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5 장. 조선 최고의 선비를 탐하다 (5/21)

제 5 장. 조선 최고의 선비를 탐하다

육 년 후.

춘궁기(春窮期)가 절정에 달한 누리달 초순. 산과 들에 먹을 만한 풀과 나무껍질들이 모다 사라져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하는 잔인한 시기, 보릿고개. 이러한 때에 곡식을 그득그득 실어 담은 수레가 굶주린 자들에게 공격을 받는 건 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일이었다. 어린아이도 잡아먹을 만큼 끔찍한 생지옥이 아니었던가.

의천 상단의 대방, 준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쩍 마른 자들이 농기구를 하나씩 움켜쥐고 사정없이 공격을 해온다. 굶주림을 참다못해 유리걸식하는 농민들이 분명했다. 살생을 피하고자 칼을 빼들지 말라, 상단의 무사들에게 명을 내린 상태였지만 머릿수가 워낙 많아 시간이 흐를수록 버거워지고 있었다.

성공만하면 먹을 수 있다는 간절함 때문인지 독기가 바짝 오른 이들은 벌건 두 눈을 광기로 번뜩이며 폭풍처럼 몰아닥쳤다. 이대로 가다간 상대를 봐주느라 자신들이 되레 당할지도 모를 일. 칼을 빼들어야 하나, 준혁의 고민이 깊어지는데 대행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피하십시오!”

준혁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사이,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옆에서 날카로운 낫이 날아들었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데 고급스러운 죽장도(竹粧刀) 하나가 눈 깜짝할 새 나타나 낫을 막아내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소박한 흰색 도포에 흑립을 쓴 수려한 이목구비의 한 젊은 선비가 보인다.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유려한 동작. 그는 현란한 솜씨로 도적떼들의 급소를 요령껏 내리쳐 쓰러트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다부진 체격의 무사도 보였는데 두 사람 모두 검술 실력이 놀라울 만큼 절륜하다. 그들의 재주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준혁은 정신을 가다듬고 우악스럽게 덤비는 자들을 능수능란하게 상대한다. 우선, 도적들부터 진압해야 했다.

사납게 총공격을 감행했던 도적들은 끝내 곡식 한 톨 구경조차 못 하고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차라리 구걸을 하였다면 찌꺼기라도 얻어갈 수 있었을 것을. 얻는 거 하나 없이 목숨만 내어놓게 생긴 것이다. 배고픔에 눈이 뒤집혔던 가엾고 무지몽매한 민초들은 그제야 몸을 오들오들 떨며 후회를 한다.

“너희들은 국법을 어기고 도적질을 하려 했으며 서슴없이 살상을 저지르려 하였다.”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젊은 선비의 근엄함에 꿇어앉은 자들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들으나마나 다음 말은 관아로 끌고 가 엄히 다스리겠다는 통매일 것이다. 꼼짝없이 죽는 일만 남았구나. 모든 것을 포기한 농민들이 삶의 끈을 내려놓는 순간, 뜻밖에 한결 누그러진 선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너희들이 처음부터 도적떼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이리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농민들이 엉거주춤 올려다보는데 선비가 두툼한 주머니 하나를 망설임 없이 그들 앞에 던져주었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툭 떨어진 주머니 속엔 필시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어있으리라.

“극심한 기근으로 주막에서도 음식을 구하지 못해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다. 저 산을 넘으면 관아가 하나 나올 것이다. 그제부터 죽을 쒀서 나누어주고 있으니 당분간 그것으로 연명하도록 하여라.”

“나리…….”

“조금만 견디다 보면 조정에서 구휼미가 더 풀릴 것이고, 보리와 밀의 수확이 시작된다. 그때가 되면 이 엽전을 나누어 갖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처자식을 버리고 이리 홀로 유리걸식을 해서야 되겠느냐.”

죽음의 기로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택하긴 했지만 고향에 두고 온 살붙이들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저 혼자 살겠다고 가족들을 버린 죄책감에 온 마음이 잠식된 이들은 회한의 눈물을 뚝뚝 쏟아내었다.

“사상자가 없으니 이번에는 이쯤에서 매듭지을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이런 짓을 하다 붙잡힌다면 그때는 정말 국법의 지엄함으로 너희들을 엄히 심판할 것이다.”

“그저 감사드릴 뿐이옵니다.”

