐다.

“이 근처에 주막도 있을까?”

“주막이요? 마마, 제발 진정하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냐, 진정하라니? 나는 그저 주막에 들어가 국밥이나 한 그릇…… 헛!”

고양된 기분을 감추고 지엄하게 윗사람 노릇을 하고자 할 때였다. 뒤에 따르던 무사가 느닷없이 튀어나와 공주를 향해 거칠게 달려오던 작은 물체를 재빨리 막아주었다. 돌발 상황에 깜짝 놀란 은명은 사태가 진정되자 군관의 등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땟물이 줄줄 흐르는 자그마한 사내아이였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홍수 같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어디를 다친 것이냐?”

어느새 아이 앞으로 다가온 은명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고도로 훈련된 군관이었는지라 작은 몸집의 아이가 다치진 않았는지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는 고개만 가로 저을 뿐 울음을 전혀 그치지 않는다.

“한데 왜 그리 우는 것이야. 많이 놀란 것이로구나?”

“우리 형아가 맞고 있습니다. 제발 우리 형아를 살려주세요!”

“맞고 있다고? 누구한테? 어디에서?”

“저기요, 저기에 있습니다!”

지체 높아 보이는 아가씨가 관심을 보이자 울음을 뚝 그친 아이는 발딱 일어나 은명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오다 마주친 분이었다. 이분이라면 형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눈에 희망의 빛이 반짝 떠오르고 있었다.

은명은 초조해하는 아이를 열심히 따라가 보았다. 골목을 두어 번 돌고 돌아 얼마간 걸어가 보니 울음소리와 비명소리, 호통소리가 뒤범벅이 된 난장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세히 보니 양반으로 보이는 한 중년의 사내가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를 사정없이 발로 짓이기는 중이었다. 그 옆에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갓난아기를 업고,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싹싹 빌며 용서를 구하는 앳된 용모의 소녀도 있었다.

“나리, 용서해주십시오, 우리 영수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도둑놈의 새끼,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이런 새끼는 쓴 맛을 똑똑히 보여줘야 돼!”

“잘못했…… 잘못했습니……다……”

쓰러져 있는 남자아이는 힘없이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코와 입술이 터져 피범벅이 되었고, 얼굴은 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부어올라 처참한 몰골이었다. 아이의 상태가 그 지경인데도 사내의 잔인한 발길질은 멈출 줄을 모른다. 주변사람들 역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멀거니 구경만 하고 있었다. 살벌하고 끔찍한 이 미친 광경에 은명은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노여움이 치솟았고 종국엔 버럭 고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만 두어라!”

갑작스러운 호통에 사람들의 시선이 은명에게로 향했지만 발길질을 하던 그 사내, 한 번 흘끗 보더니 그대로 무시하고 폭력을 이어갔다. 은명은 무사에게 눈짓을 보냈고, 무사는 눈 깜짝할 새에 달려가 아이를 짓밟고 있는 사내의 한쪽 다리를 잡아 거칠게 밀어버렸다. 사내가 벌러덩 뒤로 나자빠진 사이, 옆에서 빌고 있던 아이의 누이는 피투성이가 된 어린 동생을 얼른 가슴에 안아 올렸다.

“영수야, 영수야! 괜찮으냐? 흐흑, 많이 아프지? 미안하다, 미안하다……”

바닥에서 나뒹굴던 사내는 종들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신경질적으로 종들의 손길을 홱 뿌리친 그는 독이 바짝 오른 얼굴로 군관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 입, 다물라!”

벼락 같이 들려 온 차가운 호통에 소리를 지르던 사내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은명을 노려보았다. 대가댁 규수 같아 보이기는 하나 새파랗게 어린 규수가 저보다 나이가 한참 높은 양반에게 이리 함부로 굴 수는 없었다. 발칵 뒤집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지체 높은 가문의 영애로 보이는 이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일. 사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음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느 댁 규수인지는 모르나 이 나라 조정의 관리에게 함부로 막말을 해도 되는 것이오?”

“너 같은 게 조정의 관리란 말이냐? 네 직책과 성명을 대 보아라.”

“아니, 이게 무슨 무례한…… 대체 뉘시오?”

“보면 모르겠느냐? 너같이 백성을 괴롭히는 관리 하나쯤 간단히 처리해 줄 수 있는 분의 여식이니라.”

당당하면서도 위엄이 서린 은명의 태도에 사내의 얼굴에 잠시 당황한 빛이 스쳐 지난다.

“그, 그건……”

“나라의 녹을 먹는 자가 연약한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다니, 부끄럽지도 않은 것이냐?”

