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제 1 장. 푸른달의 첫 만남 (1/21)

제 1 장. 푸른달의 첫 만남

세상이 온통 연둣빛으로 물든 푸른달 초순. 시원스레 반듯한 외모에 호리호리한 체구의 한 소년이 건장한 무사의 호위를 받으며 충청도의 어느 고을에 첫 발을 내딛었다. 아직 관례도 치르지 않았을 앳된 얼굴이지만 소년은 이미 상투를 틀어 갓을 쓰고, 흰색 도포에 쪽빛 쾌자를 말끔히 차려 입은 모습이었다. 그 외관이 어찌나 생소하면서도 훤칠한지 지나던 고을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흘끔흘끔 그 선비를 훔쳐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체 어느 댁 도련님이랴? 이 고을 분은 아닌 거 같은디.”

“저 귀티 나는 얼굴 좀 봐! 시상에, 강 진사 댁 애기씨보다 훨 곱구먼!”

“기여? 오메…… 몇 년 만 지나면 여인네들이 밤잠도 못 자고 설쳐대겄어!”

소곤소곤 귀엣말을 주고받다 연신 웃음을 터트리는 부녀자들의 속살거림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달달한 꽃향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따스한 봄날, 달빛처럼 서늘하면서도 아름다운 외모의 어린 선비 하나가 순진한 아낙들의 마음을 살랑살랑 간질이고 있는 것이라. 구릿빛 피부에 늠름한 체격의 소유자 치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마저 느끼게 하는 호위무사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어린 상전을 바라보는 눈길엔 온화함과 뿌듯함이 서려있었다.

‘후후, 우리 도련님이 이번에 새로 부임한 현감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 다들 놀라 까무러치겠구나!’

외모뿐 아니라 그 능력은 또 얼마나 출중한지. 그의 상전은 얼마 전, 남들이 몇 십 년씩 준비한다는 대과에서 열넷, 어린 나이로 장원급제한 도성의 유명 인사였다. 종전의 최연소 장원급제자 기록을 하루아침에 갈아치운 타고난 선재(仙才)인 것이다. 단번에 종육품 관직을 제수 받은 그는 당연히 남들보다 진급 또한 빠를 터. 장차 나라의 동량이 될 인재 중의 인재라는 상감마마의 칭찬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 저건 뭐지?”

갑작스런 물음에 상념에 빠져있던 치경이 정신을 차려보니, 어린 상전은 이미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었다. 평소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소년의 성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어 치경은 미소를 띠우며 그 뒤를 따른다.

작은 시전이 형성되어 있는 고을의 번화가. 물건 값을 흥정하는데 정신이 없어야 할 장안의 주민들이 길가 양쪽 끝으로 붙어 서서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어떤 행렬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한데 모인 복잡한 상황인지라 치경이 빠르게 인파를 헤치고 앞서 나가 상황을 알아보고 온다.

“노비들입니다. 이번 변란 때 참수된 자들의 일족과 그 사노(私奴)들로 보입니다.”

“그렇군.”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에서 크게 세발 짝쯤 물러나 있던 서율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 지긋지긋한 피바람은 과연 언제쯤이면 멈출는지. 저도 모르게 연상된 고통스러운 기억이 힘겨워 억지로 머릿속을 비워내는데 가까이서 또랑또랑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저들은 모두 이번에 새로 관노비가 된 자들이냐?”

동시에 아래쪽을 내려다본 서율과 치경은 잠시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착각에 빠졌다. 기껏해야 서율의 가슴팍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조그만 계집아이가 꼬질꼬질한 무명옷을 걸쳐 입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척 봐도 사대부인 서율과 건장한 어른인 치경에게 저 아이가 반말지거리를 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밤톨만 한 저 아이, 두 사람의 순간적인 착각을 단숨에 날려버린다.

“뭘 그리 멍청하게 보고만 있느냐? 내가 지금 묻고 있다!”

“근데, 이 조그만 녀석이……”

“무엄하구나!”

치경이 화를 참지 못하고 꿀밤을 한 대 먹이려 하자 아이가 흠칫 놀라면서도 꿋꿋이 버티고 서서 호통을 쳤다. 아이의 잔망스러움에 멈칫한 것도 잠시, 이내 코웃음을 치며 다시 쥐어박으려는 찰나,

“그만. 그만 두게.”

옆에서 보고 있던 서율이 끼어들었다.

“지금 버릇을 고쳐주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

치경의 속 깊은 뜻을 서율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상대가 그들이 아닌 거친 성정의 양반이었다면 지금쯤 저 아이는 끔찍한 매질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서율은 눈앞의 여아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티 없이 깨끗하고 뽀얀 얼굴에 그림같이 자리 한 먹빛의 눈동자. 그 큰 눈망울은 맑고도 투명해 세상사 어려움이란 요만큼도 겪어보지 않은 듯싶었다. 게다가 말투와 표정,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고대광실의 금자둥이마냥 어찌나 도도하고 당당한지, 걸치고 있는 저 남루한 옷이 외려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다 또 가만 보니 저 아이, 어디서 많이 본 듯 매우 낯이 익은 인상이었다.

‘대체 이 친숙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서율의 예리한 눈빛이 특유의 호기심으로 반짝이는데 멀뚱히 올려다보던 계집아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발끈하였다.

“뭘 그리 보고만 있는 것이야, 어서 답을 하여라.”

“저들 중엔 다른 관할 지역의 노비였던 자들도 있을 것이다.”

“정말?”

원하는 답을 들었는지 아이가 반색하며 물었다.

“그래, 내가 원하는 답을 주었으니 너도 협조 좀 하거라.”

“그게 무슨 소리냐?”

아이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서율은 아이의 작은 손을 낚아채어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제껏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을 희고 보드라운 손이었다,

‘최근 몰락한 사대부의 여식이라.’

서율이 나름 신분을 결론지었을 때 아이가 손을 거칠게 뿌리치더니 야무지게 외쳤다.

“이제 보니 실성을 한 자로구나!”

“보자보자 하니까 이 쥐방울만한 녀석이!”

“그만!”

서율은 저를 암팡지게 노려보는 아이와 그런 아이에게 씩씩대며 다가서는 치경 사이로 쏙 끼어들며 외쳤다. 이미 인내심이 바닥을 보인 치경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분통을 터트리며 호소했다.

“도련님!”

“흠흠.”

헛기침으로 치경의 말을 가로막은 서율은 양쪽에서 뿜어대는 화기를 느끼며 유유자적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아이와 충성심이 지극한 치경 사이에 끼어 고을에 들어서자마자 어이없는 피로감이 몰려온 것이다. 아래를 흘끔 내려다보니 앵돌아진 아이는 아직도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허락도 없이 내 몸에 손을 대다니.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행렬이 바로 코앞에 당도했는데 보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는 것이냐?”

