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바람은 불다 불다 그친다.
오랜만에 대전에 든 서율은 금상과 세자 앞에 예를 올리고 정좌하였다. 그의 암행감찰이 만족스러웠는지 금상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맞아주었다.
“그래, 네가 올린 서계는 모두 읽어보았다. 이번에도 그대의 검술 실력이 빛을 발했다지?”
“무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서율이 지나치게 서책만 파고들자 건강을 염려했던 정경부인이 검술을 배우게 하였다. 처음에는 심신단련 차원으로 가볍게 시작하였으나,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그의 성정답게 무과라도 치를 듯 기를 쓰고 파고들었다. 더욱이 그동안 외관직과 암행감찰직을 두루 거치며 현장에서 실전경험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으니, 현재는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하, 너의 그런 마음조차 갸륵하도다. 세자, 언제 한 번 지평과 검술을 겨루어 보거라. 너희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심히 궁금하구나.”
“자리를 한번 마련토록 하겠습니다.”
금상은 허허 웃으며 서율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열넷, 어린 나이로 조정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등장한 인재 중의 인재였다. 노련한 조정 관원들의 질시와 부러움에 휘둘릴까, 일부로 외관직으로 자주 돌려 경험을 쌓고 성장해주길 기다렸다. 임금의 전략은 대성공이었고, 서율은 그 진가를 톡톡히 발휘하며 사헌부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인재로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세자가 다음 정권을 이어가는데 꼭 필요한 인재. 그 반대로, 세자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정적이 될 수도 있는 존재.
‘정적이 되면 그 아비인 좌상을 뛰어넘는 왕실 최대의 적수가 될 것이다. 세자, 너는 저 아이를 어찌 다스릴 것이냐.’
배동으로 들여 세자와 붙여놓긴 했지만 서율이 그 진가를 발휘할수록 금상은 기특해 하면서도 한편으론 근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그런 속내를 비추며 의견을 물었더니 뜻밖에 세자는 여유롭게 웃으며 금상을 안심시켰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김서율은 소자의 참모가 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더 이상은 말해주지 않아 세자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으나 김서율을 볼 때마다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김대원의 자식이라니…….
“위쪽 지방의 상황을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구나. 네가 본대로 솔직히 고해보아라.”
“서계에 올린 바와 같이 구휼미로 농간을 부리는 자들로 인해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부역을 하는 자들이 점심에 먹는 음식은 나무껍질과 이름도 알 수 없는 풀, 뿌리들뿐이었고, 그나마 보급되는 죽은 허연 물과 같아 그것을 먹고도 전혀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물에 고운 진흙을 타서 마시는 이들도 허다하였습니다.”
차마 금상께 말씀을 올리진 못했지만 그렇게 초근목피로 연명한 백성들은 심한 변비로 고생하고 있었다. 바지에 핏물을 흥건히 묻힌 채 절뚝거리며 다니던 그 끔찍한 모습들이란. 걸을 때마다 들려오던 그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아직도 생생히 들려오는 듯하였다.
“구휼미로 농간을 부리는 자들은 분명 도성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일을 전적으로 너에게 맡길 터이니 당분간 도성에 머물며 철저히 캐보도록 하여라.”
“예, 전하.”
“참, 요즘 지평의 혼담이 오간다던데 사실이더냐?”
“예?”
금상과 세자가 호기심 감추지 않은 얼굴로 서율을 들여다보았다.
“소신, 처음 듣는 이야기 옵니다.”
“하긴, 어젯밤에 한양에 올라와 일찍부터 입궐을 하였으니 전해들을 시간도 없었겠구나.”
“김 지평을 사위로 맞고 싶어 하는 집안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그 동안 여러 명의 매파들이 꽤 들락거렸던 모양입니다. ……자네도 이제 안사람을 맞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자신도 모르는 혼사 얘기가 금상과 세자의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오자 서율은 당황스러우면서도 침착하게 답을 올렸다.
“소신, 아직 혼사에 뜻이 없사옵니다. 올 초에 집에도 그리 일러두었으니 당분간 혼사는 없을 듯하옵니다.”
“그래, 그대는 과연 어떤 여인을 지어미로 맞아들일지 내가 다 궁금하구나. 오늘 소연회가 있을 것이다. 그대도 꼭 참석토록 하여라.”
“예, 전하.”
