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2 장. 공주 은명 (2/21)

제 2 장. 공주 은명

쏴아아- 쏴아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짙푸른 자연이 탁 트이게 펼쳐진 깊은 산속 계곡. 수려한 기암괴석과 푸르른 녹음, 그 아래, 햇살과 바람과 구름과 자연을 머금고 굽이굽이 넘실거리는 청량한 계곡물까지.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기묘한 절경을 자아내는 그 곳에 한 여인과 한 여자아이가 나란히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은명은 실눈을 뜨고 옆에 계시는 어머니를 살짝 훔쳐보았다. 연미색 삼회장저고리에 풍성한 하늘빛 치마를 차려 입으신 모습이 여느 때처럼 기품 있고 정갈하였다. 깊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향기로운 내음이라도 맡는 듯 행복한 표정이시라니. 꽃향기라도 나는 것일까? 은명도 눈을 감고 후각을 곤두세워 보지만 맡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좋은 향이 나는 것입니까? 어디에서요?”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모두 떨쳐낸 후에 맡아 보아라. ……향이 느껴지느냐?”

“음…… 어머니에게서 좋은 향기가 납니다.”

“후훗.”

여인이 눈을 뜨고 내려다보자 은명이 배시시 웃으며 어머니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것 말고 또 다른 향은 없었느냐?”

“글쎄요.”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진 은명이 허공에 대고 킁킁거렸지만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이에 잔잔한 미소를 띠운 어머니는 듣기 좋은 음성으로 어린 딸을 차분히 일깨워주었다.

“땅에서, 바람에서, 나무에서, 풀잎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향이 피어오르고 있지 않느냐. 저기 저 흐르는 투명한 물에서조차 향기가 나는구나.”

은명은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콸콸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니라. 사람 또한 그렇단다. 자신만의 향이 없다 함은 그 사람의 영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은명이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어머니의 표정과 목소리가 어쩐지 처연하여 이상하게 은명의 마음을 울리고 있었다.

“은명아, 향기 있는 사람이 되어라. 아무런 빛깔도, 향기도 지니지 못한 무의미한 삶을 경계하여라. 다른 곳에서 얻으려 하지 말고 너 스스로 향기를 피워내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느니라.”

“예, 어머니.”

“여인이기에 포기하지 말고, 규방에 갇혀있다 하여 단념하지 말거라. 어여쁜 비단 옷을 입고 있어도, 남루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도, 언제나 그윽한 향을 뿜어내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느니라.”

은명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이렇게라도 하여 왠지 슬퍼 보이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어린 딸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어머니는 슬픈 기색을 모두 지우고 해님처럼 환하게 웃어주셨다. 그런데 지나치게 환히 웃은 것일까. 갑자기 어머니가 햇살처럼 눈이 부셨다. 그 눈부심을 참지 못한 은명이 눈을 살짝 감았다 뜨는데 눈앞에 계시던 어머니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어? 어머니!”

깜짝 놀란 은명이 이리 저리 뛰어다녀 봤지만 그 어디에도 어머니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결코 저를 혼자 놔둔 적이 없었기에 덜컥 무서워지기까지 하였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

.

.

“어머니…… 어머니……”

“아기씨, 공주 아기씨! 정신이 드시옵니까?”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자 눈가에 물기를 머금은 보모상궁의 얼굴이 들어왔다. 최 상궁도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지셔서 울고 있는 것일까. 일어나고 싶었지만 온몸이 화끈화끈 뜨거우면서도 천근만근 무거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시야는 왜 또 이리 흐릿해지는지. 감당할 수 없는 신열에 정신이 몽롱해진 은명은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려 하였는데.’

며칠 만에 기운을 차린 은명은 자리옷을 입은 채 금침 위에 앉아 바뀌어있는 방안의 풍경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이곳은 온양행궁, 어린 공주가 공식적으로 피접을 나와 있는 별궁이었다. 은명은 금상의 유일한 적녀로 일 년 반 전 승하하신 효경왕후의 소생이자 세자의 하나뿐인 동복누이였다.

약 보름 전, 온양에서 보령이 가깝다는 말을 주워들은 은명은 과거 어머니와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도승지의 본가를 떠올렸다.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열망에 떠날 차비를 하라, 명을 내렸으나 웃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어머니가 계실 땐 즉흥적으로 손을 잡고 길을 나서곤 했었는데 이제는 지척을 방문할 때조차 허락을 받아야 한다니. 화가 난 은명은 행궁이 뒤집어질 정도로 소란을 피웠다.

