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황제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예전과는 다르게 제 뜻대로 흘러가는 이 상황에 대한 즐거움이었다.
그래, 어쩌면 예전부터 이랬어야 했다.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제 자신의 앞을 막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갈 그때였다.
“아니지.”
황제는 고개를 내저었다. 한 사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 남아 있었다. 황제는 그걸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루베르. 그의 존재만이 계속 황제의 마음에 거슬렸다.
연구뿐만 아니라 사적인 원한도 충분히 가지고 있을 그 남자를 빼고 일의 성공을 논하기엔 아직 일렀다.
하지만, 황제는 이미 머릿속에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해둔 뒤였다.
직접 부딪쳤다가는 아무리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타격이 남을 터였다. 황제는 지금 그런 일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다.
“녀석의 말에 진심이 들어 있다고 믿는 수밖에.”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간을 좁혔다.
일전에 플로라의 독립적인 생산을 얘기했을 때, 그렇게 부정적인 반응은 아니었지.
황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확실한 긍정, 그게 필요했으니까.
“내 편이 된다면 참으로 유용한 말이 될 것을.”
황제는 그렇게 말하면서 슬그머니 황태자가 머무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면 또 있었다. 무언가를 꾸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아들, 카룬 때문이었다.
카룬의 비장한 모습을 본 황제는 아직도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경고의 의미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던 건데, 카룬은 이전보다 더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그 반응을 보면 카룬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황제는 그게 누가 되었든 또다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이를 잡아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공화국의 끄나풀을 잡아 가두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래, 이제 그 여자를 찾기만 하면 해결되겠지.”
황제는 또 한 명의 여인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했다.
어떻게 그 수많은 병사를 뚫고 탈출한 건지 직접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손에 걸리면 절대로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숲에서 사라진 이상 발견도 시간문제겠지.
그렇다면 이제 황제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연구소로 간다.”
“네, 알겠습니다.”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루베르의 정확한 마음을 알아둘 필요도 있었다.
황제는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의 발걸음은 숲 너머에 있는 연구소로 향했다.
* * *
짹짹.
아침 햇살이 눈을 찌르는 익숙한 느낌이 반가웠다.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은 자꾸만 눈을 뜨기를 거부했다.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고, 식은땀으로 인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전날 꾸었던 꿈이 워낙 기분 나빴던 탓이다.
‘거기서 루베르와 카룬이 죽게 될 줄이야.’
전날에 꿨던 꿈이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날 줄이야.
불쾌한 감각에 몸을 천천히 일으키던 그때, 오른손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뭐지?’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올렸다.
“헙.”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남자의 가슴팍에 숨이 탁 막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곳엔 아침부터 준수한 외모를 자랑하는 루베르가 눈을 감고 있었다.
환한 햇살 아래로 반짝이는 은발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두근, 두근.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더불어 내 심장이 점차 크게 박동했다.
나는 천천히 루베르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악몽을 꾸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의 일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이 많았는데 그래도 다행이었다.
“흠.”
루베르가 눈을 찌르고 있는 햇살 때문에 낮게 신음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풀어진 분위기를 뽐내고 있는 루베르를 바라보니 이상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아.”
나도 모르게 흐트러진 루베르의 머릿결을 정리하려고 손을 든 그때였다.
“음.”
루베르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면서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루베르는 그대로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더니 내 목덜미에 깊게 숨을 내뱉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루베르는 단 한 번도 내게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쩌지도 못하고 딱딱하게 굳은 채로 루베르를 올려다보고 있던 그때, 루베르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루, 루베르. 정신이 들어요?”
“또 이런 꿈을 꾸게 될 줄이야.”
루베르는 그렇게 말하더니 나를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아스텔라, 당신이 언제나 걱정입니다.”
“네?”
“당신은 언제나…….”
나를 바라보는 루베르의 눈빛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불안함과 더불어 걱정스러움에 떨리는 아름다운 적안. 나를 붙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위태로움.