세자가 갑자기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린 건 대신들과 함께 화원정 건너편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걸음을 하던 중이었다. 묵묵히 그 뒤를 따르던 대신들은 무슨 일인가하여 앞을 내다보고는 고리눈이 되어버린다. 저 멀리 연못가, 그들이 향하는 곳에 궁녀들에게 둘러싸인 아름다운 뒤태의 한 여인이 있었다. 붉은 색 스란치마에 연한 다홍빛 꽃수가 드리워진 새하얀 당의가 눈이 부시다. 세 가닥으로 곱게 땋아 내린 반질반질 윤이 나는 새까만 머리카락은 또 어떠한가. 자그마한 진주 장식이 알알이 박혀 있어 마치 반짝반짝 별이 떠 있는 밤하늘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설마?’
사년 전 옹주가 하가한 이래, 궁에서 저런 차림을 할 수 있는 여인은 오직 한 사람, 공주밖에 없었다. 허나 공식 석상에 언제나 불참할 정도로 사람들과 섞이는 걸 꺼려하는 분이 아니었던가. 금상과 세자 또한 굳이 공주를 내보이려 하지 않으셨기에 대신들은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긴가민가하였다.
공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나온 건 아홉 해 전, 효경왕후의 국장일이었다. 재작년, 계비이신 효운왕후가 승하하셨을 때에도 병이 중하여 피접을 나갔던 탓에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때문에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는 몇몇 원로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대신들은 공주의 생김새조차 알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그들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피해 갔을 세자였다. 한데 지금은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공주에게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대신들은 지금 이런 상황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론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들의 안사람을 쥐 잡듯이 잡아대고, 후궁들을 화병으로 쓰러지게 만든다는 바로 그 유명한 분이 아니시던가. 생김새는 어떠하신지, 성정은 또 얼마나 괄괄하신지 생생히 확인해볼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은명은 눈을 감고 바람에 실려 오는 다양한 향기에 푹 빠져있었다. 여러 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전하시라면 멀리서 바라만 보고 말았을 것이요, 후궁들이었다면 알아서 피해갔을 것이니, 가까이 다가올 사람은 세자와 빈궁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세자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온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
“향기를 맡고 있습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은명은 그 자세 그대로 답을 하였다.
“꽃향기라도 나는 것이냐?”
“바람을 타고 오는 바깥세상의 향기를 맡고 있습니다.”
“그냥 꽃향기만 맡으면 안 되는 것이냐?”
“후훗, 이 세상을 꽃향기만 맡으며 살아갈 순 없습…”
은명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다가 세자 뒤로 길게 시립하고 있는 한 무리의 대신들을 보고는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장원서에 일러 취연당에 생화를 더 보내도록 하여라.”
“예, 저하.”
세자가 내관에게 명을 내린 후 대신들에게 은명을 소개했다.
“처음 뵙는 분들이 더 많으실 겁니다. 제 누이입니다.”
올해 열여섯, 소녀에서 여인으로 막 들어선 공주는 세간의 소문이 믿기지 않을 만큼 청아하면서도 총명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상상했던 것과 너무도 상이한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던 대신들은 황급히 예부터 올렸다. 은명도 살짝 고개 숙여 답을 하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당황스럽다.
“어쩐 일이십니까?”
“연회장으로 향하다 네가 있기에 와본 것뿐이다. 생각해보니 네가 중신들과 마주할 기회가 전혀 없었더구나.”
오라버니의 엉뚱한 행동이 영 불편했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대신 자신을 보고 흠칫 놀랐던 이판을 바라보았다. 이판은 공주와 눈이 마주치자 흔들리는 마음을 정리하고 얼른 소개를 올린다.
“신(臣), 이판 윤도우, 인사 올리옵니다.”
“경께서는 저를 보고 어찌 그리 놀라시나요?”
“황공하옵니다. 이리 성장하신 공주마마를 가까이서 뵈오니, 승하하신 효경왕후 마마를 뵙는 것 같은 착각에 그만…….”
“이 아이가 점점 모후를 더 닮아가는 모습에 저 또한 가끔은 그런 착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의 말이 흡족했는지 옆에 있던 세자가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기분 좋게 응수하였다. 이판은 더 나아가 어쩐지 애틋한 빛을 내보이며 공주께 걱정의 인사를 건넸다.
“그간 강릉으로 피접을 나가셨다 들었사옵니다. 옥체 강녕하시옵니까?”
“평안합니다.”
