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4 장. 연연불망(戀戀不忘), 재회 그리고 상흔 (4/21)

제 4 장. 연연불망(戀戀不忘), 재회 그리고 상흔

맑고 상쾌한 날씨가 이어지는 청명한 시월. 곡식과 인심이 풍요롭게 넘쳐나 말도 살찌고 사람도 살찐다는 축복받은 이 계절에 딱 한 사람, 공주만은 사들사들 고스러지고 있었다. 궐 안의 실세로 자리 잡았으니 하늘을 쓰고 도리질을 해도 모자를 판에 해쓱한 몰골은 무엇이요, 끝없이 내리 쉬는 긴긴 한숨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최근 동궁전에서 공주의 건강을 매우 염려하시어 조석으로 의관을 보내 몸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허나 내의원의 의관은 병명조차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채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려대고 있는 상황. 이는 공주의 병이 알려질까 두려워 최 상궁이 증상을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은 탓이었다.

“후우.”

“마마,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십니다.”

최 상궁이 우는 소리를 하자 경상에 이마를 처박고 한숨을 쉬어대던 은명이 고개를 들었다. 어린아이의 싱그러움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 퀭하니 초췌한 몰골이 보기에도 딱할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여러 달 음식을 제대로 넘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수면도 깊이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큰일이라니? 내 병이 그리도 위중한 것이냐?”

“마마께서는 혹…… 보령에 계시는 그분 생각을 하시는지요?”

“헉!”

최 상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은명이 덴겁하여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내가 잠꼬대를 하였더냐?”

“아이고, 맙소사!”

제발 그것만은 아니기를 바랐건만 끔찍한 짐작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최 상궁은 급한 마음에 은명에게 바싹 다가가 조심스레 소곤거렸다.

“마마, 마마께서는 지금 상사병을 앓고 계시는 겁니다.”

“상사병?”

“예, 그분이 그리도 보고 싶으십니까?”

“……응, 보고 싶어.”

은명은 머리를 다시 경상 위로 떨어트렸다. 지난 수개월, 중전과 세자빈에게 기어오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혼내주었다. 그러나 화를 내면 낼수록 속이 풀리는 게 아니라 점점 더 꼬여만 가는 것은 무슨 조화속일까. 입맛도 떨어지고 침수에 들어서는 시름시름. 모든 게 다 싫고 짜증이 나는 와중에 떠오르는 얼굴은 딱 하나, 김서율뿐이었다.

세자는 언제나 숨쉬기도 벅찰 만큼 바빴고, 빈궁은 속병을 앓고 있는 중전께서 놔주질 않아 함께할 수 없었다. 금상께서는 여전히 화국 옹주만 데리고 산책을 하신다. 그럴수록 은명은 김서율의 얼굴만 또렷이 떠올랐다. 남루한 몰골을 하고 있어도 어디선가 나타나 오롯이 편을 들어준 사람. 오라버니 이후로 따뜻하게 웃어주고, 어여쁘다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내 편을 들어주었던, 나만의 사람이니라.”

“마마…….”

나직이 속삭이는 공주의 말에 최 상궁은 눈앞이 캄캄해지는데 기별도 없이 세자가 취연당에 들이닥쳤다. 올해 열일곱, 듬직하니 준수한 장부로 성장한 세자는 상석에 좌정하여 반쪽이 되어 있는 어린 누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멍하니 오라버니를 마주보던 은명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 연유를 묻는다.

“왜 그러셔요?”

“너 말이다, 무슨 말 못할 근심이라도 있는 게야?”

구석에 물러나 있던 최 상궁은 뜨끔하여 사색이 되었지만 은명은 더 없이 태연자약하였다.

“그런 건 없습니다.”

“어의가 오늘 피접을 권했다.”

“피접이요? 저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세자의 말에 동그래졌던 은명의 눈이 이내 기쁨과 환희로 출렁거린다.

‘피접이라.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하였던 것일까?’

“네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 같으니 조용한 곳에서 쉬다 오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만. 궐이 그리도 답답한 것이냐? 솔직히 오라비는 네가 그냥 여기서 나와 함께 지냈…….”

“싫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궐이 싫습니다. 답답합니다.”