“저놈은 도둑놈이요. 사는 꼴이 하도 딱해 여러모로 보살펴주었음에도 보은은커녕 남의 집 귀한 제사 음식에 손을 댄 놈이란 말이오.”

사내의 말에 아이의 누이가 바닥에 엎드려 사정을 했다.

“그건 소인의 잘못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하도 굶어 젖이 안 나오고 있습니다. 그 바람에 막내가 배고파서 울다 경기를 한다고 동생한테 걱정의 말을 하였더니……. 흑흑, 이 아이는 저희를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제발 소인이 대신 벌을 받게 하여 주십시오.”

“대체 무엇을 훔쳤느냐?”

“저기……”

마음이 짠해진 은명이 측은한 목소리로 묻자 아이의 누이가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지짐이 두 장을 가리켰다. 고작 지짐이 두 장 때문에 아이에게 이토록 끔찍한 매질을 가하였단 말인가. 은명은 열이 뻗쳐올랐지만 사내는 시종일관 뻔뻔한 모습이었다.

“저것은 조상님들께 올리려던 거였소. 그 어떤 음식보다 내게는 귀한 것들이오.”

“저 아이를 죽일 뻔하였다. 죽은 사람을 위한 음식이 산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하다는 것이냐?”

“에헴, 흠!”

사내는 헛기침을 하더니 싸늘한 눈으로 아이의 누이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 것이나 기한이 나흘밖에 남지 않았으니 빨리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오늘 것 또한 달아둘 것이야.”

깊은 욕망과 음흉함이 잔뜩 배인 시선으로 아이의 누이를 쭉 훑어본 사내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빠르게 멀어져 갔다.

사내의 기분 나쁜 눈빛을 똑똑히 목격한 은명은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그의 시선은 욕지기가 날 정도로 불쾌하고 매스꺼웠다. 대체 저 기분 나쁜 눈빛은 무엇이란 말인가. 은명이 찜찜한 기분에 휩싸여 있는데 사람들 틈에서 토실토실 살이 오른 한 여인이 울먹이며 뛰쳐나왔다.

“미안하다, 아정아. 이를 어쩌면 좋으냐, 다 내 잘못이다.”

여인은 방금 전 그 사내의 반빗아치였다. 사정을 들어보니 영수라는 아이는 사내의 집에서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해주고 음식을 조금씩 얻어오는 처지였다. 아이들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반빗아치는 마침 오늘 남은 것이 있어 지짐이를 몰래 건네주었고, 영수는 어머니를 생각해 감사해하며 받아왔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내가 쫓아와 마구 행패를 부렸다. 훔친 것은 아니었으나 혹시라도 반빗아치가 화를 입을까, 아이는 입을 다물고 고스란히 그 매를 다 감당하였던 것이다.

나이도 어린것이 어쩜 저리도 속이 깊을까. 처절한 광경에 가슴이 미어진 은명은 동생을 안고 훌쩍이는 아정을 애처로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네 이름이 아정이냐?”

“허가 아정이라 합니다.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런데 기한이라니? 아까 그자가 무슨 소리를 한 것이냐?”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오늘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 아이를 업게.”

은명이 군관에게 영수를 업으라 하자 아정이 붉어진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뼈가 상했을 수도 있으니 의원에게 보여야 할 것이다. 내가 의원을 불러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앞장 서거라. 너희 집이 어디냐?”

은명은 아정이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명을 내린 후 아이들을 모두 챙겨 근처에 있다는 그들의 집으로 향했다. 의원을 불러 치료를 받게 하고 집안 형편을 꼼꼼히 살펴볼 작정이었다. 대체 얼마나 어려운 형편이기에 남매들이 하나 같이 비쩍 말라 비실대는 것일까? 조급한 마음에 은명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구경의 대상이었던 아이들이 사라지자 모여 있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때, 외진 담장에 붙어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지켜본 한 사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처럼 곱상한 외모를 가진 의천 상단의 대방, 준혁이었다.

“이야, 우리 공주마마, 의롭고 어여쁜 분이실 줄 내가 알았다니까!”

공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 녹녹하면서도 따사로운 기운이 애잔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크크크.”

청월관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던 준혁은 온종일 바쁘고 알차게 보낸 공주의 하루 일과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직설적이고 솔직한데다 불같은 성미까지. 크크, 귀여우셔라.”

‘한데 사헌부 지평과는 무슨 사이실까? 단순한 사제지간은 아닌 듯한데…….’

한 달 전, 현법사까지 몰래 쫓아갔다 공주와 함께 있는 익숙한 얼굴의 사내를 보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주막에서 국밥만 먹고 헤어졌던 그 사내가 소문이 자자한 좌의정 김대원 대감의 차남이란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공주께서 보인 과감한 행보의 첫 방문지 역시 사헌부의 김서율이었다. 멀리 있었기에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공주마마 표정이…… 어?”