이판이라면 좌상을 도와 어머니의 친정을 무너트리는데 일조한 인물이었다. 그런 자가 승하하신 왕비와 닮은 공주를 보며 저리 애잔한 표정이라니. 그의 행동이 모순적으로 느껴져 고개를 살짝 돌리는 찰나, 은명의 시선이 한곳으로 정확히 고정되어버렸다. 노회한 대신들 중에서도 좌중을 휘어잡을 만큼 압도적인 관록의 기운을 내뿜는 인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은명과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이 잠시 가늘어지더니 이내 원상태로 돌아가 정중히 예를 취했다.
‘누구지?’
“좌상 대감이시다.”
누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세자가 그의 정체를 알려주자 은명은 놀라움에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찌…… 김대원이 저런 모습일 수 있단 말인가?’
권력에 눈이 먼 김대원이라면 음흉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풍기고 있어야 마땅했다. 대체 저 당당함과 드높은 기개는 어디에서 기인되는 것이란 말인가. 은명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사실 그는 조선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하고 있었다. 선대왕 시절,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 하에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가문과 스스로를 구해낸 인물. 문관이었으나 무과에도 출중해 병권을 장악하고 오늘 날 재상의 반열에 오른 그야말로 신화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신(臣), 좌상, 공주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중저음의 군더더기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은명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황송하옵니다.”
이제 은명은 그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좌상은 공주의 그런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였으나 꽤 오래도록 그런 상태가 지속되자 옆에 있던 세자가 무안해하며 제지에 나섰다.
“원로대신의 낯을 그리 빤히 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신기해서 그렇습니다.”
“무엇이 그리 신기하십니까?”
은명의 진지한 말에 좌상 역시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좌상 대감께서는 이마에 뿔이 솟아나 있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은명아! ……대감, 이 사람이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공주의 엉뚱한 말에 모든 중신들은 그대로 얼어버렸고 세자는 민망한 얼굴로 사과를 했지만 좌상은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허허, 실제로 보니 어떠하십니까?”
“기품과 관록을 갖춘 백호 같으십니다. 하여 속이 더 쓰리고, 아파옵니다.”
“어찌 계속 이러는 것이냐?”
계속되는 누이의 직설적인 언행에 세자는 난감해했지만 좌상과 은명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좌상은 허허거리며 한 번 웃기는 했으나 그건 웃는 게 아니었다. 눈가도, 입가도, 거의 움직임이 없는 웃음. 애초에 웃음이란 걸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세자가 하도 펄쩍 뛰니 은명은 궁금하다는 어조로 좌상에게 물었다.
“불쾌하셨습니까?”
“상찬으로 듣겠습니다.”
“상찬이었습니다.”
담백하게 답을 한 은명은 말간 얼굴로 세자를 올려다보았다.
“저하, 이 정도면 대신들의 얼굴을 충분히 익힌 것 같으니 소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파격적인 말로 대신들의 혼을 쏙 빼놓았던 공주가 마지막엔 품위 있고 정갈한 모습으로 예를 올리더니 취연당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무수히 쏟아지는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은명은 대신들의 행렬을 도도하고 우아하게 지나쳐 갔다. 그렇게 몇 걸음을 내걸었을까, 문득 대열의 끝부분에 서 있던 한 훤칠한 사내와 시선이 한데 뒤엉키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은명의 심장도 덜컹 내려앉는다.
‘김서율?’
그였다. 육 년 만에 김서율과 두 눈이 마주친 것이다. 서율은 인사를 올리듯 고개를 살짝 숙였지만 은명은 모르는 척 그 앞을 빠르게 지나쳐버렸다. 육 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늠름한 장부로 성장한 그를 은명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두 발은 유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나 심장은 마구잡이로 폭주를 하였다. 기이하게 눈물도 찔끔 새어 나왔다. 잠잠했던 이성이 뒤집어지고 저 깊이 눌러두었던 노여움이 홧홧하게 되살아났다. 좌상과 그의 아들, 아무도 용서치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의빈으로 주저앉혀 시름시름 말라가는 꼴을 보고야 말리라. 은명은 아드득 독기를 품었지만 치맛자락을 쥐고 있는 손끝은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과중한 업무에서 벗어난 대신들은 끼리끼리 모여 앉아 유쾌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번 연회는 갑자기 불어 닥친 기근으로 업무량이 배로 늘어난 중신들을 위로코자 금상이 친히 마련한 자리였다. 물론 시기가 시기인 만큼 연회라기보다 다과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상차림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긴히 나눌 말이 있었는지 금상께서 삼정승을 이끌고 산책을 나가자 대신들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들이었다.