안 된다는 말이 나올까 무서웠던 은명은 조바심이 잔뜩 묻어난 얼굴로 펄쩍 뛰며 말했다. 저리도 힘든 것인가. 영문을 모르는 세자는 어린것이 오죽하면 저럴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에 피접을 허했다.

김서율을 다시 볼 수 있다니! 은명은 날아갈 듯 기뻐 낯꽃이 활짝 피어오른다.

“그리도 좋으냐?”

“예, 좋습니다. 행복합니다! 허면 피접 갈 장소는 제가……”

“남양으로 정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김서율이 있는 곳은 남양이 아니라 보령이었다. 그렇다면 피접은 기필코 보령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남양이라니요? 저는 보령으로 가고 싶습니다.”

“보령은 너무 멀구나. 남양으로 가거라.”

“저는 보령으로 가겠습니다!”

은명은 기겁을 해서 소리쳤고, 세자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고집을 부리는 누이를 바라보았다.

“꼭 보령으로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느냐?”

“제가 꼭 남양으로 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보령은 너무 멀다. 이번에 나가면 지난번처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 아니냐. 가끔 보러 갈 것이니 가까운 곳으로 가거라.”

“그냥 보령으로 보내주시어요.”

“어허, 그만하여라.”

서율을 볼 수 있을 거라 들떠있던 은명은 하늘을 날다 땅바닥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그를 볼 수 없다니! 짜증과 분노는 순식간에 두 배, 세 배로 부풀어 올랐고, 결국은 빠방 폭발하고 말았다.

“싫습니다, 온양에 있을 때도 보러 온다 해놓고 한 번도 안 왔으면서. 오라버니, 거짓말쟁이! 지금도 며칠 만에 찾아온 거면서 남양까지 언제 보러 오겠다고 그러십니까!”

“은명아!”

누이의 어리광이 도를 넘었다 생각했는지 세자의 목소리가 다소 엄격해졌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일. 은명은 그대로 방바닥에 엎어져 막무가내로 떼를 쓰기 시작했다.

“으아앙…… 저는 보령으로 갈 것입니다. 보령이 아니면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여요, 보령으로 보내주셔요!”

대궐이 떠나갈 듯 울어대는 은명을 번쩍 안아다 빈궁에게 던져놓고, 세자는 눈앞에 숨을 죽이고 있는 최 상궁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구나.”

“황송하옵니다. 이 모든 것이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벌하여주시옵소서.”

“보령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예에?”

방바닥에 코를 박고 있던 최 상궁은 엄청난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어 세자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궐 안에 있다 하여 공주의 움직임도 모르고 있을 줄 알았더냐?”

“마, 망극하옵니다.”

“바른대로 대거라. 보령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야?”

“그, 그것이……”

세자의 노기에 최 상궁은 보령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공주가 몰래 빠져나갔다 봉변을 당할 뻔했단 소리에 세자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어린 선비가 현감이었단 말에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다. 설명을 모두 마친 최 상궁은 질책을 받을 각오로 고개를 조아리는데 정작 세자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었다.

‘서율이다! 분명, 김서율이야. 최 상궁은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것인가? ……온양에서 지냈으니 그간의 사정을 알 턱이 없겠구나.’

올 봄, 열넷이란 어린 나이로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서율은 대궐뿐 아니라 도성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최 상궁은 슬쩍 고개를 들어 세자의 기색을 살폈다. 분명 무슨 말씀이 있어야 하거늘 이상하게 입을 꾹 닫으시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야 세자가 복잡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보령으로 갈 차비를 하여라.”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매듭달 중순. 집무실을 나와 겨울풍경을 바라보던 서율이 크게 심호흡을 시작하자 청량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수없이 많은 문서를 들여다보느라 어질어질했던 머리가 더 없이 맑고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자박, 자박. 누군가 작은 보폭으로 소복이 쌓인 눈을 지르밟으며 조심조심 걸어오고 있었다. 이방의 딸아이가 자그마한 소쿠리를 두 손에 받쳐 들고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올해 여덟, 작은 몸집에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진 이 아이는 봄에 보았던 그 맑은 눈빛의 아이를 연상케 하곤 하였다.

“날도 추운데 여기는 어쩐 일이냐?”

