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어머, 아가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루시였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루시는 루베르가 여기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은 건지 나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미안해, 루시.”
루시가 들고 온 물수건을 옆에 내려놓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손님은 루시뿐만이 아니었다.
“깨어난 겁니까.”
열린 문틈으로 란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나를 확인하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군요.”
란은 내 상태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이윽고 옆에 앉아 있던 루베르를 보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환자를 괴롭히는 건 좋지 않을 듯하군요.”
“괴롭힌 건 딱히 아니었습니다만,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합니다. 아스텔라.”
“아뇨, 저는 괜찮은데요.”
그래봐야 잠만 자다가 일어난 건데, 뭐.
나는 루베르의 손을 붙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루베르의 손이 내 움직임에 맞추어 살랑살랑 움직였다.
이렇게 루베르를 직접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역시 나는 루베르를 두고 갈 수는 없어.’
이전 삶이 그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이미 너무 많은 걸 받은 후였다.
“다들 이렇게 함께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는 나를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 * *
모두의 관심 아래서 나는 이틀 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조금만 움직이려고 하면 난리인 루시와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상태를 살피러 오는 루베르 때문이었다.
‘정말 괜찮았는데.’
뭐, 그래도 덕분에 푹 쉬었으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쉬는 것도 좋긴 했지만, 그건 역시 내 성미와는 맞지 않았다.
“정말 나가려고?”
“응.”
나는 포피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다름 아닌 황제의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적어도 내 손으로 붙잡은 진범의 끝은 확인하고 싶었달까.
―알겠습니다. 대신 저와 함께 가도록 하죠.
루베르도 그런 내 뜻을 알고서 더는 말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내 상태가 쌩쌩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서인지도 몰랐다.
똑똑.
“아스텔라, 준비는 다 됐습니까?”
밖에서 들리는 루베르의 목소리에 나는 옷을 가다듬고서 문 쪽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돌리고 나가자 루베르가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제 갈까요?”
나는 루베르가 내미는 손을 붙잡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 * *
밀수와 살인 그리고 살인미수의 죄명까지 달게 된 황제의 얼굴은 그야말로 죽상이었다.
“다음과 같은 죄명에 따라 사형을 선고합니다.”
재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게나 여러 사람의 인생을 박살 낸 것치고 너무나 허무한 결말이었다.
“루베르.”
재판 방청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우리를 붙잡은 건 다름 아닌 카룬이었다.
“아,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인사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몸은 좀 괜찮습니까?”
카룬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그날 기절한 게 크긴 컸던 모양이었다.
“아, 괜찮습니다. 그날은 좀 피곤해서 그랬던 거라.”
“무척 걱정했습니다. 루베르는 또 어찌나 무섭던지. 앞으로는 되도록 건강한 상태를 유지해주세요.”
카룬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두 번 그랬다가는 제국에서 무서워 살기가 힘들 것 같으니 말입니다.”
“꽤 한가하신 모양입니다.”
루베르가 삐딱한 말투로 되물었다. 카룬은 불손한 말을 듣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한가할 리가 있나. 네가 이렇게 선대 황제를 잡아 넣어준 덕분에 갑자기 일을 맡게 돼서 오늘도 간신히 참석한 거라고.”
“그런 것치고 상당히 시간이 많아 보이십니다.”
루베르가 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자신의 뒤로 당겼다.
“이거 원, 억울해서 살겠나.”
카룬이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탐정과 손을 잡기로 한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막상 이렇게 공로를 인정받고 나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저도 함께 일할 수 있어 무척 좋았습니다.”
“다행이군요. 어쨌든 몸조리 잘하십시오. 다음에 시간이 되면 직접 대공 성으로 찾아가도록 하죠.”
“아뇨, 뭐 그럴 필요까지야.”
“당신은 엄청난 일을 해낸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 정도로 감사를 표해야지요.”
“폐하.”
얘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황제의 보좌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카룬은 무슨 말인지 다 아는 사람처럼 손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가봐야겠군요. 모쪼록 뒤는 맡겨주십시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뵙겠습니다.”
카룬은 그 말을 끝으로 저 멀리 사라졌다.
우리도 몸을 돌려 마차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 * *
재판을 방청하고 돌아온 이후, 루베르는 집무실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일이 너무 바쁜 탓일지도 몰랐다.
“또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니야?”
포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역시 루베르가 무리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한번 찾아가보자.”