세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배동이었던 서율과 홍문관 수찬, 희립을 앉혀놓고 조용히 구휼미와 관련된 수사의 진척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중신들 중에도 분명 연루된 자들이 있을 것이다. 당분간 이 일은 나에게만 직접 보고토록 하여라. 마침 사가에 자주 나갈 일이 있으니 눈에 띄지 않으려면 그때를 이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하겠사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사가에 자주 나가신다니요?”
희립의 물음에 세자가 피식 웃으며 술을 한 잔 들이켰다.
“공주를 하가시키기 전에 내가 좀 데리고 있으려 도성으로 돌아 오랬더니, 두 가지 조건을 내세우지 뭔가.”
“조건이라니요,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화경궁에서 거처하게 해줄 것.”
“화경궁이라면 공주께서 태어나신 궐 밖 사가가 아닙니까?”
“그렇다네. 그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리워할 만도 하지.”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둘째, 청나라 유람을 허하여 줄 것.”
“예에?”
희립이 놀라서 소리쳤고,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서율도 황당해하며 세자를 바라보았다. 너무도 어이가 없었지만 공주는 일찌감치 해진 옷을 주워 입고 혼자서 몰래 빠져나간 경력이 있었다. 어릴 때도 그랬는데 지금이야 오죽할까. 청국이든, 나선(羅禪)이든, 충분히 가고도 남음이었다. 게다가 엉뚱한 면에 있어서는 세자 또한 공주 못지않으니 상식을 벗어나 이미 허락을 했을 수도 있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서율은 곧바로 확인에 들어간다.
“그래서 뭐라 하셨습니까? 설마 공주마마를 청나라로 보낼 생각은 아니시지요?”
“물론 아니네. 거기가 어디라고 몸도 약한 공주를 그 멀리까지 보낸단 말인가. 대신 타협을 보았지.”
“타협이요?”
“실학을 배우게 해주겠다, 약조하였네. 천문, 청국말, 지리, 산학, 등등 이것저것 배우고 싶은 것도 참 많더군. ……해서 말인데 지평, 자네가 우리 공주를 맡아주었으면 하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정말이지 듣기만 해도 아찔한 소리였다. 서율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여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그런 방면에 능하지 않은가. 마침 화경궁이 자네의 사가에서 가까우니 칠일에 한 번 공주에게 지식을 좀 나누어 주도록 하게. 물론, 사헌부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말일세.”
너무나도 엄청난 소리에 서율은 기가 막혀 뭐라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세자는 그런 서율을 보며 짓궂게 씨익 웃더니 정곡을 파고들었다.
“뭘 그리 화들짝 놀라는가? 공주와 대면하지 못할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게야?”
“……”
“왜, 공주를 마주보기 두려운가?”
‘설마, 저하께서…….’
서율의 얼굴이 확연히 굳어지자, 세자는 짓궂은 기색을 싹 지우고 대수롭지 않은 듯 대응하였다.
“아까 화원정에서 공주를 보고 기겁을 했나 보군. 그 아이가 직설적인데다 불같은 면이 있긴 하지만 경우 없는 아이는 아니라네.”
‘아닌가?’
잠시 혼란스러웠던 서율은 냉정을 되찾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보았다.
“그런 자리는 소신보다 여기 있는 수찬이 더 적합할 듯싶습니다.”
옆에 있던 희립을 끌어들인 것이다. 마침 화원정에서 공주를 보고 여러모로 감탄했던 희립은 얼굴에 화색이 감돈다. 당장이라도 응할 듯 기꺼운 표정이었다. 서율도 내심 기대해보지만 안타깝게도 세자는 이를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건 아니 될 말이네.”
“문 수찬 또한 다방면에 매우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수찬은 성정이 물러 공주를 감당하기 버거울 것이야. 자네의 그 냉철하고 대쪽 같은 성정으로 공주의 불같은 면을 다스려 주었으면 하네. 더 이상은 거절하지 마시게.”
고집스럽고 단호한 어조로 서율의 입을 막아버린 세자는 이내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마무리를 지었다.
“어려워할 것 없네. 누이 동생이라 여기며 그 아이가 잘못하는 게 있으면 따끔하게 혼내주시게. 내주쯤 거처를 옮길 예정이니 직후에 바로 시작하면 될 것이야. 자, 공주의 스승이 된 기념으로 내 술 한 잔 받으시게. 우리 은명이를 잘 부탁하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이럴 수는 없었다. 육 년 전, 그리 모질고 매정하게 끊어내고 도망을 쳤는데 이제와 공주 앞에 정기적으로 얼굴을 내밀라니. 하지만 세자가 따라주는 술을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서율은 그대로 잔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으로 공주의 강론을 수락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유월 초 어느 저녁. 의미심장한 한 잔의 술에 세자는 만족스러워했고, 희립은 아쉬워했으며, 서율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좌상, 우상, 그리고 이판. 조정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세 사람이 우상의 사저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역경과 고난을 함께해온 정치적 동지이자 이제는 원수가 되어버린 경산부원군의 휘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이기도 했다.