혼잣말을 하던 준혁은 저 앞에 있던 한 사내를 알아보고는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안면이 부드럽게 펴진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김서율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선비님 아니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준혁이 만면에 미소를 띠우며 다가갔으나 서율은 그를 알아보는 것 같으면서도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싸늘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그 값비싼 물건들은 잘 팔았는가?”

한 요릿집에 방을 잡아 들어앉은 서율은 눈앞의 사내를 주시하며 건조하게 물었다. 눈치가 빠를 뿐 아니라 영리하기까지 한 준혁은 여유를 잃지 않고 숨김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인다.

“한양 본점의 도방은 사사로이 제게 외숙이 되십니다. 오랫동안 자녀를 갖지 못한 선친께서 오십이 넘어 첩실을 들였는데 그분의 동생이시지요. 그 귀중품들은 모두 그자가 주문을 받아 부탁한 것들이었습니다.”

“해서 자네는 잘 모른다?”

“금비녀의 행방은 알 길이 없으나 연적과 황모필은 얼마 전 한 육품 관리의 손에 넘어 간 것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런 자가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요. 상단의 회계장부에 숫자를 맞춰 놓긴 하였지만 분명 조작되었을 것입니다.”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자신이 이끄는 상단이 연루되어 있는 일이었다. 어느 정도 비호를 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강준혁은 모든 것을 가감 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털어놓는 연유가 무엇인가?”

“장사치들이란 생존 본능이 무서울 정도로 강한 족속들이지요. 저는 특히나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은 진실만을 말해야 할 때다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고, 그 본능에 충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의심하십니까?”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 것으로 보네. 그랬다면 아무리 은인일지라도 그런 물건들을 함부로 내보이진 않았겠지. 헌데 그 기방에는 무슨 일이었는가?”

“대방인 저도 모르게 의천 상단에서 기방을 운영 중이라기에 가본 것뿐입니다.”

“청월관이 의천 상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곳이란 말인가?”

뜻밖의 정보에 서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별감 하나를 내세우긴 했지만 그 뒤에 한양 분점의 도방, 양병수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지금 무언가를 수사 중이십니까? 청월관이 그 일과 연루되어 있다, 이리 보고 계신 겁니까?”

“아직은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네. 그 육품 관리가 평소 그곳을 자주 들락거렸다기에 와봤을 뿐. 하지만 지금부터는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

“그곳이 요즘 도성뿐 아니라 근교에 있는 돈까지 죄다 쓸어 모으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 막대한 부가 누구의 손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궁금하신 모양입니다.”

무서울 정도로 눈치가 빠른 준혁을 보며 서율은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겉보기엔 곱상하니 여려 보여도 거대 상단의 대방이라 그런지 결코 만만히 볼 인물은 아니었다.

“한 가지만 약조해 주신다면 제가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큰 도움이라…… 꽤나 자신만만하군.”

“저 또한 청월관 일이 무척이나 궁금한 사람입니다. 까딱하다간 선친께서 평생을 바쳐 일궈온 우리 상단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후에 양병수가 범죄와 연루된 사실이 드러난다 해도 우리 상단 전체를 상대로 문책하지 않겠다, 약조하여 주십시오. 그리만 해주시면 선비님께 기꺼이 협조를 하겠습니다. 제가 꽤 유용할 것입니다.”

흥미로운 제안에도 서율은 이렇다 할 감흥 없이 마지막 점검에 나섰다.

“이(利)를 취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게 장사치들의 속성이지. 하물며 자네는 손꼽히는 거대 상단의 대방일세. 뒤에서 저들과 야합을 도모하지 않을 거라 내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예, 장사치에게 있어 이(利)를 취한다는 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지요. 그러나 저에게는 그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 목숨. 저는 죽고 사는 일에 굉장히 민감한 사람입니다. 무조건 오래 오래 살아야 하는 사람이지요. 쓸데없는 욕심으로 수명을 단축시키는 어리석은 짓, 저에게는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설득하기 위해 괜히 하는 말로 들리지는 않았다. 재물을 불리는 일보다 장수(長壽)에 더 무게를 두는 장사치가 있다니.

‘사연이 깊은 자로군.’

사실 서로에게 전혀 손해날 게 없는 계약이었다. 아니, 서율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큰 수확을 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늘만 해도 존재조차 몰랐던 양병수란 대어까지 낚았으니 앞으로 준혁의 도움을 받는다면 수사는 급물살을 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심이 선 서율은 담담한 어조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약조를 하지. 의천 상단 내, 범죄와 연루된 자들만 처벌할 것이고 불법으로 착복된 재산에 한해서만 몰수를 할 것이네.”