“어?”

아이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냉큼 뒤를 돌아보았다. 노비행렬은 정말 코밑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꼭 보고 싶었던 것인지 방금 전까지 노발대발 하던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구경꾼들 틈으로 쪼르르 달려가 버린다.

“후훗.”

따끔하게 혼을 낼 수도, 무한정 받아 줄 수도 없는 아이를 순식간에 떼어버린 사실이 자못 흡족하였다. 이렇게 후련할 수가. 서율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우며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고을을 한번 둘러보려면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몇 발짝 나아갔을 때, 뒤에서 누군가 옷소매를 잡아당겨 돌아보고는 뜨악하고 말았다. 떨쳐낸 줄 알았던 그 아이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의 입에서 나온 당돌한 말은 아주 가관이었다.

“그대, 나를 업어 주어야겠다. 나를 번쩍 업거라, 응?”

“뭐라?”

이제껏 업힌 적은 많았으나 반대로 무언가를 등에 짊어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그였다. 서율이 노골적으로 기막혀하자 아이는 난처한 얼굴로 북적이는 인파에 시선을 던진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어른들이 지나치게 크고 단단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딱한 마음에 치경에게 맡기려는데 아이가 기겁을 하여 그의 소매를 덥석 잡아당긴다.

“무엇이냐?”

“나는 그대에게 업히겠다. 그대가 업어다오.”

아이가 주춤주춤 치경에게 등을 돌리며 애가 타는 눈으로 서율을 올려다본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은데 아이의 오밀조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천둥벌거숭이마냥 굴었지만 아직은 어린 나이인지라 거친 외모에 무뚝뚝한 무사가 무서웠던 것이다.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치경은 거부당했다 느꼈는지 맹렬히 쏘아보고 있었다. 이에 더 겁을 먹은 아이는 서율의 소매를 부여잡고 거의 애원조로 부탁을 하였다.

“이러다 행렬을 놓칠 것이다. 나는 저들을 꼭 보아야 한다. 날 도와다오!”

“도련님, 소인이 데리고 다녀오겠습니다.”

“자네는 가서 길이나 열어주게.”

눈물이 차오를 것 같은 아이의 새까만 눈망울이 마음을 두드린 탓이었을까. 서율은 한숨을 작게 내쉬더니 아이 앞에 순순히 등을 내밀어 주었다. 또래들보다 키가 큰 편인 그는 아이를 가뿐히 업어 올려 성큼성큼 나아갔고, 치경은 수많은 인파를 간단히 헤치고 길을 열어주었다. 갑자기 끼어든 그들이 못마땅해 눈을 부라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육척이 훨씬 넘는 장신의 치경을 보고는 금세 움츠러들고 만다. 어느새 그들은 맨 앞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노비들의 행렬은 길지 않았다. 그들은 관아로 가서 하루, 이틀 정도 묵었다 이 고을에 남게 될 몇 명만 빼고는 또다시 어딘가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서율은 아이가 누군가를 절실히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행렬을 유심히 살피는 아이의 눈에는 신기한 구경을 한다는 일말의 유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혹시나 하는 어떠한 기대감으로, 지칠 대로 지친 관노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을 뿐.

‘멸문을 당한 가문의 여식인 건가…….’

피곤에 절어있는 노비들과 자신의 목을 꼭 끌어안고 최대한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있는 아이. 서율은 그 둘을 번갈아 보며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은은히 풍겨오는 운치 있는 향기는 아이에게서 오는 것일까. 어쩌면, 이렇게 숨을 쉬고 살아있음에 그나마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도. 등 뒤로 전해오는 아이의 말랑말랑한 감촉과 따스한 체온이 유난히도 포근하고 안심되는 순간이었다.

“고마웠다. 너희들의 도움은 절대 잊지 않으마.”

서율의 등에서 내려온 아이는 감사인사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에게 하대를 하였다. 그렇지만 치경은 더 이상 아이를 나무라지 않는다. 그저 애처로운 듯 흐릿한 미소를 걸치고 바라보기만 할 뿐.

“누구를 찾고 있는 것이냐?”

“……”

“혹, 가족을 찾는 것이냐?

“……”

서율의 안타까운 물음에 아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지금 관아에 살고 있느냐?”

“아니다.”

“그럼, 어디에 살고 있는 것이냐?”

“……”

아이는 또다시 입을 닫고 눈만 끔벅끔벅 거렸다. 무엇이든 직선적으로 답하되, 답하기 곤란한 질문엔 둘러대기보다 차라리 입을 다무는 성정인 것이다.

“알았다. 네가 답하고 싶지 않다면 나도 더 이상은 묻지 않으마. 하지만……”

꼬르륵-. 서율이 캐묻는 것을 그만두고 앞으로의 신변안전을 위해 잔소리를 조금 하려는 찰나, 아이의 뱃속에서 현재의 공복 상태를 알리는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 울려 퍼진 소리가 민망했는지 아이는 부끄러워하며 양팔로 작은 배를 얼른 감싸 안는다. 앙증맞은 몸에 비해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하던지.

서율과 치경은 거의 웃음보가 터질 뻔했지만 아이의 왼손 중지에서 화려하게 반짝이는 은빛 반지를 보는 순간 웃음기는 꿀꺽 사라져버렸다. 언뜻 보기에도 영롱한 보석이 박힌 진귀한 물건이었다. 저리 귀한 반지를 어떻게 지니고 있는 것일까. 서율은 치경과 시선을 교환한 뒤 반지와 아이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갑자기 아이의 정체가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뜨끈하면서도 고소한 국물을 한 모금 삼키자 따뜻한 기운이 몸 전체로 빠르게 번져나간다. 아이를 데리고 주막에 들어선 서율과 치경은 구수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할 때쯤에야 자신들도 꽤 허기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한양에서 충청도까지 지름길을 이용해 쉬지 않고 달려온 여정이었다. 누적된 피로감으로 온몸이 노곤하게 내려앉는 느낌이었으나 뿌연 고기국물이 지쳐버린 그들의 원기를 어느 정도 회복시켜 주었다. 수저를 뜨던 서율은 어느 순간 아이가 음식에 전혀 입을 대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수저를 쥐고 그저 건성건성 국밥을 휘젓고만 있는 저 모습. 분명 배가 고플 터인데 아이는 음식이 아닌 주막의 풍경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이냐?”

크고 새까만 눈이 요리조리 움직이기만 할 뿐 도통 먹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서율이 입을 열었다.

“음…… 아직 먹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왜 안 먹는 것이냐? 따로 먹고 싶은 게 있는 게야?”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단지…… 조금 이상할 뿐이다.”

“이상하다?”