루베르는 진심으로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것처럼 걱정스러워하고 있었다.
“루베르, 저는…….”
괜찮다는 말을 건네기 위해서 입을 연 그때, 잠에 취해 있던 루베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
탄성을 내지른 루베르의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이 사라졌다.
“미안합니다, 아스텔라.”
루베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보며 사과했다.
“이번에도 꿈인 줄만 알고…….”
“아, 그러셨구나.”
평소에 얼마나 많이 걱정하고 있길래 이런 꿈을 꿨다고 얘기할까.
괜히 걱정스러운 마음에 루베르를 바라보고 있자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혹시 제가 또 다른 실수를 하기라도 한 건 아닙니까?”
“네?”
실수라면.
아까의 장면이 머릿속을 스침과 동시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던 걸까. 루베르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향해 다가오던 그때였다.
똑똑.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저하.”
“거기 놓고 가게.”
노크한 이유가 식사 때문임을 알게 된 루베르는 안도의 숨을 내뱉으면서 내 쪽을 살폈다.
“배가 고프진 않습니까? 식사라도 가져오죠.”
“아, 저는 괜찮은데…….”
똑똑.
거절하려던 그때, 다시 한 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루베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더니 그가 문 쪽을 노려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저하, 오늘 아침부터 마력 억제기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숲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연구소를 포함한 이 주변 지역의 마력 억제기도 일시적으로 제거한다고 합니다.”
“그렇군, 알겠다.”
루베르가 그렇게 얘기하고 문에서 멀어지려고 하던 찰나, 이윽고 시종이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뭐지?”
루베르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또 한 가지, 전달 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지금 황제 폐하가 이곳을 향해 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뭐?”
누가 봐도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던 루베르가 빠르게 나를 돌아봤다.
나 역시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찰나, 다시금 문밖에 있던 시종이 말을 이었다.
“그를 위해 준비를 서두르셔야 할 듯합니다.”
“알겠다.”
루베르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시종이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루베르는 한참이나 경계하다가 이내 밖에 있던 인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건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만 보더라도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는지가 보였다.
“아스텔라,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아무래도 식사는 돌아가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잠시만요, 황제라니. 그게 대체 무슨 얘기예요?”
루베르가 고개를 내저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자세한 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은 듯합니다.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지금이 기회입니다.”
루베르는 말을 마친 후에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단 당신은 대공 성으로 돌아가 계십시오.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대체 어떻게 연락하려고 그러는데. 믿을 수 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태까지 루베르가 내게 연락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마 저 마력 억제기 때문인 듯한데, 그게 제거되었으니 이제 연락할 수 있게 됐다는 걸까.
내가 질문을 하려던 그때, 루베르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나중에 만납시다.”
루베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내 아래에서 파란빛이 생겨나더니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루베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눈앞에 있던 루베르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선명해진 눈앞에는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손님!”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나 때문에 놀란 집사가 빠르게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주변을 살펴보니 확실했다. 이곳은 공작 성의 로비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방금 그 마법은 분명…….”
“집사님, 설명은 나중에 드릴게요.”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나는 주변을 살피면서 집사에게 물었다.
“혹시 란이 이곳에 오진 않았나요?”
제발. 여기 있다고 해라.
숲에서 잡힌 여성이 란이 아니길 바라면서 물었지만, 집사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꾸했다.
“아니요, 어제 그렇게 나가신 이후로는 연락이 없으셨습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소, 손님!”
란이 이곳에 없다는 얘기를 들으니 몸에 힘이 쭉 풀렸다. 결국 납치된 게 란이 맞았다는 얘기였다.
내가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바로 그때, 내 뒤에 있던 육중한 문이 열렸다.
“실례합니다. 여기 혹시 아스텔라님이 계십니까?”
내 이름이 들려 고개를 돌려서 그곳을 바라보자 거기엔 익숙한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당신은!”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아멜 공화국에서 란과 함께 넘어온 사신이었다.