[한양까지 언제 파발을 띄워 허락을 받는단 말이냐? 나는 혼자라도 갈 것이니 오기 싫으면 너희들은 여기에 있거라!]

[최 상궁, 거기서 며칠만 바람을 쐬었다 오면 아픈 것이 싹 다 나을 것 같아 그러는 것이다. 우리 조용히 다녀오자, 응?]

안 그래도 혼자된 공주가 측은하던 차에 은명이 불쌍한 표정으로 품에 안겨 살살거리자 최 상궁도 깜빡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하여 웃전의 허락도 받지 않고 비밀리에 보령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는 것이지?”

“예, 마마. 꽤 여러 날 앓으셨사옵니다.”

“가야할 곳이 있었거늘. 날 거짓말쟁이로 알 것이다.”

“마마…….”

“다시는 못 만나겠지?”

‘아니야! 다 나으면 김서율, 그자를 찾아가 아팠다고 말해줘야지. 그때까지 나를 잊으면 아니 되는데…….’

물수건으로 손과 발을 닦아주던 최 상궁은 눈물이 차오른 공주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며칠 전, 갑자기 사라지셔서 얼마나 놀랐던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한 게 손발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다행히 비밀리에 풀어놓은 무사가 시전에서 공주 아기씨를 찾았기에 망정이지. 처음에는 차림이 하도 해괴망측해 알아보지도 못했었다고 한다. 자신 또한 공주의 몰골을 보고 얼마나 기함을 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약과에 불과했다. 목욕을 하며 시전에서 겪은 일들을 줄줄이 말하기 시작하시는데, 당장이라도 그 사악한 것의 목을 베어버리고, 자신도 목을 매어 제대로 모시지 못한 벌을 받고 싶었다.

‘대체 무엇을 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연유를 알아보려 요리조리 구슬려 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이제 아홉 살, 어린 나이임에도 한 번 다물면 아무리 용을 써도 절대로 입을 열지 않는 분이었다. 생전 처음 겪은 망측한 일로 놀라지는 않으셨을까 진맥을 받게 하고 싶었지만 그도 할 수 없었다. 공주께서 손사래를 치며 음식을 싸 놔라, 하사품을 내와라, 곱게 단장을 해 달라, 다른 일로 한창 들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결국 관아를 다녀오자마자 열이 펄펄 끓으며 정신을 놓아 버리고 만 것이다. 며칠 동안 승하하신 효경왕후 마마를 얼마나 찾으시던지. 코끝이 찡해진 최 상궁이 눈물을 참으며 작은 몸체 이곳저곳을 정성껏 닦아드리는데 나인 하나가 탕약을 들고 들어왔다.

공주는 쓰디 쓴 약을 잘 받아먹고 입가심으로 달달한 앵두정과도 오물오물 먹더니 그대로 보모의 무릎을 베고 편히 누웠다.

“답답하니 창을 열어주어.”

최 상궁이 금침을 끌어다 공주를 덮어주자 나인이 가까이에 자리한 창을 활짝 열어주었다. 탁 트인 파란 하늘이 한 눈에 들어와 기분이 한결 상쾌해진다. 은명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처음으로 꾼 어머니의 꿈을 곰곰이 새겨보았다. 꿈속의 대화는 실제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속리산에 올랐다 나눈 내용이었다. 물론 그때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산을 내려오긴 했었지만.

‘어머니, 이제 그곳에만 계시는 거여요? 보고 싶습니다.’

대군사저에서 군으로 태어났던 오라버니와 달리 은명은 아버지인 안영대군이 보위에 오른 뒤 궐이 아닌 사가에서 공주로 태어났다. 은명은 늘 피접을 다녔던 어머니, 중전 서씨를 따라 어린 시절을 궐 밖 사가에서 보냈다. 중전은 공주를 늘 옆에 끼고 있다가 대비전에서 은명이 보고 싶다는 기별이 오면 그제야 잠깐씩 궐로 들여보내곤 하였다. 때문에 궐에는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달 머무는 게 고작이었다. 부왕과는 처음부터 데면데면하였다. 아무리 오랜만에 용안을 뵙고 문후를 올려도 오가는 내용은 늘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내용이랄 것도 없었다.

“중전께서는 평안하시더냐?”

“예, 평안하시옵니다.”