“이렇게 한 상에서 여러 명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게 너희들은 이상하지도 않느냐? 그리고 이건 숭늉도 식혜도 아닌 것이 밥을 국물에 담가갔고 나오다니.”

아이의 대답에 서율의 눈매가 가늘어지긴 했으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치경이 나섰다.

“한번 먹어보기나 해라. 우리 도련님께서도 처음엔 너처럼 이상해 하셨지만 이제는 꽤 즐기시는 편이다. 자, 어서.”

뚝뚝한 치경이 다정히 어르며 권하자 아이는 마지못해 한 수저 뜨더니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 맛을 보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는지 아이가 연달아 수저질을 시작했다. 배가 고픈데 뭐든 맛있지 않으랴. 치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그러나 서율은 뭐가 그리 이상한지 아예 수저를 내려놓은 채 조심조심 먹고 있는 아이의 모습만 묵묵히 관찰하고 있었다.

한 식경 후, 값을 치르고 주막을 나선 서율과 치경은 아이의 엉뚱한 행동에 또다시 식겁하고 말았다. 아이가 밥값을 내겠다며 손가락에 끼고 있던 귀한 반지를 한 치의 망설임도 빼서 내밀었기 때문이다.

“받거라, 내가 공으로 얻어먹을 순 없지.”

서율은 말없이 반지를 받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은빛 반지를 빙 둘러싸고 노란빛 호박이 정교한 국화문양을 이루어 박혀있는 게 고아하고 멋스러웠다. 게다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깨알보다 작은 하얀 보석들도 전체적으로 반짝반짝 눈송이처럼 박혀있어 어찌나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지.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반지가 절대로 아니었다. 이 정도 반지를 아이에게 끼울 수 있는 집안이라면 분명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 나라 최고의 명문거족 중 하나일 터. 꼬맹이, 너는 누구인 것이냐? 서율의 눈동자가 간만에 호기심과 흥미로움으로 찰랑찰랑 거린다.

“참으로 진귀한 반지구나. 이건 어디에서 난 게냐?”

“어머니께 받은 것이다.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라고.”

품위와 장수를 상징하는 국화꽃이라. 반지의 안쪽을 살펴보니 과연 아이의 말대로 건강하다의 뜻을 가진 ‘健(건)’자와 한 송이의 국화꽃이 운치 있게 새겨져 있었다. 꼼꼼히 살펴본 서율은 아이의 왼손을 잡아 올려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를 도로 끼워주었다. 뜻밖이었는지 아이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린다.

“국밥 한 그릇에 비해 지나치게 과한 물건이구나. 처음부터 네게 값을 받을 생각이 없었으니 그냥 가지고 있거라.”

“그럼, 내일 사람을 보내 식사 값과 사례를 두둑이 챙겨 주마. 어디에 살고 있느냐?”

마치 최고 권력자의 영애와도 같은 깜찍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서율은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이 고을 관아에서 지낼 것이다.”

“관아?”

의외의 답이었는지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래, 나는 오늘 부로 이 고을에 새로 부임한 현감이다.”

“정말이냐? 너처럼 어린 현감은 내가 본 적이 없거늘.”

그새 적응이 되어버린 것일까, 아이의 시먹은 말투에 이젠 웃음부터 나온다.

“후후, 네가 본적이 없다하여 무조건 그르다 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다. 세상의 모든 일을 전부 알고 있다, 어찌 장담할 수 있느냐?”

“좋다, 내가 내일 직접 관아로 가서 네가 현감이 맞는지 확인할 것이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내게 거짓을 고한 대가로 크게 경을 치게 될 것이야.”

“그래, 기대하고 있으마. 허나 형편이 여의치 않다면 굳이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하하.”

서율의 진지한 당부에 아이가 처음으로 까르르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해맑고 산뜻한지 지켜보는 서율과 치경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졌다.

“내 말이 그리도 재미있느냐?”

“아니다, 나의 형편이 어렵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럼, 내일 보자.”

아이는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하더니 상대의 말은 듣지도 않고 나풀나풀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가버리는 것이냐? 얼결에 인사할 기회를 놓쳐버린 서율은 아이의 등에 대고 황급히 외쳤다.

“집까지 바래다주랴?”

“되었다, 내가 잘 봐두었느니라!”

아이는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웃음기가 묻어있는 짧은 말만 남긴 채 모퉁이를 돌아 금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제멋대로인 아이였다.

“저리 웃으니 참으로 어여쁩니다. 화를 당한 집안의 아이일까요?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게 얼마 전까지 귀하게만 살았던 아이 같습니다.”

“글쎄…….”

서율의 눈가에 모호한 기색이 역력히 서려 있었다.

그 무엇도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서율은 앞으로 다스리게 될 고을을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었지만 그저 대충대충 훑어보기만 할 뿐, 마음은 이미 콩밭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반 시진 전 보았던 그 아이가 자꾸만 눈앞에 감실감실 거리는 게 궁금증이 솟아올라 거의 미칠 지경인 것이다. 평소 사람들의 신분이나 집안 따위에 무심했던 그였다. 한데 아까 만난 그 아이는 왜 이리도 호기심에 불을 지피게 하는지.

처음에는 그도 몰락한 대가댁 여식이겠거니 치부했었다. 그러나 모진 일을 당한 아이 치고 그 맑은 눈에 티끌만큼의 한도 서려있지 않았다. 뿐이랴,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귀한 반지를 버젓이 지니고 있었고, 식사를 할 때 독상을 받는 버릇이 배어 있었으며 저보다 나이가 높은 사대부에게 하대를 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이 새로 부임한 이 고을 현감이라 밝혔음에도 주눅은커녕 거침없이 하대를 하던 그 위풍당당함이란. 저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이 별로 없었던 아이인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이어지는 명문가의 여식이라 보기엔 그 차림새가 노비나 시비아이와 같았고, 관노비들을 바라보는 눈빛 또한 심상치가 않았다.

‘대관절 어디에서 튀어나온 아이란 말인가.’

어느새 고을 한 바퀴를 빙 돌아 노비행렬이 있었던 바로 그 시전에 당도했지만 궁금증을 풀지 못한 서율은 여전히 그 아이를 떠올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꼬맹이가 어찌나 안차게 굴었는지 내내 황당해만 하다가 이름을 묻는 것조차 깜빡하고 말았다. 아는 거라곤 얼굴밖에 없으니 내일 그 아이가 나타나지 않으면 궁금증은 영원히 해소되지 못할 것이다.

‘순식간에 나타났다 제멋대로 사라지다니!’

서율은 이제 그 콩알만 한 아이에게 슬금슬금 약이 오르고 있었다.

“이리 다오. 그건 내 꺼다, 내 꺼란 말이다!”