“어느 목숨이나 소중한 건 매일반이다. 각자의 목숨만큼 다른 이의 목숨 또한 소중한 것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크윽…… 소인들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극악무도한 자들이라 윽박지를 줄 알았건만. 뜻밖에 자신들의 처지를 헤아려준 선비의 아량에 농민들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암행어사다! 그렇다면 적어도 오품 이상이란 소린데, 저리도 젊은 선비가?’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준혁은 두 눈을 반짝이며 선비의 신분을 짐작했다. 이제 겨우 스물, 아직은 어린 나이였지만 거상이라 불리던 아버지 밑에서 밤낮으로 상술을 익히며 자라온 장사치였다. 눈치만큼은 육십 평생을 산 노인 못지않게 빠르고 정확하다 자부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저희 상단에게 맡겨주십시오.”

올해 스물하나, 훤칠한 장부로 성장한 서율은 갑자기 끼어든 곱상한 외모의 젊은이를 돌아보았다.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의천 상단의 대방, 강준혁이라 합니다.”

“김서율이라 하네.”

의주에 탄탄한 뿌리를 둔 저들은 십여 년 사이, 한양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한 거대 상단이었다. 한데 상단의 대방이 이제 갓 약관(弱冠)에 접어든 젊은이라니. 이들에 대해 알고 있던 서율은 속으로 적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마음을 꿰뚫기라도 하듯 젊은 대방은 시원스레 그의 궁금증부터 풀어주었다.

“작년에 돌아가신 부친의 대를 이어 대방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여러모로 부족하지요. ……대행수.”

“예, 대방 어르신.”

“저자들을 이끌고 곡식을 모두 산 너머 관아에 가져다주어라. 곡식이 백성들에게 전부 돌아가는지 끝까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예.”

서율과 치경은 물론 무릎을 꿇고 있던 농민들까지 어리벙벙한 얼굴이 되었다. 자그마치 여섯 대의 수레였다. 저 많은 양을 모두 내어 놓겠다는 것인가. 아직은 어리다 할 수 있는 대방의 배포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오히려 다음 행보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혹 한양으로 가는 길이시면 저와 동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잠시 후, 의천 상단의 대행수를 필두로 기나긴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절망에 빠져있던 농민들 또한 새롭게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가벼운 걸음으로 수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행렬이 점차 멀어지자 제자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율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준혁을 돌아보았다.

“정말 괜찮겠는가? 무리를 한 게 아닌지 걱정이군.”

“괜찮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한양까지 타고 갈 말 한 필과 이것이었으니까요.”

대행수에게 내어 받은 작은 짐 꾸러미를 들어 보이며 준혁은 털털한 미소를 지었다.

“구경이나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아무에게나 내보이지 않는 귀한 물건이지만 생명의 은인이시니 눈 호강 한 번 시켜드리겠습니다.”

준혁은 상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쪼르르 그늘로 달려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멀뚱히 그 모습을 쳐다보던 서율과 치경도 걸음을 옮겨 자리에 앉는다. 잠시나마 숨 돌릴 여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빠듯했던 일정으로 장기간 피로가 쌓인 탓인지 온몸이 뻐근하니 노곤노곤 내려앉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 필요한 건 눈 호강이 아니라 말미의 휴식일 뿐. 하지만 한참을 부스럭거리던 준혁이 제일 먼저 매끈한 세필붓을 꺼내보이자 시선은 단박에 그리로 집중되고 말았다.

“세필붓이 아닌가?”

“예, 최상급의 황모로 제작된 것입니다. 황모 특유의 탄력으로 글이 매끄럽게 쓰일 뿐 아니라 복원력 또한 훌륭하지요. 특히 이 붓대는 벽조목으로 제작된 것이라 부르는 게 값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비들이 꽤나 탐을 내겠군.”

서율과 치경이 흥미를 보이기 시작하자 준혁은 씨익 웃으며 또 다른 물건을 보여주었다. 그가 다음으로 꺼내 든 물건은 사대부들이 그야말로 사족을 못 쓰는 연적이었다. 귀한 상아로 연꽃을 형상화한 것인데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도 다채로웠다. 게다가 꽃잎의 테두리 부분이 모두 금으로 둘러져 있어 고급스러움이 한층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상아로 얇은 표신이나 호패를 제작하기도 하지만 이런 연적을 만들려면 애초에 어느 정도 굵기를 확보해야 하지요. 때문에 안 그래도 값비싼 상아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게 됩니다.”