“엄니가 호박떡 갖다 드리래유. 식기 전에 어여 드세유.”

추위로 볼이 빨개진 아이가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소쿠리를 내민다. 이곳까지 들고 오느라 얼마나 손이 시렸을까. 기특한 마음에 서율은 곰살갑게 웃으며 그것을 건네받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끼어들어 소쿠리를 사정없이 내쳐버린다.

“엇!”

갓 만들어진 호박떡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얼어붙은 땅바닥 위로 볼품없이 팽개쳐졌다. 아이는 울먹거렸고, 성이 난 서율은 거칠게 돌아보다 화들짝 놀라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너…… 그 꼬맹이?”

지난봄에 만났던 그 아이가 두툼한 분홍빛 공단 두루마기에 모피를 댄 아얌을 예쁘게 쓰고 경직된 얼굴로 서율을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관아 사랑채의 상석을 차지한 은명은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서늘해진 눈으로 서율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녕 공주마마이십니까?”

시전에서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어쩐지 친숙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이제야 깨닫는 서율이었다. 세자 저하와 닮은 얼굴. 서율은 세자와 함께 수학하던 배동이었다. 세자가 다른 배동들과 이미 오랜 시간 함께 어울리며 수학하던 중 서율의 재주가 남다르다 하여 여섯 살, 어린 나이로 뒤늦게 합류했던 것이다. 이미 저들끼리 가까워진 배동들은 연배가 낮고, 당파가 다른 그를 배척하려 했지만 세자의 배려로 그들과 어울리며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한심한 어르신은 군왕, 총애를 빼앗은 첩과 이복자매는 후궁마마들과 화국 옹주로구나.’

서율은 어두운 낯으로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던 은명은 차가운 냉기를 풀풀 풍기며 톡 쏘아붙였다.

“질문을 던져놓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야? 내가 공주라는 게 그리도 못 미더우냐?”

“아니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한데 조금 전에는 무슨 연유로 음식을 쳐내셨습니까?”

양심을 건드리는 그의 질문에 은명이 움찔하여 오른쪽 눈썹이 까딱 높아졌다 제자리를 찾는다.

“그건…… 그보다 더 귀한 음식을 다시 만들어 보내줄 것이다.”

“그보다 더 귀한 음식은 없습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은명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관아 아전의 안사람이 정성껏 만들어 보내준 것이었습니다. 빠듯한 살림에 식구들 챙기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근조근 짚어내는 그의 말에 은명은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아직은 마음이 덜 풀리고 자존심도 상해 끝까지 억지를 부린다.

“지금 나를 가르치는 것이냐?”

“백성들의 곤궁한 처지를 조금 더 헤아려 달라,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줄줄이 옳은 말이었기에 은명은 더 이상 대꾸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부끄럽고 무안하기만 할 뿐.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말하였듯이 나는 이곳에 피접을 나온 것이다. 긴히 할 말이 있어 찾아왔지만 오늘은 몸이 곤하여 이만 돌아가야겠다.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지.”

은명은 저 할 말만 마치고 벌떡 일어나 서둘러 방을 나가버렸다. 마치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서두르더니 치경이 올리는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그대로 훌쩍 가마에 올라타 휘익, 사라져버린다. 웬만해선 말이 없는 치경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 할 정도였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글쎄…….”

서율과 치경은 황당해하면서도 무거운 낯으로 멀어지는 공주의 가마를 바라보았다. 지난 봄, 서율은 한동안 업무를 보다가도 밖으로 나가 정문 쪽을 살폈고, 외출을 나갔다 돌아오면 찾아온 이가 없었는지 제일 먼저 묻곤 하였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체념한 그는 맑은 눈동자의 그 아이가 하늘 아래 어디서든 건강히 지내기만을 기원했었다. 그런데 그 꼬맹이가 반년이 훨씬 지난 지금, 사늘한 얼굴을 하고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공주 아기씨라니…….”

서율의 쓰디쓴 혼잣말에 치경의 얼굴은 더욱 흐려지고 있었다.

‘화를 누르지 못하고 일을 저질러 오자마자 줄행랑을 치고 말았구나. 잘 지냈느냐, 묻고 싶었건만. 늦게 와 미안하다, 사과하고 싶었건만.’