비단을 취급하는 선전(縇廛) 앞. 은명은 눈앞의 여인에게서 반지를 돌려받고자 까치발을 들고 허공 위로 팔을 뻗어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얄미운 그 여인, 반지를 쥐고 있는 왼쪽 팔을 번쩍 치켜들더니 다른 손으로 은명을 사정없이 밀쳐버린다.

“아야!”

“천것 주제에 말본새 하고는!”

여인에게 떠밀린 은명은 흙바닥 위로 짐짝마냥 고꾸라졌다. 바닥에 부딪힌 무릎이 제법 따끔거렸지만 정신적 충격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천것이라니? 은명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얼이 빠져 일어나지도 못하고 여인을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하였다.

‘천것이라고? 내가? ……어찌 그런 말을!’

여인은 은명이 닿았던 곳이 더럽다는 듯 손으로 툭툭 털어내며 혐오스러운 표정이었다. 비단 옷을 차려 입고 고운 빛깔의 천들을 구경 하던 다른 사람들 역시 은명을 보는 눈에 멸시와 경멸이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왜?’

하늘빛 비단 천을 보는 순간, 어머니가 즐겨 입으시던 치마가 떠올라 잠시 서서 만져본 것뿐이다. 한데 느닷없이 웬 여인이 나타나 무지막지한 힘으로 손에서 반지를 빼가더니 천것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런 누더기나 주워 입는 주제에 감히 우리 아이 물건에 손을 대? 이런 벼락을 맞을 년 같으니라고!”

은명은 그제야 사람들이 왜 저토록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 그 연유를 알 것 같았다. 몸에 걸치고 있는 해진 무명옷. 저들은 단지 허름한 겉모습만 보고 죄 없는 사람을 천하다 부르며 도둑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눈앞이 하얘질 만큼 울분이 솟구친 은명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여인을 힘껏 쏘아보았다. 여인은 기가 찼는지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는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 도둑년이 어디서 감히 눈을 부라려!”

“그 입 다물라. 네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아이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자 눈앞의 여인은 물론 옆에서 구경 중이던 사람들 또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반상의 법도가 지엄하거늘 딱 봐도 천것이 분명한 계집아이가 감히 양가 댁 부인을 상대로 하극상을 일으키다니. 그러거나 말거나 은명은 억울함과 분함을 참지 못해 발까지 동동 구르며 기를 쓰고 고함을 질렀다.

“누구더러 천하다 하느냐, 누구더러 도둑이라 하느냐? 내게서 반지를 빼앗아간 건 너다. 너야말로 도둑이란 말이다!”

“뭐, 뭐야?”

“이 금수만도 못한 것. 비단 옷을 걸치고 도둑질이나 하는 못되고, 천한 것!”

“이, 이년이……”

금방이라도 김이 모락모락 날 것처럼 얼굴이 시뻘게진 여인이 은명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틀어쥐고 한쪽 팔을 높이 치켜 올렸다. 때린다!

“아악!”

은명은 맥없이 멱살을 잡히면서도 움츠러들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누구든 도와달라는, 힘없는 아이가 할 수 있는 나름의 구조 요청이었다.

‘아무도 너를 돕지 않는다!’

확신에 찬 여인이 비명을 지르는 아이의 뺨을 내리치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여인의 팔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는 사이, 한 선비가 여인의 손에서 아이를 빼내어 그의 등 뒤로 재빨리 감추어 버렸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찌 된 것일까. 잠시 혼이 나갔던 은명이 고개를 살짝 내밀어보니 아까 만났던 그 무사가 여인의 팔을 놓아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자는! 은명이 그대로 위를 올려다보자 자신을 업어주었던 그 번듯한 이목구비의 어린 선비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으냐?”

팽팽히 날 서있던 전신의 신경이 걱정스러운 말 한마디에 탕, 끊겨 버린다. 천군만마를 얻었다 한들 이보다 더 든든할 수 있을까. 깊은 안도감에 눈동자가 따끔거리는 은명은 그대로 선비의 등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심호흡부터 하였다. 심장이 터져버릴 듯 미친 듯이 콩닥거렸기 때문이다.

서율은 아이의 조막만 한 손이 자신의 옷을 꼭 움켜쥐는 것을 보자 마음이 짠해왔다. 더 빨리 끼어들었어야 했는데. 시전을 둘러보다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아이가 무언가를 돌려달라며 필사적으로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초반부터 상황을 지켜본 서율은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느라 시간을 끌었던 게 못내 후회스럽다.

“이게 무슨 짓이오? ……이것 보시오!”

난데없이 봉변을 당했다 생각한 여인은 무사의 상전처럼 보이는 소년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나 서율은 아이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여인을 돌아보았다.

“반지를 보여주십시오.”

“이것은 내 딸아이의 것이요.”

여인과 조금 거리를 두고 여덟,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여아가 몸종의 보호를 받으며 서 있는 게 보였다.

“이 아이 또한 반지가 자기 것이라 주장하고 있으니 일단은 보여 주십시오.”

“지금 저 천것의 말을 믿는다는 것이오?”

여인은 순순히 내놓을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똑같이 해줄 수밖에. 상전의 신호를 받은 치경은 눈 깜짝할 사이 여인의 손에서 반지를 낚아채 서율에게 가져다주었다.

“이, 이 무슨 무례한 짓인가? 남의 것을 무력으로 빼앗아가다니!”

문제의 반지가 반 시진 전, 밥값이라며 아이가 빼주었던 그 반지임을 확인한 서율은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반지가 정녕 따님의 것입니까?”

“지금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요? 정 못 믿겠으면 당장 관아로 가십시다. 내 오늘 저 요망한 년의 주리를 틀고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놓겠소!”

“그리 하시지요. 단, 반지가 이 아이 것임이 확인된다면 부인은 절도죄와 무고죄로 중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반가의 여인이 재물에 눈이 어두워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니! 화가 난 서율은 끝장을 볼 태세로 여인과 맞서는데 가까이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아에 꼭 가야 하느냐?”

슬쩍 내려다보니 아이가 붉어진 눈에 걱정과 불안감을 그득히 담고 있었다. 관아로 가게 되면 기록이 남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터. 이는 신분이 불분명한 아이에게 크게 불리할 수 있었다. 결국 이쯤에서 마무리를 해야 한다 결론 내린 서율은 여인을 향해 건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반 시진 전, 이 아이 역시 이와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찌 저런……”

“또한, 아이의 반지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가차 없이 말머리를 잘리자 눈살을 찌푸렸던 여인은 반지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말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다.

“따님의 반지에 특별한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까?”

“……그런 건 없소.”

“이 아이의 반지 안쪽에는 건강하다는 뜻의 ‘건’자와 국화 한 송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럼, 확인을 해보지요.”