“이것 또한 부르는 게 값이 되겠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보여드릴 것에 비하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두 사내의 얼굴에 강한 호기심이 떠오르자 준혁은 비단 천 사이로 휘황찬란한 백색의 기다란 보석함 하나를 꺼낸다. 외관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조심스레 뚜껑이 열리고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서율은 구경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금강석이 아닌가?”

“알아보시는군요! 조선에는 잘 알려지지 않아 극히 소수만 알아보는 것이지요.”

세 번째로 꺼낸 물건은 영롱한 노란빛을 내뿜는 여러 개의 금강석이 모란꽃 모양의 머리 부분을 촘촘히 장식하고 있는 금비녀였다.

“이러한 빛깔을 가진 것이라면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가격이 짐작조차 되지 않을 것인데.”

“맞습니다. 한양 분점에 주문이 들어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어렵게 구한 것입니다. 청나라에서도 구할 수가 없어 수소문하는 데에만 엄청난 금액이 들어갔으니까요. 비녀는 금강석에 맞게 따로 제작된 것입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몇 년 전부터 구하기 시작해 이제야 의뢰를 완수하게 되었습니다.”

“대체 누가 이런 걸…….”

“저희들은 주문이 들어온 물건을 구해드리고 그 값을 받을 뿐, 세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어떻습니까, 재미있는 구경이 되셨습니까?”

“덕분에 실로 좋은 구경을 하였네.”

무뚝뚝한 성격인 치경도 만족스러웠는지 준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준혁은 곱상한 외모만큼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펼쳐놓은 물건들을 다시 최고급 비단 천으로 조심조심 감싸기 시작했다.

‘대체 누가 저런 것을 주문했단 말인가?’

서율의 머릿속에서는 의문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세필 붓과 연적까지는 그런대로 재미를 느끼며 구경할 수 있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특이한 모양의 연적에 열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집 몇 채 값에 달하는 값비싼 연적을 사 모으는 자들이 종종 있을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노란 빛이 도는 금강석이라니. 이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물건이었다. 그 액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실로 엄청날 것이다.

이 나라 조선에서 여인의 비녀에 그와 같은 재물을 들일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사헌부에서 오랫동안 잔뼈가 굵은 서율은 저도 모르게 직업병이 도지고 말았다. 과거를 반추해 보았을 때 이렇게 엄청난 물건들은 종종 조정 관리의 부정부패와 닿아있기도 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율은 다시 한 번 물건의 생김새를 빠르고 정확하게 머릿속에 입력시켰다.

“정경부인을 욕보인 지 얼마 되지도 안았는데 어찌 벌써 환궁을 하셨을꼬.”

“이참에 우리가 직접 공주의 혼처를 찾아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궐에서 안하무인으로 날뛰어봤자 길례를 치르고 하가를 하면 출가외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함부로 왈가왈부할 명분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궁녀들을 따돌리고 수풀 속에서 쉬고 있던 은명은 반드러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막 단잠에 빠지려던 참이었건만 궐 안의 실세, 공주의 꿀 같은 휴식을 방해하는 자가 누구더란 말이냐. 나뭇잎 사이로 내다보니 차 귀인과 현 소의가 몇몇 외명부의 여인들과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마땅한 혼처가 있겠습니까? 사대부 가문에서 봤을 때 공주께서는 이 나라 최악의 신붓감이십니다. 화국 옹주라 해도 반길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공주마마라니요?”

“과거에서 번번이 낙제만 한다는 호판 댁 자제 말입니다. 용모 하나는 말끔하다지요? 금혼령이 내려지면 동자봉단을 넣어보라 일러야겠습니다.”

“호호호.”

강릉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들이 멀어지자 은명은 도리머리를 지으며 다시 무릎 위로 고개를 푹 묻어버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한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그 안에 계시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용히 지나쳐 주십시오.”

“어허, 환궁하셨다기에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이복 오라비라고 홀대를 하십니까?”

오늘은 쉴 수 있는 날이 아닌 것이다. 은명이 한숨을 내리 쉬고 밖으로 기어나가자 기다리던 정한군이 냉큼 부축하여 일으켜준다. 공주의 머리와 옷깃에 나뭇잎과 잔가지가 잔뜩 붙어 몰골이 자못 추레하였다.

