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이게 현실이 맞긴 할까.
루베르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그는 아스텔라의 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스텔라는 그런 루베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아스텔라도 자신과 똑같은 마음이다.
그걸 알아챈 루베르의 이성이 일순간 툭 끊어졌다.
“흡!”
루베르가 아스텔라의 입속 깊은 곳을 훑어 내려갔다.
점막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듯 적나라한 놀림에 아스텔라가 몸을 저도 모르게 뒤로 젖혔다.
찰나의 순간 루베르의 미간이 좁아졌다.
루베르는 자신과 아스텔라 사이에 생긴 틈을 빠르게 좁혀나갔다.
더는 아스텔라와 이런 어중간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촉.
루베르가 아스텔라의 입술을 삼키면서 자극적인 소리가 퍼졌다.
루베르는 빠르게 아스텔라의 틈을 비집고 더욱 안으로 들어갔다.
“하.”
아스텔라가 가쁘게 숨을 내뱉었다.
평소였다면 아스텔라가 힘들어하는 걸 알고서 멈췄을 루베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도 입맞춤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아스텔라의 허리에 자신의 팔을 휘감은 채 그녀를 기대게 만들고 있었다.
촉, 촉.
얼마나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을까.
얇은 은실을 그려내면서 두 사람의 입술이 천천히 멀어졌다.
루베르는 그대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아스텔라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아스텔라.”
루베르의 입에서 낮게 울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루베르는 천천히 고개를 틀어 아스텔라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아스텔라는 자신을 조금 밀어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부끄러운 듯이 붉게 물든 두 볼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루베르는 지금만큼은 한순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루베르!”
아스텔라의 허리를 휘감은 채 그대로 끌어당기자 아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루베르를 바라봤다.
당황한 듯한 그녀의 시선을 보면서 루베르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항상 그랬다. 그녀는 자신이 담아내기엔 너무나도 크고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더욱 마음을 표현하고 나서도 마음이 불안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자신보다도 몸을 아끼지 않고서 위험에 뛰어들어 원하는 바를 이루는 아스텔라를 보면 더욱 그랬다.
아스텔라의 마음에 자신이 없다고 해도 지금으로 만족하자.
그런 마음을 먹으면서 겁쟁이인 자신을 변호하려 해봤지만, 아스텔라의 마음을 전해 듣고 나니 그런 건 모두 자신의 위선에 불과했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이 순간을 그렇게 바라왔으면서.
더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겁쟁이인 자신의 마음을 열어준 아스텔라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내게서 멀어지지 말아 주십시오.”
루베르는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던 저열한 본심을 내비치면서 천천히 아스텔라를 끌어안았다.
* * *
“아스텔라.”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었다.
쿵쿵.
맥박이 뛰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루베르도 이걸 느끼고 있을까.’
이미 마음을 고백한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이런 마음을 적나라하게 들키는 것엔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 일단 떨어지자.
그렇게 마음먹고서 루베르와 거리를 벌리려고 할 때였다.
“루베르!”
루베르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의 넓은 품 안에 나를 가두었다.
“내게서 멀어지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면서도 부탁하는 어조로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절절함이 흘러넘쳤다.
루베르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부끄러움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루베르와 조금 더 닿고 싶다는 욕심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루베르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면서 눈을 감았다.
쿵쿵.
루베르의 가슴팍에 머리를 가져다 대니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마음이구나. 정말 루베르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이미 말로 그걸 전해 듣긴 했었지만, 실제로 느끼게 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렇게 얼마나 루베르와 안고 있었을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생각해보니 그랬다. 지금 루베르가 혼자서 그 위험 속에 몸을 들이밀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걸 말리기 위해서 내 마음을 고백한 거였고.
나는 빠르게 고개를 들어 루베르를 응시했다.
“루베르!”
“네.”
루베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내 입술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쪽, 소리와 함께 루베르의 얼굴이 내게서 멀어졌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풀어지는 듯했다.
‘아니, 잠시만!’
나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아스텔라,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래서 대답은요?”
“네?”
루베르가 고개를 갸웃대면서 나를 내려다봤다.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는 표현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니, 그거 말고요!”
나는 루베르를 가까스로 밀어내고서 그를 노려봤다.
그런 내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베르가 탄성을 내뱉으면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거였습니까.”
중얼거리는 루베르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일은 절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루베르, 그러니까 같은 이유에서 저도 당신을 위험한 곳에 혼자 보낼 생각은 없어요. 더욱이 황제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욱요.”
“아스텔라,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무시하는 건 더욱 아니고요.”
루베르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신도 그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알고 있어요. 제가 말하는 건 그 위험 속에서 황제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조사한다고 했던 부분이에요.”
“지금 이런 상황에서 외부인이 침입할 방법은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황궁 내의 감시가 더욱 심해진 것도 사실이고요.”
다정한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루베르는 절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걸 표하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당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함께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기에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함께 행동했다간 더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루베르의 말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자, 루베르가 내 입술을 매만졌다.
“더욱이 상황이 잘못된다면 그걸 파악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스텔라, 당신이 꼭 남아주어야 해요.”
“상황이 잘못되다니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루베르가 눈을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서 대꾸했다.
“미안합니다. 어쨌든 상황상 함께 행동하면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제가 혼자 움직이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일 겁니다.”
“…….”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루베르가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것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결국 그의 완곡한 부탁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루베르의 말이 맞단 생각도 들고.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루베르가 난감해지는 상황이 생겨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직접 갈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던 바로 그때,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신 꼭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이 있어요.”
“그게 뭡니까?”
“포피를 꼭 데려가줘요.”
루베르가 가는 곳은 플로라가 있는 숲속이겠지. 그렇다면 마력의 제한을 걸어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포피가 있다면 내가 능력을 이용해서 순간이동을 할 수 있을 테고.
“상황이 나빠지면 제가 바로 도우러 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것까지는 이해해줄 수 있을까요?”
“음.”
루베르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한참을 더 고민하던 루베르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그 대신, 제가 연락이 닿지 않을 때만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겁니다. 알겠죠?”
“알겠어요.”
“네, 그럼 저도 포피를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이 됐든 루베르의 뜻을 존중해주기로 한 이상, 그의 행동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만약을 대비한 방법이야.’
루베르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쓰지 않아도 될 최후의 방법.
쓸 일이 없을 거라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다짐해봤지만, 마음이 진정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황제는 루베르를 노리고 있을 게 뻔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스텔라.”
그걸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루베르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황제에게는 이제 별다른 방법이 없을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플로라를 모두 운반하더라도 이후 상용화나 연구 내용을 상세하게 알기 위해서는 저와 카룬의 도움이 분명 필요할 테니까요.”
별다른 일이 없을 거라는 그의 말에도 마음은 자꾸 불안해졌다.
나는 루베르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면서 말했다.
“조심해야 해요. 무슨 일이 생기면 포피를 통해서 이곳으로 꼭 오고요.”
“알겠습니다.”
그 말을 하며 자상하게 미소 짓던 루베르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이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 길게 머물 수가 없군요.”
루베르가 그 말을 하면서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도 역시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질 무렵인 지금 더 머물 수는 없었다.
나는 루베르와 붙잡은 손을 어렵사리 내려놓았다.
“무사히 다녀와요.”
“반드시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루베르는 주변을 살피다가 내 뺨을 붙잡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스텔라, 반드시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믿고 있을게요.”
그 말을 끝으로 루베르의 주변으로 푸른빛이 맴돌았다.
그리고 루베르의 모습이 점차 흐려지더니 이윽고 내 앞에 서 있던 루베르가 온데간데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