도승지의 본가로 돌아와 망연자실 앉아있는 은명은 속상한 마음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가 다정한 얼굴로 다른 아이를 바라보는 모습에 왜 그리 분노가 치솟았는지……. 순간적으로 그 아이가 화국 옹주로 보였고, 서율만은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불안감에 그런 거친 행동을 하고 말았다.

“아까 그 음식이 무엇이었더냐?”

풀이 팍 죽은 은명은 최 상궁에게 힘없이 물었다.

“호박떡인 줄로 아옵니다.”

“똑같은 걸 만들어 관아에 보내주고, 아까 그 아이의 집에도 비단이랑 곡식을 좀 내어다 주게.”

“예, 마마.”

휘이잉, 북풍한설이 스산하게 불어오는 겨울 밤, 어린 공주의 가슴엔 그보다 더 시리고 매서운 칼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며칠 뒤, 서율이 소송 관련 문건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은명이 귀한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타나 당당히 선칭각의 안채를 차지했다. 관아는 집무 공간인 제흥당과 거처 공간인 선칭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안식구가 없는 서율은 이제껏 선칭각을 비워두고 있었다. 꼭꼭 닫아두었던 선칭각의 문이 열리고, 공주를 모시고 온 아리따운 처자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며 삭막했던 그곳이 순식간에 온기로 채워진 느낌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서율이었지만 공주께서 하시는 일에 토를 달 순 없었다.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공주의 말을 상기하며 서율은 관아에서 업무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선칭각 안채에 발을 들여놓았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공주는 최후의 결전을 앞둔 비장한 장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목소리와 말투 또한 매우 엄숙하였다.

“그대의 조언대로 나는 궐로 돌아가 기어오르는 자들을 따끔하게 혼내주었다.”

“잘 하셨습니다.”

“부왕께서 나의 행동을 묵인하시어 이제 궐에선 그 누구도 나를 우습게보지 못한다.”

“그러하십니까.”

“그래도 전하께서는 여전히 내게 눈길을 주지 않으신다. 옹주전과 크게 다투었을 때 옹주를 찾아가 안아주시고 위로해 주셨지만 내게는 걸음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왕의 용안을 손에 꼽힐 정도로만 뵈었고, 긴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다.”

“마마…….”

“나는 이제, 그런 아바마마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부왕을 부정하는 공주의 엄청난 발언에 서율은 화들짝 놀라 문 쪽을 돌아보았다. 밖에서 누군가 엿들었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한 그에 비해 은명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완고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부왕은 혜빈과 옹주, 그리고 다른 후궁들에게 기꺼이 양보할 것이다. 나는 오라버니와 빈궁마마만 있으면 된다.”

‘변하셨다. 맑았던 눈에 상처를 담아버렸구나.’

아픔이 배어있는 은명의 눈이 서율의 가슴마저 울렁이게 하고 있었다.

“허나 평생을 오라버니와 빈궁마마 곁에서 살 수는 없다. 곧 부마도위가 정해질 것이고 나는 궐을 나가야 한다. 하여 궐 밖에도 내가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그게 너라고 생각한다. 너라면 내가 믿을 수 있다.”

“……”

은명은 할 말을 마치고 그에게서 답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서율은 어두운 얼굴로 묵묵히 침묵을 고수할 뿐이다. 알겠다고 대답만 하면 되는 것인데 어찌하여 입을 열지 않는 것일까. 마음이 급해진 은명은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아홉 살이란 나이가 무색할 만큼 맹랑한 소리를 뱉어내었다.

“나의 의빈이 되어다오. 그대에게 평생토록 부귀영화를 보장하여줄 것이다.”

그림처럼 경치가 맑고 빼어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화경궁(畫境宮).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았던 아름다운 그곳으로 김서율과 함께 돌아가고 싶었다. 시린 가슴을 녹여주는 그의 다정한 미소를 가까이서 오래도록 볼 수 있길 염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거절하겠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냉정하고도 단호한 거절이었다. 거절을 당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하였기에 은명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숨 막히는 얼마간의 침묵이 흐르고, 자신이 거절당했음을 확실히 인지한 어린 공주는 날이 선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를 거절하는 것이냐? 내가 어리다 생각하느냐? 너는 나를 우선순위 신붓감으로 고려해보겠다, 약조하였다.”