그렇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우연히 만나 의기투합한 두 사람이 막 요릿집을 나섰을 때였다. 새끼줄을 꼬아 알맞은 크기로 돌돌 말아 만든 공이 데굴데굴 굴러와 준혁의 발끝을 톡하고 건드린다. 공이 굴러온 방향을 보자 한 무리의 아이들이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빨갛게 익은 얼굴로 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귀여웠는지 준혁은 피식 웃으며 공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고, 그로 인해 목에 걸고 있던 장식물 하나가 밖으로 달랑 튀어나왔다.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 청보석 장식물. 우연찮게 그 장식물을 목격한 서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표정이 묘하게 바뀌어갔다. 공을 던져주고 뒤늦게 그의 시선을 의식한 준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팍에 있던 장식물을 다시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릴 적부터 지니고 있던 거라 없으면 허전합니다.”

준혁은 멋쩍은 듯 웃었고, 서율은 순식간에 표정을 지워버렸지만 꼭 말아 쥔 두 주먹만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느 쓰러져가는 초가집 앞. 옻칠을 한 윤기 나는 겉면에 은빛의 매화꽃이 촘촘하게 새겨진 가마 하나가 멈춰 섰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지나던 사람들까지 걸음을 멈추고 쳐다볼 정도로 보통의 가마들보다 훨씬 크고 호화롭게 만들어진 가마였다. 문이 열리자 맑고 영민해 보이는 얼굴에 기품 있는 복색을 갖춰 입은 한 규수가 조심스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보모상궁의 잔소리와 꾸지람을 꿋꿋이 견디며 기어이 아정이네 집을 다시 찾은 은명이었다.

기한이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던 사내의 끈적끈적한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내내 찜찜해하던 은명은 그로부터 나흘째인 오늘, 꺼림칙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몸소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불길했던 예감은 적중하였다. 가마에서 내려 겨우 두세 발짝 걸음을 떼었을 때 구경꾼들 틈에서 한 아낙이 은명을 알아보고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아이고, 아가씨! 며칠 전 저 길가에서 영수 구해주신 분 맞으시죠?”

“그렀네만.”

“아이고, 살았네. 아이고, 살았어!”

“무슨 일이 있었는가?”

“큰일 났습니다. 아가씨께서 주신 가락지와 엽전 꾸러미 때문에 아정이랑 영수 어미가 지금 절도죄로 포청에 끌려가 있습니다.”

“절도죄라니? 그건 그들이 훔친 게 아니라 내가 준 것이었다.”

“그걸 누가 믿어 주겠습니까. 곽 봉사 나리께서 훔친 거라고 포졸들을 데려왔는데 아가씨께서 어느 댁 분이신지도 모르고 증명할 길이 없어 그대로 끌려갔습니다.”

“곽 봉사라면 그날 영수에게 폭력을 가했던 그놈이더냐?”

“예, 맞습니다. 그 분이 이 집에 곡식을 빌려줬습죠. 기한 내 못 갚으면 아정이를 첩으로 들이려다가 계획대로 안 되니까 앙갚음을 한 것입니다.”

보기만 해도 징그러웠던 그 사내가 이제 열넷, 어린 아정을 첩으로 들이려 하였단 말인가. 은명은 더 들을 것도 없이 곧장 가마에 올라 포청으로 향했다.

나흘 전, 아이들을 따라 그들이 사는 집에 직접 가보았던 은명은 가난이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부엌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음식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은 우물물을 길어다 배를 채웠고 그 어미는 유복자를 낳은 뒤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 시들어가고 있었다. 형편이 그 지경인 것을 보고 어찌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쌀을 사다 독을 채워주고, 가지고 있던 엽전꾸러미와 끼고 있던 가락지까지 전부 빼서 손사래를 치는 아정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었다.

그런데 오늘, 곽 봉사 그자가 포졸들을 불러와 집안을 수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돈을 되돌려 받을 수 없을 거라 여기고 아정이를 데리러 왔다가 영수 어미가 엽전 꾸러미를 내밀자 심술을 부린 것이리라. 은명은 노여움에 열불이 치솟아 머리끝까지 후끈 달아올랐다.

“파렴치한 작자 같으니.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초조한 마음을 누르며 포청에 당도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눈물로 범벅이 된 영수와 그의 동생 영재였다. 갓난아기를 등에 업은 영수는 포청에서 막 나오던 곽 봉사의 다리를 부여잡고 사정을 하는 중이었다.

“나리, 정말 훔친 게 아닙니다. 며칠 전, 그 아씨께서 저희 사정을 딱히 여겨 주고 가신 것입니다. 제발 저희 어머니와 누이를 살려주십시오!”