“산책을 꽤 길게 하시던데 특별히 거론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곧 중전마마 간택이 있을 예정이라네.”
연회 중간, 따로 산책에 나섰던 두 분 재상께 이판이 궁금증을 드러내자 먼 친척 형님이기도 한 우상이 답을 주었다.
“오, 드디어 말입니까?”
“영상께서 무던히도 주청을 드렸던 모양일세. 후궁들 중에서 중전을 뽑지 않으시겠다, 미리 단속을 하시더군.”
“어찌하실 겁니까?”
이판이 좌상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후궁이 중전에 오를 수 없는 건 이미 국법으로 정해진 일입니다. 안빈께도 넌지시 알려드리세요. 중전으로 올릴만한 처자도 물색해 보시고요.”
“저희 문중에서 말입니까?”
우상과 이판이 뜻밖이라는 얼굴로 되묻자 좌상은 늘 그러했듯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우리 가문에는 연치에 맞는 처자가 없습니다. 송씨나 윤씨 문중에는 참한 규수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 중전이 나와야 합니다. 마땅한 처자만 있으면 간택령을 내릴 필요도 없이 바로 들일 생각이에요.”
“세 번째 중전마마이시니 그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공주마마를 먼저 하가시켜야 하는 게 아닌지요? 벌써 열여섯이 되셨으니 너무 늦어진 듯합니다.”
우상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흐른다. 화국옹주는 열둘에 길례를 올리고 현재 첫 아기씨를 회임 중이었다. 그에 반해 공주는 병을 핑계로 늘 피접을 다니고 있어 지금까지 길례가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다. 재작년, 공주의 부마 얘기가 다시 거론된 적이 있었지만 효운왕후께서 젊은 나이로 승하하시는 바람에 그마저도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부왕이신 금상께서 먼저 비를 맞이하셔야지요.”
좌상의 딱딱한 말에도 이판은 감회에 젖은 듯 어딘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참으로 놀랐습니다. 공주께서 승하하신 효경왕후마마를 쏙 빼닮지 않으셨습니까.”
“맑고 영민해 보이시더군.”
스승의 따님이기도 했던 효경왕후를 떠올리며 우상은 씁쓸히 술 한 잔을 들이켰다. 한때나마 하늘같은 스승이요, 둘도 없는 동무였건만. 정쟁이 무엇이기에 사람의 도리마저 저버리게 하였는지. 잠시나마 감회에 젖어 드는데 우상의 장남, 익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소자 들어왔습니다.”
“그래, 왔느냐.”
삼면이 트인 대청마루에 마련된 술자리였다. 익정은 밖에 그대로 선 채 좌상과 이판께도 인사를 올린 뒤 곧장 자신의 처소인 작은 사랑채로 걸음을 옮겼다. 올해 스물여섯, 한성부 판관인 익정은 삼 년 전, 산고 끝에 안사람이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나자 묵묵히 일에만 매진해 오고 있었다. 씩씩하고 호방한 성격인데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과년한 여식을 둔 다른 명문가에서 꽤 탐을 내는 혼처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여인과의 혼사가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이미 경험한 바 있기에 아직까지 재취에 별 뜻을 두지 않고 있었다.
“형님!”
작은 사랑채에 다다르는데 성균관에 적을 두고 있는 아우, 익현이 쫄래쫄래 쫓아 나온다.
“너는 왜 이렇게 자주 나오는 것이냐? 그러다 대과를 몇 번이나 떨어지려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조정 중신들이 공주마마를 뵈었는데 미모가 상당하시다는 소문입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저리 흥분을 하는지. 익정은 아우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혀를 끌끌 차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형님께서는 놀랍지도 않으십니까?”
어느새 쫓아 들어 온 익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전하와 효경왕후 마마의 자녀이시니 당연한 것 아니냐. 너는 세자 저하를 가까이서 직접 뵙고도 공주마마의 옥안이 전혀 짐작이 안 되었더냐?”
