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성으로 돌아온 루베르가 시간을 확인하려던 그때였다.
댕댕.
복도에 있던 괘종시계가 큰 소리로 정각이 되었음을 알렸다.
루베르는 해가 지고 있는 창밖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방 한구석에 놔두었던 크리튼을 챙겨 들었다.
평소였다면 황제가 있는 곳에 마검을 들고 가는 게 허락되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숲에 들어가는 것이니 호위 핑계를 대면 될 것도 같았다.
실제로는 황제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이긴 했지만.
―무사히 다녀와요.
아까 보았던 아스텔라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다시금 떠오른 루베르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곤 예상치도 못했는데.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자신이 겁내고 있으면 먼저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내밀어주었지.
루베르가 한창 아스텔라의 생각에 빠져 있던 찰나였다.
똑똑.
“대공 저하, 황제 폐하께서 지금 산책을 위해 연구소로 오고 계시다 합니다.”
“알겠다.”
황궁으로 부르지 않고 굳이 이곳까지 몰래 온다는 건 역시 들켜선 안 되는 일을 해결하기 위함이라는 소리였다.
이런 감은 언제나 빗나간 적이 없었다.
루베르는 혀를 한번 차고서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루, 괜찮아? 정말 황제를 만날 생각이야?”
계속해서 루베르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포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루베르?”
“포피, 나를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응?”
포피가 고개를 갸웃대면서 루베르를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의 일이었다.
“당연하지. 무슨 일이든 말만 해. 포피는 루베르의 편이니까!”
너무 당연한 걸 묻지 말라는 듯한 빠른 대답에 루베르의 표정이 밝아졌다.
루베르의 마음속에 담겨 있던 불안이 조금은 거둬진 순간이었다.
아스텔라도, 포피도 자신의 곁에서 도움을 준 고마운 존재들임을 알고 있어서였다.
“황제와 산책하러 가는 길에 너를 데려가려고 해.”
“나를? 정말!?”
포피가 즐거운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팔짝 뛰었다.
꼬리가 붕붕 돌아가는 걸 보고 있자니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착각마저 들었다.
루베르는 당황을 거두지 못한 채로 물었다.
“포피,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는 거지?”
“알아.”
“그런데 왜 그렇게 기뻐해?”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잖아!”
포피가 꼬리로 이불보를 세게 내려치면서 루베르를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루베르, 나도 데려가. 한번 말한 건 어겨서는 안 돼. 어머니와 자주 했던 말이잖아?”
“알겠어. 무슨 일이 생기면 잘 부탁할게.”
“걱정하지 마!”
루베르가 포피를 들어 허리춤에 매고 있던 작은 가방에 집어넣었다.
포피는 아스텔라 때와는 달리 어떤 반항도 하지 않고 그 안에 쏙 들어갔다.
“조금 답답하더라도 참아줘.”
“이 정도는 이제 익숙해서 괜찮아!”
포피의 밝은 목소리에 루베르의 입꼬리가 아주 잠깐 올라갔다.
이어서 루베르는 자신의 어깨 위에 기다란 망토를 하나 걸쳤다. 그러자 작은 가방은 망토 안에 잘 가려졌다.
“그럼 출발해볼까.”
루베르는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 *
곧 있으면 도착할 거란 말과는 달리 황제는 루베르가 내려가고 30분은 뒤에 얼굴을 내밀었다.
“많이 기다렸나.”
“아닙니다.”
“일이 좀 생겨서 말이야.”
황제가 씩, 미소를 지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약속에 늦은 사람치고는 뻔뻔했다.
하지만, 루베르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폐하께서 책임지고 계시는 국민이 얼마나 많은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대와는 역시 말이 잘 통해서 좋군. 그래, 그럼 이제 산책을 함께 해볼까.”
그건 이쪽이야말로 기다리던 말이었다. 루베르가 짧게 긍정하자, 황제가 뒤를 바라보고 외쳤다.
“거기 있는 호위기사 한 명과 보좌관만 나를 따르고 나머지는 모두 여기 있도록.”
그 말을 들은 사용인들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자, 그럼 가볼까.”
황제가 슬그머니 앞으로 나서면서 어두운 숲 쪽으로 향했다.
루베르는 그의 약간 뒤에서 붙어 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대에게 처음으로 산책을 권했는데 이렇게 쉬이 나올 줄은 몰랐네.”
“폐하의 명인데 다른 여부가 있겠습니까.”
“내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거란 말로 들리는군.”
황제가 뼈가 있는 한마디를 던지면서 루베르를 돌아봤다.
장난스러운 목소리와는 다르게 황제의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루베르는 바짝 긴장한 채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황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살짝 미소만 짓고서 다시 뒤로 돌아섰다.
“내가 왜 그대를 이곳에 불렀는지 예상이 갈 테지. 이미 말한 게 그렇게 많았으니.”
“드는 생각이 있긴 했습니다.”
“그대는 참 그대의 아비와 똑같아. 거짓을 절대 입에 담지 않지.”
터벅터벅.