“시끄럽다! 너 같은 도둑놈을 키운 어미와 딸년인데 안 봐도 뻔하지. 정 억울하거든, 그 처자를 찾아와 증명해 보이 거라. ……비키 거라 이놈아, 어디서 그 더러운 몸뚱이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야!”

곽 봉사는 갓난아기를 업고 있는 영수의 가슴을 발로 사정없이 차버리고는 더러운 게 묻었다는 듯 신발을 땅바닥에 벅벅 문질러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은명은 옛 기억이 소록소록 떠오르며 마치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울분이 솟아올랐다.

그 옛날 보령에서 정씨 여인의 횡포에 얼마나 억울하고 서러웠던가. 김서율과 홍치경이 아니었다면 은명도 그날 꼼짝없이 도둑으로 몰려 큰 화를 당했을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저놈은 정씨 여인보다 더 악질인 것이다. 곱고 우아한 차림의 은명은 그 자태에 걸맞지 않게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씩씩거리며 사내 앞으로 척척 걸음을 옮겼다.

개똥이라도 밟은 양 땅에 신발 바닥을 비비적거리던 사내는 시야에 분홍빛 치맛단이 들어오자 누군가 싶어 고개를 들어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덴겁하여 몸을 살짝 비틀거리기까지 하였다. 며칠 전 보았던 그 버릇없는 규수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찰나의 아찔한 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린 사내가 얼른 자리를 피하려는데 부르르 떨고 있던 규수에게서 그의 속을 뒤집어버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너어…….”

너라니, 너라니! 이 몸이 동네 꼬마아이라도 된단 말인가. 어린 규수의 밑도 끝도 없는 반말지거리에 벌겋게 달아오른 사내가 소리를 지르려는데,

“아씨!”

엉엉 울고 있던 영재가 은명을 알아보고는 쏜살같이 달려와 치맛자락에 와락 안겨 들었다. 눈물이 가득 차오른 영수 또한 이제는 살았구나 싶은 얼굴로 은명을 붙잡고 호소하였다.

“아씨, 제발 우리 어머니랑 누이를 살려주십시오!”

짠한 마음에 은명이 아이들을 한 번씩 어루만져 주고 있는데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사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보시오, 소저! 대체 뉘시오? 대체 어느 댁 여식이기에 조정의 관리를 이리 함부로 대한단 말이오. 오늘은 소저의 부친이 뉘신지 내 꼭 알아야겠소.”

“시끄럽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냐!”

사내의 호통에 은명이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최 상궁이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새처럼 튀어나와 사내보다 더 큰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정오품 보모상궁이 종팔품 봉사에게 호통을 칠 수도 있는 일. 하나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곽 봉사는 주변에 몰려든 포졸과 사람들에게 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대가댁 영애라 해도 그렇지, 조정의 벼슬아치에게 맘대로 너라 칭하고, 그 아랫것이 덩달아 호통을 쳐대다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인 것을!”

“파렴치할 뿐 아니라 분수도 모르는 자로구나. 제 잘못은 생각도 않고 남의 부친의 함자를 궁금해 하다니! 사사로운 감정으로 무고한 이들을 옥에 가둬놓은 주제에 꼴에 관리라고 대접은 받고 싶은 것이냐? 긴 말할 필요 없다. 내가 지금 포청으로 들어가 아정이와 아정 어미의 무죄를 입증하고 너를 무고죄로 발고할 것이다.”

은명의 면박에 곽 봉사가 얼굴을 씰룩이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살면서 이런 치욕은 처음이었다. 고함이라도 실컷 지르고 싶었지만 보는 눈들이 많은 바, 우선은 점잖은 관리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변해가던 사내는 갑자기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러시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는 규수가 어느 댁 여식인지 꼭 알아야겠소. 대체 어느 대가댁에서 여식 훈육을 이리 훌륭하게 시켰는지 나뿐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궁금할 것이오.”

은명이 새삼 주위를 둘러보니 큰소리에 포청에서 뛰어나온 포졸들뿐 아니라 길 가던 사람들까지 멈춰 서서 구경 삼매경에 한창이었다. 대가댁 규수가 지엄한 포도청 앞에서 벼슬아치와 험악하게 싸우는 광경을 또 어디에서 볼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흥미진진했으면 포졸들까지 신분을 망각한 채 넋을 놓은 모습이었다. 최 상궁과 난이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는 사이, 성질머리를 간신히 누른 곽 봉사는 최대한 이치에 맞게 따지고 들었다.