서율은 자신이 먼저 확인한 후 여인의 코앞에 가져가 척하니 보여주었다. 반지를 들여다본 여인은 얼굴이 사과보다 더 빨갛게 달아올랐고, 이를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일제히 저희들끼리 쑥덕거렸다.

“부인께서는 생사람을 잡으셨습니다.”

“착각을…… 하였소. 우리 아이 거랑 너무 똑같아서.”

“그러셨겠지요. 확인을 마쳤으니 이만 저 아이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주위를 의식하던 여인은 방자하게 대들던 계집아이가 눈에 들어오자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기다리시오! 저년은 반가의 여인인 나에게 하대를 하고 욕을 보였소. 절도를 했다는 오해는 풀렸을지 몰라도 양반을 모독한 죄는 결코 씻을 수 없을 것이오. 내 저년을 당장 관아로 끌고 가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야겠소!”

아이를 데려가려던 서율은 여인의 몰염치함에 탄식이 터져 나왔다. 조용히 끝내고 싶었건만 왜 저렇게 화를 자초하고 있는 것인지. 어언지간 여인에게 바투 다가간 서율은 두 사람만 들릴 정도로 낮고 사늘한 음성으로 경고를 날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냉기가 뚝뚝 흐르는 어린 선비의 말씨에 여인이 움찔거린다.

“욕심이 나셨겠지요. 탐이 나서 빼앗고 싶으셨겠지요. 그러고도 양반이랍시고 권위를 내세우려 하는 것입니까! 양반은 도둑질을 해도 된다, 어느 법전에 쓰여 있더란 말입니까?”

“무, 무슨……”

“촌구석에서 제법 행세하는 집안이라 하여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절도죄로 형을 받고 가문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이쯤에서 그 입을 닫고 조용히 물러나도록 하십시오.”

와르르 무너져 내린 자존심 때문에 여인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서율은 사정을 두지 않았다.

“아이에게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 싹싹 빌어도 모자를 판에……”

싸늘한 눈초리를 날리며 서율과 치경은 아이를 데리고 그곳을 떠나버렸고 남겨진 여인은 수많은 인파 속에 눈요깃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대로 끝내지는 않을 것이다! 낯 뜨거운 수치심에 분노가 끓어오는 여인은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많이 놀랐느냐? 이제는 안심하여라.”

시전 귀퉁이, 한적한 곳에 이르자 서율은 걸음을 멈추고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많이 놀랐는지 아이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대꾸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로가 될까 싶어 그는 아이의 왼손 중지에 다시금 반지를 끼워주었다.

“어머니께 받은 소중한 것이니 다시는 잃어버리지 말거라.”

“……어찌하여 나를 도와주는 것이냐? 지금 내 몰골이 이러하거늘.”

망연히 바라보던 아이는 서글픔을 잔잔히 풀어내며 물었다. 눈물을 참는 것인지 어린것이 자꾸만 눈꺼풀을 깜빡이는 게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찡하게 하였다.

“억울하게 당할 뻔했으니 당연히 도와야지. 지금 너한테는 우리뿐이질 않느냐.”

다정한 그 한마디가 아이의 심금을 건드렸던 것일까. 은명은 서율을 빤히 보며 입가를 실룩이더니 억눌렀던 감정을 한꺼번에 빵 터트리고 말았다. 서러움과 두려움이 봉인을 해제하고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흐흑, 으아앙……”

당황한 서율이 주춤주춤 달래보려는데 아이가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더니 그대로 얼굴을 처박고 더욱 구슬피 울어대었다.

“엇!”

남녀칠세부동석이라 귀가 닳도록 가르침을 받아온 그였기에 일곱은 족히 넘었을 여자아이가 오롯이 품에 안겨오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이 아이, 몸을 달달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여인에게 맞서며 다라지게 굴었지만 실은 무서웠을 것이다. 서율은 안된 마음에 아이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토닥토닥 다독여주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의 가슴과 배 사이의 부분이 축축해질 무렵, 눈언저리와 코끝이 새빨개진 아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꺽꺽거리면서도 서러움을 토해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내가, 무서웠다. 맞을 뻔하였느니라!”

아이의 하소연이 애처로우면서도 귀여워 서율은 피식 웃으며 작은 몸체를 꼭 안아주었다. 잠시 후, 이대로 계속 울면 탈진하지 않을까 싶어 서율은 슬슬 걱정이 되었다. 하여 아이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안은 채로 등을 살살 쓸어주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게 집으로 곧장 갈 것이지 반 시진 동안 어디를 그리 돌아다닌 것이냐?”

“개울가.”

“개울가?”

“아이들이 엄청 많기에. 그렇게 많은 아이들은 내 처음 보았느니라.”

서율과 치경은 기가 막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은 원래 물가라면 사족을 못쓰는 법. 두 사람도 고을을 둘러보며 아이들이 개울가에 바글바글 몰려있는 것을 목격했었다. 그런데 설마,

‘그런 광경을 처음 보았던 것인가? 이 아이는 대체…….’

또다시 의문이 떠오른 서율은 아이를 품에서 떼어내 눈물을 슥슥 닦아주었다. 이 길로 집까지 쫓아가 아이의 속사정을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함께 가자꾸나. 내 너를 집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

“왜? 싫은 것이냐?”

서율의 물음에 아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짓더니 스스럼없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에서 전해오는 보송하고도 따뜻한 느낌이 놀랍고도 생경했다. 서율이 움찔하여 내려다보니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얼굴로 아이가 생긋 웃어 보인다. 정녕 자기 몸에 손을 대었다며 파르르 떨던 아까 그 아이가 맞으렷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등을 내주고, 품도 내주었으니 이까짓 손쯤이야. 지금의 상황을 정당화시키며 애써 담담히 받아들이려는데 어느덧 서율의 입가에 봄바람 같은 미소가 살포시 실리고 있었다. 산과 들이 신록으로 물들어 가는 푸른달 초순의 어느 날, 장차 조선 최고의 인재로 성장할 김서율이 저도 모르는 새 굉장한 아이의 인생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여기가 확실합니까?”

“분명 이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독기를 가득 품은 여인이 관아의 비장과 포졸들을 대동하고 시전 곳곳을 뒤지고 있었다. 조금 전, 선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화기가 끓고 분통이 터져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 조그만 년과 어린 선비 놈을 모두 잡아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하나 반가의 자제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는 법. 계집아이만이라도 찾아내어 반병신을 만들어 놓으리라 단단히 벼르는 중이다.

“산속 민가까지 모조리 수색해야 할 것이다.”

“저를 찾으십니까?”

감정이 끓어오른 여인이 앙칼지게 명을 내리는데 뒤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그 어린 선비가 무사와 함께 태연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인은 싸늘한 눈초리로 빠르게 그들의 주위를 훑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계집아이는 어디 있소?”