“……”

그러면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은명은 이 시간이 가장 싫었다. 부왕께서는 매번 한두 가지 형식적인 질문을 던진 후에 그대로 앉혀놓고 한참동안 얼굴을 바라보고만 계셨다. 대충 순서를 알고 있는 은명은 시선을 금상의 가슴팍에 고정시키고 할마마마와 무엇을 할지 궁리를 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렇게 불편한 절차가 모두 끝나면 자경전으로 쪼르르 달려가 어리광을 피우며 할마마마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사가에서는 중전의 보호 아래, 궐에서는 대비의 보호 아래, 은명은 구김살 없이 무럭무럭 예쁘게만 자라났다. 끝없이 행복할 것만 같던 은명에게 갑자기 찾아온 일생일대의 불행은 어머니, 중전 서씨의 죽음이었다. 대비마마께서 돌아가신지 일 년 만에 꽃보다 곱고 아름다웠던 중전께서 불현듯 세상을 하직하신 것이다.

전날까지만 해도 은명과 놀아주실 정도로 건강했던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몸져누우시고 말았다. 시름시름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리까지 하셨다. 원인 모를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급기에 세자 내외가 황급히 병문안을 나오기에 이르렀다. 아들 내외를 보자 기운이 나셨는지 어머니는 그 다음 날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은명은 며칠 동안 어머니와 오라버니, 그리고 새언니에게 둘러싸여 기분 좋은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화목한 시간이 지나고 세자 내외가 환궁할 시간이 다가왔을 때였다.

“은명아, 궐에 다녀오지 않으련?”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말씀에 은명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라버니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긴 했지만 이제 막 기운을 차린 어머니의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아니어요, 소녀는 그냥 어머니 곁에 있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오라버니랑 빈궁마마랑 조금 더 함께 지내고 싶지 않느냐?”

“그러고는 싶지만…….”

“어미가 걱정되어 그러느냐? 이리 온.”

은명이 어머니의 품으로 쏙 안겨 들자 세자는 장난치듯 놀려댔다.

“은명이 아직도 아기로구나. 앞으로 유모 젖을 한참 더 먹어야 되겠다.”

“저는 이미 다 컸습니다.”

은명이 예쁜 미간을 찡그리며 정색을 하자 방 안에 있던 모든 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중전은 무릎에 앉힌 어린 딸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머리와 얼굴을 다정히 쓸어 주었다.

“네가 예뻐서 오라버니가 장난을 치는 것이다. 어미는 오늘 이렇게 세자와 빈궁, 그리고 공주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더 없이 기쁘고 행복하구나. ……선아.”

“예, 어마마마.”

“궐에 가면 어린 누이를 잘 돌봐주어야 한다. 궐에서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은명이를 잘 지켜주어야 하느니라.”

“심려치 마시옵소서. 잘 돌볼 것입니다.”

아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중전은 밝은 웃음을 띠고 오랫동안 자식들과 며느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세자 내외와 공주가 떠날 때에는 친히 대문 밖까지 나와 배웅을 하셨다. 덩에 오르기 전, 은명은 창백한 얼굴의 어머니를 돌아보며 신신당부하였다.

“어머니, 금방 올 터이니 적적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셔요.”

“그래, 아가야. 조심히 잘 다녀오너라.”

연과 덩이 조금씩 움직이자 은명은 창으로 고개를 쏙 내밀어 손을 흔들었고, 어머니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오래도록 지켜봐 주셨다. 그리고 그것이 두 모녀가 눈을 맞추고 서로를 마주보는 마지막이 되었다.

이틀 뒤, 아침에 일어나보니 궁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통곡소리에 은명은 등골이 다 섬뜩할 지경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눈시울이 붉어진 최 상궁이 들어서는데 아래위로 온통 새하얀 옷차림이었다. 할마마마가 돌아가셨을 때 상궁들이 입고 있던 상복이 떠올라 은명의 어린 가슴은 조마조마하였다. 대체 누가 돌아가셨단 말인가. 곧이어 눈앞에 엎어진 보모상궁은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공주마마, 중전마마께서 지난밤에…… 승하하셨습니다.”

어린 은명이 기억하는 가장 끔찍한 아침이었다.

언제나 겹겹이 쌓여있던 어머니와 할마마마의 보호막이 사라진 이후, 일곱 살 어린 공주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은 현실 세계는 충격과 경악, 절망, 그 자체였다. 궐 안 어디에도 은명이 설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전이 밖으로 피접을 다니는 사이, 내명부를 장악한 간택 후궁들의 위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 중에서도 중전을 대신해 내명부를 이끌던 혜빈 김씨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혜빈의 소생인 화국 옹주를 대하는 아바마마의 따스하기 이를 데 없는 다정한 태도였다. 놀랍게도 금상께서는 어여쁜 옹주의 손을 잡고 종종 산책에 나서곤 하셨다.