“부친께서 얼마나 높은 자리에 계신지는 모르오나 그건 어디까지나 부친의 품계일 뿐. 소저가 벼슬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엄연히 품계가 있는 이 사람에게 어찌 이리 무엄하게 굴 수 있단 말이오. 무턱대고 하대를 할 게 아니라 그래도 되는 분인지 아닌지, 신분을 제대로 밝혀 보시오.”

높고도 고귀해 품계를 초월한 존재인 공주. 신분을 밝힌다면 이 모든 소동은 단번에 정리될 것이나 길바닥에서 실컷 싸워놓고 어찌 지존의 딸이라 나설 수 있을까. 웬만해선 눈치 같은 건 전혀 안 보는 은명일지라도 그러기엔 다소 민망스러운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공주가 포청 앞에서 싸움질을 했다는 소문이 돌아 이번 일이 동궁전과 대전에까지 보고가 들어간다면…….

‘그랬다간 화경궁에서의 생활도 끝장이다. 스승님께 도움을 청해볼까? 아니야,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은명이 새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속으로 대책을 궁리하는데 어디선가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대체 여기서 또 뭘 하고 있는 것이오?”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니 나흘 전 목숨을 구해주었던 한성부의 판관이 그날 같이 있었던 참군과 함께 은명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살았구나, 안도의 숨이 쉬어진다. 비록 어처구니없는 듯 황당한 표정을 여실히 드러내고는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은명은 그가 도와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도성 안을 구경하겠다던 사람이 포청 앞에서 지금……”

“판관 나리!”

생글생글 웃으며 반겨주는 저 여인, 며칠 전 보았던 그 버르장머리 없는 규수가 분명하렷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익정과 그 옆의 참군은 움찔하여 몸을 뒤로 살짝 주춤거린다.

공무로 포청에 들렀다 돌아가던 익정은 정문 앞에서 다툼이 일어난 것을 목격하고 괘씸하다는 생각이 일었다. 감히 누가 포청 앞에서 싸움질을 한단 말인가. 호통을 치러 왔던 그는 소동의 주인공을 확인한 후 기가 차서 잠시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싸움의 원인 중 하나는 규수의 맹랑한 말버릇 때문이었다. 그 역시 규수가 언제 한번 임자를 만나 된통 당해봐야 한다, 생각했었다. 한데 막상 처자가 입을 다물고 곤란해 하자 마음 속 한 구석이 왜 그리 불편해져 오는 것인지. 결국 알 수 없는 거북함을 참지 못하고 싸움을 중단시키려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규수, 하는 짓이 요상하기만 하다. 한성부 판관이라 밝혔을 때에도 귓등으로 넘겨버리던 사람이 느닷없이 ‘나리’라 높여 부르며 쪼르르 달려오기까지 하다니. 하대를 들었을 땐 기분이 나쁘더니 또 갑자기 저렇게 높여 부르자 섬뜩하기도 하였다. 심란해진 익정은 바싹 다가온 은명에게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웬일이요, 갑자기 존대를 다해주고?”

“여기서 그대의 직책이 가장 높은 것 같아 위신을 세워주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대에게 존대를 할 터이니, 그대도 나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도록 하여라.”

규수의 깜찍한 대답에 익정과 참군은 뜨악해서 입이 다물어지지도 않는다. 도대체 어디서 떨어진 여인이란 말인가. 두 사람의 상태가 어찌 되었든 은명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당돌한 기색을 싹 지우고 처연하게 도움을 청했다.

“저를 도와주실 것이지요?”

익정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주술에 걸린 것 마냥 규수가 시키는 대로 포도청 종사관까지 불러내 착실히 일처리에 나섰다. 윗선이 움직이자 아정과 아정의 어미도 금방 풀려 나왔다. 영재가 안마당을 방방 뛰어다닐 정도로 기뻐했지만 포청 안 분위기는 여전히 살벌한 게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고 있었다. 은명과 곽 봉사가 서로를 쏘아보며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곽 봉사는 여전히 부친의 함자를 대라며 어깃장을 놓았고 은명은 포청 종사관에게 사내를 장형에 처하라 주장하고 있었다.

“어디 누가 이기나 끝까지 한 번 해보시지. 나는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그 댁에서 소저를 데리러 올 때까지 이러고 있자고.”

“너는 절대로 포청을 멀쩡히 걸어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 이 규수 말버릇 좀 보십시오.”

곽 봉사는 거 보라며 포청의 관리들에게 호응을 얻어내려 애썼고, 최 상궁은 두 주먹을 말아 쥐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저놈을 옥에 처넣고 싶었지만 나서지 말라는 공주의 하명에 득도하는 심정으로 이 상황을 참아내고 있는 것이다. 포청 종사관과 포도부장들도 대가댁 어린 규수와 나이 많은 말단 벼슬아치의 싸움에 끼어 곤란한 표정이었다. 이때, 보다 못한 익정이 슬쩍 사내에게 다가가 소곤거린다.