“귀가하였습니다. 그리 알아듣게 말씀을 드렸건만 아직도 볼 일이 남으셨습니까?”

여인은 서율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나의 실수는 인정하겠소. 내 그 아이에게 우선 사과부터 할 것이오. 헌데 촌구석에서 행세 꽤나 한다는 우리 집안도 감당치 못한다는 반지를 남루한 행색의 그년은 어찌 감당을 한단 말이오? 반지가 그년의 것임이 틀림없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그년의 집으로 데려가주시오. 가서 그년의 집안을 확인하고 내가 실수를 하였다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리다.”

“……”

“왜, 못 가겠는가? 혹 어린 종년이 상전의 것을 훔친 것은 아니요?”

“일단 관아로 가시지요.”

서율이 차분하게 제안했으나 여인은 그 말을 간단히 무시하고 포졸들에게 명을 내렸다.

“최대한 빨리 죄인을 잡아들여야 할 것이다. 포졸들을 더 풀어 그년을 찾아내어라.”

“예!”

관원들은 일제히 그 명을 받들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물론, 추상과도 같은 호령에 몇 발짝 걸음을 떼지는 못하였지만.

“멈추어라!”

어린 선비의 목소리가 어찌나 서슬이 퍼런지 관원들이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나이는 어리나 든직하니 위엄이 서려있는 게 상대를 압도하는 무언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누구의 명을 따르는 것이냐?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이 어찌하여 사사로운 명을 받드는 것이야!”

잠시 주춤거리던 비장은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서율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선비님, 지나던 길이시면 그냥 가십시오. 저분께서는 성 진사 댁 며느님이십니다. 원래 지금처럼 사또께서 아니 계시면 진사 어른 댁에서 고을 일에 관여를 하였습죠.”

“진사? 이 고을에 도승지 영감의 본가가 있을 터인데?”

“예, 있습죠. 하지만 워낙 지체가 높으신 분들이라 소소한 고을 일에는 관여를 잘 안 하십니다.”

“뭘 꾸물거리는 것인가. 언제까지 쓸데없는 잡담이나 나누고 있으려는 게야!”

내가 누구인지 잘 알았느냐는 듯 여인의 기세가 한층 더 등등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치경은 서율의 눈짓을 받고 몸속에서 둘둘 말린 문서를 꺼내 비장에게 건네주었다. 비장은 의아한 얼굴로 문서를 펴보고는 두 눈이 휘둥그렇게 떠진다.

“고, 고신(告身)?”

“이분께서 새로 부임한 현감이시오.”

“예에?”

치경의 소개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서율을 바라보았다. 여인도 꽤 놀라는 눈치였다.

“어찌 저 어린 선비가……”

“관아로 가서 부인의 궁금증을 풀어드리지요. 부인을 모시고 관아로 돌아가거라.”

“아…… 예!”

잠시 얼이 빠져있던 관원들은 서율의 명에 날쌔게 대답을 하였고, 새침해있던 여인도 우선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여인과 관원들이 충분히 멀어지자 느긋이 서 있던 서율은 치경에게 재빨리 명을 내렸다.

“얼른 가서 아이를 데려다 주고 무슨 곡절이 있는지 소상히 알아오게.”

“예, 도련님.”

명을 내린 후 서율은 관원들의 뒤를 쫓았고, 치경은 날래게 몸을 움직여 아이를 숨겨놓은 장소로 향했다. 시전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 모퉁이를 돌고 또 돌아 인적이 없는 구석진 곳. 건물과 건물 사이, 어린아이 하나가 넉넉히 들어갈 정도의 작은 공간 앞에서 치경은 걸음을 멈췄다. 시전에서 여인과 관원들을 먼저 발견한 그들이 아이를 안전한 곳에 미리 숨겨두었던 것이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그는 가림막이로 세워둔 판자부터 치워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아이가 얌전히 들어앉아 있어야할 공간이 텅 비어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급히 주변을 살폈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눈에 띄지 않는다. 치경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번져나갔다. 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향긋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오월의 늦은 오전. 수심에 찬 치경이 하릴없이 화단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집무실에 있던 서율이 밖으로 나왔다.

“나오셨습니까?”

치경에게 고개만 살짝 끄덕인 서율은 어딘지 갑갑한 표정으로 말없이 창창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 모두 어제 그 아이가 걱정되어 마음이 편치 못한 상황.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는지 알고 싶어 이곳저곳을 수소문 중이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잘 있다는 전언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서율과 치경에게서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현감어르신!”

무슨 일인지 이방이 헐레벌떡 걸음을 하였다.

“성 진사 댁 큰 서방님과 며느님이 오셨습니다.”

“또 그 아이 얘기를 꺼내겠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어제 현감 어르신께 결례가 많았다며 사과를 드리러 오셨답니다.”

“사과? 어제 관아에서도 그 난리를 치더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것이…… 사또에 관해 무슨 얘기를 들은 모양입니다. 어, 저기 옵니다요.”

저 앞에 이립(而立)이 조금 못되어 보이는 한 선비가 어제 그 여인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성 선비는 이방의 소개로 서율과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반 발짝 물러나 있던 자신의 처, 정씨를 인사시켰다. 전날까지만 해도 지극히 표독스러웠던 정씨 부인은 지아비 앞이라 그런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눈은 내리깔고, 목소리는 나긋나긋, 행동 하나 하나 조심조심.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숙하고 품위 있는 반가 여인의 품새를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어제는 저의 생각이 짧아 결례가 많았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리 성을 내시더니 하루아침에 어찌 이리 변하셨습니까?”

서율은 냉담하였으나 여인은 눈도 깜짝 안 했다.

“송구합니다. 어제는 그 천것이 매우 무례하였고, 그날 시전에 있던 다른 댁 부인들께서도 매우 분개해 하였는지라…….”

“애초에 부인께서 그 아이의 물건에 욕심을 내지 마셨어야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사람이 천비 아이의 물건에 욕심을 내었다니요?”

서율의 직언에 지아비마저 끼어들자 여인은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다시 침착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제 말씀드린 대로 그 아이가 제 상전의 것을 훔친 것 같아 진상을 밝히고자 했을 뿐입니다. 어제부터 제가 간곡히 부탁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사또께서 그 천비를 잡아들여 진상을 낱낱이 밝혀주십시오.”

“나를 잡아들이라는 것이냐?”

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제 그 아이의 똘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돌아본 서율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놀라워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그 아이였다. 아니, 어제 그 아이가 분명하긴 했으나 차림새는 하늘과 땅만큼 달라져 있었다. 아이는 밝은 초록빛 비단치마에 잔잔한 꽃수가 놓아진 연노랑 저고리를 받쳐 입어 화창한 햇살 아래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왼쪽 가슴엔 나비 모양의 황옥과 연옥, 비취가 위에서 아래로 줄줄이 이어진 노리개를 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새까만 머리 한편엔 백옥으로 만들어진 여러 송이의 매화꽃이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어제 그 천것?”

