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자, 그럼 이제 나는 돌아가보겠어. 이제 한계이기도 하고.”
그 말을 마친 크리튼이 검에 손을 얹자마자 그대로 사라졌다.
우리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시선을 돌렸다.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더는 이곳에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군요. 무엇보다 저는 지금 죽은 사람일 테니 말입니다.”
루베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법은 있습니까?”
“일단 성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겠지요. 이대로 있다간 모두 잡혀 들어갈 테니.”
루베르는 저 멀리 서 있던 집사를 불러 무언가를 얘기했다.
이윽고 대화가 끝난 듯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루베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 루베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긴 대공 성입니다. 황궁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에도 지하의 출구로 이어진 비밀 통로가 존재하지요. 그곳으로 나가면 될 듯합니다. 이곳은 집사에게 맡기고 나가도록 하지요.”
아까 얘기하던 게 그것과 관련된 거였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루베르가 갑자기 문 옆의 괘종시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럼 이제 이곳을 나가볼까요.”
괘종시계의 유리문을 열어젖힌 루베르는 망설이지 않고 시계의 분침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바퀴를 조금 더 돌렸을 때, 루베르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쾅.
이윽고 방 안에 커다란 진동이 울리고 괘종시계가 옆으로 스르르 움직였다.
그리고 벽 안쪽에 사람 한두 명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문이 나타났다.
“서둘러 짐을 들고 오죠.”
공간을 확인한 란이 빠르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난 란의 어깨엔 제법 큰 가방이 메어져 있었다.
“출발하지요.”
루베르가 망설이지도 않고 어두운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빠르게 그 뒤를 따랐다.
* * *
통로는 꽤 길게 이어져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걸은 듯한데도 아직 출구가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여길 나가서 갈 곳이 있을까.’
가장 걱정인 건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나간다고 한들 루베르와 란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됐다.
그렇다면 몸을 숨길 장소를 찾아야 한다는 소린데, 이렇게 갑자기 준비도 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도망치고 있는 지금 그럴 곳이 있을까.
내가 루베르를 향해 질문을 던지려던 바로 그때였다.
“본회의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할 것 같군요. 정확히 언제 회의가 진행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습니까?”
뒤따라오던 란이 내 앞에 있는 루베르를 향해 말을 건넸다.
“그런 건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만, 황제는 분명 빠르게 플로라와 관련된 사안을 처리하려 할 겁니다. 무엇보다 반대 세력의 방해가 두려울 테니.”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려고 한다면 이번 일을 파헤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심란한 마음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베르는 어떤 동요도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본회의의 진행을 막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지금은 다른 정보가 없는 상황입니다. 일단 그 정보를 얻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겠죠.”
“그 말엔 나도 동감합니다. 그런데 그 정보를 어떻게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황궁에 정보를 줄 수 있는 자가 한 명 있지요. 그리고 그자와 연락할 방법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내 앞을 걸어가던 루베르의 발걸음이 딱 멎었다.
이윽고 끽, 하는 소리와 함께 환한 빛이 안으로 들어왔다.
눈이 부심에도 일말의 찡그림도 없이 햇빛 아래로 나선 루베르의 은발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지금부터 상단으로 갈 겁니다.”
루베르의 눈빛에는 망설임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 * *
쾅.
문이 닫히고 안으로 들어온 우리를 맞이한 상단 주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연락은 따로 없었나.”
루베르가 안으로 들어서면서 묻는 말에 상단 주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윽고 상단 주인이 입구에 달려 있던 팻말을 돌려 「닫음」이라는 글자가 밖으로 보이게 했다.
“연락은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정말 간신히 받은 연락이었습니다.”
“곤란하게 됐군.”
루베르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주변을 살피던 바로 그때였다.
쿵쿵!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우리는 전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오늘은 영업하지 않습니다!”
상단 주인이 큰소리로 외쳤지만, 불청객은 쉽게 돌아갈 마음이 없어 보였다.
쿵쿵!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계속해서 문을 두드릴 이유가 없었으니까.