“그쯤 해두게. 저 규수는 한성부의 판관인 내게도 하대를 했었네. 나도 아무 소리 안 하고 넘어갔건만 자네가 계속 이렇게 걸고넘어지겠다는 것인가?”

우상의 장남인 종오품 한성부 판관에게도 하대를 했었다는 말에 사내가 조금 움츠러드는 기색을 보인다. 그러자 이번에는 은명을 잡아끌어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 좋은 말로 타일렀다.

“다들 무사히 풀려났으니 이제 그만하시오. 저리도 초라한 자들이 그 귀한 밀화 가락지를 지니고 있었으니 의심을 사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소.”

“어찌하여 그것을 당연하다 하십니까?”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익정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은명은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띠며 물었다.

“귀중품을 훔쳤다는 정황도 증인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저들이 의심을 받는 게 당연한 것입니까? 행색이 남루하기 때문에 의심을 받아야 한다면 형편이 안 좋은 자들은 전부 죄인이 되는 것입니까?”

잠자코 얘기를 듣던 익정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상황을 빨리 마무리하고자 편견에 기대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저 또한 행색이 남루하였다면 판관께서는 저를 돕지 않으셨을 것입니까?”

어리석은 과오로 마음이 흔들리던 익정은 갑작스럽게 날아든 질문에 말문이 탁 막혀버리고 말았다. 규수의 새까맣고도 맑은 눈동자와 시선이 얽히자 눈앞이 어질어질 아득해지는 듯도 하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입을 떼려는 순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규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판관이시라면 기꺼이 도우셨을 것입니다.”

너무도 확신에 찬 결론에 익정은 할 말을 잃었고, 은명은 그대로 포청 종사관에게 다가갔다.

“묻겠습니다. 제가 파렴치한 저자에게 하대를 한 것이 국법에 어긋나는 일입니까?”

“국법을 어긴 것은 아니지요.”

“허면, 아무런 증좌도 없이 무고하여 죄 없는 이에게 해를 입힌 행위는 국법에 어긋나는 것입니까?”

“무고죄는 국법으로 엄히 다스리게 되어있습니다.”

왕실의 비빈도, 사대부가의 높은 벼슬아치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사사될 수 있을 만큼 엄히 다스려지는 죄가 무고죄였다. 죄질의 심각성을 공공연히 강조하고자 부러 질문을 던졌던 은명은 입가에 만족감이 드리워졌다. 종사관에게서 정확히 듣고 싶었던 대답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질질 끌 필요가 무에 있겠습니까. 그저 국법대로만 처리하여 주십시오.”

은명의 완고한 태도에 종사관 또한 졌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포청 종사관으로서 모든 일을 국법에 따라 엄중히 처리하겠다, 약조를 드리지요. 죄인은 법에 따라 장형에 처해지게 될 것입니다.”

“종사관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허면 죄 없는 이 선량한 백성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짐을 받은 은명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곽 봉사에게 다가가 마지막으로 야무지게 쏘아주었다.

“꽤 아플 것이다. 네 일그러진 우월감이 빚어낸 일이니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하여라. 또한, 오늘부터 사람을 시켜 아정이네 식구들을 살필 것이다. 해코지라도 하다 걸리는 날엔 네가 그토록 원하는 내 부친의 함자를 듣게 될 것이야.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걸, 땅을 치고 후회하는 날이 없기를 바란다.”

삐뚤어진 우월감은 잘근잘근 뭉개주어야 하는 법. 서릿발 같은 경고를 내린 은명은 아정이의 가족들을 챙겨 포청 정문을 당당히 빠져나갔다.

“참으로 당돌한 규수가 아닙니까?”

은명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한성부의 참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명자도 묻지 못하였구나.”

“예?”

“저 규수 말이다. 명자를 물어보고 싶었는데…….”

참군이 어리벙벙하여 살펴보니 상관은 멀어지는 규수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사별한지 올해로 삼 년, 무수히 쏟아지는 혼담을 번번이 거절해온 그에게 드디어 춘풍이 불어오는 것일까. 은명을 바라보는 익정의 눈가에 끝없는 아쉬움과 애틋한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은명은 두 모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몸보신을 하라며 고기와 생선까지 잔뜩 사다 안겼다. 강파름 하다못해 앙상하기까지 한 아정의 어미는 조건 없이 선의를 베푸는 대가댁 아가씨를 배웅하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감읍할 따름입니다, 아가씨.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런 말 말게. 내가 생각이 짧아 자네와 아정이를 고생시켰으니 외려 내가 더 미안할 뿐이네. ……아정이 네가 고생이 많았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가씨. 소인과 소인의 가족에게는 하늘과 같은 은인이십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화경궁으로 찾아오너라. 화경궁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는 있느냐?”