‘늘 차가우셨던 아바마마께 저리도 온화하고 다정한 면이 있었구나.’

허나 그 따스함은 오로지 옹주에게로만 향해 있었기에 은명은 그 모습을 멀리서 훔쳐보기만 하는 신세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삭여내는 일 또한 오롯이 어린 공주 혼자만의 몫이었다.

어느 날 나인들끼리 속닥이는 대화를 통해 혜빈이 왜 그토록 기세가 등등한 것인지, 어머니께서는 왜 그토록 궐 밖으로 나돌아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선대왕께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갑자기 승하하시어 보위가 동복아우인 금상께로 넘어왔다. 그런데 즉위식을 앞두고 커다란 역모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에 출중한 무관이었던 은명의 외조부, 서한철 대감과 선대왕의 충신이었던 김대원 대감이 진압에 나섰다. 각각 전후방을 맡아 역도들을 잡아들이는 사이, 궐에서는 무사히 즉위식을 끝마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막 보위에 올라 힘들었던 금상이 장인이었던 경산부원군을 가까이 두고 전적으로 의지했던 것이다. 이미 권세를 쥐고 있던 선왕의 충신들에게는 심히 고까운 일이었으리라.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저들은 부원군을 철저히 짓밟아버렸다. 그것도 금상을 해하고 어린 세자를 앞세워 세도정치를 하려 했다는 엄청난 죄명 하에. 강직하기로 이름 난 부원군이었기에 이를 믿지 않는 자들도 많았으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증좌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끝까지 죄를 부인하던 외조부는 모진 고신 끝에 옥사(獄死)하였고, 중전의 친정은 하루아침에 멸문이 되었다.

경산부원군의 사후, 병권과 조정을 한 손에 틀어 쥔 김대원과 그의 세력은 뒤이어 왕비의 폐위를 거세게 주청하였다. 그러나 이는 세자의 안위와 직결된 일, 왕실에서 받아들일 리 없었다. 뜻을 이루지 못한 권신들은 차선책으로 제 여식들을 간택 후궁으로 들여 달라 요구해왔다. 타협의 형식으로 청이 가납되었고, 세도가의 여식들이 줄줄이 입궁하기에 이르렀다. 병조판서 김대원 또한 자신의 가문에서 처녀를 선별해 궐로 들여보냈는데, 그가 바로 혜빈이었다.

모진 일을 당한 중전은 심병을 앓다 피접을 핑계 삼아 궐 밖으로 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년 뒤, 왕비의 폐위문제는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친정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관노비가 된 남동생 부부의 뒤를 봐주다 발각이 된 것이다. 이때 중전을 살린 이가 은명이었다. 폐위문제로 조정이 한창 시끄러울 때 중전의 회임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임금은 이를 빌미로 세자가 보위에 오른 다음까지 권신들의 후일을 보장해주고, 중전을 궐 밖 사가인 화경궁에 거처하도록 함으로써 폐위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그로부터 아홉 달 뒤, 혜빈이 옹주를 출산한지 두 달 만에 중전께서는 공주 은명을 출산하였다. 당시 여덟이었던 세자는 삼칠일이 지나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가 누이를 흐뭇한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어머니가 아기를 안겨주었을 때에도 무서워하기는커녕 얌전히 품에 안아 한참을 토닥토닥 얼러주었다.

“아기가 어여쁘냐?”

“예, 어마마마. 참으로 조그맣고 어여쁩니다. 게다가 보통 아기가 아니질 않습니까? 어마마마와 저를 살린 보석 같은 아이입니다.”

중전은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아기와 어린 세자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였다.

은명은 외숙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었다. 사가에서 어머니는 가마를 멈추게 하고 장옷을 깊이 뒤집어쓴 채 어느 관아의 노비 내외를 멀리서 지켜보며 눈시울을 붉히곤 하셨다. 은명이 여섯 살 되던 해, 어찌된 영문인지 그 노비 내외가 삼남매를 데리고 화경궁으로 들어왔다. 은명은 비슷한 또래의 그 아이들과 함께 놀았고, 노비 내외는 멀리서 슬픈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았다.