“그렇기는 하지만 소문이 워낙 흉흉하지 않았습니까. 자꾸만 사나운 옥안이 연상되어 저도 그간 심히 안타까웠습니다. 아무튼, 그 소문이 성균관에 쫘악 퍼지는 바람에 부마간택에 참여하고 싶다는 유생들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소문이 모두 틀렸다고 볼 수만은 없겠지. 후궁마마와 외명부 부인들에게 얼마나 인심을 잃었으면 그런 소문이 궐 밖으로 퍼졌겠느냐. 현 왕실에 단 한 분뿐인 공주이신데다 세자 저하의 동복누이시니 오만 방자함이 하늘에 이르고도 남을 것이야. 웬만한 사내들은 그 기세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것이다.”
익정의 지적에도 아우 녀석의 얼굴에선 흥분된 기색이 전혀 수그러들지 않는다.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면 사나운 성질머리도 매력이 되는 법. 익현은 공주를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아리따운 꽃이 독을 품고 있는 건 천명과도 같은 일이지요. 그걸 알면서도 취해버리는 게 사내 아니겠습니까?”
“미색 하나 보고 안사람을 얻겠다니, 쯧쯧. 그러고도 니들이 최고의 지성인 성균관 유생이라 할 수 있느냐? 이렇게 떠들 시간 있으면 가서 글이라도 한 자 더 보거라.”
아무리 공주마마시라지만 여인네 하나에 성균관이 들썩인다니. 사내대장부로서의 기개가 철철 넘치는 익정에겐 그저 못마땅할 따름이었다.
‘어머니, 소녀가 돌아왔습니다. 은명이가 이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매화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화경궁의 매화원. 매화를 좋아하시던 어머니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조성한 이곳, 매화원의 한복판에 은명이 서 있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간들바람을 맞으며, 솔솔 스며드는 향기로운 내음을 마시며, 푸르게 우거진 유월의 매화나무를 찬찬히 둘러보는 중이다.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어디선가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봄날, 네 명의 크고 작은 아이들이 꽃보라가 휘날리는 매화원에서 밝고 흥겨운 얼굴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 뒤로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어머니를 닮은 외숙과, 친절했던 외숙모가 평온한 얼굴로 아이들을 지켜보고 계셨다. 환영을 바라보던 은명의 눈가에 어느덧 물기가 그득히 괴어오른다.
‘보고 싶습니다. 소녀를 지켜보고 계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를 대신하여 이제부터 제가 외숙 일가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그분들이 소녀를 찾아올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만큼 외숙 일가를 향한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은명은 끈질기게 그들을 수소문하였다. 그리고 몇 년 전, 일가가 화경궁에서 끌려간 직후 도주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날 이후 은명은 하루빨리 어른이 되기만을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어른이 되어 화경궁을 되찾으면 그분들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은명의 안식처이자 그분들과 연통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인 화경궁. 공주가 화경궁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멀리 멀리 퍼져 외숙께서 은밀히 기별을 전해오시기를 은명은 하늘님께, 그리고 어머니께 간절히 소원하였다.
“마마, 공주마마!”
은명이 눈을 감고 소원을 비는데 난이가 헐레벌떡 걸음을 하였다.
“무슨 일이냐?”
“동궁전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오늘 첫 강론이 있을 예정이라 하옵니다.”
“알았다.”
애잔한 빛을 발하던 은명의 얼굴에 쌀쌀한 냉기가 드리워졌다. 며칠 전, 세자로부터 김서율이 저의 강론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는 김대원의 차남입니다. 어찌 그런 자에게 소녀의 강론을 맡기려 하십니까?]
[사사로운 감정은 떨쳐내어라. 그는 나의 사람이니라. 나의 사람은 곧 너의 사람이기도 하다. 원수의 핏줄이라는 시선을 거두고 뛰어난 조정의 관리이자 탁월한 학자로만 보거라. 그만한 스승도 없을 것이다.]
세자의 뜻은 확고해 보였다. 은명도 거절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오라버니의 마음이 궁금하여 여쭈었을 뿐. 이제 칠일에 한 번, 따로 공을 들이지 않아도 그와 정기적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참으로 절묘한 시기가 아닌가.
‘그는 제 아비가 그러했듯 언젠가 저들의 영수가 되어 오라버니와 내 목에도 칼을 들이댈 것이다. 애초에 싹을 잘라버려야 하는 재목인 것이다.’
은명은 자신이 하려는 일에 애써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런데,
쿵, 쿵, 쿵.