황제는 더 안쪽으로 향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연구소의 건물은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본론으로 들어갈까. 내가 그대를 불러들인 이유는 다름 아닌 우리 사이에 협력 관계를 맺기 위함이야.”
황제의 발걸음이 사람 한 명 오가지 않는 어두운 숲속 안에서 딱 멈췄다.
이제 그곳에는 황제와 루베르 그리고 황제의 호위기사와 보좌관밖에 없었다.
숨 쉬는 소리마저도 적나라하게 들릴 정도로 적막한 공간.
그곳에 서 있던 황제가 보좌관에게 손짓했다.
“장치를 해제해.”
“알겠습니다.”
이윽고 보좌관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끽.
작게 울리던 소리와 함께 갑자기 땅이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황궁에만 비밀 공간이 있는 건 아니었다는 얘기지.”
이윽고 아래로 푹 꺼져 있던 땅이 쭉 밀리더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하나 만들어졌다.
밤에 울리던 소리와 진동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나.
루베르가 가만히 문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황제가 슬그머니 앞으로 나아갔다.
“이쪽으로 오게.”
황제를 따라 계단 아래로 내려가자 그곳엔 커다란 철문이 하나 있었다.
열쇠 구멍조차도 보이지 않는 철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때, 황제가 그의 손을 그대로 철문 위에 얹었다.
끽.
다시 한 번 울리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옆으로 열렸다.
“들어가지.”
황제는 그 말을 하고서 안으로 향했다.
루베르도 애써 놀란 걸 숨기려고 애쓰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 * *
내부는 생각보다도 밝았다. 그건 안에 있던 병사들 옆에 놓인 횃불 때문이었다.
루베르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에 있다고는 하지만, 높이가 꽤 되는 데다가 안으로 넓게 퍼진 광활한 땅에 루베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우리의 얘기는 여기서 시작하도록 하지.”
황제가 어느샌가 뒤로 돌아선 채로 루베르를 응시했다.
“난 그대가 연구해왔던 정보와 내 편이 되어줄 머리가 필요하네, 대공. 그걸 자네도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자네에게 맡겨보고자 생각 중이야.”
황제가 빙긋 미소를 지으면서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는 동굴의 안쪽을 가리켰다.
“저 안에 얼마나 많은 플로라가 있는지 알고 있나? 모두 여기서 키워낸 것들이지.”
“그 말은 처음 듣습니다만.”
“성과를 빼앗은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그렇게 됐어.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게.”
황제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생겨났다.
“안으로 들어가볼까.”
이윽고 횃불을 든 황제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루베르는 그 뒤를 따랐다.
얼마나 안으로 들어갔을까. 곧이어 황제의 걸음이 딱 멎었다.
그리고 황제가 바로 옆에 있는 횃대에 불을 붙였다.
“이건……!”
“그래, 자네가 그렇게 보았던 것이니 모를 수가 없겠지. 플로라야.”
셀 수도 없이 많은 플로라를 확인한 루베르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엄청난 규모였다.
“나는 이걸 상용화할 생각이야. 그리고 그대에겐 두 가지 선택이 남아 있지.”
“무슨 선택이 말입니까?”
“나를 돕거나, 아니면…….”
황제가 의도적으로 뒷말을 흐렸다. 그 말이 무엇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때려치우라는 말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루베르는 그걸 내뱉을 수는 없었다.
―루베르.
안전하게 돌아오라는 아스텔라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으니까.
루베르는 숨을 한번 참아내고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돕겠습니다.”
“진심인가?”
황제의 시선이 별안간 매섭게 변했다. 마치 루베르가 진실을 말하는지 확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구소는 어차피 폐하의 것이었습니다. 그 밑에서 일하고 있는 저는 당연히 폐하의 명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
황제가 눈썹을 치켜뜨면서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나도 환영이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네, 폐하.”
하지만, 대답을 들은 황제는 뒤돌아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길래 저러는 거지.
루베르가 다시 한 번 황제를 향해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취익!
어디선가 밀려들어온 바람과 함께 나는 달짝지근한 향에 루베르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익숙한 향기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 향을 모를 수가 없었다.
“큭!”
그 냄새는 너무나도 빠르고 정확하게 루베르의 코를 스쳐 지나갔다. 루베르는 결국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리춤에 달린 크리튼을 빼보려 했지만, 손이 떨리는 터에 쉽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대공.”
뒤돌아선 황제는 코와 입을 틀어막은 채 바닥에 쓰러진 루베르를 냉소적인 표정을 지은 채로 내려다봤다.
“이게 무슨…….”
“뭐, 익숙하지 않나? 자네는 그냥 6개월 동안 겪었던 일을 반복하다가 죽으면 되는 거지.”
“뭐라고?”
루베르가 머리를 흔들면서 어떻게든 정신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는 씩,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앞에 파란 가루를 들이밀었다.
“편히 잠들라고, 루베르. 네 아비처럼 말이야.”
플로리스. 그 정체를 확인한 루베르의 눈이 간신히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