“조용히 쉬고 싶었을 뿐입니다.”

“쯧쯧, 처소에 푹신한 금침을 놔두고 이게 무슨 생고생이시랍니까.”

공주의 머리에 붙은 마지막 나뭇잎을 떼어내며 정한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해 열아홉, 혜빈의 소생인 그는 자유분방한 성정으로 세자 내외를 제외한 은명이 교류하고 있는 유일한 종친이었다. 좌상과 혜빈을 등에 업고 오라버니의 자리를 넘볼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한군은 이를 뻔히 알면서도 그런 듯 아닌 듯, 반질반질 은명을 찾아와 끊임없이 놀아 달라 조르곤 하였다.

“최 상궁이 아주 사색이 되었더이다. 부리는 사람을 어찌 그리 골탕 먹이십니까. 가시지요, 부용정에 다과를 마련하라 일렀습니다.”

접선을 쫙 펼친 정한군이 태평스레 부채질을 하며 부용정으로 향하자 은명도 그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은명과 혜빈은 전쟁을 치르듯 싸워대는 사이였다. 괄괄한 혜빈은 공주의 거침없는 행동을 아니꼬워했고, 은명은 콧대가 하늘에 닿아있는 그를 사정없이 짓밟아주었다. 혜빈과 크게 다투었던 어느 날, 처소에 놀러 온 정한군에게 날 선 소리를 퍼부어 댄 적이 있었다. 무슨 의도로 찾아오는 것이냐, 마주하기 껄끄러우니 눈앞에 나타나 친한 척하는 것을 삼가라.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정한군의 태도는 유유하기 그지없었다.

[혜빈마마와 또 싸우셨습니까? 여인들의 다툼에 저를 끼어 넣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은명은 억지로 끌려 나가 뱃놀이를 가야 했다. 이복누이의 따가운 눈총에도 나오길 잘하지 않았냐며 희희낙락거리던 그 모습이란. 그날 이후 은명은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내주는 듯, 아닌 듯 지금과 같은 관계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막 부용정으로 향하는 중문을 나서자, 저 앞에 상궁의 안내를 받으며 웬 어여쁜 규수가 다소곳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궐에서 궁녀가 아닌 자기 또래의 사대부가(士大夫家) 처자를 보는 게 신기했던 은명은 호기심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한 눈에 보기에도 단아하고 음전하니 가정교육을 잘 받은 명문가의 여식이었다. 궐 구경이 처음인지 흘끗흘끗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던 규수는 마주 오던 은명과 시선이 마주치자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그러나 공주와 정한군을 발견한 상궁이 한곳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이자 규수도 재빨리 아미를 숙였다. 쓱 지나치긴 했지만 은명은 힐끔힐끔 돌아보며 충족시키지 못한 궁금증에 미련을 보였다. 공주가 하는 양이 뜻밖이었는지 정한군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동무가 필요하십니까?”

“누구일까요?”

“이판의 여식입니다. 안빈전으로 드는 것일 테지요.”

생각해 보니 안빈이 이판대감의 먼 친척뻘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은명은 돌연 정한군에게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낸다.

“사대부가의 여식을 어찌 그리 대번에 알아보십니까?”

“여러 명문가에서 탐을 내는 규수이지요. 외모가 고울 뿐 아니라 품행이 바르고 음전하여 조선 최고의 신붓감이라 하더이다.”

“명성이 자자한 규수였군요. 과연 그럴 만도 합니다. 올해 몇인가요?”

기억을 더듬는 듯 정한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열여덟이라 했던가. 아무튼, 조만간 좌상 대감의 둘째 며느님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콰쾅! 은명의 머리 위로 날벼락이 내리쳤다. 좌상의 둘째 며느리라면 김서율의 안사람이 된다는 소리가 아닌가. 육 년 전 보령에서 말도 없이 떠나버린 앳된 얼굴의 그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외가를 산산이 부셔버린 불구대천 원수의 아들. 정한군이 뭐라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는다. 착 가라앉은 은명의 얼굴 위로 서느런 삭풍만이 쌩쌩 몰아치고 있었다.