심장이 거칠게 쿵쾅거린다. 사정없이 팔딱팔딱 뛰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새하얀 도포에 아청색 쾌자가 잘 어울리는 김서율이 잔뜩 굳어버린 얼굴로 화경궁에 들어섰다. 제아무리 냉철한 그일지라도 육 년 만에 이루어지는 오늘의 만남이 결코 아무렇지 않을 수만은 없었다. 얼마 전, 대궐 후원에서 보았던 공주가 떠올랐다. 새까만 먹빛의 큰 눈망울에 오밀조밀 작고 새하얀 얼굴, 거기다 대신들을 기함시켰던 당돌한 말투까지. 공주께서는 어릴 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셨다. 그의 얼굴 위로 씁쓸한 미소가 드리워진다. 결국은 제자리란 말인가.
안내를 받아 안채에 당도해 보니 이미 면식이 있는 최 상궁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색한 듯 말없이 가벼운 목례를 나눈다.
“모시겠습니다.”
최 상궁은 고개를 곧추세우자마자 간결한 말과 함께 걸음을 떼었다. 안채로 드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서율은 어리둥절했지만 조용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안채에서 조금 더 들어가 중문을 하나 지나니 빼어난 분위기의 후원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널찍한 연못이 자리해 있고 향기로운 꽃들이 만개해 있는 곳. 예년보다 심히 더운 탓인지 작약이나 월계화, 촉규화는 물론, 치자화, 원추리, 당국화, 연화, 등등 여름 꽃 또한 탐스럽게 만발해 있었다. 물 위로 풍성하게 흐드러진 연잎의 밝은 초록빛이 싱그러워라, 절경에 먼저 취하고 향기에 또 한 번 취하는구나.
“오르시지요.”
진풍경에 잠시 넋을 잃었던 서율이 정신을 차려보니 연못 위로 멋스럽게 지어진 정자 입구에 당도해 있었다. 교각에 발을 들여놓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수록 그새 누그러졌던 긴장감이 다시금 솟아오른다. 공주를 뵌다면 발이 드리워진 장소일 거라 여기고 있었기에 이리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저 앞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한가로이 차를 마시고 있는 공주가 한눈에 들어온다. 연한 초록빛 치마에 연미색 삼회장저고리라. 그 모습이 사방에 펼쳐진 연꽃식물들과 천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쪼르륵, 궁녀가 시원한 매실 냉차를 따라 서율의 다과상 위에 올려주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와 마주앉아 있긴 했지만 은명은 무심한 얼굴로 차를 마실 뿐, 말을 건네거나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쿵쿵쿵…… 쿵쿵쿵……
평온한 겉모습과 달리 심장은 격렬히 질주하였고, 얼굴은 따끔거릴 정도로 뜨끈뜨끈 불타오르고 있었다. 왜 이러는 것일까. 들썩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론 준비는 전혀 안 하신 겁니까?”
그 말과 함께 들썩이던 은명의 가슴이 콱 막혀버린다. 차라리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이지 육 년 만에 만나서 처음으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가슴이 뛰는 이유는 저 작자의 행태에 분노했기 때문이리라. 저 혼자 울컥한 은명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한 어조로 답을 하였다. 물론, 시선은 찻잔에 고정되어 있었다.
“고리타분하여라.”
“……”
“첫날부터 무슨 강론입니까. 속수례(束修禮)를 행한다, 여기시지요. 이 다과상이 비단과 포 대신입니다.”
성의 없는 표정에 성의 없는 말투였지만 서율은 예에 따라 겸손을 표했다.
“많이 부족하여 공주마마께 도움을 드리지 못할까 저어되옵니다.”
“그럴 리가요. 고매한 학식과 품성으로 모두가 흠모한다는 지평이 아니십니까. 기대가 매우 크니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여 주십시오. 지켜보겠습니다.”
이럴 때는 스승이 되어 달라 다시 한 번 간곡히 청을 올리는 게 예의였다. 한데 가르침을 받아야 할 이가 되레 스승을 지켜보겠다며 버릇없이 굴고 있는 꼴이라니. 기이하게도 은명은 그가 얄미웠다. 약이 바짝 올랐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그의 평온함이 이상하리만치 분노의 활화산을 들쑤시고 있었다. 하여 공주는 그 아니꼬운 심기를 기어이 밖으로 표출해내고 만다.
“그나저나 민망하시겠습니다.”
그의 시선이 공주에게로 정확히 고정되었다. 은명은 이제 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희미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꽁지 빠진 새처럼 내빼셨는데 제 발로 다시 찾아온 격이 아닙니까. 위신이 영 말이 아니십니다.”