“그때는 마마의 신분을 몰랐습니다. 이제 공주마마이신 걸 알았으니 그때의 약조는 무효합니다.”

“내가 공주면 달라지느냐? 어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것이야!”

화가 난 은명이 손으로 경상을 탕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지만 서율은 아랑곳없이 냉정한 말을 이어 나갔다.

“달라집니다. 저를 믿으십니까?”

“너를 믿는다. 너는 나의 사람이다.”

“제가 마마의 사람이라 어찌 속단하십니까? 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제 부친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저는,”

“그만!”

하얗게 질려버린 은명이 서율의 다음 말을 막아버렸다. 아무리 어리고 정치에 관심 없는 공주라 해도 세자의 근심과 간택 후궁들의 권세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정도는 꿰뚫고 있었다. 만약 김서율이 외조부인 경산부원군을 죽이고 실권을 더욱 공고히 한 세력의 자손이라면? 은명은 거기서 생각을 멈추고 머릿속을 깨끗이 비워버렸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김서율이 가만 내버려두질 않는다.

“곧 알게 되실 일입니다.”

“무슨 소린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알아들으셨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 앞으로는 내 앞에서 그대의 집안을 들먹거려선 아니 될 것이야. 나는 여기에 너 하나만을 보러 온 것이다.”

“……”

“물러가거라. 오늘은 더 이상 그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공주가 고개를 옆으로 휙 돌리며 당차게 명을 내렸다. 너와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을 것이다, 확고히 보여주는 몸짓이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서율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은 한 발 물러서기로 하였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예를 올리고 방에서 물러나려 할 때였다.

“나는 예서 쉬었다 갈 것이다.”

공주에게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 하십시오.”

“앞으로도 종종 이곳을 이용할 것이야.”

“예?”

서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은명은 태연히 대꾸하였다.

“내가 도승지 영감 댁에 계속 처박혀 지낼 수만은 없지 않느냐? 그렇다고 고을 아이들과 어울려 놀 수도 없는 노릇이니 종종 이곳에 다니러 오겠다는 것이다. 알아서 드나들 터이니 따로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야.”

위풍당당, 말하는 폼은 거의 이곳의 안주인이었다. 결국 입도 벙긋 못하고 방을 나선 서율은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지만 곧 쓸데없는 기우라며 스스로를 다독거린다. 설마하니 공주께서 고을 관아에 자주 드나드실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어디까지나 김서율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날 이후 은명은 관아를 제집처럼 뻔질나게 드나들더니 어느새 선칭각 안채를 떡 하니 차지해 버렸다. 처음에는 말없이 두고 보기만 하던 서율도 공주의 물건이 안채를 가득 채우고 거의 매일같이 들락거리기에 이르자 이를 제지하고 나섰다.

“어차피 비워두는 방이 아닌가? 내가 이곳에 잠시 머무른다고 서까래가 무너지기라도 한단 말이냐?”

“잠시가 아니질 않습니까. 마마의 잦은 방문으로 비워두었던 이곳에 군불을 떼고 간식을 올리느라 관아의 예산이 많이 낭비되고 있습니다.”

감히 공주께 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서율은 작정이라도 한 듯 무엄한 소리를 서슴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화가 난 은명은 공주를 능멸한 그에게 벌을 주는 대신 보모상궁에게 명을 내렸다.

“최 상궁, 지금까지 들어간 비용을 모두 변상해주고 앞으로는 장작과 내 간식을 따로 마련해오게.”

서율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으로 휙 들어가 버리는 공주를 속상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비용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공주께 들어가는 것인데 무에 그리 아까우랴. 다만 자신을 받아준 세자저하를 위해서라도 공주의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 인연을 정리하고 싶었다. 다급해진 서율은 안으로 들어가려던 보모상궁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에 대해 이미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공주마마께 상세히 말씀 올려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말씀 올리려 하였지만 도통 들으려 하지 않으십니다. 기회를 봐서 귀띔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최 상궁이 무뚝뚝한 얼굴로 지나쳐 가자 서율은 씁쓸함이 입안 그득히 퍼지는 듯하였다. 맑은 눈망울에 드리워진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상처를 드려야 하는 게 안타까웠다. 하지만 달리 무슨 방도가 있단 말인가. 마음이 커지면 상처는 더욱 쓰릴 뿐인 것을.