친정을 잃은 어머니는 오랫동안 궐 밖을 떠돌며 심병을 앓다 돌아가셨다. 그런데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이들은 여전히 부른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세상의 이치란 원래 이리도 불공평하단 말인가. 흠잡을 데 없이 곱고 조신했던 이판의 여식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김서율이 곧 최고의 아내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대, 승승장구하며 잘도 사는군.’

살살 불어오는 온풍을 맞으며 한가로이 차를 마시고는 있지만 가슴이 냉랭하게 얼어붙은 은명은 손끝이 시려오고 있었다.

“왜 저를 최악의 신붓감이라 하는 겁니까?”

고산 녹차의 풍미에 흠뻑 빠져있던 정한군은 공주의 물음에 풋, 웃음을 터트렸다.

“알고는 계셨습니까?”

“가만히 있는데 들려오더이다.”

“크크, 왜긴 왜겠습니까? 마마의 그 불같은 성질머리 때문이지요. 외명부의 여인들이 마마라면 아주 학을 떼지 않습니까. 될 수 있으면 평생 피하고 싶은 분을 며느리로 맞아 한집에서 마주하다니요. 어불성설입니다.”

지나치게 적나라한 답변이었다. 할 말을 잃은 은명이 큰 눈망울만 끔벅거리는데 정한군은 뭐가 그리 재미난 지 신나게 킥킥거린다.

“너무 심각해하지 마십시오. 저 같이 마마의 직설적인 화법을 좋아하는 이도 가끔은 있을 겁니다. ……물론,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마지막 말과 함께 장난기를 싹 밀어낸 정한군은 은명을 응시하였다.

“마마께서 최악의 신붓감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지존의 따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의빈이 되면 출사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까?”

“평생 정사와 관련된 그 어떠한 의견도 피력치 못하게 됩니다. 뿐입니까, 도성 안에서 남은 인생을 감시 받으며 운신조차 자유롭지 못할 테지요. 형벌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여 못난 자들만 부마도위로 뽑는 것입니까?”

“못난 자들이 아니라 그렇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은명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변해간다…….”

“완전히 유폐되어 금고를 당하는 것이나 매한가지인 삶입니다. 처음에는 학문에 정진하고 정신수양에 힘쓰기도 하겠지요. 허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반복되는 무료함과 답답함을 어찌 달랠 수 있겠습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대대손손 쓰고도 남을 만큼의 재산밖에 없으니, 자연스레 방탕한 생활로 빠져드는 것이지요.”

“오라버니께서는 재미있게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 법이라 하였습니다. 저야 어릴 때부터 마음을 비우고 이쪽 생활을 개척해왔으니 풍류의 멋과 맛을 아는 것이지요. 출사에 뜻을 두었던 사대부의 자제들이 어디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적응을 못하고 내내 괴로워만 하다 천하잡놈이 되더이다. 고모부님들 보십시오.”

끔찍하고도 현실적인 설명에 등골이 오싹해진 은명은 화국 옹주의 부마를 떠올렸다. 전(前) 대사헌의 손자로 영민할 뿐 아니라 성정 또한 온순하여 화락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풍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서원위는 됨됨이가 곧고 바르다 들었습니다.”

“아직까진 그렇습니다. 이제 시작 아닙니까. 예의 주시해야지요.”

잠시간 허우룩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은명은 뜻을 알 수 없는 속웃음을 지으며 질문을 이었다.

“그런 삶을 살면 끔찍합니까?”

“적응이 되면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옥 같은 삶이 되겠지요.”

“나라의 동량지재라 촉망 받던 자가 그리 되면 어찌 될까요?”

“그런 자는 애초에 의빈으로 들이지도 않습니다.”

산딸기를 먹느라 여념이 없는 정한군은 은명의 얼굴에 모질고 어두운 기운이 감도는 것도 모르고 건성건성, 쉬이 답을 내주고 있었다.

“왕실에서 혼인을 제의하면 거절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그런 자를 의빈으로 들일 턱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조선 최고의 선비라 일컫는 김서율 같은 자 말입니다. 공주께서 아무리 떼를 쓰신다 한들 전하께서 김 지평을 과연 의빈으로 주저앉히시겠습니까? 아니지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천하의 김서율이 왕녀의 치마폭에 휩싸이다니요.”