어느 밤, 무서운 꿈을 꾼 은명은 깊이 잠든 보모를 놔두고 안채를 찾았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노비 내외가 나누는 엄청난 내용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어린 딸이 밖에서 듣고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된 어머니가 어찌나 성을 내시던지. 은명은 생전 처음으로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나야 했다.

외숙에 관해 절대 발설치 말라는 어머니의 신신당부를 은명은 놀라울 만큼 철저히 지켜내었다. 이는 중전과 은명, 그리고 지밀상궁인 김 상궁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되었다. 공주와 외가 식구들의 관계는 나날이 끈끈해졌지만 그럴수록 은명은 그 상황을 더욱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 나라의 왕비인데 그 아우인 외숙은 어찌하여 노비로 살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인들의 대화로 모든 상황을 알게 된 은명은 기가 팍 죽어버렸다.

‘하여 부왕께서 나를 싫어하시는 게로구나.’

혜빈전 궁녀들은 상궁부터 나인에 이르기까지 그 도도함이 하늘에 닿아있었다. 중전의 사후, 그들은 궁 안의 다른 궁녀들을 모아놓고 혜빈께서 새로이 중전에 오르실 거라며 으스대기도 했었다.

“이제 우리 혜빈마마께서 내전의 주인이 되실 거야.”

“하지만 후궁마마께서는 중전마마에 오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걸.”

“병판 대감께서 계시잖아. 병판께서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한 아무도 혜빈께 대적할 수는 없어.”

“그럼 이제 옹주마마께서는 공주마마가 되시고, 정한군께서는 대군마마가 되시는 거네.”

“공주마마가 정말 안 되셨어. 전하께서는 옹주마마만 예뻐하시고 저하께서는 하루 종일 바쁘시니. 옹주께서 정말 공주마마가 되신다면 지금의 공주마마는 천덕꾸러기가 되실 거야.”

천덕꾸러기란 말에 어린 은명은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서럽고 또 서러웠다.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저들을 모조리 잡아다 따끔하게 혼을 내야 했지만 혜빈과 옹주에 관해서라면 이상하게 기부터 죽었다. 해서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힘없이 처소로 돌아간 은명은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으로 오랫동안 끙끙 앓다가 피접을 나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외숙께서는 어디에 계신 걸까? 하루 빨리 찾아내어 숨겨드려야 하는데.’

파란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은명은 외숙 일가를 떠올리자 가슴이 찌르르 아파왔다. 피접이 결정되면서 외숙 일가를 함께 데려오려 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서거 이후 외숙의 정체가 발각되어 모두 잡혀갔다는 소식만 겨우 전해들을 수 있었다.

최 상궁을 졸라 이리 저리 알아보긴 했지만 그들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그러다 며칠 전, 보령에 들렀다 고을 관아에 노비들이 잔뜩 온다는 종복들의 수군거림에 심장이 얼마나 고동쳤는지 모른다. 혹시라도 외숙 일가가 그 안에 있을까 조바심이 났었다. 하여 도승지 댁 노비들이 내다 버린 헌 옷을 주워 입고 몰래 빠져나갔던 것이다.

예전에는 외가에 대해 쑥덕이는 소리만 들으면 기가 팍 죽었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외숙 같이 착하신 분이 죄를 지었을 리 없어. 외조부는 분명 억울한 누명을 쓰셨을 테지.’

며칠 전, 누추한 옷을 입었다 하여 반지를 빼앗고 자신을 도둑으로 몰았던 정씨 여인이 떠올랐다. 뻔뻔하게 물건을 빼앗고도 오히려 펄펄 뛰며 화를 냈던 여인. 멱살이 잡혔을 땐 너무 무서워 그 앞에서 울음을 터트릴 뻔하였다. 그 여인도 알고 있었다. 은명이 말로는 지지 않고 끝까지 대들었지만 두 눈에는 두려움을 그득히 담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겁을 먹을수록 그 여인은 점점 더 포악한 얼굴을 하고 나를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였어. 이대로 도망만 치다간 나는 진짜 겁쟁이가 되고 말거야. 아아, 어머니께서 걱정이 되어 꿈에 찾아오신 게로구나.’

‘더 이상 주눅 들지 않아. 당당해질 거야. 다시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도망치지 않겠어.’

꽤 오랜 시간 멍하니 하늘을 내다보던 은명은 무언가 결심을 굳힌 듯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았다. 그런 갑작스러운 행동이 걱정스러웠는지 최 상궁은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아니, 이제 궐로 돌아가야겠다.”

은명의 얼굴에서 결연함 같은 게 묻어 나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