루베르가 자신의 허리춤에 달고 있던 크리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루베르가 눈짓으로 상단 주인에게 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남자 한 명이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한참 찾았습니다!”
루베르가 란을 향해 다가가는 사신을 알아채고서 칼에 올려뒀던 손을 내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공 성으로 찾아갔더니 이곳으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사신이 이마의 땀을 훔치다가 이윽고 란을 향해 몸을 돌렸다.
“큰일입니다! 황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황제가 직접 귀족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예? 어떻게…….”
이윽고 루베르를 바라본 사신이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이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플로라에 관한 회의를 진행하는 듯합니다. 어떻게든 반대 의사를 밝혀야 합니다!”
사신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것만 보더라도 그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명백했다.
“플로라의 위험성을 알고 있는 이상 그리고 황제의 본심을 알고 있는 이상 절대로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나도 거기엔 동감하지만, 직접 쳐들어가는 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어.”
란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내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엄청난 생각이 스쳐갔다.
“잠시만요!”
상단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나를 바라봤다.
이게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이게 낫겠지.
나는 숨을 한번 고르고 말을 이어나갔다.
“전하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이 바로 눈앞에 있잖아요.”
“그런 겁니까.”
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신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받은 사신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이건 어쩌면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랐다.
* * *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습니다. 사신들이 직접 찾아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황제는 곧장 카룬을 불렀다.
―대충 시간만 끌다가 내보내라. 아니, 내가 직접 너를 돕는 게 빠르겠군.
황제는 작게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이윽고 사신들을 제지하라는 말과 함께 방에서 빠져나갔다. 명은 그게 전부였다.
카룬은 표정을 굳히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 손으로 진실을 은폐해야 한다는 사실이 역겹게만 느껴졌다.
“문을 열어라.”
알현실의 앞에 도착한 카룬을 확인한 기사가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안에 앉아 있던 사신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
카룬은 그게 절대로 호의적인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인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정중했지만, 말투에 날이 서 있었다. 카룬은 그걸 알아채고서 작게 숨을 내뱉었다.
“앉지.”
카룬이 자리를 앉음과 동시에 가장 가운데 있던 사신이 입을 뗐다.
“본회의의 내용에 관해 전해 들은 바로는 플로라에 관한 건도 포함되어 있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회의에 저희 공화국 사신은 부르지 않으신 겁니까?”
되도록 아무렇지 않게 대처해야 한다. 황제가 직접 나서기 전에.
카룬이 입을 열려고 하던 그때, 갑자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장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였다.
“저희는 이에 이의를 신청할 겁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플로라는 공화국에서만 다룰 수 있는 특산품입니다!”
옆에 있던 사신 두 명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사신은 꽤 감정적으로 대처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식이면 우리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겠군.”
“직접 대면조차 할 수 없는데 어떤 얘기를 나눌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순간, 사신의 손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대체 저게 뭐지?
카룬이 당황하고 있던 사이 문이 열리고 밖에 있던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 조사에 응해주셔야겠습니다.”
“뭐라고?”
“황제 폐하의 시해 시도와 관련된 사안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사신으로서 가진 권리를 박탈당하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카룬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상황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황제가 자신을 믿지 못하고 결국 또 사람을 보내 진실을 은폐하려는 모양이었다.
“지금부터 하시는 발언은 모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거 놓으십시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윽고 사신들이 기사들의 손에 붙잡혀 밖으로 빠져나갔다.
알현실에는 이제 누구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카룬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시선에 잡힌 건 방금 사신이 떨어뜨리고 간 종이였다.
‘이상해.’
단 한 번도 그렇게 소리를 지른 적이 없던 사신들이 감정적으로 대처한 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카룬은 슬그머니 주변을 살피다가 소파 밑을 뒤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엔 작게 말린 종이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카룬은 빠르게 그걸 주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카룬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괜찮으십니까.”
기사가 마치 카룬을 감시라도 하듯 물어왔다. 카룬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내용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 *
“이건……!”
방에 돌아온 카룬은 쪽지를 확인하고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본회의에 관한 정보가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