정씨 부인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리자 아이의 바로 뒤에 시립하고 있던 중년 여인이 빠르게 튀어나와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쫘악-.

“악!”

엄청난 마찰음과 함께 정씨 부인의 고개가 뒤로 훅 돌아가 버렸다.

“이 무슨……”

찰싹-.

“아악!”

갑자기 당한 일이 억울해 정씨 부인이 항의를 하려 고개를 들자 중년의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 아까보다 더 세게 뺨을 후려갈겼다. 이번에는 맞은 이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릴 정도였다.

“이게 무슨 짓이요? 반가의 여인을 이리 욕보이다니!”

내자가 맞는 것을 막지 못한 성 선비가 얼굴이 새빨개져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뺨을 후려친 그 여인, 선비의 말을 가벼이 흘려버리고 불호령을 내린다.

“네년이로구나! 네가 저분의 몸에 상처를 내고 반지를 훔치려 하였으며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말로 욕을 보인, 바로 그 죄인이렷다!”

“저, 저는……”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연속으로 뺨을 두 대나 얻어맞아 기가 꺾인 정씨 부인은 상대방의 꼬장꼬장함에 눌려 엉거주춤 흙바닥 위로 무릎을 꿇었다. 저쪽은 딱 봐도 출중해 뵈는 무사가 둘이나 버티고 있어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최고급 재질의 비단이었다. 대체 어느 가문을 건드렸단 말인가. 허름했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권문세가의 영애로 탈바꿈해 정씨 부인은 머리가 핑핑 돌아갈 지경이었다.

“너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 그 죄를 목숨으로 물어야 할 것이다!”

“허억.”

여인은 물론 주위 사람들이 전부 놀라 서릿발 같은 여인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흙빛으로 물든 성 선비는 완전히 얼이 빠져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이럴 때는 조정의 관리가 나서야 하는 법. 한데 새로 부임한 현감과 그의 호위무사, 무척 흥미진진한 얼굴로 사태를 관망할 뿐이다.

“모, 몰랐습니다. 모르고 한 것입니다!”

“몰랐다? 저분이 네게 스스로 천비라 하였느냐?”

“그, 그건……”

“너는 겉모습만으로 저분의 신분을 짐작하고 불경스러운 짓을 저질렀다. 심지어 반지의 주인이라 밝혔음에도 끼고 계시던 것을 억지로 빼앗아 갔으니 산속의 도적떼와 무엇이 다르다 할 수 있겠느냐? 탐욕에 눈이 멀어 귀한 분의 옥체에 상처를 입혔으니 너는 물론, 너희 가문 또한 무사치 못할 것이다!”

평소 같으면 국법을 들먹이며 짱짱히 대항했겠지만 저들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온갖 죄를 뒤집어씌운다면 존재감 미미한 집안 하나 해치우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울까. 엄청난 세도가의 여식을 잘못 건드렸단 생각에 정씨 여인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제 살 길은 딱 하나, 아이에게 잘못을 싹싹 비는 수밖에 없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 소인을 죽여주시고, 부디 가족들만은 구명하여 주십시오.”

여인은 땅바닥에 엎어져 아예 통곡을 해댄다. 이에 잠자코 지켜보던 은명이 치맛자락을 사라락 들어 올려 그 앞으로 사뿐사뿐 걸음을 떼었다. 거동은 엄전했으나 표정과 눈빛은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고개를 들어라.”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신분이 천하다 하여 그 사람 자체가 천한 것은 아니라 하였다. 또한, 신분이 귀하다 하여 그 사람 자체가 귀한 것도 아니라 하였다. 양반이라 해도 그 사람됨이 비루하게 천할 수 있고, 천민이라 해도 그 됨됨이가 얼마든지 귀할 수 있다!”

오호라, 이틀 새 눈앞의 꼬맹이가 서율을 여러 번 놀라게 하고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다 정도가 심해지면 끼어들려 했지만 입을 여는 족족, 저리 옳은 말만 해댈 줄이야. 아이는 작은 주먹을 그러쥐고 당차게 말을 이었다.

“너는 어떨 것 같으냐? 신분은 양반일지 몰라도 너의 됨됨이는 그야말로 천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목숨이란 하늘에 달려있는 것이니 함부로 거두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너의 죄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천것 주제에 그동안 다른 이에게 수도 없이 천것이란 말을 해왔을 것이니 그 벌로 네게 곤장을 치게 할 것이다.”

곤장이라니! 눈앞이 까마득해진 정씨 여인은 지금까지보다 더 크게 엉엉 울어버렸지만 아이는 똑 부러지게 주의를 주었다.

“시끄럽다. 곤장을 맞는다니 수치스러우냐? 그렇다면 오늘의 수치를 가슴에 새겨 두고두고 간직하도록 하여라. 하여 행색이 남루한 자가 우스워 보이거든 오늘의 수치를 꺼내어 너의 그 가당찮은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야 할 것이야!”

아이는 목소리와 말씨, 표정, 손끝 마디마디까지 어린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품격 있는 권위가 제대로 서려 있었다. 어느 댁 여식이 저리 대차고 다기지단 말인가. 대명문가의 여식이 틀림없어 보이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하였다. 서율의 호기심은 한층 더 여물어가고 있었다.

자줏빛 수수꽃다리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관아의 후원. 바람이 불때마다 꽃송이가 하늘하늘 날리며 그윽한 향기를 퍼트리는 가운데 어린 남녀가 서로를 마주보며 은근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서율은 정복이 아닌 연한 옥빛 도포에 새하얀 답호를 입고 있어 은명의 옷차림과 근사하게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현감이라더니 허언은 아니었구나.”

“그럼 이제 말을 높여야지, 이 녀석아.”

“앗!”

서율이 손가락으로 아이의 이마를 톡 튕기며 타박을 하자 은명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맞은 곳을 살살 문지르며 성을 내었다.

“무엄하도다!”

시건방진 저 말투조차 반가워 서율은 속웃음을 짓는다. 지난 밤, 아이의 안부가 걱정되어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이렇게 번듯하고 화사한 모습으로 나타나주니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 어제는 생김새와 차림새가 그토록 이질적이더니 오늘은 생김새, 차림새, 행동과 말투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딱딱 들어맞고 있었다.

“몇 살이냐?”

“어찌하여 여인의 나이를 묻는 것이냐?”

그리 찔찔 짜며 안겨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외하는 꽃띠 처녀 행세라니! 서율은 아이가 새초롬하게 구는 양이 귀여워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는다.

“이리 차려 입으니 참으로 어여쁘구나.”

서율의 한마디에 은명의 심장이 쿵쿵쿵 방아질을 시작했다.