“……”
“면구스러우시지요? 예, 그럴 것입니다. 앞으로는 행동거지에 각별히 조심하여 주십시오. 무지한 이 제자, 본 대로 따라하면 곤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스승님.”
“이제 그만 속수례를 파하고 강론을 시작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침묵하던 서율이 여전히 차분한 음성으로 다른 제안을 해온다.
“듣기 싫으십니까?”
“강론을 하러 온 스승입니다. 무례한 언사는 자제하여 주십시오.”
“사실을 말하였을 뿐인데 뭘 그리 피해가려 하십니까.”
톡 쏘아 붙이는 공주의 말에 서율은 물끄러미 마주보기만 하였다.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난 듯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어두운 낯으로 은명을 얼마간 들여다보기만 하고 있을 뿐.
“서운하셨습니까?”
그리고 잠시 후에 흘러나온 그의 한 마디에 은명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정녕 섭섭했던 것일까. 서운해 죽겠는데 그가 아무렇지 않아 보여 심사가 뒤틀리고 괘씸했던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김대원의 핏줄이란 말이다! 혼란스러움에 은명은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그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공주마마께 인사도 올리지 않고 떠난 것은 불경이었습니다. 허나 다시 한 번 그런 상황이 주어진다 해도 소신은 주저 없이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소신이 했던 행동에 후회는 없지만 마마께서는 크게 언짢으셨을 테지요. 화를 내어 조금이라도 분이 풀리신다면 얼마든지 그리 하십시오. 지금부터 입을 다물고 끝까지 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빈틈없고 감정 없는 말투였다. 전부 들어주겠다니? 해볼 테면 해봐라, 이 말이더냐? 오냐, 얼마든지 해 볼 작정이니라.
“이곳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눈동자가 심히 출렁이던 은명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한때, 그와 함께 이곳으로 돌아오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어머니와 나누었던 온기를 그와 함께 이어가고 싶었다.
“효경왕후마마께서 피붙이를 모두 잃고 심병을 앓다 승하하신 곳입니다.”
아홉 살 어린아이가 꾸었던 가장 달콤했던 꿈. 눈을 뜨면 허무하게 사라지는 백일몽을 꾸었더랬다.
“원래대로라면 조정에 나아가 국사를 논해야 할 저희 외숙께서는 노비가 되어 쫓기는 신세로 전락하였지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추운 겨울날 작은 손으로 고된 노동을 해야 했던 외사촌들을 생각할 때마다, 이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깟 화를 조금 낸다 하여 이 원통함이 과연 풀리기나 하겠습니까?”
더 이상은 꿀 수 없는 꿈. 그의 아비가 만들어놓은 지옥이었다. 묵묵히 듣고 있는 김서율 또한 차갑고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소신이 어찌 해드려야 좋으시겠습니까? 눈앞에 안 보이길 원하십니까?”
“또 줄행랑부터 놓으려 하십니다!”
냉정해 보일 정도로 차분한 그와 달리 은명은 한눈에 보기에도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육 년 전 그때, 인사도 없이 떠날 게 아니라 제 발로 찾아와 사실대로 알렸다면 지금쯤 어찌 되어 있었을까. 듣기 싫다 하여도 내가 김대원의 차남이다, 무작정 소리쳐서 알려주었더라면……. 이쪽에서 먼저 그를 내쳤을까, 아니면 그 마저도 용서하고 함께하여 달라 손을 내밀었을까.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그런 상황이 또 한 번 주어진다 하여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는 말하고 있었다. 만약이란 없는 것이다.
“분풀이는 제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칠일에 한 번 꼬박꼬박 화경궁에 모습을 보이십시오. 강론은 물론, 공주인 제게도 성심성의를 다하셔야 할 것입니다.”
“……분부, 따르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십시오. 다음번에 오셨을 땐 강론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을 것입니다.”
서율은 잠시 공주를 바라보더니 흐트러짐 없이 예를 올리고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은명은 그제야 아롱아롱 눈물이 솟아오른다. 서럽거나 슬퍼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가 한심하였을 뿐. 오늘의 만남을 위해 몇날며칠, 얼마나 거창한 계획을 세웠던가. 그럼에도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건진 거 하나 없이 육 년 만의 재회가 막을 내렸다. 온몸의 기가 전부 빨려나간 듯 힘이 하나도 없었다. 바람은 불다 불다 저절로 사그라져 그친다 하였던가.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 데 저 혼자 미친 듯이 날뛰며 흥분하다 제풀에 지진 형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