‘예전처럼 지낼 수는 없는 것일까.’

김서율은 이제 예전처럼 웃어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은명이 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 그는 계속해서 어둡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하릴없이 손을 놓고 있던 은명은 보모가 들어오자 들고 있던 과제인 자수를 시작하였다.

공주라고 해서 놀고 싶은 대로 놀 수 있는 건 아니다. 시간에 맞춰 강론을 듣고, 수를 놓으며, 꽃꽂이와 서화를 익혀야 했다. 피접을 나왔더라도 병이 중하지 않은 이상 예외는 없었다. 때문에 은명은 관아에 와서도 서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습자(習字)를 하였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해야 할 일은 똑같았고, 매일같이 김서율을 보는 것도 아니었건만 추위를 싫어하는 공주는 한파가 몰아치는 날에도 기어이 관아에 오고야 말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귀티 나는 꼬맹이가 이 나라 공주일거라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주구장창 선칭각 안채를 드나들며 활개를 치기 시작한지 벌써 여러 날. 관아의 아전과 포졸들은 은명을 서율의 먼 친척 누이쯤으로 여기게 되었다. 지난 봄, 성 진사 댁 며느리를 혼쭐 내준 사건은 까마득한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이미 오래인 것이다. 어쩌다 은명이 오지 않는 날에는 관아의 모든 이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기다리기도 하였다. 공주가 보령의 관아에 확실한 존재감을 새겨 넣은 것이다.

부부가 사랑채와 안채에 각각 자리를 잡고 한 집에서 서찰로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로 내외가 엄격한 조선. 그리고 그런 교육을 받고 자라난 서율. 이러한 그에게 최근 말 못할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으니 공주와 직접적으로 얼굴을 맞대는 일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어느 땐 한양 본가에 들어와 있는 외사촌 누이, 시연이보다 공주가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어찌된 일인지 공주께서는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몸소 그의 집무실을 찾아와 당연하게 명을 내리곤 하였다. 거리를 두어도 모자를 판에 오히려 익숙해지고 있으니……. 서율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였다.

‘드디어 내일이로구나.’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아직은 오소소 살을 에는 듯한 꽃샘추위가 찾아오는 물오름달 초순. 서율이 집무실을 정리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데 치경이 급하게 안으로 들었다.

“공주 아기씨께서 오셨습니다. 많이 앓으셨는지 얼굴이 안되셨습니다.”

“지금 안채로 드셨는가?”

“제흥당 별채에 계십니다.”

“제흥당?”

서율은 모피로 만들어진 덮개를 들고 제흥당 별채로 향했다. 겨울 내내 쉴 새 없이 들락거리던 공주는 어디가 안 좋은지 지난 엿새 동안 관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서 모두가 노심초사, 걱정을 하던 참이다. 아전과 포졸들은 첫날부터 은명의 부재를 궁금해 했고 셋째 날이 되자 치경이 슬슬 궁금해 하더니, 다섯째 날이 되었을 땐 서율까지도 궁금증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공주께서 오셨다 해도 업무에만 몰두하였겠지만 오늘은 여러모로 특별한 날이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앞에 작은 몸집의 공주가 새로 들어온 관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율은 잠시 그 여린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다가가 등 뒤로 따뜻한 모피를 덮어주었다. 어린 공주는 추위에 많이 약하셨는데 애늙은이처럼 시시때때로 손끝과 등이 시리다며 몸을 떨곤 하였다.

“날이 많이 차갑습니다. 옥체 아직 미령하신데 예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아는가? 우리 외숙 일가도 관노비가 되었다네.”

은명이 노비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중얼거렸다. 심하게 앓았는지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그래서 그때, 노비행렬을 그리도 유심히 살펴보셨던 것입니까? 혹시 그 속에 피붙이들이 섞여있지 않을까 하여?’