[지금 너한테는 우리뿐이질 않느냐.]

어제 이 말을 들었을 때에도 가슴이 얼마나 벅차게 뛰어올랐는지 모른다. 은명은 눈앞의 선비가 마음에 쏙 들었다. 몸에서 열이 나는 것을 숨기고 보모를 닦달해 부랴부랴 달려온 것도 실은 이 선비가 보고 싶어서였다. 보고 싶었던 얼굴을 바라보며 한껏 기분이 좋아져 있는데 은명에게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명자가 무엇이냐?”

그건 말해줄 수 없었다. 관아에 오기 전, 명자를 밝혀서는 안 된다 보모가 얼마나 신신당부를 하였던가.

“그건 알 거 없다.”

“뭐라? 대체 얼마나 금쪽같은 명자이기에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냐?”

서율이 황당해하자 아이는 새치름하게 고개를 팽 돌려버렸다. 태도를 보아하니 집안에 관해서도 말해주지 않을 것은 분명하였다. 어제도 답하기 곤란한 질문에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닥치는 대로 질문을 퍼부어 나름의 추리를 해보는 수밖에.

“어제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아이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가로 젓자 서율은 빠르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집에는 어찌 돌아간 것이야?”

“밖을 내다보다 나의 호위무사를 만났느니라.”

어제는 누더기 하나를 주워 입고 몰래 빠져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집안에서 무사들을 풀어 아이를 찾게 하였을 테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짓을 덜컥 저지르는 아이라. 서율은 더 많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그럼, 관아에는 왜 오기 싫다 하였느냐?”

“일이 커지면 한양에 계시는 아버님과 오라버니한테까지 소식이 올라갈 것이다.”

“지금 친척 집에 놀러 온 것이냐?”

“그냥 피접을 왔을 뿐이다.”

“피접? 몸이 안 좋으냐? 그래도 모친 곁에 머무는 게 더 나을 것인데.”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셨다.”

아이의 눈가가 촉촉해지며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자 서율은 아차 싶었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속으로 곤란해 하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억울하다는 얼굴로 질문을 해왔다.

“아버님의 딸이 자꾸 불손하게 굴면 어찌해야 하느냐?”

“아버님의 딸?”

“아버님의 딸보다 그 아랫것들이 더 싫다!”

고민을 한참 들어주다 보니 아이는 첩에게 총애를 빼앗긴 정실의 딸인 것 같았다. 어미를 따라 피접을 다니느라 본가를 자주 비우는 사이, 이복자매가 아비의 마음을 사로잡고 아이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동복(同腹) 오라비가 집안의 장남이어서 아이가 계속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랄까. 첩과 이복자매의 위세에 눌려 저 혼자 속상해하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르자 딱한 마음이 들었다.

‘쯧쯧, 어미가 안방을 빼앗기고 화병이 나서 세상을 뜬 게지. 그래도 그렇지, 아랫것들까지 모조리 첩실에게 붙어버리다니! 어느 댁 어르신인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아이는 사람의 정(情)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피하고 싶을 만큼 서먹서먹한 아비와 늘 바쁘기만 한 오라비.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던 모친을 갑자기 잃고 마음 한 자락 기댈 곳을 찾지 못해 과거 어미와 왔었던 이곳을 다시 찾아온 것이다. 불쌍하구나, 서율의 가슴에 연민이란 감정이 싸하게 파고들었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응?”

“어찌하긴 뭘 어찌해, 아까처럼 하면 되지.”

“아까처럼?”

“그래. 조금 전 그 밉살맞은 여인을 따끔하게 혼내주지 않았느냐. 아까처럼 당당하게 아랫것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시정토록 하면 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네 모습이 매우 의젓하고 보기에도 좋았느니라. ……왜 그러느냐?”

“혼인을 하였느냐?”

어느 순간 아이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싶더니 엉뚱한 질문을 해왔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서율은 빙긋 웃으며 답을 해준다.

“아직 미취(未娶)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조금 더 자라 그대를 나의 지아비로 삼아 줄 것이야.”

“뭐? ……하하하.”

생각지도 못한 아이의 당찬 포부에 서율은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우스우냐? 기뻐서 그러하냐?”

“내가 마음에 든 것이로구나?”

아이는 대답대신 고개만 세차게 끄덕거린다.

“한데 어찌하여 네 명자도 알려주지 않는 것이냐?”

“보모가 명자를 함부로 알려주지 말라 하였다. 내 오늘 보모와 담판을 짓고 내일 다시 와서 명자를 알려줄 것이다. 대신 지금은 나이를 알려주마. 나는 올해 아홉이 되었느니라. 그럼 이제 내가 자랄 때까지 기다리겠노라, 약조를 해주겠느냐?”

아이가 다짜고짜 새끼손가락을 쳐들더니 조바심이 돋아난 얼굴로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음…… 내 한 번 숙고해 보도록 하지.”

“내가 싫으냐? 어제 그런 모습을 보여 그대 눈엔 내가 못난이로 보이는 게로군.”

새까맣고 순진한 눈망울을 출렁이며 한숨을 깊이 내쉬는 아이는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그럴 리가 있느냐, 아까 어여쁘다 하지 않았어. 지금까지 만난 여아들 중, 네가 제일로 예쁘다.”

“참이냐? 그럼 지아비가 되어 줄 것이다, 그리 약조를 해다오.”

축 처져있던 아이가 반짝 되살아나 새끼손가락을 도로 치켜들었지만 어린 선비는 고개를 단호히 가로저었다. 아, 속상하여라. 은명은 실망스러워 힘없이 손을 떨구는데 서율이 그 손을 다시 잡아 올려 저의 기다란 손가락을 척 걸어주며 말했다.

“장차 내가 지어미를 맞이해야 할 때가 오면 너를 제일 먼저 나의 신붓감으로 고려해 볼 것이다. 어떠냐? 이 정도로는 안 되는 것이냐?”

내리 거절만 당하다 겨우 얻은 긍정적인 답변이었다. 어찌 충분치 못하다 할 수 있으랴. 은명은 감격에 겨워 마주 걸고 있는 새끼손가락을 힘차게 흔들며 다짐을 받았다.

“약조한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있어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신붓감이니라.”

“후훗, 그래.”

“내일 올 터이니 기다려다오. 내일 오면, 나의 명자를 알려주고 그대의 명자도 물어볼 것이다. 내게 뜸을 들이지 말고 그대의 명자를 꼭 알려주어야 한다.”

아이의 신신당부에 서율은 즉석에서 시원스레 자신을 소개하였다.

“나는 서율이라 한다. 김서율.”

어미를 잃고 헛헛해하던 아이에게 자신이 새로운 안식처가 된 줄도 모르고 서율은 여낙낙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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