“화경궁이요? 거기는 공주방인데……”

아정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은명은 빙긋 웃으며 미리 준비해둔 말을 읊었다.

“내가 빈궁마마의 먼 친척 동생이라 거기서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꼭 찾아와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아아- 예, 알겠습니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은명은 가족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뒤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신경을 얼마나 곤두세웠는지 속이 울렁거려 가마는 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정이네 집을 빠져나와 큰길로 걸음을 하는데 은명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든 일이 원만하게 마무리는 되었지만 아직까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이었다.

“저들이 끼니를 거르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혹 내가 챙겨주지 못한다 해도 알아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하여 주고 싶다.”

어미는 병색이 짙고 영수와 영재, 갓난아기는 너무도 어렸다. 결국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아정이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열넷밖에 안 된 어린 여자아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화경궁에 불러다 일을 시키면 내가 공주라 부담스러워하겠지?”

“그리도 마음이 쓰이십니까?”

“저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내 동생이 떠오른다.”

무심코 내뱉은 공주의 말에 난이와 군관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최 상궁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서숙영, 한 살 아래의 여동생이 생겼다며 머리도 빗겨주고, 손도 잡아주며 예뻐했던 그 아이. 공주는 지금 아정이를 보며 어린 시절 잠시 함께 살았던 외사촌 동생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전의 속마음을 알아버린 보모는 순식간에 표정이 흐트러졌지만 곧바로 내색을 지우고 못 들은 척 평온하게 걸음을 재촉하였다.

마침내 공주의 일행이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드는데 조금 떨어진 곳, 구석진 모퉁이에서 준혁이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오늘도 하루 종일 뒤를 밟았던 그는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않고 멀어지는 공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당분간은 찾아뵙지 못 할 것입니다. 대신 마마의 고민은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저녁 무렵, 화경궁 근처를 돌아보던 익정은 오후에 포청에서 들었던 말들이 신경 쓰여 자꾸만 정신이 산만해지고 있었다. 유능한 관리로 명성을 떨치던 그의 자존심에 찬물을 끼얹고, 능력뿐 아니라 사상까지도 의심하게 만든 여인. 그녀의 말간 얼굴이 끊임없이 떠올라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데 바로 그 규수가 저 앞, 화경궁의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잘못 보았나 싶기도 했지만 두 번 세 번 재차 확인을 해봐도 그녀가 틀림없었다. 그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저 여인, 이제는 그의 가슴마저도 쿵쾅쿵쾅 질주하게 만들고 있었다.

중간에서 잠시 가마를 탔던 은명은 오늘따라 멀미가 심해 속도 가라앉힐 겸 근처에서 내려 걸어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정문까지 두 발짝 정도 남겨두었을 때 지척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포청에서 보았던 한성부의 그 판관이었다. 뜻밖의 만남이 반가워 은명은 활짝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넨다.

“어? 여기서 또 뵙습니다.”

“그대가 어찌 여기에 있는 것이오?”

“저도 다시 하대를 할까요?”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이 신기해 물었던 것인데 규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으로 트집을 잡았다. 그 엉뚱함에 익정은 이제 헛웃음마저 픽 새어 나온다.

“이건 하대가 아닌데…… 뭐, 좋습니다. 그런 말을 계속 듣느니 차라리 저도 아주 높임말을 쓰는 게 낫겠습니다. 한데 소저께서는 여기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는 이곳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익정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진다.

“강릉에서 오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예, 저는 빈궁마마의 먼 친척 동생입니다. 마마의 주선으로 한양에 머무는 동안 이곳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거짓말이 술술 잘도 튀어나오는구나. 괜히 민망해진 은명은 얼른 돌아서려는데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제가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물론입니다. 한성부의 판관이 아니십니까?

“직책과 함께 제 명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명자는 생각나지 않았다. 은명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익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훗, 저는 송가 익정이라 합니다. 제 명자 정도는 기억해주시지요.”

“알겠습니다.”

“저에게 성함조차 알려주지 않으실 겁니까?”

은명이 대답만 하고 돌아서자 또다시 익정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은명은 잠시 그를 돌아보더니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명이. 저는 명이라 합니다.”

은명이 안으로 들어가고 화경궁의 문이 굳게 닫히자 낯꽃이 활짝 피어난 익정은 작은 소리로 그녀를 불러 보았다.

“명이, 명이 소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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