포피가 폴짝 뛰면서 말했다. 나는 포피를 안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집무실은 그렇게 멀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똑똑.
“루베르?”
문을 두드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문이 빼꼼 열리더니 언제나처럼 잘생긴 루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텔라, 여기까진 어쩐 일입니까?”
“잘 쉬고 있는지 걱정이 되어서요.”
“네?”
나는 포피와 함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루베르는 우리를 막지 않았다.
“저게 다 뭐야.”
포피가 산처럼 쌓여 있는 종이를 보고 기함했다. 포피가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그랬겠지만. 나는 루베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번엔 며칠째 안 주무시고 계신 거예요?”
“그게…….”
루베르가 드물게 말을 흐렸다. 눈을 피하는 모습까지 아주 완벽한 회피였다.
나는 루베르의 손을 붙잡고 바로 침대로 향했다.
“아스텔라, 정말 괜찮습니다.”
“저렇게 많은 양을 처리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나는 루베르를 침대에 억지로 눕히면서 루베르의 눈을 내 손으로 덮었다.
“어서 주무세요.”
“……그러기엔 너무 밝습니다. 무엇보다 잠도 오지 않고요.”
“그래도 눈 감고 있으면 괜찮을 거예요.”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루베르의 속눈썹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이런 와중에 또 내 말은 잘 들어주고.’
나는 루베르의 손을 붙잡았다. 따뜻한 그의 손을 붙잡고 있자니 나도 졸음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아스텔라.”
“네?”
햇살에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뜨고 있으니 루베르가 나를 불렀다.
이윽고 루베르가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오롯이 나만을 비추는 걸 보자니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당신도 조금 피곤해 보입니다.”
“네?”
루베르는 내 손을 붙잡아 당겨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루, 루베르!”
“이대로 조금만 있어주지 않겠습니까?”
당황해서 루베르의 품을 벗어나려고 하던 그때, 루베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루베르의 손이 잘게 떨렸다.
“루베르, 괜찮아요?”
내가 루베르의 손을 붙잡자 그가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으면서 입을 열었다.
“또다시 당신을 잃는 줄 알고 무서웠습니다.”
“아.”
분명 내가 쓰러진 일 때문에 그런 거겠지. 나는 루베르의 손을 토닥였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걸요.”
루베르는 내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럴 땐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정신을 잃었던 그때, 루베르의 어머니를 만나 뵈었어요.”
“제 어머니를 말입니까?”
“네, 직접 찾아왔더라고요.”
아무래도 얘기하는 게 좋겠지.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서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제가 이곳에 있게 된 것도 모두 루베르의 어머니 덕분이에요.”
“그게 무슨…….”
“포피를 살린 것도, 저를 이곳에 부른 것도 모두 마법이었거든요. 본인도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어머니를 정말로 만나 뵌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루베르의 뺨에 손을 얹었다.
“루베르, 언제나 당신을 지켜주고 있었던 거예요. 당신이 혼자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거죠.”
내가 오기 전부터, 아니 다른 사람이 루베르를 구하러 들어갔을 때부터 스텔라는 마음 졸이면서 그를 바라봤을 터였다.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만 봐도 마음이 아픈데…….’
스텔라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감히 가늠하는 것조차 실례였다.
“루베르, 너무 많은 걸 혼자 떠안을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니까요.”
나는 루베르의 등을 쓸어내리며 조곤조곤 얘기했다.
루베르는 내 허리를 두른 팔에 힘을 주어 나를 있는 힘껏 안았다.
“당신은 어떻게 매번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그렇게 해주는지.”
“네?”
곧이어 루베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뜨거운 시선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이윽고 루베르가 고개를 틀어 반쯤 감은 눈으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고마워요, 아스텔라. 내 곁에 있어줘서.”
입술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루베르의 다정한 숨결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루베르가 그런 나의 뺨을 붙잡고 천천히 다가오던 바로 그때였다.
“너네, 포피가 있는 건 까맣게 잊고 있는 거지?”
포피가 왕, 하고 짖으면서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루, 루베르! 그럼 수고해요!”
“잠시만요, 아스텔라.”
루베르가 나의 손을 붙잡아 돌리고 이내 짧게 입을 맞추었다.
“조심히 가요.”
이렇게 대놓고 속삭이듯 말하면 반칙 아니야?
“가, 갈게요!”
나는 포피를 안은 채로 곧장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집무실 안에서는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걸 애써 모른 척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