비상한 머리와 뛰어난 학식을 갖춘 그가 정좌를 하고 서책을 보는 모습이 푸른 대나무처럼 고고하고 꼿꼿하다 했던가. 김서율이 소년의 티를 벗고 외모가 더욱 빛을 발하자 사람들은 그에 관해 촉각을 곤두세우며 일거수일투족을 입에 올렸다. 그리고 그 소식은 도성 안을 빙빙 돌다 궐 안까지 스며들어 궁녀들 사이에서도 오르내렸다. 때문에 피접을 나갔다 잠깐씩 환궁하는 사이사이, 그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들려오곤 하였다.

지난 육 년,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은명은 그의 이름 석 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생각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더 이상 벗어날 생각이 없어진 것이다. 그 대신 온전히 취해보고 싶었다. 의빈이란 족쇄를 채워 울타리 안에 가두고, 그의 몸과 마음이 황폐하게 말라가는 과정을 곁에서 똑똑히 지켜보고 싶었다. 결심이 선 은명은 두 눈에 형형색색 스산한 빛을 띠고 질문을 던졌다.

“이판 댁 여식과의 의혼이 성사되었답니까?”

냉기와 빈정거림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 이상한 낌새에 천진스레 차 맛을 음미하던 정한군은 고개를 들어 공주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설부화용, 고운 이목구비에 으스스한 설한풍이 휘불리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변화인가. 정한군은 공주의 의도를 읽어내려는 듯 깊은 시선을 건네며 답을 주었다.

“김서율이 암행감찰을 돌고 있는 모양입니다. 곧 돌아온다 하니 한양에 당도하는 대로 결론이 나겠지요.”

“최고끼리 만나면 불공평합니다. 잘난 이가 부족한 이를 만나 감싸고 보듬어 주는 게 도리이지요. 하물며 저는 일국의 공주이니 이 못돼 먹은 성질머리를 덮어줄 최고의 선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은명의 속뜻을 알아챈 정한군은 떠름한 얼굴로 확답을 요구했다.

“김서율을 의빈으로 만들고 싶으십니까?”

“그가 의빈이 되면 좌상이 괴로워하겠습니까?”

공주의 말이 정한군의 실소를 자아냈다. 대체 저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들어차 있는 것인지. 정한군은 혼란스러움을 접고 다시 여유작작 농을 하듯 받아 넘긴다.

“이거,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 집안은 저의 외가이거늘.”

“역성을 드시렵니까?”

“뭐, 촌수가 까마득히 멀어 이복누이인 공주마마께 핏줄이 더 당기기는 합니다. 하지만 가능하겠습니까? 그는 이미 출사하여 빠르게 승차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전하와 좌상 대감의 반대는 물론, 좌상을 따르는 세력 전체가 들고 일어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리 만들고 싶습니다.”

정한군의 눈빛이 은명을 관통하듯 날카로워졌다.

“좌상을 위시한 저들 세력이 마마의 외가를 무참하게 짓밟기는 하였지요. 저의 모친이신 혜빈께서도 그들이 계속 세를 이어가는데 한몫 단단히 하셨을 테고요. ……지금 복수를 하고자 하십니까?”

“후후, 무슨 그런 거창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그냥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가 의빈이 되면, 망가질 것 같습니까?”

“김서율을 망가트리고 싶으십니까?”

직접적인 물음에 대한 은명의 답은 능청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단지 그가 탐이 날 뿐입니다.”

“탐이 나신다구요?”

“조선 최고의 선비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모두가 흠모한다는 그를, 저도 흠모하고 있을 뿐입니다. 공주라고 뛰어난 자를 낭군으로 맞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그럼 한번 시도해 보시지요. 허나 부마로 찍을 수는 없으실 겁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입니까?”

“김서율이 제 발로 걸어와 연모하는 마음을 줄줄이 고백하며 전하께 혼인을 청한다면 또 모를 일이지요. 화경궁으로 거처를 옮기시면 그와의 자리를 한번 마련토록 하겠습니다.”

도와주겠다는 것인가. 생각지 못한 그의 말에 은명이 뾰족한 시선을 보낸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후후, 별 생각 없습니다. 저도 가끔은 무료해서 말입니다.”

정한군이 사근사근 답하며 소박하니 우아한 찻잔에 손을 뻗는다. 춘풍화기가 도는 그의 얼굴엔 여유꽃이 활짝 피었지만 여전히 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은명의 얼굴엔 소슬한 기운만 짙어지고 있었다.