공주의 맥없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낯빛은 한겨울의 밤처럼 몹시도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었다. 인연으로 이어지기엔 얽혀있는 악연이 너무나도 질겼다. 그렇다면 이제는 마음먹었던 계획을 독하게 실행해 옮기는 수밖에. 살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와 마음까지 꽁꽁 얼려버리는 삼월의 어느 날, 결심을 굳힌 서율은 그보다 더 차갑게 식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아직은 병색이 남아있는 은명이 가마에서 내려 관아로 들어섰다. 그런데 오늘따라 제흥당 내부가 전체적으로 어수선하니 꼭 이사라도 가는 분위기였다. 은명과 궁녀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걸음을 멈추고 둘러보는데 아전 하나가 반가운 얼굴로 달려 나온다.

“오셨습니까, 아기씨. 몸도 안 좋으신데 아랫사람들 시키시지 뭣 하러 예까지 직접 나오셨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짐 챙기러 오신 거 아니십니까?”

은명이 어리둥절하여 최 상궁을 바라보았고, 최 상궁은 다시 아전에게 물었다.

“짐을 챙기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분위기는 또 왜 이리 어수선하고? 오늘 무슨 날인가?”

“새로운 현감께서 오시는 날이지 않습니까.”

“헉!”

날벼락 같은 소리에 공주가 충격을 심하게 받은 듯하자 최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

“허면 지금 계시는 현감께서는?”

“연락 못 받으셨습니까? 오늘 아침 일찍 한양으로 출발하셨습니다. 원래 소속된 곳이 따로 계시질 않으셨습니까.”

은명은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몸에서 기운이 쫙 빠져나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궁녀들과 아전이 대경실색하여 아우성을 쳤지만 그들의 말소리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딱 하나의 사실만 뇌리 깊숙이 떠오르고 있을 뿐.

‘나를 버리기로 하였구나.’

거처로 돌아온 은명은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앉아있기만 하였다. 그는 떠났고, 덩그러니 혼자만 남겨진 것이다. 어떡하든 설득하여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고 싶었건만 어찌 일언반구도 없이 저 혼자 가버렸단 말인가. 어찌 이리도 모질게 군단 말인가.

‘발걸음이 떨어지더란 말이냐? 영영 안 볼 작정인 것이냐? 어머니와 내가 함께 살았던 화경궁을 그대에게도 보여주고 싶었건만. 그대도 좋아하였을 것인데…….’

깊은 충격에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은명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걱정이 된 최 상궁은 내내 동동거리다가 전복죽을 들여와 은명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억지로라도 먹일 심산인 것이다.

“이러다가 또 앓아누우십니다. 딱 세 숟갈만 젓수시어요, 예?”

“……”

“마마.”

수저를 들라는 말에 멍하니 기척조차 보이지 않던 공주가 여태껏 피해왔던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던졌다.

“김서율, 그는 누구이더냐?”

“……병판, 김대원 대감의 차남이십니다.”

보모의 말을 듣자마자 은명은 눈물이 핑 돌았다. 김대원이 누구인가. 외조부를 죽이고 외가를 멸문시킨 후, 어머니마저 폐위시키려 했던 자였다. 혜빈을 내세워 왕실을 장악하고 스스로는 조정을 장악하여 왕권을 뒤흔드는 포악무도한 자였다.

[저를 믿으십니까?]

[제가 마마의 사람이라 어찌 속단하십니까?]

그때부터 이미 짐작을 했는지도 모른다. 짐작이 사실일까 두려워 철저히 진실을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고 말았다.

“흐흑.”

“마마…….”

“나는…… 나는 김서율이 정말 좋았다. 내 사람이라 믿었다. ……그도 옹주의 사람이었구나, 혜빈의 사람이었구나.”

어린 공주의 뜨거운 눈물이 가슴 아파 보모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마마……”

“함께하고 싶었다. ……많이 좋아했다. 내가 좋아했느니라……”

‘끊어내야 할 인연이었구나.’

‘……지워야할 사람이었구나.’

무정하고 야속한 하늘님이시어라

따뜻한 햇살로 나의 마음 살살 녹이시더니

차가운 달빛으로 나의 마음 꽁꽁 얼리시는구나

닿지도 않을 인연이었거늘 어이하여 그와 나를 만나게 하였을꼬

아득하고 서러운 이 마음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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