‘형벌 같은 삶이라……. 김서율, 그대에게 딱 맞는 형벌이 아닙니까. 탐욕스러운 좌상도 의빈이 되어 사지가 잘린 자식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쓰리겠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그대 또한 괴로울 것입니다. 저를 끝도 없이 원망하고 또 미워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사람들로 박작박작한 도성의 어느 주막. 준혁은 아직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한양에 당도한 직후 저녁을 함께하자고 제안한 쪽은 준혁이었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할 겸 최고급 요릿집이나 기방에서 접대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데 두 사람이 준혁을 데리고 온 곳은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그저 번성한 주막이었다. 게다가 주문한 음식은 머릿수에 맞춘 국밥 세 그릇과 수수한 지짐이 한 장. 준혁은 방금 전 주모가 내온 단출한 국밥을 들여다보았다.

“더 좋은 음식을 대접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한양에서 솜씨가 제일 좋은 곳이라네.”

서율이 수저로 국밥을 휘휘 저으며 답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건더기가 예전처럼 알차진 않았지만 지옥 같은 북쪽 지방에 비하면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어명으로 도성을 오래도록 비우고 돌아오는 길이면 서율은 습관처럼 이곳을 가장 먼저 들르곤 하였다. 주모의 솜씨도 제법이었지만 도성 안의 모든 소식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대과에 급제한 첫해를 제외하고 지난 육 년 간 사헌부에 적을 두고 있는 그였다. 때문에 이곳에서 수군거리는 부패한 관리들의 행적이나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은 하나하나 전부 유용한 정보가 되고 있었다. 특히 이번처럼 오랜 시간 도성을 비웠다 돌아오는 날이면 굵직굵직한 이야기가 마구 들려오기도 하였다. 물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글쎄, 공주마마께서……”

지금처럼 이곳저곳으로 피접을 다니시는 공주께서 가끔 궐로 돌아가 내외명부를 홀딱 뒤집는 경우. 그 소식에 흥분한 백성들은 한두 달씩 모든 사건을 뒷전으로 미루고 저리 공주마마 이야기에만 심취해 있곤 하였다. 역대 어느 왕녀께서 이처럼 백성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셨을까.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준혁과 치경은 말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았지만 서율은 귀를 닫고 묵묵히 식사에만 집중하였다.

“에이, 공주마마께서 정경부인을 울리신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배알이 꼴리시면 옹주마마 뺨까정 사정없이 후려치시는 분이라는데.”

“쯧쯧, 어째 그분은 혼인도 안 하고 그러고 계시는지.”

“이 나라 최악의 신붓감이라잖아. 어느 대가댁에서 공주마마를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겠어, 나라도 싫겠구먼.”

치경은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성질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 저 사내들의 밥상을 뒤엎어버리고 싶었다. 공주마마가 누구이신가. 마지막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오는 바람에 그가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분이었다. 그 옛날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돌리면서도 배시시 웃던 어린 공주가 눈에 밟혀 얼마나 가슴이 아팠었는지. 그때 일이 떠오르자 쇳덩이를 올려놓은 듯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워진다. 무뚝뚝하고 우락부락한 겉모습과 달리 치경은 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해서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오래 전 물오름달 초순, 하직인사도 없이 떠난다는 상전의 말은 치경에게도 꽤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이었네. 공주께서도 금방 털어내시겠지.]

그 말을 끝으로 상전이 공주에 관해 그 어떤 말도 입에 올리는 것을 치경은 본 적이 없었다. 지난 육 년간, 단 한 번도 말이다.

“맙소사, 쯧쯧…… 이러다간 백성들이 공주마마를 산적으로 알겠습니다. 저는 말입니다, 공주 아기씨께서 아름답고 어여쁜 분이실 것 같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치경은 물론, 밥 먹는 데에만 열중하던 서율도 수저질을 멈추고 준혁을 바라보았다.

“자네 혹시, 공주 아기씨를 어디서 뵌 적이 있었는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치경이 진지하게 물었지만 준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근데 제 생각엔 얄미운 후궁마마와 외명부의 부인들을 따끔하게 혼내주는 멋지고 당찬 분이실 것 같습니다. 소문이 이렇게 심상치가 않은데 그냥 내버려두는 것 보십시오. 정말 대인배 같은 행보이십니다. 혹, 공주마마를 뵐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저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아무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니지 않은가.”

준혁에게 통박을 놓긴 했지만 공주를 좋게 봐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 치경은 다시금 국밥을 푹푹 떠서 입에 넣는다. 반대로 서율은 입맛을 잃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먹지는 않고 수저로 국밥을 뒤적거리고만 있었다. 어떠한 말이든 공주에 관해서라면 듣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그의 바람과는 달리 공주의 소식은 느닷없이 곳곳에서 흘러나와 서율의 귓가를 깊이 파고들곤 하였다. 특히 내외명부의 여인들과 충돌이 생기는 날에는 지금처럼 어디를 가나 귀에 딱지가 앉도록 공주마마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정경부인을 울리시다니, 기가 막히는군. 대체 어쩌시려고…….’

당했다고 밖으로 소문을 흘리는 내외명부의 여인들이 문제가 많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눈꼴시다하여 성정을 마구 폭발해버리는 공주도 분명 문제가 있었다. 순식간에 입안이 깔깔해진 서율은 결국 입맛을 모두 잃고 아예 수저를 놓아버리고 말았다.

좌상 김대원 대감의 사저. 보희는 시연의 처소를 나와 정경부인께 인사를 올리고 힘없이 대문으로 향했다.

‘분명 오늘쯤은 오신다고 하였는데…….’

이조판서 윤도우 대감의 고명딸 보희는 오 년 전 어머니를 따라 이 댁을 처음으로 찾았다 김서율을 보게 되었다. 그 유명한 김서율이 어머니께 인사를 올린다고 안채에 들었을 때 호기심이 일어 고개를 살짝 들어보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예기치 않게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고, 보희의 가슴은 사정없이 두방망이질을 쳐댔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녀가 그를 마음에 품기 시작했던 것이.

사헌부의 지평인 그가 어느 날 도성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면, 이는 임금의 밀명을 받아 조선팔도 어딘가를 암행감찰 중이라는 의미였다. 짧게는 보름, 길게는 몇 개월씩도 걸리기 때문에 언제 돌아올지 따로 기약할 수 없는 여정이었다. 그런데 이틀 전, 궐에 들었다 안빈께서 살짝 귀띔을 해주시어 그가 오늘쯤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서 얼굴이라도 잠시 볼 수 있을까, 시연을 본다는 핑계로 찾아왔던 것이다.

어른들끼리 혼담을 진행 중이라는 말을 들은 이후, 이상하게도 서율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그는 이 혼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봐 줄지, 궁금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리 허탕을 치고 말았으니. 혹시나 했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지고, 무거운 걸음으로 대문을 나서는데 하늘에서 화답을 보내주셨다. 김서율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너, 보희구나!”

가마로 향하던 보희가 급히 돌아보자 밝은 낯빛의 서율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정이 힘들었는지 전보다 야윈 듯 했지만 두 눈에 흐르는 싱싱함과 힘찬 기운은 여전해 보였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닥쳐온 일이라 보희의 심장이 미친 듯이 팔딱이고 있었다.

“오라버니! 이제 오십니까?”

“그래, 시연이를 보러 왔었구나. 잘 지냈느냐?”

“예, 무탈합니다.”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너도 이제 얼른 혼례를 올려야지.”

“……”

보희는 수줍은 마음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다.

“시각이 너무 늦어져 집에서 걱정하시겠다.”

“이 시간쯤 돌아가겠다, 미리 말씀 드리고 왔습니다.”

“그래, 역시 너답구나.”

그러더니 서율은 성큼성큼 가마로 걸어가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자, 오르거라.”

둥실둥실 구름 위를 떠가는 기분으로 가마에 오른 보희는 마지막 순간, 모든 용기를 짜내어 고개를 살짝 들어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서율이 싱긋 웃어 보이자 보희가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 맞잡은 양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조심히 가거라.”

“들어가십시오.”

가마 문이 닫히고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자 보희는 천천히 숫자를 열까지 세었다. 그리고 충분히 멀어졌단 생각이 들자 크게 호흡하며 아득해진 정신을 가다듬는다. 기쁘고 행복해 코끝이 다 시큰거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될 것이다. 아내, 김서율의 아내…….’

보희는 조금 전, 환히 웃어주던 그를 떠올리며 고운 미소를 짓는다. 행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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